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그래픽 노블>이 나오기까지의 우여곡절
리승환: <그래픽 노블>은 왜 만들게 됐나?
노모뎀(노 모뎀입니다, 노모 뎀 아닙니다): 회사 대표가 다큐멘터리 영상 전문쪽으로 활동해오다가 요즘 만화 원작의 영화가 많이 만들어지는데 그래픽 노블은 만화와 다르고 영화에 가까운 제3의 무엇 같은데 그런 그래픽 노블을 다뤄보고 싶다며 힘을 빌려달라고 했다. 그래서 함께 일하게 됐다.
리: 뭔가 대표가 큰 모험을 한 것 같다?
노 : 내가 참여는 했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아무런 감이 없었다. 그래서 이런저런 연구, 기획을 하고 있었는데 6개월 지나, 갑자기 대표가 월간지로 그래픽 노블을 다뤄보고 싶다고 하더라.
리: 월간? 월간… 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나?
노: 대표 자신이 창작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열망이 컸다. 또, 예비 창작자들을 위해 그래픽 노블에 대한 정보 제공자 역할을 하고 싶어 했다. 그를 돕기 위해서는 나부터도 만화에 대해 초심자라는 자세로 접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대중의 니즈를 충족시켜줄 수 있을까 고민만으로 6개월을 보냈다. 1년 동안 기획한 게 100개의 작품을 정리한 백서다. 이는 엄밀하게 그래픽노블은 어떤 작품들인지에 대해 탐구하는 과정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리: 그러면 잡지는 원래 포기한 것이었나?
노: 원래 잡지 기획은 따로 진행중이었고, 백서는 단행본으로만 낼 계획이었다. 그런데 잡지의 출간이 미뤄지는 상황에서, 그렇게 힘 나눌 게 아니라 100개의 그래픽 노블 백서를 잡지로 내자고 대표가 다시 제의를 했다.
리: 기존 작업한 건 어떻게 하고…
노: 그래서 큰 병크가 터졌다. 단행본 나가려면 교정 단계가 필요하다. 보통 5번 거쳐서 오타 등을 다 잡아낸다. 그런데 단행본이 잡지로 바뀌며 내용은 같지만 그림과 글 배치가 완전히 달라졌다. 100개의 만화에 대해 다룬 단행본을, 단 며칠만에 수석 디자이너가 잡지로 바꾸는데 성공했다. 그런데도 오류가 5군데밖에 없었다. 이건 정말 기적이다.
리: 되게 뻔뻔스럽다.
노: 실은 굉장히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다(…)
리: 이왕 이렇게 된 거 오타 발견 이벤트라도 하는 게(…)
그건 독자 농락이고… 다른 실수는 그래도 눈감아줄 수 있는데,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본문에는 초속 5km 내용이 들어가 있다. 너무나 죄송하고, 또 앞으로 더 신경 쓰겠다. (수정 페이지는 여기서 다운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픽 노블? 만화와 다른 게 뭐야?
리: 100개를 추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그래픽 노블을 봤는가?
노: 처음에는 대표가 한국에 출간된 그래픽 노블을 모두 집계해 달라고 하더라. 열심히 320개 정도를 추리했을때 그래픽 노블에 대한 정의를 명확하지 내리지 못한채 출간 해온 출판사들의 시행착오가 보였다. 다시 필터를 만들고 여러번 출판사의 책들을 뒤지고 나니, 나중에는 500개가 넘는 그래픽 노블이 모이더라. 대표는 그 중 베스트 200개를 뽑아 달라 했지만 베스트의 의미가 희석되는 것 같아 100개로 한정했다.
리: 캡콜드 같은 만화 연구가는 그래픽 노블이나 만화나 같은 것이고, 표현만 다르다고 하더라.
노: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미국이나 다 똑같은게 만화 라는 말에 대한 편견이다.한국인들이 흔히 쓰는 표현이 “아, 이런 만화 같은 일을 봤나”이다. 이 말은 현실과는 거리가 멀고 우스꽝스럽고 황당무계한 일을 가리킨다. 그런데 미국도 코믹스라고 하면 코믹한 어감이 전해지고, 일본도 망가라는 단어가 사람들에게 그런 느낌을 준다. 진지한 정통 소설과 무게가 같은 만화가 정작 만화라는 이름만으로 낮춰지는 게 싫다는 사람들이 나왔다.
그런 사람들이 만화에 새 이름을 붙여줘야겠다고 나온 게 ‘그래픽 노블’이라고 보면 된다. 세월이 지나자 출판사들이 이를 새로운 마케팅 용어로 쓰기 시작했고, 이는 오히려 진지한 만화 연구가들의 지탄을 받기 시작했다. 아무리 좋은 뜻으로 쓰는 거지만 결과적으로 농락, 왜곡이 아니냐는 것이다.
리: 그런 만화학자들의 반발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노: 나도 동의한다. 그래픽 노블이라는 용어를 널리 알린 윌 아이스너도 만화 문화를 끌어올리기 위해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이지, 만화라는 이름을 끊고자 한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에게도 별명이 있다. 별명 중에는 사람을 돋보이게 하는 별명도, 얕잡아 보이게 하는 별명도 있다. 이 중 그래픽 노블은 만화를 돋보이게 하는 별명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리: 100개의 그래픽 노블은 어떻게 선정했는가?
