ㅍㅍㅅㅅ https://ppss.kr 필자와 독자의 경계가 없는 이슈 큐레이팅 매거진 Tue, 21 Jan 2025 05:07:25 +0000 ko-KR hourly 1 https://wordpress.org/?v=5.8.10 https://ppss.kr/wp-content/uploads/2015/07/ppss-100x100.png ㅍㅍㅅㅅ https://ppss.kr 32 32 ‘짱구’도 아빠가 되겠지, 그래도 이 여름날을 기억해줘 https://ppss.kr/archives/267122 Tue, 21 Jan 2025 04:40:06 +0000 http://3.36.87.144/?p=267122 나는 짱구 또래의 아이를 키우고 있는 아빠다. 그래서인지 이 장면을 만난 순간 갑자기 마음이 울컥하는 게 느껴졌다. 〈짱구는 못말려 극장판: 어른제국의 역습〉에서의 한 장면이다.

아버지가 태워주는 자전거 뒤에 타고 있던 소년이 / 출처: 〈짱구는 못말려 극장판: 어른제국의 역습〉
장면이 전환되면서 짱구의 아버지 신형만이 된다. 등 뒤에는 아들인 짱구를 태우고 있다. / 출처: 〈짱구는 못말려 극장판: 어른제국의 역습〉

짱구 또래의 아이를 키우고 있는 아빠로서, 이 장면을 오랜만에 만난 순간 갑자기 마음이 울컥하는 게 느껴졌다. 이 장면에는 슬프다고밖에 할 수 없는 면들이 구석구석 담겨 있다. 하나는, 짱구가 아빠의 등을 바라보며 아빠의 자전거 뒤에 타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이날이 여름이라는 점이다. 세 번째는 별 생각 없어 보이는 짱구의 평온한 표정이다.

어 아이가 아빠의 뒤에 앉아 등을 바라보며 자전거를 타는 시간은 길어도 이삼 년 남짓이다. 그보다 어릴 때는 아이가 위험할 수 있어 등 뒤에 태우기 어렵다. 그보다 크면 스스로 자전거를 타려고 하지 굳이 등 뒤에 타려고 하지 않는다. 인생에서 패달에 발이 닿지 않는 아이를 등 뒤에 태우고 달리는 일은 아주 잠시, 지나고 나면 잘 기억나지도 않을 짧은 시절의 일이다.

낚시대를 어깨에 올린 채 자전거를 몰며 여름에 떠나는 나들이라는 것도, 그리 자주 있을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어쩌면 짱구 아빠는 매일같이 회사에 출퇴근하며 일하다가, 일 년에 딱 한 번 낸 여름휴가를 가족과 보내기 위해 힘을 냈을 것이다. 뭉게구름이 솟아 있는 좋은 날, 아직 아이는 부모와 함께 여름을 보내는 그런 날, 인생에 몇 번 없을 여름휴가가 그 속에 담겨 있다. 몇 년 뒤 아이가 아빠의 자전거 뒤에 타서 낚시를 따라나서는 일은 끝날 것이다.

인생과 시간의 진실이랄 것을 딱히 알 리 없는 짱구의 표정은 마치 자신이 영원히 그대로 그 자리에 있을 거라 믿는 것처럼 평온하다. 인간의 삶이란, 세월이 흐르면서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지나가며 잊혀지는 일이라는 걸 아이는 아직 제대로 모른다. 아이는 언젠가 자신이 어른이 되고, 아빠가 될 거라는 걸 머리로는 알겠지만 그래도 지금이 그대로 영원할 줄 믿고 있다. 언젠가는 엄마와 아빠로부터 떨어져, 다른 누군가와 여름을 보내며, 삶을 사랑할 것을 아직은 모르고 있다.

사진: UnsplashPriscilla Du Preez ????????

