ㅍㅍㅅㅅ https://ppss.kr 필자와 독자의 경계가 없는 이슈 큐레이팅 매거진 Tue, 15 Oct 2024 03:04:04 +0000 ko-KR hourly 1 https://wordpress.org/?v=5.8.10 https://ppss.kr/wp-content/uploads/2015/07/ppss-100x100.png ㅍㅍㅅㅅ https://ppss.kr 32 32 프로야구 천만관중 시대를 연 건 다름아닌 ‘고객경험’입니다 https://ppss.kr/archives/267418 Tue, 15 Oct 2024 03:04:04 +0000 http://3.36.87.144/?p=267418 갑자기 30%나 성장했습니다

올해 프로야구가 사상 처음으로 천만 관중을 달성했습니다. 작년 같은 경기 수 기준으로 관중이 34%나 늘어난 건데요. 프로야구는 원래 국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 중 하나입니다. 2000년대 초반에는 잠시 침체기를 겪었지만,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면서 다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죠.

이후 꾸준히 성장해 2018년에는 840만 명의 관중을 기록하며 절정을 맞이했습니다. 이후 다시 부침을 겪고, 팬데믹으로 위기도 맞이하였지만, 작년에 다시 800만 관중을 돌파하며 희망을 되찾는 과정 중에 있었습니다.

올해의 흥행은 대부분 예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국가대표팀의 성적이 부진했고, 여름에는 야구가 빠진 올림픽이 열리면서 관심이 분산될 거란 예측도 많았거든요. 게다가 올해부터 온라인 중계가 유료화되면서 시청 접근성까지 떨어졌다는 이야기도 나왔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중 수가 200만 명 이상 폭증하면서 천만 관중을 달성하자, 그 원인을 두고 다양한 분석이 나왔습니다. 인기 구단들의 좋은 성적, 시즌 막판까지 이어진 치열한 순위 경쟁, 자동 판정 시스템(ABS) 도입 등 여러 이유가 제시되었지만, 가장 설득력 있다고 받아들여지는 해석은 바로 ‘프로야구가 가성비 좋은 여가 활동’이라는 분석입니다. 경기 관람 비용이 상대적으로 저렴해 20대 젊은 층이 몰렸다는 거죠.

하지만 저는 단순히 가격만으로 흥행을 설명하기엔 부족하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영화관은 관람료 인상으로 침체를 겪고 있지만, 실제로 야구 경기의 객단가는 더 높습니다. 올해 영화관의 객단가는 9,698원이지만, 야구장은 평균 14,772원이거든요.

그럼에도 야구장은 관객들로 가득 차고, 영화관은 빈 좌석이 많은 건 단순 가격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결국 프로야구 흥행의 핵심은 ‘가격 대비 뛰어난 고객 경험’에 있다고 봐야 하며, 여기서 핵심은 가격이 아니라 그 가격으로 제공하는 경험의 탁월함에 있다는 거죠.

 

좋은 경험에 돈이 몰립니다

이 현상은 최근 KBO가 실시한 ‘야구장을 찾는 이유’ 설문조사에서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응답자의 절반 이상인 56%가 자신이 응원하는 팀의 성적과는 상관없이 야구장을 더 자주 찾는다고 답했거든요. 이유는 응원 문화가 재미있어서(49.3%),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가기 위해서(39.2%), 나들이나 데이트 목적으로(31.1%), 그리고 치맥 같은 야구장의 식음 문화가 좋아서(29.4%)라는 순서로 나타났습니다.

특히 응원 문화가 가장 중요한 이유로 꼽힌 점은 흥미롭습니다. 승패보다는 응원 자체,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함께하는 시간과 즐기는 먹거리가 주된 이유라는 거죠. 이는 오프라인 경험을 중시하며 이를 찾아다니는 최근의 소비 트렌드와도 밀접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야구팬들이 말하는 경기장을 찾는 이유, 결국 재밌는 경험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변화의 흐름은 야구장의 객단가에서도 드러납니다. 올해는 평일 경기나 외야석 관중이 늘면서 평균 객단가는 살짝 하락했지만, 전체적으로는 매년 상승세였거든요. 이는 구단들이 앞다투어 선보이는 특별석이 큰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편안한 테이블석 정도였던 특별석이 이제는 캠핑석, 뷔페석, 가족석 등으로 확장되었고, 그만큼 가격도 일반석보다 훨씬 비쌉니다. 그럼에도 팬들은 더 나은 관람 경험을 위해 기꺼이 비용을 지불하고 있죠. 이건 영화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 업계가 전반적으로 침체기지만, 프리미엄 상영관은 여전히 예매가 어려울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으니까요.

이처럼 중요한 건 가격이 아니라, 그 가격에 걸맞은 경험을 제공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소비가 위축된 상황에서도, 더 나은 경험을 제공하면 팬들은 지갑을 열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현장의 뜨거움을 이어가려면

물론 프로야구가 앞으로도 천만 관중의 열기를 계속 유지하려면, 경기장 밖에서의 노력도 병행되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올해 티빙에게 뉴미디어 중계 사업자로 선정하면서, 40초 이내의 숏폼 콘텐츠는 자유롭게 저작권을 푼 것은 좋은 시도였습니다. 이를 통해 야구 관련 콘텐츠가 소셜 미디어에 더 많이 등장했고, 그로 인해 더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어모았죠. 글로벌 밈이 된 ‘삐끼삐끼 춤’ 같은 히트작이 나오는 등, 야구장이 트렌드의 중심이 되기도 했습니다.

티빙 역시 프로야구 중계를 통해 사용자 수를 크게 늘리고 넷플릭스와의 격차를 좁히는 등 경영적인 성과를 내고 있지만, 팬들 사이에서는 중계 퀄리티가 예전 무료였던 네이버보다 떨어진다는 불만이 나오는 것은 확실히 문제입니다. 티빙은 중계 이외에도 야구 관련 콘텐츠를 늘리기 위해 ‘야구 대표자’ 같은 프로그램도 론칭했지만, 완성도에서 비판을 받는 등 아직은 개선할 부분이 많아 보입니다.

따라서 결국 프로야구가 더 성장하기 위해서는 현장의 혁신만큼이나 중계의 품질도 높아져야 합니다. 예능 프로그램 ‘최강야구’가 예상치 못한 인기를 끌며 프로야구 열기를 더한 것처럼, 중계를 보완하는 새로운 양질의 콘텐츠들이 더해진다면 더욱 좋을 겁니다. 그래서 야구대표자 같은 사례들이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계속 시도되어야 할 거고요.

이러한 노력들을 바탕으로 오프라인과 온라인 경험이 함께 발전한다면, 프로야구의 인기는 더욱 오래 지속될 수 있을 겁니다.

원문: 기묘한의 브런치


커머스와 IT에 관한 트렌드를 기록하고 나눕니다

트렌드라이트는 국내 최대 규모의 커머스 버티컬 뉴스레터로, ‘사고파는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매주 수요일 아침, 가장 신선한 트렌드를 선별하여, 업계 전문가의 실질적인 인사이트와 함께 메일함으로 전해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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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킹은 어떻게 2024 파리 올림픽 공식 종목이 됐을까? https://ppss.kr/archives/263388 Tue, 26 Sep 2023 09:22:12 +0000 http://3.36.87.144/?p=263388 브레이킹은 어떻게 올림픽 종목이 됐을까?

한국 브레이킹 댄스계의 최대 이슈는 올림픽이다. 몇 년 전부터 ‘브레이킹 K’라는 이름으로 대표 선발전이 펼쳐졌다. 이 과정에서 토너먼트를 거친 댄서는 ‘국가대표’가 되어 진천 선수촌에 입소했다. 댄서가 정식으로 태극마크를 달게 된 것이다. 스트릿 문화에서 시작된 ‘브레이킹 댄스’가 올림픽 종목이 되리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브레이킹K는 대한민국의 공인 브레이킹 국가대표 선수 선발대회다. 2021년 1회가 열려 3년째 이어져 오고 있다.

