ㅍㅍㅅㅅ https://ppss.kr 필자와 독자의 경계가 없는 이슈 큐레이팅 매거진 Mon, 24 Mar 2025 13:39:59 +0000 ko-KR hourly 1 https://wordpress.org/?v=5.8.10 https://ppss.kr/wp-content/uploads/2015/07/ppss-100x100.png ㅍㅍㅅㅅ https://ppss.kr 32 32 북촌 한옥마을은 100년도 안 됐다고?: 한옥의 역사 https://ppss.kr/archives/264455 Mon, 24 Mar 2025 13:24:28 +0000 http://3.36.87.144/?p=264455

한옥

우리나라 고유의 형식으로 지은 집을 양식 건물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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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옥은 원래 없었다?!

한옥이라는 말은 원래는 없는 말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한옥이라는 용어 자체가 서양식 주택인 양옥과 구분하기 위한 용어이기 때문이죠.

한옥이라는 말은 1907년 정동길 주변을 기록한 약도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당시 서양의 근대 건축양식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이들과 구분하기 위해 표시한 것이었죠. 이때는 한옥이라고 하면 살림집을 의미했는데요. 우리나라의 전통 건축물을 통칭하여 한옥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1975년에 나온 『삼성 새우리말 큰사전』에서부터 입니다. 이 사전에서 한옥은 양옥과 대비되는 개념이자 한옥의 동의어로 ‘조선집’, ‘한식집‘이 있다고 표기되어 있죠.

현재 한옥에 대한 정의는 건축법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요. 2010년 2월에 제정된 「건축법 시행령」 제2조에 따르면 한옥은 ‘기둥 및 보가 목구조 방식이고 한식 지붕틀로 된 구조로서 기와, 볏짚, 목재, 흙 등 자연 재료로 마감된 우리나라 전통 양식이 반영된 건축물 및 그 부속 건축물’을 말한다고 합니다.

 

2. 한중일 전통 가옥의 차이는?

한중일 전통 건축물은 비슷하게 생겼는데요. 한옥만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중국의 집은 온돌과 마루가 없고 일본은 마루만 있는 반면, 한옥은 방에는 온돌을 대청과 툇간에는 마루를 깔아두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어요. 난방시설인 온돌과 냉방시설인 마루를 가지고 있는 한옥은 겨울에 춥고 여름에 더운 한반도의 특징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온돌은 순수 우리말로 구운 돌의 약자인 ‘구들’이라고도 합니다.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불기운이 바닥 아래를 지나 굴뚝으로 빠지게 되는 구조이죠. 온돌은 열의 효율이 높고 연료나 시설이 경제적이며 고장이 별로 없다는 장점이 있어요.

마루는 나무 널판으로 구성된 바닥을 말하는 것으로 바닥을 지면으로부터 떨어트려 통풍이 되도록 해 습기를 방지하는 구조입니다. 대개 마루는 앞쪽이 트여 있고 뒤쪽에는 문이 달려 있는데, 한여름에 문을 열면 통풍이 잘됐죠.

 

3. 조선시대부터 한옥마을이었던 북촌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한옥은 대문, 마당, 부엌, 사랑방, 안방, 마루, 외양간, 화장실, 장독대 등이 갖추어져 있는 조선시대 상류층의 한옥입니다. 유교 사상이 사회 전반에 퍼져있던 조선시대라 신분과 남녀유별, 장유유서를 공간에도 적용했죠. 크게 안주인이 쓰는 공간인 안채와 바깥주인이 쓰는 바깥채 등으로 나누기도 하고, 집채를 달리하거나 작은 담장을 세워 주거 공간을 상, 중, 하로 나누기도 했어요.

한옥은 풍수지리에 따라 배산임수의 원칙으로 지어졌어요. 뒤로는 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물을 마주하며 남쪽으로 짓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한옥의 위치였죠. 풍수지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서울에서 가장 좋은 장소는 경복궁이고 그다음이 창덕궁인데요. 그 사이에 있는 북촌 역시 북고남저로 겨울에 따뜻하고 배수가 잘될 뿐 아니라 남쪽은 넓게 트인 데다 남산의 전망도 좋아 조선 시대부터 권문세가와 왕족들이 모여 살던 동네라고 하네요.

경복궁
창덕궁

반면 하급 관리들은 남산 기슭인 이른바 남촌에 살았죠. 이곳은 음지이기는 하지만 배수가 잘되고 지하수가 풍부하여 물을 얻기 편했어요. 오늘날의 중구 남산동에서 필동을 거쳐 묵정동에 이르는 지역이에요.

하지만 조선 후기에는 조금 달라졌습니다. 원래 고급 관리가 살던 곳이 북촌, 하급 관리가 살던 곳이 남촌이었죠. 하지만 후기로 갈수록 북촌에는 노론이 거주하기 시작했고, 남론에는 소론과 남인·북인이 살게 됐어요.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른 기록입니다.

 

4. 서양인들이 만든 개량한옥

구한말 미국공사관 ⓒUniversity of Arkansas Libraries

구한말이 되자 우리나라에 서양인 관리와 서양인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한옥을 구입해 자신들의 습관과 용도에 맞게 개조했어요. 여러 개의 방을 터서 침실·식장·거실 등으로 개조하는 한편, 벽지를 바르고 종이로 된 창문을 유리창으로 바꾸고 서양식 가구와 카펫 그리고 난로를 설치했어요. 당시 미국공사관이 대표적인 개량한옥이었죠.

서양인이 개조한 한옥은 이후 조선인의 주거 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조선인 재력가들은 이들을 따라 창호지 방문과 창문을 유리로 바꾸는 한편, 대청마루를 응접실로 바꾸고 목욕탕도 설치했어요. 당시 재력가들 사이에서는 서양식 가구를 사용하는 것은 부와 개화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유행하기도 했다고 하네요.

 

5. 도시형 한옥의 탄생

도시형 한옥

1908년 일본이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하면서 일본인들을 조선의 농경지로 대규모로 이민시키는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이때 조선의 땅값이나 세금이 일본에 비해 싸고 수익률이 높아 주로 일본에서의 빈농층이 주로 이민을 왔죠. 1911년 첫 이민 가족 160호를 시작으로 매년 5,000명 이상이 넘어왔어요.

일본인들이 조선의 농촌으로 이민 온 후 일제는 본격적으로 조선의 농촌을 수탈했습니다. 특히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많은 조선인의 토지를 빼앗았죠. 토지를 빼앗긴 조선인들은 소작농이 되었습니다. 소작농 거리도 찾지 못한 이들은 공장이 있는 대도시로 이주해 막노동을 하게 됐죠. 이로 인해 경성에는 1926년 30만이던 인구가 1931년에는 36만으로 1936년에는 67만으로 늘어났죠. 도시로 몰린 인구로 인해 주택난이 심해져 새로운 주거 형태가 필요해졌어요.

주택난 속에서 조선인 전문 주택 개발업자들이 등장했습니다. 관급 건설 사업을 일본인들이 독점하게 되면서 조선인 건설업자들은 민간 주택 시장으로 눈을 돌렸죠. 이들은 대형 필지를 사서 작은 필지로 나눈 후 획일화된 한옥을 개조했습니다. 어려운 조선인들의 경제 사정상 소규모 주택의 수요가 더 많았고, 주택 개발을 하는 입장에서도 작게 여러 주택을 만드는 것이 평당 이익이 높았기 때문이었죠. 게다가 한옥은 일본인들이 손대기 어려운 분야였고, 유학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서구식 건축 개발보다 훨씬 수월한 시장이었어요.

이때 대규모로 만들어진 한옥을 도시형 한옥이라고 부릅니다. 기존 한옥과 달리 ㄷ자나 ㅁ자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비교적 크기가 작고, 변소가 건축물 내부에 들어간 형태를 띠고 있었으며, 벽돌과 유리 함석을 사용하는 등의 특징이 있었죠.

 

6. 건축왕, 북촌 한옥마을을 만들다

건축왕 정세권

당시 등장한 전문 건설업자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정세권이예요. 1919년 3.1 운동 이후 상경한 정세권은 1920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부동산개발회사 건양사를 설립했습니다. 북촌을 시작으로 경성 곳곳에 근대식 한옥 집단지구를 건설하면서, 10년도 안 되어 큰 부를 축적해 조선을 대표하는 부동산업계의 거물로 성장하게 되죠. 사람들은 그를 건축왕이라고 불렀어요.

그가 개발한 대표적인 필지는 조선 왕족의 종친 이해승의 누동궁을 개발하여 만든 68채의 한옥단지, 북촌 가회동 31번 한옥 집단지구, 익선동 166번지 등이 있어요. 후자의 두 곳은 지금도 한옥을 찾아볼 수 있죠.

이 부를 바탕으로 정세권은 신간회, 조선물산장려회, 조선어학회 등을 물심양면으로 후원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을 계기로 일제에게 고문을 받기도 하고 막대한 재산을 빼앗기기도 하면서 안타깝게도 건양사는 쇠락하게 돼요.

 

7. 고급 주택가였던 전주 한옥마을

전주 한옥마을

지금의 전주에는 풍남문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일제강점기 이전만 해도 사대문이 있었어요. 성안에는 관인, 양반, 향리 등이 거주했고, 성 밖에는 상인들이 거주하면서 남문시장이 형성됐죠. 하지만 1907년 조선 통감부의 폐성령에 따라 풍남문을 제외한 3개 성문이 철거되었고, 도심부는 1920~30년에 일본인들이 독점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1920, 30년대의 도시 집중화 경향에 따라 전주로 많은 사람이 이주해 왔습니다. 그중에는 호남평야의 대지주나 신흥 자본가들도 있었죠. 이들은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고급 주택가인 한옥 집단지역을 형성했어요. 이 지역의 한옥 주택은 1970년대까지 꾸준히 생겨났지만, 1970년대 중반부터는 한옥 보존 정책이 시행되면서 신축이 중단되었죠.

