ㅍㅍㅅㅅ https://ppss.kr 필자와 독자의 경계가 없는 이슈 큐레이팅 매거진 Thu, 10 Apr 2025 04:09:09 +0000 ko-KR hourly 1 https://wordpress.org/?v=5.8.10 https://ppss.kr/wp-content/uploads/2015/07/ppss-100x100.png ㅍㅍㅅㅅ https://ppss.kr 32 32 ‘가난한 진상’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https://ppss.kr/archives/268384 Thu, 10 Apr 2025 04:09:09 +0000 http://3.36.87.144/?p=268384

A씨는 원래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큰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월급을 받고 계획적으로 소비하며 살아갔다. 그런데 어느 날, 회사가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몇 개월 치 퇴직금이 나왔지만,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저축은 바닥을 드러냈고, 생활비는 점점 빡빡해졌다.

재취업을 위해 이력서를 돌리고, 가급적 절약하며 살려고 했다. 하지만 면접에서 번번이 떨어지고, 은행 잔고가 줄어드는 걸 보며 불안이 커졌다. 결국 실업급여와 기초생활수급 같은 복지제도를 알아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나라에서 이렇게라도 지원해 주니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몇 개월이 지나자 점점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로는 부족한데?” ”

“이건 내가 받을 권리가 있는 거잖아.”

“나라가 나한테 해준 게 대체 뭐지?”

조금씩, 사고방식이 변하기 시작했다.

 

‘가난한 진상’의 사고구조

일부의 ‘가난한 진상’은 왜 진상처럼 행동하게 될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이들은 자신이 받는 복지나 지원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당연히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면 ‘사소한’ 행정 절차나 규정 같은 건 부차적인 것이다. 아무리 규정을 근거로 들며 이 이상 해줄 수 없다고 설득해 봐야 가난한 진상들에게 그런 말은 먹히지 않는다. 오히려 규정 자체도 문제라고 여길 가능성이 높다. 왜? 규정은 나를 일부러 안 도와주려고 누군가와 누군가가 짜고 치는 음모니까.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가로막는 적처럼 느껴지니까.

가난한 진상은 무례한 사람들일까? 겉으로는 그래 보일 수 있다. 어쨌든 요구가 먹히지 않으면 과격한 행동도 서슴지 않는 그런 사람들도 분명 있으니까 말이다. 사회복지 계통에서 일하고 계신 많은 분들이 피로와 고통을 호소하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다. 하지만 ‘무례하다 – 개입/처벌해야 한다’로 이어지는 경로로 빠져서는 우리는 ‘가난한 진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가난한 진상은 단순한 무례함, ‘못 배워먹어서’라기보다는 심리적 방어 기제와 사고방식의 변화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가난을 자신의 무능력이나 잘못의 결과로 받아들이기보다, 사회적·구조적 실패로 돌리고 싶은 마음이 강해지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러진 않았을 것이다. 아직 희망이 꺼지지 않았던 시절, 실패와 가난은 ‘내 탓’이었고, 그래야만 했다. 나만 더 잘하면, 나만 더 정신 차리면 가난에서 극복할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가난이 장기화되면 어떨까? 더 이상의 내 탓은 고통스럽다. 내 탓만 반복한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가난 탈출에 대한 희망이 점차 꺼져가는 바로 그 시점, ‘가난한 진상’에 대한 유혹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세상이 나한테 해준 게 뭔데? 꼭 나만 잘못한 거야?

‘세상이 나한테 해준 게 뭔데?’라는 생각이 자리 잡으면, 복지의 손길에도 감사보다는 당연하다는 태도가 먼저 형성된다. 지원을 받으며 ‘최소한 이 정도는 해줘야지’라고 생각하고, 나아가 ‘내가 받은 피해에 비하면 이 정도 지원은 너무 적다’는 불만이 생긴다. 사고방식이 이런 식으로 자리 잡으면, 복지를 받을수록 더 많은 요구를 하게 되고, 지원이 끊기거나 기대만큼 주어지지 않을 경우 강한 반감을 느끼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책임은 점점 흐려지고, 모든 원인이 사회나 국가에 있다고 믿는 태도가 굳어진다. “내가 이렇게 된 건 내 잘못이 아니야. 시스템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 이런 생각이 자리 잡으면서, 복지 정책이 충분하지 않다고 느낄 때마다 더 큰 분노가 형성된다. 결국 복지를 받는 것이 일종의 ‘당연한 권리’가 되고, 이 권리가 충족되지 않으면 사회가 자신을 홀대한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출처: freepik

 

경제적 불안이 사람을 어떻게 바꿔놓는가?

이제 원점으로 돌아갈 차례이다. 결국 가난한 진상을 만드는 건 ‘가난’이다. 가난은 단순히 돈이 부족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가난, 그중에서도 장기화한 가난은 곧 ‘트라우마’다. 극적인 계기를 맞아 가난이 해결된다 해도, 가난이 남긴 상처는 쉽게 회복되는 것이 아니며, 가난은 인간의 사고방식과 행동을 근본적으로 바꿔놓는다.

즉, 경제적 불안은 대인관계·도덕적 판단·의사결정 방식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경제적 불안은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변화시키는가?

 

1) 생존 모드의 발동

첫째, 가난한 사람들은 장기적인 목표보다 단기적인 생존에 집중하게 된다. 이를 터널 비전(Tunnel Vision)이라고 한다. ‘당장 오늘, 내일 어떻게 살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면서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는 것이 어렵고, 결과적으로 즉각적인 욕구 충족이 더 중요해진다.

예를 들어, 당장 월세가 밀려 퇴거 위기에 처한 사람이 ’10년 뒤를 위한 재테크’를 고민할 여유가 있을까? 그보다는 오늘 하루를 버티기 위해 대부업체에서 고금리 대출을 받거나, 일회성 수입이라도 당장 생기는 일을 찾아 나설 가능성이 크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점점 더 장기적인 사고를 하기 어려워진다. 미래를 준비할 만한 여유가 없으니 ‘지금’을 해결하는 것에만 몰두하게 되는 것이다. 즉 한 달 후의 일을 걱정하기보다는, 오늘 식사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순위가 되는 것인데, 이렇게 생존 모드가 활성화되면 절약보다는 즉각적인 소비를 선택하는 경향이 높아지고, 돈이 들어오면 곧바로 사용해 버리는 패턴이 굳어진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이는 단순한 나태함이 아니라, 장기적인 보상을 고려할 여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뇌가 단기적인 보상에 더욱 민감해지는 결과라고 볼 수 있다.

 

2) 자기 개념의 붕괴, 그리고 대물림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가난을 죄악으로 규정하는 자본주의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겠고, 가난한 사람들이 행동적으로 보여주는 ‘꾀죄죄하고, 구차하고, 유치하고, 한심한 모습’에 반발감을 느끼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고정관념과 편견을 만든다. ‘가난한 사람들은 노력을 안 한다’, ‘가난은 게으름의 결과이다’ 등의 편리한 공식을 만들어 싸잡아 비난하고 외면하는 것이다. 게다가 가끔 뉴스를 보면 ‘가난한 진상’이 등장한다. 그들이 사회복지사에게, 봉사자에게, 공무원들에게 어떤 ‘진상 짓’을 하는지를 본다. 가난한 진상의 소식들은 고정관념·편견을 재생산, 강화하는 역할을 맡는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항변한다. ‘진정한 가난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나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는 ‘빈곤 포르노’는 실상을 반영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이는 심리학적으로 나름 일리 있는 설명이다. 사실 가난이 길어지면 단순히 경제적 어려움을 넘어,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 근본적으로 변화한다. 처음에는 ‘내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나아질 거야’라는 희망이 있었지만, 반복적인 실패와 좌절을 겪으며 ‘내가 뭘 해도 소용없다’는 생각이 깊어지게 된다. 이는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으로 이어진다.

사람들은 흔히 가난을 ‘노력의 부족’으로 해석하지만, 가난이 장기화되면 개인의 효능감(self-efficacy) 자체가 무너진다. ‘나는 무능하다’, ‘나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인식이 굳어지면서, 새로운 도전을 시도할 동기를 잃어버린다. 가난이 사회적 낙인과 결합하면, 개인은 자신을 더욱 낮게 평가하게 된다. ‘나는 가치 없는 사람이다’, ‘사회는 나 같은 사람을 원하지 않는다’는 자기개념(self-concept)의 왜곡이 일어나고, 결국 이는 사회적 관계 회피와 경제적 재기 의지의 약화로 이어진다.

출처: freepik

더 큰 문제는 가난의 대물림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세대를 거쳐 대물림되면, 가난은 단순한 재정적 문제를 넘어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심화된다. 유년기부터 경제적 불안이 일상화된 사람들은 장기적인 목표를 설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합리적인 재정 관리를 배우지 못한 채 동일한 패턴을 반복하게 된다. 결국 가난이 지속되는 한 이를 극복할 동력조차 상실하는 악순환이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마치며

가난은 단순한 경제적 상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사고방식과 삶의 태도,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까지 바꾸어 놓는다. 우리는 종종 가난을 개인의 잘못으로 여기고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 냉소적인 시선을 보낸다. 하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무기력과 사회적 낙인은 단순한 의지로 극복하기 어렵다.

