ㅍㅍㅅㅅ https://ppss.kr 필자와 독자의 경계가 없는 이슈 큐레이팅 매거진 Tue, 07 Jan 2025 03:07:36 +0000 ko-KR hourly 1 https://wordpress.org/?v=5.8.10 https://ppss.kr/wp-content/uploads/2015/07/ppss-100x100.png ㅍㅍㅅㅅ https://ppss.kr 32 32 자기혐오에 빠진 모든 어른이들에게,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https://ppss.kr/archives/263274 Tue, 07 Jan 2025 03:05:35 +0000 http://3.36.87.144/?p=263274 ※ 이 글은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3〉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딘가 경험이 없어 어리숙한 이들. 그렇기에 어른이 나서서 먼저 보호해 줘야 하는 이들. 바로 어린이들이다. 그런데 요새는 어린이라는 단어가 어른들에게도 붙는다. 클라이밍을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 ‘클린이’, 헬스에 처음 도전하는 이들에게 ‘헬린이’라는 이름이 붙는 것처럼. 어린이들 입장에선 나이 꽤나 먹은 이들이 자신들의 지위를 빼앗아 가니 곡할 노릇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만큼 사회가 불안정한 탓에 어른들도 어린이가 가지는 특권을 시샘하는 것이 아닐까?

철두철미한 준비도 경험의 공백을 메울 수 없기에, 어른들도 빠르게 변하는 세상이 당혹스럽고 무섭다. 그래서 어른이 되었을 법한 나이가 되었음에도 키덜트니 어른이니 하면서 다들 나이 들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도 이건 처음이에요. 그러니 어린이 대하듯 친절하게 대해줘요!’ 하고 말이다.

어른이라고 계속 어린이고 싶었던 건 아니다. 누구보다 멋지게, 사랑하는 이들을 책임지는 삶을 어릴 적부터 꿈꿔오지 않았는가. 그러나 사회는 어느 때보다 다재다능한 사람을 원하고, 우리는 참 미숙해 때로는 자괴감이 든다. 바로 이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오늘의 사회적 영화 보기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3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주인공들은 하나 같이 진작 어른이 돼야 했으나, 결국 어른은 되지 못했던 인간군상들이다. 캡틴 아메리카처럼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정의를 가슴에 품은 것도 아니요, 토니 스타크처럼 멘토가 되어주기엔 자기 앞가림이 바쁘다. 누군가에게 좋은 어른이 되어주기엔 각자 어딘가 부족해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 즉 이들은 요즘 사회가 정의하는 ‘어른이’의 정의에 부합하는 이들이다.

각 멤버가 어른이 될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선 같은 영화 1~2편, 엔드게임을 거쳐 많이 풀렸는데 유독 과거 이야기를 꽁꽁 숨기고 있는 한 마리(?)가 있다. 바로 너구리(Racoon)인 로켓. 그래서 이번 3편은 그런 로켓을 주인공으로 어린아이 혹은 성장하지 못한 어른을 주제로 이야기를 준비했다.

 

1. 성장하지 못한 어른, 어른이

영화의 3가지 파트. 항상 눈이 즐거운 우주를 만들어 준다.

이 영화의 줄거리를 크게 나누면 3가지 파트로 나눌 수 있다. 파트 1에서는 아담 워록의 급작스런 습격으로 인해 로켓이 중태에 빠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가오갤 멤버들인 친구이자 가족인 로켓을 구하기 위해 로켓의 과거가 숨어있는 오르고 스코프사에 침입한다. 파트 2에서는 로켓의 창조주이자 타노스와 같이 ‘우주를 조금 더 완벽하게 만든다’는, 겉보기엔 이타적인 철학을 품은 빌런 하이 에볼루셔너리를 쫓아 카운터 어스로 떠난다. 마지막으로 파트 3에서는 아센터 연구소에서 로켓을 구하고 가오갤 멤버들이 다시 힘을 합쳐 빌런을 물리친다.

어떻게 보면 전형적인 히어로 무비의 줄거리지만, 하이 에볼루셔너리의 철학과 가오갤 멤버들의 대비가 이 영화를 정말 각별하게 만든다. 완벽을 지향하는 빌런과 완벽과는 억만년 거리가 있는 어딘가 모자란 히어로들의 대결이라니…(이 대결 구도는 영화 내내 나를 정말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완벽을 추구하는 빌런과 완벽과는 거리가 먼 히어로들의 대결

영화 속의 하이 에볼루셔너리는 다툼과 분쟁이 없는 이상사회를 꿈꾸지만, 그 대의를 위해 수많은 실험체들을 고문하고 잔인하게 개조한다. 타노스가 숭고한 대의를 위해 절반의 우주를 날려버린 것에 공감하는 이들이 많은 것처럼, 하이 에볼루셔너리의 철학 역시 과거에 수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던 철학이다. 바로 나치즘과 파시즘, 홀로코스트를 자행한 우생학적 사상 말이다.

이런 우생학적 편견들은 여전히 사회 속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유전자 레벨의 개조와 세뇌가 아닐지라도 자신들이 꿈꾸는 ‘이상향’을 위해서라면 대의를 위해 소수를 기꺼이 희생시키고, 누군가의 다양성과 개성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넘쳐나지 않는가? 대체로 이상향이라고 불리는 디스토피아는 다양성의 무덤 위에 세워지는 법이다.

하이 에볼루셔너리 역시 로켓에게 이상향을 약속하지만, 정작 그를 이상향으로 데려갈 생각은 없다. 왜냐면 로켓은 하이 레볼루셔너리의 기준에서 이상향에 어울리지 않는 소수 쪽의 인물일 테니까.

영화 초반의 Creep은 로켓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노래에 가깝다

라쿤은 스스로가 그 이상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임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영화가 시작할 때부터 한 음악을 흥얼거리며 따라 부른다. 바로 라디오헤드의 전설적인 팝송 〈Creep〉이다.

<Creep>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멤버들, 특히 로켓이 스스로에게 품은 감정을 대변하는 노래이다. 꿈틀꿈틀 기어다니는 벌레와 같은 혐오스러운 물체.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많이 비꼬는 뉘앙스의)새끼’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단어다.

이처럼 가오갤 멤버들은 자신을 미워할 동기를 하나씩 가지고 있다. 사회가 말하는 평범함에 녹아들기엔 너무나 특이하고,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들이기에 스스로를 사랑하기가 어렵다. 죽음을 눈앞에 둔 어머니를 외면한 것을 마지막으로 우주 해적에 납치당한 지구인부터, 광적으로 균형에 집착하는 양아버지 덕에 산전수전을 다 겪은 자매, 그 양아버지의 부하 때문에 가족을 지키지 못했던 아버지까지. 참으로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가오갤 멤버들이다. (그런 감정마저 자학과 유머로 극복하기에 이들이 사랑스러운 거겠지만)

그런 Creep으로서 자각이 있기에 그들은 항상 어른으로서, 혹은 히어로로서 책무를 다해야 할 때 어른스럽지 못하다. 타고난 재치와 배짱으로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해 나가긴 했지만, 감정이 앞서 중요한 임무를 망쳐 놓기나 했으니(대표적으로 스타로드가 타노스 뺨따귀를 때린 것) 더 성숙한 어른의 도움을 받아 문제를 해결하는 식이었다. 이를테면 아버지(욘두)가 희생하거나, 어른의 책무를 다하고자 했던 히어로(토니 스타크)의 도움을 받는다거나.

몸은 성숙했건만 정신적으로나 인간관계에서나 어중간한 어른이. 바로 요즘 어른들의 모습이 겹쳐지기에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MCU 세계관 속 어느 히어로보다도 친근하게 다가온다.

 

2. 완벽함은 세계를 구할 수 없다

유독 어린아이들이 많이 나온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어른이’뿐 아니라 정말로 어린 친구들도 많이 나온다. 생쥐를 베이스로 개조된 종족부터 어린 시절의 로켓과 동물 친구들까지.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상태를 ‘어린이’라고 정의한다면 누구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 아담 워록까지 어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어린이란 아직 어른의 돌봄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며, 그 모두를 포용하는 개념이다. 하이 레볼루셔너리는 바로 이 어린이들을 위해(혹은 타노스와 마찬가지로 자신만이 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이상향을 건설하고자 행동한다.

그러나 과거 수많은 천재들이 그랬듯, 희생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해결된 것은 거의 없다(이는 하이 레볼루셔너리 같은 천재들이 겉으론 이상을 위하는 척 행동하지만, 자신보다 뛰어난 피조물의 등장에 분노하는 것처럼 위선으로 가득 찬 자기만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상향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그 기준에 부합하지 못한 어린이들이 셀 수 없이 희생된다. 현대 사회에서 정의 내리는 성공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방황하고, 어른들은 자신들이 꿈꾸는 성공을 쫓느라 정작 진짜로 존재하는 문제를 돌아보지 못한다. 이처럼 이상이 구해내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다.

하이 레볼루셔너리는 자신의 이상향을 기준으로 어린아이(혹은 동물)의 개성과 장점을 무시한 채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강제한다. 뒷다리 힘을 개성과 장점으로 삼는 토끼, 플로어에겐 억지로 거미 같은 다리와 육식 동물의 이빨을 떠올리게 하는 입을 덧댄다. 바다코끼리인 티프를 육지에 억지로 적응시킨다고 바다에 최적화된 지느러미와 꼬리 대신 바퀴를 달아놓는다. 그러나 본래의 태생과 개성을 무시한 교정이 원활하게 작용할 리가 없다. 보기 흉측한 Creep이 될 뿐이다. 결국 하이 레볼루셔너리의 이상에 못 미치는 이들은 구제받지 못하고 사회로부터 폐기 처분 판정을 받는다.

비슷한 사례를 주변에서 종종 발견하곤 한다. 그림으로 그린 듯한 성공을 강요하는 사회와 학생의 개성은 말소하고 맹목적인 교육과 교정을 반복하는 학교들. 대의를 위해 개인의 개성과 특징을 말소하는 흔히 볼 수 있는 사례다. 이들을 구하고자 등장한 완벽한 선은 오히려 이들을 구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린이들을 도울 수 있는 것은 누구일까? 우문현답일지도 모르지만 바로 어른이다.

 

3. 완벽해서 어른이 아니야, 책무를 다하니까 어른이야

덜떨어진 어른들이 하는 일이 그러하듯 가오갤 멤버들의 작전은 완벽과 거리가 멀다. 원래 목적인 라쿤을 구해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본의 아니게 네뷸라와 드렉스, 맨티스가 역으로 인질로 잡혀버리고 만다. 늘 그렇듯 책임을 돌리기에 바쁜 이들의 모습은 어른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분노와 자기혐오에 가득 차 모진 말들을 내뱉는 이들 앞에 다른 존재가 나타난다. 바로 하이 에볼루셔너리가 창조하고, 신세계로 이주시키고자 준비한 어린이들이다.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 역시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규정되어 있던 엄격한 완벽이다. 그것을 충족하지 못한다면 결국 폐기당해야만 하는.

그러나 완벽이 구해내지 못했던 이들을, 누구보다 불완전한 어른인 가오갤 멤버들이 구해낸다. 그것도 가장 완벽하지 않은 방식으로. 이들이 아이들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개개인이 완벽해서가 아니었다. 모자란 이들이지만 이들은 어른으로서 책무를 피하지 않았고, 결점만큼이나 뛰어난 개성과 서로의 단점을 감싸줄 좋은 동료들이 있었다. (마블 영화의 히어로들은 영웅을 우상화하지 않는 점이 좋다. 그들은 언제나 인간적인 나약함과 자신의 욕망 사이에서 흔들리는 존재들이다. 그럼에도 책무를 다하기 때문에 멋진 히어로이다).

독특한 사람, 괴짜가 좋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결점이 가득한 이도 자신이 모르는(혹은 노력으로 길러낸) 장점 하나쯤은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장점이 자신을 혐오하게 만든, 결점에서 유래되었다는 점은 마지막 구출 장면을 더욱 뭉클하게 만든다.

딸을 지키지 못했던 드렉스는 유일하게 아이들과 소통을 할 수 있는 존재였고, 아버지로부터 잔인하게 개조당한 탓에 기계의 몸과 심장을 지니고 있던 네뷸라는 덕분에 거의 망가진 우주선에 동력을 공급하여 아이들을 구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에고가 오로지 자신의 숙면을 위해 만들었던 맨티스는 자신의 태생 덕분에 아빌리스트(2편, 3편에 등장하는 우주 괴수)의 두려움을 이해하고 이들과 소통할 수 있었다. 이들을 그토록 괴롭게 했던 자기혐오의 원천이자 결점은, 어떤 의미로는 결점이 아니었다.

 

자기혐오도 긍정할 수 있는 어른이 되길 바라며

어렸을 때는 100점만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뭐든지 해낼 수 있는 완전무결함이 뛰어난 어른으로서 자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 혼자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더라. 심지어 내 인생마저도. 하고자 하는 일이 더 큰 대의와 선을 위한 일일수록, 큰일을 해내고자 도전할수록 뼈저리게 느껴지는 건 나의 부족함과 결점이었다. 그런 결점 때문에 스스로가 몸서리 처질 정도로 미워질 때도 있었다.

