ㅍㅍㅅㅅ https://ppss.kr 필자와 독자의 경계가 없는 이슈 큐레이팅 매거진 Mon, 07 Oct 2024 03:32:54 +0000 ko-KR hourly 1 https://wordpress.org/?v=5.8.10 https://ppss.kr/wp-content/uploads/2015/07/ppss-100x100.png ㅍㅍㅅㅅ https://ppss.kr 32 32 한국에서 제대로 철학 책 읽기가 어려운 이유 https://ppss.kr/archives/267129 Mon, 07 Oct 2024 03:32:54 +0000 http://3.36.87.144/?p=267129 철학 책 읽기의 어려움

나처럼 철학하는 사람, 철학을 공부하는 학자 입장에서, 철학 텍스트를 읽는다는 게 다른 텍스트를 읽는 것과 차이가 있는지, 있다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짚고 가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철학 책을 읽으려면 굉장히 많은 장벽이 있습니다. 다른 텍스트들하고 단순히 비교하자는 건 아닙니다. 철학 책의 특징을 좀 알게 되면, 철학이 읽기에 가장 까다롭다는 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사진: UnsplashDebby Hudson

 

1. 다루는 문제를 파악하라

우선 철학 텍스트를 왜 읽느냐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소설이건 역사서건 철학 책이건, 아니면 연극이건 영화건 드라마건, 당대의 삶의 문제를 다룬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시대의 문제를 꿰뚫는 그런 거죠. 그래야 평가도 함께 따라가고요. 영화 〈기생충〉이 사람들에게 호소했던 문제가 분명히 있습니다. 가령 불평등이 그렇지요.

철학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철학도 시대가 겪고 있는 가장 심각하고 핵심적인 문제, 그래서 풀어야만 하는 문제를 다룹니다. 중요한 철학자마다 자기가 살았던 시대, 자기가 살았던 삶의 조건 속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그 문제를 문제로 잘 정리하고, 정리된 문제를 잘 해결하려고 시도했고, 그 시도가 어느 정도 수긍이 갔기 때문에, 철학 텍스트로서 살아남았다 이렇게 봐야 됩니다.

따라서 역사학이나 문학과 마찬가지로, 철학은 아주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답으로써 텍스트가 만들어졌다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독자로서 철학 텍스트를 읽을 때, 왜 이 철학자가 이 책을 썼을까, 이 사람이 풀려고 했던 구체적인 문제가 뭐였을까를 알아내지 못하면 읽을 수가 없습니다.

철학 책은 읽기 어렵다는 말을 합니다. 철학자가 책을 쓸 때 원래 풀려고 했던 문제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그러니까 문제와 문제를 풀려는 고민을 지우고 그저 써 있는 내용과 결과만 놓고 읽으려고 하니까, 이 얘기를 왜 했는지 모르겠고 그래서 어려운 지점이 생기게 됩니다. 특정 철학자의 문제는 그 사람에 대해 다룬 역사적인 문헌 속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령 플라톤이 《국가》라는 책을 썼는데, 도대체 어떤 문제 때문에 썼는지, 플라톤이 살았던 당시 사회적인 조건은 뭐였는지 등을 2차 문헌으로 접해서 알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가 《성찰》을 왜 썼는지,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을 왜 썼는지 등도요. 그러니까 각 철학자가 갖고 있던 고유한 문제를 알지 못하면 철학 책을 읽어도 읽은 게 아닙니다. 그래서 우선 문제를 알아야 합니다.

‘플라톤은 어떤 시대를 살았으며, 어떤 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을까?’를 생각하며 읽어야 한다

그런데 2차 문헌을 통해서, 그러니까 특정 철학자에 대한 사료라든지, 아니면 그 철학자에 대한 동시대와 후대의 해석을 통해 문제가 다 드러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철학자가 간파한 문제가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다른 사람에게 간파되지 않은 채로, (뭐라고 그러죠? 책을 읽을 때 눈으로 흘려 읽는다 그러죠? 건성으로 읽는 거예요,) 그러니까 글자만 따라가고 뜻은 파악하지 못한 채로, 그런 방식으로 수천 년 동안 읽혔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철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와 통찰을 읽어내지 못하는 채로 그냥 접할 때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따라서 어떤 독자건 간에, 특히 철학 연구자나 일반 독자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수백 수천 년 동안 간과됐을지도 모를 그 철학자의 통찰과 문제를 찾아내는 일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철학자 본인도 문제를 다 깨닫지 못한 경우요. 엄청난 영감이 떠올랐고 직관적으로 보긴 했지만, 미처 다 자각하지는 못한 거죠. 막상 글을 쓰다 보면 무의식적인 숨은 통찰이 숨어 들어갈 수 있거든요. 후대에 발견되는 거죠. 글 속에는 어느 정도 들어있는데, 충분히 자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냥 녹아들어 있기만 한 걸 찾아내는 것도 후대의 독자 몫인 거죠. 이런 일이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철학 텍스트를 읽을 때는 해당 텍스트를 쓴 철학자가 풀려고 했던 구체적인 문제가 뭔지를 포착해서 그 문제가 잘 풀렸는지 검토하고, 독자 본인이 살아가고 있는 지금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인지, 풀 수 있는 문제인지 따지고, 못 풀었으면 추가 작업을 더 해나가는 식으로, 그걸 생각거리 혹은 생각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합니다. 굉장히 중요한 일이고 본질적입니다. 그러니까 그 텍스트를 놓고 함께 생각했을 때 뭔가 우리 삶의 문제를 풀 때 도움이 되는 문제인지 알면 그 텍스트는 읽을 가치가 있는 거고, 더 파다 보면 열쇠 같은 뭔가가 나올 수가 있고,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보통은 이런 과정이 생략됐기 때문에 철학 텍스트를 읽기 어렵다는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이건 다른 인문 고전도 비슷한 것 같아요. 보통은 책의 줄거리 정도 배우고 끝나는 경우가 많고요. 아이들도 두꺼운 책을 읽고 나서 고작 줄거리를 정리하는 정도죠.

생각이 필요해

 

2. 진짜 그 철학자가 쓴 걸까

철학자가 지금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그런 형태로 책을 쓴 게 아니라는 게 또 문제입니다.

두 번째로 철학 텍스트는, 특히 오래된 경우에, 원본 자체가 오늘날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책의 형태로 쓰지 않은 게 다수입니다. 우선, 언어가 다릅니다. 플라톤이 쓴 고전 《국가》는 한 기원전 3~4세기 희랍어로 썼어요. 지금 그리스에 가도 현재 그리스 사람도 잘 못 알아들을 희랍어, 아티카 희랍어로 썼습니다. 심지어 플라톤은 대문자로 썼고 띄어쓰기도 안 되어 있었습니다. 후대에 보기 좋게 다듬고 각색하고 편집한 판본이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이른바 ‘정본’입니다. 많은 고증과 연구를 거친 결과물입니다. 깔끔하게 책에 인쇄된 거, 그런 거 없었어요.

플라톤 당시에는 인쇄술이 없었죠? 게다가 문자가 탄생한 후 일반에 보급된 지 얼마 안 되던 시점이었습니다. 플라톤은 문자로 기록을 남긴 첫 세대에 해당합니다. 아시다시피 역사학자가 ‘축의 시대’라고 부르는, 동서고금의 성인들이 활동했던 시기에, 이분들은 죄다 문맹이었습니다. 문자를 몰랐어요. 문자가 나온지 얼마 안 됐거든요. 플라톤의 스승 소크라테스도 구라만 깠지, 기록을 남긴 건 제자인 플라톤이었어요. 공자의 말이 제자들을 통해 몇 백 년 후에 정리된 게 《논어》예요.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됐을 리가 없다

또 누구 있죠? 석가모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접할 수 있는 문자 형태로 정리된 건 상당히 후대예요. 가령 석가모니의 초기 텍스트인, 흔히 《법구경》이라고 부르는 ‘니까야’가 있는데, 이 텍스트도 처음엔 구전으로 전수됐어요. 인도 각지의 고승들이 모여서 1년에 한 번 경전을 암송하는 행사를 열었어요(노래가 아니면 이 긴 작품을 외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함께 합창 형태로 암송하다 보면 서로 잘못 알고 있던 부분들이 수정되겠지요. 이런 형태로 1년에 한 번씩 모여서 암송하는 행사를 몇 백 년 계속한 후에야 텍스트로 정착됐습니다. 그전까지는 다 구전으로 왔던 겁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도 다 구전이 나중에 텍스트로 정착된 겁니다. 플라톤은 텍스트로 뭔가를 남긴 첫 세대고, 인류 역사에서 비슷한 시기 다른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축의 시대는 아니지만 예수도 문맹이었습니다.)

더욱이 당시에는 글을 적을 수 있는 미디어(즉, 매체)가 활판 인쇄가 아니었어요. 당연히 전자 조판도 없었습니다. 다 파피루스나 양피지, 아니면 나무조각, 다시 말하면 쉽게 손상되는, 오래 보존되지 못하는 미디어에 기록했습니다.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기록물은 흙판이나 돌에 기록된 것들입니다. 쐐기 문자가 대표적이죠.

거기 뭐 기록됐는지 아세요? 그건 장부였습니다. 주로 돈 얘기만 잔뜩 있어요. 거의 모든 기록이 누가 누구한테 얼마를 빌렸네, 갚았네, 얼마에 어떻게 거래됐네, 이런 것들이었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경제 문제가 사람들한테 가장 중요한 주제였던 거죠. 그랬으니까 지워지지 않게 기록했던 거예요.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설형문자 토판. 이름부터 ‘채무 변제 증서’다….

지식층에 문자가 보급된 게 기원전 3~4세기입니다. 앞서 말했던 플라톤 시대입니다. 그런데 파피루스, 양피지, 나무 같은 미디어는 대부분 썩어 사라졌습니다. 건조한 지역에서 보존된 것들이 가끔 발굴되기도 합니다만. 그렇다면 내용이 어떻게 전해졌을까요? 필사였습니다. 베끼고 또 베꼈지요. 언제까지 그랬냐면 인쇄술이 발명될 무렵까지 그랬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텍스트는 대부분 19세기 쯤에 정리되었다고 봐도 좋습니다. 그전까지는 기술의 한계와 관심의 한계가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텍스트가 성립된 과정을 살펴보면,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책 찾아서 읽으면 되지, 하는 식이 아니었던 거예요. 애로사항들이 많았습니다. 남아 있는 자료를 읽는 일은 비석이 오래돼서 비바람에 낡아버린 비문 읽는 것과 비슷한 작업입니다.

옛 문헌에 대해 문헌 자체와 역사적 과정을 연구하고, 언어적인 짜임을 분석해 원저자가 썼던 모습에 최대한 가깝게 복구하고 복원하는 작업을 보통 문헌학(philology)이라고 부릅니다. 오래된 고전 텍스트에 관련된 경우 고전 문헌학이라고도 합니다. 문헌학 작업은 동서양이 마찬가지예요. 생각해 보세요. 어렸을 때 베껴 써본 적 있죠. 요즘이야 ‘컨트롤 C, 컨트롤 V’ 하면 되지만 옛날에 손으로 일일이 베꼈지요. 베끼다 보면 누락과 중복이 엄청 많아요. 수많은 오류가 생깁니다. 당대까지 전수된 모든 문헌을 비교 검토하고, 전수 과정을 추적하고, 원본에 가장 가깝게 복원하는 작업이 필수적이었습니다.

문헌학은 텍스트의 진실성을 찾는 작업입니다. 말하자면 전수된 문헌 중에는 저자가 처음 썼던 게 아닌 내용이 많이 섞여 있습니다. 쓰다가 멋있어 보이면 자기 얘기도 좀 섞고 하는 경우도 많았고요. 그래서 지금 우리가 활자화된 후에 접하는 것과 원본이 다른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고, 그건 필연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몇 줄 안 되는 노자 《도덕경》만 해도 판본이 엄청 많죠. 이런 식이예요. 그러니까 손에 쥔 철학 책을 읽고 고전 철학자의 생각을 과연 얼마나 알 수 있을까, 의문이 드는 건 당연합니다. 철학 책 중에 어지간한 것들은 아주 옛날 사람들이 썼기 때문에 이런 사정이 있습니다.

요약하면, 플라톤이 사용한 고대 희랍어, 데카르트가 사용한 라틴어와 프랑스어(출판된 것들은 사정이 낫지만, 당대 유럽 지식인과 주고받은 편지가 더 많아요), 이런 것들을 굉장히 여러 번 각색되고 편집된 형태로 우리가 접하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읽고 있는 게 액면 그대로 그 사람이 사용한 그 언어, 그리고 그 언어가 전달하려고 한 의미를 담고 있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전제해야 합니다.

문헌학 작업이 철학 텍스트의 성립을 위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었다는 것도 확인하고 갔으면 좋겠습니다. 철학 텍스트라는 아주 추상적인 텍스트가 아주 구체적인 문제에서부터 시작됐기 때문에 최대한 그 문제를 잘 알아야 하고 문제를 느꼈던 사람 가까이 접근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말씀도 드렸고요.

문헌학은 문헌의 전승 관계를 조사하고 그 관계를 해명하는 학문이다. 기원전 3세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 오토 폰 코르벤, 「고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그러면 고전어인 희랍어, 라틴어는 그렇다 쳐도 근현대에 나온 책은 어떨까요? 솔직히 말해, 20세기 중반 이후에 쓰인 철학 텍스트 중에 중요한 건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이 이슈는 각자 평가하기 나름이니까 더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20세기 초반 무렵까지 쓰인 텍스트들의 상태인데, 생각보다 문제가 심각합니다. 그 무렵까지도 여전히 출판되지 않고 노트 상태로만 남아 있는 텍스트가 아주 많습니다. 맑스, 니체, 후설, 심지어 하이데거도. 하이데거 죽은 게 1976년인데도요. 이 사람들의 텍스트도 노트로 남아 있는 게 대부분입니다. 하이데거의 노트 중에 반유대주의를 강하게 담고 있는 《검은 노트》가 있는데, 2014년에야 출간되었어요. 그러니까 뭐냐면 현대 텍스트라고 생각하는 상당히 많은 텍스트조차도 의문의 여지가 있다는 겁니다.

맑스나 니체가 쓴 글씨를 보통 사람은 알아볼 수가 없어요. 문서 보관소에 가보면 필체가 정말 엉망입니다. 검색하면 사진으로 볼 수 있어요. 누군가 이걸 깔끔한 활자체로 바꿔주는 작업을 하는 거죠. 그런 문헌학 연구자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해야 합니다. 노트의 보존 상태가 좋아 학자들이 정확히 복원했다고 봐야겠지만, 아직 출판되지 않은 것도 많다는 점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3. 언어적인 문제도 크다

연관된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잘 복원된 텍스트라고 칩시다. 서점에 가서 플라톤이 쓴 《국가》를 뽑아서 읽으면 플라톤이 품었던 문제가 보일까요? 칸트가 쓴 《순수이성비판》은? 데카르트의 《성찰》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이 얘기는 뭐냐면, 우리가 접하는 철학 텍스트의 대다수는 해당 철학자가 쓴 그 내용이 아니라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한국의 철학자 또는 철학 연구자가 현대 한국어로 번역한 텍스트라는 겁니다. 이게 중요한 문젯거리입니다. 물론 번역자가 주석을 아주 잘 달아주고 잘 읽히게 번역했을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충분치는 않습니다. ‘아’ 다르고 ‘어’ 다르거든요. 무엇보다도 철학에서는 뉘앙스가 문제가 돼요.