사회는 가난을 방치할 수도 있고, 그것이 개인의 몫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가난의 대물림을 방치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가난이 세대를 넘어서며 굳어질 때, 우리는 단지 한 사람의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 세대의 가능성까지 함께 소멸시키는 선택을 하는 셈이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가난을 완전히 없애겠다는 비현실적인 목표가 아닐지도 모른다. 다만 누군가가 한 번 가난해졌다고 해서, 그가 그리고 그의 아이들이 영원히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도록 만드는 사회라면 우리는 과연 공정한 사회를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가난의 ‘얼굴’

원문: 허용회의 사이콜로피아


작가의 말

심리학적 글쓰기, 직장심리, 자존감, 목표관리, 마음건강, 메타인지, 외로움 극복, 공간활용의 심리학 등 다양한 주제로 강연 가능합니다. 출강 제안도 환영합니다. 허작가의 사이콜로피아 홈페이지에서 제 소개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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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칼협, 알빠노”의 시대가 두려운 이유 https://ppss.kr/archives/264583 Thu, 06 Mar 2025 04:02:53 +0000 http://3.36.87.144/?p=264583 과거에는 어린이들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 노래에서 시대상을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요즘은 어디서 시대상을 알 수 있을까요? 저는 커뮤니티에서 자주 쓰는 말들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제 눈을 사로잡는 단어는 ‘누칼협’ 과 ‘알빠노’입니다. 오늘은 이 단어들에 숨어있는 심리와, 우려하는 지점에 대해서 이야기해 봅니다.

 

누칼협: 누가 그걸 하라고 칼 들고 협박했어?

이 단어는 보통 어떤 사람의 선택에 대해서 평가할 때 나오는 단어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시점에서 특정한 선택을 하게 되고, 그것을 후회하거나 아쉬워하고, 개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할 수 있지요. 이것은 누구나 모두가 하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했던 선택은, 결과적으로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 하더라도, 당시에는 최선의 선택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도 이 선택을 후회하고 아쉬워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누칼협’이라고 대답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서는 이런 심리가 느껴집니다.

누가 그 선택을 하라고 칼로 협박한 것도 아니잖아? 네가 선택했잖아! 너의 모든 책임이니까 앓는 소리 하지 마. 악으로 깡으로 버티든가 그만두든가, 알아서 해.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들어가면 이런 심리도 엿보입니다.

난 너의 부정적인 이야기나 감정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다. 네가 실수했건, 운이 안 좋건, 네가 선택한 것이면 힘들어도 응당 받아들여야 한다.

 

알빠노: (내가) 알 바인가?

이 단어도 비슷한 맥락에서 쓰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어려움이나 힘듦에 대해서 토로하면 어떤 사람들은 ‘알빠노’라고 대답하죠. 사실 그 사람의 사정에 대해서 이해되지 않거나 이해하고 싶지 않다면 답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면 되지만, 사람들은 이런 표현을 굳이 쓰곤 합니다. 여기에서도 이런 심리가 엿보입니다.

너의 부정적인 감정이나 힘듦을 왜 얘기하냐? 엄밀히 이야기해서 내가 알아야 할 이유가 없는데 왜 굳이 알리는 것이냐? 너는 내가 그 사정을 듣고 이해해 주길 바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조용히 해라.

누군가가 올린 글에서는 감정적으로 이해해 주거나 이성적으로 조언해 줄 사람을 찾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하지만 저 댓글을 쓰는 사람들은 사람들은 이해해 주지도 않을 거면서 굳이 댓글을 써가며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방식으로 말이죠.

두 표현에서 저는 ‘상대를 향한 가혹한 태도’가 읽힙니다. 상대방이 어떤 상황에 처했고, 어떤 힘듦을 겪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으며 오로지 너의 의지와 선택에 따라서 나온 결과일 뿐이니 힘든 이야기는 일절 하지 말고 받아들이라는 것이지요. 그들은 왜 이런 태도를 가지게 된 걸까요?

 

자신에게 가혹하기 때문에 타인에게도 가혹한 사람들

사실 상대방에 대해서 가혹한 사람은, 스스로를 향해서도 가혹하게 대하는 태도가 자리잡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스스로에게 자비로운 사람이 (‘내로남불’처럼 자기방어적 태도를 보이는 경우를 제외하고), 타인에게도 자비로움을 갖지 않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즉, 자신이 힘들고 어려울 때에도 ‘그럴 수 있다’, ‘이번 선택은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그랬구나’ 같은 이해나 위로를 해주지 않기 때문에, 상대방에 대해서도 ‘그럴 수 있다’거나 ‘그 선택을 한 이유가 있었구나’라고 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스스로에게도 ‘너는 왜 그랬어?’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지’ ‘왜 멍청한 선택을 하고 그래?’라고 생각하니, 상대방에게도 그렇게 표현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Image by freepik

이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다양한 부정적인 감정을 충분히 해소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타인에게 베풀 공감이나 위로도 나오지 않습니다. 자신도 여유가 없는데 타인의 어려움이 눈에 들어올 리 없고, 오히려 자신에게 스트레스를 공격적으로 푸는 방법으로 접근하게 되죠. 앞서 말했듯이 이해가 안 되거나 공감이 안 된다면 그냥 넘어가게 되는데, 그것에 또 일일이 반응하는 이유입니다.

저는 요즘 사람들이 서로에게 관심을 주지 않고, 이해해 주지 않으며, 인정해 주지 않으려는 태도가 만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이나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회피하거나 멀어지지 굳이 다가가서 변화를 이끌려 하지 않습니다. 상대가 내 말을 들을 것 같지 않고, 어떤 부정적인 반응이 올 지 모르거든요.

이 모든 것은 ‘불안’에서 기인한다고 봅니다. 사람들은 사회가 주는 끊임없는 불안 때문에 이미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고 있습니다. 살아남고, 생존하는 데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과정에서 주위 사람들을 챙기기보다는 내 가족, 내 사람들만 챙기거나 적자생존, 각자도생의 생각을 갖기가 쉽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이해해 주지 않고, 관심을 주지 않고, 인정을 해주지 않을 때 소외받는 사람들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부족한 인정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위험하거나 이상한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생활 속의 ‘소외당한’ 사람들

다음은 제가 일상에서 발견한 예시들입니다.

1. 수년 전에 알았던 지인이 오랜만에 연락해서 대뜸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과거에 이런 이야기를 해서 내 인생이 어려워졌다. 사과해라.

차근차근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분명히 오해가 있고 억울한 측면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과 조금 대화해 보니, 정상적인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상대가 원하는 대로 사과를 하고 마무리했지만, 마음속 한편이 많이 씁쓸했습니다. 분명히 수년 전에는 큰 문제가 없었던 사람이었거든요. 왜 저렇게 된 것일까,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뭔가를 할 수는 없었습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선’을 넘어섰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2. 오전에 동네 앞 공원에서 달리기를 하며 보았던 풍경입니다. 공원 중간에는 식수대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 노인분이 식수대 앞에서 오랜 시간 알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생수통 여러 개를 가져와서 물을 담는 건 그렇다 쳐도, 물 나오는 버튼을 의미 없이 누르거나, 굳이 쓰레기 받이에 물을 담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죠.

그런 행동을 제가 운동을 하던 30~40분 내내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오기 전부터 거기 계셨고, 자리를 떠날 때에도 있으셨던 걸로 봐서 최소 1~2시간은 그 식수대 앞에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식수대를 이용할 수 없었습니다.

3. ‘정유정 사건’은 흔히들 ‘사이코패스의 잔혹한 살인’이라고 해석합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좋지 못한 기질을 가진 사람이 적절한 양육을 받지 못하고, 오랫동안 소외받아서 생긴 일로 보이기도 합니다. 이 사람이 적절한 양육을 받고, 적더라도 의미 있는 관계를 맺고 있었다면 이런 행동으로 이어졌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죠.

사회가 단절되고,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 관심을 주지 않을 때 주변으로부터 피드백을 받지 못한 사람은 혼자만의 생각을 키워가게 됩니다. 이 생각이 잘못된 방향으로 발현되면 이상해지거나, 안 좋은 방향으로 심각해질 수 있습니다.

더욱이 요새는 SNS에서 개인화된 정보를 추천하고 있습니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전혀 듣지 않거나, 차단하기도 쉽기 때문에 잘못된 생각은 계속 강화될 수 있습니다. 이때 이 사회에서 제대로 자신을 지키지 못했거나 제대로 된 존재감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이상한 행동을 하고 나아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처벌을 강화하고 감시를 더 강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예측해서 대비할 수도 없을뿐더러, 결국 강력한 처벌이 주어진다 한들, 누군가가 피해를 보고 난 후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마치며

사실 명확한 방향성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전쟁과 재해, 전염병으로 인해 전 세계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한정된 국토에 너무 많은 인구가 살고 있고, 주변 시선을 무척 신경 쓰는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경제는 저성장 중이고, 각자도생의 분위기까지 겹쳤기 때문에 일개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하는 건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래도 그나마 아이디어를 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개인 단위에서는 나 자신을 심적으로 챙기고, 주변 사람도 챙길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기. 국가적으로는 국민의 불안을 줄일 수 있는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기. 경제적으로 안정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부자가 되어야만 괜찮은 인간이라는 인식 대신 다양한 삶의 형태를 보여주고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게 유도하며, 사회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챙기는 복지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원문: 멘디쌤 조명국의 브런치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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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다는 이유로 집에서 쫓겨나지 않는 세상 https://ppss.kr/archives/267433 Tue, 05 Nov 2024 23:37:24 +0000 http://3.36.87.144/?p=267433 1.

사람들은 흔히 가난한 사람들을 곧 자격 없는 사람으로 여긴다. 안전하고 쾌적한 집에서 살 자격, 맛있는 음식을 먹을 자격, 휴식하고 여가를 누릴 자격, 혹은 아이를 낳아 건강하게 기를 자격 같은 것들 말이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에는 자립에 대한 환상이 존재한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오롯이 자신의 능력으로 생활해야 하는데, 가난한 사람은 하는 일 없이 복지 시스템에 빌붙어 삶을 이어 나가고 있다는 환상 말이다. 그리고 그 틈새에서 선택지가 없는 사람들을 착취하고, 그들이 계속 빈곤 상태에 머물도록 만드는 사업들이 자라난다.

