ㅍㅍㅅㅅ https://ppss.kr 필자와 독자의 경계가 없는 이슈 큐레이팅 매거진 Tue, 06 Feb 2024 12:00:47 +0000 ko-KR hourly 1 https://wordpress.org/?v=5.8.10 https://ppss.kr/wp-content/uploads/2015/07/ppss-100x100.png ㅍㅍㅅㅅ https://ppss.kr 32 32 안녕, 모든 에반게리온 https://ppss.kr/archives/245700 Mon, 06 Sep 2021 07:17:05 +0000 http://3.36.87.144/?p=245700 ※ 이 글의 작품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은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에서 한국어 더빙과 함께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그 외의 신극장판 시리즈 〈에반게리온: 서〉 〈에반게리온: 파〉 〈에반게리온: Q〉 또한 감상할 수 있습니다. 구작 TV 시리즈 〈신세기 에반게리온〉, 극장판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은 넷플릭스에서 시청 가능합니다.


에반게리온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주지의 사실은, 세기말의 음로론적 정서와 오타쿠 문화를 훌륭하게 결합해 서브컬처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작품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TV 시리즈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95년도에 방영을 시작해 97년도 극장판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으로 끝을 맺었다.

근 10년이 지난 2006년, 〈에반게리온: 서〉로 시리즈의 리메이크(제작사와 감독은 Rebuild로 불러 달라고 했다), 4부작 신극장판의 제작을 알렸다. 2009년 〈에반게리온: 파〉, 2012년(한국은 2013년) 〈에반게리온: Q〉로 이어질수록 매 편마다 극단적으로 변화하는 스타일과 전개에 평가는 크게 갈렸다. 그리고 9년이 지난 2021년에 이르러서야 마지막 완결편인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이 개봉했다.

신극장판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 〈에반게리온: 파〉.

필자가 에반게리온 시리즈를 처음 접한 것은 2009년 겨울이었다. 당시 〈출발 비디오 여행〉에서는 개봉하는 영화를 30초 동안 짧게 소개해주는 단막 코너가 있었는데, 거기서 〈에반게리온: 파〉를 소개해주는 영상을 보고 흥미를 느꼈고, 시리즈를 감상하며 팬이 되었다. 우습게도 당시 내 나이는 작중 주인공인 신지, 레이, 아스카와 똑같은 14살, 중학교 1학년이었다.

2013년 〈에반게리온:Q〉를 감상하고, 그 충격적인 전개에 경악을 금치 못했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완결편이 개봉하겠지 하고 생각을 했지만 개봉은 요원했고, 점차 관심 속에서 잊혀갔다. 이후 꽤 오랜 기간 동안 애니메이션에 흥미를 끊고 지내기도 했고 에반게리온 시리즈의 감독인 안노 히데아키가 2016년에 제작한 실사영화 〈신 고지라〉를 일본에서 감상하기도 했지만, 이 시리즈에 대한 감정은 추억, 애증 그 이상은 남지 않은 지 오래였다.

2020년 제작이 거의 완료되었고 개봉한다는 소식이 들려왔지만, 그다지 큰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뭐 개봉하면 극장 가서 봐주지 정도의 생각뿐. 코로나19로 인해 일본 국내 개봉도 연기를 거듭해 2021년 3월이 되어서야 겨우 개봉을 했다. 당시 현지 평은 예상외로 무척 호의적이었으며, 오히려 팬덤 내에서는 평가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양상이었고 평론가들의 평이 긍정적이라는 데에서 흥미를 느꼈다. 애니메이션을 멀리하고 살던 지난 몇 년 동안 내 미디어 소비는 주로 영화에 치우쳐 있었기에, 어쩌면 내가 만족할만한 결말이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기대했다. 그리고 국내에는 8월 13일에서야 아마존 프라임을 통해서 공개되었다.

최근 이번 작을 감상하기 전에 TV 시리즈 〈신세기 에반게리온〉부터 극장판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과, 신극장판 3부작을 모두 시청하였다. 철없던 14살에 봤던 이후로 처음 하는 재감상이었다. 당시의 나는 신지와 동갑이었지만, 지금은 미사토의 나이에 가까운 성인이 되었다. 때문에 당시에는 보지 못했던 많은 요소들을 이제야 볼 수 있었고 감상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확실한 건 14살짜리 어린아이에게는 너무 어려운 이야기였다는 사실이다.

왜 이렇게 개인적인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는지 의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뭐 내 글쓰기 스타일이 원래 그렇다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은 감독이 자신의 세계를 작품에 접목한, 자전적인 메타픽션에 가깝기 때문이다. 감독은 자신의 현실을 작품에 투영했고, 나 또한 내 현실을 작품에 투영할 수밖에 없었다. 애시당초 작품의 메시지부터가 현실에 대한 이야기였고 이번 작에서는 그게 더욱 노골적이다. 그러니 현실적 요소와 맥락을 완전히 배제한 본 작품의 비평은 기만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사도 ‘릴리스’. 노골적으로 종교적 상징을 차용했다. / 출처: 넷플릭스

에반게리온을 좋아하는 대다수의 팬들은 설정 하나하나를 분석하고 끼워 맞추며, 불친절하게 표현되는 극 중 서사를 명확하게 해석하려 하는 시도들이 대부분이었다. 수없이 많은 종교적, 철학적 메타포들을 접목해 그럴듯한 해석과 이론을 도출해내고는 했다. 그리고 나 또한 이러한 시도들을 즐기던 팬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감독은 그렇게 많은 걸 치밀하게 생각하고 계산하며 각본을 작성하지 않았고, 실제 제작 환경은 쪽대본에 가까웠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밝혀졌다. 신극장판 또한 다를 바 없이, 개봉을 1년 남짓 남기고 각본을 갈아엎고 연기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이는 신극장판 시리즈가 감독 본인의 자회사에서 제작하는 독립영화이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저런 분석론적인 접근이 무의미한 시도였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분명히 노골적으로 보이는 이미지들이 존재하고, 메타포들이 넘친다. 감독이 그를 의도하지 않고 넣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으며, 만약 있어 보이는 척하기 위해, 단순히 좋아하는 고전들의 오마주를 위해서 넣은 게 절대다수라 하더라도 그 모든 요소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허나 우리는 에반게리온 시리즈의 본질적인 테마는 자아와 성장, 관계, 소통에 대한 이야기임을 상기해야 한다. 이를 간과한 해석은 작품의 중심에서 한참 비껴난 것이다.

TV 시리즈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극장판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 즉 구작(이하 구작이라 통칭함)은 ‘껍질을 깨고 나아가라’, ‘너 자신을 찾으라’는 메시지였다. 미성숙하고 어린 주인공 신지, 어른스러워지고 싶은 아스카, 감정을 모르는 레이, 나이는 먹었지만 아이처럼 애정을 갈구하는 미사토, 여전히 과거 속에 갇혀 있는 겐도까지. 에반게리온을 대표하는 대사인 ‘도망치면 안 돼’라는 대사는 반복해서 나오지만, 신지는 자신으로부터, 아스카는 부모로부터, 레이는 인간으로부터, 미사토와 겐도는 과거로부터 계속해서 도망치는 것을 반복할 뿐이다.

주인공 신지, 레이, 아스카는 모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에바에 탄다. 얼핏 보면 자신이 원해서 타는 것 같은 아스카 또한 사실은 사회적인 압박에 의한 것이며, 이러한 주체성이 결여된 도피는 지하철, 하강하는 에스컬레이터, 엘리베이터 등의 이미지로 반복적으로 표현된다.

‘모두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라는 문구가 인상적인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 포스터.

작 중에서 말하는 인류 보완 계획, 서드 임팩트 같은 개념은 인간의 육체와 자아를 모두 LCL이라는 하나의 액체로 환원해 서로 간의 갈등이 없는 온전한 평화로운 세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구작에서는 서드 임팩트의 발현 직전, 신지 본인이 내면적인 성장을 이룩하면서 서드 임팩트가 중지되며 영화(엔드 오브 에반게리온)가 끝난다.

그 중간에 보이는 극장 관객들의 실사 촬영 영상, 현실의 길거리에 섞여 있는 레이와 아스카의 코스프레, 그리고 마지막 “기분 나빠”라는 대사까지. 진정한 자신을 찾으라는 메시지는 좋았지만 전달 방식이 너무 투박했으며, 결국 변화를 위해서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에 대한 방향성은 따로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안일하다는 인상 또한 있었다(그래서 더 좋았다).

신극장판 시리즈는 얼핏 보면 전개가 기존과 많이 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구작의 커다란 플롯은 꾸준히 답습했다. 〈에반게리온:서〉는 두말할 것도 없고, 〈에반게리온:파〉 또한 연출 톤이 변화했을 뿐 큰 틀에서는 차이점이 없으며, 시리즈의 중요한 변곡점이라고들 말하는 〈에반게리온:Q〉도 사실은 구작의 21–24화의 커다란 플롯에서는 크게 비껴가지 않는다. 이에 걸맞게 본작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 또한 TV시리즈의 25–26화, 그리고 극장판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플롯을 어느 정도 유지한다.

 

이하 스포일러 포함

극초반 뷜레의 파리 탈환 작전 이후, 영화는 초반의 50분가량을 니어 서드 임팩트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소중한 일상을 단조롭게 조명한다. 그 일상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전작들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따스함이 스며들어 있으며, 흡사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들을 떠올리게도 한다. 관객들은 그러한 일상 속에서 감정을 되찾게 되는 레이와 상처를 추스르고 다시 일어서게 되는 신지의 모습을 덤덤하게 지켜본다. 초반부터 에반게리온답지 않은 방식에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고, 감독의 내면적인 세계관이 크게 변화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후 전과 비슷한 상실을 겪지만 신지는 매우 빠르게 다시 일어서고, 도망쳤던 과거와 다시 마주하고 매듭을 짓기 위해 분더에 오른다. 지상에서의 소중한 일상을 경험한 신지는 비로소 전작에서 자신에게 크나큰 상처를 주었던 등장인물들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자신의 잘못을 똑바로 마주하며 사과의 말을 건네기도 한다. 이 시점에서 신지는 에바의 주박에서 벗어나 바카(바보), 가키(애송이)에서 어엿한 한 명의 성인으로 거듭난다.

그 뒤에는 여전히 이해하기 힘든 현학적 설정과 용어들이 나열되며, 훌륭한 퀄리티의 박력 넘치는 전투씬들이 전개된다. 하지만 이 시리즈의 전작들에서 에반게리온이 싸우던 목표는 사도, 적들이었지만 본 전투 시퀀스에서 파괴하고자 하는 대상은 네르프 본부, 에반게리온 그 자체라는 점에서 분명하게 다르다. 이 지점에서부터 영화는 기존의 에반게리온을 철저하게 해체하고자 시도한다. 그리고 신지는 마침내 자기가 계속해서 도망쳐오던 대상인 아버지, 이카리 겐도와 일대일로 마주하게 된다.

최종 전투씬은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양상인 듯하다. 특촬물의 오마주라는 점에서 보면 도움이 될 듯.

싸움의 배경은 여태까지 에반게리온 시리즈에서 등장한 주요 장소들이다. 이러한 장소들을 하나의 촬영장, 무대로써 정신적으로 구현한 세계 속에서 신지의 초호기와 겐도의 13호기가 맞붙는다. 1화의 에반게리온 케이지, 사키엘과의 결전 장소, 삼시엘과의 결전 장소, 미사토의 집, 2학년 A반, 레이의 방, 네르프 본부 등 작중 주요 무대들을 하나씩 부숴 나간다. 종국에 전투는 그들의 내면인 열차 내부에 도달한다.

전투 도중 겐도가 AT필드를 생성하면서, 사실은 겐도 또한 신지를 두려워했음이 밝혀진다. 에반게리온 시리즈 전체에서 신지와 겐도는 일대일로 터놓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다. 유이의 무덤 앞에서 잠깐 이야기를 나누긴 하지만, 이야기의 대상은 단지 어머니, 부인과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고 서로의 마음이 맞닿지는 못했다.

영화의 최후반 전투에서, 겐도는 자신이 왜 이러한 일들을 벌였고,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그리고 자신 또한 너랑 별 다를 바 없는 어린아이였다며 고백한다. 신지는 세상과의 단절, 아버지를 향한 결핍을 상징하던 카세트를 겐도에게 건네준다. 미사토의 희생으로 새로운 창이 신지에게 전해지고, 신지는 미사토의 죽음과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인다. 겐도는 자신만의 포스 임팩트를 마무리한 뒤 열차에서 내리며 이야기 속에서 퇴장한다.

노골적인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 라스트 씬의 오마주.

이제 신지는 작중의 주요 인물들과 직접 마주하며 못다 한 이야기들을 마무리한다.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마지막 씬과 똑같은 구도에서, 아스카에게 “고마워, 나도 너를 좋아했어”라며 구작에서는 차마 전하지 못했던 말을 건넨다. 그리고 에반게리온으로부터 아스카의 엔트리 플러그를 분리하며 아스카는 완전히 퇴장한다. 이후 〈에반게리온: Q〉 극 내내 신지가 의지하던 존재인 카오루에게도 진솔한 마음을 전하며, 카오루가 나가고 셔터는 닫힌다.

마지막으로 신극장판 시리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던 아야나미 레이가 남았다. 신지는 초호기의 엔트리 플러그 속에 녹아있던 레이에게 ‘너는 더 이상 에바에 탈 필요가 없다’라고 말한다. 그들 뒤편의 벽에는 신극장판 시리즈와 구작 시리즈의 컷, 타이틀들이 영사된다.

신지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 이야기하고(Neon Genesis), 이제 아야나미 레이 또한 퇴장한다. 모든 에반게리온 시리즈는 창에 꿰어지며 활동을 멈추고, 포스 임팩트는 중단된다. 이제 새로운 세계에서, 신지는 기존 에반게리온 시리즈의 인물과는 관계없는 신극장판 시리즈의 새로운 등장인물인, 마리와 함께한다. 이카리 신지의 에반게리온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분명 구작의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와 신극장판의 시키나미 아스카 랑그레이는 다른 인물임에 분명하지만, 아스카와 신지의 마지막 대화는 시키나미에게 솔직한 마음을 전하는 것을 통해 소류에게 속죄를 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이와 비슷하게 이번 영화의 수많은 시퀀스와 이미지들에서 구작의 기시감이 느껴지며, 구작에서 아버지에게, 미사토에게, 아스카에게, 레이에게, 카오루에게 하지 못했던 말들을 직접 전하며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 루프물임이 언급되기도 하지만, 그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가 에반게리온을 두 번, 아니면 그 이상 감상하듯이, 신지와 카오루도 몇 번의 반복을 해왔을 뿐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진심이 전해지느냐는 거다.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에서의 서드 임팩트의 결말은 비극에 가까웠지만, 신극장판에서의 포스 임팩트는 성공적으로 저지되었다. 그럼 이 둘의 차이는 과연 무엇인가. 신극장판의 신지는 일상의 소중함을 깨달았고, 사람의 따스함을 느꼈다. 감독 안노 히데아키는 동일본 대지진과 아내와의 만남을 통해 가치관의 변화, 개인적인 성장을 이룩했다.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서는, 성장하기 위해서는 내 솔직한 마음을 부딪혀야 된다고, 우리는 좀 더 서로 솔직해져야 될 필요가 있다고, 영화는 두 시간 반이나 되는 러닝타임 동안 줄기차게 이야기한다. 좀 전에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은 껍질을 깨고 나아갈 방법을 제시하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24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비로소 감독은 답을 찾을 수 있었지 않나 생각한다.

세트는 부서졌고, 등장인물들은 모두 퇴장했으며, 영사기는 꺼졌다. 지금까지의 에반게리온은 끝맺어졌지만 이제는 신세기 에반게리온(Neon Genesis Evangelion)의 시작이다. 당신이 내리자 문이 닫히고 열차는 떠났으며 에바의 주박(DSS 초커)은 풀렸다. 14세였던 소년은 어엿한 어른이 되었다. 어린 시절 에반게리온을 봐오던 우리는 과연 그 시절에 비해서 조금이라도 성장한 것일까. 이제는 우리가 계단을 뛰어 올라갈 차례다.

안녕, 나의 모든 에반게리온.