 

8. 아파트에 밀린 한옥

6·25전쟁 이후로 경제가 개발되면서 도시로 인구가 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전보다도 토지를 효율적으로 이용해야 하는 필요성이 생기자, 한옥보다는 서양식 단독주택과 아파트가 건설되기 시작했어요. 특히 1960년대와 1970년대 산업화와 새마을 운동 시기를 거치면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심해졌고, 초가집도 슬레이트집으로 바뀌게 됐어요. 70년대 중반에는 재개발, 신축 등으로 인해 기존 한옥의 90%가 헐리게 됩니다.

북촌한옥마을에도 1970년대 들어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한옥을 보존해야 한다는 필요성도 대두되기 시작했죠. 1976년 북촌 지역을 민속 경관 지역으로 지정하면서 북촌의 한옥은 보존되기 시작했답니다.

원문: 사소한 것들의 역사


참고문헌

  • 김경민. (2017).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이마
  • 임창복. (2011). 한국의 주택, 그 유형과 변천사. 돌베게
  • 전남일. (2010). 한국 주거의 공간사. 돌베게
  • 전남일 외 3명. (2008). 한국 주거의 사회사. 돌베게
  • 이용우. (2003). 북촌 한옥마을. 대한인쇄문화협회
  • 장성화. (2011). 전주 한옥마을 조성사업의 도심재생 성과 분석 및 개선방안. 전북발전연구원
  • 신광호. (2003). 도시형 한옥 마당의 공간적 특성 연구 – 전주시 도시형 한옥 사례 연구. 우송대학교 석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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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신석기 농부의 식단은 빵과 우유가 아니라 ‘죽과 물’이었다 https://ppss.kr/archives/268400 Thu, 27 Feb 2025 04:52:56 +0000 http://3.36.87.144/?p=268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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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자들은 덴마크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인 퓐(Funen) 섬에서 5,500년 전의 음식을 가는 돌(grinding stones)을 발견했습니다. 이 신석기 유적에서는 보리와 밀도 같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고고학자들은 이것이 북유럽 초기 농부들이 빵을 만들어 먹은 흔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모에스고르 박물관의 벨모에드 아웃 박사(Ph.D. Welmoed Out from Moesgaard Museum)가 이끄는 연구팀은 퓐 섬 유적에서 발굴된 가는 돌과 곡식, 식물 등의 유물을 더 자세히 분석해 가장 오래된 빵의 흔적은 아니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발견된 돌 중 하나입니다. 기존에는 곡물을 갈아 빵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을 것이라 사료되었는데, 새로운 연구에 따르면 곡물을 갈 때 사용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 출처: Niels H. Andersen, Moesgaard Museum

​첫 번째 증거는 돌에 남은 흔적입니다. 연구팀은 마모 흔적을 봤을 때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밀을 갈아서 밀가루를 만드는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확인했습니다.

더욱이 현미경으로 확대해 본 결과 이 돌에 남은 녹말이나 다른 식물 조각은 밀이나 보리 같은 곡물이 아니라 훨씬 거친 식물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예를 들어 개암(헤이즐넛) 같은 단단한 식물 열매나 혹은 식물 자체를 갈아 먹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밀가루 대신 밀 자체를 물에 넣어 끓인 죽이나 포리지(우유나 물을 넣고 곡물을 끓인 요리)를 먹었습니다.

곡물을 가는 돌에서 추출한 네 가지 유형의 전분 과립입니다. 현미경으로 촬영한 사진을 400배 확대하여 촬영했습니다. / 출처: Cristina N. Patús, HUMANE, Barcelona

​사실 빵은 꽤 손이 많이 가는 음식입니다. 밀을 갈아서 가루로 만든 후 반죽을 만들고 효모를 넣은 후 적당히 숙성하여 빵으로 구워내는 과정이 개발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연구팀은 최초의 빵 비슷한 음식이 나오기 위해서 500년 정도는 더 필요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초기의 빵은 우리가 아는 빵보다 훨씬 거칠고 조악한 음식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오늘날 우리가 먹는 맛있는 빵이 됐습니다.

​아마도 같은 시기 우리 조상도 비슷하게 곡물을 먹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냥 먹기에는 보리나 쌀 같은 곡물이 너무 단단한 만큼 물과 함께 끓여 죽을 만들어 먹었다는 것이 가장 그럴듯한 가정입니다. 밥을 지어 먹은 건 한참 후의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시행착오와 발전을 거쳐 우리가 지금 문명 생활을 누리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새삼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원문: APERTURE LABORA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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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콘센트 하나로 통일 좀 해줘라: 콘센트의 역사 https://ppss.kr/archives/268679 Fri, 14 Feb 2025 04:52:35 +0000 http://3.36.87.144/?p=268679

플러그

전기 회로를 쉽게 접속하거나 절단하는 데 사용하기 위하여 코드 끝에 부착하는 접속 기구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1. 한 집 당 벽면 콘센트 한 개

로터리 컨버터
크기는 대략 이렇습니다

전기 기술은 1800년에 개발된 볼타의 파일을 시작으로 19세기에 급속도로 발전합니다. 불과 100년도 안 되어서 전기가 가정용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죠.

전기가 가정용으로 보급될 수 있었던 이유는 1888년 로터리 컨버터(Rotary Converter)가 발명되었기 때문입니다. 로터리 컨버터는 전압, 주파수, 위상 등을 원하는 형태로 바꿀 수 있는 장치입니다. 그러니까 전기가 모든 가정에 동일한 전압의 전기를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단 말이죠.

전기가 가정에 처음 공급되었을 때는 조명용으로만 사용되었기 때문에, 가정에는 천장에 달린 소켓만 있었습니다. 영국을 기준으로 1930년대 초까지도 기술적 한계로 인해 한 가구당 6개의 천장 소켓과 1개의 벽면 소켓만 있었다고 합니다.

1909년의 토스터기 ⓒwww.worldstandards.eu
전구와 비슷해 보이는 초기 전기 플러그

참고로 벽면 콘센트 아니고 소켓 맞습니다. 당시 전기 기기들은 오늘날과 같은 꽂아 쓰는 플러그 형태가 아니라 전구를 끼우듯이 돌리는 형태였기 때문이죠. 이 나사 소켓형 플러그는 1880년대 중반 에디슨에 의해 개발되었고 20세기 초까지 산업 표준으로 활약했습니다.

 

2. 파나소닉을 만들어 낸 멀티탭

대략 이런 느낌의 쌍소켓
마쓰시타 고노스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30년대까지 대부분의 가정에는 벽면에 하나의 소켓만 있었어요. 이러한 이유로 천장 조명을 제외한 2개 이상의 전기 기기를 사용하려면 추가적인 어댑터가 필요했습니다.

이 어댑터는 1918년 일본에서 발명됩니다. 작은 전기용품 가게를 운영하던 일본의 한 전기공이 쌍소켓을 발명한 것이죠. 쌍소켓은 히트 상품이 되어 그의 가게를 어엿한 기업으로 성장시킵니다.

이 기업이 바로 훗날 파나소닉이 되는 마쓰시타 전기 산업입니다. 쌍소켓을 발명한 전기공은 파나소닉의 창업자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죠.

테이블 탭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멀티탭
멀티탭 절망편 ⓒReiner Hahn

우리가 쓰고 있는 멀티탭 형태는 1929년에 테이블 탭(Table Tap)이라는 이름으로 처음에 등장했습니다. 1970년에는 페드트로(Fedtro)라는 회사에서 콘센트 구멍마다 스위치가 달린 멀티탭을 선보였죠.

 

3. 유럽과 미국의 평행이론?!

에디슨이 발명한 소켓형 플러그는 불편했기 때문에 오늘날처럼 꽂는 형태의 플러그가 등장합니다. 흥미로운 건 유럽과 미국에서 각각 독자적으로 발명했는데 발상이 비슷했다는 점이에요.

  • 유럽 승 : 일자형 플러그

꽂는 형태의 플러그는 유럽에서 먼저 등장했습니다. 1882년 영국의 토머스 테일러 스미스(Thomas Taylor Smith)가 ‘전기 회로 연결’에 대한 특허를 낸 것이 최초였죠. 1889년 제너럴 일렉트릭 컴퍼니 카탈로그에도 꽂는 플러그가 등장한 것을 보면 상용화도 빠르게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893년 GEC 카달로그에 실린 전기 플러그
1904년 허벌(Hubbell)의 플러그 제품들

반면, 미국에서는 유럽보다 22년이 늦은 1904년 하비 허벨(Harvey Hubbell )에 의해 발명됩니다. 산업 표준이 소켓형이었기 때문에 그의 발명품은 소켓에 연결해서 사용하는 형태였죠. 하비 허벨은 이후 허벨 회사를 설립하고 다양한 제품을 내놓는데요, 오늘날의 멀티탭과 비슷한 형태의 제품도 있었습니다.

  • 미국 승 : 접지 플러그
Knapp의 접지 플러그
1925년 등장한 슈코 플러그

누전을 방지하기 위한 접지 장치가 들어간 플러그의 발명은 미국이 유럽보다 빨랐습니다. 1915년 허벨 회사에 재직 중이던 조지 냅(George Knapp)이 3핀짜리 콘센트, 즉 접지 장치가 들어간 플러그를 개발한 것이죠.

유럽에서는 그로부터 10년 뒤인 1925년 바이에른 전기 악세사리(Bayerische Elektrozubehör AG)에 재직 중이던 알베르트 뷔트너(Albert Büttner)가 개발합니다. 이 플러그는 안전 콘센트를 의미하는 독일어 ‘Schutzkontakt’의 줄임말인 슈코(Schuko)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죠. 현재는 type F 규격으로 불리며 대부분의 유럽 국가와 우리나라에서 사용 중입니다.

접지 기능이 있는 이 두 플러그는 안전성과 편리성을 인정받아 미국과 유럽의 표준이 되었죠.

