ㅍㅍㅅㅅ https://ppss.kr 필자와 독자의 경계가 없는 이슈 큐레이팅 매거진 Tue, 27 May 2025 03:41:36 +0000 ko-KR hourly 1 https://wordpress.org/?v=5.8.10 https://ppss.kr/wp-content/uploads/2015/07/ppss-100x100.png ㅍㅍㅅㅅ https://ppss.kr 32 32 청바지가 500년이나 됐다구? 청바지의 역사 https://ppss.kr/archives/266648 Tue, 27 May 2025 03:41:36 +0000 http://3.36.87.144/?p=266648

청바지

능직으로 짠 질긴 무명으로 만든, 푸른색 바지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1. ‘님’에서 만든 데님

제노바 선원

16세기 제노바의 코르듀로이 목화는 품질이 좋기로 유명했는데요. 이를 본 프랑스의 님스 지방에서도 좋은 품질의 직물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죠. 그 노력의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님스 지역의 능직이라는 뜻의 세르제 드 님(Serge de Nimes)입니다. 세르제 드 님이 드 님(de Nimes)으로 불리며 오늘날까지 데님이라는 명칭으로 이어진 것이죠.

이 데님은 내구성이 매우 강해 제노바 해군들이 입었는데요. 이것이 Jeans의 어원이라는 설이 있어요. 제노바를 뜻하는 프랑스어 단어가 Génes이기 때문입니다. 이후 데님은 서부개척 시절 마차의 천으로 이용되었고, 미국과 영국의 전쟁에서도 전략물자를 실어 나르는 데 요긴하게 사용되었습니다.

 

2. 데님 바지와 청바지는 다르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데님 바지는 오래 전부터 있어왔는데요. 하지만 우리는 리바이스(Levi’s)의 청바지를 최초의 청바지로 알고 있죠. 이전의 데님 바지와 청바지의 차이는 리벳이라는 구리 단추와 대량생산에 있습니다. 데님 바지에서 주머니 모서리와 단추 플라이의 밑부분 등에 금속 리벳을 설치한 것이 리바이스의 청바지로, 이로 인해 내구성이 더 향상되었죠.

이 아이디어는 제이콥 데이비스(Jacob Davis)라는 재단사에 의해 발명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발명품을 사업화하기 위해 당시 샌프란시스코에서 도매상점을 운영하고 있던 Levi와 손을 잡기로 하고 1873년 특허도 함께 등록합니다.

 

3. 도대체 왜 있나 궁금했던 청바지의 작은 주머니

지금 생산되는 청바지의 공통적인 특징으로는 오른쪽 앞주머니 안의 작은 주머니와 두 개의 뒷주머니를 들 수 있습니다. 원래는 앞주머니 두 개와 오른쪽 뒷주머니만 있었어요.

1870년대 후반 오른쪽 앞주머니에 회중시계를 넣을 수 있는 작은 주머니가 생겼고, 1901년부터 왼쪽 뒷주머니가 추가되었습니다. 또한 리바이스 청바지의 상징인 리벳이 현재는 뒷주머니에서 빠져 있는데요. 이는 1960년대에 리바이스가 안장, 가구 등에 흠집이 난다는 소비자의 불만을 받아들인 결과죠.

 

4. 최초의 XX바지

리바이스 상표

1873년 특허를 내고 탄생한 청바지는 XX라는 이름으로 출시되었는데요. 이 XX라는 명칭은 1890년 501이라는 명칭으로 바뀝니다. 이 리바이스의 501라인은 아직도 출시되고 있죠.

1886년에는 이 바지에 상표가 붙습니다. 말 두 마리가 청바지를 반대 방향으로 당기고 있는 모습인데요. 지금까지 쓰이는 상표로 리바이스 청바지의 내구성을 상징하죠. 1936년에는 다른 청바지와 구분할 수 있도록 레드 탭(Red Tab)을 부착하기 시작했고, 이는 리바이스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5. 반항의 상징, 청바지

<위험한 질주>의 한 장면

청바지는 여러 편의 영화에 등장하며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1952년 <밤의 충돌>의 마릴린 먼로, 1953년 <위험한 질주>의 말론 브란도, 1955년 <이유 없는 반항>의 제임스 딘이 입으면서 반항의 상징으로 떠오른 것이죠. 이 때문에 미국 동부를 중심으로 한 일부 주에서는 교실에서 데님 착용을 금지하기도 했습니다.

청바지는 록 음악의 역사와도 함께 하는데요. 엘비스 프레슬리가 청바지를 입고 나와 자유의 상징이 되기도 했어요. 심지어는 Elvis의 이름이 글자 순서만 바꾸면 Levis가 된다는 점이 화제가 되기도 했죠.

저항의 이미지는 1970년대에도 이어져 히피, 사이키델릭 록, 반전 시위 등을 상징하는 의복이 되었습니다. 펑크 록의 유행으로 디스트로이드 진, 흔히 말하는 ‘찢청’이 등장하기도 했죠.

 

6. 청바지가 파란색인 이유?

인디고 블루 염료

대부분의 청바지가 파란색인 이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골드러쉬 시절 광산에 뱀이 많았는데 당시 파란색 염료에는 뱀이 기피하는 성분이 있기 때문에 사용했다는 설이 있죠, 두 번째로 원래 리바이스에서는 덕 팬츠(duck pants)와 파란 색의 데님 바지를 출시했었는데요. 파란 색의 데님 바지의 경우, 인디고 블루 염료의 성분 때문에 세탁할수록 부드러워진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더 선호되었고, 이윽고 파란색만 출시하게 되었다는 설이 있죠.

원문: 사소한 것들의 역사


참고문헌

※ 리바이스의 시초에 대해서는 여러 참고문헌이 있었지만, 각자 내용이 달라 리바이스 공식 홈페이지의 내용만을 중점적으로 다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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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코인 VS 튤립 버블 논쟁 https://ppss.kr/archives/269141 Mon, 12 May 2025 09:02:16 +0000 https://ppss.kr/?p=269141 비트코인은 등장과 동시에 ‘현대판 튤립 버블’이라는 낙인을 피할 수 없었다. 17세기 네덜란드를 뒤흔든 튤립 투기 열풍처럼, 비트코인 역시 급등과 폭락을 반복하며 ‘광기 어린 자산’이라는 비유의 중심에 섰다. 지금 다시 묻고 싶다.

과연 이 비교는 정당한가? 튤립과 블록체인은 같은 궤적 위에 놓여 있는가?

이 질문을 출발점으로 비트코인과 튤립 버블의 유사성과 차이를 짚고, 그 이면에 감춰진 경제적 열광, 기술적 전환, 그리고 자산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심층적으로 분석해 보기로 한다.

출처: CNBC

 

튤립 버블, 최초의 자본주의 광기

17세기 초,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중 하나였다. 해상 무역의 중심지였던 암스테르담은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 1602년 설립)를 기반으로 초기 자본주의 금융 시스템을 꽃피우고 있었다. 공영 증권거래소, 국제 신용 시스템, 보험 산업까지 발달한 이 도시는 사상 초유의 유동성 시대를 열었다. 그 결과, 상인과 기술자, 항해사, 법률가 등 신흥 중산층과 상류 계층은 잉여 자본을 새로운 투자처에 쏟아부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바로 그때 오스만 제국을 거쳐 들어온 이국적인 식물, 튤립이 등장했다. 초기에는 단순한 관상용 식물에 불과했지만 일부 품종은 ‘튤립 브레이킹 바이러스(Tulip breaking virus)’라 불리는 바이러스 감염으로 인해, 꽃잎에 마치 수채화처럼 번지는 줄무늬가 생겼다.

사진: UnsplashGiu Vicente

정상적인 튤립은 단색으로 피어나지만, 이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색이 깨지듯(break) 흩어진 듯한 모양이 나타나며, 꽃잎은 마치 그림처럼 예측 불가능한 패턴을 띠게 된다. 당시 사람들은 이 현상이 질병 때문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오히려 그것을 자연이 허락한 신비로운 예술로 여겼고, 이 불완전하고 비대칭적인 패턴을 ‘희귀성의 극치’, ‘자연이 허락한 유일무이한 무늬’로 인식했다.

즉, 튤립 브레이킹 바이러스(Tulip Breaking Virus)에 감염된 일부 품종이 세밀한 줄무늬와 얼룩이 있는 꽃잎(세멸색)을 만들어내며 엄청난 희귀성과 예술적 가치를 지닌 수집품으로 변모한 것이다.

무엇보다 이 바이러스로 인해 만들어진 튤립은 재현이 불가능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희귀 품종은 예측 불가능성과 유일성이라는 요소를 더해 가격을 폭발적으로 끌어올렸다. 가장 유명한 품종 중 하나인 ‘영원한 황제(semper augustus)’는 1636년 말 한 뿌리가 5,500 플로린에 거래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 암스테르담 운하변 고급 주택 한 채의 평균 가격이 약 3,000 플로린이었음을 감안하면, 이는 단 한 송이 꽃이 도시 부동산보다 비쌌던 시대가 실제로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당시 영원한 황제(semper augustus)를 그린 그림. 화가는 알 수 없으며 1640년 이전에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미국의 노턴 사이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튤립의 신화, 하루아침에 무너지다

그러나 1637년 2월, 네덜란드 하를럼(Haarlem) 지역의 한 경매장에서 단 한 건의 거래가 유찰되며 분위기는 돌변했다.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수천 플로린에 거래되던 튤립 뿌리는, 그날 이후 단 한 명의 구매자도 나타나지 않는 ‘시장 실종’ 상태에 빠졌다.

이 한 건의 유찰은 ‘튤립이 더 이상 오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신의 신호탄을 낳았다. 불신은 곧 공포와 투매로 번졌다. 계약은 줄줄이 파기되었고, 한순간에 가격은 90% 이상 폭락했다. 가장 비싼 품종은 단 며칠 만에 가축 몇 마리 가격으로 전락했으며, 시장에는 공황 상태에 가까운 침묵이 이어졌다. 투기의 광기와 신뢰의 붕괴가 맞물린 그 순간, 세계는 역사상 최초로 기록된 대규모 자산 버블 붕괴를 목격했다.

이 사건은 훗날 경제학자들과 역사학자들에 의해 ‘튤립 마니아(Tulip Mania)’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 자산 거품과 투기 심리를 설명하는 고전적 사례의 원형으로 남게 되었다.

 

디지털 시대, 비트코인 등장

세기가 바뀌고 370여 년이 흐른 2009년, 전혀 다른 형태의 자산이 등장했다.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으며, 정부도 발행하지 않는 비트코인(Bitcoin)이 그것이다.

처음에는 ‘코인’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기술적 실험에 가까웠다. 발행자는 사토시 나카모토라는 정체불명의 인물 혹은 집단. 그는 중앙은행도, 국가도, 기업도 아닌 암호학과 분산 시스템을 바탕으로 작동하는 탈중앙 디지털 화폐를 제안했다. 비트코인의 모든 거래는 ‘블록체인(Blockchain)’이라 불리는 공개 분산 장부에 기록되고, 누구도 이를 위조하거나 되돌릴 수 없도록 설계됐다. 이는 역사상 처음으로, 제3자 없이도 신뢰를 자동으로 형성하는 화폐 시스템이었다.

사진: UnsplashAndré François McKenzie

출시 초기, 비트코인은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했다. 1BTC의 가격은 고작 0.003달러였다. 심지어 2010년에 1만 비트코인으로 피자 두 판을 주문한 ‘비트코인 피자 데이’가 상징처럼 회자될 만큼, 실용성과 생존 가능성조차 의심받는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상황은 달라졌다. 사이버 리버테리언, 해커 집단, 기술 공동체, 금융 엣지 투자자들이 비트코인의 구조적 속성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 발행량이 제한된 희소성
  •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검열 저항성
  • 국가의 경계를 초월한 탈중앙·탈국가성

이들은 비트코인을 중앙 통제를 벗어난 새로운 금융 질서의 가능성으로 보기 시작했다. 특히 2020년 이후 팬데믹이 세계를 덮치고 각국 중앙은행이 제로금리 정책과 대규모 양적완화(QE)로 대응하면서, 시장에는 초과 유동성이 넘쳐났다. 투자자들은 인플레이션을 피할 수 있는 대체 자산을 찾았고, 그 답 중 하나가 비트코인이었다.

2021년, 비트코인은 마침내 6만 달러를 돌파하며 역사적 정점을 찍었다. 불과 10여 년 만에 2천만 배의 가치 상승을 기록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자산의 부상이 아니라, 신뢰와 화폐에 대한 인식 자체의 전환이었다.

하지만 비트코인의 궤적은 언제나 급등과 급락이 교차했다. 누군가는 그것을 ‘디지털 도박판’이라 불렀고, 또 다른 누군가는 ‘21세기의 디지털 금’이라 찬양했다.

