ㅍㅍㅅㅅ https://ppss.kr 필자와 독자의 경계가 없는 이슈 큐레이팅 매거진 Tue, 19 Jun 2018 09:34:56 +0000 ko-KR hourly 1 https://wordpress.org/?v=5.8.11 https://ppss.kr/wp-content/uploads/2015/07/ppss-100x100.png ㅍㅍㅅㅅ https://ppss.kr 32 32 [대북제재 해제, 그 후] 2부: 개발독재라는 그림자 https://ppss.kr/archives/165150 https://ppss.kr/archives/165150#respond Tue, 19 Jun 2018 09:23:43 +0000 http://3.36.87.144/?p=165150 ※ 이 글은 「[대북제재 해제, 그 후] 1부: 북한철도 재건의 10가지 주요 과제」에서 이어집니다.


북한 철도 옆에도 도롱뇽이 있을지 모른다

나는 이들 로드맵에 따라올 세 문제를 심도 있게 검토하고자 한다. 첫 번째 문제는 일각에서 확인 가능한, 지나치게 성급한 사업 일정에 대한 제안이다. 예를 들어, 비록 착각 때문이었지만, 박흥수는 분명 2-3년 내로 경의고속선 같은 대형 사업을 끝내자는 제안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성급하게 접근할 경우, 경제개발 협력에서 가져야 할 중요한 정신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 그 정신이란, 개발 과정에서 선진국이 겪었던 부작용은 최소화하고, 장점은 최대한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게 하는 데 있다. 사업을 지나치게 급하게 추진하면 이를 달성하기는 어려워진다. 이것은 아주 구체적인 기반도 가진 경고다.

나는 북한철도의 개발에서 곱씹어야 할 한국철도의 중대한 시행착오는 1980년대의 긴축과 그로 인한 철도의 위기, 그리고 이후의 환경에 대한 거친 접근이라고 생각한다. 전자는 지금 글쓴이가 한참 연구 중인 주제인 만큼 여기서 결론을 제시할 수는 없다(앞서 소개한 연말 출간 예정인 책 『서울, 수도권, 철도: 거대 도시와 철도, 철도와 거대 도시』에 수록될 예정이다). 하지만 후자는 비교적 손쉽게 논의할 수 있는 문제를 남긴다. 논의의 출발점으로 좋은 장면은, 탈북민들이 천성산 도롱뇽 사건을 언급했던 보도일 것이다.

처음 대한민국에 왔을 때 천성산 도롱뇽 때문에 일어났던 단식과 엄청난 촛불을 보면서 생명을 중시하는 대한민국 국민의 마음에 큰 감명을 받았고, 이처럼 훌륭한 나라에서 살게 된 데 긍지와 감사를 느꼈다.

출처: 녹색연합

이는 앞글의 주제인 철도와 관련된 사건에 대한 감상이라는 점에서 더 흥미롭다. 천성산 원효터널이 400m 두께의 화강암괴 위 고산 습지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는 주장이 비록 지질·지형학적으로는 믿기 어렵다 해도 이 소송은 환경 영향이 현대적 동력교통수단 가운데 가장 작은 철도 역시 주변 환경을 세심하게 평가하는 과정 이후에 건설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메시지를 남겼다. 북한 내각이나 로동당, 인민 일반에게 개발사업을 환경의 견지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볼 정도로 성숙한 의식이 있다고는 아직 생각할 수 없는 만큼, 한국 측은 적어도 건설사업에서는 환경 문제를 엄격하게 다룰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주요 간선에 대한 신규 건설사업에 대해서는 전략환경영향평가가 국내와 동일한 수준으로 시행되어야 한다. 사업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다. 한반도의 자연환경은 1년을 주기로 크게 변화하므로, 제대로 된 환경영향평가는 적어도 1년은 필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장기적으로는 환경적 이득으로 돌아올 것이다. 또한 전략환경영향평가는 인민에게 가는 피해 역시 엄정히 평가하여 감쇄시킬 수 있기 때문에 1년여의 조사 시간은 인간의 기준에서 보더라도 의미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여기에 평안남도 지역은 더욱더 각별한 평가가 필요하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일대는 이른바 “평남지향사”라는 이름을 가진 석회석과 탄전 지대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생각지도 못한 곳에 석회 동굴이 존재하고, 그 동굴 속에 인류가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신종 도롱뇽이 살지도, 그리고 고속철도가 바로 그곳을 관통해 이 도롱뇽을 멸종으로 몰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북한 당국은 모든 주요 건설사업에 대해 한국 정부가 전략환경영향평가를 원활히 수행할 수 있도록 관련 데이터를 제공하고 조사원들의 현지 조사 여건을 보장해야만 한다. 환경 평가로 인한 사업 기간 증가에 반대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런 조사 과정은 한국 측의 개발이 얼마나 꼼꼼하게 여러 가치를 조절하고 반영하는 작업인지 북한 인민에게 확인시켜주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 본다.

한 가지 더 언급할 가치가 있는 사실도 있다. 현 평양역은 옛 고구려의 장안성을 그대로 관통한다. 서평양 일대의 중심가, 지금의 평천, 중, 모란봉구역 일대가 모두 평원왕 연간부터 1,500년간 이어진 평양성의 옛터기 때문이다. 재개발 과정에서 매장문화재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필요하다. 1,400년 전의 시간을 담은 고구려의 유물이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는 땅이 바로 평양역 부지라면, 신속한 공사보다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할 수밖에는 없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의 1:100만 축적 지질도

파랑은 석회석. 단층 또는 발달한 절리(검은 선)가 아주 많이 보이는 복잡한 지질 환경임을 확인할 수 있다. 지질자원연구원은 북한지역에 대해서는 더 세밀한 지질도를 제공하지 않고 있다. 아마도 아직 지질 정보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역 균형 발전 문제

재원의 분배와 관련된 중대한 문제도 있다. 이 문제가 어떤 구조로 이뤄져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경부고속도로 부설 당시로 되돌아가 보자. 당시 김대중은, 박정희 정부가 고속도로를 경부 축에 건설하는 것은 이미 불균형 상태에 빠져 있던 한국의 지역 개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며, 따라서 다른 축선에 우선 투자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는 개도국이 동원할 수 있는 빈약한 자원을 주요 거점에 집약해야 그나마 효율적인 성장이 가능할 것이라고 반박한다.

이 논쟁의 어느 편이 맞는지 확인할 방법은 지금으로서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논쟁과 동일한 구도를, 북한 개발 문제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 만큼은 분명하다. 현재 북한 인구의 절반은 경의 축에 집결해 있다. 특히 이 축의 중심인 평양은 특권적 지위를 누리는 도시이며, 비유하자면 중국 내륙의 2선급 지방 도시 정도는 되는 소비 수준을 보여주는 듯하다. 반면 함북∙함남∙자강∙량강, 동북변 4개 도는 면적으로는 북한의 절반이지만 인구는 1/4만 거주하는 지역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들 지역은 개혁개방과 함께 더욱 심각한 상황에 처할 것이 분명하다. 주체 중화학공업은 사실상 종말을 맞이할 것인 데다, 서울과의 거리도 멀고, 함북은 무연탄 구조조정을 피하기 어려우며, 자강∙량강도는 지형까지 아주 험준하여 투자와 산업구조 구축 자체가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평양을 통과하는 축선에 먼저 재원을 투입하는 것은, 북한의 불균형 상태를 더욱더 악화하는 선택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물론 재원이 정말 극도로 부족하다면 경의 축에만 모든 것을 몰아놓을 수도 있긴 하다. 하지만 한국은 이제 선진국이 되었고 경부고속도로 논쟁을 벌이던 당시와는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20년 전에도 대규모 투자에 꼭 필요했던 외국 채권을 사용할 이유는 이제 없다. 북한지역에 필요한 자금을 국채 또는 공기업 채권으로 조달한다면, 이들의 현재 이자율은 3% 미만이다. 재정 역시 교통시설 건설에 매년 수조 원 정도는 충분히 투입할 수 있다.

실제로 올해 예산안에서 교통시설특별회계 가운데 약 7조 원은 교통시설 건설에 투입되지 않고 일종의 예비비로 남아있는 상황이다. 이 7조 원의 흐름을 유지한다면(물론 이를 위해서는 교통 관련 세제를 계속해서 잘 유지해야 한다), 그리고 지나치게 급한 목표를 잡지 않고 30년 정도의 긴 호흡을 이어갈 수 있다면 현재 가치 200조 원 정도의 투자에 어려움은 없을지 모른다. 참고로 지난 30년(1989-2018)간 한국 정부가 도로와 철도에 투자한 금액의 절대 액수는 278조 원 정도다.

하지만 여전히, 이 재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배분 작업의 필요성은 없어지지 않는다. 북한 재건을 위한 투자의 범위는 그야말로 광범위할 수밖에 없으며, 재원 역시 한국 측 영토 내에서 북한 연결을 위해 정비해야 하는 망의 방대한 규모나 여전히 부족한 수도권과 남부 지방 철도망에 대한 투자를 감안하면 여유 있는 것은 아니다. 토건 예산을 줄여 복지 재원에 쓰여야 한다는 여론이 더욱 강력해질지도 모른다.

북한 철도망에 재정을 투자하는 것은 이 모든 요구를 뒤로 미룬 채 이뤄지는 선택이다. 이런 선택은, 기왕이면 효율적이어야 하고 이 선택을 위해 자신의 자원을 기꺼이 내어 준 사람들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뤄져야만 할 것이다. 지역 균형 발전을 위한 재원 배분은 이런 선택의 한 양태일 것이라고 본다. 한국의 개발 시도가 북한의 지리적 불균형 발전을 심화시키는 역할만을 할 뿐이라면, 이미 이로 인한 정치적 비용을 크게 치르는 한국민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귀결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생활 수준이 북한 내에서는 매우 높은 평양보다는 주체 중화학공업의 쇠락으로 심각한 위기에 봉착한 함경도 동해안 축선, 군수공업의 해체로 위기에 처하게 될 강계, 별다른 산업이 없는 혜산, 도태가 필요한 무연탄광이 즐비한 함북 두만강 만곡부 일대에 대한 투자가 절실하며, 우선시되어야 한다. 이들 지역의 인민이야말로 개발 사업을 통해 생길 기회가 없으면 개혁개방의 충격 속에서 상대적인 빈곤에 빠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를 막으려면 수도권과 가까운 패서 지역이나 강원도, 대도시 평양, 심양∙대련과 가까운 평북 지역에 대해서는 투자 순위를 늦추거나, 재정 투자를 최소화해야 할 것이다. 물론 북한의 인적 자원이 집중된 경의선에 대한 투자가 지나치게 늦어져서는 곤란하다. 나는 경의고속선 투자를 전액 국채와 철도시설공단 채권으로 수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며 여기서 아낀 재정을 관북고속선, 그리고 나머지 지선망에 투입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철도보다 전반적으로 수익성이 높은 고속도로망과 공항은 한국에서와같이 사업비의 50% 이상을 채권으로 조달해야 할 것이다).

관북고속선

경의고속선은 평양과 서울을 오가는 인원의 대부분을 수송할 것이며, 서울에서 심양, 나아가 대련과 장춘 방면을 오가는 국제선 승객 또한 상당 부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하얼빈, 북경은 항공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매우 어려운 거리다) 상당한 운임 수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운임으로 비용을 부담하는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앞서 추정한 13.5-15.8조 원의 막대한 비용 가운데, 아마도 절반 정도는 이들 승객이 부담해야 할 것이다. 참고로 호남고속선 역시 건설비의 절반을 부채로 조달한 상황이다.

하지만 관북고속선, 그리고 기타 지선들은 운임 수익으로는 철도의 유지관리비용조차 충분히 조달하기 어려울 것이 확실시된다. 멀리 갈 것 없이, 경부선을 제외한 지금의 한국철도 노선 대부분이 바로 그렇기 때문이다. 이들 노선의 지속적인 현대화를 위해서는 건설과 운영에 대한 재정 지원이 필수적이다. 결국 북한 내 불균형 발전을 최대한 억제하는 데 철도가 기여하기 위해서는, 경의선에 대해 채권을 조달하여 아낀 재정을, 이들 선구에 집중하는 재정 운용 전략이 필요하다.

 

개발 독재의 암운

다시 배분과 선택이라는 문제로 돌아가 보자. 북한 측 철도망의 재건에 국공채나 재정을 투입하는 선택은, 그것을 통해 할 수 있었던 다른 일을 포기하겠다는 선택과 같다. 이 선택은 효율적이어야 함은 물론, 자원을 내어주고 기회비용을 버린 한국민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선택이 되어야만 한다.

김정은은 지금 이런 선택이 자신의 계산대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찾아온 평화 분위기 앞에 많은 한국민이 기뻐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변하지 않은 사실이 있다. 김정은은 인민의 인준을 직접 받은 통치자가 아니며, 억압적 통치 기구를 다각적으로 활용하여 인민의 의지와 자유, 자결권을 억압한 채 조선로동당의 일당 독재를 이어가는 인물이라는 명백한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그동안 한국 정부가 언급을 자제한 것은 오늘의 북한을, 그리고 근미래의 북한을 통제할 수 있는 집권 세력은 상당히 긴 시간 동안 김정은과 조선로동당뿐이라는 현실을 인정하고 상황이 급변하지 않도록 관리하기 위해서이지 김정은 정권이 어떤 이상을 실현하는 정부라고 보아서가 아니라는 점을 김정은과 로동당 간부들은 주지해야만 한다. 한국민 역시 흥분이 가시면 이 문제에 대해 다시 고뇌하기 시작할 것이다.

북한 체제가 지금까지 보여온 억압적인 모습은 유사한(다만 훨씬 더 느슨했던) 방식으로 한국민을 억압했던 과거의, 박정희∙전두환 시기의 한국 정부와도 비견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민은 이들 정권에 대해 지속적인 항의를 멈추지 않았으며, 그 결과 대통령을 일반 국민이 선출하는 등 정부에 대한 민주적 견제 장치가 크게 강화된 제6공화국이 시작될 수 있었다. 최근에는 이 민주적 가치를 여러 측면에서 훼손해 온 보수 대통령 두 명에 대한 정치적 항의가 결실을 맺었고, 사법 처리도 시작되었다.

김정은은 자신이 상대한 한국의 대통령이, 이런 정치사 위에, 그리고 한국민의 민주주의를 향한 의지 위에 서 있는 인물임을 단 한 순간도 잊지 말아야 한다. 한국이 준 자원을 진정으로 도움이 필요한 인구 집단에게 공정하게 배분하지 못하고, 억압적 통치 기구를 강화하는 데 주로 사용한다는 보고가 계속된다면 한국민의 여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 것인지, 그리고 점점 그 역량을 성장시킬 북한 인민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게 될 것인지 (아마도 이 글을 찾아볼) 김정은은 스스로 깊이 생각해보길 바란다.

문제는 이것이다. 30년에 걸친 철도망 개발이, 다만 김정은과 로동당의 억압적 통치 기구를 강화할 뿐 인민의 자유와 권리를 증진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김정은의 목표가 박정희∙전두환과 같은 개발 독재라면 대체 이를 돕는 일이 진정으로 인민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는 있는 것일까?

개발 독재, 그리고 그들 정권을 인정하고 도움을 준 미국의 가치 논쟁은 지금도 한국 현대사를 평가할 때 매우 뜨거운 논점이다. 30-50년 뒤 경제성장을 위해 어느 정도는 불가피한 자유화 덕에 북한의 학자들 역시 남한의 개발 지원에 대해 김정은의 개발 독재를 돕는 것이었으니 비난할 수 있다는 논쟁을 벌일 가능성이 있다(그리고 이런 해석에 기반해, 마치 한국의 뿌리 깊은 반미 운동권처럼, 반한 운동권이 북한에서 자라날지도 모를 일이다).

상황을 바꾸려면 필요한 것은 결국 김정은의 결단이다. 나는 최소한 다음 조건이 만족될 경우에만 위에서 제시한 철도망 개발 사업이 진정으로 인민을 위한 사업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김정은은, 비유하자면 박정희∙전두환보다는 노태우를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 현재 북한을 안정적으로 통치할 능력이 김정은과 로동당에게만 있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20년 정도의 시간이 지난다면,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인민의 역량이 강화된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때쯤에는 김정은이 권좌에서 내려오더라도 인민의 요구를 제대로 된 방식으로 대의할, 좀 더 체계적이고 민주적인 정치 체계 하에서 북한이 통치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희망이 섞인 한 가지 제안을 김정은에게 하고 싶다.

한국의 개발 참여가 확실해지면 지금으로부터 20년쯤 뒤 제헌 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거를 한국 선관위나 기타 국제 관리 하에 치르고, 변화한 북한의 상황과 인민의 요구를 반영하는 새 나라를 만들 수 있도록 필요한 준비를 차근차근 수행해 가는 것이 어떨까(물론 노태우는 감옥에 다녀왔고, 추징금도 논란의 여지는 있으나 어쨌든 완납했다. 김정은도 조국을 정의로운 새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는 담담하게 다녀올 생각을 하는 게 좋다고 본다).

사실 이렇게 해도 로동당의 재집권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라는 점을 바로 노태우와 김영삼이 보여준다는 사실 역시 참고하길 바란다. 한국과 북조선의 최종적인 통합은 이렇게 자결권을 찾은 인민이 결정하면 될 일이다. 한국민의 모든 의구심을 떨치고, 개발 지원이 억압적 체제를 강화하는 데 쓰이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려면 철도 로드맵은 정치체제 변화 로드맵으로까지 이어져야 한다.

북한 민주화 로드맵이 아예 없을 경우, 한국 정부가 국제적, 도덕적으로 처할 입장 또한 고려될 필요가 있다. 북한의 민주화에 대한 진전이 없는 상태에서 열린 한국의 지갑은, 마치 독재자들의 억압적 행동과 무관하게 그들에게 열려 있는 것으로 유명한 중국의 지갑과 그 도덕적 위계가 같아지고 말 것이다.

스스로의 힘으로 억압적 정권을 후퇴시키고 민주적 제도를 쟁취해 낸 한국민들이, 자신들의 지갑이 이런 식으로 평가받는 것을 원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정부의 외교적 수사와는 무관하게, 민간에서는 김정은에게 개발 독재가 가진 중요한 문제를 지적하는 한편 북한의 안정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인민의 자유와 권리를 실현하는 데 적절한 수준의 민주화 로드맵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발언이 이어져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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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제재 해제, 그 후] 1부: 북한철도 재건의 10가지 주요 과제 https://ppss.kr/archives/165137 https://ppss.kr/archives/165137#respond Thu, 24 May 2018 07:51:39 +0000 http://3.36.87.144/?p=165137 여러 해  북한철도를 지켜봤다. 아마도 무언가가 곧 바뀔 것 같다. 백지상태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특권이 정말 몇 주 내로 끝날 것 같아, 서둘러 논의해본다. 논의의 흐름은 이렇다. 북한 철도사업의 큰 흐름에 대한 일종의 로드맵이 있어야 한다. 어느 사업 하나 만만한 것이 없고, 2-3년 내로 끝낼 수 있는 사업도 없기 때문이다(다행히 문재인의 임기 내에 가시적인 것이 나올 사업은 두어 개 정도 있다).

또한 철도사업을 정도 이상으로 빠르게 하자고 하는 여론의 흐름은, 북한의 발전과 개발에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조언해야 하는 한국의 입장을 제대로 구현하려면 적절하지 않다는 점 또한 지적하고 싶다. 여기에 북한 내부의 극심한 불균형 상태를 감안하면 과거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당시 있었던 논쟁, 즉 이미 발전된 축선에 먼저 투자해야 하느냐 후미진 지역부터 주자를 해야 햐느냐는 논쟁을 다시 벌여볼 가치가 있다는 지적을 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김정은으로서는 가장 힘들겠지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개인∙일당독재라는 정치적 문제에 대해 논의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다음 글에서 논하겠다.

 

북한철도 재건의 간략한 로드맵

로드맵 포괄 사업

다음 10가지 사업이 북한철도 재건을 위해 단계적으로 이뤄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들 사업은 한국 측 영토에서 가능한 사업을 제외하면 모두 제재가 해제된 시점부터 이뤄져야 한다. 가장 첫 번째 이뤄져야 할 사업인 디젤기 지원이 의미가 있으려면, 제재 대상인 디젤유가 북한에 반입될 수 있어야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0년 차’는 대북제재 해제와 김정은의 확고한 개혁개방 의지가 드러난 해를 지시하는 것으로 규약한다.

 

0. 0-4년 차: 디젤기 100량 지원

이는 현재 북한 측의 기관차가 극히 부족하며, 특히 전력사정이 악화될 수밖에 없는 겨울에 전기기관차를 사용하지 못해 생기는 극심한 수송 애로를 돌파하기 위해 필요한 가장 시급한 사업이다. 100량이라는 물량은 최소한의 수준이다. 모든 주요 노선에 일상생활과 부합하는 빈도의 열차를 공급하면서, 큰 무리가 없는 운전 일정과 시각표를 짤 수 있는 물량이기 때문이다.

북한 측 간선 철도의 표정속도는 여러 보도나 노무현 정부 당시의 시운전 데이터로 보아 대략 40-50km/h로 추정된다. 그리고 북한 측 간선철도의 현재 길이는 대략 4000km 수준이다. 계산 편의를 위해 간선이 하나의 노선이라고 가정해 본다. 기관차 100량을 모두 투입하면, 열차 100편이 대략 40km 간격으로 배열될 수 있다. 물론 왕복을 기준으로 하면, 같은 방향으로 향하는 열차 간 간격은 80km 수준이 될 것이다.

험지 운전이나 장대열차 보조기관차로 쓰일 차량, 수리를 위해 빠질 차량, 비상을 위해 대기해야 할 예비차량 등 여러 명목으로 본선 운전에 투입되지 못할 차량, 그리고 도착지에서 입환 중이거나 하루가 끝나 기관차고로 들어간 열차까지 합쳐 절반 정도만이 본선을 주행한다고 가정해 보자. 대략 160-200km 정도마다 한 편의 열차가 통과하게 될 것이다. 표정속도로 계산하면 4-5시간마다 1편 정도의 열차가 된다.

주요 도시의 역을 아침, 점심, 저녁에 한 편씩의 열차가 통과한다면, 그리고 아침과 저녁 차량은 근거리 통근에, 점심 열차는 장거리 이동에 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배정한다면 현재 극심한 수송난에 시달려 목탄차량까지 이용 중인 북한 인민의 교통 상황을 크게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한국철도의 디젤기관차는 300량도 채 되지 않는다. 131량이 운행 중인 디젤동차를 넘겨주는 것 역시 가능하지만, 이들 열차는 한국에서도 배차 간격이 매우 긴 지방선에서 주로 활약하는 만큼 북한 측에게 즉시 넘겨줄 경우 그 빈틈을 메울만한 열차가 없다. 디젤 동력차 상당수를 새로 만드는 작업이 꼭 필요하다.

물론 북한 측 ‘방통(객차나 화차처럼 부수된 철도차량을 지시하는 말로 탈북자들의 매체를 참고하면 일상에서 널리 쓰이는 말로 추정)’의 제동관 및 기타 제어장치와 기관차 설비를 호환시키기 위한 조치나, 북한 측에 주요 역에 기관차 경정비 시설을 갖추는 작업도 반드시 필요하다. 철도차량의 제작에는 통상 2년이 걸리고 설비 호환을 위한 작업이나 북한 측 기관차 정비 시설 건설에도 시간이 필요하기에, 가장 먼저 이뤄져야 할 디젤 차량 긴급 지원 프로젝트 역시 적어도 3-4년 정도를 잡고 준비해 나가야 한다.

북한철도 주요 지명을 숙지하고 시작하자

 

1. 1-4년 차: 경원선 연결

이미 물리적으로 연결된 경의선 이외에, 동해선을 연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보도가 줄을 이었다. 나는 이것이 적절하지 않은 결정이라고 본다. 동해선을 현 한국철도망과 연계하기 위해서는 제진에서 강릉까지 110km에 달하는 거리에 새 철도 노선을 부설해야 하는 데다, 이렇게 접속된 강릉지역의 철도는 강릉역에서 원주 방면 선로와 삼척 방면 선로가 나뉘는 구간은 단선인 상황이다.

강릉지역은 철도를 지상으로 부설하는 데 극렬하게 반대한 바 있기 때문에, 강릉 시가지를 완전히 우회하는 선로를 건설하지 못하면 이곳 강릉의 병목 때문에 동해선을 이용한 대량 철도 수송은 어렵다. 동해선 영덕-삼척 구간 역시 여전히 완공까지는 수년이 남았고, 속초에서 접속하는 춘천-속초 간 철도는 단선철도로 설계 중인 데다 경춘선 서울 측에도 용량과 구조상의 한계가 있다.

게다가 부산항과 동해선 사이의 접속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부산 도심을 직접 관통하는 열차를 운행하거나(북항), 창원-사상간 철도 건설, 또는 대구에 고모(경부선)-가천(대구선)간 삼각선을 신설하기 이전에는 동대구에서 방향을 전환하거나 크게 우회하는 내륙 철도망으로 운행(신항)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들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는 데만도 적어도 7년은 필요할 것이다.

북한 측 문제도 있다. 동해선과 경원선은 원산 남측 약 15km 떨어진 지점인 안변에서 합류, 단선으로 북상해 원산으로 함께 진입하는 노선이다. 안변으로 진입하기 위해 동해선은 삼각주를 피해 빙 둘러가는 선형을 취하며, 이 덕분에 군사분계선에서 안변에 이르는 거리도 경원선이 대략 20km 짧다(월정리-안변 104.9, 제진-안변 125.9). 서울에서 원산으로 향하는 거리는 말할 필요도 없이 경원선이 훨씬 짧다. 추가령 인근, 검불랑 일대의 고도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선이 구불거리는 지점에 직선화된 터널을 먼저 시공한다면 그 값은 더 짧아질 것이다.