 

4. 하나로 통일시켜라 좀…

옛날 스페인의 콘센트. 어떻게 쓰는지 상상도 못 하겠다…
옛날 그리스식 콘센트

플러그와 콘센트는 나라별로 독자적으로 발전되어 왔기 때문에 유럽 내에서도 각자 모양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나라끼리 표준화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100년 전 사람들이라고 안 한 것이 아니었죠. 그래서 1906년 영국에서 비영리 국제기구인 국제 전기기술 위원회(IEC)도 창설되면서 총대를 메는가 싶었는데, 하필이면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애매한 상태에서 멈춰버렸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다시 유럽 국가 12개국이 모여서 회의를 했죠. 하지만 1938년 영국과 1939년 프랑스에서 열린 회의는 모두 눈치만 봤고, 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흐지부지되었습니다.

1957년에야 국제 전기 장비 승인 규칙 위원회(IECEE)에서 플러그 및 콘센트의 표준을 발표하긴 했지만, 이는 기술 보고서에 불과했습니다. 1963년이 되어서야 ‘유로 플러그’라고 불리는 것이 등장하긴 합니다만 이미 각국의 전기 인프라가 깔린 상황이었던지라… 통합은 물 건너간 거죠.

세계표준이라 쓰고 남아공 전용이라 읽는 N타입

그래서 세계 표준은 없냐고요? 놀랍게도 있습니다. 1986년 제정된 유니버셜 플러스(Type N)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세계 표준 규격인 만큼 접지도 있고 플러그도 두껍지 않아 합리적인 플러그죠. 하지만 전 세계에 깔린 전기 인프라를 뒤집어엎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사용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전기 인프라가 완전히 구축되지 않았던 애꿎은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브라질에서만 이 플러그를 채택했습니다. Type N의 변형 플러그가 등장했기 때문에, 사실상 남아공 전용 플러그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통일된 건 하나 없이 A~O Type이 존재하는 현재에 이르렀는데요. 러프하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Figure.16 A-O 까지의 플러그&콘센트 타입 (혼파망…)
  • 미국의 영향을 받은 나라: Type A, B
  • 영국의 영향을 받은 나라 : Type C, D, G, M
  • 독일을 필두로 사실상 유럽 표준 : Type F
  • 소수 국가들에서만 쓰는 : Type H(이스라엘), J(스위스), K(덴마크), L(이탈리아), O(태국)
  • 세계 표준이라 쓰고 남아공, 브라질용이라 읽는 : Type N

 

5.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에너지 경제신문

우리나라에 전기 인프라가 깔리기 시작한 것은 미군정 시기부터입니다. 시대 특성상 자연스럽게 미국 표준인 Type A, B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1970년대 초까지 미국 표준을 잘 쓰고 있었죠.

하지만 문제는 1970년대까지 발전소가 부족해 전력 사정이 열악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기 사용량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하자, 정부는 효율적이고 안정적인 전력 공급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하죠. 그렇게 시작된 것이 1973년부터 2005년에 걸친 ‘220V 승압 사업’입니다.

전압이 높아지며 발생하는 감전 등의 안전 문제를 고려해 type F를 채택한 것입니다. Type A, B는 코드를 완전히 빼기 전까지 전기가 통하기 때문에, 살짝만 걸쳐있는 상태에서 돌출된 핀을 잡으면 감전되는 안전성 문제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지금의 콘센트 형태로 자리 잡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원문: 사소한 것들의 역사


표지 이미지 출처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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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르트 아주머니가 세상을 구한다 https://ppss.kr/archives/268353 Tue, 04 Feb 2025 04:38:38 +0000 http://3.36.87.144/?p=268353 한국을 대표하는 3대 요원이 있다. 음지에서 정보를 수집하는 국정원 블랙요원, 필요한 물건이 있다면 하루가 지나기 전에 어디든지 가져다주는 쿠팡맨, 그리고 시위대와 경찰과 철통보안의 빌딩을 자유자재로 통과하는 야쿠르트 아주머니다.

야쿠르트 아주머니의 진화

나는 극단적으로 내성적인 사람이라 그 흔한 “야쿠르트 하나 주세요”라는 말도 못 꺼내봤지만, 멀리서 오래도록 관찰해 왔다(야쿠르트 주문을 못 해서 그런 건 아니다…). 눈에 띄는 샛노란 색의 히어로 복장. 눈이 쌓여 자동차들도 꼼짝 못 할 때에도 유유히 빙판을 빠져나가는 시속 8km의 시즈탱크. 그 안에는 야쿠르트부터 한우, 채소까지 최대 680kg까지 물건을 실을 수 있다. 가히 한국 메카닉의 정점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메카닉이 음료 회사에서 가능한 게 맞냐고

심지어 동네의 지리와 사람들까지 훤히 아는 정보력까지 갖추고 있다. 나는 그들이 단순히 음료를 판매하는 것이 아닌, 한국 사회를 유지시키기 위한 비밀임무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그리고 답을 찾았다.

 

경찰이 야쿠르트 아주머니에 SOS를 치다

금정구의 실종 치매 노인을 찾아준 프레시 매니저님

지난 5월 10일, 오후 2시 18분. 부산 금정구에 노인복지센터에서 노인이 사라졌다는 신고가 접수되었다. 그는 치매를 앓고 있었다. 경찰들은 곧 야쿠르트 아주머니의 본부. hy(옛 야쿠르트) 동상점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자 거리에서 야쿠르트를 팔던 야쿠르트 아줌마의 무전ㄱ… 아니 카카오톡에 알람이 울렸다. 18명의 요원들이 있는 단톡방에 실종 노인의 인상착의와 함께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뜬 것이다.

30분 전 검정 모자에 빨간 점퍼를 입은 할아버지가 사라졌습니다. 발견하시는 분께서는 즉시 연락 바랍니다.

오후 2시 38분쯤 인상착의가 비슷한 할아버지를 야쿠르트 아주머니가 발견하고 경찰에 알렸다. 일반적으로 실종 치매 환자를 찾을 수 있는 골든타임은 24시간이다. 야쿠르트 아주머니들은 접수 신고 20분 만에 이걸 찾고 말았다.

매년 치매 환자들의 실종 사건은 1만 4천 건에 이르고 있다. 야쿠르트 아주머니는 지난 3월에는 대전에서 실종된 노인을, 12월에는 인천에서 한파 속에 슬리퍼 차림으로 나온 노인을 구했다. 지역과 사람을 훤히 알고 있는 그들의 눈은 언제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찾고 있다.

 

지역을 지키는 로컬 히어로 집단

도로와 도로, 건물과 건물, 가정과 가정 사이에 언제나 그들이 있다

그렇다. 그들은 경찰과 공조하며 실종된 노인을 찾거나, 골목길을 누비며 안전이 취약한 곳들을 찾아 범죄 발생 우려 지역들을 경찰에 전달하는 활동들을 하고 있었다. 전국에 1만 명이 넘는 요원(이 중에서 10년 넘게 활동한 베테랑은 약 5,600명에 달한다)들을 보유한 hy의 조직력은 지역의 안전을 지키는 데 안성맞춤이다.

2022년에는 반지하에 홀로 사는 할아버지가 의식을 잃고 쓰러진 것을 발견해서 구하기도 했다. 때로는 매일 집 앞에 놓는 야쿠르트 2병을 가져가지 않은 것을 보고 사람을 구한 적도 있었다.

이는 hy가 지자체, 관광서들과 손을 잡고 ‘홀몸노인 돌봄 사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려 1994년부터 시작한 hy의 대표적인 활동 중에 하나다. 단순히 음료를 전달하는 것을 떠나서 이런저런 대화를 통해 정서적인 치료까지 함께하고 있다.

홀로 사는 노인 100만의 시대와 그에 따르는 고독사 문제. 특히나 코로나19로 인해 사람들이 접촉하지 않는 ‘언택트 시대’가 왔음에도 야쿠르트 아주머니들은 그 틈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있다.

지난해 분당 정자교 붕괴 사고에도 프레시 매니저가 있었다

사실 히어로라는 게 어디 악당을 처리하는 일만 하겠는가, 사회의 그림자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일. 야쿠르트 아주머니는 그 최전선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문득 그들의 시작이 궁금해졌다.

 

47명의 가정주부가 전설을 만들다

유산균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는 인물로 야쿠르트 아주머니들이 활약했다

hy, 그러니까 ‘한국 야쿠르트’가 시작된 것은 1971년도의 일이다. 그들의 경영이념은 ‘건강사회건설’이다(의미심장하지 않은가). 하지만 당시는 유산균 음료를 알지 못해 병균이냐고 부르던 시절이었다. 한국야쿠르트에서는 유산균 음료의 인식을 바꿔줄 사람들이 필요했다.

현재는 1만 명이 넘는 인원이 모인다는 야쿠르트 아주머니 결사대(아니다)

그렇게 서울 종로 지역을 중심으로 야쿠르트를 알릴 47명의 요원들을 모집했다. 모집 요건이 있었다. 남성이 아닌 ‘가정주부’만을 모집한다는 것이었다. 당시는 가정주부들이 밖에 나가서 일을 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시절이었다. 일을 하면서도 중간중간 아이를 돌보며 자유롭게 시간 조절을 할 수 있는 야쿠르트 아주머니는 가정주부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 사회의 이곳저곳에 그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때문에 사람들은 편을 갈라서 싸우는 한이 있더라도 야쿠르트 아주머니만은 친절하게 맞이한다.

전설적인 일화도 있다. 1994년 철도노조 파업으로 명동성당을 점거한 노조원과 경찰이 대치하던 일촉즉발의 순간이 있었다. 그때 홀연히 나타난 전설의 야쿠르트 아주머니가 있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 야쿠르트 배달해 드려야 해요.

홀연한 외침에 경찰도, 노조원도 모두 길을 비켜주었다. 정영희 매니저님의 일화다. 한국 사회에서 야쿠르트 아주머니만은 건드리면 안 된다는 사회적인 룰이 생긴 것을 의미한다.

 

야쿠르트 아주머니에서 프레시 매니저로

사람들의 일이 인공지능과 기계로 대체되는 시기. 언뜻 편리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술들의 폭주 속에서도 가슴 속 핫팩처럼 사회를 따뜻하게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야쿠르트 아주머니, 아니 ‘프레시 매니저’의 일화들은 듣다 보면 아직 우리 주변이 사람이 사는 곳이구나 느끼게 한다.