원문: 범수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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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날’이 간절한 지금 딱 맞춰 찾아온 위로, 〈소울〉 https://ppss.kr/archives/235260 Tue, 16 Feb 2021 05:05:39 +0000 http://3.36.87.144/?p=235260 삶에 관한 지혜를 전하려는 창작 작품들이 종종 선택하는 방법 중 하나는 이른바 ‘죽었다 살아나는’ 인물에 관한 이야기다. 이런저런 연유로 죽음의 목전까지 갔다가 다시 살아난 이야기, 더 나아가 직접적인 죽음을 맞았으나 역시 우리가 아직은 모르는 세계의 힘으로 인해 다시 삶을 얻게 되는 이야기들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사실 매우 단순하다.

삶은 어떤 이유로든 의미 있고 아름답다.

특별한 인생만이 의미 있고 중요한 삶이 아닐뿐더러, 목표를 이루거나 이루지 못하거나에 상관없이 삶은 그 자체로 모두에게 소중하고 의미 있다는 것이 이런 작품들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다. 그런데 이 메시지는 너무 단순하고 너무 당연하다고까지 여겨지는 탓에 평범한 전달 방식으로는 쉽게 그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이 메시지는 너무 진부해서 전달하는 데 커다란 공을 들이지 않으면 듣는 이에게 ‘그걸 누가 몰라?’라는 대답으로 돌아오기 일쑤다.

보통 이 단순하지만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많은 창작자들은 죽음이라는(정확히는 죽었다가 살아나는 판타지 성격의) 충격 요법을 동원하곤 한다. 〈업 (Up, 2009)〉과 〈인사이드 아웃 (Inside Out, 2015)〉을 연출했던 피트 닥터가 만든 픽사의 신작 〈소울 (Soul, 2020)〉 역시 그런 범주에 있는 작품이다.

전작 〈인사이드 아웃〉처럼 상상력을 동원해 만들어낸 태어나기 이전의 세계(메커니즘)는 이번에도 흥미롭다. 태어나기 전 영혼들에게 기본적인 성격이 부여되는 세상의 모습은 〈인사이드 아웃〉에를 나를 구성하는 뇌의 메커니즘을 구현했던 것과 비교하자면 세계관 이상으로 더 발전시키지는 않는다.

〉소울〉은 태어나기 전 세상에 존재하던 〈22〉와 우연히 이 곳에 오게 된 뮤지션 조 가드너를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둘은 가장 먼 지점에서 여정을 시작하지만 결국 같은 목적을 가진 여정이었다는 걸 알 수 있게 된다. 솔직히 말하자면 22와 조 가드너의 이야기가 완전히 동등한 형태로 양립한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조 가드너의 입장에서 더 자연스럽고 의미 있는 이야기로 성립되지만 22의 입장에서만 본다면 조금 내러티브가 부족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울〉은 결국 앞서 말했던 것처럼 단순하지만 가장 완벽한 삶의 지혜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데 이번에도 성공한다(이 영화를 제대로 봤다면 성공이라는 단어는 지양해야 옳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서도 누군가는 〈그걸 누가 몰라?〉라고 되물을지도 모르지만, 대부분은 그래도 이 영화를 통해 한 번 더 그 단순한 삶의 의미에 대해 잠시라도 돌아보고, 매일 지나쳤던 일상을 아주 잠깐이라도 한 장면 한 장면 들여다볼 기회를 가졌을 거다.

그런 의미에서 〈소울〉은 픽사의 전작들을 통틀어 가장 어른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작품이 아닐까 싶다. 삶은 지치고, 일상은 반복되고, 꿈은 어느새 포기해야만 하고, 하루하루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에 자책하고 실망하는 것이 잦아질 때 이 영화를 만난다면 ‘반복되고 뻔한 삶은 의미 없어’ ‘성공하지 못하는 삶도 괜찮아’ 같이 급격하게 모든 것이 단번에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달라질 게 없이 반복되는 삶일지라도 그 속에서 아주 작은 의미를 찾아내는 지혜를 얻을 것이다.

또 하나, 의도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영화 속에서 평범한 일상을 다르게 마주하는 장면은 지금 코로나 19로 평범했던 일상을 잃어버린 모두에게 특별한 의미로 전달될 수밖에 없었다. 아이러니하지만 지금의 코로나 시대는 굳이 죽었다 살아나는 판타지적 충격요법을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많은 이가 평범한 일상을 잃어버렸고 또 모두가 그 평범함을 간절하게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코로나 19라는 질병은 우리에게 아주 커다란 〈소울〉 같은 충격이 되지 않을까 싶다.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과 삶의 의미를 간절히 되돌아보게 되는 요즘, 〈소울〉은 부담스럽지 않게 내 삶을 위로하는 다정하고 생동감 넘치는 연주였다.

원문: 아쉬타카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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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배달부 키키”: 돌아갈 곳이 있는 소녀의 모험 https://ppss.kr/archives/224742 Fri, 11 Sep 2020 04:55:56 +0000 http://3.36.87.144/?p=224742 올해 초 넷플릭스를 통해 20여 편에 달하는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게 된 것은 코로나 시대의 행운이었다. 사상 초유의 입학 지연 사태로 인해 아이가 봄철 내내 학교에 갈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지브리까지 없었다면… 아이고야.

넷플릭스에서는 지브리 애니를 무려 21편이나 볼 수 있습니다! ^-‘)d

위기 속에서 지브리의 애니메이션 시리즈는 나름 대안학교의 역할을 충실히 해 냈다. 매일같이 보는 TV 애니메이션과는 사뭇 다른 컬러의 극장판 애니메이션이었기 때문에 두 아이 모두 꽤나 흥미롭게 이 여정에 참여했다. 어쩌면 지브리가 애니메이션을 통해 보여준 이야기의 풍광이 학교에서 보라 한 EBS보다 더 교육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이들이야 별 생각 없이 봤겠지만.

물론 아이들이 전편을 다 섭렵한 것은 아니다. 최근의 애니메이션 시청 경력으로 치면 이 꼬마 관객들이 나보다 몇 수 위다. 게다가 다른 곳도 아니고 우리 집 안방이다. 초반부터 주의를 확 잡아끌지 못하면 천하의 미야자키 하야오 할배도 별 수 없다. 그런 이유로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와 <추억은 방울방울>, <고양이의 보은>은 결국 끝내 정주행에 실패.

재밌는 건, 아들과 딸의 관람 성향이 묘하게 나뉜다는 것이다. 아들이 좋아하는 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하울의 움직이는 성>, 딸이 좋아하는 건 <마녀 배달부 키키>와 <마루 밑 아리에티>이다. 기준이 무엇인지는 불분명하다. 제각기 자신이 몰입할 수 있는 캐릭터가 다르니 그런 것일까…? 그저 옆에서 곁눈질하며 짐작할 뿐.

아이들이 좋아하는 영화나 애니메이션은 반복 강제 재방송이란 영광의(?) 자리에 오른다. 마녀 배달부 키키도 덕분에 꽤나 자주 집에 놀러 왔다. 영화를 보고 나면 둘째는 언제나 집에 있는 온갖 기다란 막대기를 다리 사이에 끼우고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나는 시늉을 한다. ‘아빠, 나 키키 같지?’ 하는 그 모습은 뭐.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이 땅의 모든 딸바보들이여, 그대들은 바보가 아니다!)

 

열세 살 키키의 고난: 어쨌든,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

부모 속 알 길 없는 열세 살 키키는 새로운 마을에 정착, 새로운 사람들을 사귀며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나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세상 모든 주인공에겐 다 고난이 따르는 법. 키키도 갑자기 마법 능력이 약해져 하늘을 날 수 없게 되는 상황에 처한다. 마법이라곤 ‘하늘을 나는 법’ 밖에 모르는데, 하늘을 나는 법을 잃어버리면 키키는 생업인 ‘우편 및 소포 배달’을 할 수 없게 된다. 시쳇말로 타지에서 굶어 죽게 생겼다는 이야기다.

어릴 때부터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날 수 있었던 키키는 갑자기 날지 못하는 자신과 마주한다. 잔뜩 힘을 준 채 ‘날아야지’하고 의식하는 순간 어깨에 힘이 들어가 고꾸라지기 일쑤다. 무리해서 날려다 하나밖에 없는 자산인 빗자루마저 부러진다. 보는 사람마저 애처로운 순간이다. (잔인한 미야자키 감독 같으니라고!)

키키가 다시 날 수 있게 되는 데는 화가 친구 우르술라의 격려가 큰 역할을 한다. 먼저 어른이 된 우르술라는 자기도 그림이 잘 안 그려질 땐 ‘미친 듯이 계속 그리고 그리고 또 그리거나’, ‘그림 그리기를 관두고 다른 것들을 하며 다시 그림이 그리고 싶어 질 때까지 기다리거나’ 한다며 키키가 마음을 다잡도록 조언해준다. 그리고 키키는 어려움에 빠진 또 다른 친구 톰보를 돕는 과정에서 결국 다시 날 수 있게 된다.

<마녀 배달부 키키>는 고난을 극복하며 어른이 되는 어린 소녀의 성장 스토리이지만, 사실 열세 살을 오래전에 훌쩍 넘어 버린 어른들도 살면서 거듭 비슷한 경험을 한다.

자전거 타기처럼 배우고 나면 몸에 각인되어 잊히지 않을 것만 같던 능력들조차도 어느 날 갑자기 몸속에서 마법처럼 사라져 버리는 경험, 다들 한 번쯤은 있지 않은가? 늘 쓰던 워드와 엑셀과 파워포인트의 텅 빈 화면에 무얼 채워 넣어야 하나 그저 막막하던 기억. 꽤나 오래 해온 일인데도 초보처럼 허둥지둥 우왕좌왕 실수 연발이라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을 때의 기억. 아니,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는데 이것도 못하면 어쩌나? 싶던 그 순간들. 날지 못하는 키키가 날려고 애를 쓸 때, 몇 개의 지나간 기억들이 가슴에 내리 꽂혔다. 키키가 힘차게 다시 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비례하여 커졌다.

그런데 그게 전부일까? 키키는 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날게 되었고, 영화가 해피엔딩으로 잘 끝나려는 순간, 키키 아버지는 우체부에게 키키의 편지를 전달받고 부리나케 집안으로 뛰어들어오며 소리친다.

여보, 키키한테 편지 왔어!

그제야 나는 깨닫게 된다. 키키에게는 고향에서 연락을 기다리는 부모라는, 자기도 깨닫지 못하고 있던 자산이 있었구나.

반복해서 본다는 게 이럴 때 좋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영화를 본다. 마녀는 열세 살이 되면 부모를 떠나 다른 마을에 가서 수행을 해야 한다는 설정이다.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키키가 갑작스레 부모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해맑게 이별 통보를 하는 장면을 빠르게 내보낸다. 그 당찬 목소리의 이별 통보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멈칫 멈칫했다. 이건 감독이 나빴다. 아니 왜 멀쩡한 애를 부모랑 생이별을 시키나? 고작 열세 살인데?!

딸과 함께 캠핑할 준비에 들떠있던 아빠는 갑작스레 어린 딸의 이별 통보를 받는다. 황망함도 잠시, 아빠는 아끼던 라디오를 선물로 건네주고, 아이가 어릴 때처럼. 아직 덜 무거울 때처럼 비행기를 태워주며 한 마디 건넨다.

우리 예쁜 딸이 어느새 이렇게 컸구나. 생각대로 안되거든 언제든 돌아오너라.

키키 아빠의 솔직한 심정은, 뒷 문장에 더 담겨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한 마디가 우르술라와 톰보에 이어 키키를 다시 날 수 있게 한 마지막 열쇠가 아니었을지. 잘 안돼도 언제든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 설사 날지 못하는 키키가 되더라도, 엄마 아빠로부터 사랑받는 소중한 딸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으니까.

젊은 혈기를 주체 못 하고 거실을 뛰어다니며 우당탕탕 난리 치는 아이들을 바라본다. 아이들이 다 커서 이곳을 떠날 때까지 나는 그만한 안정감을 심어줄 수 있을까? 어른이 되어 세상에 나가 때론 좌절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뭐, 정 못 날겠으면 집에 가면 되니까’ 하며 힘 빼고 다시 도전할 수 있을 정도의 마음, 딱 그만큼의 따뜻함을 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자산으로 남겨줄 수 있을까 생각한다.

‘생각대로 안되면 언제라도 돌아오라’라고 등 두드려주는 아빠가 되는 것, 아무리 상상해도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마녀 배달부 키키> (1989) / 출처: 네이버 영화

원문: 자민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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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의 네 작품을 통해 보는 애니메이션 산업의 미래 https://ppss.kr/archives/220931 Wed, 22 Jul 2020 08:01:13 +0000 http://3.36.87.144/?p=220931 CGI의 시대, 애니메이션은 어떻게 독자 영역을 확보할 것인가?

2019년은 유난히 인상에 깊게 남는 애니메이션이 많았던 해였다. 특히 아래 네 작품은 그 자체로는 서로 공통점이나 관계가 거의 없지만, 좀 더 거시적인 차원에서 중요한 공통점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틈틈이 메모를 남겨 놨었다. 이 글은 그 메모를 정리해서 쓴 글이다.

우선 여기서 애니메이션이라 함은 TV 아니메를 제외하고 극장 개봉을 위해 만들어진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에 한함을 미리 언급해 두겠다.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2018). 소니는 이 영화 하나로 그동안 스파이더맨 시리즈와 그 팬들에게 저지른 모든 죄를 씻어냈다.
〈배트맨 닌자〉(2018). 연출과 작화만으로 이 목록에 끼었지만, 사실 이 작품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괴작이다.
〈겨울왕국 2〉(2019). 전작 〈겨울왕국〉(2013)은 디즈니가 기존 서사 중심에서 캐릭터 중심으로 작품의 축을 옮겨감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본문에서 언급할 연출의 측면과 함께, 확실히 〈겨울왕국〉 시리즈는 전통적인 디즈니의 작품과는 다른 면이 있다.
〈날씨의 아이〉(2019). 본문에서는 연출만 언급하게 됐지만, 이 작품은 신카이 마코토의 문제의식과 메시지가 변했다는 점에서 훨씬 더 인상적이었다.

〈슈렉〉과 〈치킨 리틀〉을 거치며 애니메이션 영화라고 하면 당연히 3D 애니메이션을 지칭한 지도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2010년 초반에 이르기까지도 3D 애니메이션의 최대 목표는 존재하지 않는 환상적 대상을 실사에 가깝게 구현하는 것이었고, 그에 따르는 시각효과 역시 실사영화의 범위를 굳이 넘으려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배우를 액터(actor)에서 마이머(mimer)로 바꿔버릴 정도로 CGI가 영화의 보편적인 기법으로 자리 잡고, CG 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의 구분이 무의미한 상황이 오자 애니메이션의 시각효과들이 실사의 한계를 완전히 떨쳐버린 듯하다.

 

코믹스의 연출 기법을 활용한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와 〈배트맨 닌자〉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와 〈배트맨 닌자〉에서 이런 연출은 코믹스의 복권으로 나타났다. 〈토이 스토리〉 이후 그간 3D 애니메이션은 코믹스와 별개의 영역을 구축한 줄 알았는데(특히 디즈니의 작품들), 실사의 한계를 넘자 코믹스의 연출과 효과를 적극적으로 구현하는 것으로 통합을 이루어낸 것이다. 물론 여기서 코믹스는 본질이 아니라 하나의 도구에 가깝다.

〈배트맨 닌자〉는 카툰 렌더링으로 3D로 2D를 흉내 냈지만, 한편으론 그 자신이 3D임을 숨기기는커녕 때로는 위화감을 줄 정도로 3D 효과를 노골적으로 내세운다. 때로는 일본 전통화 기법을 효과로 삼는가 하면, 특정 순간에는 아예 완전한 2D로 전환하기도 한다. 분명 과거의 어느 시기였다면 위화감을 이유로 쓰이지 않았을 기법들이 점차 사용되는 것이다.

물론 이 두 작품은 애초에 코믹스를 원작으로 한 실험적인 작품이었단 평가도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막상 2019년 하반기에 다른 두 작품을 보며 생각이 바뀌었다. 〈겨울왕국 2〉와 〈날씨의 아이〉는 어떤 식으로 보나 앞의 두 작품과 그리고 서로서로도 완전히 다른 성격의 작품이다. 특히 〈겨울왕국 2〉는 그간 디즈니, 픽사의 전통을 충실히 따르며 특별한 기교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3D로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날씨의 아이〉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전통을 충실히 따르는 2D 작품이라는 점에서 분명히 다르지만 또 한편으로는 공통점이 있다.