  • 극단적인 변동성
  • 창시자의 익명성
  • 규제 회피적 글로벌 구조
  • 불확실한 내재 가치

이 모든 요소는 비트코인을 튤립 버블과 나란히 놓는 비교 논리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튤립’과 ‘코인’은 다르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 거래되던 튤립 한 뿌리는, 아름답고 희귀한 물리적 실체를 지닌 자산이었다. 그러나 그 사용 가치는 감상과 과시에 국한된 소비재에 불과했다. 일부 품종은 희귀한 색조와 무늬, ‘튤립 브레이킹 바이러스’에 의해 만들어진 예측 불가능한 무늬 덕분에 엄청난 가격에 거래되었지만, 결국 그것은 시간이 흐르면 자연 증식이 가능한 식물이었다. 즉, 물리적 희소성은 유지되기 어려웠고, 자산으로서의 내재 가치는 시장의 열망에만 의존했다.

튤립은 식탁 위의 빵처럼 인간을 먹여 살릴 수도 없고, 건축 자재처럼 어떤 구조를 세울 수도 없었다. 그 가격은 결국 ‘이 뿌리를 더 비싸게 사줄 다음 사람이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에 기반한 것이었고, 그 믿음이 무너진 순간, 튤립은 꽃이 아니라 경제적 망상이 되었다.

반면, 비트코인은 실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실체를 능가하는 기술적·경제적 구조를 내포하고 있다. 그 핵심은 블록체인 기술, 즉 모든 거래를 투명하게 기록하고 검증하는 분산원장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은 중앙의 통제 없이도 신뢰를 구축하며, 누구도 임의로 조작하거나 변조할 수 없다. 신뢰를 코드로 구현한 기술, 그것이 비트코인의 본질이다.

또한 비트코인은 총 발행량이 2,100만 개로 고정되어 있다. 이는 금보다도 더 엄격한 희소성을 의미하며, 중앙은행이 찍어내는 화폐처럼 인위적 공급 확대나 인플레이션으로부터 자유로운 구조를 가진다.

비트코인은 단지 보관하거나 사고파는 자산이 아니다. 누구나 제3자의 개입 없이 개인 간 직접(P2P) 거래를 수행할 수 있으며, 국경을 초월한 송금에서도 빠르고 저렴한 수수료를 제공한다. 더 나아가, 이더리움과 같은 스마트 계약 플랫폼과 결합되면, 탈중앙 금융(DeFi) 생태계 및 토큰화 자산 시스템으로 확장될 수 있는 잠재력도 지닌다.

이처럼 비트코인은 단순한 가격 등락을 넘어, 디지털 화폐, 가치 저장 수단, 그리고 차세대 금융 인프라로서의 기능을 복합적으로 수행하는 자산이다. 그 존재는 물리적 실체 없이도, 프로토콜과 수학적 신뢰, 그리고 네트워크 효과 위에 구축된 새로운 디지털 질서다. 그것이 튤립과 본질적으로 다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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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거품의 배경에는 ‘돈’이 있다

튤립 버블이 발생한 17세기 초반,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진보적인 국가였다.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인 동인도회사(VOC)를 중심으로 한 무역 제국은 막대한 부를 본국으로 끌어들였고, 암스테르담은 근대 금융의 실험장으로 떠올랐다.

공영 증권거래소, 이중 회계장부, 국제 신용거래. 당시로선 파격적인 제도들이 도입되며 자본주의의 기초 구조가 형성되었다. 그 결과, 상인·기술자·법률가로 구성된 신흥 시민계급에는 생존을 넘어선 ‘자산 증식’이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가진 돈이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는 점이었다. 오늘날처럼 다양하게 분화된 금융상품이 존재하지 않았던 그 시대에, 그들이 선택한 자산은 뜻밖에도 튤립의 한 뿌리였다. 특히 희귀한 무늬와 색조를 지닌 튤립은, 단지 식물이 아니라 사회적 계급을 과시하는 수단, 수집 가능한 예술품, 그리고 결국엔 가격 상승을 기대하는 투기 대상으로 변모했다. 투기는 본능이 아니라, 방향을 잃은 자본의 필연적 선택이었다.

그로부터 약 400년 후, 비슷한 흐름이 또 한 번 반복됐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전 세계 중앙은행들은 경기 부양을 위해 제로금리 정책과 양적완화(QE)를 단행했고, 특히 2020년 팬데믹의 충격 이후에는 미국 연준(Fed)을 중심으로 역사상 유례없는 수준의 초저금리·초과 유동성이 공급되었다.

 

시장, ‘돈의 홍수’에 잠기다

주식, 부동산, 미술품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자산 가격이 동반 상승했고, 투자자들은 점차 금, NFT, 비트코인 같은 대체 자산(Alternative Assets)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빠르게 수익률을 증명해 낸 것이 바로 비트코인이었다.

희소성과 탈중앙성, 그리고 기술적 서사를 무기로, 비트코인은 ‘디지털 금’이라는 내러티브를 형성했다. 특히 전통 자산을 불신하거나, 중앙 통제에 대한 회의감을 가진 젊은 세대와 기술 기반 투자자들에게는 비트코인이야말로 미래형 자산이자 새로운 질서의 상징처럼 보였다. 결국, 튤립이든 비트코인이든, 그 시작점은 다르지만 불을 붙인 건 같은 연료였다.

쌓인 돈은 방향을 찾고, 방향을 잃은 돈은 거품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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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 저장’과 ‘투기’ 사이

비트코인은 어느 순간부터 ‘디지털 금(Digital Gold)’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이는 단순한 은유나 마케팅 용어가 아니다. 금처럼 희소하고, 채굴이 가능하며, 중앙 기관 없이도 신뢰를 유지하는 자산이라는 점에서, 일부 투자자들은 비트코인을 21세기형 가치 저장 수단(Store of Value)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동시에, 비트코인을 ‘투기성 자산(Speculative Asset)’으로 보는 시각도 뿌리 깊다. 극심한 가격 변동성, 실질적 사용처의 불확실성, 그리고 무엇보다, “더 비싸게 사줄 누군가가 있다는 전제”에 기반한 거래 구조가 문제로 지적된다. 이러한 특성은 17세기 튤립 시장과 닮아 있다는 비판을 가능하게 한다.

비트코인은 금과 달리 물리적 실체는 없지만 실체를 대신하는 ‘코드 기반 신뢰’를 제공한다. 모든 거래는 블록체인이라는 분산원장에 영구적으로 기록되며, 누구도 이를 위조하거나 삭제할 수 없다. 이러한 구조는 비트코인을 단순한 자산을 넘어, 거래 인프라로 기능할 수 있는 기술적 기반으로 확장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결되지 않은 핵심 문제가 있다. 바로 극단적인 가격 변동성이다.

2021년, 비트코인은 6만 달러를 돌파했지만 불과 몇 달 사이 3만 달러 아래로 급락했고, 다시 상승하며 반복적인 롤러코스터 장세를 보였다. 이러한 흐름은 전통적인 가치 저장 수단이 갖추어야 할 안정성을 위협한다. 그래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비트코인은 ‘디지털 시대의 도박판’, 혹은 ‘기대와 공포 사이에 놓인 실험적 자산’으로 인식되고 있다.

 

시각의 충돌 : 신뢰할 것인가, 회의할 것인가

비트코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극명하게 엇갈린다.

그것은 금융의 미래인가, 아니면 잘 포장된 망상인가? 새로운 질서의 실험장인가, 혹은 공포 위에 세워진 투기판인가?

먼저, 알레한드로 레예스(Alejandro Reyes)의 말을 들어보자. 버클리대학교 경제사 교수이자 금융 투기 버블 연구의 권위자인 그는, 튤립 버블과 비트코인을 자주 비교 대상으로 삼아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튤립은 일시적인 문화적 열광이었다면, 비트코인은 기술 기반의 시스템 전환이다.

즉, 두 자산은 가격의 등락은 닮았을지언정 태어난 맥락, 확장성, 구조적 기능 면에서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튤립은 단지 비싸졌을 뿐이지만, 비트코인은 금융 질서 자체를 실험한다.

IMF(국제통화기금)도 비슷한 시각을 보였다. 2021년 글로벌 금융안정성 보고서에서 IMF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내재 가치에 대한 논쟁은 지속되지만, 블록체인 기반 디지털 자산은 국경을 초월한 금융 인프라로 기능할 수 있는 구조적 기반을 갖추고 있다.

이는 비트코인이 단순한 투기 대상이 아니라, 국제 금융의 기술적 대안 인프라로서 일정 수준의 가능성을 인정한 평가로 해석된다. 그러나 반대편에는 여전히 단호한 회의론자들도 존재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폴 크루그먼(Paul Krugman)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이자 《뉴욕타임즈》 칼럼니스트로 잘 알려진 그는, 비트코인을 ’21세기의 투기 도구’로 규정하며 강하게 비판했다.

비트코인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으며, 본질적으로 공포 기반의 투기 구조를 갖추고 있다. 가격은 믿음으로 유지되지만, 믿음은 급격히 무너질 수 있다.”

그는 화폐가치의 근간은 결국 신뢰를 바탕으로 한 법정화폐 시스템과 정부 보증에 있다고 본다. 그 어떤 기술적 구조도 이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비트코인은 금융 한쪽에서는 금융 질서의 진화, 다른 한쪽에서는 디지털 시대의 망상으로 해석되고 있다. 금융 역사학자, 국제기구, 노벨상 수상 경제학자까지 각기 다른 위치에서 다른 언어로 이 자산을 해석하고 있지만, 그 갈라진 평가의 폭은 오히려 한 가지 사실을 말해준다.

비트코인은 아직 정의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정의되지 않은 상태 자체가 이 자산의 가능성과 동시에, 가장 큰 위험이기도 하다.

 

비트코인은 과연 ‘디지털 금’이 될 것인가

비트코인을 둘러싼 가장 상징적인 수사는 단연 ‘디지털 금(Digital Gold)’이라는 개념이다. 이 말은 단순한 마케팅 용어가 아니라, 자산으로서의 비트코인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프레임을 반영한다.

Image by mamewmy on Freepik

금(Gold)은 수천 년 동안 인류 문명과 함께해온 궁극의 가치 저장 수단(Store of Value)이었다. 그 가치는 희소성, 물리적 내구성, 대체 불가능성, 그리고 어느 국가도 통제하지 못하는 보편성에 기반했다. 이러한 속성은 인플레이션과 금융 위기 속에서도 금이 법정화폐의 대안으로서 생존해 온 핵심 이유였다. 그렇다면 비트코인은 금과 같은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가?

  • 희소성: 총발행량이 2,100만 개로 고정되어 있어, 공급이 구조적으로 제한된다.
  • 탈중앙성: 정부·은행·기업의 통제를 받지 않는 독립적 시스템이다.
  • 위·변조 불가능성: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모든 거래가 영구적으로 기록되고 검증된다.
  • 검열 저항성: 누구도 사용자의 송금이나 보유를 막을 수 없는 구조다.

이러한 특성은 분명 금과 유사하며, 일부에서는 오히려 금보다 더 정교한 희소성과 신뢰 메커니즘을 갖췄다는 평가도 나온다. 실제로 글로벌 자산운용사와 기술기업들은 비트코인을 자산 포트폴리오에 포함시키기 시작했고, 2024년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비트코인 현물 ETF를 승인한 사건은, 그 흐름이 제도권으로 진입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계기였다.

그러나 ‘디지털 금’이라는 수식어가 붙기에는 여전히 넘어야 할 현실적 장벽도 많다.

  • 극단적인 가격 변동성: 금은 안정적인 가치 보존 수단이지만, 비트코인은 연 단위로 수십 퍼센트 이상 요동친다. 이는 가치 저장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를 위협한다.
  • 채굴 의존성과 에너지 소모: 비트코인 채굴은 막대한 전력을 요구하며, 탄소중립 시대의 흐름에 역행한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 정책 및 규제 리스크: 각국 정부의 입장은 엇갈리고 있으며, 때로는 강력한 제재 조치가 내려지기도 한다. 이는 ‘금처럼 안전한 피난처’라는 서사를 흔드는 요소다.
  • 기술적 불확실성: 블록체인 기술은 아직 진화 중이며, 후속 기술에 의해 대체되거나 보완될 가능성이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트코인이 ‘금’과는 전혀 다른, 디지털 시대의 신형 자산이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비트코인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거래 구조, 신뢰 방식, 금융 주권에 대한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비트코인은 아직 ‘금’은 아니다. 하지만 금이 결코 가질 수 없는 ‘시대성’을 품고 있다.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에게 비트코인은 자산이자 언어이며, 자기결정권의 상징이고, 검열되지 않는 화폐이며, 기술 기반 신뢰가 구현된 자유의 도구다.