아래에서 지적할 서울지역 병목 문제는, 개혁개방 초기 수년간은 열차가 하루 한 자릿수만 다니면 충분할 것이기 때문에 차차 해결할 문제라고 본다. 러시아 방면 연결이나 부산 방면 연결 역시 경원선이 우월하다. 원산부터는 평라선을 그대로 따라갈 수 있고, 부산에서 경원선으로 올라오는 망 역시 수도권 내부망을 임시로 활용하면 된다. 사실 동해선 연선 지방정부가 통과 화물열차의 대량 운용을 달가워 할 것인지도 의문이다.

어쨌든 동해선 투자를 반드시 하고 싶다면 삼남 지방에서 북한으로 올라가는 통과 화물 물량이 많아져 수도권 부근으로 화물을 접근시키지 않는 것이 꼭 필요한 시점에 해야 가장 효율적이다. 화물 물량이 이 단계가 되려면 적어도 개혁개방 이후 10년은 필요할 것이라고 본다. 규모와 수요, 제한된 재원까지 고려하면, 모든 면에서 동해선 우회 루트는 경원선보다 후순위로 구축할 노선이다.

경원선은 현재 백마고지역까지 북상해 있고, 같은 노선의 북한 측 이름인 ‘강원선’은 평강까지 남하해 있다. 양측 사이의 과거 철도 노선 길이는 약 17km다. 동해선에 필요한 최소 110km, 영남 방면과 수도권 방면 연결을 더 충실하게 하기 위해 필요한 약 300km의 투자와는 극적으로 다른 규모다.

평강고원과 철원 사이의 높이 차이가 상당해 구철도의 선형이 구불구불하긴 해도, 이런 규모 차이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다. 양측이 군단급 대병력을 주둔시킨다는 점을 감안하면 협의에 시간이 걸릴 수도 있지만, 개성 측 경의선 역시 지금도 양측 군단급 대병력이 서로를 노린다는 점을 감안하면 철도가 통과할 폭 10여 미터 토지를 확보하는 것이 그리 큰일은 아닐 것이다.

경원선 사업에는 중요한 정치적 이점도 있다. 동해선 연결은 사업 규모가 크고 아직 실무가 진행된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내일 당장 사업에 착수한다 해도 7년은 필요한 것이 통례다. 기왕에 짓는 김에 현대적인 고규격 철도를 건설해 중복투자를 차단해야 하니 더욱 그렇다. 하지만 17km 수준의, 그리고 당장 열차가 하루 몇 편 정도만 운행하면 되기에 요구 시설 수준이 낮은 단선 비전철 철도는 사업 기간이 그리 길게 필요하지 않다.

군 당국 간 협의가 원활하게 이뤄지기만 한다면 문재인의 대통령 퇴임 전에 사업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정치적으로도, 정권 재창출을 위한 대규모 행사는 꼭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경원선 연결은, 김정은이 투자를 집중하는 것으로 알려진 원산을 서울과 최단거리로 잇는 망을 확보하는 의미도 있다. 다시 말해 김정은에게도 경원선 개통은 희소식이다.

김정은을 다시 불러내어 개방과 개혁의 의지를 국제사회에 확약하는 자리를 만들고 민주당 정부의 집권을 이어나가는 동력으로 사용하려면 문재인 퇴임 전에 물리적인 성과가 있어야 할 것이며, 경원선은 여기에 가장 적합하다.

 

2. 0-30년 차: 수도권 우회선 투자

북한으로 올라가는 한국 측의 철도는 극히 빈약하다. 경의선 단선 하나만이 연결되어 있고, 앞서 제안한 경원선 투자가 이뤄져도 연결망은 단선 두 가닥에 불과하다. 이들을 복선으로 확충한다 해도, 그리고 고속신선을 추가한다 해도 삼남 지방에서 북한으로 올라가는 화물 처리는 어렵다. 동해선 투자는 이 문제를 감안한 것이겠지만 전라∙충청 지방에서 나오는 화물을 수송하기에는 어렵거나 지나치게 우회가 심한 데다 지적한 것처럼 연결을 위해 필요한 철도망의 규모도 만만찮다.

서해선(대곡-소사-안산-홍성)을 통한 화물 수송 역시 주변의 높은 인구밀도를 감안했을 때 대규모가 되기에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지나치게 붐빌 서해선, 그리고 여객 수요가 의심스럽고 연안 주운으로 상당 부분 대체가 가능한 동해선보다는, 어느 정도의 여객 수요가 존재하면서 철도가 아니면 접근하기 어려운 수도권 북동부와 내륙 지역에, 서울 외곽 순환 축선을 공급해 삼남 지방에서 북상하는 화물을 서울을 우회해 수송할 수 있도록 기반을 갖춰야 한다.

구체적인 제안은 연말에 출간될 내 책 『서울, 수도권, 철도: 거대 도시와 철도, 철도와 거대 도시』(가제)에서 확인하길 바란다. 여기서 분명히 지적할 부분은, 사업 규모가 매우 큰 만큼 북한 방면의 수요에 따라 탄력적으로 투자 규모가 분산될 필요가 있고, 최대 30년 정도를 두고 여유 있게 계획을 세울 필요가 있다는 점 정도다.

 

3. 1-7년 차: 신호 및 전력설비 표준화 결정 및 투자

현재 북한 측의 신호 설비 수준은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단선 구간이기 때문에 통표 폐색을 사용하는 듯하지만, 열차가 정면 추돌하는 사고가 일어났다는 기사도 있을 정도로 상황은 혼란스러운 것 같다. 하지만 철도의 경쟁력을 위해 절실한 고빈도, 고속 운전을 위해서는 신호의 현대화는 무엇보다도 절실한 과제다.

룡천역 수준으로 폭발하지 않는 이상 북한철도 관련해서 알 수 있는 게 거의 없지만, 매우 열악하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또한 지금의 경제난을 일으키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전력 관련 설비 또한 완전히 새로 정비해야만 할 것이다. 특히 북한 측의 전력설비는 DC 3000V를 기본 규격으로 하지만, 한국 측의 설비는 AC 25000V를 기본 규격으로 한다. 양측 직통운전을 위해서는 전력설비를 표준화하거나, 양측 전력에 모두 대응할 수 있도록 특별히 개조된 차량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양측 실무진들의 논의가 절실하다. 북한 전국에 깔린 전력설비의 규모는 방대한 것이기 때문에, 만일 북한 측 전력을 바꿀 경우 사업 기간은 제시된 것처럼 적어도 7년은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전력과 무관하게 필요한, 신호설비 투자 역시 작지 않은 규모인 만큼 비슷한 기간 진행되어야 한다.

 

4. 2-8년 차: 대형사고 발생구간 등 애로구간 보강 및 신규 복선터널 확보

북한철도에서는 대형 사고 소식이 자주 들려온다. 그리고 이 가운데 상당수는 산악 철도에서 발생한 사고들이다. 1996년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자강도 송원군 개고개 탈선사고에서는 적어도 네 자릿수에 달하는 사망자가 발생한 것 같다. 207년 12월에도 청진을 출발, 부령에서 회령으로 넘어가는 산악 지역에서 사고가 발생해 수십 명의 사망자가 있었다는 자유아시아방송의 보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 사고를 줄이려면 험지를 통과하는 구간을 개량하는 토목 사업이 절실하다. 이는 사고가 나면 큰 피해를 입게 될 북한 지방 인민을 위한 일일 뿐 아니라, 개혁개방이 진행되면서 일부 산악선 열차를 탑승하게 될 외국인이나 남한인들의 안전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사고 사례나, 북한 철도를 위성으로 관찰해 보면, 개량 투자가 반드시 필요한 극악한 험지는 아래 그림에 수록된 여섯 선구로 보인다.

대형사고 발생구간 등 주요 애로구간

이들 선구, 또는 기관사 등을 통해 수집된 다른 심각한 애로 구간에 대해서는 앞으로 건설될 복선전철의 규격에 맞는 복선터널 시공을 미리 시행해야 한다. 중복 투자를 막기 위해서일 뿐 아니라, 산악지역의 개발과 균형 발전을 위한 최소한의 선투자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5. 3-13년 차: 주요간선 최고속도 증속투자

현재 북한철도의 표정속도는 45km/h 수준이다. 물론 낮은 속도지만, 지금도 태백선, 경북선, 경전서부선과 같은 남한의 일부 지방선에서는 이보다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가 기록되는 만큼 특별한 현상은 아니다. 어쨌든 수도권 광역철도와 비슷한 속도로 달리는 열차로는 북한 전국을 연결하기에 지극히 부족하다. 고속철도 투자를 즉각 수행한다면 물론 좋겠지만 이는 막대한 비용과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일인 데다 주요 거점도시·거점노선만 연결할 수 있고 우리의 면 단위에 해당할 작은 마을을 연계할 수도 없다.

기존선의 최고속도를 증속시켜 철도의 상황을 개선하는 투자가 북한 전국에서 이뤄질 필요가 있다. 다만, 초기 단계에서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한 토목 사업(평면, 종단선형 개량)은 최소화하고 궤도의 각 요소를 개량해 고속·고빈도 운전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본선의 목침목을 압축콘크리트 침목으로 교체하고, 레일을 50kg 이상 중량레일로 교체하며, 아직 강자갈을 쓰는 도상은 모두 쇄석으로 교체하는 한편 되도록 장대레일 구간을 확보해 고속 주행시 레일 이음매에서 일어나는 충격을 줄인다.

북한 전역의 간선망에 이런 작업을 수행하는 것은 매우 긴 호흡에서 이뤄져야 할 일이다. 일례로 한국철도의 장대레일화는 1980년대에 시작되었지만 30년이 지난 지금도 장대레일 보급율은 여전히 70% 수준이다. 목침목이 남은 측선도 아주 흔하다. 다만 주요간선의 대부분 선구에서 100km/h-120km/h 이상의 운전을 가능하게 해 표정속도를 70km/h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개량은 10년 정도의 사업 기간 내에 마무리해야 하며, 특히 아래에서 논의할 이유로 경의선과 평라선 이외의 축선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투자가 이뤄져야만 한다.

 

6. 4-16년 차: 경의고속선

경의고속선

경의고속선을 6순위에 놓은 것은, 이 노선이 시급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앞서 제시한 과제들이 훨씬 더 시급하거나(0, 3, 4, 5순위) 남한 측에서 사업을 개시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기 때문이었다(1, 2순위). 경의고속선이 구체적으로 어디를 거쳐 가든, 그 활용법이 어떻게 되든, 그리고 서울 시내 노선이 어떻게 되든 분명한 건 이 노선은 평양과 신의주를 지날 것이며 수도권·인천공항과 북한 관서 지방·요녕성을 잇는 주축선이 될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엄청난 투자를 필요로 할 것이라는 사실이다(개인적으로는 해주 경유에 찬성한다).

일각에서는 이 사업이 불과 2-3조 원, 그리고 2-3년이면 된다는 주장을 하지만 이는 향후 수요 증가에 따라 순차적으로 구매해야 할 물량에 해당하는 고속철도 차량 가격(10량 KTX-산천이 약 400억 원, 2조 원=50개 편성=경부고속철도 1단계 사업 좌석 물량의 절반 수준) 정도밖에는 안 될 돈이다. 북한의 노동력을 동원한다고 해도 그것이 통하는 것은 토공 구간뿐이다. 고가나 터널은 한국 측의 장비가 동원되어야 하고, 평양 시내 구간에서는 역과 본선을 대규모로 정비하는 작업 또한 필요하다.

평양 시내에서는 10면 20선의 대규모 역사가, 4복선 정도의 대규모 본선이 필요할 것이다. 평안남도 일대에는 석회암 지대와 탄전이 있어 지질이 좋지 않은 데다 심지어 어디에 석회동굴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심각한 문제점도 있다. 이런 악조건을 극복하려면 대부분의 토목 공사를 장비를 통해 수행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적어도 중국 측 복선전철의 단가를 사용할 필요는 있다. 아마도 2-3조 원이라는 계산은 자릿수를 착각한 데서 나온 오류라고 본다.

서울 도심과 인천공항 연계의 어려움, 평양 통과에 필요한 투자 규모, 평남 일대의 열악한 지질, 아주 많을 수밖에 없는 고가와 터널을 감안하면, 경의고속철도 건설에는 호남고속철도만큼의 시간적 길이, 그리고 중국 측과 호남고속철도의 중간 정도 되는 단위 비용 투입이 필요할 것이다. 호남고속철도 기본계획이 관보에 고시된 것은 2006년 8월의 일이며, 개통은 15년 4월이니 총 9년 4개월의 사업 기간이 들어갔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물론 기본계획 설정을 위한 사회적 논의 기간은 포함하지 않은 것이다. 이제 시작한 일인 만큼, 노선망에 대한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는 데만도 2-3년은 걸리는 것이 정상이다. 최소한 10년, 통상적인 템포로는 13년을 잡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더 시급한 사업들을 어느 정도 해결한 다음 사업을 본격 진행해야 하는 만큼, 경의고속선 사업을 시작할 시점은 대략 4년 차 정도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 이전에는 모든 노력을 디젤기 투입을 통한 운행 개선이나 애로구간 시설개량에 쏟아야 한다. 시간을 길게 잡을 이유 가운데 하나인 재원 분배 문제는 아래에서 논의한다. 또한 경의고속선의 연장이 약 450km이며(남한 측 연장도 최소 50km이며 공항연계 포함 시 더 길어짐), 호남고속선의 단가는 약 450억 원/km, 중국 측 복선전철은 200억 원/km인 만큼, 이들의 가운데 값인 300-350억 원/km를 적용하면 13.5-15.8조 원의 비용은 지출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7. 5-20년 차: 관북고속선

관북고속선

북한의 반대편, 동해안 쪽에도 고속철도가 필요하다. 특히 청진의 경우 서울과의 거리가 매우 멀고, 원산(36만), 함흥(70만), 청진(60만) 모두 그 규모가 충분치 못한 데다 후자의 두 도시는 주체 중화학공업(비날론, 주체철…)의 주요 거점들이기 때문에 아주 길고 근본적인 침체가 예상된다. 상당한 수준의 경기 부양과 산업 재배치 사업을 수행하지 하지 않으면, 개혁개방 이후 이들 도시는 말 그대로 몰락할 수밖에 없다. 부양 사업의 선두에 고속철도가 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 노선은 경의선보다 상황이 훨씬 더 어렵다. 서울 동부 지역에서 열차 착발을 취급할만한 역이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은 데다, 청진은 신의주보다 훨씬 멀기 때문이다. 원산까지는 약 180km(=서울-대전), 함흥까지는 300km(서울-대구) 정도의 거리겠지만, 청진까지는 600km에 달하는 거리가 될 것이다. 중국 측 심양∙대련까지의 거리와 비슷한 수준이다. 청진지역 공항의 건설 방향에 따라 고속철도의 경쟁력이 크게 좌우될 것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함흥까지는 어떤 경우에도 고속신선을 건설해야겠지만, 청진의 경우에는 항공과 보조를 잘 맞추어서 고속열차 공급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청진에서 북쪽으로 150km 정도 올라가면, 장춘과 훈춘을 연결하는 중국 측 고속철도(长珲城际铁路)가 연길을 통과하는 지점이 나온다. 이곳에서 중국 측 망과 연계 운행을 할 수 있도록, 두만강 만곡부까지 고속신선 투자를 장기적으로 진행할 수도 있다. 무연탄 위주인 북한 석탄산업은 축소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그에 상응하는 경제적 기회를 공급하기 위해서는 고속철도의 역할이 절실하다. 거리가 멀긴 하지만, 이 지역의 조선족들이 한국을 오갈 때 항공기 대신 택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8. 15-25년 차: 관서 지역(평북·평남·자강) 지선망 고속화 정비

두 고속선이 부분적으로 개통을 시작하면 추진해야 할 과제는 지선망에 고속열차를 투입하고, 이들이 고속 운전을 할 수 있도록 노선을 정비하는 과제다. 여기서는 관서 지역 지선망 정비를 우선해야 한다고 적었지만, 지역 균형 개발 방침을 좀 더 철저히 적용한다면 다음에 소개할 관북·패서 지역 노선을 더 먼저 시작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해 둔다.

이들 지역은 경의선의 백업 노선이 통과할 수 있고 평양 근교의 여러 도시가 경제 재건을 거치면서, 그리고 서울과 요녕성을 잇는 통로로 기능하면서 인구와 산업이 발전해 나갈 지역이다. 따라서 경의선의 백업 기능을 충분히 할 종축(남북축) 노선을 고속화해 고속열차가 고속으로 직결 운행하도록 도울 필요가 있다. 대표적인 노선으로 만포-강계-희천-개천을 잇는 만포선이 있다. 특히 이 노선의 북단인 만포는 옛 고구려의 고도 국내성을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지역이기에 한국인 관광객이 아주 많이 찾을 지역이다.

다만 이들 노선을 정비할 때는, 본선을 250km/h 규격으로 정비하더라도 구 단선을 폐지하지 않고 남겨두어 면 규모의 지역까지 속속들이 연계하는 완행열차를 계속해서 유지할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지금도 철도망이 있는 축선인 -개천-구성-삭주-중국 측 관전현(단동시)으로 이어지는 백업 노선 역시 개척,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9. 20-30년 차: 관북(함북·함남·량강), 패서 지역(황남·황북) 지선망 고속화 정비

북한철도망 제안 전체 약도

관북 지역, 패서 지역 역시 이유는 다르지만 정교한 철도 투자를 필요로 한다. 관북 지역은 거대한 산악 지역인 데다 쇠퇴가 확실시되는 무연탄 및 주체 중화학공업에 깊이 의존한 지역이기 때문에 다른 발전 동력을 공급해야 한다는 이유에서, 패서 지역은 거리가 유사한 충청권처럼 수도권에서 올라올 많은 제조업을 좀 더 효율적으로 배치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에서 그렇다.

관북 지역에서 먼저 정비할 노선은 혜산을 연결하는 혜산만포청년선·백두산청년선이다. 이 노선이 정비되지 않으면 량강도 지역은 제대로 된 전국적 경제 분업 과정에 참여할 수조차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혜산이 백두산 방면 관광 거점도시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삼지연∙대홍단 방면 지선망 또한 함께 다시 부설할 필요가 있다.

부전령을 넘어 혜산과 함흥을 직접 연결하는 노선은 지형이 매우 험준한 만큼 일단은 건설하지 않는다. 함북 지역에서는 앞서 언급한 회령-연길 방면 노선뿐 아니라 무산 방면, 라진 방면 노선도 고속화한다. 함흥에서 부전령을 넘어 혜산을 진입하는 노선, 그리고 황초령을 넘어 자강도 방면을 연결하는 (개마고원 관통 고속화) 노선은 30년 차 이후에 추진할 과제로 삼는 게 어떨까 한다.

패서 지역의 경우 황해 내륙의 신계 분지를 수도권 및 평양과 연결하는 노선, 그리고 황해 해안 지역을 모두 연결하는 해주-과일-남포간 노선을 별도로 고속화 노선으로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 지역 모두는 수도권과 가깝기 때문에 산업 입지로 각광받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를 철도를 활용해 질서 있게 개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개발 전략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 이 글은 「[대북제재 해제, 그 후] 2부: 개발독재라는 그림자」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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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철도를 통한 대륙연결은 정말로 철의 실크로드를 열어줄까? https://ppss.kr/archives/3548 https://ppss.kr/archives/3548#comments Wed, 04 Apr 2018 04:09:39 +0000 http://3.36.87.144/?p=3548 노무현 연간, 햇볕정책의 상징이자 실질적 효과는 개성공단과 경의선 복원이었다. 개성공단이 북한의 풍부한 노동력을 활용하여 중국 등지의 임금 상승 압박에 시달리던 국내 경공업 기업에 대한 지원책이자 북한 산업 재건의 초석으로 의도되었다면, 경의선 복원은 북한의 교통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한국과 대륙을 잇는 새로운 방법을 만들기 위한 시도로 의도되었다.

마침 육상 교통 수단 가운데 철도는 에너지 효율성과 저공해성을 갖추었고, 장거리 수송에 적합하며, 북한의 교통 네트워크 가운데 그나마 상태가 낫기 때문에 선택되었을 것이다. 이 두 성과 가운데, 철도는 그 채산성이 의심되는 광물 자원과 함께 북한의 개방을 이끌어 낼 경우 한국에게 가장 큰 이익을 가져올 수단이 될 것이라는 게 사람들의 생각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북한철도는 기술과 설비면에서 너무 낙후되었고, 너무 체제의 중심부에 가까우며, 그 직원을 신뢰할 수 없고, 러시아 방면으로는 궤간전환의 부담이 있는 데다가, 중국 방면으로는 동북 3성 방면을 제외하면 우회가 심하다. 물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설비 투자뿐 아니라 북한철도, 나아가 그에 의존하는 북한 체제 자체의 성격 변동이라는 광범위한 과제까지 완수해야만 한다.

어찌할 수 없는 기술적 사실, 즉 러시아 광궤의 존재와 현 시점에서는 극복할 수 없는 지리적 사실, 즉 중국 방면의 우회 역시 심대한 문제다. 한편 여객열차의 운행 역시 호사가들의 말잔치에 불과하다는 정황이 있다. 이제 이런 문제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고치기 힘든지 자세히 말해보도록 하겠다.

북남철도연결구간 열차시범운행
이미지 출처: 코레일

 

북한철도의 낙후성

철도 시설의 수준을 국제 비교하기 위한 지표로 총연장, 전철화율, 복선화율 같은 것들이 있다. 총연장이 긴 나라일수록 철도는 국토 구석구석에 뻗고, 전철화율이 높은 나라일수록 비교적 높은 효율을 지닌 전기 동력을 철도운송 동력으로 많이 활용하고, 복선화율이 높을수록 각각의 철도 노선이 많은 열차를 처리하며 속도도 준수한 구간이 많다고 볼 수 있다.

한국철도의 총연장은 약 3,500km 정도며 전철화율과 복선화율은 모두 50%를 막 넘긴 수준이다. 북한철도는 어떨까? 총연장은 남한보다 조금 길고, 전철화율 역시 상당히 높은 80% 수준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철도의 용량과 속도를 좌우하는 복선화는 사실상 전혀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위성 지도로 확인해 보면 평의선(평양~의주)간, 열차가 집중되는 일부 구간에 수십 km 정도의 복선 구간이 존재할 뿐이다. 쉽게 말하면 북한철도의 현재 시설 수준은 시설이 잘 정비된다고 해도 지금 정동진∙강릉으로 가는 열차가 다니는 영동∙태백선의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영동·태백선의 전철화는 수십년 전에 완료됐는데 말이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철도차량은 매우 무겁고, 또 제동거리가 도로차량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길다. 단선운행을 할 경우 정면충돌의 위험도 있다. 따라서 엄격한 노반∙궤도 관리가 필요하고, 신호를 통해 열차 운행을 통제해야만 한다. 이런 관리 없이 열차는 고속 주행을 할 수 없고, 신호 자동화가 이뤄지지 못하면 열차 운행 횟수가 제약되게 마련이다.

고쿠부 하야토((国分隼人)의 저서 『장군님의 철도: 북한 철도 사정(将軍様の鉄道: 北朝鮮鉄道事情)』(신초샤, 2007)에는 묘향산 등으로 가는 노선의 열차 내에서 찍은 동영상이 첨부되어 있어 대강의 상황을 추정할 수 있다. 이렇듯 전해지는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볼 때 노반과 궤도의 상태는 결코 고속주행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철도 신호의 경우 선로의 일정 구역에 하나의 열차만 진입할 수 있도록 하여 열차 사이의 간격을 유지하게 하는 시스템인 폐색 시스템에서 문제가 크다는 지적이 있다(유근수, 「남북철도연결에 따른 철도신호제어시스템의 개량 방안」, 광운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2: pp. 30~49). 자동폐색장치가 설치된 선구는 평양지하철뿐이며 선로연장의 60% 정도는 개통은 역무원이 하고 폐쇄는 열차가 진입하면 자동으로 이뤄지는 반자동 폐색장치, 40%는기관사에게 주어진 표식을 보고 선로를 개통시켜주는 전적인 수동 시스템 통표 폐색을 이용한다고 한다.

대량의 물동량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이런 신호들을 경부선에 준하는 수준으로 개량하고 현재 북한철도에 전무한 열차 자동 정지장치(ATS) 설비와 같은 것을 설비해야 한다(유근수, 앞의 글, 76~88쪽). 급커브가 워낙 많아서 대규모의 선형 개량이 필요하다는 것도 심각한 문제다. 곡선반경 600m는 남한의 새롭게 개량된 철도에서는 급곡선이지만 북한의 설계기준에서는 곡선 가운데 가장 완만한 곡선이다.

외형부터 포스 넘치는 북한 철도.
외형부터 포스 넘치는 북한 철도.

물론 이런 지적에 ‘충분한 투자를 하면 될 것이다’ ‘북한의 풍부한 인력을 활용하면 철도 개량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라는 반론도 가능하다. 그러나 철도공사 연구원에 의해 수행된 북한 철도시설 개량에 대한 연구(홍천희∙정상기, 「북한철도 건설인력 수준과 활용 방안 연구」, 2010)를 보면 이런 반론은 북한의 취약한 기술 수준 덕분에 무효가 될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요약문에 따르면 북한철도 기능공의 기능 수준은 남한의 15~20% 수준, 무기능공은 30~50% 수준에 불과하다. 소수의 남한측 기능공 투입으로는 철도 개량 공사를 하며 만날 수많은 난점에 쉽사리 돌파구를 열 수 없을 것이라 보는 것이 좋다. 북한측 인력 양성이나, 정말 열악한 근무 환경에 엔지니어들을 대거 보내는 방법 가운데 택일을 하는 것만이 북한철도 개량을 원활히 할 수 있는 방법이지만 무엇이 되었든 애로사항이 꽃피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다. 빠른 사업 진행을 꿈꿀 수는 더더욱 없다.

