ㅍㅍㅅㅅ https://ppss.kr 필자와 독자의 경계가 없는 이슈 큐레이팅 매거진 Wed, 05 Oct 2022 04:32:51 +0000 ko-KR hourly 1 https://wordpress.org/?v=5.8.11 https://ppss.kr/wp-content/uploads/2015/07/ppss-100x100.png ㅍㅍㅅㅅ https://ppss.kr 32 32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정복 군주 칭기즈 칸, 그리고 ‘뇌절왕’ 푸틴의 차이 https://ppss.kr/archives/257323 Wed, 05 Oct 2022 04:32:51 +0000 http://3.36.87.144/?p=257323 지금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는 패전의 길로 가고 있다. 만약 핵무기까지 푸틴이 사용한다면 단순한 패배가 아니라 러시아 연방까지 해체될 수 있다. 이번 전쟁에서 푸틴은 형편없는 전쟁 수행 능력을 보여주었다. ‘바보 이반’ 푸틴과 ‘전쟁의 신’인 칭기즈칸을 비교해보자.

 

“전쟁의 명분은 충분히 갖추었는가?”

몽골 초원을 정복한 칭기즈칸은 1211년 마침내 중국으로의 원정 전쟁에 나선다. 전쟁에 앞서 칭기즈칸은 몽골고원에 쿠릴타이(일종의 간접 민주주의)를 개최한다. 칭기즈칸은 몽골 선조 중 한 명인 제2대 암바가이칸을 기리는 제사를 한다. 금나라는 암바이칸을 유괴하여 사로잡아서 목마에 못 박아 목숨을 잃게 한 민족의 원수였다. 분노한 초원의 병사는 만장일치로 전쟁에 찬성한다.

그렇지만 칭기즈칸은 이를 거부한다. 그는 하늘의 뜻을 물어보겠다고 하고 신성한 부르칸산으로 올라간다. 칭기즈칸은 영리한 늑대였다. 고작 2~3만에 불과한 몽골 연합군으로 당시 중국 대륙의 절반을 차지한 100만 금나라 군과 싸우기 위해서는 명분과 사기가 필요했다. 초조하게 거의 일주일을 기다리는 전사들 앞에 나타난 칭기즈칸은, 푸른 하늘이 전쟁을 명령했고 몽골군은 승리한다는 신탁을 받았다고 증언한다. 물론 개뻥이다. 그렇지만 초원의 전사와 민중은 이를 믿고 만리장성을 넘어 결국 금나라와 송나라를 정복한다. 전쟁에서 명분과 사기는 이만큼 중요하다.

푸틴을 보자. 그는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에 앞서 침략을 절대 비밀로 했다. 물론 미국 방첩망이 다 알고 있었지만, 그는 병사는 물론 장군들도 속였다. 영문을 모르는 병사들이 명령을 받고 우크라이나 영토에 들어섰을 때 그들은 왜 전쟁을 해야 하는지 몰랐다. 보급이 떨어지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러시아군은 일제히 도주했다. 왜 싸워야 하는지를 모르는 병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자신의 목숨이기 때문이다.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렸는가?”

1221년, 칭기즈칸의 군대는 중국 만리장성에서 장강 북쪽을 다 차지했다. 이제 양쯔강을 넘어 송나라를 쳐야 하는데 불행히도 몽골군에게 해군이 없었다. 무엇보다 몽골군은 중국 남방의 습한 기후에 지쳐 떨어졌고, 게다가 말을 살찌울 수 있는 초지가 없었다. 칭기즈칸과 유목부대는 후덥지근한 중국을 벗어나 새로운 건조지대를 정복 목표에 추가했다. 그것이 바로 중앙아시아다.

칭기즈칸은 푸틴처럼 무턱대고 중앙아시아를 쳐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먼저 상대의 반응을 보았다. 100여 명의 교역 사절단을 중앙아시아의 점령자인 호레즘 샤에게 보냈다. 그런데 몽골군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모르는 호라즘 제국의 샤는 이 사절단을 죽여버렸다. 칭기즈칸이 사과를 요구하는 전령을 보냈으나, 겁대가리를 상실한 샤는 전령들의 수염을 깎아 돌려보냈다. 당시 수염은 남자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어서 이를 깎는다는 것은 거세와 비슷한 굴욕이었다.

사절단이 몰살당하고 전령들이 수염이 깍여 돌아오자 칭기즈칸은 속으로 웃었을 것이다. 전쟁의 명분을 찾은 것이다. 먼저 칭기즈칸의 장군들과 보르지오 가문이 들고 일어섰다. 이런 모욕을 참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초원에서 쿠릴타이가 개최되었다. 칭기즈칸은 분노하며 외쳤다.

사절단을 죽이고 전령들의 수염을 깍은 것은 나에 대한 모욕이자 대몽골 제국에 대한 모욕이다. 푸른 늑대들이여!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결론은 보나 마나다. 이미 정복자 칭기즈칸의 권위는 하늘을 뒤엎고 있었다. 신보다 위대한 칭기즈칸에 대한 모욕은 쿠릴타이에 참여한 모든 전사들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되었다. 중앙아시아에 쳐들어간 몽골군은 반항하는 적에게 용서를 베풀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이 모욕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0만 원정군이 하나가 된 몽골군은 지리적 이점을 가진 40만 병력의 호라즘 제국을 무너뜨렸다. 만약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냥 전쟁을 벌였다면 유목 전사들은 그렇게 열심히 싸우지 않았을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군은 분열되었다. 이 전쟁에 동원된 대부분 병사는 러시아 시골의 이민족 출신이다.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잘난 루스키들은 전쟁과 무관하게 축제를 즐기고 일상생활을 영위했다. 자신이 왜 싸워야 하는지 모르는 러시아 병사들은 도시의 루스키를 증오했고 자신을 이 바닥에 몰아낸 푸틴을 원망했다. 러시아 병사들은 칭기즈칸군과 달리 하나가 아니라 용병에 불과했다. 러시아군은 전황이 유리하면 약탈에 나섰고, 전황이 조금이라도 불리하면 도망갔다.

병참과 무기가 중요한 현대전이라고 하지만, 병사들의 사기를 고려하지 않으면 백전백패라는 것이 베트남전과 아프간 전쟁의 교훈이다. KGB 출신의 푸틴은 전쟁의 기본을 몰랐다. 총동원령을 내리든 핵무기를 쓰던 이번 전쟁에서 러시아의 패배는 불가피하다. 러시아는 전쟁의 명분이 없었고, 푸틴과 병사들은 하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반면 죽을 때까지 문자도 모르고 전략 교과서인 삼국지도 알지 못한 칭기즈칸은 누구보다 전쟁의 명분과 병사들의 사기를 중시한 탁월한 정치인이었다. 클라우제비츠가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다고 한 말은 푸틴과 칭기즈칸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원문: 윤성학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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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1941년에 왜 진주만을 기습했을까? https://ppss.kr/archives/249257 Tue, 04 Jan 2022 02:46:46 +0000 http://3.36.87.144/?p=249257 ※ BBC 매거진 『BBC Collector’s Edition Pearl Harbor bookazine』(2019)의 글을 바탕으로 작성된 글입니다.

일왕 등의 표현은 필자 본인이 결정한 것입니다. 지명은 본국, 영어와 한자 등을 병행할 수 있어서 좀 혼선이 있습니다. 진주만 등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가 더 궁금하실 경우 여기에서 확인하세요.

그리고 국내에서 고사 직전인 전사분야에서 반가운 책이 또 출간되었습니다.

그래픽노블로 원자폭탄 개발의 비화를 제대로 소개했습니다. 프랑스풍이라 호불호가 나뉠 듯합니다.

짙어지는 전운: 일본은 1941년에 왜 진주만을 기습했을까?

1.

일본이 1930년대에 맹렬하게 제국을 건설하자 미국이 계속 경보를 울렸다. 그렇지만 루즈벨트 대통령은 1차대전의 고통을 기억하는 대중에게 다시 전쟁을 주장할 수 있었을까?

1931년 9월 중순, 일본군은 만주를 합병하려는 모략을 꾸몄고 도쿄에서 ‘계획 노출. 다테카와 도착 전에 실행’이라는 경고 전보를 받았다. 일본정부는 일본군의 군사행동을 승인하지 않고 다테카와 요시츠구Yoshitsugu Tatekawa중장을 보내 막으려고 했다.

중앙이 다테카와이고 1940년 소련대사로 떠나기 전 모습입니다.

9월 18일 저녁, 다테카와가 탄 기차가 선양Mukden에 도착하자, 미리 통지를 받은 군 장교들은 그를 도심의 고급 찻집으로 안내해 차와 정종, 그리고 기생을 접대했다.

저녁 10시 20분, 일본군은 선양 근처의 일본군 철로에 작은 폭탄을 터트렸다. 피해는 거의 없었지만, 일본군은 중국군을 비난하며 재빨리 행동에 나섰다. 19일 정오가 되자 남만주철도회사South Manchuria Railway의 거점 고시 대부분을 점령하고 나머지 지역도 연달아 점령했다. 그렇게 15년 전쟁Fifteen-Year War이 일어났고 1945년 8월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이 투하되고 일왕 히로히토가 항복하면서 전쟁이 끝났다.

저녁 10시 20분, 일본군은 선양 근처의 일본군 철로에 작은 폭탄을 터트렸습니다.

일본군의 조작은 소용이 없었다. 1931년 9월 22일, 미 국무부 헨리 스팀슨Henry Stimson은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에 다음과 같이 전신을 보냈다. ‘일본군이 상당한 사전 준비 끝에 대대적인 침공을 시작한 것이 분명하다…’

그 당시 전 세계는 선양 사건이 결국에는 진주만으로 이어질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이후 미국 정부는 무력으로 탄생한 국가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스팀슨 독트린을 발표했고 이는 일본 정부에게 중국에서 철수하라는 공식적인 선포였다.

 

2.

시간을 앞으로 돌려 1919년 1월, 강대국이 파리강화회담장에 모여 1차대전 수습을 협의했을 때에 일본은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와 나란히 앉았지만 주역이 될 수 없었다.

일본은 회담장에 2가지 목표를 가지고 참석했다. 먼저, 베르사유조약Treaty of Versailles에 인종 평등 문구를 넣고 싶었다. 미국은 반일본인법을 계속 강화시켰고 1913년 캘리포니아 외국인토지법California Alien Land Law으로 이민 농부가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게 했다. 싱가폴, 홍콩, 상하이 등의 해외 식민지에서도 일본인 사업가를 노골적으로 차별하기 시작했다.

인종차별이 너무 심해서, 1868년 쇼 군막부 폐지 후에 일본군 현대화를 주도했던 야마가타 아리모토Aritomo Yamagata공작은 백인종의 황인종 차별을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그렇지만 서방 강대국은 베르사이유 조약에 인종차별 금지 조항을 넣지 않았고 이후 일본은 초강경 국가주의로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일본은 독일 제국의 아시아 자산을 영구적으로 이전해 달라고 요구했었는데 이것도 신통치 않았다. 중국 동부의 자오저우만 조차지Kiautschou Bay를 얻어냈다가 다시 중국에 반환해야 했다. 독일의 남태평양 식민지는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와 나누어 차지했다.

1921년 11월의 워싱턴해군군축조약Washington Naval Conference은 일본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줬다. 그 당시 대량살상무기였던 전함 건조를 제한하는 다자간 군축조약이었는데, 미국과 영국은 525,000톤이 인정된 반면에 일본은 315,000톤을 인정받았다. 일본 국수주의자들은 서방 국가가 불공정한 처사를 벌이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저명한 국수주의 지식인 미츠카와 가메타로Kametaro Mitsukawa는 서방 강대국이 20세기가 끝나기 전에 아시아를 완전히 굴복시킬 작정이라고 주장했다.

 

3.

일본 주류 정치인들은 국내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국가연맹과 워싱턴군축조약 등의 종전 합의를 지지했다. 메이지 헌법Meiji Constitution이 1930년 초에 완전히 변경되는 일이 벌어졌다. 1868년에 도쿠가와 막부를 전복시키고 헌법과 일왕제를 결합한 불완전한 헌법이었지만 일본 민주주의의 근간이었다.

대공황Great Depression의 영향이 컸다. 군 파벌과 언론은 국민의 불만을 이용해 국수주의와 반자본주의를 추진했다. 더구나 젊은 일왕 히로히토는 메이지 헌법이 보장한 특권으로 군 파벌을 통제할 수 있는데도 그러지 않았다.