바로 이 지점에서, 비트코인은 단순한 ‘디지털 금’을 넘어, 금이 되지 못한 것들이 꿈꿔왔던 미래의 화폐가 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

 

반복되는 역사인가, 새로운 질서의 서막인가

비트코인과 튤립 버블의 비교는 단순한 흥미를 넘어, 시장의 심리와 자산의 본질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두 가지 모두 희소성과 열광, 그리고 급격한 가격 상승이라는 공통점을 지니지만, 그 뿌리는 전혀 다르다.

튤립은 일시적인 수요와 신기함에 기반한 감각적 투기 대상이었다면, 비트코인은 기술적 설계와 경제적 구조, 그리고 사회적 요구가 맞물린 복합적 금융 실험체다. 그것은 단순한 자산이 아니라 거래를 기록하는 방식, 신뢰를 분산시키는 메커니즘,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금융 구조라는 점에서 새로운 시스템의 전초기지라 할 수 있다.

물론, 비트코인은 아직 ‘완성된 금’이 아니다. 그 가치는 여전히 극심한 변동성, 정책과 규제의 불확실성, 기술 진화의 불안정성 속에 놓여 있다. 그 미래에는 장밋빛 낙관과 종말론적 경고가 동시에 존재한다.

그러나 단 하나, 분명한 사실은 있다. 비트코인은 우리 시대의 거울이라는 것이다. 그 안에는 신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화폐란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는 성찰, 권력은 기술로 재구성될 수 있느냐는 질문이 담겨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묻는다.

비트코인은 진짜 금이 될 수 있을까? 아니면 그조차도, 지나가는 한 송이 튤립에 불과할까?

그 답은 기술이 아니라, 시장에, 그리고 우리 각자의 믿음에 달려 있다.

원문: 광화문덕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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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 기업으로, 기업에서 가정으로 이동해 온 컴퓨터의 역사 https://ppss.kr/archives/266638 Fri, 09 May 2025 08:18:07 +0000 http://3.36.87.144/?p=266638 ※ 한국기계산업진흥회에서 발행하는 KOAMI Insight 매거진에 기고한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1. 파스칼의 계산기

파스칼의 계산기

컴퓨터가 나오기 전에 계산은 계산자나 미리 계산을 해둔 계산표를 가지고 하는 것이 보편적이었습니다. 이러한 기구를 이용해서 ‘계산하는 사람’을 컴퓨터라고 불렀죠. 하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다 보니 오류가 있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계산하는 기계, 계산기 발명 시도가 있었습니다.

라이프니츠의 계산기

기계식 계산기가 처음 등장한 것은 1623년 빌헬름 시카르트(Wilhelm Schickard)에 의해서였습니다. 6자리 숫자의 덧셈과 뺄셈을 수행할 수 있는 기계였죠.

이후 1642년에는 파스칼에 의해 기계식 계산기가 개발되었고, 1671년 라이프니츠에 의해 곱셈, 나눗셈까지 가능한 사칙연산 계산기가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단순 계산기가 아닌 본격적인 현대 컴퓨터의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한 것은 찰스 배비지(Charles Babbage)였죠.

차분기관의 일부

1821년 찰스 배비지는 천문학자 존 허셜(John Herschel)과 함께 수치 계산표를 검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계산표에서 오류를 발견했고, 계속해서 오류가 나타나자 화가 난 배비지는 본인이 직접 증기기관을 이용한 계산 기계를 만들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배비지는 영국 정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아 증기기관으로 작동하는 계산기를 만들기 시작해 1832년 샘플에 해당하는 모델을 만들었습니다. 배비지는 자동으로 계산하기 위해 곱셈을 덧셈으로 바꿔서 복잡한 계산을 단순하게 만들어주는 계산 방식인 차분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이 기계를 차분기관이라고 불렀죠. 하지만 끝내 만들어지지는 못했습니다. 1834년까지 차분기관 제작에 진척이 없어 정부 지원금이 끊겼거든요.

하지만 배비지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해 명령어를 입력해 다양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기계의 아이디어를 떠올렸죠. 이 기계는 해석기관이라고 불렸으나, 역시 설계도만 있을 뿐 실제로 제작되지는 않았습니다. 이 해석기관을 이해한 에이다 러브레이스(Ada Lovelace)는 만들어지지도 않은 해석기관을 이용해 베르누이 수를 구하는 알고리즘을 작성했는데, 이것이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램이 되었습니다.

참고로 완성되지 않은 찰스 배비지의 차분기관은 1991년 런던 과학박물관에서 배비지 탄생 200주년을 맞이해 완성합니다.

 

2. 직조기에서 시작된 IBM?

자카르의 천공카드를 이용한 베틀 ⓒthoughtco.com

18세기 중반, 태엽 달린 기계 장치들은 오르골처럼 실린더 위의 돌기나 구멍을 이용해 움직임을 반복했습니다. 이것을 산업 분야에서 처음 사용한 곳은 섬유산업이었죠.

1725년 바실레 부숑(Basile Bouchon)이 천공카드를 이용해 베틀을 제어하는 방법을 발명하고 1805년 조셉 마리 자카르(Joseph Marie Jacquard)가 산업적으로 완성하죠. 자카드의 베틀을 본 나폴레옹과 조세핀은 자카드 베틀에 대한 특허를 부여했고, 그 대가로 자카드는 3,000프랑의 연금과 6년가 베틀마다 로열티를 받았습니다.

허먼 홀러리스의 천공카드

19세기 후반 미국에서는 노예제가 폐지되면서 인구가 급속하게 늘었고, 세금을 거두기 위한 인구조사를 빠르게 해야 했죠. 허먼 홀러리스(Herman Hollerith)는 섬유 산업에 쓰이던 천공카드를 도입해 인구조사에서 얻은 결과를 한 사람당 한 장의 카드에 저장하는 방식을 개발했습니다.

홀러리스 천공카드 기계의 가장 큰 혁신은 전기의 사용이었습니다. 홀러리스의 기계는 천공카드에 구멍이 있으면 금속 바늘이 구멍을 통과해 수은에 닿아 전기신호를 전달하는 원리였습니다. 홀러리스는 TMC라는 회사를 설립해 천공카드 기계를 납품하면서 천공카드는 인구통계, 보험, 군수 관리 등에 쓰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TMC는 훗날 IBM이 되죠.

 

3. 전쟁이 만들어낸 컴퓨터

봄베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은 독일군의 암호화 장치 에니그마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영국의 비밀정보국은 에니그마 해독을 위해 과학자들을 모아 암호해독 전담팀을 만들었죠. 이때 차출되었던 앨런 튜링(Alan Mathison Turing)이 1939년 봄베 컴퓨터를 개발합니다. 봄베 컴퓨터 제작에 관한 영화가 바로 <이미테이션 게임>이죠.

1943년 콜로서스 mk2 의 모습

하지만 곧이어 에니그마의 상위 버전인 로렌츠 암호 전신기가 등장하며 봄베보다 더 성능이 좋은 암호해독기가 필요해졌습니다. 그렇게 개발하게 된 것이 콜로서스입니다.

콜로서스는 당시 최신 기술인 진공관을 사용했는데요. 진공관은 쉽게 망가지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장치를 끄지 않는 것이었죠. 장치를 끄지 않으면 진공관의 온도가 급격히 올라가거나 내려가 생기는 충격을 피할 수 있었거든요.

그리하여 1943년 1,500여 개의 진공관과 릴레이만으로 완성된 디지털 컴퓨터 콜로서스가 개발됩니다. 콜로서스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등에 중요한 역할을 해냈죠.

에니악의 일부 모습

1943년 영국이 콜로서스를 만들었을 때, 미국은 대공 미사일 시스템을 만들기 위한 컴퓨팅 장치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벨 연구소에서 담당했던 이 프로젝트에는 레이더와 같은 다른 장치로부터 직접 데이터를 받기 위해 전기회로를 사용한 컴퓨팅 기계를 개발하죠. 2년에 걸쳐 제작된 이 기계가 바로 에니악으로, 농구장만 한 크기를 자랑했습니다. 진공관은 총 17,468개가 사용되었는데 역시 전원을 끄지 않는 것으로 진공관 고장을 예방했습니다.

에니악이 하나의 문제를 풀고 난 다음 다른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복잡한 전선을 사람들이 일일이 다시 연결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문제를 푸는 데는 금방이었으나 전선을 연결하는 작업에는 며칠씩 걸렸죠.

이러한 에니악을 본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은 데이터뿐만 아니라 컴퓨터 프로그램도 코드로 만들어 컴퓨터에 입력해야 한다는 ‘내장형 프로그램 개념’을 떠올립니다. 이 프로그램 내장 방식은 오늘날 컴퓨터의 기원이 됩니다.

폰 노이만은 1945년 에니악 개발팀과 논의한 끝에 새로운 <에드박 보고서 1차 초안> 보고서를 제작하고, 이 방식을 바탕으로 1951년 에드삭이 개발됩니다.

 

4. 튜링의 만능기계

사실 컴퓨터에 대한 아이디어는 봄브와 콜로서스, 에니악이 등장하기 전부터 있었습니다. 1936년 앨런 튜링의 <계산 가능한 수에 관하여, 수리 명제 자동생성 문제에 응용>이라는 논문에 처음 등장했죠.

이 논문은 수학자 힐베르트(David Hilbert)의 생각이 틀렸음을 증명하기 위해 썼던 것이었는데요. 힐베르트의 생각은 지금까지 수학자들이 어떠한 문제를 증명하기 위해 해왔던 과정은 몇 개의 추론 규칙을 반복해서 적용하는 것이 전부이며, 이런 규칙들을 찾아서 자동으로 추론해 주는 기계를 만들면 수학자들이 더 이상 고생하지 않으리라는 것이었죠.

이에 앨런 튜링이 ‘만능기계’를 제시해 이 만능기계가 못 푸는 문제가 있음을 보임으로서 힐베르트가 틀렸음을 증명합니다. 이 만능기계의 원리가 폰 노이만의 프로그램 내장 방식의 유래가 됩니다.

앨런 튜링의 ACE ⓒAntoine Taveneaux

튜링은 세계대전 동안 암호해독기를 만드느라 범용 컴퓨터의 설계는 전쟁 이후에 시작했습니다. 이 컴퓨터는 자동 컴퓨팅 엔진(ACE, Automatic Computer Engine)이라고 불렸으며 1950년에 첫 시험 모델이 완성되었죠.

참고로 튜링의 에이스는 폰 노이만의 에드박과 아주 다른 방식의 기계였습니다. 에드박은 에드박의 논리 구조는 계산을 빠르게 만드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고, 에이스는 다양한 문제에 사용할 수 있게 논리 구조를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었죠.

 

5. 정부에서 기업으로

LEO의 모습 ⓒi-progrmmer.info

전쟁 이후에는 컴퓨터가 민간에 쓰이기 시작합니다. 1947년 당시 영국에서 큰 회사들 중 하나였던 라이언스(J. Lyons & Co. Ltd)는 관리부서 업무를 자동화하기 위해 컴퓨터 전문가들을 수소문했습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이 만든 컴퓨터를 사업용으로 쓰기에는 부적합하다고 판단한 라이언스는 직접 컴퓨터를 제작하기로 합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컴퓨터가 레오(LEO, Lyons Electronic Office)이죠. 레오는 기존 컴퓨터보다 기업에서 사용하기에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포드 같은 기업이나 기상청에서 채택했습니다. 미국에서는 1946년 존 모클리(John William Mauchly)와 존 에커트(John Presper Eckert Jr)가 컴퓨터 회사를 세워 유니박을 만듭니다. 유니박을 처음 구매한 곳은 미국 통계국이었죠.

이후 기업용 컴퓨터가 점차 많은 곳에서 쓰이게 되는데, 여기에는 트랜지스터가 등장한 영향이 컸습니다. 트랜지스터를 이용하면 진공관을 이용한 컴퓨터 기계보다 훨씬 작고, 전기도 조금 들고 저렴했기 때문에 기업들도 컴퓨터를 사는데 부담이 적어진 거죠.

트렌지스터는 1947년 벨 연구소의 윌리엄 쇼틀리(William Bradford Shockley)와 그의 연구소 동료였던 존 바딘(John Bardeen), 월터 브래튼(Walter Brattain)과 함께 개발한 것이었죠. 이후 쇼클리는 벨 연구소를 떠나 1955년 쇼클리 반도체 연구소를 설립합니다. 하지만 쇼클리의 연구소는 새로운 연구 결과물을 내지 못했고 자기 고집대로만 연구소를 운영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연구소를 떠났습니다.

1957년 쇼클리의 연구소를 떠난 8명의 연구원은 페어차일드 반도체라는 새로운 회사를 설립해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곳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또다시 여러 회사를 만들었습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회사가 바로 인텔이죠.

