ㅍㅍㅅㅅ https://ppss.kr 필자와 독자의 경계가 없는 이슈 큐레이팅 매거진 Thu, 26 Mar 2020 08:48:39 +0000 ko-KR hourly 1 https://wordpress.org/?v=5.8.11 https://ppss.kr/wp-content/uploads/2015/07/ppss-100x100.png ㅍㅍㅅㅅ https://ppss.kr 32 32 자녀를 각자 다른 종교에 ‘자산 배분’한다면? https://ppss.kr/archives/213120 Thu, 26 Mar 2020 08:48:39 +0000 http://3.36.87.144/?p=213120 분산투자의 관점에서, 자식이 세 명일 때 셋 다 다른 종교를 가진다면 어떨까? ​한 명은 기독교, 한 명은 불교, 한 명은 이슬람교로 하십시다. ​부모가 천국 및 낙원에 가거나 성불하기를 각자 다른 곳에서 열심히 기원한다면 우리도 죽어서 행복해질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더 높지 않을까? 그것이 분산 투자 아닌가.

이 가설은 우선 사후의 세계가 존재할 가능성을 우리가 알 수 없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사후 세계가 없다면 말짱 꽝이지만 혹시 존재한다면 헤지(hedge)를 해야 하니까.

​가장 좋은 케이스는 천국이 하나인 경우다. 천국은 동일하지만, 천국으로 들어오는 길, 즉 ‘채널’ 혹은 접수창구가 다른 거라면? 말하자면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의 고객 만족 시스템은 개별적이지만 입국장은 똑같은 경우다. 모두 각자 다른 창구를 통해 자녀들의 기도를 접수해놨고, 셋 다 나름 가산점을 부여했다면 해피 케이스다. 마치 암 보험을 여러 개 들었는데 보험금이 다 함께 나오는 경우 아니겠는가.

​현실 세계를 보다 보면 같은 종교여도 때에 따라서 ‘접수창구’가 제대로 작동 안 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예컨대 천국이 동일함에도 특정 교파에서 기도하는 게 효과 없는 경우라면, 한 군데에서 평생 기도해봤자 불발이 날 가능성도 생각해야 한다. 이런 경우에는 여러 교파 혹은 종교에서 골고루 기도하는 것이 기도 접수 가능성을 높일 것이다.

​특히 기도가 ‘누적 기도량’보다 ‘접수의 유무’가 더 중요할 때 그러하다. 많이 기도한 게 아니라 ‘한 번이라도 로그인 흔적이 있어야 한다’가 더 중요하다면? 간혹 어떤 종교에서는 ‘죽기 직전에라도 회개한다면 똑같이 죄의 사함을 받는다’고 하는데 이는 분명 누적 기도량보다 접수 유무가 더 중요하다는 암시이리라. 그렇다면 무조건 많은 창구에서 접수를 해야 한다. 죽기 직전에 모든 종교에 다 귀의해볼 필요가 있다.

​천국이 마치 롯데월드와 에버랜드가 다르듯이 물리적으로 따로 존재할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기독교의 천국과 불교의 천국이 별도로 존재한다면? 그렇다면 양쪽 기도가 다 접수되어 있을 테니 1) 더 크고 강력한 교파에서 알아서 영혼을 모셔간다, 혹은 2) 우리가 천국 가는 길에 선택권이 생긴다. 둘 다 나쁘지 않은 결과다.

출처: 『세인트☆영멘』

​가장 나쁜 경우는 천국 가는 행이 1인 1사 시스템으로 배타적일 때다. 그리고 여러 종교에 귀의했을 때 계약 위반으로 문제가 되는 경우다. 즉 기독교에서 기도했지만, 자녀 형제 중 누구라도 경쟁 종교에 기도를 넣은 행위가 그 자체로 법적 시비가 발생해서,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한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다. 예컨대 기독교의 천국에 입성 직전에 불교의 염라대왕 비서실에서 서류를 들고 찾아와서 행패를 부리다가 결국 양쪽에서 계약 파기를 이유로 지옥으로 떨어뜨린다면…

​실제로 각 종교에서 이런 배타적 계약 이론을 설파할 이유는 충분하다. 그런 교리가 없다면 모든 합리적인 자산 배분가는 모든 종교를 다 돌아다닐 것이고, 그에 따라 그들의 막대한 십일조 및 기부금은 분산되어버릴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현실적인 문제다. 종교는 배타적일 필요가 있다.

​만약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너의 첫째 딸은 나에게 기도를 해서 만족한다만, 너의 둘째 아들이 감히 부처에게 기도한 게 영 괘씸해서 나는 너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저세상 헌법의 안정성에 심각한 의문을 제시해야 한다. 오히려 자식이 악마에게 기도를 했다 한들 넓은 품으로 ‘나’는 용서해줘야 정상 아닐까. 물론 이런 망상을 저지르는 죄는 피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자산 배분 입장에서 종교는 사후적으로 ‘대박 옵션’의 세계다. 만약 천국이 실재한다면, 단 한 번의 기도 접수만으로도 그 천국에 입성하느냐 마느냐, 수천 배의 행복을 얻느냐 마느냐가 결정된다. 즉 옵션 가치는 어마어마하게 높고 가격은 비대칭적으로 저렴한 상황이다. 그러니 이런 티켓은 최대한 다양하게 수집해두는 것이 맞다. 이론적으로는 모든 종교를 다 믿는 게 맞다.

​그러나 물론 종교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논리적 근거를 초월한 신념을 말하는 것이니, 분산해서는 안 될 것 같다. 또 종교에서 주는 기쁨이란 사후적인 것보다 현세에서의 기쁨이 더 클 것이다. ​오늘도 종교활동을 하시는 분들은 얼마나 큰 기쁨과 충만감을 얻었겠느냔 말이다.

​다만 우리 자녀들이 모두 다른 종교를 믿는다면, 집안이 행복해질 가능성보다 불행해질 가능성이 훨씬 높지 싶다. 불행해질 가능성을 막고자 그런 꿈도 접어야겠다. ​개인적으로 죽으면 모든 게 끝난다 생각한다. 오로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하나의 잔상으로 존재하는 것 아닐까. 나를 아는 사람들이 멸종하면 그것으로 존재도 끝이고, 나를 아는 사람들이 번성하면 그것으로 남에게 의미를 주고 사는 삶이 될 것 같다.

​그러나 종교란, 우리가 세속 세계에서 살며 잊기 쉬운 영적 정신적 재교육을 해주는 시설이다. 인류의 지혜를 알려주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마련해주며,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기댈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존재이다. 앞으로 종교가 더 커질 것이냐 작아질 것이냐 묻는다면, 나는 매수 의견(long)이다. 다만 톱 픽(top pick)은 따로 없다.

원문: 불릴레오 천영록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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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지가 비난받는 이유와 물고기 표시 https://ppss.kr/archives/214588 Mon, 23 Mar 2020 07:06:04 +0000 http://3.36.87.144/?p=214588 요즘 신천지라는 기독교 계열 이단 종교에 대한 사회적 분노가 거셉니다. 10여 년 전부터 개신교에서는 이 신천지라는 이단에 엄청난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에서도 1층 공지란에 가장 크게 붙여놓은 것이 신천지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 공지란에도 이런 그림과 함께 신천지에 대한 경고문이 붙어 있었습니다.

이번 사태가 벌어지면서, 누가 신천지 신도 수가 몇천 명 정도냐고 묻길래 몇십만 명 수준일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실은 저도 그 숫자는 잘 몰랐습니다. 그냥 생각에, 몇천 명 수준이면 그 종교가 그렇게 유명하지 않을 것이고, 몇백만 명 수준이면 감히 이단이라고 부르지 못할 테니, 아마 수십만 명 수준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는 25만 명 정도 된다고 하더군요.

사실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면 신천지든 뭐든 기독교 계열 이단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신천지=전염병이라는 씻지 못할 오명이 각인되었으므로 신천지라는 이단의 성장은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기독교, 특히 개신교 입장에서는 불행 중에서 그나마 좋은 소식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신천지 박멸 절호의 찬스에 개신교 측에서는 이분이 등장하셔서 갑분싸.

제 생각입니다만, 그럼에도 기존 신천지 신도들은 이번 기회에 신천지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탈출하지 않고 오히려 더 굳게 단결할 것 같습니다. 자신들은 억울한 피해자이고, 기존 기독교 교단에서 자신들에게 부당한 혐오와 증오를 조장하며 탄압한다고 여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지금 신천지 신도들은 로마에 고의로 화재를 일으켰다는 누명을 쓰고 콜로세움에 끌려 나와 사자밥이 되면서도 믿음을 굽히지 않았던 초대 기독교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을까요?

저는 신천지가 무슨 교리를 가르치는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서 모릅니다. 제 직장 동료분 중에 독실한 개신교 신자가 있어서 최근 물어보았습니다.

Q. 신천지에서는 주로 뭘 가르치길래 이단이라고 하나요?

A. 걔들은 요한계시록에 굉장히 집착하는데, 거기 나오는 14만 4,000명이라는 숫자에 큰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 숫자의 신자들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쳐요.

→ 사실 개신교도 교회 안 나오면 모두 지옥 간다고 가르칩니다.

Q. 그거 말고는 이단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나요?

A. 일단 신자가 되면 포교를 해서 새 신자를 데려오라고 조직적으로 움직여요.

→ 사실 개신교에서도 새신자 선교를 굉장히 중시합니다. 조직적으로 조를 짜서 길거리에서 선교 활동을 하기도 하고, 전 세계 방방곡곡에 선교사를 보냅니다.

Q. 그 외에는 없어요?

A. 교회에 돈을 바치라고 부추겨요.

→ 교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건 개신교도 마찬가지예요. 좀 심한 경우로, 전에 제가 다니던 대형 교회에서는 목사님이 건축 헌금을 장려하면서 일요예배 때 어떤 가정의 주부가 제출한 편지를 감동적인 음악과 함께 읽어주시는데, 내용은 ‘전세금으로 모았던 돈을 모두 하나님께 바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굉장히 놀랐습니다. 그 외에도 집 판 돈을 모두 헌금으로 내서 가정 분란이 일어나는 사례를 종종 들었습니다.

Q. 걔들은 교주 이만희가 재림 예수라고 주장하나요?

A.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그런 소리를 안 하는데, 아주 핵심층으로 올라가면 결국 ‘사실 이만희가 재림 예수’라고 가르친대요.