또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남북철도망은 서울이라는 병목을 통과해야만 남한 각지로 연결된다는 점이다. 주로 물동량을 담당할 것으로 예상되는 경의선은 서울역을 통해 경부선과, 용산역을 통해 중앙선과 접속되는데, 이들 선구는 다들 알다시피 사람을 빼곡히 태운 전동차와 고속열차만으로도 선로 용량이 모자란 곳들이다. 이를 우회하기 위해 대곡~소사~안산 방면을 통해 서해선으로 접속되는 철도를 건설하고 있으나, 이는 대곡에서 소사를 지나 시흥 일대까지 지하로 다니는 철도로서, 디젤견인 열차는 다닐 수 없고 컨테이너 이외의 화물도 취급하기 어렵다.

물론 전철과 공용하기 때문에 이 노선의 용량에도 한계가 있다. 석탄이나 양회와 같은 벌크 화물들은 여전히 경부선과 중앙선을 통해 남하해야 하는데, 이는 여객열차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계획으로 채택할 수 없다. 다른 축인 경원선 역시 중앙선과 경부선으로 연결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또 경원선은 전선 복선에 불과하여 의정부 이남으로는 2복선화를 할 공간이 남아있지도 않다. 동해선이 있다고 반문할 수도 있으나, 제진역과 가장 가까운 남한측 철도역은 직선거리로만 100km 떨어진 강릉역이다(춘천이 직선거리가 더 가깝긴 하지만, 춘천에서 출발한 철도는 속초를 거쳐 갈 것이다).

일부 문헌에서는 원주~춘천~철원을 잇는 수도권 우회선을 짓자는 제안도 하고 있다. 물론 이 노선 역시 최소한 120km 이상의 연장을 지닌 노선이 될 것이다. 여하간에, 서울을 우회하면서도 화물열차 운용에 제약이 적은 철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매우 많은 자금과 노력이 필요한 셈이다. 동해선 복원에만 수조 원, 수도권 우회선 추가에도 수조 원이 투입되어야 한다.

용산역의 넘치는 철길들.
용산역의 넘치는 철길들.

요약하자면, 북한철도는 남한철도와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으로 낙후되어 있다. 비단 시설뿐 아니라 그것을 시공하고 운영하는 인력의 역량 역시 의심스럽다는 보고는 북한철도 복원이란 대단히 장기적인 과제라는 것을 알려준다. 또한 서울 인근의 혼잡을 피하기 위해 새롭게 남측에 건설해야 하는 철도 투자 역시 막막하다. 아마도 동해북부선과 원주~철원선을 모두 시공한다면 10조 원은 너끈히 들어가지 않을까 한다.

남북철도의 원활한 연결을 위한 시설투자에 필요한 노력과 시간, 자금은 막대한 수준이다. 이를 위한 비용을 과연 얼마나 어떤 식으로 부담할 것인지 전문 영역 밖에서는 누구도 분명히 공론화하지 않았다. 철도 연결이 가져올 밝은 미래만 강조하고 그 비용 부담에 관심을 기울이고 싶어 하지 않는 태도로는 합리적인 의사 결정을 하기 힘들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를 보면 북한철도뿐 아니라 남한의 공론장 역시 낙후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북한의 폐쇄성: 정보와 인적 개방을 장담할 수 있는가

군사정권 시절, 각 역사의 철도 시설물 특히 여객 처리와 관련 없는 부분을 촬영하는 것은 요새 군 기지나 발전소를 촬영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또, 쏘련의 작전계획에는 유사시 남한에 대한 핵 공격 지점으로 부산항과 더불어 대전조차장이 실려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는 철도가 유사시 수송의 중추가 되어 물자와 병력을 실어나르는 통로가 되기 때문이었다.

도로가 몹시 발달한 남한에서도, 여전히 철도가 이렇게 중대한 역할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제일 중요한 것으로 꼽을만한 것은 역시 수송을 통제하기 쉽다는 것이다. 앞서 얼핏 다뤘지만, 철도는 안전을 위해서라도 정밀한 신호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열차 사이의 간격을 유지해야 하고, 또 열차의 행로를 조절해야만 하는 것이다. 기관사는 자력으로 방향을 바꿀 수 없고, 또 육안으로 안전한 간격을 유지할 수 있는 속도 수준은 매우 낮다. 이를 보조하기 위해 신호가 있다. 이 신호 시스템에 실려 돌아다니는 정보를 모두 수집할 수 있다면, 현재 어디에서 어떤 열차가 움직이고 있는지를 모두 밝혀줄 수 있다.

북한의 경우는 남한보다 훨씬 더 철도가 중요하다. 화물의 90%, 여객의 60%가 철도로 수송된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이는 물자와 인력의 수송을 용이하게 통제하려는 의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는, 공산권 특유의 개인 차량 통제 방침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북한에서는 다른 모든 집단의 수송력을 합쳐도 철도부를 따라갈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제, 철도공사의 화물 열차가 평양이나 중국으로 가기 위해 평부선(평양~부산간 선구라는 말로, 실질적으로는 평양~개성간 선구를 지시한다)으로 진입했다고 해 보자. 화주는 화물이 안전히 목적지에 도달하기 바랄 것이고, 철도공사는 직원이 안전하게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길 바랄 것이다. 이를 믿을 수 있으려면, 열차 운행정보를 화주와 철도공사가 실시간으로 받아볼 수 있어야 한다. 현재 한국철도공사는 이런 정보를 제공하고 있고(철도물류정보서비스. 이전에는 누구나 볼 수 있었으나, 철도 동호인의 접속 증가로 인한 트래픽 우려로 인해 회원제 열람으로 전환했다), 여타 철도 사업자 역시 이런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다. 여기서 내가 우려하는 바는, 북한철도성 측이 자신들의 열차운행정보를 이처럼 공개할 의사가 없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북한은 이런 기본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다는 말.
북한은 이런 기본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다는 말.

물론 철도공사라고 해서 모든 열차의 운행정보를 일반에 공개하지는 않는다. 대통령 전용열차 “경복호”의 정보는 철도물류정보서비스상에 개재되지 않는다. 아마도 군화물(연보상에 “건설”이라고 써 있는 것이 군용 열차다) 역시 일반에 공개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열차는 이용객을 위해 일반에 공개된다.

북한철도성 역시 모든 열차를 화주 일반에 공개해야 할 이유는 없다. 일부 수송은 누락되어도 화주들에게는 상관 없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철도공사에게는 남북 연계수송과 관련된 간선의 모든 열차 운행정보를 공개해야만 한다. 그래야 원활한 연계 운전과 향후 운전계획 수립에 대한 피드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한철도성이 이런 민감한 정보를 과연 공유할 수 있을 것인지는 의심스럽다. 북한 철도의 간선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그대로 한국철도공사에 보고한다는 것은 곧 북한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상세하게 밝히는 것이나 다름 없는 일이다. 북한측으로서는 매우 부담스러운 일일 것이다.

열차운행정보가 원활히 공유되지 않으리라고 예상하는 것은 북한 철도 사고에 대한 정보가 매우 낮은 수준으로만 알려지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가끔씩 일어나는 열차 사고 소식에 귀를 기울여 보라. 룡천역 폭파사고 이외에는 상세한 보도를 보기가 힘들다. 대북 방송이 탈북자나 조중국경을 오가는 사람들로부터 얻은 정보를 토대로 보도하는 것이 전부다. 철도사고를 이처럼 은폐해서 얻을 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없음에도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은, 북한이 운행정보를 제공하는 협력을 과연 순순히 받아들일 것인지 의심스럽게 만든다.

남북철도 직결시, 북한 철도성은 또 다른 부담을 져야 한다. 한국철도공사 직원들이 북한철도의 주요 역에 파견 근무를 나가거나 적어도 자주 들락거려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군사정권 시절 역사의 철도 시설물을 촬영하는 것은 꽤 성가신 일이었다는 지적을 했던 바 있다. 이는 역이 열차 운용을 통제하는 핵심 시설이기 때문이다. 이 곳에서 열차를 조성하고, 행로 변경을 하며, 열차 간격을 조절하기도 한다. 이런 활동을 위한 시설물들은 취약한 부분이 있고, 따라서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외부인의 출입이 통제된다.

그렇다면 북한 철도성측은 철도공사 직원을 외부자로 보고, 그들로부터 철도 시설물에 관한 정보를 보호하려 시도할 수도 있는 것이다. 북한측이 자신들의 정보에 대해 보이는 폐쇄적인 태도들은 이런 심증을 강화한다. 이들은 한국철도공사가 자신들의 열차 운용에 개입하는 것을 매우 우려할 일로 여기고 있을 수 있다.

열차 운행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잠시 생각해 보면 이런 심증은 더욱 굳어진다. 예를 들어, 기관사는 자신이 운전할 철도 선로의 상태를 거의 암기하고 있어야 한다. 이는 곧, 철도공사 기관사가 북한 내에서 운전을 하게 된다면 북한 간선 철도의 상태를 외우는 비 북한인이 생긴다는 의미다. 정보 공개에 극히 소극적인 북한이 이런 선택을 할 가망은 낮지 않을까 싶다.

룡천역처럼 개박살나지 않으면 알려질 게 없는 북한 철도.
룡천역처럼 개박살나지 않으면 알려질 게 없는 북한 철도.

철도 정보를 외국과 공유하고, 외국의 철도 직원이 자국 철도시설물 내로 들어오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던 시절의 유산은 세계 국경지역 철도의 풍경 속에 여전히 남아 있다. 유럽처럼 국경 통과 자율화가 된 곳이 아닌 한, 많은 국경 통과 열차는 국경에서 기관차와 기관사를 교체한다. 선로가 익숙하지 않다는 문제도 있고, 사람이란 컨테이너처럼 세계를 정처없이 떠돌아다닐 수 없는 것이라는 문제도 있지만, 역시 외국인이 철도에 접근하는 것이 껄그럽다는 이유도 빼놓을 수 없다. 북한은 자신의 정보를 밖으로 드러내는 데 어느 나라보다도 소극적인 나라다.

이들의 태도를 바꾸지 못한다면, 남북철도 연결은 열차운행정보조차 제대로 공유되지 않고, 철도공사 직원의 북한철도 진입도 매우 제한적으로만 이뤄져서 열차 운행에 필요한 조건이 확립되었는지 확인하기도 힘든 상황 속에서 열차를 굴리는 상황을 낳고 말 것이다. 북한철도성이 간선의 정보를 명명백백히 밝히도록 유도할 방법을 함께 제시하지 못하는 한, 철의 실크로드는 그 속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암흑의 길로 전락할 수도 있다.

 

과연 북한철도 직원을 믿을 수 있는가? : 화차 실종 사건

앞서 지적한 문제는 북한 철도성의 전체 방침과 관련된 것이었다면, 지금 지적할 문제는 북한 철도성 직원들의 기강과 관련된 문제다. 북한에 반입된 중국측 화차가 누적 2천량(한국철도공사의 전체 화차 보유량 규모가 약 1.4만량이니, 2천량이 상당한 숫자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규모와 기능이 다르긴 하지만, 철도공사가 수도권 전철을 굴리기 위해 보유하고 있는 전동차의 수효도 2천량 정도 된다는 것을 참조할 수 있겠다)이나 실종되어, 중국측이 북한으로 더 이상 중국 소유 화차를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보도는 북한철도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들어보았을 것이다. 화차를 되돌려 보내지 않고, 사적으로 전용하는 결정을 내리는 것은 아마도 철도성의 최고위급이 아니라 각 역의 중간간부들일 것이다. 이런 전력이 있는 자들에게 화물을 맞길 수 있는지,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검토해야만 한다.

이 <화차 실종 사건>과 유비해 볼 수 있는 현상이 있다. 후진국에서는 중간간부들의 부패로 인해 구호물자 같은 것이 중간에 사라져 정작 구호가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물자가 가지 못하는 상황이 빈번하게 벌어진다. 물론 북한에서도 얼마든지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다. 화차와 화물은 물론 구호물자와 같은 성격을 지닌 것은 아니지만, 부패한 중간간부의 먹잇감이라는 점에서는 구호물자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중간간부들의 부패를 막을 대책을 수립하지 않고 북한으로 화물을 진입시켰다가는, 화차와 화물이 모두 실종되는 사건이 화차의 국적을 바꿔서 재발될 것이다.

문제는 쉽지 않다. 대체로 부패는 생활이 불안정해진 자가 저지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화차 실종 사건 관련 기사를 보면, 낙후된 창고 시설을 대체하고자 유개有蓋화차를 빼돌린 경우도 있다. 소득이 충분치 않고, 인프라가 충분하지 않아서 이런 부패가 빈발하는 것이라면, 결국 북한 철도성의 직원들에게 한국발 화물을 처리하는 댓가로 충분한 임금을 지급하고, 또 각각의 역사를 정비하는 지원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마도 적절한 대응 같다.

하지만 북한은 개성공단처럼 직접 고용관계에 있는 북한인들에게도 남측이 직접 임금을 지급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북한 철도성 직원은 직접 고용관계도 아닌데, 과연 중간간부의 부패를 막을 정도로 충분한 임금을 줄 뾰족할 방법이 있을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또, 북한 전역 수백개에 달하는 역사를 충분한 수준으로 정비하는 작업은 아주 장기적인 과제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중간간부의 부패로 인한 화차 실종 사건을 방지할 수 있는 장치를 설정하는 것 역시 매우 힘든 일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 많은 열차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 많은 열차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러시아 광궤 문제

러시아 광궤(1520mm)는 일찍이 유럽 방면에서의 침공을 막기 위해 유럽 대륙에서 쓰는 표준궤(1435mm)와는 다른 규격으로 설정된 것이다. 이것이 지금은 유라시아대륙 횡단 철송의 효율성을 낮추는 장애물이 되고 있다.

궤간이 다르면, 당연히 대차를 바꾸지 않는 한 달릴 수 없다. 아예 다른 화차에 싣는 방법도 있다. 궤간이 변화하는 대차를 도입하는 방법도 있지만, 궤간 가변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해 보면 철도기술연구원에서 관련 시험이 이뤄지고 있을 뿐 아직 수송에 적용하고 있는 단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광궤와 표준궤 열차를 한 궤도에 모두 운용하기 위해 3선을 까는 방법도 있기는 하지만, 국내에서는 관련 연구가 전혀 되지 않을 정도로 기술적으로 취약한 안인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러시아 광궤와 표준궤의 넓이 차이가 85mm 정도에 불과해 4선 궤도를 부설하기는 힘들고, 레일 사용 수준이 균등하지 못한 3선 궤도를 부설해야만 해서(라진 일대에 3선 궤도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음) 애초에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 듯하다.

환적 부담 또는 궤간가변대차의 비용 부담은 고스란히 운임으로 연결된다. 보도를 보면, 유럽쪽 러시아에 화물을 보내는데 걸리는 시간이 인도양 항로에 비해 두 배 정도 빠르기는 하지만 운임 역시 두 배 비싸다. 또한 남한과 철송 연결이 제대로 되지 않는 현 상황에서도 철도 용량 부족으로 인해 운임이 상승한다는 보고가 들리는 것을 보면, 복선철도의 수송력 자체도 선박에 비하면 그리 대단한 수준은 아니다. 또 유럽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러시아에서 다시 환적을 해야 하므로, 러시아 방면의 화물이 아니면 경쟁력을 갖추기 힘들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러시아 경제가 성장하면서 늘어날 트래픽을 생각하면, 내수 위주로 철도 용량을 사용하려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바이칼 호를 북으로 우회하여, 동해 북단/사할린 대안의 소베츠카야가반에 이르는 BAM 철도가 보조 축선으로 존재하기는 하지만 한반도에서 접근하려면 상당히 우회하는 것이 사실이다.

조봉현이 쓴 <남북한 철도수송 필요성과 과제> 4절에 재인용된 경의선 통과 트래픽 수준과, 교통연구원 성낙문의 발표문, 김명민∙조지현이 쓴 <철도 물류기지 구축을 통한 남북철도 활성화 방안 연구>(유통과학연구 8-2 (2010) 05-12)를 보면 대략적인 수송량 추정치가 실려 있다. 모든 예측에서, 낙관적 예측과 비관적 예측 사이의 규모 차이는 상당하다. 이는 투자가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 여부가 매우 불확실하다는 이야기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남북철도 연결이 열어줄 장밋빛 미래만 이야기한다면, 이는 우호적인 분위기 아래서 이뤄진 학계의 연구성과조차 무시하는 태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러시아로 가는 길은 그리 밝지만은 않다.
러시아로 가는 길은 그리 밝지만은 않다.

중국 방면 연결 문제

모든 연구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은 중국 방면 연결은 대체로 동북3성 방면 화물에서나 효과를 얻을 것이라는 점이다. 지도를 펼쳐보면 이런 결론은 쉽게 수긍할 수 있다. 북경으로 가는 화물이라고 해도, 매우 좁은 회랑을 따라 움직여야 하고 천진까지 가는 항로에 비해 우회가 심하므로 운임과 시간 면에서 그리 우세하지 못할 것이라고 보는 것이 좋다. 다른 지역은, 아예 바다를 운항하는 선박이 진입 가능한 내륙수로까지 있으므로 굳이 철도를 이용할 필요가 없다.

 

여객 운송은 무리

사실 지금까지 국내에서 이뤄진 어떠한 연구에서도 북한철도를 통한 여객 운송은 고려되지 않고 있다. 그야말로, 호사가들의 말잔치 말고는 아무런 이야기도 없다. 철도가 인접해 있으며, 정기적으로 남측 사람 수백명이 드나들고 수만 명의 통근 인파가 몰리는 개성공단에서도 정기 여객열차를 굴리는 계획은 없었다. 심지어 잠시 정기 화물열차편을 굴리던 시절에도 정기 여객열차는 진입하지 않았다. 행사용 특별 열차만이 다녔을 뿐이다. 수도권에서 이런 곳이 있었다면, 당장 민원 폭탄을 맞아 철도공사가 곤욕을 치루지 않았을까.

노무현 연간 당시, 해당 구간에 굴릴만한 열차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경의선에 다니던 디젤동차를 진입시키면 그만이었다. 또한 화물열차가 봉동역까지 정기 운행하였으므로, 철도공사에 숙련 기관사가 없는 것도 아니었고, 정기 운행에 따른 절차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개성공단 관련 인원이라는 일 수백명의 정기 수요도 있다. 수백명이면 열차를 굴리기에 적지 않느냐는 지적을 할 수도 있지만, 경북선 같은 한가한 선구의 승객도 그 정도 밖에는 되지 않는다. 화물열차 역시 화물이 별로 없음에도 몇 년간 계속 다닌 바 있다.

게다가 개성공단으로 통근하는 노동자의 숫자는 확실히 철도의 도움을 받으면 좋은 수준인 수만 명에 이른다. 상황이 이런데도 여객열차를 굴리지 못했던 것은 의지가 없었거나 무언가 심각한 제약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상세한 것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으나, 열차에 탑승한 채로 CIQ(세관Customs∙출입국Immigration∙검역Quarantine의 약자) 를 통과하는 게 문제가 된 것이 아닌가 추정해 볼 따름이다. 열차에 탄 채로 CIQ를 받을 수 있게 만드는 노력이 성공하지 못했다면, 북한을 통한 여객열차 운행은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다.

운좋게 CIQ 통과를 비롯한 각종 장벽이 제거되었다고 해 보자. 개성 관광 정도는 열차로 다닐 수 있을지도 모른다(금강산 방면 연결은 남한쪽 철도가 미비하여 십년 간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이상은 2, 3절에서 제시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승객과 승무원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위험천만한 여행이 될 뿐이다.

평양과 중국 동북지역으로 가는 고속선(고속열차가 전속력으로 다닐 수 있는 고규격의 전용선)을 놓고, KTX를 굴리자는 호사가들의 주장도 있기는 하다. 물론 지금 당장 시작해도 행신역에서 북행 KTX를 탈 수 있는 것은 10년은 지나야 하는 일이긴 하다. 여하튼 이 경우, 서울에서 약 200km가 좀 넘게 떨어진 평양까지는 1시간 정도, 400km가 좀 넘게 떨어진 신의주까지는 2시간 정도면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국 동북은 멀다. 신의주에서 요녕성의 성도 선양까지는 직선거리로만 220km 정도다. 1시간 이상이 소요될 것이다. 현존하는 고속선을 따라가면, 장춘이나 대련까지는 추가로 한 시간 이상, 하얼빈까지는 여기에 추가로 한 시간 이상이 걸린다. 한편 선양에서 북경까지는 684km에 달하며, 평균속도 300km/h로 달린다고 해도 2시간 20분이 걸린다. 사실상 선양에서 하얼빈이나 북경까지는 3시간이 걸린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를 합산하면, 서울에서 선양까지 최소 3시간, 하얼빈까지 5시간 반, 북경까지 6시간이 걸린다는 이야기다. 일본의 사례를 보면, 도쿄 역에서 신칸센으로 약 3시간 20분 정도 소요되는 오카야마를 넘어서면 고속열차보다 항공기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고 한다. 그렇다면 중국 방면 고속철 연결 역시 선양을 넘어서면 항공에 밀릴 것이 자명하다. 인프라 공유를 위한 표준 정비 정도는 이에 비하면 큰 어려움이 아닐 것이다.

결국 북한행 또는 북한 경유 정기 여객철도는 시범사업이 가능한 상황이 있었음에도 실현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전망이 어둡고, 또 주요 목적지가 너무 멀다는 점 때문에 고속철 사업의 경우는 그리 채산성을 기대할 수 없다. 서울발 유럽행 열차 같은 것은 관광열차 수준의 소략한 사업에 불과하니 분석하지 않아도 상관 없을 것이다. 단, 개성공단행 열차조차 굴리지 못하는 상황에서 북한을 관통하는 열차를 기대하는 것은 대단한 시기상조라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텅 빈 평양 공항, 하지만 기차보다는 개발성이 좋다.
텅 빈 평양 공항, 하지만 기차보다는 개발성이 좋다.

 

총정리 : 북한 철도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버려라

북한철도 연결에 수많은 난관이 있을 것이라는 짐작들은 많은 분들이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물리적 시설 수준과 북한의 기술력 자체가 처참한 수준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듯하다. 게다가 남한의 철도망은 북한과의 연결에 적절한 형태로 정비되어 있지도 않다. 또 대륙국가와의 연결로 인한 경제적 이득 역시 생각보다 큰 수준은 아니라는 것이 관련 연구에서 확인된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문제는, 북한철도의 정보 및 인적 폐쇄성을 바로잡고, 또 해이해진 북한철도 직원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북한 정권의 행동이 매우 근본적인 수준에서 변화해야 한다는 점이다. 열차운행정보와 사고정보를 정확히 전파하고, 화물과 열차가 중간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보의 개방과 인적 개방, 그리고 북한철도 직원의 처우 개선이 있어야 하지만 이것은 북한 정권이 현재까지 해 온 행동과 충돌한다.

게다가 철도는 간선 노선만 하더라도 전국 주요 도시를 관통하고 있으며, 열차와 관련 정보가 집결하는 거점인 철도역은 각 도시의 중심이기도 한 만큼 철도 개방의 영향력은 북한정권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클 것이다. 다시 말해, 간선철도와 철도역 그리고 관련 정보에 대한 개방은 사실상 전국 주요 부분에 대한 상당한 수준의 개방을 의미하는 것이다.

남한에서도 철도가 중요하지만, 북한에서는 사실상 모든 수송이 철도로 이뤄진다는 점도 생각해야만 한다. 철도 개방은 특구 지정을 통해 제한적 개방만을 추구해 온 북한정권으로서는 해본 적도, 생각한 적도 없는 수준의 급진적인 개방일 것이다. 결국 광범위한 북한의 개혁개방 없이는 신뢰성 있는 철도 운행은 어렵다. 하지만 이를 어떻게 성취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찾기 힘들다. 현재까지 이뤄진 북한측의 철도 개방은 특구 개발의 장식품 수준에 불과하다.

결국 북한철도 연결이 정말로 철의 실크로드가 되기 위해서는, 호사가들의 말잔치가 아니라 정말로 북한철도를 상당한 수준으로 개방할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현재의 정보 개방 상태에서 열차를 굴리는 것은, 심하게 표현해서 화물과 화차를 실종 또는 사고로 대파되는 길로 내보내는 일이다. 이런 상황을 외면하고, 북한철도 연결이 장밋빛 미래를 열어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지한 행동이자 무책임한 행동이다. 독자 제위의 현명한 판단을 바란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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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독일의 탈핵’은 성공적일까? https://ppss.kr/archives/125922 https://ppss.kr/archives/125922#respond Thu, 03 Aug 2017 07:02:29 +0000 http://3.36.87.144/?p=125922 “탈핵”을 시도한 독일 에너지 관련 이야기가 참으로 많다. 하지만 제대로 된 데이터는 찾을 수 없어 매우 안타까운 수준의 논의만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 와중에, 나는 아주 세밀한 통계 출처를 하나 찾을 수 있었다. 태양에너지시스템을 위한 프라우호퍼 연구소 (Fraunhofer Institute for Solar Energy Systems)가 독일 전력 당국의 각종 통계를 세밀하게 정리해 놓은 다음 사이트가 바로 그곳이다. 이번 주에는 이 통계와 유로스탯의 통계를 활용해 독일의 “탈핵”을 평가해 보도록 하겠다.

 

전원별 발전량

그림 1 독일의 전원별 발전량.

전체 발전량 추이를 먼저 살펴보자. 가장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원전의 발전량일 것이다. 최대 발전량을 기록한 06년(159TWh)에 비하면, 16년 원전의 발전량은 분명 거의 절반 정도로 줄었다(80TWh). 물론 2011년에 갑자기 원전을 여러 기 닫지 않았다면 이러한 변화는 더 완만하게 이뤄졌을 것이다.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독일에게는 석탄이 매우 중요한 발전 연료다. 중간 노란색과 파란색 연료가 바로 그것이다. 독일은 분명 이들도 함께 감축하겠다는 메시지를 국제사회에 보냈다. 하지만 독일은 석탄 의존을 사실상 줄이지 못하고 있다. 원자력의 감소에 비해 석탄의 증대가 큰 편은 아니지만, 발전량의 절반 가까운 물량을 석탄으로 채우고 있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석탄에서 나오는 전력은 2016년에도 여전히 236TWh에 달한다. 특히 갈탄은 원전 다음가는 기저 연료로 계속해서 활용되고 있으며, 유연탄보다 그 물량과 비율이 더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상황이다.

