ㅍㅍㅅㅅ https://ppss.kr 필자와 독자의 경계가 없는 이슈 큐레이팅 매거진 Thu, 15 Dec 2022 04:37:17 +0000 ko-KR hourly 1 https://wordpress.org/?v=5.8.10 https://ppss.kr/wp-content/uploads/2015/07/ppss-100x100.png ㅍㅍㅅㅅ https://ppss.kr 32 32 영화 〈팔도기생〉, 당대를 풍미한 톱 배우를 한자리에서 만나다 https://ppss.kr/archives/255123 Thu, 15 Dec 2022 04:37:17 +0000 http://3.36.87.144/?p=255123 영화 〈팔도기생〉은 1968년 제작된 영화로, 1960년대 후반에 유행했던 팔도 시리즈 중 하나다. 팔도 시리즈는 대체로 전국 각 도에서 모인 출중한 인물들이 서울 출신의 주인공을 맏형으로 연대하여 공동의 적과 싸우거나, 공동의 과제를 해결하는 포맷으로 되어 있다.

〈팔도기생〉은 주인공 박효천(김진규 분)이 각 지방의 명기(名妓)들을 한 명씩 만나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으며, 팔도 기생들 간의 횡적인 연대는 보이지 않는다.

영화 〈팔도기생〉의 포스터

 

줄거리

흥선대원군은 풍류남아 박효천(김진규)을 한양 명기(名妓) 녹수(김지미)의 집으로 부른다. 이 자리에서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 낙성을 기념하는 행사에 조선 전국의 명창들을 불러 축하의 노래를 부르게 함과 아울러 민속 가락을 정리하라고 이른다. 대원군의 명을 받은 박효천은 전국 풍류여행을 떠난다.

그렇게 박효천은 전국 각도의 기생을 만난다. 함경도의 이름난 기생 태현실을 만나 〈신고산 타령〉을 듣고, 평양에서는 화선(문희 분)을 만나고, 송도에서는 초혼(전양자 분)을 만난다. 전라도에서는 절세가인 금향(남정임 분)이 사또의 수청을 거부하여 노여움을 사게 되는데, 박효천은 사또를 달랜 후 금향을 만나 남도가락을 듣는다. 진주에서는 남홍(윤정희)를 만나 시창을 듣는다.

낙성식 날, 경복궁에서는 성대한 잔치가 열린다. 박효천이 초대한 전국의 명기들이 모두 참석하여, 각자 자랑하는 가락들을 뽑는다. 기생들의 맏언니 뻘인 녹수(김지미 분)는 기생들에게 본분을 잊지 말고 노래를 잘 보전하라는 말을 남긴다. 임금은 박효천의 공로를 인정하여 장악원 원장, 요즘으로 치면 국악원 원장을 맡으라는 명을 남기지만 박효천은 풍류를 즐기며 평생을 떠돌아다니겠다며 거절하고 다시 길 위로 떠난다.

빵빵한 당대 배우 라인업

 

그 시절 배우들에 대한 향수가 있다면

이 영화에는 김지미, 윤정희, 남정임, 문희를 비롯해 전양자, 태현실 등 당시의 톱 여배우들은 모두 출연하였다. 이 영화에 출연하지 못한 배우들은 시기심을 갖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총망라된 라인업이다.

하지만 호화 출연진에 비해서 극적 완성도는 매우 낮다. 90분 정도의 상영시간 안에 6~7명의 여배우를 만나는 만큼, 한 사람당 배정된 시간은 10분 남짓에 불과하다. 그래서 영화의 대부분은 어느 지방에 찾아가 명기를 만나고, 저녁에 술 한잔하면서 노래  한 곡 듣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러다 보니 극적인 긴장감이나 아기자기한 스토리의 전개는 기대할 수 없다.

이렇게 영화의 작품성으로는 도저히 좋은 평가를 할 수 없으나, 당대의 일류 여배우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매력이라 할 것이다.