1930년 11월 14일, 하마구치 오사치Osachi Hamaguchi수상이 도쿄역에 들어섰다가 총격을 받고 중상을 입었다. 8개월 후에 죽었는데 암살범은 극우국수주의 애국사Aikokusha(‘Society of Patriots’)당원이었다. 애국사는 1920년대에 결성된 극우 조직 중 하나였다.

하지만 당시 일본의 경제 침체가 심해졌기 때문에, 1930년의 런던해군감축조약London Naval Treaty과 서방에 대한 반발이 더해졌다. 이에 일본 국민은 암살 사건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18개월 후인 1932년 2월 9일, 전 재무대신이 혈맹당Ketsumeidan(‘League of Blood’) 학생 당원의 총격을 받았고, 단 다쿠마Takuma Dan후작도 중역으로 재직 중이던 미츠이 은행 밖에서 살해당했다. 다쿠마 후작은 미국 공대를 졸업해 서방에 우호적이었고 국가연맹의 장 리튼Lytton공작의 선양 사건 조사를 지원했었다.

1932년 5월 15일, 이번에는 해군 하급장교로 구성된 반자본주의 집단이 이누카이Inukai수상을 집에서 살해했다. 전설적인 코미디배우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도 살해 대상이었지만 이누카이의 아들과 함께 스모 경기를 보러 외출 중이어서 목숨을 건졌다. 일본 극우주의의 테러는 국민의 환영을 받았고 테러범은 가벼운 수감형만 받았다.

암살의 여파는 굉장히 컸다. 일왕은 다수당인 정우회Seiyūkai에서 후임 수상을 선택하지 않고 강경군 파벌인 마코토 사이토자작Saitō Makoto을 새 수상으로 선임했다. 이후 정당은 유명무실해졌고 1940년에 고노에 후미마로Fumimaro Konoe수상(히틀러 코스프레 인물)의 지휘에 따라 자발적으로 해산하고 대정익찬회Imperial Rule Assistance Association로 흡수되었다.  일본이 독일 나치당을 따라 1당독재국가가 된 것이다.

 

4.

자유주의, 자본주의, 국제주의에 대한 반감이 절정에 달해있을 무렵인 1936년 2월 26일, 19명의 젊은 장교가 일왕을 보호하고 국가 정신을 보호하겠다며 쿠데타를 시도했다. 그들은 선원과 병사에 대한 칙어Imperial Rescript for Seamen and Soldiers를 주장했다. 해당 칙어는 모든 병사는 신성한 국가의 수호자 임무를 기억하고 일왕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을 보여야 한다는 1882년의 행동 강령이었다. 이는 2,700자의 문서로 무사도의 사무라이가치를 현대식 훈련과 병기 사용에 결합시킨 세뇌 작업용이었다.

많은 일본군 장성은 반신반인의 신화 숭배에 빠져 젊은 장교의 움직임을 노골적으로 지지했다. 그렇지만 일왕은 기대와 다르게 반응했다. 1932년과 달리, 쿠데타 장교는 정부 자체를 전복시키려고 했다. 이에 일왕은 이들을 유죄 처분하고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그런데도 종전 후에는 일왕이 무기력한 입헌군주였다는 오해가 깊게 자리 잡았다.

일왕은 쿠데타 시도 후에 군 파벌을 통제하지 않고 정치권으로 세력을 넓히도록 방치했다. 1936년 5월, 현역 장군과 제독만 전쟁 대신에 취임할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되었고, 육군과 해군은 모든 정부 구성에 대해 거부권을 가지게 되었다. 일본은 아주 작은 법 개정만으로 군사독재국가로 향하는 길을 열었다.

 

5.

채 1년도 안되어서 일본은 중국과 다시 전쟁에 돌입했고 중국 전역을 점령하려고 했다.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려고 벌인 선양 사건은 1933년 탕구휴전Tanggu Truce으로 끝났고 일본은 만주와 만리장성 남쪽 160km 제한구역을 받아냈다. 일본 만주군은 중국 영토를 조금씩 침입했고 1937년이 되자 북경은 거의 포위된 상태였다.

1937년 7월 7일, 북경 남부 루거우차오Marco Polo Bridge(사진 참조)에서 갑작스런 무력 충돌이 벌어졌고 양국의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타이위안Taiyuan, 상하이, 난징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난징에서는 300,000명 이상의 중국인이 학살당했다. 중일전쟁은 10년 가까이 지속되면서 중국인 2,0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일본은 국제동맹에도 적극적으로 나서, 1936년 11월에 나치 독일과 방공 협정Anti-Comintern Pact을 맺고 스탈린의 소련을 상대하려고 했다. 이탈리아도 1년 후에 추축국에 합류했다.

1936 이후, 만주 광동군이 개발한 명령(계획)경제 모델이 일본에서도 대세가 되기 시작했다. 정부는 일본산업은행Industrial Bank of Japan을 통해 전쟁물자 산업체에게 자금을 지원했다. 계획경제체제가 더욱 강화되어 1938년 국가총동원령National Mobilization Law으로 국내 소비를 줄였다.

식품보다 무기에 더 집중했는데, 이는 독일의 국가사회주의National Socialism 정책을 그대로 따른 경제 모델이었다. 육군과 해군을 장악한 일본의 극우파는 동아시아에서 서방의 영향을 줄이겠다며 자급자족의 대동아공영권‘Greater East Asia Co-Prosperity Sphere’을 추진했다. 다윈의 적자생존을 따랐다. 철학자 카노고기 카즈노부Kazunobu Kanokogi는 ‘일본이 아시아에 제국을 세울 수 없다면 몰락할 수 밖에 없다’고 예언했다.

자연스럽게 총력전으로 이어졌다. 일본은 소련을 두려워했고 국경에서 전면전을 벌였다가 몽골-만주국경의 할힌골Khalkhin전투(그림 참조)에서 참패를 당했다. 1941년 4월, 소련과 협정을 맺고 북부국경을 중립지역으로 만든 후에, 남쪽으로 시선을 돌려 장개석군을 공격했다. 장개석은 중화민국Republic of China의 국수주의 지도자로 충칭Chongqing 서부에 포위된 상태였다. 일본군은 충칭의 보급로를 끊기 위해 1940년 9월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북부를 점령했다.

1941년이 되자 일본제국은 끊임없는 군사행동으로 한국과 대만을 포함해 534,000km2에서 인도차이나(베트남, 라오스와 캄보디아)와 중국동부까지 점령해 4,144,000km2로 확장했다. 일본군 점령지의 인구는 1억명에서 3억명으로 늘었다.

 

일본이 아시아를 마구 점령하는 동안에 미국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1.

미국은 19세기에 일본과의 교역을 하기 위해 해군을 파견했고, 중국 영토에서 격전을 벌였다. 또한 하와이 왕국을 점령했고, 필리핀도 합병했다. 그렇지만 1930년대에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미국은 1차 대전 후에 고립주의 노선을 선택했다. 유럽의 부패하고 비민주주의 왕정 때문에 세계대전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전쟁에서 이익을 얻은 전쟁 모리배War profiteering도 비난했다. 1934년의 베스트셀러인 『죽음의 상인Merchants of Death』과 같은 출판물이 큰 영향을 미쳤고 미국인은 국제 문제에서 중립을 택했다.

 

2.

또한 미국에겐 1929년 월스트리트 붕괴로 시작된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로 국내 문제가 최우선이 되었다. 보호주의 스무트-할리관세법Smoot-Hawley Act (1930)으로 수입품 20,000개의 관세를 높였고 미국의 고립주의 정책을 재확인했다. 전설적인 평론가 월터 립만Walter Lippmann은 1936년에 「미국의 정책은 개입하지 않는 것이다The policy of the United States is to remain free and untangled」라는 제목의 칼럼을 쓰며 미국의 관점을 대표했다.

1932년과 1936년,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FDR)대통령은 고립주의 노선으로 당선되었다. 군 통수권자인 루즈벨트는 세계에서 겨우 18번째로 큰 군대를 보유했는데 이는 벨기에, 포르투갈과 스위스보다도 적은 규모였다.

루즈벨트는 재선 직후에 노선 변경을 시도했다. 그는 1937년 10월 5일 시카고 연설에서 “세계 평화가 위협받고 있다… 절대로 전쟁에 개입하지 않으려 했지만 전쟁의 참혹한 영향과 참전의 위험을 피할 수 없다”라며 경고했다.

루즈벨트가 이끄는 대로 대중도 변했다. 일본이 새로운 시도를 할 때마다 미국의 고립주의 결의는 옅어졌다. 난징학살과 성폭행, 인도차이나 침공, 양츠강 USS 파나이Panay침몰이 이어졌다.

일본 군부 내 강경파가 미국을 자극하기 위해 파나이호를 침몰 시키고, 그 결과 46명이 사상 당했습니다.

무엇보다 1940년 9월에 독일, 일본과 이탈리아가 맺은 삼국동맹조약Tripartite Pact이 가장 큰 경종을 울렸다. 일반 미국인도 전체주의 세계에서 더 이상 고립되어서는 안된다고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자유세 계를 수호하기 위해 비밀 지원을 시작했고 1941년에는 무기대여법으로 영국에게 군사 지원하고 장개석의 국민당 군에게 군 자금을 지원했다.

무엇보다 루즈벨트 행정부의 강경파는 일본에 대한 강력한 제재 조치를 반대하던 국무장관 코델 헐Cordell Hull이라는 큰 장애물을 넘었다. 1941년 7월 25일, 루즈벨트는 미국 내 일본의 금융 자산을 모두 동결해서 일본 군부의 자금줄을 조였다.

 

3.

일본 내각은 제국이 피폐해져서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1942년이 되면 필수 일상품 11개 중 8개가 크게 부족해진다고 분석했다. 설상가상으로 일본은 기름 수입량의 80%를 차지하는 캘리포니아 기름을 구입할 수 없었다.

기름 공급이 중단되면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1941년 9월 3일, 고노에 내각은 미국의 금융 동렬과 기름 금수 조치에 대항해 대본영Imperial General Headquarters이 만든 제국국가정책 실행계획을 협의했다. 서방 강대국이 조치를 완화하지 않는다면, 필요한 경우 미국, 영국, 네덜란드와 전쟁을 하기로 결의했다.

일본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유전과 미국령의 필리핀을 최대한 빨리 점령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가능하다면 영국육군과 해군 전력이 막강한 싱가폴도 점령하고 천연자원이 풍부한 말라야와 미얀마도 점령하기로 했다.

일본해군 주력 함대는 필리핀 구원에 나선 미 함대를 기다리기로 했다. 미육해군연합위원회는 1920년에 주황색 전쟁계획을 수립했었는데, 일본해군은 태평양 서쪽 진입항로인 마샬군도Marshall Islands에서 미 해군을 궤멸시키기로 했다. 1905년 대한해협에서 러시아 해군을 전멸시킨 도고Togo의 전설을 재현하고 싶어 했다.

그렇지만 연합함대Combined Fleet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Isoroku Yamamoto제독은 미국을 상대로 완전히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하와이의 미 태평양함대 기지를 기습하려고 했다.

그는 기습으로 미 태평양함대를 전멸시켜서 미 해군의 활동을 크게 위축시키고 싶어했다. 특히 미래 해전의 기둥인 항공모함이 목표였다. 일본은 그 동안 태평양 제도의 방어막을 강화하고 동남아시아 제국의 천연자원 공급로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어쩌면 진주만에서 태평양 함대가 궤멸되면 미 정부가 휴전을 제안할 수 있다고 기대했다.

이 계획은 연합함대의 주축인 항모 6척을 적의 공격권 안으로 보내 큰 피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전략이었다. 더구나 항모는 영국이 타란토Taranto해전(그림 참조)에서 이탈리아 해군을 공격한 것이 유일할 정도로 입증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야마모토는 일본의 최신형 뇌격기와 어뢰에 자신이 있었다. 비밀리에 설계하고 개선시켜 속도, 거리와 정확도 측면에서 세계최고였다. 군부의 반대가 빗발치자 야마모토는 차라리 사임하겠다며 자신의 생각을 밀고 나갔다.

 

4.

미국과의 관계가 계속 악화되자, 일본은 1940년 11월 27일에 전 외무대신 노무라 키치사부로Kichisaburō Nomura제독을 워싱턴으로 파견해 영구적인 평화를 협상했다. 미국은 스팀슨 독트린에 따라 개방 교역, 아시아 국가의 평화적인 정권 교체, 다른 국가의 문제 불간섭을 요구했다. 더 나아가 나치 독일과의 동맹 취소를 강하게 요구했다.