IBM 360 ⓒNBC NEWS

IBM는 컴퓨터의 표준을 만들어 컴퓨터가 널리 쓰이는 데 기여했습니다. 기존 컴퓨터는 각 컴퓨터를 위해 특별히 개발된 소프트웨어만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한 회사에서 만든 컴퓨터끼리도 소프트웨어를 공유할 수 없었죠.

1964년, IBM에서는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50억 달러라는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입해 모든 소프트웨어가 잘 동작하는 System/360을 개발합니다. System/360으로 IBM의 컴퓨팅 분야 매출은 2배가 증가했고, 이를 통해 여러 업체가 만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컴퓨터 종류에 상관없이 작동하는 개방형 표준이 만들어집니다.

 

6. 기업에서 가정으로

알테어 8800의 잡지 광고

세계 최초의 가정용 컴퓨터는 1974년에 등장한 알테어 8800Altair 8800로 1년 만에 5,000여 대가 넘게 팔렸죠. 알테어 8800은 오늘날로 치면 본체만 있는 셈으로 확장 장치를 이용하던가, 전면 패널의 토글스위치와 LED만을 이용해 컴퓨터를 사용해야 했는데, 스위치를 이용해 기계어 명령어를 메모리에 주입하고 프로그램을 실행 후 결과를 LED로 표시하는 식이었죠. 즉 컴퓨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만 사용할 수 있는 기계였습니다.

이처럼 한계가 많은 제품이었지만 컴퓨터의 역사에는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빌 게이츠(Bill Gates)와 폴 앨런(Paul Gardner Allen)은 알테어 8800을 보고 이를 위한 프로그램인 알테어 BASIC을 납품하며 마이크로 소프트를 설립했고, 스티브 잡스(Steven Paul Jobs)와 스티브 워즈니악(Steve Gary Woz Wozniak)은 더 나은 PC를 만들겠다며 애플을 창립하죠.

Figure.13 SAGE 콘솔을 사용하는 모습 ⓒcomputerhistory.org

일반 사람들이 컴퓨터를 많이 쓰이게 된 계기는 사용하기 편리한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GUI)가 등장한 이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최초의 GUI는 1958년 북미항공우주방위사령부에서 사용했던 SAGE(Semi-Automatic Ground Environment)라는 방공망 관제용의 전산 시스템의 제어 콘솔이었습니다. SAGE 제어 콘솔에는 레이더 스크린이 있었는데, 라이트펜으로 화면을 찍으면 아군기인지 적기인지 알려주는 기능이 있었죠. 다만 군사 기밀이라 민간용으로 쓰이지는 않았습니다.

스티브 잡스와 매킨토시S 128k의 모습

1973년에는 GUI 운영체제를 탑재한 최초의 컴퓨터 제록스 알토가 등장합니다. 다만 제록스에서 상용화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어 연구소 내에서만 사용하고 있었는데요. 이를 본 애플은 제록스에 100만 달러어치의 애플 주식을 주고 기술 자료와 제품을 개발할 권리를 얻습니다.

그렇게 해서 애플이 내놓은 제품이 1983년 애플 리사 LISA, 1984년 매킨토시 128K이고, 매킨토시 128K의 성공으로 GUI가 대중화됩니다.

IBM PC ⓒIBM

매킨토시 128K의 성공으로 80년대 개인용 컴퓨터 시장은 애플이 점령했습니다. 그때까지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지 않은 IBM은 당시 연구원이었던 돈 에스트리지(Philip Donald Estridge)에게 1년 만에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라는 미션을 주었습니다.

돈 에스트리지는 가격을 낮추기 위해 IBM에서 모든 부품을 제작하는 것이 아닌, 다른 회사에서 만든 기성품을 가져다 썼습니다. 그리고 다른 회사에서 주변 기기나 호환 기종을 만들 수 있도록 아키텍처를 개방하는 정책을 결정하죠. 그러니까 오늘날 조립PC의 시초인 셈이었죠.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IBM PC 5150은 사무용 컴퓨터로 큰 인기를 얻으며 성공합니다. IBM PC 5150의 성공으로 PC는 IBM의 모델명에서 개인용 컴퓨터를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죠.

IBM PC 5150의 아키텍처 개방 정책은 컴퓨터 업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부품과 소프트웨어를 제조하는 회사가 많이 늘어나 컴퓨터 산업 전체가 커지는 계기가 됩니다. 특히 인텔과 마이크로소프가 가장 큰 혜택을 얻었죠. 그리고 현재까지 MS OS의 IBM PC 호환 기종과 Mac OS의 매킨토시로 시장이 양분되어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원문: 사소한 것들의 역사


참고

  • 더밋 튜링. (2019). 계산기는 어떻게 인공지능이 되었는가. 한빛미디어
  • 마틴 데이비스. (2023). 오늘날 우리는 컴퓨터라 부른다. 인사이트
  • 박민규. (2020).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은 IT의 역사. 빈빈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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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전 ‘피의 화요일’, 학생과 시민이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 https://ppss.kr/archives/268820 Wed, 23 Apr 2025 03:06:54 +0000 http://3.36.87.144/?p=268820 1960년 4월 19일, 4·19 혁명의 불길이 타오르다
혁명은 4월 18일, 고대생 피습사건을 계기로 ‘부정선거 규탄’에서 ‘독재 타도’로 바뀌고 있었다.

1960년 4월 19일은 화요일이었다. 전날, 평화적 시위를 마치고 귀가하던 고려대학생들이 경찰과 공모한 정치깡패들의 무차별 테러로 다친 뒤라 분위기는 잔뜩 격앙되어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하나둘 국회의사당에 모인 학생들은 선언문을 낭독하고 거리로 나섰고 이내 경무대 방향으로 행진하기 시작했다.

 

‘피의 화요일’ 사망 186명, 부상 6026명

애당초 ‘부정선거규탄’과 ‘학원의 자유’를 외쳤던 학생들의 평화적 시위는 경찰의 폭력 진압 앞에서 질적 변화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날의 구호는 ‘3·15부정선거 다시 하라’, ‘1인 독재 물러가라’, ‘이승만은 하야하라’ 등 독재정권 퇴진과 민주주의 수호를 요구하는 혁명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전우와 애국가를 부르며 달려가는 젊은 학생들의 대열에 하나둘 시민들도 합류했고, 서울 시내는 온통 민주 수호와 독재 타도를 외치는 10만 명이 넘는 시위대열로 뒤덮였다. 경무대로 나아가려는 학생들과 이를 저지하려는 경찰의 공방은 점차 치열해지기 시작했다.

최루탄과 공포탄으로 시위대를 막던 경찰의 1차 저지선은 잔뜩 고양된 학생과 시민들 앞에서 이내 무너졌고, 시위대는 경찰의 최후 저지선인 경무대를 향해 달려갔다. 소방차를 앞세운 시위대와 경찰의 간격이 10여 m로 좁혀졌을 때, 실탄을 장전한 경찰의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경무대에서의 발포를 비롯하여 서울 시내 곳곳에서 경찰의 무차별 사격으로 숱한 학생과 시민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분노한 시민들은 반공청년단 본부와 왜곡 보도를 일삼은 신문사를 불태웠으며, 시위를 진압하려 출동한 소방차를 빼앗고 경찰서를 습격하는 등 시위를 한층 격렬하게 전개하기 시작했다.

혁명의 불길을 댕긴 실마리는 전날인 4월 18일, 청계천 4가에서 벌어진 테러였다. 국회의사당 앞에서 구속된 학생들의 석방과 학원 자유를 요구하며, 평화적 시위를 벌인 후 고려대생들이 귀갓길에서였다. 경찰의 비호 속에 반공청년단이라는 정치깡패들의 무차별 테러로 학생 수십 명이 다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계엄군이 출동했지만, 군은엄정 중립을 지키면서 치안 유지와 유혈사태 방지에 힘썼다. 시위대가 군의 탱크 위에 올라가 있다.
교수단 시위 이후에는 4.19 때 발포로 친구를 잃은 초등학교 학생도 시위에 참여했다.

학생들의 평화 시위마저 폭력으로 진압한 정권에 대한 국민의 분노는 마침내 임계점에 이르렀다. 이 고대생 피습 사건은 학생시위의 주역을 지방의 고교생으로부터 서울의 대학생으로, 시위목적도 ‘부정선거규탄’에서 ‘독재 타도’로 전환하게 한 변곡점이었다.

서울 시내가 완전히 무정부 상태에 빠지자 당황한 이승만 정부는 이날 오후 3시, 서울 일원에 이어 유혈사태가 벌어진 부산·대구·광주·대전에도 계엄령을 선포했다. 밤늦게까지 산발적으로 이어진 시위는 계엄군이 서울에 진주하면서 일단 가라앉았다. 계엄군은 중립을 선언하고 소극적으로 시위진압에 임하였고, 유혈사태 방지와 치안 유지, 혼란 수습 등에 치중하였다.

이날 하루 동안의 시위로 서울에서만 1백여 명, 부산에서 19명, 광주에서 8명 등 전국적으로 186명이 사망했고, 6026명이 부상했다. 이날을 ‘피의 화요일’이라 부르는 이유다.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학원의 자유를 요구하면서 시작된 학생시위는 마침내 그 비등점에서 폭발하고 만 것이었다.

 

혁명의 시발점, 2.28 대구 학생 시위

사월혁명은 2월 28일, 대구에서 시작된 고교생들의 부정선거규탄 시위가 시발점이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는데, 당국은 대구에서 개최될 민주당 선거 유세에 학생들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학생들을 등교시켰다. 공휴일에 학교에 불려 나온 학생들은 영화 관람과 토끼사냥 등에 동원되었다.

전날, 학교의 의도를 간파한 경북고·대구고·사대부고 학생 8명은 부당한 등교 지시에 항의하고자 시위를 조직하고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해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는 결의문도 작성했다. 28일 오후 1시 학생 800여 명이 반월당을 거쳐 경상북도청으로 행진하며 벌인 시위에 다른 학교 학생들이 합류하며 시위대는 1200여 명으로 늘어났고, 120여 명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시위가 번질 것을 우려한 경찰은 주동자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학생을 석방하였지만,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시위는 보름 뒤 정·부통령 선거일에 자행된 부정선거로 다시 불이 붙었다. 선거는 이승만(1875~1965)의 장기 집권과 유고 시 뒤를 이을 부통령 후보 이기붕(1896~1960)의 승리를 위해 추악하고 불법적인 부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상 유례없던 부정선거의 양상은 다음과 같다.

  • 3~5명씩 짝지어 기표하고 자유당원에게 검사받는 3인조, 5인조 공개 투표
  • 투표소 주변에 자유당 완장 부대를 동원해 민주당 지지자를 위협
  • 있지도 않은 사람을 유권자로 둔갑시켜 자유당에 투표하게 하는 유령 유권자 조작
  • 총 유권자의 40%에 달하는 자유당 표를 미리 투표함에 넣어두는 4할 사전투표

이처럼 투표는 부정과 폭력이 난무한 가운데 진행되었고,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대구에서 타오른 불길은 이은 곳은 마산이었다. 민주당 마산지부의 선거무효 선언과 함께 시작된 부정선거 규탄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하자, 이승만정권은 무차별 진압에 나섰다. 마산에서는 만여 명이 넘는 시위대에 경찰이 총격을 가하자 시민들은 돌을 던지며 맞섰다. 이날 경찰의 발포로 7명이 사망하고, 870명이 부상했다.

3·15 시위에 대한 국회 조사단은 경찰의 총격이 시위대 해산이 아닌 살상 목적으로 자행된 것을 밝혀냈지만, 대통령 이승만은 시위가 ‘공산당의 사주’로 벌어진 일인 양 주장하였다. 부통령 당선자 이기붕은 “쏘라고 준 것이지 가지고 놀라고 준 게 아니”라는 망언도 서슴지 않았다.

 

김주열의 희생과 교수단 시위 이후 이승만 하야

국회 조사 등으로 진정된 시위는 3·15 시위에 참여한 학생 김주열(1944~1960) 군의 주검이 마산 중앙부두 앞 바다에서 눈에 미제 최루탄이 박힌 채 떠오르면서 다시 불이 붙었다. 마산 시민은 물론, 전국에서 자유당의 만행을 규탄하는 시위가 이어졌다.

4월 19일의 시위와 항거는 2·28이래 이어져 온 일련의 저항을 매듭짓는 항거의 정점이었다. 혁명의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자, 자유당 정권은 사건 무마에 온 힘을 기울였지만, 민심은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독재정권의 종말을 결정짓는 시위는 4월 25일에 일어났다. 전국의 대학교수 대표들이 모여 시국 수습을 위한 선언문을 발표하고 시위에 나선 것이다. 이날 오후 3시,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인 27개 대학교수 258명은 ‘대통령을 위시한 여야 국회의원들과 대법관 등은 3·15부정선거와 4·19사태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동시에 재선거를 실시하라’고 하는 요지의 14개 항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이승만의 하와이 망명을 전하는 5월 29일 자 <경향신문>기사. 그는 5년 후 망명지에서 죽었다.