이건 한국적 현실인데, 대체로 번역본으로 읽어야 합니다. 근데 번역하다 보면 원래 의미와 한국어 번역 사이에 차이가 너무 많이 납니다. 한 문장이 한 문단이 되고 책 한 권이 되는데, 이 과정에서 원본과는 완전 다른 얘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걸 차단하는 작업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철학 책이 잘 읽히지 않을 때, 가장 중요한 이유가 번역이 부실해서라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책을 읽는 게 철학 책을 읽는 것일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해 많이 고민하게 됩니다. 책을 소개해 달라고 해도 마땅히 추천할 만한 게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현실이 척박합니다.

작가 pikisuperstar 출처 Freepik

그럼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철학 텍스트가 얼마나 되겠나? 생각해 보면, 진짜 얼마 안 됩니다. 왜냐하면 불행하게도, 또 여러 가지로 유감스러운 부분이지만, 한국어로 철학 텍스트를 쓴 선학(先學)이 별로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잠깐, 지폐에 나오는 얼굴들, 퇴계도 있고 율곡도 있지 않냐, 물어볼 수도 있습니다. 그분들은 한국어로 글을 쓰지 않았죠. 우리가 알아먹을 수 있는 한글로 쓴 게 아니죠. 그분들이 쓴 것도 우리한테는 외국어입니다. 원효도 그렇고 정약용도 그렇습니다. 누가 아주 잘 번역해 줘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언어적인 문제가 굉장히 크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게다가 우리가 외국어를 배우기 시작하는 게, 영어는 그나마 좀 빠르지만 희랍어, 라틴어는 중고등학교 때 어림도 없고 독일어, 프랑스어를 좀 배우긴 하는데 요즘엔 잘 안 배웁니다. 그래서 영어 아닌 외국어는 대부분 대학에 와서 배우기 시작합니다. 대학생 쯤 되면 자기 생각을 책으로 쓸 정도 되는 나이인데, 우리는 비로소 그때 아빠, 엄마를 배우기 시작하는 거죠. 적어도 학술장에서는 분명히 짚고 가야 할 문제입니다. 인문 교육 전체가 그렇지만 철학은 특히 더 심하다고 봐요. 물론 문학적인 글의 맥락과 뉘앙스를 파악하는 것도 쉬운 문제는 아니에요. 하지만 철학은 제일 까다로운 사고를 끝까지 붙잡고 있어요. 이 문제를 파악하기 어렵게 하는 장벽이 언어인데, 이 장벽을 넘는 일이 만만치 않습니다.

전반적으로 두 가지 차원의 문제, 그러니까 첫 번째는 철학 텍스트를 읽을 때 해당 철학자의 구체적인 문제를 파악해야 한다는 점, 두 번째는 거기에 도달하는 데 굉장히 장벽이 많다는 점, 특히 한국 사회는 연구 인력도 별로 없었고 연구 역사도 짧고, 게다가 요즘은 연구도 안 하고 하는 문제 때문에 굉장히 난관에 부딪혀 있다는 점을 알고 나시면 철학 텍스트를 일반 독자가 읽는 게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4. 그러므로, 원전을 비교해 읽어라

끝으로, 이렇게 좋지 않은 조건에서 철학 책을 읽으려면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먼저 번역된 ‘원전’을 ‘비교’하며 읽으라고 하고 싶어요. 요약된 책을 보는 건 안 보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발췌된 구절들일지라도 원전을 읽어야 합니다. 해설이나 설명이 붙어 있으면 더 좋아요. 또한 2개 이상의 판본이 있으면 반드시 비교해서 읽으라고 하고 싶어요. 번역한 사람마다 원문에 대한 이해나 해석이 다를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비교하며 읽다 보면 원문이 해석될 수 있는 몇 가지 가능성이 확인되기도 해요. 바로 그런 지점에서 자기 나름으로 생각을 해 보는 거죠.

실제로 참 난감해요. 내가 철학 쪽에 오래 종사했기 때문에 좋은 철학 입문서를 추천해 줄 수 있느냐는 요청을 많이 받게 되는데, 유감스럽게도 별로 없어요. 물론 외국 책을 번역한 것 중에서도 찾아보기 쉽지 않아요. 이른바 일반인들이 아니면 공대생들이 읽을 만한 그런 게 있느냐? 일반 독자가 아니면 고등학생 이상의, 한글을 읽어낼 수 있는 독자가 철학을 어떻게 입문하고 공부해야 할까요? 어떤 책을 읽어야 되고 어떻게 읽어야 될까요?

문제거리입니다. 요령 있는 답은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직접 책을 썼고 또 쓰고 있습니다. 만약 서양 철학을 처음 공부해 보려고 한다면 내가 쓴 《생각의 싸움》을 권합니다. 서양 철학 입문서로 손색이 없다고 자부합니다.

여러 온라인 서점에서 구매할 수 있습니다. / 출처: 교보문고

 

마치며: 한국의 역사적 특수성을 이해하자

마지막으로 이 문제와 관련해서, 한국에서 그동안 학자들이 뭘 했느냐,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별로 한 게 없어 보이는 거죠. 학자들의 게으름과 무능함을 꼽는 사람도 많은데요. 부인할 수는 없지만, 사정이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이 문제 역시 한국적인 현실과 굉장히 밀접한 측면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역사적인 배경이라는 게 있거든요. 한국의 역사적 특수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우선 오늘날 우리가 쓰는 한국어와 한글이 보편화된 것이 20세기 초반임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전까지 대부분의 문헌은 한문이었다는 뜻입니다.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지 않으면 읽을 도리가 없습니다. 동시에 이 시기가 일제 강점기였다는 점도 기억해야 합니다. 제국주의 일본은 한국어 말살을 꽤했지요. 결국 한국어가 보편화되기 시작한 것과 한국어가 억압된 것이 거의 동시라는 뜻입니다.

다음으로 분단과 독재가 있었습니다. 남북을 통틀어, 한국에서도 어지간한 학자들이 성장하고 있었는데 대부분 살해됐습니다. 감옥 가거나 고문당해 죽거나 해외로 망명하거나 아니면 중도에 포기하거나 이런 일이 허다했습니다. 사상의 장이 성숙할 수 없는 사회 풍토였습니다. 사상의 자유를 탄압했던 굉장히 오랜 역사가 있었습니다. 해방 이후 20세기 후반 내내 그러했지요. 이 문제가 충분히 해소됐다고 얘기할 수도 없는 상황이죠. 지금도 이념을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철학을 포함해서 흔히 말하는 인문학의 전통적인 연구 분과들이 제대로 성장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겁니다.

결국은 식민지와 분단이라는 문제로 한국의 20세기 역사 전체가 왜곡됐기 때문에 현대 한국어로 좋은 철학 텍스트를 생산해낸 철학자 혹은 철학 연구자가 별로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단순히 학자들의 게으름 문제로 치환할 게 아니라, 한국 현대사 전체와 관련된 문제라고 인식해야 하고 거기서부터 문제를 풀어가야 되는데, 결국은 한반도 평화가 전제돼야 풀릴 수 있는 문제입니다.

철학 책 한 권을 제대로 읽고 싶었을 뿐인데 너무너무 많은 문제 / 작가 jcomp 출처 Freepik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접할 수 있는 철학 책이, 읽어야 할 또 읽자고 권할 만한 책이 빈약한 데는 이런 배경이 있습니다. 앞으로 읽을 독서 목록을 더 많이 만들어야 한다는 시대적인 과제를 함께 짊어져야겠습니다. 한국인 혹은 한국어 구사자가 한국어로 집필하는 것이 한국어 철학 책을 읽을 수 있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획을 그었던 외국의 유명한 철학자들의 성과물을 한국어로 번역하더라도 잘 읽히지 않는 게 정상이라는 걸 전제로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한국 연구자들이 해설도 쓰고, 관련된 문제를 짚어서 논문도 쓰고 해야겠지요. 이게 미진한 것도 사실이고, 좀 아쉽습니다. 널리 읽히는 논문이 생산되지 않은 게 한 30년 넘게 지속된 현실이어서, 이것도 풀어야 합니다. 국가의 연구 지원이 한국연구재단(KCI) 등재지에 수록된 논문 위주로 진행되다 보니, 정작 읽히고 토론되기 위해 논문을 쓰는 게 아니라 평가 받기 위해 논문을 쓰는 상황으로 이어져오고 그런 관행이 정착되어 버렸지요. 연구자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는 능력도 떨어졌고요. (이 문제도 따로 다루어야 합니다.)

지금 시점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인문학의 학문 연구 분과들에서 학문 후속세대가 재생산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학문 연구의 대가 끊길 위기입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가령 철학을 공부해 대학원 가서 박사를 받았다 치면, 그다음에 바로 굶어야 합니다. 이런 일이 기초 인문학 분과들에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학원 진학을 꺼리거나 포기합니다. 이 상황이 20년 정도 지속되면, 학문 전통 자체가 내부에서는 사라지는 거죠. 지금 거의 절멸 직전에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나마 대학원을 가더라도 다 미국으로 갑니다. 그래서 한국어를 쓰는 한국인이라 할지라도 미국 학풍의 후예로 길러집니다. 미국적 특수성을 보편으로 수용하면서 한국적인 것이 필요 없다는 태도를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적인 학문이 뭔지는 논의할 거리가 많지만, 이런 풍토에서 지금 이곳의 문제를 다루는 텍스트가 나오기는 어렵습니다.

미국에 유학 갔다 온 경제학 박사가 한국 경제를 제일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 데이터를 다룬 적이 없기 때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미국에 복무하는 미국 학자지 한국에서 강의한다고 해서 한국 학자라고 할 수는 없다고 봐요. 도대체 이 현실에 대해 뭘 얘기할 수 있겠어요?

한국 학문의 미래와 관련한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굉장히 획기적인 해결책이 마련돼야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른 자리에서 깊게 논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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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내용보다 말하는 태도가 더 중요하다고? https://ppss.kr/archives/259296 Wed, 18 Jan 2023 03:59:16 +0000 http://3.36.87.144/?p=259296 메라비언의 법칙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기업에서 교육 담당을 했던 나는 메라비언의 법칙이 익숙하다. 메라비언의 법칙은 의사소통에 있어 언어적 요소 즉, 말의 내용은 7%의 중요성을 갖고, 비언어적 요소(청각, 시각)가 93%의 중요성을 갖는다는 이론이다.

메라비언의 법칙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이미 무슨 법칙이나 이론으로 알려진 것들 중에 상당수는 가설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크게 신뢰하지 않았다. 그저 소통에 있어 비언어적 요인의 중요성을 과장한 내용 정도로만 여겼었다. 그러다 메라비언의 법칙이 점점 만연해지는 현상을 접하고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궁금해졌고, 도서관 한쪽 구석에 먼지에 쌓인 메라비언의 책인 『Nonverbal communication』을 찾아 읽었다.

적어도 책에서는 메라비언이 단 한 번도 스스로 법칙이라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이 알고 있는 메라비언의 법칙과 실제 메라비언의 생각이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해 페이스북에 포스팅한 기억은 있다.

출처: 박진우의 페이스북

자랑같지만 내가 페이스북에 포스팅했던 시점엔 국내에 메라비언의 법칙이 잘못 쓰이는 오류를 지적한 글은 없었다. 이후 여러 사람들이 이 오류를 지적했지만 아쉽게도 이런 글들 중에는 다른 누군가가 비판한 글을 다시 베껴가며 본인이 제기한 비판인 양 쓴 글도 있다. 그래서 이번엔 메라비언의 법칙이 나온 배경과 진실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리고 소통에서 태도보다 말의 내용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관해 최근에 읽은 좋은 논문 한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사람들은 잘못 알려진 메라비언의 법칙으로 인해 소통 상황에서 말하는 내용보다 보여지는 태도가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메라비언은 모든 소통 상황에서 비언어적 요소가 언어적 요소보다 월등히 중요하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먼저 커뮤니케이션에서 말의 내용이 7%, 목소리가 38%, 얼굴 표정이 55%의 중요도를 갖는다는 원문을 찾아보자.

출처: Mehrabian, A., & Ferris, S. R. (1967). Inference of attitudes from nonverbal communication in two channels. Journal of consulting psychology, 31(3), 248.

원문엔 본 연구와 메라비언과 위너의 1967년 연구를 함께 종합했을 때, 커뮤니케이션에서 말의 내용, 음성, 표정의 영향력이 각각 7%, 38%, 55%라고 정리하고 있다. 이 문구가 바로 흔히 알려진 메라비언의 법칙이 최초로 기재된 문헌이다.

사실 이 문구만 딱 떼서 보면, 메라비언이 커뮤니케이션에 있어 언어적 요소의 중요도는 7%, 비언어적 요소의 중요도가 93%로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진실은 전혀 다르다. 지금부터 메라비언의 법칙의 진실을 당시 메라비언의 연구들과 책들을 하나씩 찾아 가며 밝혀내겠다.

참고로 심리학에서 이와 유사하게 논문의 일부만 딱 떼서 유행시킨 유명한 법칙 중 하나가 바로 ‘1만 시간의 법칙‘이다. 말콤 글래드웰은 책 『아웃라이어』에서 어떤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1만 시간이 필요하다며 안데르스 에릭슨의 논문을 인용한 적이 있는데, 이 역시도 논문 중 딱 한 구절만 따와서 잘못 알린 대표적인 법칙이다. 나중에 에릭슨 교수는 『1만 시간의 재발견』에서 이를 바로 잡은 바 있다.

 

당시의 실험 환경을 자세히 들여다 보자

다시 논문으로 돌아가 보자. 일단 이 논문에서 했던 실험은 이렇다.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은 ‘maybe’라는 다소 모호한 말을 다양한 목소리 톤으로 듣고 동시에 여러 표정의 사진을 보게 된다. 그리고 여러 조건 하에서 ‘maybe’가 긍정적인지, 중립적인지, 부정적인 의미인지를 응답했다.

‘maybe’라는 말 자체는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 않지만, 피험자들은 들리는 목소리 톤이 날카롭고 보이는 사진의 표정이 화났을 때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확연했다. 그렇다. 이 실험에서는 말의 내용이 전혀 중요하지 않은 상황을 의도적으로 연출한 것이니 비언어적 요소가 미치는 영향은 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어서 이 공식이 나온 몇 가지 맥락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먼저, 메라비언과 위너의 1967년 연구다.

제목은 「불일치 소통 해석하기」다. 소통 장면에서 불일치는 말의 내용과 태도가 서로 매칭되지 않은 상황을 의미한다. 쉽게 말하자면, 비꼬는 말을 떠올리면 쉽다. 나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으로부터 ‘잘한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실제 공부를 잘해서, 운동을 잘해서, 심부름을 잘해서 들었던 기억도 있지만 화병을 깨뜨리거나, 시험 점수가 엉망이었을 때도 같은 말을 들었다. ‘잘한다’는 말의 내용만으로 충분한 소통이 가능했던 상황은 진짜 내가 뭔가를 잘했던 장면 뿐이다.

내가 실제로는 잘못했는데 ‘잘한다’는 말을 들었던 불일치(inconsistent) 조건일 때 나는 부모님의 ‘잘한다’는 말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이때는 부모님의 말의 내용이 아니라 어조나 표정이 훨씬 중요했기 때문이다. 1967년에 메라비언은 같은 대학의 수전 페리스와 이런 불일치 상황에 관련한 논문을 한 편 더 발표한다.

이 논문에서는 말하는 사람의 태도를 추론하는 데 음성과 얼굴 표정이 미치는 영향력에 관해 연구했다. 연구 결과, 표정은 음성에 비해 3/2(1.5)배 영향력이 컸다. 38%에 1.5를 곱하면 57%인데, 메라비언의 법칙이라고 정리된 내용과 거의 비슷하다.

메라비언이 1967년 당시 언어적, 비언어적 요소가 판단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할 때 썼던 통계 기법은 요인의 독립성만을 가정한 선형회귀모형에 기반한 다중회귀분석이었다. 요인 간의 매개나 상호작용효과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통계적 분석기법이 충분히 빌달하지 못했던 당시를 감안하더라도 메라비언에게 아쉬운 점은 ‘선행연구를 종합한 결론’이라고 언급했을 뿐, 어떤 조건이었는지 구체적으로 기술하지 않고 각 요인의 효과를 표현한 것이다.