그렇게 부족한 우리지만 어쩌다 보니 어른이 되었다. 아니, 돼버렸다. 나의 모자람으로 인해 무언가 잘못될 때마다 ‘이래도 어른이라 할 수 있나?’라는 기분에 자괴감이 든 적이 여러 번 있다. 그러나 선이란 꼭 모든 준비가 갖춰져야 베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꼭 완벽하고 성숙한 어른이 아니더라도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 (아니, 오히려 완벽한 어른보다 그런 어른이 분명 멋있다)

분명한 것은 아이들도 부족한 어른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어른이’로서 가오갤 멤버들이 각자 품었던 자기혐오를 극복하고 어른이 되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어린이였던 이들이 실패한 멋진 어른들을 보며 배우고 자라는 영화기도 하다. 힘을 분출할 줄밖에 모르던 어린이는 어른들의 등을 보며 깨닫게 된다. 완벽하게 행하기에 어른인 것이 아니라, 책무를 다하고자 하는 모습이 어른임을.

 

PS.

춤은 머저리들이나 추는 것이라 말하던 드렉스가 춤을 추는 장면과, 3편의 영화 내내 거의 웃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던 네뷸라가 웃으며 리듬을 타는 모습에 살짝 눈물이 나올 뻔했다. 오늘도 책무를 다했던 멋진 어른이들이여, 우리도 내일엔 이들처럼 자신을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원문: 소라소라빵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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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무한한 우주, 티끌 같은 다정함일지라도 https://ppss.kr/archives/263272 Tue, 11 Jul 2023 01:07:15 +0000 http://3.36.87.144/?p=263272 ※ 영화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멀티버스와 이세계라는 장르가 최근 인기 있는 모티프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 영화(콘텐츠) 정말 최고인걸?’라는 느낌을 주는 작품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그나마 ‘스파이던 뉴 유니버스’ 애니메이션 정도일까요? (그마저도 시각적 연출 측면에 한정되지만)

그런데 행운스럽게도, 이토록 멀티버스라는 모티프가 줄 수 있는 가슴 따뜻한 울림을 지닌 영화를 만났습니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입니다.

 

1.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때론 도움이 된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는 보는 이를 빼놓고서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이야기가 누군가를 가슴 저리게, 미소 짓게 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그 원동력은 읽는 이가 겪어온 삶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술가들이란 이야기를 누구보다 날카롭게 벼려 가슴 깊숙이 찔러주는 사람들이겠죠.

가능성의 우주(멀티버스), 이세계 이야기가 오늘날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최선의 선택과 결정으로 만들어진 오늘날의 자신이지만, 세상의 등쌀에 이리저리 떠밀릴 때면 그런 내가 한없이 작고 하찮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밀려오는 후회와 함께 다른 선택을 해서 찾아왔을 세계를 꿈꾸게 되죠.

그때 다르게 선택했다면, 달라졌을까?

그래서 팍팍한 현실을 잊게 해줄 이야기가 꾸준히 웹툰이나 극장에서 보이는 것 같습니다.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던 헝가리 속담처럼, 그렇게라도 힘든 현실에서 잠시 눈을 돌리는 것이죠.

가운데가 텅 빈 베이글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이하 에에올)〉의 등장인물인 ‘조부 투파키’가 만든 베이글은 이런 현대인의 상징과도 같습니다. 자신의 실패와 어린 시절의 후회를 빚어 창조했다고 하는 베이글. 마치 가슴 한쪽이 뻥 뚫린 사람 같기도 하고, 무(無)를 뜻하는 O(zero) 같기도 하고, 빛마저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보이기도 하죠. 조부 투파키는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베이글 속으로 들어가 죽음의 망각에 기대고 싶어 합니다. 벗어날 수 없는 삶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하죠.

이는 조부 투파키만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영화 밖의 우리도 자신만의 실패와 후회를 빚어 만든 베이글을 가슴 속에 하나씩 지니고 살아갑니다. 베이글과 계속해서 눈을 마주치다 보면 무력감이 온 정신을 지배하고, 곧 그 속으로 자신을 던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죠. 때문에 베이글은 한 겹의 커튼으로 가려 무시하거나, 속을 채울 무언가를 계속해서 찾아 나서야 합니다. 하루라도 더 이 우주를 살아가기 위해서.

빈 구멍을 메워주기 위해서 보통의 다중 우주, 이세계를 소재로 한 콘텐츠는 환상적인 비일상의 세계를 준비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죠.

네가 꿈꾸는 모든 것이 여기 있어. 멋진 신세계를 탐닉하면서 베이글로부터 시선을 돌려!

실제로도 어린왕자의 상자 같은 멀티버스를 마음껏 주무르다 보면 현실의 고통과 상실은 잊혀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상자만을 가지고 놀 수는 없습니다. 언젠가는 장미가 기다리고 있는 고향 별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에에올’이 준비한 멀티버스는 조금 다릅니다. 멀티버스가 모티프이지만, 이들이 주목하는 것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우주’가 아닙니다. 바로 그 옆에 있는, ‘우주에 비하면 티끌과도 같은 우리 옆의 존재들’이죠.

 

2. 모든(Everything, Everywhere)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거의 없다’는 것과 같다

검은 베이글을 닮은 영수증의 오류 표시

영화 초입부터 보여주는 에블린의 삶은 마치 검은 베이글과도 같습니다. 자신의 20년 인생이 녹아 있는 영수증은 국세청으로부터 고발을 당했습니다. 이곳저곳이 오류투성이라며 친절하게 큰 동그라미마저 그려져 있습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죠.

너의 인생은 의미가 없어.

가운데가 파인 베이글처럼, 에블린의 삶은 후회와 무기력만이 가득합니다. 딸과 남편과의 관계도 삐그덕거립니다. 그 순간 ‘알파 차원’의 웨이먼드가 그녀에게 찾아옵니다. 그는 지금과 다른 우주에서 최선의 형태로 살아가고 있는 에블린을 보여주죠.

가장 성공한 차원의 에블린의 모습 중 하나

에블린이 접신하는 다중 우주 속 또 다른 에블린들은, 우리가 현실을 망각하기 위해 읽어내리는 여러 콘텐츠와 닮아 있습니다. 현란하고 황홀하며, 눈길을 끄는 광경으로 비참한 현실을 잊게 만들어 줍니다. 심지어 가장 중요한 현실의 문제를 망각하게 만들 정도죠. 영화에서는 이를 ‘버스 점프(Verse Jump)’라고 이름 붙입니다.

멀티버스의 이름을 ‘버스 점프’라고 부르는 건 참으로 기묘합니다. 수많은 자아와, 그것을 현실시켜 줄 정보를 찾아 넘나드는 현대인을 염두에 둔 작명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 가능성에 쫓기며, 현실의 고난함을 잊기 위해 차원(콘텐츠)을 넘나들지만, 그럴수록 우리의 자아는 어디까지가 자신의 욕망이고 어디까지가 타인의 기대인지 구분하기 힘들어집니다. 빌런인 조부 투바키가 바로 그런 인물의 전형입니다.

조부 투바키가 되어 버린 조이와, 그런 우주적 빌런을 만들어 낸 알파 세계의 에블린. 이들은 어느 우주의 자신들보다도 많은 가능성을 품은 이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목적지(가능성)가 있다고 한들, 정착하고자 하는 항구가 없다면 배는 결코 육지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어머니의 기대와 사회의 강압 때문에 시작된 출항이기에, 조이에게는 스스로 정한 정착지가 없었습니다.

‘어디든 갈 수 있다’는 말은 곧 ‘어디에도 갈 곳이 없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결국 조이는 망망대해의 한가운데에서 방향을 잃고 표류하게 됩니다. 조이의 자아는 자신의 욕망과 타인의 기대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합니다.

그러나 모든 이들에게 공평한 단 하나의 정착지가 있습니다. 바로 죽음입니다. 조부 투바키는 그렇게 자신을 지치게 하는 표류에서 벗어날 방법으로 죽음이라는 마지막 수단을 꿈꾸게 됩니다.

우리가 찾아 나선 가능성도 조부 투바키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조이에게 에블린이 늘상 하는 잔소리인 ‘살을 빼라’ ‘레즈비언의 정체성을 아버지에게 알리지 마라’는 사회의 표준에 맞춰진 요구입니다. 조이에 대한 사랑에서 기반한 잔소리이지만, 이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마치 남의 옷에 내 몸을 끼워 맞추듯 답답함과 숨 막힘을 견뎌야 합니다. 사회는 그 기대를 ‘가능성’이라고 부르지만, 여기에 딱 맞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이죠. 강압에 떠밀릴수록 새로운 조부 투바키가 탄생할 뿐입니다. 가능성의 우주는 순식간에 종말의 블랙홀로 뛰어드려는 이들로 가득 차게 됩니다.

알파 우주의 웨이먼드는 에블린이 지닌 가능성의 힘으로 조부 투바키의 허무에 맞서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극한까지 밀어붙인 가능성은 또 다른 허무가 되어 데칼코마니처럼 반복될 뿐이었습니다. 무한 우주가 지닌 가능성으로도 조부 투바키의 가슴 속 뻥 뚫린 구멍은 메울 수 없었습니다. 다른 멀티버스 영화와 달리, 가능성이 지닌 힘은 우주를 멸망으로 몰아가는 허무를 메울 수 없는 겁니다.

 

3. 무한한 가능성의 우주를 거쳐 만난, 지금 이 순간에 다정함을

역설적이게도 조부 투파키를 막아낸 사람은 최악의 가능성을 지닌 주인공 에블린입니다. 알파 우주의 웨이먼드가 보았을 때 특출난 장점도 없고, 특별한 재능도 없는 사람. 허술한 영어로 세금 신고를 하다, 가족끼리 즐기기 위해 산 노래방 기계가 잘못 접수되어 국세청의 조사까지 받게 된 이민자. 그런데 그녀가 지닌 진정한 무기는 영화 시작부터 관객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베이글 속을 채우는 듯한 가족의 모습

바로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보여주는, 노래방 기계로 단란한 시간을 보내는 에블린 가족의 모습입니다. 골치 아픈 사건을 만든 노래방 기계이지만 남편과 에블린의 진실된 재능은 바로 다른 우주의 자신을 소화해 내는 능력이 아니라 사랑이었던 겁니다.

현실의 문제가 너무나 벅차서 그렇지, 에블린은 본래 남편과 닮아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었음을 영화 내에서 몇 번이나 보여줍니다. 실패한 인생의 원인인 웨이먼드를 따라 미국으로 온 것도, 코인 세탁소를 힘들게 운영하며 딸을 낳은 것도, 의절한 아버지가 미국에 건너와도 보살펴 주는 것도, 설령 딸이 다중 우주를 멸망시킬 악이라 해도 죽일 수 없다 맞섰던 것도 에블린이 모든 순간, 모든 장소에서 사랑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최악의 가장 성공했던 알파 우주의 자신들도 가지지 못했던 재능입니다.

내가 아는 유일한 것은 우리가 친절해야 한다는 것이야. 제발, 친절하게 대해줘. 특히 우리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를 때.

내가 유일하게 아는 것은 우리 모두 다정해야 한다는 거야. 다정함을 보여줘. 특히 우리가 모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를 때 말이야.

남편인 웨이먼드는 순진한 사람이지만 바보는 아니었습니다. 지루한 세탁 과정을 기다리는 와중에도 사람들이 웃을 수 있게 인형 눈을 붙여 놓는다던가, 자신들을 조사하는 국세청 세무사에게도 미소가 가득한 모양의 쿠키를 건네주는 것. 그가 보인 다정함은 에블린이 다시 영수증을 정리해 제출할 기회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실제로 다정함은 다른 사람에게도 선의를 끌어내는 그의 전략적인 무기였습니다.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 에블린은 다른 차원에서 빌려온 기술들이 아니라, 다정함이라는 무기를 빌려옵니다. 남편이 장난삼아 붙이곤 했던 눈알을 이마 정중앙에 붙이고, 악당들에게 다정함을 베풉니다. 폭력에 친절로 응수하며, 싸움이 아닌 화해의 액션을 화려하게 펼쳐 보입니다. 모두가 다정해져서 우주를 가득 채울 수 있도록. 그 혼란마저 이해하고 껴안을 수 있도록.

검은 베이글과 정반대로 가운데는 검고, 겉은 하얀 인형 눈. 마치 다정함이 허무를 채우듯이,

사랑이 조부 투파키의 베이글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모든 가능성을 경험할 수 있는 조부 투파키에게 우주는 ‘이제 더 기대할 것이 없는’ 공간입니다. 결국 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라 차갑게 식어 멸망할 것을 알기에 합리적인 결론으로 죽음에 이르고자 합니다. 그럼에도 조부 투파키가 주인공 에블린을 찾아온 것은 필연적으로 찾아올 ‘죽음’의 우주에서 벗어나 ‘나를 혼자 두지 말아 달라’ ‘나를 사랑해 달라’는 가장 절박한 의지를 표현하고, 자신이 모르는 일말의 기대감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베이글의 빈 속을 채워줄지도 모르는 단 한 명의 사람을 찾아.