1941년 7월, 일본이 프랑스 비시Vichy정부와 공동방위와 군사 협력에 대한 조약Protocol Concerning Joint Defence and Joint Military Cooperation에 서명하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완전히 넘겨 받으면서 더 이상의 협상이 불가능해졌다.

일본은 루즈벨트가 의회를 설득하고 군사력을 강화시킬 시간을 벌고 있다고 의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름 재고가 크게 악화되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 내각은 미국에게 자산동력을 풀어줄 것으로 요구하고 있어서 협상 전망이 어두웠다.

일왕 측근은 1941년 10월 17일에 호전적인 도조 히데키Hideki Tojo를 수상으로 임명해서 전쟁밖에 대안이 남지 않았다. 도조는 극우파로 1934년 수필에서 반드시 세계에 일본의 정신을 전파하고 일본제국의 문화와 이데올로기 전쟁이 시작될 것이라고 단언했었다.

일왕은 11월 5일 내각회의에서 야마모토의 기습 공격을 승인했고 이튿날, 노무라 대사는 워싱턴에 마지막 제안을 했다. 일본군을 중국에서 일부만 철수시키겠다는 제안 A였다.

미국은 암호 해독으로 다른 제안이 더 있다는 것을 알고 이 제안을 거부했다. 일본의 제안 B는 미국이 자산동결을 풀고 장개석군 지원을 중단하면 인도차이나 남부에서 철수한다는 내용이었다. 루즈벨트는 11월 26일 암호 해독으로 일본이 11월 29일 이후에 공격을 감행한다는 정보를 알았고 이제 전쟁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미국은 일본의 군대 이동을 분석해 그들의 목표가 동남아시아 어디인가는 알았지만 야마모토의 연합함대의 위치를 모르고 있었다. 실제로 연합함대는 일본 북부 끝의 쿠릴열도Kuril Islands에서 무선교신을 하지 않고 대기 중이었다.

그동안 코델 헐 국무장관은 협상 진전이 없자, 노무라 대사에게 중국과 인도차이나전면철수 등의 10가지 최후통첩을 전달했다. 일왕은 미국의 조건이 너무 가혹하다며, 1941년 12월 1일에 도조에게 진주만, 필리핀과 말라야 동시공격을 허락했다.

이렇게 해서 1931년 선양 사건과 함께 시작한 일본의 중국 침공은 영국 제국뿐만 아니라 세계 최강국 미국과도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원문: 죽기 전에 알아야 할 세계사 1001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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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수산부 공무원 A씨는 왜 그랬을까 https://ppss.kr/archives/227151 Mon, 28 Sep 2020 07:07:10 +0000 http://3.36.87.144/?p=227151 어업지도선 선원으로 일하는 해양수산부 공무원 A씨가 북한 해상에서 북한군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국방부에 따르면 북한군은 A씨를 발견하고 배에 태우지 않은 채로 대화를 한 후, 배를 돌려 돌아갔다가 다시 되돌아와 그를 총으로 쏘고 시체를 불로 태운 것으로 파악됐다. A씨는 21일 오전 한국군에 의해 실종이 확인됐고, 22일 밤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북한을 강력 규탄하며 공식 사과를 요구하고 나섰다.

출처: 뉴스1

A씨는 왜 바다에 빠진 것일까. 지금까지 확인된 내용은 그가 신발을 벗고 구명조끼를 착용한 채로 배에서 분리됐다는 정도다. 사고로 빠졌다면 신발을 벗을 이유가 없고, 자살을 하는 의도였다면 구명조끼를 벗은 상태로 입수했을 것이다. 자살과 사고일 가능성은 높지 않다. 원한을 품은 누군가가 일부러 빠뜨렸을 수도 있지만 같은 배에 탔던 동료들은 A씨가 없어진 줄도 몰랐다고 한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월북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국방부 역시 월북 가능성을 높게 본다고, 하지만 정보 출처는 공개할 수 없다고 밝혔다.

정부가 월북 가능성을 거론하자 반사적인 비판이 잇따랐다. ‘월북’이라는 단어는 한국에서 독특한 맥락을 가진 단어다. 과거 군사정권에서 정치적 반대자를 불법적으로 처단할 때 당사자 혹은 그의 가족들을 친북인사로 몰아가는 방법을 즐겨썼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부가 말하는 월북은 조작의 뉘앙스를 가진다. 많은 시민이 A씨 행적 관련 정부의 발표에 코웃음부터 친 데는 그런 이유가 있다.

국방부를 관장하는 국회 국방위원회는 24일 서욱 국방부장관을 불러 공개질의를 했다. 월북 문제를 포함해 군 대응 적절성 등에 대해 당을 가리지 않고 이런저런 질타들이 쏟아졌다. 그러나 공개질의 후 열린 비공개보고가 끝난 뒤에는 여야 의원을 막론하고 별다른 지적이 없었다고 한다.

A씨가 월북을 했는지 안 했는지 일개 시민이 정확한 내막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다만 관련 고급정보 접근 기회가 있었던 여야 국회의원들이 저런 반응인 걸 보면 정부의 월북 가능성 거론에도 적지 않은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월북 가능성에 근거가 없었다면 야당인 국민의힘 소속 의원들이 반발했을 것이다.

출처: 인천해양경찰서

아침부터 타임라인에 비관적인 포스팅들이 많이 보인다. 국가가 국민을 버린 것 아니냐는 울분부터 세월호와 이 사건이 뭐가 다르냐는 이들도 있다. 처음에는 무엇이 다른지 설명하려고 했는데, 그냥 분하고 화가 나서 감정을 분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서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타임라인을 넘기게 된다. 그럴 땐 정부 욕해도 된다. 국민 욕 받아주는 것도 행정학이 규정하고 있는 정부의 주요한 역할이니까.

다만 굳이 비관할 필요가 없는 문제의 사실관계를 애써 부정적으로 재배열한 후 감정이입 하는 것이 그 사람 혼자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그건 본인의 정력도 갉아먹지만 주변 소중한 사람들도 감정의 하강나선으로 함께 끌어들인다. 코로나 때문에 다들 기본적인 스트레스 수치가 높은 상황인 것 같다. 우울할 일이 아닌 것에는 우울해하지 말자.

원문: 김동환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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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함 HMS 바럼의 격침과 영국 최후의 마녀 이야기 https://ppss.kr/archives/220881 Thu, 09 Jul 2020 08:08:05 +0000 http://3.36.87.144/?p=220881 1941년 11월 26일은 독일 해군 중위 티센하우젠(Hans-Diedrich von Tiesenhausen)에게 운수 대통한 날이었습니다. 그의 잠수함 U-331의 음탐사가 멀리서 들려오는 군함들의 엔진 소리를 탐지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군함들은 대략 그의 잠수함 쪽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군함들의 정체는 영국 해군 전함 3척과 그를 둘러싼 구축함 8척이었습니다.

티센하우젠 중위는 알 방법이 없었겠지만, 이들은 리비아로 향하는 이탈리아군 수송단을 요격하기 위해 알렉산드리아 항구를 나선 퀸 엘리자베스호(HMS Queen Elizabeth), 밸리언트호(HMS Valiant), 그리고 바럼호(HMS Barham), 그러니까 모두 1910년 초반에 진수된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3척과 그를 호위하는 구축함들이었습니다.

1917년 영국 북부의 군항 스카파 플로우(Scapa Flow)에 정박한 바럼호입니다. 바럼호가 포함된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들은 연료를 석탄에서 중유로 바꾼 최초의 전함이었습니다. 덕분에 24노트 이상의 속력을 낼 수 있었던 이들은 모두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맹활약했고, 그중 가장 유명한 전함은 HMS 워스파이트(HMS Warspite) 입니다. / 출처: wikipedia

U-331은 용케 영국 구축함들의 초계선을 뚫고 전함들에게 접근했고, 첫 번째 전함은 놓쳤지만 두 번째 전함을 향해 어뢰 4발을 일제히 발사할 수 있었습니다. 거리는 375m, 매우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때마침 U-331이 발각되어 영국 전함들이 대공포로 사격을 시작했고, 티센하우젠 중위는 급히 잠항해야 했습니다. 그의 음탐사는 어뢰 1발이 명중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영국 구축함들이 미친 듯이 폭뢰를 뿌려댔지만 U-331은 무사히 그 해역을 빠져나올 수 있었고, 티센하우젠은 과연 그가 명중시킨 전함의 이름과 그 피해를 궁금해하며 기지로 돌아갔습니다.

어뢰에 피격된 전함은 바럼이었고, U-331의 음탐사의 겸손한 분석과는 달리 4발 중 3발의 어뢰를 좌현에 고스란히 얻어맞았습니다. 바럼은 급격히 기울어져 옆으로 드러누웠고, 곧이어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습니다. 어뢰 폭발이 일으킨 화재가 탄약고에 도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뢰에 피격된 지 4분 만에, 바럼은 대폭발과 함께 침몰했습니다. 862명의 장교와 수병이 목숨을 잃었고, 구조된 승조원은 채 500명도 되지 않았습니다.

폭발하는 바럼. 바로 뒤를 따르던 밸리언트호에 탔던 사진기자가 찍은 것입니다.

한편, 며칠 뒤 영국 포츠머스(Portsmouth)의 한 가정집에서는 강령술이 시행되었습니다. 헬렌 던컨(Helen Duncan)이라는 40대의 스코틀랜드 출신의 여성 영매가 주도하던 이 강령술에서, 영매는 자신이 불러낸 젊은이의 영혼이 ‘자기가 탄 배가 침몰했다’고 말했다면서, 그가 쓴 수병모의 장식띠(hat-band)에는 ‘HMS Barham’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참석자들은 술렁였습니다. 그리고 이 술렁임은 약 2달 뒤인 1942년 1월 바럼호의 격침 소식이 보도되면서 경외의 감탄으로 바뀌었습니다. 헬렌 던컨은 해군 당국에서도 주목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당시 영국 해군 당국은 바럼호의 격침 소식을 비밀에 부쳤습니다. 그 이유는 전시 국민 사기를 고려한 것도 있었습니다만, 독일 해군에게 자신들의 전과를 알려주지 않으려 한 것이 더 컸습니다. 3만 3,000톤급 전함 1척의 손실은 당시 지중해에서의 해군 전력의 큰 변화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빈틈을 메울 전함 재배치를 끝내기 전에는 그 소식이 적국에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실제로 공격이 이루어진 뒤 그 전과 확인은 주요 군사작전의 하나입니다. 가령 폭격기 편대를 이용하여 적의 공장 지대나 도시 등을 폭격할 때의 절차는 먼저 정찰기를 띄워서 목표물의 현황을 확인하고, 폭격기들을 보내 폭탄을 왕창 던진 뒤, 다시 정찰기를 보내 반드시 전과를 확인했습니다. 그래야 거기에 다시 폭격기를 보내야 하는지 아니면 다음 도시로 목표물을 변경해도 되는지 결정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 과정에서 정찰기가 손실되는 등 인적 물적 손해도 따르는 것은 물론이었습니다. 그런데 아군 함대의 손실을 고스란히 신문에 보도해서 적군의 수고를 덜어주는 일은 있을 수 없었지요. 그래서 해군에서는 2달 넘게 바럼호의 격침 소식을 비밀에 부쳤던 것입니다.

군사적 가치가 있는 영매 헬런 던컨입니다. / 출처: wikipedia

그런 상황에서 불과 격침 며칠 뒤에 헬런 던컨이라는 여자가 강령술에서 바럼호의 격침 소식을 정확히 알아내자 해군 당국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헬런 던컨은 1920년대 후반부터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유명한 인사로서, 특히 입을 통해서 심령체(ectoplasm)를 토해내는 것으로 잘 알려진 유명한 영매였습니다. 그녀의 강령술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은 그녀가 입으로 토해내는 희뿌연 심령체를 직접 보고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의 고객 중에는 유명 인사도 많았다는데, 확인된 바는 없지만 본인 주장에 따르면 그중에는 윈스턴 처칠과 영국 국왕 조지 6세까지도 있었습니다. 역사학자이자 비밀결사 프리메이슨(Freemason)의 일원이었던 알프레드 도드(Alfred Dodd)는 공식 재판정에서 이 여자가 진짜 영매라고 증언하기도 했습니다.