조만간 사람형으로 변신할 것 같은 야쿠르트 아주머니 카트 코코

기술은 야쿠르트 카트(배트맨의 배트카처럼 이들에게는 코코라는 카트가 있다)에 잔뜩 적용시키고, 사람이 필요한 일에는 직접 나선다. 나는 언젠가 그들이 세상을 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언제나 그들이 이곳을 지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지만, 그전에 “야쿠르트 하나 주세요”라고 물어보는 게 먼저겠지?

원문: 마시즘


참고문헌

  • 야쿠르트 아줌마, 학교 폭력 예방 나선다, 이동경, 연합뉴스, 2012.2.29
  • 홀몸노인 찾아가는 ‘야쿠르트 아줌마’, 한겨레, 2014.12.30
  • 한국야쿠르트, 홀몸노인 돌봄사업 확대한다, 최원혁, 헤럴드경제, 2017.4.3
  • 주부 일자리의 원조 ‘야쿠르트 아줌마’, 강신우, 이데일리, 2018.6.25
  • 한국야쿠르트 ‘프레시 매니저’, 경찰과 골목길 범죄예방 나선다, 박성은, 신아일보, 2020.9.24
  • 세계 최초의 ‘달리는 냉장고’··· 우리는 골목길 엔터테이너, 박돈규 기자, 조선일보, 2020.11.10
  • 코로나 언택트 시대의 틈새…‘야쿠르트 아줌마’들이 메운다, 고영득, 경향신문, 2021.3.15
  • 50년 역사 지닌 ‘야쿠르트 아줌마’의 변천사, 최지혜, 매일일보. 2021.6.20
  • “야쿠르트와 함께 마음을 전해요” hy 프레시매니저, 박지연, 한국일보, 2021.12.12
  • [여성과 산업] ⑥우리 동네 플랫폼 ‘야쿠르트 아줌마’, 최인영, 우먼타임스, 2022.3.2
  • 홀몸 노인 살린 야쿠르트 아줌마…하루 18.5㎞ 달린다, 장혁진, KBS, 2022.9.3
  • “매일 배달하며 눈여겨봐요”…고독사 예방 앞장서는 기업은, 방영덕, 매일경제, 2022.11.15
  • 특유의 세심함으로 실종 치매 노인 귀가 도운 ‘야쿠르트 아주머니’, 김지은, 대전일보, 2023.3.29
  • 유제품 전달하며 나 홀로 어르신의 건강 챙겨드려요, 김윤주, 조선일보, 2023.12.20
  • “애기 엄마 고마워” 한파 속 치매노인 구한 ‘천사 야쿠르트 아줌마’, 김다운, 아이뉴스24, 2023.12.22
  • 야쿠르트 카트로 누비는 거리…길잃은 치매노인 보호자 역할도, 이민경, 헤럴드경제, 2023.12.22
  • “유제품배달하며 어르신 건강 살펴…제가 느끼는 정이 더 커요”, 신선미, 연합뉴스, 2024.2.5
  • 야쿠르트 아줌마로 18년… 연 매출 2억4000만원, 명예의 전당 올랐다, 문지연, 조선일보, 2024.3.7
  • 야쿠르트 판매원들 실종 치매 노인 20분 만에 찾아내, 권기정, 경향신문, 2024.5.29
  • ‘경찰관부터 사회복지사까지’…hy ‘야쿠르트 아줌마’의 활약상, 김민주, 뉴스포스트, 2024.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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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깎이 777 말고 아는 사람? https://ppss.kr/archives/266642 Thu, 16 Jan 2025 14:34:33 +0000 http://3.36.87.144/?p=266642 손톱깎이 하면 쓰리세븐이 가장 유명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손톱깎이에는 생각보다 여러 브랜드가 있습니다. 국내만 해도 벨, 로얄금속공업 등이 있고 해외의 벨로티, 카이 등이 있죠.

손톱깎이 최초의 브랜드는 Gem이지만 현재는 판매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로 오래된 회사인 Trim을 중점적으로 살펴볼 예정입니다. 아니, 그럴 예정이었습니다… 만 마찬가지로 Trim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더라고요. 그래서 손톱깎이 전반에 대한 역사를 다뤄보았습니다. 그래도 분량이 적은데, 이런 날도 있어야죠ㅎㅎ

 

1. 시작이 불분명한 손톱깎이

 1875년 발렌타인 포거티의 손톱깎이 개선 특허
1881년 유진 하임과 셀레스틴 마츠의 손톱깎이 특허

손톱깎이의 발명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가장 오래된 손톱깎이 개선 특허는 1875년 미국의 발렌타인 포거티(Valentine Fogerty)에 의해 출원되었습니다. 다만 포거티의 특허 제품은 손톱깎이라기 보다는 원형 네일 파일에 가까웠죠.

19세기에 수많은 손톱깎이 특허가 나오는데, 오늘날과 비슷한 클램프형 손톱깎이는 1881년 유진 하임(Eugene Heim)과 셀레스틴 마츠(Celestin Matz)의 특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902년 Gem 손톱깎이 광고

1896년에 Gem이라고 하는 손톱깎이 브랜드 제품이 처음으로 생겨났습니다. 1947년에는 미국 바세트(BASSETT)사의 TRIM 손톱깎이가 출시됩니다. 트림 제품은 레버를 엄지손가락으로 돌릴 수 있는 기능을 추가하는 등 안정적인 사용감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죠. 우리나라에서도 트림 제품은 고급품으로 인식되어 장롱 서랍에 모셔두고 사용했답니다.

 

2. TRIM이 선택한 국내 손톱깎이 회사

벨금속공업 이희평 사장 ⓒ동아일보

고급 손톱깎이로 명성이 높았던 TRIM의 손톱깎이는 1980년대 이후 한국의 손톱깎이 회사들의 품질이 상승하고 경쟁력이 높아지면서 세계 시장 점유율에서 점점 밀리기 시작합니다. 결국 2003년 트림은 공장 문을 닫고 OEM방식을 채택했죠. 이곳의 생산을 도맡은 곳이 바로 한국의 벨금속공업입니다.

벨금속공업은 1954년 한국전쟁 직후에 설립되어 우리니라 최초로 손톱깎이를 만든 회사입니다. 당시에는 손톱깎이를 만들 강철 자재조차 구하기 어려웠죠. 그래서 주변에 나뒹굴던 드럼통을 작두로 잘라낸 뒤 연마기로 일일이 날을 갈아 손톱깎이를 만들었다고 하네요.

한동안은 해외에 OEM방식으로 판매하다가, 1974년부터는 BELL이라는 자체 브랜드로 수출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88올림픽 이후로 한국의 위상이 올라가면서 세계에서 벨 손톱깎이를 알아봐 주기 시작합니다.

참고로 1970년에 벨금속공업에서 손톱깎이에 손톱 칼을 붙인 디자인 특허를 냈습니다. 오늘날에야 흔한 디자인이지만 당시에는 벨금속공업에서만 만들 수 있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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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777 vs 보잉

쓰리세븐 손톱깎이 세트, 군대를 다녀온 분은 익숙한 세트 ⓒi777mall.com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쓰리세븐(777) 손톱깎이 회사는 1975년 설립되었습니다. 현재는 세계시장 점유율 40%를 차지하며 세계 1위를 하고 있는 기업이죠.

창업자 김형규 회장이 1960년대 중반 잡화상을 하던 중, 미국 트림사의 손톱깎이가 유행하는 것을 보고 손톱깎이 사업에 뛰어들었다고 하네요. 벨금속공업과 마찬가지로 드럼통을 이용해 손톱깎이를 만들기 시작해 OCM 브랜드로 제품을 수출했습니다.

93년, 미국 점유율 70%를 넘어가자 이들은 자체 브랜드로 수출을 결심하고 미국 특허청에 ‘777’ 상표출원을 했습니다. 하지만 미국 항공사 보잉에서 90년에 777을 등록해 놓았기 때문에 상표등록을 할 수 없다고 통보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미국 상표법은 ‘선사용주의’이기 때문에 보잉사 보다 먼저 777을 사용했다는 것을 증명하면 승소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온 공장을 뒤져 84년 미국에 777 브랜드를 부착해 수출한 제품을 찾아냅니다. 결국 보잉과 공동으로 상표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이 소송전의 승리로 쓰리세븐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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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기한 손톱깎이들

분량이 적어서 이대로 끝내기가 아쉽네요. 신기한 손톱깎이들도 몇 개 소개해 드립니다.

ⓒamazon.com

허리를 굽히지 않아도 되는 발톱깎이 

안티오크 클리퍼(Antioch Clipper)에서 처음으로 출시한 발톱깎이로, 2011년에 특허가 출원되었습니다. 허리를 굽히기 힘든 어르신들을 생각해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klhip의 13만 원짜리 손톱깎이 ⓒklhip.com

가장 비싼 손톱깎이

세계 최초의 인체공학적으로 올바른 손톱깎이라고 주장하는 Klhip 손톱깎이입니다. 가격은 $79.95으로, 국내에서는 13만 원에 판매되고 있습니다. 의료용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들어졌다, 일본의 수술용 초정밀 기술이 사용되었다 등등의 수식어가 있긴 한데… 개인적으로 가격이 납득가진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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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동 손톱깎이 ⓒlotteon.com

전자동 손톱깎이

샤오미 등에서 출시한 전자동 손톱깎이입니다. 언제 처음 등장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국내에는 2019년부터 소개된 것으로 보입니다. 깎는다기보단 갉아내는 거라 호불호가 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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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사소한 것들의 역사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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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왜 ‘삼각팩’에 담긴 커피를 가장 맛있다고 하나? https://ppss.kr/archives/268003 Wed, 08 Jan 2025 03:08:10 +0000 http://3.36.87.144/?p=268003 목욕 후에 마시는 삼각포리는 한국인의 소울 드링크다

부모님 손에 이끌려 간 공중목욕탕에서 나는 인내를 배웠다. 뜨거운 온탕과 거친 때밀이가 펼쳐지는 아수라장, 잠깐이라도 견디기 힘들었던 사우나와 냉탕의 지옥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이것 때문이었다.

