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대통령 후보의 돼지 발정제 이야기가 넘실거리네요. ‘돼지 발정제가 뭐냐’ ‘듣기도 처음 듣는다’ 하는 분들 많으신데, 저는 무려 그걸 먹어봤습니다. 예전부터 하도 얘기를 많이 하고 다녀서 제 지인들은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마침 노트북 배터리도 10% 남았으니 빠르고 리드미컬하게 촥촥촥 썰을 풀어봅니다.
때는 진배가 17살, 가슴이 봉긋하게 솟아오르고 엉덩이가 점점 더 무거워지는 시기였습니다. 교복 치마를 줄여 입었고 앞머리에는 크고 신선한 깻잎 한 장을 붙이고 다녔죠. 캬~! 멋을 아는 고딩! 진배의 고향은 축산업이 발달한 곳입니다. 당연히 축사가 많았고 돼지 발정제도 많은 곳이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그런 곳에서 나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즐겁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몇 가지 사건을 제외하면요. 그 몇 가지 사건에 돼지 발정제 에피소드가 있네요.
일요일이었습니다. 친구들과 읍내에서 하여간 무언갈 먹고 돌아오는 길이었어요. 뭘 먹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무얼 입었는지는 기억이 납니다. 청카바! 당시에 유행했던 스키니 청재킷을 우리는 그렇게 불렀습니다. 단추를 채우면 상체가 터질 거 같은데, 숨 한번 크게 쉬면 옷 다 터질 거 같은데, 그 흉함을 모르고 그저 유행 아이템을 입었다는 이유로 자긍심이 +100 된 날이었습니다. 친구들과 헤어져 집에 도착하니 중학교 때 알던 남자사람친구가 우리집 대문에 서 있습니다.
“어? 왠일이냐?”
“야, ○○형이 ○○네서(우리집에서 2분 거리) 너 좀 보재.”
“○○오빠? 나 그 오빠 잘 모르는데?”
“거기 가면 ○○형도 있고, ○○형도 있어.”
“나 그 오빠들은 더 모르는데? 내가 아는 사람은 없어?”
“아, ○○ 있어.”
“아아… 잘됐다. 근데 오빠들이 나는 왜 부르는 거여?”
“낸들 아냐. 부르면 그냥 가는 거지.”
청카바를 입고 도착한 곳은 동네 오빠네 집이었습니다. 오빠네 부모님은 어딜 가셨는지 보이지 않고, 가끔 보며 얼굴을 익힌 오빠들이 거기서 담배를 피우며 소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널브러진 새우깡과 포스틱이 눈에 들어옵니다. 헐, 이 오빠들 미성년자인데 술 먹고 담배 피우네? 이걸 엄마한테 일러 말어 생각하며 인사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처음 보는 오빠들이 꽤 많았습니다. 그중 한 명이 제게 쌕쌕이 음료를 하나 건넵니다. 새콤달콤 과즙의 맛 쌕쌕이. 귤의 알갱이가 톡톡 터지는 쌕쌕이. 고등학생들은 유치해서 안 먹는 쌕쌕이. 저는 말했습니다.
“저 쌕쌕이 싫은데… 저기 델몬트 오렌지 주스로 마실게요.”
돌이켜보면 쌕쌕이나 오렌지 주스나 뭐가 다른지… 고급진 입맛을 가진 진배는 귤 음료는 싫으니 오렌지 음료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음료를 준 오빠가 안 된다고 합니다.
“… 아? 저 오렌지 주스 마시면 안 돼요?”
“응, 안 돼. 저건 ○○ 거야. 넌 쌕쌕이 마셔야 해.”
“그럼 저 안 마실래요. 쌕쌕이는 싫어서.”
“아냐, 마셔야 돼.”
“괜찮아요. 그런데 저 왜 부르신 거예요?”
“아… 음… 학교는 잘 다니니? 저번에 정류장에서 보고 인사도 제대로 못 했지? 목마르다. 쌕쌕이 좀 마셔.”
“괜찮아요. 쌕쌕이 싫어서.”
“오빠는 진배랑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진배는 어떻게 생각하니?”
“친하게 지내면 좋죠…”
“그럼 쌕쌕이 좀 마실래?”