이어서 교수 4백여 명은 ‘4·19의거로 쓰러진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구호를 내걸고 평화적인 시위를 시작, 서울시가를 행진했다. 이 4·25 교수단 시위는 시민과 학생들의 절대적 지지를 불러일으켜 그날 밤부터 다시 시민·학생들의 궐기로 이어졌다.

4월 26일, 서울 시내엔 경계 태세가 삼엄했지만, 시위대의 규모도 엄청나게 불어났다. 교수단 시위 이후 국민의 요구는 이승만의 하야로 정리되었다. 4·19 때 경찰의 발포로 친구를 잃은 초등학교 학생도 어깨동무하고 시위에 참여했다.

경무대를 지키던 계엄군은 실탄을 장전하고 있었지만, 엄정중립의 입장을 지켜 더는 국민의 희생을 초래하지 않았다. 달리 사태를 수습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승만 대통령은 결국,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당일 오후 4시에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돌아간 이승만은 4월 28일, 이기붕 일가가 스스로 목숨을 끊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4.19가 ‘미완의 혁명’인 이유

이승만의 하야 후 허정 내각 수반이 과도정부를 이끌었고, 학생들은 파괴된 질서를 회복하는 데 힘썼다. 그리하여 1960년 8월, 의원내각제의 제2공화국 장면 내각이 새롭게 출범하였다. 그러나 제2공화국은 이듬해인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이 이끈 군부 쿠데타로 무너졌다. 4·19가 ‘미완의 혁명’이 된 이유다. 4·19는 쿠데타 이후 군사정권에서는 ‘의거(義擧)’로 불리다가 문민정부 때가 되어서야 ‘혁명’이라는 이름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당시 한국 상황이 “이승만정권의 권력 구조와 정치의식 계층, 특히 학생들의 가치관과의 사이에 크고 명백한 균열이 있었다”는 점에서 ‘혁명적인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시위 학생과 시위군중들은 “조직화 된 지도력”을 갖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또, 이러한 “명백한 지도력의 부재가 이승만의 조속한 사임을 가져오게 하”였지만, 이는 “이승만정권의 붕괴 후에 ‘혁명’을 완성시키지 못하는 중요한 원인”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4·19가 ‘미완의 혁명’이 될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원문: 이 풍진 세상에


두 번째 책 『독립운동가, 청춘의 초상』을 내면서

유관순 18살, 이재명 22살, 윤봉길 24살, 안중근 30살, 이봉창 34살. 독립운동의 빛나는 순간들 속에서 독립운동가들은 2030 청춘이었다.

100년 전에 찍은 한 장의 사진으로 남은 ‘청춘의 초상’이 들려주는 뜨겁고 강렬한 대한의 독립운동 이야기. 반백의 노구와 주름진 얼굴의 흑백사진 속에서 기억되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에게도 조국의 독립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찬 청춘의 시절이 있었다.

독립운동가들의 2030 시절의 한때를 포착한 단 한 장의 사진과 함께 읽는 색다른 근현대사 책. 100년 전 사진으로 되묻는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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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권이 없었다면 아이비리그도 없었다, 복권의 역사 https://ppss.kr/archives/266652 Wed, 09 Apr 2025 04:15:10 +0000 http://3.36.87.144/?p=266652

복권

번호나 그림 따위의 특정 표시를 기입한 표(票). 추첨 따위를 통하여 일치하는 표에 대해서 상금이나 상품을 준다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1. 진시황이 싼 똥, 복권으로 치운다

오늘날 키노, 글자 대신 숫자로 바뀌어 로또처럼 되었다

복권과 비슷한 유물이 고대 이집트 유적에서 발견되기도 했지만, 기록상 가장 오래된 복권은 기원전 1세기경 중국의 한나라에서 등장합니다. 이 복권은 키노(Keno)라고 불렀는데요. 키노는 120개 글자 중에서 10개를 맞추면 되는 형식으로 오늘날의 로또와 비슷했어요. 오히려 45개 숫자 중에서 6개를 맞추는 로또보다 훨씬 낮은 당첨 확률을 가지고 있었죠.

키노가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한나라의 탄생과 관련이 있습니다. 한나라는 진나라가 멸망하고 세워졌는데요. 새로운 나라를 세움으로서 체제와 영토를 정비해야 했고, 진나라 때 벌여놓은 만리장성 공사 등을 마무리 지어야 했기 때문에 많은 돈이 필요했죠. 하지만 전쟁 직후의 국가 재정으로는 무리였어요. 그래서 재정을 확보할 방법을 찾다가 고안해 낸 것이 복권이었죠. 이 키노는 한나라가 멸망하면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러다가 키노는 19세기 미국 대륙 횡단 철도 건설을 하던 중국 이민자들에 의해 부활했어요. 키노의 120개 한자는 80개의 숫자로 대체되었죠. 지금도 미국 카지노에서 차이니즈 로터리(Chinese Lottery)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어요.

 

2. 클래스가 다른 로마의 복권 경품

유럽에서는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5대 황제 네로가 복권을 발행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첫 황제로서 수도를 건설하기 위해서, 네로는 대화재로 불탄 로마를 재건하기 위해서 발행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요. 당시 아우구스투스의 복권은 음식 계산서 영수증을 추첨해 선물을 나눠주는 형태였고, 네로는 귀족과 부유층을 상대로 노예, 배 등의 경품을 걸었죠.

 

3. 복권으로 세운 아이비리그

베니스의 복권 추첨 ⓒHistory.com

16세기 초 제노바 공화국에서는 90명의 후보자 중에서 5명의 의원을 뽑았는데요. 이 방식을 차용해 90개의 숫자 중에서 5개 숫자를 추첨하는 복권이 만들어졌어요. 이것이 로또(Lotto)의 시초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렌체에서도 도시 정비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복권이 등장했는데요. 이 복권은 당첨자에게 현금을 주어서 현대식 복권의 시작으로 보기도 합니다.

16세기 후반부터는 유럽 각국에서 복권 제도가 국가사업에 이용되었는데요. 독일에서는 쾰른 대성당을 재건하기 위해 사용되었고, 현재도 유지비의 상당 부분을 복권 수익에서 충당하고 있죠. 영국에서는 미국 식민지 개발에 사용되었는데요. 하버드, 예일, 콜롬비아, 프린스턴 등의 아이비리그 대학들이 복권 수익금으로 세워졌죠. 미국의 경우 프렌치 인디언 전쟁과 독립 전쟁에서 복권을 이용해 군수 자금을 마련했어요.

 

4. 막아봐야 다시 활성화되는 복권

1800년대 중반부터 미국 내에서 복권에 관한 열기가 너무 뜨거워지자 1900년대 초부터 미국 내에서는 복권 발행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어요. 하지만 복권을 금지하자 불법 내기와 도박 등이 성행해 결국 뉴햄프셔 주는 1964년 합법적인 복권 발행을 승인하죠.

영국에서도 복권 제도가 도박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1826년 일시적으로 복권 발행이 중단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복권의 이익을 공공사업에 사용하면서 복권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생기자, 1990년대에 국가 복권 제도를 다시 도입하죠.

 

5. 복권으로 산 올림픽행 티켓

조선견문도해 ‘복권 추첨’ / 부산근대역사관

우리나라 복권의 시초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계’로 추정합니다. 계원들의 이름이나 숫자를 적은 알을 통 속에 넣고 돌리다 밖으로 빠져나온 알로 당첨자를 정하는 산통계가 대표적이죠. 그 외에도 일정 번호를 붙인 표를 100명, 1000명, 1만 명 단위로 판매한 뒤, 추첨해 매출액의 80%를 복채로 주는 작백계도 인기가 있었습니다.

근대적 복권은 1945년에 등장합니다. 일본 정부는 군수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승찰이라는 복권을 발행했죠. 승찰은 10원짜리 복권으로 당첨금은 10만 원이었습니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되면서 사라지게 됩니다.

(좌)런던 올림픽 복권 ⓒ문화재청 / (중)제 1회 후생 복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 (우)제 1회 애국복권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우리나라에서 발행된 최초의 복권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인 1947년에 등장합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1948년에 열린 런던 올림픽 대회의 참가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복권을 발행한 것입니다. 액면 금액 100원, 1등 상금 100만 원이었던 이 복권은 140만 장이 발행되었고, 당첨자는 모두 21명이었죠. 이 복권으로 마련된 경비로 축구, 농구, 육상, 역도, 복싱, 레슬링, 사이클 7개 종목 선수 50명과 임원 17명으로 구성된 선수단이 런던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1948년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해이기도 하지만 그해 7월에는 이례적인 수해 피해가 있던 해이기도 합니다. 수천 명의 사상자와 수십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죠. 이재민 구호 기금 마련을 위해 1949년 10월부터 1950년 6월까지 세 차례 후생 복표가 발행되었고,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발행이 중단되었습니다.

6‧25 전쟁 뒤인 1956년에는 전쟁 복구에 들어가는 산업 자금과 사회 복지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매달 애국 복권을 발행했어요. 매달 1회씩 총 10회까지 운영된 이 복권은 100환짜리와 200환짜리로 발행되었습니다. 그 후 국가적인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복권이 등장합니다. 1962년 산업박람회복표, 1968년 무역박람회복표 등이 발행되었죠.

 

6. 준비하시고… 쏘세요!

1969년에 주택 복권이 발행되기 시작하면서 정기적으로 발행되는 복권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주택 복권은 무주택 군·경 유가족, 국가유공자, 파월 장병의 주택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발행되었죠.

처음에는 서울에서만 발행되었지만 2회부터는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인기가 늘어남에 따라 월 1회 추첨이 주 1회 추첨으로 바뀌었어요. 1등 당첨금도 1978년 천만 원, 1981년 3천만 원, 1983년 1억 원, 2004년 5억 원으로 점차 증가했습니다. 특히 1981년부터 TV를 통해 방송되면서 ‘준비하시고… 쏘세요!’라는 멘트와 다트 형식의 추첨 방식이 유명해졌죠.

하지만 찬란했던 영광은 2002년 12월에 등장한 로또로 인해 몰락합니다. 2002년에는 1,851억 원에 달하던 연간 판매액이 2005년에는 318억 원으로 급감하고, 마침내 2006년 복권위원회에서 인쇄 복권의 상품 수를 줄이기 위한 목적으로 폐지되었어요.

 

7. 앞으로 절대 없을 전설의 레전드 407억

로또 ⓒ서울신문

2002년 국내에 등장한 로또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보다 당첨금 이월 규정 때문이었는데요. 운이 좋게도(?) 초기에 연달아서 당첨금액이 이월되면서 19회차 로또의 1등 당첨금이 407억 2200만 원이 되었죠. 이 전설의 19회차 로또의 당첨자는 지방 경찰서 경사로 혼자 당첨금을 거머쥐었죠.

이후 높은 당첨금으로 사행성 논란이 일면서 이월 당첨금을 2번으로 제한하고, 구매액도 2천 원에서 천 원으로 낮춰 다시는 수백억에 달하는 당첨금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단적인 예로 최소 1등 당첨금인 2013년의 546회차는 4억 593만 원이었죠.

 

마치며

시작에서부터 복권은 국가사업을 위해서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도박처럼 취급되면서 금지되기도 했죠. 결국은 다시 풀리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세금을 거둬들이기 좋은 수단이기 때문이겠죠.

그러고 보면 술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유해성으로 인해 금지한 적이 있지만 결국 다시 활성화되었고, 세금을 거두는 데 이만한 게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우리 모두 국가를 위해서 술과 복권을 열심히 합시다??

원문: 사소한 것들의 역사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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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 한옥마을은 100년도 안 됐다고?: 한옥의 역사 https://ppss.kr/archives/264455 Mon, 24 Mar 2025 13:24:28 +0000 http://3.36.87.144/?p=264455

한옥

우리나라 고유의 형식으로 지은 집을 양식 건물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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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옥은 원래 없었다?!

한옥이라는 말은 원래는 없는 말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한옥이라는 용어 자체가 서양식 주택인 양옥과 구분하기 위한 용어이기 때문이죠.

한옥이라는 말은 1907년 정동길 주변을 기록한 약도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당시 서양의 근대 건축양식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이들과 구분하기 위해 표시한 것이었죠. 이때는 한옥이라고 하면 살림집을 의미했는데요. 우리나라의 전통 건축물을 통칭하여 한옥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1975년에 나온 『삼성 새우리말 큰사전』에서부터 입니다. 이 사전에서 한옥은 양옥과 대비되는 개념이자 한옥의 동의어로 ‘조선집’, ‘한식집‘이 있다고 표기되어 있죠.