바로 목욕을 하고 난 뒤에 아빠가 사주는 ‘서울우유 커피 삼각포리’였다. 잽싸게 삼각포리의 꼭지를 가위로 자르고 빨대를 꽂아 마시면서 생각했다.

목욕 퀘스트를 해결하면 얻을 수 있던 서울우유 커피 삼각포리

어른이 되면 이렇게 맛있는 커피우유를 더 많이 마실 수 있는 거야?

안타깝게도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시간이 오래 지났지만 여전히 이 녀석보다 맛있는 커피 음료를 찾을 수가 없다. 마치 어린 시절 즐겨 마셨던 친구 같은 음료가 알고 보니 ‘이쪽 세계관 최강자’였다고 할까?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서울우유 커피 삼각포리가 세상에 나온 지 5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 녀석을 이길만한 제품은 나오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다른 애들은 삼각 팩에 담기지 않았잖아(어디 사각형이 까불어).

 

서울우유가 삼각형 용기에 담기게 된 이유

그렇다. 시대를 막론하고 오랫동안 사랑받은 음료들은 고유의 모양이 있다. 코카콜라의 곡선 유리병이라던지, 앤디 워홀의 작품이 되기도 했던 앱솔루트 보드카의 병 디자인이 그렇다. 서울우유 커피 삼각포리 역시 한 번 보면 잊힐 수 없는 디자인을 가졌다. 삼각형의 팩 모양에 담긴 커피라니. 어쩌다가 이런 용기에 음료를 넣게 된 걸까?

과거에 우유는 병에 담겨서 판매되었다

시간을 돌려보자. 196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가 아는 우유는 유리병에 담겨서 판매되었다. 사람들이 하나, 둘 우유의 맛과 영양에 반해가는 사이 우유회사들에는 문제가 생겼다.

우유병으로 시작해서 각 가정의 용기가 되었던 서울우유

신선한 우유를 담을 ‘유리병’이 잘 회수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우유를 만들려면 병을 또 만들어야 하고, 병은 무겁고, 깨지기가 쉽다 보니 우유회사들의 멘탈도 깨지기 일부직전이었다.

1972년 대한민국 우유를 대표하는 ‘서울우유’가 먼저 변화를 모색했다. 만들기도 쉽고, 우유의 맛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방법. 바로 ‘삼각팩’을 만든 것이다.

저기.. 저 색깔이 왜… 하얗죠?

문제는 거기에 담긴 것이 ‘커피’가 아니라 그냥 ‘흰 우유’였다는 것이다. 아… 커피로 시작한 게 아니었어?

 

그때는 우유였지만 ‘커피’가 되자 생긴 놀라운 일

안타깝게도 서울우유의 삼각팩 변신은 큰 호응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몇 가지 이유를 추측하면 아래와 같다.

낯가리는 삼각팩의 서울우유
  1. 유리병이 익숙한데 이것은 낯설게 생겼다.
  2. 마시려면 가위가 꼭 필요하다.
  3. 우유를 마시고 난 다음에 얻는 ‘유리병’도 없잖아?

하지만 이 삼각팩에 우유 대신 커피가 담기자 상황은 이렇게 변한다.

  1. 유리병 우유와 다른 맛인데 포장도 멋지네?
  2. 가위로 잘라 마셔야 한다니 재미있다.
  3. 유리병은 구할 수 없지만, 더 구하기 힘든 커피를 마실 수 있잖아!
전설의 시작 서울우유 커피 삼각포리

1974년에 출시된 ‘서울우유 커피 삼각포리’는 외형적으로도 내용적으로도 완벽한 데뷔였다. 당시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커피믹스나 자판기커피조차 없었던 시절이었다. 상류층들만 먹는다는 귀한 커피 맛을 볼 수 있다는 매력에 서울우유 커피 삼각포리는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났다. 우유를 담을 유리병의 문제는 모두 ‘종이 팩’으로 대체가 되었다. 딱 한 가지 제품만 빼고 말이다. 바로 ‘서울우유 커피 삼각포리’다. 50년이 지났지만 사람들은 이 제품을 삼각팩에 마시고 싶어 했다. 우리의 DNA가 뭔가 이 삼각형의 팩에 담긴 커피를 원한다고!

그런데 정말 궁금했다. 삼각팩에 든 커피는 왜 맛있게 느껴지는 것일까?

 

서울우유 커피 삼각포리에 숨은 3가지 맛의 비밀

인터넷에는 ‘서울우유 커피 삼각포리’를 두고 한 가지 갑론을박이 벌어진다. 바로 서울우유에서 만든 커피에는 재료가 유사하기 때문에 맛은 같다는 주장이다.

커피우유…아니 서울우유 커피들, 2018년부터 모든 커피우유는 ‘커피’라고 불린다

이런 말이 나오면 금세 많은 한국 사람이 달려들어 ‘그렇지 않아! 확신하는데 삼각팩에 뭔가 더 성분을 넣은 게 분명해!’라는 의혹 제기 파와 ‘예로부터 커피는 사각이 아니라 삼각에 마셔야 한다’는 장유유서 파 등의 답글이 달리게 된다. 때문에 마시즘이 한 번 그 이유를 3가지로 찾아봤다.

압도적인 국산 원유 함량이 보이십니까?

첫 번째, 다른 커피 제품과 비교했을 때 서울우유 커피 삼각포리를 비롯한 가공유 시리즈들은 원유 함량이 높아서 맛있을 수밖에 없다. 국산 원유를 75%를 넣어 깔끔한 우유 맛을 강조했다. 재료가 좋으니 맛이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같은 서울우유에서 나오는 커피들의 차이를 설명할 순 없다.

시각적으로도 너무 맛있다

두 번째는 ‘삼각팩’ 그 자체다. 사람은 이미 맛을 보기 전에 눈으로 맛을 짐작하거나 기대한다. 다른 우유들과 달리 삼각팩 모양에 담겨있는 ‘서울우유 커피 삼각포리’는 이제 유일무이한 디자인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전 국민이 이 제품을 안다. 이게 바로 ‘힙’이 아니던가?

잡지 표지 모델로 섰던 지드래곤이 마시는 음료는? 출처 : L’uomo

세 번째는 마시는 방법이다. 처음 삼각팩이 고려되었을 때 종이펄프가 아닌 이런 포장을 선택한 것은 포장재가 가지고 있는 영향을 받지 않고 우유의 맛만을 순수하게 전달하자는 의도였다. 많은 포장들은 입구에서 재질의 향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서울우유 커피 삼각포리는 그렇지 않았고, 심지어 빨대를 꽂아 마신다.

당시에는 우유의 참맛을 알려주기 위한 가장 좋은 시도로 느껴진다. 물론 단점도 없는 것은 아니다. 이걸 마시려고 엄마 쪽가위를 훔쳐서 주머니나 가방에 넣어두고 다녀야 했으니까. 언젠가… 빨대가 바로 꽂아지는 서울우유 커피 삼각포리가 나올 수도 있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진해지는 국민음료의 맛

시간이 지날수록 맛과 추억은 깊어만 간다

서울우유 커피 삼각포리가 세상에 등장한 지 5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대단한 점은 별다른 마케팅을 하지 않아도 매년 3,500만 개가 팔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이 음료를 놓아줄 생각이 없다. 어른들은 어른대로, 아이들에게는 새로운 발견과 추억으로 서울우유 커피 삼각포리의 사랑은 계속 진행 중이다. 어느덧 이 삼각팩에 담긴 커피는 서울우유를 넘어 ‘소울우유’가 된 것이 아닐까?

세상에 있는 다양하고 맛있는 커피들 사이에서 ‘유일한 모양을 가진 커피’. 서울우유 커피 삼각포리는 맛을 온전히 전달하기 위한 노력과 그것을 즐긴 사람들의 추억과 감성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여러분은 서울우유 커피 삼각포리 안에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까?

원문: 마시즘


참고문헌

  • 마시는 법, 동아일보, 1976.7.23
  • 서울우유 제품 다양화에 박차, 매일경제, 1977.6.9
  • 코피우유 판매 잇달아 업계 소비 확대 일환책, 매일경제, 1987.8.20
  • 국내 지로팩용기 생산의 역사, 한국포장협회, 1999.1
  • 투명한 사면체의 추억 삼각포리 커피우유, 디자인DB Vol.175, 2001
  • 30년 넘은 장수제품 ‘불황시대 효자’, 김보미, 경향신문, 2009.2.23
  • 서울우유, 39년 만에 새로운 ‘삼각우유’ 출시, 정은미, 아이뉴스24, 2012.6.26
  • 자전거로 우유병 나르던 그 시절부터…1위 지킨 ‘협동조합 체제’, 주현진, 서울신문, 2015.6.25
  • 커피우유는 카페라떼와 어떻게 다를까? 마시즘, 2021.1.11
  • 그때 그시절 공중목욕탕의 추억…서울우유 ‘커피포리’, 김동현, 뉴시스, 2021.6.6
  • 온라인용 ‘삼각커피우유’ 판매 돌풍…이커머스 힘주는 서울우유, 조재형, 아주경제, 2021.11.23
  • 서울우유 커피우유 3종, 성분은 같아도 맛은 다르다?, 김효인, 조유빈, 투데이신문, 2022.8.29
  • [식품박물관]①호랑이띠, 48세 된 국민 삼각우유…’커피포리’, 정병묵, 이데일리, 20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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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철의 노벨상 후보들, 겨울 난방기구의 역사 https://ppss.kr/archives/265602 Fri, 03 Jan 2025 01:39:01 +0000 http://3.36.87.144/?p=265602

난방기

실내의 온도를 높여 따뜻하게 하는 장치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시작하기 전에

윌리스 하빌랜드 캐리어는 에어컨의 기초를 만든 사람입니다. 인터넷에는 이 사람이 노벨평화상을 받아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더라고요. 오늘 저는 겨울철 노벨 평화상 후보들을 소개해 보려 합니다. 라디에이터, 온수기, 전기장판, 온수 바닥 난방 등의 온열 기구로 인류를 추위에서 구원하신 위인들이죠.