메라비언이 ‘말의 내용과 태도가 불일치하거나, 말의 내용이 모호할 때’라는 전제를 분명히 했다면 어땠을까? 자신의 이름으로 법칙이라고까지 명명돼 본인의 의도와 달리 잘못 쓰이는 현상을 어느 정도는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여담으로 메라비언과 페리스의 논문엔 아주 재밌는 부분이 있다. 부모들이 자녀를 키우면서 말 잘듣는 자녀와 말 안듣는 자녀에게 소통하는 방식은 같을까, 혹은 다를까? 다시 말해, 말 잘듣는 자녀에겐 대개 말의 내용과 태도가 일치하겠지만, 말 안듣는 자녀에겐 말의 내용과 태도가 불일치하는 장면이 자주 나오지는 않을까?

결과는 어땠을까? 차이가 없었다. 말의 내용과 태도가 불일치한 것은 자녀의 문제가 아니었다. 평소 비꼬는 말을 자주하는 부모가 “내가 너 키우다가 이 모양이 됐다”며 한탄한다면, 과학적 진실이 아닐 수 있다.

 

‘말과 태도가 불일치할 때’의 실험 결과였던 것이다

이제 메라비언이 쓴 두 권의 책을 살펴보자. 1971년 『Silent messages』와 1972년 『Nonverbal communication』이다. 먼저 『Silent messages』의 한 구절이다.

Indeed, in the realm of feelings, our facial expressions, postures, movements, and gestures are so important that when our words contradict the silent messages contained within them, others mistrust what we say-they rely almost completely on what we do.

실제로 감정의 영역에서 우리의 얼굴 표정, 자세, 동작 및 몸짓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의 말이 그 안에 포함된 무언의 메시지(silent messages)와 모순될 때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말하는 것을 불신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말을 믿지 않을 때는 보여지는 태도와 메시지가 모순될 때다. 이때는 보여지는 태도가 훨씬 중요하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메라비언의 1972년 『Nonverbal communication』을 보자.

우선, 원문에선 커뮤니케이션의 전반적 영향력이 아니라 호감(liking)만을 언급했다. 그리고 55%는 제스쳐, 자세, 동작, 표정 등 보여지는 전체 모습이 아니라 그냥 얼굴일 뿐이다. 당시 연구에서 얼굴 사진만 썼기 때문이다. 그러니, 얼굴 표정을 전체 비주얼로 확대해서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도 비주얼 자료로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면 잘못된 것이다. 이 책에서 메라비안이 쓴 글을 살펴 보자.

Thus, in the case of inconsistency, facial expressions are the most dominant, the vocal component ranks second, and words are the least significant. In other words, one would be hesitant to rely on what is said when the facial, or the vocal, expression contradicts the words.

따라서, 불일치한 상황(말의 내용과 태도의 불일치)인 경우 얼굴 표정이 가장 중요하고 음성적 요인이 두 번째로 중요하며 말의 내용이 가장 중요하지 않다. 다시 말해, 얼굴이나 목소리가 말과 모순될 때 말에 의존하기를 주저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 당시 메라비언이 했던 연구들은 주로 말의 내용과 태도가 불일치한 조건(inconsitent situation)이었다. 그리고 메라비언의 법칙의 원문이라고 알려진 책, 『Nonverbal communication』에서도 역시 불일치 조건을 언급하고 있다.

우리가 일상적 혹은 업무적 소통을 하면서 내용과 태도의 불일치를 겪는 상황이 얼마나 될까? 말의 내용과 태도의 불일치 조건에서만 적용되는 법칙을 세상의 모든 소통, 심지어는 프레젠테이션 자료까지 확대해서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제발 잘못된 전제임을 깨닫길 바란다.

 

말의 내용은 정말로 중요하다

최근 소통에 있어 언어적 요인의 중요성에 관한 좋은 논문이 있어, 소개하고 글을 마친다.

메라비언의 법칙이 가장 많이 쓰인 분야 중 하나는 세일즈다. 세일즈맨들은 고객에게 전하는 내용보다 표정이나 목소리와 같은 비언어적 요소가 훨씬 중요하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보험 상품은 보험사 별, 상품 별로 특별히 차별화되는 게 없지만, 누가 어떻게 파느냐에 따라 성과는 크게 다르다.

즉, 세일즈맨이 전달하는 내용보다도 비언어적 요소가 더 중요할거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실제로도 그럴까?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에 치중하는 판매원들의 성과가 실제로 더 좋을까?

작가 pch.vector / 출처 Freepik

2022년 미국 테네시 대학교 하슬람 비즈니스 스쿨의 니라지 바라드와지(Neeraj Bharadwaj) 교수 등의 연구진은 세일즈맨들의 감정 표현에 따른 판매 성과를 연구한 바 있다. 연구진들은 아마존 라이브, 페이스북 라이브, 타오바오 라이브 등 99,451개의 라이브 스트림 판매에서 세일즈맨들의 얼굴 표정과 판매 성과와의 관계를 분석했다. 얼굴 표정에서 추출한 감정은 기본 감정인 6개(행복, 슬픔, 놀람, 분노, 두려움, 혐오감)로 구분했고, 표정별 실제 거래 체결 내역을 조사했다. 다양한 표정으로 상품을 설명하는 쇼호스트를 떠올려보자. 연구 결과, 어떤 표정이 가장 효과적이었을까?

표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진지한 설명이었다. 특히 제품에 대한 설명이 한창이어야 할 중간 즈음에 너무 밝은 표정은 오히려 구매 저항감을 일으켰다.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메라비언의 법칙은 세일즈 장면에서 작동하지 않았다.

세일즈에서 소비자를 구매로 이끄는 것은 세일즈맨의 태도가 아니라, 세일즈맨이 하는 말이다. 우리는 종종 설득에서 표정의 영향력(파토스)을 과장하고, 말의 내용의 영향력(로고스)을 과소평가한다.

하지만, 말의 내용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렇다고 표정의 영향력이 없으니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다. 행복감의 경우, 처음과 끝 부분의 영향력이 있었다. 즉, 세일즈에서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 내용을 전달하는 것은 중요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프레젠테이션에 집중해야 할 중간 즈음에 행복한 표정은 판매에 부정적이었다. 내용보다 태도만을 강조하는 세일즈맨을 소비자들은 의심하기 때문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사람들은 세일즈에서 메라비언의 법칙이 잘 작동될 것으로 믿었지만, 실제는 비주얼로 보여지는 표정이나 목소리의 톤보다 정직하고 진솔한 설명이 가장 중요했다.

출처: Bharadwaj, N., Ballings, M., Naik, P. A., Moore, M., & Arat, M. M. (2022). A New Livestream Retail Analytics Framework to Assess the Sales Impact of Emotional Displays. Journal of Marketing, 86(1), 27–47.

세상엔 잘못된 정보가 많다. 가짜 뉴스를 혐오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유포자가 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누군가의 앞에 서서 가르치는 입장의 사람이라면, 스스로 잘못된 정보를 생산하고 배포하고 있지는 않은지 늘 경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비판적 사고와 과학적 사고가 필요하다.

아쉽게도 나는 내가 일하는 HRD 업계에서 이러한 사고를 충분히 갖춘 사람을 많이 만나지를 못했다. 잘못 알려진 메라비언의 법칙은 여전히 유행 중이다. 이 글을 읽고 공감하는 사람들부터 그런 글을 안 보고 말을 안 듣기를 바랄 뿐이다.

원문: 박진우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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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은 오류로 가득하다 https://ppss.kr/archives/241468 Thu, 02 Sep 2021 07:08:53 +0000 http://3.36.87.144/?p=241468 ※ Yale Climate Connections에 피터 글릭(Peter Gleick)이 게재한 「Book review: Bad science and bad arguments abound in ‘Apocalypse Never’ by Michael Shellenberger」를 번역한 글입니다.


‘풍요의 뿔’과 토마스 맬서스.

『로미오와 줄리엣』의 몬테규 집안과 캐퓰릿 집안을 생각하면 됩니다. 아니면 1863년에서 1891년 사이, 서로 원수지간이던 웨스트 버지니아와 켄터키주의 햇필드와 맥코이 가문을 생각해도 됩니다. 환경 과학, 인구 증가, 자원 부족, 생태학 분야에서 맬서스주의자와 기술만능주의자(Cornucopian) 사이의 지난 수십 년 간의 갈등이 이와 비슷합니다.

맬서스주의자들은 영국의 경제학자인 토마스 맬서스가 이야기했던, 지구 자원의 한계는 기하급수적인 인구 증가를 뒷받침하지 못할 것이며, 따라서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동의하는 이들입니다. 반대로 기술만능주의자들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풍요의 뿔(Cornucopia)”처럼 기술의 발전이 사회적 필요를 메꾸어줄 뿐 아니라 무한한 경제성장과 인구 증가가 더 새로운 기술의 발전에 도움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맬서스주의자와 기술만능주의자 사이의 학술적 논쟁과 충돌은 200년이 넘도록 계속 변화해 왔습니다. 최근에는 인간에 의한 기후 변화, 탈삼림화(deforestation), 종의 멸종, 인구 압박, 그리고 점점 심각해지는 공중보건의 위기를 중심으로 점점 더 극단적으로, 또 이데올로기적으로 변했습니다. 이는 과학기술이 발달할수록 위의 문제들이 가진 복잡성과 연관 관계가 더 명확해졌고, 이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지역적, 국가적, 전지구적 행동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마이클 셀렌버거의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또한 이 논쟁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셀렌버거는 이 책을 쓴 이유를 서문에서 이렇게 밝힙니다. 곧 비이성적이고 과장된 맬서스주의자의 재난에 대한 경고를 반박하기 위해, 우리가 경제 성장과 기술 발전 그리고 더 많은 자연 자원의 활용에 주력한다면 이 환경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기술만능주의를 강조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과 같은 입장의 허먼 칸, 줄리안 사이먼, 비외른 롬보르의 이야기를 반복합니다.

 

도가 지나친 기후변화 담론(?)

셀렌버거는 자신을 환경주의 행동주의자이자 “긍정적, 인간적, 이성적 환경주의의 적인 과장과 경고를 일삼는 극단주의”를 반박하기 위해 사실과 과학을 세상에 전달하는 이로 소개합니다. 그는 “지난 몇 년 사이에 기후변화에 대한 환경주의자들의 주장이 도를 지나치기에”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지구가 처한 위기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는 논쟁적 주제에 이성적 목소리와 명확한 분석을 추가하는 것은 늘 환영할 일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책은 심각한 오류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선 이 책에는 수많은 허수아비 때리기 오류가 등장합니다. 셀렌버거는 과학자, 교육받은 엘리트, 언론인 활동가, 저명한 환경주의 행동가들이 지구의 종말이 온다는 틀린 사실을 믿을 뿐 아니라, 그러면서도 이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대응책인 원자력 에너지와 끝없는 경제발전을 거부한다고 주장합니다.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원서와 한국어판.

설사 그가 지금 지구가 처한 위기의 본질과 복잡성을 제대로 이해하고(물론 그렇지 않지만) 제대로 된 과학적 결과를 제시한다고 하더라도(역시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논리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습니다. 이는 전통적인 기술만능주의자가 가진 과도한 단순화, 곧 경제 성장과 이에 따라 등장할 만능의 기술에 모든 것을 의존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위대한 언론인이자 작가였던 H. L. 멩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에는 잘 알려진 해결책이 늘 존재한다. 바로 멋지고, 그럴듯한, 그러나 틀린 해결책이다.

멩켄은 또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정확하게 안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했습니다. 이는 기후 위기나 팬데믹, 환경 변화와 같은 복잡하고 불확실한 문제에 대해 정확히 필요한 충고일 것입니다.

 

잘못된 과학의 적용, 허수아비 때리기, 사실의 체리 피킹, 인신공격

하지만 이 책의 문제는 더 심각합니다. 저자는 여러 주제를 어지럽게 오가며 자신의 경험과 논증, 그리고 자신의 관점을 지지하는 자료만을 골라 제시하는 방식으로 독자가 그의 주장을 따라가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이 책의 가장 큰 문제는 올바른 과학적 자세인, 데이터와 사실을 바탕으로 이론을 검증하고 주장을 확인하는 방식이 아니라 입장을 먼저 정한 다음 그 입장에 맞는 데이터와 사실만을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이 책에는 논리적 오류와 감정적, 이데올로기적 논증, 허수아비 때리기, 사실의 잘못된 사용과 선택적 체리 피킹, 그리고 과학적 오류와 실수가 곳곳에 존재합니다. 게다가 이 책은 과학자들과 환경주의자들, 언론에 대한 볼썽사나운 인신공격으로 점철된, 분노로 가득 찬 책이기도 합니다.

나는 지금 이 책의 오류 중 몇 가지만 지적하려 합니다. 아마 모든 오류를 지적하려면 책을 한 권 새로 써야 할 것입니다. 짧게 말해, 이 책에서 새로운 내용은 틀렸고, 옳은 내용은 이 책이 처음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책의 핵심에는 기술만능주의의 두 가지 주장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장의 한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환경의 문제는 가난의 결과일 뿐 모든 이가 부유해지면 저절로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이 주장은 아주 오래된 것으로 많은 이가 이미 논파한 바 있습니다. 여기 여러 예가 있습니다.

 

원자력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주장

출처: The New York Times

두 번째 주장은 셀렌버거가 예전부터 해오던 것으로, 기후 및 에너지 문제는 원자력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태양광이나 풍력이 아닌 원자력만이 값싸고 안정적인, 풍부한 에너지를 제공할 수 있다”고 말하며 “원자력만이 인간의 환경 발자국을 줄이면서 고에너지 문명을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원자력에 대한 경제적, 환경적, 정치적, 사회적 반론을 그는 들을 가치가 없다고 단순하게 무시합니다. 예를 들어, “원자력 폐기물은 전기 발전에 따른 폐기물 중 가장 안전한 최선의 폐기물에 해당한다. 이 폐기물은 아직 누구도 해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는 원자력만이 (어쩌면 아프리카 콩고강에 건설을 주장하는 초대형 댐까지) 기후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에너지원이라 주장하며, 이는 (그가 “신뢰할 수 없는”이라 부르는) 재생 에너지가 규모도 작고 간헐적이며, 경제적, 환경적, 정치적, 사회적 문제가 있다는 주장으로 뒷받침됩니다.

가난과 환경 문제가 서로 엮여있다는 것은 사실이며, 이는 전혀 새로운 주장이 아닙니다. 이는 국제 개발의 기본 상식으로, 초기 UN밀레니엄개발목표(United Nations Millennium Development Goals)와 지금의 지속가능발전목표(Sustainable Development Goals)에도 다음과 같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지속가능발전목표는 모든 이들이 더 나은, 더 지속 가능한 미래를 가지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금 우리가 직면한 가난, 불평등, 기후 변화, 환경 파괴, 평화와 정의라는 전지구적 위기의 고려가 필요하다. 이 17개의 목표는 모두 서로 엮여 있다.

주류 환경과학과 환경경제학은 다양한 에너지원에 복잡한 환경적 장단점이 있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고려했습니다. 에너지 위기평가, 통합환경시스템분석, 생태경제학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이 문제를 다루어왔습니다.

 

수많은 허수아비 때리기

셀렌버거는 다른 문제에도 계속 허수아비 때리기 논법을 사용합니다. 허수아비 때리기란 상대의 진짜 주장이 아닌 다른 주장을 만들어놓고는 이를 논파하는 오류를 말합니다. 기후 변화 논쟁에서 가장 흔한 허수아비 주장은 과학자들이 기후변화가 최근 극단적인 기상 사태의 “원인”이라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후과학자들은 “원인”과 “영향”의 차이를 철저하게 구분합니다. 이는 “귀인 과학(attribution science)”이라는, 오늘날 기후 연구의 가장 활발한 분야입니다.

