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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세트 테이프

소리를 기록할 수 있는 자기 테이프를 장치한 작은 플라스틱 갑. 1963년 네덜란드 필립스사(Phillips社)가 개발하였다.≒카세트.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1. 자기 테이프 이전은 와이어

음성을 기록하는 장치는 토머스 에디슨(Thomas Edison)이 포노그래프(Phonograph)를 발명하고, 에밀 베를리너(Emile Berliner)가 축음기를 개선한 디스크 그래모폰을 만들며 시작되었습니다. 그래모폰의 기본 원리는 소리 파형을 매체에 기계적으로 기록하고, 그 파형을 진동으로 재생하는 것이었죠. 이러한 디스크 그래모폰 기술은 LP로 발전하게 됩니다.

반면 1888년경, 미국의 오벌린 스미스(Oberlin Smith)는 그래모폰과 달리 기계적 녹음 방법과 완전히 다른 자기 녹음의 아이디어를 처음으로 생각해 냈습니다. 스미스는 이 아이디어를 특허로 등록하지 않고 공개하는데요, 이를 보고 영감을 받은 발데마르 폴센(Valdemar Poulsen)은 1898년 세계 최초의 자기 녹음기를 발명합니다.

폴센의 장치는 에디슨의 축음기와 매우 유사하지만, 실린더가 강철 와이어로 감싸져 있고, 와이어에 전자석이 접촉해 있다는 점이 달랐죠. 이때 전자석이 축음기의 바늘 역할을 하며, 실린더가 회전하면서 소리가 기록되었죠. 폴센은 이 장치를 텔레그래폰(Telegraphone)이라고 불렀습니다.

폴센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에서 텔레그래폰의 특허권을 획득하고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 출품해 좋은 평가를 받습니다. 하지만 초창기 기술이었던 만큼 음질이 좋지 않았고 고장이 잦았습니다. 게다가 디스크 그래모폰의 성능은 계속 발전했기 때문에 폴센의 텔레그래폰은 실패합니다. 그럼에도 폴센과 그의 조수 페더 O. 페더센(Peder O. Pedersen)은 텔레그래폰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데요. 1907년 그들은 녹음의 감도를 높이고 왜곡을 줄이는 DC 바이어스 시스템에 대한 특허를 미국에서 획득합니다. 이 기술은 이후 30년 동안 AC 바이어스가 발명될 때까지 자기 녹음 장치에서 필수적인 기술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2. 와이어 다음은 강철 리본

와이어 레코드는 디스크 레코드보다 더 오랜 시간 연속적으로 재생할 수 있다는 차별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1920년대 방송 및 군사 통신 분야에서 자기 녹음기에 대한 관심이 커지기 시작합니다. BBC에서는 무게 1톤, 길이 3,000m의 강철 리본으로 30분 동안 녹음하는 강철 리본 레코더를 사용했습니다. 이는 1937년 일본으로 수입되어 NHK 도쿄에서도 사용되었죠.

와이어 레코더와 강철 리본 레코더는 풀리면 다시 감기가 매우 어려웠고, 끊어질 경우 다시 용접해야 하는 등 사용성이 안 좋았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28년, 독일 엔지니어 프리츠 페우머(Fritz Pfeumer)는 종이테이프에 산화철을 코팅하여 녹음테이프를 만들었고, 세계 최초의 테이프 레코더인 사운드 페이퍼 머신(Sound Paper Machine)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운드 페이퍼 머신의 코팅된 자기 테이프는 표면이 고르지 않았고, 코팅이 잘 붙어있지 않아 재생 중에 자성 입자가 헤드와 접촉하면서 떨어졌죠. 이로 인해 이 기계는 ‘샌드페이퍼 기계’라는 악명이 붙게 되었죠.

 

3. 독일에서 발전한 테이프 레코더

이러한 테이프 레코드의 한계들로 인해 대다수 유럽에서는 디스크 레코더가 주류였습니다. 반면 독일만은 예외였습니다. 프리츠 페우머의 사운드 페이퍼 머신을 시작으로 릴투릴 레코더가 주류였죠. 1930년대 독일의 AEG에서 마그네토폰(Magnetophon)을, 1935년에는 K1을 연이어 발표했습니다. 그래서 1939년 독일 대부분의 방송국에는 마그네토폰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1942년에는 AC바이어스가 도입되어 마그네토폰의 음질이 크게 개선되며 고품질의 사전 녹음된 방송을 송출할 수 있었죠. 당시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는 마치 연설장에 있는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자기 테이프 레코더를 애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독일에서는 군사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테이프 레코더 기술을 비밀에 부쳤습니다. 참고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은 고품질 방송이 라이브로만 가능하다고 생각해, 독일에서 이러한 방송이 지속적으로 송출되는 것에 대해 당황해했다고 합니다.

 

4. 엘비스 프레슬리도 쓰게 된 마그네토폰

1945년 7월, 독일이 항복한 지 두 달 후, 미국 육군 통신단의 존 멀린(John Mullin)은 프랑크푸르트 외곽의 한 라디오 방송국에서 독일제 마그네토폰을 발견합니다. 독일의 통신 기술에 매료된 멀린은 마그네토폰을 개량해 1946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IEEE 회의에서 선보입니다. 이후 멀린은 Ampex Co., Ltd.와 협업하여 1948년 Ampex 200 모델을 완성하죠.

당시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던 ‘빙 크로스비 쇼(Bing Crosby Show)’에서는 녹음 음질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는데요. 이 쇼의 관계자들이 고품질의 Ampex 200을 보자 바로 ABC 방송국에 도입합니다. 이를 본 메이저 녹음 스튜디오들도 앞다투어 Ampex 200을 도입하죠. 참고로 1954년 엘비스 프레슬리(Evis Presley)는 자신의 첫 싱글 <댓츠 올 라이트(That’s All Right)〉를 Ampex의 자기 테이프 기계로 녹음했습니다. 이렇듯 Ampex는 1950년대 미국 릴투릴 시장을 지배하기 시작했죠.

곧이어 휴대용 테이프 레코더도 등장합니다. 1951년 스테판 쿠델스키(Stefan Kudelski)가 만든 나그라(Nagra)가 그 주인공이죠. 나그라는 시네 카메라와 동기화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추고 있어, 영화 촬영 현장에서 주요 음향 녹음 장비로 사용되었습니다.

 

5. 차량에서 쓸 수 있는 테이프 레코더

테이프 레코더는 1950년대 폭발적으로 발전하고 대중화되면서 빠르게 디스크 레코더를 대체합니다. 1960년대에는 방송국, 녹음 스튜디오는 물론, 가정용 오디오 장비까지 테이프 레코더가 대세가 되죠.

초기의 테이프 레코더는 모두 오픈 릴 방식으로, 작동을 위해 테이프 릴이 필요했습니다. 고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오픈 릴 테이프 레코더는 높은 테이프 속도를 유지해야 했고, 이는 많은 테이프를 소비했습니다. 이로 인해 릴과 전체 기계의 크기가 상당히 커질 수밖에 없었는데요. 커다란 테이프 릴은 테이프가 풀려서 엉키는 등 관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러한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카트리지 안에 테이프를 사용하는 방법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집니다.

특히 카트리지 테이프가 필요했던 분야는 차량용 오디오 장비였습니다. 진동이 많은 차량에서는 오픈 릴 테이프는 물론 디스크 레코드 장비도 무용지물이었기 때문이죠. 차량용 오디오 장비는 진동에 강한 테이프 레코드여야 했고, 작고, 카트리지에 담겨 있어야 했습니다.

이에 1962년 피델리팩(Fidelipac) 카트리지가 미국에서 판매되기 시작했으며, 차량용으로 매우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 카트리지는 4트랙 스테레오 시스템으로 10분 동안 재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3년 뒤 출시된 리어제트(Learjet)의 카트리지는 8트랙으로 약 60분 동안 재생할 수 있었습니다. 이 8트랙 카트리지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표준 차량용 스테레오로 자리 잡았습니다.

 

6. 표준화 전쟁: 필립스 vs. RCA

한편, 유럽에서는 음악 테이프의 인기에 힘입어, 1958년 RCA 빅터에서는 카트리지형 테이프를 발표했고, 테이프 레코더와 함께 약 150종류의 음악 테이프를 출시했습니다. 그러나 이 카트리지는 대량생산 시 정밀도를 유지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원하는 수준의 녹음·재생 성능을 달성하려면 매우 좁은 헤드 간격이 필요했는데, 당시의 제조 및 부품 기술로는 이를 구현할 수 없어 품질 관리에 실패하죠.

미국에서 차량용 스테레오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1964년 유럽에서는 필립스(Philips)에서 개발한 콤팩트 카세트 테이프가 주목받고 있었습니다. 필립스를 이어 RCA도 자신들의 카트리지 디자인을 개발해 유럽에서 대중화하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이후 RCA는 유럽 제조업체들과 협력하여 다시 더 작은 카트리지인 DC 인터내셔널 타입을 만들어냅니다. 그렇게 해서 콤팩트 카세트 테이프와 DC 인터내셔널이 경쟁하게 되죠.

필립스는 DC 인터내셔널과 경쟁하면서 소니에 콤팩트 카세트 포맷을 채택하도록 접근하며, 개당 25엔의 로열티를 제안합니다. 하지만 소니가 이를 거절하죠. 필립스는 가격을 크게 낮추어 제안하지만, 또다시 소니가 거절합니다. 결국 필립스는 소니에게 무료로 라이센스를 제공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독점금지법과 다른 회사와의 형평성을 고려하여 1965년 필립스는 모든 회사에 특허를 무료로 공개합니다. 이러한 결정을 통해 필립스의 콤팩트 카세트는 표준이 되죠.

 

6. 워크맨의 등장

이처럼 카세트 테이프가 점차 대중화되고 있었지만, 주로 녹음 및 업무·학습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음악 감상용으로는 LP가 더 대중적이었죠. 그랬던 카세트 테이프가 LP의 자리를 넘보게 된 시점은 휴대용 카세트 테이프 플레어이어가 등장한 이후였죠.

1966년 소니에서 첫 번째 콤팩트 카세트 테이프 레코더 TC-100를 출시했습니다.. 말이 콤팩트지 휴대가 간신히 가능한 카세트 테이프 레코더였죠. 2년 후에 출시된 TC-50가 진정한 콤팩트 카세트 테이프 레코더의 시작이라 부를 수 있었습니다. 이후 출시된 워크맨과 사이즈도 큰 차이가 없었고, 무엇보다 아폴로 10호 우주선 승무원들이 사용하면서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소형 휴대용 테이프 레코더에는 문제가 있었는데요. 걸으면서 받는 충격 때문에 카세트 테이프의 회전에 간섭이 생겨 재생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이었죠. 소니에서는 1975년 출시한 고성능 휴대용 Hi-Fi 데크 TC-D5에서 이 문제를 해결합니다.

하지만 TC-D5는 하이엔드 카세트 레코더인 만큼 기능도 많고 부피도 컸습니다. 이를 직접 들고 출장을 갔던 소니의 창립자 중 한 명인 마사루 이부카가 특히 불편함을 호소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항상 휴대하며 들을 수 있는 컨셉의 기기를 떠올리게 되었죠. 그러면서 당시 기자들의 취재용으로 쓰이던 소니의 프레스맨(Pressman)에서 녹음 기능과 스피커를 없애고 스테레오 앰프를 장착한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와 그에 어울리는 가벼운 헤드폰 개발을 지시합니다. 이렇게 해서 1979년 워크맨(Walkman)이 출시됩니다.

최초의 워크맨은 소니 창업 33주년을 기념해 33,000엔으로 책정되었습니다. 두 달 동안에만 30,000대 이상이 판매되었고, 1989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1억 대 이상이 판매되었습니다. 하지만 CD의 등장과 휴대용 CD플레이어가 등장하며 워크맨과 카세트 테이프는 쇠퇴합니다.

 

참고

  • 김토일. (2005). 소리의 문화사. 살림.
  • 기디언 슈워츠. (2022). 오디오, 라이프, 디자인. 을유문화사
  • Masanori Kimizuka. (2012). Historical Development of Magnetic Recording and Tape Recorde. National Museum of Nature and Science Systematic Examination of Technology Report, Volume 17.

원문: 사소한 것들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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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8월 26일, 프랑스 의회가 ‘프랑스 인권 선언’을 공표하다 https://ppss.kr/archives/265467 Tue, 02 Sep 2025 00:15:06 +0000 http://3.36.87.144/?p=265467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1789, 프랑스)

1789년, 프랑스 제헌 국민의회는 헌법의 정신을 담은 전문(前文)과 17개 조의 기본 원리를 공표하였다. ‘프랑스 인권선언’ 또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이라 불리는 이 선언은 자유와 평등, 종교, 출판과 결사의 자유 등 인간의 천부적 권리는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보편적임을 표명하고 있었다.

선언의 근본 사상은 근세의 자연법사상과 계몽사상을 통해 자라난 인간해방의 이념이다. 선언은 인간의 자연적 권리(자유·소유권·안전과 압제에 대한 저항)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이를 보전하기 위하여 정치적 결합, 즉 국가의 형성을 인정한다. 또 국가 형성의 기본 원칙으로서 시민적 제 권리(주권재민·권력분립·법률제정권 등)를 보장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구체제의 억압에 종언을 고하다

인간의 기본권과 근대 시민사회의 정치이념을 명확히 표현하고 있는 이 선언으로 종교와 출판의 자유 등 인간의 기본권을 억누르던 로마 가톨릭교회를 중심으로 한 구체제(앙시앵 레짐 Ancien Régime)의 억압은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프랑스 인권선언은 말할 것도 없이 프랑스 대혁명(1789.7.14.~1794.7.27.)의 산물이다. 절대왕정이 지배하던 프랑스의 구체제를 무너뜨린 것은 면세의 혜택을 누리면서 권력과 부와 명예를 독점하고 있었던 성직자와 귀족에 맞서 무거운 세금을 시달려야 했던 인구의 98%를 차지하고 있던 제3계급(평민)이었다.

7월 14일 아침, 파리 민중들이 혁명에 필요한 무기를 탈취하기 위하여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 점령하면서 시작된 혁명은 2년간에 걸쳐 프랑스의 전 체제를 전복시켰다. 혁명은 구체제를 무너뜨렸지만, 혁명 후 수립된 공화정이 나폴레옹의 쿠데타로 무너지는 등 굴곡진 정치 상황이 이어졌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프랑스 혁명이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구체제의 모순을 풍자한 당시의 만화.
시민들에게 공격받는 바스티유 감옥. 장 피에르 휴엘이 그린 수채화.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외젠 들라크루아가 유화. 사실 프랑스 혁명보다 40년 이후에 벌어졌던 7월 혁명을 기념하기 위한 그림이지만, 흔히들 프랑스 혁명을 상징하는 그림으로 오해한다.

프랑스 혁명은 유럽과 세계사에서 정치권력이 왕족과 귀족에서 시민계급으로 옮겨지는, 역사적으로 새로운 시대로 열어가는 전환점이었다. 그리고 이 혁명이 환기해 낸 혁명의 이념인 자유와 평등과 박애, 인간의 존엄성을 확인하고 국민 주권에 관한 내용을 총화해 낸 것이 프랑스 인권선언이었다.

라파예트(1757~1834) 등이 기초한 프랑스 인권선언문은 영국의 권리장전(Bill of Rights, 1689)과 미국의 독립선언서(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1776)와 함께 근대 민주주의 발전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문서로 불린다.

프랑스 인권선언은 자유와 평등을 보편적인 이념으로 확산시켜 보통선거와 근로권, 사회보장제도, 교육권 등 사회권을 규정하고 있는 1793년의 또 다른 인권선언으로 이어졌다. 혁명은 숱한 사람들의 희생을 요구했지만, 결과적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구체적으로 확인한 인권의 진보, 그 출발점이기도 했다.