누군가 조부 투파키의 우주를 열고, 누군가가 이 구멍을 채워주어야 합니다. 바로 눈알로 상징되는 다정함만이 이 구멍을 채울 수 있습니다. 에블린이 경험한 알파 세계가 지닌 것 같은 무한한 가능성이 아니라, 바로 다정함이요.

 

4. 우주마저 건널 수 있는 티끌 같은 다정함을 가지기를

다양한 욕망과 빚어내는 자아가 꿈틀대는 현대 사회입니다. ‘멀티 페르소나’, ‘부캐’, ‘N잡러’라는 말들처럼 누구나 저마다의 우주를 열심히 건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우주에는 자신만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타인의 우주 역시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혼란스럽습니다. 조부 투파키가 어머니의, 할아버지의 요구에 맞춰지듯이 자신의 욕망과 사회가 주입한 욕망, 타인의 기대 사이에서 끊임없이 충돌하고 공존합니다. 타인의 욕망과 자신의 욕망 사이를 헤매는 우리의 머릿속이 곧 멀티버스입니다. 그렇게 수많은 욕망 사이를 점프(jump)하고 분열하다 보면, 결국 우리의 자아를 상실하고 검은 베이글을 빚어낼지도 모릅니다.

나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선 타인의 마음에 존재하는 나와, 내 마음에 존재하는 타인을 꺼내 함께 비교해 볼 수밖에 없습니다. 방법은 매우 간단합니다. 조이가 에블린이 자신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기를 원하는 것처럼, 상대방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즉 먼저 상대방에게 다가가 다정함을 건네고, 상대방의 다정함을 이끌어 내는 것. 그렇게 서로의 빈틈을 채워주는 관계를 구축하는 것.

손가락으로 핫도그를 먹고 발로 피아노를 치는 우주가 있듯, 우주에서는 모든 것이 일어날 수 있어!’

이렇게 열린 마음으로 세상에 친절을 베푸는 것. 다정함이 빈틈을 채우자, 우주는 모든 것이 중요한 공간으로 탈바꿈합니다. 나의 욕망만큼이나 너의 욕망 역시 중요하고, 그 수많은 가능성을 건너 우연히 우리가 함께 있다는 사실이요.

때문에 사랑합시다. 사소하고 미미한 것들을. 언제든지 다정함을 베풀 수 있도록. 우주의 거대한 무의미함에 맞서 절망하지 않고, 사랑을 서로 놓지 않을 수 있도록. 당신과 내가 그 수많은 가능성을 건너 여기 함께 있다는 사실을 축복하며, 서로의 베이글을 채울 수 있게.

원문: 소라소라빵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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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이 실패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소녀혁명 우테나” https://ppss.kr/archives/257469 Tue, 15 Nov 2022 05:06:17 +0000 http://3.36.87.144/?p=257469 지난번 이야기, 「겟 아웃과 놉의 감독 조던 필을 중심으로 푼 현대사회와 미디어의 신화」에 이어 두 번째 감독을 소개드립니다. 오늘은 조금 더 딥(Deep)한 서브컬처 작품으로 준비해왔는데요. 바로 세일러문 애니메이션 시리즈의 감독으로 유명한 이쿠하라 쿠니히코! 그리고 주제는 ‘페미니즘과 백래쉬’입니다.

그럼 오늘의 고급스럽게 포장된 덕질 노트 2탄을 시작해봅니다!


서두: 실패한 혁명 뒤의 이야기

오늘의 이야기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실패한 혁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조금 더 자세하게는 ‘실패한 혁명으로서 페미니즘, 그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페미니즘 운동을 실패했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 오해와 편견을 살 수 있는 발언인지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지만, 혁명의 실패가 그 시도가 지닌 가치를 깎아내리지 않음을 함께 기억해주시며 그 근거를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어떠한 혁명을 성공적이라 평가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 필수조건이 다음과 같은 2가지라 생각합니다.

  1. 구체제를 파괴적일 정도로 뒤엎는 것
  2. 새롭게 세운 체제를 지속하는 것

과거의 프랑스 대혁명이 왕권을 타도하고 3일 뒤에 다시 왕권이 복귀되었다면, 혁명이 과연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삼일천하일 뿐입니다. 때문에 최근 거세진 백래시를 마주하고 있는 페미니즘은 자신들이 목표로 하던 가부장제의 전복 및 ‘혁명의 성공’에 성공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그런 고민과 이야기를 이쿠하라 쿠니히코의 작품 『소녀혁명 우테나』로 풀어볼 겁니다.

이쿠하라 쿠니히코의 대표적인 작품은 이외에도 『돌아가는 펭귄드럼』 『사라잔마이』 등이 있습니다. 3개 다 다른 것 같으면서도 비슷한 주제 의식을 담고 있으며, 페미니즘의 변천과 역사와 엮어 생각을 거리를 던져줍니다.

미리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쿠하라 감독의 필모는 ‘페미니즘이라는 혁명의 등장, 그리고 혁명의 실패, 그 혁명이 실패했음에도 우리는 그 유산을 어떻게 이어 나가야 하는가?’라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회가 되신다면 시간 날 때마다 쭉 이어보시는 걸 추천드리고 싶어요.

우선 이 감독의 성향을 알아보기 위해 가장 유명한 작품, 세일러문부터 소개해봅니다.

 

INTRO: 세일러문과 LGBT, 감독의 성향을 대표하는 초기작

원작자는 아니고 애니메이션 시리즈 감독임

마법소녀물의 조상 격인 세일러문. 이쿠하라는 『세일러문 R』이라는 애니메이션 시리즈의 감독을 맡았습니다. 그는 원작을 파격적일 정도로 재해석했는데 원작의 인물들에게 LGBT, 즉 소수자의 정체성을 부여한 것입니다. 이는 90년대 한국만큼이나 보수적이었던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보기 드문 시도로, 어느 작품에서도 보기 힘든 입체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내면서 세일러문의 성공을 이끌었습니다. 대표적인 캐릭터가 바이 섹슈얼 정체성을 지닌 넵튠과 우라노스죠.

한국과 미국에선 사촌이라는 관계로 순화되서 들어왔는데, 이 두 캐릭터는 일종의 레즈비언적 운명 공동체로 묘사됩니다. 이 두 캐릭터가 얼마나 레즈비언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는지, 애니메이션이 방영되었을 적 미국 레즈비언 사회에선 ‘내 사촌이 되어줘’라는 말이 고백 대사로 유행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트랜스 젠더 정체성을 지닌 피쉬아이 등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런 변주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가 한 명 있습니다. 바로 세일러문의 원작자인 타케우치 나오코죠. 나오코가 바라본 세일러문은 일종의 ‘모성애의 화신’이었기 때문에 이쿠하라의 변주를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원작자와 이쿠하라는 큰 갈등을 겪게 되고, 그 결과 이쿠하라의 감독직 하차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그의 초기작만 보더라도 그의 관심사에 대해서 유추가 가능합니다. 그는 80년대 미국 내에서 성행했던 페미니즘 운동과, 막 등장한 개념은 소수자 성과 LGBT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상업적인 의도이든 아니든, 그것을 자신이 감독하는 애니메이션에 녹여낼 정도로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죠. 이 정도 배경지식을 지닌 채로, 감독으로서의 진정한 첫 작품 『소녀혁명 우테나』로 넘어가 봅시다.

2장: 그 혁명은 성공했는가? 소녀혁명 우테나

『소녀혁명 우테나』를 관통하는 시대적 배경에는 2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일본의 버블경제 붕괴와 『신세기 에반게리온』이죠.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세일러문 감독직에서 하차한 이쿠하라 감독이 쉬는 동안 방영된 작품입니다. 일본 사회의 세대 정서를 관통한 애니메이션이자, 감독이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을 만들기로 결정하는 데 큰 영감을 준 애니메이션이기도 합니다. 그가 영향을 받아 만든 작품이 바로 『소녀혁명 우테나』이고요.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기성세대가 만든 버블경제가 붕괴되어 젊은 세대에게 사회적 짐이 부여된 상황에서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신지와 아스카는 이 짐을 떠안은 젊은 세대를 대변하는 캐릭터였죠. 마찬가지로 『소녀혁명 우테나』 역시 기 체제에 대한 나름의 문제의식을 제기합니다. 그런데 우테나가 본 시선은 조금 다릅니다.

축하는 개뿔, 오메데토 할 시간에 혁명하자

에반게리온은 기성세대로부터 ‘이 시대에 존재해도 된다’는 긍정과 위로를 받으면서 끝납니다. 마지막화의 “오메데또”가 그 상징이죠. 반면 우테나는 ‘구세대가 만든 불합리한 체제를 혁명하자, 뒤집자’는 수준까지 발전합니다. 이들이 혁명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가부장 제도입니다.

여기서 두 번째 시대적 배경이 나옵니다. 『소녀혁명 우테나』가 방영된 시기는 1998년입니다. 미국 내에서 일어난 레디컬 페미니즘이 거센 백래시의 파도를 맞이하고, 메카시즘과 내부 담론 분열로 인해 운동 자체의 추진력도 많이 약화된 시기입니다. 즉 이쿠하라 감독은 ‘혁명의 실패’를 두 눈으로 목도한 상태에서 우테나를 제작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파괴적일 정도로 구체제를 뒤엎는 것이 혁명이다

그런데 이쯤에서 다시 생각해봅시다. 혁명의 정의에 대해서요. 선풍기가 불편하다고 에어컨으로 바꾸거나, 가스레인지를 인덕션으로 바꾸는 정도를 혁명이라 부르지는 않습니다. 혁명은 이를테면 산업혁명 이전에는 말이 중심이었던 인프라가 자동차가 등장한 후 모두 해체되는 것에 가깝습니다. 말을 키우는 목장, 마부, 마차 등의 인프라는 깡그리 무너지고 고속도로나 물류 시스템 등 새로운 체제가 등장해 구체제를 무너뜨리는 정도의 변화를 일컫는 것이죠.

그래서 왕권을 무너뜨린 프랑스 혁명, 자유 시장의 질서를 해체하고자 하는 공산주의 같은 것들 뒤에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이런 혁명의 특징을 기억하고 우테나를 함께 바라봅시다.

작품의 배경인 ‘오오토리 학원’. 이는 그야말로 높은 가부장제의 성을 가리킨다.

우테나엔 혁명의 대상인 가부장제를 은유하는 메타포가 넘쳐납니다. 일단 작품 줄거리를 소개해 봅시다.

작품의 배경인 오오토리 학원은 성벽에 둘러싸인 하나의 세계, 하나의 사회입니다. 이곳에는 ‘안시’라는 수수께끼의 힘을 가진 소녀가 있어요. 작중에선 이를 ‘세계를 혁명하는 힘’이라 부릅니다. 이 힘을 얻기 위해서는 듀얼이라는 칼부림을 통해 경쟁자들을 쓰러트리고 안시(여성)를 신부로써 소유해야 합니다.

신부를 ‘소유’해야 힘을 얻을 수 있는 사회

참가자들은 각자 결핍된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이 듀얼에 참가합니다. 반면 이 학원에 막 전학을 온 소녀 우테나는 안시(여성)가 물건처럼 다뤄지는 모습에 동정심을 품게 됩니다. 그녀는 안시를 불합리한 시스템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스스로 왕자를 자처해 듀얼에 참가하게 됩니다. 공주는 공주를 구할 수 없으니 왕자가 되어 공주를 구하려고 하는 스토리. 이것이 소녀혁명 우테나의 큰 줄기입니다.

듀얼에 참가하는 캐릭터들도 마치 가부장제의 악습을 여러 파편으로 나눈 것 같은 설정입니다.  자신보다 뛰어난 남자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우월감을 느끼는 남성 캐릭터, 자신의 레즈비언적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서 세계를 혁명할 힘을 원하는 캐릭터, 여성을 착취하여 권력을 얻는 남성, 맨박스에 갇힌 남성 등.

그럼 우테나는 가부장제를 상징하는 캐릭터들을 모두 물리치고, 안시를 해방시킬 수 있었을까요? 우테나의 혁명은 성공했을까요?

체제를 반복하는 것은 혁명의 수단이 될 수 없다.

아뇨, 오히려 처절하게 실패합니다. 1990년대에 미국 페미니즘 운동이 거대한 백래시를 맞이했던 것처럼 외적으로 아주 처절하게 실패해요. 이는 당연하게도, 주인공 우테나의 혁명은 전제부터 잘못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왕자가 되어 공주를 구한다는 것은 체제를 다른 모습으로 반복할 뿐이죠.

3세대 페미니즘 이론가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가 지적하듯, 일종의 왕자님을 자처하는 젠더 수행은 가부장제를 더욱 공고히 할 뿐 혁명의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이는 1980년의 2세대 페미니즘이 ‘여성 동지’라는 젠더에 지나치게 국한된 나머지, 다양한 인종과 계층을 포섭하지 못해 결국 성공하지 못한 페미니즘의 변천과도 동일합니다.