셀렌버거는 사람들이 최근의 극단적인 기상 사태(산불, 홍수, 폭염, 가뭄)의 원인을 기후변화로 돌린다는 허수아비 주장을 세운 뒤, 이 주장을 반박합니다. 예를 들어 “많은 이가 캘리포니아 산불의 원인으로 기후 변화를 지목한다”고 한 뒤 “호주의 산불은 호주의 기온이 오르지 않았더라도 발생했을 것이다”라는 식입니다.

출처: The New York Times

그가 2019년 아마존 산불에 대한 뉴욕타임스의 보도를 인용하며 언론이 화재를 어떻게 보도하는지에 관해 쓴 내용에도 오류가 있습니다. “아마존 산불에 대해 뉴욕타임스는 ‘산불은 기후 변화 때문이 아니다’라고 제대로 보도했다”. 하지만 셀렌버거는 자신이 원하는 부분만을 고른 것입니다. 실제 기사를 찾아보면 바로 두 문장 뒤에 “영향”이라는 단어가 나타납니다.

이 산불들은 기후 변화 때문이 아니다. 크게 보면 인간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기후 변화가 산불을 더 크게 만들었을 수 있다. 높은 기온과 건조한 공기는 산불을 더 뜨겁게, 그리고 더 빨리 퍼지게 만들 수 있다.

셀렌버거는 기후 변화와 극단적 기상 사태 사이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연구 또한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의 “기후 변화는 아직 이런 다양한 극단적인 사건들의 빈도를 증가시키지 않았다”는 주장은 15년 전 발표된 연구로 이후 많은 연구가 추가되었습니다. 실제로 허리케인, 폭염, 홍수, 빙하 소멸 등의 극단적인 사건과 기후 변화 사이의 강한 연관성을 보여주는 연구 결과들이 점점 더 늘어납니다.

예를 들어 2019년 미국기상학회(AMS)는 13개 국가의 과학자 121명의 연구를 포함한, 2018년의 극단적인 기상 사태 분석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미국 서부의 극심한 가뭄과 이베리아반도와 북동아시아의 폭염, 미국 중부 대서양 주의 폭우, 베링해의 기록적으로 낮은 빙하의 크기 등이 극단적인 기상 사태의 예였으며, “이들은 인간에 의한 기후 변화 때문일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AMS의 편집장인 제프 로젠펠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100건 이상의 귀인 연구를 게재했고, 이 분야의 과학적 정당성을 보였다. 귀인 연구는 실제 세상의 복잡성을 고려한다는 점에서 점점 더 유용해지고 있다. […]

이 연구들은 기후 변화에 인간의 영향이 있음을 다른 무엇보다도 더 확실하게 보여준다.

셀렌버거는 생물종의 멸종에 관해서도 심각한 개념적 오류를 보입니다. 이를 다룬 장에는 멸종률, 생태계와 생물학적 기능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지질학적 시간 척도 개념, 그리고 데이터의 오용이 한데 뒤섞여 있습니다. 예를 들어 셀렌버거는 종 부유도(richness)와 종 다양성(biodiversity)을 혼동하고 황당한 주장을 펼칩니다. “외래종(invasive species)은 실제로 세계의 섬 지역 종 다양성을 평균적으로 두 배가 증가시켰다. 새로 도입된 식물종의 수는 멸종된 식물의 수의 100배가 넘는다.”

이 논리에 따르면 10종의 고유종 조류가 살던 섬에 이들이 모두 멸종하고 20종의 외래종 조류가 들어왔을 때 그 섬의 ‘종 다양성’은 두 배로 증가한 것입니다. 이런 모순은 그 자신이 인용한 연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숫자만을, 종 다양성이 아닌 종 부유도만을 보았기 때문이며, 외래종이 고유종을 멸종시키고 생태계 안전성을 약화하며 동식물을 균질화하는 등의 종 다양성에 미치는 악영향을 무시한 결과입니다.

출처: Canon Global

근거들을 취사선택하거나 오해, 남용한 고전적인 오류들도 있습니다. 셀렌버거는 자기 자신을 감정적 논증이 난무하는 분야에서 과학과 사실을 전달하는 백기사로 그립니다. “이 책의 모든 사실, 주장, 논증은 최신 과학 연구 결과에 기반해 있다. […]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은 이를 무시하는 정치적 우파와 좌파로부터 주류 과학을 보호한다.” 하지만 그의 논증에는 근거의 부적절한 사용과 이제는 유효기간이 지난 연구 결과, 자신에게 유리한 연구 결과만의 선택적 사용, 오해, 명백한 실수 등이 가득합니다.

가장 흔히 나타나는 잘못된 용어 사용의 예 중에는 “할 수 있다(can)”, “할 수 있었다(could)”, “할 것이다(will)”, “하게 될 것이다(will likely)” 등이 있습니다. 그는 이를 통해 고전적인 기술만능주의의 낙관주의를 드러내며 진짜 근거에 의한 주장이 아닌 긍정적으로 윤색된 이야기를 독자에게 전달합니다.

예를 들어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식량 생산의 경우,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FAO)는 다양한 기후변화 시나리오 하에서도 식량 생산은 현격히 증가할(will)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모든 가능한 기후변화 시나리오 하에서 정말로 식량 생산이 확실히 늘어난다면 이는 참으로 기쁜 소식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다음의 2018년 FAO의 보고서를 잘못 옮긴 것입니다.

기후변화는 이미 농축수산물의 생산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며, 그 영향은 저소득 및 중소득 국가에 더 심각하다. 이러한 효과는 21세기 내내 점점 더 심해질 것이다. […]

기후변화는 특히 지속 가능하지 않은 농업 방식에 있어 더 많은 농지와 물을 사용하게 할 것이며, 이는 가난한 이들에게 특히 불공평하게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는 식량 가용성과 접근성에 모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 책에는 그가 과학적 근거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단순히 “할 것이다(will)”를 이용해 자신의 낙관주의로 대체한 수많은 예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과학자의 말을 잘못 옮긴 예들

셀렌버거가 든 원자력 에너지에 대한 주장의 근거도 잘못 인용한 것입니다. 그는 “맬서스주의자들은 원자력 발전소와 원자폭탄을 뒤섞는 전략을 애용한다”고 말하며, 이를 뒷받침하는 주장으로 폴 에를리히와 앤 에를리히, 존 홀드런이 1977년 출판한 『에코사이언스(Ecoscience)』를 이야기합니다. 셀렌버거는 이 책에 서술된 다음과 같은 확실한 사실을 인용합니다.

대형 원자력 발전소의 장수명 방사능은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1,000배에 달한다.

하지만 이 문장이 발전소를 폭탄에 비유한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틀린 것입니다. “그 비유는 틀렸다. 발전소는 폭탄처럼 폭발하지 않는다.” 셀렌버거는 이를 통해 ‘맬서스주의 환경론자’들은 원자력 발전소와 원자폭탄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는 허수아비를 세운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인용한 문장의 바로 앞에는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경수로나 열중성자로가 원자폭탄처럼 폭발하는 일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는 그가 에를리히와 홀드런의 저작을 오해한 예에 불과합니다. 예를 들어 그는 몇 문단 뒤에 이렇게 말합니다. “홀드런과 에를리히들은 가난한 나라들의 비료 사용 확대와 공업화된 농업에 반대하기 위해, 그리고 기근의 위험을 경고하기 위해 화석 연료가 부족해질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이는 이들이 오랫동안 주장해온 내용과 정확히 반대되는 것입니다. 홀드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환경주의자들은 에너지가 바닥날 것이라 주장한 것이 아니라 환경이 바닥날 것이라 주장한 것이다. 이는 사용 가능한 공기, 물, 흙, 그리고 이를 이용하는 생물군이” 화석 연료가 환경, 사회, 건강에 미치는 영향 때문에 바닥나리라는 뜻입니다.

출처: Energy Warden

“그린피스가 아니라 탐욕이 고래를 구했다”는 셀렌버거의 주장에도 오류가 있습니다. 그는 펜실베니아에서 발견된 값싼 석유가 고래를 멸종으로부터 구했다고 주장합니다. “드레이크 웰의 석유 발견은 등유 생산으로 이어져 […] 고래를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한 페이지 뒤, 그는 바로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고래 사냥은 다시 훨씬 더 큰 규모로 재개되었다. 1904년에서 1978년, 고래잡이들은 100만 마리의 고래를 사냥했고 이는 과거의 세 배에 달하는 수이다.” 그는 값싼 식용유(아이러니하게도 콩고의 삼림을 벌채하고 만들어지는 것도 같은 팜유입니다)가 고래를 구했다고 말하고서는, 이후에도 고래가 더 많이 사냥당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고래사냥이 오늘날 거의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시장의 힘도, 에너지원의 발견도, 그가 주장한 것처럼 “탐욕”이나 경제 성장 때문도 아닙니다. 바로 환경 운동가들과 대중의 운동에 의해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특이하게도 그는 마지막 장에서 이를 인정합니다. “더 나은 대안을 선택함으로써 환경을 보호하는 일에 있어 대중의 태도와 정치적 행동은 의미가 있다.” 이는 정확히 그린피스와 같은 환경 운동 집단이 해온 일입니다.

출처: Greenpeace UK

 

과학적 불확실성과 “우리는 알지 못한다”는 다르다

셀렌버거는 과학에서 말하는 “불확실성” 개념 또한 잘못 이해했습니다. 과학자들은 이 단어를 “우리는 모른다”가 아니라 “다양한 가능성”의 의미에서 사용합니다. 그는 빙상과 삼림의 손실, 아마존의 생물종 멸종, 해류의 변화와 같은 파국적인 재해의 임계값을 두고 이렇게 주장합니다.

“이들 재해가 가진 높은 불확실성과, 이들이 동시에 일어나므로 인해 생기는 복잡성은 이들 시나리오가 말하는 임계값에 대한 논의 자체를 비과학적으로 만든다. […] 소행성의 충돌이나 초대형 화산의 폭발, 극도로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의한 팬데믹과 같은 여러 가능한 재해 중 어느 하나가 발생할 가능성이 다른 것보다 더 크다고 말할 수 있는 과학적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틀렸을 뿐 아니라 별로 위로도 되지 않는 말입니다.

첫째, 불확실성이 크다는 것은 ‘비과학적’인 것과 다릅니다. 둘째,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와 다른 이들은 이러한 전지구적 재해의 위험도를 평가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이를 제외하지도 않습니다. 특히 우리의 대응이 너무 늦었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세상을 떠난 기후학자인 스티븐 슈나이더는 다른 기술만능주의자의 이런 주장에, ‘두꺼운 꼬리’를 가진 확률분포에 존재하는 극단적인 위기가 일어날 확률을 대비하는 일의 중요성에 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과학계가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정책을 강력하게 제안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높은 수준의 가능성을 가진 재해를 과학계가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책임감 때문이다.

즉 과학자들이 기후 위기와 같은 재해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그들이 “종말론자”라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책임감을 가지고 과학, 경제학, 공공정책, 공공보건의 맥락에서 논의돼야 하는 위험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브라질 브루마지뉴의 댐이 붕괴한 후 파괴된 주택들. / 출처: AP News

논리 오류 중에는 상대의 논증을 반박하기 위해 상대방 개인이나 그의 동기를 공격하는 인신공격의 오류가 있습니다. 이 책에 수없이 등장하는 인신공격의 오류는 그것만으로도 이 책의 신뢰를 떨어뜨릴 정도입니다. 셀렌버거는 “종말론적 환경주의자”들은 가난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거나, 심지어 아예 개의치 않는다”고 말하며 콩고강의 거대한 댐에 반대한다고 공격합니다.

그는 세상을 떠난 데이비드 브라우어같은 환경주의 지도자나 주요 환경주의 단체의 재정을 공격하며, 이들이 화석연료 회사로부터 돈을 받아 “원자력 발전소의 폐쇄가 친환경적인 것처럼” 꾸민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또 자신의 주장에 반하는 주장을 하는 수많은 환경주의자와 지구물리학 과학자들의 동기와 평판을 공격합니다.

 

정말 언론과 환경 과학자들이 ‘인류애’에 반대할까?

셀렌버거의 언론에 대한 반감은 특별합니다.

뉴스 미디어, 편집장, 언론인은 자신들의 일상적인 환경 문제에 대한 공포감 조성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자신의 신념과 정의, 진실에 대한 직업적 책임감이라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환경운동가들이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언론인으로 위장해 이러한 보도 방식을 유지하려 노력할지 모른다고 의심한다. 나는 소셜미디어와 같은 전통적 언론의 외부에서 이런 환경 문제를 보도하는 방식에 새로운 기준을 만들고 이들에 대항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중에서도 최악은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인류에 혐오감을 가진 이들이라 공격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에너지 사용량을 극단적으로 줄이는 것과 같은 즉각적이고 급진적인 기후변화 대책을 준비하지 않는다면 인류의 종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기후변화 활동가, 언론인, IPCC 과학자 등의 주장을 접하면 그들이 진정한 인류애를 가졌거나, 아니면 오히려 그 반대되는 무언가를 가진 게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인간의 문명과 인류 그 자체를 위해 맬서스주의자와 종말론적 환경주의자와 싸워야 한다.

그는 결론에서 환경적 재해를 걱정하는 이들은 “인간의 문명을 싫어하는 이들이 가지는 일종의 잠재의식이 낳은 판타지” 놀이를 한다고 주장하며, 자신이 선호하는 대안에 반대하는 이들 또한 문명의 파괴를 바란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이는 이 분야에서 일하는 이들의 동기를 공격하는 매우 고약한 수법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는 단순한 오류가 매우 많습니다. 물론 숫자와 인용, 주장이 많은 책은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도를 넘어섭니다. 모든 오류를 지적하는 것은 이 글의 범위를 넘어서는 일일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에너지 생산에 필요한 물의 양을 나타낸 숫자가 틀렸습니다. “천연가스는 석탄보다 25–50배 가까이 물을 적게 사용한다.” 그러나 그가 인용한 문서에 나오듯, 그 숫자는 25–50이 아니라 2보다 좀 작은 값입니다.

게다가 그는 풍력이나 태양광에 모든 화석연료나 원자력보다 물이 덜 든다는 사실은 밝히지 않습니다. 기후변화와 극단적인 기상 사건에 대한 논의에서는 지구의 기온 상승과 강우량 변화가 산불이 나는 기간을 늘리는 데 영향을 미쳤다는 수많은 근거를 무시합니다. 그는 이어 원자력 발전은 “공해가 전혀 없다(zero pollution)”는 사실도 아니고 필요하지도 않은 과장된 주장을 두 번이나 반복합니다.