 

여성을 배제한 선언의 한계

프랑스 인권선언은 미국 독립선언문과 함께 ‘인권’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지만, 이 선언의 한계도 적지 않다. 선언에서 이르는 ‘시민’의 범주가 백인 남성에 한정되어 있었고 인권의 보편성을 주창하고 있지만, 이는 근본적으로 부르주아의 요구가 반영된 것이었다.

새로운 사회의 주역으로 등장하고자 했던 부르주아들은 구체제에 대한 자유를 선언하면서 자신들의 이상을 투영하여 신분이 아니라 능력과 재산에 걸맞은 지위를 보장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올랭프는 “여성들에게도 교수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 또한 여성들은 연단에 올라설 수 있는 권리도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랑스 인권선언이 보장한 각종 시민권이 남성에게만 한정되었다고 본 극작가 올랭프 드 구즈(Olympe de Gouges, 1748~1793)는 1791년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을 발표했다.

여성은 자유롭게 태어나 남성과 대등한 권리를 지닌다.

이렇게 시작하는 여성권리선언은 1789년 인권선언의 17개 조항을 ‘여성의 처지에서 다시 쓰는 방식’으로 여성도 권리의 주체임을 천명하였다.

구즈는 프랑스 최초의 헌법이 제정되는 1791년,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을 통해 남성에게 부여된 모든 권리와 자유가 여성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혁명과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여성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발표하는 올랭프 드 구주. 1790년에 출판된 인쇄물.

여성이 교수대에 오를 수 있는 것처럼 연단에도 오를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던 구즈는 연단에 오르지 못한 채 1793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자신의 성별에 적합한 덕성을 잃어버린 사람’으로 단죄를 받았는데,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를 공격했다는 이유로 1793년 급진 공화파에 의해 처형당한 것이다.

프랑스 인권선언이 발표된 지 200년이 훨씬 지났다. 그러나 여전히 현실에서의 인권은 교과서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며 그것을 위해 싸우는 이들은 감옥에 갇히기도 한다. 227년 전에 프랑스에서 천명된 ‘천부적 권리’를 위해서 아직도 사람들은 싸우고 있다.

지금도 사회적 차별과 ‘여혐’ 따위와 싸워야 하는 대한민국에서 여성의 인권은 구즈가 처형당했던 시대에서 얼마나 더 멀리 왔을까.

원문: 이 풍진 세상에


두 번째 책 『독립운동가, 청춘의 초상』을 내면서

유관순 18살, 이재명 22살, 윤봉길 24살, 안중근 30살, 이봉창 34살. 독립운동의 빛나는 순간들 속에서 독립운동가들은 2030 청춘이었다.

100년 전에 찍은 한 장의 사진으로 남은 ‘청춘의 초상’이 들려주는 뜨겁고 강렬한 대한의 독립운동 이야기. 반백의 노구와 주름진 얼굴의 흑백사진 속에서 기억되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에게도 조국의 독립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찬 청춘의 시절이 있었다.

독립운동가들의 2030 시절의 한때를 포착한 단 한 장의 사진과 함께 읽는 색다른 근현대사 책. 100년 전 사진으로 되묻는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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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공자도 이해할 수 있는 웹 개발의 역사 https://ppss.kr/archives/257673 Fri, 22 Aug 2025 01:16:53 +0000 http://3.36.87.144/?p=257673

동영상이나, 음성 따위의 각종 멀티미디어를 이용하는 인터넷을 이르는 말. = 월드 와이드 웹.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시작하며

요즘 글이 뜸했습니다. 사실 뉴스레터 서비스가 유료로 전환되고 나니, 예전처럼 손이 잘 안 가게 되네요. (한 번 발송할 때 마다 치킨 한 마리값이 사라집니다..ㅠㅠ)

그래서 역사 콘텐츠를 텍스트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고 있는데요, 그중 하나가 웹사이트였습니다. 그렇게 코딩을 시작하게 되었는데요. 코딩을 하며 배우는 웹의 기술들이 어떤 배경으로 탄생했는지가 궁금해지더라구요. 그래서 역사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최대한 개발 지식이 없는 분들도 이해하실 수 있도록 글을 구성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다루는 내용이 조금 전문적이다 보니 쉽지는 않네요. 그리고 웹의 역사는 정말 방대하더라구요. 프론트엔드를 중점적으로 조사했는데, 그럼에도 분량 조절에는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시간 나실 때 천천히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웹의 기반: 하이퍼텍스트

웹의 출발점은 ‘하이퍼텍스트’라는 개념에서 시작됩니다. 하이퍼텍스트는 1963년, 테드 넬슨(Ted Nelson)이 책이나 문서처럼 선형적으로만 정보를 읽는 방식에서 벗어나 인간 사고처럼 자유롭게 연결되고 탐색 가능한 정보 구조를 만들고자 진행했던 ‘제너두(Xanadu)’라는 프로젝트에서 처음 사용됩니다. 모든 문서를 상호 연결하고, 문서의 부분 인용과 출처·변경 기록까지 영구적으로 추적할 수 있는 하이퍼텍스트 네트워크를 목표로 했습니다.

이후 1967년, 브라운대학교의 앤드리스 반 댐(Andries van Dam)과 함께 실제로 하이퍼텍스트 편집 시스템을 구현하면서, 컴퓨터 기반의 하이퍼텍스트 시스템이 현실화되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대에는 워드프로세서처럼 문서를 다루는 프로그램이 점점 발전하면서, 하이퍼텍스트 기능을 포함한 다양한 소프트웨어가 등장했습니다. 특히 1987년 애플이 발표한 ‘하이퍼카드(HyperCard)’는 프로그래밍 지식이 없어도 사용자가 직접 인터페이스를 만들고 멀티미디어 요소를 넣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며 하이퍼텍스트 기술의 대중화를 이끌었습니다.

 

2. 웹과 HTML의 등장

1991년,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물리학자 팀 버너스 리(Tim Berners-Lee)는 연구자들 간의 정보 공유를 위해 새로운 시스템을 제안합니다. 이 시스템은 인터넷 위에 하이퍼텍스트 기술을 얹는 형태로, 논문과 데이터를 연결하고 접근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바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b, WWW)의 시작입니다.

기존 인터넷은 이메일, 파일 전송 등 통신 기능에 초점을 맞췄지만, 웹은 처음으로 콘텐츠 중심의 구조를 인터넷에 도입하며 인터넷 사용자의 범위와 목적을 크게 넓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웹 시스템의 핵심 구성 요소는 HTML(HyperText Markup Language)이었습니다. HTML은 웹페이지의 구조를 기술하는 언어로, 하이퍼링크를 포함한 텍스트, 이미지, 레이아웃 등의 요소를 브라우저에 표시할 수 있게 합니다.

 

3. WWW vs 고퍼

하지만 웹이 처음 등장했을 때는 생각보다 큰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논문 중심의 정보 공유라는 목적은 대중에게는 와 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신, 1991년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에서 만들어진 ‘고퍼(Gopher)’라는 다른 서비스가 인기 끌고 있었죠. 고퍼는 텍스트 기반 메뉴를 통해 원하는 정보를 찾아가는 구조로, 네트워크 속도가 느린 당시 환경에서도 빠르고 안정적인 성능을 제공했습니다.

반면 웹은 이미지 기반의 인터페이스라서 느린 연결 환경에서 비효율적이었습니다. 특히 웹은 고성능 워크스테이션 ‘넥스트(NeXT)’ 컴퓨터의 운영체제인 ‘넥스트스텝(NeXTSTEP)’에서만 구현되었는데, 문제는 NeXT 컴퓨터가 많이 팔리지 않았다는 것이었죠. 웹이 널리 쓰이기 위해서는 다양한 운영체제에서 동작할 수 있도록 해야 했습니다.

 

4. 웹브라우저의 등장과 서버의 탄생

1993년, 시카고의 NCSA(국립 슈퍼컴퓨터 응용센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마크 앤드리센(Marc Andreessen)은 NCSA 소속 프로그래머인 에릭 비나(Eric Bina)와 함께 유닉스를 지원하는 웹 브라우저 ‘모자이크(Mosaic)’를 개발합니다.

모자이크는 마우스를 이용해 인터넷을 탐색할 수 있는 클릭 인터페이스를 제공한 최초 브라우저로, 일반 사용자들도 손쉽게 웹을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획기적인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모자이크의 가능성을 확인한 NCSA는 인력을 보강해 같은 해 윈도우와 매킨토시 버전도 출시했습니다.

그 결과 단 두 달 만에 100만 건이 넘는 다운로드를 기록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로써 웹은 고퍼를 제치고 대중화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웹이 대중에게 퍼지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단순히 문서를 읽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글을 남기거나 검색을 하는 등 웹과의 상호작용을 원하게 됩니다. 이렇게 사용자의 요청을 받아 서버가 실시간으로 처리해 주는 기능이 필요해졌고, 그에 따라 웹 서버에서 정보를 처리해 다시 웹페이지에 반영하는 ‘백엔드 기술’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때 등장한 기술이 NCSA에서 만들어진 CGI(Common Gateway Interface)입니다. 사용자가 웹페이지에서 입력을 보내면, 서버는 그 정보를 받아 CGI 프로그램을 실행해 결과를 만든 뒤 다시 웹페이지로 돌려보내는 방식이었죠.

 

5. 1차 브라우저 전쟁 넷스케이프 vs 익스플로러 – CSS, Javascript, DOM

모자이크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모자이크 개발을 주도했던 아르바이트생 앤드리센은 정식 개발팀에 포함되지 못했고, 앤드리센은 NCSA를 떠나 넷스케이프(Netscape)를 창업합니다. 그리고 1994년 10월, ‘넷스케이프 네비게이터(Netscape Navigator)’라는 웹 브라우저를 출시합니다.

‘넷스케이프 네비게이터’는 상업적인 용도가 아니라면 누구나 무료로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출시한 지 3개월도 채 되지 않아 200만 건이 넘는 다운로드를 기록하며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고, 넷스케이프 네비게이터는 웹의 상징이 되었죠.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마이크로소프트는 모자이크 브라우저에 라이선스 비용을 지불하고 ‘인터넷 익스플로러(Internet Explorer)’를 개발하여 1995년 브라우저 경쟁에 뛰어들었죠. 인터넷 익스플로러 2.0부터는 브라우저를 무료 제공을 하며 공격적으로 마케팅합니다.

넷스케이프도 이에 맞서며 경쟁이 치열해집니다. 특히 1996년에는 웹사이트에서 사용자와 상호작용할 수 있게 해주는 JavaScript를 개발해 넷스케이프 네비게이터 2에 탑재합니다. 이에 질세라 MS도 같은 해 Jscript를 개발해 인터넷 익스플로러 3.0에 탑재하고, 뿐만 아니라 CSS(Cascading Style Sheets)라는 웹 디자인 기술을 도입해 주목받았죠. CSS는 HTML 내부에 직접 스타일을 입력하던 비효율적인 구조를 해결하며 웹의 시각적 표현을 풍부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JavaScript와 JScript 덕분에 웹사이트는 버튼 클릭, 마우스 오버 같은 간단한 인터랙션을 구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웹페이지의 구조나 내용 자체를 자유롭게 제어하긴 어려웠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기술로 등장한 것이 바로 DOM(Document Object Model)입니다. DOM은 웹페이지의 내용을 계층적 구조로 표현하여, 자바스크립트가 특정 요소를 선택하고 조작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덕분에 사용자가 글자를 입력하면 그 값을 검사하거나, 버튼을 누르면 화면 구성이 바뀌거나, 필요한 부분만 서버에서 불러오는 기능도 가능해졌습니다.

1997년 넷스케이프와 마이크로소프트가 각각 DOM 기능이 확장된 새로운 브라우저(Netscape Navigator 4.0과 IE 4.0)를 출시하면서 동적인 웹(DHTML)이 본격화됩니다. 하지만 두 회사가 DOM을 각기 다르게 만들었기 때문에, 한 웹사이트가 브라우저마다 다르게 보이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문제가 있었죠. 이런 문제를 ‘크로스 브라우징 이슈’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혼란은 웹 표준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했고, 이후 W3C와 같은 기구가 등장해 HTML, CSS, DOM 등의 명확한 명세를 정립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합니다.

익스플로러와 넷스케이프의 대결은 1997년에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MS가 Windows 98에 기본 브라우저로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탑재했습니다. 이미 브라우저가 깔려 있는 컴퓨터 사용자들은 굳이 다른 브라우저를 다운로드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넷스케이프의 점유율은 급감합니다.

넷스케이프는 익스플로러와의 경쟁에서 밀려 결국 1998년, 미국의 큰 통신회사인 AOL에 42억 달러에 회사를 넘깁니다. 이후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독주를 이어가며 2002년에는 점유율 96%까지 올라가게 됩니다.

 

6. 야후, 아마존 등의 등장 – PHP, JSP

웹이 단순한 문서 공유의 도구를 넘어 일상 속 서비스 플랫폼으로 진화한 결정적인 전환점은 포털과 전자상거래의 등장입니다. 1994년 스탠퍼드 대학의 제리 양(Jerry Yang)과 데이빗 파일로(David Filo)는 인터넷 상의 수많은 웹사이트를 주제별로 분류한 디렉토리인 Jerry and David’s Guide to the World Wide Web를 만들었고, 이는 곧 ’야후(Yahoo!)’로 발전합니다. 야후는 단순한 링크 모음이 아닌, 정보를 분류하고 검색할 수 있는 웹의 첫 포털 개념을 대중에게 선보였죠.

같은 시기 제프 베조스가 창업한 아마존은 책을 판매하는 온라인 쇼핑몰로 시작해, 웹을 통해 상품을 사고팔 수 있다는 인식을 확산시켰습니다. 이베이, 알리바바 같은 플랫폼도 비슷한 시기에 출범하며 웹은 정보 탐색에서 ‘상거래와 사용자 서비스’ 중심으로 패러다임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이런 변화는 웹이 단순히 정적인 문서를 보여주는 수준에서 벗어나, 사용자 계정, 장바구니, 검색, 결제 등 실시간 데이터 처리가 필요해졌다는 의미였습니다. 즉, 웹의 동작 방식은 ‘프론트엔드’뿐 아니라, 사용자의 요청을 받아 처리하는 ‘서버 기술(백엔드)’의 발전이 필수였죠.

기존에는 CGI(Common Gateway Interface)를 통해 이러한 요청을 처리했지만, CGI 방식은 매 요청마다 외부 프로그램을 새로 실행해야 했기에 서버에 부담이 컸고, 대규모 서비스 확장에도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 등장한 대표적인 기술이 바로 PHP와 Java Servlet입니다.

PHP는 1995년 라스무스 러도프(Rasmus Lerdorf)가 개인 홈페이지 방문자 수를 집계하려 만든 도구에서 출발했습니다. HTML에 직접 프로그래밍 코드를 삽입할 수 있다는 특징 덕분에 빠르게 확산되었고, 설치가 간편하고 학습 난이도가 낮아 개인 블로그나 중소형 웹사이트에서 널리 쓰였습니다. 특히 WordPress와 같은 콘텐츠 관리 시스템(CMS)의 기반 언어로 채택되면서 웹의 보편적 도구로 자리잡게 됩니다.

반면, 기업이나 금융권 등에서는 더 정교하고 안정적인 웹 기술이 필요했습니다. 이에 선 마이크로시스템즈(Sun Microsystems)는 1997년 Java 언어를 바탕으로 Java Servlet을 발표합니다. Java는 원래 가전제품에 사용되는 임베디드 소프트웨어를 위해 만들어졌는데, 이를 웹에 맞게 개량한 것이 Java Servlet이었죠.