요즘 가끔씩 아이의 두 눈을 뚫어지게 바라볼 때가 있다. 언제 이렇게 컸나, 아직 어린데, 아직 앳된 얼굴인데, 아직 이렇게 귀여운데 참 많이 컸다. 그리고 아이가 아내와 이야기 나누는 걸 가만히 듣는다. 아직 발음이 아이 발음인데, 완벽한 어른 발음은 아닌데, 아직 아기 같은데, 그래도 정말 많이 컸다. 그래도 아직 부모가 자기의 세계이고, 엄마와 아빠랑 함께 있는 걸 좋아하고, 같이 놀아달라고 하고, 어디든 따라다니는 나의 강아지인데, 이제는 친구랑 노는 걸 더 좋아하기도 하고, 자기 세계도 만들어간다. 그런 것들이 눈앞에 손에 잡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가끔 아이를 곁에 누이고 아이가 해달라고 하는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줄 때면 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구나’하는 안도의 마음이 든다. 문어 나라 이야기, 굼벵이 세상 이야기 같은 걸 제멋대로 지어내 들려주면, 아이는 세상에서 제일 재밌다는 듯 깔깔 웃는다. 내가 집에서 운동을 할 때마다 옆에 와서 따라 하는 걸 보고 있으면, 아직 나와 너는 연결되어 있구나, 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이 여름도, 우리 셋이 마치 하나인 것처럼 보내는 나날들도 점점 끝나가고 있다는 건 안다.

나는 삶을 우울하게 보는 사람이 아니고, 내가 어떤 삶의 국면에서도 나름의 기쁨을 잘 찾아낼 것을 스스로 믿는다. 그렇지만 삶이 본질적으로 슬프다는 사실은 잊지 않으려 한다. 언젠가 나에게 자전거를 가르쳐준 아버지, 나에게 그림을 가르쳐주고 이야기를 들려준 어머니의 자리에 내가 와 있듯이 아이도 커서 다시 이 자리에 서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때쯤 되어 나의 흩어질 마음을 아이가 기억해 주고 이해해 준다면 삶의 가장 깊은 위로가 될 것 같다. 우리는 어쨌든 한 번뿐인 삶의 슬픔을 껴안고 서로를 위로하며 살아아야 한다.

아마 20년쯤 뒤에도, 짱구는 여전히 짱구일 것이고, 짱구 아빠는 하루 종일 회사에서 일한 뒤 돌아와 땀 채인 발의 냄새를 풍기는 짱구 아빠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아빠의 자리에는 아이가 있을 것이고, 아이는 또 다른 짱구를 품에 안으며 이 시절을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

원문: 정지우 문화평론가 겸 변호사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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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감자수제비와 뇨끼를 구분하던 날 https://ppss.kr/archives/265493 Thu, 13 Jun 2024 04:47:46 +0000 http://3.36.87.144/?p=265493 언젠가 달팽이처럼 등을 동그랗게 만 채로 티브이를 보던 엄마가 물었다.

뇨끼가 뭐야?

한 예능 프로의 미션으로 주인공 어머니께 음식 대접을 위해 전통시장에서 장을 보는 중이었다. 출연자들은 뇨끼를 만들기 위해 시장을 돌며 감자와 밀가루를 샀다. 방에서 물먹으러 나왔다가 엄마의 느닷없는 질문 공격에 당황해 심드렁하게 답했다.

뇨끼? 음… 이탈리아 파스타인데 일종의 국물 없는 감자수제비 같은 거야. 감자를 넣은 반죽으로 만든 수제비.

엄마가 묻는 말에 답을 해놓고도 영 개운하지 않았다. 뇨끼를 눈으로 본 적도, 입으로 먹어 본 적도 없는 엄마의 머릿속에 뇨끼는 그저 감자수제비로 기억될 테니까.

엄마는 칠십 평생 처음 들어 본 괴상한 이름의 음식이 감자수제비 맛이라니 신기해하셨다. 사실 뇨끼와 감자수제비는 분명 다른 음식이다. 하지만 엄마가 가늠할 수 있는 수준으로 설명하기에 이보다 적당한 요리가 없었다.

Pixabay

곧 엄마에게 뇨끼의 신세계를 열어 드리리라 다짐했지만 현실이 된 건 한참 지나서다. 오른쪽 무릎을 수술한 지 1년 만에 고장 난 왼쪽 무릎을 고치기 위해 수술대에 오르기 직전이었다. 17년 전에 수술한 왼쪽 무릎의 인공 관절이 또 말썽을 부려 재수술이 필요했다. 한동안 입원을 하고, 또 퇴원하더라도 당분간 외출이 어려워질 엄마. 그러니 입원 전 마지막 콧바람을 넣는 외출 식사 메뉴로 뇨끼를 택했다.

집 근처에 이탈리아 식당이 없는 건 아니지만, 수제 뇨끼를 취급하는 곳을 찾아 굳이 택시를 타고 옆 옆 동네로 향했다. 주말에는 예약 없이는 맛볼 수 없다는 그곳에 프리랜서의 특권, 평일 점심 무예약 신공으로 도착했다.