 

‘더 나은 미래’라는 공동의 목표

셀렌버거가 더 나은 미래를 목표로 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이는 환경과학자나 환경주의 운동가뿐 아니라 제대로 된 인간이라면 모두 마찬가지일 겁니다. 의견의 차이는 현재 위기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이 세상을 더 나은 미래로 이끌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의 차이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데올로기적 사고, 과학에 대한 오해, 그리고 전문가들을 향한 분노에 찬 인신공격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물론 최선의 길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지금 이 상태로는 지구가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넘어버릴 수 있으며 어쩌면 심각한 환경적, 사회적 붕괴가 올지 모른다는 근거를 믿는 이들이라 하더라도 종말론적 미래가 반드시 예정되어 있다는 점을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이를 피할 수 있는 행동을 우리가 해야 한다고 주장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는 기술만능주의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 또한 무제한적인 경제 발전과 기술의 혁신이 비극적인 미래를 반드시 피할 수 있게 만들어주리라는 점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두 관점이 가진 불균형에 문제의 답이 있습니다. 만약 맬서스주의자가 틀렸다 하더라도 이들의 시도는 어쨌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것입니다. 하지만 기술만능주의자가 틀렸다면 미래는 거의 분명하게 종말론적 세상이 될 겁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미래의 환경적, 사회적 재해를 파악하고, 알리고, 이를 피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은 극히 중요한 일입니다. 나는 기후변화, 담수 자원, 환경 분쟁과 같은 과학과 정책이 교차되는 분야에 40년 이상을 종사했고, 여기에 효과적이고 바람직한 해법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아직 깨끗한 물과 공중 위생 설비가 없는 수십억 명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를 공급할지 압니다. 우리는 기후변화를 늦추기 위해 온실가스 배출을 낮추는 동시에 기후변화의 영향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우리는 누구도 배를 곯지 않고 모두에게 충분한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 어떻게 농업의 효율을 높일 수 있는지 압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어떤 해결책을 우선시할 것인지, 정부와 각종 기구의 실패를 어떻게 고칠 것인지, 정책결정자를 어떻게 설득할 것인지, 그리고 안타깝게도, 더 효과적으로 빠르게 세상을 변화시킬 것인지 두고 어떻게 서로 이성적으로 대화할 것인지를 위한 적절한 노력입니다. 이 책은 이런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원문: 뉴스페퍼민트(1부/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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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검사, 누구를 떠올리며 응답하십니까? https://ppss.kr/archives/244848 Wed, 18 Aug 2021 04:31:34 +0000 http://3.36.87.144/?p=244848

한국 사회는 정말 저신뢰 사회가 맞을까?

석사 시절에 가장 마지막으로 썼던 논문의 주제다. 비록 내가 1저자이긴 했지만 연구실 내 존경하는 교수님 두 분께서 공동 저자로 참여하셨고 많은 도움을 주셔서, 실수하지 않고자 바짝 긴장해가며 몰두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콘셉트를 좀 더 자세히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허용회, 박선웅, 허태균 (2017). 저신뢰 사회를 만드는 고신뢰 기대? 가족확장성과 신뢰기준의 역할. 한국심리학회지: 문화 및 사회문제, 23(1), 75-96.

한국 사회는 대체로 다른 나라 대비 저신뢰 사회로 평가받는다. 구체적으로, 국회, 검찰, 사법부, 정치인, 잘 모르는 타인 등에 대한 신뢰 점수가 다른 나라 대비 낮다는 통계 결과가 많다.

하지만 여기에는 나라(문화)마다 가진 ‘신뢰 기준’의 차이가 고려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한국인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 사회 전반에 더 높은 신뢰 ‘기준’을 요구한다면 당연히 그 신뢰 기준을 충족하는 건 어려운 일이 되며, 따라서 결과인 신뢰 점수가 낮게 보고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때 등장했던 핵심 개념이 바로 참조집단효과(reference group effect)1였다. 참조집단효과란 비교문화 연구에서 등장한 개념으로 주관적 생각을 묻는 리커트 문항에 대한 응답 결과가 응답자의 소속 문화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내용이다. 가령 동일한 문항에 대해서도 한국인은 한국인을 참조 집단으로 삼아 응답할 것이며, 미국인은 미국인들을 참고 집단으로 삼아 응답하려 할 것이다.

이렇게 서로 ‘기준’이 다르기에 동일 문항(위 연구에서는 ‘신뢰’에 대한 질문)이라 하더라도 점수에 대한 직접 비교가 어려우며, 정확한 비교를 위해서는 신뢰 ‘기준’의 차이를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 참조집단효과 개념을 가져온 우리 연구의 아이디어였다. 인성검사에서 다음과 같은 문항이 등장했다고 하자.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똑똑한 편이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이라는 말을 보고 누구를 떠올렸는가? 가족, 친구, 지인, 직장동료, 동호회 사람들, 지역 주민, 같은 세대, 같은 성별, 한국인, 동양인, 인류(?) 등… 각자 처한 맥락에 따라, 떠올리기 쉽고 어려운 정도에 따라(availability heuristic), 혹은 또 다른 이유에 의해 각자 떠올린 대상/집단이 다를 것이다.

물론 꼭 누군가를 떠올렸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위 문항에 답변하면서 의식적으로 특정 대상/집단을 떠올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같은 문항에 대해서도 떠올리는 비교 대상이 사람마다 다르기에, 위 신뢰 연구 사례와 마찬가지로 동일 문항에 대해 같은 응답을 했더라도 직접 비교가 어려울 수 있다는 점이다.

비교 대상에 따라 ‘똑똑함’ 에 대한 주관적 응답이 달라질 수 있다.

이에 관한 흥미로운 연구가 있어서 소개해 보고자 한다. 연구자들은 참조집단효과가 개인차를 측정하는 심리검사에서도 나타나는지 확인하기 위해 관련 연구를 진행했다2. 일부분만 발췌했는데, 간략히 소개하면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연구자들은 빅5(Big5) 중 하나인 성실성(conscientiousness)을 측정하되, 조건에 따라 검사 안내(instruction)를 달리 제공했다. 아래 그림에서 1–5번까지 총 5개의 비교 조건이 만들어졌다.

  1. 참조할 집단 제공하지 않음
  2. 가족을 떠올리며 응답하게 안내
  3. 동 나이대 같은 성별의 사람들을 떠올리며 응답하게 안내
  4. 또래 친구들을 떠올리며 응답하게 안내
  5. 일반적인 다른 사람들을 떠올리며 응답하게 안내

조건에 따른 응답값의 상관분석 결과가 아래 제시되어 있다.

Crede, Bashshur, & Niehorster, 2010.

아무런 참조집단을 제시하지 않은 1번과 참조집단을 제시한 2–5번의 평균(M)이 다르며, 상관계수도 1에 가깝지 않음을 알 수 있다. (.4–.6의 상관계수로 보아 참조집단을 달리해도 응답 경향성은 비슷하지만 그렇다고 또 같지는 않은, 그런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추가로 알 수 있는 것은 ‘어떤 참조집단’을 안내했느냐에 따라 평균값이나 No.1과의 상관이 조금씩 달랐다는 점이다. 위에서 보면 1번과 3번의 평균은 유사하다. 다만 No.2는 No.1과 평균 차이가 제법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마찬가지로 No.1과 나머지 간의 상관계수도 각각 .44, .64, .39, .66 으로 서로 같지 않다.

Crede, Bashshur, & Niehorster, 2010.

이 표는 기준 관련 타당도가 참조집단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 본 것이다. 참고로 해당 연구에서는 기준 관련 타당도를 보기 위해 성실성 측정 과정에서 미루기, 건강 관련 행동에 관한 설문이 같이 이뤄졌다.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미루기(Procrastination)의 경우, 응답 점수가 높을수록 미루는 정도가 낮다고 해석해야 한다. 먼저 위 그림에서 동그라미 친 부분, 아무 참조집단이 제시되지 않은 ‘No Reference Group’ 집단을 보자.

  • 성실성 정도가 강할수록 미루기를 덜 한다는 점,
  • 건강 관련 행동 중 일부는 성실성과 관련이 덜하고(prevention health, accident control),
  • 건강 관련 행동 중 일부는 성실성과 부적 관련이 존재한다는 점이 보인다(traffic risk, substance risk).

이제 네모 친 부분을 보자. 순서대로 가족, 동 나이 동일성별, 또래 집단, 일반 사람들을 떠올리며 응답하도록 유도한 경우의 결과들이다. ‘No Reference Group’ 집단의 결과와 대략적으로 비교해보면,

  • 전체적인 방향성은 같아 보인다(성실성과 미루기가 반대 관계라는 것, 성실성과 건강 관련 행동이 정적 관계라는 것).
  • 그러나 ‘상관계수의 크기’는 조건에 따라 조금씩 다름을 알 수 있다. 가령 미루기의 경우 ‘No Reference Group’과의 상관이 가장 크며 나머지 참조집단 조건에서는 조금씩 그 수치가 낮음을 알 수 있다.

위 결과는 해당 논문 내용의 일부분일 뿐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종합해보면 1) 성격검사에서도 참조집단효과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였다. 2) 그러나 가족, 친구, 다른 일반 사람들, 또래 등 참조집단을 명시적으로 안내하는 조치가 검사 타당도 확보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이렇게 정리 가능할 듯하다.

 

마치며

성격검사를 다루다 보면 실제로 참조집단이 명시된 검사를 종종 보게 된다. 상단에 ‘○○를 떠올리며 응답’하라거나 ‘□□□와 비교해 나는’ 등의 문장으로 검사 문항이 시작된다거나 하는 경우들이다. 하지만 위에서 살폈듯 참조집단효과를 고려한 의식적 조치에는 장단점이 있다.

응시자들이 중구난방으로 떠올릴 수 있는 비교 대상을 하나로 정리해준다는 점이 장점이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다는 점은 여전히 단점으로 남는다. 가령 ‘가족’으로 제한된다 하더라도 개개인의 가족에 대한 인식, 느낌은 다를 수 있는 관계로, 여전히 비교 준거가 동일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위 논문에서 살폈듯 참조집단의 명시적 제시는 타당도를 오히려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깔끔하지 않은 결론이지만, 어쨌든 문항을 만들고 검사를 만들 때는 이런 참조집단효과에 대한 고민도 필요할 듯하다.

원문: 허용회의 브런치


참고

  1. Heine, Lehman, Peng, & Greenholtz, 2002.
  2. Crede, M., Bashshur, M., & Niehorster, S. (2010). Reference group effects in the measurement of personality and attitudes. Journal of Personality Assessment, 92(5), 390-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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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https://ppss.kr/archives/237481 Wed, 17 Mar 2021 02:03:21 +0000 http://3.36.87.144/?p=237481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애띤 손을 잡으며
「너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운 진정코 설운 대답이다.

윤동주의 시 「아우의 인상화」로 이야기를 열어본다. “너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하는 질문에 대한 아우의 엉뚱한 대답을, 시인은 “설운, 진정코 설운 대답”이라 평한다. 순진한 아우의 대답에 시인이 슬픔을 발하는 것은, 아마도 냉혹한 현실을 살아야 할 해맑은 아우의 얼굴 앞에서 느낀 안쓰러움 까닭일 테다. 한편으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올곧은 삶을 살고자 끊임없이 성찰했던 시인임을 알기에, ‘사람이 된다’는 대답이 주는 위대한 의미 앞에 서성이게 된다. 우리는 ‘사람이 되는’ 삶을 향해 지금 나아가는가?

 

사실로서의 역사와 기록으로서의 역사

이어 오늘의 문장 앞에 도달한다. 역사를 공부한다면 첫 번째로 접하게 되는 문장, 역사 교과서의 첫 장을 여는 질문, 역사 수업의 첫 번째 주제임과 동시에 인문 필수 교양서적으로 잘 알려진 에드워드 카 저작의 제목으로도 유명한 문장이다. 그래서일까, 그 답 또한 너무 잘 안다 여기고 쉽게 건너뛰는 질문이기도 하다. 사실로서의 역사, 기록으로서의 역사,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 딩동댕, 이제 본격적인 역사 이야기로 넘어가 보도록 할까?

그런데 잠시만, 이에 대해 조금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마음 급한 사람 손목을 붙들어 본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고 갑시다. 우리는 정말로 역사란 무엇인지 아나요? 학술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역사에 대한 정의에 대해 그럭저럭 공부할 수 있다. 하지만 정답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을 조금 내려놓고 나면, 각양각색의 대답이 슬며시 고개를 든다. 사람으로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삶에 대한 개똥철학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니까. 우리가 살아온 이야기가 곧 역사라고 한다면, 역사란 무엇이냐는 물음은 산다는 게 무어지? 또는 우리는 무엇이 되려니? 하는 질문의 다른 이름이 되기도 한다. 이 물음 앞에서 한 번은 고민을 해 보아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헤겔은 역사가 가진 이중적인 의미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과거에 일어난 사실 그 자체(res gestae)로서의 역사와 이야기(담론)로서의 역사(historia rerum gestarum)로. 개똥철학 이야기를 하려는 듯하더니 갑자기 머리 아픈 학술적인 이야기로 급하게 문장을 선회한 이유는, 우리 사는 이야기도 사실 이 안에 어느 정도 묶여 있기 때문이다. 인내심을 가지고 옛날 사람들의 이야기를 조금만 더 들어보자. 19세기 독일의 레오폴드 폰 랑케(Leopold von Ranke)에게는 지금 이 맥락에 어울리는 뻔한 이름이 하나 붙어 있는데,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이름,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가 그것이다. 그는 1824년 『라틴 및 게르만계 민족의 역사』라는 책을 썼는데, 책의 내용보다 서문의 문장 하나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Wie es eigentlich gewesen)을 다루고자 했다.

당대에 유행한 경험주의/실증주의를 역사학 분야에도 반영하여, 학문적인 정립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데,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인간은 오감을 통한 경험적인 관찰을 통해 세계에 대한 인식을 획득한다. 이것이 경험이다. 축적된 경험 속에서 인간은 이성을 활용하여 일종의 패턴을, 법칙성을 찾아낸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실증할 수 있는 것만이 참된 지식이며, 그렇지 않은 부분은 허구로 구분된다. 랑케는 이런 철학적인 관점에서, 역사학의 궁극적인 목표를 역사 지식의 획득, 즉 원사료(original source)를 이용하여 과거 사실을 밝혀내는 것 자체로 삼았다. 물론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그는 헤겔과 마찬가지로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신의 섭리라는 식의, 실증주의 관점에서 ‘허구’에 해당하는 주장을 공공연하게 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우리에게 그는 사실로서의 역사의 대명사로 남았다.

당연히 반론이 뒤따랐다. 이런 역사는 인간의 복잡하고 다채로운 삶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인도의 시인 타고르(Tagore)는 역사학자이기도 했는데, 랑케식의 역사에 국한하지 않는 넓은 포용력의 필요성을 이야기했다. 역사 지식의 형성 과정에 대한 반론도 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과거의 사실이 있다고 치자. 그냥 있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이지 엄청 많이 있다. 그럼 그걸 다 어떻게 공부해? 다행히도 그 무수한 과거의 사실 중 일부만이 운 좋게 사료에 담기게 된다. 이런 식으로 역사 기록을 남기는 사람들을 역사가라고 부른다.

역사가는 수많은 사실 중 어떤 것을 기록으로 남기는가? 그야 모든 것을 다 쓸 수는 없으니까, 그 자신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취사선택하기 마련이다. 어? 취사선택이라고? 그러면 이 과정에서는, 그렇다. 분명히 역사가라는 사람의 주관이 개입한다. 랑케는 신교도였다. 그래서 교황청의 자료 보관소 열람을 거절당했다. 교황들의 행적을 다룬 랑케의 기록에서, 교황청에 대해 호의적인 대목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기록에는 주관이 들어간다. 눈에 보이게 드러날 수도 있고, 선택과 배제의 작업을 통해 은밀하게 숨겨 놓을 수도 있다. 선택과 배제의 작업이 드러나지 않도록 매우 은밀하게 숨겨 놓은 대표적인 책에는……, 충분히 예상 가능했으려나? 역사 교과서가 있다.

일기를 쓴다. 일기는 역사 기록의 아주 좋은 예가 된다. 과거의 무수한 사실에 대한 취사선택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 어려서부터 일기 쓰기를 강요당하면서 배운 바가 있다. 좋은 일기란? 아침 기상부터 저녁 취침까지 시간 순서대로 있었던 일들을 쭉 적는 것은 결코 좋은 일기가 아니다. 그날의 일 중에서 의미 있는 것들, 좋았던 것들,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것들을 위주로 자신의 생각을 적는 것이 좋은 일기라고 배웠다.

