ㅍㅍㅅㅅ https://ppss.kr 필자와 독자의 경계가 없는 이슈 큐레이팅 매거진 Fri, 11 Apr 2025 03:59:09 +0000 ko-KR hourly 1 https://wordpress.org/?v=5.8.10 https://ppss.kr/wp-content/uploads/2015/07/ppss-100x100.png ㅍㅍㅅㅅ https://ppss.kr 32 32 악플이 걱정되더라도, 자기 이야기를 글로 써야 하는 이유 https://ppss.kr/archives/267116 Fri, 11 Apr 2025 03:59:09 +0000 http://3.36.87.144/?p=267116 글쓰기에 대한 하나의 정의가 있다면,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뚫고 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나를 싫어하거나 멸시하고, 왜곡하거나 험담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나아가 그로 인해 큰 상처를 받고 움츠러들거나 삶을 포기하기까지 하는 등 삶에 커다란 영향을 받기도 한다.

자기의 글을 쓰겠다는 결심은, 그렇게 나를 부정하는 타자들을 배제하면서, 나의 길을 뚫고 나가겠다는 것과 상응한다. 내가 믿고 싶은 삶, 내가 나 자신이고 싶은 방식, 내가 나를 받아들이고 싶은 정의로 나를 규정하면서 나아가는 것이 곧 글쓰기로 실현되기도 한다. 그럴 때 누군가는 내가 나를 정의하는 방식, 내가 내 삶을 좋아하고자 하는 방식을 싫어하고 비난하겠지만 글 쓰는 사람은 그것을 뚫고 나가야 한다.

출처: freepik

그렇기에 때로 글쓰기는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많은 사람들이 글쓰기 강의에서 내게 ‘글 쓰는 용기’에 대해 고민하며 묻곤 한다.

나에 대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할 자신이 없어요.

누군가 비난할까 봐 두려워요.

내 생각이 틀리면 어쩌죠?

이런 질문은 거의 매번 듣는다. 그러면 그냥 용기를 갖고 나아가는 것밖에 다른 방법은 없는 것 같다고 대답한다. 다만 다행스러운 일이 하나 있다면, 글 쓰는 사람은 선의의 동료 역시 얻을 여지가 있다는 점이다.

세상의 절반 이상은 나의 생각이나 삶에 동의할 수 없다. 모두 경험한 게 다르고, 삶에 대한 믿음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세상에 10분의 1이나 100분의 1 정도는 나와 공감할 수 있는 사람도 있을 거라 믿고 있다. 글 쓰는 사람이 자기 진실에 대해 써나갈 때, 그전에는 만날 가능성이 없었던 10분의 1이나 100분의 1을 만날 ‘가능성’이 생긴다. 글 쓰는 사람은 그들과 한 명 한 명 만나가면서, 선의의 울타리를 만들고, 그 울타리를 넓혀가면서 글을 쓴다.

출처: freepik

아마도 거의 필연적으로, 글 쓰는 사람은 선의보다 악의를 더 많이 만나고, 악의보다는 무관심을 더 자주 만날 것이다. 아무리 천사처럼 헌신적으로 봉사하며 산 성인에게도 그를 증오하며 암살하려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하물며 각자도생 사회 속에서 간신히 자기 삶 하나 건사하며 살기 바쁜 현대의 개인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좋게 봐줄 사람보다는 ‘누칼협’이나 ‘알빠노’ 같은 걸 내세우면서 적극적으로 욕할 사람이 더 많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자기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은 계속 자기 글을 쓰며 자기 길을 뚫고 간다.

이런 시대에 가지면 좋은 태도가 하나 있다면, 참견하기 좋아하는 온갖 사람들의 험담에 상처받기보다는 그저 나의 삶을 살면서 함께 살아갈 사람들을 찾고, 그들과 공감하고 사랑하는 데 몰두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있는 온갖 악의적인 시선과 말들이 우리를 엄청나게 해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우리를 해칠 수 없는 선의의 울타리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것도 좋을 듯하다. 글 쓰는 사람은 그런 믿음으로, 오늘도, 내일도 글을 쓸 수 있다.

원문: 문화평론가 겸 변호사 정지우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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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권이 없었다면 아이비리그도 없었다, 복권의 역사 https://ppss.kr/archives/266652 Wed, 09 Apr 2025 04:15:10 +0000 http://3.36.87.144/?p=266652

복권

번호나 그림 따위의 특정 표시를 기입한 표(票). 추첨 따위를 통하여 일치하는 표에 대해서 상금이나 상품을 준다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1. 진시황이 싼 똥, 복권으로 치운다

오늘날 키노, 글자 대신 숫자로 바뀌어 로또처럼 되었다

복권과 비슷한 유물이 고대 이집트 유적에서 발견되기도 했지만, 기록상 가장 오래된 복권은 기원전 1세기경 중국의 한나라에서 등장합니다. 이 복권은 키노(Keno)라고 불렀는데요. 키노는 120개 글자 중에서 10개를 맞추면 되는 형식으로 오늘날의 로또와 비슷했어요. 오히려 45개 숫자 중에서 6개를 맞추는 로또보다 훨씬 낮은 당첨 확률을 가지고 있었죠.

키노가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한나라의 탄생과 관련이 있습니다. 한나라는 진나라가 멸망하고 세워졌는데요. 새로운 나라를 세움으로서 체제와 영토를 정비해야 했고, 진나라 때 벌여놓은 만리장성 공사 등을 마무리 지어야 했기 때문에 많은 돈이 필요했죠. 하지만 전쟁 직후의 국가 재정으로는 무리였어요. 그래서 재정을 확보할 방법을 찾다가 고안해 낸 것이 복권이었죠. 이 키노는 한나라가 멸망하면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러다가 키노는 19세기 미국 대륙 횡단 철도 건설을 하던 중국 이민자들에 의해 부활했어요. 키노의 120개 한자는 80개의 숫자로 대체되었죠. 지금도 미국 카지노에서 차이니즈 로터리(Chinese Lottery)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어요.

 

2. 클래스가 다른 로마의 복권 경품

유럽에서는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5대 황제 네로가 복권을 발행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첫 황제로서 수도를 건설하기 위해서, 네로는 대화재로 불탄 로마를 재건하기 위해서 발행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요. 당시 아우구스투스의 복권은 음식 계산서 영수증을 추첨해 선물을 나눠주는 형태였고, 네로는 귀족과 부유층을 상대로 노예, 배 등의 경품을 걸었죠.

 

3. 복권으로 세운 아이비리그

베니스의 복권 추첨 ⓒHistory.com

16세기 초 제노바 공화국에서는 90명의 후보자 중에서 5명의 의원을 뽑았는데요. 이 방식을 차용해 90개의 숫자 중에서 5개 숫자를 추첨하는 복권이 만들어졌어요. 이것이 로또(Lotto)의 시초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렌체에서도 도시 정비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복권이 등장했는데요. 이 복권은 당첨자에게 현금을 주어서 현대식 복권의 시작으로 보기도 합니다.