 

1. 첫 번째 후보, 라디에이터

최초의 산업용 난방은 라디에이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산업혁명의 시작은 증기기관이고, 라디에이터는 바로 그 증기로 공기를 따뜻하게 만드는 장치이기 때문이죠. 증기기관을 만들어낸 제임스 와트(James Watt)도 1790년대 일종의 라디에이터를 만들어 집에 설치했다고 합니다.

스티븐 골드의 매트릭스 라디에이터 ⓒpmmag.com
넬슨 번디의 라디에이터 특허

이처럼 증기기관이 등장하고부터 다양한 형태의 라디에이터가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증기를 사용하는 라디에이터는 압력 때문에 폭발하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1854년 스티븐 골드(Steven J. Gold)이죠. 그가 만든 라디에이터는 기존의 것보다 훨씬 저압으로 작동하는 장치로, 생김새 때문에 매트릭스 라디에이터로 불렸죠. 당시 사용되고 있던 벽난로와 비교해 효율도 안정성도 높아 상업적으로 성공한 최초의 라디에이터가 됩니다.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라디에이터의 형태는 1863년 발명가 조셉 나슨(Joseph Nason)과 로버트 브릭스(Robert Briggs)가 그 전신을 만들고, 1872년 넬슨 번디(Nelson H Bundy)가 완성한 제품입니다.

아메리칸 라디에이터 회사(American Radiator Co.)는 1891년 많은 보일러와 라디에이터 제조업체들을 통합해 세계에서 가장 큰 라디에이터 제조사가 됩니다. 이 회사는 오늘날에도 존재하는데요. 바로 아메리칸 스탠다드(American Standard)죠.

 

2. 두 번째 후보, 온수기

옛날에는 따뜻한 물을 쓰려면 냄비에 물을 끓여서 사용했습니다. 씻는 물이라면 펄펄 끓는 냄비 물을 찬물과 섞어 미지근하게 만든 뒤에 바가지로 퍼서 사용했죠.

가이저의 광고 ⓒbatemanwaterheating.com

오늘날처럼 바로 온수가 나오는 기계는 1868년 처음 등장했습니다. 영국의 벤자민 와디 모건(Benjamin Waddy Maughan)이 발명했죠. 모건은 이 발명품을 아이슬란드 온천의 이름을 따서 가이저(Geyser)라고 불렀는데요. 가이저는 차가운 물이 뜨거운 가스에 의해 가열된 파이프를 통과하면서 온수가 되는 원리였습니다. 하지만 가스를 배기하는 장치가 없어 자칫하다가는 터질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장치이기도 했죠.

에드윈 루드가 만든 온수기
에드윈 루드와 그의 발명품 온수기 ⓒwaterheatersplusplumbing.com

모건의 발명품을 안전하게 개량한 것은 연료 가스 제조 회사에서 일하고 있던 노르웨이의 엔지니어 에드윈 루드(Edmund Rudd)였습니다. 루드는 1880년 최초의 자동 저장 탱크식 가스 온수기 특허를 받았죠.

켐프의 태양령 온수기 특허
켐프의 태양령 온수기 광고 ⓒarticsolar.com
켐프의 태양력 온수기 광고 ⓒarticsolar.com

루드가 온수기를 개량한 때와 비슷한 시기에 켐프(Clarence Kemp)도 온수기를 생산하고 있었는데요, 1891년 그는 조금 특별한 온수기를 발명합니다. 가스로 물을 데우는 장치가 아닌 태양열로 물을 데우는 온수기인 클라이맥스 시스템을 개발한 것이었죠. 물이 흐르는 파이프를 지붕 위에 노출해 태양열로 파이프를 데우는 형식이었어요. 뜨거운 물을 사용하기 위해 한여름에도 난로를 데워야 하는 것이 불편하다고 생각해 만든 것이었죠.

 

3. 세 번째 후보, 전기장판

러셀의 전기담요를 보고 있는 사람들

최초의 전기장판은 1912년 의사였던 사무엘 러셀(Samuel Irwin Russell)에 의해 발명됩니다. 결핵환자의 몸을 따뜻하게 만들기 위해 발명한 것이었죠. 하지만 부피도 크고 화재의 위험성도 있어서 널리 쓰이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장판이 아닌 담요 형태로 만든 건 조지 크롤리(George Crowley)입니다. 조지 크롤리는 해군 기술자였는데요, 조종사들이 높은 고도에서 추위를 견딜 수 있도록 하는 전기 온열 비행복을 개발합니다. 그리고 이 기술을 담요에도 적용하죠. 1936년에는 실내 온도에 따라 자동으로 켜졌다 꺼졌다 하는 전기담요를 개발하기도 합니다.

 

4. 마지막 후보, 온수 바닥 난방

바닥 난방 시스템은 기원전 1300년 중동에서 처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르자와 국왕이 터키 비체슬탄의 궁전에 설치된 것이 바로 최초의 바닥 난방이죠. 참고로 우리나라의 온돌은 기원전 4세기경(!)으로 추정됩니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시기에 로마에서도 하이포코스트(hypocaust)라고 불리는 바닥 난방장치가 있었어요. 하이포코스트는 돌 바닥 아래의 빈 공간에 연기가 지나 벽면의 연도(연기 길)로 빠져나가게 되는데요. 온돌은 연기가 지나가는 길이 만들어져 있는 반면, 하이포코스트는 바닥 아래가 거의 다 뚫려있는 형태였죠. 또한 가정집보다는 목욕탕 등의 상업시설에 설치되었죠.

온풍 바닥 난방을 설명하는 그림

로마 제국이 몰락한 후 유럽에서의 난방 시스템은 후퇴하여 벽난로가 난방을 대체하게 됩니다. 다시 바닥 난방이 유럽에 등장한 것은 19세기 초반이죠. 1800년 초, 미국의 발명가 다니엘 페티본(Daniel Pettibone)은 바닥에서 따뜻한 바람이 나오는 장치를 개발하는데요. 엄연히 말하면 바닥을 따뜻하게 하는 것은 아니었고 특정 위치에서 따뜻한 바람이 나오는 장치라 바닥 난방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했죠.

앤지어 퍼킨스의 난방 시스템

온풍을 이용한 난방 방식은 부피가 너무 크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1831년이 되면 온수 파이프가 방바닥을 흐르게 해 바닥을 데우는 난방방식이 등장합니다. 앤지어 퍼킨스(Angier March Perkins)의 고압 온수 난방 시스템이었죠. 이 난방 시스템은 영국에서 인기를 끌고, 이윽고 미국에서도 유행하게 되죠.

 

5. 석탄 → 갈탄 → 연탄 →기름 → 가스

새마을 보일러 ⓒ6080추억상회

우리나라는 온돌을 오랫동안 쓰다가 주거 형태가 점차 변하기 시작하면서 더 이상 온돌을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서 집마다 퍼킨슨 방식의 바닥 난방이 도입되기 시작했죠. 물을 데우는 연료는 석탄으로 시작되었다가, 조개탄으로 불린 갈탄, 연탄 순으로 이어졌습니다.

당시에는 새마을보일러라는 것도 있었습니다. 퍼킨슨 화로 윗부분에 뚜껑을 만들어 그 안으로 물이 들어가 데워진 후, 옆에 달린 큰 고무통에 온수를 받을 수 있는 형태였죠. 새마을보일러는 1960년대 후반부터 널리 보급되었지만, 연탄가스 중독 사고가 발생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때마침 1970년대 다가구주택, 아파트 등이 보급됨에 따라 집마다 있던 퍼킨슨 난방이 중앙 난방식 연탄보일러로 대체되기 시작합니다. 이 중앙식 연탄보일러는 온수 사용이 가능하도록 제작된 최초의 온수용 보일러이기도 하죠.

1975년 이후부터는 아예 연탄이 사라지고 기름보일러가 보급되기 시작했습니다. 작동 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방안에서도 보일러를 컨트롤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은 혁신이었죠. 1997년 중반에는 사용자가 기다릴 필요 없이 순간적으로 온수를 쓸 수 있는 순간식 기름보일러도 등장합니다.

하지만 90년대 후반 정부의 에너지 정책과 맞물려 기름보일러보다는 가스보일러로 점차 시장의 흐름이 옮겨가게 되죠.

원문: 사소한 것들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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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최고의 맥주는 어쩌다 침몰하게 된 걸까? https://ppss.kr/archives/268001 Wed, 18 Dec 2024 01:41:56 +0000 http://3.36.87.144/?p=268001 1등석 여자는 술도 못 마신다고 생각했어요?

‘타이타닉’ 같은 명작은 언제나 우리 가슴속에 따뜻한 무언가를 남게 한다. 사랑의 농도는 만난 시간에 비례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라거나, 사실 생긴 게 저 디카프리오라면 누구라도 평생 기억하겠다는 현실이나, 3등석에 있는 저놈의 맥주는 무엇이기에 1등석 승객인 로즈도 맛있게 마실 수 있을까라는 궁금함 같은 거 말이다.

하지만 저것이 카스나 테라일리도 없고, 색깔이 어두워 흑맥주(포터)인지 에일인지 모르겠다 싶었는데… 어?

저 뒤에 있는 아저씨가 들었던 로고! 빨간색 삼각형 로고를 발견하게 되었다. 저것은 어디에서 본 맥주다.

바로 바스(Bass)였다. 빨간 삼각형이 상징인 맥주다. 피카소의 그림에도, 마네의 그림에도 이 맥주가 등장한다. 그런데 이 맥주… 타이타닉처럼 망하지 않았나?

오늘 마시즘의 맥주 이야기. 타이타닉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했고, 또 타이타닉처럼 사라진(?) 비운의 맥주 ‘바스’에 대한 이야기다.