 

비보잉, 어쩌면 가장 유명할 스트릿 댄스

브레이킹 댄스는 50년 전 뉴욕의 브롱크스에서 탄생했다. 처음에는 미국인들의 스트릿 컬처였다. 하지만 비교적 빠른 시간에 전 세계로 뻗어나가며 수많은 청년들이 즐기는 문화가 됐다.

인기도 많다. 세계에서 1:1 브레이킹 배틀을 제일 잘하는 댄서를 뽑는 <레드불 BC ONE>은 매년 성황을 이룬다. 프리스타일 세션, 아웃브레이크, 배틀 오브 더 이어 등 브레이킹 댄스를 메인으로 둔 세계 대회 또한 곳곳에서 펼쳐진다. 레드불뿐만 아니라 몬스터 에너지, 아디다스, G-SHOCK, 퓨마 등 세계적인 브랜드가 브레이킹 댄서를 후원하고 있다.

한때는 길거리 젊은이들의 치기 어린 문화로 취급받기도 했다. 그러나 꾸준한 발전을 거쳐 체계적인 대회를 치르는 큰 문화로 성장해다.  세계 대회의 규모와 후원사의 면면 등을 기준으로 보자면, 브레이킹 댄스는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스트릿 댄스 중 하나라는 데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레드불 BC One의 포스터. 에너지 드링크 회사인 레드불에서 후원하며, 1:1 브레이킹 배틀 중 가장 권위 있는 대회로 인정받고 있다.

 

‘올림픽 종목’ 타이틀이 갖는 무게감

그런데 어떻게 브레이킹 댄스가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된 걸까? 얼핏 보면 스케이트보드로 스트릿 컬처의 가능성을 본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가 나선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반대에 가깝다.

IOC가 올림픽 종목을 심사하는 기준은 매우 까다롭다.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있어야 하고, 남녀 모두 출전할 수 있어야 하며, 상업성도 있어야 한다. 국가 보급률 기준도 있다. 유명한 스포츠라 해도 이 기준에 맞지 않으면 금세 퇴출된다.

대표적인 종목으로 야구가 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마지막으로 퇴출됐다. 2020년 도쿄 올림픽에서 잠깐 부활하긴 했는데, 결론적으로는 정식 종목에서 퇴출되고 말았다… / 사진: UnsplashChris Chow
반대로 태권도는 다가오는 2028년 LA 올림픽에서도 정식종목 자격을 유지하게 됐다. 이를 두고 언론에서는 ‘8연속 정식 종목 쾌거’라는 헤드라인을 달았다. 올림픽 정식 종목이 주는 무게감이 얼마나 대단한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 출처 Freepik

명확한 룰 또한 필수적인 요소다. 올림픽에서 선수들의 노력은 모두 숫자로 치환된다. 복잡한 기술은 높은 점수를 얻고, 정확하지 못한 동작은 감점 요인이 된다. 선수의 감성과 개성을 심사 기준에서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조차 ‘예술성’으로 엄격하게 점수를 매긴다. 선수의 모든 요소가 판정의 대상이 되는 거이다. 그런 만큼, 큰 무대로 나설수록 명료한 규정에 의한 심판 판정은 그만큼 중요해진다.

브레이킹 댄스는 이런 점에서 잠재력이 있는 댄스였다. 먼저 브레이킹 댄스에는 모든 댄서가 공유하는 기본기가 있다. 기술의 완성도도 높고, 댄서마다 개성도 훌륭하며, 대중의 눈에 띌 수 있을 만큼 볼거리도 많다. 세계적으로 널리 보급되기도 했다.

사진: Unsplash의 Michael Afonso

하지만 발목을 잡는 요소가 없었던 건 아니다. 명문화된 규정이 부재했다. 대회마다 판정의 기준이 없던 건 아니었지만, 심사위원의 안목과 경험에 적잖이 의존하는 측면이 있었다. 스트릿 문화이기 때문에 폭력적이라는 부정적 편견도 한몫했다.

 

해결책을 찾다: 비보잉과 댄스 스포츠, 그들의 어색한 악수

이런 아쉬움을 해소하기 위해 필요한 건 룰을 정비하고 체계를 다잡을 협회의 존재였다. IOC에서 원하는 형태로 브레이킹 댄스가 스타일을 바꾼다면 가능성이 있어 보였던 것이다. 세계 댄스스포츠 연맹(WDSF)이 나서 브레이킹 댄스를 올림픽 종목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한 이유다.

세계 댄스스포츠 연맹(World DanceSport Federation, WDSF). 댄스스포츠 종목을 총괄하는 국제 스포츠 행정 기구다. 로고가 귀엽다

하지만 댄서들이 마냥 반긴 건 아니었다. 문제는 세계 댄스스포츠 연맹 그 자체였다. 이들은 스트릿 댄스와의 연관성이 부족했다. 스트릿 댄서는커녕 브레이킹 댄서도 아닌 사람들이 브레이킹 댄스를 대표하게 된다는 사실은 댄서들로서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다.

이는 2017년 올라왔던 <WDSF가 힙합에서 손을 떼게 해달라>는 청원에 2,000명 이상이 호응하는 결과를 낳았다. 협회가 브레이킹 댄스를 착취하고, 예술성을 거세하고, ‘댄스스포츠의 올림픽 진출’이라는 숙원 사업의 미끼로 악용한다는 내용의 청원이었다. 배드민턴협회가 야구를 대표하고, 승마협회가 모터스포츠를 대표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꼬집기도 했다.

하지만 브레이킹 댄스의 가능성을 본 WDSF와 댄스 커뮤니티는 멈출 이유가 없었다. 이들은 유스 올림픽에 브레이킹 댄스를 세우며 비보잉의 잠재력을 대중과 IOC에게 어필했다. 결과적으로 브레이킹 댄스는 2024 파리 올림픽 정식 종목에 채택되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 스포츠댄스가 ‘댄스스포츠’라는 이름을 달고 시범종목에 채택된 이후 번번이 올림픽 도전에 실패했던 댄스 커뮤니티로서는 24년 만에 이룬 쾌거였다.

출처: DIRT

또한 이 과정에서 불거진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WDSF는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규정을 제정하고 이를 습득한 심사위원을 양성했다. 판정 시스템도 올림픽에 걸맞은 형태로 개정했다.

하지만 아직 결과물이 완벽하지는 않다는 비판이 따른다. 판정은 스피디해졌으나, 스트릿 댄스를 몇 가지 판정 기준으로 재단하고 순위를 매긴다는 점에서 각 대회마다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점수를 얻을 수 있는 브레이킹 댄스의 스타일이 정해져 있다는 비판도 따른다. 협회는 선수별 성과에 따른 포인트제를 만들고 세계 대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하여 올림픽 티켓을 공정하게 부여하려고 한다.

하지만 적지 않은 댄서가 이 과정에서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다. 일정은 낯설고, 부담감은 무겁다. 이런 춤을 추기 위해 브레이킹 댄서가 된 건 아니었다는 푸념도 소셜 미디어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래도 올림픽의 여정은 시작되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브레이킹 댄스는 올림픽이라는 무대에 서게 되었다. 여태껏 보지 못한 수많은 대중과 국가가 지켜보는 무대다. 브레이킹 댄스와 댄스스포츠가 발을 맞추는 데에는 다소 미온적이라 해도, 각 장르가 갖는 근본적인 차이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해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두 장르는 불안한 동거를 이어가고 있다. 그 목표는 단 하나, 올림픽이다.