과연 그는 진짜 영매였을까요? 확실한 것은 뭔가 이야기가 잘 안 되었는지 1944년 당국은 이 여성을 체포하여 정식 재판에 걸었고, 재판에서는 1735년 제정된 마녀 처벌법(Witchcraft Act)으로 유죄 판결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또한 윈스턴 처칠이 그 판결에 대해 ‘구시대적인 바보짓(obsolete tomfoolery)’이라며 펄쩍 뛰었고 직접 구치소로 던컨을 방문까지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이 영매의 주요 고객 중에 윈스턴 처칠도 있었던 것일까요? 혹시 해군 당국도 이 영매를 통해서 전쟁의 향방을 가를 수 있는 정보를 저승으로부터 얻으려 했던 것일까요? 물론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헬런 던컨이 시행한 강령술에서 실제로 나타난 심령체의 모습입니다. / 출처: wikipedia
진짜 심령체로 보이십니까? 그러시다면 여러분이 바로 호구입니다. / 출처: wikipedia

한참 활동하던 1930년대, 이미 많은 사람이 이 여자가 가짜 영매 사기꾼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 알았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이 여자가 입으로 토해내는 심령체의 사진을 찍었는데, 사진을 보면 그 심령체는 그냥 헝겊과 종이탈로 만든 허접한 인형이라는 것이 명백하게 보입니다. 실제로 심령체 일부를 채취해서 조사해본 결과, 그건 그냥 치즈 만들 때 사용하는 얇은 거즈 천에 불과했습니다.

던컨의 재주는 강령술 현장의 분위기를 그럴싸하게 조성하는 것과, 미리 삼켜둔 천을 자유자재로 토해내는 것뿐이었습니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어떤 기자가 강령술 직전에 파란 식용 색소 알약을 내밀며 이것을 삼키고 강령술을 시작하면 거액을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던컨은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그러면 던컨은 바럼호의 격침 소식을 어떻게 알게 되었던 것일까요? 그리고 왜 영국 해군은 던컨에게 마녀 처벌법을 들이대며 그녀를 감방에 가두었던 것일까요? 간단합니다. 당시 영국 해군은 군사 보안이 중요하다고 해도 같은 동료 군인들의 직계 가족들에게는 그 전사 소식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아래 사진과 같은 전사 통지서를 보냈습니다.

페이스북 그룹 ‘배틀십스 앤드 배틀크루저스(Battleships and battlecruisers)’에서 어떤 분이 공개한, 자기 가족이 받았던 바럼호 승조원의 전사 통지서입니다.

그러면서 그 내용은 군사기밀이므로 바럼호의 격침 사실은 ‘아주 가까운 가족(your own intimate family)’ 외에는 절대 비밀에 붙여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지요. 당연히 그 비밀은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불과 몇 다리 건너면 다들 서로 아는 사이인 것처럼, 던컨에게까지 바럼호의 격침 소식이 전해지기까지는 며칠 이상 걸리지 않았던 것이지요.

영국 해군 당국은 이런 보안 위반에 대해 던컨을 처벌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정말 영매이고 자신은 불쌍한 영혼이 말해준 것을 전달했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던컨을 처벌할 법 규정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고민하던 검사의 눈에 1735년에 제정되었던 마녀 처벌법이 들어온 것이지요.

모양새는 무척 이상하긴 했지만 아무튼 전시에 개인의 금전적 이익을 위해 군사 기밀을 누출한 던컨에게 정의 구현이 되긴 한 것입니다. 그 결과, 헬런 던컨은 공식적으로 기록된 ‘영국의 마지막 마녀’가 됐습니다. 던컨은 9개월을 복역하고 석방되었는데, 그 이후에도 또 강령술을 하며 용돈벌이를 했다고 합니다.

던컨의 사후 사면을 촉구하는 운동가들의 기사가 실린 2008년 영국 신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저 개인적으로 석연치 않은 점이 있습니다. 저 위 편지에 나와 있듯, 바럼호의 격침 소식을 알린 편지는 전사자 가족들에게도 12월 7일에나 발송되었습니다. 아마 가족들이 편지를 받은 것은 며칠 뒤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던컨은 11월 말, 바럼의 격침 불과 며칠 후에 이미 강령술을 시행했습니다. 혹시 던컨이 정말 영매였을까요?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어쩌면 제가 호구 기질이 다분한지도 모르겠네요.)

아, 그리고 독일 해군은 바럼의 격침 사실을 과연 던컨의 가짜 강령술 덕분에 미리 알게 되었을까요? 바럼을 격침한 티센하우젠 중위는 자신이 바럼을 격침했다는 것을 1942년 1월에야 영국이 공식 발표한 신문 기사를 보고 알게 되었고, 그 기사가 나자마자 그에 대한 포상으로 대위 승진과 함께 철십자 훈장을 받았습니다.

다만 그해 11월, 연합군의 북아프리카 침공을 저지하다가 영국 해군 뇌격기의 공격에 U-331은 격침되었고 그는 영국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전쟁 후에는 캐나다로 이민 가서 실내 건축가가 되었다고 하네요.

미래의 캐나다 실내 건축가 티센하우젠 씨입니다. / 출처: wikipedia

원문: Nasica의 뜻은 ?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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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총을 찾아서 https://ppss.kr/archives/201525 Wed, 14 Aug 2019 08:10:28 +0000 http://3.36.87.144/?p=201525

용기 있게 뚜벅뚜벅 걸어 군대가 늘어서 있는 뒤편에 이르니, 러시아 관리들이 호위하고 오는 사람 중에 맨 앞에 누런 얼굴에 흰 수염을 한 조그마한 늙은이가 있었다.

‘저자가 필시 이토일 것이다.’

생각하고 바로 단총을 뽑아 그를 향해 4발을 쏜 다음, 생각해보니 그자가 정말 이토인지 의심이 났다. 나는 본시 이토의 얼굴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만약 잘못 쏘았다면 일이 낭패가 되는 것이라 다시 뒤쪽을 보니 일본인 무리 가운데 가장 의젓해 보이며 앞서가는 자를 향해 다시 3발을 이어 쏘았다.

  • 안중근 의사가 옥중에서 작성한 옥중 자서전 중

질문: 그대가 가진 브라우닝식 단총은 7연발인가 8연발인가.

안중근: 8연발이다.

질문: 단총을 조사해보니 약협이 7개 있고 발하지 않은 것이 1발 있는데 어떠한 까닭인가.

안중근: 나는 목적하는 사람을 쏘았으니까 그 후는 발사할 필요가 없으므로 멈췄다.

  • 하얼빈 의거 직후 안중근 의사 심문 기록 중

질문: 그대가 십자형의 흠이 있는 탄환을 우의 총에 재어 준 이유는 어떠한가.

안중근: 이토를 죽이기 위해 재어 주었다.

질문: 흠을 낸 탄환은 힘이 있으므로 그대가 가진 것을 나누어 주었는가.

안중근: 나는 탄환 끝에 흠을 낸 것만 있었다.

질문: 끝에 흠을 낸 탄환은 명중하면 상처가 크기 때문인가.

안중근: 나의 탄환은 다 끝에 흠이 나 있다. 특별히 상처를 크게 할 목적은 아니다. 나는 흠이 나 있는 탄환을 샀다.

  • 하얼빈 의거 직후 안중근 의사 심문 기록 중

M1900 사격 재현을 위해 수많은 자료를 확인했다. 주변 상황을 다 배제하고 오로지 사격과 ‘표적 제거’에 한정해서 나온 결론은 세 가지였다.

  1. 죽음을 각오한 경우에는 표적을 제거 할 수 있는 방법론이 더 많아지고, 확실해진다.
  2. 이토 히로부미라는 ‘캐릭터’ 덕분에 거사에 성공할 수 있었다.
  3. 안중근 의사는 명사수다.

‘죽음을 각오한’이라는 표현 때문에 ‘자살 공격’을 떠올릴 수도 있겠는데, 여기서 말하는 죽음이란 ‘퇴로’에 관한 이야기다. 만약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다음 탈출하겠다.’고 했을 경우 M1900으로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는 게 어려웠을 수도 있다.

사수가 생환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면 우선 떠올릴 수 있는 게 원거리 저격 혹은 시한폭탄 같은 실행자의 안전을 보장하는 방법을 떠올릴 것이다. 원거리 저격에 한정한다면 사격 포인트는 한정된다. 경호하는 쪽에서도 저격 예상 포인트를 확인하고 이쪽에 병력을 배치하거나 예방책을 강구할 것이다.

대통령 행사 때 주변의 높은 건물에 저격병을 배치하는 게 괜한 ‘뻘짓’이 아니다. / 출처: 민중의소리

안중근 의사는 죽음을 각오한 상황이었기에 이토 히로부미 앞까지 다가갈 수 있었다. 실제 사격 거리는 7.25m라는데, 팔 길이 등을 감안한다면 7m 정도에서 사격했다고 볼 수 있다.

M1900에 들어가는 7.65mm탄, 그러니까 32ACP탄은 위력이 강한 군용탄이라기보다는 호신용 권총탄으로 볼 수 있다. 위력이 약한 대신 반동이 적어서 한 손 사격을 해도 안정적인 사격 자세를 유지할 수 있다. 이 32ACP탄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려면, 상당히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그렇기에 안중근 의사는 이토의 코앞까지 다가갔고, 이토에게 4발을 발사했다. 이 중 3발이 이토의 몸에 박혔다.

범용한 사람이었다면 이 대목에서 퇴로를 찾아 도망칠 생각을 했을 텐데, 안중근 의사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이토 히로부미를 수행하던 인원 3명에게 각각 1발씩을 발사했다. (아이러니한 게 이토 히로부미는 안중근 의사의 총격에 죽지만, 안중근 의사의 총을 맞은 수행원 3명은 천수를 누렸다.)

처음부터 퇴로를 생각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거사였다. 만약 M1900을 들고 ‘생환’을 전제로 한 작전을 펼쳤다면 ‘맞으면 맞고, 아니면 말고’ 식으로 허공에 난사하는 형태로 몇 발 쏘고 끝났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는 1909년 10월 26일의 하얼빈은 이토 히로부미가 참석한 행사에서 군중의 난동이 일어났다고 기록됐을지도 모른다.

이토 히로부미의 캐릭터도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 이토는 오늘날의 표현을 빌자면, ‘자기 정치’를 했던 인물이다. 하얼빈에서 코코프체프와의 회담이 결정됐을 때 러시아 쪽에서 경호 문제를 두고 협의했다. 자신들 관할 안에서의 회담이었기에 러시아 쪽도 이토 히로부미라는 거물에 상당히 공을 들였다.

그 회담 당사자였던 코코프체프부터가 러시아 재무장관이었다. 당시 러시아 정치권에서는 소위 말하는 ‘실세’로 불렸다. 자국 장관을 생각해서라도 경호에 신경을 써야 했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는 최소한의 경호만을 말했다. 그는 자신을 보러 온 일본 환영인파를 고려했던 것이다. 과시욕이었다. 그 결과 안중근은 하얼빈역사까지 무사히 접근할 수 있었다.

우덕순 의사가 담당했던 채가구(蔡家溝)역에서는 러시아의 철저한 검문 때문에 우덕순 의사가 체포된다. 10월 26일 하얼빈역 의거는 안중근 의사와 그 동지들이 하얼빈 일대를 다 구역을 나눠서 각자 담당구역에 이토 히로부미가 나오면 사살할 것을 약속했다. 이때 이토를 태운 특별열차가 채가구역을 지나 하얼빈역에 도착했고, 하얼빈역을 담당했던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사살한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만일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일을 도모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하니 그대는 여기 머물러 기회를 기다려 행동하고, 나는 오늘 하얼빈으로 돌아가 두 곳에서 일을 치르면 더욱 확실한 것이다. 만일 그대가 일을 성공하지 못하면 내가 성공할 것이요. 만일 내가 성공하지 못하면 그대가 성공해야 할 것이다. 두 곳에서 다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다시 활동비를 마련해 다음에 거사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책일 것이다.

  • 안중근 의사가 옥중에서 작성한 옥중 자서전 중

만약 열차가 채가구역에 섰다면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역사는 우덕순을 어떻게 기록했을까? 어찌 되었든 이토 히로부미의 과시욕 덕분에 안중근 의사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고, 그 이후의 결과는 교과서에 실려 있는 그대로다.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하는 게, 이토 히로부미의 과시욕이 기회를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안중근 의사가 뛰어난 사격 솜씨가 없었다면 거사는 성공하기 힘들었을 것이란 점이다. 하얼빈역을 재현하기 위해 자료를 준비하는 와중에 느낀 건 ‘안중근 의사가 총을 잘 쏘는구나.’라는 기존 평가의 재확인이었다.

‘저격’이란 개념으로 접근했을 때 사수는 표적의 표면적이 가장 많은 정면 혹은 배면을 노린다. 표적의 크기도 크기지만, 치명적인 장기를 바로 노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에서 이토에게 명중한 3발의 탄환 중 1탄과 2탄은 오른쪽 상박, 즉 어깻죽지에 맞았다(오른쪽 상박 위에 1탄, 그 아래에 2탄이 박혔다. 이 탄들이 팔을 뚫고 들어가 몸통에 박혔다).