현재 한옥에 대한 정의는 건축법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요. 2010년 2월에 제정된 「건축법 시행령」 제2조에 따르면 한옥은 ‘기둥 및 보가 목구조 방식이고 한식 지붕틀로 된 구조로서 기와, 볏짚, 목재, 흙 등 자연 재료로 마감된 우리나라 전통 양식이 반영된 건축물 및 그 부속 건축물’을 말한다고 합니다.

 

2. 한중일 전통 가옥의 차이는?

한중일 전통 건축물은 비슷하게 생겼는데요. 한옥만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중국의 집은 온돌과 마루가 없고 일본은 마루만 있는 반면, 한옥은 방에는 온돌을 대청과 툇간에는 마루를 깔아두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어요. 난방시설인 온돌과 냉방시설인 마루를 가지고 있는 한옥은 겨울에 춥고 여름에 더운 한반도의 특징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온돌은 순수 우리말로 구운 돌의 약자인 ‘구들’이라고도 합니다.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불기운이 바닥 아래를 지나 굴뚝으로 빠지게 되는 구조이죠. 온돌은 열의 효율이 높고 연료나 시설이 경제적이며 고장이 별로 없다는 장점이 있어요.

마루는 나무 널판으로 구성된 바닥을 말하는 것으로 바닥을 지면으로부터 떨어트려 통풍이 되도록 해 습기를 방지하는 구조입니다. 대개 마루는 앞쪽이 트여 있고 뒤쪽에는 문이 달려 있는데, 한여름에 문을 열면 통풍이 잘됐죠.

 

3. 조선시대부터 한옥마을이었던 북촌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한옥은 대문, 마당, 부엌, 사랑방, 안방, 마루, 외양간, 화장실, 장독대 등이 갖추어져 있는 조선시대 상류층의 한옥입니다. 유교 사상이 사회 전반에 퍼져있던 조선시대라 신분과 남녀유별, 장유유서를 공간에도 적용했죠. 크게 안주인이 쓰는 공간인 안채와 바깥주인이 쓰는 바깥채 등으로 나누기도 하고, 집채를 달리하거나 작은 담장을 세워 주거 공간을 상, 중, 하로 나누기도 했어요.

한옥은 풍수지리에 따라 배산임수의 원칙으로 지어졌어요. 뒤로는 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물을 마주하며 남쪽으로 짓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한옥의 위치였죠. 풍수지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서울에서 가장 좋은 장소는 경복궁이고 그다음이 창덕궁인데요. 그 사이에 있는 북촌 역시 북고남저로 겨울에 따뜻하고 배수가 잘될 뿐 아니라 남쪽은 넓게 트인 데다 남산의 전망도 좋아 조선 시대부터 권문세가와 왕족들이 모여 살던 동네라고 하네요.

경복궁
창덕궁

반면 하급 관리들은 남산 기슭인 이른바 남촌에 살았죠. 이곳은 음지이기는 하지만 배수가 잘되고 지하수가 풍부하여 물을 얻기 편했어요. 오늘날의 중구 남산동에서 필동을 거쳐 묵정동에 이르는 지역이에요.

하지만 조선 후기에는 조금 달라졌습니다. 원래 고급 관리가 살던 곳이 북촌, 하급 관리가 살던 곳이 남촌이었죠. 하지만 후기로 갈수록 북촌에는 노론이 거주하기 시작했고, 남론에는 소론과 남인·북인이 살게 됐어요.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른 기록입니다.

 

4. 서양인들이 만든 개량한옥

구한말 미국공사관 ⓒUniversity of Arkansas Libraries

구한말이 되자 우리나라에 서양인 관리와 서양인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한옥을 구입해 자신들의 습관과 용도에 맞게 개조했어요. 여러 개의 방을 터서 침실·식장·거실 등으로 개조하는 한편, 벽지를 바르고 종이로 된 창문을 유리창으로 바꾸고 서양식 가구와 카펫 그리고 난로를 설치했어요. 당시 미국공사관이 대표적인 개량한옥이었죠.

서양인이 개조한 한옥은 이후 조선인의 주거 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조선인 재력가들은 이들을 따라 창호지 방문과 창문을 유리로 바꾸는 한편, 대청마루를 응접실로 바꾸고 목욕탕도 설치했어요. 당시 재력가들 사이에서는 서양식 가구를 사용하는 것은 부와 개화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유행하기도 했다고 하네요.

 

5. 도시형 한옥의 탄생

도시형 한옥

1908년 일본이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하면서 일본인들을 조선의 농경지로 대규모로 이민시키는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이때 조선의 땅값이나 세금이 일본에 비해 싸고 수익률이 높아 주로 일본에서의 빈농층이 주로 이민을 왔죠. 1911년 첫 이민 가족 160호를 시작으로 매년 5,000명 이상이 넘어왔어요.

일본인들이 조선의 농촌으로 이민 온 후 일제는 본격적으로 조선의 농촌을 수탈했습니다. 특히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많은 조선인의 토지를 빼앗았죠. 토지를 빼앗긴 조선인들은 소작농이 되었습니다. 소작농 거리도 찾지 못한 이들은 공장이 있는 대도시로 이주해 막노동을 하게 됐죠. 이로 인해 경성에는 1926년 30만이던 인구가 1931년에는 36만으로 1936년에는 67만으로 늘어났죠. 도시로 몰린 인구로 인해 주택난이 심해져 새로운 주거 형태가 필요해졌어요.

주택난 속에서 조선인 전문 주택 개발업자들이 등장했습니다. 관급 건설 사업을 일본인들이 독점하게 되면서 조선인 건설업자들은 민간 주택 시장으로 눈을 돌렸죠. 이들은 대형 필지를 사서 작은 필지로 나눈 후 획일화된 한옥을 개조했습니다. 어려운 조선인들의 경제 사정상 소규모 주택의 수요가 더 많았고, 주택 개발을 하는 입장에서도 작게 여러 주택을 만드는 것이 평당 이익이 높았기 때문이었죠. 게다가 한옥은 일본인들이 손대기 어려운 분야였고, 유학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서구식 건축 개발보다 훨씬 수월한 시장이었어요.

이때 대규모로 만들어진 한옥을 도시형 한옥이라고 부릅니다. 기존 한옥과 달리 ㄷ자나 ㅁ자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비교적 크기가 작고, 변소가 건축물 내부에 들어간 형태를 띠고 있었으며, 벽돌과 유리 함석을 사용하는 등의 특징이 있었죠.

 

6. 건축왕, 북촌 한옥마을을 만들다

건축왕 정세권

당시 등장한 전문 건설업자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정세권이예요. 1919년 3.1 운동 이후 상경한 정세권은 1920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부동산개발회사 건양사를 설립했습니다. 북촌을 시작으로 경성 곳곳에 근대식 한옥 집단지구를 건설하면서, 10년도 안 되어 큰 부를 축적해 조선을 대표하는 부동산업계의 거물로 성장하게 되죠. 사람들은 그를 건축왕이라고 불렀어요.

그가 개발한 대표적인 필지는 조선 왕족의 종친 이해승의 누동궁을 개발하여 만든 68채의 한옥단지, 북촌 가회동 31번 한옥 집단지구, 익선동 166번지 등이 있어요. 후자의 두 곳은 지금도 한옥을 찾아볼 수 있죠.

이 부를 바탕으로 정세권은 신간회, 조선물산장려회, 조선어학회 등을 물심양면으로 후원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을 계기로 일제에게 고문을 받기도 하고 막대한 재산을 빼앗기기도 하면서 안타깝게도 건양사는 쇠락하게 돼요.

 

7. 고급 주택가였던 전주 한옥마을

전주 한옥마을

지금의 전주에는 풍남문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일제강점기 이전만 해도 사대문이 있었어요. 성안에는 관인, 양반, 향리 등이 거주했고, 성 밖에는 상인들이 거주하면서 남문시장이 형성됐죠. 하지만 1907년 조선 통감부의 폐성령에 따라 풍남문을 제외한 3개 성문이 철거되었고, 도심부는 1920~30년에 일본인들이 독점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1920, 30년대의 도시 집중화 경향에 따라 전주로 많은 사람이 이주해 왔습니다. 그중에는 호남평야의 대지주나 신흥 자본가들도 있었죠. 이들은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고급 주택가인 한옥 집단지역을 형성했어요. 이 지역의 한옥 주택은 1970년대까지 꾸준히 생겨났지만, 1970년대 중반부터는 한옥 보존 정책이 시행되면서 신축이 중단되었죠.

 

8. 아파트에 밀린 한옥

6·25전쟁 이후로 경제가 개발되면서 도시로 인구가 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전보다도 토지를 효율적으로 이용해야 하는 필요성이 생기자, 한옥보다는 서양식 단독주택과 아파트가 건설되기 시작했어요. 특히 1960년대와 1970년대 산업화와 새마을 운동 시기를 거치면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심해졌고, 초가집도 슬레이트집으로 바뀌게 됐어요. 70년대 중반에는 재개발, 신축 등으로 인해 기존 한옥의 90%가 헐리게 됩니다.

북촌한옥마을에도 1970년대 들어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한옥을 보존해야 한다는 필요성도 대두되기 시작했죠. 1976년 북촌 지역을 민속 경관 지역으로 지정하면서 북촌의 한옥은 보존되기 시작했답니다.

원문: 사소한 것들의 역사


참고문헌

  • 김경민. (2017).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이마
  • 임창복. (2011). 한국의 주택, 그 유형과 변천사. 돌베게
  • 전남일. (2010). 한국 주거의 공간사. 돌베게
  • 전남일 외 3명. (2008). 한국 주거의 사회사. 돌베게
  • 이용우. (2003). 북촌 한옥마을. 대한인쇄문화협회
  • 장성화. (2011). 전주 한옥마을 조성사업의 도심재생 성과 분석 및 개선방안. 전북발전연구원
  • 신광호. (2003). 도시형 한옥 마당의 공간적 특성 연구 – 전주시 도시형 한옥 사례 연구. 우송대학교 석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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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신석기 농부의 식단은 빵과 우유가 아니라 ‘죽과 물’이었다 https://ppss.kr/archives/268400 Thu, 27 Feb 2025 04:52:56 +0000 http://3.36.87.144/?p=268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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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자들은 덴마크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인 퓐(Funen) 섬에서 5,500년 전의 음식을 가는 돌(grinding stones)을 발견했습니다. 이 신석기 유적에서는 보리와 밀도 같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고고학자들은 이것이 북유럽 초기 농부들이 빵을 만들어 먹은 흔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모에스고르 박물관의 벨모에드 아웃 박사(Ph.D. Welmoed Out from Moesgaard Museum)가 이끄는 연구팀은 퓐 섬 유적에서 발굴된 가는 돌과 곡식, 식물 등의 유물을 더 자세히 분석해 가장 오래된 빵의 흔적은 아니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발견된 돌 중 하나입니다. 기존에는 곡물을 갈아 빵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을 것이라 사료되었는데, 새로운 연구에 따르면 곡물을 갈 때 사용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 출처: Niels H. Andersen, Moesgaard Museum

​첫 번째 증거는 돌에 남은 흔적입니다. 연구팀은 마모 흔적을 봤을 때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밀을 갈아서 밀가루를 만드는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확인했습니다.

더욱이 현미경으로 확대해 본 결과 이 돌에 남은 녹말이나 다른 식물 조각은 밀이나 보리 같은 곡물이 아니라 훨씬 거친 식물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예를 들어 개암(헤이즐넛) 같은 단단한 식물 열매나 혹은 식물 자체를 갈아 먹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밀가루 대신 밀 자체를 물에 넣어 끓인 죽이나 포리지(우유나 물을 넣고 곡물을 끓인 요리)를 먹었습니다.

곡물을 가는 돌에서 추출한 네 가지 유형의 전분 과립입니다. 현미경으로 촬영한 사진을 400배 확대하여 촬영했습니다. / 출처: Cristina N. Patús, HUMANE, Barcelona

​사실 빵은 꽤 손이 많이 가는 음식입니다. 밀을 갈아서 가루로 만든 후 반죽을 만들고 효모를 넣은 후 적당히 숙성하여 빵으로 구워내는 과정이 개발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연구팀은 최초의 빵 비슷한 음식이 나오기 위해서 500년 정도는 더 필요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초기의 빵은 우리가 아는 빵보다 훨씬 거칠고 조악한 음식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오늘날 우리가 먹는 맛있는 빵이 됐습니다.