사진: UnsplashMichael Afonso

올림픽은 그 어떤 스포츠 이벤트보다도 거대한 대회다. 아무리 훌륭한 문화라고 해도 쉽게 가질 수 없는 기회다. 브레이킹 댄스계에게는 뜻밖의 선물이고 호재인 이유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댄스스포츠와 브레이킹 댄스의 동행은 적어도 2024년 여름까지는 유효할 것이다. 주사위가 어떤 값을 얻을지, 이 주사위를 던지는 게 옳은 일이었을지는 내년에 모두 알게 될 것이다.

원문: 스트릿 웨어 브랜드 DI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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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점유율이 높으면 무조건 승리하나요?: ‘열심’에게 배신당한 당신에게 https://ppss.kr/archives/258989 Tue, 20 Dec 2022 04:07:22 +0000 http://3.36.87.144/?p=258989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둘 중 택해야 한다면 나는 확신의 전자다. 어느 한 팀의 열혈 팬은 아니지만, 정교한 두뇌 게임 같은 야구보다는 보기만 해도 아드레날린이 폭발하는 단순한 축구에 애정이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내 인생에 자주 오지 않을 기회인 유럽 여행을 가기로 마음먹고 여행지를 정할 때, 별로 고민하지 않고 스페인을 1순위로 택했다. 인생 버킷 리스트 중 하나였던 현지인 아저씨들과 함께 스페인 프로 리그 라리가 경기 직관을 하던 그 밤, ‘나 좀 괜찮게 살고 있구나 ‘ 싶어 혼자 몰래 울컥했다.

밤을 새워가며 유럽 축구 4대 리그를 순례하던 열정은 서서히 식었지만, 지금도 월드컵 시즌이 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500g도 안 되는 공 하나의 행방에 잠 못 이루는 전 세계 축덕들 사이에 끼여 소심하게 환호한다.

대한민국팀의 첫 번째 예선경기가 있던 지난 목요일 밤. 0:0 어느 한쪽도 점수를 내지 못한 채 전반전이 끝났다. 하프타임이 시작되자 전반전 경기를 분석한 데이터가 공개됐다. 유효슈팅과 반칙 상황 등이 숫자로 정리된다. 그중 제일 궁금한 건 점유율. 같은 시간 동안 어떤 팀이 얼마나 공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스페인이나 독일, FC 바르셀로나 등 세계적인 최강팀들의 공통점은 바로 점유율이 높다는 점이다. 그래서 피치 위에는 ‘점유율 = 승리’ 같은 공식이 있다. 점유율이 높다는 건 공을 선점하고 있다는 시간이 길다는 뜻이고, 그 시간이 길다는 건 슛을 시도할 기회가 많다는 걸 의미한다. 동시에 상대편에 비해 골을 넣을 확률이 높다는 뜻과 닿아 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촘촘히 패스하며 골을 몰고 골대로 진격하는 튼튼한 ‘빌드업‘을 하다가 예상 밖의 반격을 당할 때도 있다. 오랜 시간 볼을 지켜 내느라 진이 빠진 선수의 방심을 틈탄 빠르고 저돌적인 선수의 가로채기에 이은 역습. 아무리 단단하게 빌드업을 한다 해도 반드시 골이 된다는 법은 없고, 오히려 역습 끝에 탄생한 한 골이 승부를 가를 때가 있다. 89분 동안 공을 가지고 있었더라도 1분 사이에 역습당한 후 골을 허용하면 경기는 패배로 끝난다. 역습을 한 팀의 팬이라면 짜릿하지만, 역습을 당한 팀의 팬 입장에서는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결과다.

여기서 우리가 쉽게 놓치는 게 있다. 점유율은 단순히 볼을 소유하고 있는 시간을 계산한 것이 숫자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관건은 점유율의 질이다. 우리 진영에서 볼을 오래 소유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상대 진영에서 공을 가지고 오래 머물러야 골이 날 확률이 높아진다. 승리에 가까워지고 싶다면 점유율의 질을 높여야 한다.

출처: Unsplash

내 열심과 다른 결과가 내 손에 쥐어졌을 때, 축구 경기의 공 점유율을 떠올린다. 대부분의 성공에는 ’ 열심’이 바탕이 된다. 하지만 ‘열심’의 결과가 꼭 성공으로 이어지리라는 보장은 없다. 기대 밖의 결과를 받아 들었을 때, 내가 열심을 뿜었던 곳의 위치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숨을 고르고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우리 진영에서만 공의 속도를 조절한 게 아니라 그곳에서 공격이라도 할 듯 최선을 다해 송곳 패스를 한 건 아닌지. 어처구니없게 우리 골대를 향해 택배 크로스를 올린 건 아닌지. 진격 질주를 하며 향한 곳이 상대방 골문이 아니라 우리 골대 쪽으로 가서 골을 꽂아 놓은 건 아닌지 말이다.

엉뚱한 곳에서 열심히’만‘ 하고 있었는지, 그 위치를 확인해야 한다. 그냥 열심 말고 똑똑하게 열심히 하는 요령이 필요하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 된다고 포기하기 전에, 나의 ’ 열심‘이 향한 곳이 어딘지 냉정하게 바라보자.

원문: 호사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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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강전, 마지막까지 함께할 수 있어서 감동적이었던 https://ppss.kr/archives/258772 Fri, 09 Dec 2022 02:20:24 +0000 http://3.36.87.144/?p=258772 포르투갈 전이 끝났던 12월 4일 새벽에 손흥민 인터뷰를 보고 깜짝 놀랐다. 자신의 부족함과 후배들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는 겸손함, 과거 경기에 대한 아쉬움 이야기까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는데, 마지막에 한 이야기가 무척 놀라워 마음을 울렸던 것이다.

가장 감사한 것은 감독님의 마지막 경기가 (관중석이 아닌) 벤치에서 같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이 말은 상상조차 못 했다. 내가 선수와 감독의 관계랄 것에 대해 별로 이해가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생각해보니 단순히 감독이 관중석에 있어서 경기가 다소 불안하거나 한 게 아니라, 함께하지 못한 것이 눈물 날 정도로 아쉬웠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몇 년간 치열하게 함께하며 여기까지 왔는데, 마지막에 관중석에 있어야 했던 감독을 보며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 안타까움, 깊은 동료애를 느끼는 것이 당연하구나 싶었다.

관중석에서 안절부절… / 출처: SBS

특히, 그 순간 자신의 기쁨에만 몰두하기보다는 타인의 마음을 더 생각하는 손흥민의 태도가 참 뭉클했다. 16강에 간 것도 너무 기쁘지만, 상대 팀에 이기고 ‘올라간 것’도 성취감을 느끼는 일이지만, 감독과 함께했던 마지막 경기를 함께할 수 있다는 것도 중요한 것이다. 경기는 이기기도 하고 질 수도 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허무하지 않은 끝을 이루는 것,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것이다.

요즘 들어, 내가 가장 감동하는 순간은 그런 것 같다. 가장 절박한 순간에 타인들의 손을 잡는 순간 말이다. 손흥민 선수 인터뷰의 마지막 한 마디가 그랬다. 가장 자기 자신의 감정에 집중할 법한 순간에도, 타인의 마음과 감정으로 들어가는 순간.

스포츠가 감동적인 건 자기 극복의 열정도 있지만, 이렇게 동료들에 대한 진심 어린 애정이 묻어나는 것이나 다 같이 함께하는 순간 때문이 아닐까 싶다. 동료가 골을 넣는 걸 자기가 넣은 것처럼 기뻐하고, 그걸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는 순간은 참으로 드물고 감동적인 것이다. 함께함을 바라는 이 마음이 오래 기억됐으면 좋겠다.

출처: SBS

나 잘났다, 내가 살아남는 게 중요하다, 내 감정이 제일 중요하다, 같은 명제를 내세우는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순간만큼은 그 반대를 배운다. 네 덕분이다, 너와 함께해서 다행이다, 마지막까지 함께하고 싶다, 같은 마음을 배운다.

함께할 수 있음에 감사하기. 어쩌면 그 마음의 정점에 있는 것이 스포츠인 것이다.