우리는 단순히 ‘안중근 의사가 총을 쏴서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다’고만 안다. 그러나 사격 장면을 확인하면 안중근 의사가 보통 사격 솜씨가 아니란 걸 확인할 수 있다.

이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하얼빈역에 도열해 있던 각국 대사, 일본 관료, 청나라 군대, 러시아 의장대 등을 사열했다. 보통 ‘→’자로 이동하는 게 정상인데, 이토는 특이하게 역사 끝까지 가서 ‘⊃’자로 이동했다. 유턴이라고 해야 할까? 이 당시 속도는 시속 2km 정도로 추정된다. 완보라고 해야 할까? 각국대사와 악수를 하고, 일본 관료들을 격려하고, 일본 환영 인파에 손을 흔들고…

이 와중에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의 보폭에 맞춰 같이 평행하게 걸으며 기회를 엿보았다. 물론 그사이에는 인파와 군인의 장벽이 있었다. 안중근 의사의 키는 163cm, 이토 히로부미는 156cm. 그리고 러시아 의장대와 헌병대의 사열을 받는 순간, 안중근 의사는 러시아 의장대 사이의 틈(부대 간의 간격. 오와 열을 맞출 때의 틈으로 추정된다)으로 빠져나가 이토에게 총격을 가한다.

안중근 의사 재판 당시 일본 측에서 제출한 현장 도해도.

하얼빈역에 있는 표지석을 보면 비스듬하게 방향이 잡혀있다. 연구자의 발언을 종합해 보면,

안중근 의사의 몸이 12시 방향이라면, 팔은 2시 방향으로 뻗어서 총격을 가했습니다. 7발을 다 발사한 다음의 팔 방향은 3시에 가까운 방향으로 추정됩니다.

이토를 쫓아가 평행하게 쫓아가다 틈을 발견 사격 지점을 확인. 멈춰 서고, 양복 왼쪽 주머니에서 M1900을 뽑아 들고, 표적 확인, 조준한다. 이때까지 이토 히로부미는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이동했을 것이다. 그래서 팔 방향으로 정면이 아니라 약간 비스듬하게 2시 방향으로 이동한 것이다.

연구자들과 학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내린 총 사격 시간은 6초. 찰나와도 같은 짧은 순간. 하얼빈 하늘에 7발의 총성이 울렸다. 역사는 바뀌었다.

 

1. 6초

6초라는 사격 시간 앞에서 우리는 고민했다. 고민의 대목은 크게 두 가지였다.

  1. 6초라는 시간 동안 경호 인력은 뭘 했던 걸까?
  2. 6초라는 시간 동안 7발을 발사해 4명의 사람에게 6발이 명중했다. 이게 물리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몇 명의 전문가들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사격선수 출신으로 경찰특공대 지원자와 특수부대 지원자들에게 사격 훈련을 시켜주는 사격 전문가, 모처에서 VIP의 경호를 맡았던(외곽 경호지만) 인물, 그리고 안중근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역사 전문가였다.

① 사격 전문가

안중근 의사의 의거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고 인터뷰했다.

“6초? 6초 동안 7발을 쏘게 내버려 뒀다고?”

“그럼 지금이라면 어떻게 해?”

“초탄까지는… 아니, 백 보 양보해서 두 번째 탄까지는 양보해도, 나머지 다섯 발이 나갔다는 건 명백한 경호 실수지.”

“어째서?”

“총 소리가 나자마자 VIP를 덮쳐야지.”

이때부터 안중근 의사의 의거란 걸 말하고,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했다고 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럴만해. 전문적인 경호 훈련을 받지 않았다면, 몸으로 덮친다는 건 생각하기 어렵지. 어깨에 모신나강 메고 있네. 전문적인 훈련을 받았다기보다는 네 말대로 의장병이야. 이런 급박한 상황에 대처하지 못했을 거야.

② 경호원 출신

안중근 의사의 의거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고 인터뷰했다.

“기본적으로 차탄 이후의 탄이 나갔다는 건 사수를 제압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사수를 제압했다면, 이후의 발사는 제지됐고, 이후의 피해는 없었을 겁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경호대상을 안전한 곳으로 퇴피시켜야죠. 그리고 사수를 제압해야죠. 그래야 재탄, 삼탄이 안 나가게 할 수 있죠.”

③ 안중근 연구자

안중근 의사가 6초 동안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사격할 수 있었던 이유는 크게 3가지 정도로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일본 측 경호 인력이 없었다. 이 때문에 급작스런 상황에서 대응을 못 했다.

둘째, 러시아 측 병력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경호의 축소를 원했고, 당시 러시아 의장대는 ‘부동자세’였다. 즉 이토 히로부미가 사열을 시작하는 상황이라서 부동자세를 취했고, 이 타이밍에 안중근 의사가 의거를 성공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 측에서는 자신들의 VIP인 코코프체프를 먼저 챙기는 게 순서였다.

셋째, 당시 소음도 생각해 봐야 한다. ‘의장대가 경례하고 군악 소리가 울리며 귀를 때렸다’는 내용이 안중근 의사 자서전에 나온다. 당시 하얼빈역에서는 이토를 환영하기 위한 일본인들의 환영인파가 내는 소리, 군악대의 연주 등이 뒤섞여 있어서 상황 파악이 힘들었을 것이다.

6초 동안 안중근 의사가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사격할 수 있었던 이유를 확인할 수 있었다.

천안 독립기념관의 현장 재현. / 출처: 프림커피의 달달한 여행 세상

다음 문제는 6초라는 사격 시간이다. 6초 동안 4명에게 7발을 발사해 6발을 명중시켰다. 1초당 1발씩이라면 어렵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다. 여기에 제약 조건이 하나씩 붙었다.

  1. 표적은 시속 2km로 걷고, 사수도 똑같은 속도로 걸어간다.
  2. 시야가 제한됐다. 당시 도열했던 사람들에 의한 ‘인의 장막’이다. 특히 러시아 의장대에 이르렀을 때는 시야가 더 제한됐다. 당시 하얼빈은 얇은 서리 같은 흰 눈이 내린 상태였고, 러시아 병사들은 두꺼운 코트와 우샨카(방한모)를 썼다. 당시 사수의 키는 163cm였는데, 이 러시아 병사들 건너편에 있었던 표적의 키는 156cm였다.
  3. 사수는 10월 23일부터 의거를 준비했다. 3일 전에 하얼빈역 1번 플랫폼을 동쪽에서 바라보는 게 고작이었다.
  4. 사수는 표적의 얼굴을 몰랐다. 표적을 특징할 수 없다는 건 상당한 핸디캡이다. 어찌어찌 사격 타이밍을 잡았다 하더라도 목표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사수는 필연적으로 멈칫거릴 수밖에 없다. 판단할 시간이 필요 한 것이다. 한 팔이 묶인 채 링에 오른 권투선수라고 해야 할까? (이토 히로부미는 을사늑약에 분노한 원태우 열사의 돌팔매질에 부상당했다. 이 때문에 자신의 사진이 퍼지는 걸 극히 꺼렸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을 모른 채 의거에 뛰어든 것이다.)
  5. 표적은 시속 2km 내외의 속도로 걸으며, 정면이나 배면이 아닌 측면만이 사수에게 노출된 상황.

이 제약조건들을 대입해서 사격의 순간을 정리하면,

  1. 사격 지점 확보 후 1차 정지: 목표물을 확인하고, 판단하는 시간.
  2. 표적의 오른쪽 상박에 2발 명중, 관통의 반동으로 표적의 몸이 사수의 정면으로 돌아설 때 표적의 윗배를 향해 3발째 명중: 이때까지 총 4발을 발사.
  3. 1차 표적 제거 후 2차 정지: 1차 사격 직후, 1차 표적이 아닐 경우를 대비 2차 표적 탐색.
  4. 표적 2, 3, 4를 향해 각기 1발씩 발사. 명중.

의거에 걸린 시간은 6초지만, 2번의 표적 탐색으로 최소 2–4초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는 가정하에서 실제 사격 시간은 2–4초 사이란 소리가 된다. 이 모든 조건을 사격 전문가에게 제시했을 때의 반응은 간단했다.

“굉장히 어려운 사격 조건이다.”

“그 정도인가?”

“그렇다.”

“한 가지 물어봐도 되나?”

“뭘 물어보려는 건가?”

“그 총이 안중근 의사 총인가?”

여기서 새로운 조건이 하나 더 추가된다. 바로 ‘총’이다. 당시 기록들을 살펴보면, 총의 출처에 대해서는 별말이 없다. 안중근 의사는 자신을 지원해줬던 이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자금 지원 등에 관한 언급을 최대한 자제하거나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누구에게 뺏었다’ 등등으로 표현했다. 안중근 의사 자서전에 의하면,

[…] 이때 동지 우덕순을 만나 계책을 비밀히 약속한 다음 각기 권총을 휴대하고 기차를 타고 가면서 생각하니 […]

라고만 나와 있다.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권총은 ‘누군가’가 조달해 줬다고 판단한다. 우덕순과 각기 M1900 한 자루씩과 탄창 2개씩을 나눠 가졌다는 점에서 누군가의 지원을 생각할 수 있다. 가장 유력한 인물은 거부 최재형(崔在亨)이다. 최재형은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지원하기 위해 우덕순과 안중근의 동행을 주선했고, 유동하와 조도선으로 하여금 통역으로 합류하도록 했다.

최재형은 노비의 아들로 태어나 구한말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러시아로 넘어가 정착했다. 태어나길 노비의 아들이었지만, 군수업으로 큰 부를 쌓고 이 덕분에 러시아 황제를 알현하고 5개의 훈장까지 받았다(러일전쟁 당시에 러시아 해군 소위로 임관 통역관으로 활약한다). 이렇게 부와 명예를 얻은 최재형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게 된다. ‘연해주 독립운동의 아버지’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그는 의병들에게 군량과 군자금, 무기를 제공했고, 직접 병력을 이끌고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최재형이 가장 유력한 총기 제공자라 할 수 있다. 아니라면 이석산, 윤능효, 이강 선생 등이 지원했을 수도 있다. 문제는 이렇게 급하게 지원받은 총으로 거사를 치른다는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가급적이면 손에 익은 총으로 사격을 하는 게 훨씬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원래 안중근 의사는 총을 잘 쏘는 것으로 유명했다. 집안에 포군(砲軍)이 있어서 사냥을 따라가고, 총을 쏘고, 직접 사냥을 했었다. 김구 선생은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과 친분이 있었는데, 안중근을 총 잘 쏘는 청년으로 말했다. 이미 안중근은 사격 솜씨는 근동에 정평이 나 있었다.

그런 그가 1908년 지린(吉林)성 훈춘(琿春)시의 한 시골 마을에서 석 달간 사격 훈련을 했다고 한다. 이 집의 소유주는 안중근 의사의 친척인 안동렬 씨였고, 그가 머무르면서 사격했던 기간은 1908년 4월부터 6월까지 3개월이었다. 만약 이때 사용했던 권총이 M1900이었다면?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러나 확신할 수는 없다.

영화 〈도마 안중근〉 속 거사 장면. 여기에서의 모델은 브라우닝 하이파워다.

다만 확실한 건 안중근 의사가 총을 잘 쐈다는 것, 여기에 더해 3개월간 집중적으로 사격을 연습했다는 것이라는 것이다. 최소한 사수가 총을 처음 쏴보거나, 사격에 서툰 것이 아니라 베테랑이란 건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러 가지 제약 조건을 넘어 표적을 사살할 수 있었던 게 운이 아니라 실력이란 걸 확인할 수 있다.

 

2. 우리는 안중근을 아는 걸까?

올해는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110주년이다. 우리는 안중근 의사를 안다고 생각한다. 되물어 보고 싶다. 우리는 안중근을 아는 걸까? 안중근 의사의 기록 필름이라고 해서 의거 직후에 끌려가는 영상을 한 번쯤은 봤을 것이다. 이 영상은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

이토 히로부미와 회담을 하는 러시아의 코코프체프가 당시로써는 신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영사기를 들고 와 이토와의 만남을 촬영했다. 만약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 필름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선물로 건네줬을 것이다. 1909년 10월 26일 9시 30분, 코코프체프의 계획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선물로 줘야 할 필름이 ‘의거의 기록물’이 됐다. 이 필름은 의거 직후 일본 인사(외교 관련 인사)가 재빨리 입수했다(돈을 주고 구입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이 필름은 어떻게 됐을까?