코믹스의 연출 기법 자체는 이미 〈킬빌〉과 같은 실사영화에서도 응용된 적이 있다. 하지만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에서는 기존 코믹스의 사용자 경험과 애니메이션을 통합했다는 점에서 단순한 연출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겨울왕국 2〉는 이전의 정적이고 실사의 물리법칙을 가능하면 따르려고 했던 디즈니와 픽사의 전통적인 시각효과에 비하면 확연히 화려하고 인공적이다. 특히 얼음 결정이나 나뭇잎이 흩날리는 장면을 〈주토피아〉, 〈모아나〉, 〈토이 스토리 4〉와 대조한다면 훨씬 이해가 쉬울 듯하다. 사실 이는 〈겨울왕국〉(2013)에서도 이미 나타났던 바이긴 한데, 이제 점차 이런 종류의 애니메이션이 주류가 되어 간다는 흔적으로 접근할 수 있겠다.

 

핵심은 실사 CGI와 구분되는 특유의 연출

〈겨울왕국 2〉는 이전의 정적이고 실사의 물리법칙을 가능하면 따르려고 했던 디즈니와 픽사의 전통적인 시각효과에 비하면 확연히 화려하고 인공적이다. 특히 얼음 결정이나 나뭇잎이 흩날리는 장면을 〈주토피아〉, 〈모아나〉, 〈토이 스토리 4〉와 대조한다면 훨씬 이해가 쉬울 듯하다. 사실 이는 〈겨울왕국〉(2013)에서도 이미 나타났던 바이긴 한데, 이제 점차 이런 종류의 애니메이션이 주류가 되어 간다는 흔적으로 접근할 수 있겠다.

이런 경향은 이미 신카이 마코토에게서는 사실 2010년부터도 충분히 나타났었다. 신카이 마코토의 강점은 빛을 사용한 화려하고도 다채로운 풍경과 배경 묘사인데, 사실 이 효과의 대부분은 고전적인 2D 애니메이션이 아닌 CG로 구현된 것이다. 〈너의 이름은.〉을 거치며 신카이 마코토식 연출이 일본에서도 점차 주류가 된다는 점은 한편으로는 이런 ‘특유 연출’의 중요성과 보편성을 보여준다.

이런 게 애니메이션의, 무엇보다 신카이 마코토의 ‘특유 연출’이다.

긴 이야기였지만 결국은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을 듯하다: 스크린숏이 바로 하나의 작품이 될 수 있을 만큼 화려하고도 특이한 연출이 늘어났다. 그 연출은 주로 시각효과 차원인데, 과거에는 위화감을 이유로 잘 사용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 위화감을 하나의 장치로 사용한다. 사실 〈아바타〉에서 〈어벤져스: 엔드게임〉에 이르기까지, 이미 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의 구분은 무의미해졌다.

기술적으로는 실사영화에서도 충분히 가능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애니메이션은 기존 실사의 한계를 떨치고 애니메이션에서만 가능한 특별한 연출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그렇지 않으면 애니메이션이 이제 별개의 장르로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조금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2019년 TV 아니메의 최대 히트작인 〈귀멸의 칼날〉 역시 비슷한 관점으로 접근할 수 있겠다.

바로 저 하늘의 묘사가 이 글에서 이야기하려는 연출의 핵심이다.
원작자가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바로 그 장면.

 

애니메이션과 애니메이션 산업의 미래

이들 네 작품의 또 다른 공통점으로는 프랜차이즈라는 점을 꼽을 수 있겠다. 물론 프랜차이즈화는 애니메이션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장편 영화뿐만 아니라 미디어 산업 전반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런데 영화에서 CGI의 비중이 커지는 건 한편으론 프랜차이즈화를 가속화하기도 했다. 왜냐면 CGI는 비싸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웬만한 장면을 CG로 만드는 것보다 그냥 직접 찍는 게 더 싸다고 하겠는가.

특히 3D로 오면서 오브젝트의 정밀성과 필요한 렌더링이 추가될 때마다 그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애초에 애니메이션 산업 자체가 사람을 연료로 움직였지만, 앞으로는 필요한 최소 연료의 양은 지속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사실 사람뿐만 아니라 다양한 기술과 장비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인디·독립 3D 애니메이션을 극장에서 보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점점 어려워지지 않을까.

히어로 영화의 기록적인 성공 이후 애니메이션이 주류가 되는 세상이 올 거란 예측도 있었다. 마블과 디즈니, 그리고 지브리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기법과 매체로서의 애니메이션은 여전히 비주류로 머문다. 역으로 CGI가 보편화하며 애니메이션의 독자적인 정체성에 의문이 제기되는 상황이 왔다. 그렇다면 CGI의 시대, 애니메이션은 어떻게 독자 영역을 확보할 수 있을까? 결국은 원점으로 돌아가는 데 있다고 본다.

대공황 즈음해서 애니메이션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때 그 원동력은 무엇보다 실사 촬영으로 도저히 표현해낼 수 없는 장면을 보여주었다는 데 있었다. 이후 애니메이션 산업에서 로봇물이 큰 인기를 끈 것도 이렇듯 현실의 제약을 벗어난 덕택이 컸다. 하지만 〈트랜스포머〉에 과거의 구현은 그 의미를 잃어버렸다.

그렇기에 애니메이션은 앞으로 표현이 아닌 환상과 상상 그 자체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실사 촬영이 할 수 없는, 하지 않는, 또는 할 필요가 없는 영역을 적극적으로 발굴할 필요가 있다. (물론 서사와 연출에 관한 내적인 완성도는 당연한 기본 전제다.) 그리고 위 네 작품은 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과연 앞으로의 애니메이션은 독자적인 정체성을 다시금 확보해낼 수 있을까?

인사하는 쥐는 옛날엔 애니메이션으로만 표현할 수 있었으니까요.

원문: 김고기의 영화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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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왕국〉의 엘사가 관계에 대하여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 https://ppss.kr/archives/208266 Mon, 02 Dec 2019 07:25:40 +0000 http://3.36.87.144/?p=208266 〈겨울왕국〉(2013)을 해석하는 방법은 참 많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이 영화가 항상 회피형 애착을 가진 사람의 속마음을 탁월하게 그려낸 영화로 비쳤습니다. 오늘은 그 얘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애착유형을 갖습니다. 애착유형이란 부모, 연인, 친구 등 타인과 정서를 교류하는 방식을 뜻해요. 대개 생후 12개월 안에 결정되며, 양육자와의 관계에 큰 영향을 받죠. 애착유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는데 바로 안정형, 불안형, 회피형입니다. 이 중 회피형은 연애할 때나 다른 친밀한 관계를 맺을 때 다른 사람과 지나치게 가까워지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거부하며, 자신만의 공간을 필요로 하는 유형입니다.

이 글을 읽고 나서 다시 한번 〈겨울왕국〉을 보면 문장이나 단어 하나하나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깃들어 있는지 깨닫고 놀라실 거예요. 또 어쩌면 여러분이 왜 자꾸만 연애에 실패하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될지도 모릅니다. 아직 〈겨울왕국〉을 보지 않은 분은 본문에 결말을 포함한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하세요!

 

마음은 하나가 아니다

사실 우리 내면에는 하나의 마음만 있는 게 아니죠. 예를 들어 ‘라면을 먹고 싶은 마음’과 ‘살을 빼고 싶은 마음’이 부딪히는 건 늘 있는 일입니다.

영화의 공간적 배경인 아렌델 왕국이 한 사람의 내면세계라고 생각해보세요. 국왕 부부, 엘사, 안나, 올라프 등은 우리 내면에 공존하는 서로 다른 욕망과 방어기제를 상징합니다. 마치 〈인사이드 아웃〉에서 기쁨이, 슬픔이, 소심이 등이 서로 다른 감정을 상징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우리에게는 누군가를 가까이하며 깊이 사랑하고 또 사랑받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애착 욕구가 있습니다. 그런 반면 상처 입고 싶지 않아서 상대를 밀어내고 회피하려 하는 마음도 있죠. 〈겨울왕국〉에서 안나는 전자, 엘사는 후자의 상징입니다.

상처에 대한 두려움(엘사)이 강하게 발달해 자연스러운 애착(안나)을 억누르는 방어기제가 된 것이 바로 회피형 애착유형이죠. 그래서 엘사의 강력한 마법을 중심에 두고 진행되는 이 이야기는 전형적인 회피형의 마음을 배경으로 한다고 볼 수 있는 거예요.

 

첫 번째 상처

우선 영화 첫머리부터 보죠. 엘사와 안나는 어릴 적 사이좋은 자매였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엘사는 모든 걸 얼어붙게 만드는 자신의 힘으로 안나를 다치게 하고 말았죠. 인생 최초로 친밀한 관계 속에서 마음의 상처를 입은(혹은 입힌) 경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린 회피형이 처음으로 ‘친밀감은 위험하다’고 느끼는 순간이죠.

안나를 치료한 지혜로운 트롤 족장은 엘사의 능력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 힘에는 아름다움이 있지만 또한 위험하기도 합니다. 두려움이 공주의 적이 될 것입니다.

엘사의 능력은 벽을 세우고 얼려 버리는 능력입니다. 타인을 배척하고 자신을 가두는 종류의 힘이죠. 고독하고 품위가 있기에 아름답지만, 결국은 마음을 고립시키는 탓에 위험하기도 한 것입니다.

엘사와 안나의 아버지인 국왕은 엘사가 힘을 통제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성문을 닫고, 두 자매가 외부인을 만나지 못하도록 합니다. 또한 엘사는 안나에게 능력을 숨기고 더 이상 방에서 나오지 않게 돼요. 회피형이 상처를 피하기 위해 마음을 닫고 아무도 들이지 않기로 결심하는 장면입니다.

회피형 애착을 가진 사람은 마음이 흔들리는 상황을 극구 피하려 합니다. 타인에게 감정적으로 휘둘려 자신이 통제력을 잃는 상황을 극도로 싫어하죠. 닫힌 문과 장갑은 그런 회피형이 사용하는 방어기제의 상징입니다. 엘사에게 장갑을 주면서 국왕은 이렇게 말하죠.

숨기고, 느끼지 마라.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마라.

정말이지 회피형의 좌우명처럼 보이는 대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마음은 닫힌 방

국왕 부부는 굳게 닫힌 성안에 자매를 남겨두고 사고로 세상을 떠납니다. 이는 한번 자리를 잡은 회피형 방어기제가 사라지지 않고 계속 마음에 남아 있는 상황을 뜻합니다.

텅 빈 성에서 안나는 외로워하며 몇 년이고 엘사의 방문을 두드리다 결국 포기하고 맙니다. 방어기제가 자연스러운 애착 욕구를 내면 깊숙이 억눌러 버리는 데 성공한 거죠. 하지만 곧 운명의 날이 찾아옵니다. 바로 엘사가 여왕으로 즉위하는 대관식 날입니다. 이날 엘사는 마침내 성문을 열고 안나와, 그리고 ‘진짜 살아 있는’ 사람들과 처음으로 마주합니다.

대관식은 이를테면 회피형의 첫 연애라고 생각해볼 수 있어요. 오랫동안 자신을 꽁꽁 가둬놓았지만 마침내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어보기로 한 거죠. 사랑을 원하는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처음으로 직시하는 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처음으로 마음을 내주었으니 당연히 서툴고 경솔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에 목말라 있던 안나는 이날 초면인 왕자에게 순식간에 마음을 빼앗기고 청혼까지 받아들이고 맙니다.

왕자와 안나의 듀엣곡 제목인 〈사랑은 열린 문〉은 엘사의 닫힌 방과 대비됩니다. 여기서도 성문은 중요한 상징으로 드러나죠. 파티에서 안나는 엘사에게 “앞으로도 계속 오늘처럼 성문을 열어뒀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엘사는 “나도 그러고 싶지만 안 돼”라고 대답합니다.

“왜? 왜 안 된다는 거야?”

“그냥 안 돼!”

이것이 무의식의 방어기제들이 작동하는 방식이에요. 논리로 풀려고 해서는 도무지 들어먹질 않습니다.

엘사의 표정에 깃든 생생한 고통과 두려움을 알아볼 수 있으신가요? 결국 엘사는 사랑을 원하는 안나를 거부하고, 능력까지 들키고 맙니다. 마음을 열어보려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죠. 어릴 때 입은 첫 상처에 이은 두 번째 상처입니다.

 

Let It Go

엘사는 황급히 왕궁에서 달아납니다. 그러면서 뜻밖에도 아렌델 왕국에 끝나지 않는 겨울을 불러오게 돼요. 한때 풍요로웠던 아렌델 왕국은 이제 사철 눈이 내리는 얼어붙은 땅이 됩니다. 누구도 다치지 않게 하려 했던 엘사에게는 아무 나쁜 뜻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두려움 탓에 엘사는 자신의 모든 관계를 얼어붙게 만들고 말았던 거죠.

도망친 엘사는 더 이상 자기 능력을 억누르지 않아도 된다는 걸 깨닫고 장갑을 벗어 던집니다. 그리고 감춰 왔던 자신의 힘을 마음껏 펼쳐 보이기 시작하죠. 이때 나오는 노래가 바로 그 유명한 ‘Let It Go’예요. 무엇을 의미하는 장면일까요? 저에게는 성장한 회피형이 자신의 성향을 합리화하는 장면으로 보였습니다.

엘사의 미숙한 마법은 진정한 사랑과 반대되는 능력, 곧 사랑을 거부하는 능력입니다. 그 능력을 마음껏 해방하면 결과가 어떻게 되겠어요?

엘사는 화려한 얼음 성을 세워서 자기 자신을 고립해버립니다. 그렇게 하면 소중한 동생과 자신의 왕국이 안전할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말이죠. 타인과 가까워지면 어차피 상처만 입으니 아예 모든 사람에게 벽을 세우면 나쁜 일도 없어진다고 여기게 된 거죠. 아주 단단히 착각한 거예요.

이 생각이 착각인 이유는, 타인에게 벽을 세우는 방법으로는 상처를 입지 않을 수는 있어도 결코 행복해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세 애착유형 중 회피형의 관계 만족도와 행복 수준이 가장 낮은 것이 바로 그런 이유죠. 이 착각은 모든 회피형이 공유하는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으면 절대로 불행해지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는 바로 그 사고방식이에요.

그러므로 사실 ‘Let It Go’는 흔히 생각하듯 자유로운 본래의 자신을 해방하는 노래가 아닙니다. 모든 애착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미성숙한 방어기제를 상징하는 노래죠.

 

그림자가 온다

엘사가 얼음 성을 짓고 나서 미소 지으며 문을 쾅 닫아버린 것은 어릴 때의 성문 닫기, 즉 회피형 행동을 반복한 것입니다. 얼핏 멋있고 능동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성이 얼음 성으로 바뀌고 드레스를 갈아입었을 뿐 똑같은 방어기제를 계속 사용하는 거예요.

분석심리학에서는 마음의 한 부분을 외면하고 억압할수록 그 힘은 더욱 강해진다고 가르칩니다. 이때 억눌린 부분을 통틀어 ‘그림자’라고 부릅니다.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도 짙어지니 정말 지혜로운 비유라고 해야겠죠.

억눌러 놓은 애착 욕구, 즉 안나가 끝끝내 얼음 성까지 찾아간 것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엘사가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안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아요. 그림자를 극복하는 방법은 애써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바른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엘사는 그러지 못하는 거죠.

 

고통스러운 깨달음

눈사람 올라프와 크리스토프의 도움으로 마침내 얼음 성에 도달한 안나. 엘사는 안나에게 진실을 듣게 됩니다. 자신만 도망치면 아렌델 왕국은 평화로울 거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온 땅이 얼어붙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예요.

심하게 절망한 엘사는 안나에게 어서 자신을 남겨두고 떠나라고 종용합니다. 사실 그런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으면서도 말이죠. 자기가 왜 그러는지도 모른 채 고장 난 기계처럼 평소에 쓰던 방어기제를 필사적으로 반복하는 거예요.

이때 잠시 통제를 벗어난 엘사의 힘이 안나의 심장을 얼려버리고 맙니다. 엘사는 그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이번엔 거대한 눈 괴물을 불러내어 안나 일행을 쫓아냅니다.

이 눈 괴물은 사랑을 원하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때려눕히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회피형은 사랑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제대로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에 그 마음을 두들겨 패고 내쫓고 외면하고 ‘문을 잠가’ 버리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래야만 마음이 다치지 않을 거라 여기기에 하는 일이지만, 사실 마음은 우리가 그렇게 가혹하게 굴 때 더 심하게 다치는지도 모릅니다.