원문: 문화평론가 정지우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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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베이징 올림픽을 되돌아보며: 올림픽 속 이데올로기 충돌의 순간들 https://ppss.kr/archives/252297 Fri, 18 Mar 2022 06:01:16 +0000 http://3.36.87.144/?p=252297 이번 주제는 전 세계의 스포츠 축제, 올림픽에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그렇다고 스포츠 선수나, 경기에 대한 이야기냐고 물으시면 그건 아닙니다. 스포츠보다는 이데올로기에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베이징 동계올림픽은 1932년부터 84년까지 이어진 냉전 올림픽(Olympic ColdWar)을 떠올리게 하는 점이 많았습니다. 첫 번째는 미국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전쟁 분위기를 자아내는 와중에 개최된 올림픽이라는 점. 두 번째는 바로 중국에서 열린 올림픽이라는 점입니다.

특히 선수들에 대한 검열이나 편파판정에 대한 이슈는 냉전시기 과열된 올림픽 양상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였는데, 전 국민을 어처구니없게 만드는 편파판정이 계속되었죠.

쇼트트랙에 아이템전이 웬 말? / 출처: SBS

그도 그럴 것이 한 언론 칼럼에서 붙여진 이번 올림픽의 별명은 ‘시진핑의 시진핑에 의한, 시진핑을 위한 올림픽’입니다. 이번의 과열된 올림픽 양상은 올해 하반기에 시진핑 주석의 연임을 결정짓는 20차 당 대회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죠. 공산당에서 보통 주석은 2연임까지가 관례고, 3연임 정도의 장기집권을 위해서는 그만한 명분과 업적이 필요합니다.

시진핑의, 시진핑에 의한, 시진핑을 위한 올림픽

때문에 이번 올림픽에서는 중국 내 소수민족의 분쟁을 잠재우면서 겉으로는 포용하는 제스처를 취하고, 중국 선수단이 메달을 많이 따 애국심을 고양시켜 ‘위대한 강대국 중국’이라는 이미지를 중국 인민들에게 과시하려는 의도를 띠고 있다는 겁니다. 때문에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을 핑계로 해외 선수들의 움직임을 철저히 통제하고, 이해할 수 없는 편파판정을 빈발하기 시작했다는 해석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착한 중국인은 죽은 중국인뿐…’ 등의 극단적인 혐오를 표출할 필요는 없습니다. 올림픽이라는 메가 이벤트는 항상 국가 원수들의 철저한 계산과 국가적 이데올로기가 도사렸던 장소이기 때문이죠. 지금은 비교적 자유롭지만 부모님 세대만 하더라도 일상생활마저 이데올로기 경쟁이라는 국제 정세로부터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스포츠에는 훨씬 정치적 목적이 얽혀 있었고요.

때문에 이번 글에선 2022 베이징 동계 올림픽처럼 올림픽에 반영되었던 국가들의 계산과 국제 정세 변화의 순간을 연대기 순으로 뽑아봤습니다. 올림픽이 정말로 선수들과 스포츠만을 위한 공간이었는지, 들여다보시죠.

  • 연대기의 분류는 엄격히 학문적인 분류가 아닌 글쓴이 개인의 견해가 담겨있습니다.
  • 포스터, 로고 등 사료는 모두 IOC 홈페이지가 출처로 별도의 저작권 표기를 생략합니다.

 

1. 올림픽의 시작, 그 속의 제국주의(1896~1936)

최초의 올림픽

가장 근대적인 올림픽의 시작은 1896년 4월에 열린 아테네 올림픽입니다. 이때는 독일과 프랑스 영국을 중심으로 한 14개국이 참여했고, 유럽에 국한된 경기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이 해에 아관파천이 발생했습니다. 전 세계 속 제국주의의 열망이 한창 확대되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당시만 해도 올림픽은 그다지 큰 대회가 아니었습니다. 뒤이어 열린 1900년 파리 올림픽만 해도 파리 만국 박람회, 즉 파리 엑스포 부속 행사로 진행되었습니다. 프로 선수와 아마추어 선수가 뒤섞여 경기를 진행했죠.

1900 파리 엑스포 조경 일러스트
1900 파리 올림픽 포스터. 여성이 그려져 있지만 정작 여성 참여자는 20명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당시는 한창 제국주의가 유럽에서 활개를 치던 시기였습니다. 엑스포는 자연스레 선진국이 자국 발전을 과시하는 장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쟁이 과열되어 발생하는 해프닝 역시 많았습니다. 이러한 면모가 돋보이는 일화가 1937년 파리 엑스포에서 발생한 독일과 소련의 경쟁입니다. 무려 주최자인 프랑스보다도 전시관을 크게 짓겠다며 소련과 독일이 자존심 경쟁을 벌인 것이었습니다.

1937 파리 엑스포의 전경. 좌측이 독일 전시관, 우측이 소련 전시관, 가운데가 주최국인 파리의 전시관이다.

서로 더욱 웅장하게, 더욱 크게 짓겠다고 경쟁한 결과 주최국인 프랑스 전시관보다 2배 큰 규모를 가진 전시관이 지어졌습니다. 이렇게 과열된 경쟁 양상이 전쟁으로 이어졌다고 말하면 성급한 결론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실제로 4년 뒤인 1941년에 독일이 조약을 깨고 소련을 침공합니다.

이렇듯 이 시기는 자신들의 체제와 국가가 뛰어나다고 자랑하고 싶어 안달을 내던 시대였습니다. 초기 엑스포 속의 부설 프로그램으로 열린 올림픽 역시 제국주의 시대의 과열된 경쟁심리가 반영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올림픽은 또 다른 체제 선전의 장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1936 베를린 올림픽

이데올로기 선전의 장으로 쓰였던 대표적인 올림픽은 1936년 독일에서 열린 베를린 올림픽입니다. 세계 최초로 TV로 중계한 올림픽이자 히틀러가 선전을 위해 개최했던 올림픽으로도 유명합니다.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나치는 영화감독을 고용해 올림픽 경기를 예술적으로 촬영하고 아리아인의 신체의 미적 아름다움을 카메라로 담는 동시에, 독일이 금메달을 독점하여 ‘아리아인의 생물학적 우수성을 홍보한다.’는 정치적인 목적을 공고히 하였습니다.

아직 나치의 폐단이 밝혀지기 전이라 나치의 경례가 자연스러운 것은 물론
미국과 영국 등 일부 국가를 제외한 참여국들도 나치 경례를 하며 경기장에 입장했다

당시의 충격적인 점은, 미국과 영국을 제외한 국가의 선수 입장 시 나치 식 경례를 하면서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올림픽 개최 이전의 독일은 공원에 ‘유대인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걸려 있을 정도로 차별이 심각했습니다. 그러나 올림픽 기간 동안에는 유대인에 대한 차별도 중단되었습니다. 그래서 TV로 방영되는 독일은 정말 평화롭고 잘 발전된 선진국으로 포장되었죠. (이런 독일과 히틀러, 나치가 5년 뒤 소련과 조약을 어기고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다들 상상조차 못 했을 겁니다) 당시 베를린 올림픽은 전 세계 50개 언어, 3천 개 이상의 프로그램으로 방송되어 효과적으로 나치를 선전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2. 냉전의 개막, 그 속에 담긴 이데올로기(1948~1984)

1952 헬싱키 올림픽

1952년 헬싱키 올림픽. 우리에게는 가슴 아픈 시대였지만 올림픽은 세계화가 이루어진 시기였습니다. 이스라엘과 소련이 처음으로 올림픽에 출전한 해이기도 합니다. 냉전의 분위기가 과열되고 있던 시대였지만 올림픽 자체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이념과 갈등을 뒤로하고 평화를 위해 전 세계가 함께 할 수 있다는 상징적인 모습을 연출했죠.