 

흑맥주의 나라에서 밝은 맥주로 살아남기

역사가 깊은 술을 만든 사람을 알고 싶다면, 대충 술이름을 읊으면 된다. 바스 맥주를 만든 사람 역시 ‘윌리엄 바스(William Bass)’라는 인물이다. 그는 맨체스터와 런던을 오가며 운송사업을 하였다. 그의 주요 품목은 바로 맥주, 가 아닌 ‘모자’였다.

그런데 그의 나이 60살에 양조장을 하나 구입하게 된다. 1777년 나중에 맥주의 도시로 불리게 되는 ‘버튼 온 트렌트’에 만든 ‘바스(Bass)’였다. 당시 영국은 세계로 뻗어나가는 나라였으니까, 맥주를 좋아하는 영국사람들을 위해 우리도 맥주를 만든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바스 맥주는 밝은 갈색의 ‘페일 에일(pale Ale)’이었다. 하지만 영국에서 유행하는 맥주는 검은색의 ‘포터(Porter)’라는 맥주였다. 영국 내에서 인기를 얻기는 힘들었지만 기회는 있었다.

바로 영국 너머에! 바스 맥주는 러시아로, 북미로, 인도로 간다! 어차피 거기도 다 영국 제국이잖아!

 

붉은색 삼각형, 영국 최초의 트레이드 마크

해외 진출을 목표로 만든 바스는 1784년 러시아로, 1799년 북미지역으로 수출하며 인기를 끌었다. 일본에 판매된 최초의 해외맥주도 ‘바스 맥주’였다. 심지어 한국의 첫 맥주 자료인 1871년 수입맥주를 한 아름 앉고 있는 김진성님의 사진에도 이 맥주가 등장한다.

수출용 맥주였던 바스 맥주는 영국 본토 내에도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바스 맥주를 만들던 ‘버튼 온 트렌트(Burton-on-Trent)’의 밝은 IPA맥주가 영국의 인기 맥주로 자리 잡았다. 이 지역만의 물 맛이 맥주에 독특한 맛을 만들어주었다며 버튼 온 트렌트는 맥주 하면 떠오르는 도시가 되었다.

사람들은 이 맥주들 중 바스 맥주통에 있는 삼각형 문양으로 구분했다. 1830년대 후반부터 사용한 이 삼각형은 바스 맥주의 상징이었다. 이후 1876년 1월 1일 영국 최초의 상표등록을 위해 전날 직원을 출동시켰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덕분에 바스맥주의 붉은 삼각형은 영국 최초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그런데… 더 이상 맥주를 만들지 않겠다고?

 

세계 최고 맥주의 어이없는 전직

윌리엄 바스가 맥주양조장을 인수한 지 200년, 바스 맥주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맥주가 되었다. ‘타이타닉호’에 실린 맥주라는 타이틀은 바스가 얼마나 인지도 있는 맥주인지를 말해준다. 비록 사고로 500상자가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 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스는 영국에서 가장 많은 펍(맥주집)을 소유한 회사가 되었다. 무려 7,190개의 펍이 있었다. 또한 호텔 사업을 시작해 영국과 유럽에 많은 호텔들을 소유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잘 나가던 일이 걸림돌이 되었다.

바로 ‘마가렛 대처(Margaret Thatcher)’의 등장이었다. 1989년 마가렛 대처는 대형 맥주회사들의 독점을 막기 위해 정책을 발표했다. 가장 주요한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2,000개 이상의 펍을 소유한 양조업체는 초과분의 절반을 매각해야 한다.

이는 영국 내의 소규모 맥주 양조업체들에게 단비 같은 이야기였지만, 바스맥주에게는 재앙이었다. 결국 이로 인해 영국의 대형 양조업체들은 펍을 매각해야 했다. 그리고 바스맥주는 맥주사업을 접고, 호텔사업에 집중하기로 한다. 2000년 6월 바스맥주는 세계에서 가장 큰 맥주회사 ‘인터브루(현 AB인베브)’에 맥주사업을 매각해 버린 것이다.

그렇게 바스맥주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점 사라지게 되었다.

 

돌아왔지만 돌아오지 않은 것

시간이 지나 2018년 영국에 ‘바스 맥주’를 재출시하겠다는 뉴스가 떴다. 영국 내의 에일시장을 다시 한번 살리기 위해 상징적인 맥주를 낸 것이다. 하지만 반응은 이전과 같지 못했다. 맥주 애호가들이라면 반가워할만한 소식이지만 더 이상 버튼 온 트렌트의 맥주가 아니었다.

단지 이름과 삼각형을 가져왔을 뿐 이전과는 내용도, 진정성도 다른 바스 맥주는 이를 기다리는 팬들과 전문가들의 외면을 받았다. 모두가 그리워하지만, 그래서 돌아왔다고 하지만 더 옛날이 그리워진 맥주가 되어버린 것이다.

바스맥주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호화롭고 거대한 맥주 산업도 갑자기 침몰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한 번 침몰한 맥주는 다시 대중들의 곁에 온전히 돌아올 수 없다는 것. 마지막으로 맥주에 대한 추억은 오랫동안 기억된다는 타이타닉 같은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원문: 마시즘


참고문헌

  • Beer Through the Ages, trystanhoward, Pressbooks
  • 7 Bass pale ale, Beer Through the Ages, trystanhoward
  • AB InBev to bring Bass Pale Ale back, Nicholas Robinson, orningadvertiser, 2018.11.9
  • The Early History of Bass, IAN WEBSTER, THE BEERTONIAN, 2019.12.17
  • Who Owns What In The UK Brewing Scene?, THE CARLING TEAM, 2020
  • 상투 틀고 끌어안은 맥주병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허윤희, 조선일보, 2021.05.17
  • The Story of Bass – The Rise & Demise of a Brewing Great, Paul Bailey, Paul’s Beer & Travel 2022.4.22
  • 타이타닉과 사라진 비운의 맥주, 바스 페일 에일, 윤한샘, 오마이뉴스, 2023.4.1
  • Bass Premium Pale Ale 4.4%, 살찐돼지, 2023. 6. 8
  • Bass Brewery Logo History, BrandCrowd. 2024.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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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 복음 12장 34절 https://ppss.kr/archives/266646 Thu, 31 Oct 2024 00:55:30 +0000 http://3.36.87.144/?p=266646

치킨

닭에 밀가루 따위를 입히고 튀겨 만든 요리. 굽기도 한다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1. B. C. (Before Chicken)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닭 요리는 백숙입니다. 고기가 귀하던 시절 더 이상 달걀을 낳지 못하는 닭을 푹 끓여서 양을 불릴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죠.

백숙 이후에는 일제강점기에 계삼탕이 나타났습니다. 계삼탕은 삼계탕의 원래 이름인데요. 인삼과 닭은 모두 귀한 요리 재료였기 떄문에 당시에는 특권층들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어요. 우리가 복날 흔하게 삼계탕을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1963년 이후 사료 산업이 발전되고 양계산업의 규모가 커진 이후입니다.

요새는 닭이 일상 음식이 되었지만, 옛날에는 특별한 날에 먹는 음식이었어요. 크리스마스나 Thanks Giving Day에 주한 미군들은 고국에서 공수한 칠면조 요리를 먹었는데, 이것을 보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따라 했다는 거죠. 하지만 칠면조는 구할 수 없으니까 대신 닭을 먹었다고 합니다.

 

2. 태초에 전기구이 통닭이 있으라

우리나라에서 처음 등장한 치킨은 1960년 명동영양센터의 전기구이 통닭입니다. 현재도 가게가 남아있어요.

전기구이 통닭은 굽네치킨과 오빠닭 등으로 대표되는 오븐 치킨의 전신이죠. 여기에 강한 양념을 더한 것이 숯불구이치킨이고, 2005~6년쯤에 유행했던 불닭을 거쳐 현재는 훌랄라와 지코바로 남아있죠.

 

3. 압력튀김기가 이 땅에 이르러 닭을 튀겼나니

1970년대 말 압력튀김기가 국내에 수입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튀김옷이 있는 후라이드 치킨이 등장하게 됩니다. 치킨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는 먼저 튀김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튀김에는 간단하게 습식과 건식이 있어요. 습식은 물반죽, 건식은 파우더를 묻혀 튀깁니다. 물반죽으로 만든 치킨을 ‘민무늬 치킨’이라 부르고, 건식으로 만든 치킨은 ‘엠보치킨’이라 부릅니다. 습식과 건식을 합쳐 볼륨감을 주는 방식은 KFC와 같은 크리스피 치킨이 되고요.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파우더를 묻혀 건식으로 튀겨낸 엠보치킨이예요. 보드람, 치킨뱅이, 둘둘치킨, 림스치킨처럼 호프집에서 파는 치킨(?)의 형태를 띠고 있죠. 림스 스타일이라고도 불리는데요. 1977년 등장한 한국 최초의 치킨 프랜차이즈인 림스치킨에서 시작했기 때문이예요.

엠보치킨은 작은 닭을 한방염지액에 담근 뒤, 파우더를 얇게 묻혀 촉촉하게 흡수시킨 다음에 압력 튀김기에서 튀겨냅니다. 그래서 닭이 작고, 독특한 한약 맛이 나는 것이 특징이죠.

 

4. 치킨에 양념이 배거늘 많은 이들이 감읍하여 그를 믿고 따르리라

엠보 치킨 이후에는 습식으로 튀겨낸 민무늬 치킨이 등장했어요. 1980년대 시장에서 파는 ‘닭전’에서 시작되었죠. 이후 치킨 1세대 브랜드로 불리는 페리카나(1981년), 맥시칸치킨(1985년), 처갓집 양념통닭(1988년), 멕시카나(1989년), 장모님치킨(1989년)가 민무늬 치킨으로 영업을 시작했어요.

민무늬치킨이 이렇게 유행할 수 있었던 데에는 먼저 1982년 프로야구 출범, 1988년 서울올림픽 등 80년대 스포츠 열풍의 덕이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양념치킨의 등장이 큰 역할을 했어요. 민무늬 치킨은 표면이 매끄러워 양념소스에 버무리기 좋았고, 염지 자체가 독특한 향미를 지닌 엠보치킨보다 양념에 적합했죠.