 

올라프가 알려주는 것

〈겨울왕국〉에서 인간이 아닌 캐릭터들, 즉 올라프(눈사람), 트롤 족장, 스벤(순록) 등은 비슷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바로 스승이자 안내자의 역할입니다. 제작진의 메시지를 전해주는 대변자이기도 하죠. 그래서 이들의 말을 잘 들어보면, 따스한 아렌델 왕국을 되찾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올라프는 ‘여름을 좋아하고 따뜻한 포옹을 원하는 눈사람’이라는 아이러니한 설정입니다. 또 엘사와 안나의 관계가 단절되기 전엔 어릴 때 같이 놀면서 만든 눈사람이기도 합니다.

이 대사는 올라프가 음양의 두 성질을 한 몸에 가진, 좀 어려운 말로 ‘대극의 합일’을 상징하는 존재라는 점을 알려줍니다. 여름과 겨울, 안나와 엘사, 이 두 극단을 이어주고 섞어주고 조화시켜 주는 존재가 올라프인 거죠.

조화로운 왕국(마음)을 되찾으려면 양극의 균형을 추구해야 하고, 여름을 되찾고 싶다는 이유로 겨울을 없애려 들어서는 안 됩니다. 엘사가 너무 강해져도 곤란하지만 우리 마음에는 꼭 엘사가 필요해요. 타인과 경계를 긋지 못하는 사람, 마음에 아무 장벽도 없는 사람 역시 마음의 병을 앓는 환자이기 때문이죠.

이처럼 관계를 냉각하는 방어기제 자체를 악마화하는 것도 옳지 않은 길이라는 걸 영화는 또렷하게 보여줍니다.

 

진정한 사랑의 행동

그럼 올라프에 이어서 이번엔 숲속의 지혜로운 종족 트롤들의 말을 들어볼까요?

안나 일행은 ‘진정한 사랑’이라는 말을 듣고는 왕자의 키스를 받아야 한다면서 급히 성으로 돌아갑니다. 만약 〈겨울왕국〉이 전통적인 동화 서사를 그대로 재현하는 야심 없는 영화였다면 아렌델은 왕자와 안나의 사랑 덕분에 정상적인 계절을 되찾았겠죠. 하지만 성에 있던 왕자는 사실 악당이었음이 드러납니다. 그러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사랑의 행동은 무엇일까요? 영화 후반에서 올라프가 간단한 한마디로 가르쳐줍니다.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을 위해 내 몸이 녹더라도 그럴 가치가 있는 거야.
Some people are worth melting for.

바로 이게 영화 〈겨울왕국〉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기꺼이 자신이 다칠 위험을 감수하는 것, 이것이 회피형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는 열쇠라는 거예요. 회피형 방어기제를 상징하는 엘사는 상처를 피하기 위해 도망치고 또 도망쳤지만, 사실 우리 마음은 상처 입을 위험을 수용했을 때 진정한 관계 속의 풍요로움을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풍요로운 왕국

〈겨울왕국〉은 회피형의 내면에서 활동하는 두 가지 마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애착과 친밀감을 원하던 안나는 상처를 두려워하던 엘사가 사랑의 힘을 깨닫도록 이끕니다. 덕분에 왕국, 즉 회피형의 내면세계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구원을 얻죠.

이렇게 애착 욕구가 해소되자 억눌려 있던 심리 에너지는 건강한 방향으로 발산되기 시작합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엘사는 왕성 한가운데서 힘을 발휘해 모두가 즐겁게 놀 수 있는 스케이트장을 만들어냅니다. 한때는 자신을 고립시키는 데 사용했던 힘으로 이제는 사람들에게 행복과 웃음을 주는 거예요. 그렇게 저주가 축복으로 전환되면서 〈겨울왕국〉은 해피 엔딩을 맞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마음이 얼어붙은 채 10년, 20년을 보내고서야 회복의 계기를 찾거나, 혹은 평생을 관계에 실패하며 보내는 일도 드물지 않아요. 만일 그런 비극이 여러분 자신의 이야기 같다면, 〈겨울왕국〉이 던지는 메시지가 해결의 실마리가 되어줄지도 모릅니다.

 

마치며

혹시 여러분의 애착유형은 무엇인지 알고 싶나요? 애착유형에 따라 달라지는 연애 해결책이 궁금하신가요? 지금 연애의 과학 앱에서 확인해보세요.

원문: 연애의 과학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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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학도 출신이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경영하는 방법: ‘창의성을 지휘하라’ https://ppss.kr/archives/189679 Mon, 18 Mar 2019 03:17:20 +0000 http://3.36.87.144/?p=189679 경영에 필요한 스킬셋은 뭘까요. 경영은 르네상스형 인간이 필요한지라 꼽자면 한도 없지만, 저라면 하나씩 소거해 나가도 마지막까지 들고 있을 하나는 ‘인간에 대한 통찰‘입니다. 재무나 전략으로 단기적인 성과를 낼 수는 있지만, 결국 그걸 이뤄내고 지켜내고 더 키우는 건 항상 ‘사람’을 통해야 하니까요. 사람만 잘 안다고 사업이 저절로 되지 않겠지만, 이 부분이 부족하면 항상 한계를 노정하거나 추락을 경험합니다.

그런 면에서 창의성이 유일한 핵심 역량이 될,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이야기는 인간 경영의 가장 깊은 고민이 녹아 있는 사업입니다. 에드윈 캐트멀(Edwin Catmull)은 평생을 이 부분에 대해 고민하고 실험하고 실패에서 배워가며 실전 연구를 했습니다. 결과로 17년간 내놓는 작품마다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는 괴력의 조직적 창의성을 달성했습니다. 그 내용을 담담히 적은 책입니다.

〈토이 스토리〉처럼 우리가 아는 유명한 애니메이션 제작 과정이 책의 줄기를 잡아주어 흥미를 잃지 않고 이야기를 따라갑니다. 그러나 화려한 겉모습의 뒷면이 인상적이지요. 회사가 언제 망할지 살아날지 기약도 없이 만든 〈토이 스토리〉를 비롯해 제작 시스템의 실패로 다 갈아엎고 작품의 퀄리티라는 회사의 가치에 천착해 흥행뿐 아니라 회사의 문화까지 건져낸 이야기는 흥미 이상입니다. 결과로 보면 쉽지만, 당면했을 때는 수많은 선택지에서 골라야 하는 어려운 결정이니까요.

캐트멀의 내공은 단단합니다. 예컨대 실행하지 않는 구호성 비전은 가방에서 떨어져 나온 손잡이 같다는 표현은 이것만 고민하지 않은 사람은 쉽게 떠올리기 어려운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또 균형은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동적인 밸런싱이라는 말에 저는 무릎을 탁 치며 공감했습니다.

픽사 초기에는 창의성을 극대화하는 방법에 신경을 썼다면, 후기에는 커진 조직에서의 창의성을 유지하는 방법이 주된 고민이었던 캐트멀입니다. 사람은 많아지고, 의견은 다양한데, 전에 나온 모든 작품이 개봉 첫 주 박스오피스 1위를 달성하는 엄청난 기록이 후배에게 주는 중압감. 이 속에서 창의성은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고민스러운 상황이지요.

결국 공포의 해결과 소통, 신뢰라는 일견 평범한 답이지만, 이를 어찌 실행했는지가 눈여겨볼 부분입니다. 경영진이 솔선수범하고, 비전과 방향성을 일관되게 적용하되 직원의 자발적 참여를 이끄는 다양한 트리거는 한 경영 천재가 슥슥 그린 도안이 아닙니다. 공학도 출신이 경영이란 책임을 떠맡아 가설과 실험과 분석이라는 틀 위에서, 벽돌 하나하나를 손에 피가 배어가며 쌓아 올린 건물 같은 맥락에서만 이해됩니다.

픽사 유니버시티를 통해 직급이나 부서를 넘는 약한 고리(weak link)를 만든 점과 고용계약에 대한 새로운 관점도 제겐 배움이었습니다. 계약 기간이 존재하면 상사는 저성과 직원이 있어도 고용계약의 만료까지 기다립니다. 저성과 직원은 영문도 모르다가 계약 종료 직전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게 되지요.

반면 우수한 직원이라면 회사는 계약 기간 이전이라도 잡으려고 더 노력하고, 직원도 회사가 좋아 자발적으로 남으면 만족도가 올라가기 때문에 고용계약은 회사에 실일 뿐 득이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캐트멀의 회사는 고용계약서를 작성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제가 스타트업 대표와 이야기할 때 ‘창업자는 회사의 영혼’이라는 표현을 자주 하는데 그걸 몸소 보여준 캐트멀입니다. 모르몬교의 구도자적 성실성으로 한 조직에 바친 생애는 최고의 창의성 조직인 픽사로 물화했습니다. 책을 읽으며 많이 배우고 같이 기뻐할 수 있는 건 저자의 자세가 한결같이 프런티어적이라서 그럴 것 같습니다.

기억해두고 싶은 말

스토리가 흡인력 있으면, 와이어 프레임 상태로 잠깐 나타나도 관객은 눈치를 못 챈다.

픽사는 기술 회사가 아니라 스토리 회사다.

신뢰는 공포의 해독제다.

경영자의 임무는 리스크 예방이 아니라, 직원의 회복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의도가 유지된다면, 목표는 바뀔 수 있다. 그 반대가 아니다.

창의성은 무관한 아이디어의 예상치 못한 결합이다.

문제도 예상할 수 없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인간의 능력도 예상하지 못한다.

임의성을 처벌하지 마라. 다음에는 숨긴다.

창의성의 적은 둘이다. 착각과 고정관념이다.

픽사가 돈도 안 되는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이유는 두 가지다. 새로운 기술의 실험과 신인의 검증.

책에서 잡스를 다시 만나는 재미도 상당합니다. 픽사의 소유주이자 코파운더이기 때문에 캐트멀은 잡스와 오래 알고 지냈습니다. 잡스는 죽기 전 세 가지 소중한 것을 말했다고 합니다. 가족, 애플, 픽사. 오만한 청년 시절부터 죽기까지 픽사의 수호자이자 영혼을 불어넣는 데 도움을 줬던 잡스입니다. 그리고 캐트멀만큼 그를 잘 아는 사람도 많지 않지요.

캐트멀과 잡스, 그리고 존 래시터

공격적 언사를 소나(sonar)처럼 쏘던 오만한 천재가 원숙한 천재로 변해가는 내용을 접하는 것도 의외의 기쁨입니다. 특히 잡스에 애정을 갖고 이야기들을 탐독하는 제겐 선물 같은 즐거움이었습니다. 마지막에 한 챕터를 특별히 할애해 잡스에 정통한 시각의 모습 그리고 마지막 함께 보낸 시간을 읽을 땐 마음이 뜨거워질 지경이었지요.

 

Inuit Point ★★★★★

최고의 전략은 논문으로 발표해도 남이 따라 하지 못하는 실행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책의 내용 중 한두 개 마음에 드는 걸 따라 해도 약간의 개선은 있겠지만 지속 가능하고(sustainable) 포괄적인(holistic) 모방이 아니면 큰 효과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경영의 지침으로는, GE 이후로 이렇게 재미나게 읽은 책이 없네요. 전체적인 분량이 많고, 자전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어 지루할 수도 있는데, 어느 정도 상황에 몰입되면 흡인력 있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처한 위치에 따라 다르게 읽힐 겁니다.

기업 외적 상황이나 아직 의사결정이 주가 되지 않는 포지션이면 그냥 좋은 말 대잔치로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직접 경영을 죽도록 고민하는 역할의 사람이라면 가뭄의 단비 같은 책이 될 겁니다. 이런 알이 꽉 밴 책 읽은 지 저는 꽤 오래됐습니다. 별 다섯 꽉꽉 채웁니다.

원문: Inuit Blogg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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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2015년,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역사에 대격변이 일어났다 https://ppss.kr/archives/188553 Wed, 13 Mar 2019 07:33:13 +0000 http://3.36.87.144/?p=188553 ※ 이 글은 IGN 코리아에 실린 글입니다.


2011년

〈리오〉

  • 제작사: 블루스카이
  • 북미 개봉일: 2011년 4월 15일
  • 손익분기점: 2억 2500만 달러
  • 전 세계 흥행 수익: 4억 8464만 달러

2010년 한 해를 쉬어갔던 블루스카이는 〈아이스 에이지〉 시리즈에 버금가는 새로운 프랜차이즈를 선보인다. 애니메이션이라면 거의 시도하지 않을 4월 비수기에 도전한 〈리오〉는 〈스크림 4G〉(2011), 〈빅 해피 패밀리〉(2011) 등 약체를 가볍게 누르며 ‘빈집털이’ 흥행에 성공. 그렇게 블루스카이는 〈리오〉 시리즈라는 새로운 무기를 장착한다.

〈쿵푸팬더 2〉

  • 제작사: 드림웍스
  • 북미 개봉일: 2011년 5월 26일
  • 손익분기점: 3억 7500만 달러
  • 전 세계 흥행 수익: 6억 6569만 달러

1편의 성공 이후 3년 만에 돌아온 〈쿵푸 팬더 2〉는 생각보다 벅찬 승부를 해야 했다. 하필이면 〈캐리비안의 해적: 낯선 조류〉(2011)-〈엑스맨: 퍼스트 클래스〉(2011) 등 대작들을 상대로 만나는 바람에 1편보다 북미 흥행 성적이 상당히 저조했던 것. 하지만 중국-한국 등 아시아 시장에서 대박을 터뜨리며 오히려 전 세계 성적은 1편을 넘어서는 데 성공한다.

〈카 2〉

  • 제작사: 픽사
  • 북미 개봉일: 2011년 6월 24일
  • 손익분기점: 5억 달러
  • 전 세계 흥행 수익: 5억 6211만 달러

〈월-E〉(2008)-〈업〉(2009)-〈토이 스토리 3〉(2010)로 이어지는 전성시대를 쓰던 픽사는 거칠 것이 없었다. 장난감 수익을 더 올려보고자 낸 〈카 2〉 역시 당연히 대박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라? 픽사 역사상 최악의 혹평을 얻고 만다. 흥행 성적도 매우 저조해서 개봉 직후 〈트랜스포머 3: 다크문〉에게 내내 끌려다니다가 겨우 본전에서 끝났다.

〈곰돌이 푸〉

  • 제작사: 디즈니
  • 북미 개봉일: 2011년 7월 15일
  • 손익분기점: 7500만 달러
  • 전 세계 흥행 수익: 4987만 달러

〈공주와 개구리〉(2009) 이후 2D 애니메이션 사업을 완전히 접었던 디즈니는 마지막 회포를 풀고 싶었나 보다. 원래 TV 시리즈-VOD로만 발매하던 ‘곰돌이 푸’ 시리즈를 ”디즈니의 마지막 극장판 2D 애니메이션”이라는 이름하에 내놓았고, 이 63분짜리 짧은 장편 애니메이션은 극도의 저예산 영화였음에도 〈퍼스트 어벤져〉(2011)에게 밀리며 조용히 사라진다.

〈개구쟁이 스머프〉

  • 제작사: 소니
  • 북미 개봉일: 2011년 7월 29일
  • 손익분기점: 2억 7500만 달러
  • 전 세계 흥행 수익: 5억 6375만 달러

창사 이후 계속되는 극심한 흥행 부진에 시달리던 소니는 유럽산 캐릭터 ‘스머프’를 이용하는 강수를 둔다. 그렇게 사상 처음으로 탄생한 ‘스머프’ 극장판 〈개구쟁이 스머프〉는 북미에서 첫 주 1위를 하긴 했지만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2011)-〈헬프〉(2011)에게 밀려 또 망하는가 싶었는데, 기대하지도 않던 호주-중국-브라질 등 해외에서 대박이 터지며 제대로 흥행에 성공. 그렇게 소니는 처음으로 웃을 수 있었다.

〈장화 신은 고양이〉

  • 제작사: 드림웍스
  • 북미 개봉일: 2011년 10월 28일
  • 손익분기점: 3억 2500만 달러
  • 전 세계 흥행 수익: 5억 5499만 달러

〈슈렉〉은 끝났지만 드림웍스는 이 세계관을 아직 포기할 수 없었다. 〈슈렉〉 시리즈의 스핀오프 격인 〈장화 신은 고양이〉는 관객들을 사로잡으며 〈파라노말 액티비티 3〉(2011) 같은 상대를 가볍게 이겼고, 10월 말-11월 초 할로윈 시장을 완전히 장악했다. 드림웍스는 2011년 〈쿵푸 팬더 2〉와 〈장화 신은 고양이〉 두 편 모두 성공시키며 기분 좋은 한 해를 보낸다.