개최지 선정 또한 의의에 맞게 회원국 투표를 통해 결정되었습니다. 특징이 있다면 냉전 시대인 만큼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정치 노선에 따라 선수들이 따로 분리되어 수용되었다는 것 정도겠네요.

그러나 이렇게 평화로운 모습이 무색할 정도로, 올림픽도 과열되는 양상을 보여준 시기이기도 합니다. 반대 진영 선수의 업적을 폄훼하는 프레이밍과 도를 넘은 비판이 쏟아졌으며, 서로의 올림픽을 보이콧하는 사태까지 이어졌죠.

1980 모스크바 올림픽. 러시아 하면 생각나는 곰 마스코트가 인상적이다

1980년의 올림픽은 모스크바에서, 1984년의 올림픽은 미국 LA에서 열렸습니다. 냉전 시대를 주도한 양측의 우두머리가 주도하는 올림픽이 연속해서 개최된 셈이죠. 결과는 불 보듯 뻔했습니다.

1980년 소비에트 연방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풍자한 만평
민주주의 진영의 올림픽 보이콧을 보여주는 포스터

1980년 소비에트 연방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습니다. 무자헤딘-알카에다-탈레반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만든 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때문에 80년 올림픽은 이에 반발한 미국과 동맹국인 한국 등 수십 개 나라가 보이콧을 선언했습니다. 그러자 이어서 열린 LA올림픽에 소련을 위시한 14개 공산권 국가들이 보이콧을 선언했습니다. 이 시기만 해도 올림픽의 권위가 연달아 실추되는 모습을 보였던 거죠.

1988년 서울 올림픽은 미국의 입장에서는 민주주의 선전의 장이 되었습니다. 한국이 6.25 전쟁을 딛고 일어나 이렇게나 현대화되고 발전하였다는 것을 전달할 수 있었던 기회였기 때문이죠. 그 덕분에 당시 공산권 국가였던 쿠바와 에티오피아, 북한 등은 보이콧을 선언했습니다. 그래도 러시아를 비롯한 다른 공산권 국가들은 참여했고, 12년 만에 온전히 이데올로기와 관계없이 개최된 성공적인 올림픽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3. 이데올로기에서 이어진 ‘선수 흠집 내기’

이런 보이콧 외에도, 양국의 매스컴은 각자의 이데올로기에 흠집을 만들기 위해 전력을 다했습니다. 지금도 미국에서 인기 있는 스포츠 잡지인 <Sports Illustrated>에선 올림픽에 출전한 소련 선수들에 대해 노골적으로 비인간적인 단어를 선택해 보도했습니다. 소련의 전체주의로 학대당하고 있다며, 부정적인 메시지와 함의를 담았죠.

영양사의 감시 아래 하루 5천 칼로리의 음식을 쑤셔 넣었다.

  • Ezra Bowen and George Weller, “The 1956 Winter Olympics,” Sports Illustrated 20(Jan, 1956), p. 27

또한 소련의 여성 운동선수들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유포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미국은 생물학적 성에 기초한 남녀 차별은 몇 세기에 걸쳐 약화되어가는 추세였지만, 스포츠 분야에서는 영향력이 미미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언론 매체는 뛰어난 기량을 보인 소련 여성 선수들을 여성으로서의 성 정체성을 포기한 집단으로 그렸습니다. 일례로 1970년 7월 2일 자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다음과 같은 글을 게재했습니다.

미국에서 여성 육상 종목의 발전이 더딘 이유 중 하나는, 소련의 타마라 프레스와 같은 선수들이 선수로 뛰기 때문이다. 이들은 여성이라기보다는 남성으로서의 특징을 더 많이 갖고 있다. 그녀의 사진을 본 미국의 부모들은 그들의 딸을 수영이나 다른 종목으로 인도하게 될 것이다.

  • Los Angeles Times, 2 July 1970, E2
전 소비에트 연방의 육상 선수 타마라 프레스

소련 여성 운동선수들의 성 정체성에 대한 의심은, 그들이 올림픽에서 보여준 기량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폄훼 시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육체를 공산주의 체제의 실패의 상징으로 활용하고, 성 질서를 파괴하는 이들처럼 그린 것이죠. 어떻게 보면 체제의 비인간성을 드러낸 영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소련의 전략은 달랐습니다. 자국의 매체를 통해 자국 선수들의 우월성을 홍보하려 했습니다. 소련의 스포츠 선수들은 단지 운동능력이 뛰어나 뽑힌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에 대한 신념으로 무장해서 국제무대에서 체제의 대표자 역할을 수행하는 일명 ‘운동복의 외교관’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이죠.

정리해서 말하자면 미국은 소련의 선수를 ‘인간 기계, 로봇’으로 묘사했습니다. 반면 소련 매체는 이들을 조국의 영광을 위해 분투하는 전사’라고 표현했죠. (※ Mertin, “Presenting Heroes,” p. 476)

올해 베이징 올림픽도 이와 비슷한 양상을 띄고 있습니다. 1월 25일 중국 선수단의 출정식이 그런 성격을 반영합니다. 당시 선수단 이런 구호를 외쳤습니다.

영수에게 보답하기 위해 목숨을 걸자. 일등을 다투고 패배는 인정하지 않는다. 총서기와 함께 미래로 가자!

여기에서 영수와 총서기는 모두 시진핑 주석을 의미합니다. 냉전 체제의 소련 스포츠 선수단과 거의 유사한 성격을 띠고 있죠.

 

4. 올림픽이 평화를 위한 공간이 될 수는 없을까?

선수들은 이데올로기와 관계없이 인사와 교류를 주고받았습니다. 2022 동계 올림픽에서 한국 숙소를 찾은 외국인 선수들이 인사차 만들고 간 눈사람입니다.

물론 소련 선수와 개인적으로 조우한 미국 선수들의 반응은 양국의 딱딱한 반응과는 달랐습니다. 1952년 올림픽 선수촌의 소련 대표 팀을 방문한 이들의 반응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들 모두가 결국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기뻐했다.

소련 선수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죠.

선량한 마음을 가진 귀국의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의 감사 인사를 전해주십시오.

이러한 모습에서 미국의 언론매체가 그리는 바와 같이 고립적이고 폐쇄적인 소련 선수들의 이미지믐 찾아볼 수 없었죠. (※ John Bale, “’Oscillating Antagonism:’: Soviet-British Athletics Relations, 1945-1960,” in East Plays West, p. 95)

분명 올림픽에는 정치적 목적과 이데올로기가 짙게 담겨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까지 그 과열된 양상과 분쟁에 동참해줄 필요는 없습니다. 올림픽에 참여하는 사람들과 올림픽을 보는 사람들이 도전과 의지, 평화를 믿는다면 올림픽은 정말로 그런 장소가 될 테니까요.

원문: 몰라도아는척의노예 도비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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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맨십 때문에 놓친 금메달, 16년 만에 되찾은 이야기 https://ppss.kr/archives/251745 Tue, 22 Feb 2022 06:07:31 +0000 http://3.36.87.144/?p=251745
2006년 토리노 겨울 올림픽 당시 린지 제이커벨리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홈페이지

스노보드 크로스가 올림픽 데뷔전을 치른 2006년 토리노 대회 여자 결선. 린지 제이커벨리스(37·미국)는 2위 타냐 프라이든(46·스위스)에 3초 앞선 상태로 마지막에서 두 번째 점프 구간에 진입했습니다.

결승선까지 43m 남은 상황에서 제이커밸리스는 올림픽 초대 챔피언 등극을 확신하는 세리머니를 선보였습니다. 점프 이후 보드 앞쪽을 잡고 좌우로 흔드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착지 과정에서 중심을 잃고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금메달 예고 세리머니를 선보이다 넘어진 린지 제이커벨리스 / 출처: IOC 유튜브

이 세리머니를 시도하기 전까지만 해도 제이커벨리스는 뒤를 한 번 돌아볼 정도로 여유가 있었습니다. 착지 실패 이후에도 위치 자체는 제이커벨리스가 앞선 상태였지만, 문제는 속력을 모두 잃은 상황이었다는 겁니다. 결국 뒤에서 따라오던 프라이든이 마지막 점프대 앞에서 역전에 성공했습니다. 제이커벨리스는 다 잡았던 금메달을 은메달로 바꿔야 했습니다.