→ 신천지에서 그렇게 주장하는지 여부는 모르겠으나, 과거 로마 시절, 언젠가 하나남이 내려보내 주시는 구세주가 내려와 로마를 무찌르고 유대민족을 구원해주실 거라고 믿던 유대인들에게는 어느 날 과거가 베일에 싸인 산골 마을 출신이자 배운 것도 없는 막노동자 출신의 예수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내가 신의 아들이자 너희들의 구세주’라고 주장했을 때도 유대인들은 아마 비슷하게 여기지 않았을까 하긴 합니다.

Q. 솔직히 여태까지는 개신교와 큰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

A. 걔들은 은밀하게 움직이고 세뇌가 될 때까지 정체를 밝히지 않아요.

→ 지금은 아닙니다만, 로마 시대에는 기독교도 비슷하게 행동했습니다. 이크티스(Ichthys)라는 물고기 그림도 초기 기독교인들끼리 로마의 탄압을 피해 서로를 알아보는 비밀 신호였지요.

이크티스입니다. 영어식으로는 익씨스, 헬라어로는 익투스라고 읽습니다. / 출처: 위키피디아

왜 하필 물고기가 기독교의 상징이 되었느냐 하면 예수님의 오병이어 기적도 있고 베드로를 포함한 십이사도의 상당수가 어부 출신인 것도 있습니다만, 다음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구절의 머리글자들을 모으면 ‘IChThYS’가 되는데, 당시 사용되던 헬라어(그리스어)에서 비슷하게 발음되는 ‘ikhthýs’라는 단어가 바로 물고기라는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 Iēsous (Ἰησοῦς) 예수 (Jesus)
  • Christos (Χριστός) 기름 부음 받은 (anointed)
  • Theou (Θεοῦ) 하나님의 (God’s)
  • yios (Yἱός) 아들 (Son)
  • sōtēr (Σωτήρ) 구세주 (Savior)

저는 신천지와 정통 기독교의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소수의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냐 인류에 대한 사랑을 가르치는 집단이냐의 차이라고 봅니다.

신천지의 근본적인 구조는 14만 4,000명 안에 들어가야 구원을 받는다는 신도들끼리의 경쟁 체제입니다. 그렇게 소수 정예로 유지되면 교주가 얻는 경제적 이익이 제한되니까, 전도를 많이 해야 경쟁에서 순위가 올라간다는 식으로 전도를 부추기겠지요. 이번에 신천지가 국민적 혐오 대상이 된 이유는 위에 나열된 이유들 때문이 아닙니다.

전염병을 퍼뜨리게 된다는 것을 알지만 자신은 14만 4,000명 안에 들어가기 위해 수요예배에 참석해야 한다며 증상이 있음에도 병원을 빠져나가 종교 모임에 참석하고, 이 난리가 벌어진 속에서도 교단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교회에 심어놓은 추수꾼들의 정체를 밝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건 다른 사람들에게 무슨 피해가 있건 말건 자신이 다른 경쟁자를 누르고 14만 4,000명 안에 들어가야 하고, 자기 교단의 세력 확장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보여주는 행동입니다.

와이프가 뉴스를 보다 한마디 하더군요.

신천지 교인은 하나 같이 다 버젓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더라… 간호사, 경찰 등등.

사실 그 이유가 신천지가 사랑의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가장 잘 보여줍니다. 그들은 가난하고 못 배우신 분들에게는 전도를 하지 않습니다. 돈이 안 되니까요. 예수님은 부자와 권세 있는 자들도 멀리하지 않으셨지만, 가난한 자와 멸시받는 자들을 주로 가까이하셨습니다.

그에 비해 정통 기독교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릅니다. 저는 성경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바로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께서는 ‘혈통적인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과거의 율법을 잘 지키는 자신들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유대교인들의 믿음에 반하는 사랑의 가르침을 펼치셨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유대교인들에게 미움을 받으셨습니다. 기독교에서 율법은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그거 율법을 어기는 것 아니냐’라는 공격을 수없이 당하시면서도 당장의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에 집중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톨릭이 전국적으로 모든 미사를 2주간 취소하고 가정 미사 및 대송으로 대체하는 것이나, 소망교회 순복음교회 등에서 일요 예배를 온라인 예배로 대체한 것은 진실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일부 개신교 교회들은 아래와 같은 핑계를 대면서 일요 예배를 위해 교회에 모이라고 부추깁니다.

신천지가 이런 핑계를 대고 계속 종교 회합을 가진다고 하면 납득이 되시겠습니까?

어지간한 규모의 교회치고 신천지 추수꾼이 없는 교회는 없습니다. 그렇게 좁고 밀폐된 교회에 모여 침을 튀기며 찬송가를 부르면 코로나19가 더 쉽게 확산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도, 온라인 예배와 가정 예배라는 훌륭한 대안이 있음에도 꼭 일요 예배를 고집하는 속사정은 여러분도 짐작하실 테니 여기서는 적지 않겠습니다.

심지어 국민이 투표로 선출한 대통령보다 종교 지도자인 이맘의 권한이 더 높은 이란조차, 기독교의 일요 예배에 해당하는 금요 기도를 취소했습니다.

참된 기독교인이라면 다음의 성경 구절을 읽어보시고 어떤 것이 참된 기독교인으로 해야 할 일인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목사님들이 뭐라고 하든 적어도 2주간은 교회에 나가지 말고 댁에서 온라인 예배 혹은 가정 예배를 드리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마태복음 6장 5–6절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원문: Nasica의 뜻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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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예배에는 성령이 없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 은화 이야기 https://ppss.kr/archives/212887 Fri, 06 Mar 2020 05:48:31 +0000 http://3.36.87.144/?p=212887 지난주에 개탄스러운 기고문 하나를 보았습니다. 요약하면 코로나19건 뭐건 감염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반드시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려야 하며, 온라인 예배와 온라인 헌금으로 대체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입니다. 이유는 여러 가지를 댑니다만, 무엇보다 저는 교회에 나와야만 성령이 임재하신다는 주장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 기고문을 올린 목사님은 이런 말까지 하셨습니다.

여건이 좋지 않기 때문에 온라인으로 예배를 한다는 논리는 구약시대에 예루살렘까지 가지 않고 가까운 산당에서 제사하던 논리와 다르지 않다.

이건 정말 기독교가 아니라 유대교스러운 주장입니다. 저 가까운 상당에서 제사 지내는 것은 사마리인들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는 물론 예수님 시대까지도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이교도 취급을 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앗시리아가 북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킨 뒤 끌려가지 않고 그 땅에 남아 외국인들과 혼혈이 된 유대인들을 말한다고 합니다. 신앙적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기는 하되, 바빌론 유수에서 돌아와 예루살렘에 다시 성전을 쌓은 유대인들이 그들을 배척했기 때문에 나블루스(Nablus) 지역의 게리심(Gerizim)산에 자신들만의 성전을 따로 쌓았고 거기서 자기들끼리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원래 유대인들은 아무 데서나 자기들끼리 하나님을 향한 제사를 지내서는 안 되었습니다.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장의 주관 하에서만 제사를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사장 계급은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취했습니다. 제물로 쓸 소와 양, 비둘기의 판매는 물론 성전에 내야 하는 인두세의 환전도 독점적으로 취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지방은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으므로 로마 화폐인 데나리온(denarius)이 통용되었는데, 성전에 내는 인두세는 반드시 과거 유대 왕국 화폐인 반-세겔(shekel)로 내야 했습니다. 이 환전 과정에서도 막대한 (대략 10배) 환차익이 제사장 계급으로 넘어갔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그런 유대인들의 전통과 질서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이교도 취급을 받았습니다. 저 목사님이 기고문에 언급하신 ‘가까운 산당에서 제사하던 논리’는 바로 저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AD 68년경의 예루살렘 세겔 은화입니다. 앞면에는 ‘이스라엘 세겔, 3번째 해’라고 되어 있고 뒷면은 ‘성스러운 예루살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1차 유대반란 때 주조된 것입니다. / 출처: 위키피디아

그러나 정작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인들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예루살렘 대성전에서 드리지 않는 제사는 모조리 무효이므로 너희들은 예루살렘 제사장의 권위에 복종하라고 꾸짖으셨나요?

19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 요한복음 4장 19–23절

예수님께서는 유대 사회에서 경멸과 증오의 대상이던 사마리아인이나 창녀, 세리들을 가까이하셨습니다. 그러나 요즘 기독교인 중에는 중국인들에 대한 무차별적 증오심과 경멸을 거리낌 없이 퍼붓는 분들이 있습니다. 스스로 원해서 중국인이 된 사람도 없고, 스스로 원해서 코로나19를 퍼뜨리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자신을 보고 ‘주여 주여’라고 외치는 자들이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자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분노를 불러일으킨 것은 막대한 이익을 남기고 환전을 하고 가축을 팔던 장사꾼들, 즉 제사장들에게 상납하던 그들의 하수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으로 인해 경제적 특권에 위협을 느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즉 기득권 세력은 로마라는 외세의 힘을 빌려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합니다.

45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46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47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 누가복음 19장 45–47절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악마를 상대하실 때도 말로 꾸짖으셨지만 성전의 환전상에게는 그야말로 폭력을 휘두르셨습니다. 악마에게는 말이 통해도 종교로 돈을 벌려는 자들은 말이 안 통하셨나 봅니다.

특히 저 기고문에서는 중소 교회의 공포심도 느껴집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모두 평등하게 만드셨고 아무리 잘난 사람이나 아무리 못난 사람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다 원죄를 가진 필멸자에 불과하지만, 정작 같은 인간들끼리 보기엔 사람마다 외모나 재주, 성품이 결코 평등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목사님의 설교에도 역량의 차이점이 많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떤 목사님에게는 많은 신도가 몰려서 대형 교회가 되고, 어떤 목사님은 동네의 작은 교회로 그치게 됩니다.