국내에서는 정말로 업계인이 아니면 주목하는 경우가 없지만, 위 그래프를 자세히 보면 바이오매스의 역할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곧 시간당 그래프를 살펴보겠지만, 현재 독일에서 원전을 실제로 대체하고 있는 것은 태양광이나 풍력이 아니라 바이오매스이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떠들썩했던 가스 발전의 역할은 그리 대단하지 않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해 서방의 대러 제제가 있었던 14년, 15년의 물량은 이전에 비해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30GWh). 16년에는 다시 물량이 회복세를 보이지만, 그 물량은 바이오매스만 못한 상황이다.

2016년 현재 독일의 전력믹스에서 재생가능에너지의 비율은 33%에 달한다. 하지만 이 가운데, 태양광(7%)과 풍력(14%)의 합은 21%라는 점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다. 4%의 수력, 그리고 특히 9%의 바이오매스가 하고 있는 기여를 무시하면, 독일 신재생의 실상을 놓치고 말 것이다. 바이오매스와 태양광∙풍력을 구분해서 이해해야 하는 이유는 아래에서 상세히 이야기하겠다. 핵심은 기저 전원과 간헐적 전원 사이의 차이에 있다.

 

풍력과 태양광: 수출까지 하거나, 아예 모자라거나

풍력과 태양광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풍력은 2016년 현재 15%, 태양광은 7% 정도의 전력만을 공급하고 있을 뿐이다. 독일 내 풍력에서 얻는 전력은 아직 원자력에서 얻는 전력을 추월하지 못했고, 태양광은 바이오매스보다 그 양이 적다.

그래프의 아래쪽에는 순수출이 함께 표시되어 있다. 신재생에너지가 확대되면서 전력 수출도 증가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그 이유를 이해하고, 태양광과 풍력 발전기가 어떻게 가동되는지, 정말로 이들이 원전을 대체하고 있는 것인지 파악하기 위해 아래 그림이 필요할 것이다.

그림 2 수출입을 감안한 2017년 6월 독일의 시간대별 전원 믹스.

2011년 원전의 급격한 감축 이후 몇 년간 독일은 대부분의 시간동안 전력을 수입해 왔던 것 같다. 하지만 최근 들어 독일은 전력을 활발하게 외국 망에 수출하고 있고, 따라서 프랑스의 원전으로부터 도움을 받는다는 진술은 사실과는 달라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수출은 한국으로서는 따라 할 수 없는 성격을 가진다는 점도 명확히 해야만 한다. 핵심은 신재생 발전량이 집중되는 시간대에 주로 순수출이 기록된다는 데 있다. 위 그래프에서, 하한선이 0GW 아래로 떨어지는 시간대(전력 순수출이 기록되는 시간대)와 태양광이 대폭 증가하는 시간대가 대체로 일치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독일 내에서 쓰거나 저장할 수 없을 정도로 처치 곤란한 전력이 태양광이나 풍력에서 쏟아져 나오는 시간대가 있고, 이것을 수출로 해결하고 있다는 서술이 이 그래프를 설명하는 데 적절할 것이다.

프라우호퍼 연구소 홈페이지에서 수출입을 빼고 그림을 다시 그려보면, 태양광과 풍력이 쏟아지는 시간대에는 가스나 유연탄, 심지어 갈탄 발전소까지 발전량을 줄인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원전까지 발전량을 조정하는 시간도 가끔 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예를 들어 2017년 6월 24일 밤 시간대). 태양광이나 풍력에서 통제할 수 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전력을 위해 전체 체계를 조정하는 상황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한국 전력망은 전력을 수출할 수 없는 고립계다. 그런데 독일의 사례에서, 기저 전원을 내렸음에도 남는 전력의 상당 부분은 수출로 해결하고 있다는 것이 위 분석의 결과다. 결국 한국이 독일만큼 태양광, 풍력 설비를 확충한다고 하더라도, 충분한 전력 저장 설비가 마련되지 않는 이상 태양광과 풍력에서 나온 상당 부분의 전력은 버릴 수밖에 없다.

이 물량을 독일의 경우에 비추어 추정해 보면 이렇다. 독일 순수출 전력(16년 50GWh)의 절반(25GWh)이 신재생에서 왔다고 가정해 보자. 이 물량은 태양광∙풍력 전력(16년 115GWh)의 20% 정도다. 한국에서 태양광∙풍력을 일정 수준 이상 증설하려면, 이만큼의 전력을 저항으로 태우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는 말이다. 또, 그만큼 낮은 발전 효율을 감안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즉, 독일과 같은 수준의 설비, 같은 수준의 발전량이 확보되더라도, 한국의 태양광∙풍력 발전량은 전체의 16% 수준으로 계산해야 할지 모른다.

물론 이 말을 뒤집어 보면, 신재생 발전량이 부족한 시점에는 어느 정도 화석연료와 기저 발전소를 가동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독일은 가스와 유연탄, 그리고 양수발전소 발전량을 조정해 이런 시점에 대응하고 있다.

전력저장설비의 미래에 대한 장밋빛 전망이 많이 퍼져 있기는 하다. 하지만 2017년 현재 충분히 유용하게, 전국망 규모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전력저장설비는 양수발전소뿐이다. 독일도 이 점은 마찬가지로 보인다.

물론 양수발전소는 댐과 인공호수를 건설해야 하는 설비이므로 환경단체들의 강력한 반발을 감수해야 건설할 수 있다. 독일은 지금까지는 양수발전소를 대거 확충하지 못한 듯하지만, 향후 투자를 늘릴 계획은 있는 듯하다.

 

설비용량과 이용률

설비용량을 살펴보자. 여기서, 풍력의 성장세는 꾸준한 반면 태양광의 성장세는 비교적 최근에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발전량에서는 매우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는 바이오매스 발전소의 발전용량은 그리 많이 늘지 않았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원전은 지속적으로 감축하고 있는 반면, 유연탄과 갈탄의 발전용량은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그림 3 발전설비 용량의 추이.

다음 그림은 설비별 평균 이용률이다. 이 값은 실제 발전량을 설비용량을 100%로 가동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최대의 발전량으로 나누어 구하는 값이다.

그림 4 설비 유형별 이용률의 추이.

원전의 가동률이 가장 높고, 그다음으로 높은 가동률은 갈탄, 그리고 2010년까지 지속적으로 상승해 70%대에 진입한 바이오매스 발전소가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들 세 연료가 현재 독일의 기저 전원을 구성하고 있다. 유연탄은 40% 정도의 가동률을 기록하고 있으며, 천연가스 발전소의 이용률은 풍력과 같은 18%까지 떨어졌다. 태양광의 이용률은 10% 수준이다. 태양광과 풍력의 이용률이 조금씩 증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설비 용량의 측면에서, 독일은 오직 원전만을 줄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2011년 원전의 감소가 극적인 것 처럼 보이지만, 석탄발전소의 용량은 거의 변화하지 않았으며 태양광과 풍력을 제외한 여러 조절 가능 전원의 전체 물량은 2011년 이후 계속 늘어났다. 결국 독일의 전력 설비는 원전을 배제했지만 나머지나 총량 면에서는 크게 변화하지 않은 조절 가능 전원 위에 태양광과 풍력 설비가 덧붙어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독일의 발전 부분 탄소배출량

나는 저번 주에 한국이 탄소배출량을 감소시키려면 원전을 적절히 활용할 필요가 있으며, 원전을 축소하는 발전 믹스로는 신재생에너지를 20% 사용하는 믹스의 경우에도 탄소를 충분히 감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독일은 이런 주장이 정말인지 확인해 볼 수 있는 적절한 사례일 것이다.

여기서 나는 앞서 소개한 IPCC 계수를 활용하여 독일의 탄소배출량을 계산해 보았다. 여기서 값을 소개하자면 이렇다. 태양광 48g/kwh, 풍력 12g/kwh, 천연가스 490g/kwh, 유연탄 820g/kwh, 갈탄 877.4g/kwh(유연탄의 107%), 원전 110g/kwh, 바이오 230g/kwh, 수력 24kwh. 원전을 제외한 모든 발전방식은 IPCC가 계산한 중앙값을 사용했으며, 원전만은 의구심을 감안하여 최대치로 설정했다.

그림 5 독일의 이산화탄소 배출량 추이. IPCC 계수를 활용했다.

계산의 결과는 위 그림과 같다. 딱 잘라 말해, 독일은 발전부분 탄소배출량을 거의 줄이지 못했다. 최근 석탄이 미약하게 감소했지만, 막대한 물량을 감안하면 전혀 성공적인 감축이 아니라는 점은 누구나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영어로 된 다른 글을 살펴보면, 독일은 한국보다 훨씬 더 큰 탄소배출량 절감을 국제사회에 약속한 것으로 보인다. 2030년까지 현재(약 9억 톤)의 60% 수준인 5.63억 톤까지 탄소배출량을 줄인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하지만 석탄의 탄소 배출량이 답보 상태인 이상, 발전 부분에서 이런 목표량을 채우는 데 충분할 정도의 탄소배출량 감축을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앞서 그래프로 확인했듯, 독일은 2015년에 신재생에너지 발전 비율 34%를 달성했으며, 그 가운데 21%는 태양광과 풍력이기도 한 나라다. 하지만 보다시피 발전 부분 탄소배출량은 견고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다. 그 핵심에는 독일이 탈석탄을 할 생각이 사실상 없다는 사실이 있다. 바이오매스가 나름대로 갈탄을 감축하기 위해 분투하고는 있으나, 석탄의 벽은 견고하다.

독일이 이토록 석탄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독일 국내에서 석탄, 특히 갈탄이 대량으로 채굴되고 있기 때문이다. 갈탄이 원전 다음 단계 기저 전원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은 이미 그래프로 확인한 대로다. 그런데 갈탄은 유연탄보다도 탄소배출량이 높은 연료다. 다시 말해, 갈탄을 계속 사용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탄소 감축을 할 의지가 없다는 뜻일 수 있다. 그럼에도 갈탄에 계속해서 중요한 역할을 맞기는 데는, 이 연료가 외국 수입 연료나 신재생보다 훨씬 더 안정적이고 신뢰할 만하다는 판단이 배경에 깔려 있는 듯하다.

독일의 사례는, 재생가능 에너지가 전체 발전량의 1/3에 달하더라도 이른바 ‘에너지 안보’를 매우 중요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인 셈이다.

 

전력 가격

여기서는 통계 출처를 바꾸어 유로스탯의 정리를 사용하기로 한다. 이 기관은 EU의 다양한 통계자료를 수집 분석하는 EU의 공식 통계 기관이니, 통계를 믿어도 좋을 것이다.

다음 두 장의 그림 가운데, 위쪽 그림은 2016년 하반기 가정용 전력가격, 아래쪽은 같은 기간 산업용 전력 가격이다. 1유로는 약 1,300원이며, 한국의 전력 소매가격(2016)은 1kwh당 105(산업)~120(가정)원 수준이니 여기서는 대략 0.08(산업)-0.09(주택) 유로/kwh 수준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독일의 전력 가격은 가정용, 산업용 모두 EU에서 2위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다시 말해, 독일의 전력은 상당히 높다. 특히 한국 가정용 전력의 소매가와 비교하면 독일 가정용 전력가격의 수준은 3배에 달하고 있다. 한국 가정용 전력의 소매가는 불가리아와 같은 수준으로, EU에서 가장 저렴한 수준이다.

한편 독일의 산업용 전력 가격은 한국의 2배에 조금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한국의 산업 소매가격은 폴란드와 유사한 수준으로, EU 국가 사이에 줄을 세워 놓으면 중간보다 조금 낮은 구간에 배치되는 수준이다.

이들 자료는 모두 독일의 전력 가격에 대량의 세금 또는 준조세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가정용이든 산업용이든, 부가세를 감안하면 전력가격의 절반이 조세나 준조세다. 세금의 용처에 대해서는 별도로 확인해야겠으나, 이는 결국 신재생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는 데 쓰일 것으로 보인다.

물론 전력 가격의 추이, 조세 또는 준조세로 모인 돈의 흐름을 별도로 추적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으나, 독일과 EU 주요국의 전력가격 현황을 비교하기만 해도 독일의 신재생 드라이브가 어떤 귀결을 가지고 올 것인지 말하기는 어렵지 않을 듯하다. 독일의 전력가격에 붙는 조세 또는 준조세는 가정용 및 산업용 공히 유럽 최대 수준이다. 가정용 전력에 더 많은 조세를 붙이는 덴마크는 독일보다도 더 강력한 신재생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나라로 유명하다. 산업용 전력에 막대한 조세가 붙는 이탈리아는 아예 원전이 없는 상태에서 신재생 투자를 늘리고 있는 나라다.

다시 말해, 신재생 드라이브가 강력할수록 전력 소매가격에 더 많은 조세 또는 준조세가 붙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이 유럽의 사례로 보아 합리적이다.

 

마치며

지금까지의 논의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1. 독일의 재생가능에너지 발전량은 1/3을 넘었다. 하지만 이 가운데 태양광과 풍력은 2/3이다.

1.1 바이오매스는 국내 논의에서는 지금껏 무시되었지만 실제 독일에서는 (기저 전원이라는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신재생 에너지원으로 그 역할을 하고 있다.

2. 독일은 바이오매스, 원전, 갈탄(독일 국내탄임)으로 기저 전원을 유지하는 한편, 태양광과 풍력에서 나오는 전력의 급격한 변동에 대응하기 위해 가스와 유연탄 발전소, 그리고 수출을 활용하고 있다.

2.1 2017년 여름 현재 실질적인 전력 저장능력은 양수발전소(pumped storage)에게만 있기 때문에, 태양광과 풍력 전원이 부족할 때 가스와 유연탄을 활용하지 않는다면 대응할 방법이 없다.

2.2 한국과 같은 폐쇄 전력망은 수출을 활용할 수 없다는 점에서 태양광과 풍력의 효율을 극대화할 수 없는 조건이다.

2.3 태양광과 풍력의 설비 이용률 증가는 그렇게까지 빠르지 않다.

2.4 원전을 실제로 대체하고 있는 것은 기저 전원으로 활용 가능한 바이오매스이며, 간헐 전원인 태양광과 풍력이라고 볼 수 없다.

3. 설비 면에서, 독일은 단지 원전만 일부 끄고 있을 뿐, 화석연료 감축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재래식 연료 가운데 오직 원전만 배제하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신중히 답해야 한다.

4. 독일은 충분한 탄소배출량 감축에 실패했다.

5. 유럽 국가와 비교해 보면, 전력 가격에 상당히 높은 조세와 준조세가 붙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결론으로부터, 한국사회가 꼭 기억해야 할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 재생가능에너지 발전량이 1/3에 달하더라도, 탄소배출량을 미미한 수준밖에는 감소시킬 수 없었다는 점을 독일은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정말로 탄소배출량을 줄이고자 한다면, 원전을 유지하면서 재생가능에너지 비율을 늘리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 바이오매스 투자에 적극 나서야 한다. 이 연료는 기저 전원으로 활용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독일에서도 태양광이 아직도 바이오매스의 발전량을 넘지 못했다는 데 주목해야만 한다. 지금처럼 태양광과 풍력에만 주의를 기울일 경우 재생가능에너지를 실질적으로 확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 태양광과 풍력의 간헐성을 보조하기 위해서는 화석연료 발전소와 양수발전소가 다수 필요하다는 점을 널리 알려야 한다.
  • 독일에서는태양광과 풍력의 총발전량이 21% 수준에 불과함에도, 때로 전기가 남아서 수출해 처리하는 순간이 있다는 점을 알려야 한다. 이것은 외국과 망이 연결되어 있을 때는 장점이지만, 한국 같은 폐쇄 망에서는 기껏 생산한 전기를 버려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는 뜻에 불과하다.
  • 독일은 국내탄인 갈탄을 포기하지 않고 있으며, 천연가스는 총발전량에 그리 기여하지 않고 있다. 천연가스 발전소의 이용률은 18%까지 떨어진 상태다.
  • 신재생을 확대하면 조세와 준조세가 전력가격에 꽤 많이 붙게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실질적인 데이터를 사용해 독일의 전력 현황에 대해 논의한 경우는 내가 알기로는 많지 않다. 내 조사를 바탕으로, 앞으로 더 많은 논의가 있었으면 한다.


표지 이미지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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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믹스”는 탄소배출량을 충분히 줄일 수 있을까? https://ppss.kr/archives/124716 https://ppss.kr/archives/124716#respond Thu, 27 Jul 2017 02:46:47 +0000 http://3.36.87.144/?p=124716 요사이 탈핵 말이 많다. 여기서 원전과 탄소 배출의 관계에 관해 약간의 계산을 해본다. 다시 말해 문재인 정부가 공약한 발전 연료 비율, 즉 2030년 발전에 투입하는 에너지원의 비율을 석탄 25%, LNG 37%, 원자력 18%, 신재생 20%로 맞췄을 때 발전소에서 나오는 탄소배출량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그리고 이 배출량 변화가 2030년까지 한국이 국제사회에 약속한 탄소 감축 목표를 달성하는 데 충분한 도움이 되는지 계산해 볼 생각이다. 이 비율을 이 글에서는 “문재인 믹스”라고 부르기로 하겠다. 결과를 먼저 말하자면 안타깝게도 전혀 충분하지 않다.

이어서 변수를 어떻게 바꿔야 필요한 배출량을 채울 수 있는지 여러 방법으로 계산해 본 결과를 제시할 것이다. 이 계산의 결과는 이렇다. 만일 탄소배출량을 충분히 줄이고 싶다면 2030년에 신재생에너지 전력 비율이 20%에 달하는 급격한 보급 시나리오 하에서도 석탄은 “문재인 믹스”보다 좀 더 빠르게 감축할 필요가 있으며, LNG 비율은 더 낮게 조절해야만 하고, 원전의 비율은 적어도 현행 비율을 유지하거나 조금 더 높이는 것도 한국 사회는 각오해야만 한다.

 

한국의 탄소감축목표: 화려하지만…

정부의 탄소배출량 감축 계획에서 한국의 탄소 배출량 현황과 감축 목표에 대해 서술하기 위해 사용할 핵심 자료는 『2016 국가 온실가스 인벤토리 보고서』(국무조정실 국무총리비서실 온실가스종합정보센터, 2016)이다.

한국의 온실가스 총배출량은 2015년 현재 약 7억 톤(이하 모두 이산화탄소 환산)으로 세계 총배출량 가운데 대략 2% 수준이다. 중국, 미국, 인도, 러시아, 일본, 독일에 이어 순위로는 7위다. 이 가운데 에너지 부분에서 배출되는 물량이 대략 6억 톤으로 대부분이다. 또한 6억 톤 가운데 2.5억 톤가량이 발전소에서 배출된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 전체 온실가스 배출량의 35% 정도가 발전소에서 나온다.

한국 정부가 국제사회에 제출한 2030년 배출량 목표는 5.36억 톤이다. 다른 많은 수사는 모두 필요 없고 현재 배출하는 7억 톤에서 약 1.6-1.7억 톤 정도를 감축해야만 이 약속을 지킬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자. 현행 대비 23% 정도 감축해야 이 약속을 지킬 수 있다. 세계 7위 수준의 탄소 배출량을 내뿜는 나라가 이 값을 지키지 못하면 파리 협약을 통한 신기후체제 역시 유명무실해질 것이고, 기후 변화의 속도는 걷잡을 수 없이 빨라질지도 모른다.

파리 협약도 이미 산업화 이전보다 2도 정도의 기온 상승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인정하고 있으므로, 이마저도 지키지 못할 경우 당장 수십 년 뒤 인류에게 기후변화는 어마어마한 부담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점은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라고 본다.

출처: 온실가스종합정보센터

 

현재의 발전 부분 탄소배출량, 그리고 “문재인 믹스”의 탄소배출량 추정

현재 한국의 어느 발전소에서 몇 톤을 내뿜는지에 대한 세부적인 추산은 인벤토리 보고서에서 제시되지 않았다. 꽤 민감한 수치이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 간 패널(Intergovernment Panal on Climate Change, IPCC)이 제공하는 탄소배출계수, 그리고 한국전력통계에서 공표된 발전량을 통해 연료별로 얼마만큼의 탄소를 배출하는지에 대해 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2015년도 한국의 총발전량 비율은 다음 그림과 같다. 전력믹스를 구성하는 세 핵심 연료 각각의 발전량은 이렇다. 석탄 200Twh, 원전 165Twh, LNG 100Twh. 기타 전원을 합치면 528Twh 수준임을 확인할 수 있다.

2015년 연료별 발전량. 석탄이 39%, LNG 19%, 원자력이 31% 정도를 차지한다.

이제 탄소배출량을 계산할 차례다. IPCC가 제시한 계수를 보면 kwh당 석탄화력의 생애 탄소배출량은 중앙값 820g/kwh, 천연가스 복합화력은 중앙값 490g/kwh이다. 중유는 별도로 제시되어 있지 않은 방식이지만 석탄과 천연가스 값의 중앙값(655g/kwh)으로 계산하면 충분하다. 원전은 최대치인 110g/kwh을 사용하기로 한다(문서 1335쪽).

생애 탄소배출량 가운데 화석연료는 중앙값을, 원전은 최댓값을 쓰는 것은 원자력에 최대한 불리한 조건을 주기 위해서다. 원전에 아주 많은 의구심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이 의구심을 반영하기 위해서라도 IPCC가 제시하는 생애 탄소배출량의 중앙값 12g/kwh보다 9배 높은 값을 사용했다.

한편 신재생에너지의 생애 탄소배출량 역시 IPCC에 따르면 0은 아니다. 이 값을 반영하기 위해, 신재생의 생애 평균 탄소배출량은 태양광의 생애 탄소배출량 중앙값(41g/kwh, 지붕)과 풍력(11g/kwh, 육상)의 중앙값, 즉 26g/kwh로 설정하기로 한다(현재 신재생이 대부분 우드팰릿이나 폐기물 연소로 채워져 있다는 점은 일단 무시한다).

이들 변수를 활용해 “문재인 믹스”를 비롯한 다양한 발전연료 믹스의 탄소배출량을 추정한 것이 아래 그래프다.

발전연료 믹스별 탄소배출량 추정. 현행은 2015년을 의미. 현재를 제외한 모든 계산에서 신재생의 발전량은 총량의 20%로 계산되어 있다.

첫 번째 막대 그래프는 2015년의 탄소배출량 추정치다. 절대량은 2.56억 톤이다. 하늘색 수평선은 이로부터 23% 줄어든 탄소배출량의 수준을 표시한 것이다. 23%는 한국이 국제사회에 약속한 2030년 배출량을 지키기 위해 감소시켜야 하는 값이다. 절대량은 1.97억 톤이다. 발전 부분 탄소배출량은 이 선 아래로 내려가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선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다면, 다른 부분의 탄소 배출량이 23%보다 더 많이 감축되어야 하고, 결국 해당 부분이 발전 부분 대신 부담을 지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두 번째 그래프와 세 번째 그래프는 “문재인 믹스”를 표현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발전량이 그대로 유지된다고 가정하는 경우에도 1.97억 톤보다 0.2억 톤 이상 많은 탄소배출량이 나올 것이다. 세 번째 그래프는 30년의 발전량이 15년 대비 20% 증가할 경우 오히려 신재생을 대거 포함한 “문재인 믹스”의 탄소배출량이 현행 배출량보다 증가할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15년간 총발전량 20% 증가는 그렇게까지 무리한 가정은 아니라는 점을 밝혀둔다. 15년 동안 매년 1.2% 정도의 발전량 증가만 있더라도 이런 증가가 충분히 발생할 수 있다(간단한 지수식으로 구할 수 있다). 게다가 2030년까지 전기차가 급속도로 보급될 경우, 중공업을 중심으로 한 전력 소비 감축이 이뤄지더라도 전력소비량의 총량은 늘어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조금 더 상세히 이야기해보겠다. IEA 데이터로, 한국의 공업 전력 투입량은 22.3Mtoe이다(toe=석유 1톤의 열량. 2014년의 값). 이 값이 절반이 된다고 해 보자. 하지만 같은 해, 차량 투입 유류만 해도 28.8Mtoe에 달한다. 한국의 차량이 모두 전기화되는 한편, 전기화로 효율이 두 배가 된다 쳐도 차량 운행에는 14.4Mtoe의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다른 조건이 다 같고 이들 값만 바뀐다고 가정하면 1차 에너지 소비는 26Mtoe 정도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전기 에너지 소비는 오히려 3Mtoe정도 늘어날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전체 전기 소비(41.9) 대비 7% 정도의 증가다. 물론 중공업 전력 소비량이 그처럼 급격하게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은 적절하지는 않다. 여하튼, 구체적인 숫자는 다르겠지만, 전기차 도입은 이런 구도(1차에너지 감소, 전기소비 증가)의 변화를 불러올 가능성이 높다.

네 번째 그래프는 발전량을 유지하면서 원전은 현 믹스(31%)로 유지하는 한편, 석탄의 발전량은 지금의 절반으로 줄이는 대안이다. 이렇게 되면 석탄 19:LNG 31:원전 31 믹스가 된다. (반올림 때문에 숫자가 딱 맞지는 않는다. 나머지 20%가 신재생인 것은 그래프에서 제시한 모든 대안에서 똑같다.)

다섯 번째는 믹스는 똑같지만 발전량이 20% 증가한 경우를 나타낸다. 발전량이 유지되면 탄소배출량이 기준선(하늘색) 아래로 떨어지지만, 발전량이 늘어나면 그렇지 않은 믹스라는 점을 알 수 있다. LNG의 탄소배출량도 무시할만한 수준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모습이 나온다.

여섯 번째 그래프는 석탄을 더 감축하면서, 발전량이 20% 증가한 시나리오를 나타낸 것이다. 이 경우 믹스는 석탄 13: LNG 37: 원전 31이다. LNG의 비율은 문재인 믹스와 동일하고, 석탄의 비율은 문재인 믹스의 절반이다. 이렇게 하더라도 탄소배출량이 기준선보다 높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LNG의 탄소배출량도 그렇게 쉽게 무시할 수 없다.