유튜브에 영화 전편이 올라와 있다. 궁금하면 보자.

원문: 이재형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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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로〉, 다시 없을 역대 최고의 인기 드라마를 기억하며 https://ppss.kr/archives/255125 Wed, 14 Sep 2022 05:05:02 +0000 http://3.36.87.144/?p=255125 우리나라에서 TV 방송이 시작된 것이 1961년이었으니까, 올해로 60년이 다 되어 간다. TV에서는 수많은 드라마를 방영하였는데, 어떤 드라마가 제일 인기 있었을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1972년 KBS에서 방영된 일일드라마 <여로>가 가장 인기 있었다고 생각한다. 시청률이 거의 80%에 육박할 정도였으니, 앞으로도 그런 시청률을 기록할 드라마는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집에 TV를 가진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동네에 TV가 있는 집이 있으면 이웃들이 방안에서, 마루에서, 마당에서 함께 보는 게 일상이었다. 그때 나는 고등학생으로서 대구에 살았는데, 우리 집에는 당시로서는 보기 힘든 25인치짜리 미제 TV가 있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우리 집으로 TV를 보러 왔다. 지금부터는 그 드라마 <여로>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1. <여로>가 걸어온 길

드라마 <여로>는 장욱제와 태현실이 주연을 맡은 드라마인데, 사실상 주인공은 태현실이라고 해도 좋았다.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 분이(태현실 분)는 집안을 도우려다 술집으로 팔려 간다. 거기서 사기꾼인 김달중(김무영 분)을 만나, 달중의 중매로 시골 부자인 최 주사 댁 며느리로 들어간다.

최 주사의 아들 영구(장욱제 분)는 지능이 낮고 몸도 불편하다. 그런 영구를 분이는 지극 정성으로 모신다. 최 주사가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까지 낳는다. 그러나 영구의 계모이자 분이의 시어머니(박주아 분)는 딸(권미혜 분)과 함께 분이를 천대하고 구박한다. 아무리 구박하고 천대하여도 분이가 흔들리지 않자 그들은 과거 분이가 술집에 있었다는 것을 최 주사에게 일러바치고, 결국 분이는 아들을 남겨두고 집에서 쫓겨나게 된다.

쫓겨난 분이는 전쟁 와중 식당을 하여 큰돈을 번다. 그녀는 번 돈으로 주위의 어려운 사람을 도운다. 이러한 분이의 선행이 널리 알려져, 신문에 미담 기사까지 실리게 된다. 한편 최 주사 집안은 사기를 당해 재산을 죄다 날리고, 가족 모두가 거의 거지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던 중 마침내 대전역에서 분이와 최 주사 댁 사람들이 만나게 되고, 그들은 다시 결합하여 행복을 되찾는다.

분이 역할을 맡은 배우 태현실

 

2. 사회현상으로서의 <여로>

진부하고, 단순하고, 그저 그런 이야기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필요한 이야기였다. 사람들은 착한 분이와 영구의 모습을 보면서 위로를 받았다. 거의 전 국민이 이 드라마를 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7시에 방영했는데, 그 시간이면 온 나라가 조용해졌다.

이 드라마에서 분이의 시어머니와 시누이, 그리고 분이를 중매한 김달중은 세상에 둘도 없는 악인으로 등장한다. 착한 분이를 얼마나 괴롭히고 학대하는지, 온 국민의 분노의 대상이 되었다. 김달중 역할을 맡은 김무영은 지방에 갔다가 몰매를 맞을 뻔했고, 시어머니 역을 맡은 박주아와 시누이 역의 권미혜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욕설을 퍼부어 제대로 밖을 다니지도 못했다고 한다.

영구 역할을 맡은 배우 장욱제. <여로>의 히트 이후 영구 역할의 그림자에 고전하다 사업가로 변신하였다고

분이의 남편 영구는 늘상 제기를 차고 논다. 하나, 둘, 셋 하면서 제기를 차지만, 처음 1개만 제대로 발에 맞추고 나머지는 헛발질만 하면서 둘, 셋을 헤아린다. 그리고 누가 자기를 부르면 무조건 대답한다. 여로의 영원한 명대사로 꼽히는 바로 그 대사다.