특히 ‘건전한’ 대형 교회에서는 목사 아들에게 목사직을 물려주는 ‘천박한 세습질’을 하지 않고 전국에서 역량이 좋은 목사님들을 찾아 초빙하기 때문에 더욱 많은 신도와 헌금이 몰려들어 더욱 강력한 교회가 됩니다. 저도 온라인으로 지금은 은퇴하신 압구정 소망교회 김지철 목사님 설교를 자주 들었는데, 저처럼 삐딱한 시선을 가진 사람이 봐도 정말 훌륭한 설교를 하시더군요. 저처럼 믿음 약한 사람에게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온라인 설교, 특히 온라인 예배는 중소 교회에게는 치명적인 위협이 됩니다. 훨씬 더 은혜롭고 훌륭한 목사님의 설교가 있는데도 왜 신도들이 그저 그런 목사님의 별로 인상적이지 못한 설교를 들으러 갈까요? 바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 때문입니다. 저는 압구정에서 먼 곳에 살기 때문에, 매주 압구정 소망교회에 갈 수가 없습니다. 또 압구정 소망교회가 아무리 큰 교회라고 해도 전국에서 몰려오는 수만 명을 수용할 정도로 예배당이 크지 않습니다.

하지만 온라인 예배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몇만 명이건 몇십만 명이건 수용이 가능할 뿐 아니라,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도 순식간에 참석이 가능합니다. 특히 압구정 소망교회 등과는 달리, 동네의 작은 교회들은 그런 온라인 예배와 온라인 헌금을 위한 시스템을 갖출 여력이나 역량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노년층 신도들이 그런 온라인에 익숙하지도 않고요.

제가 전에 다니던 작은 교회 목사님은 (많은 경우 개신교 목사님들이 그러듯) 정치적으로는 우파셨고, 설교 중에 자유민주주의의 중요성과 좌파 세력의 준동에 대한 우려를 종종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그 교회 바로 옆에 인근 대형 교회의 제2 예배당이 들어선다는 소문이 퍼지자, 설교 도중에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렇게 대형 교회가 동네 구석구석까지 세력을 넓혀서 신도들을 다 가져가는 것이 옳은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거야말로 평소 개탄하시던 좌파 세력들이나 하던 이야기였습니다. 기업의 독과점은 결국 소비자들이 그 피해를 입기 때문에 막아야 하는 것입니다. 종교, 특히 개신교 교단 문제에서도 다양성과 중소 교회 목회자들의 몫을 보장하는 것이 중요할까요? 글쎄요, 기업의 경제적 독과점 문제와 종교 지도자의 독과점 문제가 같은 것인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종교개혁 이전 로마 교황청이 유럽 전체에 대한 종교 독점권을 쥘 때 벌어졌던 가톨릭의 처참한 부패상에 대한 기억도 있습니다만, 다미선교회나 이번 신천지와 같은 소수 이단 문제도 있다 보니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는 이번 코로나19 확산 관련해 가급적 온라인 예배로 대처하는 것이 매우 바람직하며, 무조건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맞다고 주장하는 일부 개신교 목사님들의 주장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고 믿습니다.

압구정 소망교회는 잠정적으로 예배를 온라인으로 대체한다고 발표했네요. 바람직한 일입니다.

원문: Nasica의 뜻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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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정녕 하나님의 뜻인가요 https://ppss.kr/archives/187896 Thu, 21 Mar 2019 07:11:58 +0000 http://3.36.87.144/?p=187896 어느 날 교회에 갔는데 ‘퀴어 반대 집회’에 갈 사람들을 모집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는 동성애 반대를 위한 서명을 받았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일어날 일들을 적어 놓은 글도 교회 안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설교 시간에는 차별금지법이 동성애를 조장하는 법이라고 대놓고 말한다. 특정 정치인을 반대하는 이유는 동성애를 옹호하는 발언을 해서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계급배반에 해당하는 정치적 선택도 서슴지 않는다. 자신들 삶을 더 나아지게 하는 정책을 선택하는 대신 동성애를 막아줄 ‘극우’ 정치인을 지지한다. 이런 과정에서 혐오는 자연스럽게 학습되고 전파된다, 다름 아닌 ‘사랑의 종교’라는 개신교 교회에서.

‘에스더 기도운동’이 대표적인 사례다. 동성애와 이슬람교를 반대하는 것을 넘어 자기들 생각에 더 많은 사람들을 동조시키기 위해 조직적으로 댓글을 조작했다. 잘못된 정보를 섞어 사람들에게 공포를 심는 방법으로 가짜 뉴스를 전파하면서도 죄책감이 없다. 이렇게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뤄야 한다는 그들의 말에는 사명감마저 감돈다.

출처: 한겨레

같은 종교를 가진 타 단체들을 빨갱이라고 비방하는 짓도 서슴지 않는다. 극우 정치인들이 생각이 다른 이들에게 흔히 써먹는 수법이다.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에스더 기도운동은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 선거운동의 일환으로, 문재인 후보에 관한 가짜 뉴스를 유포했다. 또 우파단체 활동가 양성을 목적으로 박근혜 정부에 43억 원의 자금 지원도 요구했다. 기독교 단체인 에스더 기도운동은 종교 활동이 아니라 정치 행위를 한 것이다.

2017년 6월 19일 황교안 전 국무총리는 대통령 권한 대행 퇴임 감사예배에서 국민 인식과 다른 말을 했고, 최근 전당대회 출마 선언에서도 “북 찬양 세력이 광화문을 점령했다”고 말했다. 그는 사법연수원 시절 수도침례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전도사로 일한 것으로 알려졌다. ⓒ C채널 방송

개신교 교회 부흥의 한 축은 ‘반공주의’다. ‘미국물’을 먹은 이승만은 ‘독실한 크리스천’임을 자처했는데, 반공주의 위에 정권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국가의 존립과 경제적 위기 상황에서 국민과 신도를 결집할 확실한 이데올로기였던 셈이다. 극우 정치 세력과 결탁한 개신교는 70~80년대 국가조찬기도회 등으로 명실상부한 주류 종교로 자리매김했다.

문제는 이러한 반공주의가 시들해지고 남북 평화와 화해의 시대가 다가오자 새로운 결집 이데올로기가 필요해졌다. 동성애와 이슬람교 혐오는 반공주의를 대체할 먹잇감으로 선택됐다. 노골적인 혐오를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한다. 가짜 뉴스를 통해 그런 혐오를 확장하고 정당성을 부여하려 했다.

진짜 한국교회의 위기는 따로 있다. 최근 인천과 충남의 교회 목사가 여신도를 성폭행해 논란이 일었다. 명성교회 등으로 대표되는 대형 교회의 세습, 목회자 양성학교인 총신대 총장의 배임·횡령 문제 수습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목사를 대기업 재벌 회장님처럼 떠받드는 것도 하나님을 믿는지, 목사를 믿는 것인지 헷갈리게 한다.

이런 것들이 교회의 진짜 문제다. 동성애와 이슬람교 혐오가 진짜 개신교의 문제를 눈감게 하고 교회를 병들게 한다. 혐오에 앞장서는 이들은 이런 교회의 문제에 어떤 생각을 하는 걸까?

‘에스더’는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유대인인 그녀는 자기 민족을 몰살하려는 이로부터 민족을 구한 여인이다. 개신교가 진짜 위기로부터 교회를 지킬 방법은 혐오의 안경을 벗는 데서 시작된다.

출처: 단비뉴스 / 필자: 장은미 기자 / 편집: 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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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가르치는 기독교의 10가지 교리 https://ppss.kr/archives/168740 https://ppss.kr/archives/168740#respond Wed, 04 Jul 2018 02:46:58 +0000 http://3.36.87.144/?p=168740 이슬람포비아들이 자꾸 꾸란 내용 왜곡해서 훼이크 뉴스 만들던데, 그런 건 성경으로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거든요? 심지어 이건 성경에 전부 그대로 나오는 팩트팩트.

 

1. 가문을 잇기 위해서는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근친상간을 해도 됩니다.

창세기 38:16-18 길 곁으로 그에게 나아가 이르되 청하건대 나로 네게 들어가게 하라 하니 그의 며느리인 줄을 알지 못하였음이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무엇을 주고 내게 들어오려느냐 유다가 이르되 내가 내 떼에서 염소 새끼를 주리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그것을 줄 때까지 담보물을 주겠느냐 유다가 이르되 무슨 담보물을 네게 주랴 그가 이르되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라 유다가 그것들을 그에게 주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더라

 

2. 성 안에서 성폭행이 일어났을 때, 여자가 소리 질러 저항하지 않았으면 여자도 처형해야 합니다.

신명기 22:23-24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동침하면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죽일 것이니 그 처녀는 성안에 있으면서도 소리 지르지 아니하였음이요 그 남자는 그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음이라

 

3. 복수를 위해서는 거짓말을 해도 됩니다.

창세기 34:1~31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과 그의 아버지 하몰에게 속여 대답하였으니 이는 세겜이 그 누이 디나를 더럽혔음이라 야곱의 아들들이 그들에게 말하되 우리는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할례받지 아니한 사람에게 우리 누이를 줄 수 없노니 이는 우리의 수치가 됨이니라 ……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이 그들의 성읍 문에 이르러 그들의 성읍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우리와 친목하고 이 땅은 넓어 그들을 용납할 만하니 그들이 여기서 거주하며 매매하게 하고 우리가 그들의 딸들을 아내로 데려오고 우리 딸들도 그들에게 주자 그러나 우리 중의 모든 남자가 그들이 할례를 받음 같이 할례를 받아야 그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거주하여 한 민족 되기를 허락할 것이라 …… 제삼일에 아직 그들이 아파할 때에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라버니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가서 몰래 그 성읍을 기습하여 그 모든 남자를 죽이고

 

4. 주의 종을 놀리면 찢어 죽임을 당합니다.

열왕기하 2: 23-24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그가 길에서 올라갈 때에 작은 아이들이 성읍에서 나와 그를 조롱하여 이르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엘리사가 뒤로 돌이켜 그들을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곰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의 사십이 명을 찢었더라

 

5. 하나님은 사람들이 죄를 짓게 조종한 뒤 그 책임을 물어 벌을 주시는 분입니다.

사무엘하 24:1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6. 하나님은 왕이 죄를 짓더라도 벌은 온 국민이 같이 받게 합니다.