공식적으로 이 필름이 세상에 공개된 건 1995년이다. 일본의 한 방송사가 저격 장면을 제외한 25초가량의 필름을 방영했다(국내 방송사도 2008년쯤 이 필름을 입수한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던 장면은 촬영되지 못했던 걸까? 아니다. 촬영됐고, 심지어 상영되기도 했다.

1910년 8월 14일 《뉴욕타임스》의 기사를 보면, 러시아 촬영기사가 촬영한 이토 히로부미 저격장면 필름이 미국으로 건너왔다. 그리고 이게 실제로 상영됐다는 기사가 나온다(필름 두 통이 태평양을 건너와 상영이 됐지만, 당시 미국인들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이 필름이 어디로 갔을까? 학계 전문가들은 이 필름을 일본 정부 기관이나 영상 관련 단체가 입수해 보관한다는 확신이 있다. 필름뿐 아니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어디에 있을까?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 안중근 의사가 순국 직전에 두 아우에게 남긴 유언

숙명여대 뒤편 효창공원에 가면 삼의사 묘역이 있다. 1946년 7월 9일 김구 선생이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묘소를 만든 것이다. 김구 선생도 3년 뒤에 이곳에 안장된다. 이 삼의사 묘의 옆에 보면, 비석이 없는 무덤이 있다. 바로 안중근 의사의 가묘(假墓)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찾을 수가 없다.

효창공원의 안중근 의사 묘터. / 출처: 오마이뉴스

일본은 안 의사의 흔적을 빨리 지워버리고 싶어 했다. 이 당시 한반도에서는 안중근 의사 엽서가 불티나듯이 팔렸다(안중근 의사의 변호사비를 모으기 위해 가족들이 엽서를 만들어 팔았다). 일본은 이 엽서 판매를 중단시켰다. 안중근 의사가 독립운동의 상징이 될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의 유해를 암매장시킨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안중근 의사가 의거에 사용한 총은 어떻게 됐을까? 하얼빈 의거 직후 안중근 의사가 사용한 M1900은 증거품으로 분류돼 일본 검찰에 넘어갔다. 재판이 끝난 뒤에 일본 본토로 넘어간다. 이후에도 계속 일본에 있었는데 어느 순간 이 총이 사라진다.

일본 측 주장에 의하면 ‘관동 대지진 당시 분실했다.’ 1923년 9월 1일에 있었던 대지진, 뒤이은 사회적 혼란과 수습 과정에서 M1900을 분실했다는 것이다. 믿을 수 있겠는가? 일본 땅 어디에 안중근 의사가 사용한 총번 262336의 총이 있을 것이다.

 

3. 이 ‘황당한’ 프로젝트의 시작

저거 브라우닝 하이파워인데?

2018년 4월 우연히 중국 하얼빈 안중근기념관에 전시된 ‘의거 사용 총기’ 사진을 보았다. M1900이 아니라 브라우닝 하이파워였다. 존 브라우닝이 설계한 건 맞지만(기초 설계만 했기에 존 브라우닝의 작품이 아니라고 분류하기도 한다) 그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M1900은 그의 첫 번째 자동권총이었다(상업적으로 판매한). 처음엔 호기심이었다.

안중근기념관에 왜 브라우닝 하이파워가 전시된 걸까?

호기심은 이어졌다. 서울 안중근기념관, 전쟁기념관, 천안 독립기념관을 샅샅이 훑었다. 안중근 의사가 의거에 사용한 M1900은 아니더라도 동일한 모델을 확인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한국 땅에서는 FN 社에서 생산한 M1900은 없었다. 서울 안중근기념관에는 M1900의 플라스틱 모형이 있었다.

서울 안중근기념관의 M1900 플라스틱 모형. / 출처: 딴지일보

우리가 하나 만들어 볼까?

40대 남자 세 명이 총을 만들기로 결정을 내렸다. 안중근기념관과 의견을 나눴고, 복각품을 만들어서 기증하는 것에 합의를 봤다. 이때가 2018년 5월이었다. 당시 이 세 남자는 2018년 안에 이 프로젝트를 끝내겠다는 계획을 짰다. 그런데 제안이 들어왔다.

내년이 안중근 의사 의거 110주년입니다. 2019년 10월 26일 전달해 주신다면 뜻깊을 거 같습니다.

1년이란 시간을 벌었다. 복각하기 위해 M1900의 설계도를 찾고, 모형 총이 생산됐는지를 확인했다. 참고할 자료와 총기를 확보하기 위해 우선 일본 쪽을 타전해 봤다. M1900은 없었으나(개라지 형태로 소량 생산된 곳은 있지만) M1900의 다음 버전인 M1910은 생산하기에 참고하기 위해 일본 모형 총기 업체에 의견을 타전하다 미묘한 기류를 느꼈다.

왜 그 총(M1900)을 만들려는 거죠?

이런 뉘앙스의 질문도 받았다. 그때서야 어렴풋이 느끼게 됐다. 일본 모형 총기 업체에서 암묵적으로 M1900을 만들지 않은 게 아닐까? 우리에겐 영웅의 도구였지만, 그들에겐 ‘흉총’이 될 수 있었다. 결론은 간단했다. 그럼 무조건 만들어야지.

처음엔 설계도를 입수해서 복각하겠다는 계획이었는데, 점점 이야기가 커졌다. 완벽한 복각을 위해서 실총을 빌려서 3D 스캐닝을 통해 설곗값을 뽑아낸 후 이 데이터를 가지고 복각에 들어간다는 계획을 세웠다.

  • “이 당시 총은 지금처럼 기계에 의해 가공이 아니라 사람이 손으로 직접 깎고, 붙이고 만들었다. 설계도는 같아도 사람의 손을 탔기 때문에 미묘하게 다 다른 총이 나왔다.”
  • “이 당시 열처리 기법은 지금과 다르다.”
  • “총 설계도라는 게 정확한 치수나 수치를 적어놓은 설계 시방서 개념이 아니라… 냉정하게 말하면 총기의 형태를 개략적으로 확인시켜주는 것일 뿐이다.”

이 모든 논의가 모인 건 실총 확보였다. 이때부터 이야기가 복잡해졌다. 가장 큰 문제는 비용과 행정 협조였다. 한국은 총기 청정 국가였다. 성인 남성 대부분이 돌격 소총의 분해·결합과 사격, 소부대 전투 전술을 몸에 체득한 상태지만 일단 사회에 나온 순간 총을 접할 기회는 없다. 엄격한 총기 통제 덕분에 민간에서 총을 구할 방법은 극히 제한적이다. 국내에 총을 들여오는 것도 어렵지만, 상태가 괜찮은 M1900을 구하는 건 더 어렵다.

이 두 가지 난점을 피해 가는 방법이 나왔다: M1900을 빌려서(미국에서는 이런 식의 거래가 흔히 있다. 문제는 이런 클래식 총기에 대한 주인의 까다로운 요구를 어디까지 받아주느냐다. 아예 분해하지 말라는 요구를 하는 주인도 있다) 실리콘 밸리에 있는 3D 프린팅 업체에 맡긴다. 여기서 수치 값을 확보한 다음 이 데이터를 국내에 들여와 총을 제작한다. 예상외로 비싼 랜탈 가격 앞에서 고민했지만 이 방법이 가장 무난하고 확실한 방법이었다.

여기에 욕심이 더해졌다. 기왕 여기까지 온 거 실사격을 해보자. 이렇게 해서 나온 방안이 필리핀행이다. 총기 복각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부터 ‘메이킹 다큐멘터리’를 찍자고 했는데, 어느 순간 메이킹이 아니라 본편 다큐멘터리를 찍던 우리는 실총을 확보했다면 이걸 한 번 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안중근 의사가 사격 실력이 좋았다고 말하는데, 실제 얼마나 뛰어났는지 확인해 보고 싶다.

‘기왕 여기까지 온 거 실사격을 해보자.’

다큐에도 담겨있지만, 안중근 의사의 사격 폼에 대해서 수많은 조사와 연구를 했다. 현대 권총 사격법은 ‘권총 사격선수’를 제외하고는 거의 양손 사격이 기본이다. 그런데 이 당시 안중근 의사는 한 손으로 사격을 했다. 과정은 차차 연재에서 풀어낼 것이고, 다큐멘터리가 공개되면 알겠지만… 6초 만에 4개의 목표물을 향해 급작 사격을 해서 표적에 명중했다. 7m 거리에서.

M1900을 확보해서 필리핀으로 가져와 이곳에서 실총 사격을 하고, 이 총을 분해해 수치값을 확보한다는 계획이 추진됐다. 역시나 문제가 많았다. 빌린 총을 필리핀까지 공수해 오는 것도 문제지만, 필리핀도 국가이기에 행정 소요가 아예 없는 게 아니었다. 결국 원점으로 돌아갔다.

실총을 사자!

 

4. 실총을 사자!

총기 옥션을 뒤지고, 건 브로커와 접촉하는 3개월 동안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이제 눈 감고도 분해·결합할 수 있을 거 같다’고 할 수 있을 거 같다. 복각을 위해 설계도를 보고, M1900과 관련된 자료와 영상을 확인하고, 총기 옥션을 뒤지는 게 일상이었다. 최소한의 생계 활동. 아니, 총을 사고 복각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총은 넘쳐났다. 블랙 프라이데이 때 어지간한 권총은 300–700달러 수준에 팔리는 걸 봤다(우리나라 K-5의 민수용 버전인 라이온 하트도 상당히 ‘싼’ 가격에 팔리는 것도 봤다). 신품 총기는 차고 넘쳤지만, M1900은 보이지 않았다. 국내 모형 총기 유통사에서 건 브로커를 통해 총기를 구해보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일을 훨씬 수월하게 진행되지만 문제는 가격대였다.

상태 좋은 녀석을 구하려면, 1만 달러부터 시작해야 할 겁니다.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걸 보면 지금도 신기하다. 나만 빼고 다들 부자인 거 같았다(그건 아니지만). 당시 우리가 구할 수 있고, 만날 수 있고, 접촉할 수 있는 모든 루트의 업체와 사람들을 만났다. 한국을 대표하는 모형업체 쪽부터 시작해서, 민간의 실총 사격장, 건 브로커, 방산지정업체는 물론 미국에 사는 대학교 시절의 동창들까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끌어왔다.

M1900은 어떻게든 작정하면 더 ‘쉽게’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M1900 앞에 붙은 문구였다. 상태가 괜찮은 M1900. 이때쯤 우리들은 내심 말은 안 했지만, M1900을 확보한다면 ‘하얼빈’을 재현하겠다는 생각들을 했다. 그렇게 3개월이 흘렀다. 이제 거의 포기할까 생각하던 그때, 미국에서 연락이 왔다.

그 총 구했다.

프로젝트 ‘잃어버린 총을 찾아서’의 퇴로가 차단되던 순간이었다.

 

5. 이제 돌아갈 수도 없어

전쟁기념관에 기증될 FN M1900. / 출처: 텀블벅

현재 ‘잃어버린 총을 찾아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우라웍스는 실물 M1900(총번 710592)를 구입했다. 총기 옥션 몇 군데를 몇 달에 걸쳐서 도전한 결과물이었다. 이 실총을 국내로 들여와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재현하고, 이 실총을 베이스로 복각품을 제작하는 게 이 프로젝트의 목표다.

전쟁기념관에 실총을 기증하기로 협의가 끝났고, 복각품은 안중근기념관에 기증하는 것으로 2018년 5월에 모든 논의가 끝이 났다. M1900이 국내로 들어온 이후 군과 민간의 협조를 얻어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재현할 준비를 한다. 프로젝트 진행 과정은 현재 다큐멘터리로 제작 중이며, 조만간 총기 전문 유튜브 ‘건들건들’에서 진행 일정을 공개할 예정이다.

현재 다큐멘터리 제작비용의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중이다. 총을 구해오고, 복각하고, 배송 및 행정 절차 과정과 시험 발사를 위해 이제까지 준비한 제작비를 다 소모했다. 안중근 의사 의거를 재현하고 싶은 욕심, 대한민국에 한 자루도 없었던 M1900을 전쟁기념관에 기증하고 이를 베이스로 총번 262336이 박힌 복각품을 안중근기념관에 기증하겠다는 생각이 지금까지 프로젝트를 끌어 올 수 있게 했다.

지난 17개월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솔직히 좀 힘들었다. 중간에 몇 번이나 그만둘까 고민했던 적이 있다. 물리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이 프로젝트를 끝까지 이어나갈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지지, 후원을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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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베트남전의 행방과 결말에 관해 모르는 것들 https://ppss.kr/archives/200140 Wed, 07 Aug 2019 05:45:03 +0000 http://3.36.87.144/?p=200140 어떤 역사든 마찬가지겠지만, 베트남전의 행방과 결말은 한두 가지 요인으로는 설명하기 힘들다.