일곱 번째 그래프는 여섯 번째 믹스에서 원전의 비율을 대폭 늘리면서 발전량이 20% 증가한 시나리오다. 이 경우 믹스는 석탄 13: LNG 27: 원전 40이다. 이렇게 하면 발전량이 20% 늘어나는 경우에도 기준선 미만으로 탄소배출량을 관리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업계는 원전의 여러 특성상 원자력 비율을 전체 전력믹스의 40% 선 이상으로 늘리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데 대체로 합의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원전 증비는 어려운 시나리오라는 점 또한 지적할 수 있다.

여덟 번째 그래프는 “문재인 믹스”를 유지하는 한편, 탄소포집 설비를 석탄화력발전소와 LNG 복합화력발전소의 절반만큼의 용량에 장착해 탄소배출량을 줄이는 시나리오다. 다시 말해 문재인 믹스를 사용하면서 화석연료 발전소를 대폭 개량하는 시나리오다. 이 시나리오에서 사용한 IPCC의 변수는 이런 식이다. 산소연소 탄소포집 석탄화력의 생애 탄소배출량 중앙값은 160g/kwh, 탄소포집 가스 복합화력의 생애 탄소배출량 중앙값은 170g/kwh.

이 시나리오에서 가장 큰 탄소배출량 감소가 예상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탄소 포집 설비는 아직 한국과 같은 대국의 수요에 알맞은 수준으로 상업화되지 않은 상황이다. 아직 충분히 상업화되지도 않은 대규모 설비를 2030년까지 채 13년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과 같은 대국의 수요에 맞춰 건설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어리석다. 따라서 이 시나리오가 실현될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원전 유지 믹스”

많은 가정과 많은 가상 시나리오를 사용한 분석이 쉽게 읽히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들 계산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분명하다.

  1. 미래의 불확실성, 그리고 기후변화의 중대성을 감안하면 총발전량이 어느 정도 증가하더라도 탄소 배출량을 충분히 억제할 수 있는 믹스를 채택하는 것이 옳다.
  2. “문재인 믹스”를 사용하면 총발전량이 2030년에도 2015년과 똑같이 유지될 만큼 전력 수요를 잘 억제하더라도 발전 부분의 탄소배출량을 필요한 만큼 감소시키기 어렵다.
  3. “문재인 믹스”의 탄소배출량 감축 성과가 부실할 것으로 예상되는 이유는 불충분한 석탄 감축, 그리고 LNG의 여전히 상당한 탄소배출량 때문이다.
  4. 따라서 “문재인 믹스”는 화석연료로 인한 탄소배출량을 더 획기적으로 감축할 수 있는 발전연료 믹스로 바뀌어야 한다. 여기서 원전의 비율은 “문재인 믹스(18%)”보다 높게, 40%보다는 낮게 설정되어야 한다. 현행 비율(31%) 유지가 가장 지지를 받기 쉽지만, 되도록 올리는 편이 중기적으로 탄소배출 감소에 더 크게 기여할 수 있다.

한 가지를 더 명시적으로 밝히고 싶다. 내가 수행한 모든 계산에서, 신재생에너지의 발전량 비율은 20%였다. 다시 말해, “문재인 믹스”가 대규모의 신재생에너지에서 얻고자 하는 모든 탄소 감축 효과가 모든 계산에서 반영되어 있다. 그럼에도 화석연료의 높은 비율로 인해 “문재인 믹스”는 충분한 탄소 감축 효과를 누리기 어려워 보인다는 것이 내 분석의 초점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결국 대규모의 신재생 투자가 있더라도, 기후변화에 충분히 대응하기 위해서는 향후 수십 년간 원전과 화석연료에 대한 투자를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특히 화석연료 발전소의 탄소 포집 기술은 분명히 매우 중요한 기여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과정이 꼭 순조롭게 이뤄지지는 않을 것이다. 기술 개발은 물론, 투자와 실제 가동 모두는 언제나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나 표류할 수 있다.

그렇다면 화석연료 발전소의 탄소 포집 기술이 확산되기 전까지는 석탄화력을 “문재인 믹스”보다 더 축소해야 할 뿐 아니라 LNG의 확대 역시 억제할 필요가 있다. 석탄 25%, LNG 37%를 상정한 믹스로는 충분히 탄소를 감축시키기 어렵다는 데 대해서는 앞서 제시한 계산 결과를 참조하기 바란다.

그런데 원전은 이미 현재의 경수로 역시 IPCC가 공인한 저탄소 발전소이다. 그렇다면 원전의 전원 믹스 내 비율을 최소한 현 수준으로 유지하는 길은 현재의 상황에서, 그리고 신재생이 총발전량의 20%에 도달하더라도 충분한 양의 탄소를 감축하기 위해 의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징검다리”로 보인다.

계산을 수행한 엑셀 파일은 글쓴이의 블로그에 게시될 것이다. 여기서는 원자력의 탄소배출계수를 12g/kwh로 둔 계산 결과도 함께 제시되었다. 가능한 비판에 참조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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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롤리 문제’ : 철도 안전 기술과 무인 자동차 https://ppss.kr/archives/98747 https://ppss.kr/archives/98747#respond Tue, 31 Jan 2017 08:23:23 +0000 http://3.36.87.144/?p=98747 윤리학자들이 좋아하는 문제 중에 ‘트롤리 문제(trolley problem)’라는 게 있다. 이 문제의 핵심은 이렇다.

당신은 기찻길 옆 산책을 즐긴다. 어느 날 산책 중, 열차가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달려오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아마도 열차는 제어 불능 상태에 빠진 것 같다. 기관사는 실신했고, 그가 멀쩡히 있었더라도 브레이크는 작동 불능 상태에 빠졌다.

그런데 열차 진행방향 본선에서는 5명이 작업을 하고 있다. 5명은 열차를 쉽게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다행히 이 지점에는 측선이 있었고, 열차를 빼 주면 5명이 살 수 있는 듯하다. 하지만 측선을 살펴보니 이곳에도 1명의 사람이 있었다. 물론 그 역시 작업에 열중하고 있기 때문에 폭주하는 열차를 피하기는 어렵다.

당신은 분기기의 레버를 잡아당겨 5명을 구하는 대신 1명을 죽일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열차가 폭주하게 두어 5명을 죽게 내버려 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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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롤리 문제의 다섯 가지 유형
출처: 위키피디아

이 문제가 묻고 싶은 질문들은 이런 것이다. 한 명의 목숨이 중요한가, 아니면 다섯 명의 목숨이 중요한가? 다시 말해, 구할 수 있는 목숨의 숫자가 당신의 판단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그리고 내 작위로 인한 책임이 큰가, 부작위로 인한 책임이 더 큰가? 즉 내가 무언가를 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가 더 받아들이기 어려운가, 내가 무언가를 실행하지 않아 일어난 결과가 더 받아들이기 어려운가?

이 문제가 철학계에 등장한 1967년 이래, 윤리학자들은 다양한 변형 사고실험을 개발하는 한편, 그 함축에 대해 지금까지 격론을 벌이고 있다. 또 심리학자들과 인지과학자들은 이 사고실험을 사용하여 인간의 윤리적 직관이 이러한 갈등 상황에서 어떤 판단을 내리는지 살펴보려고 하고 있다. 무인자동차 개발이 이뤄지고 있는 오늘날에는 심지어 자동차와 관련된 공학자들까지도 이 문제에 주목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문제의 다른 측면에 주목하고 싶다. 철도는 이 문제로부터 아무것도 배울 것이 없고, 오히려 완전히 다른 측면에 주목하여 빈발하던 사고를 극복해 안전을 달성해 왔다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트롤리 문제는 철도 안전 기술의 중요한 측면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고, 교통 체계를 더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오히려 실제 철도 현장을 더 안전하게 만들어 온 기술의 원리와 원칙에 대해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트롤리 문제’가 제안하는 최악의 상황은 철도에서 아주 일어나기 어렵다

글쓴이가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싶은 부분은, 트롤리 문제가 제안하는 상황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철도 현장에서는 수많은 기술이 개발되어 있다는 점이다. 한 사람의 손에 의해 치명적인 결과가 벌어지지 않게 만들기 위한 기술 발전, 절차, 규칙이 오늘날의 철도 안전을 책임지고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문제는 ‘분기기 레버’이다. 이 문제의 핵심에는 인력으로 분기기 위치를 전환할 수 있다는 가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연동장치가 설치되지 않은 원시적인 구내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다.

연동(lock)이란, 역이나 신호장 내부의 각종 신호기와 분기기를 동기화시키는 장치를 말한다. 연동이 없다면, 기관사에게 현시되는 신호와 실제 분기기의 개통 방향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이런 일치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각 역의 관제에서 신호와 분기기를 통합 제어해야만 할 것이다.

연동은 19세기 후반 이래 철도 안전의 3대 요소 가운데 하나로 꼽을 수 있는 기술이었고, 현대화된 철도에서는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요소이다. 게다가 도심 거리를 지나다니는 노면전차의 분기기라면, 주변 행인이 최대한 건드릴 수 없도록 안전장치를 해 놓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도로 신호등 장비도 경찰만 열 수 있도록 잠궈 두는 것이 상식이다.
그렇다면 분기기 앞에서 망설이는 철도원이라는 그림 자체에 문제가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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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성립이 안 된다는 이야기
출처: selectall

레버가 있는 곳이 아직 남아 있기는 하지만, 분기기 레버는 철도 기술의 발전 속에서 취약한 부분이라는 합의가 있어왔고 이에 따라 점차 제거되어 왔다. 관제가 전동기로 분기기를 가동하는 것이 현대화된 철도의 기본이다(이 과정에서 현시 신호도 함께 바뀐다). 철도원이나 기타 개인이 임의로, 관제에 통보하지 않고 분기기를 조작할 수 있는 상태라는 것 자체가 현대 철도로서의 자격이 없는 설비 수준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트롤리 문제의 책임은 시설 투자를 게을리 한 철도 당국에게 있는 셈이다.

그래도 시설 투자는 돈이 많이 드는 일이니, 인력으로 움직이는 분기기가 남아 있다고 가정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분기기는 대체로 번호가 낮은 분기기이다. 즉 분기각이 크고 속도제한이 낮은 분기기에나 레버가 남아 있다.

분기기에 속도 제한을 거는 이유는 간단하다. 탈선에 매우 취약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철도에서도 46번 분기기의 170km/h 제한이 분기기에서 분기할 때 낼 수 있는 최고 속도이다. 제대로 된 기관사라면 분기기 부근에서 감속을 해야 한다. 통상 철도에서 가장 짧은 분기기인 8번 분기기의 속도제한은 방향에 따라 20km/h(배향)-35km/h(대향)이다. 철도에서는 8번 분기기가 역 구내나 기지 구내에 주로 깔리겠지만, 노면전차의 속도와 공간 제약을 감안하면 본선->측선 방향 편개분기기에도 8번 분기기가 깔릴 가능성이 있다.

8번 분기기의 전체 길이는 대략 25m 가량이다. 현대 철도차량은 20km/h 대역에서는 이 정도 거리 내에서 멈출 수 있고, 35km/h 운전 시에도 그렇게 멀리 가지는 않는다. 수십 미터 내로 제동이 된다. 또한 노면전차는 도로와 공용으로, 육안 운전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비상제동장치들이 더 마련되어 있어 더 빠른 정차가 가능하다. 참고로 지하철 열차가 승강장에 진입할 때 내는 속도가 약 60~65km/h 수준이다.

기관사 임의로 제한속도를 어기고 분기기에 진입하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물론 이 경우에는 탈선이 일어나 열차가 멈출 가능성이 크다. 또 이렇게 일어난 사고는 명백한 기관사의 책임인데, 이는 본선 상 분기기에 대한 정보를 숙지하는 게 기관사의 의무사항이며, 또한 언제 분기기 방향이 바뀔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탈선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감속을 하는 것이 맞기 때문이다.

물론 트롤리 문제의 가정 상, 기관사는 실신해 버린 상태이기에 열차를 통제할 수 없다. 하지만 200년 철도사에서 그런 사고 역시 얼마든지 많이 일어났기에, 공학자들은 대응책을 다수 고민한 바 있다. 덕분에 현대 철도에서는 ‘열차 자동 정차장치’를 설치하는 것이 고밀도 혼잡선구의 기본이다. 기관사가 정위치하지 않거나, 신호에도 정시 반응하지 않으면 열차에 즉시 비상제동을 체결하는 것이 이 장치의 기본 원리다.

KTX의 경우에는 기관사가 특별히 마련된 장치에 손을 대고 있지 않는다면 곧 비상제동이 걸린다. 도시철도의 경우에는 이처럼 제어가 꼭 세밀하게 되어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수백m 간격으로는 ATS 지상자가 설치되어 있어 기관사가 때맞춰 체크하지 않으면 비상제동이 체결되게 된다. 물론 역은 분기기와 승객으로 인해 위험한 곳이므로, 제대로 된 설계라면 기관사가 멀쩡한지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ATS 장치를 초입부터 다수 설치해 놓아야 하는 곳이다. 분기기가 있는 곳이라면 ATS 설비가 부근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ATS가 제대로 작동했다면, 트롤리 문제 속 열차는 비상제동이 체결되고 있는 중일 것이다.

사고 선구가 고밀도, 고속 열차 운전이 이뤄지는 간선이나 도시철도라면 주변에 EMP탄이 터져서 모든 회로가 죽은 상태가 아닌 이상 ATS 설비가 갖춰져 있으며 이 설비가 작동한다고 기대할 수 있다. 낙뢰가 떨어져서 신호설비가 죽어버린 경우에도 비상제동 체결 후 관제 음성 지시에 따라 저속 운행(20km/h)을 하는 것이 기본이다. 여하간 ATS가 무력화된 경우에도 분기기 조작자의 책임은 없다. ATS 정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이유를 밝혀 그에 따른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참고로 ATS가 좀 더 발전한 장비가 열차 자동운전 장비라고 할 수 있다. 철도에서는 자동 운전 열차가 널리 상업 운전 중이다. 자동 운전 이슈에 대해서는 글의 말미에서 좀 더 논의를 해 보자.

제동장치 고장 가정도 있다. 하지만 철도차량의 기본 제동 방식인 압축공기제동은 19세기 중반 처음 개발될 때부터 열차가 다른 칸과 단절되는 방식 등으로 제어가 상실되면 바로 제동을 체결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탈선으로 인해 연결기가 끊어진다거나 하면 열차를 구성하는 모든 차량에 곧 비상제동이 체결될 것이다. 다만 트롤리 문제의 설정상 ATS 이외에는 자동 비상제동 체결을 할 만한 상황은 없어 보인다.

역이 내리막 앞에 있어, 열차가 내리막에서 폭주하는 상황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경우에는 두 가지 변수가 있다.

1) 분기기가 정위와 반위가 있는 편개 분기기 형태인가, 정위가 따로 없는 Y형 양개 분기기인가?

  • 양개 분기기라면 일정 속도 이상을 넘는 열차는 탈선하게 된다. 편개 분기기라면 정위에서는 속도 제한이 따로 없으므로 열차를 탈선시키려면 분기기를 반위로 바꿔야 한다.

2) 역 이후에 충분히 긴 내리막이 있는가?

  • 역 이후에 충분히 긴 내리막이 있다면 역 이후 내리막에서 열차는 폭주하여 완파될 것이다. 완파를 막으려면 역에서 열차를 탈선시키든 측선으로 빼든 해서 정차시켜야 한다. 측선 쪽에 설비가 있다면 그것을 이용할 수도 있다.
  • 다만 설정상 그 앞에 사람이 있다면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된다. 또 여기서 열차가 빈 화물열차이며 기관사가 아직 죽지 않았다고 가정하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본선으로 열차를 보내어 사람 5명+기관사를 죽이고 열차를 완파시킬 것인가? 측선으로 빼내어 1명을 죽이고 기관사 또한 죽을 수 있는 상황에 내몰지만 열차 파괴는 경파 수준으로 막을 것인가? 이 정도 선택지가 된다.

이렇듯 내리막 폭주 시에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요소들이 개입된다. 여기서 양개 분기기라면 폭주 열차는 분기기 조작을 어떻게 하든 탈선할 것이기 때문에 분기기 조작자에게는 책임이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편개 분기기의 경우 내리막 유무에 따라 문제의 성격이 바뀐다.

내리막이 없다면 드디어 트롤리 문제가 철학자들이 논의하는 방식으로 성립할 것이다. 하지만 내리막이 있다면 기관사와 열차의 운명이 문제에 끼어들게 된다. 하지만 역시, 레버가 있는 분기기라는 조건을 만족시키는 분기기라면 통과 제한 속도가 낮을 테니, 측선으로 빠진 열차는 분기기의 특성상 곧 탈선하여 정차할 듯하다. 물론 이 탈선 열차가 측선 상에 있는 한 명의 사람을 치고 지나갈지 어떨지는 아무도 모른다.

3
출처: 중앙일보

트롤리 문제가 일어날 만한 상황이 있는지 점검하는 인적 절차도 있다. 열차가 운행 중인 시각에 보선 작업을 벌일 경우, 작업반(분대규모) 가운데 한 명은 열차감시를 하는 것이 의무사항인 걸로 알고 있다. 고속열차의 경우 애초에 열차 차단 시간을 설정하고 그때 작업을 하는 것이 원칙이다. 요 몇 년새 열차감시가 제대로 되지 못하여 안타까운 사고가 작업팀에게 일어나는 경우가 있긴 했으나, 결국 이때도 책임은 차단시간을 제때 확보하지 못한 회사에게, 그리고 열차감시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사람에게 있다.

역 구내에서는 역무원이 열차감시를 할 수도 있다. 간선 철도에서는 적어도 열차가 진입하는 시간에는 역무원이 열차를 확인할 수 있는 장소에 나와 있어야 하며, 본선이나 측선상의 작업자들에게 경고를 보낼 수 있어야 한다.

웹상에서 유행하는 트롤리 문제의 한 변형도 잠깐 논의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이 변형에 따르면, 선로 상에 있는 사람들은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레일에 묶여서 옴짝달싹할 수 없다. 열차감시를 하는 역무원은 경고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구하러 뛰어들어야 한다. 그러나 물론 성인 5명을 묶어놓은 끈이 쉽게 풀릴 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대책이 없는 것이 아니다. 먼저 역무원이 상주하는 구내라면 역무원에 의해 쉽게 발각될 것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아무도 없는 신호장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선로순회를 하는 보선반 인원에 의해 발각될 가능성이 크다. 이들은 하루에도 여러 차례 선로를 도보로 왕복하면서 살펴보는 것이 일이다. 선로가 제대로 되어 있는지 앞서 보내는 개통열차를 운행하여 상황을 살펴보는 것을 통해 위험을 회피할 수도 있다. 고속철도의 경우 매일 새벽에 한 편 굴려보면서 점검하는 절차가 준수되고 있다.

가능성이 낮지만, 궤도 양 단에 묶인 인체로 인한 효과가 일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인체도 쇼트를 일으킬 수는 있기 때문에 이런 가능성이 성립한다. 쇼트를 일으킬 수 있는 물체는 폐색(block)을 설정하는 데 기본이 되는 궤 도회로 점유 효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폐색이란 열차가 한 편만 들어갈 수 있는 선로 상의 구간이다. 궤도 회로란 철로 된 궤도를 전기 회로로 구성해 놓은 것을 말한다. 이 회로에 철도의 금속제 차축이 진입하면 회로에 단락(short)가 일어나 선로가 점유되어 있는지 확인할 수 있어, 선로 점유 현황을 파악하고 본선 상의 열차를 통제할 때 궤도회로는 가장 기본이 되는 기술이 된다.

비록 인체가 충분한 도체가 아니긴 하지만, 인체가 쇼트를 일으킬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으니 궤도의 양 단에 묶인 인체로 인해 단락이 일어날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물론 확실히 이상 점유를 시키려면 침수 정도는 시켜야 할 것이다. 여하튼 이렇게 궤도회로가 점유되면, 사람들이 있는 폐색구간 초입의 신호기에는 정지신호가 현시된다. 그에 따라 기관사가, 또는 ATS에 따라 정차하면 사고는 일어나지 않는다.

논의대로면, 정말로 모든 조건이 맞아떨어진 경우는 이렇다.

연동 없는 구내에서, 기관사가 죽어버린 열차가 ATS도 설치되지 않은 구간에서 레버가 달려 있고 연동이 제한적인(즉 레버를 당기면 방향이 바뀌는) 8번 또는 비슷한 호수의 분기기를 그대로 통과할 수 있는 속도로 달려가고 있는데, 즉 본선으로든 측선으로든 열차는 그대로 달릴 수 있는 속도를 유지하고 있는데, 양 분기기 앞에 갑자기 서로 구별되는 숫자만큼의 사람들이 선로로 뛰어듬.

물론 이런 역이나 신호장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이들 조건 가운데 가장 일어나기 쉬운 일은 사람이 뛰어드는 일이다.

이때 분기기 조작원은, 주변에 추돌할 물체가 없다는 전제하에 열차 탈선을 선택할 수 있다. 최대 35km/h 수준의 속도라면, 어디 추돌하더라도 열차 측 사망자까지 나오기는 쉽지 않다. 20km/h 정도라면, 유류나 황산조차라도 서 있는 구내가 아닌 이상에야 객실 내 승객에게 위해가 갈 가능성은 매우 낮다. 노면전차라면 뭐 접촉사고 정도의 효과가 날 것이다.

하지만 열차 전방에 그대로 노출된 사람은 스치면 사지 손실, 치이면 사망이다. 위해의 수준이 다르기 때문에 탈선이 더 나은 답일 수 있다. 열차를 탈선시키는 방법은 간단하다. 열차가 분기기를 통과할 때 레버를 당겨 분기기 위치를 정위에서 반위로 바꿔버리면 된다. 물론 추가 사고가 나지 않는다는 조건이지만, 철도에서는 탈선을 시켜서 사람을 살리는 방법이 가능하다. 열차는 그냥 제동을 걸었을 때보다 더 짧은 거리를 진행하고 멈추게 된다. 속도가 낮기 때문에 탈선한 열차는 선로 주변에 멈춰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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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나왔던 그림입니다. 까먹으셨을까 봐 다시 가져옴

이런 대안과 관련해서도 학계에서 논의되는 한 가지 변형이 있다. 가장 우측 그림이 그것이다. 이 그림을 그린 학자에 따르면, 진행 중인 열차를 다른 차량으로 막아서 5명을 구하면, 선로 주변 해먹에서 잠을 자고 있던 무고한 사람이 탈선한 열차에 맞아 죽는 결과가 나오게 된다. 이때도 열차 탈선을 시킬 수 있을까?

물론 철도 현장을 알고 있다면 이런 터무니없는 퍼즐을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철도 현장에서 매우 중요한 사고 유형을 제시할 수 있다. 복선 철도에서는 탈선한 열차의 일부분에 맞은편 열차가 추돌하여 사고가 더 커지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에서도 비슷한 유형의 사고가 일어난 적이 있다(2013년 대구역 탈선사고).

그렇다면 더 현실적인 퍼즐은, 열차 빈도가 매우 높은 복잡한 역이나 본선에서 탈선을 시켜 맞은 편 열차와의 추돌 가능성을 남겨두면서도 사람을 구할 것이냐는 퍼즐인 셈이다. 이때 선택지는 5명의 목숨이 한 편, 그리고 본선 차단과 맞은편 열차와의 추돌 가능성이 한 편이다. 열차 자체의 방호 능력 덕분에 이런 추돌로 인해 사람이 죽는 경우는 드물지만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또한 본선 차단과 2차 사고는 많은 경우 수십만 명의 교통편과 시간을 빼앗고 철도사업자에게는 막대한 재정 손실을 불러오게 된다. 정답은 없지만, 현실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사고인 만큼 이런 식으로 문제를 제시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추가로 뚱뚱한 사람을 본선에 떨어뜨려 열차를 탈선시켜 저지하는 방식의 퍼즐 역시 개연성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달리는 열차를 저지해 앞으로 가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다른 철도차량이라도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고속 추돌 사고 가운데서는 상대 열차를 올라타 앞으로 진행하는 사고 사례를 빈번하게 찾을 수 있다. 올라탐 방지 장치는 철도차량의 필수 요소가 될 정도이지만, 최근에도 중국의 온주 고속열차 추돌 사고에서는 고속열차 한 량 반 정도를 종잇장으로 만드는 올라탐 현상이 벌어지고 말았다. 수백 톤의 질량으로 달리는 열차를 완전히 차단시키려면 역시 수백 톤의 질량이 필요하다. 100kg 수준의 인체가 아니라, 과선교 자체를 붕괴시켜야 열차가 앞으로 달려 나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물론 그렇게 하면 열차 쪽 피해가 매우 커진다. 독일의 유명한 고속철도 탈선 사고인 에셰데(Eschede) 사고 역시 탈선한 열차가 과선교를 붕괴시켰기 때문에 사고 규모가 매우 커졌던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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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셰데 열차 사고 현장사진
출처: RuhrNachrichten

결국 철도기술의 발전을 알고 있다면, 분기기 조작 역무원의 책임이 성립하는 경우는 대단히 까다로운 조건이 맞아 떨어질 때뿐이며, 이에 따라 트롤리 문제는 개연성이 매우 낮은 작위적인 문제처럼 보이게 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2. 철도 안전 기술의 초점

물론 작위적인 퍼즐이라 할지라도 기능과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앞서 지적했던 것처럼, 이 퍼즐은 당신이 사람 목숨의 수가 많을수록 더 가치 있다고 평가하는지, 그리고 작위와 부작위 사이의 선택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물어보는 데 있어서는 매우 적절한 틀거리가 될 수 있다. 묻고자 하는 질문에 알맞은 틀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에 철학뿐만 아니라 심리학과 공학으로도 번져나갔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성격 때문에, 나는 이 퍼즐이 철도 안전의 원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앞선 서술의 초점이 분기기 조작원의 책임이 없다는 점을 보이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는 데 주목해 보자. 내가 줄기차게 지적한 내용의 핵심은 현대 철도의 분기기는 구조상 외부에서 조작이 대단히 어렵다는 점, 그리고 기관사나 역무원, 정비 및 보선팀이나 운전을 지시한 관제 등 상황에 따라 여러 주체에게 열차 운행에 대한 책임이 귀속된다는 점이었다.