사무엘하 24:12-15 가서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게 세 가지를 보이노니 너를 위하여 너는 그중에서 하나를 택하라 내가 그것을 네게 행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아뢰어 이르되 왕의 땅에 칠 년 기근이 있을 것이니이까 혹은 왕이 왕의 원수에게 쫓겨 석 달 동안 그들 앞에서 도망하실 것이니이까 혹은 왕의 땅에 사흘 동안 전염병이 있을 것이니이까 왕은 생각하여 보고 나를 보내신 이에게 무엇을 대답하게 하소서 하는지라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고통 중에 있도다 청하건대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아니하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이에 여호와께서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전염병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 명이라

 

7. 하나님은 사탄과의 내기를 위해 사람에게 재앙을 일으키는 것을 허용합니다.

욥기 1:12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욥기 2: 6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8. 종교적 열심을 위해서는 외국인 아내와 그 사이에서 낳은 자녀를 쫓아버려야 합니다.

에스라 10: 10-12 제사장 에스라가 일어나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범죄하여 이방 여자를 아내로 삼아 이스라엘의 죄를 더하게 하였으니 이제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의 뜻대로 행하여 그 지방 사람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 하니 모든 회중이 큰 소리로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이니이다

 

9. 은혜 받기 위해서는 개 취급 당하는 모욕도 참아야 합니다.

마 15:25-28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10. 여자는 남자를 가르쳐서는 안되며, 출산을 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2: 11-15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원문: 변영권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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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비정치적인 책이 아니다 https://ppss.kr/archives/21693 Thu, 31 May 2018 23:58:53 +0000 http://3.36.87.144/?p=21693

흔히 교회에서 듣는 말 중 하나가 ‘기독교인은 정치적이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교우들과의 모임이나 교제의 자리에서 특정한 정치적 이슈를 이야기하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신실한 교인들 사이에서 암묵적인 관례이다. 그러나 과연 ‘기독교인이 정치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 맞는 말일까?

 

우리의 일상에 정치적이지 않은 영역은 없다

정치란 무엇일까? 많은 사람이 정치를 특정한 정당에 소속된 정치인들이 하는 활동만이 정치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우리 삶에서 정치적이지 않은 영역은 없다. 정치의 정의를 살펴보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정의에 의하면 ‘정치’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정치] 통치자나 정치가가 사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거나 통제하고 국가의 정책과 목적을 실현시키는 일.
  2. 개인이나 집단이 이익과 권력을 얻거나 늘이기 위하여 사회적으로 교섭하고 정략적으로 활동하는 일.

통상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치는 1번의 의미로서만 협소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2번의 의미로 정치의 의미를 확장하면 우리가 회사나 교회, 가정에서 하는 모든 행동은 정치적인 행동이 된다. 또한 1번의 의미로만 사용한다 하더라도 ‘통치자나 정치가가 사회구성원들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거나 통제’하려 할 때 대의 민주주의의 이념에 따라 간접적으로 선출된 정치인들에게 시민들은 자신의 권익과 권리를 지키기 위해 분명한 의사 표현과 주장을 할 책임이 있다.

그런 자신의 권익과 권리를 판단하고 주장하는 것의 기준은 결국 개인의 이해관계와 관련이 깊다. 결국 넓게 정의하면 ‘정치란 인간의 가치판단이 들어가는 모든 영역에서 가치를 비교하고 선택하는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1번이든 2번이든 우리가 판단하고 행동하는 모든 일상의 삶에서 ‘탈정치적인 이슈’란 없다.

소비자들이 물건을 사는 소비의 영역에서조차 정치적인 판단은 들어간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특정 대기업 제품을 쓰지 않는 이유가 단순히 디자인이나 제품이 맘에 안 들어서가 아니라 그 기업의 부도덕함에 대한 항의의 표시라면 그의 소비행태는 충분히 ‘정치적인’ 행동이 된다.

출처: 가습기 살균제 옥시 불매 페이스북 페이지

 

성경은 비정치적인 책이고 영혼 구원에만 관심이 있다?

게다가 기독교인들이 착각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성경이 비정치적인 책이고 성경의 관심은 오직 ‘영혼 구원’에만 관심이 있다고 믿는 고정관념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이상하리만치 한국교회의 설교강단은 성경 속의 이야기에서 ‘정치적 색깔’을 탈색하는 데 능란하다. 그러나 구약성경뿐 아니라 복음서, 신약성경 곳곳들 면밀히 들여다보면 성경이 당대의 정치에 대해 얼마나 많은 직접적인 언급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놀라게 된다.

특히 그런 부분이 도드라진 것은 구약의 선지서들 속의 선지자들(예언자들)과 당대의 왕들, 종교지도자들의 충돌이나 마지막 선지자 세례 요한, 그리고 복음서에서 당대 종교지도자들과 사사건건 갈등과 긴장 관계에 있었던 예수님의 모습이다.

예레미야만 보더라도 당시 앗시리아 제국의 멸망 과정에서 다른 제국들 간의 전쟁이 일어났고 그사이에 유다 왕국도 멸망의 길을 피할 수 없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성전을 불멸의 존재로 여기며 하나님 말씀을 마음 놓고 어기던 유다를 향해 있을 하나님의 심판을 40년 동안 충실하게 선포했고 그 대가로 박해, 폭력, 격리, 수감 등을 당했다.

예레미야서에는 당대의 왕들과 종교지도자들과의 갈등과 긴장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특히 이채로운 것은 예레미야는 당대의 왕들이 듣기 원했던 말들을 마치 하나님의 음성으로 왜곡해서 선포하고 아부하였던 종교지도자들과의 갈등과 그들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가 매우 생생하고 준엄하게 묘사되어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구절이 ‘예레미야서 28장’인데 거짓 선지자 ‘하나냐’는 시드기야 왕에게 바빌로니아 왕국을 꺾을 것이라는 거짓 예언을 한다. 이에 예레미야는 하나냐의 거짓 예언을 책망하며 다음과 같은 심판의 말씀을 선포한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예언자 하나냐에게 말하였다. “하나냐는 똑똑히 들으시오. 주님께서는 당신을 예언자로 보내지 않으셨는데도, 당신은 이 백성에게 거짓을 믿도록 하였소.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내가 너를 이 지면에서 영영 없애 버릴 것이니, 금년에 네가 죽을 것이다. 네가 나 주를 거역하는 말을 하였기 때문이다’.” 예언자 하나냐가 바로 그해 일곱째 달에 죽었다.

  • 예레미야 28:15~17

예레미야를 비롯한 구약의 선지자들은 당대의 첨예한 정치 상황에서 왕들과 거짓 종교지도자의 틈바구니에서 ‘현실 권력에 타협하지 않은 예언자의 목소리’를 드높이다가 온갖 박해와 고난과 죽임을 당했다. 이런 모습이 정치적인 모습이 아니라면 어떤 게 정치적인 모습일까?

하나냐와 같이 하나님이 요구하는 정의와 그분의 뜻보단 위정자들의 비위와 권력을 세워주는 거짓 선지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은 한국기독교의 근현대사에서도 전혀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정치’에 대한 올바른 관념과 의식을 교육시켜야

많은 교회가 교인들에게 교회 내에서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요구할 것이 아니라, 올바른 정치에 대한 기독교적 가치관과 행동을 교육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침묵하고 가만 있는 것이 비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불의에 대한 침묵과 비겁함을 ‘경건으로 기만’하는 문화가 더욱 기승을 부리는 한국교회의 상황에서는 더욱 그런 정치 교육이 필요하다.

지지하는 정당이 다르고 지지하는 정치인이 다르고, 어떤 이슈에 대해 바라보는 관점이 다를지라도 서로를 존중하고 인격을 무시하지 않으며, 현안에 대한 토론과 논쟁이 가능한 문화를 교회에서 교육하고 만들어줘야 한다.

그가 특정 정당에 소속이 되어있기 때문에, 그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그가 장로이기 때문에, 그가 유명한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무조건 지지하고 반대하는 문화가 아닌, 정치인으로서의 사람됨과 그가 어떤 공약을 주장하고 있고, 이 공약이 내세우는 바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그가 지금까지 얼마나 약속을 잘 지켜왔는지에 대해 꼼꼼히 따지고 판단하는 법을 가르쳐줘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목사와 교인은 그 정치인이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교회를 다니는지, 교회를 다닌다면 직분이 무엇인지만 보고 덮어놓고 지지하고 뽑아주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어쩌면 가장 기만당하기 쉽고, 속이기 쉽고, 설득이 필요 없는 맹목적 군중들이 되어버리고 만다.

정치인들 중에 왜 유독 ‘기독교인’이 가장 많을까? 기독교가 선교를 잘해서? 만일 당신이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은 가장 속이기 쉬운 맹목적 기독교인 중 한 명이다. 기독교인들이 현대정치에 저지르기 가장 쉬운 끔찍한 잘못 중의 하나는 바로 지지하는 정당과 정치인이 ‘교회를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또는 ‘기독교와 교회에 호의적이다’라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을 지지하거나 뽑아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뽑힌 최악의 지도자가 누구인지 아는가? 바로 히틀러다. 추태화 박사가 쓴 ‘권력과 신앙’이라는 책에 보면 독일교회가 어떻게 히틀러를 옹호하고 부역하게 되었는지 그 역사적 과정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독일교회는) 나치 정권에 협조하면 국내 선교도 원활할 것이고 여러 가지 프로그램도 제공받아 교회가 부흥할 것이라는 직·간접적으로 인센티브를 얻을 수 있다는 감언이설에 교역자들이 전적으로 오판(誤判)하였다.”

성경은 탈정치적인 책이 아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읽어내렸던 이사야서 61장을 보면 예수님의 사역이 폭력적 권력과 독재, 로마와의 야합을 통해 백성들에 대한 수탈을 거리낌 없이 자행하던 당대의 종교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에게 얼마나 서슬 퍼런 경고의 말씀이었는지 우린 짐작할 수 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니, 주 하나님의 영이 나에게 임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갇힌 사람에게 석방을 선언하고, 주님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고,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셨다.’

  • 이사야서 61:1,2

당대의 종교지도자들, 헤롯, 로마의 총독이 만일 저 글을 읽어내려가는 젊은이를 현장에서 바라보았다면 아무런 정치적인 위협을 받지 못했을까? 아니면 자기들에 대한 심각한 도전과 위협이라고 생각했을까?