어떤 이들은 남베트남이 북베트남에 비해 강한 국력과 초강대국 미국의 직접적인 지원을 받았음에도 북베트남에게 패망한 것은 각계각층에 간첩이 많기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사실 이거 이명박근혜 정권 당시 군대 정훈교육에서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나오던 레퍼토리다. 물론 이런 레퍼토리에서 남베트남 정권이 하도 썩어빠져서 정작 지원 주체인 미국조차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지경이었다는 걸 말하는 경우는 본 적 없다.

어떤 이들은 공산주의자 호찌민을 경계하기도 하지만, 정작 이 호찌민이 중국의 개입을 두려워하여 초기에는 미국에 지원 요청을 했으나, 아시아 지역에서의 공산주의+민족주의 컬래버레이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미국이 흑백논리의 함정에 빠져서 베트남전 자체를 회피할 기회를 놓쳤다는 걸 거론하는 경우도 별로 본 적 없다.

어떤 이들은 북베트남이 초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이길 수 있었던 건 호찌민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했기 때문이라고도 말한다. 그런데 정작 이렇게 된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 미국이 의회의 결의가 아니면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독단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없는 철저한 민주주의 국가였기 때문이라는 점을 언급하는 경우는 별로 못 봤다. 게다가 북베트남이 전쟁 수행을 위해 얼마나 많은 정치적 ‘숙청’을 감행했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과정에서 언론의 자유나 정치적 자유 따위는 개나 줘버린 상황이 되었다는 걸 말하는 경우도 본 적 없다.

또 어떤 이들은 호찌민이 베트남의 민족적 영웅이고, 이런 영웅이었기에 남북을 통틀어 구심점이 될 수 있었다고도 하지만… 글쎄, 나도 베트남에 가고서야 ‘조심스럽게’ 듣게 된 이야기들이지만, 정작 당시 남베트남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호찌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호찌민은, 자신의 정권을 세우기 위해 북위 17도선 이남을 ‘포기하고’ 미국과 응오 딘 지엠 정권에게 줘버린 사람으로 인식되는지라…

사실 북베트남 정규군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제대로 구분하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고, 정작 베트남 전쟁 기간에 북위 17도선 이북에서는 제대로 된 전투가 벌어진 적도 없으며, 대부분의 ‘전투’는 남베트남 지역에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과 미군/한국군/남베트남군 사이에서 벌어졌으며, 소위 그 ‘고엽제’라는 것도 대부분 사이공 인근 지역에 뿌려졌다는 걸 아는 사람도 생각 외로 많지 않다.

북베트남이 전쟁의 피해를 입은 거라고는 미국 공·해군의 공습을 지속적으로 받았다는 정도인데, 그나마도 북베트남의 심기를 지나치게 거슬러서 협상을 거부하는 경우를 피하기 위해 대단히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만 공습을 계속했다는 걸 고려하는 사람도 그닥 본 일이 없다.

사실 신채호는 그런 말 한 적도 없지만 종종 신채호가 했다고 오인되는 발언,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였던가. 그 말의 의미가 역사의 일부분을 제멋대로 가져다가 내 깜냥에 맞게 문질러서 써먹자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역사는 교훈을 얻기 위해 공부하는 거지, 자기 위안을 얻기 위해 배우거나 그런 ‘도구’로 활용하기 위해 존재하는 건 아닐 테다.

원문: 박성호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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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와 김정은의 회담은 왜 결렬되었나 https://ppss.kr/archives/189701 Wed, 13 Mar 2019 05:30:14 +0000 http://3.36.87.144/?p=189701 트럼프와 김정은의 회담이 합의를 하지 못했는데 내용을 보니까 이전부터 우려하던 핵심 부분이 그대로 문제가 되었네요. 이 문제를 풀지 못하면 북한 핵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이 안 되므로 이 부분을 도대체 어떤 식으로 풀랑가 싶었는데 결국 아무것도 안 되었습니다. 일단 해당 문제에 대한 북한의 입장과 미국의 입장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출처: 연합뉴스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할 수밖에 없던 사정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죠. 북한의 무기들은 대부분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에 도입된 것으로서 2020년 시점에선 도입한 지 50여 년이 되어서 폐기물이 되기 직전의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게다가 최근 기술이 급격히 발전해가면서 미국, 한국, 일본 등 북한의 적성 국가들이 스텔스 전투기, 드론, 첩보 위성 등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며 군사력을 현대화하는 중이죠.

그런데 북한의 붕괴된 경제력으로는 최신 무기를 도입하기는커녕 기존 무기를 유지하기에도 벅찬 상황이죠. 즉 북한의 군사력은 붕괴 직전이고 이는 북한 권력층들에게 공포심과 불안을 안겨주기에 충분합니다. 해서 북한에게 유일하게 남은 대안이 핵무기 개발이었죠.

핵무기 개발은 북한에게 주변 적성 국가들에 대한 군사적 억제력을 제공해주고, 핵을 기반으로 오히려 미국이나 일본·한국 등에 대한 발언권 강화 및 국제적 위상 강화도 가져다주는 일거양득의 효과가 있었죠. 또 핵을 지렛대로 해서 국제 경제 제재도 풀어보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즉 북한으로서 핵 개발은 오히려 저렴한 비용으로 여러 가지 도저히 풀 수 없는 난제를 동시에 풀, 다른 대안이 없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니 국제사회에서 욕을 바가지로 먹으면서도 밀어붙일 수밖에 없던 겁니다. 북한 권력층이 미쳐서 그런 게 아니고.

반면 미국은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무조건 막아야 할 입장입니다. 미국이나 서유럽 국가들은 더 이상 핵무기를 소유하는 국가들이 늘어나는 것을 극력 반대하고, 북한이 뚫리면 다른 국가들이 핵을 가지려는 유혹에 쉽게 빠져 일본 등도 핵을 가지려고 하면서 현재의 세계 질서가 근본적으로 무너집니다. 미국과 EU 국가들은 북한에 CVID를 강요할 수밖에 없죠.

출처: KBS

북한의 입장과 미국의 입장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인데, 그럼 이를 어떤 식으로 타협할 것인가? 북한도 그렇고 문재인 정권에서도 양측의 상반된 목표를 조금씩 양보해서 단계적이고 부분적인 핵 포기를 하되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도 전면적이 아니라 일부분만 하는 것으로 북한과 미국이 타협하는 안을 제시한 것이죠.

문제는 이걸 대체 왜 미국이 수용해야 하는가? 미국이 왜 북한에 대한 CVID를 포기해야 하는가? 이겠죠. 사실 핵무기 개발은 기술 개발이므로 한번 개발된 기술은 되돌리기 어렵습니다. 관련 개발진들을 모조리 잡아다 죽여버릴 수도 없고 관련 정보 및 연구 성과가 다 폐기되었는지 확인하기도 어렵죠.

즉 미국 입장에선 부분적인 북한의 핵 개발 중지는 사실상 핵 개발을 지속한다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속도가 늦어질 뿐이죠. 미국이 원하는 것은 오로지 북한의 전면 핵기술 폐기와 그 감시뿐이죠. 문제는 이걸 북한이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이게 간단치가 않다는 게 문제죠. 기본적으로 이는 북한이 미국 등 서방국가에 대한 전면 항복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고.

한국 입장에선 북한이 전면 핵 폐기를 하고 남한과의 경제 협력을 하길 원하겠지만 북한 입장에선 그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일단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그냥 가난해서 부자 국가들이 투자해주기를 애원하는, 흔해 빠진 제삼세계 국가 중 하나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미국과 대결하며 민족을 수호하는 북한의 위대한 김씨 왕조의 신화가 그냥 허무맹랑한 헛소리가 되는 거죠.

국제 제재 해제하고 해외투자를 받을 국제화가 되면 북한 인민들이 봐도 북한이 세계적으로 봐도 유난히 가난하고 낙후된 나라일 뿐인데, 여기서 북한 정권의 당위성을 무슨 수로 확보하나요? 3대 세습 독재정권의 결과가? 오잉? 이게 대체?

여기서부터 북한 정권으로서는 골때리는 상황에 직면합니다. 경제 제재를 풀고 싶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개방되어선 오히려 자신들의 안위가 위험한 사태가 될 거라는 건 쉽게 예측이 가능하죠. 오히려 북한으로서는 적당히 핵 개발을 제한하고 적당히 경제 제재를 푸는, 즉 자신들이 통제할 수 있는 레벨의 개방만이 필요할 뿐입니다.

즉 핵 개발은 더 이상 안 하지만 이미 완성된 핵무기는 그대로 소유하되 경제 제재는 일부만 해제되는 상황이 오히려 필요한 거죠. 또 한 가지 북한 정권이 가진 딜레마는… 개방을 해서 경제를 발전시키고 발전된 경제력을 기반으로 무너진 군사력을 재건해야 하는데, 이게 1-2년에 될 일이 절대 아닙니다. 북한의 무너진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는 데도 거액을 10년 이상 퍼부어야 하고, 이후 경제가 고도성장을 해도 20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고 경제성장에 주력해서 발전된 경제력으로 다시 군사력을 확충하는 데 적어도 3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거죠. 이 이야기는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북한이 최소 30년간은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한국이고 미국이고 일본이고 북한의 적성 국가들은 민주국가로서 선거를 통해 정권을 교체하는데, 북한에 친화적인 정권이 계속 선거로 등장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은 대단히 비현실적입니다. 트럼프가 이미 전 세계적으로 합의된 이란의 핵 협정을 제멋대로 갈아엎은 게 불과 1-2년도 안 되었죠. 미국이나 한국의 앞으로 집권할 미래의 정권이 갑자기 태도를 바꿔서 북한을 공격할 경우 북한은 무방비 상태로 맞는 상황이 됩니다.

즉 북한으로선 문재인 정권만 믿고 핵을 무조건 다 집어던질 수가 없는 거죠. 10년 뒤에도 문재인 정권이 집권할 거란 보장이 도대체 어디에 있나요? 북한이 그걸 믿을까요? 바부탱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남한이 북한에 무기를 사다 줘서 무기 현대화를 해줄 건가요? 오잉?

출처: 연합뉴스

결국 칼자루를 쥔 건 미국인데 북한보다 압도적인 힘을 가진 미국으로선 북한이 무조건 CVID를 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은 있을 수가 없고, 북한이 개방한다고 해도 그 경제적 부담은 한국이 전부 질 것이지 미국은 상관없습니다. 사실상 미국은 꽃놀이 패를 쥔 거죠. 북한이 지금처럼 미사일 안 쏘고 조용히만 있어도 미국으로선 충분히 성공이고. 북한이 갑자기 이전처럼 미사일 쏴대면 막강한 군사력의 미국으로선 북한을 그냥 때려부수면 되니까요.

북한으로서도 트럼프와 협상했다가 이전대로 도로 미사일 쏘고 핵 실험하기는 이제 도리어 부담스러운 상황이 돼버렸죠. 오히려 몰린 건 북한이 되었어요. 한국으로선 경제적인 부담을 다 한국이 질 테니 북한은 핵을 포기하고 미국은 경제 제재를 전면 폐기하는 걸 바라지만, 북한의 이런 우려는 사실 한국이 전부 다 해결해주기에는 무리한 부분이 있습니다.

결국 이 부분은 미국이 양보해주길 한국이 미국에 애원해보는 것인데… 미국으로선 CVID를 양보해야 할 이유가 또 전혀 없단 말이죠. 또 설령 트럼프가 제한적인 핵 개발 중지를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다음 미국 정권에서 얼마든지 뒤집어 엎어버릴 가능성이 매우 높죠. 이란 핵 협정이 휴짓조각이 된 것처럼요.

오히려 한국으로선 대충 핵 협정이 맺어졌다가 미국의 미래의 정권에 의해 휴짓조각이 되면 그게 훨씬 더 골때리죠. 북한에 투자한 거액의 투자금이 통째로 증발해버리니. 한국 경제가 한순간에 골로 가서 온 가족 부여잡고 한강에서 점프하는 사람들이 속출하는 수가 있죠.

결국 문제를 해결하려면 북한이 전면적으로 CVID를 받아들이는 것 이외엔 없는데 북한을 무슨 수로 설득해서 CVID를 받아들이게 하느냐가 문제인 거죠. 그리고 그게 상당히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 문재인 정권으로서도 어찌 해줄 수가 없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하고 말이죠. 근데 북한도 북한대로 지금의 경제 제재를 버티는 것도 어려운 상황인 게 맞습니다.