영구 없~다.

아이들 사이에서 이 영구를 따라하는 것은 당시 유행하는 놀이였다. 덕분에 부모들의 걱정이 대단하기도 했다. 개그맨 심형래의 바보 캐릭터 영구는 <여로>에서의 영구 캐릭터를 재해석한 것이다. 영구 역을 맡았던 배우 장욱제를 직접 찾아가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드라마 <여로>를 못 본 사람은 심형래의 연기에서 영구의 말투와 행동을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심형래의 영구 연기는 유튜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3. <여로>를 볼 수 있는 곳

안타깝게도 당시에는 방송자료 관리가 제대로 안 됐다. 자료 보존에 대한 사람들의 의식이 희박하던 때였다. <여로>가 녹화된 테이프는 KBS 사옥을 여의도로 이전하면서 대부분 소실되었다. 당시에는 녹화용 테이프를 재사용하거나 소품으로 재활용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그때 사라졌을 가능성도 높다.

그래서 <여로>는 딱 1회분(제 207회)만 남아 있다. 이조차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부분은 5분 가량의 클라이맥스에 불과하다. 당시에는 VHS가 가정용으로 보급되던 시기도 아니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녹화하는 일도 잘 없었다. 당시 재제작되었던 영화나 소설로 스토리를 복기할 수 있는 정도일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여로> 장면. 덕분에 TV에서 <여로> 관련 자료화면이 나온다면 100% 이 장면이다…

<여로> 드라마에 삽입된 이미자의 주제가는 지금도 쉽게 만나볼 수 있다.

원문: 이재형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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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검객 황금 108관〉, 한국형 무협영화의 출발 https://ppss.kr/archives/255127 Wed, 31 Aug 2022 04:20:38 +0000 http://3.36.87.144/?p=255127 영화 <나그네 검객 황금 108관>은 1967년 개봉된 영화다. 박노식과 남정임, 이대엽, 태현실 등이 출연하였다. 1966년 쇼브라더스가 제작한 홍콩 무협영화가 수입되어 큰 인기를 끌자, 한국형 무협영화로 제작된 것이다.

당시의 포스터. ‘나그네’를 빼고 거의 다 한자다…

고려가 멸망하고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후, 고려의 부활을 꿈꾸던 조선의 이조판서(극 중에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가 생전에 거사를 위해 황금 108관을 숨겨놓았다는 소문이 퍼진다. 이런 상황에서 주인공인 검객 박창도(박노식 분)는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현상금 사냥꾼으로서 살아가고 있다. 그는 항상 베어 죽인 악당들 주검 옆에 저승길 노자나 하라고 동전 한 닢을 던져둔다.

눈빛이 장난 아님
멋있음

한편, 죽은 대감의 딸 옥화는 아버지가 숨겨둔 황금 108관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동시에 죽은 이조판서의 반대파인 장정승 일파도 거사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황금 108관을 찾는다. 그러나 옥화와 장지 모두 거사는 명분에 불과하다. 둘 다 황금을 차지하기 위해 눈이 어두워져 있다. 황금이 숨겨진 곳을 아는 사람은 대감의 친구였던 주지뿐이지만, 주지는 대답을 거부한다.

양 세력은 황금을 독차지하기 위해 검객을 고용한다. 옥화는 주인공인 검객 박창도를, 장지는 수수께끼의 검객 조창운(이대엽 분)을 고용한다. 둘은 모두 검술의 초고수이다. 하지만 옥화와 장지 일파는 이들을 그저 도구라고만 생각한다. 황금을 차지하면 모두 죽여버릴 속셈이다.