예수님은 그런 종교 및 정치 권력자들의 견제와 감시를 두려워하거나 물러서지 않고, 성전에서 폭리를 취하며 부패한 정·재계 관료들의 ‘돈줄’인 성전 안의 시장을 뒤집어엎으면서 그들의 이익과 권력에 실제적인 ‘위협’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군중들의 환호와 성전 안의 시장을 뒤집어엎는 단호한 선지자로서의 행동은 그가 ‘돈과 권력’으로 매수 불가능한 ‘정치적 제거 대상’ 1순위인 것을 그들에게 명백히 보여준 셈이다. 그래서 그들은 증인을 매수했고, 없는 죄를 뒤집어 씌우며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한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선고 받는 재판과정만큼 ‘정치적인 장면’이 또 있던가?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선고받는 과정은 성경에 등장하는 가장 정치적인 장면중 하나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중에서-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선고받는 과정은 성경에 등장하는 가장 정치적인 장면 중 하나다. 출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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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로 굴을 멸종시키자는 사람들 https://ppss.kr/archives/162254 https://ppss.kr/archives/162254#respond Mon, 14 May 2018 05:32:39 +0000 http://3.36.87.144/?p=162254

저는 여태껏 굴을 자의로 먹어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어릴 때 부모님에 의해 강제로 먹어야 했던 굴은 식감도 식감이지만 제게는 너무 비렸거든요. 지금에 와서야 고백하는 것이지만, 그즈음에 억지로 먹이신 굴들은 몰래 뱉어버리거나, 씹지 않고 통으로 삼키기 일쑤였습니다.

그런 기억 때문인지, 성인이 된 지금도 저는 굴을 먹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생굴을 초장에 찍어 먹으며 감탄사를 연발하시는 분들이 잘 이해가 가지 않기는 합니다만, 한국에서는 정말 많은 분이 굴을 드십니다. 한국에서 한 해에 생산되는 굴의 양만 해도 2만 톤 가까이 되니 가히 엄청난 양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이렇게 많은 분이 즐기는 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하나 있습니다. 구토와 설사, 탈수, 발열 등의 증상을 2주간 겪게 되는 괴로운 질병, 바로 ‘노로바이러스 감염증’입니다.

많은 분이 오해하지만 굴을 생으로 먹는다고 항상 노로바이러스에 걸리는 것은 아닙니다. 노로바이러스는 비단 굴뿐이 아니라 다양한 경로로 감염될 수가 있거든요. 오염된 지하수를 통해서도, 그런 지하수를 통해 재배한 채소나 과일 때문에도 감염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유독 굴이 노로바이러스와 관련되어 주목을 받는 것일까요? 사실 무척이나 단순한 이유입니다. 노로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의 분변이 굴이 자라는 연안 해역으로 스며들고, 오염된 바닷물에서 자란 굴들이 재차 사람에게 먹혀서 그 사람을 감염시키는 악순환이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빚이 빚을 부르는 채무의 악순환과 비슷한 일이 발생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에 해결법이 없냐는 생각이 드실 수 있습니다. 굴을 먹을 때마다 혹시나 노로바이러스에 감염될 걱정을 하는 것은 슬픈 일이니까요. 이런 문제점에 대한 해결법은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방법은 굴을 익혀서 먹는 것입니다. 생굴이 가지는 식감과 맛을 선호하시는 분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굴을 먹고 탈이 나기 전에는 그 굴이 노로바이러스를 가졌는지 알 방법이 별로 없습니다. 조금 맛이나 식감이 떨어지더라도 생으로 섭취하지 않고 익혀서 먹으면, 감염의 위험성이 확연히 감소합니다.

두 번째 방법은 노로바이러스를 가지지 않은 굴이 새로이 노로바이러스를 갖지 않도록 격리 조치를 하는 것입니다. 노로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의 분변도 적절한 하수 처리와 바이러스 제거 방법을 이용하면 해수를 오염시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익혀 먹는 것이지만, 애초에 노로바이러스 감염 위험을 줄일 수 있다면 날것으로 먹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만족시킬 수가 있는 것이죠.

세 번째 방법은 굴을 아예 멸종시키거나 굴을 먹는 행위를 금지하는 것입니다. 굴을 먹는 것은 노로바이러스의 위험성이 있으니 아예 금지하고, 굴을 먹는 사람을 부도덕한 행동을 했다며 비난하면 노로바이러스 감염이 줄어들 수 있습니다. 물론 굴이 아니라 다른 경로로도 노로바이러스 감염이 일어날 수 있기는 하겠지만 아무튼 줄어들긴 할 겁니다.

세 번째 방법은 너무 극단적인 것 아니냐고요? 이게 정확히 지금 반동성애 단체들이 하는 일입니다. 에이즈 감염 위험을 이유로 동성애가 죄악이며 이를 박멸해야 한다는 말들을 거리낌 없이 내뱉으니까요.

당연히 에이즈와 노로바이러스가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굴을 생으로 섭취하는 행위와 에이즈 감염이 발생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구조입니다. 모든 동성 간 성 접촉이 HIV 감염을 일으키는 것도 아니고, 동성 간 성 접촉으로만 HIV 감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굴이 오염된 해수에 의해 노로바이러스 감염 위험이 높듯, 동성애와 에이즈의 관계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감염된 사람에 의해 계속 감염이 일어날 뿐인 거죠.

심지어 해결법마저도 동일합니다. 앞의 내용을 복기해봅시다. 굴을 생으로 먹지 않으면 노로바이러스 감염이 확연히 줄어들듯, 콘돔을 착용한 성관계는 HIV 보균자라고 하더라도 감염이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합니다. 감염되지 않은 굴을 보호하는 방법과 동일하게, 에이즈 역시도 예방약을 사용하면 새로운 감염을 막을 수 있습니다.

최근 개발된 에이즈 예방약 트루바다(Truvada)는 WHO에 의해 에이즈 예방약으로 공인을 받았으며, 한국 식약처에서도 최근에 국내 시판을 허가한 바 있습니다. 신약이다 보니 가격이 만만찮은 것이 단점이긴 하지만요.

국가 보건정책에 있어서 감염병 관리는 무척이나 중요한 이슈입니다. 그래서 한국 질병관리본부는 물론이고, 보건복지부에서도 에이즈 확산 방지를 위해 무척이나 노력합니다. 보건소에서 진행하는 무료 익명 검진은 물론이고, 그 외의 다양한 정책도 시행 중입니다.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이런 노력은 기본적으로 감염 위험성이 높은 집단이 정부의 정책을 신뢰하고 그 지시를 따라주어야만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겁니다. 특정 질병을 앓는 것이 ‘종교적 죄악’의 대가라는 발언이 거리낌 없이 분출되는 상황에서 예방 정책에 협조해달라는 말이 순수하게 받아들여지기는 힘들거든요.

그런데 아직도 굴을 멸종시키거나, 굴을 먹는 사람들에게 낙인을 찍는 것이 유일한 방법인 양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참 답답할 노릇입니다. 이런 적대적인 태도는 당사자들의 감염관리 정책에 대한 순응도를 낮추는 것은 물론, 이들을 더더욱 사회에서 고립시켜 감염 위험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내몰기까지 합니다.

정말로 한국에서 에이즈를 몰아내고 싶다면, 윤리적 차원의 비난이 아니라 정책적 차원에서의 지원을 도모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원문: 한설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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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랜턴과 소금 https://ppss.kr/archives/43963 https://ppss.kr/archives/43963#respond Wed, 02 May 2018 04:29:44 +0000 http://3.36.87.144/?p=43963 artgrim

당신이 성능 좋은 휴대용 랜턴을 샀다고 하자. 근데 랜턴이 별로 어둡지 않을 때는 필요 이상으로 밝게 비추고, 정작 칠흑같이 어두울 때는 전혀 빛을 비추지 않는다면 그 랜턴을 불량품이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시장에서 건강에 좋은 비싼 소금을 샀다고 하자. 그런데 이 소금도 음식에 이미 소금이 뿌려져 있을 때는 굉장히 짠맛을 내는데 소금이 전혀 뿌려져 있지 않은 음식에서는 전혀 짠맛을 내지 못한다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신앙이 시대와 역사를 초월해 영원히 변함없는 유일무이한 진리를 믿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들의 신앙은 자신이 살아가는 동시대인의 삶과 역사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고, 반응도 없는 철저히 분리된 신앙이란 것이다.

난 한국에서 목회자들이 거의 ‘칼빈’급으로 존경하는(때로 이분들의 칼빈 사랑과 존경은 예수의 권위보다 앞서는 듯한 느낌이 든다) 신학자들이나 유명한 목회자들을 볼 때 그런 이상한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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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와 손잡은 나찌 독일의 기독교 종교지도자들과 히틀러를 암살하려 시도하다 사형당한 본 회퍼 목사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던 우리 근현대사의 식민지배, 군부독재 같은 수많은 비극과 권력의 폭압, 학살, 야만과 광기의 시대에 어쩌면 아무런 목소리도, 빛도 비추지 않고 침묵과 방관 속에 그런 현실들을 외면하면서 연구실이나 목회에만 전념하며 탁월한 학문적 업적과 목회적 성공을 거두었다고 해서 그들이 ‘역사적 재평가’없이 어떻게 그렇게 변함없이 후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지 그게 무척 궁금했다.

심지어 가장 가까운 가족의 가슴아픈 고백과 폭로를 통해 드러난 저명한 신학자의 인격적 결함에도 그건 모함일 뿐이며 설사 그런 허물이 있다하더라도 그의 업적과 광채는 더욱 빛을 발한다며 맹목적인 존경을 보이는 목사들과 신학자들을 볼때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세례요한은 왜 죽었을까?

저들은 시대와 삶과 분리되어 ‘시대와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완벽하게 그 자체만으로 존립하는 진리’라는 게 가능하다는 것을 믿는다는 생각에 경이로운 마음까지 든다(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경악’에 가깝지만).

그들은 세레요한이 왜 죽었는지 모르는 걸까? 세례요한은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드는 헤롯왕실의 도덕적인 부패를 비난하다가 옥에 갇히었고 결국 죽음까지 이르게 되었다(막6:17~29). 세례요한은 그저 오지랖이 넓어서 ‘헤롯왕실’의 정치에 주제넘게 간섭하다가 죽음을 당한 것일까?