출처: 뉴시스

결국 김정은은 어느 쪽이건 어려운 선택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네요. 그냥 전면 항복하고 경제성장을 하되 언제 북한 독재 정권이 무너질지 모르는 상황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정권 안보에 주안점을 두되 경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둘 것인지. 어찌 되었건 무엇인가 하나는 포기해야만 하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원문: Okjin Park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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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과 바나나 우유의 문제: 사회는 군인을 어떤 존재로 바라보는가 https://ppss.kr/archives/184950 Fri, 18 Jan 2019 07:03:50 +0000 http://3.36.87.144/?p=184950 정부가 올해부터 군 장병들에게 딸기, 초코, 바나나 우유 등 가공유를 배식하기로 하자, 낙농업계가 반발하고 있다고 합니다. 흰 우유 소비량이 줄어들어 낙농업계에 피해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회가 군인을 대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단면이란 생각이 드네요. 적당히 쓰는 소모품, 남는 거 꾸역꾸역 밀어 넣는 짬 처리반.

군대 복무 문제는 20대 남성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의 근원 중 하나겠죠. 다들 지나고 나니 “고작 입대로 찌질하게 군다”고 20대 남성들을 비웃는데, 과거를 떠올려보면 저만해도 정말 입대가 지옥만큼 싫었거든요.

쿨한 척하지 말고 여기서부터 주목해보자고요. 군대는 엄청나게 큰 문젯거리에요. 갑자기 모든 남자를 1년 반 동안 죄다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구렁텅이로 처넣는다고요. 사소한 문제들, 변으로 꽉 차서 물도 안 나오는 재래식 화장실 등 한 40년쯤 과거로 타임 워프한 듯한 삶의 질은 접어놓더라도요… 제일 큰 문제가 아래와 같은 것인데,

  1. 시간을 박탈한다는 것
  2. 신체적 자유를 박탈한다는 것
  3. 경력을 박탈한다는 것

이걸 보상해줄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다고 봐요. 돈? …쉽진 않을 것 같아요. 2018년에 병장 월급을 21만 6천 원에서 40만 6천 원까지 인상했지만 그 정도로 사람들이 고마워하진 않을 거예요. 엄청나게 올랐지만 사실 목돈이라기엔 낯뜨거운 수준이니까요. 적어도 100만 원 이상은 돼야 하지 않나 싶긴 한데, 그것도 충분한 보상이라고 볼 순 없고, 충분히 만족하지도 않을 거라 보고요…

이 박탈감은 ‘남성만을 대상으로 하는 국민개병제’가 유지되는 이상 완전히 해결할 순 없다고 생각해요. 성 평등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올수록 군대 문제가 안 올라올 수도 없다고 보고요. 자꾸 일부 사람들이 이런 문제 제기를 ‘찌질하다’며 묵살하려 하는데 이거 절대로 작은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성별만을 이유로 1년 반 동안 신체의 자유를 박탈하는 게 어떻게 작은 문제에요?

다만 이런 박탈감을 그나마 줄일 방법은 있겠죠. 신체적 자유를 조금만 덜 박탈하더라도 좋을 거예요. 휴대전화도 좀 쓰게 해 주고, 외박도 좀 자유롭게 나가게 하고. 이러면서 병영 부조리도 자연스레 줄여나갈 수 있겠죠.

그리고 그 못지않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저는 ‘기분’인데요.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아, 성 평등 문제가 이토록 심각한데 고작 20대 남자애들 ‘기분’을 맞춰줘야 한다고? …네, 저는 맞춰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1년 반 동안 신체적 자유를 박탈할 거라면. 존경해줘야 해요. 신체적 자유를 헌납하고 국경을 지키는 숭고한 행위에 대해서요. 존중하는 태도로 대하고, 고마워해야 하죠. 그런데 현실은 그냥 군바리 취급이잖아요. 소모품, 짬 처리반.

또 요즘 터지고 있는 여러 사회 문제가 이들의 기분을 더욱 상하게 하죠. 예를 들어,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 “총을 들지 않을 양심을 인정하라!” 그럼 궁금해지죠. 왜 세금을 내기 싫은 양심은 인정받을 수 없지만, 총을 들지 않을 양심만은 인정받아야 할까요? 총은 살인의 도구니까 그렇대요.

그럼 살인 무기를 든 나는 뭔데? 누군 살인 무기를 들고 싶어 들었나? 이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어요. “양심이란 그런 뜻이 아니고… 개인마다 다른 것…” 같은 교과서에나 나올 말을 하기 전에, 당연히 떠오를 수밖에 없는 이 의문에 성실하게 답을 해 줘야 해요.

“총을 들어서라도 가족과 사회를 지키려 하는 당신의 숭고함에 감사한다.”, 사실 이게 기초가 되고 그 위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의 의의를 얘기했어야 했다고 생각하는데… 우린 그러지 않았죠. 어디서는 징병에 응한 것만으로도 가해자라는 얘기가 나오질 않나 말이에요.

 

국민개병제 대상이 남성만인 이유에 대해 식자들은 이렇게 말하죠. “국방의 의무는 사실 병역의 의무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납세를 비롯해 사회, 경제에 이바지하는 것이 모두 국방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도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이건 궤변이라고 봐요. 징병을 남성만 대상으로 하는 걸 정당화하기 위해 만든 법리적 궤변. 병역 말고 뭐가 그렇게 뚜렷하게 국방에 이바지하나요? 남성도 납세만으로 국방의 의무를 할 수 있게 해 주나요?

‘그건 국가에 요구하라!’ 맞는 말이에요. 그런데 이미 하고 있어요. 군인권센터 같은 곳도 있고, 많은 사람이 여기에 군 내부 부조리를 내부고발하고 있고요. 씨알도 안 먹혀서 그렇지(…) 군 부조리는 고발에 고발이 끊임없이 이어져서 이제 지겨울 정도고요. 게다가 국가가 군인을 막 대하는 것만큼, 우리 사회도 군인을 막 대하고 있어요. 직접적으로 징병해가고 신체의 자유를 박탈하는 건 행정부지만, 우리 사회 구성원들, 수많은 개인들, 수많은 사인들이 군인을 ‘군바리’ 취급하고 있죠.

예전에 이런 모멸을 참을 수 있었던 건 그게 ‘남성’의 의례였기 때문일지도 모르죠. 군필 남성이 사회의 주축이고, 그들이 가정을 먹여 살리고, 기업을 돌리고, 국가를 지탱하는 존재였으니까. 그 ‘기분’이 그들을 지탱해왔던 걸지도. 하지만 이젠 아니잖아요. 아니어야 하잖아요. 소모품, 짬처리반. 바나나 우유를 먹으면 안 되는 존재들. 그게 지금 군인을 대하는 사회의 솔직한 시선이잖아요. 마지막으로 가공유 군납에 대한 한국낙농육우협회의 논평을 인용해볼게요.

군 급식 지향점은 군 장병 체력증진에 있다. 당이나 색소, 수입 분유가 함유된 가공유를 군 급식에 포함하겠다는 것은 군 급식 목적에 역행하는 것이다.

바나나 우유 하나 먹는다는데, 무슨 대역죄라도 저지르는 것 같네요.

원문: 임예인 님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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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징벌적’이라는 것이다 https://ppss.kr/archives/183644 Thu, 10 Jan 2019 01:10:19 +0000 http://3.36.87.144/?p=183644 ‘남들이 하기 싫은 의무’를 대신 하는 것이 징병제라고 하자. 그렇다면 그것과 준하는 것을 병역거부자들에게 요구하기 이전에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것’을 강요당한 이들에게 그에 따르는 ‘보상’을 해주는 것을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정당한 사회를 구현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징벌적이라고 하는 거다. 가기 싫은데 가서 고생하는 사람도, 거부하여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도 함께 망하는 것. 기본적으로 자신이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개인적 신념에 의한 병역거부자’에 대해 이 사회가 요구하는 것은 ‘나도 고생했으니, 너도 한번 당해봐라’ 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니 장병들에 대한 복지나 처우개선이 해결되지 않거나 진행이 되더라도 더딘 것이다.

시점과 관점을 좀 바꾸어 보는 유연함이 군과 군 출신자들에겐 필요하다. ‘남들도 고생했으니 너희도’가 아니라 ‘고생하기 싫으니 우리도’로 바꿔보는 것이다. 이등병 기준으로 최소 월 급여는 80만 원 이상, 병장 기준 최소 월 급여는 120만 원 정도는 주고 위수지역 다 폐지하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노후화되고 현대전 교리에도 맞지 않는 장비들도 개선해주고. 근무 시간 끝나면 좀 더 자유를 인정해주고 말이다.

예산 없다고? 그럼 늘려야지! 그 정도 예산 올리고 세금 올라가는 거에 싫다고 할 대한민국 국민 없다. 아차, 자한당이나 애국 뭐시기 하는 애들은 싫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부사관이나 간부사관 출신들은 ‘우리는 심하게 고생하는데’라는 말할 자격 없다. 그 길을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고 자신이 선택했지 않은가. 그리고 그게 ‘직업’ 아닌가. 당신들이 요구해야 할 것은 ‘같은 공무원인데 왜 다른 공무원들과 달리 차별을 하느냐’ 정도 아닐까?

더 나은 처우를 원하면, 그들을 품고 같은 편으로 먼저 만들어라. ‘우리는 피해자야!’ 하지 말고 ‘우리도, 너희도 같은 피해자이니 서로 윈윈하자’라는 인식을 가져보면 어떨까. 억울한가? 억울하다면 당신들을 그렇게 만든 사회를 바꿀 생각을 해보자. 억울한 마음을 가지게 될 사람들을 더 양산하는 세상을 만들지 말고.

원문: 김찬우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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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적’ 병역거부라는 단어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면 https://ppss.kr/archives/179679 https://ppss.kr/archives/179679#respond Mon, 19 Nov 2018 05:43:42 +0000 http://3.36.87.144/?p=179679 ‘양심적’ 병역거부에서의 ‘양심’이 지속적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면 학술적 논의에서는 본인들끼리 그 용어 쓰고, 공중에게는 오해하지 않는 용어로 표현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신념적 병역거부라든지 뭐 그런 대체어가 없는 것도 아닌데 왜 그 표현을 고집하는 건지 잘 이해가 안 간다. 엄밀한 학술적 용어니 뭐니 그러는 거 일종의 엘리트주의 아니냐는 거다.

헌법에서 말하는 ‘양심’은 공중의 의미로는 ‘신념’에 가깝다. 출처: 채널A

막말로 양심만 학술적 개념인가? 예컨대 약학에서 사용되는 ‘흡수’라는 단어는 일상어 흡수와는 전혀 별개의 단어다. 다음 중에 약학에서 사용되는 ‘약물의 흡수’라는 것이 정확히 뭘 것 같은지 한 번 골라보시라.

  1. 약물이 인체의 소화기관 내로 유입된 것
  2. 약물이 녹아서 소화기관의 소화액 내에 유입된 것
  3. 약물이 소화기관 조직 세포 내에 유입된 것
  4. 약물이 인체의 혈액 내에 유입된 것
  5. 약물이 작용 부위의 세포에 유입된 것

정답은 제일 밑에 적어놨다. 근데 이걸 대부분 시민은 오해를 하기 때문에, 부연설명을 하고 설득해야 할 책임은 약사에게 있지 이걸 못 알아듣는 국민들 탓을 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억지 같으면 아예 오심(惡心)이란 단어를 생각해보자. 의약계열에 계시지 않는 분들 중에 이게 무슨 뜻인지 단번에 이해하시는 분이 과연 있을지 의문인데, 아직도 약상자 안의 설명서에 이런 단어를 쓰는 것이 있다. 대체 뭘 것 같으신가? 심(心)이 들어가니까 심장 부작용일까? 오심이란 nausea, 그냥 우리말로 메스꺼움이다.

근데 아직도 이걸 이걸 “오심·구토가 발생할 수 있다”고 적어둔다. “속이 메스껍거나 구토를 할 수가 있다”고 적으면 될걸. 이렇게 적어두고 시민들이 못 알아들으면 이게 대체 누구 탓이냔 말이다. ‘양심적 병역거부’의 양심이 뭔지 아는 입장에서 보면 웃길 수는 있는데, 그러면 용어를 바꿀 생각을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출처: 연합뉴스

참고로 위 문제의 답은 4. 혈액 내로 유입되는 것이다. 그래서 정맥으로 바로 찔러넣는 정맥주사는 약동학적으로 ‘흡수’ 단계가 없다.

원문: 한설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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