〈아서 크리스마스〉

  • 제작사: 아드만
  • 북미 개봉일: 2011년 11월 23일
  • 손익분기점: 2억 5000만 달러
  • 전 세계 흥행 수익: 1억 4742만 달러

〈플러쉬〉의 ‘역대급 폭망’ 이후 겨우 정신을 차린 아드만은 배급사 ‘소니’의 도움을 받아 5년 만에 복귀작인 〈아서 크리스마스〉를 공개한다. 영화 제목 그대로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크리스마스를 노리며 11월 중순~12월 중순에 타이밍 좋게 개봉하긴 했는데 하필 경쟁작으로 〈셜록홈즈: 그림자 게임〉(2011)-〈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2011)을 만났고 결과는 또다시 ‘폭망’이었다.

2011년 총평

7편이나 나온 한 해였지만, 싸움의 요충지에 위치한 〈곰돌이 푸〉가 큰 흥행을 바라지 않고 나왔던 작품이었던지라 사실상 경쟁은 전무했다. 드디어 처음으로 소니가 웃은 가운데, 5년 만에 돌아온 아드만은 또다시 헛발질을 하고 말았다. 잘 나가는 블루스카이-드림웍스와 달리 픽사는 처음으로 자존심에 금이 갔으며, 잠시 휴지기를 가진 디즈니는 모은 힘을 터뜨릴 준비를 끝냈다.

 

2012년

〈로렉스〉

  • 제작사: 일루미네이션
  • 북미 개봉일: 2012년 3월 2일
  • 손익분기점: 1억 7500만 달러
  • 전 세계 흥행 수익: 3억 4884만 달러

일루미네이션의 2번째 작품 〈로렉스〉는 4년 전 개봉한 블루스카이 〈호튼〉(2008)의 흥행 노선을 나름 많이 모방했다. 둘 다 ‘닥터 수스’ 원작에 사실상 애니메이션끼리 맞붙기 어려운 조용한 3월 개봉에 개봉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존 카터: 바숨전쟁의 서막〉(2012)-〈21 점프 스트리트〉(2012)를 물리친 〈로렉스〉는 태동을 시작한 일루미네이션에게 활기를 불어주었다.

〈허당 해적단〉

  • 제작사: 아드만
  • 북미 개봉일: 2012년 4월 27일
  • 손익분기점: 1억 3700만 달러
  • 전 세계 흥행 수익: 1억 2305만 달러

작년 〈아서 크리스마스〉(2011)의 패배를 곱씹으며 1년도 안 돼서 돌아온 아드만의 〈허당 해적단〉. 이번에는 예산을 좀 줄여서 본전은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불행히도 이번 상대는 〈헝거 게임〉(2012)과 〈어벤져스〉(2012). 결국 흥행에 또 실패한 아드만은 배급을 담당하던 소니와 또다시 헤어졌고, 〈숀더쉽〉(2015)까지 3년 동안 작품을 못 내고 표류한다.

〈마다가스카 3〉

  • 제작사: 드림웍스
  • 북미 개봉일: 2012년 6월 8일
  • 손익분기점: 3억 6200만 달러
  • 전 세계 흥행 수익: 7억 4692만 달러

2011년 동안 한 번도 싸우지 않아서 몸이 근질근질했던 드림웍스는 픽사에게 또다시 일격을 가한다. 〈마다가스카〉 3부작의 마지막인 〈마다가스카 3〉는 〈프로메테우스〉(2012)-〈락 오브 에이지〉(2012)를 밟아버린 채 〈메리다와 마법의 숲〉에게 정면으로 들이받았다. 〈마다가스카 3〉는 픽사에게 큰 타격을 주는 데 성공했고, 북미는 물론 러시아-브라질 등 해외에서도 대박을 터뜨리며 드림웍스에게 큰 행복을 안겨주었다.

〈메리다와 마법의 숲〉

  • 제작사: 픽사
  • 북미 개봉일: 2012년 6월 22일
  • 손익분기점: 4억 6200만 달러
  • 전 세계 흥행 수익: 5억 4044만 달러

〈카 2〉(2011)의 흥행 부진으로 당황한 픽사는 더 큰 위기에 봉착했다. 불과 2주 간격으로 개봉한 〈마다가스카 3〉를 떼어내기에 벅찼던 〈메리다와 마법의 숲〉은 〈19곰 테드〉(2012)-〈어메이징 스파이더맨〉(2012) 같은 경쟁작에게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한 것. 여기에 뒤로는 〈아이스 에이지 4: 대륙 이동설〉까지 압박하며 흥행력은 완전히 무너져버렸고 본전을 찾자마자 초라하게 막을 내리고 만다.

〈아이스 에이지 4: 대륙 이동설〉

  • 제작사: 블루스카이
  • 북미 개봉일: 2012년 7월 13일
  • 손익분기점: 2억 3700만 달러
  • 전 세계 흥행 수익: 8억 7724만 달러

3년 전 〈업〉(2009)-〈아이스 에이지 3: 공룡시대〉(2009)처럼 픽사와 함께 여름 시장을 양분할 줄 알았던 블루스카이는 픽사가 주저앉자 쾌재를 불렀다. 〈아이스 에이지 4: 대륙 이동설〉은 〈다크 나이트 라이즈〉(2012)와의 싸움에서 전혀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며 3편에 이어 또다시 독일-프랑스-중국 등 전 세계 곳곳에서 대박을 기록했고, 8억 달러를 가볍게 넘는 데 성공했다.

〈파라노만〉

  • 제작사: 라이카
  • 북미 개봉일: 2012년 8월 17일
  • 손익분기점: 1억 5000만 달러
  • 전 세계 흥행 수익: 1억 0714만 달러

〈코렐라인: 비밀의 문〉(2009) 이후 3년 만에 2번째 작품으로 돌아온 라이카의 시도는 또다시 으스스 한 공포물 〈파라노만〉이었다. 이렇듯 회사의 작품 컨셉이 확연히 잡힌 라이카였으나 흥행을 향한 영점 조정은 아직 제대로 잡히지 못한 상태였는데, 〈본 레거시〉(2012)-〈익스펜더블 2〉에게 밀리다가 퇴장하던 〈아이스 에이지 4: 대륙 이동설〉에게 간접적인 피해까지 받아버리고 만다. 결국은 또 흥행 실패.

〈몬스터 호텔〉

  • 제작사: 소니
  • 북미 개봉일: 2012년 9월 28일
  • 손익분기점: 2억 1200만 달러
  • 전 세계 흥행 수익: 3억 5838만 달러

서서히 흥행 주가가 오르기 시작한 소니는 ‘뱀파이어’와 각종 괴물들을 소재로 한 〈몬스터 호텔〉을 공개한다. 어느 정도 호평을 받으며 〈테이큰 2〉(2012)와 〈아르고〉(2012)와의 치열한 싸움에서 승리한 〈몬스터 호텔〉은 무난한 흥행에 성공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몬스터 호텔〉이 소니에서 제일 잘 나가는 시리즈가 될 줄은 관객은 물론 소니 스스로도 몰랐을 것.

〈주먹왕 랄프〉

  • 제작사: 디즈니
  • 북미 개봉일: 2012년 11월 2일
  • 손익분기점: 4억 1200만 달러
  • 전 세계 흥행 수익: 4억 7122만 달러

2년 만에 디즈니와 드림웍스가 11월 추수감사절-12월 크리스마스 시즌을 두고 격돌했다. 다만 이번에는 그때와는 반대로 디즈니가 선공, 드림웍스가 후공이었다. 〈주먹왕 랄프〉는 〈007 스카이폴〉(2012)과 싸움을 버텨내며 드림웍스를 공격했고, 〈가디언즈〉가 의외로 쉽게 무너져 버리자 불안불안해 보였던 〈주먹왕 랄프〉의 흥행은 겨우내 이어지며 흑자로 돌아섰다. 이로 인해 디즈니는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가디언즈〉

  • 제작사: 드림웍스
  • 북미 개봉일: 2012년 11월 21일
  • 손익분기점: 3억 6200만 달러
  • 전 세계 흥행 수익: 3억 0694만 달러

2년 전 〈라푼젤〉(2010)과 싸우던 〈메가마인드〉(2010)의 악몽이 다시 떠올랐다. 〈가디언즈〉는 격돌한 〈주먹왕 랄프〉는 물론 〈브레이킹 던 파트 2〉(2012)-〈라이프 오브 파이〉(2012)에게 밀려 〈헷지〉(2006) 이후 단 한 번도 북미 1위를 하지 못하고 퇴장한 드림웍스 작품이 되고 말았다. 결국 2-3편까지 이어지는 속편 계획이 다 날아가는 사태까지 터져버렸으니 참 씁쓸하다.

2012년 총평

2년 전 〈토이 스토리 3〉(2010)가 〈슈렉 포에버〉(2010)-〈슈퍼배드〉(2010)의 협공에도 압도적인 성적을 냈던 것과 달리, 〈메리다와 마법의 숲〉은 〈마다가스카 3〉-〈아이스 에이지 4: 대륙 이동설〉 사이에 끼어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이렇게 픽사가 급격하게 휘청인 사이 일루미네이션-소니 같은 신생회사들이 무섭게 치고 올라온다. 〈마다가스카 3〉가 또다시 대박을 내 마음을 놓을 수도 있는 드림웍스지만, 디즈니와의 맞대결에서 처음으로 패배를 기록한지라 기분이 좋지 않았고, 아드만과 라이카는 슬프게도 또다시 몇 년 후를 기약해야 했다.

 

2013년

〈크루즈 패밀리〉

  • 제작사: 드림웍스
  • 북미 개봉일: 2013년 3월 22일
  • 손익분기점: 3억 3700만 달러
  • 전 세계 흥행 수익: 5억 8720만 달러

2010년부터 꾸준히 1년에 2편 이상의 작품을 보여주었던 드림웍스는 이쯤부터 회사 전략을 ‘선제공격’에서 ‘물량 공세’로 바꾸고 준비된 모든 카드를 꺼내 들며 극장가를 공략한다. 〈크루즈 패밀리〉는 〈백악관 최후의 날〉(2013)-〈지아이조 2〉(2013) 등을 가볍게 누르고 성공하며 드림웍스의 새로운 시리즈로 연착륙한다.

〈에픽: 숲속의 전설〉

  • 제작사: 블루스카이
  • 북미 개봉일: 2013년 5월 24일
  • 손익분기점: 2억 5000만 달러
  • 전 세계 흥행 수익: 2억 6843만 달러

그동안 3-4-7월에 작품을 내왔던 블루스카이가 이번에는 5월 극장가에 도전했다. 블루스카이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작품으로 꼽히는 〈에픽: 숲속의 전설〉이지만, 영화는 〈분노의 질주 6: 더 맥시멈〉(2013)-〈나우유씨미: 마술사기단〉(2013)을 상대로 만나 4위로 출발하더니 본전만 겨우 찾고 퇴장했다. 결국 블루스카이는 자사의 선택을 후회하며 〈에픽: 숲속의 전설〉이후 다시는 5월에 작품을 내지 않고 있다.

〈몬스터 대학교〉

  • 제작사: 픽사
  • 북미 개봉일: 2013년 6월 21일
  • 손익분기점: 5억 달러
  • 전 세계 흥행 수익: 7억 4423만 달러

프라이드에 상당한 타격을 입은 픽사는 안정적인 선택을 했다. 〈몬스터 주식회사〉(2001) 이후 무려 12년이나 지나서 돌아온 〈몬스터 대학교〉는 다행히 〈월드 워 Z〉(2013)-〈히트〉(2013)를 가볍게 누르며 출발. 하지만 예상치도 못한 후발주자 일루미네이션의 〈슈퍼 배드 2〉의 압박에 엄청난 타격을 받으며 또 주저앉았다. 그나마 일본-영국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이 정도지 본전도 못 찾을 뻔했다.

〈슈퍼 배드 2〉

  • 제작사: 일루미네이션
  • 북미 개봉일: 2013년 7월 3일
  • 손익분기점: 1억 9000만 달러
  • 전 세계 흥행 수익: 9억 7076만 달러

애니메이션계 사상 최대 이변이 2013년에 일어났다. 픽사-드림웍스 두 공룡 사이에 끼어 아무리 잘해봐야 고전을 면치 못할 줄 알았던 일루미네이션의 〈슈퍼 배드 2〉가 두 경쟁작을 이겨버린 것. ‘미니언’이라는 캐릭터와 퍼렐 윌리엄스의 노래 ‘HAPPY’를 내세우며 〈론 레인저〉(2013)-〈퍼시픽 림〉(2013)을 전부 밀어내 버린 〈슈퍼배드 2〉는 단숨에 〈토이 스토리 3〉(2010) 다음으로 역대 애니메이션 2위까지 오르며, 일루미네이션이 디즈니-픽사-드림웍스 급 대형 회사로 성장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한다.

〈터보〉

  • 제작사: 드림웍스
  • 북미 개봉일: 2013년 7월 17일
  • 손익분기점: 3억 3700만 달러
  • 전 세계 흥행 수익: 2억 8257만 달러

영화가 완성돼서 개봉을 하긴 해야 하는데, 언제 개봉시킬까 고민하던 드림웍스. 장고 끝에 사상 처음으로 7월 중순에 작품을 낸다. 나름 공을 상당히 들였던 〈터보〉는 그래도 드림웍스 작품답게 어느 정도 살아남을 줄 알았건만 경쟁작이었던 〈컨저링〉(2013)-〈더 울버린〉(2013)은 물론, 〈슈퍼 배드 2〉와 〈개구쟁이 스머프 2〉에게 패하며 드림웍스는 뒷목을 잡았다.

〈개구쟁이 스머프 2〉

  • 제작사: 소니
  • 북미 개봉일: 2013년 7월 31일
  • 손익분기점: 2억 6200만 달러
  • 전 세계 흥행 수익: 3억 4755만 달러

소니의 첫 번째 흥행작 〈개구쟁이 스머프〉(2011)의 후속작은 나오지 않으려야 안 나올 수 없었다. 〈개구쟁이 스머프 2〉는 드림웍스의 〈터보〉를 밀어낸 채 〈투건스〉(2013)-〈엘리시움〉(2013)과의 싸움에서 소소한 흥행을 계속 이어가며 시리즈의 흥행을 이어갔다. 이후에는 같은 소니의 〈하늘에서 음식이 내린다면 2〉와 바통터치.

〈하늘에서 음식이 내린다면 2〉

  • 제작사: 소니
  • 북미 개봉일: 2013년 9월 27일
  • 손익분기점: 1억 9500만 달러
  • 전 세계 흥행 수익: 2억 7433만 달러

그 누구도 9월 가을철 비수기에 제대로 된 애니메이션을 내지 않는다는 걸 눈치챈 소니는 계속해서 홀로 9월 극장가를 독식한다. 비수기 극장가를 장악하려던 〈하늘에서 음식이 내린다면 2〉는 〈프리즈너스〉(2013)-〈그래비티〉(2013) 같은 대작 틈바구니에서 살아남는 데 성공했고, 소니는 1년에 2편이나 성공시키는 성과를 거둔다.

〈겨울왕국〉

  • 제작사: 디즈니
  • 북미 개봉일: 2013년 11월 27일
  • 손익분기점: 3억 7500만 달러
  • 전 세계 흥행 수익: 12억 7648만 달러

이대로 한 해가 마무리되었다면 2013년의 우승은 일루미네이션의 〈슈퍼배드 2〉였을 것이다. 하지만 ‘끝판왕’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 사실 〈겨울왕국〉은 처음에 〈헝거 게임: 캐칭 파이어〉(2013)에게 8배 격차로 크게 밀리며 시작했다. 그렇게 ‘디즈니 작품이 또 망하는가’ 싶었으나 돌연 역주행을 시작.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2013) 같은 대작들과 싸우면서 개봉 1-2-3주 차도 아닌 3-6-7주 차에 북미 1위를 하는 말도 안 되는 장기 흥행력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북미 4억 달러를 기록한 영화는 일본 2억 5000만, 한국 8000만, 중국 5000만 달러로 아시아 시장에서도 ‘초대박’을 터뜨리며 역대 2번째로 10억 달러를 돌파한 애니메이션이 된 건 물론 〈토이 스토리 3〉(2010)를 제치고 역대 애니메이션 1위에 등극한다. 이 기록은 2019년인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았다.