Servlet은 CGI 방식의 비효율을 극복해, 서버 메모리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요청에 빠르게 응답할 수 있는 구조를 제공했습니다. 이후 JSP(Java Server Pages)가 등장하면서 Java 기반의 웹 서비스 구축도 본격화됩니다. 이같은 서버 측 기술의 발전으로 웹은 사용자의 요청에 따라 실시간으로 콘텐츠를 생성하고 처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서버에서 데이터를 만들어도, 그것을 사용자 화면에 효율적으로 반영하는 방법이 미흡했죠. 당시 웹에서는 사용자의 요청이 있을 때마다 전체 페이지를 새로 불러왔기 때문에, 화면이 깜빡이거나 로딩 시간이 길어지는 등 사용자 경험이 크게 저하되었습니다. 특히 빠른 반응이 핵심인 전자상거래나 검색 서비스에서는 치명적인 한계로 작용했습니다.

 

7. 구글 맵이 보여준 혁신: Ajax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서버에서 생성된 데이터를 더 효율적으로 브라우저에 전달하기 위해 1999년에 등장한 기술이 Ajax(Asynchronous JavaScript and XML)였습니다. Ajax는 기존처럼 페이지 전체를 새로 고치지 않고도, 서버와 주고받는 데이터를 바탕으로 화면의 일부만을 바꿀 수 있게 해주는 기술입니다. 즉, 매번 전체 페이지를 갱신하는 것이 아닌 특정 영역만을 빠르게 바꿀 수 있게 된 것이죠. 이로 인해 부드러운 전환과 빠른 반응이 가능한 웹이 열린 것입니다.

Ajax는 2005년 Google Maps를 통해 전 세계 사용자에게 각인됩니다. Google Maps는 웹 기반임에도 데스크탑 소프트웨어처럼 자연스러운 스크롤과 빠른 줌 기능, 실시간 탐색을 제공해, Ajax의 혁신을 보여주었죠.

 

8. 브라우저 춘추전국시대 – Flash, JQuery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브라우저 시장을 장악했지만, 표준을 무시한 독자적인 구현, 잦은 보안 문제, 기능 업데이트 중단 등으로 비판을 받기 시작합니다. 이에 따라 대안 브라우저들이 등장합니다.

2004년, 모질라 재단은 오픈소스 기반의 Firefox를 출시해 빠른 속도, 탭 브라우징, 확장 기능 등으로 주목을 받았고, 애플도 WebKit 엔진을 기반으로 Safari를 개발해 Mac OS에 기본 탑재했죠. 그 결과, Firefox, Safari, Opera 등 다양한 브라우저들이 공존하는 ‘브라우저 춘추전국시대’로 접어들게 됩니다.

하지만 각 브라우저가 HTML, CSS, JavaScript를 해석하고 실행하는 방식이 제각각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주목받은 것이 Flash였습니다. Flash는 독립 실행 환경으로 브라우저와 상관없이 일관된 사용자 경험을 보장했고, 복잡한 애니메이션, 음악, 동영상 등을 손쉽게 구현할 수 있어 웹 기반 게임, 광고, 멀티미디어 사이트 등에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Flash, Sliverlight와 같은 외부 플러그인을 사용하지 않고 브라우저 간의 호환성 문제를 보다 근본적으로 해결한 것은 jQuery입니다. 2006년 존 레식(John Resig)에 의해 만들어진 jQuery는 복잡한 자바스크립트 기능을 간단한 문법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주었고, 브라우저마다 다른 DOM, 이벤트 처리, Ajax 방식의 차이를 통일된 방식으로 다룰 수 있게 해주는 API(기능 호출 방식)를 제공했습니다. 이를 통해 개발자는 복잡한 크로스 브라우징 문제를 걱정하지 않고, 웹의 동작을 더 쉽게 제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9. Flash 가고 HTML5 온다

Flash나 Silverlight 같은 별도의 플러그인에 의존한 멀티미디어 재생은 보안에 취약하고, 모바일 기기와의 호환도 떨어졌으며, 성능 문제도 잦았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HTML의 새로운 버전인 HTML5가 개발되었고, 2008년 초안이 공개된 뒤 2014년 정식 표준으로 채택됩니다. HTML5는 단순히 웹페이지의 구조를 구성하는 언어를 넘어, 웹 자체를 하나의 앱 실행 환경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핵심 기술로 자리잡습니다.

HTML5를 통해 브라우저만으로도 동영상과 음악을 재생할 수 있고, 캔버스를 활용한 그래픽 표현이나 사용자 위치 정보 활용, 드래그 앤 드롭 같은 다양한 상호작용 기능도 구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웹페이지의 구조도 더 명확하게 나눌 수 있게 되어, 사용자 경험과 접근성도 함께 향상되었죠. 결과적으로 HTML5는 웹을 단순한 문서 공유 도구에서 ‘앱이 실행되는 플랫폼’으로 바꾸는 전환점이 됩니다.

특히 2010년, 애플이 아이폰에서 Flash 지원을 중단한다고 발표하면서 플러그인 중심의 웹 기술은 급속히 쇠퇴하고, HTML5 중심의 표준 웹 기술이 주류로 자리잡게 됩니다.

 

10. 빠르고 간편해지는 백엔드 개발

웹 개발은 점점 복잡해졌고, 이에 따라 웹 개발자들은 더 많은 기능을 더 빠른 시간 안에 구현해야 했죠. 이 과정에서 PHP는 개발 속도는 빠르지만 유지보수가 어렵고, Java는 안정성은 뛰어나지만 설정이 복잡하고 개발 속도가 느린 구조적인 한계에 부딪히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접근을 제시한 것이 바로 Ruby on Rails입니다. 2004년 데이비드 하이네마이어 한슨(David Heinemeier Hansson)이 만든 Rails는 Ruby 언어를 기반으로, 반복적인 코드를 줄이고 구성 요소를 표준화하며, 데이터베이스와의 연동까지 자동화하는 기능을 제공합니다. GitHub, Shopify, Twitter 같은 서비스들이 초기에 Rails를 채택하면서 그 영향력은 더욱 커졌습니다.

비슷한 시기, Python 기반의 Django도 등장합니다. 원래는 지역 신문사의 콘텐츠 관리 시스템을 위해 개발되었지만, 빠른 개발과 보안 중심 설계 덕분에 교육기관, 언론사, 콘텐츠 서비스 등에서 널리 사용됩니다.

Django는 기본적으로 관리자 화면이 자동 생성되며, 복잡한 SQL문을 직접 작성하지 않고 파이썬 문법으로 데이터를 조작할 수 있었고, 템플릿 시스템까지 제공하며 웹 전반의 구조를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Ruby on Rails와 Django는 복잡한 서버 개발을 간결하게 만들었고, 웹 개발이 ‘빠른 프로토타입 제작 → 반복적 개선’이라는 새로운 문화로 변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1. 브라우저 시장을 제패한 크롬

2000년대 중반, 구글은 더 이상 단순한 검색 서비스 기업이 아니라, 웹 자체를 하나의 운영체제처럼 만들겠다는 비전을 세우게 됩니다. 사용자 대부분이 웹 브라우저를 켜고 제일 먼저 방문하는 곳이 구글이었기에, 웹이 OS처럼 작동한다면 구글은 그 출발점에 설 수 있었죠.

이를 위해 구글은 문서 작성(Google Docs), 이메일(Gmail), 캘린더 같은 웹 기반 소프트웨어를 차례로 개발합니다. 하지만 웹 애플리케이션을 제대로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당시 브라우저의 성능으로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에 구글은 스스로 브라우저를 만들기로 결정하고, 브라우저의 핵심 구성 요소인 자바스크립트 엔진도 직접 새로 개발하기로 합니다.

그렇게 2008년 V8 JavaScript 엔진이 등장합니다. V8은 기존 엔진들과 달리 코드를 한 줄씩 해석하는 방식이 아니라, 전체 코드를 기계어로 바꿔 실행하는 JIT(Just-In-Time) 컴파일 방식을 채택합니다. 이로써 자바스크립트의 실행 속도가 획기적으로 빨라졌고, 브라우저에서 실제 데스크톱 앱에 가까운 복잡한 기능도 가능해졌습니다. 또한 멀티코어 CPU 환경에 최적화된 병렬 처리 기술도 적용되었죠.

V8 엔진은 애플의 오픈소스 렌더링 엔진인 WebKit과 결합되어 같은 해 ‘크롬Chrome’ 브라우저로 완성됩니다. 크롬은 빠른 속도와 강력한 디버깅 도구, 간결한 사용자 인터페이스로 개발자와 일반 사용자 모두에게 큰 인기를 끌었고, 당시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독점하던 브라우저 시장에서 속도와 안정성, 개발 친화성을 무기로 빠르게 점유율을 확보해나갑니다. 2012년에는 세계 브라우저 점유율 1위로 올라서며 웹 개발의 새로운 표준 환경을 만들어갑니다.

 

12. JavaScript할 줄 알죠? 이제 서버도 개발하세요: Node.js

2009년, 라이언 달Ryan Dahl 은 구글의 V8 JavaScript 엔진을 기반으로 서버에서도 JavaScript를 실행할 수 있는 기술인 ‘Node.js’를 발표합니다. 이전까지는 브라우저(클라이언트)는 JavaScript, 서버는 PHP, Java, Python 같은 언어로 나뉘어 개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Node.js의 등장으로 한 명의 개발자가 프론트엔드와 백엔드를 모두 자바스크립트로 개발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립니다. 따라서 빠른 개발과 인력 절감이 중요한 스타트업 환경에서 특히 큰 주목을 받게 됩니다.

Node.js의 또 다른 혁신은 서버 작동 방식 자체를 바꿨다는 점입니다. 기존 서버는 요청이 들어올 때마다 새로운 프로세스나 스레드를 생성해 처리했지만, 이는 많은 사용자가 동시에 접속하면 서버에 과부하를 일으키기 쉬웠습니다. Node.js는 하나의 프로세스로 수천 개의 요청을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 구조는 채팅, 알림, 실시간 데이터 처리 등 동시성이 중요한 서비스에 최적화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구조적 혁신과 함께 Node.js 생태계를 탄탄하게 만든 또 하나의 요소는 npm(Node Package Manager)이었습니다. 개발자는 자신이 만든 라이브러리나 도구를 npm에 등록하고, 다른 개발자는 이를 간편하게 설치해 사용할 수 있었죠. 이로 인해 JavaScript 기반의 수많은 유틸리티와 프레임워크가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13. 복잡한 UI의 페이스북: React

2000년대 후반, 페이스북은 전 세계 수억 명의 사용자를 확보하며 빠르게 성장합니다. 사용자가 늘어날수록 웹사이트가 처리해야 할 데이터도 많아지고, 사용자의 행동에 따라 화면을 실시간으로 반응시키는 일이 중요해졌습니다. 그러나 당시 주류였던 jQuery 기반의 방식은 화면 구성 요소를 일일이 제어해야 했고, 복잡한 UI에서는 유지보수와 성능 모두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페이스북은 2013년, React라는 UI 라이브러리를 오픈소스로 공개합니다. React는 웹 화면을 ‘컴포넌트’라는 작은 단위로 나눠서 개발할 수 있게 만들었고, 각 컴포넌트는 상태(state)와 전달받은 데이터(props)를 바탕으로 화면을 그리도록 설계되었습니다.

가장 혁신적인 점은 실제 화면(DOM)을 직접 조작하지 않고, 가상의 화면 구조인 Virtual DOM을 사용한다는 점이었습니다. Virtual DOM은 실제 DOM보다 훨씬 가볍기 때문에 빠르게 화면의 변화를 계산할 수 있었고, 변경이 필요한 부분만을 선별해 실제 DOM에 반영함으로써 효율적인 렌더링이 가능했습니다. 이를 통해 React는 복잡한 UI를 다루는 데 필요한 속도와 관리 편의성을 모두 갖추게 되었고, 곧 프론트엔드 개발의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14. React, Angular, Vue 삼국지

페이스북이 React를 공개하기 전, 2010년에 구글은 이미 AngularJS라는 혁신적인 프레임워크를 선보였습니다.

AngularJS는 기존 웹 개발에서 사용자가 입력하면 자바스크립트로 직접 DOM을 찾아서 내용을 바꿔야 했던 것과 달리 화면에 보여줄 내용을 미리 템플릿화해두고, 사용자가 그 안에 넣을 데이터만 바꾸면, 알아서 화면이 갱신되는 구조였어요. 이런 방식을 ‘양방향 바인딩’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 AngularJS는 화면이 바뀌었는지를 주기적으로 계속 확인해야 했기에 페이지가 복잡해질수록 느려지고, 성능 문제도 생겼습니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려고, 구글은 2016년 완전히 새롭게 만든 Angular 2를 발표합니다. Angular 2는 React의 컴포넌트 방식을 도입합니다. 그리고 Zone.js라는 기술을 이용해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있는 순간에만 화면의 변화를 감지해 성능 문제도 해결하죠. 하지만 기존 AngularJS와 호환되지 않아 기존 사용자들이 이탈했고, 구조가 복잡하고 배우기도 어려워 신규 유저 유입도 쉽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Angular의 복잡함과 React의 JSX 문법에 익숙하지 않은 개발자들 사이에서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Vue.js입니다. Vue는 구글의 개발자 에반 유(Evan You)가 React와 Angular의 장점만을 취합해 만든 프레임워크입니다. React처럼 컴포넌트 기반 구조를 따르되, HTML 중심의 템플릿 문법을 사용해 진입 장벽을 낮췄고, 상태 관리, 라우팅, 빌드 도구 등을 공식적으로 지원하면서 점진적 도입이 가능한 구조로 설계되었습니다.

덕분에 Vue는 소규모 팀과 개인 개발자를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며, Angular, React와 함께 프론트엔드 삼국지를 형성하게 됩니다.

 

15. 메타 프레임워크의 시대: Next.js

React, Angular, Vue는 화면을 구성하는 데 강력했지만, 웹 애플리케이션 전체를 구축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화면 이동(라우팅), 서버에서의 데이터 처리, 검색엔진 최적화(SEO) 같은 기능은 따로 구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등장한 것이 바로 Next.js입니다. 2016년 Vercel에서 발표된 Next.js는 React를 기반으로 하지만, 페이지 단위 라우팅, 서버사이드 렌더링(SSR), 정적 사이트 생성(SSG), 이미지 최적화, SEO 기능 등을 내장해, 복잡한 설정 없이 전체 웹사이트를 효율적으로 구성할 수 있게 해줍니다.

이처럼 UI 도구에 그치지 않고, 백엔드와 배포까지 포괄하는 프레임워크*를 ‘메타 프레임워크(meta-framework)’라고 부릅니다. Next.js 이후 Vue 기반의 Nuxt.js, Svelte 기반의 SvelteKit, Solid 기반의 SolidStart 등도 등장하며 웹 개발의 흐름은 ‘통합과 자동화’로 진화해가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또 하나 주목받은 기술이 있습니다. 바로 Svelte입니다. 기존 프레임워크들이 브라우저에서 Virtual DOM을 통해 DOM을 갱신한 반면, Svelte는 개발자가 작성한 코드를 컴파일 시점에 실제 DOM 조작 코드로 바꿔주는 방식입니다. 즉, 브라우저가 무겁게 계산하지 않아도 되고, Virtual DOM도 필요 없게 되는 것이죠. Svelte는 이런 점에서 프레임워크가 아니라 컴파일러에 더 가깝고, DOM을 ‘언제, 어떻게 바꿀지’에 대한 고민을 아예 없애버리는 접근으로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 프레임워크

자주 사용하는 기능들을 미리 구조화해 놓은 일종의 도구 모음입니다. 즉, 개발자가 일일이 기본부터 만들 필요 없이, 정해진 틀 안에서 빠르고 일관되게 개발할 수 있도록 돕는 도구이죠.

이 글에서 언급된 프레임워크는 Ruby on Rails, Django, React, Angular, Vue, NEXT.js입니다.