우테나는 왕자를 동경했지만 왕자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왕자가 되어봤자 시스템이 정한 규칙을 되풀이할 뿐, 안시를 해방시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안시에게 배신당해 등 뒤에서 칼에 찔리는 연출이 등장하기까지 하죠. 페미니즘 백래쉬로 인해, 서로 ‘자매’라고 지칭하던 여성 내에서도 계급과 인종, 의견 차이와 분쟁으로 갈라졌던 것처럼요. 그런데 감독은 작품 내에 메시지 하나를 남겼습니다.

혁명은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마음의 혁명도 그럴까요?

 

3장: 실패한 혁명도 유산은 남는다

성(가부장제)안에서 주체성을 잃었던 안시는, 우테나의 혁명 시도로 주체성을 되찾는다

우테나의 혁명은 실패했지만, 안시에게 한 가지 변화를 남깁니다. 학원, 즉 가부장제란 시스템에선 해방되기 위해서는 왕자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시스템에서 나가야 된다는 것.

듀얼에서 남성들의 소유물, 권력 유지 수단에 지나지 않던 안시는 우테나의 혁명으로 자신의 주체성을 자각하고 학원 밖으로 나가려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외적인 혁명은 실패했지만 마음의 변화는 이뤄낸 셈인 거죠. 이는 2세대 페미니즘이 전한 성과이자, 실패한 혁명의 값진 교훈입니다.

극장판 격 후일담에 속하는 『어드레센스 묵시록』에서는 주체성을 되찾은 안시가 결국 우테나와의 유대를 맺습니다. 다른 이들의 방해공작을 전부 물리치고 가부장제 시스템에서 빠져나가며 진정한 사랑(해방)을 이루는 장면까지 연출되죠. 어떻게 보면 2세대 페미니즘이 추구했던 이상적인 ‘혁명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그러나 여기서 하나 문제가 있습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2세대 페미니즘은 ‘실패한 혁명’에 가깝습니다. (성공했다면 그 이후에 페미니즘은 세상에 필요하지도 않았겠죠) 감독은 극장판에서 이상적인 혁명의 성공을 그리긴 했지만, 과연 한 개인이 기존의 시스템을 뒤엎고 새로운 체제를 세우는 것이 쉬운 일일까요?

소수의 왕족과 귀족, 그에 맞서는 다수의 시민. 이렇게 수적인 차이가 나는 대결에서조차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수많은 희생과 실패가 필요했습니다. 혁명의 성공은 역사 속에서도 손꼽히는 일입니다. 그런 만큼 개인이 시스템 내에서 성공적인 혁명을 일으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특히나 이데올로기가 희박해지고, 개인주의 혹은 나노사회라는 키워드가 하나의 표준으로 자리 잡은 오늘 사회에서는 더욱이요.

이는 다음에 다룰 주제인 『돌아가는 펭귄드럼』에서 자세히 다룰 예정입니다.

혁명이 성공할 수 없는 사회에서 시스템을 뒤집을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생존할 수 있을까요? 감독은 그 대답을 『아가는 펭귄드럼』이란 작품에서 내놓습니다. 펭귄드럼은 소녀혁명 우테나에서 얻은 주제 의식을 계승하는 작품인 셈이지요. 『돌아가는 펭귄드럼』의 이야기는 다음에 들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원문: 소라소라빵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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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저 친구가 많으면 부자가 될 수 있을까? https://ppss.kr/archives/256737 Wed, 07 Sep 2022 03:41:46 +0000 http://3.36.87.144/?p=256737 ※ 이 글은 〈몰라도 아는 척〉의 108화 방송대본을 기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전 세계를 막론하고 친구 관계에 대한 속담이 많습니다. 한국엔 ‘친구 따라 강남 간다’. 중국에는 ‘근묵자흑’ ‘맹모삼천지교’. 어린 시절 우리의 부모님도 그토록 ‘친구는 가려서 사귀어라’라고 조언을 주시곤 했죠.

그런데 얼마 전, 뉴스에서 재미있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친구라도 금수저…”부자 친구 많은 동네서 자라면 커서 소득↑”」이라는 조금은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였죠.

해당 기사의 댓글 반응

기사 내용에 대한 저의 처음 인상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부자 친구가 있다면 유리한 기회가 많을 것이라는 기대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같았죠. 댓글 역시 ‘뭐 이런 연구에 돈을 쓰나?’라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기사에서 소개된, 미국 성인을 7200만 명이나 조사했다는 사실은 무시하고 지나치기는 어렵더군요. (사회과학에서는 보통 1,000명 정도를 조사해도 유의미하고 신뢰도 높은 조사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하니까요) 궁금해지던 차에 해당 논문을 읽다 보니, 이것 참 언론에서는 자극적인 부분만 쏙 빼서 보도했구나 싶었습니다.

논문에서 제시한 결과에 대해 미리 알려드리고 싶은 점은, 아쉽게도 부자 친구를 쉽게 만나는 방법이나, 금수저 친구를 내 편으로 만드는 방법 같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세상이 좀 더 평등이랑은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슬픈 현상이었죠.

 

1. 우리는 왜 금수저, 즉 부자가 되고 싶어 할까?

인간의 행복은 오랫동안 만인의 관심사였습니다. 철학이나 사회학에서도 행복에 영향을 주는 변수를 추려내고자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죠.

지금까지 대략 밝혀진 것은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성별이 남성일 때, 국가권력이 균등하게 분배되고 투명한 정부 밑에서 살아갈 때 행복하다는 것. 그리고 소득이 높아질수록 행복도 같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 U자를 그린다는 것. 전부 사회학에서 연구를 통해 알게 된 행복의 조건입니다. 오늘 소개할 부자와 가난한 자의 우정을 연구한 이 연구도 그런 행복의 조건을 알아내기 위한 연구 중 하나입니다.

연구의 결론은 기사에서 소개된 것처럼 ‘금수저 친구가 많으면 소득이 높아진다.’라는 것입니다. 부자인 친구를 많이 사귄 가난한 사람은 성인이 되었을 때, 가난한 사람들끼리 친구인 사람보다 그 사람의 직업, 학력, 매력 등 자신의 조건보다 더 높은 소득을 벌었습니다. 친구의 70%가 부유한 동네에서 살고 있다면 가난한 친구의 미래 평균 수입은 무려 20%나 증가했죠.

심지어 이러한 우정은 가난한 사람이 다닌 학교의 질, 가족 구성원의 구조, 자신의 인종보다 훨씬 큰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친구 관계가 인종이란 한계마저 뛰어넘었다는 것이 놀랍긴 하지만,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부자인 친구로부터 돈 될 만한 정보를 얻을 수도, 아니면 상류층 아이들이 준비하고 대비하고 있는 시험의 존재를 알 수 있을 수도 있겠죠. 적어도 좌절하지 않는다면 자신을 자극해주는 좋은 관계를 만들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미국 ‘네이처지’에 논문을 발표한 한 연구팀은, 이 상식과 같은 전제를 무려 7200만 명이나 되는 성인을 대상으로 엄밀한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이 거대한 조사 속에서 연구팀이 알고 싶은 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왜 특정 지역이 빈곤에서 벗어날 수 없을까? 있다면 그 방법은 무엇일까?

즉 사회적 사다리를 놓을 방법에 대한 고민인 것이죠. 사회적 사다리란 부의 분배가 얼마나 공정하게 이루어지는지 나타내는 주요한 지표 중 하나입니다. 경제적 불평등이 증가할수록 구성원들 간 상대적 박탈감은 높아지고, 동시에 사회적 위기감이 높아지기 때문에 사회 전체의 불안감은 높아져 갑니다. 이는 곧 사회 전체가 계급 상승을 위한 경쟁에 몰두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자연스럽게 삶의 피로도가 상승하고, 행복의 질은 떨어집니다. (우리 주변에서는 특히 쉽게 들어볼 수 있는 이야기인 것 같네요.)

때문에 연구진은 이 사회적 사다리를 회복시킬 방법을 찾다가 그 방법의 일환으로 부자 동네와 가난한 동네를 비교해보고, 부자와 빈자 간의 우정까지 조사하게 된 겁니다.

 

2. 끼리끼리 노는 것이 뭐가 문제일까?

최근 수십 년 동안, 사람들은 비슷한 경제적 지위를 지닌 사람들끼리 응집했습니다. 한국에서도 부촌 아파트, 좋은 학군 주변을 둘러싼 명품 아파트를 떠올리시면 이런 계층 간 분리가 어떤 느낌인지 와닿을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부자들은 대부분 부유한 친구들을 가지고 있고, 가난한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한 친구들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연구를 들으면서 ‘비슷한 사람들과 친구가 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고, 당연한 얘기인데 무엇이 문제냐?’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촌이 형성되고, 가난한 사람들끼리 만나는 것처럼 사회가 파편화돼가는 것이 왜 문제가 될까요? 사회 전체적인 행복도가 낮아지는 것도 있지만, 사회 전체가 낭비하는 매몰 비용이 상승하기 때문입니다.

불평등이 심해진 사회는 계층이 낮아지는 것에 대해 큰 불안감을 가지게 됩니다. 사회 전체에 경쟁에 몰두하게 되고, 점차 불평등하고 잃을 것이 많아진 사회는 우리나라의 사교육 비용처럼 필요 없는 잉여 비용의 소비에 낭비하게 됩니다.

또 다른 영역은 사회적 자본입니다. 흔히 우리가 인맥이라고 부르는 그것이죠. 연구는 또 다른 흥미로운 지점을 발굴했습니다. 빈부 간 교류가 많을수록 비교적 부자에 속하는 이웃들이 주변의 아이들을 가난에서 구하는 데 더 능숙했습니다. 가난한 아이가 알 수 없는 시험의 존재를 알려준다거나, 대학 입학에 필요한 자기소개서에 필요한 조언을 해준다던가, 성장과 성공을 향한 매개를 해주었죠. 지역사회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비율이 높은 곳 역시 빈부 간 교류가 활발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수십 년 간 이러한 사회적 자본은 국가가 계층별로 분리되면서 감소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부자들은 대부분 부유한 친구들을 가지고 있고, 가난한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한 친구들을 가지게 된 것이죠.

가난한 사람들은 자기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 이외의 계층과는 만남이 적어져서, 점차 지역 내에서의 인맥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반면 부유한 이들은 적극적으로 자신과 비슷한 부를 지닌 사람과 매개될 수 있는 곳, 이를테면 대학에서 더욱 많은 인맥을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부유한 자들은 비슷한 이들과의 교류를 찾아 적극적으로 이동한 것에 반해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한 지역에 고스란히 매립되어, 점차 지역 간의 격차와 계급의 격차가 벌어지는 형태가 되었습니다.

 

계층 간 활발한 교류는, 경쟁에 매몰된 사회를 바꿔나갈 수단이 된다

마지막으로 논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례를 가지고 계급 간 사다리를 놓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한 대학의 사례인데요, 대학에선 값비싼 클럽 스포츠와 학교 동아리 활동에 더 많은 학생이 참여할 수 있도록 교통비·신체검사·장비를 무료로 제공했습니다. 학생들은 공통의 관심사로 빈부에 관계없이 모여, 공통의 목표를 나누고, 우애를 다지며 계급의 유동성을 높이는 결과를 보였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학생들은 SAT에서 더욱 좋은 점수를 받거나, 가난함에도 4년제 대학을 무사히 졸업하는 등 좋은 영향을 받았죠. 또 다른 방법으로 무작위로 기숙사 룸메이트를 배치하거나, 멘토링 프로그램으로 다양한 사회 경제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장기간 매칭시켜 계층 간 관계를 구축했습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어색한 상황을 피하고, 비슷한 이들과 있고 싶어 하는 법입니다. 편하고, 의식하지 않아도 되고, 무엇보다 즐겁고 행복합니다. 이 연구 말고도 다뤄보고 싶은 연구가 있었는데, 거기서 내린 결론은 ‘가족, 연애, 직장, 종교 어느 집단이든 자신의 의견에 동조해주는 집단에서 인간은 가장 큰 행복을 느낄 수 있다’라는 결론이었습니다. 비슷한 가치관과 라이프 스타일을 지닌 인간끼리 모였을 때 행복도가 높은 것도 비슷한 이유일 수도 있겠죠.

그럼에도 계층 간 이동이 점차 적어지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교류가 늘어났을 때 가난한 사람이 더욱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그가 기회를 탐탐히 노리고 있는 뛰어난 사람이라서였을까요? 어떤 부자가 가난한 이들을 더 많이 도운 것은 단순히 그가 아량이 넓은 사람이었기 때문일까요?