16세기 후반부터는 유럽 각국에서 복권 제도가 국가사업에 이용되었는데요. 독일에서는 쾰른 대성당을 재건하기 위해 사용되었고, 현재도 유지비의 상당 부분을 복권 수익에서 충당하고 있죠. 영국에서는 미국 식민지 개발에 사용되었는데요. 하버드, 예일, 콜롬비아, 프린스턴 등의 아이비리그 대학들이 복권 수익금으로 세워졌죠. 미국의 경우 프렌치 인디언 전쟁과 독립 전쟁에서 복권을 이용해 군수 자금을 마련했어요.

 

4. 막아봐야 다시 활성화되는 복권

1800년대 중반부터 미국 내에서 복권에 관한 열기가 너무 뜨거워지자 1900년대 초부터 미국 내에서는 복권 발행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어요. 하지만 복권을 금지하자 불법 내기와 도박 등이 성행해 결국 뉴햄프셔 주는 1964년 합법적인 복권 발행을 승인하죠.

영국에서도 복권 제도가 도박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1826년 일시적으로 복권 발행이 중단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복권의 이익을 공공사업에 사용하면서 복권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생기자, 1990년대에 국가 복권 제도를 다시 도입하죠.

 

5. 복권으로 산 올림픽행 티켓

조선견문도해 ‘복권 추첨’ / 부산근대역사관

우리나라 복권의 시초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계’로 추정합니다. 계원들의 이름이나 숫자를 적은 알을 통 속에 넣고 돌리다 밖으로 빠져나온 알로 당첨자를 정하는 산통계가 대표적이죠. 그 외에도 일정 번호를 붙인 표를 100명, 1000명, 1만 명 단위로 판매한 뒤, 추첨해 매출액의 80%를 복채로 주는 작백계도 인기가 있었습니다.

근대적 복권은 1945년에 등장합니다. 일본 정부는 군수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승찰이라는 복권을 발행했죠. 승찰은 10원짜리 복권으로 당첨금은 10만 원이었습니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되면서 사라지게 됩니다.

(좌)런던 올림픽 복권 ⓒ문화재청 / (중)제 1회 후생 복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 (우)제 1회 애국복권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우리나라에서 발행된 최초의 복권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인 1947년에 등장합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1948년에 열린 런던 올림픽 대회의 참가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복권을 발행한 것입니다. 액면 금액 100원, 1등 상금 100만 원이었던 이 복권은 140만 장이 발행되었고, 당첨자는 모두 21명이었죠. 이 복권으로 마련된 경비로 축구, 농구, 육상, 역도, 복싱, 레슬링, 사이클 7개 종목 선수 50명과 임원 17명으로 구성된 선수단이 런던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1948년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해이기도 하지만 그해 7월에는 이례적인 수해 피해가 있던 해이기도 합니다. 수천 명의 사상자와 수십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죠. 이재민 구호 기금 마련을 위해 1949년 10월부터 1950년 6월까지 세 차례 후생 복표가 발행되었고,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발행이 중단되었습니다.

6‧25 전쟁 뒤인 1956년에는 전쟁 복구에 들어가는 산업 자금과 사회 복지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매달 애국 복권을 발행했어요. 매달 1회씩 총 10회까지 운영된 이 복권은 100환짜리와 200환짜리로 발행되었습니다. 그 후 국가적인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복권이 등장합니다. 1962년 산업박람회복표, 1968년 무역박람회복표 등이 발행되었죠.

 

6. 준비하시고… 쏘세요!

1969년에 주택 복권이 발행되기 시작하면서 정기적으로 발행되는 복권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주택 복권은 무주택 군·경 유가족, 국가유공자, 파월 장병의 주택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발행되었죠.

처음에는 서울에서만 발행되었지만 2회부터는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인기가 늘어남에 따라 월 1회 추첨이 주 1회 추첨으로 바뀌었어요. 1등 당첨금도 1978년 천만 원, 1981년 3천만 원, 1983년 1억 원, 2004년 5억 원으로 점차 증가했습니다. 특히 1981년부터 TV를 통해 방송되면서 ‘준비하시고… 쏘세요!’라는 멘트와 다트 형식의 추첨 방식이 유명해졌죠.

하지만 찬란했던 영광은 2002년 12월에 등장한 로또로 인해 몰락합니다. 2002년에는 1,851억 원에 달하던 연간 판매액이 2005년에는 318억 원으로 급감하고, 마침내 2006년 복권위원회에서 인쇄 복권의 상품 수를 줄이기 위한 목적으로 폐지되었어요.

 

7. 앞으로 절대 없을 전설의 레전드 407억

로또 ⓒ서울신문

2002년 국내에 등장한 로또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보다 당첨금 이월 규정 때문이었는데요. 운이 좋게도(?) 초기에 연달아서 당첨금액이 이월되면서 19회차 로또의 1등 당첨금이 407억 2200만 원이 되었죠. 이 전설의 19회차 로또의 당첨자는 지방 경찰서 경사로 혼자 당첨금을 거머쥐었죠.

이후 높은 당첨금으로 사행성 논란이 일면서 이월 당첨금을 2번으로 제한하고, 구매액도 2천 원에서 천 원으로 낮춰 다시는 수백억에 달하는 당첨금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단적인 예로 최소 1등 당첨금인 2013년의 546회차는 4억 593만 원이었죠.

 

마치며

시작에서부터 복권은 국가사업을 위해서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도박처럼 취급되면서 금지되기도 했죠. 결국은 다시 풀리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세금을 거둬들이기 좋은 수단이기 때문이겠죠.

그러고 보면 술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유해성으로 인해 금지한 적이 있지만 결국 다시 활성화되었고, 세금을 거두는 데 이만한 게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우리 모두 국가를 위해서 술과 복권을 열심히 합시다??

원문: 사소한 것들의 역사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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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완벽주의자를 위한 심리학자의 변호 https://ppss.kr/archives/269006 Tue, 01 Apr 2025 03:27:22 +0000 https://ppss.kr/?p=269006 1. 게으르다고 스스로를 비난하지 말아야 할 이유

나는 게으른 완벽주의자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정리해 보자면….

1) 게으르면 안 되는가?

모든 유기체는 최소한의 에너지를 쓰며 살아가고자 하는 본능이 있다. 할 일이 없거나, 지금 당장 하지 않아도 될 때 일을 하지 않고 쉬는 것은 본능이다. 게으름을 악덕으로 보는 문화 자체에 반대한다.

2) 게으르다는 것은 무엇인가?