 

Reference

원문: 사소한 것들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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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템 ‘바세린’이 사실은 석유 찌꺼기라고? https://ppss.kr/archives/270176 Tue, 05 Aug 2025 07:05:28 +0000 https://ppss.kr/?p=270176 누가 샀는지 모르겠지만 어릴 때부터 항상 집에 있던 바세린(Vaseline)은 상처 치료, 피부 보습, 각질 제거, 큐티클 정리 등 다양한 효능을 가진 ‘만능템’으로 오랫동안 사랑받아 왔다. 이는 우리나라에서뿐만 아니라 전 세계 어디서나 동일한데, 오죽하면 바세린을 빵에 발라먹는 곳도 존재했다고 한다. 대체 어떤 계기로 이러한 사랑을 받게 된 걸까?

출처: Unilever

바세린의 역사는 18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837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창업주 로버트 체스브로는 뉴욕대학교 화학과를 전공 후 향유고래기름을 정제하는 화학자가 됐다. 당시만 해도 석유 유전이 개발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고래로부터 기름을 얻어 연료로 사용했는데, 이에 적합하게 정제하는 작업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작업은 1859년 석유가 발견되며 필요 없어졌고, 로버트는 곧바로 석유 기름을 연구하기 위해 펜실베니아로 향했다. ‘석유로 뭐라도 만들면 돈이 되지 않을까’라는 호기심이었다.

미국의 화학자이자 바세린 설립자인 로버트 체스브로(Robert Chesebrough, 1837~1933)

석유 시추 현장에 가 인부들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로버트는 끈적끈적한 석유 찌꺼기, 로드 왁스에 관심이 갔다. 특유의 끈적거림 때문에 시추 장비를 고장 내는 골칫덩이였는데, 인부들이 이 로드 왁스를 모아뒀다가 상처가 나거나 화상을 입었을 때 피부 위에 바르는 것이었다. 신기하게도 실제로 회복이 됐고, 흥미를 느낀 로버트는 그것을 가져와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후 약 5년간 연구에만 매달린 로버트는 로드 왁스에서 ‘페트롤라툼’이라는 밝은색의 젤 성분을 추출하는 데 성공했다. 오리지널 바세린 제품은 바로 이 페르톨라툼 100%로 구성되어 있다.

1865년 해당 추출법을 특허 등록한 로버트는 그로부터 5년 뒤 브루클린에 ‘체스브로 매뉴팩처링사’를 설립하고 제품을 생산해 ‘바세린’이라는 이름으로 시장에 출시했다. 이것이 브랜드의 시작이었다. 물론 출시하자마자 잘된 건 아니다. 로버트의 수많은 노력이 있었고, 오늘 그의 노력에서 성공 포인트를 찾아보려 한다.

 

최초의 샘플링 이벤트

로버트의 판매 수단은 마차였다. 마차를 타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바세린을 화상이나 상처 치료제로 홍보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사람들은 별 관심을 두지 않았고, 그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다. 바로 무료로 샘플을 나눠주는 것!

일단 써보기만 하면 그 효과를 알게 될 것이라 확신한 로버트는 미국 최초로 샘플링을 시작했다. 의사, 약사, 주부들에게 샘플을 무료로 뿌리고 다녔는데, 그가 1873년까지 뿌린 샘플의 양만 50만 개 이상이었다고 한다.

사람들 앞에서 직접 제품을 시연하는 로버트 체스브로의 모습(재연)
당시 로버트가 바세린 판매를 위해 타고 다니던 마차

지금 많은 브랜드사도 이와 같은 고민을 한다. 항상 우리 제품이 가장 좋다고 얘기하지만, 그 제품을 써볼 기회에 대한 부분은 쉽게 하지 못한다. 당시 바세린은 화상 및 상처 치료제였기 때문에 의사와 약사들에 대한 설득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가 한 일이 샘플을 나눠주는 것이었고, 이를 통해 설득을 이끌 수 있었다.

전문가로부터 효과가 검증된 제품의 인기가 높아지는 건 당연한 순서였다. 샘플이 동이 날 즈음에는 사람들이 바세린을 사기 위해 약국으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샘플링 이벤트는 과거에도 진행돼 효과가 검증된 가장 기본적인 마케팅이다.

실제 석유에서 추출된 로드 왁스의 모습

 

증명하려면 증거를 만들 것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눈으로 보여야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 로버트는 바세린의 효능을 입증하기 위해 사람들이 보는 자리에서 자신의 피부에 고의로 화상이나 상처를 낸 후 바세린을 바르는 자해 마케팅을 진행했다. 다소 어처구니없는 행동이지만, 이 방법은 많은 설득을 일으킬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건 결국 피부가 좋아진다는 본질에 집중했다는 것이다. 지금 하면 식약처 법률에 위배되거나 과장 광고로 신고를 받을 수 있겠지만, 이것도 일종의 Before&After 방식인 셈이다.

1875년 영국 대행사를 통해 영국 시장에 진출한 바세린은 첫 해외 판매를 시작하며 1년 후 최초의 의학 저널 중 하나인 영국 런던의 의학 저널 <란셋(The Lancet)>에 실리게 됐다. 이는 영국을 비롯한 유럽 전역에서 인지도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바세린을 매일 발랐는데, 얼마나 애용했으면 로버트에게 기사 작위까지 수여했다. 2008년에 발간한 유니레버의 브랜드 보고서에 의하면, 이후 바세린이 전 세계적으로 39초마다 1개씩 판매되고 있다고 한다. 공신력을 가진 매체와 사람의 인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시대의 흐름에 올라타기

바세린의 역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있다면 바로 ‘세계대전’이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당시 바세린은 최전선에서 군인들의 상처와 타박상을 치료하고 자외선으로부터 탄 피부를 보호해 주는 구호품으로 활용됐다. 영국군이 담배와 교환했을 정도로 바세린을 구하기 위해 혈안이었으며, 많은 미군은 집에 ‘더 많은 바세린을 보내달라’고 편지를 부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고 1920년대가 되면서 체스브로매뉴팩처링사는 의약품 시장에서 바세린이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고 판단하고, 브랜드 인지도를 기반으로 화장품 산업에 뛰어들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동안에는 미군의 의료용품 공급처가 돼 바세린 브랜드 이름으로 미군에 페트롤리움 젤리가 포함된 화상 치료제, 소독용 거즈 등을 공급했다.

말하자면 시대적 흐름을 잘 활용한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전쟁은 엄청난 유통과 인프라를 확보하는 기회가 됐고, 전쟁터에서 미국 군인을 지켜주는 애국적인 이미지까지 덤으로 얻었다.

제 2차 세계대전 때 사용된 바세린 코팅 거즈

 

마치며

이번에 바세린의 역사를 공부하며 특이한 사실을 알게 됐다. 바세린은 의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화상과 피부 상처 치료에 직접적인 효과가 없다. 다만 그때만 해도 상처 부위를 통한 감염이 많았는데 바세린의 젤 층이 감염을 막는 역할을 했으며, 보습 성분이 습윤 환경을 조성해 치유 과정에 도움을 준 것이다.

제품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매우 주관적이다. 오랜 기간 바세린은 화상·상처 연고로 사용됐고, 사람들은 그걸 믿었다. 하지만 과학기술이 발달하며 사실이 아닌 게 밝혀졌다. 이쯤에서 우리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화장품이 좋다, 나쁘다의 영역은 굉장히 주관적인 것이다. 그래서 함부로 제품에 대해 평가하기보다는 임상과 인증을 통한 새로운 지표와 근거 있는 판단이 필요할 것이다.

원문: 박진호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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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팅을 하지 않는다고 마케팅하는 브랜드 ‘러쉬’ https://ppss.kr/archives/257155 Thu, 24 Jul 2025 03:01:42 +0000 http://3.36.87.144/?p=257155 마케팅을 하지 않는 캠페인을 마케팅하는 러쉬

2021년 11월 28일 글로벌 화장품 기업 러쉬(LUSH)가 SNS 활동을 전면 중단하겠다고 공식 성명문을 발표했다. 많은 기업이 마케팅을 위해 공격적으로 SNS를 활용하는 마당에 정반대의 행보를 택한 셈이다. 이 방침은 영업 활동이 이뤄지는 48개국에 모두 적용되며, 그 이유로 소셜미디어의 역기능인 사이버 괴롭힘·가짜 뉴스 등이 불러일으키는 문제가 러쉬가 지향하는 진정한 휴식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행보를 두고 누리꾼들은 브랜드 가치에 걸맞은 결정이라며 박수를 보냈지만, 난 마케터 시점에서 봤을 때 러쉬가 스마트하고 빠른 전략을 구사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산업이 그렇지만 특히 뷰티 업계에서 마케팅은 생명이다. 화장품의 경우 원가가 낮아 수익이 많이 남는 것처럼 보이지만, 유통과 마케팅에 비용을 쓰면 거의 남지 않거나 마이너스가 나는 경우도 잦다. 그만큼 마케팅으로 과열된 시장에서 ‘유별난’ 선택을 한 것이고, 오히려 이게 지금 시대와 잘 맞아떨어진 것이다.

과거에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이 급부상하며, 고객과의 소통이라는 명분 아래 온 기업이 노출도 잘 안 되고 손도 많이 가는 소셜미디어 계정 운영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하기에 당연히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뷰스컴퍼니는 지난해부터 과감하게 SNS 관리를 하지 않고 있다.) 그렇기에 러쉬의 전략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마케팅을 하지 않겠다고 통보하는 마케팅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들의 자신감에는 분명 엄청난 노하우가 깔려있을 것. 러쉬의 성공방정식을 찬찬히 살펴봤다.

러쉬 ‘2022 고 네이키드 캠페인’ 현장

 

1. 20% 팬덤의 힘

파레토법칙에 집중한다. 20%의 잠재고객이 80% 이상의 매출을 일으킨다고 보는 D2C의 근간이 되는 법칙이다. 이 법칙에 따르면 20%의 고객에게 마케팅 비용을 쓰는 것이 5배 이상의 마케팅 비용 절감효과를 일으킨다고 한다.

러쉬는 그들의 철학을 따르는 탄탄한 팬덤을 통한 유기적 바이럴 양이 엄청난 브랜드다. 그간 핸드메이드, 친환경, 동물실험 반대, 인권향상, 공정무역, 차별 금지 등 확고한 철학을 기반으로 소비자를 설득했다. 요즘 유행하는 클린뷰티나 비건 역시 러쉬가 오랫동안 애써온 부분으로 제품도 제품이지만 이러한 가치관이 탄탄한 팬덤을 형성하며 성공적인 비즈니스로 거듭날 수 있었다.

러쉬 공동 창립자

 

2. 브랜드와 유통의 상생

이 이야기는 러쉬의 창업자 마크 콘스탄틴이 더바디샵 창업자 애니타 로딕과 만나며 시작된다. 신문에서 더바디샵의 자연주의 철학이 담긴 기사를 읽게 된 콘스탄틴은 자신의 샘플과 함께 그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로딕이 단번에 제품의 가치를 알아보며 곧바로 1200파운드(한화로 약 205만 원)어치의 물량을 주문했다. 이걸 계기로 콘스탄틴의 제품은 단숨에 더바디샵 베스트셀러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브랜드는 절대 혼자 클 수 없다. 브랜드의 레버리지가 중요하기에 이걸 알리기 위한 채널과 전략이 필수적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러쉬와 더바디샵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마치 올리브영과 닥터자르트, 올리브영과 닥터지의 상생 관계를 떠올린다. 러쉬가 뜰 수 있었던 가장 큰 부분은 소비자와의 접점이었던 더바디샵의 영향이 크다. 더바디샵에 공급하던 페퍼민트 풋 로션과 코코아 바디 버터가 히트를 치며 브랜드 인지도가 크게 올라갔기 때문이다.

이후 더바디샵은 독점 공급을 원했지만, 콘스탄틴은 미용실, 체육관, 두피 클리닉 등에 납품하며 판매 채널을 늘려나갔다. 그러다 둘 사이에 갈등이 조장됐고, 더바디샵이 러쉬를 인수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결국, PB 브랜드로 들어가며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이 같은 사안은 지금도 심각하게 다뤄지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올리브영에도 PB와 EB 제품에 존재하는데 공정거래위반법에 의해 오피셜하진 않지만, 은연중에 독점 공급이 이뤄지고 있음은 명확하다. 카니발리즘으로 인한 유통채널과 브랜드 사이의 갈등이 과거에도 있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러쉬 빅 풋 배쓰 밤
러쉬 슬리피 바디 로션

 

3. 원물마케팅의 원조

화장품 마케팅을 하기 위해서는 제품의 탄생 배경부터 소비자에게 전달되기까지 전 과정에 대한 이해와 통찰이 필요하다. 러쉬는 오감을 자극하는 브랜드로 식료품 마켓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와 접목시켰다. 신선한 식재료를 통해 요리한다는 콘셉트로, 제품을 만드는 곳을 공장이라고 부르지 않고 ‘러쉬 키친’이라 명명했다. 좋은 성분, 좋은 화장품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콘셉트 원료에 대한 아이디에이션을 통해 비주얼화시키는 작업이 필요한 이유다. 인간의 오감을 자극해 구매하게 만드는 것이다.

러쉬의 주력제품 중 하나인 배쓰 밤도 오감 자극을 활용했다. 이름 그대로 물속에서 폭발하는 미사일을 모티브로 한 제품으로, 아이들이 재미난 목욕시간을 보냈으면 하는 마음에 개발했다. 발포 비타민에서 영감을 받아 탄산이 발포돼 기포를 내며 제품이 물에 녹을 수 있도록 하는 성분과 피부에 잘 흡수되는 에센셜 오일이 함유돼 있다.

 

4. 신뢰의 중요성

이제는 제품을 구매할 때 제품에 대한 단순한 필요성이나 목적성에 기반하는 것이 아니라, 제품에 대한 철학까지도 고려하는 가치 소비 시대다. 러쉬는 이를 위해 모든 제품에 스티커를 붙이는 방식을 택했다. 제조 일자와 유통기한 그리고 제조자의 캐리커처 및 이름까지 기재한다. 공장에서 찍어낸 제품이 아닌, 사람이 직접 만든 제품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무척이나 번거롭지만, 신뢰를 위해 이 번거로운 과정을 지속하는 게 러쉬의 마지막 성공방정식이다.

러쉬 제품에 붙어 있는 핸드메이드 인증 스티커

 

마치며

러쉬는 소비자의 선택을 기다리지 않는다. 확고한 철학과 신념으로 소비자를 끌어당긴다. 그들의 메시지가 너무 강력한 나머지 SNS도 필요 없어진 것이다.

우리 또한 본질에 대한 집중이 필요한 시기다. 확실한 기준도 없이 유행만 따라가진 않았는지 고민하고, 부수적인 부분을 정리해야 한다. 이 과정이 결국 브랜드 파워를 강력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원문: 박진호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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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스니커즈들의 뒷이야기: 스니커즈의 역사 https://ppss.kr/archives/269524 Fri, 11 Jul 2025 05:05:34 +0000 https://ppss.kr/?p=269524

스니커즈

밑바닥에 고무창을 붙여 걸을 때 발소리가 나지 않는 운동화

  • 국립국어원 우리말샘

 

1. 최초의 운동화는?

초기 플림솔 ⓒ Alansplodge
배에 표시되어 있는 플림솔 라인

19세기 철도가 발달하면서 영국의 노동자들은 바닷가에서 휴가를 보낼 수 있었죠. 이들은 바닷가에서 샌드 슈즈(Sand Shoes)를 신었습니다. 샌드 슈즈는 가죽 혹은 밧줄로 밑창을 만들고 캔버스 천을 덧댄 신발로 내구성이 뛰어나지는 않았습니다.

1830년에 리버풀 러버 컴퍼니(Liverpool Rubber Company)에서 밑창을 고무로 제작하기 시작하면서 이야기가 달라지죠. 이때까지 샌드 슈즈는 밑창과 캔버스 천이 쉽게 떨어지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결합 부분에 두꺼운 고무 밴드를 추가한 거예요. 샌드 슈즈에 부착한 고무 밴드의 모습이 마치 화물선의 적재량을 알려 주는 표시인 플림솔 라인(Plimsol Line)과 닮았다고 해서 이 신발을 플림솔이라고 부르기 시작합니다.