질이 형편없이 낮은 주거 서비스를 비싸게 팔아 치우는 최저 주거 공간의 임대업이 대표적이다. 한 가지 예로, 이혜미 기자는 서울에 있는 쪽방과 원룸촌에 사는 사람들과 소유주들을 두루 만나며 임대 사업의 이익 구조 속에서 어떻게 가난한 사람이 경험하는 주거 환경이 악화되고, 가난이 심화되는지 면밀히 밝혔다(이혜미, 2020).

좀 더 포괄적인 증거로, 비용을 제외한 순수익을 따졌을 때 미국의 가난한 동네 임대주가 한 세대당 매달 300달러를 벌어들이는 반면, 부유한 동네 임대주는 250달러를 벌어 역설적으로 가난한 지역의 임대업 수익성이 더 높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관련 논문: 바로가기).

출처: 영화 <기생충>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오히려 높은 수익을 올릴 기회가 있다는 것은, 거꾸로 말해 이들이 과중한 임대료 부담으로 인한 주거 불안정을 경험한다는 의미이다. 다음 달이면 지금 사는 집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이 거대한 불확실성은 삶의 기반을 뒤흔든다. 주거 공간은 경제적 조건, 사회적 네트워크, 안전, 교육의 기회, 보건의료 서비스 접근성 등 삶의 전반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확실성 속에서 빈곤은 심화되어 가고, 신체는 낡고 닳는다. 이 모든 상황이 함께 극단으로 치달을 때 사람들은 임대료를 체납하게 되고, 강제 퇴거가 발생한다. 그리고 퇴거는 빈곤의 결과일 뿐 아니라, 더 깊은 빈곤의 원인이 된다.

 

2.

오늘 소개할 논문은 미국의 두 개 도시(쿡 카운티, 뉴욕)에서 법원의 강제 퇴거 명령이 세입자들의 주거, 일, 그리고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았다(☞논문 바로가기: 미국 도시에서 강제 퇴거와 빈곤). 퇴거가 실제로 ‘더 깊은 빈곤의 원인’인지 확인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앞서 언급했듯, 퇴거가 발생하는 맥락이 복잡하기 때문이다.

이 연구에서도 이러한 맥락의 일부를 살펴볼 수 있었다. 두 도시에서 강제 퇴거 소송에 제소된 세입자는 제소 이전에 이미 같은 지역 내 제소되지 않은 세입자에 비해 소득과 고용률이 낮았으며, 신용도 나쁘고 빚도 많았다.

제소된 세입자는 특히 제소 직전 1년간 소득과 고용률이 급격히 떨어졌고, 신용도 나빠졌다. 제소 직전 2년에 걸쳐 병원 방문은 잦아졌는데, 이는 주로 응급실 입원 증가에 의해 나타난 경향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제소된 사람 중 실제 퇴거가 결정된 사람들에서 더 큰 폭으로 나타났다. 즉, 퇴거 소송이 시작되기 앞서 많은 세입자들이 새로운 건강상의 문제와 함께 실직과 소득 감소를 경험했으며, 그 정도는 소송의 결과 실제 퇴거를 당한 사람들에서 더 심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퇴거당한 세입자와 그렇지 않은 세입자의 소송 후 결과를 단순 비교하면 제소 이전 발생한 생활 사건 같은 다른 요인이 달라 생겨난 차이를 강제 퇴거 명령의 효과와 구분하기 어렵다. 연구진은 퇴거 명령이 결정되는 방식을 활용해 이 문제를 해결한다.

미국에서 강제 퇴거 소송 건은 해당 지역의 담당 판사들에게 무작위로 배정되는데, 판사들에 따라 퇴거 명령을 내리는 성향이 다르다. 덕분에 평균적으로 유사한 특성을 가졌지만 운 나쁘게 엄격한 판사에게 배정되어 퇴거당한 세입자를 운이 좋았던 세입자와 비교하면, 퇴거 명령의 효과만을 구분해 추정할 수 있다.

Image by macrovector on Freepik

강제 퇴거 명령의 효과는 어마어마했다. 운 나쁘게 퇴거 명령을 받은 세입자가 갑작스럽고 급하게 이뤄지는 강제 퇴거를 당할 확률은 운이 조금 더 좋았던 세입자에 비해 43.5% 포인트 더 높았다. 이 경우 세입자는 더 큰 스트레스를 받을 뿐 아니라, 충분한 시간을 두고 대안적인 주거 공간을 찾을 수 없어 더 위험하고 질 낮은 곳으로 이사를 가야 할 수도 있다.

운 좋게 퇴거 명령을 피한 세입자의 29.2%도 제소 1년 후에 이사를 갔지만, 퇴거 명령을 받으면 그 확률이 37.4%로 더 높아졌다. 퇴거 명령은 적절한 주거 공간을 찾지 못할 확률도 높였다. 퇴거 명령을 피하면 제소 1년 후 홈리스 쉼터를 이용할 확률이 0.9%였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쉼터 이용 확률은 4.3%로 5배 가까이 늘었다.

퇴거로 인해 깊어진 주거 불안정은 직업 생활의 어려움으로 이어졌다. 퇴거당한 세입자는 아슬아슬하게 퇴거를 피한 세입자보다 제소 후 첫해에는 6% (연 1,292달러), 두 번째 해에는 14% (연 2,452달러) 적은 소득을 얻었다. 퇴거는 일자리를 가질 확률도 지속적으로 낮추어, 퇴거당한 세입자의 고용률은 (통계적으로 유의미하진 않았지만) 제소 후 2년 동안 꾸준히 1.3% 포인트 정도 낮았다. 이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이어져, 제소 1년 후 신용 점수 등을 종합해 측정한 가계의 재정 건전성 지표를 표준편차의 0.11배 가량 낮추었다.

퇴거 명령 후의 이러한 변화는 몸과 마음의 건강에 고스란히 투영되었다. 의료 이용 기록을 수집할 수 있었던 뉴욕 시에 한해, 퇴거를 당한 세입자는 운 좋게 퇴거를 피한 세입자에 비해 1년 동안 병원 방문 횟수가 29% 늘었다. 특히 정신 건강 문제로 병원을 방문하는 횟수는 2배 이상 늘어, 전체 병원 방문 횟수의 1/4가량을 설명했다. 다행히 이러한 변화가 제소 2년 후까지 이어지진 않았다.

퇴거 명령의 부정적 영향은 특히 흑인과 여성 세입자에 집중되었다. 퇴거가 주거 불안정을 심화하고, 경제적 어려움을 가중시키며, 건강을 악화시키는 효과는 모두 흑인과 여성 세입자에서 더 크게 나타났다. 강제 퇴거 집행을 위해 법원에 제소당하는 세입자 상당수가 흑인과 여성이라는 점에서 이 사실은 중요하다.

또한, 이 연구는 판사들이 현재보다 조금 더 관대해지면 제소당한 세입자들의 삶과 건강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는 착취적인 임대 산업의 뿌리를 뽑지 못하더라도, 퇴거 명령의 부정적 충격을 분명히 줄일 수 있다.

 

3.

지난 10월 17일은 빈곤 철폐의 날이었다. 자격 없다 꼬리표 달린 이들이 권리를 외치는 날이다. 괜찮은 집에서 안정적으로 살 권리는 그중에서도 기본적이고 핵심적이다. 이미 가난한 사람들이 집에서 쫓겨난 결과 삶의 전방위적 측면에서 더 나쁜 일들이 발생한다는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들을 끊임없이 불안정한 주거 환경으로 몰아내는 빈곤 산업의 고리를 끊고, 모두에게 ‘살 권리’를 보장하자.

Image by pikisuperstar on Freepik

원문: 시민건강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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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시선에 맞춘 성장은 ‘개미지옥’이 될 수 있다 https://ppss.kr/archives/267120 Tue, 24 Sep 2024 04:58:35 +0000 http://3.36.87.144/?p=267120 얼마 전 한 성형외과 의사 지인과 이야기를 했는데, 요즘에는 미모가 뛰어날수록 얼굴에 손을 댄다고 한다. 나는 잘 모르는 영역이라 막연히 세상에는 예쁘거나 잘생긴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지만, 알고 보면 상당수가 ‘만들어진’ 미모의 사람들이라는 게 다소 신기하게 느껴진다. 말하자면 우리는 ‘조작 혹은 계량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든 보이는 것들은 원래 그대로가 아니고, 만들어지거나 조작되거나 계량된 것들이다.

또 요즘 아이 부모들은 아이 키 때문에 난리도 아니다. 내가 어릴 땐 키가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살았던 것 같은데, 요즘에는 아이 키가 잘 안 큰다 싶으면 호르몬 주사 등으로 아이 키를 키우려 한다. 교육 같은 것은 물론이고 외모적으로도 아이들이 손해보고 클까 걱정하며 무엇이든 ‘평균 이상’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식이 팽배해 있다. 남들보다 못한 존재로 클까 봐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작가 pikisuperstar 출처 Freepik

나도 스스로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고 싶고, 여러 면에서 성장하고 싶은 의욕도 있다. 내 아이 역시 잘자라서 자기 인생을 잘 누리면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싶고, 그를 위해 많이 도와주고 싶기도 하다. 그런데 이렇게 인생의 모든 것을 ‘조작’하고 ‘계량’할 때,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가에 대해서는 깊은 고민이 필요할 듯하다. ‘모든 것’에 있어서 ‘남들’보다 못한 존재로 살지 않기 위해 계량하다 보면 근본적으로 끝이 없다.