계층 간의 교류가 활발해질 때 부자는 계층의 사다리에서 미끄러질 수 있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자신이 지닌 풍요로움을 나누고, 가난한 사람은 패배감이나 좌절감에서 벗어나 조금 더 넓은 세상을 보고 가능성을 꿈꿀 수 있습니다. 개천에서 용이 나온다는 신화는 더 이상 한국에는 없습니다. 서로 교류할 수 있는 기회와 접점을 늘리는 것, 그것이 이 경쟁과 계급 상승에 매몰된 사회를 바꿔나갈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원문: 몰라도아는척의 노예 도비의 브런치


참고자료

  • Social capital I: measurement and associations with economic mobility, Nature | Vol 608 | 4 August 2022
  • Social capital II: determinants of economic connectedness, Nature | Vol 608 | 4 August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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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체의 발전으로 보는 서사와 인권의 역사 https://ppss.kr/archives/255446 Fri, 29 Jul 2022 03:10:14 +0000 http://3.36.87.144/?p=255446 ※ 이 글은 〈몰라도 아는 척〉 100화 방송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지난 4월 13일 장애인 이동권시위, 혹은 탈시설권 시설 시위 끝에 전장연 박경성 대표가 TV에 출연하여 이준석 국힘 대표와 토론을 진행했습니다. 수많은 차별이 담긴 시선에도 용기를 낸 그에게, 소소한 저의 생각을 남기고자 오늘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오늘 준비한 이야기는 ‘서사와 인권의 역사를 짚어보다’입니다. 뜬금없이 왜 서사와 인권인지는 글의 말미에 다시 한번 정리하겠습니다.

 

1. 인권과 서사?

  • 인권: 인간이면 누구나 갖는 보편적인 권리

저는 이 정의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보편적? 권리? 두 개념 다 너무 막연하고 어렵습니다. 대신 저는 매클루언의 책 『구텐베르크 은하계』에 묘사된 인권에 대한 정의를 더 좋아합니다.

인간이 자유로이 쓸 수 있을 때 영웅적 개인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인간성을 얻게 되었다!

(※ 실제로 이런 어구가 나오지는 않습니다. 구텐베르크 은하계를 저 나름의 시선에서 정제화시킨 것이죠.)

바로 자신만의 주체적인 서사를 만들어갈 수 있는 권리가 곧 인권이라는 이야기이죠. 또한 서사를 새로이 기록할 매체의 보급은 곧 인권의 확충으로 이어졌다는 해석도 곁들여져 있습니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한 영화가 성평등적인 작품인가를 평가할 때 자주 사용되는 백델 테스트를 거론해볼게요. 백델 테스트를 통과하려면 3가지 기준이 통과되어야 합니다.

  1. 영화에 이름을 가진 여성이 등장할 것
  2. 여성들이 서로 이야기할 것
  3. 이야기의 주제가 남자에 대한 것 이외의 것일 것.

이 테스트는 최소한의 기준으로 각본 단계에서 여성 캐릭터의 역할이 축소되거나, 남성의 트로피만으로 전락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영화들이 이 기준을 통과하지 못해요.

물론 백델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다고 해서 안 좋은 작품이라는 얘기는 아니고 통과했다고 해서 성평등적인 작품이라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그저 최소 기준일 뿐이라는 얘깁니다. 어쨌든 서사란 생각보다 인권과 근접하게 엮어볼 수 있는 소재라는 것이죠. 그 이유를 오늘은 다음과 같은 책과 함께 이야기해봅니다.

마셜 매클루언의 『구텐베르크 은하계』

 

2. 서사를 기록할 매체의 발전은 인권의 확대를 낳았다

제정일치 사회였던 이집트. 대부분 초기 문명은 구전 전승을 기반으로 한 제정일치 사회였다.

우리가 역사 속에서 일반 백성들이 아니라 왕과 귀족의 역사를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그들에게만 허락된 주체적인 서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면 인권은 처음에는 신화적 존재에게만, 그다음은 왕과 귀족 같은 영웅적 개인들에게만 부여되었습니다. 그 외 백성들은? 인권이 없었죠. 사유재산의 차이, 통치의 효율성을 위한 강압적인 권리의 제한. 이런 차별과 함께 작용한 것은 권력층이 자신들만이 서사를 독점하고 시민들의 서사를 억압했다는 것입니다.

제정일치 사회, 문자라는 발명품이 없는 상황에서 구두언어, 즉 사람의 말이라는 것은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식을 전승시키는 유일한 수단이자, 입과 입을 통해 신화가 쌓아온 권력은 불가침의 성역에 가까웠습니다. 여기에 의문을 가지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죠. 그런데 그렇게 쌓여온 구두언어의 권위에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바로 문자언어와 그것을 기록할 매체의 등장으로 말이죠.

문자언어와 기록매체의 등장. 구두언어가 쌓아온 권위에 금이 가고 영웅적 개인에게 인권의 범위가 확대되다.

문자 매체의 등장은 전달할 수 있는 지식의 범위와 영토를 넓혔고, 인간 사회는 단순한 부족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구두언어만 있었을 때는 전달되지 못하던 메시지가 기록매체를 타고 명령, 권력의 분화가 가능해지면서 통치 가능한 영토와 사회의 복잡성이 증가한 것이죠.

하지만 동시에 신화가 가지는 권위는 약화되었습니다. 과거엔 구두에서 구두로 전달되던 신화가 기록을 통해 볼 수 있는 사람이 늘어나자 권위가 약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회 역시 제정일치 사회에서 벗어나 문자를 익힐 수 있는 왕과 귀족에게 인권이 확대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인쇄매체의 보급은 지식의 보급은 물론 보편적 인권의 근간을 마련했다.

역사책에서 배운 내용을 복습해 볼까요? 영국의 명예혁명과 권리장전, 프랑스 대혁명, 미국의 독립혁명 등 인권을 진보시킨 대사건들은 공통으로 18세기에 일어났습니다. 사회적 변화로는 중상주의로 인해 부유한 시민계급이 등장했고 국가 예산에 시민들이 담당하는 몫이 커졌다는 걸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민들에겐 여전히 주체적인 서사가 없었어요. 왕과 귀족, 영웅적 개인만이 서사를 독점했습니다. 하지만 인쇄매체의 보급은 시민들의 목소리를 기록할 수 있는 공론장을 키웠고, 자신의 불만이나 생각을 책이라는 형태로 남기기까지 했습니다. 즉 시민들의 서사와 기록이 발생한 것이죠.

프랑스 인권 선언

무엇보다 근대의 인권 쟁취의 결과물이 인쇄 매체에 문서의 형태로 공표되었다, 이 지점이 저는 참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인쇄매체는 권력을 독점하는 수단이었던 지식을 평준화시키고 보급화시킨 매체이자 인권이라는 개념이 적힘으로써 혁신적인 변화를 만들어낸 매체인 셈이니까요.

18세기에 책이란 여전히 부유층만 소비할 수 있는 사치재에 가까웠지만 중세나 고대만큼은 아니었습니다. 중세에 책을 쓴다는 것은 지식이나 의견을 남긴다는 것보다 오히려 종교적 행위에 가까웠습니다. 구텐베르크 활자 및 종이 생산법의 발전은 일반 시민들이 지식을 접하고, 신문이나 글의 형태로 자신들의 서사를 남길 방법의 가짓수를 늘렸습니다.

권리장전이나 프랑스 인권선언, 미국의 독립 선언문 역시 이러한 인쇄 매체에 기록되어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공표되었고, 인권의 범위는 고대와 중세에 비해 훨씬 확대되었습니다. 서사의 보급이 곧 인권의 범위를 넓힌 것이었죠.

물론 이때도 인권에서 배제되어 있던 계층은 여성으로, 여러 편견으로 인해 지식과 서사로부터 격리된 여성들의 인권에 주목한 사람은 적었습니다. 하지만 책이라는 매체의 등장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등 1세대 페미니스트의 목소리를 책이라는 형태로, 즉 서사의 형태로 남겼기 때문에 20세기에 그녀의 글이 재발견되며 페미니즘이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근대 이후부터는 선거권의 확대가 곧 인권의 확대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권리가 선거권이라는 것은 인권을 서사와 등치 시켜놓고 보았을 때 참으로 오묘합니다. 나를 다스릴 권리자를 내 손으로 뽑을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한다는 것은 곧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하나의 주체로서, 서사를 가진 객체로서 존중받고 권리를 획득하였다는 증거인 셈이죠.

영국의 경우 제5차에 걸친 차티스트 운동으로 인권이 확대되어갔습니다. 제1차 차티스트 운동이 벌여진 1832년만 하더라도 전체 인구 중 5.9%의 부르주아 시민계급에만 주어졌던 선거권이 1867년 제2차 차티스트 운동에선 14.5%의 도시 노동자와 소시민에게 확대되었고, 1918년 제4차 차티스트 운동에선 남자는 만 21세, 여성은 제한적으로 선거권이 인정되어 74.8%의 이들에게 선거권이 돌아갔습니다. 1928년 제5차 차티스트 운동을 계기로 남녀평등, 만 21세 이상에게 평등하게 보장되는 보통 선거권이 보급되었죠.

 

3. 매체가 극히 발전한 오늘도 서사는 불공정하다

분명 인권은 약 200년 만에 엄청난 진일보를 이루었습니다. 신화시대에서 영웅적 개인의 시대가 오기까지 수만 년, 또 왕과 귀족의 시대에서 시민의 시대가 오기까지 약 2천 년, 그리고 일부 시민들의 사회에서 모든 인간에게 인권이 확대되기까지 약 5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에 비하면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이 인권의 빛을 보고 있는 셈이지요.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 능력사회, 혹은 평등한 민주주의 사회에서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이번 2022년 대선과 장애인 이동권 시위에 대한 몇몇 사건이 특히 그러하다고 저는 느낍니다. 제가 앞서 ‘인권이 서사의 보급과정이다’라고 이야기한 것은, 그러한 점에서 이번 대선과 장애인 이동권 시위에 대한 서사는 정말로 불공평했기 때문입니다.

이대남 서사는 정말 이대남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걸까?

많은 매체에서 그들의 서사와 이야기가 지워졌습니다. 언론과 매스컴은 이번 대선에서 이대남이라는 신조어를 만들 정도로 20대 남성들의 목소리와 그들의 서사에 귀를 기울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공신력 있는 많은 지표들이 여성들이 차별받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음에도 여성들의 서사엔 크게 기울이지 않았습니다(이대남 현상에 대한 지표가 궁금하신 분들은 책 『20대 남자, 남성 마이너리티 정체성의 탄생』을 참고해보시길 바랍니다).

여성들이 토로하는 유리천장의 문제부터 성폭력과 성희롱, 격해지는 젠더 갈등. 목소리를 내고 여성들이 스스로의 서사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늘었습니다. 그런데 그 서사에 주류 매체는 귀를 기울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대남들은 서사를 획득하고 자신의 인권을 지켜냈을까요? 대선 이후 이대남이라는 용어가 쏙 들어간 것을 보아하니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장애인 이동권에 대한 목소리 역시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강경한 시위에 나오기까지 이들의 서사는 그림자 영역에 있었습니다. 때문에 이들은 자신들의 서사를 널리 알리기 위해 강경한 시위라는 형태를 취했고, 많은 비난과 우려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매스컴 앞에 서기로 결심했습니다. 자신들의 서사를 이야기해야 인권이라는 권리를 쟁취할 수 있으니까요.

 

마무리하며

메타버스라는 새로운 매체는 이제 어린아이들에게 서사를 보급해 줄 것인가?

정리해 보겠습니다. 인권은 지식의 독점 와해, 매체의 보급과 함께 발전해왔습니다. 지식의 보급과 서사의 분산은 인권 감수성이 높은 사회를 만듭니다. 하지만 모든 매체들이 기록을 담당한다고 해서 평등적이진 않습니다. 신문과 텔레비전은 남성의 시대에, 유튜브나 SNS는 밀레니얼의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다음 세대의 인간들에게 그리 평등하진 않습니다. 땅을 먼저 선점한 이들의 문화나, 영향력이 짙게 배이기 때문이겠죠. 구두 언어는 부족적 특징이, 인쇄 언어는 시각 중심의 파편적 특징과 가부장제가 짙게 녹아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여전히 자신의 목소리를 담을 수 있는 매체가 있고, 거기에 목소리를 남긴다는 행위 자체에 인권을 확대시킬 저력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매체와 역사가 그 과정을 증명해왔듯이.

원문: 몰라도아는척의노예 도비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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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 누가 제일 잘못했는지 따져봐야 할까요? https://ppss.kr/archives/252352 Mon, 13 Jun 2022 04:22:26 +0000 http://3.36.87.144/?p=252352 ※ 저번 시간에는 「팬데믹은 앞으로 다가올 기후위기의 “개막식”일 뿐이다」이라는 글에서 SF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실제 기온이 오르면 벌어질 기후 시나리오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왜 이렇게 절망적인 시나리오가 임박했는데도 기후 행동이 어려울까요? 똑똑한 사람들이 내놓은 시나리오는 책으로도 제법 많이 소개되어 있고, 이미 인지하고 있는 사람도 많습니다. 책을 추천받아 읽기도 하고, 채식주의나 제로 웨이스트 등의 친환경 트렌드에 관심을 가지고 행동하기도 하고, 관련 상품을 직접 구매해서 사용하는 개인적 실천까지 다다른 사람도 많습니다.