게으르다는 형용사는 심리학적으로 어떤 추가적인 설명도 가지지 않는다. 가치 판단적인 형용사에 가깝다. 그래서 완벽주의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기보다는 반대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형용사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3) ‘게으른 완벽주의’라는 표현에 어떤 이득이 있는가?

완벽주의 성향과 지연 행동이 상관 관계를 갖는 것은 맞다. 그러나 ‘게으른’이라는 표현을 붙이는 순간 부정적인 판단이 들어가게 된다. 누군가 스스로를 ‘게으른 완벽주의’라고 할 때 자기 비난 말고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모르겠다.

사람의 행동에는 대부분 이유가 있다. 미루는 행동도 마찬가지다. 이유를 이해하지 않고, 비난만 하는 것은 행동 변화에 결코 좋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만약 스스로를 게으른 완벽주의자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자신을 비난하기보다, 일을 미루는 패턴과 그 패턴 아래 있는 생각과 감정을 관찰해 보자. 자신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이 변화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

 

2. 그래도 시작을 자꾸 미룬다면, 질문을 바꿔보자!

완벽주의자들이 특히 시작을 미루게 되는 일들이 있다.

  1. ​제대로 해야 하는 일
  2. (단기 마감이 없는) 장기 프로젝트
  3. 끝 혹은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일

​일상적인 예시로는 청소가 있다.

  • 서랍 안부터 제대로 정리해야 할 거 같음
  • 집을 청소하고 관리하는 건 단기 마감이 없음
  • 끝이 없는 일이고, 기준도 나의 기준임

​이외에도 이런 일들을 많이 미루게 된다.

  • 대학원생들의 졸업논문
  • 디자인, 창작, 창업 등 답이 정해지지 않은 일

​”제대로 해야 할 것 같아”서 시작이 부담된다면 질문을 바꿔보자.

​어떻게 쉽게 할까?

어떻게 하면 빨리 끝낼까?

​목표 지점의 50% 정도는 쉽고, 빠르게 하는 데 집중하는 걸 추천한다. 일단 50%가 완료되었다고 느끼면 성취감도 들고, 이후 작업에 대한 부담감도 낮아진다. 제대로, 잘하는 건 그 이후에 작업해도 충분하다.

​웃기지만 나는 박사논문 쓸 때 매일매일 나한테 기특하다고 말해주려고 했다. 어른이 이런 걸 칭찬받는 게 일견 우습게 보인다고 느껴져도 잘했다고, 대견하다고 나에게 말해줬다. ​그런데 진짜로 기특하지 않은가? 더 미룰 수도 있었는데, 미루지 않고 시작한 나 자신이?

​못한다고 구박하지 말고 작더라도 잘한 점들을 찾아서 인정해 주자. ​결국 우리를 움직이는 건 두려움보다는 용기와 응원이니까!

3. 자기 비난으로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을 미루고 있거나 도전을 망설이고 있을 때, 자기 비난이 효과적이었던 적이 있는가? 나는 아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스스로 동기부여를 하기 위해 자기 비난을 사용할 때가 많지만, 자기 비난은 동기부여에 딱히… 효과가 없다. 만약 비난 받는 것이 수행 향상에 도움이 되었다면, 야구 경기장에는 치어리더가 아니라 야구 몽둥이를 든 사람들이 있었어야 맞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러는 것일까? 알고 보면 우리 손에 쥐어진 것이 야구 몽둥이밖에 없기 때문에, 그게 우리가 아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계속 사용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내 삶이 망하길 바라면서 자기 비난을 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스스로를 비난하는 내 안의 목소리도 결국 내가 잘 살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내가 잘 사는 방법을 고민해 보면 어떨까? 소파에 누워서 일을 외면하고 있는 내가 책상 앞까지 걸어가서 앉으려면 무엇이 필요할지 고민하는 사람이 함께 있어 준다면 어떨까?

​내가 원하는 행동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목소리를 경청해 보자. 그 목소리를 이해하고 지지해 주자. 결국 내가 잘 사는 방법을 제일 잘 아는 건, 그리고 그걸 누구보다도 원하는 건 바로 나 자신일 테니까!

원문: 서늘한여름밤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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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포모증후군과 성인ADHD의 유병률이 급증한 원인은 뭘까? https://ppss.kr/archives/265721 Sun, 23 Mar 2025 14:00:22 +0000 http://3.36.87.144/?p=265721 1.

포모(FOMO)증후군이란 말은 2004년부터 사용되었지만,  스마트폰과 유튜브, SNS가 만연한 2010년도부터 널리 퍼졌습니다. 포모증후군은 원래는 사회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였습니다. 나 혼자 뒤처질까 두려워하는 현상이나, 대인관계에서 홀로 도태되어 혼자가 되는 것에 대해 가지는 강박적 불안입니다. 하지만 부동산 폭등, 2차 전지 관련주 폭등, 비트코인, 벼락거지 등의 출현으로 인해 한국에서는 경제적인 의미가 과도하게 부각된 단어죠.

포모증후군의 가장 무서운 점은 무엇일까요? 내면의 성장이나 성숙에 시간과 자원을 투자하는 대신, 타인이 이룬 강남 아파트나 포르쉐, 롤렉스 같은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성과에만 가치를 두고 과몰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진득하게 집중하지 못하게 됩니다. 관심을 가져야 할 정보와 주제가 너무 많다 보니, 타인의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할 시간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죠.

책을 한 권 읽을 시간도 에너지도 없는 탓에, 그 책을 10분으로 요약한 유튜브 시청으로 독서를 대신하게 됩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유튜브 콘텐츠를 30초로 요약한 숏폼이나 릴스에 탐닉하게 되죠.

Image by freepik

 

2.

최근 한국에서 성인ADHD 유병률이 급증한 것은 포모증후군이 만연하기 시작한 시기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손흥민, 오타니 같은 스포츠 재벌이나 비트코인으로 벼락부자가 된 타인의 성공을 볼 때 우리 중뇌변연계의 보상회로와 도파민이 자극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쾌감과 불안을 동시에 경험하게 됩니다. 성공에의 강렬한 갈망과 질투심을 느끼고, 왜 나는 저런 걸 이루지 못했는지 후회하고 열등감을 느끼며 초조해하죠.

이대로 있으면 나는 망해! 뭐라도 해야 해!

강박적인 충동과 불안은 자신으로 하여금 사전에 계획되지 않은 행동을 하게 만듭니다. 이 과정에서 실수가 반복되면서 자책과 우울에 빠지게 됩니다. 이로 인해 집중력과 인지 능력, 의사 결정능력이 떨어지는 악순환이 벌어집니다. 이게 바로 성인 ADHD의 원리입니다.

Image by atlascompany on Freepik

 

3.