그들의 속셈을 파악한 박창도와 조창운은 도리어 힘을 합해 옥화와 장지 일파를 처단한다. 그리고 땅에 숨겨둔 금괴 상자를 찾아낸다. 하지만 상자 속에는 금이 아니라 돌로 가득 차 있다.  이조판서는 돈을 노리고 달려드는 자들을 이용하여 거사를 성공시키려 했고, 일부러 황금 108관의 군자금이 있다고 헛소문을 낸 것이다.

떠돌이 검객이라고 생각하였던 조창운은 사실 조정의 관리였다. 역모 사건을 파헤치려 장지 일파에 거짓 고용된 것이었다. 일이 마무리되자 박창도는 다시 유랑의 길로 떠나고, 조창운은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멋있음 222

당시 이 영화는 한국형 무협으로서 꽤 신경을 써서 제작했다. 당시의 영화평을 보면 아주 수준 높은 결투 장면이라고 추켜올린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엉성하기 짝이 없는 결투신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홍콩 무협영화도 지금 보면 유치한 면이 적지 않지만, 그래도 결투 장면에서는 무술감독과 스턴트맨 등의 협력을 받아 박진감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비해 〈나그네 검객 황금 108관〉에는 칼싸움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다. 주인공을 포위하고 달려드는 악당들은 배를 완전히 드러낸 채 검을 높이 들고 덤비며, 주인공은 훤히 드러난 배를 그냥 베기만 한다. 악당들은 마치 일부러 칼을 맞으려 덤벼드는 사람들 같다.

당시의 출연배우들은 검술이나 무술을 특별히 수련한 게 아니었다. 국내에서는 이들을 지도할 무술감독도 변변히 없었고, 스턴트맨이라는 직종이 확립되어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러니 어쩔 수 없는 형편이라 하겠다.

어쩔 수 없는 허술함

중학교 때 봤고, 최근에 다시 감상했다. 중학교 때는 꽤 재미있는 영화라 생각했는데, 지금은 큰 재미를 느끼지 못하겠다. 무술영화에서 무술 액션이 제대로 받쳐주지 못하니까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그보다 지금 배우들의 옛 얼굴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오지명과 백일섭이 각각 옥화와 장지 일파를 돕는 조연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젊은 사람들은 오지명과 백일섭을 〈순풍산부인과〉와 〈꽃보다 할배〉로 기억하겠지만, 사실 이들은 젊었을 때 꽤 인기 있는 액션 배우들이었다. 지금의 모습과 비교하면 재미있다.

리즈 시절의 오지명
리즈 시절의 백일섭

원문: 이재형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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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공룡 100만년〉, 원시 시대를 배경으로 새로운 섹시 심벌이 태어나다 https://ppss.kr/archives/255129 Thu, 11 Aug 2022 07:36:17 +0000 http://3.36.87.144/?p=255129 영화 <공룡 100만년>(One Million Years B.C.)은 1966년 영국에서 제작된 영화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우리나라에서 개봉된 영화로, 당시에도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사실 이 영화는 1940년에 제작된 영화 <One Million B.C>의 리메이크작이다. 원작도 크게 흥행을 일으켰지만, 1966년 리메이크작은 정말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그도 그럴게, 당시만 하더라도 영화 촬영 기술이 그다지 발달하지 못했다. 그런데 원시시대를 배경으로 공룡이 나오는 영화를 제작했던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충격을 자아냈다.

컴퓨터 그래픽이 없었기 때문에, 공룡 모습의 물체를 만들어서 조정하는 스톱모션 기법으로 촬영했다. 그래도 당시에는 이 영화에 등장하는 공룡들이 정말로 감탄스러웠다.

1940년 작의 공룡 장면. 파충류 동물에게 뿔 몇 개 붙이고 공룡이랍시고 내보냈다…

그에 반해 1966년 작의 공룡 묘사는 무척 진일보했다. 공룡들의 박진감 넘치는 액션에 숨이 막힐 지경…

최근 이 영화를 다시 보았다. 고등학생 이후 처음으로 보는 것이었다. 놀랐다. 당시에는 감탄을 불러왔던 여러 공룡들의 모습이 정말 조악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실물과 다름없는 공룡을 만들어내지만, <공룡 100만년>에 나오는 공룡은 모습도 우스꽝스럽고 움직임도 어색하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첨단기술을 총동원해 제작한 영화였다.