특히 2021년은 놀라울 정도로 제로 웨이스트나 ESG 경영이라는 친환경 키워드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일부 기업과 정부는 ‘녹색 에너지’라는 형태의 해결책을 개발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해결책을 설치하고 확대하는 데 필요한 정치적 단결이나 경제적 힘의 집결, 의식의 유연성을 갖추지 못한 상태입니다. 얼마 전 마무리된 COP26(유엔기후협약 당사자 회의)는 초창기 의제였던 ‘석탄 연료 사용 폐지’에 극적으로 가까워지는 듯했으나, 결국 ‘단계적 감축’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사실상 이전 목표였던 기온 상승 2도 억제라는 목표는 포기한 듯합니다.

단계적 폐지가 사실상 번복된 상황에 고개를 숙인 알로크 샤르마 COP26 의장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시스템을 세운다는 것은, 전 세계를 쌓아 올린 탄소 기반의 교통과 에너지, 공업과 농업 시스템을 처음부터 뜯어고친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는 개인적인 실천이 아닌, 기후를 구제하겠다는 공동의 목표 아래 정치적인 행동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와도 같습니다. 즉 기후를 위해 표를 던져야 하고, 표심을 잡기 위해 친환경적인 정책을 내세우는 정치인까지 나타나야 한다는 거죠.

하지만 이렇게 정치적인 기후 움직임은 포착하기도, 실천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우선 기후 행동은 다 같이 수행해야 하는 팀 과제의 성격입니다. 그런데 효능감은 잘 체감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의 역사와 문명의 끊임없는 진보를 믿고 있고, 그 진보의 혜택이 자신에게도 돌아올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사실상 인류의 역사 전체로 보면 5%에 불과한 발전의 역사는 일탈에 가깝고, 그 짧은 기간 동안 지구를 황폐화시켰는데도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기후위기를 위한 단합이 어려운 것은 ‘기후위기의 책임 소재가 누구에게 있느냐?’라는 질문에 명확하게 답하기 어렵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노를 저어야 하죠?

분명 탄소를 가장 많이 배출해서 피해를 일으키는 사람이 있고, 피해를 입는 사람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흔히 자연법상의 질서에서 가해자가 피해자가 보상하는 형태를 일반론적인 정의로 합의합니다. 그렇다면 기후위기의 책임은 누가 가장 강하게 져야 할까요? 지구 온난화의 진위를 둘러싼 많은 공방이 있었지만, ‘인류세’라는 지질구분학적 용어가 학계와 일반인들 간의 간극을 뛰어넘어 유행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일단 인간이 나쁜 것은 확실합니다.

원래 지질학에서는 지질학적 변화가 가시적으로 보일 때 붙은 지층의 세대를 구분하는 개념으로 ‘세’라는 용어를 씁니다. 인간이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의 세월이 지나야 구분되는 층이 발생하죠. 하지만 인간이 눈부신 현대문명을 쌓아 올린 지 몇십 년이 채 되지 않은 이 시점에 그런 변화가 나타났다는 놀라운 사실 덕분에, 현대를 인류세로 드라마틱하게 정의하자는 주장이 등장했습니다.

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오즈본 월슨(Edward Osborne Wilson)은 수많은 생물 종이 사라지고 곰팡이와 세균 정도만 남은 암울한 미래를 예견하며, 일명 ‘고독세’라는 거창한 이름까지 붙였습니다. 다른 누군가는 불로 음식을 조리하면서 시작된 인간의 문명이 내연기관까지 발명하며 기후오염을 일으켜 망하게 생겼다고 ‘화염세’라는 얄궂은 이름을 붙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모두 공통적으로 인간이 자연에 끼친 해로움을 강조하는 개념입니다. 그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 될 것입니다.

그 책임을 개인적 차원에서라도 감당하고자 ‘제로 웨이스트’ 라이프 스타일이나 탄소 감축에 동참하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자세입니다. 하지만 극적인 변화를 위해선 단연코 국가 레짐 단위의 변화, 즉 투표를 통한 정책 변화가 필수적입니다. 보셨다시피 국가 내부에서 여러 정책 안건을 뚫고 기후위기가 메인 안건으로 올라오기는 매우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세계 질서를 위해서라도 가장 많은 피해를 낸 자, 즉 역사 속에서 이산화탄소를 가장 많이 배출한 국가를 특정해서 그 책임을 물게 하는 것이 최선의 답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곧 이러한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선 책임 기준을 정하는 것부터 문제입니다. 당장 오늘의 탄소 배출량을 따질 것인지, 과거까지 소급해서 합친 양을 따질 것인지부터 의견이 분분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번 따져 봅시다. 누구에게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 합리적일까요?

Oak Ridge National Laboratory, “global. Regional, and National Fossil-Fuel CO2 Emissions

역사 속 이전 세대들에게 책임을 돌리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물론 탄소기반 문명은 18세기 영국에서 석탄을 태우기 시작할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화석연료 기반의 이산화탄소의 절반 이상은 1989년 이후에 배출되었습니다. 1751년 이후로는 1,578기가톤이 배출된 반면, 1989년 이후로는 그 절반을 넘는 820기가톤의 이산화탄소가 방출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역사의 탓으로 돌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집단적인 행동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Carbon Dioxide information Analysis Center, Oak Ridge National Laboratory, “global. Regional, and National Fossil-Fuel CO2 Emissions”(Oak Ridge,2017)

 

어느 나라가 제일 잘못했는지 따져보는 게 좋을까요?

그렇다면 역시 탄소 배출량이 높은 국가 순으로 줄을 세워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 타당할지도 모릅니다. 2018년을 기준으로 배출량을 따지면 중국이 27%, 미국이 15%, EU가 9%, 인도가 7%로, 20세기 후반 경제 강국으로 성장한 국가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COP26에서 밝힌 1.5도 이내의 기온 억제라는 감축 목표를 위해서 해당 국가들의 협력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후담론에서 국가 단위의 해결책은 제대로 작동한 사례가 드뭅니다. 산업혁명 이후 태어난 탄소 기반 문명에서는 화석연료를 더 많이 사용할수록  국력이 강해지는 게 상식이었습니다. 국가경쟁력을 위해 기후는 언제나 차후의 문제로 미뤄졌습니다. 그 결과로 세계 2위의 탄소 배출국인 미국은 이름에 걸맞는 책임은커녕 2017년 6월, 트럼프 대통령의 지휘 아래 기후 협약에서 탈퇴했습니다. 심지어 비용이 많이 드는 친환경 에너지 대신 효율이 좋은 화석 연료를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한다(!)는 망언까지 하기도 했습니다.

출처: 이코노믹리뷰

결국 기후위기 타파는 언제나 국력의 우위를 지키려는 목표의 하위 목표로 설정됩니다. 그래서 기후 변화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보다는 국가 간 경쟁 조건과 득실을 계산해 경쟁에서 승리하는 시나리오만을 찾게 됩니다.

따라서 국가레짐을 기준으로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1. 국가레짐을 기준으로 탄소배출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은 효과적이지 않았다.
  2. 탄소 기반 문명에서 탄소배출=국력인 상황에서 기후 문제는 언제나 국가경쟁력에 밀려 후순위 의제였다.
  3. 국가 간 경쟁 조건과 게임 이론을 가정할 시 승리하는 시나리오만 찾느라 국제협력은 뒷전이 된다.

국가 단위의 책임 문책이 어려운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북반구와 남반구,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의 탄소 배출에 대한 딜레마 때문입니다.

개도국은 빈곤과 기후위기 사이의 딜레마에 봉착해 있습니다. 선진국의 탄소 기반 경제 모델을 그대로 따라 해서 빈곤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탄소 문명을 가속화할수록 마주할 기후위기에는 취약합니다. 기후위기의 이자가 스스로에게 거대한 피해를 입히는 형태로 돌아오게 되는 겁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공평하지 않다’는 이유로 이들의 무제한적인 탄소 배출을 허락할 수도 없는 일이니까요. 선진국은 무제한적인 탄소 기반의 문명을 마음껏 누려 발전을 이룩했으니 공평하지 않다고 불만을 가질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이들의 탄소 배출을 무제한 허용하는 것은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적절한 해결책이 될 수 없기 때문이죠.

인당 탄소 배출량은 적지만 인구와 경제 규모로 인해 국가 전체의 탄소 배출량이 높은 중국과 브라질 등이 이러한 케이스에 해당합니다. 이 국가들에게 협조를 요구하는 것은 필수적이지만, 이들은 역사적인 이유나 현실적인 이유를 핑계로 기후 대응에 필요한 기준을 따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Unsplash

 

너무 어렵다면, 새로운 기준을 세워 봅시다

때문에 국가 간 이득 관계를 넘어선 다른 책임 기준으로 제시되는 것 중 하나는 기업 단위의 책임제입니다. 1751년부터 2010년 사이 약 260년 동안 배출된 온실가스의 63%는 90개의 탄소 메이저 기업으로부터 발생했고, 이에 대한 책임과 역할을 해당 기업들이 감수해야 된다는 주장입니다.

90개의 메이저 기업은 주로 화석연료와 시멘트, 철강 등의 분야에 분포되어 있습니다. 이 업계에 대해 강력한 규제를 고려하는 것 또한 타당한 책임분배의 원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국가와 달리 소비자들과 투자자들이 타깃을 특정해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도록 압박을 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소비자들이 더욱 기후위기에 동참하게 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후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노를 젓기 위한 여러 방안 중 저를 가장 매혹시켰던 것은 기후위기를 인권의 시각으로 바라볼 것을 제안한 프레임의 전환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인권을 기준에서 바라보는 기후위기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원문: 몰라도아는척의 노예 도비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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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은 앞으로 다가올 기후위기의 “개막식”일 뿐이다 https://ppss.kr/archives/252299 Fri, 20 May 2022 06:10:21 +0000 http://3.36.87.144/?p=252299 “다른 문명은 어떻게 된 거지? 다들 살아는 있어?”

갑자기 뜬금없지만 내일 당장 지구가 멸망하는 모습을 상상해보신 적 있나요? <인터스텔라>나, <투모로우>, <2012>, <설국열차>, <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 이런 영화를 보고 난 직후가 아닌 이상 ‘내일 지구가 어떻게 멸망할지 몰라.’라는 상상에 깊게 빠지는 사람은 드물 겁니다. 대부분은 내일 먹을 점심메뉴나 만날 사람, 조금 더 진지한 고민이 있다면 미래설계 같은 것들이 먼저 떠오르겠죠.

매년 봄이나 가을의 인상이 점점 옅어진 것이 느껴질 때면 ‘지구 온난화가 정말 오고 있구나’하는 정도의 실감은 있습니다. 다만 통장에 찍힌 숫자에 대한 걱정을 찍어 누르고 올라오기엔 부족할 뿐이죠. 미디어에 묘사되는 기후위기도 온실가스로 인해 뜨거워지는 날씨와 녹아내리는 빙하,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북극곰 정도랄까요.

얼마 전 『지구 끝의 온실』을 읽다가

부끄럽지만 고백하자면, 저 역시도 ‘지구 멸망’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국내의 젊은 작가들이 불어넣은 일명 ‘SF 붐’ 덕분에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뛰어난 창작자들이 인문학과 페미니즘이 뒤섞인 걸작들을 써 내려가자, 자연스럽게 기후위기를 상상하게 된 것이죠.

기후위기를 다루는 SF소설의 여러 모티브 중 저를 가장 두렵게 만든 것은 단연코 ‘페르미의 역설(Fermi’s paradox)’입니다. 원자폭탄 설계 팀의 일원이자 이탈리아 출신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Enrico Fremi)는 점심시간 동료와 시시콜콜한 잡담에 빠져들었습니다. 대화의 소재는 당시 미국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UFO였죠. 대화를 하다 잠시 우두커니 서 있던 페르미는, 정신을 차린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들 어디에 있는 거지?

우주가 그렇게 광활하다면 우리는 왜 아직도 다른 지적 생명체나 우주 문명과 조우하지 못한 걸까?

페르미의 이러한 상상력에 여러 설정으로 답을 준 SF소설은 많지만, 의외로 답은 굉장히 뻔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탄소 기반 문명을 구축한 지 수백 년이 되지 않아 기후위기라는 문제에 도달한 것처럼, 수백억 년의 역사를 지닌 우주에서 이미 출현한 다른 문명은 서로를 발견하기 전에 스스로를 태워 죽인 것일지도 모르는 셈이죠. 차라리 아서 c. 클라크의 『유년기의 끝』처럼 이미 지적으로든 도덕적으로든 완벽에 가까워진 외계인이 우리가 충분히 성숙해질 때까지 모습을 숨기고 있다는 클리셰를 믿고 싶을 정도입니다.