2013년 총평

불과 3년 전만 해도 예상하지 못한 대격변이 펼쳐졌다. 그 잘 나가던 픽사는 계속해서 비틀거리며 힘든 싸움을 펼쳤고, 드림웍스가 물량 공세로 완전히 노선을 바꾼 사이 움츠렸던 소니는 이제 날개를 펴고 훨훨 날아다녔다.

사상 초유의 이변을 낸 일루미네이션은 연륜이 있는 다른 제작사보다 더 강력한 ‘포스’를 내뿜었고, 디즈니는 〈겨울왕국〉 한방으로 〈판타지아 2000〉(2000)부터 〈주먹왕 랄프〉(2012)까지 13년 동안 낸 적자를 한꺼번에 전부 메꾸는 데 성공한다. 이렇게 전쟁은 갈수록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안갯속으로 빠져들었다.

 

2014년

〈레고 무비〉

  • 제작사: 워너
  • 북미 개봉일: 2014년 2월 7일
  • 손익분기점: 1억 5000만 달러
  • 전 세계 흥행 수익: 4억 6916만 달러

엄청나게 커져가는 애니메이션 시장을 도저히 두고 볼 수 없던 워너브라더스는 자회사 ‘워너 브라더스 픽쳐 애니메이션’에 ‘카툰 네트워크’ 제작진들을 일부 더해서 ‘워너 애니메이션 그룹’(이하 워너)를 공식 출범시킨다. 과거 〈아이언 자이언트〉(1999)-〈해피 피트〉(2006) 같은 명작을 간간이 만들던 기억을 되살려낸 첫 작품 〈레고 무비〉는 압도적인 극찬과 〈로보캅〉(2014) 등을 누르고 북미 3주 연속 1위라는 흥행까지 모두 잡았고, 워너는 이 전쟁의 새로운 도전자가 되었다.

〈천재 강아지 미스터 피바디〉

  • 제작사: 드림웍스
  • 북미 개봉일: 2014년 3월 7일
  • 손익분기점: 3억 6200만 달러
  • 전 세계 흥행 수익: 2억 7570만 달러

극장가에 물량으로 집중포화를 쏟아붓는 드림웍스의 2014년 첫 작품은 〈천재 강아지 미스터 피바디〉였다. 그런데 〈300: 제국의 부활〉(2014)-〈다이버전트〉(2014)에게 밀린 북미 성적은 참담했고, 믿었던 해외 성적마저 죽을 쑨 나머지, 결국 미스터 피바디는 미스터 ‘피바다’로 끝나고 말았다.

〈리오 2〉

  • 제작사: 블루스카이
  • 북미 개봉일: 2014년 4월 11일
  • 손익분기점: 2억 5700만 달러
  • 전 세계 흥행 수익: 5억 0010만 달러

1편 〈리오〉(2011)의 흥행 성공은 당연히 속편으로 이어졌다. 블루스카이의 〈리오 2〉는 1편처럼 4월 비수기에 개봉해서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2014)와 치열하게 싸운 끝에 살아남았고, 멕시코-중국 등 해외에서도 대박이 나며 시리즈의 흥행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드래곤 길들이기 2〉

  • 제작사: 드림웍스
  • 북미 개봉일: 2014년 6월 13일
  • 손익분기점: 3억 6200만 달러
  • 전 세계 흥행 수익: 6억 2154만 달러

4년 만에 돌아온 〈드래곤 길들이기 2〉는 1편 때보다 훨씬 어려운 싸움을 치러야 했다. 〈22 점프 스트리트〉(2014)-〈트랜스포머: 사라진 시대〉(2014)에게 밀려 북미 1위는 한 번도 못 했고, 비수기에 개봉한 1편보다 북미 성적이 훨씬 더 못 나왔다. 그러나 중국-러시아-독일-프랑스 등 해외 대부분 국가에서 제대로 터지며 전 세계 성적은 오히려 상회했으니 결과적으로는 웃을 수 있었던 드림웍스였다.

〈박스트롤〉

  • 제작사: 라이카
  • 북미 개봉일: 2014년 9월 26일
  • 손익분기점: 1억 5000만 달러
  • 전 세계 흥행 수익: 1억 0929만 달러

라이카의 작품치고 나름 공포 요소를 쭉 뺀 〈박스트롤〉은 언제나처럼 엄청난 노력이 들어간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메이즈 러너〉(2014)-〈나를 찾아줘〉(2014)에게 크게 밀리며 흥행은 또 실패. 이쯤 되면 한 번쯤 터져줄 만도 한데 흥행 성공에 계속 실패하는 게 이상할 정도다.

〈빅 히어로〉

  • 제작사: 디즈니
  • 북미 개봉일: 2014년 11월 7일
  • 손익분기점: 4억 1200만 달러
  • 전 세계 흥행 수익: 6억 5782만 달러

디즈니와 드림웍스가 2년 만에 또 붙었다. 〈겨울왕국〉(2013)의 흥행 초대박으로 고무된 디즈니는 얼마 전 인수한 ‘마블 코믹스’의 영웅 소재로 한 〈빅 히어로〉로 승부수를 던졌다. 그러나 〈마다가스카의 펭귄〉과의 경쟁보다 〈인터스텔라〉(2014)와 치고받고 싸우다 〈헝거 게임: 모킹제이〉(2014)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래도 중국-일본의 아시아 성적으로 흥행에 무난히 성공하긴 했다.

〈마다가스카의 펭귄〉

  • 제작사: 드림웍스
  • 북미 개봉일: 2014년 11월 26일
  • 손익분기점: 3억 3000만 달러
  • 전 세계 흥행 수익: 3억 7302만 달러

예상치 못한 피해를 본 건 비단 디즈니뿐이 아니었다. 드림웍스의 〈마다가스카의 펭귄〉도 디즈니 〈빅 히어로〉와의 싸움을 준비 중이었으나 당시 공공의 적이었던 〈헝거 게임: 모킹제이〉(2014)에게 크게 밀리며 당황하다가 〈호빗: 다섯 군대 전투〉(2014)가 개봉하자 KO. 그나마 중국에서 대박이 나서 본전은 찾았으니 불행 중 다행.

2014년 총평

연초에 워너가 합류하며 대형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제작사는 9개로 늘었고, 상위권 블루스카이와 하위권 라이카의 성적은 계속 상반된 결과를 보여주었다. 연말에 디즈니와 드림웍스가 한판 제대로 붙었으나 둘 다 이렇다 할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끝났으며, 그 외 별다른 싸움은 없었다.

 

2015년

〈스폰지밥 3D〉

  • 제작사: 파라마운트
  • 북미 개봉일: 2015년 2월 6일
  • 손익분기점: 1억 8500만 달러
  • 전 세계 흥행 수익: 3억 2519만 달러

2000년대까지 실사영화만으로도 잘 나가던 파라마운트는 애니메이션 제작에 별로 관심이 없던 편이었다. 그러다 이제 애니메이션 시장이 너무나 커져 버린 데다 2010년대에 들어서며 서서히 흥행세가 꺾이는 바람에 조바심이 나 모회사 ‘바이어컴’ 산하의 ‘니켈로니언’ 제작진들을 대량으로 섭외해서 ‘파라마운트 애니메이션’(이하 파라마운트)를 설립한다.

니켈로니언 제작진들답게 아니나 다를까 첫 번째 작품은 ‘스폰지밥’ 극장판 〈스폰지밥 3D〉였으며 〈주피터 어센딩〉(2015)-〈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2015)를 상대로 명승부를 펼치며 흥행에 성공. 그렇게 파라마운트는 이 전쟁에 도전장을 내민다.

〈홈〉

  • 제작사: 드림웍스
  • 북미 개봉일: 2015년 3월 27일
  • 손익분기점: 3억 3700만 달러
  • 전 세계 흥행 수익: 3억 8604만 달러

2010년부터 1년에 2편 이상씩 꾸준히 작품을 내며 미친 듯이 달려온 드림웍스가 잠시 안식년을 가졌다. 2015년 드림웍스의 유일한 작품이었던 〈홈〉은 〈분노의 질주 7: 더 세븐〉(2015) 밑에서 조용한 흥행을 계속 이어갔으며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2015)이 개봉하기 전까지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흥행을 쓸어 담으며 드림웍스의 휴식을 도왔다.

〈인사이드 아웃〉

  • 제작사: 픽사
  • 북미 개봉일: 2015년 6월 19일
  • 손익분기점: 4억 3700만 달러
  • 전 세계 흥행 수익: 8억 5761만 달러

픽사의 야심작이었던 〈인사이드 아웃〉은 최악의 악조건에서도 대박을 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일루미네이션이, 어찌 보면 참 치사하게, 배급사 유니버설에게 협공을 요청해서 전 세계 16억 달러에 빛나는 무시무시한 대작 〈쥬라기 월드〉(2015)를 6월 초에 배치하는 바람에, 이 공룡과 싸우느라 힘을 다 뺀 나머지 〈미니언즈〉와 싸울 때 엄청나게 고전했던 것.

하지만 명작은 결국 인정받게 돼 있는지라 영국-한국-멕시코 등 전 세계 곳곳에서 대박이 터지며 손익분기점의 2배가 넘는 성적을 거두었고, 최종적으로 대성공으로 끝난다.

〈미니언즈〉

  • 제작사: 일루미네이션
  • 북미 개봉일: 2015년 7월 10일
  • 손익분기점: 1억 8500만 달러
  • 전 세계 흥행 수익: 11억 5940만 달러

〈슈퍼배드〉 시리즈의 스핀오프인 〈미니언즈〉는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캐릭터 ‘미니언’의 효율을 극대화한 작품이다. 여름 내내 경쟁을 벌였던 〈인사이드 아웃〉에 평가는 한참 못 미쳤지만 흥행은 훨씬 웃돌았는데, 〈앤트맨〉(2015)-〈미션 임파서블: 로그네이션〉(2015) 같은 쟁쟁한 경쟁작들을 모두 물리치며 북미는 물론 독일-중국 등 해외 등지에서도 ‘초대박’이 터졌다.

이로써 〈미니언즈〉는 역대 3번째 10억 달러 돌파 애니메이션이 됐으며, 〈토이 스토리 3〉를 끌어내리고 〈겨울왕국〉에 이은 역대 애니메이션 2위 자리까지 오른다.

〈숀더쉽〉

  • 제작사: 아드만
  • 북미 개봉일: 2015년 8월 5일
  • 손익분기점: 6200만 달러
  • 전 세계 흥행 수익: 1억 0621만 달러

〈플러쉬〉(2006)-〈아서 크리스마스〉(2011) 같은 작품이 계속 실패하자 아드만은 아예 완전히 ‘저예산’ 애니메이션으로 전략을 대대적으로 수정한다. 그리고 정말 다행히도 그 방법은 적중했는데 〈숀더쉽〉은 소소한 흥행을 한 북미는 물론 영국-독일 등 유럽에서도 조금씩 성적을 모으며 최종적으로는 흥행 성공. 아드만은 〈월레스와 그로밋: 거대 토끼의 저주〉(2005) 이후 10년 만에 웃을 수 있었다.

〈몬스터 호텔 2〉

  • 제작사: 소니
  • 북미 개봉일: 2015년 9월 25일
  • 손익분기점: 2억 달러
  • 전 세계 흥행 수익: 4억 7480만 달러

1편의 흥행 성공 이후 3년 만에 돌아온 〈몬스터 호텔 2〉는 〈인턴〉(2015)-〈마션〉(2015)과의 싸움에서 전혀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며 또다시 소니에게 큰 기쁨을 안겨주었고, 〈몬스터 호텔〉 시리즈는 소니의 효녀로 자리 잡는다.

〈스누피: 더 피너츠 무비〉

  • 제작사: 블루스카이
  • 북미 개봉일: 2015년 11월 6일
  • 손익분기점: 2억 4700만 달러
  • 전 세계 흥행 수익: 2억 4623만 달러

새로운 개봉 시기에 또 도전한 블루스카이는 사상 최초로 추수감사절 시즌을 겨냥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무난한 흥행과는 달리 〈스누피: 더 피너츠 무비〉는 〈007 스펙터〉(2015)-〈헝거 게임: 더 파이널〉(2015)에게 사정없이 끌려다녔고, 결국 픽사의 〈굿 다이노〉와 충돌하자마자 사라져버리고 만다. 이로써 〈스누피: 더 피너츠 무비〉는 블루스카이 창립 이래 첫 번째 적자 애니메이션이 되었는데, 그냥 블루스카이가 평소에 잘하던 대로 3월에 개봉했다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도 해본다.

〈굿 다이노〉

  • 제작사: 픽사
  • 북미 개봉일: 2015년 11월 25일
  • 손익분기점: 4억 3700만 달러
  • 전 세계 흥행 수익: 3억 3221만 달러

2010년대 들어 계속해서 불안한 모습을 보이던 픽사의 폭탄이 드디어 터지고 말았다. 배경 CG는 참 좋았지만 ‘이게 무슨 픽사 작품이냐’ 할 정도로 쓴소리를 들은 〈굿 다이노〉는 〈헝거 게임: 더 파이널〉(2015)에게 시작부터 기세를 펴지 못하더니 〈크람푸스〉(2015)-〈하트 오브 더 씨〉(2015)에게 연달아 패했고, 결국 ‘최종 보스’ 격인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2015)가 개봉하자마자 순위권에서 증발했다. 그렇게 〈굿 다이노〉는 픽사 최초의 적자이자 ‘폭망’ 애니메이션이 되었다.

2015년 총평

전쟁 판도는 폭풍의 눈인 일루미네이션이 뒤흔드는 가운데 아드만은 오랜 회복 끝에 살아났다. 또 더 이상 픽사와 드림웍스는 절대강자라고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고, 블루스카이는 처음으로 쓴맛을 보았으며, 소니는 어느덧 정상궤도에 자리 잡았다. 라이카-워너-디즈니는 한 해를 쉬었다.

애니메이션에 무관심했던 파라마운트마저 이 전쟁에 뛰어들며 대형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제작사는 드디어 10개가 되었고, 어느덧 전쟁터는 포화상태에 다다른다. 이쯤 되니 경쟁을 피하려고 개봉일을 당기거나 미룬다고 해서 싸움을 피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제 이 10개 회사는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는 대혈전을 펼친다.

원문: IGN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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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 3선 https://ppss.kr/archives/76295 https://ppss.kr/archives/76295#respond Wed, 14 Mar 2018 22:30:39 +0000 http://3.36.87.144/?p=76295 1970년대 이후의 일본에서 음악을 소재로 삼은 애니메이션 작품들은 100편 이상 제작되었다.

그 종류도 상당히 다양한 편이다. 록밴드를 소재로 한 작품(가령 <BECK>이라든가 <Detroit Metal City>라든가) 재즈를 테마로 삼은 작품, 중고등학생들의 동아리 활동을 소재로 한 작품이라든가 클래식을 주 장르로 삼은 작품, 음악이라는 테마를 소재로 한 판타지물도 존재하며 심지어 SF를 가미한 작품들도 존재한다.

SF를 가미한 가장 최근작은 동명의 만화를 토대로 제작되고 있는 <기동전사 건담 썬더볼트>와 올 4월부터 방영 예정인 <마크로스 델타>가 있겠다. <마크로스 델타>의 경우 4월 방영 예정이고 선행방송으로 1화가 공개됬지만, 벌써부터 망작의 스멜이 물씬 풍긴다. 유투브의 반다이 공식 채널을 통하여 1화가 공개된 <건담 썬더볼트>의 경우 미친놈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긴 하지만 선곡이 아주 탁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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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로스 델타>

작년에는 뮤지컬을 테마로 한 작품이 두 편 등장했는데, 하나는 애니메이션의 진행 방식 자체가 뮤지컬이었고, 다른 하나는 뮤지컬 배우 지망생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K-ON>처럼 밴드 부활동을 가장한 일상물이 있는가 하면, 노래방을 테마로 전대물을 엮은 괴랄한 작품도 있다. 상당히 마이너 하지만 일본 전통가요인 엔카를 테마로 한 작품도 있다. 가라오케를 소재로 한 그 작품의 경우, 메이저 아티스트들의 곡을 피처링하고 실제로 메이저 레이블에서 활동하는 가수들이 제작에 동참했음에도 불구하고 흥행에는 대참패를 기록했다. ㅎㅎ

이 중에서 주목할 만한 ‘음악을 이야깃거리로 삼은’ 3개 작품을 소개해볼까 한다.