1868년에는 끈이 달려 더욱 편안해진 ‘크리켓 샌들’이 등장합니다. 이름처럼 크리켓 경기를 위한 신발로 당시 가격으로 6달러로 아주 비쌌죠. 하지만 산업혁명으로 기계가 발달하면서 1897년에는 60센트가 됩니다.

ⓒ Keds

1916년에는 US 러버 컴퍼니(US Rubber Co.)와 굿이어(Goodyear)가 합작하여 케즈(Keds)를 설립하게 됩니다. 이 케즈에서 최초로 대량 생산된 스니커즈 챔피온(Champion)을 판매하죠. 챔피온은 현재에도 판매되고 있습니다.

 

2. 최초의 운동화는 리복

리복 최초 러닝화 ⓒDAILY MIRROR

최초의 러닝화는 1865년에 시작됩니다. 바닥에 스파이크가 달려있는 구두처럼 생긴 모습이었죠. 1900년 대에는 J. W. 포스터 앤 손(J. W. Foster and Son)이라는 영국 회사에서 스파이크가 달린 가죽 러닝화인 ‘Foster’s Running Pumps’를 제작하는데요. 영화 <불의 전차>로 더 유명한 1924년 프랑스 하계올림픽 100m 달리기 챔피언 해롤드 아브라함스(Harold Abrahams)가 이 신발을 신어 유명세를 얻게 됩니다. 이후 1958년 J. W. Foster and Son은 회사의 이름을 바꾸게 되는데요. 그게 바로 리복(Reebok)이죠.

 

3. 테니스에 진심인 아디다스

스탠스미스 – 1963년 ⓒadidas

최초의 테니스화는 1931년 아디다스에서 처음 선보입니다. 물론 그 전에 컨버스 올스타나 케즈의 스니커즈를 테니스화로 사용했긴 하지만 테니스화라고 명명해 출시한 것은 아디다스가 처음이었죠.

테니스화의 역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신발은 1963년에 등장합니다. 아디다스가 컨버스 천이 아닌 가죽으로 된 테니스 신발을 출시한 것이었는데요. 이 신발의 모델은 당대 프랑스의 테니스 스타였던 로버트 헤일렛(Robert Haillet) 이었죠. 하지만 로버트 헤일렛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은퇴하게 되고 새로운 당대 최고의 테니스 선수와 계약하게 됩니다. 그가 바로 그 유명한 스탠 스미스(Stan Smith)이죠.

 

4. 많은 이야기가 담긴 농구화

  • 컨버스 올스타 – 1917년
최초의 농구화 컨버스 올스타 ⓒconverse

세계 최초의 농구화는 컨버스(Converse)에서 제작한 올스타입니다. 당시 농구 선수였던 척 테일러(Chuck Taylor)는 컨버스를 찾아가 이 농구화에 대한 개선점을 제안합니다. 이 제안을 계기로 척 테일러는 컨버스의 홍보와 유통을 담당하게 되고, 더 나아가 신발에 그의 이름을 붙이게 되죠. 그의 노력 덕분에 컨버스 올스타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미군의 공식 운동화가 되기도 했고, 1970년대 초에는 미군 공수 부대에도 납품되었다고 합니다.

  • 아디다스 슈퍼스타 – 1970년
최초의 로우탑 가죽 농구화, 아디다스 슈퍼스타 – 1970년 ⓒadidas

아디다스 슈퍼스타는 최초의 로우 탑 가죽 농구화입니다. 처음엔 농구선수 카림 압둘 자바가 신고 나오면서 인기를 끌었죠. 하지만 슈퍼스타를 더 유행시킨 것은 힙합그룹 Run-DMC인데요. 그들은 슈퍼스타를 신발끈 없이 신발 혀를 밖으로 빼고 신는 스타일을 유행시켰죠.

아디다스에 진심이었던 Run-DMC는 1986년 <My Adidas>라는 곡을 출시하기도 했습니다. 아디다스는 그들과 백만 달러의 광고 계약을 체결했는데, 운동선수가 아닌 인물이 모델 계약을 따낸 사례는 스포츠웨어 브랜드 사상 최초였다고 하네요.

  • 나이키 에어 조던 1 – 1985년
에어 조던 1 – 1985년 ⓒNike

농구화하면 빼먹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에어조던이죠. 나이키 에어 조던 1의 시그니처 컬러인 검은색과 빨간색은 혁명적인 것이었습니다. 당시 NBA는 일정 부분 이상의 흰색이 포함된 농구화를 신도록 규정하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에어조던은 이러한 제재를 오히려 마케팅 기회로 활용합니다. 나이키는 마이클 조던이 에어조던을 신고 경기를 할 때마다 5000달러의 벌금을 지불했고, 이런 광고 카피를 내보내죠.

NBA가 이 신발의 착용을 금지했습니다. 다행히도 NBA는 여러분이 이 신발을 신는 것은 금지하지 못합니다.

당연히, 엄청난 매출을 거두었습니다.

 

마치며

마이클 조던, 스탠 스미스, 척 테일러, 해럴드 아브라함스 등 운동화의 탄생과 유행에는 항상 스타 운동선수들이 함께 했습니다. 오늘날 운동화 회사들이 스포츠에 투자하며 홍보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당연한 일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케즈 챔피온이 최초의 스니커즈였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스니커즈에 비해 인기가 없었던 것은 스포츠 스타와 관련된 일화가 없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원문: 사소한 것들의 역사


참고문헌

  • Amber J. Keyser. (2015). Sneaker Century, A History of Athletic Shoes, Twenty-First Century Books
  • Conran. (2009). Fifty Shoes that Changed the World. Design Museum
  • Marc Richardson. (2018). A Quick History of Reebok. grailed.com
  • 로리 롤러. (2002). 신발의 역사. 이지북
  • 마티외 르 모. (2019). 1000 SNEAKERS. 루비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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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실험한 것을 어떻게 믿음?: 실험실의 역사 https://ppss.kr/archives/269518 Fri, 13 Jun 2025 03:08:57 +0000 https://ppss.kr/?p=269518

실험실

실험을 하기 위하여 필요한 장치와 설비를 갖춘 방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들어가기 전에

최근에는 계속해서 전자기기에 관련된 역사만 조사했는데요. 『실험실의 진화』라는 책을 보다가 재밌어서 오랜만에 다른 주제를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책을 꽤 오래전부터 도서관에서 눈여겨 보고 있었는데, 전자기기의 역사만 조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뒷전으로 미루어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냥 읽기만 해야지 했다가 결국 정리까지 해버렸네요.

실험실의 역사는 화학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화학사는 한 번 정리한 적이 있습니다) 가장 인상 깊은 순간도 보일이 자신의 실험을 사람들에게 믿게 하기 위해 실험실을 개방하였다가, 왜 과학자만을 위한 닫힌 실험실이 되었는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1. 최초의 실험실은?

최초의 실험실은 누가 만들었는지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따르면 실험실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16세기 신비주의 철학자 존 디(john Dee 인데요.)하지만 실험실(laboratory)의 라틴어 어원인 라보라토리움(laborarorium)은 16세기 이전부터 쓰였기 때문에 존 디가 실험실이라는 단어를 처음 쓴 사람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2. 어둠의 연금술사 실험실

연금술사의 실험실은 주로 지하와 같은 어두컴컴한 곳에 있었습니다. 안드레아스 리바비우스(Andreas Libavius)는 이 점을 비판하며, 연금술이 지하 세상의 어두운 비밀을 몰래 탐구하는 활동이라며 비난했습니다.

반면, 리바비우스는 연금술과 대비되는 가상의 ‘화학의 집’을 제안했는데요. 화학의 집은 도심에 있었고, 커다란 창을 통해 들어온 빛이 내부를 환하게 밝혀주는 구조였습니다. 말하자면 연금술은 어둠의 학문이고, 화학은 빛의 학문이라는 것이죠.

이처럼 연금술은 화학자들과 종교인들에게 비난의 대상이었는데요. 금을 만들기 위한 목적이 탐욕스럽고 헛되다고 보였기 때문이죠.

하지만 사실 18세기 초엽까지 화학자의 실험실은 연금술사의 실험실과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두 실험실 모두 가장 중요한 기구는 화로와 증류기였습니다. 화로는 고온을 만들어서 금속을 녹이거나 증류를 하는 데 사용했고, 증류기는 불순물을 걸러내는 데 사용했죠.

18세기 중엽부터 화학 연구의 주류가 야금학이나 약제학에서 기체 화학으로 바뀌면서 화로의 중요도가 점점 줄어듭니다. 대표적으로 라부아지에(Antoine-Laurent de Lavoisier)의 실험실을 보면, 화로는 없고 테이블 위에 각종 실험 도구들이 놓여있었습니다. 게다가 라부아지에의 실험실은 파리의 병기창에 있었고,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반면 동시대 프리스틀리의 실험실은 17세기의 연장선이었습니다. 집에 실험실을 두고 공기 수집기를 개량해서 실험했죠. 그래서 혹자는 프리스틀리를 최후의 연금술사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3. 프랜시스 베이컨과 실험의 등장

화학자의 실험실이 생겨났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중심이 되는 중세에서는 실험 자체를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지식은 실험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본질을 사변적으로 생각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라고 받아들여졌죠.

그리고 당시 실험실의 필수품이었던 화로와 증류기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는 자연의 모든 존재는 자연적인 운행을 하므로 인간이 개입하는 실험은 자연을 망친다고 보았는데요. 특히 자연에서 볼 수 없는 화로와 증류기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랬죠.

16세기에 이르러서야 아리스토텔레스적 사고에 반기를 든 지식인이 등장하는데요. 바로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이었습니다. 베이컨에게 지식은 대상이 무엇에 의해 일어나고 있는지 동적 원리를 탐구하는 것이며, 이를 알기 위해서는 실험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화로와 증류기에 대한 비난에 대해서는 베이컨은 실험이 인공적인 상태를 만드는 게 아니라 막고 있던 다른 요소를 치워줌으로써 자연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는 작업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더 나아가 베이컨은 국가와 사회가 지원하는 공동 연구의 필요성을 이야기합니다. 베이컨의 저서 『새로운 아틀란티스』(1626)에는 솔로몬의 집이라는 공간이 등장하는데요. 이곳에는 36명의 연구원이 분업하여 연구합니다. 외국을 여행하며 정보를 수집하는 사람, 실험을 수집하는 사람, 실험을 수행하는 사람, 수집된 내용을 정리하는 사람, 실용적으로 응용할 방법을 찾아내는 사람, 새로운 실험을 연역하는 사람, 새로운 실험을 수행하는 사람, 이를 모두 취합하여 자연법칙을 이끌어내는 사람으로 나뉘어 합동 연구를 진행합니다.

베이컨의 이상이었던 솔로몬의 집은 1660년 왕립학회가 설립됨으로써 실현되었습니다. 이곳에서 과학자들이 모여 실험 결과를 발표하고 토론했죠. 하지만 조직적인 협동 연구가 진행된 것은 아니었고, 정부의 연구비 지원도 없었습니다.

 

4. 실험을 믿게 하는 방법: 열린 실험실

연금술사의 실험실은 비밀에 싸인 공간이었으며, 연금술사의 실험 노트는 본인이 아니면 해석할 수 없는 암호 문자를 사용했습니다. 반면, 근대 과학자들은 실험이 공개적으로 검증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로버트 보일(Robert Boyle)이었습니다. 그의 실험실은 모두에게 열려 있었고, 실험 결과를 책이나 논문으로 발표했죠. 다만 그의 실험을 직접 보지 않은 과학자들에게 어떻게 실험 결과를 믿게 할 것인지가 문제였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보일은 세 가지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첫 번째는 많은 사람이 자신의 실험을 지켜보았다고 기록하는 것이었습니다. 보일은 수은주 실험에서 “유명한 수학 교수들, 월러스 박사, 와드 박사, 그리고 미스터 렌이 보고 있는 가운데 실험했다”며 이름까지 공개하기도 했죠. 보일은 독자들에게 자신의 실험을 목격한 사람들이 거짓말을 할 사람들이 아니라는 믿음을 심어주려고 한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실험의 시시콜콜한 내용까지 전부 기록해서 보고하는 것이었습니다. 보일은 진공 속의 새에 대한 실험을 보고하면서, 공기를 빼니까 새가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고, 구경하던 한 사람이 실험을 멈추게 하고 새를 구해줬다는 이야기를 적었습니다. 이렇게 세세한 내용을 전부 기록함으로써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죠.

세 번째는 실패한 실험까지 자세하게 기록하는 것이었습니다. 실패한 실험에 대한 상세한 보고는 성공한 실험에 대한 설득력을 높여주었죠.

하지만 보일도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들의 비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들은 보일이 만든 진공이 인공적인 산물이라며 비판했습니다. 리바이어던으로 유명한 홉스(Thomas Hobbes)도 실험이 과학적 사실을 만들어낸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실험이 완벽한지 확신할 수 있냐는 것이었죠. 따라서 홉스는 보일의 진공 펌프는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공기가 새고 있고, 진공 속에서 새가 죽은 것은 숨을 쉬지 못해서가 아니라 진공펌프의 틈으로 공기가 급격하게 빨려 들어가 소용돌이를 일으켜 새를 죽인 것이 아니냐며 비판합니다.

이에 대해 보일은 새를 넣은 유리구 속에 작은 깃털 하나를 매달은 채로 진공을 만들었습니다. 홉스의 말대로 공기의 강한 소용돌이가 새를 죽인 것이었다면 깃털은 소용돌이 때문에 요동을 쳤을 테지만 미동도 하지 않았죠.

 

5. 증인은 중요하지 않다: 닫힌 실험실

보일의 진공 실험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쪽이 막힌 긴 유리관에 수은을 가득 채운 뒤 수은이 담긴 넓은 그릇 안에 거꾸로 세웁니다. 그러면 유리관 속 수은은 넓은 그릇 안으로 내려가다가 일정 높이에서 더 이상 내려가지 않죠. 이때 긴 유리관과 넓은 그릇 전체를 진공펌프 안에 넣고 공기를 빼내면, 넓은 그릇에 작용했던 공기의 압력이 약해지면서 긴 유리관 속 수은 기둥의 높이가 내려가게 됩니다.

보일의 실험이 화제가 되면서 당시 유명한 물리학자인 크리스티안 하위헌스(Christiaan Huygens)도 보일의 실험을 재현해 봅니다. 그런데 진공을 만들어도 수은 기둥이 전혀 낮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하위헌스는 이 사례를 들면서 보일이 진공펌프를 통해 얻은 공간은 진공이 아니라고 비판했죠.

보일은 이 결과를 듣고 하위헌스가 만든 진공펌프가 불량이라 나타난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위헌스가 1663년 보일의 진공펌프를 가지고 자신의 실험을 재현하면서, 보일은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죠. 보일이 하위헌스의 실험 결과를 받아들였지만, 아직 믿지 않는 왕립학회 회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을 대상으로 로버트 훅은 하위헌스의 실험을 재현합니다. 로버트 훅은 회합 장소로 실험 도구를 옮겨 실험을 재현했습니다. 실험 결과는 하위헌스의 결과대로였죠. 하지만 그럼에도 왕립학회 회원들은 실험 도구를 옮기는 과정에서 진공펌프의 밀봉에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회합 장소가 아닌 로버트 훅의 실험실에서 실험 결과를 재현한 뒤에야 과학자들은 하위헌스의 실험 결과를 받아들입니다.

이 일을 계기로 실험의 신뢰도는 목격자의 존재와는 무관하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실험실은 열린 공간일 필요가 없어졌죠. 실험실은 실험을 주도하는 과학자만의 공간이 되어 갔습니다.