남들보다 근육도 많아야 하고, 키도 커야 하고, 얼굴도 잘생겨야 하고, 남부럽지 않은 차도 타야 하고, 가방도 메야 하고, 시계도 차야 하고, 남들이 무시하지 않는 동네의 아파트도 가져야 하고, 브랜드 옷도 입어야 하고, 아이 학벌도 좋아야 한다. 남들을 기준으로 놓고 조작과 계량의 세계에 뛰어들면 자기를 온전하게 사랑할 방법이 없어진다. 대신 남들의 기준에서만 자기가 사랑받을 존재가 되는데, 이 남들이란 존재는 만족을 모른다. 우리에게 충족의 기준을 알려주지도 않는다.

얼굴을 고치기 시작하면 몇억을 들여서도 고칠 것들이 있다고 한다. 눈, 코 입, 볼, 턱, 윤곽선 등 하나씩 하다 보면 아파트 한 채 값은 들일 수 있다고 한다. 명품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끝없이 올라가는 영역이 있다. 아파트로 남들의 신경을 쓰기 시작하면 서울 강남 안에서도 ‘테북’과 ‘테남’이 나뉜다. 그 안에서도 브랜드가 나뉜다. 이렇게 타인들의 기준을 신경 쓰느라 신경쇠약에 걸릴 수준이 된다.

작가 pch.vector 출처 Freepik

우월감과 열등감은 동전의 양면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느끼는 우월감에 중독되면, 반드시 다른 누군가에게는 열등감을 느끼게 된다. 만족의 기준을 남들과의 비교에 둔다는 점에서 그렇다.

나는 기본적으로 성장을 지지하는 사람이고, 정신이나 신체의 자기계발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기준을 만들지 않으면, 성장과 계발도 일종의 개미지옥이 된다. 그 개미지옥은 타인들의 시선이라는 모래로 이루어져 있다. 만족과 행복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은 아무리 계량되어도 불행하게 살 것이다.

성장의 다른 이름은 때로 결핍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진짜 결핍을 마주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 결핍을 무한한 타인들의 기준으로 채울 것이 아니라, 진짜 자신이 되어가는 방식으로 채워야 한다는 점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원문: 정지우 문화평론가 겸 변호사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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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에 가까워진 대한민국 초등학생과 초등학교 https://ppss.kr/archives/266940 Thu, 12 Sep 2024 12:46:14 +0000 http://3.36.87.144/?p=266940
작가 Drazen Zigic / 출처 Freepik

전국의 초등학생이 절반으로 줄었다는데…!

벌써 올해가 시작된 지도 2개월이 지나, 3월이 다가왔습니다. 여러분은 ‘3월’ 하면 어떤 것이 먼저 떠오르시나요? 저는 싱그러운 봄 날씨, 예쁜 꽃들과 함께 3월에 입학하는 풋풋한 학생들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일부 초등학교는 입학생을 맞이하기는커녕 학생이 없어 폐교를 걱정한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약 두 달 전 보도된 뉴스에 따르면, 최근 3년 사이 학생이 감소하여 문을 닫은 초∙중∙고 학교는 103개나 되고, 지난해 신입생을 받지 못한 초등학교는 무려 145개나 된다고 합니다. 뉴스에서는 이 소식을 심각하게 전달하고 있는데, 막상 주변을 둘러보면 정말 초등학생이 줄어들고 있는 것인지 좀처럼 체감이 되지 않는데요! ‘학생 수가 정말 줄어들었을까?’라는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제가 졸업한 경기 내혜홀초등학교를 검색해 보았습니다.

경기 내혜홀초등학교 학교 현황 (출처: 네이버)

제가 졸업하던 2011년 당시 전교생 수는 1,000명이 넘었지만, 지금은 432명으로 13년 동안 약 40% 감소한 수준이었어요. 40%나 줄어들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는데요! 아마도 이런 경향은 제가 졸업한 학교 이외에도 수많은 다른 학교에서도 나타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따라서 전국 초등학생 수의 변화를 알아보기 위해 한국교육개발원과 교육통계서비스에서 제공하는 데이터를 활용해서 정말 초등학생과 초등학교 수가 감소하고 있는지, 감소 현상이 두드러지는 학교나 지역이 있다면 어디인지 등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주인을 잃은 교실 안 절반의 책상들

초등학생 및 초등학교 수 (데이터 출처: 한국교육개발원)

한국교육개발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초등학생은 약 260만 명으로, 이는 서울 올림픽 경기장 약 39개를 가득 메울 수 있을 정도입니다.

2023년 기준 초등학교는 6,364개 존재하며, 평균적으로 학교 하나당 약 409명의 학생을 수용하고 있는데요. 이 숫자는 지난 시간 동안 어떻게 변화해 왔을까요? 1965년도부터 2023년까지의 데이터 변화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965년부터 2023년까지 초등학생 수 및 초등학교 수를 나타낸 콤보 차트 (데이터 출처: 한국교육개발원)

위 시각화는 1965년부터 2023년까지 초등학생과 초등학교 수를 나타낸 콤보 차트입니다. 차트에서 막대는 초등학생 수, 갈색 선은 초등학교 수의 변화를 표현하고 있는데요! 왼쪽의 y축은 학생 수를, 오른쪽의 y축으로는 학교 수를 알 수 있습니다.

막대 길이의 변화를 보면 초등학생의 수가 평균 12년 간격으로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지만, 최근으로 올수록 점점 줄어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초등학생이 가장 많았던 1971년과 비교해 보았을 때, 2023년 초등학생 수는 약 55.1%나 감소한 수치에 해당했어요. 반면, 선의 높낮이 변화를 통해 초등학교는 1987년부터 감소하다가 2001년부터 다시 증가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학교 수가 증가하는 이유는 최근 신도시가 개발되면서 학교도 새로 생겨나기 때문이라고 해요.

학교 수는 늘어난 데 비해 학생 수가 줄어들었다면, 한 학급의 학생이 전보다 훨씬 줄어들었을 것 같은데요. 지금은 한 학급에 몇 명의 학생이 있을까요? 1999년부터 2023년까지의 학급당 학생 수 데이터로 알아보겠습니다!

1999년부터 2023년까지 학급당 학생 수를 나타낸 라인 차트 (데이터 출처: 교육통계서비스)

위 시각화를 보면 학급당 학생 수는 24년간 꾸준히 감소하는 추세임을 알 수 있는데요. 1999년에는 35.4명이었던 학급당 학생 수가 2023년이 되자 20.7명이 되며 약 41% 줄어들었습니다. 한 학급의 책상과 의자 약 14쌍이 사라진 셈인데요, 이제는 교실이 텅 비어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와 같이 학생 수가 줄어드는 경향은 전국 대부분의 시도에서 유사하게 나타났습니다.

2012년에서 2023년의 지역별 학생 수 변화량을 나타낸 양방향 막대 차트(데이터 출처: 교육통계서비스)

위 시각화는 2012년 대비 2023년의 시도별 학생 수 증감률을 나타낸 양방향 막대 차트입니다. 중앙의 0을 기준으로 학생 수가 증가했으면 오른쪽으로, 감소했으면 왼쪽으로 막대가 뻗어 있는데요! 막대의 길이로 2012년에 비해 2023년에 학생 수가 얼마나 크게 변화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전국적으로 2개의 시도(세종특별자치시, 제주특별자치도)를 제외하면 2012년에 비해 2023년의 학생 수가 감소했습니다. 이 중에서 가장 크게 학생 수가 감소한 서울특별시는 초등학생 증감률 -24.2%로 약 12만 명이나 감소했습니다.

한편, 앞서 언급한 세종특별자치시, 제주특별자치도는 각각 +0.9%(359명), +360%(25,524명) 증가율을 보였는데, 절대적인 수치의 변화는 타 시도의 감소량에 비해 미미한 수준이었습니다.

 

2. 오히려 도시의 학교에서 줄어드는 학생들

전국의 초등학생 감소 추세를 확인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모든 초등학교에서 학생 수가 줄어들고 있을까?”, “혹시 어느 초등학교에서는 학생 수가 증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학생 수가 꾸준히 증가/감소한 학교의 비율을 나타낸 파이 차트 (데이터 출처: 교육통계서비스)

교육통계서비스에서는 전국의 초등학교마다 연도별 전교생 수를 제공하는데요. 2008년부터 2023년까지 각 초등학교별 연도별 전교생 수의 변화를 살펴본 결과, 대다수의 학교는 연도별 학생 수가 등락을 반복하는 패턴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런 패턴을 보인 학교는 전체(폐교 포함) 7,241개 중 6,023개, 83.18%를 차지했어요.

그러나 1,008개(13.92%)의 학교에서는 학생 수가 매년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요! 학생 수가 꾸준히 증가한 학교 210개(2.9%)에 비해 5배 많은 정도였습니다.

학생 수가 꾸준히 감소하는 추세를 보인 학교는 다음 해에도 학생 수가 감소할 여지가 있다고 예상해 볼 수 있는데요. 이러한 학교들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분석해 보았습니다.

매년 학생 수가 감소한 1,008개의 초등학교는 어디에 있을까요? 일반적으로 이미 학생 수가 적은 지방에서 지속적으로 학생 수가 감소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는데요. 정말 이 학교들이 지방에 있는지 알아보려고 합니다.

먼저, 지역 규모를 기준으로 특별/광역시, 시, 읍, 면, 특수지역으로 분류하여 분포를 확인해 보았습니다.