생각해보면 사실 아침부터 했던 일들을 쭉 적고 싶어도, 일어나서 눈을 몇 번 비볐는지, 화장실에 들어가 몇 분을 보냈는지, 세수를 먼저 했는지 양치를 먼저 했는지 같은 것들을 일일이 적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연스럽게 기록의 대상으로 어떠한 사건을 선택하고 어떠한 사건을 배제하게 된다. 작성자의 가치관, 주관성의 개입이 이루어지는 대목이다. 의도한 바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정리하자면, 과거의 사실은 과거의 기록을 통해서만 후대에 전해지는데, 과거의 기록 자체가 주관성을 반드시 포함한다는 말이 된다.

과거의 기록을 바탕으로 경험해 본 적 없는 과거를 재구성해야 하는 현대의 우리들은 그래서 주춤하게 된다. 과거인이 기록하지 않은 내용은 영원히 알 수 없다. 이미 생산의 단계에서부터 주관이 개입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역사 기록을 읽는 우리 역시 주관으로 똘똘 뭉친 존재이다. 스스로의 지식과 스스로를 둘러싼 환경이라는 편견의 안경을 쓴 상태에서 과거의 기록들을 읽어 나간다. 오늘날의 우리 역시 무수한 기록 중 어떤 부분을 골라내고(선택), 어떤 부분을 무시하며(배제), 주관의 기록에 자신의 주관을 더해 나간다. 그렇다면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 담은 역사라는 것은 과연 가능한 작업인가? 여기까지 오면 랑케에게 과감하게 마지막 빠이빠이를 외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잠깐, 누군가의 한마디를 듣고 나니 랑케를 완전히 떠나보내는 것도 꽤 망설여진다. 과거의 사실에 닿는 것이 어차피 불가능한 일임을 깨달은 김에 깨끗이 보내주려 하였는데, 어딘가 석연치 않다. 많이 들어 본 단어가 눈앞에 등장한다. 역사 왜곡. 아무래도 많이 당해 본지라 이 단어 앞에서는 불편한 감정을 숨기기가 어려워진다. 과거의 사실을 무시해 버린다면 창작의 영역으로, 말마따나 소설을 쓰시는 영역에 닿게 된다. 실존 인물이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 사극이라면 역사는 수식어가 들어가는 게 어색한 것처럼 말이다.

가상의 역사 드라마…라고 부르면 되려나?

과거의 사실에 닿기 위한 노력도, 그 과정에서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는 인정도 모두 필요하다. 어렵게 어렵게, 드디어 정답에 닿는다. 바로 저 유명한 명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에 도달하는 순간이다. 역사는 과거(의 사실)와 현재(과거의 사실을 기록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오늘날의 우리)의 끊임없는(지속적인) 대화(상호작용)이다. 깔끔하고, 아름답다. 아름다운 정의다.

 

개똥철학: 삶과 이야기의 집합

History is a continuous process of interaction between the historian and his facts, an unending dialogue between the present and the past.

완벽한 정의를 찾았기에 여기에서 마무리 짓는다면 속 편할 텐데 그럴 작정이었다면 애초에 이 글을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과거의 사실도 현재의 우리도 모두 중요하다는 견해는 물론 타당하다. 하지만 저 명제의 맹점은, 저것이 비유라는 데 있다. 딴지는 여기서 시작한다.

에드워드 카는 대화라는 비유로 둘 사이의 연관을 설명했다. 대화, 둘 이상의 실체 사이의 상호적인 언어 소통, 너도 한마디, 나도 한마디 나누며 오고 가는 그것이 대화다. 가만 생각해보자. 과거의 사실과 오늘날 우리 사이에는 어떠한 종류의 대화가 오고 갈 수 있을까?

대화라는 게 사실 참 어렵다. 오늘 했던 대화들을 살펴볼까. 내면 깊숙이 눌러 놓은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상대의 기분도 고려해야 하고, 말을 하는 자기 자신의 체면도 살펴야 한다. 감정이 얼굴 밖으로 드러나면 미성숙한 사람, 표현을 감추고 꽁꽁 숨기면 음흉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 과거의 사실과 한 번 대화를 해 보자. 적어도 눈치 볼 일은 없어서 좋겠구나.

그런데 하다 보니 그게 아니다. 과거라는 이 친구는 꿀 먹은 벙어리다. 편식쟁이, 운동 부족의 비만아, 성인병 환자에 과로를 일삼아 건강을 망친 군주, 조선조 세종에 대해 기록을 남겨 보려 한다. 세종 원년의 기록. 상왕으로 물러난 아버지 태종이 아들 임금에게 잔소리를 한다. “아들이 사냥을 좋아하지 않는 건 아는데, 뚱뚱해서 운동을 좀 해야 하므로 사냥을 시켜야겠다.(주상은 사냥을 좋아하지 않으시나, 몸이 비중(肥重)하시니 마땅히 때때로 나와 노니셔서 몸을 존절히 하셔야 하겠으며, [세종 즉위년 10월 9일])” 태종은 아들 걱정을 많이 한 군주였다.

세종 4년의 기록. 아버지의 상을 지키며 과로로 고생하는 임금에게 신하들이 청한다. “아버지(선왕)께서도 예전에 임금님이 고기 없이는 밥 안 드시는 거 알고 나중에 당신 돌아가신 다음에도 에프엠대로 규정 다 따르지 말고 고기 먹으라고 하셨잖아요.(‘주상은 고기가 아니면 진지를 들지 못하니, 내가 죽은 후 권도를 좇아 상제(喪制)를 마치라.’고 하셨으니, 이는 곧 전하께서 예법을 지키시고 지나치게 슬퍼하시므로, 앞으로 건강을 해하실까 미리 아시고 염려하셨사오니, [세종 4년 11월 1일])” 독서를 많이 하여 생겼다는 안질도 실은 당뇨 합병증 증세일 수도 있다고 한다.

세종은 식욕만큼이나 성욕에도 충실한 임금이었다. 7명의 부인에게서 낳은 자식이 무려 18남 4녀. 자녀의 수가 조선 임금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같은 이야기만으로 세종의 일대기를 정리한다면 어떨까. 거기다 세종에 대한 여러 기록과 다른 왕족들의 초상화를 참고하여 복원하였다는 저 어진을 덧붙이며 이야기를 끝맺는다면.

못난이 비만 왕 세종 어진. 다른 세종 어진과 마찬가지로 후대의 복원도 중 하나다.

이 후손 놈이 누구 덕에 편하게 글 쓰는지도 모르느냐, 하고 관 뚜껑을 박차고 일어나 달려들어도 참 좋을 텐데, 당연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잘한 것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것은 다 제쳐두고! 하고 과거는 말하지 않는다. 과거는 나서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는 이루어질 수 없고, 이루어진 적도 없다. 다만 침묵하는 과거 앞에 오늘날 우리의 독백만 허공을 가를 뿐이다.

그렇다면 에드워드 카의 정의는? 그것은 어쩌면 과거와 현재의 불공평하고 부조리한 관계를 아름답게 포장한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주관이 담겨 있지만 여전히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는 것이 역사 서술이라는 모순된 명제를, 마치 진실인 양 은폐하여 온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렴 어떠한가. 어쨌든 과거의 사실에는 닿기란 불가능하고, 오늘 우리가 떠들어대는 소리가 소음뿐이라 하더라도 막을 방도는 없는데.

역사란 무엇인가? 잘 모르겠다.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그것을 거스를 방법은 없다. 스티븐 호킹 박사가 타임머신이 가능하다고 했을 때, 잠시 설렘을 느낀 것은 미래가 궁금해서가 아니었다. 과거의 어느 시점을 다시 볼 수 있다면, 고스란히 다시 재현해 낼 수 있다면 하는 기대였는데 역시나, 과거로의 시간 여행은 이론적으로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엔트로피는 계속 늘어나고……하는 부분들은 문송한 관계로 설명하기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다른 이야기는 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역사를 통해, 지나간 시간의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할까?

좋아하는 사진이 한 장 있다. 내게 역사의 이유가 되어 준 사진이다. 교과서에도 실릴 만큼 원래부터 유명한 사진이었고, 드라마의 마지막을 장식한 덕분에 더욱 유명해진 사진이다. 1904년 영국인 기자 하나가 러일 전쟁을 취재하러 한반도에 왔다. 작은 나라는 아직 망하지 않았지만, 이제 이를 누가 차지할지가 곧 결정 날 판국이었다.

승자가 결정 난 이후 그는 이 나라를 다시 찾았다. 을사늑약이 맺어졌고 작은 나라는 보호국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까지 획득한 다음의 일이었다. 제국주의의 화살은 이 나라의 형식적인 군대마저 흩어 버렸다. 해산된 군인들은 자신들만의 싸움을 계속했다. 정미의병, 후기의병 같은 이름으로 외우곤 했던 이들이다. 영국인 기자는 이들이 꽤 인상 깊었던 모양이다. 여기저기 어려운 곳을 쏘다니며 취재를 하였고, 그 덕에 그들의 모습을 사진 한 장에 남길 수 있었다. 기자는 이들과의 만남과 대화를 기록으로도 남겼다.

“당신들이 여기에 있는 줄 알면 일본군이 틀림없이 이리로 올 텐데, 야간 공격에 대한 어떤 경계 태세를 취하나요? 보초는 세워 놓았나요? 개울 쪽 도로는 방비합니까?”

“보초는 필요 없습니다. 주위에 있는 한국인 전부가 우리를 위해 감시를 해줍니다.”

나는 다른 의병군의 조직에 대해 여러 가지로 그에게 물어보았다. 그들은 도대체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 것일까? 그 대장이 나에게 해준 이야기로 미루어 보면 그들은 실제로 전혀 조직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각각 흩어져 있는 몇 개의 무리들이 아주 엉성하게 결합되어 있는 것에 불과했다. 각지의 부유한 사람들이 기금을 제공했다. 그것을 그가 산재해 있는 한두 사람의 의병에게 은밀히 건네주면 그들이 각각 자기 주위에서 자기편을 모으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들의 전도가 반드시 밝은 것만은 아님을 인정하였다.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좋습니다. 일본의 노예로 살기보다는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죽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 F. A. 맥켄지 저, 김창수 역, 『조선의 비극』, 을유문화사, 1984

을사늑약과 함께, 그들은 나라가 망할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무기를 들었다. 그러나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전투를 앞둔 이들은 담담했다. 정신적인 무장, 패기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 다가올 죽음을 순순히 맞이할 심산이었다. 그럼에도 그 이유는 분명히 알았다. 노예로 살기보다 자유민으로 죽겠다. 이들은 임금을 위해, 쇠약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말하지 않는다. 애국심이라는 말로는 전부 담아낼 수 없는 인간의 존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진의 왼쪽 앞줄에서 세 번째, 그러쥔 총을 앞세우고 카메라를 노려보는 아이가 있다. 잘해야 10대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모습이다. 엄마 손에 억지로 깨워져, 절반쯤 감긴 눈을 해서 학교에 가고, 편의점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학원 뺑뺑이를 돌았을 그럴 나이. 똑같이 이 땅을 살았던 소년에게 다른 것이 있다면 100년 일찍 태어났다는 사실뿐이다. 전혀 다른 상황과 환경 속을 살아야만 했던 인생의 변수는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할까? 그는 그 스스로의 선택으로 펜 대신 총을 들었고, 외국인의 카메라 속의 자신의 족적을 남긴 후 머지않아 죽을 수밖에 없을 거라던 자신의 예측대로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역사다. 삶의 이야기, 당당할 수도, 비겁할 수도 있었던 무수한 인생들과 그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 속에서 행하였던 선택의 집합체. 그래서 모든 역사는 숭고하다. 의미가 있다. 하나의 짤막한 문장으로 요약된 기록 속에는, 숱한 인생의 이야기들이 빼곡하게 숨 쉰다. 40만 명을 참수했다는 동양 역사서의 한 대목을 읽어 내는 데는 수초도 채 걸리지 않지만, 40만의 시신이 널려 있는 광경은 그 누구도 쉽게 상상해 내기 어렵다. 그들이 살아온 시간들, 그들이 누렸던 감정들,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또 큰 산이 되어 쌓이고 큰 내가 되어 흘러넘친다. 과거의 사람들은, 영웅들은, 민초들은 특출 나서, 유별나서 그 상황과 환경 앞에 맞닥뜨린 것은 아니다. 유한한 인간으로서, 오늘의 우리는 저들과 다른가?

가끔 동래 부사 송상현을 생각해 본다. 눈앞에 나타난 수많은 적군을 바라보는 그는 두렵지 않았을까? 필경 두려웠을 것이다. 자신의 목숨이, 가족들의 안위가 염려되었으리라. 무엇보다 자신이 죽은 이후의 상황을 가늠할 수 없음이 가장 두려웠을 것이다. 동래성을 포위한 왜장에게 그가 서신을 전한다. “싸우다 죽는 것은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戰死易假道難)” 우습게도 우리의 상황과 환경은 꼭 우리의 능력 범위 바깥에서 우리를 둘러싸곤 한다. 눈을 떠 보니 어느 순간 성 밖을 가득 메운 적의 군대를 바라보는 심경.

정도는 다를지언정, 벽에 부딪히고 이룰 수 없는 욕망에 매일을 좌절하는 것이 우리 삶의 연속이다. 그때 우리는 어떤 말을 남길 수 있을 것인가? 역사는 그 길을 보여준다. 역사는 우리와 같은 사람의 이야기이면서도, 우리보다 먼저 삶이라는 것을 경험해 보았던 그네들의 이야기인 까닭이다.

원문: 한겨울의 브런치(1부/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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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척석사’가 되고 싶은 당신에게 https://ppss.kr/archives/236719 Tue, 16 Mar 2021 06:35:41 +0000 http://3.36.87.144/?p=236719 ※ 오마이뉴스에도 발행된 글입니다.


출처: YouTube/Neuro Transmissions

서른이 넘어 석사 과정 대학원 신입생이 되었다. 배움에 늦음은 없다지만 주변 또래 친구들이 박사 과정을 밟았기에 신경이 아예 쓰이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1년 전부터 아내가 대학원 입학을 계속 권유하긴 했지만 대학원에 진학할 생각은 없었다. 명석한 편도 아니고 가만히 앉아서 하는 일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대학원생이 되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 것도 아니고 갑자기 명석해진 것도 않았는데 말이다.

우연찮게 취미로 글쓰기를 하면서 학문적인 호기심이 커졌고 의미 있는 논문을 써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 대학원에 관심이 생겼다. 대학원 접수를 앞두고 주변 대학원생 친구들에게 대학원 생활을 묻기도 하고 온라인 커뮤니티와 카페를 기웃기웃 거리며 정보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회사의 형태와 분위기가 가지각색이듯 대학원의 형태와 분위기도 다양했다. 고심 끝에 대학원과 전공을 결정했고 대학원에 지원해보기로 결심했다.

1년 전부터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던 교수님이 있었다. 저서를 읽고 칼럼을 꾸준히 챙겨봤다. 존경심이 절로 들었다. 다른 학교도 알아봤지만 내가 지향하는 바대로 연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결국 해당 교수님이 있는 학교에만 지원하기로 했다. 면접과 연구실 컨택 과정을 통해 원하는 교수님 연구실에 들어가게 되었다.

합격 통보와 연구실이 결정되고서 『대학원생 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이라는 책을 읽었다. 아직 학기가 시작된 건 아니어서 이 책을 집어 든 게 늦은 시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대학원에 지원하기 전에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을 정도로 유용한 정보와 이야기들이 가득 담겨 있다.

『대학원생 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은 대학원생이었던 3명의 저자가 전반적인 대학원 생활에 대해 풀어 써놓은 책이다. 이 중 권창현 저자는 교수다. 덕분에 교수 입장에서 바라본 대학원생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연구한다는 것은 인류 지식의 경계를 조금, 아주 조금 더 확장한다는 것이다.