​아마도 같은 시기 우리 조상도 비슷하게 곡물을 먹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냥 먹기에는 보리나 쌀 같은 곡물이 너무 단단한 만큼 물과 함께 끓여 죽을 만들어 먹었다는 것이 가장 그럴듯한 가정입니다. 밥을 지어 먹은 건 한참 후의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시행착오와 발전을 거쳐 우리가 지금 문명 생활을 누리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새삼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원문: APERTURE LABORA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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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콘센트 하나로 통일 좀 해줘라: 콘센트의 역사 https://ppss.kr/archives/268679 Fri, 14 Feb 2025 04:52:35 +0000 http://3.36.87.144/?p=268679

플러그

전기 회로를 쉽게 접속하거나 절단하는 데 사용하기 위하여 코드 끝에 부착하는 접속 기구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1. 한 집 당 벽면 콘센트 한 개

로터리 컨버터
크기는 대략 이렇습니다

전기 기술은 1800년에 개발된 볼타의 파일을 시작으로 19세기에 급속도로 발전합니다. 불과 100년도 안 되어서 전기가 가정용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죠.

전기가 가정용으로 보급될 수 있었던 이유는 1888년 로터리 컨버터(Rotary Converter)가 발명되었기 때문입니다. 로터리 컨버터는 전압, 주파수, 위상 등을 원하는 형태로 바꿀 수 있는 장치입니다. 그러니까 전기가 모든 가정에 동일한 전압의 전기를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단 말이죠.

전기가 가정에 처음 공급되었을 때는 조명용으로만 사용되었기 때문에, 가정에는 천장에 달린 소켓만 있었습니다. 영국을 기준으로 1930년대 초까지도 기술적 한계로 인해 한 가구당 6개의 천장 소켓과 1개의 벽면 소켓만 있었다고 합니다.

1909년의 토스터기 ⓒwww.worldstandards.eu
전구와 비슷해 보이는 초기 전기 플러그

참고로 벽면 콘센트 아니고 소켓 맞습니다. 당시 전기 기기들은 오늘날과 같은 꽂아 쓰는 플러그 형태가 아니라 전구를 끼우듯이 돌리는 형태였기 때문이죠. 이 나사 소켓형 플러그는 1880년대 중반 에디슨에 의해 개발되었고 20세기 초까지 산업 표준으로 활약했습니다.

 

2. 파나소닉을 만들어 낸 멀티탭

대략 이런 느낌의 쌍소켓
마쓰시타 고노스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30년대까지 대부분의 가정에는 벽면에 하나의 소켓만 있었어요. 이러한 이유로 천장 조명을 제외한 2개 이상의 전기 기기를 사용하려면 추가적인 어댑터가 필요했습니다.

이 어댑터는 1918년 일본에서 발명됩니다. 작은 전기용품 가게를 운영하던 일본의 한 전기공이 쌍소켓을 발명한 것이죠. 쌍소켓은 히트 상품이 되어 그의 가게를 어엿한 기업으로 성장시킵니다.

이 기업이 바로 훗날 파나소닉이 되는 마쓰시타 전기 산업입니다. 쌍소켓을 발명한 전기공은 파나소닉의 창업자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죠.

테이블 탭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멀티탭
멀티탭 절망편 ⓒReiner Hahn

우리가 쓰고 있는 멀티탭 형태는 1929년에 테이블 탭(Table Tap)이라는 이름으로 처음에 등장했습니다. 1970년에는 페드트로(Fedtro)라는 회사에서 콘센트 구멍마다 스위치가 달린 멀티탭을 선보였죠.

 

3. 유럽과 미국의 평행이론?!

에디슨이 발명한 소켓형 플러그는 불편했기 때문에 오늘날처럼 꽂는 형태의 플러그가 등장합니다. 흥미로운 건 유럽과 미국에서 각각 독자적으로 발명했는데 발상이 비슷했다는 점이에요.

  • 유럽 승 : 일자형 플러그

꽂는 형태의 플러그는 유럽에서 먼저 등장했습니다. 1882년 영국의 토머스 테일러 스미스(Thomas Taylor Smith)가 ‘전기 회로 연결’에 대한 특허를 낸 것이 최초였죠. 1889년 제너럴 일렉트릭 컴퍼니 카탈로그에도 꽂는 플러그가 등장한 것을 보면 상용화도 빠르게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893년 GEC 카달로그에 실린 전기 플러그
1904년 허벌(Hubbell)의 플러그 제품들

반면, 미국에서는 유럽보다 22년이 늦은 1904년 하비 허벨(Harvey Hubbell )에 의해 발명됩니다. 산업 표준이 소켓형이었기 때문에 그의 발명품은 소켓에 연결해서 사용하는 형태였죠. 하비 허벨은 이후 허벨 회사를 설립하고 다양한 제품을 내놓는데요, 오늘날의 멀티탭과 비슷한 형태의 제품도 있었습니다.

  • 미국 승 : 접지 플러그
Knapp의 접지 플러그
1925년 등장한 슈코 플러그

누전을 방지하기 위한 접지 장치가 들어간 플러그의 발명은 미국이 유럽보다 빨랐습니다. 1915년 허벨 회사에 재직 중이던 조지 냅(George Knapp)이 3핀짜리 콘센트, 즉 접지 장치가 들어간 플러그를 개발한 것이죠.

유럽에서는 그로부터 10년 뒤인 1925년 바이에른 전기 악세사리(Bayerische Elektrozubehör AG)에 재직 중이던 알베르트 뷔트너(Albert Büttner)가 개발합니다. 이 플러그는 안전 콘센트를 의미하는 독일어 ‘Schutzkontakt’의 줄임말인 슈코(Schuko)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죠. 현재는 type F 규격으로 불리며 대부분의 유럽 국가와 우리나라에서 사용 중입니다.

접지 기능이 있는 이 두 플러그는 안전성과 편리성을 인정받아 미국과 유럽의 표준이 되었죠.

 

4. 하나로 통일시켜라 좀…

옛날 스페인의 콘센트. 어떻게 쓰는지 상상도 못 하겠다…
옛날 그리스식 콘센트

플러그와 콘센트는 나라별로 독자적으로 발전되어 왔기 때문에 유럽 내에서도 각자 모양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나라끼리 표준화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100년 전 사람들이라고 안 한 것이 아니었죠. 그래서 1906년 영국에서 비영리 국제기구인 국제 전기기술 위원회(IEC)도 창설되면서 총대를 메는가 싶었는데, 하필이면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애매한 상태에서 멈춰버렸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다시 유럽 국가 12개국이 모여서 회의를 했죠. 하지만 1938년 영국과 1939년 프랑스에서 열린 회의는 모두 눈치만 봤고, 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흐지부지되었습니다.

1957년에야 국제 전기 장비 승인 규칙 위원회(IECEE)에서 플러그 및 콘센트의 표준을 발표하긴 했지만, 이는 기술 보고서에 불과했습니다. 1963년이 되어서야 ‘유로 플러그’라고 불리는 것이 등장하긴 합니다만 이미 각국의 전기 인프라가 깔린 상황이었던지라… 통합은 물 건너간 거죠.

세계표준이라 쓰고 남아공 전용이라 읽는 N타입

그래서 세계 표준은 없냐고요? 놀랍게도 있습니다. 1986년 제정된 유니버셜 플러스(Type N)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세계 표준 규격인 만큼 접지도 있고 플러그도 두껍지 않아 합리적인 플러그죠. 하지만 전 세계에 깔린 전기 인프라를 뒤집어엎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사용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전기 인프라가 완전히 구축되지 않았던 애꿎은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브라질에서만 이 플러그를 채택했습니다. Type N의 변형 플러그가 등장했기 때문에, 사실상 남아공 전용 플러그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통일된 건 하나 없이 A~O Type이 존재하는 현재에 이르렀는데요. 러프하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Figure.16 A-O 까지의 플러그&콘센트 타입 (혼파망…)
  • 미국의 영향을 받은 나라: Type A, B
  • 영국의 영향을 받은 나라 : Type C, D, G, M
  • 독일을 필두로 사실상 유럽 표준 : Type F
  • 소수 국가들에서만 쓰는 : Type H(이스라엘), J(스위스), K(덴마크), L(이탈리아), O(태국)
  • 세계 표준이라 쓰고 남아공, 브라질용이라 읽는 : Type N

 

5.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에너지 경제신문

우리나라에 전기 인프라가 깔리기 시작한 것은 미군정 시기부터입니다. 시대 특성상 자연스럽게 미국 표준인 Type A, B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1970년대 초까지 미국 표준을 잘 쓰고 있었죠.

하지만 문제는 1970년대까지 발전소가 부족해 전력 사정이 열악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기 사용량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하자, 정부는 효율적이고 안정적인 전력 공급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하죠. 그렇게 시작된 것이 1973년부터 2005년에 걸친 ‘220V 승압 사업’입니다.

전압이 높아지며 발생하는 감전 등의 안전 문제를 고려해 type F를 채택한 것입니다. Type A, B는 코드를 완전히 빼기 전까지 전기가 통하기 때문에, 살짝만 걸쳐있는 상태에서 돌출된 핀을 잡으면 감전되는 안전성 문제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지금의 콘센트 형태로 자리 잡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원문: 사소한 것들의 역사


표지 이미지 출처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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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르트 아주머니가 세상을 구한다 https://ppss.kr/archives/268353 Tue, 04 Feb 2025 04:38:38 +0000 http://3.36.87.144/?p=268353 한국을 대표하는 3대 요원이 있다. 음지에서 정보를 수집하는 국정원 블랙요원, 필요한 물건이 있다면 하루가 지나기 전에 어디든지 가져다주는 쿠팡맨, 그리고 시위대와 경찰과 철통보안의 빌딩을 자유자재로 통과하는 야쿠르트 아주머니다.

야쿠르트 아주머니의 진화

나는 극단적으로 내성적인 사람이라 그 흔한 “야쿠르트 하나 주세요”라는 말도 못 꺼내봤지만, 멀리서 오래도록 관찰해 왔다(야쿠르트 주문을 못 해서 그런 건 아니다…). 눈에 띄는 샛노란 색의 히어로 복장. 눈이 쌓여 자동차들도 꼼짝 못 할 때에도 유유히 빙판을 빠져나가는 시속 8km의 시즈탱크. 그 안에는 야쿠르트부터 한우, 채소까지 최대 680kg까지 물건을 실을 수 있다. 가히 한국 메카닉의 정점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메카닉이 음료 회사에서 가능한 게 맞냐고

심지어 동네의 지리와 사람들까지 훤히 아는 정보력까지 갖추고 있다. 나는 그들이 단순히 음료를 판매하는 것이 아닌, 한국 사회를 유지시키기 위한 비밀임무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그리고 답을 찾았다.

 

경찰이 야쿠르트 아주머니에 SOS를 치다

금정구의 실종 치매 노인을 찾아준 프레시 매니저님

지난 5월 10일, 오후 2시 18분. 부산 금정구에 노인복지센터에서 노인이 사라졌다는 신고가 접수되었다. 그는 치매를 앓고 있었다. 경찰들은 곧 야쿠르트 아주머니의 본부. hy(옛 야쿠르트) 동상점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자 거리에서 야쿠르트를 팔던 야쿠르트 아줌마의 무전ㄱ… 아니 카카오톡에 알람이 울렸다. 18명의 요원들이 있는 단톡방에 실종 노인의 인상착의와 함께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뜬 것이다.

30분 전 검정 모자에 빨간 점퍼를 입은 할아버지가 사라졌습니다. 발견하시는 분께서는 즉시 연락 바랍니다.

오후 2시 38분쯤 인상착의가 비슷한 할아버지를 야쿠르트 아주머니가 발견하고 경찰에 알렸다. 일반적으로 실종 치매 환자를 찾을 수 있는 골든타임은 24시간이다. 야쿠르트 아주머니들은 접수 신고 20분 만에 이걸 찾고 말았다.

매년 치매 환자들의 실종 사건은 1만 4천 건에 이르고 있다. 야쿠르트 아주머니는 지난 3월에는 대전에서 실종된 노인을, 12월에는 인천에서 한파 속에 슬리퍼 차림으로 나온 노인을 구했다. 지역과 사람을 훤히 알고 있는 그들의 눈은 언제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찾고 있다.

 

지역을 지키는 로컬 히어로 집단

도로와 도로, 건물과 건물, 가정과 가정 사이에 언제나 그들이 있다

그렇다. 그들은 경찰과 공조하며 실종된 노인을 찾거나, 골목길을 누비며 안전이 취약한 곳들을 찾아 범죄 발생 우려 지역들을 경찰에 전달하는 활동들을 하고 있었다. 전국에 1만 명이 넘는 요원(이 중에서 10년 넘게 활동한 베테랑은 약 5,600명에 달한다)들을 보유한 hy의 조직력은 지역의 안전을 지키는 데 안성맞춤이다.

2022년에는 반지하에 홀로 사는 할아버지가 의식을 잃고 쓰러진 것을 발견해서 구하기도 했다. 때로는 매일 집 앞에 놓는 야쿠르트 2병을 가져가지 않은 것을 보고 사람을 구한 적도 있었다.