이런 내용을 요약하여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철도사고의 책임은 일개인에게 귀속되지 않으며, 철도라는 시스템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 상황에 귀속된다. 철도사 200년간 겪었던 수많은 사고 경험은 어떻게 하면 제대로 시스템을 구성하여 사고를 막을 수 있느냐는 방향으로 응축되었다. 철도 안전의 책임은 일개인의 능력에 맡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 있는 수많은 철도원 모두에 의해 지켜지는 것이다.

특히 철도에서 시스템을 강조해야 했던 이유는 다음 두 가지이다. 먼저 이 시스템은 인간의 감각과 순발력만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속도와 무게, 규모를 가지고 있다. 305km/h로 달리는 KTX의 비상제동거리는 3km에 달한다. 또한 언급했다시피 열차의 무게는 통상 수백 톤이며, 열차를 직접 저지할 수 있는 것은 비슷한 무게의 콘크리트 더미뿐이다. 전국 각지의 열차 지연상황이 서로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을 정도로 네트워크의 규모 역시 방대하다.

또 한가지의 이유는 이 시스템이 한 편에 수백 명, 때로는 수천 명의 사람 목숨을 싣고 달리기 때문에, 그리고 대도시 사이를 연결하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교통수단이라는 사회의 평가 때문에 생기는 무거운 책임이다.

아무도 다치지 않은 철도 사고 때문에 철도가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하루에도 15명꼴로 사망하는 도로 교통에 비하면 매우 안전하다는 점을 들어 철도인들이 이것이 철도에게 불리하다고 주장하는 장면을 몇 번 목격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도로 차량에 비해 철도차량이 가진 책임이 훨씬 더 크고 무겁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런 비난도 철도가 감당해야 할 일종의 사회적 책임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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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X 광명역 탈선 사고. 몇 승객의 경미한 부상을 제외하고는 인명피해가 없었으나, 자칫 큰 인명피해로 이어질 수 있는 KTX 사고이니만큼 비난이 집중되었다.
출처: 동아일보

이런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 설계된 시스템의 구성 원칙 가운데 여기서 짚어볼 만한 부분은 바로 페일 세이프(fail safe) 원칙이다. 이 용어는 항공 안전 운항의 핵심 원칙을 지시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

이상이 생기더라도, 기체가 떨어져서는 안 된다. 생각할 수 있는 대부분의 이상 상황에는 최대한 비행할 수 있게 하라.

물론 이런 원칙은 각각의 영역에서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응용될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 예를 들어 원자력 발전소의 경우 원자로에 이상이 발생하면 핵분열부터 즉각 정지시켜야 할 것이다. 철도 운전의 경우에는 이상이 발생하면 최대한 즉각 정차하여 상황을 살피는 것이 널리 통용되는 페일 세이프 원칙이다. 다만 터널에서는 원칙이 변형된다. 터널에서 이상이 생기면 최대한 신속히 빠져나와야 하는데, 터널은 탈출이 어려운 데다 주변 도움을 받기도 어려운 곳이기 때문이다.

이 원칙을 언급하는 이유는 이렇다. 위험 상황 시 도움이 되는 원칙은 간명하고 이해하기 쉬운 원칙이다. 긴급 상황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그 상황 하에서 많은 경우 인간의 판단력과 순발력은 엉망이 되고 만다. 페일 세이프 원칙의 정신은 바로 이렇게 허둥대는 인간에게 조금이라도 대처하기 쉬운 상황과 여유를 만들어 놓으라는 데 있다. 철도 안전 현장의 발전을 이끌어 온 개념은 이런 식의 개념들이지, 사람을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하게 만드는 트롤리 문제와 같은 난제가 아니다.

 

3. 자동차 안전을 위해 철도를 참조하려면

최근 트롤리 문제가 철학계 밖에서도 점점 더 많이 언급되는 이유는, 아마도 자율주행차 때문일 것이다. 자율주행차를 제어할 인공지능이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어야 하느냐는 질문에서 아마도 트롤리 문제는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도로 차량은 엄격하게 통제된 시스템 위를 달리는 철도보다 이런 상황에 처할 가능성이 훨씬 높을 것이다. 이 때문에 트롤리 문제처럼 곤혹스러운 상황에 대한 논의가 철도 안전에 대해 생각할 때보다 더 유용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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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글쓴이는 미래 도로를 좀 더 안전하게 만들기 위한 논의에서 철도 기술이 트롤리 문제와 같이 현업과 무관한 형태로 등장하는 것은 실제로 도로를 안전하게 만드는 데 그리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글쓴이는 오히려 현 단계 도로를 더 안전한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절실한 과제는 철도 안전을 달성하는 데 보탬이 되었던 요소들을 도로에서도 실현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 가운데 손꼽을 수 있는 초점은, 도로 운전에서도 페일 세이프가 성립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을 것이다. 현재 도로 운전의 여건을 생각해 보면, 차량 이상이나 주변 여건의 변화가 생겼을 때 따를 수 있는 간단한 페일 세이프 원칙이 성립할 수 없는 상황이다. 후방에서 달려오는 차량 덕분에 정지한다고 해서 안전하지 않고, 이상이 생긴 차량을 더 주행시키거나 안전하지 않은 도로 위에서 더 주행을 하는 것도 위험한 일이다. 아마도 도로 운전을 더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 트롤리 문제보다 더 중요한 딜레마는 이 딜레마일 것이다.

철도는 이런 딜레마를 잠시 앞에서 언급한 폐색 개념을 도입하여 해결했다. 폐색 개념은 결국 열차 사이에 일정량의 안전거리를 도입하게 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철도 안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자동차 운전에서도 안전거리에 대한 권장 사항이 있지만, 교통량이 증가한 경우나 추월 등을 위해 운전자들은 이를 무시하고 있는 형편이다. 도로와 차량이 이상 상황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날은 절대로 오지 않을 것이므로, 자율주행차는 안전거리를 엄수하는 것을 철도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다. 안전거리는 이상 발생 시 최소한의 대처를 할 수 있는 물리적 기반이 되어 주는 토대이므로 어떤 경우에도 없어져서는 안 된다.

또한 광학 도구에 의존하지 않는 방식으로 차량을 제어할 수 있는 기반이 없다면, 도로 차량은 안개 속에서 감속해야만 한다. 안개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광학 도구로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철도는 이를 전기의 힘으로 달성할 수 있었다. 중후장대한 금속, 즉 도체로 가득 찬 시스템이기 때문에 궤도 회로를 구성하여 차량의 소재를 파악하는 일이 생각보다는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도로 차량은 동일한 방식으로 안개를 극복할 수 없지만, 광학 도구에 의존하지 않는 방식으로 차량을 제어해야 한다는 목표만은 철도 기술에서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례 말고도 다른 많은 흥미로운 사례들이 철도 기술 속에 있다. 이미 이 글은 많이 길어졌고, 글쓴이 역시 철도 기술에 대해 그리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하니 더 상세한 논의는 이만 줄이겠다.

하지만 이것만은 강조하고 싶다. 철도 안전은 트롤리 문제가 부각시켜놓은 일개인의 책임과 선택으로 지켜질 수 없었고, 다양한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안전 설비를 체계적으로 채택하면서 동시에 현업에서 실제 일을 하는 사람들의 선택은 최대한 간명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지켜질 수 있었다. 도로 안전 또한 그러한 방향으로 발전해 나아가야만, 여전히 심각한 교통사고 사상자 숫자는 크게 감소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한국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사람의 수는 여전히 1년에 5천 명 수준에 달하며, 전 세계적으로는 1백만 명이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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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역학의 철학”인가? https://ppss.kr/archives/94336 https://ppss.kr/archives/94336#respond Fri, 02 Dec 2016 04:43:41 +0000 http://3.36.87.144/?p=94336 상관관계와 인과 관계, 그리고 역학이라는 젊은 데이터 과학

과학 철학에 대한 상세한 연구서는 많은 경우 잘 팔리지 않는다. 많은 요인이 있겠지만, 과학 자체도 어려운데 그 과학에 대한 철학은 얼마나 더 어렵겠냐는 생각이 무엇보다도 큰 걸림돌일 것이다. 과학 철학에 대한 연구를 책으로 출간해 더 많은 독자를 만나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걸림돌은 때로 연구 자체보다도 훨씬 넘기 어려운 장벽이다.

글쓴이는 <역학의 철학>이라는 책을 번역해 작년(2015년) 봄에 출간했다. 군대에서 병으로 복무하던 시점이었지만 상세한 교정지를 만들어 넘기던 기억이 난다. 이후 병으로 올해 7월까지 복무하면서 과학의 근본적인 쟁점을 골라 철학적으로 깊이 탐구한 책 몇 권을 수기로 옮겼지만, <역학의 철학>을 작업했던 분들과 함께 준비한 책인 <증거기반의학의 철학>을 제외하면 아직 출간 작업을 진행시킨 책은 없다. 글쓴이는 방금 언급한 장벽을 실감하고 있는 상황에 처해 있다.

그런 와중에, <역학의 철학> 판매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역학의 철학> 1쇄가 모두 팔려 2쇄를 찍어야 하는 상황이라는 내용이었다. 영어책도 1쇄를 모두 팔지 못한 상태라는 소식과 함께였다. 사람들이 그 이름이 무엇을 지시하는지도 잘 모르는 ‘역학’을, 그것도 철학적으로 다루는 책이 한국어권에서 영어권보다도 더 많이 팔려나갔다는 소식이니 놀라운 일이었다. 글쓴이는 1쇄에서 발견했던 몇 가지 오류나, 반드시 개선해야 하는 몇 가지 부분에 대한 수정 요구 사항이 담긴 파일을 작성하면서 깊은 생각에 빠지게 되었다.

이 실적에 감탄하며, 한국의 많은 현장 과학자들이 과학에 대한 철학적 반성에 갈증을 느껴왔다고 선포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 선포하는 데는 큰 의미가 없다. <역학의 철학>이 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었는지, 그 요인을 상세히 분석해 두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그것이 <역학의 철학> 1쇄에 성원을 보내 준 천여 명의 독자들, 그리고 2쇄를 구매하실 수백 명의 독자들에게, 그리고 손실이 예상되는 책을 기꺼이 출간해 준 “생각의 힘” 출판사에게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글쓴이는 <역학의 철학>이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둔 요인이 다음 다섯 가지라고 생각한다.

  1. 역학에 대한 교과서 이외의 창구.
  2. 역학이 인과에 그토록 주목했던 이유가 <인과 해석 문제> 때문이었다는 점을 지적.
  3. 역학 연구자들이 주목하지 않았으나 역학 연구에 꼭 필요한 인식적 덕목을 발굴.
  4. 실제로 역학 연구자들이 씨름하는 개념적 쟁점들을 분석.
  5. 법률적 맥락에서 역학적 증거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연구.

 

역학에 대한 교과서 이외의 창구

역학은 의학 분야 가운데서도 점점 더 중요한 분야가 되어 가고 있다. 이미 수십 년 전부터 계속된 금연 캠페인과 그로 인한 흡연율 하락은 역학 없이는 벌어지지 않았을 변화이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 해에 걸쳐 호흡기에 큰 피해를 입은 사실이 밝혀진 가습기 살균제 사건 역시 역학이 없었다면 그 전모를 밝혀낼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글쓴이는 새로 만나는 사람들에게 내 책을 소개하기 위해 역학이라는 이름이 무엇을 지시하는지 설명하는 일부터 해야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역학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분야가 세 개나 있기 때문이다. 물리학 분야의 力學, 그리고 주역을 다루는 易學, 마지막으로 의학의 한 분야인 疫學까지.

이름과 이 책 사이에 얽힌 에피소드도 있다. 이 책이 막 출간되었던 2015년 3월 당시, 인터넷 서점 알라딘은 이 책을 易學 분야의 책으로 분류했다. 작업 당시 이런 하드코어 학술서가 팔리기 위해서는 易學으로 이 책이 분류되는 것이 훨씬 더 낫지 않겠느냐는 농담을 가끔 하기는 했으나, 정말로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 며칠 뒤 분류가 바로잡히기는 했지만, 역학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낯선 것인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런 상황은 일정 부분 역학에 대해 믿을만한 교양서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유래할 것이다. 영어권에서도 역학 분야의 철학적 쟁점은 저자 브로드벤트에 의해 사실상 처음 연구되었다. 역사책으로도 모라비아의 저술 이외에는 손꼽을만한 것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오늘날 역학은 분명 활발한 연구를 통해 공중보건 정책에 깊은 영향을 끼치고 결국 인구집단 일반의 건강에, 아니 그들의 건강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에도 상당한 영향일 끼치고 있으나, 실제로 그 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일부 소수 연구 인력 이외에는 깊이 이해되고 연구되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인 셈이다.

<역학의 철학>의 1장과 2장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역학의 뼈대를 이해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제공할만한 읽을거리가 된 듯하다. 다시 말해, 그 이후 부분에서 전개되는 철학적 논의나 역학의 전문 논의가 어렵게 느껴진다고 하더라도 1장과 2장만은 역학에게서 영향을 받는 누구나 읽어둘 만한 내용이다. 역학이 대체 무엇이고 무엇을 연구하는지, 그리고 다른 과학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쉽게 대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1장에서 브로드벤트가 보여준 내용은 표 1과 같다.

내용
첫 번째 역학은 인과 연구
두 번째 증거 수집에서 실험이 중요하지 않음
세 번째 추론에서 이론이 중요하지 않음
네 번째 방법이 건강과 관련된 모든 것에 적용됨
다섯 번째 인구집단을 다룸
여섯 번째 공중보건을 책임짐
표 1 역학 연구의 특징

<역학의 철학>은 바로 이 1장과 2장 덕분에 역학이 무엇인지 소개하는 교양서적의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다. 아마도 앞으로도 이 분야에서 교과서나 논문 이외의 저술이 나오기는 어려울 것이니, 역학을 배우는 학생들이나 보도에서 접하고 그 정체를 궁금해할 많은 독자들에게 <역학의 철학>은 오랫동안 추천할 만한 책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고 본다.

 

인과 해석 문제: 상관관계와 인과관계

데이터를 다루는 수많은 과학에서, 금과옥조처럼 취급되는 슬로건이 있다. 바로 “상관관계는 인과관계가 아니다”라는 슬로건이다. 그런데 역학은 놀랍게도 상관관계와 그리 잘 구별되지 않는 방식으로 연구의 결론을 내린다. 바로 다음과 같은 방식이다.

  • 흡연의 기여로 인해 흡연자들이 폐암에 걸리게 될 생애 위험의 초과분율 은 95%이다.

이 문장은 노출과 결과 사이에 특정한 양적 연관성, 다시 말해 일종의 상관 관계가 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역학자들은 이 문장을 흡연과 폐암 사이에는 특정한 인과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 사용한다. 양적 연관성 또는 상관관계로부터 인과 관계를 주장하기 위해, 역학자들은 대체 어떤 방식으로 이들 연관성 측정 지표를 해석하는가? 다시 말해, 역학이 내놓은 측정지표는 어떤 함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관관계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바로 이 문제가 브로드벤트가 말하는 ‘인과 해석 문제’이다.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 브로드벤트가 제시하는 많은 논의들은 현대 철학에서 인과 이론을 다루는 핵심 이론들이며, 몇몇 인물이나 논의는 역학자나 데이터에 기반해 연구 활동을 전개하는 많은 과학자들에게도 익숙한 것이다. 브로드벤트는 ‘확률적 접근’이나 ‘반사실적 접근’에 대한 논의가 인과 해석 문제를 푸는 데 어떤 한계가 있는지 지적하는 한편, 자신이 옹호하는 “설명적 접근”이 가장 설득력 있는 답변을 제시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 서평에서 인과 이론의 전문적인 내용을 다루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선행 논의에 대한 상세한 평가와 자신의 이론에 대한 적절한 옹호가 어우러져, 역학을 비롯한 많은 데이터 과학자들이 자신이 사용하는 인과 추론이 어떤 구조인지 반성해 볼 만한 논의가 이뤄졌다는 평가만은 덧붙이고 싶다 .

진술과 해석
역학자의 진술 흡연의 기여로 인해 흡연자들이 폐암에 걸리게 될 생애 위험의 초과분율은 95%이다.
확률적 해석 흡연은 흡연자가 폐암에 걸릴 확률을 비흡연자보다 95% 높게 만든다
반사실적 해석 흡연은 폐암의 필요조건이다. 즉 흡연이 폐암을 일으키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설명적 해석 흡연은 비흡연자에 비해 흡연자의 폐암이 20배 더 많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핵심 차이다.
표2 역학자의 진술과 세 가지 해석 방식에 따른 각각의 해석 내용

 

역학의 인과 추론이 이뤄야 할 덕목: 안정성과 예측

역학자들은 데이터로부터 인과를 찾아내기 위해 오늘도 분투하고 있다. 하지만 최소 수년, 길면 수십 년간의 연구를 거쳐 얻은 데이터가 단순한 상관관계와 구분되는지 알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일반적인 도구는 역학자들의 손에는 없다.

역학 연구의 많은 결과는 당시의 과학적 상식과도 어긋나는 것이 많았다. 산부인과 진료를 보는 의료진의 손을 소독해 산욕열의 유행을 저지한 젬멜바이스의 사례는 과학사를 조금이라도 알고 계신 분께는 너무나 유명할 것이다(<역학의 철학> 2장에 이 사례에 대한 깔끔한 정리가 있다). 현대 역학의 가장 대표적인 성과인 흡연-폐암 사이의 관계 역시 1950년대 후반 처음 제기되었을 때는 역학계 내부에서도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 통계가 당연해 보이는 것을 숫자로 보여주는 기법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역학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

지금 문제는 이것이다. 역학은 아무도 모르던 인과 관계를 데이터에서 뽑아낸다. 하지만 그것을 대체 어떻게 지지할 수 있는가?

다른 과학의 성과에 의존해, 그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찾아내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젬멜바이스처럼 연구 시점의 과학에 의존해서는 어떠한 설명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부딪친다면, 역학자들은 다른 과학과 고립된 상태에 처한 채로 판단을 내려야 한다. 실제로 젬멜바이스의 메커니즘 설명은 틀렸다. 이런 경우에도 역학은 올바른 인과관계를 찾아낼 수 있었다는 점을 의학사는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런 주장들은 어떤 덕목을 공유하고 있었는가?

브로드벤트는 그 덕목이 바로 안정성이라고 주장한다. 여러 유명한 역학적 성과들은 연구 결과가 안정적이었기 때문에 그리 설득력 없는 메커니즘 추론에 의해 뒷받침되었음에도 널리 수용되었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안정성은 다음과 같은 속성이다.

어떤 결과, 주장, 이론, 추론, 또는 다른 과학적 성과물은 다음 조건을 만족할 경우 오직 그 경우에만 안정적이다.

  1. 실제로, 좋은 과학적 증거에 의해 곧장 반박되지는 않는다.
  2. 현재 사용할 수 있는 최선의 과학적 지식에 비춰볼 때, 해당 주제에 대해 적절한 수준의 연구가 수행될 경우에도 문제의 성과물은 좋은 과학적 증거에 의해 곧장 반박되지는 않을 것이다. (<역학의 철학> 140쪽)

문제가 되는 역학 연구가 내놓은 인과 추론이 이런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역학 연구가 제안한 가설이 중요한 대조 가설에 비해 더욱더 안정적인지 평가하는 것이 중요하다. 안정성은 좋은 역학 연구, 나아가 데이터 과학 연구가 가져야 할 덕목이었고, 또 그래야만 한다.

이런 제안은 관련 과학 연구가 어떤 덕목을 가져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하는지에 대한 제언이다. 이 제언은 역학과 같은 의학의 중요한 목표인 예측에 대해서도 중요한 함축을 가진다. 브로드벤트는 좋은 역학의 예측이 되기 위해서는 바로 방금 말한 안정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어떤 인과 가설에 의한 예측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그 인과 가설이 안정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브로드벤트의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역학과 같이 예측을 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려 하는 (사회과학을 포함하는) 여러 과학이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문제 제기도 포함하고 있다. 많은 (사회)과학자들은, 어떤 법칙이나 예측의 쟁점이 된 현상 기저의 메커니즘을 찾아내야만 좋은 예측을 해낼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듯하다.

브로드벤트는 좀 더 깊은 질문을 제기한다. 그런 탐구가 왜 좋은 예측이 될 수 있는가? 또는, 많은 역학 연구처럼 아예 쟁점 현상 기저의 메커니즘에는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좋은 예측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철학적 답변이 안정성이라는 점을 <역학의 철학> 4~7장의 논의에서 확인하길 바란다.

 

역학에 고유한 몇 가지 쟁점들

<역학의 철학>은 인접 과학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이들 일반적인 주제를 넘어, 현장 역학자들이 실제로 고민하고 있는 주제를 직접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만한 책이다. 다만 이 서평에서는 8장과 9장의 주제는 아주 간략히 언급하고 넘어가도 무방할 것으로 본다. 이들 챕터는 실제로 역학자들이 데이터나 연구 결과 얻은 지표를 해석할 때 있어 범하는 오류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8장은 기여 분율을 해석할 때 역학자들이 자주 범하는 오류에 대응하기 위한 논의가 이뤄진 부분이다. 9장은 역학이 위험을 표기할 때 상대 위험도를 사용하는 경향에 대한 비판이 이뤄진 부분인데, 이 문제에 대해 역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 독자에게 권하고 싶은 저술은 글쓴이의 다른 번역서인 <숫자에 속아 위험한 선택을 하는 사람들>(살림 2013)이다.

다만 10장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상세히 이야기하고 넘어가고 싶다. 이 장은 우리가 질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느냐는 의학의 뿌리 깊은 문제에 대해 현대 역학이 끼친 개념적 충격을 다루고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19세기 후반부 생리학의 발전 이래, 질병은 하나의 원인을 통해 규정되었다. 결핵균이 일으키는 것이 결핵, 비타민 C의 결핍이 일으키는 것이 괴혈병 등. 이런 생각은 여전히 많은 감염병과 결핍 질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준다. 하지만 현대 역학은 암처럼 다양한 요인과 관련되어 일어나는 질환을, 그리고 비만이나 흡연처럼 다수의 결과를 일으키는 현상을 주로 다룬다.

결국 현대 역학은 질병을 하나의 원인과 하나의 결과로 이뤄진 단순한 사슬이 아니라 다수의 요인이 결합해 일으키는 인과적 그물망의 결과로 다룬다. 이런 사고방식을 ‘다요인주의’라고 부른다. 브로드벤트는 이 다요인주의가 가지는 매우 중요한 결과를 비판한다.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결과는 다수의 원인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다요인주의는 무엇이 중요한 요인인지, 그리고 중요한 원인이 아닌지 지적해 보여줄 수는 없는 사고방식이다. 이 문제점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이 문제가 바로 10장의 핵심 쟁점이다. 브로드벤트의 해결책인 “대조 모형”의 상세한 내용은 <역학의 철학>에서 직접 살펴보시길 권한다.

 

역학과 법률

<역학의 철학>의 마지막 장은 역학과 법률의 관계를 다룬다. 역학적 증거가 말하는 노출과 결과 사이의 연결은 앞서 살펴봤다시피 통계적 상관관계이다. 이것은 이 관계를 인과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러 설명이 있다고 하더라도 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 법원은 합리적 의심이 배제될 수 있는 만큼의 증거만이 증거로서 유효한 능력을 가진다고 본다. 그리고 아직 한국 법원은 역학적 증거를 그렇게 인정하지 않은 상태이다.

역학적 증거가 가진 법적 입증 능력 문제는 바로 지금 한국사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문제이다. <역학의 철학>의 저자 브로드벤트가 속한 영미권에서는 상대 위험도가 2보다 클 경우, 즉 역학적 증거에 따르면 쟁점 원인 때문에 문제의 질환에 걸린 것으로 보이는 사람이 쟁점 원인과 무관하게 걸린 사람보다 더 많은 경우 역학적 증거가 입증 능력을 가진다고 본다. 하지만 글쓴이가 대화와 문헌으로 살펴본 결과, 어떠한 한국 법학자도 이러한 견해에 찬동하지 않을 것 같다. 이런 상황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이 질문은 가습기 살균제 피해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로 역학 연구 결과가 제출된 상황인 만큼,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고 동시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자격이 있다. 비록 법학 전통이 다른 영미권의 저술이지만, 바로 이 논쟁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줄 수 있는 저술인 만큼, 그리고 앞으로 발전할 수많은 데이터 과학이 산출한 증거들 역시 법정에 증거로 제시될 것인 만큼 법학도들에게도 일독의 가치가 있는 저술이라고 글쓴이는 생각한다.

 

결론

이렇게 <역학의 철학>을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이유, 그리고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어 예상외로 많이 판매된 이유 다섯 가지를 짚어보았다.

먼저, 이 책은 점점 더 중요한 과학이 되어 가는 역학이 무엇이고 무엇 때문에 현대 의학에서 의미 있는 부분인지 간략히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일반에게 읽힐 만했다. 또한, 상관관계에서 인과관계를 읽어내야 하는 역학의 본성, 그리고 그와 같은 과업을 주변 과학이 제시하는 사전 정보가 극히 부족한 상황에서 해내야만 하는 역학의 어려움 속에서 자연스럽게 제기될 몇 가지 방법론적 질문에 답한 책이라는 점에서 역학과 생의학 전공자들에게 중요한 책이다.

물론, 인과관계나 안정성 같은 쟁점은 사회과학을 비롯한 다양한 유형의 데이터 과학도 공유할 수 있는 만큼, 역학자뿐만 아니라 데이터 과학자 일반에게도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역학에 고유한 쟁점에 대한 논의는 의학에서 사용하는 숫자에 대한 논의를 깊이 있게 해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질병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개념 일반을 반성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전혀 다른 지적 전통인 역학과 법학 사이에서 긴장이 벌어지는 우리 사회의 몇몇 장면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일독을 권할만한 부분이 있다.