 

6. 대학교의 실험실

19세기 초반 유럽 대학에서는 실험실을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당시까지도 대학의 주요 과목은 신학, 의학, 법학, 철학이었기 때문이죠. 19세기 말에서야 과학이 주요 과목이 되면서 대학 내에 실험실과 연구실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유기화학을 개척한 유스투스 폰 리비히(Justus von Liebig)는 기센 대학교에서 실험 실습을 할 수 있는 실험실을 운영했는데요. 이 리비히의 실험실은 여러 대학 실험실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대학에 실험실이 자리 잡게 되면서 어떻게 학생 여럿에게 동시에 같은 실험을 가르칠지에 대한 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네덜란드 레이던 대학교의 화학 교수 헤르만 부르하버(Herman Boerhaave)은 많은 학생들이 동시에 실험을 진행하고, 안전하게 불을 사용할 수 있도록 작은 화로를 만들었습니다. 점차 큰 화로는 실험실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19세기 무렵 학생들은 화로 대신에 알코올 램프로 실험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7. 물리학 실험실의 탄생

리비히의 실험실이 성공적으로 운영되면서 19세기 초엽 대학에는 화학 실험실이 정착했습니다. 게다가 인공 염료의 상업화로 대학뿐만 아니라 기업에서도 화학 실험실이 세워졌죠. 하지만 화학 외의 분야에서는 실험실이 좀 처럼 활성화되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18세기 후반 유행했던 전기 실험은 실험실이 아닌 살롱이나 귀족의 저택에서 진행되었죠. 대중강연으로 유명했던 험프리 데이비(Humphry Davy)와 마이클 패러데이(Michael Faraday)도 강연을 하는 극장의 무대 바로 옆에서 실험했죠.

물리학 실험실이 생겨난 계기는 전신의 발명이었습니다. 1830년대 새뮤얼 모스(Samuel Morse)가 발명한 전신은 급속도록 발전해 1850년대 이미 해저 케이블이 깔리죠. 전신선은 수십에서 수천 킬로미터에 달했는데, 중간에 손상된 부분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표준저항이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표준 저항을 측정해서 만드는 것이 국가적 차원에서 중요한 일이 되었죠. 표준저항을 만들기 위해서는 외부의 교란 없이 정밀 작업이 가능한 실험실이 필요했고요.

그렇게 생겨난 물리학 실험실은 화학 실험실을 모방해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물리학 실험실에서는 보통 강의실 바로 옆이나 밑에 있었고, 강의와 연계된 실험을 진행했죠.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실험실은 표준저항을 정교하게 측정하고 유지하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1874년 세워진 케임브릿지 대학교의 캐번디시 연구소는 1층과 3층에 연구 실험을 위한 실험실을 배치하고, 2층에는 학부생을 위한 강의실과 실험실을 지어 이런 문제를 해결합니다. 특히 정밀 실험실이 위치한 1층은 복도를 없애고 방과 방을 직접 연결함으로써, 학생들의 접근을 자연스럽게 차단했습니다.

 

8. 생물학 실험실의 탄생

18세기 무렵 생물학 강의는 주로 대학교 박물관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교수는 박물관에 있는 표본을 가져와서 강의했죠. 실험은 일부 교수가 알아서 장소를 마련해 하는 것이었습니다.

근대 실험생리학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 마장디(Françosi Magendie)는 생리학에서 실험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요. 이를 위해서는 동물실험을 위한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마장디의 제자이자, 췌장액의 기능을 밝힌 것으로 유명한 클로드 베르나르(Claude Bernard)역시 마찬가지였죠.

하지만 마장디가 속했던 콜레주 드 프랑스(Collge de France)는 생리학 연구에 실험실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베르나르에게 충분한 실험실을 제공해주지 않았습니다. 사실 마장디의 동물실험은 비윤리적이라며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거든요. 결국 베르나르가 여러 정부 기관을 설득하는 오랜 노력 끝에 자연사박물관에 딸린 작은 부속 건물을 실험실로 제공받았는데요.이때는 생리학자로서 베르나르의 연구가 거의 끝나가던 때였죠.

케임브리지 대학의 마이클 포스터(Michael Foster)는 교육과 생리학 실습을 병행할 실험실을 대학에 요구해 1873년 ‘기초 생물학에 대한 실제적인 수업’을 개설합니다. 이 수업에서는 다양한 동식물들을 해부 및 관찰했죠. 포스터는 학부생을 대상으로 실험을 통해 생물학을 가르친 최초의 과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실험을 통해 생물학을 가르치는 방식은 서서히 여러 대학으로 확산해 갔습니다.

포스터의 스승이었던 토머스 헉슬리(Thomas Huxley)도 “과학 연구자에게는 실험실 작업이 중심이어야 하며, 책은 이를 도와야 한다”라며 실험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1872년 영국 왕립 과학 칼리지의 교수가 된 후 학생들의 실험을 위한 공간과 예산을 확보해 생물학을 가르쳤죠.

원문: 사소한 것들의 역사


참고

  • Lowe, D. (2015). Laboratory history: The chemistry chronicles. Nature 521, 422
  • Peter J. T. Morris. (2021). The history of chemical laboratories: a thematic approach. Chemtexts
  • 황상익, 김옥주. (1992). 19세기 서유럽 생리학의 전문과학화 과정. 의사학, 1(1), 3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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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바지가 500년이나 됐다구? 청바지의 역사 https://ppss.kr/archives/266648 Tue, 27 May 2025 03:41:36 +0000 http://3.36.87.144/?p=266648

청바지

능직으로 짠 질긴 무명으로 만든, 푸른색 바지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1. ‘님’에서 만든 데님

제노바 선원

16세기 제노바의 코르듀로이 목화는 품질이 좋기로 유명했는데요. 이를 본 프랑스의 님스 지방에서도 좋은 품질의 직물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죠. 그 노력의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님스 지역의 능직이라는 뜻의 세르제 드 님(Serge de Nimes)입니다. 세르제 드 님이 드 님(de Nimes)으로 불리며 오늘날까지 데님이라는 명칭으로 이어진 것이죠.

이 데님은 내구성이 매우 강해 제노바 해군들이 입었는데요. 이것이 Jeans의 어원이라는 설이 있어요. 제노바를 뜻하는 프랑스어 단어가 Génes이기 때문입니다. 이후 데님은 서부개척 시절 마차의 천으로 이용되었고, 미국과 영국의 전쟁에서도 전략물자를 실어 나르는 데 요긴하게 사용되었습니다.

 

2. 데님 바지와 청바지는 다르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데님 바지는 오래 전부터 있어왔는데요. 하지만 우리는 리바이스(Levi’s)의 청바지를 최초의 청바지로 알고 있죠. 이전의 데님 바지와 청바지의 차이는 리벳이라는 구리 단추와 대량생산에 있습니다. 데님 바지에서 주머니 모서리와 단추 플라이의 밑부분 등에 금속 리벳을 설치한 것이 리바이스의 청바지로, 이로 인해 내구성이 더 향상되었죠.

이 아이디어는 제이콥 데이비스(Jacob Davis)라는 재단사에 의해 발명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발명품을 사업화하기 위해 당시 샌프란시스코에서 도매상점을 운영하고 있던 Levi와 손을 잡기로 하고 1873년 특허도 함께 등록합니다.

 

3. 도대체 왜 있나 궁금했던 청바지의 작은 주머니

지금 생산되는 청바지의 공통적인 특징으로는 오른쪽 앞주머니 안의 작은 주머니와 두 개의 뒷주머니를 들 수 있습니다. 원래는 앞주머니 두 개와 오른쪽 뒷주머니만 있었어요.

1870년대 후반 오른쪽 앞주머니에 회중시계를 넣을 수 있는 작은 주머니가 생겼고, 1901년부터 왼쪽 뒷주머니가 추가되었습니다. 또한 리바이스 청바지의 상징인 리벳이 현재는 뒷주머니에서 빠져 있는데요. 이는 1960년대에 리바이스가 안장, 가구 등에 흠집이 난다는 소비자의 불만을 받아들인 결과죠.

 

4. 최초의 XX바지

리바이스 상표

1873년 특허를 내고 탄생한 청바지는 XX라는 이름으로 출시되었는데요. 이 XX라는 명칭은 1890년 501이라는 명칭으로 바뀝니다. 이 리바이스의 501라인은 아직도 출시되고 있죠.

1886년에는 이 바지에 상표가 붙습니다. 말 두 마리가 청바지를 반대 방향으로 당기고 있는 모습인데요. 지금까지 쓰이는 상표로 리바이스 청바지의 내구성을 상징하죠. 1936년에는 다른 청바지와 구분할 수 있도록 레드 탭(Red Tab)을 부착하기 시작했고, 이는 리바이스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5. 반항의 상징, 청바지

<위험한 질주>의 한 장면

청바지는 여러 편의 영화에 등장하며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1952년 <밤의 충돌>의 마릴린 먼로, 1953년 <위험한 질주>의 말론 브란도, 1955년 <이유 없는 반항>의 제임스 딘이 입으면서 반항의 상징으로 떠오른 것이죠. 이 때문에 미국 동부를 중심으로 한 일부 주에서는 교실에서 데님 착용을 금지하기도 했습니다.

청바지는 록 음악의 역사와도 함께 하는데요. 엘비스 프레슬리가 청바지를 입고 나와 자유의 상징이 되기도 했어요. 심지어는 Elvis의 이름이 글자 순서만 바꾸면 Levis가 된다는 점이 화제가 되기도 했죠.

저항의 이미지는 1970년대에도 이어져 히피, 사이키델릭 록, 반전 시위 등을 상징하는 의복이 되었습니다. 펑크 록의 유행으로 디스트로이드 진, 흔히 말하는 ‘찢청’이 등장하기도 했죠.

 

6. 청바지가 파란색인 이유?

인디고 블루 염료

대부분의 청바지가 파란색인 이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골드러쉬 시절 광산에 뱀이 많았는데 당시 파란색 염료에는 뱀이 기피하는 성분이 있기 때문에 사용했다는 설이 있죠, 두 번째로 원래 리바이스에서는 덕 팬츠(duck pants)와 파란 색의 데님 바지를 출시했었는데요. 파란 색의 데님 바지의 경우, 인디고 블루 염료의 성분 때문에 세탁할수록 부드러워진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더 선호되었고, 이윽고 파란색만 출시하게 되었다는 설이 있죠.

원문: 사소한 것들의 역사


참고문헌

※ 리바이스의 시초에 대해서는 여러 참고문헌이 있었지만, 각자 내용이 달라 리바이스 공식 홈페이지의 내용만을 중점적으로 다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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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코인 VS 튤립 버블 논쟁 https://ppss.kr/archives/269141 Mon, 12 May 2025 09:02:16 +0000 https://ppss.kr/?p=269141 비트코인은 등장과 동시에 ‘현대판 튤립 버블’이라는 낙인을 피할 수 없었다. 17세기 네덜란드를 뒤흔든 튤립 투기 열풍처럼, 비트코인 역시 급등과 폭락을 반복하며 ‘광기 어린 자산’이라는 비유의 중심에 섰다. 지금 다시 묻고 싶다.

과연 이 비교는 정당한가? 튤립과 블록체인은 같은 궤적 위에 놓여 있는가?

이 질문을 출발점으로 비트코인과 튤립 버블의 유사성과 차이를 짚고, 그 이면에 감춰진 경제적 열광, 기술적 전환, 그리고 자산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심층적으로 분석해 보기로 한다.

출처: CNBC

 

튤립 버블, 최초의 자본주의 광기

17세기 초,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중 하나였다. 해상 무역의 중심지였던 암스테르담은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 1602년 설립)를 기반으로 초기 자본주의 금융 시스템을 꽃피우고 있었다. 공영 증권거래소, 국제 신용 시스템, 보험 산업까지 발달한 이 도시는 사상 초유의 유동성 시대를 열었다. 그 결과, 상인과 기술자, 항해사, 법률가 등 신흥 중산층과 상류 계층은 잉여 자본을 새로운 투자처에 쏟아부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바로 그때 오스만 제국을 거쳐 들어온 이국적인 식물, 튤립이 등장했다. 초기에는 단순한 관상용 식물에 불과했지만 일부 품종은 ‘튤립 브레이킹 바이러스(Tulip breaking virus)’라 불리는 바이러스 감염으로 인해, 꽃잎에 마치 수채화처럼 번지는 줄무늬가 생겼다.

사진: UnsplashGiu Vicente

정상적인 튤립은 단색으로 피어나지만, 이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색이 깨지듯(break) 흩어진 듯한 모양이 나타나며, 꽃잎은 마치 그림처럼 예측 불가능한 패턴을 띠게 된다. 당시 사람들은 이 현상이 질병 때문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오히려 그것을 자연이 허락한 신비로운 예술로 여겼고, 이 불완전하고 비대칭적인 패턴을 ‘희귀성의 극치’, ‘자연이 허락한 유일무이한 무늬’로 인식했다.

즉, 튤립 브레이킹 바이러스(Tulip Breaking Virus)에 감염된 일부 품종이 세밀한 줄무늬와 얼룩이 있는 꽃잎(세멸색)을 만들어내며 엄청난 희귀성과 예술적 가치를 지닌 수집품으로 변모한 것이다.

무엇보다 이 바이러스로 인해 만들어진 튤립은 재현이 불가능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희귀 품종은 예측 불가능성과 유일성이라는 요소를 더해 가격을 폭발적으로 끌어올렸다. 가장 유명한 품종 중 하나인 ‘영원한 황제(semper augustus)’는 1636년 말 한 뿌리가 5,500 플로린에 거래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 암스테르담 운하변 고급 주택 한 채의 평균 가격이 약 3,000 플로린이었음을 감안하면, 이는 단 한 송이 꽃이 도시 부동산보다 비쌌던 시대가 실제로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당시 영원한 황제(semper augustus)를 그린 그림. 화가는 알 수 없으며 1640년 이전에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미국의 노턴 사이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튤립의 신화, 하루아침에 무너지다

그러나 1637년 2월, 네덜란드 하를럼(Haarlem) 지역의 한 경매장에서 단 한 건의 거래가 유찰되며 분위기는 돌변했다.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수천 플로린에 거래되던 튤립 뿌리는, 그날 이후 단 한 명의 구매자도 나타나지 않는 ‘시장 실종’ 상태에 빠졌다.

이 한 건의 유찰은 ‘튤립이 더 이상 오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신의 신호탄을 낳았다. 불신은 곧 공포와 투매로 번졌다. 계약은 줄줄이 파기되었고, 한순간에 가격은 90% 이상 폭락했다. 가장 비싼 품종은 단 며칠 만에 가축 몇 마리 가격으로 전락했으며, 시장에는 공황 상태에 가까운 침묵이 이어졌다. 투기의 광기와 신뢰의 붕괴가 맞물린 그 순간, 세계는 역사상 최초로 기록된 대규모 자산 버블 붕괴를 목격했다.

이 사건은 훗날 경제학자들과 역사학자들에 의해 ‘튤립 마니아(Tulip Mania)’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 자산 거품과 투기 심리를 설명하는 고전적 사례의 원형으로 남게 되었다.

 

디지털 시대, 비트코인 등장

세기가 바뀌고 370여 년이 흐른 2009년, 전혀 다른 형태의 자산이 등장했다.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으며, 정부도 발행하지 않는 비트코인(Bitcoin)이 그것이다.

처음에는 ‘코인’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기술적 실험에 가까웠다. 발행자는 사토시 나카모토라는 정체불명의 인물 혹은 집단. 그는 중앙은행도, 국가도, 기업도 아닌 암호학과 분산 시스템을 바탕으로 작동하는 탈중앙 디지털 화폐를 제안했다. 비트코인의 모든 거래는 ‘블록체인(Blockchain)’이라 불리는 공개 분산 장부에 기록되고, 누구도 이를 위조하거나 되돌릴 수 없도록 설계됐다. 이는 역사상 처음으로, 제3자 없이도 신뢰를 자동으로 형성하는 화폐 시스템이었다.