사실 과학적으로 고증하자면,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영화다. 공룡은 약 6,000만년 전인 백악기 말에 전멸하였다. 반면 이 영화의 무대는 100만년 전이다. 지금으로부터 까마득한 옛날이지만, 공룡이 전멸한 6,000만 년의 시대에서 보자면 현재나 그때나 별 차이 없는 후대의 일일 것이다. 재미를 위해 과학적 고증 따위는 날려 버린 셈.

영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 투막은 먹을 것을 두고 다투다가 아버지인 추장으로부터 쫓겨난다. 투막은 광야를 헤매다 여러 공룡을 만나 쫓기기도 하고, 죽을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평화를 사랑하는 조개 부족에게 구해지고, 거기에서 로아나(라켈 웰치 분)라는 금발의 미녀를 만난다.

라크웰 웰치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 포스터의 주인공이다.

투막은 조개 부족과 함께 살면서 그들을 돕는다. 때로는 위기에서 구해주기도 한다. 그러다 로아나와 함께 자신의 부족에게 돌아가게 된다. 여러 위기를 뚫고 부족에 돌아온 투막은 아버지로부터 추장 자리를 빼앗는다. 로아나도 도전해 오는 다른 여자들과의 싸움에서 이겨 추장 부인으로서의 자리를 차지한다.

사실 이 영화의 스토리에 진지하게 빠져드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공룡과 인간, 로맨스라는 말이 안 되는 요소들을 한 화면 안에서 뭉뚱그려 넣는 게 이 영화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여러 공룡이 차례로 등장해서 관객의 넋을 빼놓는다. 다음에는 주인공의 용맹한 전투씬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섹시 심벌 라켈 웰치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세 가지 히트 공식만으로, 이 영화는 1960년대의 영화계를 뒤흔들었다. 특히 라켈 웰치는 마릴린 먼로와 브리짓 바르도가 물러난 할리우드에서 섹시 스타로 떠오르는 데 성공한다.

30년이 흘러 <쥬라기공원>에서는 이렇게 실감 나는 비주얼의 공룡이 탄생했다.

제목은 엉뚱하고, 내용은 허술하다. 하지만 1960년대에는 충격적으로 재미있던 오락 영화였다. 당시의 추억을 되새기고 싶다면 다시 봐도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원문: 이재형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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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만복〉, 인스턴트 라면을 발명한 사업가 부부의 일생 https://ppss.kr/archives/255121 Wed, 27 Jul 2022 05:39:04 +0000 http://3.36.87.144/?p=255121 중국의 라면, 일본의 ‘라멘’으로 진화하다

세계에서 인스턴트 라면을 가장 많이 먹는 국가는 중국이라고 한다. 중국의 인구가 워낙 많기 때문에 나오는 오류다. 국민 한 사람당 인스턴트 라면을 가장 많이 먹는 국가는 단연 우리나라이다.

2016년 기준으로 우리나라는 국민 한 사람이 일 년에 평균 76봉지의 라면을 먹는다. 2위의 인도네시아 52봉지를 멀찍이 따돌리고 세계에서 단연 1등을 차지하고 있다. 대체 인스턴트 라면은 누가 발명한 것일까?

중국의 ‘란주 라면’. 200여 년 전 청나라 건륭 황제 시기에 개발된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라면은 중국이 옛날부터 먹어온 국수의 한 종류다. 1880년대 후반 일본이 개항하면서 요코하마, 코베, 나가사키 등에 많은 외국인들이 이주했는데, 이때 중국인들이 가져와 일본에 전파했다고 한다. 1910년에 일본 동경에 중화요리점 ‘라이라이간(来々軒)’이 개점하여 큰 인기를 얻었는데, 주 메뉴가 ‘남경소바’ 혹은 ‘지나소바’라 불린 라면(라멘)이었다. ‘라이라이간’에서 중국 면 요리와 일본의 식문화를 융합시킨 최초의 일본 라면(이하 라멘)을 팔았다는 이야기다.