이미 잘 알려진 <노다메 칸타빌레>나 <Beck>같은 작품들은 제외했다. 지난 번에 다룬 <4월은 너의 거짓말>이나 원작 만화의 극히 일부분만을 소재로 삼은 <피아노의 숲>, 역시 원작 소설의 일부분만을 다룬 <울려라! 유포니엄>도 이번 추천글에서 제외하니 양해 바란다. 물론 제외된 작품들 또한 매우 추천하는 바이다. (<울려라! 유포니엄>의 경우, 부활동을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을 소개할 때 따로 올리도록 하겠다)

 

1. PI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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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ANO (2002)

<PIANO>는 2002년에 방영된 아동용 애니메이션이다. 총 10화로 제작하고 방영되었으며, 일본의 아동용 컨텐츠 전문 채널인 Kids Station에서 방영된 애니메이션이다. 부제는 ‘어린 소녀의 마음의 멜로디’.

<PIANO>는 성격이 정반대이지만 사이는 좋은 소녀 두 명의 일상적인 이야기를 다룬 애니메이션이다. 특히 주인공인 ‘노무라 미우’라는 피아노를 공부하는 소녀를 통하여 가족과 친구의 소중함, 그리고 감수성 깊은 사춘기 소녀들의 고민과 성장을 그렸다. 이 작품에서 피아노는 어린 소녀 미우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일종의 매개체로 등장한다. 음악을 소재로 하는 다른 애니메이션들과 달리, 극 중에 사용되는 곡 대부분이 작품을 위해 작곡된 오리지널 곡이라는 게 특징.

주인공 미우의 성우를 담당한 카와스미 아야코의 경험담을 소재로 한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특이하다. 이 애니메이션, 2화와 3화에서 잠시 소개되는 쇼팽의 곡을 제외하면 작중에서 미우가 연주하는 피아노 곡 전체를 모두 이 성우가 작곡하고 연주했다. 참고로 1976년생인 카와스미 아야코는 애니메이션과 게임 팬들에게는 <Fate> 시리즈의 세이버 역으로도 유명하다. (그녀의 다른 대표작으로는 성계의 문장 시리즈의 라피르, 마호로매틱의 안도우 마호로, 투 하트 시리즈의 카미기시 아카리, 제로의 사역마 시리즈의 앙리에타 드 트리스테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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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우에 작곡까지 하는 능력자 성우 카와스미 아야코 씨. 오오…!

재미있게도 각 화의 제목이 모두 이탈리아어로 되어 있는데, 서양음악을 전공하신 분들이라면 쉽게 이해를 하거나 공감이 갈 부분이다. 모두 음악용어이고, 악보에서 작곡가가 연주자에게 요구하는 표현을 설명하는 문구로 되어 있다. 가령 1화의 제목은 〜con sentimento〜 인데, 이것은 ‘좀 더 감정을 살려서’ 라는 뜻이다. 8화의 경우에는 〜con melancolia〜 인데, 이것은 ‘슬픔으로 마음이 가라앉는 느낌으로’라는 요구다. 각 화의 제목에 맞추어 에피소드의 내용이 맞춰져 있고, 미우가 연주하는 곡들이 분위기를 한층 더 살리고 있다. 이런 연출기법은 TV드라마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기법이지만, 일본 애니메이션의 경우 90년대 중후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인공 미우의 성우를 담당한 카와스미 아야코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하자면, <노다메 칸타빌레>의 애니메이션 판에서 노다 메구미 역을 맡은 성우가 바로 이 카와스미 아야코이다. 물론 노다메 칸타빌레에서 노다메의 연주를 맡은 것도 그녀. 재미있게도 노다메 칸타빌레의 한국판 라이센스 드라마인 <내일도 칸타빌레>의 일본어 더빙 버전에서도 주인공 설내일(심은경 분)의 더빙 또한 그녀가 맡았다. <내일도 칸타빌레>는 한국, 일본 양국에서 흑역사로 취급되지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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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양국과 방송사와 배우 팬들에게까지 흑역사 취급받는 <내일도 칸타빌레>(…)

<PIANO>는 기본 아동용 애니메이션인 관계로, 국내외 많은 애니메이션 덕후들에게 큰 주목을 받지 못한 작품이다. 같은 아동용 애니메이션인 <피아노의 숲>의 경우 사실 원작만화는 아동용 작품이 아니다. 1998년부터 2015년까지 총 17년간 연재된 작품으로, 단행본만 무려 26권에 달한다. <피아노의 숲>은 이치노세 카이라는 소년이 피아노 솔리스트로 성장하는 과정을 다룬 만화인데, 초등학교 시절부터 시작하여 청년기까지의 방대한 세월을 다루고 있다. 단지 2007년에 공개된 극장판 애니메이션이 주인공의 유년기만을 다루다보니 아동용 애니메이션이라는 인식이 생겨 버렸을 뿐.

또한 PIANO는 성우가 작곡에 연주를 담당했다는 점에서도 ‘음악을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을 선호하는 덕후들에게 외면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이건 ‘고작 성우 주제에’라는 편견으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사실 카와스미 아야코는 3살 때부터 피아노를 시작하였고 자신의 첫 메이져 데뷔 앨범인 Primary(1998)의 경우 자신이 작사한 곡 5개와 자신이 직접 연주한 피아노 곡 5개를 수록하기도 했다. 성우업 이외에도 싱어송 라이터로 활동하고 있는 인물이고, 노다메 칸타빌레의 경우, 드라마와 애니메이션에서 모두 사용된 ‘방구 체조’가 그녀의 작품이기도 하다. 그래서 고작 성우 주제에, 라는 편견을 들이대면서 노다메 칸타빌레는 다들 좋아했다는 점은 나로서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 있다)

여담이지만 <노다메 칸타빌레>의 경우, 드라마를 보신 분들께는 애니메이션을, 애니메이션을 보신 분들께는 원작 만화를 추천해드리고 싶다. 그리고 원작 만화까지 다 섭렵하신 분들께는, 베네수엘라의 El Sistema와 시몬 볼리바르 유소년 오케스트라, 그리고 Gustavo Dudamel에 대한 다큐멘터리나 그들의 연주 동영상을 찾아보시라고 권유해드리고 싶다. 노다메 칸타빌레에서 묘사되는 많은 연주들은 엘 시스테마의 연주 활동에서 그 모티브를 따온 것이 많기 때문이다.

주목받지 못한 작품이지만 의외로 어둠의 경로를 통해 쉽게 구할 수 있는 작품이니, 즐기고 싶은 분들은 한 번 감상해보는 것도 좋을 듯.

 

2. 니타보 (NITABOH, 仁太坊-津軽三味線始祖外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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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TABOH 仁太坊-津軽三味線始祖外聞
(니타보우 츠가루샤미센시조외문, 2004)

2004년에 상영된 극장판 애니메이션이다. 일본 전통악기 중에 하나인 샤미센(三味線)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애니메이션에서는 츠가루샤미센(津軽三味線)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仁太坊(니타보우)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츠가루 지방에서는 츠가루 샤미센을 완성시킨 인물로 알려져 있고, 그의 이름을 딴 레스토랑들도 상당히 많은 편. 아니, 츠가루시에 가보면 니타보우와 관련된 것들이 실제로 상당히 많은 편이다. 이 애니메이션은 일본의 역사소설가인 다이죠 카즈오의 츠가루샤미센에 대한 책을 베이스로 제작이 되었는데, 실제 츠가루샤미센의 역사와는 조금 다른, 픽션이 많이 가미된 연출을 보이고 있다. 그도 그럴것이 니타보우라는 인물에 대한 기록은 실제로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고, 츠가루 지방에서 구전되어 내려오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 따라서 본 애니메이션을 역사물로 보기에는 조금 힘든 면이 있다. 약간의 ‘국뽕’이 섞인 작품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

니타보우의 정확한 생몰년도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대략 에도 막부 말기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그는 8세 때 실명한 후 샤미센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으나 11세에 아버지를 잃고 유랑악단의 일원이 되어 하루벌이를 하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샤미센에 대한 흥미를 버리지 못하여 평생 수행을 하며 ‘사람들이 진심으로 즐길 수 있는 음악’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평생을 악기 연주 및 연주 기법을 만드는데 바쳤고, 덕분에 츠가루샤미센의 시조가 되었다는 전설을 가진 인물.

3개의 현을 가진 일본의 전통악기인 샤미센은 사실 중동에서 발현된 악기이다. 그 악기가 인도를 거쳐 중국에 도래한 후 중국 남부 지방에서 3개의 현을 가진 악기로 발전하였고, 송/원 시대를 거쳐 오키나와로 유입된 뒤 다시 에도 시대에 이르러 일본 전국 각지로 퍼진 악기이다. 일설에 의하면 역시 중동에서 인도를 거쳐 당나라 말기에 한반도로 들어와 정착이 된 해금이 일본에 전래되어 그 모양과 쓰임새가 다소 변화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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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겹게 3줄로 요약할 만큼 어마어마하게 복잡한 역사를 가진 샤미센…
출처: TBS

해금과 샤미센의 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일수도 있으나, 후자의 경우 조금 설득력이 부족하다. 해금은 2개의 현을 활로 켜는 찰현악기이고, 샤미센의 경우 채를 사용하여 현을 뜯어서 연주를 하는 발현악기인 만큼, 궁극적으로 다른 악기라는 것.

여하튼 샤미센은 대략적으로 송나라, 그러니까 고려 시대에 일본에 전래된 악기임은 틀림없다. 특히 에도 시대에 이르러 일본 전국 각지에서 여러 유파가 생기면서 다양한 연주법을 가진 대중적인 악기로 자리를 잡았다. 현재에도 일본에서 가장 대중적인 전통 악기 중에 하나로 손꼽힌다. 그리고 그 샤미센 중에서도 가장 연주 기법에 특색이 있고 인지도가 높은 악기가 바로 ‘츠가루샤미센’이다.

츠가루샤미센은 1960년대에 엔카가수들이 샤미센 연주가락을 모방한 창법을 구사하거나 혹은 엔카 공연 시에 샤미센을 등장시킨 것이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서 대중화가 이루어졌다. 다소 정형화된 관동지방이나 관서지방의 샤미센 연주와 달리 음색이 풍부하며 타악기를 연주하는 듯한 느낌도 자아낼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샤미센 자체가 속주가 가능한 악기이기 때문에 현대에는 락이나 재즈 등을 새로운 장르를 접목시킨 샤미센 아티스트들이 꽤 많이 배출되었다. 대표적으로 요시다 브라더즈나 아가츠마 히로미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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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전 샤미센 아티스트인 요시다 브라더즈.
출처: 위키피디아

다만 이 작품은 다소 ‘국뽕’스러운 내용과 신파스러운 연출이 가미되어있다. 물론 도입부에서 ‘이 작품은 다이죠 카즈오의 소설에 픽션 요소를 더 많이 가미하여 제작되었습니다’라는 설명으로 시작한다는 면에서 무조건 ‘국뽕’애니메이션으로 치부할 수 없기도 하다. 또한 여타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접하기 힘든 일본 전통악기들의 멜로디를 십분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음악적인 가치가 뛰어나다고 볼 수 있다.

샤미센 뿐만 아니라 일본의 다른 전통 악기들에 대한 묘사도 상당히 수준급이라, 일본의 전통악기를 소개하는 레퍼런스로 사용하기에도 좋은 애니메이션이다. 또한 막부 말기의 혼란한 상황이나 뚜렷한 계급이 존재했던 에도 시대 서민들의 생활상과 고충 등이 잘 묘사되어있는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은 우리나라의 문화체육부와 교육부에 해당하는 일본의 문부과학성이 우수작품으로 선정했다는 사실이다. 또 일본의 학부모 단체들이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작품으로 꼽은 여러 애니메이션 작품 중 하나이며, 현재 일본의 초중고등학교의 시청각실 및 전국의 도서관에서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작품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이런 부분은 사실 국악교육이 전문 학교에서 수학하지 않으면 수박 겉핥기 정도로만 이루어지고 있는 대한민국 주민으로서 상당히 부러운 부분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니타보>라는 작품은 현재 교육현장의 일선에 계시는 분들이나 국악 관련 단체에서 활동하시는 분들께 적극적으로 추천해드리고 있는 작품이다. 이런 작품이 극장에서 상영되고 또 초중고등학교에서도 교재로 활용되는 일본의 현실이 마냥 부럽다.

<니타보>는 국내 어둠의 경로 사이트에선 좀처럼 구해보기 힘든 작품이지만(물론 토렌트에는 있다), 다행히 영문 자막판이 유튜브에 게재되어있다. 교육용 애니메이션이라는 점도 있어 본래 츠가루 지방의 사투리가 아닌 표준어를 구사한다는 점은 다소 아쉽기도 하지만, 연출 자체는 꽤 가벼운 마음으로 볼만하다.

 

3. 언덕길의 아폴론 坂道のアポロ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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坂道のアポロン (언덕길의 아폴론 2012)

1960년대 중반, 멀리 나가사키 사세보로 전학을 오게 된 소년 니시미 카오루는 엘리트 집안 출신으로 항상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하고 어릴 적부터 배워온 피아노 실력 또한 수준급인 소년. 하지만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잦은 전근으로 인하여 전학을 밥 먹듯해온 탓으로 인하여 소심하고 결벽적인 성격을 지닌 아이가 되었다. 어느날 카오루는 전학을 오게 된 사세보의 고등학교에서 그의 운명을 바꾸게 될 두 인물과 조우하고 재즈에 접하게 되는데……

<언덕길의 아폴론>은 2000년에 문단에 데뷔한 일본의 순정만화작가인 고다마 유키(小玉ユキ)의 다섯번째 작품이자 이를 애니메이션화한 작품이다. 원작만화는 2007년부터 2012년까지 연재되었고, 단행본은 총 9권 + 번외편 1편으로 완결이 되었다. 애니메이션의 경우 원작만화가 종결된 2012년 4월부터 방영이 시작되어 6월까지 총 12화의 짧은 편성으로 방영되었다. 애니메이션의 감독을 맡은 이는 <카우보이 비밥> 시리즈로 유명한 와타나베 신이치로. 전체적인 OST는 칸노 요코가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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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우보이 비밥>. 와타나베 신이치로가 감독한 애니메이션은 믿고 볼 수 있다.

감독을 수행한 와타나베 신이치로에 대해서 몇가지 이야기를 더 하자면, 이 사람의 데뷔작은 <마크로스 플러스>이다. 이미 데뷔작에서부터 음악과 연관이 깊은 작품을 담당했다. 이후에 그가 메가폰을 잡은 작품들 역시 음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거나 OST를 신중히 선별하여 작중 분위기를 확 휘어잡는 경향이 강하다. <카우보이 비밥>이 그러했고 <사무라이 참프루> 또한 그러했다. 2007년에 그가 참여한 옴니버스 작품인 <지니어스  파티>의 7번째 작품인 <베이비 블루> 역시 와타나베 신이치로다운 연출과 와타나베 신이치로다운 멋진 OST로 가득 채워져있다.그리고 언덕길의 아폴론과 그의 최신작인 잔향의 테러 또한 그러하다,

자신의 만화에서 출신지인 나가사키를 배경으로 삼는 경우가 많은 고다마 유키답게, <언덕길의 아폴론> 역시 나가사키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단 그녀의 다른 작품들과 달리 시대적 배경이 1960년대로 설정되어 있다. 특히 <언덕길의 아폴론>은 1960년대의 나가사키 사세보(佐世保)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데, 사세보는 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군항 중에 하나이고, 미 해군이 주둔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한 만큼 미군을 상대로 한 클럽이나 바가 상당히 밀집해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특히 재즈바가 많이 밀집되어 있다.

일본의 군항들 중 ‘요코스카’나 ‘쿠레’가 상당히 현대화된 지역이라면, 사세보는 여전히 196-70년대의 모습을 간직한 곳이 많다. 원작 만화 뿐만 아니라 애니메이션에서도 이런 부분에 대한 연출 및 묘사가 상당히 잘 되어 있다.

애니메이션의 경우 고증 면이 원작만화보다 훨씬 철저한데, 요코스카에서 사세보로 전학을 온 카오루를 제외하면 등장인물들 대부분이 나가사키, 특히 사세보 지역의 방언을 사용한다. 심지어 제작 과정에서 성우들에게 일일히 사세보 방언의 스페셜리스트가 개인지도를 했을 정도로 지역 색이 물씬 풍기도록 배려한 연출이 돋보인다. (사세보는 나가사키현 내에서도 지역특색이 아주 강한 방언을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다만 원작만화와 마찬가지로 <언덕길의 아폴론>은 초보자들에게는 한없이 불친절한 작품이다. 재즈 장르에 대한 입문용이라기보다는 재즈에 상당히 심취해 있는 독자층, 혹은 시청자들을 위한 작품이다. 평소에 마일즈 데이비스, 존 콜트레인, 쳇 베이커, 아트 블레이키, 글렌 굴드, B.Y.포스터, 사라 본, 빌리 할리우드 같은 재즈 아티스트들의 연주를 즐겨 듣는 분들에게는 강추하고 싶은 작품이지만, 재즈라는 장르에 대해 다소 이해가 부족하신 분들의 경우에는 “뭐지 중2병스러운 녀석들의 이 먼치킨스러운 향연은?”이라고 느낄 수도 있겠다.