 

대학원생은 공부하는 사람인가요? 일하는 사람인가요?

대학원생은 연구자다. 대학원생은 대학원에 소속되어 있기도 하지만 대학원 내 교수님의 연구실에 소속되어 있기도 하다. 연구실은 연구하는 공간이다. 그러므로 대학원생은 대학원 강의를 수강하는 학생이기도 하지만 연구실에 속한 연구원, 연구자다.

따라서 연구 방향과 주제가 설정된다면 연구실과 지도교수 고민은 자연스레 줄어들 것이다. 물론 내가 가고 싶다고 해서 연구실과 지도교수를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교수님이 ‘합격’ 통보를 해줘야 한다. 솔직한 마음으로 ‘내 돈 주고 대학원에 입학하는데 뭐 이리 들어가기 어려운가?’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책에는 입학 전 연구실과 지도 교수 결정에 관한 고민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학교의 이름보다 연구실과 지도교수가 중요하고 입학 전에는 반드시 연구실을 컨택하고 지도교수를 만나볼 것을 권했다.

물론 대학원 입학의 목적이 ‘연구’가 아니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력서 한 줄을 늘리기 위함이라면 학교 이름이 중요할 테고 인적 네트워크를 확장하기 위함이라면 아는 교수님과 지인들이 있는 학교에 입학하는 게 건설적인 선택이다.

대학원은 학부와는 다르게 ‘지도교수’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지도교수의 연구 주제와 방향이 곧 연구실의 주제와 방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도교수는 대학원 내에서 ‘절대권력’으로 불린다. 『대학원생 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에는 좋은 지도 교수를 선택하는 법이 나온다. 교수의 연구 경력과 성과 그리고 인품들에 따라 유머러스하게 항목을 나누었다.

1위 – 떠오르는 별

2위 – 통제광, 과학 오타쿠

4위 – 반쯤 신

5위 – 달변가

6위 – 노예 주인, 구멍가게 주인, 느긋한 교수

9위 – 사이코

  • 61–65쪽

사실 지도교수를 잘 선택하려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는 게 더 중요하다. 물론 9위 사이코와는 그 누구도 맞지 않을 테니 피하는 게 상책이지만 자신에게 맞는 스타일의 교수가 있는 법이다. 내가 조급한 사람이라면 느릿한 교수와는 맞지 않을 테고 통제당하는 걸 싫어한다면 꼼꼼하게 챙겨주고 통제하는 교수와는 맞지 않을 테다. 나는 주로 개인적인 연구를 확장하고 심화하고 싶은데 연구실 교수는 프로젝트를 계속 따와서 연구실을 바쁘게 만든다면 이 또한 맞지 않을 테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한 고민을 끝내면 지도교수를 선택하는 과정도 수월해지리라 생각한다.

연구실 선택도 마찬가지다. 질서가 잘 잡혀있고 체계적인 연구실은 능동적인 연구 활동의 폭이 줄어든다. 반면 개인의 시간을 자유롭게 보장해주는 연구실은 능동적인 연구 생활이 가능하겠지만 그만큼 길을 헤맬 가능성도 매우 높다. 삽질할 가능성이 매우 높단 뜻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삽질이 비효율적인 행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물도 많이 파 본 사람이 어디가 물이 나올만한 곳인지 잘 알기 때문에 삽질은 피와 살이 되리라 믿는다.

나는 대학원 지원 전부터 프로젝트에 대한 반감이 있었는데 막상 여러 이야기를 듣다 보니 프로젝트를 통해 석사 학위 논문을 발전시키는 사례가 꽤 많다고 한다. 좋은 기회의 프로젝트가 생기면 고민해봐야겠다.

석사 학위는 교수님이 떠먹여 주다시피 하고 박사 학위는 스스로 개척하는 것과 같다고 흔히들 말한다. 따라서 이 점을 감안하고 지도교수와 연구실을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물론 정답은 없다. 길이야 그냥 걸어가면 새로운 길이 만들어지는 법이니까.

 

자유와 방종의 차이는 대학원생의 자발성과 책임감이 결정짓는다

프로젝트가 바삐 돌아가는 연구실에서 9to6는 필수이고 야근이 기본일 수도 있다. 하지만 프로젝트가 따로 없는 연구실은 시간이 남아돈다. 종일 딴짓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다. 물론 이에 따른 결과 또한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무한한 자유가 누군가에게는 타락의 지름길이 되기도 하며 누군가에게는 창조적인 학문 활동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책에서도 대학원생에게 가장 필요한 태도는 ‘자발성’과 ‘책임감’이라고 강조한다. 자기 연구를 자발적으로 수행하고 인간관계와 교수님과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자기 성향에 따라 지도교수와 연구실을 잘 선택하는 게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나는 양질의 논문을 양껏 쓰기 위해 대학원에 입학하기로 했다. 『대학원생 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을 읽으며 주로 논문을 쓰는 노하우를 집중적으로 살펴보며 꼼꼼하게 메모했다. 이 책이 논문을 쓰는 법에 대한 책은 아니지만 논문에 대해 1도 모르는 나 같은 초짜에게는 매우 귀한 자료를 담은 책이었다.

논문 쓰기에 대해 많은 자료가 있었지만 세 가지만 요약해본다.

첫째, 첫 번째 논문은 최대한 빨리 써라.

1단계: 가설 세우기, 실험하기, 데이터 정리

2단계: 논문 쓰기, 그림 그리기, 영어 첨삭, 논문 투고

3단계: 수정하기, 추가 실험하기, 재투고하기

  • 189쪽

논문을 쓰고 투고하는 사이클을 최대한 빨리 경험하는 게 논문을 쓰는 데 도움이 된다. 나는 이 첫 번째 논문을 최대한 빨리 쓰기 위해 입학하지도 않은 현재, 논문을 쓰기 위해 노력한다. 지금 넘치는 의욕 때문에 예상보다 일찍 번아웃을 경험할지도 모르지만 지도교수님께 이런 상황을 말씀드렸고 조언을 구했다. 일주일간 고민 끝에 목차와 선행연구 목록을 정리한 A4용지 두 장을 들고 교수님을 찾아뵈었다.

교수님은 연구의 방향 그리고 논문에 대한 조언을 마구 쏟아주셨다. 교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논문 쓰기가 한 발짝 진보한 건 아니었지만 어떻게 연구 주제를 잡을지에 대한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 안 그래도 활활 타오르는 의욕에 교수님은 기름을 부어주셨다. 논문이 언제 완성될지 모르겠지만 학기 전을 활용해서 개인 연구를 최대한 진전시켜볼 생각이다.

둘째, 아이디어를 남에게 이야기하라.

결국 아이디어를 말하고 안 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 344쪽

단순히 아이디어를 가진 것과 아이디어를 ‘논문화’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논문과 아이디어 대한 피드백을 주고받을 스터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때론 함께 논문을 써도 되고 따로 논문을 쓰더라도 서로에게 피드백을 주면 윈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논문의 구조를 파악하라.

나는 이런 문제를 풀 거야(abstract)

사실 이 문제는 이런 동기에서 연구가 시작된 건데(introduction)

관련해서 이런저런 접근들이 있었지 (related works)

난 이런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해보려고 하는데(method)

정말 이게 효과적인지 실험도 해봤어(experiment)

실험 결과는 이렇게 해석할 수 있지(discussion)

마지막으로 너를 위해 요약해줄게(conclusion)

  • 68쪽

때로 논문은 하나의 단행본으로 나와도 부족할 양이 아니기도 하다. 내용은 학문적 가치를 지녀야 하고 논리성을 띠어야 한다. 양만 채워서도, 질만 채워서도 안 된다.

논문에 대해 막막하던 차에 이 책을 펼치고서 논문의 구조를 맛보기라도 할 수 있었다. ‘어떤 동기로 연구를 시작했는지, 어떤 연구를 할 건지, 어떤 연구 방식으로 연구할 건지, 결론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쉽게 이야기해준다. 마침 교수님과 미팅 때 논문에 관한 책을 읽어볼 것을 권유하셔서 논문에 대해 공부하면서 관심 있는 연구 논문들을 읽어볼 생각이다.

대학원 입학 결정 전부터 연구실과 지도교수가 결정된 지금까지도 막막함의 연속이다. 앞으로 대학원 생활이 이런 막막함의 연속일지도 모르겠다. 책을 통해 온통 암흑으로 가득 찬 대학원 생활에 일부분 빛이 비치었다. 『대학원생 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은 아무것도 예상이 되지 않고 막막한 대학원생에게 도움이 될 책이다.

책을 읽는다고 모든 궁금증이 해결되진 않겠지만 그래도 이 책이 대학원생 라이프의 든든한 친구가 되어줄 것이라 믿는다. 혹시 대학원에 지원할 예정이거나 이제 막 대학원에 입학했다면 『대학원생 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일독을 권한다.

원문: 현우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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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이 얼얼할 때까지 영어를 떠들게 된다: 하버드생이 만든 말하기 앱 ‘스픽’ 체험기 https://ppss.kr/archives/233403 Mon, 11 Jan 2021 04:30:52 +0000 http://3.36.87.144/?p=233403 저는 영문학을 전공했습니다. 학점을 잘 받는 것과 영어를 잘하는 건 별개입니다. 순수 한국에서 자란 한국인이, 영어를 잘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계속 영어에 미련이 남아, 영어 공부에 도전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실패해왔죠. 제가 실패한 유형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아직도 이 수준…

와썹 콘텐츠

광고 영상에서 “아직도 미국인에게 How are you 하니? 우리는 Whassup 쓴다! 니가 쓰는 영어는 미국인이 못 알아들어!”라며 디스를 해서 결제했지요. 덕택에 교과서에 없던 표현을 배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실례합니다, 근처 병원이 어디에 있지요?”라는 표현도 못 하는데, How are you든 Whassup 이든,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전화영어

그래서 원어민과 전화로 이야기하는 서비스를 신청했습니다. 그러나 영어가 힘든 저는, 전화를 거는 것조차 부담스럽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뚫리지 않은 입으로는, 결국 주어진 지문을 읽고 반복하는 회화학원과 크게 다르지 않았죠. 어느 정도 회화는 되는데, 말할 기회가 부족하다면 좋은 선택이 될 것 같습니다.

 

영어로 말문을 트이게 해준 특이한 앱

최근에 스픽(Speak)이라는 앱을 알게 됐습니다. 크게는 1) 수업 5–6분, 2) 따라 하기 8–9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수업 1분 동안은 여타 영어 앱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앱에서 말을 시킨다! 내가 소리 내 읽으면 알아듣는다.
스마트폰으로 공부하면 끊임없이 카톡과 인스타의 유혹에 시달립니다. 그럴 때, 이 말하기 하나로 집중력이 생깁니다. 집중력뿐 아니라, 입을 열게 되는 경험 자체가 놀랍습니다. 말하기 수업이야 유튜브에도 좋은 게 많지만 막상 입을 열려면 어색하죠. 스픽은 끊임없이 입을 열게 합니다.

 

지칠 때까지 말을 시켜서 문장과 표현이 입에 붙는다

수업 뒤엔 배운 표현들을 반복해서 말하게 합니다. 이런 이유로 계속 말을 하게 됩니다. 전화영어는 상대가 사람이라 오히려 좀 부담스러웠는데, AI 앞이니 오히려 입을 열기 편하기도 했습니다.

퀴즈까지 내주며 집중력을 높인다.

 

제대로 표현하라고 피드백까지 준다

여기서 또 놀라웠던 게…

피드백이 돌아옵니다. AI가 발음을 알아먹고 칭찬도 합니다;;;

그 피드백이 은근 정확합니다. 예로, He is의 H 발음이 뭉개져서 is가 늘어난 것처럼 ‘이이즈’ 같이 말한다거나, L과 R이 꼬이면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며, 제대로 발음하라고 합니다.

정확히 발음한 No와 not은 초록색으로, 잘못 발음한 she’s는 흐리게 뜬다.

예로 위의 경우, “she’s”가 계속해서 틀리면 왜 틀렸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제 경우에는 she와 ‘s의 연음 처리를 제대로 못했던 걸 알게 되어 표현을 고칠 수 있었습니다.

 

자연스러운 대화로 상대와 대화하는 느낌을 준다

이렇게 AI와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난 후, 원어민 강사들과 대화하는 듯한 연출의 콘텐츠가 있습니다. 질의응답식으로 외국인 배우들이 나와 영상에서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변을 수업 콘텐츠에 따라 맞게 해보는 거죠.

부담스러운 아이컨택트.
한국 음식에 대한 얘기를 나누기도 합니다.

 

질문에 답변까지 해주는 신기한 영어 앱 

보통 영어 앱은 일방적으로 수업을 제공하고 끝인데, 스픽은 질문도 가능합니다. 저는 질문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다른 분들이 남긴 질문과 선생님의 답변을 보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영문과 졸업한 나도 몰랐다;;;

 

공부량을 정확히 체크해주는 싱기방기

이렇게 7일간 수업을 꾸준히 해보니, 말하기 반복량이 생각보다 많아서 놀랐습니다. 저는 7일간 1,093개의 문장을 말했다고 하는군요. 매일 아침 학원에 갈 때도, 이렇게 많이 말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떠들어대니, 표현이 입에 붙을 수밖에…

 

단점도 있지만, 말하기 반복 학습은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경험

단점도 있습니다. 영어의 어느 부분이 인식이 안 되었는지는 알겠는데, 왜 틀렸는지는 알려주지 않습니다. 물론 올바른 발음을 반복적으로 따라 하며, 무엇이 잘못됐는지 스스로 곱씹는 재미도 있기는 하지요.

사실 뭐든 꾸준히 하면 다 성과가 납니다. 다만 그러기에 우리의 의지력이 약해서, PT나 과외를 받고는 하죠. 스픽은 그 수준까진 아니겠지만, 저렴한 가격으로 연습량을 확보하는 데에는 충분한 앱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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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이데아’의 라면을 끓이다 https://ppss.kr/archives/233339 Fri, 08 Jan 2021 06:55:35 +0000 http://3.36.87.144/?p=233339 내가 비로소 플라톤의 철학을 이해하게 된 것은 군복무를 하던 시절 처음 맛본 어느 혁명적인 인스턴트 면요리 덕분이었다. 나가사키 짬뽕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녀석은 당시 백색국물 또는 하얀국물 라면이라 불리며 꼬꼬면, 기스면 등과 함께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중이었다. 마음껏 움직일 자유도, 새로운 물건을 살 방법도 없었던 우리는 몇날 며칠을 선임하사 옆에서 치근덕댄 끝에 나가사키 짬뽕 몇 봉지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쫄깃한 면발은 물론이거니와 시원한 국물, 게다가 큼직한 해물 건더기까지! 녀석을 접한 그곳이 ‘싸제(사회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음식을 군대에선 이렇게 부른다)’ 음식은 다 맛있게 느껴진다는 군대라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그 맛은 가히 감동이었다. 후루룩 쩝쩝. 그렇게 정신없이 면과 국물을 넘기고 조금씩 배가 불러오기 시작할 즈음, 뜬금없는 고민 하나가 내 머릿속을 맴돌기 시작했다.

근데 이 시키, 라면이야 짬뽕이야?

??

 

나가사키 짬뽕, 라면일까 짬뽕일까?

논란의 여지는 많았다. 재빨리 이 녀석이 짬뽕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한 좌뇌는 이름 말미에 붙은 ‘짬뽕’이라는 두 글자와 기존의 라면과는 차별화된 국물 색깔에 주목했다. 반면 라면이 확실하다고 주장한 우뇌는 그럼 먼저 나온 ‘오징어 짬뽕도 짬뽕이냐, 게다가 자기들도 백색 국물 라면이라고 했지 짬뽕이라고 말한 적 없지 않냐’며 좌뇌의 주장을 강한 어조로 반박했다. 결국 결정권은 심신 전반의 의견을 종합한 나의 몫.