금메달 예고 세리머니를 선보이려다 역전을 허용한 린지 제이커벨리스 / 출처: IOC 유튜브

제이커벨리스는 이후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다섯 번 우승하고 국제스키연맹(FIS) 스노보드 월드컵에서 23승을 거두는 등, 이 종목 정상급 기량을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올림픽에서는 2010년 밴쿠버에서 5위, 2014년 소치에서 7위에 그치는 등 준결선 문턱을 넘지 못했습니다. 2018년 평창 대회 때는 12년 만에 선수 네 명이 메달 세 개를 놓고 다투는 결선 무대를 밟았지만 0.003초 차이로 4위에 그쳤습니다.

그렇게 만 20세 182일에 올림픽 금메달을 코 앞에 두고 있던 제이커벨리스는 만 37세 174일이 되어서야 다시 올림픽 메달 도전 기회를 얻었습니다. 2022 베이징 겨울 올림픽 스노보드 전 종목 출전 선수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게 바로 제이커벨리스였습니다.

2022 베이징 올림픽 결선 경주를 1위로 마무리하는 린지 제이커벨리스 /출처: 뉴욕타임스

이번에는 몸을 바짝 낮춘 채 경기에 참여했습니다. 제이커벨리스는 9일 중국 중국 허베이성 장자커우 원딩 스노파크에서 열린 결선에서 몸을 마짝 움크린 채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습니다. 제이커벨리스가 올림픽 스노보드 역사상 가장 나이가 많은 금메달리스트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겨울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미국 여자 선수 가운데도 제이커벨리스가 역대 최고령입니다. 16년 만에 다시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낸 것도 미국 여자 선수로는 첫 기록입니다. 이 대회 미국 선수단에 첫 금메달을 안긴 제이커벨리스는 말했습니다.

16년 전에 금메달을 놓쳤다는 게 믿기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 금메달을 땄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다. 2006년 결승전 이야기를 사람들이 계속한다. 그 덕에 내가 이 종목에 더욱 매진할 수 있었다.

제이커벨리스는 또 “16년 전보다 선수들 기량이 아주 좋아졌는데 이렇게 우승해 더욱 의미가 있다”면서 기뻐했습니다.

그는 ‘젊은 선수들에게 조언을 해달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과거 실수가 당신이 누구인지 정의하는 건 아니다. 이런 큰 무대에서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승자다.

그렇습니다. 언제든 경험을 통해 배우고 성장할 수 있다면 나이 따위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더해서

2022 베이징 올림픽 스노보드 크로스 혼성전 금메달을 차지한 제이커벨리스, 닉 바움가트너/ 출처: 뉴욕타임스

이로부터 사흘이 지나, 역대 최고령 올림픽 스노보드 여자 금메달리스트 나이는 만 37세 177일로 늘었습니다. 케이커벨리스가 혼성전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걸었기 때문입니다. 단 제이커벨리스와 함께 금메달을 딴 닉 바움가트너가 만 40세 57일이라 남녀 통합 최고령 자리에서는 내려왔습니다.

‘스노보드 크로스’는 다양한 지형지물이자리한 코스 위에서 스노보더 네 명이 동시에 레이스를 벌이는 종목입니다. 올림픽에서는 예선을 통해 16강을 정한 뒤 네 명씩 조를 나눠 1, 2위가 다음 라운드에 진출하는 방식으로 순위를 가립니다. 올림픽 코스는 길이 1050m(±150m), 표고차 130~250m, 평균 경사 12도(±2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원문: kini’s Sportuge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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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동계올림픽 남자 쇼트트랙 준결승” 트윗 모음 https://ppss.kr/archives/251071 Tue, 08 Feb 2022 02:23:59 +0000 http://3.36.87.144/?p=251071

황대헌 선수가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1000m 준결승에서 탈락했습니다.#황대헌 #베이징올림픽 #올림픽 #쇼트트랙 @Beijing2022 pic.twitter.com/rPxqyLaoLy

— 올림픽 (@Olympic) February 7, 2022


표지이미지 출처: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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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만화에 나올법한 운동부 매니저가 실제로 있을까? https://ppss.kr/archives/250092 Tue, 18 Jan 2022 08:08:13 +0000 http://3.36.87.144/?p=250092
농구부 매니저 소연이에게 고백하는 강백호

<슬램덩크>는 양아치 고등학생 강백호가 농구를 좋아하는 여학생 채소연에게 첫눈에 반해 다소 불순한(?) 목적으로 농구부에 들어갔다가 농구에 푹 빠져 진정한 농구인으로 거듭나는 성장기를 그린 청춘 만화다.

<슬램덩크> 농구부 매니저 소연이

‘농구는 잘 모르겠고 그쪽을 좋아하게 될 것 같습니다..’

저런 청초한 눈망울로 쳐다보면 여자인 나도 반할 것 같다. 소연이처럼 예쁘고 청순한 운동부 매니저가 현실에도 존재할까?

키 크고 훈훈한 운동선수들이 땀 흘리며 경기에 열중하고, 그 모습을 관중석에서 지켜보며 “선배 파이팅!!” 하며 목놓아 응원하는 예쁜 매니저들. 스포츠 청춘만화에서나 나올법한 이런 장면을 현실에서 볼 수 있을까?

놀랍게도 일본 대학에서는 청춘만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장면들을 현실에서 꽤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일본 대학의 운동부 문화

일본 대학에는 축구부, 농구부, 테니스부, 조정경기부, 검도부 등등 수많은 운동부가 존재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프로선수를 목표로 하는 학생들이 운동부에 들어가지만, 일본에서는 프로가 아닌 일반 학생들도 운동부에 많이 가입한다.

운동부에 들어가면 대학 4년 동안 주 4~6회 강도 높은 훈련에 참여해야 하고, 학업보다 운동부 활동을 최우선시해야 한다. 운동선수가 되려고 대학에 온 것도 아니고 누가 제 발로 운동부에 갈까 싶겠지만 놀랍게도 상당수의 일본인 학생들이 운동부 활동에 4년간 청춘을 다 바친다.

출처: Freepik

나도 처음에는 운동부에 들어가는 게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방과 후 운동장에서 밝고 기운찬 목소리를 내며 열심히 훈련하는 운동부 사람들을 보다 보니 뭔가 부러웠다.

중·고등학생 때 공부밖에 안 해서 잘하는 운동 하나 없는 내가 문득 초라하게 느껴졌다. 나도 공부 외에 뭔가 잘하는 운동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몇몇 관심 있는 운동부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여자 부원 대환영!! 선수 말고 매니저 말입니다.

어딜 가도 유독 ‘여자 부원 대환영‘이라는 피켓을 내건 운동부들이 많았다. 어느 동호회나 모임에 가도 항상 여자 멤버가 부족한 건 국룰인가 싶었다. 그런데 그런 것 치고는 캠퍼스 안에서 운동부 잠바를 입고 돌아다니는 여학생들이 꽤 많이 보였다. 그녀들의 옷차림이 꽤 흥미로웠는데, 운동부 잠바를 입고 있긴 했지만, 풀메이크업과 탱글탱글한 머리 컬, 레이스 치마에 뾰족구두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풀 셋팅을 한 모습이었다.

내가 상상했던 운동부원 이미지와는 좀 거리가 멀어서 당황했다. 일본에서는 운동하는 여자분들도 평소에 화려하게 잘 꾸미고 다니는구나.. 일본 여자들은 자기 관리를 정말 철저히 한다는 걸 새삼 느꼈다.