학생 수가 꾸준히 감소한 학교가 속한 지역의 지역 규모 분포를 표현한 막대 차트 (데이터 출처: 교육통계서비스)

매년 학생 수가 감소한 학교가 많이 분포한 지역은 읍, 면 지역이나 특수지역이 아닌 시, 특별/광역시 지역으로 나타났습니다. 의외의 결과였는데요! 시 지역과 특별/광역시 지역이 전체의 64.8%를 차지하고 있어, 지방보다 도시 지역의 많은 학교들이 지속적인 학생 수 감소 현상을 겪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학생 수가 꾸준히 감소한 학교가 속한 지역을 나타내는 단계 구분도 (데이터 출처: 교육통계서비스)

오히려 도시 지역에서 꾸준히 학생 수가 감소하는 초등학교가 많다니, 이와 같은 현상이 두드러지는 지역이 어디일지 궁금했는데요. 위 시각화는 학생 수가 매년 감소한 초등학교의 시도별 분포를 나타낸 단계 구분도입니다. 지역이 짙은 붉은색에 가까울수록 꾸준히 학생 수가 감소한 학교가 많다는 것을 의미하는데요!

차트를 보면 가장 짙은 색을 띈 지역은 경기도로 전체 1,008개 중 205개의 학교가 분포해 있습니다. 특히 경기도 중에서도 수원에는 32개의 학교가 분포했는데요. 수원은 2024년 1월 기준 경기도 내 인구수 1위임에도 불구하고, 학생 수가 꾸준히 감소한 학교가 가장 많은 지역이라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3. 지방 초등학교의 소멸

당연한 수순이겠지만, 학생 수의 감소는 끝내 폐교로 이어지게 됩니다. 지난 시간 동안 학생 수가 감소해 오다 끝내 문을 닫은 학교들에 대해서도 데이터로 살펴보았습니다. 2008년부터 2023년까지 교육통계서비스에 폐교 사실을 보고한 학교들의 데이터를 활용했어요.

지난 15년 동안 전국에서 문을 닫은 초등학교는 540개입니다. 그중 학생 수가 10명 미만 존재한 상태에서 문을 닫은 폐교는 전체 중 217개(40.18%)나 되었으며, 또 학생 수가 끝내 0명이 되어 문을 닫은 학교는 전체 폐교 540개 중 240개(44.4%)였습니다. 폐교 역시 수도권보다 상대적으로 학생 수가 적은 지방에서 더 많이 발생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요. 정말 그럴지 지역 규모별로 폐교의 분포를 확인해 보았습니다.

폐교가 속한 지역의 지역 규모 분포를 표현한 막대 차트 (데이터 출처: 교육통계서비스)

위 시각화는 2008년부터 2023년까지 지역 규모별로 폐교 수 분포를 나타낸 막대 차트입니다. 폐교가 많이 분포한 지역은 예상대로 면 지역이나 특수지역처럼 대체로 인구수가 4,000명 미만인 곳으로 각각 전체 폐교의 47.22%, 35.75%를 차지해, 이를 합하면 무려 82.97%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2008~2023 전국 폐교 초등학교의 수를 나타낸 막대 차트(데이터 출처: 교육통계서비스)

마찬가지로 폐교들이 실제로 위치한 시도는 어디일지 알아보았는데요! 2008년부터 2023년까지 시도별로 전국에서 폐교한 학교 수를 막대 차트로 만든 뒤, 폐교 수가 많은 지역 순으로 정렬해 보았습니다.

전라도와 경상도, 강원도 순으로 폐교가 많이 분포한 것으로 나타났는데요! 이 지역들은 인구수가 평균 3,000명이 채 되지 않는 면 지역과 섬이나 산에 위치해 발길이 닿기 어려운 특수지역에 위치했다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전라도의 경우, 문을 닫은 162개의 초등학교 중 141개(87%)는 면이나 특수지역에 있었고, 경상도는 160개 폐교 중 136개(85%)의 학교가 면이나 특수지역에 있었습니다.

반면 경기도를 포함한 특별/광역시 지역은 모두 낮은 폐교 수를 보여주고 있는데요. 특히 광주광역시와 세종특별자치시는 단 하나의 학교도 문을 닫지 않았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인구가 밀집되고 비교적 인프라가 좋은 지역의 학교는 폐교 확률이 낮지만, 지방의 면 지역이나 특수지역의 학교는 문을 닫을 확률이 크다고 해석할 수 있어요.

 

에디터의 한마디

지금까지 데이터를 활용해 초등학생과 초등학교와 관련된 특징을 살펴보았습니다. 특히 1971년에 비해 학생 수가 절반에 가까운 수치로 줄어들었다는 사실과 가장 낮은 시점이 2023년, 가장 최근이라는 점이 놀라웠습니다. 또 학생 수가 매년 빠짐없이 꾸준히 줄어드는 학교는 오히려 도심에 많다는 점, 이미 문을 닫게 된 지방의 폐교의 분포를 통해 미래에는 지금보다 더 많은 학교가 줄어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요.

본문에서 언급하지 않았지만, 초등학생 수가 감소하는 이유는 낮아지는 합계출산율 때문이라고 합니다. 통계청의 ‘인구동향조사 중 출생, 사망 통계’에 따르면 2023년 합계 출산율은 0.72명으로, 전년 대비 0.06명이 감소하며 역대 최저치를 달성했다고 합니다. 즉, 앞으로 초등학생이 늘어날 가능성조차도 줄어들었다고 해석할 수 있어요.

저는 종종 제가 졸업한 학교가 있는 동네를 찾아가 추억을 떠올려보곤 합니다. 어릴 적 뛰어놀던 운동장과 맛있는 간식을 사 먹었던 학교 앞의 분식점과 문방구를 보며 여전하면서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소소한 행복인데요! 오늘의 글을 쓰며 ‘우리 학교도 학생 수가 줄어 문을 닫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여러분들도 네이버에 졸업했던 초등학교 이름을 검색해 학생 수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아보세요!

원문: NEWS JELLY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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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지역의 병원이 없어진다면 https://ppss.kr/archives/266944 Thu, 12 Sep 2024 05:12:21 +0000 http://3.36.87.144/?p=266944 1.

지역 병원의 폐업이 반복되고 있다. 최근 경상남도 동부권에서만 종합병원 2개 기관이 문을 닫았다.

김해 중앙병원은 지역응급의료센터 운영 등 지역의 필수의료를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했으나 부실운영과 무리한 신축병원 건립 실패로 2023년 10월 운영을 중단하였다. 웅상중앙병원은 동부 양산 유일의 응급의료기관이었지만 병원장 별세 후 인수자를 찾지 못해 2024년 3월부터 폐업 상태다. 경남 서부권 농촌 지역에서도 군 내 유일한 응급실이 있었던 새하동병원이 경영난으로 휴업을 반복하다가 2022년 3월 결국 폐업하기도 했다

병원이 폐업한 후 지역 경제나 의료 접근성, 건강 결과 등이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연구는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관련 연구 「농촌 종합병원 폐업이 지역사회에 미치는 영향」). 폐업 후 대체로 응급 이송 시간이 길어지고 병원서비스 접근성은 감소했지만, 의료의 질이나 건강 결과 측면에서는 뚜렷한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2.

그렇다면 질문해 보자. 지역 병원이 폐업하고 사망률이 증가하지 않았거나, 심지어 건강 결과는 오히려 좋아졌다고 한다면 병원 폐업은 문제가 아닌 걸까?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병원이란, 의료란 무엇을 위한 것인지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만약 병원의 존재 의의가 숫자로 요약되는 건강 결과에만 있다고 하면 지역의 병원 하나쯤 없어져도 괜찮다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병원과 주민이 맺는 사회적 관계 자체를 의미 있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면, 병원 폐업 후 주민의 인식과 경험을 세심히 살펴야 비로소 질문에 답할 수 있게 된다.

오늘 소개하는 논문은 미국에서 농촌 병원이 폐업하고 1년 뒤에 주민의 인식을 조사한 연구다.

작가 mrsiraphol 출처 Freepik

연구의 배경이 된 미국 테네시주는 2010년 이후 14개의 농촌 병원이 폐업했다. 그중에서도 애팔래치아는 산간 지역으로서 경제적으로 낙후되었을 뿐 아니라 의료 접근성도 다른 지역보다 떨어진다. 의사를 비롯한 의료 제공자가 부족하고, 의료기관까지 거리도 멀며, 교통 상황도 열악하다. 건강보험이 없는 사람의 비중이 높고, 건강 정보를 습득하고 해석하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도 많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역 병원의 폐업은 기존 건강 불평등을 악화시킨다는 점에서 더 문제적이다.

연구진은 조사를 위해 54병상 규모의 작은 병원이 폐업한 지역을 찾았다. 빈곤율과 실업률이 높고 의료서비스 공급도 부족한 농촌 마을이었다. SNS와 지역 언론의 온라인 광고를 통해 병원에 관해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모집했고, 연구참여자가 소개해준 다른 주민을 만나는 방식으로 총 24명을 인터뷰했다. 인터뷰 내용을 분석하기 위해 의료 접근성을 가용성(availability), 접근성(accessibility), 편의성(accommodation), 지불능력(affordability), 수용가능성(acceptability) 등 5가지 차원으로 구성한 이론적 틀을 활용하였다.

연구 결과, 접근성 면에서는 모든 연구참여자가 병원 폐업 후 진료를 위한 이동시간이 길어졌다는 데 동의했다. 설상가상으로 외지 병원으로 이동하려면 더 열악한 도로를 거쳐야 했다. 대중교통 인프라는 턱없이 부족했고 특히 노년층과 거동불편자가 교통수단을 마련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주민들은 의료서비스를 이용하기 어려워졌다는 인식도 공유하고 있었다. 응급의료와 전문의 서비스는 더 이상 지역 내에서 이용할 수 없게 되었다. 주민들은 근처에서 응급 상황에 대처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몹시 애석해했다. 과거와 달리 기본적인 CT 검사를 위해서도 외지로 나가야만 했다.