어떻게 해야 극복할 수 있을까요? 간단한 팁을 드릴까 합니다.

  1. 멀티 태스킹이 아닌 싱글 태스킹을 할 것.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온전히 집중하기)
  2. 새로운 일이나 아이디어를 찾기보다는, 현재 일과 문제를 먼저 정리할 것.
  3. 타인의 일상·가십·인터넷 기사를 최소 1주일 이상 끊고 자신의 일상에만 몰두할 것
  4. 자기 과시, 허세를 부리는 사람을 멀리할 것.
  5. 실현 가능한, 구체적이고 단기적인 목표를 세우고 조금씩 실행해 나갈 것.

원문: 박종석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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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소가 건물주들의 최애 브랜드가 된 이유 https://ppss.kr/archives/267848 Wed, 05 Mar 2025 00:44:15 +0000 http://3.36.87.144/?p=267848 이제 스세권보다 다세권

한때 ‘맥세권’, ‘스세권’이라는 단어가 유행했습니다. 역세권에서 파생된 표현으로, 맥도널드나 스타벅스를 도보로 이용할 수 있는 입지를 뜻하는데요. 이 두 브랜드는 아무 상권에나 입점하지 않기 때문에, 매장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해당 지역이 좋은 부동산으로 평가받곤 했습니다.

특히 스타벅스는 ‘건물주의 꿈’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스타벅스가 입점하면 건물 가치와 토지 가격이 상승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건물주들은 어떻게든 스타벅스를 입점시키고 싶어 했고, ‘건물주 위에 별다방’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국내 스타벅스 매장이 2,000개를 넘어설 만큼 포화 상태에 이르면서, 이제는 과거만큼 선호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대신 새롭게 주목받는 브랜드가 있습니다. 바로 다이소입니다. 다이소는 경기 영향을 비교적 덜 받기 때문에 폐업 위험이 낮고, 고객을 끌어들이는 힘도 강력합니다. 게다가 임대료 방식에서도 스타벅스와 차이가 있는데요. 스타벅스는 월 매출의 10~12%를 임대료로 내는 반면, 다이소는 고정 월세를 선호합니다. 요즘처럼 내수가 위축된 시기에는 건물주 입장에서도 안정적인 임대 수익이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겠죠.

특히 복합 쇼핑몰과 대형마트 같은 대형 리테일 시설들이 다이소 입점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모습입니다. 다이소가 집객력과 매출 면에서 꾸준한 성과를 내고 있기 때문인데요. 최근에는 백화점뿐만 아니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프리미엄 아웃렛에도 다이소 매장이 입점하는 사례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서로에게 득이 됩니다

하지만 아무나 다이소를 유치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이소의 입점 조건이 상당히 까다롭기 때문인데요. 우선 300평 이상의 단층 매장을 선호하며, 단층이 아닐 경우 복층 구조도 가능하지만 대신 전용 엘리베이터 설치가 필수라고 합니다. 여기에 주차장 지원이 가능한 건물을 우선적으로 고려한다고 하죠.

다이소가 이렇게 입지를 철저하게 따지는 이유는 5,000원 이하 균일가라는 브랜드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싸게, 많이 팔아야 성장할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더 다양한 상품 카테고리로의 확장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대형화 전략이 필수적이죠. 그래서 넓은 매장, 그리고 한번 오면 여러 상품을 두루 둘러보기 편한 단층을 요구하는 겁니다.

또한, 한 번 방문한 고객이 더 많은 물건을 구매하도록 유도해야 하기에, 주차가 가능한 매장은 매출이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다이소는 넓은 공간뿐만 아니라, 주차 인프라가 갖춰진 입지를 더욱 선호하는 거죠. 실제로 주차장 유무에 따라 매장 매출이 많이 차이 난다고 하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다이소 입장에서도 대형 리테일 시설은 매력적인 입점 대상이 됩니다. 넉넉한 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주차장 같은 필수 인프라도 기본적으로 갖춰져 있기 때문이죠. 이러한 이유로 다이소는 매년 타 유통시설 내 입점 매장의 수와 비중을 꾸준히 늘려가고 있습니다.

다이소는 전략적으로 매장의 대형화를 추진 중이며, 이로 인해 테넌트 매장 수와 비중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반대로 리테일 기업과 건물주 입장에서도 다이소는 매우 소중한 브랜드입니다. 요즘처럼 어려운 시기에는 넓은 공간을 안정적으로 채울 수 있는 브랜드 확보 자체가 중요한데요. 다이소는 이를 충족하는 대표적인 곳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다이소는 특유의 강한 집객력을 바탕으로 건물 전체, 매장 전체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특히 대형마트의 경우, 다이소 입점을 통해 약점으로 지적받는 생활용품 경쟁력을 보완할 수 있는 최적의 파트너가 될 수 있죠.

이처럼 건물주와 다이소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다이소 매장은 더 빠른 속도로 대형화 및 확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변해 갈 겁니다

이와 같은 건물주와 다이소의 동행이 지속되려면, 다이소의 저비용 구조가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상품 가격 경쟁력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인데요. 다이소는 상품당 마진을 최소화하는 대신, 판매량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운영됩니다. 따라서 고정비를 줄이는 것이 핵심 과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고정 임대료는 건드릴 수 없기 때문에, 매년 매장 운영 비용을 절감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죠.

대표적인 예가 줄어드는 매장 직원 수입니다. 매장은 커지고 있지만, 필요 인력은 줄여 수익성을 맞추는 방향으로 운영되고 있는데요. 이를 위해 다이소는 2020년을 기점으로 셀프 계산대를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대부분의 매장에서 셀프 계산대를 쉽게 찾아볼 수 있죠.

뿐만 아니라 물건을 찾는 것도 인력 대신 ‘매장 상품 찾기’ 기능으로 대체하려 하고 있기도 합니다. 아예 최근에는 고객이 반경 5km 이내의 다이소 매장을 찾고, 해당 매장의 영업시간뿐만 아니라 재고 현황까지 확인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사실 셀프 계산대, 무인 자동화 매장 등 혁신 기술은 그동안 여러 유통업체에서 테스트됐지만, 본격적인 확산은 더딘 상황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완전 무인 편의점은 이미 2021년에 등장했지만, 매장 운영 비용 절감 효과보다 초기 구축 비용이 더 컸기 때문에 빠르게 확산되지 못하고 있죠.

하지만 다이소는 이러한 흐름을 주도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대형 매장 비중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만큼, 기술의 경제성을 가장 빠르게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인데요. 앞으로 다이소의 이러한 운영 효율화 전략이 가시적인 성과를 내게 된다면, 당분간 ‘다세권’ 시대는 지속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원문: 기묘한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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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삶을 정말로 좋아하고 있는가?” https://ppss.kr/archives/258778 Fri, 28 Feb 2025 02:24:24 +0000 http://3.36.87.144/?p=258778 1.