사진: UnsplashAndré François McKenzie

출시 초기, 비트코인은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했다. 1BTC의 가격은 고작 0.003달러였다. 심지어 2010년에 1만 비트코인으로 피자 두 판을 주문한 ‘비트코인 피자 데이’가 상징처럼 회자될 만큼, 실용성과 생존 가능성조차 의심받는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상황은 달라졌다. 사이버 리버테리언, 해커 집단, 기술 공동체, 금융 엣지 투자자들이 비트코인의 구조적 속성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 발행량이 제한된 희소성
  •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검열 저항성
  • 국가의 경계를 초월한 탈중앙·탈국가성

이들은 비트코인을 중앙 통제를 벗어난 새로운 금융 질서의 가능성으로 보기 시작했다. 특히 2020년 이후 팬데믹이 세계를 덮치고 각국 중앙은행이 제로금리 정책과 대규모 양적완화(QE)로 대응하면서, 시장에는 초과 유동성이 넘쳐났다. 투자자들은 인플레이션을 피할 수 있는 대체 자산을 찾았고, 그 답 중 하나가 비트코인이었다.

2021년, 비트코인은 마침내 6만 달러를 돌파하며 역사적 정점을 찍었다. 불과 10여 년 만에 2천만 배의 가치 상승을 기록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자산의 부상이 아니라, 신뢰와 화폐에 대한 인식 자체의 전환이었다.

하지만 비트코인의 궤적은 언제나 급등과 급락이 교차했다. 누군가는 그것을 ‘디지털 도박판’이라 불렀고, 또 다른 누군가는 ‘21세기의 디지털 금’이라 찬양했다.

  • 극단적인 변동성
  • 창시자의 익명성
  • 규제 회피적 글로벌 구조
  • 불확실한 내재 가치

이 모든 요소는 비트코인을 튤립 버블과 나란히 놓는 비교 논리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튤립’과 ‘코인’은 다르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 거래되던 튤립 한 뿌리는, 아름답고 희귀한 물리적 실체를 지닌 자산이었다. 그러나 그 사용 가치는 감상과 과시에 국한된 소비재에 불과했다. 일부 품종은 희귀한 색조와 무늬, ‘튤립 브레이킹 바이러스’에 의해 만들어진 예측 불가능한 무늬 덕분에 엄청난 가격에 거래되었지만, 결국 그것은 시간이 흐르면 자연 증식이 가능한 식물이었다. 즉, 물리적 희소성은 유지되기 어려웠고, 자산으로서의 내재 가치는 시장의 열망에만 의존했다.

튤립은 식탁 위의 빵처럼 인간을 먹여 살릴 수도 없고, 건축 자재처럼 어떤 구조를 세울 수도 없었다. 그 가격은 결국 ‘이 뿌리를 더 비싸게 사줄 다음 사람이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에 기반한 것이었고, 그 믿음이 무너진 순간, 튤립은 꽃이 아니라 경제적 망상이 되었다.

반면, 비트코인은 실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실체를 능가하는 기술적·경제적 구조를 내포하고 있다. 그 핵심은 블록체인 기술, 즉 모든 거래를 투명하게 기록하고 검증하는 분산원장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은 중앙의 통제 없이도 신뢰를 구축하며, 누구도 임의로 조작하거나 변조할 수 없다. 신뢰를 코드로 구현한 기술, 그것이 비트코인의 본질이다.

또한 비트코인은 총 발행량이 2,100만 개로 고정되어 있다. 이는 금보다도 더 엄격한 희소성을 의미하며, 중앙은행이 찍어내는 화폐처럼 인위적 공급 확대나 인플레이션으로부터 자유로운 구조를 가진다.

비트코인은 단지 보관하거나 사고파는 자산이 아니다. 누구나 제3자의 개입 없이 개인 간 직접(P2P) 거래를 수행할 수 있으며, 국경을 초월한 송금에서도 빠르고 저렴한 수수료를 제공한다. 더 나아가, 이더리움과 같은 스마트 계약 플랫폼과 결합되면, 탈중앙 금융(DeFi) 생태계 및 토큰화 자산 시스템으로 확장될 수 있는 잠재력도 지닌다.

이처럼 비트코인은 단순한 가격 등락을 넘어, 디지털 화폐, 가치 저장 수단, 그리고 차세대 금융 인프라로서의 기능을 복합적으로 수행하는 자산이다. 그 존재는 물리적 실체 없이도, 프로토콜과 수학적 신뢰, 그리고 네트워크 효과 위에 구축된 새로운 디지털 질서다. 그것이 튤립과 본질적으로 다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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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거품의 배경에는 ‘돈’이 있다

튤립 버블이 발생한 17세기 초반,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진보적인 국가였다.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인 동인도회사(VOC)를 중심으로 한 무역 제국은 막대한 부를 본국으로 끌어들였고, 암스테르담은 근대 금융의 실험장으로 떠올랐다.

공영 증권거래소, 이중 회계장부, 국제 신용거래. 당시로선 파격적인 제도들이 도입되며 자본주의의 기초 구조가 형성되었다. 그 결과, 상인·기술자·법률가로 구성된 신흥 시민계급에는 생존을 넘어선 ‘자산 증식’이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가진 돈이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는 점이었다. 오늘날처럼 다양하게 분화된 금융상품이 존재하지 않았던 그 시대에, 그들이 선택한 자산은 뜻밖에도 튤립의 한 뿌리였다. 특히 희귀한 무늬와 색조를 지닌 튤립은, 단지 식물이 아니라 사회적 계급을 과시하는 수단, 수집 가능한 예술품, 그리고 결국엔 가격 상승을 기대하는 투기 대상으로 변모했다. 투기는 본능이 아니라, 방향을 잃은 자본의 필연적 선택이었다.

그로부터 약 400년 후, 비슷한 흐름이 또 한 번 반복됐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전 세계 중앙은행들은 경기 부양을 위해 제로금리 정책과 양적완화(QE)를 단행했고, 특히 2020년 팬데믹의 충격 이후에는 미국 연준(Fed)을 중심으로 역사상 유례없는 수준의 초저금리·초과 유동성이 공급되었다.

 

시장, ‘돈의 홍수’에 잠기다

주식, 부동산, 미술품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자산 가격이 동반 상승했고, 투자자들은 점차 금, NFT, 비트코인 같은 대체 자산(Alternative Assets)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빠르게 수익률을 증명해 낸 것이 바로 비트코인이었다.

희소성과 탈중앙성, 그리고 기술적 서사를 무기로, 비트코인은 ‘디지털 금’이라는 내러티브를 형성했다. 특히 전통 자산을 불신하거나, 중앙 통제에 대한 회의감을 가진 젊은 세대와 기술 기반 투자자들에게는 비트코인이야말로 미래형 자산이자 새로운 질서의 상징처럼 보였다. 결국, 튤립이든 비트코인이든, 그 시작점은 다르지만 불을 붙인 건 같은 연료였다.

쌓인 돈은 방향을 찾고, 방향을 잃은 돈은 거품을 만든다.

Image by mamewmy on Freepik

 

‘가치 저장’과 ‘투기’ 사이

비트코인은 어느 순간부터 ‘디지털 금(Digital Gold)’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이는 단순한 은유나 마케팅 용어가 아니다. 금처럼 희소하고, 채굴이 가능하며, 중앙 기관 없이도 신뢰를 유지하는 자산이라는 점에서, 일부 투자자들은 비트코인을 21세기형 가치 저장 수단(Store of Value)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동시에, 비트코인을 ‘투기성 자산(Speculative Asset)’으로 보는 시각도 뿌리 깊다. 극심한 가격 변동성, 실질적 사용처의 불확실성, 그리고 무엇보다, “더 비싸게 사줄 누군가가 있다는 전제”에 기반한 거래 구조가 문제로 지적된다. 이러한 특성은 17세기 튤립 시장과 닮아 있다는 비판을 가능하게 한다.

비트코인은 금과 달리 물리적 실체는 없지만 실체를 대신하는 ‘코드 기반 신뢰’를 제공한다. 모든 거래는 블록체인이라는 분산원장에 영구적으로 기록되며, 누구도 이를 위조하거나 삭제할 수 없다. 이러한 구조는 비트코인을 단순한 자산을 넘어, 거래 인프라로 기능할 수 있는 기술적 기반으로 확장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결되지 않은 핵심 문제가 있다. 바로 극단적인 가격 변동성이다.

2021년, 비트코인은 6만 달러를 돌파했지만 불과 몇 달 사이 3만 달러 아래로 급락했고, 다시 상승하며 반복적인 롤러코스터 장세를 보였다. 이러한 흐름은 전통적인 가치 저장 수단이 갖추어야 할 안정성을 위협한다. 그래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비트코인은 ‘디지털 시대의 도박판’, 혹은 ‘기대와 공포 사이에 놓인 실험적 자산’으로 인식되고 있다.

 

시각의 충돌 : 신뢰할 것인가, 회의할 것인가

비트코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극명하게 엇갈린다.

그것은 금융의 미래인가, 아니면 잘 포장된 망상인가? 새로운 질서의 실험장인가, 혹은 공포 위에 세워진 투기판인가?

먼저, 알레한드로 레예스(Alejandro Reyes)의 말을 들어보자. 버클리대학교 경제사 교수이자 금융 투기 버블 연구의 권위자인 그는, 튤립 버블과 비트코인을 자주 비교 대상으로 삼아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튤립은 일시적인 문화적 열광이었다면, 비트코인은 기술 기반의 시스템 전환이다.

즉, 두 자산은 가격의 등락은 닮았을지언정 태어난 맥락, 확장성, 구조적 기능 면에서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튤립은 단지 비싸졌을 뿐이지만, 비트코인은 금융 질서 자체를 실험한다.

IMF(국제통화기금)도 비슷한 시각을 보였다. 2021년 글로벌 금융안정성 보고서에서 IMF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내재 가치에 대한 논쟁은 지속되지만, 블록체인 기반 디지털 자산은 국경을 초월한 금융 인프라로 기능할 수 있는 구조적 기반을 갖추고 있다.

이는 비트코인이 단순한 투기 대상이 아니라, 국제 금융의 기술적 대안 인프라로서 일정 수준의 가능성을 인정한 평가로 해석된다. 그러나 반대편에는 여전히 단호한 회의론자들도 존재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폴 크루그먼(Paul Krugman)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이자 《뉴욕타임즈》 칼럼니스트로 잘 알려진 그는, 비트코인을 ’21세기의 투기 도구’로 규정하며 강하게 비판했다.

비트코인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으며, 본질적으로 공포 기반의 투기 구조를 갖추고 있다. 가격은 믿음으로 유지되지만, 믿음은 급격히 무너질 수 있다.”

그는 화폐가치의 근간은 결국 신뢰를 바탕으로 한 법정화폐 시스템과 정부 보증에 있다고 본다. 그 어떤 기술적 구조도 이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비트코인은 금융 한쪽에서는 금융 질서의 진화, 다른 한쪽에서는 디지털 시대의 망상으로 해석되고 있다. 금융 역사학자, 국제기구, 노벨상 수상 경제학자까지 각기 다른 위치에서 다른 언어로 이 자산을 해석하고 있지만, 그 갈라진 평가의 폭은 오히려 한 가지 사실을 말해준다.

비트코인은 아직 정의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정의되지 않은 상태 자체가 이 자산의 가능성과 동시에, 가장 큰 위험이기도 하다.

 

비트코인은 과연 ‘디지털 금’이 될 것인가

비트코인을 둘러싼 가장 상징적인 수사는 단연 ‘디지털 금(Digital Gold)’이라는 개념이다. 이 말은 단순한 마케팅 용어가 아니라, 자산으로서의 비트코인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프레임을 반영한다.

Image by mamewmy on Freepik

금(Gold)은 수천 년 동안 인류 문명과 함께해온 궁극의 가치 저장 수단(Store of Value)이었다. 그 가치는 희소성, 물리적 내구성, 대체 불가능성, 그리고 어느 국가도 통제하지 못하는 보편성에 기반했다. 이러한 속성은 인플레이션과 금융 위기 속에서도 금이 법정화폐의 대안으로서 생존해 온 핵심 이유였다. 그렇다면 비트코인은 금과 같은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가?

  • 희소성: 총발행량이 2,100만 개로 고정되어 있어, 공급이 구조적으로 제한된다.
  • 탈중앙성: 정부·은행·기업의 통제를 받지 않는 독립적 시스템이다.
  • 위·변조 불가능성: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모든 거래가 영구적으로 기록되고 검증된다.
  • 검열 저항성: 누구도 사용자의 송금이나 보유를 막을 수 없는 구조다.

이러한 특성은 분명 금과 유사하며, 일부에서는 오히려 금보다 더 정교한 희소성과 신뢰 메커니즘을 갖췄다는 평가도 나온다. 실제로 글로벌 자산운용사와 기술기업들은 비트코인을 자산 포트폴리오에 포함시키기 시작했고, 2024년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비트코인 현물 ETF를 승인한 사건은, 그 흐름이 제도권으로 진입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계기였다.

그러나 ‘디지털 금’이라는 수식어가 붙기에는 여전히 넘어야 할 현실적 장벽도 많다.

  • 극단적인 가격 변동성: 금은 안정적인 가치 보존 수단이지만, 비트코인은 연 단위로 수십 퍼센트 이상 요동친다. 이는 가치 저장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를 위협한다.
  • 채굴 의존성과 에너지 소모: 비트코인 채굴은 막대한 전력을 요구하며, 탄소중립 시대의 흐름에 역행한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 정책 및 규제 리스크: 각국 정부의 입장은 엇갈리고 있으며, 때로는 강력한 제재 조치가 내려지기도 한다. 이는 ‘금처럼 안전한 피난처’라는 서사를 흔드는 요소다.
  • 기술적 불확실성: 블록체인 기술은 아직 진화 중이며, 후속 기술에 의해 대체되거나 보완될 가능성이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트코인이 ‘금’과는 전혀 다른, 디지털 시대의 신형 자산이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비트코인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거래 구조, 신뢰 방식, 금융 주권에 대한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비트코인은 아직 ‘금’은 아니다. 하지만 금이 결코 가질 수 없는 ‘시대성’을 품고 있다.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에게 비트코인은 자산이자 언어이며, 자기결정권의 상징이고, 검열되지 않는 화폐이며, 기술 기반 신뢰가 구현된 자유의 도구다.

바로 이 지점에서, 비트코인은 단순한 ‘디지털 금’을 넘어, 금이 되지 못한 것들이 꿈꿔왔던 미래의 화폐가 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

 

반복되는 역사인가, 새로운 질서의 서막인가

비트코인과 튤립 버블의 비교는 단순한 흥미를 넘어, 시장의 심리와 자산의 본질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두 가지 모두 희소성과 열광, 그리고 급격한 가격 상승이라는 공통점을 지니지만, 그 뿌리는 전혀 다르다.

튤립은 일시적인 수요와 신기함에 기반한 감각적 투기 대상이었다면, 비트코인은 기술적 설계와 경제적 구조, 그리고 사회적 요구가 맞물린 복합적 금융 실험체다. 그것은 단순한 자산이 아니라 거래를 기록하는 방식, 신뢰를 분산시키는 메커니즘,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금융 구조라는 점에서 새로운 시스템의 전초기지라 할 수 있다.

물론, 비트코인은 아직 ‘완성된 금’이 아니다. 그 가치는 여전히 극심한 변동성, 정책과 규제의 불확실성, 기술 진화의 불안정성 속에 놓여 있다. 그 미래에는 장밋빛 낙관과 종말론적 경고가 동시에 존재한다.

그러나 단 하나, 분명한 사실은 있다. 비트코인은 우리 시대의 거울이라는 것이다. 그 안에는 신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화폐란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는 성찰, 권력은 기술로 재구성될 수 있느냐는 질문이 담겨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묻는다.

비트코인은 진짜 금이 될 수 있을까? 아니면 그조차도, 지나가는 한 송이 튤립에 불과할까?