양념치킨은 프랜차이즈 등록 시기(1982)가 가장 빨랐던 페리카나가 자신이 원조임을 강조했었죠. 하지만 현재는 멕시칸 창립자인 윤종계씨가 양념치킨의 개발자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윤종계씨는 1985년 양념통닭 요리법을 개발해 ‘계성육계’라는 개인업체를 운영하고 있었고, 1986년부터 ‘맥시칸 양념통닭’으로 사업을 확대했어요.

이 맥시칸 치킨에서 생겨난 업체만 70여 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대표적으로 ‘처갓집양념통닭’은 맥시칸 기계제작 공장장과 영업부장이 시작한 사업이죠.

 

5. BBQ 가로되 안방에서도 KFC 치킨을 허락하라 하더라

KFC, BBQ처럼 바삭한 튀김옷이 특징인 치킨을 크리스피 치킨, 업계 용어로는 ‘물결무늬 치킨’이라고 합니다. 크리스피 치킨을 만들기 위해서는 염지 닭에 튀김가루를 묻히고, 물반죽코팅(배터믹스)에 담갔다가 다시 튀김가루에 묻혀야돼요. 이때 좁은 통에서 튀김가루를 묻히면 닭이 서로 눌려 튀김옷의 컬이 잘 잡히지 않기 때문에, 큰 통에서 많은 양의 튀김가루를 담아 묻혀야 하죠.

이처럼 크리스피치킨은 원가가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KFC에서만 먹을 수 있는 고급 치킨이었어요. 1990년대 말이 되어서야 등장한 또래오래, BHC에서 크리스피치킨을 선보였는데요. 1995년 당시 BBQ의 컨셉은 ‘안방에서도 KFC 치킨을 즐길 수 있다’일 정도였죠.

원문: 사소한 것들의 역사


참고

  • 정은정. (2014). 대한민국 치킨전. 따비.
  • 대법원 1997. 2. 5. 선고 96마364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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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광복, ‘한글’로 해방의 감격을 노래하다 https://ppss.kr/archives/266956 Mon, 07 Oct 2024 12:26:10 +0000 http://3.36.87.144/?p=266956 1945년, 해방의 감격을 전하는 시와 시조, 노랫말, 그리고 산문
▲ 1945년 8월 25일, 남산 국기게양대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있다. 날짜는 미확인.

어머니! 이, 일본이 항복을 했다 합니다!”
“뭐라 했느냐?”
“일본이, 일본이 말예요, 항복을, 천황이 방송을 했다 합니다.”

서희는 해당화 가지를 휘어잡았다. 그리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정말이냐…….”

속삭이듯 물었다. 그 순간 서희는 자신을 휘감은 쇠사슬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다음 순간 모녀는 부둥켜안았다. 이때 나루터에서는 읍내 갔다가 나룻배에서 내린 장연학이 뚝길에서 만세를 부르고 춤을 추며 걷고 있었다. 모자와 두루마기는 어디다 벗어던졌는지 동 저고리 바람으로

“만세! 우리나라 만세! 아아 독립 만세! 사람들아! 만세다!”

외치고 외치며, 춤을 추고, 두 팔을 번쩍번쩍 쳐들며, 눈물을 흘리다가는 소리 내어 웃고, 푸른 하늘에는 실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5부 완결편 마지막 장면

봉순이 낳은 아이로 서희가 딸로 거둔 양현이 일본의 항복 소식을 서희에게 알리는 장면이다. 서희는 땅바닥에 주저앉고, 모녀는 부둥켜안는다. 읍내 갔다가 소식을 듣고 돌아오며 서희의 집사 장연학이 미친 듯이 만세를 부르고 춤을 추다 눈물을 흘리다가 소리 내어 웃는 가운데 대단원의 막이 내린다.

 

한글로 노래한 해방의 감격

실제로 1945년 8월 15일, 당시 삼천만 동포는 해방의 감격을 어떻게 드러냈을까. 남편인 길상이 감옥에 있는 최서희에게는 해방의 의미가 훨씬 명확했을 것이다. 징집을 피해 산에 온 사람들을 도우며 나름의 항일 운동에 참여한 장연학에게도 남다른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 전남 광주에서 펼쳐진 5.15해방 경축 퍼레이드

그러나 실제 해방 당일 그 소식을 제대로 아는 이들도 많지 않았고, 너무 갑작스러운 통일 소식이 별로 실감할 수 없었을 거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마침내 일제가 물러간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민족 지도자들의 귀환과 활동을 통해 광복의 의미를 실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1945년 해방 무렵에 사람들이 느꼈을 벅찬 감격은 어땠는지를 검색해 보다가 2020년에 국립 한글박물관의 소식지 <한박웃음>(2020.8. 제84호)의 기획 기사 ‘광복의 기쁨, 한글로 노래하다’를 읽었다. 해방은 일제 말기부터 금지되었던 조선어 사용과 교육을 온전히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심훈은 ‘그날’을 맞이하지 못했다

1930년에 심훈(1901~1936)이 발표한 시 <그날이 오면>은 심훈이 ‘해방의 그날’에 대한 열망을 직접적으로 표출한 작품으로, 이육사의 <절정>과 함께 1930년대를 대표하는 저항시다. 1920년대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잇는 이 작품은 해방의 그날이 오면, 시인의 머리로 종로의 인경을 두들기고 가죽으로 북을 만들어 치며 행렬의 앞장을 서겠다는 단순하고 격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날이 오면>은 1930년 3월 1일 기미 독립선언일을 기념하여 쓴, 식민지 시대의 대표적인 저항시이지만 심훈은 해방을 맞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그의 시는 작품집 《그날이 오면》(1949)에 실려서 해방 조국의 독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조선어학회의 간사장을 맡았던 한글학자 이극로(1893~1978)는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징역 6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해방 이틀 뒤에 함흥형무소에서 출옥했다. 국어학자인 그에게 해방은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을 터, 그는 1945년 12월 발간된 《해방기념시집》에 시조 ‘한양의 가을’을 싣고 한반도의 아름다움과 희망찬 내일을 노래했다.

 

시와 시조, 노랫말이 된 해방의 감격

이극로는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하면서 맞춤법 통일, 표준말 제정, 사전 편찬, 외래어 표기법 통일 등에 크게 이바지한 이다. 그는 1948년 4월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 참석차 평양에 갔다가 잔류하여 북한에서 활동하였는데, 1966년 이후 본격화한 북한의 언어규범화운동인 ‘문화어 운동 사업’을 주관하였다.

‘한양의 가을’은 한강, 기러기, 남산의 단풍, 무 배추 등 조선 김치 같은 시어를 써서 흥분하지 않고 담담하게 해방 조국에 당도한 가을을 노래했다. 씩씩한 청소년들의 모습에서 ‘신흥 조선’을 읽는 국어학자의 모습을 천천히 떠올리게 해 준다.

청록파 시인 조지훈(18920~1968)은 1945년 12월에 간행된 《해방기념시집》에 <산상(山上)의 노래를 발표하며 ‘어두운 과거를 극복한 현실에 대한 기쁨과 미래에 대한 소망’을 노래했다. 그는 해방의 감격을 비유적 표현과 절제된 어조를 통해 우회적으로 표현하면서, 일제 강점기를 견뎌내고 광복을 맞이하고도 민족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는 자기 모습을 구체적인 사물을 통해 드러냈다.

위당 정인보(1893~1950)는 처음으로 ‘국학’이라는 용어를 써서 이 땅에 ‘국학’의 뿌리를 내리고 품격 높은 국한문 혼용의 산문과 아름답고 전아한 의고체(擬古體)의 한글로 시조를 썼던 이다. 그는 해방 무렵에 ‘십이애(哀)’를 쓰기도 했지만, 그가 노랫말을 쓴 ‘광복절 노래’는 그의 아름다운 한글 맵시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광복절은 1949년 10월 1일 제정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따라 제정되었는데 광복절 노래도 같은 해 공모로 만들어졌다. 바장조, 4분의 4박자, 전체 16마디로 구성된 전형적인 두도막 형식 A(aa’) B(bc)의 곡이다. 2연 8행의 정형시에 1절과 2절로 나누어 곡을 붙였다.

‘보리밭’과 동요 ‘나뭇잎 배’를 만든 윤용하가 작곡한 이 광복절의 노랫말에도 위당 특유의 예스러운 한글의 아름다움의 품격으로 빛난다.

 

해방을 맞이한 여인의 감회, ‘대한 해방 감회문’

한편, 조선의 마지막 공주 덕온공주(조선의 제23대 왕 순조와 순원왕후의 막내딸)의 손녀 윤백영이 58세에 독립을 맞이하며 느낀 기쁨을 적은 글도 새삼 ‘나라 글자’ 한글에 대한 정체성을 환기해 준다. 붓글씨로 쓴 ‘대한 해방 감회문’은 “당시 여성으로서 해방에 대해 한글로 쓴 자료가 드문데다 윤백영의 뛰어난 한글 서체가 정갈하게 드러나 역사적으로도 가치를 지니는 작품”(한박웃음)이다.

여인은 해방을 “하늘은 복되고 길한 기운을 발하고 사람들은 행복의 기쁨이 넘치고 풀과 나무는 향기를 통하고 땅은 오곡이 잘 여물도록 도와주는 이때”로 받아들였다. 여성이라고 해서 해방의 감회가 남자와 다르겠는가. 궁서체의 글씨에 따뜻하게 배어 있는 한 여성의 감회는 새삼 시대를 뛰어넘어 다가온다.

고 성내운 교수의 목소리로 읊는 정희성의 시 <8·15를 위한 북소리>를 듣는다. 새벽 운동에서 돌아와 태극기를 달면서 고개를 빼어 아파트 위아래를 찾아보는데, 위층 어디쯤 태극기 하나가 펄럭이고 있어서 반가웠다. 아, 언제 서울에 갈 기회가 있으면 ‘한글박물관’에도 꼭 한번 들러야겠다고 생각한다.

원문: 이 풍진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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