나는 운동부 잠바를 입은 예쁜 언니들 손에 이끌려 어느 운동부 신입생 환영회에 가게 되었다. 맛있는 밥과 술을 얻어먹은 후, 운동부에 들어가면 어떤 훈련을 하게 되는지 물어봤다. 나를 신입생 환영회에 데려온 그 예쁜 언니들은 활짝 웃으며 여자 부원은 훈련을 하지 않고 남자 선수를 케어하는 매니저를 하게 될 거라고 말했다.

… …
??
매니저..?
설마… 이거??

슬램덩크 농구부 매니저 소연이와 한나. 자세히 보면 둘 다 풀메이크업이다.

운동부 중에 여자가 플레이어로 활약할 수 있는 곳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축구부, 농구부, 아이스하키부 등등 대부분의 운동부에서 선수는 남학생들만 할 수 있다. 드물게 여자 운동부가 있긴 하지만 소수에 불과하다. 그래서 여자 부원은 운동부에 들어가면 선수가 아닌 매니저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운동부 매니저가 하는 일

실제로 내 대학 동기 중 운동부 매니저였던 친구들한테 들은 이야기를 정리하면 매니저의 역할은 대략 아래와 같다. (※주의 : 모든 대학 운동부가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일본 대학 운동부 매니저의 역할

  • 선수 부상 관리 (팔목에 붕대 감아주기)
  • 선수 식단 관리(매니저가 밥해주는 운동부도 있음)
  • 운동 경기 자료 수집 및 분석
  • 선수 대신 수업 대리 출석해주기
  • 선수들 경기할 때 큰 소리로 응원하기
  • 경기 중간 쉬는 시간에 물 갖다주기
  • 경기 도중 필드 밖으로 나간 공 주워오기
  • 선수들 유니폼 세탁
  • 비품 구입 및 관리
  • 선수들의 컨디션, 몸 상태 체크
  • 선수들이 경기에만 집중할 수 있게 그 외 모든 걸 케어

운동부 매니저가 되고 싶은 이유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겠지만 일본인 친구들한테 물어보니 대략 아래 이유 중에 있을 거라고 한다.

운동부 매니저가 되고 싶은 이유

  • 운동에 대한 열정 (여자부가 없어서 선수로는 못 뛰지만, 매니저로서라도 지켜보고 싶어서)
  • 운동부에 있는 지인한테 부탁받아서 어쩔 수 없이
  • 봉사 정신과 희생 정신이 투철하고 누군가를 서포트하는 게 좋아서
  • 단체 활동을 통해 팀워크 정신을 배우고 싶어서
  • 잘생긴 남자 친구를 사귀기 위해
  • 남자들한테 주목받고 관심받고 싶어서
  • 그냥 궁금해서
  • (※이외에도 다양한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운동부 매니저에 대한 오해와 진실

경기 자료 수집/분석, 부상 관리, 컨디션 체크는 뭐 그렇다 쳐도, 그 외의 일들은 솔직히 내가 보기엔 선수들 뒤치다꺼리로밖에 안 보였다. 매니저가 물통을 들고 따라다니면서 선수한테 물을 갖다주고, 경기 도중에 공 주우러 다니고, 심지어는 선수들 대리 출석까지 해준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충격적이었다.

출처: 일본 야나기가우라 고등학교 홈페이지

더 놀라운 건 매니저들 스스로가 그런 일을 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심지어는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사실이다. 누가 선수 팔목에 붕대를 빠르고 정확하게 감아주는지, 누가 선수들을 더 잘 케어해주는지 서로 경쟁을 할 정도였다. 그게 그들 사이에선 매니저로서 능력을 측정하는 기준인 동시에 본인의 여성스러움을 어필하는 척도인 것 같았다.

상당수의 여자 매니저들은 항상 풀메이크업에 풀셋팅을 하고 다녔다. 목소리도 진짜 본인 목소리가 맞나 싶을 정도로 아기 같은 목소리를 내며 뭐만 보면 ‘귀여워~~(카와이이~~)’라는 말을 남발하는데 솔직히 보고 있기 힘들었다. 절대 나랑 친구가 될 수 없는 부류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미국 드라마 ‘가십걸’처럼 선수와 매니저끼리 같은 운동부 안에서 돌려 사귀는 일도 빈번했다.

그래서 나는 남자들의 관심에 목마른 여자들이 운동부 매니저를 하는 줄 알았다. 자기들도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들어왔으면서 남자 선수들 뒤치다꺼리를 왜 자진해서 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굳이 ‘매니저’라는 역할을 따로 두고 별 잡다한 일을 도맡아 하는 게 솔직히 이상해 보였다.

게다가 인터넷 검색창에 ‘운동부 매니저‘라고 검색하면 온갖 선정적인(?) 사진들이 나오는 걸 보고 매니저라는 역할 자체가 다소 성차별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렇게 내 안에서는 운동부 매니저에 대한 안 좋은 인식만 쌓여갔다.

대학교 3학년 때 한 수업에서 팀 프로젝트를 하게 되었는데 나랑 같은 조에 농구부 매니저인 여자애가 있었다. (슬램덩크 소연이와 머리 스타일은 똑같았다.) 그 친구는 자기가 농구부 매니저라는 사실에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엔 별로 좋게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내가 매니저에 대해 상당 부분 오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일본 운동부에서는 ‘매니저’가 하나의 중요한 역할로 자리 잡고 있었다. 매니저는 선수가 경기에만 집중해서 최상의 성과를 낼 수 있도록 경기 이외의 모든 전반적인 것들을 관리한다.

출처: Freepik

회사에 비유하자면 경영지원, 재무회계, 인사, 총무와 같이 회사가 잘 돌아갈 수 있게 제반 사항을 지원하는 일을 매니저가 담당하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매니저도 선수와 감독 못지않게 꼭 필요한 역할 중 하나다. 실제로 일본 대학 운동부에서 매니저가 없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일본 청춘만화에는 여리고 청순한 여자 매니저가 자주 등장하지만 실제로는 매니저가 꼭 여자여야 할 필요도 없다. 드물긴 하지만 남자 매니저도 존재한다고 한다. 매니저는 훈련에 직접 참여하진 않지만, 선수들과 똑같이 주 4~6회 운동부 활동에 출석해야 하며, 선수들의 훈련을 계속 지켜보며 케어를 해줘야 한다. 따라서 운동부 매니저를 하려면 어느 정도의 체력과 정신력이 받쳐줘야 한다.

희생 정신과 봉사 정신이 투철하고 남을 서포트해주는 데서 큰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매니저로 잘 맞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운동부 매니저 일이 웬만한 희생 정신과 봉사 정신 없이는 하기 힘든 일이다. 대단히 수고스럽지만 보람된 일임은 분명하다.

원문: Moonlighter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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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5종, 승마 대신 사이클을 도입한다고? https://ppss.kr/archives/247288 Thu, 25 Nov 2021 03:20:47 +0000 http://3.36.87.144/?p=247288
독일 대표 아니카 슐로이를 태운 채 고집을 부리는 세인트 보이. / 출처: 도쿄=로이터 뉴스1

‘세인트 보이’가 결국 큰일을 해내려나 봅니다.

세인트 보이는 2020 도쿄(東京) 올림픽 근대5종 대회장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은 말(馬)입니다. 독일 대표 아니카 슐로이(31)는 ‘펜싱 + 수영’ 중간 순위에서 올림픽 기록을 세우면서 메달 전망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세인트 보이가 경기 참가를 거부하면서 결국 최하위(31위)로 대회를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2020 도쿄 올림픽 근대5종 승마 경기에 참가 중인 한국 대표 전웅태. / 출처: 도쿄=로이터 뉴스1

근대5종은 △펜싱(에페) △수영(200m 자유형) △승마(장애물) △사격 △크로스컨트리 달리기를 한 데 묶어서 진행하는 종목입니다. (2009년부터는 사격과 크로스컨트리를 따로 치르지 않고 ‘레이저 런’이라는 종목으로 통합해 진행합니다.)