살아가다 보면 ‘내가 내 삶을 정말 좋아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할 때가 있다. 좋아한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다. 삶을 좋아한다, 라는 말은 자주 쓰는 말이 아니고 어딘지 어색하게도 느껴지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 핵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중요한 진실은 언제나 드물게 마주하게 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말이다.

내가 내 삶을 좋아하는가, 라는 질문 앞에서 다른 질문들은 오히려 부차적인 것이 된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얼마나 가졌는가, 내가 남들보다 얼마나 잘살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얼마나 이루었는가,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라는 건 모두 핵심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어떤 질문이 핵심에 가까울까?

내가 원하는 게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인가?

내가 남들보다 잘산다고 표현할 때의 기준은, 내가 진짜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준인가?

내가 무엇을 이루었는지 헤아릴 때 그것들은 내가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일까?

내가 행복을 가늠할 때 그 행복은 진짜 내가 원하는 행복인가?

이 질문들이 핵심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이 질문들을 하나로 모으면, ‘나는 내 삶을 정말 좋아하고 있는가.’가 되지 않을까 싶다.

사진: UnsplashKelly Sikkema

 

2.

살다 보면,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아닌데도 어느덧 원하고 있는 경우가 참 많다. 남들이 중요하다고 하니 나도 좇고 있고, 남들로부터 느끼는 박탈감이나 소외감이 무서워서 남들을 따라 살고 있다. 내가 원한 삶은 이게 아니었는데도, 그저 남들이 원하는 직장, 동네, 상품 같은 것들을 나도 좇아 살고 있다. 그럴 때 나는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다.

그런 것들을 좇느라 정신없이 견뎌내고 있는 이 나의 삶을 정말 좋아하는가?

내가 이 삶을 좋아한다면, 내가 사랑하는 것들 때문이다. 여유로운 주말 아침에 나서는 가족과의 산책, 회사 점심시간에 동료들과 나누는 수다, 늦은 밤 홀로 책 읽는 시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 삶에 바로 그런 요소들이 있기 때문에, 나는 이 삶을 좋아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 삶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내가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좇는 것들, 강박을 느끼는 것들, 집착하는 것들 때문이다. 특히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무의식적으로 강요받는 것들 때문이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 저렇게 살아야 한다,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라는 것들이 어느덧 내 안에 들어와 나를 조종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 부분들이 너무 커져서 삶을 뒤덮어버릴 정도가 된다면 “나는 내 삶을 좋아하지 않아”라고 말할 용기가 필요하다.

 

3.

하나의 삶을 부여받은 한 명의 인간에게 의무가 있다면, 자기 삶을 좋아할 의무일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내 삶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내 삶을 좋아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느낀다.

삶이 너무 메말라 있다고 느낀다면, 당장 오늘부터 서점에 달려가 좋아할 수 있는 책 한 권을 고른다. 음악이 부족하지 않나 싶으면, 음악을 챙겨 듣는다. 데이트가 부족한 것 같으면, 양손에 아내와 아이의 손을 하나씩 잡고 달려 나간다.

그리고 내 삶을 싫어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소가 있다면, 그 요소에 대한 ‘제거’를 다짐한다. 때로 그 요소는 어떤 사람일 수도 있고, 다른 문제일 수도 있다. 내게는 내 삶을 좋아할 의무가 있으므로, 내 삶을 싫어하게 만드는 요소들을 제거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삶을 개척할 용기를 지닌다는 건 그런 의무로부터 비롯되기도 할 것이다.

사진: UnsplashJessica Rockowitz

나는 아내와 아이랑 함께 바다 앞에 고요히 앉아 있을 때, 삶을 좋아한다고 느낀다. 그러려면 내게 무엇이 없어야 하고 있어야 하는지를 확신한다. 확신이 삶의 추동력이다. 이 삶을 사랑하기 위한, 절실한 이유들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나에게는 꿈이 있다. 죽는 날까지 이 삶을 더 온전히 좋아하는 것이다.

원문: 문화평론가 겸 변호사 정지우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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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아웃 방지: 무기력을 존중하며, 슬금슬금 회복하자 https://ppss.kr/archives/268390 Thu, 20 Feb 2025 00:22:00 +0000 http://3.36.87.144/?p=268390

박사학위 논문 초고를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보내자마자 엄청난 무기력, 허탈감, 공허함이 밀려왔다. 솔직히 힘들 줄 알았지만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 한 학기 먼저 졸업하신 동기쌤이랑도 통화했는데 그 쌤도 졸업하고 3개월은 번아웃이셨다고 하셔서 지금 이 상태가 정상이구나 싶었다. 논문 심사도 아직 못 받았는데 심사받고, 수정하고, 제출까지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니 까마득하더라.

그래도 배운 게 심리코칭이고, 완벽주의와 무기력 회복으로 먹고사는 심리 코치인지라, 지금 내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빨리 파악할 수 있었다. 에너지를 많이 쓴 이후에는 지치는 게 당연하다. 이럴 때는 빠른 회복이 목적이 아니라, 천천히 연착륙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지금껏 달려온 나 자신의 수고스러움을 인정해 주자. 지칠 수밖에 없는 지금을 존중해주자. 쉬어야 한다고 내 몸과 마음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지 말자. 그다음 일은, 그다음에 생각해도 충분하다.

원문: 서늘한여름밤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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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연락 좀 자주 해라!” 오랜만에 연락 받았을 때 하면 안 되는 말 https://ppss.kr/archives/268420 Sun, 16 Feb 2025 15:04:45 +0000 http://3.36.87.144/?p=268420

야, 연락 좀 자주 해라.
연락 좀 하고 살자.
왜 이렇게 오랜만에 연락해!

어느 주말이었습니다. 간밤에 꿈속에 나타난 옛 친구가 있어서 궁금한 마음에 먼저 전화를 걸었습니다. 실로 오랜만의 연락입니다. 그런데 벨이 울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가 받자마자 “야, 연락 좀 자주 해라. 나 까먹은 거 아냐?”라고 투덜거렸습니다. 순간 기분이 묘했지요. 반가우면서도 지적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조금 씁쓸했달까요.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에휴, 본인도 나한테 연락 한번 안 했으면서… 내가 연락 안 한 거나, 네가 연락 안 한 거나 피장파장 아닌가?

그런데 문득 생각해 보니, 저 역시 누군가에게 “왜 이렇게 오래 연락이 없어? 연락 좀 하고 살자”라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단순히 반가운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고 여겼지만, 상대방 입장에서는 어떻게 들렸을지 생각해 본 적은 많지 않았지요. 그러자 “상대방도 분명 이런 감정을 느꼈을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친구가 던진 “야, 연락 좀 자주 해”라는 말은 어쩌면 아주 사소한 토라짐이나 친근한 투정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오랜만에 들은 이 한마디가 왜 거슬리는지 곰곰이 떠올려 보았습니다.