 

<기생충>이 보여주는 기후 위기의 아이러니

기후위기를 주제로 인권과 정치적 갈등과 연관된 인상 깊은 상상력을 제공한 다른 작품 중 떠오르는 또 다른 작품 중 하나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입니다. 만인에게 평등하게 주어질 것 같은 폭우라는 기후재난이 부유층에게는 그저 잔디가 깔린 넓은 집 앞마당에서 비 오는 날의 캠핑을 즐기게 해주는 해프닝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소득층에겐 기후위기란 침수로 인해 역류하는 똥물 속에서 앞으로의 생존을 위해 돈이 될 만한 물건을 건져 내야 했던 사투의 현장일 뿐입니다.

영화 <기생충> 중

1인당 배출하는 탄소의 양은 저소득층에 비해 고소득층이 압도적으로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책임과 피해는 저소득층의 삶에 직격탄으로 돌아온다는 아이러니는 <기생충>에서 고소득층의 ‘인디언 캠핑’이란 메타포로 상상력을 보태 상징되기도 합니다.

미국은 자연과 조화된 삶을 살아가던 인디언을 정복하고 세계 제일의 탄소 기반 문명을 세워냈습니다. 인디언은 본질을 상실한 채 찌꺼기만 남았습니다. 기생충 속 인디언 시뮬라크르의 홍수 속에서 기후재난은 추억으로 미화될 뿐입니다. 이는 기후위기의 원인 제공자와 피해자가 뒤집히고,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이 전환된 아이러니를 강렬하게 각인시키는 상상력이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기후위기의 책임을 묻는 것은 실타래 풀듯이 간단한 일이 아닐 겁니다. 기후 문제는 결국 우리들이 고민하고 행동해야 될 문제로 남겠죠. 저는 기후전문가가 아니고, 심지어 이 분야를 전공한 사람도 아닙니다. 하지만 굳이 기후 파트를 따로 떼어내 쓰기로 결정한 것은 스스로도 기후위기를 알아가기 위함이기도 하고, 기후위기에 대한 상상력을 공유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한 편의 영화 같지는 않지만, 그렇기에 더욱 신경을 곤두서게 만드는 기후위기에 대한 상상력을요.

 

팬데믹은 앞으로 다가올 기후위기의 ‘개막식’이다

좋아요, 똑똑한 사람들이 준 시나리오를 읽어봅시다. 재난 영화는 기후 위기가 불러올 미래 사회에 대한 상상력을 보여줍니다. 병충해에 의한 식량난에서 탈출하기 위해 삶의 터전을 찾아 은하를 건너는 영화부터 해수면의 상승으로 자유의 여신상이 반쯤 잠긴 채 얼어붙는 영화, 사막화된 지구 속에서 물과 석유라는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 정치적 갈등을 겪는 8기통 테크노 바바리안들에 대한 상상.

어느 것도 겪고 싶지 않은 암울한 미래지만, 지금 상태에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모두 동시에 겪어야 할 미래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그 시나리오의 개막식 같은 증상이 근 2년간 우리의 일상을 갉아먹은 팬데믹입니다.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 될 수도 있는 무시무시한 미래

코로나 팬데믹의 원인으로 지목된 가설 중 하나를 짚어봅시다. 산림 벌채, 도로 건설로 대표되는 인류 문명의 외연 확장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은 야생동물들이 도시로 몰려들었고, 이들이 앓던 질병이 도시의 높은 인구 밀도로 인해 인수 감염의 형태로 나타났다는 증상입니다.

스페인 독감 또한 인수 감염이 전 세계를 물들인 사례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당시에는 바이러스를 분리·보존하는 기술이 없어 정확한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지만, 한 농장에서 인수 감염을 통해 전파가 시작되었다는 추측이 존재합니다(〈익스플레인 : 코로나바이러스를 해설하다, 2020, 넷플릭스 다큐〉) 비정상적으로 밀집된 인구와 가축이라는 비자연적인 환경이, 본래 같은 종끼리만 전파되는 바이러스를 인간에게 옮겨 ‘스페인 독감’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는 주장이죠.

인간의 외연 확장 중 하나인 이주와 운송의 발달은 바이러스의 발이 되어 전 세계로 퍼지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인간은 원래 대륙과 대륙을 건널 운명이 아니었는데, 감당할 수 없는 발을 얻었다’는 주장이죠. 매클루언식 미디어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자면, 인간은 외연적 확장이 극에 달한 나머지 바쁘게 살아야 하는 운명을 떠안고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팬데믹으로 인해 이동이 제한되어 버리는 ‘자가 절단’을 얻어버린 것입니다.

 

1도가 올라갈수록 ‘불지옥’이 되어갈 지구

팬데믹은 기후위기가 불러올 여러 시나리오 중 겨우 한 가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2050 거주불능 지구』의 저자 데이비드 월러스 웰스는 칼럼니스트로 활동해오며 쌓은 방대한 레퍼런스를 통해 2050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줄이지 못할 경우 발생할 12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합니다.

기온이 상승하며 가을이 점점 짧아집니다. 해수면이 상승하고 사막화가 진행되며, 복합적인 기후 변화로 인해 빈곤과 난민 문제가 심화됩니다. 예기치 못한 산불과 재난이 더욱 자주, 높은 빈도로 발생할 것입니다. 바다 생태계는 붕괴되고 팬데믹처럼 인류가 만나 본 적도, 알지도 못하던 바이러스가 전파됩니다. 기후 분쟁이 시작됩니다.

좀 더 시나리오를 단순화시켜 “1도씩 기온이 상승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를 제시하는 분석도 존재합니다(『6도의 멸종 : 기온이 1도씩 오를 때마다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 마크 라이너스). 기온이 2도 상승하면 가뭄이 지중해 연안과 인도의 상당 지역을 강타할 겁니다. 전 세계 옥수수와 수수 농장이 문을 닫아 세계 식량 공급은 패닉에 빠질 겁니다. 옥수수를 사료로 제공하는 축산 농장을 포함해서요!

심지어 공기 중 이산화탄소량이 늘어날수록 작물의 영양소가 떨어질 것이라는 충격적인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The Great Nutrient Collapse」Helena Bottemiller Evich, Politico(2017)). 당 자체는 늘어나지만 그만큼 건강에 유익한 다른 영양소, 예컨대 칼슘이나 단백질, 철분이나 비타민C 같은 영양소가 줄어들면서 불량식품처럼 변하고 말 거라는 주장이죠. 

불량과자 같아지는 식물들의 영양소. 탄소가 계속해서 증가한다면 Helena Bottemiller Evich, “The Great Nutrient Collapse” Politico

3도가 오르면 4억 명 이상의 사람들이 물 부족을 겪을 겁니다. 4도가 오르면 적도 지방의 주요 도시는 너무 더운 나머지 사람이 살 수 없는 공간으로 변합니다. 북위도 지방조차 여름마다 폭염으로 수천 명의 목숨이 위협받고, 인도는 32배의 폭염이 발생하여 93배 많은 사람들이 위험에 노출될 겁니다.

사하라 사막과 근접한 남부 유럽은 가뭄에 시달리게 되고, 카리브해 근방은 21개월 더 오래 지속되는 건기를 겪게 되죠. 북부 아프리카는 더욱 심각해서 건기가 60개월 지속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5년간 비를 제대로 못 볼지도 모른다는 것이죠. 물 부족으로 고통받는 사람은 2050년 즈음에는 아시아에서만 약 10억 명이 될 것입니다. (「Projetions of Water Stress Based on an Ensemble of Socioeconomic Growth and Climate Change Scenarios : A Case Study in Asia」, Charles Fant)

안 그래도 산불이 잦은 지중해 지역은 2배, 미국은 6배 이상 화재가 늘어납니다. 2017년에 가을 캘리포니아에서 발생한 토마스(Thomas) 화재는 10만 명에 달하는 피난민을 발생시켰는데, 이런 최악의 화재가 2017년만 해도 캘리포니아 주에선 9천여 건 발생했습니다. 지구가 뜨거워질수록 최악의 화재가 덮쳐올 확률 역시 동반 상승하는 것입니다.

생태계 그 자체가 변화하면서 닥쳐올 문제들도 만연합니다. 뜨거워지고 말고를 떠나, 공기 자체도 건강에 나빠질 겁니다. 기온 상승이 불러일으킨 가뭄은 공기의 질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쳐 분진 노출, 분진 폐렴이라 불리는 현상을 일으킵니다. SF소설처럼 온 지구를 유해한 분진이 뒤덮어 분진을 막기 위해 돔을 덮는 도시 국가가 나타날지는 모르겠지만, 분진으로 인해 사망률이 2배 올라가고 입원이 3배 이상 증가하는 치명적인 재난이 나타날 겁니다. (「Drought Sensitivity in Fine Dust in the U.S Southwest」 Ploy Achakulwisut) 미디어에도 자주 노출되었던 피해 중 하나인 산호 백화현상(Coral Bleaching)은 바닷속 생태계의 근원이자 식량 공급원인 황록 공생 조류를 사멸시켜 바다 생태계의 순환 시스템에 치명적인 피해를 낳을 것입니다. (Robinson Meyer, “Since 2016, Half of All Coral in the Great Barrier Reef has Died”, The Atlantic, 2018)

「Yellow Fever Circles Brazil’s Cities」 Shasta Darlington and Donald G. Mcneil Jr.

팬데믹과 같은 바이오 하자드는 바이러스 인수 감염뿐만 아니라 생물을 매개로 한 전염으로도 더 자주 발생할 것입니다. 모기의 입이 비뚤어진다는 처서가 지났는데도 모기가 사람 피를 빠는 일이 잦아지니 더욱 체감되는 영역이기도 하죠.

황열병은 원래 아마존 분지 지역, 혹은 밀림에서만 일어나는 병이었습니다. 해당 지역을 방문하는 여행객만 걱정할 문제였죠. 그러나 기후 상승으로 인해 2016년부터 모기의 활동 범위가 넓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황열병 역시 아마존 분지를 벗어나 상파울루와 리우데자네이루 같은 대도시에도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죠. 저소득층이 거주하는 판자촌을 중심으로 3천만 명 이상의 사람이 치사율 3~8%에 이르는 전염병과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Yellow Fever Circles Brazil’s Cities」 Shasta Darlington and Donald G. Mcneil Jr.)

이처럼 기후위기는 생각지도 못하는 방식으로, 알지도 못하는 바이러스를 더 빨리, 더 많이 인류에게 전염시킬 수 있습니다. 

비용도 큰 문제입니다. 다들 겪은 것처럼, 팬데믹은 단순히 치사율을 떠나 사회적 기반과 시스템을 뒤흔들 정도로 거대한 비용의 문제를 남겼습니다. 선진국들은 비교적 빠른 속도로 정상화되긴 하였지만, 몇 세기 전 일부 국가가 다른 지역을 식민지 삼아 한껏 누렸던 자산을 바탕으로 되찾은 안정일지도 모릅니다.

늘어나는 비용 부담을 감당하지 못한 국가에서는 기후 난민이 발생하여 정처 없이 세계를 방황하고 있습니다. 2018년에 발표된 세계은행 보고에 따르면 2050년까지 탄소 배출량이 줄어들지 않을 경우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와 남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이 세 지역에서만 기후 난민이 1억 4000만 명 이상 발생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Armed-Conflict Risks Enhanced by Climate-Related Disasters in Ethnically Fractionalized Countries」 Carl-Fried Schleussner, et al,)

 

마치며

사실 이렇게 끔찍한 시나리오를 늘어놓는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똑똑하고 많이 아는 사람들이 이미 많이들 한 이야기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그리고 “왜 반응하지 못했는지”라는 열린 질문입니다. 우리의 발치에 덩그러니 놓인 이 질문에 대답할 때가 되었습니다.

원문: 몰라도아는척의 노예 도비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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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베이징 올림픽을 되돌아보며: 올림픽 속 이데올로기 충돌의 순간들 https://ppss.kr/archives/252297 Fri, 18 Mar 2022 06:01:16 +0000 http://3.36.87.144/?p=252297 이번 주제는 전 세계의 스포츠 축제, 올림픽에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그렇다고 스포츠 선수나, 경기에 대한 이야기냐고 물으시면 그건 아닙니다. 스포츠보다는 이데올로기에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베이징 동계올림픽은 1932년부터 84년까지 이어진 냉전 올림픽(Olympic ColdWar)을 떠올리게 하는 점이 많았습니다. 첫 번째는 미국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전쟁 분위기를 자아내는 와중에 개최된 올림픽이라는 점. 두 번째는 바로 중국에서 열린 올림픽이라는 점입니다.

특히 선수들에 대한 검열이나 편파판정에 대한 이슈는 냉전시기 과열된 올림픽 양상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였는데, 전 국민을 어처구니없게 만드는 편파판정이 계속되었죠.

쇼트트랙에 아이템전이 웬 말? / 출처: SBS

그도 그럴 것이 한 언론 칼럼에서 붙여진 이번 올림픽의 별명은 ‘시진핑의 시진핑에 의한, 시진핑을 위한 올림픽’입니다. 이번의 과열된 올림픽 양상은 올해 하반기에 시진핑 주석의 연임을 결정짓는 20차 당 대회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죠. 공산당에서 보통 주석은 2연임까지가 관례고, 3연임 정도의 장기집권을 위해서는 그만한 명분과 업적이 필요합니다.