이를 시작으로 라멘은 일본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라멘 전문점, 중화요리점, 레스토랑, 포장마차 등 라멘을 파는 가게가 급속도로 늘어났다. 지역별로 독특한 라멘이 생겨나면서, 라멘은 일본의 국민적 음식으로서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일본의 라멘 가게

그렇다면 ‘라멘’이라는 말은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모든 음식이 그렇듯이, 언제 어떻게 출발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여러 가지 설은 있다. 가장 유력한 설은 중국 서북부에 있는 란주에서 가장 많이 먹은 면의 일종인 랍면(拉麺, 라미엔)에서 왔다는 설이다.

한자로 ‘랍(拉)’은 ‘끌어당겨 늘린다’라는 뜻이 있다. 랍면은 메밀국수나 우동처럼 칼로 썰어 국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당기고 늘려 가늘고 긴 국수 형태를 만드는 수타법으로 만들어진다. 그래서 지금도 일본에서는 라면을 한자로는 “拉麺”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이외에도 노면(老麺, 라오미엔)에서 나온 말이라는 설도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으레 인스턴트 라면만 생각한다. 하지만 요즘에는 우리나라에도 일본식 라멘집이 들어서면서 라멘을 즐기는 사람들도 많이 생겼다. 일본에서는 라멘이라 하면 당연히 식당에서 요리한 라멘을 생각하며, 봉지라면이나 컵라면은 반드시 ‘인스턴트 라면’이라 부른다.

그러면 인스턴트 라면을 처음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안도 모모후쿠라는 사람이다. 발명가이자 기업가로서,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요리인 라면을 누구나 쉽게 먹을 수 있도록 인스턴트 라면을 발명한 사람이다. 이를 기반으로 닛신식품(日淸食品)이라는 기업도 창업하였다. 닛신식품은 지금도 일본의 유력한 종합식품회사로서 연 매출액이 약 5조 원에 달하고 있다.

닛신식품

 

〈만복〉, 인스턴트 라면을 발명한 사업가 부부 이야기

드라마 <만복>(만뿌쿠)는 NHK TV소설이다. 2017년 방영되었으며, 전체 151회로 이루어져 있다. 이 드라마는 인스턴트 라면을 처음 만들어낸 닛신식품의 창업자 안도 모모후쿠(安藤百福)와 그의 처 마사코(仁子)의 일생을 모델로, 열심히 살아가는 부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안도 모모후쿠와 마사코 부부의 극 중 이름은 다치바나 만페이와 다치바나 후쿠코로 변경되어 나온다. 드라마 제목 만복(만뿌쿠)는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남편 만페이와 부인 후쿠코의 이름 앞자 한 글자씩을 따서 “만뿌쿠”가 될 수도 있고, 배 가득 먹는다는 만복(滿腹)도 일본어 발음으로는 “만뿌쿠”가 된다. 그러니까 만뿌쿠 부부가 만들어가는 만뿌쿠 이야기가 바로 드라마 〈만뿌쿠〉라 할 것이다.

드라마 <만복>의 포스터

주인공 이마이 후쿠코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세 자매 가운데 막내다. 그녀가 발명가 다치바나 만페이와 만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둘은 후쿠코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하고, 월급쟁이가 되라는 장모의 입버릇에도 발명가, 기업가의 길을 간다.

만페이는 뛰어난 아이디어와 성실함으로 오사카 지역에서 큰 명성을 얻지만, 사업에는 늘 불운이 따른다. 사업을 잘 일궈 성공하려다가도, 무슨 마가 끼었는지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 일어나 좌절된다. 사기를 당하기도 하고, 이용만 당하다가 말아먹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후쿠코는 남편을 격려하며 쪼달리는 사업 자금을 대기 위해 곳곳으로 돈을 빌리러 다닌다.