그가 부패하고 혼란스런 세상사를 멀리하고 산속에 들어가서 ‘성경필사’만 하거나, 동굴에서 뜻 맞는 사람들을 모아 조용히 ‘제자양육’만 했다면 죽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런 유사한 예들은 특히 선지서들을 보면 비일비재하게 나온다. 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왕들과 지도자에게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며 ‘바른 말’을 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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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밧지오, 〈세례요한의 죽음〉, 1607

개인의 삶과 개개인의 삶들이 모여 영향을 주고받는 시대와 사회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 복음이라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장난 랜턴, 맛을 잃은 소금이 어떻게 진짜 복음일 수 있을까?

이런 궁금증은 세월호 참사를 비롯해서 이 시대의 수많은 불의와 아픔과 비극에도 여전히 침묵하고 (말을 차라리 안 하는 게 나은 목회자들도 있지만) 잠잠히 연구와 목회에만 전념하는 유명한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을 볼 때 더욱 증폭된다.

 

예수님의 경고

내 궁금증이 너무 수준이 낮아서 고매하신 신학자들과 목사님들께서는 코웃음을 칠지 모르겠으나 난 성경에 기록된 이 말씀이 더 상식적이고 납득 가능한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짠 맛을 되찾게 하겠느냐? 짠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려서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세운 마을은 숨길 수 없다. 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다 내려놓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다 놓아둔다. 그래야 등불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환히 비친다.

  • 마태복음서 5:13-15 새번역

시대와 삶과 분리되어 ‘세상과 동떨어진’ 영원한 진리를 믿는 신앙이 가능하다고 믿는 그 믿음이 내겐 언제나 기묘하고 이상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런 믿음은 ‘아무 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려서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 우린 지금 그런 광경을 한국 사회 도처에서 목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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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어쩌다 ‘정의’를 외면하게 됐나 https://ppss.kr/archives/109011 https://ppss.kr/archives/109011#respond Wed, 04 Apr 2018 12:50:19 +0000 http://3.36.87.144/?p=109011 종교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거룩한 신을 믿는 종교인이나 성직자는 누구보다 정직하고 정의로운 가치관을 가졌을 것이라 기대한다. 그러나 현재 대한민국 상황만으로도 알 수 있듯이 심심찮게 드러나는 교회와 기독교인의 행태를 보면 기대와는 정반대 모습을 볼 수 있다.

의로우신 하나님과 진리를 믿고 따른다는 종교인이 도리어 명백한 불의와 악의 편을 들며 정직과 진실을 왜곡하는 데 앞장서는 모습을 보며 많은 사람이 당황하고 이해하지 못한다.

작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 최종 선고 기일에 참석해 기도했던 박 대통령 법률대리인단 서석구 변호사. 출처: 포커스뉴스

나 또한 몇 년 전 내가 다니던 교회 담임목사가 상습적인 성추행과 성폭력 혐의를 받고 불미스럽게 물러나면서 그 사건을 대하는 교인들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당연히 자숙하고 회개하는 시간을 가지며 물러났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교인들도 있었지만, 많은 교인이 도리어 피해자들을 욕하고 비난하며 이들이 ‘교회를 흔드는’ 꽃뱀이라고 생각했다.

교회 일에 헌신적이었던 어떤 교인은 “큰일을 하려는 목사는 그런 실수와 허물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 아니냐”며 노골적으로 그를 두둔했다. 지금이야 개신교인들의 명백한 불의와 악에 대한 그런 반응에 별로 충격을 받지 않지만, 당시 내게는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내가 아는 후배들, 지인들이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 목사에게 합당한 권징과 징계를 교단 측에 촉구하는 활동을 몇 년 동안 하게 됐다. 여기에는 개신교인들의 왜곡된 신앙관을 고쳐야 한다는 절박감도 있었다.

이후 유사한 사건들, 교회 내 온갖 비리, 사회 이슈가 있을 때마다 드러나는 목사·교인들의 ‘정의’에 대한 둔감, ‘악과 불의’에 대한 무지를 지켜보면서 개신교 내 어떤 공통된 원인으로 이런 양상이 드러나는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몇 년간 한국교회의 유사한 모습을 관찰하면서 한국교회가 ‘정의’의 가치를 외면하는 이유로 대략 4가지 중요한 원인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1. 권력에 대한 숭배와 타협
  2.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번영주의
  3. 교회 내 팽배한 전근대성과 반지성주의
  4. 정의가 신앙의 본질과 상관없다는 생각

 

1. 권력에 대한 숭배와 타협

한국의 많은 교회는 민주화 과정의 엄혹한 시절에도 한 번도 불의한 정권에 맞서 싸우거나 저항하여 사회적 불화를 일으킨 적이 없다. 정권의 독재에 맞서 싸우고 저항한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멀쩡한 사람을 고문해서 감옥에 집어넣고, 간첩으로 누명을 씌어서 사형을 시키던 시절에도 그런 정권에 아무런 저항도, 예언자적 목소리도 들려주지 않았다. 반대로 그런 권력에 적극 야합하고 축복 기도를 해 주며 자신들 위상과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 힘썼다.

대학생 선교 단체 CCC의 김준곤 목사는 국가조찬기도회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위한 10월 유신을 칭송하며 다음과 같이 축복 기도하였다.

민족의 운명을 걸고 세계의 주시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10월 유신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기어이 성공시켜야 하겠다. (중략) 당초 정신 혁명의 성격도 포함하고 있는 이 운동은 (중략) 마르크스주의와 허무주의를 초극하는 새로운 정신적 차원으로까지 승화시켜야 될 줄 안다.

외람되지만 각하의 치하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군 신자화 운동이 종교계에서는 이미 세계적 자랑이 되고 있는데, 그것이 만일 전 민족 신자화 운동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다면 10월 유신은 실로 세계 정신사적 새 물결을 만들고 신명기 28장에 약속된 성서적 축복을 받을 것이다.

  • 〈교회연합신보〉, 1973년 5월 6일

그리고 무고한 시민 수백 명이 학살되거나 다친 광주민주화운동 직후인 1980년 8월 6일, 한경직 목사를 비롯한 유력한 교계 인사들은 서울 롯데호텔 에메랄드룸에서 나라를 위한 조찬기도회를 열었다. 이들은 전두환을 앞에 두고, 전두환의 군권 찬탈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그의 앞날을 축복해 주었다.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만화에 등장하는 1980년 국가조찬기도회 묘사.

이처럼 한국 개신교는 권력에 야합하며 교세를 키우고, 안정을 담보하기 위해 정치적 올바름과 정의의 문제를 꾸준히 외면해 왔다. 권력자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고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그가 듣고 싶어 하는 축복의 말씀만 들려주었다. 하나님의 진리와 정의를 선포하고 악한 권력을 견제하는 선지자의 소명을 버렸다.

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죽어 가고, 인권을 탄압받고, 간첩 누명으로 소중한 생명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가도 교회의 안정과 부흥을 위해, 또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잘못된 것이라 소리쳐 저항하지 않았다. 마치 구약에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폭주하는 왕들에게, 그들이 듣고 싶은 거짓 예언만 들려주며 아부하는 왕궁의 제사장이나 종교 지도자들 같은 모습으로 ‘하나님의 정의’를 외면해 왔다.

이런 권력 지향적인 아부와 숭배는 과감하게 세상 질서와 권력에 도전하여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거세시켰다. 그래서 불의한 세상에 도전하지 않고 그들이 좋아할 만한 당의정으로 뒤덮인 욕망과 탐욕의 복음을 전하며 세상의 부조리, 불의에 타협했다.

한국 개신교의 권력에 대한 숭배와 집착은 ‘정의’를 외면하게 하고 복음의 본질조차 왜곡시켜 버렸다. 세상 가치와 부딪치는 진리의 복음이 아니라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와 완벽히 부합하는 탐욕과 권력의 복음을 탄생시킨 것이다. 더 큰 ‘교세’와 ‘권력’을 얻기 위해서라면 불의한 정권과 얼마든지 야합할 수 있기 때문에 ‘정의’ 따위는 그리 중요한 가치가 아니게 된 것이다.

지금 이 나라에서는, 놀랍고도 끔찍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예언자들은 거짓으로 예언을 하며, 제사장들은 거짓 예언자들이 시키는 대로 다스리며, 나의 백성은 이것을 좋아하니, 마지막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

  • 예레미야 5장 30-31절(새번역)

 

2.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번영주의

예수께서는 자신을 선한 목자라 지칭하시며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다고 하셨다(요한복음 10장 11절).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씀도 하셨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고 하면, 그는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다 남겨 두고서, 길을 잃은 그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가 그 양을 찾으면,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 양보다, 오히려 그 한 마리 양을 두고 더 기뻐할 것이다.

  • 마태복음 18장 12-13절(새번역)

자본주의 관점이나, 합리적 관점에서 볼 때 이 말씀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1마리 양을 잃어버렸다고 99마리 양을 두고 1마리 양을 찾으러 간다는 것은 남겨진 99마리 양까지 위험에 빠뜨리는 무모하고 어리석은 행동이다. 그럼에도 저런 비유를 하신 것은 예수님이 수의 많고 적음으로 생명의 가치를 따지는 합리주의자가 아니라, 생명의 가치를 따져 단 1마리의 양이라도 소중히 여기는 분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다. 생명의 가치로 보았을 때 99마리나 1마리나 똑같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려 주신 것이다.

교회는 마땅히 저런 예수의 시각으로 사람들을 존중해야 한다. 사람 1명이 생명의 가치로 보이기보다 많은 교인 중 하나로 여겨진다면 얼마든지 99마리 양을 위해 1마리를 희생할 수 있다.

‘정의’는 약자와 소외자를 보호하기 위한 가치이기도 하다. 그들이 힘이 없고 능력이 부족하더라도 외면당하거나 낙오하지 않고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정의로운 말씀이 성경에는 가득하다.

‘외국 사람과 고아와 과부의 재판을 공정하게 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하면, 모든 백성은 ‘아멘’ 하십시오.

  • 신명기 27장 19절(새번역)

당신들은 포도를 딸 때에도 따고 난 뒤에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마십시오. 그 남은 것은 외국 사람과 고아와 과부의 것입니다.

  • 신명기 24장 21절(새번역)

옳은 일을 하는 것을 배워라. 정의를 찾아라. 억압받는 사람을 도와주어라.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고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여 주어라.

  • 이사야 1장 17절(새번역)

나 주가 말한다. 너희는 공평과 정의를 실천하고, 억압하는 자들의 손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하여 주고, 외국인과 고아와 과부를 괴롭히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곳에서 무죄한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지 말아라.