시진핑의, 시진핑에 의한, 시진핑을 위한 올림픽

때문에 이번 올림픽에서는 중국 내 소수민족의 분쟁을 잠재우면서 겉으로는 포용하는 제스처를 취하고, 중국 선수단이 메달을 많이 따 애국심을 고양시켜 ‘위대한 강대국 중국’이라는 이미지를 중국 인민들에게 과시하려는 의도를 띠고 있다는 겁니다. 때문에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을 핑계로 해외 선수들의 움직임을 철저히 통제하고, 이해할 수 없는 편파판정을 빈발하기 시작했다는 해석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착한 중국인은 죽은 중국인뿐…’ 등의 극단적인 혐오를 표출할 필요는 없습니다. 올림픽이라는 메가 이벤트는 항상 국가 원수들의 철저한 계산과 국가적 이데올로기가 도사렸던 장소이기 때문이죠. 지금은 비교적 자유롭지만 부모님 세대만 하더라도 일상생활마저 이데올로기 경쟁이라는 국제 정세로부터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스포츠에는 훨씬 정치적 목적이 얽혀 있었고요.

때문에 이번 글에선 2022 베이징 동계 올림픽처럼 올림픽에 반영되었던 국가들의 계산과 국제 정세 변화의 순간을 연대기 순으로 뽑아봤습니다. 올림픽이 정말로 선수들과 스포츠만을 위한 공간이었는지, 들여다보시죠.

  • 연대기의 분류는 엄격히 학문적인 분류가 아닌 글쓴이 개인의 견해가 담겨있습니다.
  • 포스터, 로고 등 사료는 모두 IOC 홈페이지가 출처로 별도의 저작권 표기를 생략합니다.

 

1. 올림픽의 시작, 그 속의 제국주의(1896~1936)

최초의 올림픽

가장 근대적인 올림픽의 시작은 1896년 4월에 열린 아테네 올림픽입니다. 이때는 독일과 프랑스 영국을 중심으로 한 14개국이 참여했고, 유럽에 국한된 경기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이 해에 아관파천이 발생했습니다. 전 세계 속 제국주의의 열망이 한창 확대되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당시만 해도 올림픽은 그다지 큰 대회가 아니었습니다. 뒤이어 열린 1900년 파리 올림픽만 해도 파리 만국 박람회, 즉 파리 엑스포 부속 행사로 진행되었습니다. 프로 선수와 아마추어 선수가 뒤섞여 경기를 진행했죠.

1900 파리 엑스포 조경 일러스트
1900 파리 올림픽 포스터. 여성이 그려져 있지만 정작 여성 참여자는 20명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당시는 한창 제국주의가 유럽에서 활개를 치던 시기였습니다. 엑스포는 자연스레 선진국이 자국 발전을 과시하는 장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쟁이 과열되어 발생하는 해프닝 역시 많았습니다. 이러한 면모가 돋보이는 일화가 1937년 파리 엑스포에서 발생한 독일과 소련의 경쟁입니다. 무려 주최자인 프랑스보다도 전시관을 크게 짓겠다며 소련과 독일이 자존심 경쟁을 벌인 것이었습니다.

1937 파리 엑스포의 전경. 좌측이 독일 전시관, 우측이 소련 전시관, 가운데가 주최국인 파리의 전시관이다.

서로 더욱 웅장하게, 더욱 크게 짓겠다고 경쟁한 결과 주최국인 프랑스 전시관보다 2배 큰 규모를 가진 전시관이 지어졌습니다. 이렇게 과열된 경쟁 양상이 전쟁으로 이어졌다고 말하면 성급한 결론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실제로 4년 뒤인 1941년에 독일이 조약을 깨고 소련을 침공합니다.

이렇듯 이 시기는 자신들의 체제와 국가가 뛰어나다고 자랑하고 싶어 안달을 내던 시대였습니다. 초기 엑스포 속의 부설 프로그램으로 열린 올림픽 역시 제국주의 시대의 과열된 경쟁심리가 반영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올림픽은 또 다른 체제 선전의 장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1936 베를린 올림픽

이데올로기 선전의 장으로 쓰였던 대표적인 올림픽은 1936년 독일에서 열린 베를린 올림픽입니다. 세계 최초로 TV로 중계한 올림픽이자 히틀러가 선전을 위해 개최했던 올림픽으로도 유명합니다.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나치는 영화감독을 고용해 올림픽 경기를 예술적으로 촬영하고 아리아인의 신체의 미적 아름다움을 카메라로 담는 동시에, 독일이 금메달을 독점하여 ‘아리아인의 생물학적 우수성을 홍보한다.’는 정치적인 목적을 공고히 하였습니다.

아직 나치의 폐단이 밝혀지기 전이라 나치의 경례가 자연스러운 것은 물론
미국과 영국 등 일부 국가를 제외한 참여국들도 나치 경례를 하며 경기장에 입장했다

당시의 충격적인 점은, 미국과 영국을 제외한 국가의 선수 입장 시 나치 식 경례를 하면서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올림픽 개최 이전의 독일은 공원에 ‘유대인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걸려 있을 정도로 차별이 심각했습니다. 그러나 올림픽 기간 동안에는 유대인에 대한 차별도 중단되었습니다. 그래서 TV로 방영되는 독일은 정말 평화롭고 잘 발전된 선진국으로 포장되었죠. (이런 독일과 히틀러, 나치가 5년 뒤 소련과 조약을 어기고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다들 상상조차 못 했을 겁니다) 당시 베를린 올림픽은 전 세계 50개 언어, 3천 개 이상의 프로그램으로 방송되어 효과적으로 나치를 선전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2. 냉전의 개막, 그 속에 담긴 이데올로기(1948~1984)

1952 헬싱키 올림픽

1952년 헬싱키 올림픽. 우리에게는 가슴 아픈 시대였지만 올림픽은 세계화가 이루어진 시기였습니다. 이스라엘과 소련이 처음으로 올림픽에 출전한 해이기도 합니다. 냉전의 분위기가 과열되고 있던 시대였지만 올림픽 자체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이념과 갈등을 뒤로하고 평화를 위해 전 세계가 함께 할 수 있다는 상징적인 모습을 연출했죠.

개최지 선정 또한 의의에 맞게 회원국 투표를 통해 결정되었습니다. 특징이 있다면 냉전 시대인 만큼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정치 노선에 따라 선수들이 따로 분리되어 수용되었다는 것 정도겠네요.

그러나 이렇게 평화로운 모습이 무색할 정도로, 올림픽도 과열되는 양상을 보여준 시기이기도 합니다. 반대 진영 선수의 업적을 폄훼하는 프레이밍과 도를 넘은 비판이 쏟아졌으며, 서로의 올림픽을 보이콧하는 사태까지 이어졌죠.

1980 모스크바 올림픽. 러시아 하면 생각나는 곰 마스코트가 인상적이다

1980년의 올림픽은 모스크바에서, 1984년의 올림픽은 미국 LA에서 열렸습니다. 냉전 시대를 주도한 양측의 우두머리가 주도하는 올림픽이 연속해서 개최된 셈이죠. 결과는 불 보듯 뻔했습니다.

1980년 소비에트 연방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풍자한 만평
민주주의 진영의 올림픽 보이콧을 보여주는 포스터

1980년 소비에트 연방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습니다. 무자헤딘-알카에다-탈레반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만든 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때문에 80년 올림픽은 이에 반발한 미국과 동맹국인 한국 등 수십 개 나라가 보이콧을 선언했습니다. 그러자 이어서 열린 LA올림픽에 소련을 위시한 14개 공산권 국가들이 보이콧을 선언했습니다. 이 시기만 해도 올림픽의 권위가 연달아 실추되는 모습을 보였던 거죠.

1988년 서울 올림픽은 미국의 입장에서는 민주주의 선전의 장이 되었습니다. 한국이 6.25 전쟁을 딛고 일어나 이렇게나 현대화되고 발전하였다는 것을 전달할 수 있었던 기회였기 때문이죠. 그 덕분에 당시 공산권 국가였던 쿠바와 에티오피아, 북한 등은 보이콧을 선언했습니다. 그래도 러시아를 비롯한 다른 공산권 국가들은 참여했고, 12년 만에 온전히 이데올로기와 관계없이 개최된 성공적인 올림픽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3. 이데올로기에서 이어진 ‘선수 흠집 내기’

이런 보이콧 외에도, 양국의 매스컴은 각자의 이데올로기에 흠집을 만들기 위해 전력을 다했습니다. 지금도 미국에서 인기 있는 스포츠 잡지인 <Sports Illustrated>에선 올림픽에 출전한 소련 선수들에 대해 노골적으로 비인간적인 단어를 선택해 보도했습니다. 소련의 전체주의로 학대당하고 있다며, 부정적인 메시지와 함의를 담았죠.

영양사의 감시 아래 하루 5천 칼로리의 음식을 쑤셔 넣었다.

  • Ezra Bowen and George Weller, “The 1956 Winter Olympics,” Sports Illustrated 20(Jan, 1956), p. 27

또한 소련의 여성 운동선수들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유포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미국은 생물학적 성에 기초한 남녀 차별은 몇 세기에 걸쳐 약화되어가는 추세였지만, 스포츠 분야에서는 영향력이 미미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언론 매체는 뛰어난 기량을 보인 소련 여성 선수들을 여성으로서의 성 정체성을 포기한 집단으로 그렸습니다. 일례로 1970년 7월 2일 자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다음과 같은 글을 게재했습니다.

미국에서 여성 육상 종목의 발전이 더딘 이유 중 하나는, 소련의 타마라 프레스와 같은 선수들이 선수로 뛰기 때문이다. 이들은 여성이라기보다는 남성으로서의 특징을 더 많이 갖고 있다. 그녀의 사진을 본 미국의 부모들은 그들의 딸을 수영이나 다른 종목으로 인도하게 될 것이다.

  • Los Angeles Times, 2 July 1970, E2
전 소비에트 연방의 육상 선수 타마라 프레스

소련 여성 운동선수들의 성 정체성에 대한 의심은, 그들이 올림픽에서 보여준 기량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폄훼 시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육체를 공산주의 체제의 실패의 상징으로 활용하고, 성 질서를 파괴하는 이들처럼 그린 것이죠. 어떻게 보면 체제의 비인간성을 드러낸 영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소련의 전략은 달랐습니다. 자국의 매체를 통해 자국 선수들의 우월성을 홍보하려 했습니다. 소련의 스포츠 선수들은 단지 운동능력이 뛰어나 뽑힌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에 대한 신념으로 무장해서 국제무대에서 체제의 대표자 역할을 수행하는 일명 ‘운동복의 외교관’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이죠.

정리해서 말하자면 미국은 소련의 선수를 ‘인간 기계, 로봇’으로 묘사했습니다. 반면 소련 매체는 이들을 조국의 영광을 위해 분투하는 전사’라고 표현했죠. (※ Mertin, “Presenting Heroes,” p. 476)

올해 베이징 올림픽도 이와 비슷한 양상을 띄고 있습니다. 1월 25일 중국 선수단의 출정식이 그런 성격을 반영합니다. 당시 선수단 이런 구호를 외쳤습니다.

영수에게 보답하기 위해 목숨을 걸자. 일등을 다투고 패배는 인정하지 않는다. 총서기와 함께 미래로 가자!

여기에서 영수와 총서기는 모두 시진핑 주석을 의미합니다. 냉전 체제의 소련 스포츠 선수단과 거의 유사한 성격을 띠고 있죠.

 

4. 올림픽이 평화를 위한 공간이 될 수는 없을까?

선수들은 이데올로기와 관계없이 인사와 교류를 주고받았습니다. 2022 동계 올림픽에서 한국 숙소를 찾은 외국인 선수들이 인사차 만들고 간 눈사람입니다.

물론 소련 선수와 개인적으로 조우한 미국 선수들의 반응은 양국의 딱딱한 반응과는 달랐습니다. 1952년 올림픽 선수촌의 소련 대표 팀을 방문한 이들의 반응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들 모두가 결국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기뻐했다.

소련 선수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죠.

선량한 마음을 가진 귀국의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의 감사 인사를 전해주십시오.

이러한 모습에서 미국의 언론매체가 그리는 바와 같이 고립적이고 폐쇄적인 소련 선수들의 이미지믐 찾아볼 수 없었죠. (※ John Bale, “’Oscillating Antagonism:’: Soviet-British Athletics Relations, 1945-1960,” in East Plays West, p. 95)

분명 올림픽에는 정치적 목적과 이데올로기가 짙게 담겨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까지 그 과열된 양상과 분쟁에 동참해줄 필요는 없습니다. 올림픽에 참여하는 사람들과 올림픽을 보는 사람들이 도전과 의지, 평화를 믿는다면 올림픽은 정말로 그런 장소가 될 테니까요.

원문: 몰라도아는척의노예 도비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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