오너 셰프의 작은 레스토랑에는 들어서자마자 허브 향이 코를 확 찔렀다. 이탈리아 가정식을 표방한 요리들이 나오는 레스토랑답게 매장 가운데 난로 위 주전자에서 허브차가 끓고 있었다. 정수기의 온수가 아닌 뭉근하게 끓인 허브차를 홀짝이며 엄마와 나는 각자의 학창 시절 겨울이면 교실 난로 위에서 끓던 보리차 주전자에 대한 추억에 대해 도란도란 수다를 떨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손질한 천연 재료로만 음식을 만들기 때문에 시간이 다소 걸리니 이해해 달라는 메뉴판 첫 장의 당부와 달리 음식은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 식전 빵에 이어 나온 이탈리아 염장 햄, 프로슈토가 올라간 샐러드를 맛본 엄마가 말했다.

지금까지 먹어 본 샐러드 중 최고로 맛있어!

불규칙하게 부순 견과류가 씹히는 수제 렌치 드레싱이 입에 맞으셨는지 설거지라도 하듯 접시에 남은 소스를 양상추로 싹싹 모아드셨다. 워밍업 차원으로 시킨 샐러드가 이 정도면 메인 메뉴는 대체 어떨까?

기대감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그때, 드디어 올 게 왔다. 테이블당 1개만 주문이 가능할 만큼 인기 메뉴인 ‘포르치니 뇨끼’. 버섯 향이 강한 ‘포르치니 버섯’과 진한 크림이 진한 수제 감자 뇨끼가 도착했다. 새우 들어간 파스타가 드시고 싶다 하여 바질 크림이 들어간 새우 파스타도 함께 당도했다. 이국적인 향신료라면 고개를 젓는 입맛이 흥선대원군인 아빠와 함께였다면 감히 시키지 못할 메뉴들이었다.

사진: UnsplashSebastian Coman Photography

살짝 구워 노릇한 뇨끼 반죽 덩이가 하얀 크림소스 위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눈처럼 뿌려진 치즈 가루 사이사이로 트러플 향이 슬쩍 올라왔다. 늘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메뉴 앞에 선 듯 포크를 가져다 대지 못하는 엄마를 위해 딸이 시범을 보인다. 뇨끼를 포크로 푹 찍어 소스를 이리저리 입힌 후 한 입 베어 먹는다.

눈치 보던 엄마도 나처럼 뇨끼를 드셨다. 만 71세에 맛보는 첫 뇨끼다. 난생처음 뇨끼를 입에 넣은 후 엄마의 눈이 반짝였다.

아, 이런 거구나! 이거 감자수제비랑 비슷하면서도 달라!

옅은 안도와 짙은 후회가 교차했다. ‘왜 이제야 왔을까?’ 예상치도 않게 수술이 빠르게 결정되고 엄마의 얼굴은 날이 갈수록 어두웠다. 1년 만에 또 수술해야 한다는 두려움, 재활 치료의 고통, 갑자기 수술비로 빠져나갈 목돈, 자리를 비우는 미안함, 가족들에게 걱정을 끼치는 거 같아 자꾸만 위축되는 모습이었다. 뇨끼 덕분에 수심이 가득했던 엄마의 얼굴에 잠시나마 생기가 돌았다.

그제야 왜 택시를 타고 옆 옆 동네까지 와서 뇨끼를 먹는지 엄마에게 이유를 설명했다. 싸돌아다니기 좋아하는 딸은 세상 산해진미 다 먹어 보고 다니는데, 정작 엄마는 감자수제비와 잔치국수, 김치찌개와 미역국이 전부인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 어쩌다 외식이라고는 돼지갈비와 짜장면. 지극히 아빠 취향의 메뉴들뿐이었다.

얄팍한 부채감을 안고 살다가 작정하고 굳이 손잡고 나오지 않으면 엄마는 평생 뇨끼 = 감자수제비로 알고 사셨을 분이다. 우아하고 교양 많은 사모님의 세계와는 먼 곳에 무릎이 닳도록 억척스럽게 살아온 엄마에게 대접한 뇨끼 한 접시에는 여러 가지가 담겨 있다. 미안함, 감사함, 그리고 응원이 가득하다.