문제는 올림픽 승마와 달리 자기 말을 타고 승마 경기를 치를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근대5종 선수는 대신 경기 시작 20분 전에 자신이 타게 될 말과 첫인사를 나누게 됩니다.

2020 도쿄(東京) 올림픽 웹사이트 캡처.

모든 말이 말을 잘 들으면 좋겠지만 세인트 보이처럼 말을 듣지 않는 말이 나오면 말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국제근대5종연맹(UIPM)은 도쿄 올림픽이 끝난 뒤 “승마 종목 전반을 재검토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당초에는 말이 스트레스를 적게 받도록 장애물 높이를 낮추고 점프 횟수도 줄일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습니다. 그런데 세인트 보이를 보고 UIPM이 느낀 위기감은 더 컸던 모양입니다.

독일 대표 아니카 슐로이를 태운 채 위용을 자랑하는 세인트 보이. / 출처: 도쿄=로이터 뉴스1

올림픽 전문 매체 인사이드더게임즈는 UIPM 이사회가 근대5종에서 승마를 아예 빼기로 결정했다고 2일(이하 현지 시간) 보도했습니다. 그렇다고 승마를 빼는 대신 근대4종으로 바뀌는 건 아닙니다. 인사이드더게임즈는 UIPM에서 4일 승마 대체 종목을 발표할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그러면서 (제목에서 보신 것처럼) 사이클이 승마를 대신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정말 이렇게 된다면 2028 로스앤젤레스(LA) 올림픽 때부터는 말이 아니라 자전거를 타고 근대5종 경기를 치르게 됩니다. 사실 근대5종은 올림픽에서 살아남지 못하면 존재해야 할 이유가 별로 없는 종목입니다. 그러니 올림픽에서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사이클이 아니라 로봇이라도 타야 할 판입니다.

2020 도쿄 올림픽 여자 도로 사이클 금메달리스트 안나 키젠호퍼. / 출처: 도쿄=ANP 스포트

이미 2024년 파리 대회 때부터는 TV 중계를 많이 탈 수 있도록 5개 종목을 90분 안에 모두 소화하기로 결정하기도 했습니다. 과연 7년 뒤 근대5종 선수는 무엇을 타고 경기를 치르게 될까요?

원문: kini’s Sportuge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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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양궁 선수들은 활시위를 얼굴에 댈까? https://ppss.kr/archives/244845 Wed, 18 Aug 2021 05:31:25 +0000 http://3.36.87.144/?p=244845

올림픽 같은 국제 경기가 펼쳐지는 시즌이 되면 평소에는 있는지도 몰랐던 애국심이 총출동한다. 시상식 맨 위에 올라 금메달을 목에 건 선수들의 감격에 찬 얼굴 안에서 피땀 어린 훈련과 연습의 시간이 슬쩍 비친다. 물론 수상대 위에 올라간 선수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감히 가늠할 수조차 없을 노력이 모여 결실을 볼 그 찰나를 위해 선수들은 자신의 호흡대로 경기에 임한다.

여러 종목 가운데 특히 양궁 경기를 볼 땐 세탁기 안에 들어앉은 빨래가 된 기분이다. 경기가 진행되는 내내 영혼과 육체가 동시에 조여졌다 풀어지기를 반복한다. 그저 눈으로 보기만 하는데도 몸 안의 수분이 다 빠져나간다. 나라면 팔다리가 떨려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그 긴장되는 순간, 선수들은 심장을 한국에라도 놓고 온 듯 대담하게 화살을 쏜다. 숨이 멎을 듯한 긴장감을 꽉 채우고 두 손을 꼭 쥐고 응원하게 된다.

활시위를 당기는 선수들의 표정에는 이렇다 할 변화가 없다. 상대 팀 선수가 몇 점을 기록했는지, 자신이 직전에 쏜 화살이 어디에 박혔는지 중요하지 않다. 그저 당장 쏴야 할 화살에만 집중한다. 줄을 힘껏 당겨 손을 턱 부근에 고정한다. 이때 활시위가 입술과 코를 누른다. ‘저렇게 누르면 아프지 않을까? 선크림 다 지워지겠는데? 계속 저 자리에 활이 닿으면 굳은살 생기는 거 아니야?’ 같은 양알못다운 하찮은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런데 이 행동에는 과학적인 이유가 있었다. 선수들이 화살의 정확성을 높이는 방법이었다. 화살을 조준할 때 선수들은 항상 같은 위치에 활시위를 고정하는 연습을 한다. 1㎜만 바뀌어도 화살이 날아가는 방향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코와 입술은 감각이 예민하고, 얼굴 중심에 위치해 화살을 정확하게 조준할 수 있다. 감각이 기억하는 ‘명중’의 순간을 그대로 재생하는 거다.

머리로 기억하는 건 시간이 흐르거나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아 흐릿해지거나 오염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몸이 기억하는 습관은 무의식이 만드는 행동이다. 양궁 선수들이 시위를 당겨 연습할 때 줄이 늘 닿던 자리에 놓는 모습을 지켜보며 궁금해졌다.

내 몸의 감각이 기억하는 습관은 뭘까?

양궁 선수들이 코와 입에 새겨진 승리의 감각이 있다면, 내게는 상대방이 가진 마음의 온도를 느끼는 감각이 있다. 줄이 코와 입에 닿았을 때의 감각을 통해 명중의 확률을 높이는 것처럼, 마음의 온도가 닿았을 때의 감각을 통해 상대방의 마음을 느낀다. 남들은 별 의미 없이 지나치는 미세한 차이가 오감으로 느껴진다.

그중에서도 부정적인 감정이 더 잘 느껴지는 편이다. 말 한마디에 싸늘해지는 표정이 눈에 보인다. 얼음송곳처럼 마음 깊은 곳을 찌르는 말투가 아프게 귀에 박힌다. 관심을 회피하는 냉정한 몸의 각도가 인식된다. 호의를 외면하는 차가운 시선까지 고스란히 느껴진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 믿지 않고 감정의 온도가 몇 도쯤인지 마음의 온도계를 들이댄다. 한여름 태양보다 더 환하고 뜨겁게 웃어도 그 사람의 마음속에는 0℃의 얼음이 차곡차곡 쌓여 있을 때도 있고, 영하 78.5℃의 드라이아이스가 가득할 때도 있다. ‘아, 이 사람에게 나는 몇 도쯤으로 받아들여지는구나.’ 파악하고 딱 그만큼의 온도로만 대한다.

상대방의 온도가 몇 도인지도 모르고 무작정 뜨겁게 달려든 적도 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내 마음 같을 수 없다. 내가 100을 주면 상대방에게 100은 아니어도 80은 기대하게 마련. 하지만 현실은 그 공식이 성립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 모든 걸 다 쏟아부어 놓고 돌아오는 게 없어 허탈한 적도 많았다. 그건 내 선택이고, 후회하지 않을 만큼 줬다고 자신을 다독여 보지만 본전 생각을 피할 수 없는 건 인간의 본능이다. 초탈의 경지에 오른 부처님이 아닌 욕심 많고 나약한 인간이기에 계산기를 두드리게 된다.

마음속에서는 수년째 ‘덜 주고, 덜 받기 운동’이 진행 중이다. 기대하지도 말고, 실망하지도 말자. 바라지도 말고, 후회하지도 말자. 원하지도 말고, 아쉬워하지도 말자. 받은 만큼 돌려주자. 표현하는 만큼 표현해 주자. 건네는 만큼 보답하자. 이거면 충분하다. 더 많이 주려고도, 더 열심히 하려고도, 더 마음에 들려고도, 더 애쓰려고도 하지 말자. 그냥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몸의 감각이 기억하는 그대로 모자람 없는 딱 그만큼만.

원문: 호사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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