노: 첫 번째로 한국에서 출간된 적이 있는 작품, 두 번째로 만화사에서 의의를 가질 기념비적인 작품, 것들, 세 번째로 누가 봐도 재미 있는 대중성을 고려했다. 그래픽 노블이라 하면 사람들 편견이 두 가지 중 하나다. 고급 유럽 만화이거나, 슈퍼 히어로물이거나. 그러면서 한국 만화는 그래픽 노블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이번 잡지에는 수록되지 않았지만, 다음 호에는 한국 만화도 소개된다.
리: 웹툰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가?
노: 미국 애가 나한테 웹툰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을 때 코리안 그래픽 노블이라 답해준 적이 있다. 당연히 웹툰이 포함된다.
리: 일본 옛날 만화가 포함되지 않는 게 아쉽다.
노: 그래픽 노블을 만화로 퉁칠 수도 있지만, 시대적 의미를 부여하면 약간의 차별점은 있다. 70년대에서 80년대에 그래픽 노블이라는 용어를 쓴 사람들도 나름 공통점은 있다. 먼저 소설식 서사, 그리고 깔끔한 배경, 마지막으로 컬러 채색이다. 일본은 대개 잡지 연재 형태이기에, 거기에 부합되기는 어렵다.
리: 결국 미국에서 내세운 사람들 정의를 따라가는 느낌이 든다.
노: 그렇게 보는 시각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비싼 단행본으로 정의할 수도 있다. 미국 애들은 좀 다를 거라 생각하고 확인해 보니, 마블에서 그래픽 노블 관련 도메인을 가지고 있더라. 그런데 그 사이트를 들어가 보니 헐크 인형 패키지에 만화책 팔고 있었다.
그래픽노블이 만화에 미친 긍정적 영향
리: 정작 그래픽 노블로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은 빡칠 일이겠다.
노: 왓치맨, 브이 포 벤데타 등의 역작을 남긴 앨런 무어라는 스토리 작가가 있다. 그 사람은 아예 자기 작품을 그래픽 노블이라 부르지 말아 달라고 했다. 출판사 마케팅이 그 정도로 싫었던 것이다. 그래픽 노블 개념을 제창한 윌 아이스너와 같은 선각자가 만화를 좀 더 격 있는 문화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반가웠지만, 그 의의조차 마케팅으로 변질되는 게 싫었던 것이다.
리: 한국 웹툰 작가들은 어떻게 바라볼까?
노: 그들의 생각은 모르겠지만, 나는 웹툰이 그래픽 노블의 좁은 정의와 좀 맞는 측면이 있다고 본다. 만화 문화가 고급문화로 제대로 일어서기 전 한국 만화는 시장에서 전멸하다시피 했다. 그 대안으로 등장한 웹툰은 컬러로 보여지고 상하 스크롤 연출 감각을 정립했다. 이걸 편집해 책으로 내다 보니 분절과 조합에서 매우 고급스러운 형태의 연출을 취하게 된다. 또 웹툰 양이 워낙 많다 보니 어느 정도 수준과 인기가 없는 만화는 출간조차 힘들다.
리: 칼라와 연출, 인기는 인정하지만 서사는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노: 그건 넘어서야 할 벽이다. 북미도 우스꽝스러운 일이 많았다. 그래픽 노블이라 불리기 전 슈퍼맨, 배트맨 만화 보면 대사보다 주먹질이 더 많았다. 그런데 그래픽 노블이라 불리게 되자 의미심장한 대사를 막 내뱉고, 싸우면서 갑자기 부모님을 떠올린다. 이게 바로 만화가 진화하는 형태다. 그 형태는 그래픽 노블이고.
리: 그렇게 보면 그래픽 노블이 단지 허명이 아니라 문화적 운동이라는 생각도 든다.
노: 그리는 사람은 몰라도 일단 흐름이 생기면 조금씩 변화한다. 책을 비싸게 파는데 인물도 뭔가 있어 보여야 하지 않겠나? 상업적 의식이 깃든 것과 별개로, 그래픽 노블 운동은 만화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이다.
리: 90년대부터 헐리우드 히어로물이 대단한 발전을 보이는데, 이와도 관계가 있을까?
노: 그렇다. 갈등 관계나 선악 구조가 예전보다 훨씬 복잡해졌다. 아마존닷컴에서도 예전에는 코믹북 이름으로 만화를 팔아왔지만 카테고리를 코믹스 & 그래픽 노블로 변경했다. 아마존에서 가장 많이 팔린 만화책은 베스트셀러 그래픽 노블이라 표시된다.
즐기는 문화가 교양으로 인정받는 세상을 위해
리: 그렇다면 이제 매거진 “그래픽 노블”이 그 역할을 하면 되겠군.