다시 시작될 고통스러운 수술과 회복의 시간을 무사히 마치고 건강한 모습으로 뇨끼를 먹으러 오기로 약속했다. 접시 바닥까지 싹싹 긁어 드신 엄마는 며칠 후 뇨끼의 추억을 안고 입원했다. 그리고 남은 딸에게는 엄마를 떠올릴 인생 음식이 하나 더 생겼다.

원문: 호사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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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못 해줘서 미안해” 왜 부모님은 이런 말을 할까? https://ppss.kr/archives/265131 Tue, 27 Feb 2024 01:31:28 +0000 http://3.36.87.144/?p=265131 엄마가 많이 못 해줘서 미안해

어렸을 때, 어머니가 자주 하시던 말씀이었다. 우리 집은 솔직히 꽤 불행했다. 가정불화가 있었고, 집은 가난했다. 급기야 내가 이제 막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부모님께서는 이혼을 결정하셨다. 어머니와 여동생이 떠나고, 아버지 밑에 남았지만 아버지는 출장으로 바쁘셔서 얼굴을 보기 어려웠다.

혼자 떨어져 있는 내가 유독 안타까우셨나 보다. 어머니는 못 해도 이주일에 한 번은 ‘엄마 집’에 나를 오도록 했고 1박 2일 동안 내가 먹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것 다 들어주셨다. 나중에 암으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어머니는 매일 내게 전화하시며 행여 엄마 없는 빈자리를 느끼지 않도록, 그렇게 신경을 많이 써 주셨다.

그때는 나도 많이 어렸다. 마냥 좋았고 슬펐을 뿐, 어머니가 마음속에 지니셨을 어떤 무게감을 가늠할 수 없었다. 지금에야 조금이나마 알겠는 거다. 시간이 흘러 결혼을 하고, 딸아이의 아빠가 되고 나니 그때의 ‘부모 마음’ 생각이 나서 이따금 먹먹한 기분이 들게 된다.

그땐 그 의미를 몰랐지… / 사진: UnsplashKelli McClintock

부모는 늘 이상적인 부모가 되고 싶어 한다. 조금이라도 부족하게 해 준 것은 아닐지, 아이가 잘못되는 건 아닐지 노심초사, 전전긍긍하며 조금이라도 더 아끼고 보살피려 마음 쓰는 것이 부모 마음이다. 기왕이면 더 좋은 곳 데려가고 싶고, 더 맛있는 것 먹이고 싶고, 자식이 하고 싶다는 거 다 지원해 주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늘 해주고 싶은 것은 많은데 현실의 벌이가 고달파서, 기력이 쇠해서, 몸이 두 개가 아니라서 나름 최선을 다한다고는 하지만 늘 자식에게는 더 못 해주는 아쉬움이 남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이 TV에 나오는 부자 연예인들 육아를 보고 한탄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걸 해줄 수 없는데, 저 부모들은 원하는 걸 다 해주는구나.

 

양육 죄책감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이상적인 부모의 모습, 그리고 실제의 부모의 모습 간에는 언제나 ‘격차’가 있다. 그리고 부모는 그 ‘격차’를 못내 아쉬워하고 미안해한다. 마음의 짐처럼 여긴다. 심리학자들은 그 부모 마음을 가리켜 양육 죄책감(parenting guilt)이라고 부른다.

양육 죄책감을 측정하는 대표적인 도구로는 모성 죄책감 척도Maternal Guilt Scale(Mann & Thornberg, 1987)라는 것이 있다.

  • 아이에게 엄마로서 따뜻한 마음을 전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
  • 아이에게 화를 내고 내면 죄책감이 들고 후회가 된다.
  • 아이가 다른 아이보다 뒤처진다고 느껴질 때 내 탓인 듯 속상하다.

양육 죄책감은 ‘양육 스트레스’라는 개념의 하위 요소로 다뤄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일부 심리학자들은 양육 죄책감만의 고유한 특징에 주목하여, 양육 죄책감만을 별도로 다루기도 한다. 그렇다면 양육 죄책감은 양육 스트레스와 뭐가 다를까?

1) 서로 다른 양상

주 양육자의 취업 여부에 따라 양육 죄책감, 양육 스트레스의 양상이 서로 다르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여기서는 ‘워킹맘’과 ‘전업주부’를 비교해 보겠다. 워킹맘과 전업주부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 워킹맘: 양육 죄책감↑, 양육 스트레스↓
  • 전업주부: 양육 죄책감↓, 양육 스트레스↑

워킹맘은 일하느라 바빠서 전업주부 대비 아이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한다. 그래서 양육 죄책감이 높은 경향이 있다. 하지만 양육에 많이 참여하지 않는 만큼 양육 활동 그 자체로부터 경험하는 스트레스의 정도는 낮다.