  • 예레미야 22장 3절(새번역)

말씀에서 보듯이 집단 내 약자와 나그네, 외국인, 장애인을 배려하고 돕기 위해서는 섬세한 ‘공평’과 ‘정의’의 정신이 필요하다. ‘정의’는 결국 아무리 열악한 조건에 있는 인간이라도 소중한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어떤 억울한 대우도 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하나님의 사랑이 구현되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인종, 종교, 성별, 장애나 그 외 기타 어떤 이유로도 차별을 금지하자는 ‘차별금지법’을 가장 앞장서서 반대하는 종교가 개신교다. 세월호 노란 리본을 달고 담임목사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교인을 ‘출교’하는 것이 한국교회 모습이다. 교회가 커지고 다수 교인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소수 교인의 아픔이나 불만은 얼마든지 무시하고 배제할 수 있다. 이런 공리주의적 사고방식이 교회를 지배하고 있다. 결국 교회도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기관이 되어 간 것이다.

30년 교회를 다닌 교인을 ‘노란 리본’을 달고 담임목사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쫓아낸 교회. / 출처: 뉴스앤조이 최유리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의 아픔과 불편 따위는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는 공리주의적 가치관이 교회를 지배하면 소수 약자들에 대한 배려와 돌봄이 사라진다. 그 결과, 교회에 덕을 세운다는 미명 아래 ‘수가 적은’ 일부 사람에게 집단적 가치에 무조건 순응하기를 요구하며, 섬세하게 그들을 돌아보는 공평과 정의의 미덕은 사라져 간다. 그리고 교회는 부하고 강하고 권력 있는 자들에게 가장 편안한 행복의 공간으로 변해 간다.

 

3. 교회 내 팽배한 전근대성과 반지성주의

기독교는 원시종교가 아닌 고등 종교다. 샤머니즘 같은 원시종교의 특징은 욕망과 바람은 있지만 자신이 기원하는 신에 대한 구체적인 계시가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성경’이라는 특별한 계시를 통해 신의 존재를 알아 가는 고등종교다.

기독교 신앙에는 인간의 먹고사는 문제, 건강과 소유 문제와 관련한 기도와 간구만 있지 않고 신의 뜻을 알아 가려는 노력이 반드시 수반된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통해 더 나은 인간으로 성숙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자라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원시종교는 욕망의 투사에 대한 간구만 있을 뿐 ‘삶의 진리’를 알려 주는 구체적인 계시가 없다. 그저 욕망하며 기도하고, 욕망대로 이루어지면 감사하고 헌신하다가 다른 욕망이 있으면 다시 기도하는 식으로 신앙 생활할 뿐이다.

교회에 있으면서도 마치 원시종교나 샤먼의 신을 믿듯이 신앙 생활하는 교인이 적지 않다. 그들은 ‘삶의 진리’에 별 관심이 없다. 매주 교회도 다니고 기도도 하지만 그 외의 시간에 따로 성경을 읽거나 하나님의 뜻을 알아 가려는 노력은 별로 하지 않는다. 그저 새벽마다 나와 온전히 자신의 필요를 위해서만 간구하며 기도할 뿐이다.

이들은 희박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목사들의 설교로만 채우려고 한다. 목사들은 이런 성도들의 필요와 욕망에 부합해 신앙과 하나님의 뜻을 단순화시킨다. 목사의 말만 들으면 되고, 목사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하고, 목사 말만 잘 들으면 다 복 받는다고 부추긴다.

그렇게 교회는 반지성주의가 팽배한 욕망의 공동체가 되어 간다. 반지성주의가 가득한 교회 분위기에서 근대적인 민주적 소통과 대화의 리더십은 찾아볼 수 없다. 마치 목회자를 하나님이 세우신 제사장처럼 우상화한다. 이런 우상화는 전근대적인 불통과 권위의 리더십으로 교회를 이끌어 가는 목사를 양산하고 만다.

‘정의’는 이런 토양에서 자랄 수 없다. 정의는 섬세한 사리 분별을 요구하는 덕목이다. 복잡한 현실 속 여러 사람의 이해관계와 욕망의 실타래를 분석해 가장 올바르고 공평한 가치를 찾아내는 작업이 정의를 실현하는 과정이다. 정의 실천에는 인간과 현실에 대한 지나친 낙관과 맹신을 피하면서 구조 악을 견제하며 욕망이 인간을 언제든지 타락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날카로운 지성이 요구된다. 하나님의 뜻을 신중하게 분별하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 로마서 12장 2절(새번역)

그러나 많은 교인이 생각하기 싫어하고, 분별하기 싫어하며, 판단하기 싫어한다. 카리스마 넘치는 누군가가 자신을 대신해서 선택해 주고, 정답을 알려 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목회자에게 의지하고 그들의 말을 맹신하며 삶의 중요한 판단을 그들에게 위탁한다.

목회자들은 어떤가. 섬세하고 깊이 있는 지성을 소유한 목회자는 많지 않다. 그저 시스템을 옹호하고 제도를 지지하며 힘 있는 자 편에서 ‘제도를 흔들고 제도에 도전하는 모든 시도’를 악으로 규정하는 단순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목사가 대부분이다. 그런 목사들을 통해 교인들은 또 왜곡된 정보를 받아들이고 사리 분별 능력을 상실한다.

생각하기 싫어하고 성경조차 제대로 모르는 교인들. 목사 말이라면 아무 의심 없이 덥석 믿어 버리는 교인들. 이런 교인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의’의 가치를 기대할 수 없다. 그래서 많은 교인이 기도 응답으로 소유의 풍성함, 직장에서의 승진, 과업의 성취를 자랑하지만 ‘정의’의 가치에는 이상하리 만치 둔감하고 무지한 것이다.

이들은 그저 모든 사회문제를 개인 노력의 문제로 환원해서 본다. 구조적인 부조리와 시스템의 모순을 알아챌 능력이 없다. 그래서 악인을 지지하고 불의한 권력을 응원하며 약자를 혐오하는 데 아주 쉽게 선동당한다.

시대가 변하여 민주주의, 인권, 노동권, 양성평등의 가치가 어느 정도 높아졌다. 제도적으로도 그런 가치를 지지하고 보완할 수 있도록 시스템이 성숙해졌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는 그런 근대화된 가치관이나 제도를 찾아볼 수가 없다. 어쩌면 모든 전근대성은 ‘신의 다스림’을 ‘성직자의 다스림’으로 단순 환원해서 교회를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한 데서 비롯된 게 아닐까.

최근 어떤 목사가 말했듯이 “교회는 하나님이 독재하는 곳”이라는 논리로 운영되다 보니, 교회 안은 시간이 멈춘 전근대적 퇴행의 공간이 되어 버렸다. 전근대적 공간에서는 권위를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계급이 나뉜다. 소통과 대화는 필요 없다. 지시와 복종만 있을 뿐이다. 그런 이들에게 어떻게 ‘공평’과 ‘정의’의 가치를 기대할 수 있을까. 그래서 교회는 가장 심각한 계급 차별과 성차별이 이루어지는 곳이 되어 버렸다.

윤석전 목사는 한교총 대각성 기도회 설교 도중 “교회는 하나님이 독재하는 곳”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출처: 뉴스앤조이 박요셉

 

4. 정의는 신앙의 본질과 상관없다는 생각

많은 목사와 교인이 정의의 문제를 ‘정치 이슈’일 뿐 ‘신앙의 본질’과 상관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정의’는 비단 정치적인 문제뿐 아니라 신앙의 본질과 깊은 관련이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셔서 우리를 ‘의롭다’ 해 주시기 위함이었다. 결국 ‘정의’ 문제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다.

우리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예수께서 값비싼 대가를 치렀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의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자격을 주셨기 때문이다. 결국 십자가 대속의 은혜는 불의와 악에 사로잡혀 있던 우리가 ‘정의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다. 십자가 은혜는 ‘정의의 열매’로 우리 각자의 삶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기독교인이 ‘예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와 가치를 퇴색시키며 정의롭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 불의와 악에 동조하며 살아가고, 예수의 십자가를 값싼 용서, 값싼 은혜로 전락시키고 있다.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말하면서도 불의와 악에 동참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정의를 무시하고 악행을 저지르면서 자신은 용서받았다고 주장하고 산다. 진정한 회개도 없이 말이다.

‘뉴스타파M 2회 최후 변론 – 누가 당신의 죄를 사했나? 전병욱 목사’ 출처: 뉴스타파 유튜브

주님의 능력은 정의를 사랑하심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공평의 기초를 놓으시고, 야곱에게 공의와 정의를 행하셨습니다.

  • 시편 99장 4절(새번역)

‘정의’ 문제가 신앙의 본질과 상관이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웃에 대한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가 돌아보고 사랑해야 할 많은 이웃이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처럼 강도 만난 자들의 이웃이 되어야 할 때도 있고, 고통받고 억울한 일을 당한 이들의 이웃이 되어야 할 때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의 아픔과 억울함을 헤아리며 정의 구현을 위해 여러모로 힘쓰고 도와줘야 한다. 억울한 이들의 아픔을 달래는 길은 ‘진실’이 밝혀지고, 악의 실체가 드러나며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하는 ‘정의’가 세워지는 것밖에 없으니까.

그러나 세월호 사건 이후 드러난 한국 개신교인의 모습은 그렇지 못했다. 그렇지 못한 모습이 많았다. 우선 아픔을 당한 이가 어떤 일을 당했는지 정확하게 알려고 하지 않았고, 그들의 아픔조차 헤아리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하나님께 묻고 싶다는 유족에게 부모가 기도하지 않아서 아이가 죽었다는 망언조차 서슴없이 내뱉는 사람도 있었다.

세월호 희생자 지성 양 어머니 안명미 씨. 출처: 뉴스앤조이 구권효

그리고 세월호 유족들은 그들이 믿고 의지했던 교회로부터, 교우들로부터 국가를 흔드는 불순 세력, 아니면 사고 난 것을 가지고 한몫 챙기려는 몹쓸 인간으로 매도되며 외면당했다. 교회와 교우들은 그들을 돌보지 않았으며 그들의 마음 한 톨도 이해하지 못했다. 교회는 유족들이 원하는 사건의 진실과 정의가 세워지는 일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저는 교회가 정말 정의로운 모습인 줄만 알았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아파서 힘들어하니까 분명 교회는 우리 손을 잡아 주고 이끌어 줄 거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가 본 교회의 모습은 ‘못 걷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와서 세월호를 외치는데 교회는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참 원망스러웠습니다.