한편 만페이에 대한 사람들의 신망이 높아지자, 오사카의 중소업자들은 만페이에게 상호신용금고 조합장이 되어달라고 부탁을 한다. 조합장이 된 만페이는 부실화된 신용조합을 다시 일으키지만, 어려운 처지에 있는 중소기업에게 융자를 한 것이 문제가 되어 직을 물러나고 만다.

그래도 만페이는 꿋꿋이 다시 사업을 시작한다. 이때 라면 사업을 시작한다.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라면을 누구나 쉽고 값싸게 먹을 수 있도록 인스턴트 라면을 만들기로 한다. 수많은 실패를 거쳐 인스턴트 라면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고, 그의 회사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그를 모방한 수많은 업체가 난립하게 된다. 그때 만페이가 생각해낸 것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컵라면’이라는 아이템이다. 이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경쟁자들을 물리치게 된다. 결국 사업을 반석에 올린 만페이와 후쿠코는 평화롭고 만족스러운 노년을 맞이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우리나라에서 라면을 처음 생산한 기업은 삼양식품이다. 삼양식품 창업자인 전중윤 회장은 일본의 묘조식품(明星食品)에서 기술을 도입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라면을 생산, 판매했다. 묘조식품은 닛신식품의 라이벌 회사였는데, 전후 어려운 한국의 사정을 듣고 흔쾌히 무상으로 기술을 원조한 것이다. 묘조식품은 2000년대에 닛신식품에 합병되었다.

이런 닛신식품도 한국에 기술을 제공했던 적이 있다. 1985년 빙그레가 라면 산업에 진출할 때였다. 그래서 빙그레 라면은 후발주자임에도 맛이 좋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별로 인기는 좋지 않아서, 2003년에 라면산업에서 철수했다고.

 

PS.

이 드라마에서 후쿠코의 어머니이자 만페이의 장모인 이마이 스즈(今井鈴)의 역할이 재미있다. 그녀는 사업을 한답시고 실패만 거듭하는 사위가 못마땅하다. 그래서 틈만 나면 사위가 하려는 일에 딴지를 건다. 그렇게 만류해도 사위는 제 갈길을 가고, 그로 인해 생기는 온갖 뒷일을 푸념하며 처리해 준다. 그녀는 항상 입버릇처럼 이 말을 달고 산다.

저는 무사(武士)의 딸입니다.

우리나라 식으로 표현하면 “저는 양반집 딸입니다”와 비슷한 느낌인 모양이다. 드라마 속의 딸들은 언제나 반신반의하는 모양이지만.

원문: 이재형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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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죽음: 이토 히로부미와 아베 신조의 죽음을 보며 https://ppss.kr/archives/255554 Wed, 13 Jul 2022 01:41:31 +0000 http://3.36.87.144/?p=255554 1.

일본의 아베 신조 전 수상이 암살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정치적 테러에는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애도의 마음이나 명복을 빌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그는 강성 우파로서 일본의 반인륜적, 반문명적인 과거사에 대한 반성 없이 시종일관 우리에 대해 강압적인 태도를 보인 데다 모욕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았던 자였기 때문이다.

일본의 전현직 수상으로서 암살에 의해 죽은 사람은 이번으로 6번째이다. 1909년 초대 수상을 역임하였던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의 총에 의해 사살된 이후 태평양 전쟁 이전까지 4인의 전현직 총리가 암살에 의해 사망하였으며, 전후의 시대에 들어와서는 아베 전 수상이 처음이라 한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으로 입헌군주국으로 바뀐 이래 지금의 101대 기시다 수상에 이르기까지, 총 64명의 인물이 수상의 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본다면 약 10%의 전현직 수상이 암살에 의해 사망한 셈이다.