음… 이유는 모르겠고… 이거 그냥 라면 맞는데?

나뿐 아니라 그날 함께 나가사키 짬뽕을 먹은 부대원 모두 우리가 방금 먹은 ‘그것’이 짬뽕 아닌 라면이 확실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아니, 사실 고민할 필요도 명확한 이유를 찾을 필요도 없었다. 우리 가슴 속의 무언가를 통해 확실하게 느껴졌기 때문. 마치 얼굴도, 목소리도 알 수 없지만 무대 앞에 나와 “우리 어머니가 확실합니다!”라며 괴성을 지르고야 마는 어느 국군장병의 모습처럼 말이다.

 

나가사키 짬뽕이 결코 짬뽕이 아닌 이유

플라톤은 자신의 대표적 저서인 《국가》를 통해 우리가 나가사키 짬뽕을 라면이라고 느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밝혀낸다. 그의 대표적 세계관인 ‘이데아론’을 통해서 말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라면이 존재한다. 신라면, 삼양라면, 안성탕면 등등. 이데아란 말하자면 이런 모든 라면들을 라면이라 부를 수 있는 단 하나의 근거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에 따르면 라면들은 생김새나 맛, 조리법 등에서 차이를 가지지만 라면이라고 불릴만한 무언가를 공유한다. 이들이 공유하는 것이 이상적인 라면, 즉 라면 ‘이데아’다.

만약 라면의 이데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많은 라면이 다 ‘라면’이라는 사실을 알 수 없다. 즉 라면의 이데아가 없다면 우리는 하얀 국물의 라면과 빨간 국물의 라면이 전혀 다른 음식이라고 생각할 거라는 것이다.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라면들은 이데아 라면의 불완전한 복사물일 뿐이다.

아직 잘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가 든 예를 하나 더 살펴봐도 좋을 것 같다. 먼저 동굴이 하나 있다고 생각해보자. 이곳에 갇힌 사람들은 사슬에 묶이고 머리가 고정된 탓에 평생 동굴의 벽면만 바라보고 살아간다. 그들 뒤에는 불이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엔 길이 하나 있어서 그곳을 지나는 사람과 동물 모형의 그림자가 벽면에 드리워지게 된다. 물론 길을 걷다 출출함을 느낀 몇몇 사람 덕분에 가끔은 라면 그림자도 비쳤을 게다(못 믿겠다면 그 길 한 켠에 편의점이라도 하나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런 탓에 이들은 자신이 평생 보아온 라면의 그림자를 진짜 라면의 모습이라고 믿게 된다.

그러다 어느 날, 한 사람이 풀려나 동굴 반대편을 향하게 된다. 처음엔 눈이 부셔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조금씩 환한 빛에 적응하기 시작할 게다. 그는 곧 태양빛으로 가득한 동굴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그곳에서 자신이 평생 라면이라 믿었던 것은 고작 라면의 그림자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된다.

그는 다시 동굴로 돌아와 전과 같은 자리에 앉았지만 더 이상 어둠에 익숙하지 않다. 이전처럼 그림자들을 자세히 살피기가 어려워 오히려 웃음거리만 될 뿐이다. 동굴의 벽면 외에 아무것도 보지 못한 친구들은 그가 불쌍하기만 할 것이다. 동굴 밖을 다녀온 뒤로 시력이 떨어진데다 라면(의 그림자)을 보고도 군침조차 흘리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아무리 진짜 라면을 보았다고 큰 소리 쳐도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는다. 그의 친구들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자신들이 바라보는 라면의 그림자에 만족한 채 평생을 살아갈 뿐이다.

 

그는 대체 왜 이데아를 말했을까?

사실 플라톤이 고작 라면의 실체 하나 밝히려고 끙끙대며 그 두꺼운 책들을 쓰진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이론을 통해 세상이 보다 살기 좋은 곳으로, 개인이 더 도덕적이며 이성적인 인간으로 바뀌어가길 바랐다. 그가 생각한 이데아는 영원하며 불변성을 지닌 세계이다. 이데아론은 구체적인 사물뿐 아니라 정의(正義), 선(善)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에도 적용되며, 특히 선의 이데아는 궁극적인 이데아이자 모든 철학적 탐구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덧붙이자면 선의 이데아는 태양의 비유로 설명된다. 플라톤은 태양이 우리가 보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며 또한 성장의 근원이 된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는 선의 이데아 또한 마음의 눈을 통해 실재의 본성을 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설명한다. 만약 선의 이데아가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어둠 속에서 헤매게 될 지도 모른다. 즉, 선의 빛을 통해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가에 대한 지침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영혼은 태어나기 전에 이데아의 세계에 살았으며, 죽은 뒤에도 그곳에 돌아가길 원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우리는 모두 이데아에 대한 선천적인 지식을 가졌다. 때문에 우리는 어떤 종류의 새로운 라면을 보더라도 “이것은 라면”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왜냐면 그것은 우리가 이미 아는 라면의 이데아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그림자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그는 불완전한 현실의 세계를 보다 나은 사회로 만들기 위해서는 인간이 지닌 이성을 통해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이데아를 발견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이데아를 발견해 세상의 본질과 진리를 이해한 자가 세상을 통치해야 한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물론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앞의 그림자 쫓기에 바쁠 테지만 말이다.

 

라면 먹는 플라톤

여담이지만 플라톤이 지금 시대에 산다면 아마 그도 라면을 즐겨먹지 않았을까 하는 게 내 생각이다. 그 근거는 그의 삶과 저서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당대 그리스에서는 평범한 음식이었던 올리브와 말린 무화과를 즐겨먹었다는 그는, 요리기술은 “기쁨이나 쾌락을 만드는 것에 대한 경험”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또한 플라톤은 먹고 마심으로써 생겨나는 기쁨조차도 용인하려 하지 않았다고 알려진다.

특히 쾌락과 즐거움은 육체 혹은 정신적인 공허함을 채움으로써 생겨난다고 설명했는데, 정신적인 음식이 ‘더 수준 높은 현실의 내용을 포함하며 학문의 영원하고 진정한 본질을 담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음식과 음료를 비롯하여 육체의 본성이 요구하는 것을 탐내는 부분’을 ‘머리를 쓰는 부분’과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배꼽 주위에 위치시킨 것 또한 그의 입장이 잘 드러나는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 비추어 보자면 부담 없고 간편한(게다가 맛있기까지 한) 라면은 그의 선호식품 1순위가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세상에 그의 철학을 만족할 만큼 완벽한 음식이 라면 말고 또 있을까! 물론, 그가 죽은 지 2500여년이 지난 뒤에야 라면이 세상에 등장한 탓에 그가 좋아할지 싫어할지를 확인할 길이 없긴 하지만 말이다.

 

완벽한 라면은 가능할까?

그럼 완벽한 라면, 즉 이데아 세계의 라면을 맛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물론 대답은 ‘없다’이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죽기 전까진 이데아의 세계에 발끝조차 닿을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단 플라톤의 설명에 따르면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자는 이데아의 세계에 닿을 수도 있다고 하니 둘이 먹다 둘 다 죽어도 모를 만큼 놀라운 라면 맛을 경험하고 싶다면 ‘라면만 먹는’ 철학자가 될 각오부터 해야 할 게다.

그게 싫다면? 과감히 이데아 속 라면은 포기하자. 원래 사람이 원하는 걸 모두 갖기란 하늘에 별 따기나 다름없는 법이다. 게다가 너무 아쉬워하진 않아도 되지 싶다. 우리 앞에 놓인 라면도 충분히 완벽하며 맛있는 건 마찬가지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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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국 작가가 말하는 김대중, 노무현의 글쓰기-말하기 스타일의 차이와 공통점 https://ppss.kr/archives/233227 Fri, 08 Jan 2021 01:58:18 +0000 http://3.36.87.144/?p=233227 강원국 작가는 김대중, 노무현, 두 정부에서 연설비서관으로 일했다. 이 내용을 『대통령의 글쓰기』라는 책으로 옮기기도 했다.

다물어클럽은 월 9,900원에 300편의 인문학 영상을 무제한 볼 수 있는 플랫폼이다. (현재 학습지 포함 할인 혜택 제공 중) 인문학계의 넷플릭스로도 불리는 다물어클럽의 강의 내용을 바탕으로,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의 글쓰기-말하기 스타일의 차이를 알아봤다.

 

김대중 대통령의 말하기와 글쓰기는 친절한 설명문

김대중 대통령은 “첫째, 둘째, 셋째”라는 표현을 즐겨 썼다. 하나의 논점을 이야기한 후, 동등하고 수평적인 근거들로 이해를 도왔다. 그래서 김대중의 연설은, 깔끔한 요약정리의 느낌이 난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누가 떠먹여 주는듯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말하기와 글쓰기는 설득하는 논설문

반면 노무현 대통령은 달랐다. 김대중 대통령식으로 “첫째, 둘째, 셋째”라 쓰면, “글을 입체적으로 써라”고 꾸짖었다 한다. 김대중의 글이 수평적이라면, 노무현의 글은 수직적이다. 하나의 주장 아래에 근거, 사례 등을 층층이 쌓으며 주장에 힘을 실었다.

 

준비와 연설 현장에서도 달랐던 두 사람의 모습

두 전 대통령의 차이는 준비단계에서도 드러난다. 김대중은 일반적인 방식, 즉 비서실에서 글을 써서 올리면, 그것을 손수 수정하는 방식으로 원고를 준비했다. 반면 노무현 대통령은 비서실의 글을 보고서, 직접 말로 풀어봤다고 한다.

그렇기에 연설 당시도 김대중은 연설비서실 초안이 기본이 됐지만, 노무현은 초안에 그다지 의존하지 않았다. 연설 스타일도 달랐는데, 김대중은 준비된 원고를 그대로 읽는 쪽이었다. 반면 노무현은 즉흥성이 강했다. 김대중이 정보를 잘 전달하려 했다면, 노무현은 현장에 맞춰 소통하며 주장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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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까지 고치고 또 고치는 완벽주의자라는 공통점

공통점도 있다. 굉장히 높은 수준의 연설을 했다는 점, 그리고 글이란 고치고 고칠수록 더 좋아질 수밖에 없는데, 연설 직전까지 고치고 또 고치며 완벽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메모광이었던 두 사람

또한 두 전 대통령 모두 끊임없이 메모를 했다는 점도 비슷하다. 김대중은 주로 기록용으로 5년간 28권의 다이어리를 썼다고 한다. 노무현은 A5 사이즈 종이에 메모한 후, 이를 참조하게끔 주변 비서관들에게 전달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강연을 무제한으로 들을 수 있는 다물어클럽

위의 내용은 다물어클럽에서의 강원국 작가 강의를 정리한 것이다. 월 9,900원에 300편의 인문학 강연을 무제한 시청 가능한 다물어클럽은, 이번 주까지 월 4,900원의 파격 이벤트를 진행 중이다.

혹시라도 그동안 인문학에 관심이 있었다면, 반값의 기회를 놓치지 말자. 코로나 시대, 이렇게 쉽게 인문학을 접할 기회는 많지 않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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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설민석이 아닌 ‘우리 안의 설민석’: 광개토왕비 역사 왜곡을 지지하는 우리들 https://ppss.kr/archives/233121 Thu, 07 Jan 2021 03:21:37 +0000 http://3.36.87.144/?p=233121 벌거벗겨진 건 세계사가 아닌, 설민석의 오류들

설민석은 최고의 스타 강사다. 무한도전 등 예능 출연을 통해 전국적인 지명도를 얻었고, ‘한국사 전문가’로서의 권위까지 얻었다. 그래서 ‘설민석의 벌거벗은 세계사’가 나올 때, 대중의 기대는 컸다. 1화부터 5%대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순항했다.

하지만 우려도 있었다. 설민석의 사실관계 오류와 역사 왜곡 논란이 많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벌거벗은 세계사’는 2화 만에 좌초했다. 사실관계가 틀린 부분이 너무 많고, 흥미 위주의 풍문을 실제 역사처럼 부풀린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벌거벗겨진 건 세계사가 아니라 설민석 강의의 오류들이었다.

 

문제는 설민석이 아니라, ‘보고 싶은’ 역사를 요구하는 우리 모두에게 있다

그러나 설민석이 하차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우리 모두에게도 있다. 설민석은 다만 그 요구를 만족하는 엔터테이너였을 뿐이다.

예로 많은 한국인이 ‘일본의 역사 왜곡’으로 아는 광개토왕비문을 보자. 비석에 “일본이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내용을 두고, 설민석은 “일본이 바다를 건너오는 걸 고구려가 격파했다”고 해석한다.

스타강사답게 이런 말도 붙여주고…
국뽕으로는 한 수 위인 김진명은 “백제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주장한다(…)

 

광개토왕비문의 진실: 해석은 “일본이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가 맞다

월 9900원에 인문학 강의를 무제한 제공하는 인문학계의 넷플릭스 ‘다물어클럽’에서 4명의 진짜 국사학자를 모아서 의견을 들었다. (이번 주까지 학습지 포함 혜택 제공 중)

이들의 의견은 놀랍게도, 우리가 싫어하는 해석이 맞다는 것.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안정준 교수 “일본은 광개토왕비문 조작을 저지르지 않았다”

오히려 역사 왜곡은 우리들이 저질렀던 것이다. “일본이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해석이 맞으며, 우리는 한국이 일본을 물리쳤다는, 그저 ‘듣기 좋은 역사’에 빠져 있었던 것. 실제 설민석은 이때 큰 오류를 저질렀으나, 아무 논란 없이 넘어갔다

백석예술대 한국사 강사 김재원 “대중매체의 역사는 국뽕 예찬”
설민석은 이때도 큰 오류를 저질렀으나, 우리가 좋아했기에 논란은 없었다.

 

그런데… 일본이 한국을 점령한 것도 거짓이다

“일본이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내용은 진실일까? 그렇지 않다. 뒤에 이어지는 내용이 “고구려가 출정하여, 일본이 어지럽힌 한반도를 회복했다”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즉, 고구려의 군사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악당역으로서 일본의 역할을 실제보다 과장한 것이다.

광개토왕비는 애당초 ‘객관적인’ 시선에서 쓰인 사료가 아니다. 광개토왕 사후, 장수왕이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고구려의 위상과 역할을 훨씬 과장하고 광개토왕을 영웅적으로 연출한,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정치적 선전물에 가깝다.

서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강진원 “굳이 역사를 민족주의로 왜곡할 필요는 없다”

다물어클럽의 진짜 역사학자들이 강조하는 부분은 여기에 있다. 역사는 굳이 왜곡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사실 그 자체로 접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와 함께 배움도 얻을 수 있다. 나아가, 과거를 통해 현실 문제의 해답을 얻을 수도 있다.

 

진짜 학자들의 이야기를 날것으로 들을 수 있는 다물어클럽

위 내용은 다물어클럽의 강의 중 일부이다. 4명의 역사학자가 모여 민족주의적, 포퓰리즘 역사 강의를 비판하고, 광개토왕비를 통해 어떤 관점이 올바른지 이야기한다.

강의를 통해 우리는 광개토왕비는, 그 자체로도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넘치는 사료임을 알게 된다. 굳이 민족주의적 판타지를 거기 투영할 필요가 없다. 덧씌워진 판타지를 벗겨내고 ‘진짜’ 광개토왕비의 모습을 찾아가는 것이야말로 진정 흥미로운 지적 여흥인 것이다.

다물어클럽은 위의 광개토왕 외에도 수많은 역사, 인문 강의가 갖춰져 있다. 설민석의 역할이 흥미를 돋는 것이었다면, 한 발만 더 깊이 공부해보는 건 어떨까? 영상 강의라면 별로 지루하지도 않을 테고, 마침 인문학 학습지까지 제공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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