사진: UnsplashZhen H

지역 병원이 폐업하면서 의료 이용의 경제적 부담도 가중되었다. 외지 응급실에 가기 위해 구급차를 이용해야 하는 상황은 가장 일반적인 걱정거리였다. 건강보험이 없는 사람들은 의료비 문제로 병원 방문을 미뤄야 하거나 이용 자체가 불가능할 것 같다고 염려하고 있었다.

일부 주민은 이전보다 대기 시간이 길어지고 진료받기가 불편해졌다는 사실도 지적했다. 연방공인보건센터에서 의료진을 만나려면 몇 달이 소요되는 일도 있었다. 병원 폐업 전에는 지역에서 365일 24시간 응급 진료가 가능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일과시간에 맞춰 진료를 받으려면 휴가를 내야만 했다.

마지막으로 주민들은 병원과 맺고 있던 관계를 잃게 되었다. 기존 병원의 의료진과 직원은 몇 다리만 건너면 아는 사이였고, 이는 ‘저 사람은 나를 진심으로 돌봐줄 것’이라는 신뢰로 이어졌다. 드나들던 병원 시설의 익숙함도 주민들이 안정감을 느낄 수 있게 했다. 하지만 병원 폐업과 함께 친숙한 관계도 사라지고 말았다.

논문은 결과를 갈무리하며 농촌 응급의료기관 지정 및 재정 지원, 일차의료 강화, 메디케이드 확대, 대체 의료시설을 확충하기 위한 법 개정 등 다양한 층위에서 의료 격차를 줄이기 위한 전략을 제시한다. 실질적인 정책 대안을 마련하는 일이 중요함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우리 지역의 의료를 지킬 수 있는 힘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지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사회적 동력이 없이는 아무리 좋은 정책도 제대로 구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3.

인구 감소와 저성장, 수도권 집중화가 심화하는 시대에 숫자 싸움만으로 비수도권 비도시 지역에 힘을 싣기는 쉽지 않다. 숫자를 통해 불평등을 드러내려는 노력의 가치를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다른 차원에서는 의료란 문서상의 건강지표가 아니라 사람들의 실제 삶과 생활을 낫게 만들려는 도구라는 점을 주장하고, 주민의 고유한 인식과 경험을 판단의 근거로 삼을 수 있게 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 연구의 가장 중요한 의의는 인터뷰를 통해 정책의 내용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실마리를 포착한 데 있지 않다. 그보다는 고작 54병상짜리 병원이 없어진 지역을 주목하고, 소중한 병원을 잃은 사람들의 경험세계를 탐구해 공적 의미를 부여한 것 자체에 있지 않은가 한다.

원문: 시민건강연구소


서지 정보

  • Letheren, A., Brown, K. C., Barroso, C. S., Myers, C. R., & Nobles, R. (2024). Perceptions of access to care after a rural hospital closure in an economically distressed county of Appalachian Tennessee. The Journal of Rural Health, 40(2), 219-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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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영이 성수역 이름을 구매한 진짜 이유는 https://ppss.kr/archives/266970 Thu, 05 Sep 2024 01:10:57 +0000 http://3.36.87.144/?p=266970 싸게 잘 사긴 했는데요

올리브영이 10억 원에 서울 지하철 2호선 성수역 이름을 구매했습니다. 올해 10월부터 향후 3년간 성수역은 ‘성수(CJ올리브영)역’으로 역명이 변경될 예정인데요. (※ 다만 구체적인 병기 역명은 추후 변경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이 거래가 싸게 잘 이루어졌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아무래도 성수라는 지역이 가진 상징성이 높게 평가된 것이겠지요.

하지만 왜 하필 성수역일까 의아해하는 시선도 분명 있습니다. 사실 2016년부터 시작된 역명 병기 유상 판매 사업은 대부분 근처에 본사를 둔 기업들이 브랜딩 차원에서 구매하거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병원들이 활용해 왔습니다. 그런 면에서 본사가 서울역 인근에 위치한 올리브영이 성수역 이름을 구매한 것은 다소 뜬금없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브랜드 인지도 또한 이미 충분히 높기도 하고요.

때문에 일각에서는 이번 행보가 성수동 인근에 오픈 예정인 올리브영의 새로운 대형 매장과 관련이 있다는 해석도 나오고 있습니다. 실제로 올리브영 측에 문의한 결과, 현재 준비 중인 매장 오픈을 앞두고 입찰에 응모한 것은 사실이며, 역명 등 구체적인 운영 협의가 진행 중이라는 답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올리브영이 성수역 역명 구매에 나선 숨겨진 의도에 대해 한번 추정해 보려 합니다.

 

결국 노리는 건 글로벌일 겁니다

아직 성수에 오픈 예정인 올리브영 새 매장에 대한 정보는 거의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성수동이 팝업스토어의 성지로 불리는 지역임을 고려할 때, 이 매장은 판매보다는 브랜딩에 초점을 둔 공간일 가능성이 큽니다.

올리브영의 모든 매장이 체험형 요소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주요 상권에 위치한 타운 매장들조차 브랜딩 기능은 보조적인 역할에 그칩니다. 아모레퍼시픽이 판매를 배제하고 체험에 집중한 ‘아모레 성수’와는 대조적인 모습이기도 한데요. 이는 올리브영이 브랜드보다는 리테일러로서의 본질에 더 집중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최근 올리브영은 PB(Private Brand) 브랜드 육성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뷰티를 넘어 건강 카테고리를 전략적으로 육성하고 있어 고객과의 소통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성수 대형 매장은 이러한 전략적 브랜딩의 핵심 역할을 맡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체험 기능 등이 기존 대비 훨씬 강화된 모습일 거고요.

하지만 사실 새로운 유형의 매장을 운영하는 것만으로도 앞서 말한 목적들은 충분히 달성할 수 있습니다. 굳이 거액을 들여 역명까지 구매할 필요는 없다는 거지요. 따라서 성수역명 병기 구매는 단순한 브랜딩을 넘어, 글로벌 확장을 위한 전략적 결정일 가능성이 큽니다.

성수동은 최근 해외 관광객들이 가장 선호하는 지역 중 하나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과거 명동이 차지하던 입지를 성수가 대체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는데요. 부역명 병기 구매가 국내 인지도 제고가 아닌, 해외 관광객들에게 올리브영을 알리기 위한 전략이라면 매우 합리적인 결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수는 외국인 관광객 수요가 가장 많은 상권으로 이미 검증된 지역입니다

특히 올리브영은 이미 글로벌 특화 매장을 옴니채널의 일환으로 활용해, 글로벌 고객을 국내 매장으로 유도하는 전략을 펼치고 있습니다. 해외 관광객들이 성수를 방문하면서 자연스럽게 올리브영을 접하고, 대형 매장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면 이러한 전략은 더욱 탄력을 받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예 새로운 매장의 이름을 역명으로 활용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성수와 올리브영만이 아닙니다

성수처럼 새롭게 관광 명소로 떠오르는 지역을 선점하고, 이를 기반으로 글로벌로 나아가려는 시도는 올리브영만의 전략이 아닙니다. 과거 명동에 관광객 수요를 노리고 대형 화장품 로드샵들이 들어섰던 것처럼, 최근 성수뿐만 아니라 압구정, 한남 등지에도 여러 브랜드들이 대형 매장을 연이어 오픈하며 외국인 관광객 수요를 공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단순히 매장을 여는 것을 넘어서, 해당 지역을 브랜드와 일체화하며 일종의 부동산 디벨로퍼 역할까지 맡는 형태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해외에서는 이미 LVMH가 파리 샹젤리제 거리, 뉴욕 맨해튼 5번가, LA 로데오 거리 등 명품 거리에 건물을 매입하고, 거리 조성까지 나서며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고요. 국내에서는 무신사가 성수, 압구정, 한남 등에 전략적으로 대형 거점을 세우며 이와 유사한 전략을 펼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이번 성수역 역명 입찰에서도 무신사가 올리브영과 경쟁을 벌였다는 점인데, 앞으로 이런 지역을 둘러싼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보입니다.

브랜드들의 해외 진출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소셜 미디어와 더불어, 관광객들이 찾는 주요 명소에 위치한 오프라인 매장은 가장 중요한 고객 접점이자 해외 진출의 시작점 역할을 하고 있는데요. 이런 맥락에서 성수가 앞으로도 핫플레이스로 자리 잡는다면, 3년 후에는 성수역의 역명이 더 비싼 가격에 팔려나갈지도 모르겠습니다.

원문: 기묘한의 브런치


커머스와 IT에 관한 트렌드를 기록하고 나눕니다

트렌드라이트는 국내 최대 규모의 커머스 버티컬 뉴스레터로, ‘사고파는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매주 수요일 아침, 가장 신선한 트렌드를 선별하여, 업계 전문가의 실질적인 인사이트와 함께 메일함으로 전해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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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7 기후정의행진, 기후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자 https://ppss.kr/archives/266922 Wed, 04 Sep 2024 02:13:22 +0000 http://3.36.87.144/?p=266922

유엔환경계획(UNEP)이 발표한 「2023년 배출량 격차 보고서」는 주요 20개국(G20) 가운데 탄소중립 목표대로 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국가는 단 한 곳도 없고, 이대로라면 금세기 말에 3도씨에 가까운 온도상승이 일어날 것으로 전망한다.