뭐 이런 대화가 족히 20분은 진행이 되었습니다. 쌕쌕이가 뭐라고 이렇게 집요하나. 동네 오빠가 마시라는데 마셔볼까 하고 쌕쌕이를 노려보았더니, 쌕쌕이가 이상해. 뭔가 노르스름한 액체가 캔 주위에 떨어져 있는데 분명히 쌕쌕이가 아니야. 쌕쌕이 위에 살짝 막 같은 것이 형성되어 있고, 투명한 그것은 기름덩어리 같기도 하고 비눗물 같기도 하고, 하여간 뭔가 내가 알던 쌕쌕이가 아니야. 진배가 질문합니다.
“오빠, 이거 쌕쌕이 맞아요?”
“응? 맞지. 왜?”
“뭐 둥둥 떠 있어요. 냄새도 좀 이상해요. 이거 상한 거 같아요.”
“아냐, 내가 아까 한 입 먹어봤는데 안 상했어.”
“이거 오빠가 먹던 거예요?”
“아… 아니… 먹던 건 아니고…”
“근데 이건 왜 따개가 따 있어요?”
“아 그냥 마셔!”
“왜 화를…”
이런 대화가 또 20분은 진행되었습니다. 분위기 진짜 이상했어요. 거기 있다간 오빠들에게 맞을 거 같은 분위기. 얼른 벗어나고만 싶었습니다.
“저 이거만 마시면 집에 가도 되는 건가요?”
“응, 그거만 마시고 집에 가.”
쭈욱 들이켰습니다. 아 그때의 맛이 아직도 기억이 나는 거 같아서 속이 안 좋네요. 쌕쌕이가 쌕쌕이가 아닙니다. 쓰고 뭔가 막 느끼하고 토할 거 같고…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데 어느새 여러 명의 오빠들이 절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여러 개의 시선이 일제히 제게 꽂혀있어요. 진배야 어때? 기분이 어때? 그런 말을 막 하면서… 그때, 저를 데리고 온 친구가 갑자기 소리를 칩니다.
“진배야 일어나, 가자!”
뭔지 모르겠는데 이때다 싶었어요. 그 친구를 따라 밖으로 나와서 집에 왔습니다. 며칠 후 얼굴에 멍이 든 그 친구를 봤습니다. 후에 친구가 그러더군요. 니가 먹은 건 돼지 발정제였다고. 저는 그날 이후로 청카바를 입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 때 그 일을 떠올리면 토할 거 같았어요.
대학교 때 그 일을 떠올리면 분노했죠.
직장인이 되어 그 일을 떠올리면 살인 충동이 일었습니다.
지금 그 일을 떠올리면… 사실 이젠 떠올리는 것조차 힘들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당한 일이 뭔지 확고하게 알아갈수록 더 힘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오빠들은 잘 지내더라고요.
나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내게 꽂히던 오빠들의 눈빛을. 그건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습니다. 돼지보다 못한, 발정 난 짐승의 눈이었습니다. 아마 지금 문제가 되는 대통령 후보도 당시 그런 눈빛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새끼 아니었겠죠. 근데 그걸 잘못한 줄도 모르고 자서전에 썼으면… 전 그 양반이 아직까지도 사람새끼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근데 뭐 괜찮습니다. 하루 이틀입니까. 좀 전에도 기사로 읽었습니다. 강제로 키스한 남자의 혀를 깨문 여자에게 실형이 선고됐다고. 괜찮아요. 뭐 하루 이틀입니까. 여교사 성폭행 사건은 감형되었네요. 괜찮아요. 뭐 하루 이틀 아니잖아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왜 그날 동네 오빠의 집에 갔던 걸까요? 왜 주는 대로 쌕쌕이를 마셨던 걸까요? 고등학교 1학년 정도 됐으면 충분히 사고하고 판단했어야 했는데 왜 그랬을까요? 그 짐승의 눈빛은 죄가 없습니다. 본능일 뿐이잖아요. 그러니까 고매하고 훌륭한 양반들께서 그걸 추억 삼아 책으로까지 내는 거 아니겠습니까? 꽉 조인 청카바 입고, 앞머리에 깻잎 붙이고 다녀서 정말 죄송합니다. 시발.
덧
돼지 발정제 찾아보니 나오네요. 내가 먹은 게 이건가… 사알짝 노르스름했는데…
원문: 수진배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