“야, 연락 좀 자주 해라!” / Image by freepik

연락은 쌍방향이고 서로 노력해야 한다는 점은 다들 알지만, 왜 마치 한 사람만 노력하지 않은 듯이 받아들여지는 걸까요. 심리학을 공부하며 접했던 의사소통과 감정에 대한 여러 관점을 떠올리면서, 자연스럽게 ‘연락’이라는 주제를 깊이 생각해 보고 싶어졌습니다.

 

‘연락’이라는 마음의 다리

연락은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연결고리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가족, 친구, 연인, 지인 등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과의 유대감을 이어가는 데 꼭 필요한 도구이기도 합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상호의존성(Interdependence)이란, 서로가 마음을 주고받으며 이뤄지는 자연스러운 유대감입니다. 궁금해서 먼저 연락을 하면 상대방도 내 안부를 묻고, 이렇게 주고받는 흐름 자체가 관계를 유지하는 원동력이 되죠. 한편, 상대방에게 건네는 작은 관심과 호의는 교류분석에서 말하는 ‘긍정적 자극(Strokes)’으로 작동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지내?”라는 짧은 메시지가 주는 온기는 생각보다 크거든요.

다만, 이 따뜻함이 책망 섞인 표현으로 바뀔 때는 오히려 불쾌감과 부담감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연락 좀 자주 해”라고 들었을 때 느끼는 압박감

반가움에서 비롯된 표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듣는 순간 왠지 모를 죄책감이나 방어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첫째, 의무감 vs. 자발성 문제입니다. 연락은 자발적으로 해야 서로가 편안합니다. 그런데 “연락 좀 자주 해”라는 말은 상대에게 ‘너는 연락할 의무가 있다’라고 전달하는 듯한 느낌을 줄 수 있습니다. 내가 보고 싶다는 마음을 솔직히 드러내기보다, 연락을 하지 않은 사람에게 약간의 책임을 묻는 듯 비칠 때도 있는 거죠.

둘째, “왜 이렇게 연락이 없었어?”라는 표현에는 은근히 “내가 서운하다” 혹은 “네가 잘못했다”라는 의미가 묻어납니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안부를 물어보는 게 아니라 책망을 듣는 기분이 들 수 있어, 마냥 반갑지는 않을 때가 있죠. 나도 나름대로 바빴던 사정이 있었을뿐더러, 어쨌든 상대방도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나에게 연락을 안 한 거잖아요. 모처럼 큰맘 먹고 연락을 딱 했는데, 연락이 왜 없었냐고 뭐라 한 소리 듣는다면, 아무리 의도가 좋았다 해도 오해를 사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Image by storyset on Freepik

물론 직장 상사나 웃어른으로부터 “자주 연락해”라는 말을 듣는 건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등한 관계인 친구나 동료 사이에서 이러한 말이 나올 경우, 괜히 불편한 지시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연락 좀 자주 해라, 내가 싫어진 거야?

하지만 정작 저 말을 한 사람 입장에서는 그걸 대개 모른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혹여 상대방이 언짢아하는 기색을 보이면 ‘난 반가워서 그런 건데 왜 저러지’ 생각하며 오해를 갖게 되는 거죠. “왜 속 좁게 그러냐?”라고 되려 역공을 가하기도 해서, 결과적으로 오랜만에 연락한 일이 도리어 관계를 해치는 원인이 되는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대신 건네면 좋은 말

심리학에서 말하는 ‘심리적 안전감(Psychological Safety)’은 누구든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해도 비난받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안전감은 사실 사소한 표현 하나로도 흔들릴 수 있습니다. 위에서 계속 말씀드린, 표면적인 비난(“왜 연락을 안 하니?”)도 그 예시겠고요.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게 더 이롭습니다.

1. “바쁠 텐데 이렇게 연락해 줘서 고마워.”

이러면 상대방이 늦게라도 전화를 줬다는 사실 자체에 감사함을 전할 수 있습니다. 다음 연락도 훨씬 부드러워지죠.

2. “다음에는 내가 먼저 연락할게.”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노력해야 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돕고 이해하는 동등한 관계라는 느낌이 전해질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훨씬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겠죠.

3.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어.”

진심으로 너의 근황을 궁금해하고 있었다는 표현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상대방이 연락이 늦었던 이유를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고, 친밀함도 쌓을 수 있습니다.

왜 이 말들이 더 효과적일까요? 저는 이런 말들이 ‘연락의 쌍방향성’, ‘호혜적 성질’을 암시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적 연락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상대방이 부모님이나 중요한 집안의 어른이 아닌 다음에야 연락이 의무는 아닙니다. 서로 안부를 주고받으며 유대를 다지는, 그러나 어느 한쪽이 부담스럽다면 강요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죠.

그래서 “연락 좀 해”라는 말은 상대방에게만 책임을 전가하는 느낌이지만, “다음에는 제가 먼저 연락할게요”는 서로가 같이 노력하자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습니다. 대등한 관계에서는 이런 방식이 훨씬 자연스럽고 건강하게 느껴집니다.

“바쁠 텐데 이렇게 연락 줘서 고마워.”라고 말하면 훨씬 더 기분이 좋아질 겁니다. / Image by freepik

 

마치며

우리가 매일같이 쓰는 말 중 상당수가 의도치 않게 상대방의 마음을 건드리기도 합니다. “연락 좀 자주 해라” 역시 그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나름대로는 친근감의 표현입니다. 하지만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때, 상대방에게 미묘한 압박감이나 서운함을 줄 수 있다는 점을 떠올리면 좋겠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정말로 전하고 싶은 마음은 무엇일까?”라고 스스로에게 묻는 일입니다. 상대방을 책망하고 싶은 마음인가요, 아니면 진심에서 우러나온 반가움인가요?

그 차이를 분명히 알고, 더 다정한 방식으로 꺼내 보시면 어떨까 합니다. 그러면 ‘연락’이라는 두 글자가 더 이상 부담이 아니라 반가움과 편안함의 매개체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원문: 허용회의 사이콜로피아


작가의 말

심리학적 글쓰기, 직장심리, 자존감, 목표관리, 마음건강, 메타인지, 외로움 극복, 공간활용의 심리학 등 다양한 주제로 강연 가능합니다. 출강 제안도 환영합니다. 허작가의 사이콜로피아 홈페이지에서 제 소개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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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떤 이상을 향해 달리고 있나요?” https://ppss.kr/archives/267112 Tue, 11 Feb 2025 05:14:54 +0000 http://3.36.87.144/?p=267112 1.