글쓴이를 비롯한 역자들은 저자 브로드벤트와의 서신 교환을 통해 미진한 논의를 보충하기도 했고(<역학의 철학> 379~394쪽), 역주를 통해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낯설 철학적 개념과 의학적 개념을 최대한 이해하기 쉽도록 해설하기도 했다. 모두가 책이 가진 가치를 더욱더 알아보기 쉽게 만들고, 더 넓은 범위의 독자들이 역학과 철학의 가치를 알아보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했던 일들이었다.

이 서평 역시 그런 독자들이 더 늘어났으면 하는 마음에서 쓴 글이다. 2쇄를 통해 더 많은 독자를 만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역학의 철학>에 좋은 일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역학의 철학>은 서두에서 이야기했던 장벽 역시 훌륭한 연구가 잘 소개되고 널리 알려진다면 넘을 수 있을 것이라는 증거가 될 것이다. 여러 과학의 개념적∙방법론적 쟁점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이뤄지고, 좀 더 풍부한 논의가 학계에 만개하는 데 과학 철학이 기여하는 이상에 <역학의 철학>이 조그마한 기여를 하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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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레일 파업 완전분석 – 파업과 민영화와 한국철도 https://ppss.kr/archives/15799 https://ppss.kr/archives/15799#comments Mon, 16 Dec 2013 07:09:56 +0000 http://3.36.87.144/?p=15799 전국철도노동조합의 총파업이 며칠째 이어지고 있다. 여론은 비교적 호의적이지만, 파업이 계속 이어진다면 상황이 어떻게 흐를지는 아무도 모른다. 당국은 여전히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있으니, 아마도 이번 파업은 역대 최장 파업이 될지도 모르겠다.

나는 여름에 이미 한국철도의 전반적 상황에 대해 몇 가지를 기술한 바 있다. 여기서는 철도와 파업과 연결된 쟁점 가운데 핵심 쟁점 몇 가지를 골라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다.

 

파업 자체: 관전 포인트

철도파업은 다른 파업과 다르다. 현대자동차의 파업과 철도파업을 비교해 보라. 자동차 공장이 파업으로 멈추면, 이로 인해 피해를 받는 것은 회사측이며 이외에는 차량을 이른 시일 내로 양도받기로 했던 소비자나 협력 업체 정도다. 현대자동차가 대기업이기 때문에 그 효과가 크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파업 때문에 사회 전체가 영향을 받지는 않는다.

반면 철도 파업으로 철도가 영업을 하지 않는다면, 해를 입는 사람들은 하루에 320만 명(2013)에 달하는 철도 이용객이 된다. 매일같이 이용하던 열차가 결행하거나 지연된다고 생각해 보라. 몇 분씩만 더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수백만 명의 몇 분은 결코 의미가 적지 않다. 열차 내부가 극히 혼잡해지는 것은 덤이다. 정부 당국도 관리 책임을 가지고 있으니 책임을 면할 수 없고, 기업들은 도로로 운송하기 곤란한 화물을 수송할 대안을 잃게 된다. 따라서 철도와 연결된 모든 사람들이, 결국 전 국민이 철도 파업으로 인해 피해를 볼 수 있는 셈이다.

병원 파업이 전면적으로 이뤄진다면, 응급 환자나 지속적 관리가 필요한 중증 환자가 큰 피해를 볼 수 있는 것처럼, 철도가 멈추면 수백만 명의 일상에 차질이 생긴다. 필수유지업무를 지정해 파업의 규모를 제한하도록 만든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파업이 벌어지면, 필수유지인력 이외에, 대체인력이 열차에 승무하는 경우가 많다. 파업 와중에 기관사를 유심히 살펴보면, 그 인원 가운데 철도공사 관리직은 물론 은퇴자, 군인, 학생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열차 운전이 미숙할 수밖에 없고, 정규 스태프가 아닌 인원을 긴 시간 동안 운용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점점 열차 운행이 축소될 것이고, 12월 둘째 주에는 비교적 운행 횟수가 유지되었던 고속열차와 수도권전철 운행도 날이 가면 갈수록 축소되기 시작할 것이다.

철도 파업이 모두의 패배로 끝나는 것은, 폭동이 발생할 경우다. 70년대 일본 구 국철이 서서히 침몰해 가고 있을 무렵, 끝없는 태업과 파업으로 인해 안 그래도 복잡한 일본의 수도권 전철은 혼잡과 지연의 극에 달해 있었다. 당시의 혼잡도는 파업을 하지 않을 때에도 푸시맨이 사람을 쑤셔 넣어야 사람이 겨우 들어가는 수준이었고, 파업으로 이 혼잡은 더 심각해진다. 혼잡과 지연을 견디지 못한 군중이 직원을 폭행하고 철도역을 파괴한 폭동이 여러 차례 있었고, 국철 노조에 대한 지지는 땅에 떨어지게 된다.

물론 일본의 70년대는 좌익 과격파의 여러 투쟁으로 노조에 우호적이지 않은 여론이 적지 않았던 시기였고, 반면 2013년 한국은 어느 정도 철도노조에 우호적인 분위기가 형성된 상태다. 하지만 열차 운행이 극적으로 감소하는 한편 눈까지 덮쳐 수도권 전철 운행이 완전히 파행으로 무너질 경우, 오지 않는 열차를 기다리다 흥분한 군중이 폭동을 일으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유혈사태의 가능성을 생각하면, 파업에 단순히 지지를 보내는 태도는 책임 있는 태도는 아니다. 특히 이번 파업은 겨울에, 폭설의 부담을 안고 진행 중이다. 철도노조로서도 유연한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나는 반값만 받고 운행되고 있으며, 평소 운행 우선순위가 가장 떨어지는 부분인 화물 부분에 대해 가장 강경한 투쟁 노선을 취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한다. 20년 이상 한국철도의 화물 부분은 영업 적자를 기록했다. 물론 지금도 화물열차는 굴리면 굴릴수록 손해다. 파업으로 인한 인력 부족에도 화물열차를 30% 이상 굴리고 있다는 점은, 철도 운영사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국가의 정책적 필요만으로 철도 운용이 독단적으로 결정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다.

게다가 사측은 복귀자를 화물 열차로 우선 배치하겠다고 발표하고 있다. 이사회의 결정뿐만 아니라, 이렇게 무리하게 화물열차를 굴리는 방침 역시 배임의 혐의가 있는 행동이라고 본다.

 

민영화와 ‘철도 공공성’

‘민영화’ 조치의 핵심은 앞선 글에서 말했던 것처럼 소유권 이전이다. 수익 사업이 아니었던 사업을 수익 사업으로 바꾸는 조치가 민영화라는 오건호의 주장이 신문 지면을 탔지만, 학계에서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민간이 사업을 운영해 그 수익을 수취, 사용할 전적인 권리를 가진다면 민영화가 된 것이다.

현재 공식적으로 민간자본은 이른바 “수서발 KTX”를 운용할 운영회사의 지분을 보유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점만 보면, 철도공사의 주장이 맞다. 아직 민영화의 문턱을 넘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러 차례 지적되었듯, 정부 당국은 현재의 안전장치를 우회하여 새 철도 운영사를 민간에 매각할 수 있다. 회사 정관에 의해서 막든, 법률에 의해 막든 난이도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일단 철도공사와 분리되어 있으며 지분도 나뉘어 있는 회사를 매각하는 것은, 적어도 철도공사가 직접 운영하는 노선을 분할해 매각하는 일에 비해서는 쉬운 일이다. 수도권 고속선 별도 운영법인 설립은 명백히 민영화로 가기 위한 절차 가운데 하나다.

그렇다면 민영화가 정말로 중요한 문제인 이유는 무엇일까? 철도 공공성을 훼손하기 때문이라는 말이 세간에 오르내리고 있다.

하지만 ‘공공성’처럼 추상적인 말은 구체적으로 정의하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 ‘철도 공공성’을 더 구체적으로 정의할 때 가장 중요한 측면은, 전국을 하나의 통합된 네트워크로 연결해 준다는 점, 그리고 운임을 소득 재분배의 도구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나는 민영화는 전자의 가치를 전적으로 훼손하고, 후자의 가치는 부분적으로 훼손한다고 생각한다.

20년 전부터, 철도 민영화론자들은 노선별로 법인을 분리 설립하여 회사를 매각하라는 주장을 했다. 철도를 여러 개의 법인으로 쪼개라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한 가지는 철도 운행이 이뤄지는 단위대로 사업체를 분리해야 한 지역의 열차 운행 비용을 다른 지역에서 짊어지게 되는 불공정한 경우, 또는 부실한 사업 부분을 투명하게 드러낼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한 마디로 지역별/부분별 투명성 때문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덩치 큰 전국 또는 전체 철도망에 비해 덩치가 작기 때문에 지분을 매각하기도 쉽다는 데 있다.

이 가운데 첫 번째 논거는 철도에 적용하기 힘든 공허한 목표이며, 두 번째 논거는 그저 권리를 매입할 민간 측의 편의만을 생각하는 방침이다. 물론 철도가 여러 조각으로 분할되지 않으면, 민간이 철도를 매입할 수 있을 가능성은 작다.

지역별/부분별 투명성이라는 목표가 공허한 이유는, 한국철도의 성격 때문이다. 먼저 지역별 투명성이라는 목표가 한국철도의 공간적 네트워크와 얼마나 서로 잘 부합하지 않는지 살펴보고, 부분별 투명성이라는 목표가 철도산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부분별 연결을 잘 뒷받침하지 않는다는 점도 보여주도록 하겠다.

지역별 투명성은 한국철도의 지리적 네트워크 구조를 감안하지 않은 목표다. 한국 지역간 철도의 핵심은 거대 도시 서울에서 출발하는 두 개의 가지에서 갈라져 나가는 노선이다. 두 개의 가지란 경부선 계통과 중앙선 계통이다. 이들 가지는 각각 유기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예를 들어 경부, 장항, 호남, 전라선 일반 열차(새마을, 무궁화)는 대부분 서울의 수색 기지에 소속된 객차로 운행 중이다.

물론 두 개의 네트워크는 충북선, 경북선, 대구선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양측을 연결하는 열차도 하루 수십 편(화물 포함) 운행 중이다. 이처럼 유기적으로 연결된 네트워크 덕분에, 한 지역의 열차 운행 비용과 다른 지역의 운행 비용을 엄격하게 구분하기는 힘들다. 아예 최근 철도공사에서도 노선별 실적을 공식 발표하지 않고 있는 형편이다. 상황이 이런데, 노선을 분리해서 철도가 제대로 굴러갈 가능성은 없다.

저밀도 지역 선구 역시 이런 유기적 운영에 보탬이 된다. 예를 들어 화물 수송에 큰 역할을 하는 충북선이 그렇다. 이 노선은 대도시 청주를 스쳐 지나갈 뿐이지만, 강원 지역의 시멘트를 경부선으로 실어 나르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역할을 한다. 따라서 저밀도 농촌 지역을 다니는 열차 승객이 고밀도 대도시 지역을 다니는 열차 승객에게 빌붙어 먹는 사람들이라는 판단이 꼭 정당한 것은 아니다.

물론 정말 한산하고 철도망에서도 큰 역할을 하지 않는 철도 노선은 재정의 도움까지 받는 것이 사실이다. ‘공익서비스의무(PSO)보상금’을 받는 노선은 지역간 소득 재분배를 위한 노선이라고 볼 수 있다. 단, 철도공사는 PSO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부분별 투명성이라는 목표는 철도산업 자체의 구조를 감안하지 않은 목표다. 사업 부분별로 채산성을 명확히 드러낸다는 목표도 건전하다고 보기 힘들다. 철도는 여러 모듈이 결합된 시스템이지만, 직접 서비스를 받아 영업으로 인한 현금이 유입되는 곳은 오직 여객과 화물 부분뿐이다. 차량 정비나 보선 부분은 직접 돈을 벌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게다가 화물과 여객이 서로 다른 기관차를 사용하는 것도 아니다. 결국 철도의 사업 부분을 엄격하게 분할해 비효율적인 부분을 잡아내겠다는 선언 역시 철도 산업의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민영화론자들이 주장하는 철도 분할은 지리적, 산업적 네트워크를 반영하지 않은 주장에 불과하다. 따라서 철도 분할을 할 경우, 전국 철도 및 철도 산업을 통합된 네트워크로 매끄럽게 운영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철도가 소득 재분배에 기여하는 면에 대해서는 세간의 오해가 있다. 이 기능을 할 수 있는 장치 가운데 재정으로 주어지는 공공서비스의무(Public Services Obligation) 보조금은 민간 사업자에게도 얼마든지 줄 수 있는 돈이기 때문에, 민영화 때문에 훼손될 종류의 철도 공공성이라고 볼 수 없다. PSO 지급 대상은 동해남부, 경전, 정선, 진해, 경북선 등의 지방 선구와 수도권 전철의 노인 무임 수송이다.

다만 이들 지급 대상에 대해, 국토부는 제대로 된 값을 치러 주지 않고 있다. 국회의원 오병윤 의원실의 자료에 따르면, 철도공사가 계산한 PSO 사업의 비용은 약 5천억 원에 달한다. 국토부가 다시 정산한 액수는 약 4천억 원이다. 하지만 실제 지급액은 약 3천억 원 수준에 불과하다. 따라서, 국토부 정산액을 기준으로 해도 철도공사는 받아야 할 PSO 보조금 가운데 25%를 받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PSO를 통한 공공성 실현의 방해물은 민영화보다는 오히려 국토부라고 할 수 있겠다.

민영화로 인해 악영향을 받을 수 있는 소득 재분배는 바로 무궁화호와 화물열차의 낮은 운임을 통한 재분배다. 이들 열차가 최근 몇 년간 사실상 반값열차로 운행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이들의 적자를 고속열차에서 얻은 흑자로 메울 수 있었다는 점이 철도 민영화 관련 논쟁이 다시 가열된 이래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바로 이 적자 메우기는 일종의 소득 재분배로 기능하고 있다.

또 이런 재분배는 PSO와 다르다. 무궁화호와 화물로 인한 적자는 열차 운행이 많은 경부선에 집중되어 있고, 고속열차 역시 경부선에 집중되어 있으며. 따라서 철도 운임으로 인한 소득 재분배는 고속열차를 타는 장거리 비즈니스객과 무궁화호를 타는 광역 통근객 사이에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경부선 축 위에서 일어나는 재분배란 곧 사실상 같은 지역 내에서 벌어지는, 계층 또는 이용 빈도에 따라 일어나는 재분배로서, 재분배 재원과 재분배 대상 사이의 지리적 거리가 매우 짧다. PSO와 다른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형식의 재분배는 승용차(유류세, 도시철도채권)로부터 대중교통으로 향하는 보조와 비슷하다. 조금 비싼 수단에서 걷은 ‘공적 자금’을, 조금 싼 수단으로 넘겨주는 방식이다. 이런 재분배를 가능하게 했던 제도적 기초는 고속 열차와 무궁화호∙화물열차가 단일한 회사 소속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철도 민영화는 여객 부분을 하나의 회사를 유지한 채 진행하기보다는 여러 부분으로 분할해 이뤄질 것이기 때문에, 이런 재분배를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따라서 비싼 수단이 싼 수단을 보조하는 부의 재분배는 민영화를 통해 크게 위협받을 것이다.

물론 이런 재분배가 화물열차에 이뤄지는 상황에 대해서는 심각한 문제 제기가 있어야 한다. 화물열차를 이용하는 화물은 시멘트, 철강 회사와 같은 대규모 제조업 기업이나 해운용 컨테이너 하나쯤은 쉽게 채우는 비교적 규모가 큰 제조업 기업에서 나오는 것이다. 고속철 객이라고 해도, 이들을 보조해야 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경부 기존선을 화물 수송용으로 활용하겠다는 고속철 건설 당시의 논리에 비춰보면, 화물열차 이용자들이 고속철 건설부채를 부담하게 만드는 방안이 있어야만 할 것이다.

즉 화물열차가 고속철 운임을 분담하는 것이 실은 더 적절하다. 어찌 되었든 화물열차는 현재 운임만 받아서는 반값열차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상당한 운임 상승이 있어야만 한다. 만일 보조가 필요하다면, 무거운 화물을 덜 수송해도 되기 때문에 편익을 입는 도로 이용객에게서 보조를 끌어와야 할 것이다.

핵심은 이렇다. 세간이 말하는 철도 공공성이란, 전국에 분포해 있는 철도 노선과 차량을 하나의 네트워크로서 유기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역량 그 자체, 그리고 소득 재분배 기능 이 두 가지로 묶을 수 있다. 그런데 철도 민영화는 무엇보다도 철도 사업자를 여러 조각으로 분할하는 것을 그 주요 방법으로 한다. 그러나 철도 분할 민영화는 두 가지 ‘공공성’ 가운데 어떤 쪽에도 기여할 수 없으며, 지금 진행되는 철도 분할은 민영화의 전 단계다.

 

한국철도의 미래: 새 노선의 영업권은 어디로?

앞서 서울에서 출발하는 철도 노선은 두 개의 가지에 불과하다고 말한 바 있다. 경부선과 중앙선은 한국 철도의 두 축이다. 그런데 최근 서울에서 출발하는 세 번째 철도 가지가 생겨나고 있다. 바로 이 가지가 “수서발 KTX”, 수도권 고속선이다. 수도권 고속선 자체는 물론 60km 길이에 불과한 경부고속선의 지선이다. 그러나 수도권 동남부에 새로운 네트워크가 몇 가지 추가되고 있고, 그것들을 수서역에 모두 집결시킨다면 서울을 빠져나가는 새로운 철도 가지가 하나 더 생겨나게 된다.

개량 및 신설 계획을 반영한 한국철도의 네트워크. 한국철도시설공단 홈페이지에서
개량 및 신설 계획을 반영한 한국철도의 네트워크. 한국철도시설공단 홈페이지에서

수서역에선 현재 수도권 고속철만 출발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판교까지 올라오는 중부내륙선(이천, 여주, 충주, 문경 방면으로)을 수서역에 연결시키는 일은 어렵지 않다. 중부내륙선은 김천에서 경부선과 만나며, 지도에는 표현되지 않았지만 김천에서 진주를 잇는 남부 내륙 철도로도 연결될 것이다.

또 수서역에서 중앙선 방면으로 철도를 연결시키는 것도 그렇게 어렵지 않다. 평창 방면 고속철을 민간에 매각한다는 문건에서 언급된 수서역 ~ 양평 용문역 사이의 철도나, 비록 예비타당성조사에서 떨어졌지만 언제든 다시 부활할 수 있는 여주~원주간 철도를 활용하면 수서역에서 출발한 열차를 강원도로 보내는 데 어떠한 어려움도 없다.

수서역은 철도 투자의 성과가 드러날 10년 뒤 시점에는 경부선, 중부내륙선, 중앙선 방면으로 모두 향할 수 있는 철도 거점이 될 것이다. 마치 고속도로에서의 동서울 톨게이트와 같은 위상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추가로, 삼성역에 고속철이 개통되어 수서역과 연결되면, 수서역으로 모여든 세 번째 철도 가지의 역할은 더 강화될 것이다.

국토부는 아마도 이 세 번째 철도 가지가 자생력을 가지고 전국 철도망에 끼어들 수 있는 사업자를 구성할만한 최소한의 크기가 된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 같다. 적어도, 이 판단은 예상 승객 면에서는 타당할 것이다. 수서역∙삼성역의 배후에 있는 서울 강남권에는 제대로 된 철도가 없었다. 이들은 대구나 부산처럼 먼 곳까지는 철도를 이용할 동기가 충분했지만 천안이나 대전처럼 가까운 곳을 철도로 이동할 이유는 없었다.

강원, 충북, 경북내륙 지역의 경우에도 강남권에서는 도로가 훨씬 우세했기 때문에 수서역∙삼성역 출발 열차는 상당한 흥행을 거둘 것이다. 비록 고속철에 대한 예측밖엔 없지만, 수도권고속철에 대한 예비타당성조사 결과는 수서역∙삼성역이 철도 객을 확대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수서발 KTX’에 대한 KDI 예비타당성조사(2009)의 수요 예측 결과.
‘수서발 KTX’에 대한 KDI 예비타당성조사(2009)의 수요 예측 결과.

수도권고속선 이용객의 수는 약 6만 명으로 예측되었으며, 서울∙용산발 열차 수요에는 거의 영향이 없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KDI는 재정당국 산하에 있는 국책연구기관인 만큼, 수요 예측을 국내 국책 연구기관 가운데서 가장 보수적으로 하는 기관이다. 때문에 나는 보도되는 다른 수요 예측보다도 KDI의 수요 예측을 가장 믿는다. 세 번째 가지의 다른 부분도, 기존 철도의 수요는 거의 침식하지 않은 채 철도 이용객을 늘릴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중부내륙선 방면으로는 철도 수요가 사실상 없었으므로, 이 노선의 수요는 그 자체로 신규 수요 창출이 된다.

그러나 세 번째 가지가 자생력이 있다는 판단은 부적절하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국토부의 투자 부족 때문이고, 또 부분적으로는 철도 산업의 유기적 특성 덕분이다.

국토부의 투자 부족에 대해 살펴보자. 세 번째 가지의 주축은 물론 수도권 고속선이다. 그러나 여름에 내가 썼던 글에서 밝혔듯 수도권 고속선에 투입하기 위해 제작되는 차량의 수는 불과 22개 편성이며, 이렇게 모자란 열차로는 제대로 된 운전 시각표조차 작성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고속철 차량은 최소 10개 편성 이상 필요하다. 그리고 급 한대로 공백을 메울 수 있는 것은 철도공사의 고속철 차량(70개 편성 보유)일 것이다.

철도 산업의 유기적 특성은 이미 앞에서도 대략적으로 살펴본 바 있다. 우선, 고속철은 평택부터 부산역까지 대부분의 선로를 함께 사용하고, 부산지역의 차량 정비 시설도 함께 사용해야만 한다. 고속철 차량이 일상적으로 해야 하는 정비조차 부산에서는 서로 다른 회사끼리의 거래로 처리해야 한다면, 같은 회사 차량을 처리할 때는 없었던 거래 비용이 늘 발생하게 된다. 이런 비용을 부담해야 할 필요는, 한국철도 전체의 입장에서 볼 때는 없다.

마찬가지 지적을 수서발 중부내륙선 방면과 강원도 방면에서도 할 수 있다. 승객 흐름상 중부내륙선 열차는 동대구역까지, 중앙선 방면 열차는 강릉이나 제천, 영주, 경주까지는 운행해야 한다. 여기서도 거래 비용이 발생할 것이나, 수서역을 거점으로 하는 사업자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점을 빼면 이들 거래 비용은 누구에게든 도움이 될 구석이 없다.

이런 특징은 교통 네트워크 중에서도 특히 대도시별로 몇 개 되지 않는 터미널을 가지고 열차를 운용해야 하는 장거리 간선 철도에서 두드러진다. 민자 고속도로는 단지 도로망을 제공할 뿐 운전은 운전자들이 하는 종류의 시스템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운전을 할 수 있는 기반 시설만 갖추면 민간의 영업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신분당선이나 9호선 같은 도시철도는 다른 회사의 차량이 진입하지 않는 폐쇄적인 네트워크로 운용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러나 간선철도, 특히 한국의 간선철도는 부산역이나 동대구역을 사용할 수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부산이나 대구에 이들을 대체할 대규모 역을 지을 수도 없고, 거의 모든 열차가 통과∙종착할 부산역∙동대구역에서 발생할 거래 비용의 규모도 적지 않다. 게다가 익산이나 제천 같은 중소도시 철도 거점의 경우에는 지금의 철도역 말고는 정말로 어떠한 다른 대안도 없을 것이다.

결국 나는 세 번째 가지 역시 한국철도공사가 운용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투자 부족을 돌파할 수 있는 여지가 비교적 커지며, 전체 네트워크를 거래 비용 없이 활용할 수 있어 유기성이 더 강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

이렇게 2013년 겨울 철도 파업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 보았다. 철도파업처럼 파급 효과가 큰 파업은 그 충격을 완화할 수 있는 방법을 염두에 두고 이뤄질 필요가 있다. 하지만 현재 파업의 쟁점이 된 철도 민영화는 분명 큰 문제다. 민영화는 철도를 산산이 분할하는 사전 조치 없이는 이뤄질 수 없다. 아직 당국이 철도 민영화의 문턱을 넘지는 않았지만, 민영화의 필수 준비 단계인 철도 분할은 철도 네트워크를 유기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치러야 할 비용을 크게 올릴 것이다. 이것은 한국철도의 연장이 크게 늘어날 시점이 될 ‘세 번째 가지’(수서역 발 노선들)가 추가되더라도 마찬가지다.

한국철도의 연장은 현재 3500km 수준이며, 수서발 노선들이 추가된다고 하더라도 약 4000km 수준을 넘지 않는다. 이런 길이는, 중국의 1개 성에 있을 철도보다도 짧은 수준이고, 독일의 1/10, 일본의 1/6에 불과한 수준이다. 국제적으로 비교해도, 한국철도가 둘 이상의 사업자가 부대끼며 있을만한 규모가 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수도권 고속선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신규 간선철도 역시 철도공사가 운영하는 방침이 철도망을 유기적으로 운영하는 데 적절할 것이다. 현재 당국의 철도 분할 정책은 민영화라는 지배 구조 문제보다도 이런 규모의 경제를 무시하는 방향이기 때문에 부적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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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덕후가 본 철도 민영화가 부당한 이유 https://ppss.kr/archives/9263 https://ppss.kr/archives/9263#comments Wed, 26 Jun 2013 23:42:45 +0000 http://3.36.87.144/?p=9263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해 보자. 철도 상하분리를 통해 그 제도적 기반이 마련된 철도 운송부분 민영화는, 최근 국토부가 신규 노선 운송권을 철도공사에 주지 않으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더욱 가시화되고 있다. 게다가 6월 26일, 국토부는 「철도산업 발전방안」 을 통해 철도공사를 여러 개의 자회사로 분할한다는 방침을 최종 확정하였다.