수상 재임 횟수가 가장 많았던 사람은 요시다 시게루(吉田茂)로서 총 5회에 걸쳐 수상직을 역임했으며, 다음으로 4회 수상을 역임한 이토 히로부미와 아베 신조가 있다. 그러나 재임 일수 기준으로 본다면 아베 신조가 사상 최장이다.

 

2.

이토 히로부미와 아베 신조는 여러모로 비교가 된다. 4회에 걸쳐 수상직을 역임했으며, 암살에 의해 사망했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그리고 출신지가 쵸슈번(長州, 지금의 야마구치현 일대)으로서 같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우리 한국인들에게 나쁜 이미지로 비춰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같다.

이토나 아베 모두 4회에 걸쳐 수상직을 역임했으나, 경력 면에서 본다면 이토가 훨씬 더 화려하다. 아베는 수상의 자리에 오르기 이전 2차례에 걸쳐 수상 도전에 실패한 경력이 있다. 이에 비해 이토는 메이지 유신 공신으로서 쵸슈번의 일개 무사에서 공작이라는 최고 귀족의 자리에 올랐으며, 44세라는 역대 최연소 나이로 초대 수상 자리에 오른 후 4회에 걸쳐 수상직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천황의 자문기구인 추밀원의 의장직을 3차에 걸쳐 맡았고, 또 초대 조선통감의 자리에 오르기도 하였다. 그야말로 승승장구였다.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 의사

두 사람 모두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밉상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차이점도 보인다. 한국에 대해 아베가 매파적 자세였다면 이토는 비둘기파에 가까왔다. 아베는 스스로 강성 우파의 선두에 서서 우리에 대한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지만 이토는 그렇지 않았다.

당시 일본의 정치권력의 핵심은 모두 메이지 유신 공신, 이른바 명치원훈(明治元勲)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 대다수의 공신들이 조선의 병합을 주장하였으나 이토는 이에 반대하였다. 그리고 조선의 부국강병을 도와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여야 한다는 강경파들에게는 이토는 상당한 걸림돌이었다. 그러나 조선 병합에 반대하던 이토도 암살 직전인 1908년 무렵부터 태도의 변화가 보인다. 조선병합 강행파의 의견에 제동을 걸지 않으며 소극적으로 동조하는 쪽으로 입장변화가 나타난 것이다. 그렇지만 스스로는 자신이 일본의 실세 정치인 가운데 유일하게 진심으로 조선을 위한다는 생각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이토 히로부미는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에 의해 사살된다. 그로부터 꼭 70년이 지난 1979년 10월 26일엔 박정희가 사살되니 10월 26일이 무슨 특별한 날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토 히로부미는 총에 맞아 쓰러진 후, 자신을 쏜 사람이 조선 청년이라는 말을 듣고는 죽어가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나를 쏘다니, 바보 같은 자식이다.

그로서는 자신이야말로 일본 정치 지도자들 가운데 진심으로 조선을 걱정해주는 사람인데, 그런 자신을 죽이다니 어리석은 짓이다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3.

아베 전 수상

그러나 우리의 입장에서는 조선에 대해 매파든 비둘기파든 오십보백보로서 일본의 정치 지도자란 어차피 그놈이 그놈일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초대 조선 통감으로서 우리의 국권을 찬탈하는데 앞장섰다는 상징성을 갖는다. 그가 매파든 비둘기파든 우리에겐 별 의미가 없다. 한국인이라면 그런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칭송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로서는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을 애도할 마음은 요즘의 젊은이들 표현으로 1도 없다.

다시 아베의 죽음을 생각해본다. 우리에게 강성 발언과 모욕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던 자이다. 과거사에 대한 반성은 눈곱만큼도 보여주지 않던 자이다. 반도체 원자재 수출 규제로 우리의 등 뒤에 비수를 꽂은 자이다. 나로서는 그의 죽음을 도저히 애도하거나 명복을 빌어 줄 수 없다.

원문: 이재형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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