우리 시대에 ‘꿈을 좇는 일’을 나쁘게 말할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런데 정신분석학적으로 볼 때, 꿈을 좇는 일은 현실과 이상의 격차가 있다는 걸 의미한다. 이 격차는 사실 해소될 수 없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모두 ‘이상’을 좇아야 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해소될 수 없는 현실과 이상의 격차가 항상 존재한다는 걸 의미하게 된다.

여기에서 아주 흥미로운 문제가 발생한다. 정신분석학에서 볼 때, 이 현실과 이상을 좁히려는 시도는 인간에게 ‘무한동력’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가령, 어릴 적 아버지를 무의식적으로 롤모델로 삼은 아이가 있다고 했을 때, 이 아이는 죽을 때까지 자기 안의 아버지를 무한하게 좇을 수 있다. 아버지라는 이미지에 도달하고자 끝없이 공부하고, 일하고, 노력하면서 한 평생을 갈아 바칠 수 있다. 그 동력은 그야말로 죽을 때까지 ‘무한’하다.

Image by pch.vector on Freepik

 

2.

이졸데 카림의 『나르시시즘의 고통』에는 자본주의가 이런 개인 내면의 ‘무한 동력’에 기생하고 있다는 취지의 이야기가 나온다. 예를 들어 SNS도 그렇다. SNS에 우리는 삶을 적당히 화려하게 편집하여 올리는데, 사실 그 삶의 이미지는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이다.

SNS 속의 나는 필터나 구도를 통해 나 자신보다 더 아름답게 만들어진 얼굴로만 장식되어 있다. 옷가지나 먹다 마신 물컵이 널부러진 집안이 아니라, 잠깐만 유지되는 완벽하게 정돈된 이미지만이 전시된다. 우리는 우리가 전시한 그 이미지에 도달할 수 없다.

이것은 우리를 ‘무한’하게 전시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바로 그 현실과 이상의 간극에서 ‘무한동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우리는 끝없이 내가 최고로 잘 나온 사진, 내가 최고로 행복한 순간, 내가 최고로 돈을 많이 쓴 시간에 대해서 올린다. 그 이유는 그것이 내가 현실을 지우고 뛰어들고 싶은 유토피아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이미지를 잠시 만들어낼 수는 있을지언정, 그 이미지 속에서 살 수는 없다.

Image by pch.vector on Freepik

참 흥미롭게도, 이런 개인의 내면적인 문제가 한 사회 전체의 동력이 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내 안에 있는 부자가 되는 이미지, 내 인생의 경영자이자 주인이 되는 이미지, 세상의 인기와 명예를 얻는 이미지에 사로잡혀 그 이미지와 지금 현실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인생의 모든 에너지를 투여한다.

자본주의란 그런 개개인들의 투쟁이 만들어낸 부산물처럼 존재하고 지탱된다. 그 과정에서 당신을 ‘이상’에 도달하게 해주겠다고 하는 수많은 상품과 브랜드, 강의 등이 만들어진다.

 

3.

여기서 하나 생각해 볼만한 점은, 인간이 이 ‘무한동력’을 생산해 내는 현실과 이상의 격차라는 구조를 없앨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가능한 건 어떤 방식으로 그 격차를 해소하는 달리기를 이어갈까 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평생 달려야 하는데, 무엇을 좇아 어떻게 달릴지만을 조정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누군가에게 그 이상은 붓다나 예수다. 누군가에게는 에르메스나 포르쉐다. 누군가에게는 노벨문학상 작가나 자연 속 도서관 주인이고, 근래 우리 사회에서 가장 보편적이게는 강남 대단지 아파트 주민 같은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상을 포기하는 건 정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건 이상을 다루는 방식이고, 이상과 공생하는 방식이다. 이것이 가능할지는 몰라도, 할 수 있다면 이상에 영혼을 팔지 않는 선에서 내 삶에 이로운 이상과의 관계를 만들어 나갈 수도 있다고 믿는다.

이상은 우리를 목숨 바치는 열광적인 상태로 만든다. 나의 이상이 ‘도박의 신이 강림한 존재’ 같은 게 되면 삶은 파멸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이상이 이웃들과 더불어 살며, 강박적으로 삶에 쫓겨 다니지 않으면서, 하루하루를 충분히 사랑할 수 있는 ‘삶의 장면’이 된다면, 구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원문: 변호사 겸 문화평론가 정지우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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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긁?’의 심리학적 의미 https://ppss.kr/archives/268398 Mon, 03 Feb 2025 03:26:29 +0000 http://3.36.87.144/?p=268398

요즘 인터넷 여기저기에서 “긁?”이라며 상대방에게 날을 세우듯 말을 건네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님 지금 긁혔음?
아, 이건 제대로 긁혔는데?
긁?

…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대체 왜 이런 표현을 쓸까 궁금해지더군요. 묘하게 신체적 상처와 연결돼 있는 듯한 ‘긁다’와 ‘긁히다’가, 감정적인 영역에서 도발과 상처를 묘사하는 용어로 자리 잡았습니다. 왜 하필 “긁”일까요? “찌르다”, “때리다”, “쑤시다” 같은 표현도 많은데 말입니다.

 

왜 ‘긁?’을 쓰며 도발하는 걸까?

사람들이 인터넷상에서 “긁?”이라며 시비(?)를 거는 이유 중 하나는, 이 표현이 단순한 욕설이나 강도 높은 비난보다 훨씬 ‘재미있고 미묘하게’ 상대방의 신경을 건드릴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예를 들어 “야, 빡쳤냐?”라고 직설적으로 묻는 것보다, “너 혹시 긁힌 거 아님?ㅋㅋ” 하는 식이 훨씬 자극적인 동시에 미묘하게 굴욕감을 주죠. 정색하며 ‘기분 나쁘다’고 항의하기도 애매한 애드리브 같은 느낌이랄까요.

또, “긁?”이라는 표현은 그 자체로 짧고, 듣는 순간 귀에 꽂힙니다. ‘찌르다’나 ‘때리다’는 물리적 통증을 연상시키지만, ‘긁히다’는 생채기가 나긴 했는데 치명적 부상은 아닌 상태를 떠올리게 해요. 그래서 상대방 심기를 은근하게 건드리는 언어적 ‘쟁기질(?)’이 가능해지는 것 같습니다.