그런데도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 등 국제금융기구와 금융자본은 에너지, 교통을 비롯한 사회기반시설의 전환을 위한 사업에 민간 자본의 이윤을 보장할 수 있도록 대규모 공적 투자와 인센티브 강화를 요구하고 있다. 화석연료에 기반한 자본의 권력은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전환을 위한 공적 지원과 혜택을 요구하는 ‘약탈적 전환’의 흐름이 강화되는 것이다. 최근 유럽의 대규모 농민 시위와 유럽연합 선거에서 드러난 ‘친환경 정책’에 대한 반발(그린래시)은 기후위기 대응의 부정의와 불평등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한국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정부가 앞장서 석유가스전 시추계획과 핵발전소 수명연장과 확대를 발표하고 대기업들의 재생에너지 사업 투자 독려와 지원을 약속하고 있다. 이를 반영한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는 반도체 클러스터와 데이터 센터를 위해 16GW 이상의 전력수요 증가를 계획했고, 이는 핵발전과 화력발전소, 초고압 송전탑 건설계획으로 이어진다.

한편 정부의 탈석탄 정책에 따라 2025년 12월 태안 1, 2호기를 시작으로 2030년까지 20기의 노후석탄발전소가 폐쇄 예정이다. 그런데 발전소 폐쇄로 사라질 것으로 예상되는 3,000개 이상의 일자리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조차 없는 상황이다.

오직 경제성장과 기업의 이윤을 위해서라면 핵발전이든, 화석연료든, 재생에너지든 무엇이든 지원하고 개발하겠다는 정부와 자본의 계획 속에 민중들의 삶은 없다. 가덕도, 새만금을 비롯한 10여 개의 신공항 사업, 케이블카 설치와 국립공원 개발사업, 4대강 사업과 같은 생태계 파괴와 기후위기를 가속화하는 온갖 개발사업들이 추진되는 이유는 오직 하나다. 모두 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경제성장과 지역균형발전을 앞세우며 정당성을 주장한다. 정부의 이러한 기후변화대책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비롯한 기본권을 침해하고 있다며 제기된 기후헌법소원이 2차례의 공개변론을 마치고 최종 선고를 앞두고 있다.

연일 치솟는 물가와 금리, 부자 감세 속에서, 대기업과 금융자본은 사상 최고의 이윤을 쌓고 있지만 노동자, 농민, 자영업자, 시민들은 궁핍한 삶에 허덕이고 있다. 농민들은 식량주권과 생태농업전환을 요구하지만 반복되는 기후재난과 자본주의적 농업구조 아래 신음한다. 비인간 동물을 비롯한 뭇 생명들은 자본의 탐욕 아래 쓰러져간다. 현재 삶의 위기가 저들이 만들어낸 착취와 수탈로부터 비롯된 것이지만, 오히려 ‘성장과 발전’으로 풍요를 거짓 약속하고 있는 것이다.

윤석열 정권에 대한 분노는 ‘이대로 살 수 없다’는 우리 삶의 절박함이기도 하다. 오직 자본의 이윤에 헌신하며 기후재난과 불평등을 강화하는 윤석열 정권과 자본에 맞선 투쟁을 전면화하자. 9월 기후정의행진은 현장의 구체적인 투쟁들을 연결하며 평등하고 존엄한 삶을 위한 정의로운 전환을 열어낼 것이다.

 

907 기후정의행진 소식

이번 907기후정의행진에 담은 우리의 요구안, 행진정보, 그리고 시민들이 함께할 수 있는 다양한 참여방식과 추진위원가입등 정보는 907기후정의행진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907기후정의행진 홈페이지에서 자세한 내용 확인하기

원문: 시민건강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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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생 총력대응’의 진정성을 보여라 https://ppss.kr/archives/266500 Thu, 11 Jul 2024 02:38:54 +0000 http://3.36.87.144/?p=266500 지난 19일에 열린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에서 대통령은 국가 인구비상사태를 선언하고, (가칭) ‘인구전략기획부’ 신설과 ‘인구위기 특별회계’를 비롯한 각종 범국가적 총력대응 정책들을 발표했다. 이전 정부에서 내놓은 저출생 대책과 다른 점은 위상을 높인 전담부처와 별도예산을 명시하고, 저출생의 직접 원인이 되는 일·가정 양립, 양육, 주거 3대 분야를 집중 지원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비상사태라는 진단에 걸맞는 대응책이며, 정부가 집행에 진정성을 보일지 회의적이다. 우선 국회에서 정부조직법상 ‘여성가족부’의 존폐가 정리되어야 부총리급 ‘인구전략기획부’가 들어설 수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윤석열정부 출범이후 지속된 여야의 대치 정국을 풀고 다른 모든 일에 앞서 그 합의를 이끌어 낸다면, 정부가 말한 ‘총력대응’의 의지를 신뢰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어렵다면, 나머지 정책들의 파급력은 다시 말할 것도 없다.

출처: MBC

시민들은 당장 정부의 여러 감세정책 때문에 재원은 마련할 수 있을지, 주거지원정책이 아니라 부동산정책이 아닌지, 아동돌봄시간 연장보다 노동시간 단축이 우선이 아닌지, 성차별 해소 없이 일·가정 양립은 가능한지, 게다가 외국인 유학생과 그 배우자에게 ‘최저임금을 적용하지 않는 가사 돌봄 취업 기회’를 주는 것이 글로벌 시대정신에 맞는지 묻고 있다.

‘휴대폰이 재미있어서 애를 안 낳는다’거나 ‘여아 조기입학으로 저출생을 해결한다’는 정부기관의 발표가 거센 비판과 조롱을 받았던 것이 불과 두 달도 되지 않았다(관련기사1, 관련기사2). 과연 한국의 인구정책 결정권자들은 저출생이 왜 문제라고 생각하고, 진정 이 문제를 해결할 의지와 능력은 있는 것일까? 이런 발표가 연이어 나온다는 것은 한마디로 무능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비상사태가 어제처럼 오늘도 이어지고, 오늘보다 내일 더 심해져서 결코 ‘저출생 추세 반전’이라는 대통령의 목표를 이루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한두 사람에 그치지 않는 것 같다.

태어나지 않는 아이들을 걱정하면서 딴 수가 없으니 안 하는 것보다는 하는 게 낫고, 없는 것보다는 이런 지원 정책이라도 나오는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다 같이 보다 더 나은 삶을 살게 하려고 머리를 맞대고 애쓴다기보다, 형편이 더 좋은 사람이 더 많은 지원정책의 수혜를 입고 사정이 어려운 누군가는 희생하고 곤란한 삶을 견디라고 하는, 더욱 강고한 불평등의 체제화를 비상사태의 해법으로 삼는 데 동의할 수는 없다.

당장 단기 육아휴직 도입과 육아휴직 월 급여 상한 인상의 혜택을 제대로 누릴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이런 대책은 공허하다 못해 좌절감까지 준다. 노동시장, 젠더 등 구조적인 사회불평등을 직격하지 않는 대책은 이미 우리가 수없이 경험한바, 그 결과는 불평등의 심화이다.

2월 20일 경북도는 도청에서 ‘저출생과 전쟁’ 선포 행사를 열었다. / 출처: 경북도

인구정책은 출생정책을 넘어선다. 인구정책은 한 사람이 태어나고 자라고 배우고 일하며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전 과정에 대한 사회정책들의 총합으로, 국가의 책무성이 전면적으로 구현되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국가는 스스로 감당해야 할 책임을 축소하고 그것을 시민들에게 돌림으로써, 생애과정에서 직면하는 다양한 사회적 위험을 개인이 극복할 과업으로 여기게 함으로써 통치의 효율성을 꾀하고 있다.

결혼과 출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국가권력은 그 과정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나는 돌봄과 노동에 대한 성차별적 사회구조와 불리함을 전면적으로 갱신하지 않고도 실현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정책들로 면피 중이다. 이런 통치 전략의 성공 여부는 ‘정부 역시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느냐’ 라는 담론의 보편화 정도가 좌우하는바, 문제 해결의 책임을 내면화한 주체가 얼마나 생산되었는가가 결정한다.

그렇다면 정부의 저출생 극복 정책이 단편적이고, 역부족이어서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비판하는 것으로는 충분한가? 고디언의 매듭(Gordian knot)을 잘라내는 영웅을 기다리며 문제를 외재화하는 것은 책임의 내면화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기 어렵게 만든다.

2000년대 이후 한국에서 저출생 현상은 개인들의 보편적 삶의 양식으로 자리 잡은 사회적 실천이자 문화가 되었다. 이는 교육, 노동, 주거, 지역, 젠더 등 모든 삶의 조건에서의 불평등과 위기의식에 기반한 사회구성원들의 개별적이면서 집합적인 수행이다.

그럼에도 국가는 여전히 저출생을 경제·성장·국력·노인 부양의 위기로만 호출하며 그 기저에 놓여 있는 구조적 모순을 비껴가고 있다(서리풀논평 바로가기). 점점 더 많은 개인들이 생존과 친밀성의 공동체로서 유지해 왔던 가족이라는 오래된 시스템에서 떠나기를 선언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변화와 시민들의 새로운 필요에 반응하기보다, 국가권력과 총자본은 ‘국가존망의 위기’라는 역사적 국면으로 전환하여 통치의 존속을 도모하고 있다.

저출생이 불평등과 위기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저항이자 결단이라는 맥락에서 우리는 정책당국에게 다음과 같이 주장하는 바이다. 출산과 인구전략이라는 연상의 고리를 끊어야만, 여성의 삶을 출산과 양육에 맞춰 쉽게 바꿀 수 있다는 도구적 인식을 중단해야만, 각자의 삶을 보호하고 더 나은 선택을 넓히는 방법으로서 저출생을 넘어선 인구정책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시민들에게 다음과 같은 결의를 제안한다. 현재의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가부장적 재생산관계로부터 파생되는 사회적 불평등을 돌파하지 않는 한, 그것을 피해 가는 복잡하고 우스운 방법들로는 저들이 말하는 비상사태도, 우리 삶의 위태로움도 해결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불평등과 차별을 극복하고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민주적이면서도 공공적이며, 지속가능한 사회적 관계’를 만들기 위한 정치적 실천, 그래서 현실과 미래의 사회구성원들이 자기 삶에 대한 결정의 실질적 주체가 되기 위한 역사적 실천. 이런 투쟁과 실천을 함께 할 것을 요청한다.