이는 hy가 지자체, 관광서들과 손을 잡고 ‘홀몸노인 돌봄 사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려 1994년부터 시작한 hy의 대표적인 활동 중에 하나다. 단순히 음료를 전달하는 것을 떠나서 이런저런 대화를 통해 정서적인 치료까지 함께하고 있다.

홀로 사는 노인 100만의 시대와 그에 따르는 고독사 문제. 특히나 코로나19로 인해 사람들이 접촉하지 않는 ‘언택트 시대’가 왔음에도 야쿠르트 아주머니들은 그 틈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있다.

지난해 분당 정자교 붕괴 사고에도 프레시 매니저가 있었다

사실 히어로라는 게 어디 악당을 처리하는 일만 하겠는가, 사회의 그림자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일. 야쿠르트 아주머니는 그 최전선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문득 그들의 시작이 궁금해졌다.

 

47명의 가정주부가 전설을 만들다

유산균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는 인물로 야쿠르트 아주머니들이 활약했다

hy, 그러니까 ‘한국 야쿠르트’가 시작된 것은 1971년도의 일이다. 그들의 경영이념은 ‘건강사회건설’이다(의미심장하지 않은가). 하지만 당시는 유산균 음료를 알지 못해 병균이냐고 부르던 시절이었다. 한국야쿠르트에서는 유산균 음료의 인식을 바꿔줄 사람들이 필요했다.

현재는 1만 명이 넘는 인원이 모인다는 야쿠르트 아주머니 결사대(아니다)

그렇게 서울 종로 지역을 중심으로 야쿠르트를 알릴 47명의 요원들을 모집했다. 모집 요건이 있었다. 남성이 아닌 ‘가정주부’만을 모집한다는 것이었다. 당시는 가정주부들이 밖에 나가서 일을 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시절이었다. 일을 하면서도 중간중간 아이를 돌보며 자유롭게 시간 조절을 할 수 있는 야쿠르트 아주머니는 가정주부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 사회의 이곳저곳에 그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때문에 사람들은 편을 갈라서 싸우는 한이 있더라도 야쿠르트 아주머니만은 친절하게 맞이한다.

전설적인 일화도 있다. 1994년 철도노조 파업으로 명동성당을 점거한 노조원과 경찰이 대치하던 일촉즉발의 순간이 있었다. 그때 홀연히 나타난 전설의 야쿠르트 아주머니가 있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 야쿠르트 배달해 드려야 해요.

홀연한 외침에 경찰도, 노조원도 모두 길을 비켜주었다. 정영희 매니저님의 일화다. 한국 사회에서 야쿠르트 아주머니만은 건드리면 안 된다는 사회적인 룰이 생긴 것을 의미한다.

 

야쿠르트 아주머니에서 프레시 매니저로

사람들의 일이 인공지능과 기계로 대체되는 시기. 언뜻 편리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술들의 폭주 속에서도 가슴 속 핫팩처럼 사회를 따뜻하게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야쿠르트 아주머니, 아니 ‘프레시 매니저’의 일화들은 듣다 보면 아직 우리 주변이 사람이 사는 곳이구나 느끼게 한다.

조만간 사람형으로 변신할 것 같은 야쿠르트 아주머니 카트 코코

기술은 야쿠르트 카트(배트맨의 배트카처럼 이들에게는 코코라는 카트가 있다)에 잔뜩 적용시키고, 사람이 필요한 일에는 직접 나선다. 나는 언젠가 그들이 세상을 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언제나 그들이 이곳을 지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지만, 그전에 “야쿠르트 하나 주세요”라고 물어보는 게 먼저겠지?

원문: 마시즘


참고문헌

  • 야쿠르트 아줌마, 학교 폭력 예방 나선다, 이동경, 연합뉴스, 2012.2.29
  • 홀몸노인 찾아가는 ‘야쿠르트 아줌마’, 한겨레, 2014.12.30
  • 한국야쿠르트, 홀몸노인 돌봄사업 확대한다, 최원혁, 헤럴드경제, 2017.4.3
  • 주부 일자리의 원조 ‘야쿠르트 아줌마’, 강신우, 이데일리, 2018.6.25
  • 한국야쿠르트 ‘프레시 매니저’, 경찰과 골목길 범죄예방 나선다, 박성은, 신아일보, 2020.9.24
  • 세계 최초의 ‘달리는 냉장고’··· 우리는 골목길 엔터테이너, 박돈규 기자, 조선일보, 2020.11.10
  • 코로나 언택트 시대의 틈새…‘야쿠르트 아줌마’들이 메운다, 고영득, 경향신문, 2021.3.15
  • 50년 역사 지닌 ‘야쿠르트 아줌마’의 변천사, 최지혜, 매일일보. 2021.6.20
  • “야쿠르트와 함께 마음을 전해요” hy 프레시매니저, 박지연, 한국일보, 2021.12.12
  • [여성과 산업] ⑥우리 동네 플랫폼 ‘야쿠르트 아줌마’, 최인영, 우먼타임스, 2022.3.2
  • 홀몸 노인 살린 야쿠르트 아줌마…하루 18.5㎞ 달린다, 장혁진, KBS, 2022.9.3
  • “매일 배달하며 눈여겨봐요”…고독사 예방 앞장서는 기업은, 방영덕, 매일경제, 2022.11.15
  • 특유의 세심함으로 실종 치매 노인 귀가 도운 ‘야쿠르트 아주머니’, 김지은, 대전일보, 2023.3.29
  • 유제품 전달하며 나 홀로 어르신의 건강 챙겨드려요, 김윤주, 조선일보, 2023.12.20
  • “애기 엄마 고마워” 한파 속 치매노인 구한 ‘천사 야쿠르트 아줌마’, 김다운, 아이뉴스24, 2023.12.22
  • 야쿠르트 카트로 누비는 거리…길잃은 치매노인 보호자 역할도, 이민경, 헤럴드경제, 2023.12.22
  • “유제품배달하며 어르신 건강 살펴…제가 느끼는 정이 더 커요”, 신선미, 연합뉴스, 2024.2.5
  • 야쿠르트 아줌마로 18년… 연 매출 2억4000만원, 명예의 전당 올랐다, 문지연, 조선일보, 2024.3.7
  • 야쿠르트 판매원들 실종 치매 노인 20분 만에 찾아내, 권기정, 경향신문, 2024.5.29
  • ‘경찰관부터 사회복지사까지’…hy ‘야쿠르트 아줌마’의 활약상, 김민주, 뉴스포스트, 2024.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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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깎이 777 말고 아는 사람? https://ppss.kr/archives/266642 Thu, 16 Jan 2025 14:34:33 +0000 http://3.36.87.144/?p=266642 손톱깎이 하면 쓰리세븐이 가장 유명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손톱깎이에는 생각보다 여러 브랜드가 있습니다. 국내만 해도 벨, 로얄금속공업 등이 있고 해외의 벨로티, 카이 등이 있죠.

손톱깎이 최초의 브랜드는 Gem이지만 현재는 판매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로 오래된 회사인 Trim을 중점적으로 살펴볼 예정입니다. 아니, 그럴 예정이었습니다… 만 마찬가지로 Trim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더라고요. 그래서 손톱깎이 전반에 대한 역사를 다뤄보았습니다. 그래도 분량이 적은데, 이런 날도 있어야죠ㅎㅎ

 

1. 시작이 불분명한 손톱깎이

 1875년 발렌타인 포거티의 손톱깎이 개선 특허
1881년 유진 하임과 셀레스틴 마츠의 손톱깎이 특허

손톱깎이의 발명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가장 오래된 손톱깎이 개선 특허는 1875년 미국의 발렌타인 포거티(Valentine Fogerty)에 의해 출원되었습니다. 다만 포거티의 특허 제품은 손톱깎이라기 보다는 원형 네일 파일에 가까웠죠.

19세기에 수많은 손톱깎이 특허가 나오는데, 오늘날과 비슷한 클램프형 손톱깎이는 1881년 유진 하임(Eugene Heim)과 셀레스틴 마츠(Celestin Matz)의 특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902년 Gem 손톱깎이 광고

1896년에 Gem이라고 하는 손톱깎이 브랜드 제품이 처음으로 생겨났습니다. 1947년에는 미국 바세트(BASSETT)사의 TRIM 손톱깎이가 출시됩니다. 트림 제품은 레버를 엄지손가락으로 돌릴 수 있는 기능을 추가하는 등 안정적인 사용감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죠. 우리나라에서도 트림 제품은 고급품으로 인식되어 장롱 서랍에 모셔두고 사용했답니다.

 

2. TRIM이 선택한 국내 손톱깎이 회사

벨금속공업 이희평 사장 ⓒ동아일보

고급 손톱깎이로 명성이 높았던 TRIM의 손톱깎이는 1980년대 이후 한국의 손톱깎이 회사들의 품질이 상승하고 경쟁력이 높아지면서 세계 시장 점유율에서 점점 밀리기 시작합니다. 결국 2003년 트림은 공장 문을 닫고 OEM방식을 채택했죠. 이곳의 생산을 도맡은 곳이 바로 한국의 벨금속공업입니다.

벨금속공업은 1954년 한국전쟁 직후에 설립되어 우리니라 최초로 손톱깎이를 만든 회사입니다. 당시에는 손톱깎이를 만들 강철 자재조차 구하기 어려웠죠. 그래서 주변에 나뒹굴던 드럼통을 작두로 잘라낸 뒤 연마기로 일일이 날을 갈아 손톱깎이를 만들었다고 하네요.

한동안은 해외에 OEM방식으로 판매하다가, 1974년부터는 BELL이라는 자체 브랜드로 수출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88올림픽 이후로 한국의 위상이 올라가면서 세계에서 벨 손톱깎이를 알아봐 주기 시작합니다.

참고로 1970년에 벨금속공업에서 손톱깎이에 손톱 칼을 붙인 디자인 특허를 냈습니다. 오늘날에야 흔한 디자인이지만 당시에는 벨금속공업에서만 만들 수 있었다고 하네요.

Trim 손톱깎이 키트 구매하러 가기

  • 위 링크로 구매가 이루어지면 저에게 소정의 수수료가 지급됩니다. 항상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3. 777 vs 보잉

쓰리세븐 손톱깎이 세트, 군대를 다녀온 분은 익숙한 세트 ⓒi777mall.com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쓰리세븐(777) 손톱깎이 회사는 1975년 설립되었습니다. 현재는 세계시장 점유율 40%를 차지하며 세계 1위를 하고 있는 기업이죠.

창업자 김형규 회장이 1960년대 중반 잡화상을 하던 중, 미국 트림사의 손톱깎이가 유행하는 것을 보고 손톱깎이 사업에 뛰어들었다고 하네요. 벨금속공업과 마찬가지로 드럼통을 이용해 손톱깎이를 만들기 시작해 OCM 브랜드로 제품을 수출했습니다.

93년, 미국 점유율 70%를 넘어가자 이들은 자체 브랜드로 수출을 결심하고 미국 특허청에 ‘777’ 상표출원을 했습니다. 하지만 미국 항공사 보잉에서 90년에 777을 등록해 놓았기 때문에 상표등록을 할 수 없다고 통보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미국 상표법은 ‘선사용주의’이기 때문에 보잉사 보다 먼저 777을 사용했다는 것을 증명하면 승소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온 공장을 뒤져 84년 미국에 777 브랜드를 부착해 수출한 제품을 찾아냅니다. 결국 보잉과 공동으로 상표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이 소송전의 승리로 쓰리세븐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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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기한 손톱깎이들

분량이 적어서 이대로 끝내기가 아쉽네요. 신기한 손톱깎이들도 몇 개 소개해 드립니다.

ⓒamazon.com

허리를 굽히지 않아도 되는 발톱깎이 

안티오크 클리퍼(Antioch Clipper)에서 처음으로 출시한 발톱깎이로, 2011년에 특허가 출원되었습니다. 허리를 굽히기 힘든 어르신들을 생각해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klhip의 13만 원짜리 손톱깎이 ⓒklhip.com

가장 비싼 손톱깎이

세계 최초의 인체공학적으로 올바른 손톱깎이라고 주장하는 Klhip 손톱깎이입니다. 가격은 $79.95으로, 국내에서는 13만 원에 판매되고 있습니다. 의료용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들어졌다, 일본의 수술용 초정밀 기술이 사용되었다 등등의 수식어가 있긴 한데… 개인적으로 가격이 납득가진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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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동 손톱깎이 ⓒlotteon.com

전자동 손톱깎이

샤오미 등에서 출시한 전자동 손톱깎이입니다. 언제 처음 등장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국내에는 2019년부터 소개된 것으로 보입니다. 깎는다기보단 갉아내는 거라 호불호가 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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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사소한 것들의 역사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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