인터넷에서 특정 표현이 유행할 때는, 그 표현이 현시대의 사회적·문화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SNS로 대표되듯 모두가 바쁜 세상 속에서 빠른 의사소통을 원하는 한편, 감정을 예리하게 건드려 손쉽게 재미를 얻으려는 심리도 깔려 있죠. 그렇다고 날것의 ‘욕’으로 도배할 수도 없고, 조금은 ‘재치 있게’ 상대방을 웃으며 건드리는 전략이 필요한 겁니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긁?”은 우리 사회가 점점 더 ‘감정 소통’에 민감해지고 있다는 점도 시사합니다. 예전에는 “열 받았냐?”라든지 “화났어?”처럼 직접적으로 물어보거나 조롱하곤 했죠. 하지만 지금은 조금만 틈이 생겨도 서로의 감정을 툭툭 건드리며, 때론 그것이 곧 밈이 되고 문화가 되는 것 같습니다.

 

상대방을 “긁?”하는 사람들의 심리

심리학적으로 보면, 사람들은 종종 ‘미묘한 공격성’으로 타인을 건드려서 자극을 탐색하려고 합니다. 아주 대놓고 공격하기에는 부담되고, 그렇다고 완전히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기엔 뭔가 심심한 거죠. 그래서 한 번 떠봤으면 좋겠는 마음이 생기는데, 이때 쓰기 딱 좋은 표현이 “긁?”이 됩니다.

또,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확인하는 과정 자체가 재미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긁혔음?”이라고 했을 때 정말 “아니, 나 안 긁혔어”라고 부정하면서도 조금은 신경이 쓰인다면, 이미 게임에서 반쯤 진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이는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끼리 서로 “울어?”하고 놀리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울어? 할 때의 놀리는 맛이 이젠 긁?으로 돌아왔네요.

 

‘긁혔다’는 것은 심리학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긁혔다”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어딘가 얕은 상처를 입은 느낌을 받습니다. 손톱자국 정도의 사소해 보이지만 은근히 쓰라린 상처 말이죠. 심리학적으로 ‘긁힌다’는 건, 누군가가 내 마음의 약점이나 콤플렉스를 살짝 건드렸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그렇게까지 심각하지는 않아도, 무시받거나 우습게 보였다는 생각이 들면 우리의 자존감이 가벼운 찰과상을 입게 되죠.

“긁히다”는 순간적인 당혹감과 불쾌감을 동시에 안겨줍니다. 하지만 너무 직접적으로 “속상해 죽겠네!”라고 표현하기엔 약간 과해 보이고, 그냥 아무 일 없는 척 넘기기엔 은근히 기분 나쁜 상태인 거죠. ‘긁혔다’는 표현이 딱 그 미묘한 감정의 스펙트럼을 잡아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가시에 긁혔다”든지 “유리 조각에 살짝 스쳤다”든지, 우리 일상에서도 ‘긁히다’는 사건은 대개 작은 생채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상처는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은근히 오래 아립니다. 그처럼 “아주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계속 신경 쓰이는 상태”를 적확하게 표현하기엔 ‘긁혔다’가 딱 들어맞는다고 느껴집니다.

콤플렉스 이야기가 나온 김에 분석심리학자 칼 융(Carl Jung)을 언급해 보고 싶은데요, 융은 인간의 심리적 구조를 개인적 무의식과 집단적 무의식으로 나누며, 그 속에 억압된 감정, 트라우마, 또는 콤플렉스가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이 중 콤플렉스는 무의식에 뿌리를 두고 우리의 행동과 감정을 강하게 흔들 수 있는 심리적 요인입니다. 누군가의 말이나 행동이 우리가 가진 콤플렉스를 자극할 때, 마치 얕게 긁힌 상처처럼 우리의 자존감은 가벼운 찰과상을 입게 됩니다.

이러한 상처는 겉으로 보기에는 사소해 보일지 모르지만, 심리적 차원에서는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상징적 그림자(shadow)를 드러내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융의 관점에서 ‘그림자’란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려워 억압해 온 부정적인 성향이나 감정의 집합체로, 우리의 자아(self)가 인정하지 못한 부분들입니다. 누군가의 말이 우리를 ‘긁는’ 순간, 그 반응은 단순한 감정적 반발을 넘어, 내면의 그림자와 마주하게 하는 통로가 될 수도 있다는 거죠.

 

가벼워 보이지만 은근히 쓰라리고, 쉽게 사라지지도 않는

언어가 주는 ‘느낌’이 한 시대를 풍미할 때가 있습니다. 한때 “즐~”이 인터넷 공간을 떠돌며 누군가를 삐딱하게 놀리는 말로 유행했던 것처럼, 지금은 “긁?”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셈이죠. 그리고 이 흐름은 계속 변주를 거듭하며 또 다른 표현으로 탈바꿈할 겁니다.

예전에 ‘즐~’이 참 재미있었다.

다만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면, 이러한 재미와 도발이 한 끗 차이로 상대방을 심각하게 상처 입힐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재미나 유머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작은 긁힘이 돌이킬 수 없는 응어리가 되지 않도록 조절하는 것도 중요하니까요.

결국, ‘긁힌다’는 건 우리 마음의 작은 자존심에 손톱으로 콕 찍고 지나가는 일과 같습니다. 가벼워 보이지만 은근히 쓰라리고, 무시하려 해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 상처를 남기죠. 그래서 사람들은 상대방을 ‘은근히 놀리고’, 상대방이 “긁혔는지” 확인하며 은밀한 우위를 점하려 합니다.

하지만 이 ‘긁?’ 문화는 단순히 싸움을 일으키는 도발이 아니라, 누군가의 감정을 알아보고 교감하고자 하는 사회적·문화적 현상일 수도 있습니다. “너는 과연 이 말에 얼마나 예민해질까?”라고 떠보는 심리 말이죠. 중요한 건 그 선을 지키는 겁니다. 말로 긁고 긁히는 걸 완전히 없앨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무심코 뱉는 한 마디가 누군가에게 영영 아물지 않을 상처가 되지 않도록, 서로 조금씩 조심하고 헤아리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결국은 ‘긁’이냐 ‘때리기’냐의 표현 차이가 아니라, 우리 마음속 배려와 재미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일 테니까요. 그러니, 누군가가 “긁?” 하고 묻거든, 가볍게 흘려보낼지 혹은 정색하고 대응할지는 스스로의 기분과 상황을 잘 살펴본 뒤 결정하는 게 좋겠습니다. 살짝 생기는 긁힘은 금방 아물지만, 때론 후벼 파듯 오래 남을 수도 있으니까요.

“긁?” 한 번에 우르르 몰려가는 것이 아니라, 유연하게 받아넘기고 서로 예의를 지켜 나가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또 하나의 작은 지혜가 아닐까 싶습니다.

원문: 허용회의 사이콜로피아


작가의 말

심리학적 글쓰기, 직장심리, 자존감, 목표관리, 마음건강, 메타인지, 외로움 극복, 공간활용의 심리학 등 다양한 주제로 강연 가능합니다. 출강 제안도 환영합니다. 허작가의 사이콜로피아 홈페이지에서 제 소개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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