실제로도 등장인물들의 연령이 고등학교 초년생들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카오루와 센타로의 연주 실력은 뭐 먼치킨도 사실 이런 먼치킨들이 따로 없다. 진정한 사기 캐릭터들의 전형이라고나 할까. ㅎㅎ

원작만화의 경우 작중 등장하는 곡이나 아티스트들에 대해 그나마 애니메이션보다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이 가미되어 있는 편이기에, 이 글을 접하시는 분들께는 먼저 원작만화를 읽어보시는 것을 추천해드린다. 다행히 국내에 정식번역판이 출간되어있다.

그러나 애니메이션 작품으로서 <언덕길의 아폴론>이 갖는 가장 큰 강점은 바로 ‘연주 장면의 훌륭한 묘사’에 있다. 만화에서는 표현하기 다소 힘들었던 부분을 실제 재즈 뮤지션들의 연주장면을 촬영한 후 그 영상과 사진을 바탕으로 애니메이션으로 재구성하였는데, 이렇게 생생한 재현 덕분에 연주장면들의 퀄리티가 가히 압권이다. 특히 애니메이션 7화에 등장하는, 센타로와 카오루의 ‘학교 축제 연주’ 씬은 애니메이션 사상 길이 남을 명장면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

이 장면은 특히 제작에 참여한 연주자들에게 원작만화의 내용 및 애니메이션의 대본을 보여준 후 연주자들이 즉흥으로 연주 및 레코딩을 진행하여 완성되었다. 그 후 일본  TV 애니메이션 오프레코딩의 전설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당시 레코딩에 참여한 관계자들 뿐 아니라, 일본의 한 저명한 음악 평론가가 ‘4분 30초의 기적’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다.

마츠나가 타카시, 난리 유카, 테시마 아오이, 루이케 신페이 등 21세기의 일본을 대표하는 재즈 뮤지션들의 연주 및 노래를 간접적으로 감상할 수 있다는 것도 <언덕길의 아폴론>의 애니메이션 버전이 갖고 있는 강점 중에 하나이다. 재즈를 좋아하시는 분들, 풋풋한 소년 소녀들의 사랑 이야기를 원하시는 분들, 그리고 레트로한 느낌을 좋아히시는 분들께 강력하게 추천해드리는 작품이다.

여담이지만 난 이 작품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애니메이션을 먼저 접하게 되었는데, 이 애니메이션을 보기로 한 이유는 사실 오프닝 곡을 부른 이가 왕년에 잘 나가던 J-POP 밴드 ‘JUDY & MARY’의 메인 보컬리스트였던 YUKI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니메이션에 푹 빠져서 결국 원작만화까지 모두 섭렵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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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동전사 건담 썬더볼트>

ps. 사실 여기에 포함을 시킬까 말까 무지 망설였던 작품이 있다. 바로 <기동전사 건담 썬더볼트>이다. 이 작품은 <문라이트 마일>로 유명한 오타가키 야스오의 원작만화를 베이스로 2015년 12월 25일부터 시작한 OVA 작품이다. 음악 그 자체가 테마인 작품은 아닌지라 빼긴 했지만, 음악감독이 현재 일본에서 활동 중인 재즈 아티스트 중에선 Top 5에 든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거물인 키쿠치 나루요시였던지라 크게 고민했다.

이 아티스트는 단순히 음악감독만 맡은게 아니라 직접 연주에도 참여했다. 마치 와타나베 신이치로가 연출을 맡은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재즈와 전투 씬의 싱크로가 절묘한 작품. <썬더볼트>의 경우 유투브에 현재 1, 2화가 모두 공개되어 있으니 안 보신 분들은 함 보시라. 건담 팬이시라면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거고, 우주세기 팬들이라면 더더욱 후회하지 않으실거고, 재즈 팬이라면 진짜 몰입하고 보실 수 있을거라고 본다.

이상 성년월드 흑과장이었습니다.

원문: 성년월드 흑과장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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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의 지금, 그리고 미래 https://ppss.kr/archives/142769 https://ppss.kr/archives/142769#respond Mon, 27 Nov 2017 06:57:36 +0000 http://3.36.87.144/?p=142769 지금은 웹툰시대

최근 ‘만화를 본다’고 하면 책을 떠올리는 사람은 적다. 많은 사람은 스마트폰이나 데스크톱 모니터로 보는 만화인 ‘웹툰’을 먼저 떠올린다. ‘웹툰’은 웹+카툰의 합성어로 인터넷망을 통해서 디지털 기기로 열람할 수 있는 만화의 형식을 취한 콘텐츠를 통칭하는 단어다.

대표 국내 포털 사이트인 네이버, 다음카카오에서는 웹툰을 개별 카테고리로 분류하고 유저에게 매일 새로운 연재작을 몇십 개씩 무료로 제공한다. 무료가 아닌 유료 웹툰을 제공하는 레진코믹스, 탑툰 등의 사이트에서도 수많은 작품이 정기적, 비정기적으로 연재된다. 모바일 앱인 카카오페이지는 방대한 유저를 바탕으로 ‘기다리면 무료’라는 새로운 판매 방식을 통해 독자들에게 작품을 제공한다.

네온비 작가의 〈나쁜 상사〉는 흥행 대성공으로 성인 웹툰에 한 획을 그었다.

만화가라고 하면 골방에서 그림만 그리는 폐인의 이미지를 떠올리던 옛날과는 달리 웹툰 작가들은 새로운 형태의 셀럽이 되었다. 웹툰 작가는 댓글은 물론 SNS, 이메일 등으로 독자와 소통하며 작품에 독자 의견을 반영하는 쌍방향성으로 중고생 등 젊은 층으로부터 인기를 끈다.

부업으로 인터넷 방송을 운영하거나 공중파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작가들도 있다. 이러한 활동과 함께 웹툰은 단순한 콘텐츠의 영역을 넘어 새로운 문화의 한 영역을 개척 중이다

주호민 작가는 파괴왕으로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다.

 

한국이 주도한 웹툰, 세계 시장으로 확대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국내 웹툰 시장규모는 2015년 기준 약 2,347억 원이며 작년 국내 웹툰 시장 규모는 4,500억 원대로 전년보다 두 배 가까이 성장했다는 게 업계의 추산이다. 콘텐츠 자체의 매출뿐 아니라 영화, 드라마, 게임 등의 원천이 되는 소스로서의 잠재력도 주목받아 2018년에는 8,000억 원을 넘어 1조 원 시장도 머지않았다는 전망이 가능하다.

웹툰은 빠른 속도로 성장 중이다.

웹툰의 원산지는 한국이나 다름없다. 디지털로 보는 만화를 미국에서는 ‘디지털 코믹’, 일본에서는 ‘디지털 망가’라고 표현한다. 웹에 특화된 콘텐츠인 ‘웹툰’과 달리 외국에서는 책의 형태로 발간된 만화를 웹 화면에 맞춰 서비스하는 단순한 방식이 주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웹에 적합한 작품이나 서비스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상업적으로 유효한 디지털 전용 시장이 구축되어 활발하게 유통된다고 할 수 있는 곳은 아직까지는 한국이 유일하다.

한국의 웹툰 서비스 코미코는 일본에서의 흥행으로 일본 만화계에 신선한 바람을 몰고 왔다.

세계에서 손꼽는 통신망을 바탕으로 데스크톱은 물론 이동 중인 대중교통에서도 무리 없이 감상이 가능하다. 소비 형태에 따른 변화에 발맞춰 데스크톱에서 보는 웹툰은 몰입감 있는 스토리를 강조한 긴 호흡의 스크롤 웹툰을 제공한다.

이동 중 짤막하게 즐기는 모바일 기기에서는 작가의 독특한 경험을 다룬 일상툰이나 강렬한 반전이 있는 개그만화를 짧은 대사와 함께 터치, 스와이프 등의 행동으로 간편하게 감상할 수 있게 구성하였다. 독자들의 소비 형태가 빅데이터로 축적되면서 이러한 개선과 변화는 더욱 빠르게 이뤄질 것이다.

 

한국 웹툰이 넘어야 할 두 가지 문제

최근 웹툰 시장의 성장은 불법 사이트라는 심각한 문제를 맞이했다. 디지털 이미지 파일로 이뤄져 있어 상대적으로 복제가 어렵지 않은 웹툰의 약점을 악용하는 사이트가 마구 늘고 있는 것이다. 기존 플랫폼이 제공하는 웹툰에서 유료로 판매하는 미리 보기 분량, 완결되어 유료로 전환된 웹툰 등을 불법 게재하고 성인광고나 도박광고 등을 붙여 수익을 내는 사이트들이다.

음성 시장이 크다는 것은 정상 시장이 커질 수 있다는 설명이 된다. 허나 음성 시장의 크기가 산업 전체 매출의 10배 이상이나 된다면 산업의 근간이 위태롭다는 말이 된다. 원고료를 지불하고 작품을 판매하는 플랫폼은 물론 작가에게 돌아가야 할 수익을 불법 사이트들이 가로채고 있는 것이다.

국내 시장 크기의 한계 또한 업계 전반의 고민거리다. 한국 웹툰은 스토리를 강조하는 일본 망가와 채색한 이미지를 중시하는 미국 코믹스 양쪽에 어필할 수 있는 요소를 갖춘 경쟁력 있는 콘텐츠다. 이러한 가능성 있는 콘텐츠가 오직 한국어 사용자들에게만 보이기 위해 만들어진다는 것은 어찌 생각하면 커다란 낭비라고 할 수 있다. 정서가 유사한 중국이나 일본 쪽의 수출이 진행 중이지만 아직 원활하다고 할 정도의 거래는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성장을 위한 키워드, 공정성

웹툰 업계가 당면한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고 창작 생태계의 선순환 구조를 안착시키기 위해서는 콘텐츠를 관리하는 전문성이 매우 절실하다.

하나는 콘텐츠 프로듀싱 및 마케팅 능력이다. 이전 시대에는 한 작품이 하나의 경로로만 유통되었으나 현재에는 디지털 기기가 발전하면서 수많은 변수와 다양한 소비창구가 생겨나고 있다. 개별 콘텐츠의 장단점을 이해하고 변화의 흐름을 읽어 유효한 성과를 이끌어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일본은 만화가뿐 아니라 편집자의 역할도 매우 크다. 출처: 오바 쓰구미, 오바타 다케시의 〈바쿠만〉

다른 하나는 저작권 전문성으로 불법 소비를 견제하고 원천 소스로서의 가능성을 확대하는 능력이다. 국가 간의 경계가 희미한 웹사이트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저작물 사용 권리와 한계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

이러한 전문성의 성립을 위해 담보되어야 하는 것이 공정한 계약 관행이다. 상기한 두 분야에 전문성을 가지더라도 창작자에게 정당한 수익이 돌아가지 않거나 콘텐츠 활용에 대한 저작권 동의가 없다면 아무리 좋은 콘텐츠가 존재한다고 해도 발전적인 순환이 불가능하다.

어느 한쪽의 이득을 위한 계약이 아닌, 창작자와 사용자 양방이 납득할 수 있는 계약서를 작성하기 위해서는 그간의 계약 사례를 모아 데이터화하고, 계약서가 가져야 할 최소한의 요건을 갖춘 표준 계약서를 보급하며 홍보해야 한다.

지난 9월 문화체육관광부와 서울시, 웹툰 3사(네이버웹툰, 다음웹툰컴퍼니, 케이티)가 협약하여 ‘공정한 웹툰산업 생태계 조성을 위한 업무협약’을 진행하며 이러한 관행이 자리 잡는데 긍정적인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웹툰은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며 문화의 또 하나의 카테고리로 자리 잡기 위해 노력 중이다. 웹툰이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산업 전반의 크기뿐 아니라 창작물 사용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활용이 필요한 때다. 이미 우리는 성장에 취해 내실을 다지지 못하여 IMF라는 쓴 교훈을 경험한 바 있다.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는 민·관뿐 아니라 모두의 각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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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가 이야기하는 스토리텔링의 22가지 법칙 https://ppss.kr/archives/55271 https://ppss.kr/archives/55271#respond Mon, 28 Aug 2017 01:45:30 +0000 http://3.36.87.144/?p=55271

“세상의 모든 뛰어난 글의 처음은 대부분 최악이었다.”

  • 앤 라모트(Anne Lamott)

픽사의 전 스토리보드 아티스트 엠마 코트(Emma Coats)는 그녀가 감독과 동료에게 배운 픽사의 스토리텔링 법칙을 22가지로 정리해 ‘#storybasics’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트위터에 올렸다. 애니메이션뿐 아니라 블로그, 소설, 프레젠테이션 등 스토리가 필요한 모든 분야에 적용될 법칙이기에 소개한다.

1. 캐릭터가 목표를 이루는 것보다 목표를 향해 노력하는 과정을 더 중시하라.

2. 작가로서가 아닌 관객의 입장에서 재미를 생각하라. 둘은 매우 다를 수 있다.

3. 테마를 갖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스토리를 다 쓸 때까지도 그게 뭔지 알기는 힘들다. 다시 계속 쓰다 보면 잡힐 것이다.

4. 문장은 이런 식으로 구성되면 좋다.

“어느 옛날 ___가 있었다.” → “매일 ___를 했다.” → “그러던 어느 날 ___가 일어났다.” → “그래서 ___가 됐다.” → “결국 ___ 그렇게 됐다.”

5. 이야기를 단순화시켜라. 집중하라. 캐릭터를 합쳐라. 두루뭉실한 이야기는 빼버려라. 애써 써놓은 것들을 잃어버리는 느낌이 들겠지만 나중엔 생각도 나지 않을 것이다.

6. 캐릭터의 장점이 뭐고 뭘 편안하게 느끼는가? 그러나 정반대의 것을 던져줘라. 도전하게 하라.

7. 중반부를 써 나가기 전에 엔딩을 먼저 생각하라. 엔딩은 어렵다. 미리 해놓는 게 좋다.

8. 어떻게든 이야기를 끝마쳐라. 완벽하지 않아도 좋다. 다음에 더 잘하면 된다.

9. 막혔을 땐 다음 단계에서 일어나지 않을 일들의 리스트를 만들어라.

10. 평소 좋아했던 이야기는 잠시 잊어라. 그 이야기들은 이미 당신의 일부다. 사용하려 하면 누군가 바로 알게 될 것이다.

11. 쓰기 시작하면 고칠 부분이 보인다. 완벽한 아이디어라도 머릿속에만 두면 아무도 모른다.

12.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을 경계하라.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도 의심하라. 분명한 것들은 치워버려라. 당신 자신을 놀라게 하라.

13. 캐릭터들에게 색깔을 입혀라. 수동적이고 유순한 캐릭터는 쓰기 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관객에겐 독이다.

14. 왜 이 스토리를 해야만 하는가? 당신의 내면에서 불타오르는 믿음이 뭔가? 그게 스토리의 핵심이다.

15. 당신이 캐릭터라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느낄지 생각하라. 진심은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신뢰를 준다.

16. 캐릭터를 응원할 이유를 줘라. 만약 실패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실패할 경우도 이야기하라.

17. 필요 없는 작업은 없다. 잘 들어맞지 않으면 그냥 넘어가라. 나중에 필요할 때가 있을 것이다.

18.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 최선을 다하는 것과 호들갑 떠는 것은 다르다. 스토리는 테스트 과정이다. 세련되게 정제하는 것이 아니다.

19. 캐릭터를 사건에 휘말리게 하는 우연은 훌륭하다. 캐릭터를 사건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우연은 사기다.

20. 연습: 당신이 싫어하는 영화 속 장면을 골라라. 당신이라면 어떻게 고칠까?

21. 상황과 캐릭터를 확실히 하라. 그냥 멋지게 쓰는 것은 안된다. 당신은 왜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들었는가?

22. 당신 스토리의 본질은 무엇인가? 가장 간단하게 설명해보라. 거기서부터 시작하라.

원문: 인생은 원테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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