철도공사는 정말로 방만하고 안이한 회사인가?

민영화가 한국철도에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가? 에서 이어집니다.

 

철도 민영화를 둘러싼 세 가지 주요 질문

이에 따라 철도 민영화 논란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나는 이 논의를 요약하는 데 가장 좋은 질문이 “누가 한국철도의 주인이어야 하는가?”라고 보고, 이 질문의 하위 질문으로 다음 질문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1. 철도공사는 정말로 철도를 믿고 맡길 수 없는 방만하고 안이한 조직인가? NO

직원 1인당 철도총괄지표는 대단히 양호하며, 수송계획도 제한된 자원을 감안하면 적실한 편이기 때문에 철도공사의 운송사업 역량에는 큰 문제가 없다. 오히려 저운임 정책으로 인해 영업수지에 큰 타격이 있으며, 정부의 직간접적 경영 개입의 부적절함 때문에 철도망 구성이나 철도에 대한 공론 형성이 부적절하게 이뤄지는 문제가 있다.

2. 민간 참여는 한국철도에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가? NO

막대한 고속철 건설 부채를 상환하는 데 수도권고속선 신규사업자가 참여하지 않는다면, 이는 심대한 불공정경쟁이자 철도부채 문제를 부추길 뿐이다. 부채를 상환하고, 철도 스톡을 확보하는 투자에 신규사업자가 본격 참여한다면 민간사업자의 부담은 대단히 커져 이익 실현에 방해물이 될 것이다. 또한 지금처럼 차량에 대해 정부가 소극적으로 재정을 투자하는 상황 하에서는 오히려 철도공사의 기존 고속열차 스톡을 최대한 활용해야만 폭주하는 수요에 대처할 수 있다. 특히 마지막 이유 때문에, 수도권고속선은 철도공사가 운영하는 것이 적절하다.

3. 공적서비스의무 보조금이 현재 한국의 맥락에서 민간참여에 유효한 동력이 될 수 있는가? 현재 시스템으로는 NO

원리상 공적서비스의무 보조금 지급은 민간이 철도의 공익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게 만드는 기법이다. 하지만 국토부는 자신들이 철도공사가 공익서비스의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돈이라고 평가한 액수의 75% 정도만을 공사에게 지급하고 있으며, 민간사업자에게는 이보다 더 적은 액수를 지급하려는 방침을 세운 상태다. 이 때문에 공공서비스의무 보조금은 한국에서는 민간이 철도의 공익적 기능을 수행하도록 하는 유인책이 사실상 될 수 없을 것이다.

큰 질문 아래서 이들 답을 다시 간추려 보자.

한국철도공사는 믿을만한 운송사업 역량을 갖춘 상태인데 반해, 국토부는 그보다는 못미더운 관리 역량을 갖춘 행위자다.

민간 참여는 주인이 져야 할 책임(고속철 부채, 유형자산 투자 부담)를 최대한 지지 않는 방식으로 논의되고 있으므로, 이 사업자는 철도의 주인이 되기에는 크게 부족하다.

공적서비스의무 보조금은 오지 노선의 혜택을 받는 지자체나 다른 복지정책 부처처럼 연관된 행위자의 도움 없이는, 지금처럼 철도공사도 민간사업자도 견디기 힘든 정도만 지급될 것이다.

 

국토부에 대한 변론, 그리고 비판

이런 평가는 철도공사를 악조건 속에서 분투하는 사업자로, 국토부는 이들을 괴롭히는 악당으로, 민간참여 사업자는 철도의 주인이 되기에는 사실상 모자란 이들로 그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철도공사와 민간참여 사업자에 대한 평가는 명백한 참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국토부의 경우에는 조금 더 변론이 가능한 입장에 서 있다.

재정정책의 맥락에서 보면, 이들은 팽창일로에 있었던 인프라 관련 예산을 깎아야 하는 입장에 있다. 현 제도상, 편성당 3~4백억원에 달하는 고속열차를 비롯해, 각종 철도차량은 정부가 절반 정도 예산을 대서 구매해야 한다. 한 편성이라도 차량을 줄이고자 노력할 수 밖에 없다. PSO 보조금 역시 가능하면 덜 지급해야 한다. 때문에 이들은 철도공사의 역량을 최대한 활용하여 재정에 끼치는 부담을 줄일 임무가 있다. 이 점에서 국토부의 행동은 어느 정도 변호받을 수 있다.

하지만 국토부는 철도 민영화 논의를 꺼낸 이래, 철도부채에 대해서는 지금껏 유효한 방침을 내놓은 바 없다. 또한, 수도권 고속선 개통 이후 피할 수 없는 차량 부족 문제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고 있다. 게다가 앞서 글에서 분석했듯 수도권고속선 차량 부족 문제에 대해서는 단기적으로 철도공사의 고속열차 활용도를 끌어올려 대처하는 방법으로 서비스 수준을 확보하는 길이 있음에도,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수도권고속선의 철도공사 운영을 대안에서 무시하고 있다.

이 점에서, 이들은 변명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 그리고 이 잘못은 국토부가 철도의 훌륭한 주인이 되려면 철도정책에 대해 더 깊은 책임을 지고 더 깊은 분석을 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지금의 국토부는 철도의 주인으로 만족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게다가 국토부는 6월 26일 「철도산업 발전방안」에서 철도공사를 지주회사로 개편하겠다는 발표를 하기에 이른다. 이에 따르면, 철도공사는 경부선 등을 운용하는 지주회사 본사에, 수서발 수도권고속선을 운용하는 자회사, 벽지 노선을 운용하는 제3섹터 여객회사, 화물 자회사, 차량관리 자회사, 시설정비 자회사, 기타 비운송사업 자회사로 분할되어 각각의 법인이 되게 된다.

이들 자회사 가운데, 화물∙차량관리∙시설관리 자회사에 대해서는 철도공사 지분이 100%라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이들을 분할하는 이유는 경쟁을 도입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직 회계적 분리를 통해 각 부분별 비용 요소를 분리하기 위한 조치일 뿐이다.

 

투명성 증진, 자회사화로 가능할까?

“투명성을 높이고 적자 감축 및 비용절감”을 한다는 것이 국토부의 의도지만, 비용 절감이나 기타 노동생산성 증가가 철도공사에게 시급하다고는 보기 힘들다는 점을 앞서 확인했다. 또 재래선의 적자는 결국 저운임 정책 때문이라는 사실 또한 앞서 확인했다.

법인 분할을 통해 투명성을 높인다는 주장에 대한 좋은 반례로는 같은 국토부 산하 공기업인 LH 공사의 합병 사례가 있다. LH 공사는 과거 대한주택공사와 한국토지공사를 합병하여 만들어진 거대 공기업이다(LH는 2012년말 현재 현대기아자동차보다 자산규모가 더 큰 기업집단이다).

두 기업을 합병했던 이유는 중복 조직을 없애는 한편 택지조성과 주택건설을 한 기업이 수행하도록 하여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서였다. 토지공사와 주택공사의 관계는 철도부분에서는 철도공사와 시설공단의 관계와 유사하다. 그리고 토지공사와 주택공사의 합병은 대체로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

그렇다면 국토부는 LH의 사례를 본받아, 철도산업에서도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조직 합병을 시도해도 괜찮았을 것이다. 그러나 국토부는 오히려 차량관리 및 보선 업무처럼 철도 운영에 핵심적인 업무를 자회사로 분리하여, 유사 업무를 수행하는 조직을 늘릴 수 있는 우려가 있는 방식으로 조직을 개편하려 시도하고 있다.

한 산하 공기업에 대해서는 공공기관 합병이 조직 슬림화와 효율성 극대화를 가져온다고 주장하고, 다른 산하 공기업에 대해서는 대체로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 회사조차 분할해야 좋다는 주장을 하는 국토부는 자신의 주장이 과연 일관된 것인지 반성해야만 한다.

 

철도공사의 자금난, 자회사가 꼭 필요한가?

철도공사의 자금난으로 인해, 수도권고속선 개통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철도공사의 고속선 사업자 출자 비율을 30%로 제한하며 70%는 공적자금으로 지원한다는 주장은 일견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새 고속선을 개통하기 위해서는 시설투자가 필요할 뿐, 출자나 새로운 법인 설립이 필요한 것은 전혀 아니다. 필요한 시설투자 자금은 신규 차량을 빼고 약 4천억으로 추산되며(고속철 사업 민간참여에 필요하다고 국토부가 이야기한 비용을 준용), 따라서 공적 자금을 지원한다면 이 정도 액수에 차량 증비 자금을 약간 지원하면 충분하지 않을까 한다.

설령 자금난 때문에 철도공사의 출자 비율을 낮춘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철도공사측의 경영권 방어를 위해 택할 수 있는 기법을 채택하지 않은 것은 국토부측의 악의로밖엔 해석할 수 없다. 철도공사에게 이른바 황금주(단 한 주만을 보유하더라도 경영권을 발휘할 수 있는 특별한 권리가 부여된 주식)를 부여했다면, 그래서 대부분의 출자금을 공적자금으로 조달하면서도 철도공사는 새 고속철 사업자의 실질적인 경영권을 확보했다면?

아마 철도공사의 자금난을 해소하면서도 경영권 매각에 대한 우려는 적은 법인 구성이 가능했을 것이다. 황금주 제도는 이미 외국의 여러 민영화 사례에서 사용되고 있는 기법이다. 제도적으로 약간의 보강만 거치면, 공사가 이를 보유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물론 황금주 제도 역시 민영화를 시도하면서, 혹시 있을지 모르는 부작용을 제어하기 위해 만든 제도일 따름이다. 나는 철도공사의 출자금 조달 문제를 걱정했다면, 황금주 제도를 택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정도의 주장을 했을 뿐이다. 새 고속철 사업자를 따로 만들어서 얻을 편익이 크지 않다는 점은 다음 글에서 상세히 서술하기로 하겠다.

 

지자체의 철도에 대한 태도의 문제 : 역내 대중교통이 아닌 혐오시설

철도 주변 행위자 가운데 가장 아쉬운 것은, 지금껏 지자체가 철도에 대해 보여온 태도다. 이들은 간선 철도를 장거리 여객 및 화물을 처리하는,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좋은 혐오시설로 생각했지, 역내 대중교통수단으로 활용하는 데 대해서는 거의 무심했다. 하지만 이런 태도로는 지역의 승용차 의존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 밖에는 없고, 광역 생활권 형성이나 그에 기반한 중심지의 고밀도화도 기대할 수 없다. 철도공사로서도 다음과 같은 독일철도의 실적은 따라갈 수 없을 것이다.

독일철도와 한국철도의 부분별 여객 수송실적
독일철도와 한국철도의 부분별 여객 수송실적

독일의 인구밀도는 ㎢당 230명으로, ㎡당 500명에 육박하는 한국보다 훨씬 낮다. 그리고 인구밀도가 낮을수록, 그리고 이동거리가 가까울수록 철도의 수송분담률이 낮아진다는 것은 대단히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장거리 열차보다 지역내 열차의 운송량이 더 많다. 인구밀도가 오히려 높은 우리도, 지자체가 광역 생활권을 연결하는 교통수단으로 철도를 발전시켜달라는 요구와 적절한 재정 지원을 계속한다면, 독일과 같이 지역내 열차가 활성화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앞서 말한대로 지역의 광역 생활권 형성에 큰 도움을 줄 것이며, 철도공사의 영업 수지에도 큰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국토부는 수도권 고속선 논쟁과 관련해서 재래선 승객을 고속철 승객에게 의존하여 서비스를 받는 준 무임승차자로 간주하는 언급을 여러 차례 남긴 바 있는데, 이에 대해서도 영업수지가 개선되면 충분한 반론이 될 것이다.

 

철도의 주인은 누구인가? 민영화는 적절한가?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철도의 주인은 철도 체계 주변에서 편익과 손실을 입는 모든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이들 모두가 철도에 깊은 관심을 기울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여러 조직이 이들을 대신하여 철도에 대해 판단을 하는 이유다. 이를 적절하게 수행할 수 있는지 여부에 따라, 각각의 조직들이 철도 각 부분의 ‘주인’으로 적절한지 판단할 수 있다.

철도공사는 어느 정도 합격선 안에 있었다.
민간의 경우, 간선철도 부분에서는 책임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행위자는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국토부는 우려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지자체는 (특히 직접 철도를 운영하는 경우도 있는 외국과 비교했을 때) 대단히 실망스러운 수준이다.

그렇다면 결국 한국철도에 자격 있는 주인을 찾아주기 위해 필요한 일은 민영화가 아니라 오히려 정부 부분인 국토부와 지자체의 행동 변화인 셈이다.

 

참고 문헌

삼성경제연구소 편, 『민영화와 한국경제』. 1996.
박정수∙박석희, 『공기업 민영화 성과평가 및 향후 과제』. 2011.
철도통계연보, 1978~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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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화가 한국철도에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가 https://ppss.kr/archives/8851 https://ppss.kr/archives/8851#comments Fri, 21 Jun 2013 02:54:35 +0000 http://3.36.87.144/?p=8851 철도공사는 정말로 방만하고 안이한 회사인가? 에서 이어집니다.


민간 참여는 한국철도에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가?

민간사업자는 철도를 통해 수익을 올리려고 할 것이다. 나는 여기서 이들의 참여가 현재 예정된 준비 하에서 사업자에게 이익이 될 것인지, 민간 참여가 철도부채 문제에 도움이 될 것인지, 그리고 이용객의 편익을 개선하는데 충분한 도움이 될 것인지 판단해 보고자 한다.

앞서 지적했듯, 철도사업을 통해 수익을 올리려면 적정 수준의 운임이 보장되어야 한다. 물론 이미 철도공사도 고속철 사업에서 어느 정도 영업 이익을 올리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수도권고속철 운영사업자가 영업 이익을 올릴 수 있다고 보는 데는 무리가 없다.

하지만 고속철은 고급 교통수단으로, 어느 정도는 사업자가(결국 승객에게 전가된다) 건설비를 부담해야 하는 시설인 것이 사실이다. 고속열차의 편익은 건설 후 수십 년에 걸쳐 발생하므로, 이 부담은 부채의 형태로 사업자가 짊어지게 된다.

각 노선별로 사업자 부담 비율이 달라지는데, 대체로 절반 정도는 사업자의 부담이다. 이에 대해 철도공사나 철도 동호인들은 불만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다른 교통수단과의 형평성을 생각하면 이 결정은 타당한 것이다. 예를 들어 전국의 모든 고속도로망과 인천공항의 경우 건설비의 상당 부분이 부채로 조달되었다(심지어 인천공항 3단계의 경우는 전액 부채로 건설한다).

고속철 건설부채의 현황은 이렇다.

한국고속철도의 총사업비와 부채 현황
한국고속철도의 총사업비와 부채 현황

약 19조 원의 부채가 고속철 사업으로 발생한 셈이다. 결국 이 돈은 고속철 사업자의 부담이고, 물론 승객에게 전가될 것이다.

인프라 건설부채는 앞서 말했듯 편익이 건설 후 수십 년에 걸쳐 발생하므로, 부채 상환 부담을 세대 사이에 균등하게 분할하는 작업이 중요하다. 상환되는 부채의 가치를 매년 동일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시중 이자율을 감안하여 미래의 부채 상환액수를 할인해 평가할 필요가 있다. 미래에 갚을 부채는 그만큼 불확실하기 때문에, 할인해 평가해야 한다.

다음 표는 18.9361조원의 부채를 30년 내로 매년 동일한 절댓값만큼 상환하려면 얼마를 내야 하는지 계산한 표이다. 모든 연도의 상환액수 절댓값은 동일하다. 단, 현재 KDI가 인프라 건설사업 예비타당성평가에 사용하는 사회적 할인율인 5.5%/년을 적용하여 미래에 지불할 원금의 가치를 할인했다.

사회적 할인율에 따른 각 연도별 고속철 부채 부담액
사회적 할인율에 따른 각 연도별 고속철 부채 부담액

매년 1.2751조원을 내면, 부채로 인한 부담을 30년 뒤 시점까지 균등하게 분할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물론 이 경우, 절대가치로는 약 38조 원을 부채 처리를 위해 납부해야 한다. 원금과 38조 원의 차이는 이자로 보면 된다. 물론 이 값은 추정치이니, 독자 여러분께서는 고속철 부채의 원활한 상환을 위해서는 1조 원 이상의 원리금 상환이 있어야 한다는 지적 정도로 보면 된다.

그런데, 현재 고속철도 사업자들이 갚아나가고 있는 부채는 1.2751조원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고속철 부채의 60%가량을 부담하는 시설공단의 경우, 철도공사가 시설공단에 납부하는 선로사용료 0.25조원 가운데 0.1조원은 고속철도 유지보수비용으로 충당하고 약 0.15조원 정도의 여유만이 있을 뿐이다(2011년 철도통계연보, 1636쪽, 1648쪽).

철도공사는 부채를 갚아나가기는커녕, 고속철도가 속속 개통되면서 계속 부채를 인수하고 있는데다가 고속열차 추가도입 등 막대한 투자 소요로 인한 차입금이 계속 증가하는 상태다. 국토부는 철도부채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파악하고는 있으나, 이것을 해결할만한 뾰족한 대안을 내놓지는 못하고 있는 상태다.

만일 새로운 고속철도 사업자가 이렇게 심각한 상태에 있는 고속철도 부채를 일정 부분 분담하지 않는다면, 이는 심각한 직무유기이자 사업자에 대한 특혜라고 할 수 있다. 철도공사와의 공정한 경쟁을 위해서는, 경부고속철도로 인한 부채를 포함해 고속철도 건설 부채 전체를 열차 운행 비율에 맞게 분담해야 한다.

나는 처음 교통연구원에서 <수서發 고속철도 운송사업 제안요청서(초안)>을 발표했을 때, 그 내용에 따라 분석하면 현재의 선로사용료 납부 조건에 따라 철도공사에 사업을 맡겼을 때보다 철도시설공단의 철도자산으로 인한 수익이 1천억 원 가량 증가할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 안은 고속철 부채 부담을 경감하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좋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재 수도권고속선 및 호남고속선용으로 현대로템에 발주된 고속열차는 22개 편성에 불과하기 때문에, 민간사업자는 정액으로 설정된 시설 임대료를 납부할 만큼의 수익을 올리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다시 다루겠지만, 최근 민간운영 계획을 용역 발주한 네 개 노선의 경우, 국토부는 철도공사에 주는 보조금보다 적은 보조금 지급을 바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수도권고속선이든, 4개 신규 노선이든 민간이 반드시 수익을 낼 수 있다는 보장이 있는 계획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게다가 철도운임 상한선을 올린다는 이야기도 없으니, 민간사업자가 고속철 부채의 구원군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수익을 창출하는 것은 사실상 힘든 일일 것이다.

 

차량 부족 문제는 철도공사가 수도권고속선을 운영하게 하면 보완할 수 있다

특히 수도권고속선 차량 부족 문제는 민간사업자의 이익 실현에도 악영향을 끼칠 뿐만 아니라 이용객의 편익에도 악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이를 보이기 위해, 가상의 고속열차 운전시각표를 작성해 보았다. 현재 발주된 고속열차는 22개 편성에 불과하나, 내가 작성한 가상 운전시각표에서 열차 운행을 위해 필요한 편성 수는 최대 25개였다. 예비차량과 각종 정비, 중련에 필요한 차량 숫자를 감안할 때, 거의 10개 편성은 모자란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중교통은 승용차 등의 개인교통과는 달리 차량에 맞춰 일정을 짜야 하므로 사람들이 불편함을 호소한다. 따라서 언제 가면 확실히 열차를 탑승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도록 시각표를 짤 필요가 있다. 특히 도시 밖으로 가는 간선철도는 이런 기법이 필수적이다. 매시간 지정된 분에 열차가 출발하도록 하여, 사람들이 쉽게 일정을 맞출 수 있게 만드는 기법을 이른바 “패턴 다이어그램”이라고 부른다.

이를 적용하여, 수서역과 목포역에서 매 시 정각에 호남선 고속열차가, 수서역과 부산역에서 매 시 33분에 경부선 고속열차가 출발한다고 설정했다. 호남선의 운전시각은 115분, 경부선의 운전시각은 132분으로 설정했다. 상행은 여기에 3분을 추가했다. 추가로, 종착역 도착 이후 40분 정도의 시간이 열차 청소와 정리에 필요하므로 이 시간 또한 열차를 운용 중인 시간으로 보고 계산에 포함시켰다. 이 시간 없이 열차를 투입한다면, 차내는 쓰레기장이 되고 화장실 변기는 넘쳐 악취가 차내에 진동하게 될 것이다. 다음은 가상의 운전시각표로 그린 “다이어그램”이다.

앞서 제시한 가정에 따라 작도한 수도권고속선 경유 고속열차의 다이어그램.
앞서 제시한 가정에 따라 작도한 수도권고속선 경유 고속열차의 다이어그램.

이 그래프는 <수서發 고속철도 운송사업 제안요청서(초안)>에 제시된 숫자인 경부선 하루 편도 24개 열차, 호남선 하루 편도 27개 열차에, 각각 주말 증편 4 / 5편을 집어넣어 그린 것이다. 총 28*2+32*2=120개 열차가 표현되어 있다. 앞서 말한대로 매시 정각에 호남선, 매시 33분에 경부선 열차를 출발시키고, 남은 횟수는 매시 30분에 호남선, 매시 3분에 경부선 열차를 투입하여 채웠다. 물론 사람이 집중되는 시간대에, 현행 시간표를 참고하여 열차를 집어넣었다. 11시 33분부터 12시 33분까지는 고속철 출발을 멈췄는데, 이는 고속선은 낮시간대에도 1시간 정도 보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떤 시각을 나타낸 수평선을, 몇 개의 열차 선이 지나갔는지 센 값이 바로 그 시각에 운용중인 열차 편성의 숫자다. 이 시각표대로면, 18시 36분에 가장 많은 열차가 필요하다. 앞서 말한 “25개 편성 필요”라는 주장의 근거가 되는 값이다. 예비차, 정비로 인해 빠질 수 있는 차량은 물론, 일부 혼잡시간대에는 중련도 필요할 것이기 때문에, 나는 최소 32~35개 편성은 보유해야 제대로 된 영업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열차를 단순히 40분, 또는 45분 간격으로 균등하게 배차할 경우 필요한 열차 수는 17개 편성으로 감소한다. 하지만 이 경우, 패턴 다이어 작성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승객의 편익은 크게 감소할 것이다. 패턴 다이어 작성은 기본 중의 기본인데, 이를 달성할 역량을 갖추지 못한 사업자가 승객의 편익을 늘려줄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려운 일이다.

이 상황을 바로잡으려면 차량 조달 계획을 밝혀야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공개된 정보하에서는 차량 추가조달에 대한 의지를 가진 사업자는 없는 것 같다. 결국 신규사업자 자력으로는 차량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럴 때 급한 대로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이 한국철도공사 소유의 고속열차를 수도권고속선에 투입하는 방법이다. 물론 현재 철도공사의 고속열차는 현재 열차 운행량을 유지하기에도 벅찬 상태다. 하지만 어떻게든 여력을 짜낼 방법은 있을 것 같다. 다음 그림을 보자.

KTX-1의 2013년 5월 토요일 기준 다이어그램.
KTX-1의 2013년 5월 토요일 기준 다이어그램.
KTX-1의 2013년 5월 토요일 기준 다이어그램.
KTX-1의 2013년 5월 토요일 기준 다이어그램.

현재 한국철도공사가 보유한 KTX-1의 숫자는 46개 편성, KTX-산천의 숫자는 24개 편성이다. 그리고 이들 차량 모두 여유 편성이 각각 6개 편성에 불과하다. 예비 열차를 10% 정도는 확보해야 하므로, 투입 여력이 크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다만, 수도권고속선 가상 운전시각표 상에서 고속열차가 가장 집중되는 시간대(18시 36분)에 현재 철도공사의 열차 투입량에는 비교적 여유가 있다. 그리고 KTX-1은 현재 수도권고속선용으로 발주한 열차보다 정원이 두 배 이상 많다(935명 : 404명). 또, 호남고속선 개통 및 경부고속선 대전, 대구 시내구간 2복선화가 끝나면 열차의 운전시각도 약간 줄어들 것이므로 차량 사정에 조금은 숨통이 트일 것이다.

조금 더 확보된 차량을, 특히 KTX-1을 수도권고속선으로 투입한다면, 수도권고속선 차량 사정에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일 것이고, 덕분에 패턴 다이어를 유지하는 한편 혼잡시간대 좌석 공급도 늘릴 수 있어 철도이용객의 편익으로 이어질 것이다.

물론 이런 주장은 한국철도공사가 수도권고속선을 운영하거나 최소한 그에 열차를 굴리는 것이 이익이라는 주장이다. 철도차량을 더 구매하기는 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발주되지 않은 상태라면, 건조에 2년은 걸리는 철도차량의 특성상, 그리고 정부의 재정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현 정권의 방침상 향후 몇 년은 92개 편성의 고속열차를 가지고 어떻게든 고속철을 운영해 나가야 한다. 현재의 스톡을 더 효율적으로 활용해 사람들의 편익을 늘리려면, 한국철도공사가 수도권고속선의 운송사업을 운영하는 것이 맞는 답이다.

 

요약

결국 현재 철도환경은 민간의 이익 실현에 적절하지 않은 상태다. 일견 영업 이익을 올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이나, 그것은 건설부채를 감당하지 않을 때에나 있을 수 있는 일이기에, 만일 수도권고속선 별도 사업자가 정말로 당기순이익을 올린다면 그것은 불공정 경쟁의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또, 차량 문제를 해결할 의사가 있는 사업자가 존재하지 않고, 철도공사의 차량(특히 정원이 많은 KTX-1)을 여력이 되는 한 수도권고속선에 투입하는 것이 오히려 철도자산을 더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에, 새로운 사업자를 만들기보다는 철도공사가 수도권고속선을 통합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철도 덕후가 본 철도 민영화가 부당한 이유 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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