노: 한국 작품 중 뛰어난 작품들도 우리가 계속 소개하고 싶다. 2호까지는 100개의 그래픽 노블을 소개하지만, 3호부터는 매거진 당 하나의 그래픽 노블만 다룰 예정이다. 3호는 틴틴으로 알려진 “땡땡의 모험”을 이야기할 예정이다. 박근혜 대통령 조차 추천했을 정도로 아주 훌륭한 그래픽 노블이다.
리: 그렇다고 한 호에 하나의 그래픽 노블만 다루면, 너무 무크지 느낌이지 않을까?
노: 균형이 쏠려있으면 독자도 쉽게 지칠 수 있다. 그래서 부제로 테마를 지정하고, 다른 내용도 일부 다룬다. 예로 “땡땡과 유럽 만화들” 이런 식이다. 그런 교양 만화를 이야기하면서 이원복 교수를 취재하는 등의 구성이다.
리: 한국에도 훌륭한 작가가 많은데, 대중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이 있다. 당신이 주목하는 작가는?
신세기.(윤하민) 나름 히트작을 3개나 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잘 모른다. 네이버 블로그와 루리웹 그리고 만화앱 인디켓 같은 곳을 통해 알려진 로봇 올리버, 천사와 악마, 위대한 찰리 모두 좋은 작품들이다.
리: 나도 잘 봤다. 그런데 누가 그렸는지 몰랐다.
노: 콘텐츠가 어떤 채널로 어떻게 보여지냐에 따라 작가 이름이 드러날 수도, 안 드러날 수도 있다. 우리도 저작권 의식이 점점 높아지고는 있지만, 커뮤니티를 통해 유통될 때는 저자의 이름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비평 등을 겸할 수 있는 또다른 유통망이 필요한 것이다.
리: 당신이 잡지 “그래픽 노블”을 통해서 하고픈, 이루고픈 일이 있다면?
노: 만화든 영화든 우리 실생활에 도움이 안 된다고 여기는 오락 문화가 많다. 그런데 이런 것들의 품질이 높아지고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려질수록, 우리의 실생활 수준이 올라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경제 살려주겠다는, 창조경제 하겠다는 돈벌이 급급한 대통령이 뽑히면 문화는 돈 안 되고, 밥 못 먹여주는… 실생활과 거리가 먼 것으로 치부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 삶도 칙칙하고 교양이 없어지게 된다. 교양이라고 하면 이런 책과 거리가 있다고 보는데, 반대로 이런 책을 즐겁게 볼 수 있게 되면 우리 삶에 교양이 돌아온다. 또 이를 통해 우리 인생이 한 단계 올라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척박하고 웃음 없고 감동 없는 세상…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이런 잡지들이 나와야 한다고 본다.
보너스. 노모뎀 추천 그래픽 노블 3선
리: 마지막으로 당신이 강추하는 그래픽 노블 3개만 이야기해 달라.
노: 너무 많은데, 남녀노소 다 볼 수 있는 걸로 꼽고 싶다.
먼저 문학동네에서 나온 <어린 왕자>다. 생텍쥐페리의 유명 원작을 토대로 그린 작품인데, 그 재단이 어린 왕자를 그래픽 노블로 제대로 만들어보고 싶다며 조안 스파르라는 작가에게 맡겼다. 심지어 내용을 맘대로 바꿔도 딴죽 걸지 않겠다며. 그렇게해서 굉장히 훌륭한 작품이 나왔다.
또 번역자가 이방인 번역 논쟁에 난데없이 말렸던 네임드 번역자 김화영인데 번역의 질도 굉장히 훌륭하다. 그야말로 3박자가 다 맞은 작품이다. 원작이 많이 알려지기도 했지만, 그래픽 노블로 보면 또 느낌이 다를 거다. 생텍쥐페리 재단에서도 성공적 시도였다고 호평하고 있다. 오래된 고전 문화가 만화의 힘으로 재탄생할 수 있는 훌륭한 모범 사례라는 가치도 있다.
다음은 오디세이다. 디지털 게임 쪽에서 잔뼈가 굵은 일러스트레이터 가레스 하인즈가 고대 서사시 오디세이아는 원작이 너무 까다롭고 애들이 이해하기 힘들다며 각색해 잘 다듬어 놓았다. 읽어보고 놀란 게 그림으로 옮기니 원작에서 이해하기 힘들었던 상관관계나 행동이 다 공감 간다는 것이다. 고전문학을 만화로 훌륭하게 재발굴한 사례다. 내가 본 고전문학을 만화화한 작품 중 원작 가치를 전혀 훼손하지 않고 재미있게 보여준 그래픽 노블으로 꼽는다.
마지막으로 굿모닝 예루살렘이다. 캐나다 작가 기 들릴의 작품인데 푸치니가 어느 지역을 들를 때마다 그 지역에 맞는 훌륭한 음악을 작곡해냈듯, 이 사람이 가면 그 지역에 걸맞는 그래픽 노블이 나온다. 기독교 계열과 이슬람 세력의 갈등, 현대사에 대한 이해의 실마리, 동양과 서양, 중동 간의 이해와 화합 등을 이 만화 한 편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다. 기행만화의 보석 같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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