그 답은 기술이 아니라, 시장에, 그리고 우리 각자의 믿음에 달려 있다.

원문: 광화문덕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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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 기업으로, 기업에서 가정으로 이동해 온 컴퓨터의 역사 https://ppss.kr/archives/266638 Fri, 09 May 2025 08:18:07 +0000 http://3.36.87.144/?p=266638 ※ 한국기계산업진흥회에서 발행하는 KOAMI Insight 매거진에 기고한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1. 파스칼의 계산기

파스칼의 계산기

컴퓨터가 나오기 전에 계산은 계산자나 미리 계산을 해둔 계산표를 가지고 하는 것이 보편적이었습니다. 이러한 기구를 이용해서 ‘계산하는 사람’을 컴퓨터라고 불렀죠. 하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다 보니 오류가 있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계산하는 기계, 계산기 발명 시도가 있었습니다.

라이프니츠의 계산기

기계식 계산기가 처음 등장한 것은 1623년 빌헬름 시카르트(Wilhelm Schickard)에 의해서였습니다. 6자리 숫자의 덧셈과 뺄셈을 수행할 수 있는 기계였죠.

이후 1642년에는 파스칼에 의해 기계식 계산기가 개발되었고, 1671년 라이프니츠에 의해 곱셈, 나눗셈까지 가능한 사칙연산 계산기가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단순 계산기가 아닌 본격적인 현대 컴퓨터의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한 것은 찰스 배비지(Charles Babbage)였죠.

차분기관의 일부

1821년 찰스 배비지는 천문학자 존 허셜(John Herschel)과 함께 수치 계산표를 검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계산표에서 오류를 발견했고, 계속해서 오류가 나타나자 화가 난 배비지는 본인이 직접 증기기관을 이용한 계산 기계를 만들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배비지는 영국 정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아 증기기관으로 작동하는 계산기를 만들기 시작해 1832년 샘플에 해당하는 모델을 만들었습니다. 배비지는 자동으로 계산하기 위해 곱셈을 덧셈으로 바꿔서 복잡한 계산을 단순하게 만들어주는 계산 방식인 차분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이 기계를 차분기관이라고 불렀죠. 하지만 끝내 만들어지지는 못했습니다. 1834년까지 차분기관 제작에 진척이 없어 정부 지원금이 끊겼거든요.

하지만 배비지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해 명령어를 입력해 다양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기계의 아이디어를 떠올렸죠. 이 기계는 해석기관이라고 불렸으나, 역시 설계도만 있을 뿐 실제로 제작되지는 않았습니다. 이 해석기관을 이해한 에이다 러브레이스(Ada Lovelace)는 만들어지지도 않은 해석기관을 이용해 베르누이 수를 구하는 알고리즘을 작성했는데, 이것이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램이 되었습니다.

참고로 완성되지 않은 찰스 배비지의 차분기관은 1991년 런던 과학박물관에서 배비지 탄생 200주년을 맞이해 완성합니다.

 

2. 직조기에서 시작된 IBM?

자카르의 천공카드를 이용한 베틀 ⓒthoughtco.com

18세기 중반, 태엽 달린 기계 장치들은 오르골처럼 실린더 위의 돌기나 구멍을 이용해 움직임을 반복했습니다. 이것을 산업 분야에서 처음 사용한 곳은 섬유산업이었죠.

1725년 바실레 부숑(Basile Bouchon)이 천공카드를 이용해 베틀을 제어하는 방법을 발명하고 1805년 조셉 마리 자카르(Joseph Marie Jacquard)가 산업적으로 완성하죠. 자카드의 베틀을 본 나폴레옹과 조세핀은 자카드 베틀에 대한 특허를 부여했고, 그 대가로 자카드는 3,000프랑의 연금과 6년가 베틀마다 로열티를 받았습니다.

허먼 홀러리스의 천공카드

19세기 후반 미국에서는 노예제가 폐지되면서 인구가 급속하게 늘었고, 세금을 거두기 위한 인구조사를 빠르게 해야 했죠. 허먼 홀러리스(Herman Hollerith)는 섬유 산업에 쓰이던 천공카드를 도입해 인구조사에서 얻은 결과를 한 사람당 한 장의 카드에 저장하는 방식을 개발했습니다.

홀러리스 천공카드 기계의 가장 큰 혁신은 전기의 사용이었습니다. 홀러리스의 기계는 천공카드에 구멍이 있으면 금속 바늘이 구멍을 통과해 수은에 닿아 전기신호를 전달하는 원리였습니다. 홀러리스는 TMC라는 회사를 설립해 천공카드 기계를 납품하면서 천공카드는 인구통계, 보험, 군수 관리 등에 쓰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TMC는 훗날 IBM이 되죠.

 

3. 전쟁이 만들어낸 컴퓨터

봄베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은 독일군의 암호화 장치 에니그마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영국의 비밀정보국은 에니그마 해독을 위해 과학자들을 모아 암호해독 전담팀을 만들었죠. 이때 차출되었던 앨런 튜링(Alan Mathison Turing)이 1939년 봄베 컴퓨터를 개발합니다. 봄베 컴퓨터 제작에 관한 영화가 바로 <이미테이션 게임>이죠.

1943년 콜로서스 mk2 의 모습

하지만 곧이어 에니그마의 상위 버전인 로렌츠 암호 전신기가 등장하며 봄베보다 더 성능이 좋은 암호해독기가 필요해졌습니다. 그렇게 개발하게 된 것이 콜로서스입니다.

콜로서스는 당시 최신 기술인 진공관을 사용했는데요. 진공관은 쉽게 망가지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장치를 끄지 않는 것이었죠. 장치를 끄지 않으면 진공관의 온도가 급격히 올라가거나 내려가 생기는 충격을 피할 수 있었거든요.

그리하여 1943년 1,500여 개의 진공관과 릴레이만으로 완성된 디지털 컴퓨터 콜로서스가 개발됩니다. 콜로서스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등에 중요한 역할을 해냈죠.

에니악의 일부 모습

1943년 영국이 콜로서스를 만들었을 때, 미국은 대공 미사일 시스템을 만들기 위한 컴퓨팅 장치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벨 연구소에서 담당했던 이 프로젝트에는 레이더와 같은 다른 장치로부터 직접 데이터를 받기 위해 전기회로를 사용한 컴퓨팅 기계를 개발하죠. 2년에 걸쳐 제작된 이 기계가 바로 에니악으로, 농구장만 한 크기를 자랑했습니다. 진공관은 총 17,468개가 사용되었는데 역시 전원을 끄지 않는 것으로 진공관 고장을 예방했습니다.

에니악이 하나의 문제를 풀고 난 다음 다른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복잡한 전선을 사람들이 일일이 다시 연결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문제를 푸는 데는 금방이었으나 전선을 연결하는 작업에는 며칠씩 걸렸죠.

이러한 에니악을 본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은 데이터뿐만 아니라 컴퓨터 프로그램도 코드로 만들어 컴퓨터에 입력해야 한다는 ‘내장형 프로그램 개념’을 떠올립니다. 이 프로그램 내장 방식은 오늘날 컴퓨터의 기원이 됩니다.

폰 노이만은 1945년 에니악 개발팀과 논의한 끝에 새로운 <에드박 보고서 1차 초안> 보고서를 제작하고, 이 방식을 바탕으로 1951년 에드삭이 개발됩니다.

 

4. 튜링의 만능기계

사실 컴퓨터에 대한 아이디어는 봄브와 콜로서스, 에니악이 등장하기 전부터 있었습니다. 1936년 앨런 튜링의 <계산 가능한 수에 관하여, 수리 명제 자동생성 문제에 응용>이라는 논문에 처음 등장했죠.

이 논문은 수학자 힐베르트(David Hilbert)의 생각이 틀렸음을 증명하기 위해 썼던 것이었는데요. 힐베르트의 생각은 지금까지 수학자들이 어떠한 문제를 증명하기 위해 해왔던 과정은 몇 개의 추론 규칙을 반복해서 적용하는 것이 전부이며, 이런 규칙들을 찾아서 자동으로 추론해 주는 기계를 만들면 수학자들이 더 이상 고생하지 않으리라는 것이었죠.

이에 앨런 튜링이 ‘만능기계’를 제시해 이 만능기계가 못 푸는 문제가 있음을 보임으로서 힐베르트가 틀렸음을 증명합니다. 이 만능기계의 원리가 폰 노이만의 프로그램 내장 방식의 유래가 됩니다.

앨런 튜링의 ACE ⓒAntoine Taveneaux

튜링은 세계대전 동안 암호해독기를 만드느라 범용 컴퓨터의 설계는 전쟁 이후에 시작했습니다. 이 컴퓨터는 자동 컴퓨팅 엔진(ACE, Automatic Computer Engine)이라고 불렸으며 1950년에 첫 시험 모델이 완성되었죠.

참고로 튜링의 에이스는 폰 노이만의 에드박과 아주 다른 방식의 기계였습니다. 에드박은 에드박의 논리 구조는 계산을 빠르게 만드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고, 에이스는 다양한 문제에 사용할 수 있게 논리 구조를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었죠.

 

5. 정부에서 기업으로

LEO의 모습 ⓒi-progrmmer.info

전쟁 이후에는 컴퓨터가 민간에 쓰이기 시작합니다. 1947년 당시 영국에서 큰 회사들 중 하나였던 라이언스(J. Lyons & Co. Ltd)는 관리부서 업무를 자동화하기 위해 컴퓨터 전문가들을 수소문했습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이 만든 컴퓨터를 사업용으로 쓰기에는 부적합하다고 판단한 라이언스는 직접 컴퓨터를 제작하기로 합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컴퓨터가 레오(LEO, Lyons Electronic Office)이죠. 레오는 기존 컴퓨터보다 기업에서 사용하기에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포드 같은 기업이나 기상청에서 채택했습니다. 미국에서는 1946년 존 모클리(John William Mauchly)와 존 에커트(John Presper Eckert Jr)가 컴퓨터 회사를 세워 유니박을 만듭니다. 유니박을 처음 구매한 곳은 미국 통계국이었죠.

이후 기업용 컴퓨터가 점차 많은 곳에서 쓰이게 되는데, 여기에는 트랜지스터가 등장한 영향이 컸습니다. 트랜지스터를 이용하면 진공관을 이용한 컴퓨터 기계보다 훨씬 작고, 전기도 조금 들고 저렴했기 때문에 기업들도 컴퓨터를 사는데 부담이 적어진 거죠.

트렌지스터는 1947년 벨 연구소의 윌리엄 쇼틀리(William Bradford Shockley)와 그의 연구소 동료였던 존 바딘(John Bardeen), 월터 브래튼(Walter Brattain)과 함께 개발한 것이었죠. 이후 쇼클리는 벨 연구소를 떠나 1955년 쇼클리 반도체 연구소를 설립합니다. 하지만 쇼클리의 연구소는 새로운 연구 결과물을 내지 못했고 자기 고집대로만 연구소를 운영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연구소를 떠났습니다.

1957년 쇼클리의 연구소를 떠난 8명의 연구원은 페어차일드 반도체라는 새로운 회사를 설립해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곳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또다시 여러 회사를 만들었습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회사가 바로 인텔이죠.

IBM 360 ⓒNBC NEWS

IBM는 컴퓨터의 표준을 만들어 컴퓨터가 널리 쓰이는 데 기여했습니다. 기존 컴퓨터는 각 컴퓨터를 위해 특별히 개발된 소프트웨어만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한 회사에서 만든 컴퓨터끼리도 소프트웨어를 공유할 수 없었죠.

1964년, IBM에서는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50억 달러라는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입해 모든 소프트웨어가 잘 동작하는 System/360을 개발합니다. System/360으로 IBM의 컴퓨팅 분야 매출은 2배가 증가했고, 이를 통해 여러 업체가 만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컴퓨터 종류에 상관없이 작동하는 개방형 표준이 만들어집니다.

 

6. 기업에서 가정으로

알테어 8800의 잡지 광고

세계 최초의 가정용 컴퓨터는 1974년에 등장한 알테어 8800Altair 8800로 1년 만에 5,000여 대가 넘게 팔렸죠. 알테어 8800은 오늘날로 치면 본체만 있는 셈으로 확장 장치를 이용하던가, 전면 패널의 토글스위치와 LED만을 이용해 컴퓨터를 사용해야 했는데, 스위치를 이용해 기계어 명령어를 메모리에 주입하고 프로그램을 실행 후 결과를 LED로 표시하는 식이었죠. 즉 컴퓨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만 사용할 수 있는 기계였습니다.

이처럼 한계가 많은 제품이었지만 컴퓨터의 역사에는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빌 게이츠(Bill Gates)와 폴 앨런(Paul Gardner Allen)은 알테어 8800을 보고 이를 위한 프로그램인 알테어 BASIC을 납품하며 마이크로 소프트를 설립했고, 스티브 잡스(Steven Paul Jobs)와 스티브 워즈니악(Steve Gary Woz Wozniak)은 더 나은 PC를 만들겠다며 애플을 창립하죠.

Figure.13 SAGE 콘솔을 사용하는 모습 ⓒcomputerhistory.org

일반 사람들이 컴퓨터를 많이 쓰이게 된 계기는 사용하기 편리한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GUI)가 등장한 이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최초의 GUI는 1958년 북미항공우주방위사령부에서 사용했던 SAGE(Semi-Automatic Ground Environment)라는 방공망 관제용의 전산 시스템의 제어 콘솔이었습니다. SAGE 제어 콘솔에는 레이더 스크린이 있었는데, 라이트펜으로 화면을 찍으면 아군기인지 적기인지 알려주는 기능이 있었죠. 다만 군사 기밀이라 민간용으로 쓰이지는 않았습니다.

스티브 잡스와 매킨토시S 128k의 모습

1973년에는 GUI 운영체제를 탑재한 최초의 컴퓨터 제록스 알토가 등장합니다. 다만 제록스에서 상용화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어 연구소 내에서만 사용하고 있었는데요. 이를 본 애플은 제록스에 100만 달러어치의 애플 주식을 주고 기술 자료와 제품을 개발할 권리를 얻습니다.

그렇게 해서 애플이 내놓은 제품이 1983년 애플 리사 LISA, 1984년 매킨토시 128K이고, 매킨토시 128K의 성공으로 GUI가 대중화됩니다.

IBM PC ⓒIBM

매킨토시 128K의 성공으로 80년대 개인용 컴퓨터 시장은 애플이 점령했습니다. 그때까지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지 않은 IBM은 당시 연구원이었던 돈 에스트리지(Philip Donald Estridge)에게 1년 만에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라는 미션을 주었습니다.

돈 에스트리지는 가격을 낮추기 위해 IBM에서 모든 부품을 제작하는 것이 아닌, 다른 회사에서 만든 기성품을 가져다 썼습니다. 그리고 다른 회사에서 주변 기기나 호환 기종을 만들 수 있도록 아키텍처를 개방하는 정책을 결정하죠. 그러니까 오늘날 조립PC의 시초인 셈이었죠.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IBM PC 5150은 사무용 컴퓨터로 큰 인기를 얻으며 성공합니다. IBM PC 5150의 성공으로 PC는 IBM의 모델명에서 개인용 컴퓨터를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죠.

IBM PC 5150의 아키텍처 개방 정책은 컴퓨터 업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부품과 소프트웨어를 제조하는 회사가 많이 늘어나 컴퓨터 산업 전체가 커지는 계기가 됩니다. 특히 인텔과 마이크로소프가 가장 큰 혜택을 얻었죠. 그리고 현재까지 MS OS의 IBM PC 호환 기종과 Mac OS의 매킨토시로 시장이 양분되어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원문: 사소한 것들의 역사


참고

  • 더밋 튜링. (2019). 계산기는 어떻게 인공지능이 되었는가. 한빛미디어
  • 마틴 데이비스. (2023). 오늘날 우리는 컴퓨터라 부른다. 인사이트
  • 박민규. (2020).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은 IT의 역사. 빈빈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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