원문: 시민건강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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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휴전 30년이 지나서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가 방영되다 https://ppss.kr/archives/266508 Fri, 05 Jul 2024 02:41:59 +0000 http://3.36.87.144/?p=266508 1983년 6월 30일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453시간 45분 동안 방송되어 이산가족 상봉을 도왔다.

1983년 오늘(6월 30일), 한국방송공사(KBS)는 1TV를 통해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를 방송하기 시작했다. 이 특별생방송은 한국전쟁 33주년과 휴전협정(1953.7.27.) 30주년을 즈음하여 일제 식민지 지배와 한국전쟁(1950)으로 인한 남북분단이 낳은, 약 1천만 명에 이르는 이산가족을 찾기 위해 기획한 특별 프로그램이었다.

KBS는 본래 라디오에서 10여 년 동안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해왔던 터였다. 그래서 하루 동안 10가족 정도가 만나게 될 것으로 예상했었다. 그러나 예상을 뒤엎고 시민들이 끊임없이 밀어닥쳤다. 뜻밖의 열기에 KBS는 닷새간 정규방송을 취소하고 이산가족 찾기 릴레이 생방송을 이어갔다.

 

상봉률 19%의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

이산가족 찾기 신청은 모두 100,952건이었다. 그중 53,536건이 방송에 소개되어 10,189건의 이산가족이 상봉했다. 성공률이 19.03%였다. 이는 이전의 신문과 라디오를 통한 이산가족 찾기 운동의 미미한 실적에 비하면 대단한 성과였다.

이산가족들의 폭발적인 반응에 고무된 KBS는 전담 방송 인원 1,641명을 투입했고 9개 지역 방송국을 동시에 연결하는 다원 생방송을 중계하는 등 모든 방송 역량을 투입했다. 자원봉사에 참여한 전국의 시민·학생들과 정부의 종합적인 지원(만남의 광장, 간이우체국, 이동 파출소, 법률상담소, 미아보호소 설치 등)도 큰 도움이 되었다.

1983년 6월 30일 밤 10시 15분에 전파를 타기 시작한 이 생방송은 1983년 11월 14일 새벽 4시까지 138일에 걸쳐 방영되어, 총 453시간 45분으로 마감되었다. 단일 주제 생방송으로 기록을 달성한 이 프로그램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어느덧 40년으로 치닫고 있었던 분단 상황과 그에 따른 1천만 이산가족의 존재가 있었다.

방송이 시작되자, 이산가족들의 사연에 온 국민이 함께 눈물을 흘렸다. ⓒ KBS 아카이브, 이하 같음.

가족을 만나지 못했던가, 할머니의 지친 표정과 좌절은 30년 시간을 넘어 내게 아직도 아프게 다가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민족사로 다루어져야 할 이산의 비극을 개인사로 방치했던 정부의 직무유기가 있었다. 일제 식민 지배에서 해방은 38도선 남북에 각각 다른 외국군이 진주하면서 이루어졌고, 이는 곧 남북이 이념으로 대립 갈등하면서 한국전쟁으로 이어졌다.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은 수백, 수천만의 인명 피해와 함께 1천만이 넘는 이산가족을 낳았다. 분단으로 인한 이산가족은 남북에서 생사를 모른 채 살아가야 했다. 그러나 이산가족은 막힌 휴전선 남북에만 있지 않았다.

 

이산가족 찾기는 ‘개인 문제’로 방치되었다

전쟁의 소용돌이와 피난길에서, 전후의 혼란과 절대 빈곤 속에서 각자도생해야 했던 무지렁이 백성들에게도 말 못 할 이산의 아픔이 있었다. 부모와 자식이, 형제와 자매가 헤어져 서로의 생사도 모르고 살아야 했던 이들 남한 내 이산가족들에게 이산가족 찾기는 개인에게 맡겨져 있었다.

남북 당국이 이산가족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53년 12월 11일부터 1954년 3월 1일까지 ‘휴전협정’ 제3조 제59항에 근거하여 설치된 ‘실향 민간 귀향 협조 위원회’가 남북이 이산가족 문제를 인도적 차원에서 해결키로 한 이후 첫 만남이었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1971년 8월 20일 남북적십자 간 판문점 중립국 감독위 회의실에서 사상 첫 회담을 개최한 이래 20여 차례의 예비회담과 8차례의 본 회담을 통해 이산가족 고향 방문 등을 조율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남한의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어떤 정책도 펴고 있지 않았다.

고작 라디오를 통해서 지엽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던 이산가족 찾기를 통해서 소수의 가족이 가끔 상봉에 성공하는 정도였다. 정부도 남한 내 이산가족 문제를 전 국민적 문제로 바라보지 않았고, 이산가족들 역시 그것을 자신의 개인적 문제로 끌어안고 있었다.

무능한 정부는 직무 태만을 저지르고 있었고, 착한 국민은 분단으로 헤어진 혈육을 찾는 일이 국가의 책임이란 걸 생각지도 못했다. 북에 두고 온 가족들이야 휴전선으로 막혀 있으니 어쩔 수 없다 쳐도 이남에서 헤어졌던 가족을 찾는 일을 왜 국가가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가족을 만나지 못했던가, 할머니의 지친 표정과 좌절은 30년 시간을 넘어 내게 아직도 아프게 다가온다.

방송이 시작되자, 온 나라의 국민이 공황에 빠졌다. 영상으로 전달되는 이산가족들의 곡절 많은 사연에 사람들은 함께 눈물을 흘렸고, 상봉에 성공한 이산가족들이 ‘맞다, 맞아!’를 외칠 때 손뼉을 치면서 함께 기뻐했다.

혈육들이 눈물로 재회하고 얼싸안고 울부짖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사람들은 분단이 우리의 삶에 드리운 깊고 어두운 그림자를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수십 년 동안 헤어져 살던 이산가족들의 상봉을 통해 분단의 아픔이 치유되는 듯한 황홀한 감정의 고양을 체험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혈육의 정, 민족적 동질성이 분단을 극복할 수 있는 출발점이라는 것도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함께 눈물 흘리며 분단 아픔을 나누다

넉 달 보름여에 걸친 최장 시간의 생방송이 이루어졌지만, 상봉에 성공한 사람은 열에 둘뿐이었다. 여전히 다수 이산가족이 이산의 고통을 치유하지 못했고, 분단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 생방송은 이산가족 상봉의 절실한 필요성을 환기하면서 이태 후 남북 이산가족 최초 상봉(1985.9.)의 촉매 역할을 했다. 냉전 체제의 긴장 완화에도 이바지했다.

이 생방송 소식은 온 세계에 타전되었다. 더는 지구상에 이와 같은 비극이 생겨나서는 안 된다는 평화의 메시지가 되어 보편적 인류애를 고취했다. KBS의 이 프로그램이 제6차 세계 언론인 대회에서 ‘1983년의 가장 인도적인 프로그램’으로 선정되고 세계평화 기여자에게 주는 골드머큐리 국제상(1984)을 받은 것은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은 결과였다.

KBS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기록물. 비디오테이프와 사진 등 2만 522건이다.

‘KBS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기록물’은 2015년 10월 ‘한국의 유교책판’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에 등재됐다. 이 기록물은 KBS가 1983년 453시간 45분 동안 생방송 한 남북한 이산가족 찾기 등을 담은 비디오테이프 463개, 담당 프로듀서의 업무수첩, 이산가족이 작성한 신청서, 일일 방송 진행표, 큐시트, 기념 음반, 사진 등 자료 2만 522건 등이다.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그러나 1세대에겐 시간이 별로 없다

<KBS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의 타이틀곡은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이었고, 이산가족 상봉 시 배경 음악은 패티 김의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였다. 눈물을 훔치면서 그 애잔한 가락을 듣던 기억이 어제 같은데 어느덧 세월은 30년이 훌쩍 흘렀다.

1985년 9월, 서울과 평양에서 최초로 이산가족 고향방문단과 예술 공연 교환 행사 개최된 이래, 남북의 이산가족 상봉은 2015년 10월까지 20차례, 이산가족 화상 상봉은 2005년 8월 15일 처음 이루어진 뒤 2007년 11월까지 7차례에 걸쳐 이어졌다.

남북 정상의 합의를 기반으로 한 6·15선언(2000)과 10·4선언(2007)으로 남북 간 화해와 평화 통일의 실마리가 열리면서 이산가족 문제에 대한 기대를 높였다. 그러나 2008년부터 이어진 보수 정부 9년은 그런 성과를 깡그리 무너뜨려 버렸다.

‘KBS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아카이브에는 이산가족 상봉 관련 기록물이 소개되고 있다. 특별생방송이 진행되던 시기의 자료, 특히 그때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살려 주는 사진 자료들이 주는 감동은 30년 세월을 넘어서 절절하게 다가온다.

현재까지 생존해 있는 이산가족 1세대는 80%가 70세 이상 노인으로, 80세 이상 고령자가 절반에 이른다고 한다. 앞으로 20년 후면 이들은 대부분 사망할 것으로 보이니 이들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다. 이들이 죽기 전에 혈육을 다시 만날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될까를 생각하면서 이산가족 찾기 관련 사진을 곰곰 들여다본다.

원문: 이 풍진 세상에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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