  • 세월호 희생자 단원고 2학년 문지성 양 어머니 안명미 씨

세월호 사건과 이어진 탄핵 정국에서 한국 보수 개신교는 교회가 얼마나 ‘정의’에 둔감하고 무지하며 왜곡된 가치에 병들어 있는지 명백하게 보여 줬다. 정의가 신앙의 본질과 상관없다고 생각하면서 도리어 악인의 편을 들고, 사리 분별 못 하는 무지로 피해자들 가슴에 피멍이 들게 하는 폭력과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

교회는 진실이 있고 정의로운 곳이어야 한다는 기대가 그렇게 무리한 요구일까. 안타깝게도 한국교회는 정의로운 곳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권력에 아부하고, 다수를 위해 소수의 목소리를 무시하며, 스스로 판단하고 분별할 줄 모르는 반지성주의에 젖어 신앙의 본질에서 ‘정의’의 가치를 떼어 버렸다.

힘과 권력에 아부하고, 약자에 대한 배려와 보호가 없으며, 반지성주의로 똘똘 뭉쳐, 올바르지 않은 맹신에 빠진 집단을 우리는 뭐라고 부르는가. 사교 집단, 사이비 집단이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국 개신교가 그들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개신교가 정의를 외면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정의가 부흥과 번영에 ‘이익’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정의는 거저 얻을 수 있는 가치가 아니다. 대개 정의롭게 살려고 하면, 상당한 저항과 불이익을 당하게 마련이다. 세상은 ‘정의’의 논리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힘과 이익’의 논리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정의롭게 살려는 순간, 이 세상은 고되고 힘들어진다. 지켜야 할 힘과 권력과 이익이 클수록 ‘정의롭게 살기’는 더욱 힘들어진다. 어쩌면 한국교회가 부흥과 번영의 길을 걸어간 순간부터 ‘정의’는 양립할 수 없는 가치였는지 모른다. 많은 목사와 교인은 ‘정의’의 가치를 양보하고 희생해서라도 부흥만 하면 된다고 합리화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보라, 이렇게 많은 교인과 화려한 성전을! 이것이 왜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란 말인가?

꼭 그렇게 말했던 2,000년 전 예수의 제자들이 있었다.

예수께서 성전을 떠나가실 때에, 제자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보십시오! 얼마나 굉장한 돌입니까! 얼마나 굉장한 건물들입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큰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 마가복음 13장 1-2절(새번역)

나는 이 말씀이 정의를 외면하면서 번창한 한국 개신교를 향한 예수님의 심판의 목소리로 들린다. 이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힘이 아니라 진리를 위해 정의를 수호하고, 억울한 자들의 아픔과 고통을 위로하기 위해 싸울 줄 아는 그런 교회와 기독교인이 많아지길 바란다.

‘정의’를 위해 싸우는 것은 피곤하고 고된 여정이겠지만, 그 길이야말로 예수께서 우리에게 걸어가라고 하신 좁고 고생스런 참된 제자의 길일 것이다. 그리고 정의를 외면하지 않는 것은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지금 한국교회에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신앙의 미덕이다.

원문: 뉴스앤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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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믿고 꼭 ‘위대한 삶’을 살아야만 하는걸까? https://ppss.kr/archives/77381 https://ppss.kr/archives/77381#respond Sun, 25 Mar 2018 00:00:48 +0000 http://3.36.87.144/?p=77381 당신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놀랍고도 위대한 계획?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을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90년대 선교단체에서 캠퍼스를 돌아다니며, 또는 교회에서 어디 선교를 가서 수없이 들이밀며 읽었던 노랑색 CCC의 전도책자 ‘4영리’의 시작부분이다. 90년대는 ‘꿈과 비전’ 또는 ‘기독교적 세계관’이라는 용어가 교회나 선교단체에서 젊은이들 사이에 엄청나게 유행했던 시절이었다. 나 또한 가장 좋아했던 책들이 대체로 ‘비전’이라는 말이 제목에 들어갔던 책들이었으니까.

4영리

어제 독서모임에서 오랜만에 90년대의 내가 거의 모든 책을 뜨겁게 섭렵했던 ‘찰스 콜슨’의 글을 ‘도시의 소크라테스'(새물결 플러스)라는 책에서 읽었다. 낯익은 그의 논리, 그의 표현들이 눈에 띄었다. 감동적이기도 하고, 은혜가 있기도 했지만 어떤 부분은 동의가 안되는 부분도 꽤 많았다. 그가 변했던지, 아님 내가 변했기 때문이겠지

그 와중에 이런 표현들이 꽤 많이 등장했는데…

‘여러분은 매일 아침 잠에서 깨어나 자신의 삶에 목적이 있음을 이해함으로써 참으로 가슴 뛰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기독교 세계관은 여러분에게 위대한 목적을 선사합니다’

참 오랜만에 읽어보는 낯익은 표현이었다. 자기개발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현이기도 하고, (물론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없겠지만) 90년대부터 그 맥락이 면면히 이어오는 꿈과 비전을 통한 신앙관과 마침 그때쯤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자기개발서 붐에는 묘한 공통점과 주장의 유사성이 있다.

‘당신은 위대한 삶을 살 자격이 있으니 그 인생을 누리라(또는 쟁취하라)’는 메세지다.

※ 한 때 내가 가장 좋아했던 책들
※ 한 때 내가 가장 좋아했던 책들

90년대의 나라면 이런 표현을 읽고 가슴이 설레고 뜨거워졌겠지. 그러나 어제는 그 부분들을 읽으며 마음 한 켠이 불편하고 전혀 동의가 안되었다.

원론적으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각자에게 ‘위대한 계획’이 있다는 말이 맞을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런 표현의 이면에는 우리가 ‘위대한 계획’에 동참하고 위대한 삶을 살지 않는 것은 무가치한 삶이라는 ‘번영주의 신학’의 가치관이나 ‘성과나 업적이 반드시 있어야만 존재할 가치가 있는’ 자본주의적 존재론이 교묘하게 투사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까지 살아보니 하나님이 날 사랑하신다는 사실만큼은 잘 알겠는데, ‘하나님의 놀랍고도 위대한 계획’이라는 표현을 갖다붙이기에 내가 살아온 지금까지의 삶은 너무 초라하고 보잘 것 없었으니까. 위대한 꿈을 꿀 수는 있었지만(몽상은 누구나 자유니까) 위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를 지불하기에 난 너무 의지박약에, 저질체력에, 성격파탄에, 무능력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데 내 삶은 왜 이럴까…?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데 내 삶은 왜 이럴까…?

그저 내게 주어진 힘겨운 하루 하루의 삶을 감당하기에도 난 벅차고 버겁기만 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언제부터인가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라는 표현은 내 삶과 전혀 상관없는 공허한 단어들로 다가왔다. 그리고 나이가 들며 주위의 친구들과 후배들을 보아도 나만 그런게 아니라 다들 비슷 비슷한 초라함과 평범함, 비루함이 뒤섞인 삶을 살고 있었다.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라는 말,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이라는 말들과는 상관없어 보이는 대다수의 평범하고 못난 나같은 신앙인들을 보아오면서 자괴감도 느끼고 실망할 때도 많았지만 언제부터인가 내 신앙관이 변하는 것을 느꼈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만으로 충분하다

4영리의 시작이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을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로 시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저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로 시작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 내가 만일 누군가에 전도를 한다면 ‘예수믿는다고 반드시 당신의 초라한 삶이 럭셔리하게 변하거나, 위대한 삶을 살게되는 건 아닙니다’라고 이야기하게 될 것 같다.

그 사랑은 목숨을 바친 사랑이었고 그 사랑이 위대한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전혀 위대하지 않고, 앞으로도 위대해질 가능성이 희박한’ 나같은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그것 하나 만으로도 족하다.

당신이 설사 예수를 믿고 회심을 경험했더라도 ‘위대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목적의식에 지나치게 사로잡힐 필요가 없다. 당신이 위대하지 않다는 것을 그분도 잘 알고 계셨으니까. 그리고 예수믿어도 여전히 주변에 민폐를 끼치고 성격나쁘고, 초라하고 비굴한 삶을 살 가능성이 99.9%라는 걸 누구보다 잘알고 계셨을테니까.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초라하고 위대함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음에도 ‘당신을 사랑하셔서’ 목숨을 버린 사랑이니까.

※위대하진 않지만 소박하고 아름다운 동네 화원의 꽃들
※위대하진 않지만 소박하고 아름다운 동네 화원의 꽃들

위대한 존재가 되지 않아도 좋다. 그저 그 사랑을 기억하고 이 힘겹고 고단한 세상을 살아낼 힘을 얻는 것 만으로도 그분은 당신을 기뻐하실 것이다. 너무 지쳐 살고 싶지 않은 순간, 그래도 날 사랑해서 목숨을 버린 신의 사랑을 기억하며 하루 하루 포기하지 않고 생명의 기쁨을 누리며 고난받는 이웃을 돕고 소박하게 이 땅의 아름다움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위대함은 그분의 몫이지, 우리의 몫은 아니니까.

이 야만스럽고 절망스런 세상에서 내가 절망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아프고 약한 이들을 돕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예수의 사랑이 내 안에 있는 한…난 초라할지언정 실패한 인생은 아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만으로 충분하다. 당신이 앞으로 여전히 위대하지 않고 초라한 삶을 살게되더라도 그 위대한 사랑은 당신을 저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 사랑을 기억한다면 마땅히 우리도 잘나고 성공하고 예수믿고 신분상승한 사람들을 사모하기보다…위대하지 않은 작고 소박한 것들, 못난 존재들, 고통받는 이웃들을 사랑해야 하지 않을까?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윤동주의 ‘서시’중-

오늘은 ‘위대하지 않은’, 앞으로도 여전히 ‘위대해질 가능성이 희박한’ 대부분의 사람들을 위해 돌아가신 예수의 ‘위대한’ 사랑을 묵상하기 좋은 날이다.

※출처: Bible TV Series
※출처: Bible TV Se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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