오늘날 가장 의미 있는 물건은 역시 돈이다. 좀 더 엄밀히 말하면 화폐이겠다. 유동성이니 인플레이션이니 하는 복잡한 경제학 개념을 끌어오지 않더라도, 우리는 화폐의 중요성을 일상생활에서 충분히, 그리고 뼈저리게 느끼며 살고 있다.
실질적인 중요성만큼이나 화폐가 가지는 상징적 의미도 굉장하다. 오만원권 지폐가 이야기될 당시 모델 논란을 떠올려보자. 요컨대 화폐 속 이미지에는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가 담기는 것이다. 여러 나라의 지폐가 가진 의미와 역사를 정리해 봤다.
1. 일본(¥): 일본 근대화의 선구자
1만 엔권은 일본의 최고액권이다. 그런 만큼 모델인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에 대한 일본인들의 시각은 한국의 세종대왕과 견줄 수 있을 정도다.
계몽운동가이자 철학자인 그를 빼고는 일본 근대화 시기, 즉 메이지 유신기를 논할 수 없다. 오사카 하급 무사 집안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네덜란드어 학교를 개설하고 미국과 유럽을 순방하는 등 일찍부터 서구 문물 수용과 일본의 개혁을 추구했다. 동시에 인권 운동가로서 군국주의에 반대하고 자유와 민권을 주장했는데, 이때 그와 대립하게 된 인물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였다.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아래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
라는 말은 생애 전기 그의 성향을 잘 보여준다. 그는 한편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근대화에도 열의를 보였는데, 특히 조선의 개화파였던 김옥균·유길준 등에 미친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갑신정변의 실패로 김옥균 등의 급진 개화파가 실각하자 급격히 흑화하여 아시아까로 돌아선다. 그 유명한 탈아론(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에 든다)이 바로 이 시기에 나온 것이다.
이후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제국주의자로서의 행보를 걷는다. 나아가 민중을 경멸하고 비난하게 되었으니, 가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2. 터키(TL): 독립 전쟁의 영웅
터키의 모든 화폐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1881~1938)가 모델로 등장한다. 터키에서 다른 건 몰라도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를 모욕하지 말자. 터키의 국부인 그를 모욕하면 법으로 처벌받을 수도 있다.
오스만 제국 치하의 그리스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이 이스탄불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군인의 길을 걷는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만 제국이 와해되자, 그는 다른 젊은 장교들과 함께 조국의 독립을 위한 전쟁을 시작한다. 이후 1923년 터키 공화국이 선포되자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그는 집권 뒤 강력한 세속화·서구화 정책으로 터키를 개방적인 국가로 탈바꿈시키지만, 동시에 투르크 민족의 정체성을 훼손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공공장소에서 터번 착용을 금지한 정책이 대표적이다.
그는 자신의 혈육을 남기면 터키가 분열될까 우려해 아내와 이혼했고, 엄청난 여성들의 구혼도 마다하다가 겨우 결혼을 하긴 했으나, 결국 자신의 씨앗을 남기는 대신 8명의 양자/양녀를 들였다.
3. 유럽 연합(€): 인물 모델이 없는 지폐
유로화에는 인물 초상화가 없다. 건축물이 모델이다. 그것도 에펠탑이나 콜로세움처럼 국가가 특정되는 유명한 건축물이 아니라 로마네스크, 고딕, 바로크 등 유럽 예술 사조를 대표하는 건축 양식의 특징을 따서 도안 되었다.
첫 도입 당시 프랑스와 독일 등이 그나마 자기네 디자인에 가까운 것으로 만들려 신경전을 벌였는데, 오히려 이로 인해 명확히 국적을 알 수 없고 실존하지 않는다고 인식되는 디자인으로 결정되어버린다.
그들은 화폐에서도 통합의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4. 호주($): 영원한 프리마돈나
호주의 최고액권 100달러권, 이 지폐의 모델은 넬리 멜바(1861~1931)라는 소프라노 가수이다.
멜버른 출생인 그녀는 무려 6살 때 국립극장에서 공연을 가질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조예를 보였다. 이후 전 세계를 무대로 공연하겠다는 야심으로 유럽으로 떠났고, 1887년 주연배우의 와병으로 얼떨결에 맡은 오페라 《리골레토》의 질다 역으로 세계적인 프리마돈나로서 명성을 알린다.
그녀의 목소리만큼이나 성격 또한 유명했는데, 공연 중 동료 가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의 파트를 가로채버린 것이다. 자존심이 상한 동료가 무대를 떠나버리자 멜바는 자신이 그 파트까지 끝까지 소화하며 공연을 마무리한다.
이처럼 오만하고 콧대 높은 그녀였지만 고향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다. 웬만한 대형극장의 공연 요청도 거절하는 그녀였지만, 고향에서 요청하는 공연은 아무리 작은 무대라도 사양하지 않았던 것이다. 생애 말기에는 아예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니, 그녀에 대한 호주인들의 사랑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5. 자메이카($)와 체코(Kč): 여성 독립 투사
자메이카의 500달러권 역시 모델이 여성이다. 눈여겨볼 점은 그녀가 군사 지도자로서의 업적으로 화폐에 올랐다는 것이다.
그 인물은 바로 ‘마룬족의 낸니'(1685~1755?). 영국에 대항해 마룬족의 통합을 이루어냈으며, 특히 현지 지형을 이용한 위장 전술과 마룬족 전통 악기를 이용한 연락 체계를 통해 영국군을 여러 번 궁지에 몰아넣기까지 하였다. 그녀의 죽음에 대해 명확히 알려진 바는 없지만 이제 그녀는 자메이카의 전설로, 그리고 화폐에 남아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체코의 2000코룬권의 모델 에마 데스티노바(1878~1930)는 델리 멜바처럼 오페라 가수였다. 독일에서 활동하던 그녀는 1차대전을 거치며 조국 체코의 저항군을 지원해 큰 고초를 겪는다. 2005년 체코 방송국에 의해 가장 위대한 체코인 중 한 명으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6. 미국($): 10만달러권과 진보 대통령
미국의 최고액권은 얼마일까? 100달러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겠지만, 사실은 100,000달러, 즉 10만달러권이다. 물론 이 지폐는 1946년부터 발행이 중단되었을 뿐만 아니라 본래 은행 간 거래에서만 사용되었기 때문에 시중에서는 볼 수 없다. 혹시 누가 보여줘도 위조지폐다.
이 지폐의 주인공은 우드로 윌슨(1856~1924). 프린스턴 대학 총장을 지낸 이로서, 미국의 28대 대통령이다. 세계사를 공부해본 사람이라면 이 이름이 익숙할지도 모르겠다. 민족자결주의(각 민족은 스스로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다른 민족이 간섭할 수 없다)의 바로 그 윌슨 맞다. 1910년 뉴저지 주지사로 처음 정계에 입문했으며, 공황과 전쟁의 위기, 그리고 당시 여당인 공화당의 분열을 틈타 1913년 바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는 진보 대통령이라는 기대를 업고 당선되었고, 실제로 어느 정도는 진보적인 정책을 내놓는다. 대표적인 것이 ‘반독점법’과 ‘아동노동금지법’. 그러나 인종 문제에서만큼은 전혀 진보적이지 못했는데, 정부 건물을 흑백분리 원리에 따라 짓거나, 흑인은 장교가 될 수 없다는 등이었다. KKK단을 찬양한 흑역사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