전업주부는 반대다. 마음만 먹으면 하루 종일 아이에게 헌신할 수도 있기에 양육 죄책감은 낮은 편이다. 하지만 늘 아이와 씨름하는 과정에서 받는 양육 스트레스는 높다.

2) 지향성의 차이

양육 스트레스는 낮을수록 좋다. 양육 스트레스가 낮은 사람들이 심리적으로 더 안정되어 있고, 아이에게 더 좋은 애착 습관을 물려준다.

하지만 양육 죄책감은 묘하다. 일견 생각하기에 양육 죄책감이 낮으면 좋을 것 같지만 연구 결과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은, 적절한 수준의 죄책감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것이 심리학자들의 설명이다.

 

양육 죄책감은 ‘적당히’ 있어야 한다.

먼저 양육 죄책감이 너무 높은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인다.

  1. 이들은 낮은 자존감, 높은 불안과 관련이 있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자신이 양육을 잘해 나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남들만큼 해주지 못할 것이 두렵고, 그런 자신이 원망스러운 사람들이다.
  2. 양육 죄책감이 높으면 자식을 과보호하고 통제하려 든다. 해주지 못해 미안하니까 한순간도 눈을 뗄 수가 없는 거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심리학적으로 과보호, 통제는 그다지 바람직한 양육 스타일이 아니다. 자칫하면 과도하게 의존적이거나 반항하는 아이를 만들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심리학자들은 양육 죄책감이 아예 없는 사람들보다, 적절히 양육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더 안정적인 양육 스타일을 보이는 것을 확인했다. 왜 그럴까?

죄책감(guilt)이라는 감정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자. 죄책감은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과하면 자신을 잡아먹지만, 적정 수준의 죄책감은 자기 각오이자 반성, 그리고 책임감으로 연결된다. 미안하니까, 부끄러우니까 아이에게 더 잘하려 노력하게 된다는 말이다.

 

아이에게 미안한 당신은 오히려 좋은 양육자이다

혹시 양육 죄책감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가? ‘적절한’ 죄책감은 오히려 아이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한다는 점을 상기하자. 죄책감이 있는 양육자가, 그렇지 않은 양육자보다 더 아이에 대한 배려와 책임도 높다.

죄책감이 느껴진다는 사실을 툭 터놓고 받아들이자. 애써 부정할 필요는 없다. 없애려고 무리할 필요도 없다. 내가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차분하게 인지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객관적인 시야가 생기고 현실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하지 못하는 일이 구분되기 시작할 것이다.

할 수 있는 한에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 그뿐이다(이는 심리학의 마음챙김(mindfulness), 자기자비(self-compassion)의 원리를 응용한 것인데, 양육 죄책감에 대해 효과성이 검증된 전략이다).

 

참고 논문

  1. 김지선, 유성경 (2023). 어머니 불안정 성인 애착과 양육 죄책감의 관계에서 지각된 남편 협력과 자기-자비의 매개효과. 한국심리학회지: 상담 및 심리치료, 35(4), 1429-1453.
  2. 이경숙, 정지현 (2020). 양육죄책감 감소를 위한 마음챙김 -자기자비 집단상담 프로그램의 효과. 인문사회과학연구,21(4), 333-355.
  3. Mann, M. B., & Thornburg, K. R. (1987). Guilt of working women with infants and toddlers in day care. Early Child Development and Care, 27(3), 451-464.

원문: 허용회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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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면 불륜하고 싶지 않나요?”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https://ppss.kr/archives/261975 Wed, 14 Feb 2024 03:42:23 +0000 http://3.36.87.144/?p=261975

결혼을 하면 다른 사람을 만나거나 불륜을 하고 싶지 않나요?

종종 이런 질문을 들을 때가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러고 싶기는커녕, 그와 비슷한 일이라도 일어날까 봐 두려워하는 편에 가깝다. 나에게는 이 가정을 지키는 것에 비하면 다른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나 욕망은 너무나 하찮은 것으로 느껴져서, 오히려 그 하찮은 것이 어떤 식으로든 나의 가장 중요한 것에 영향을 미칠까 두렵다.

아내와 아이랑 만들어온 지난 몇 년간의 시간, 그 속에서 울고 웃고 견뎌낸 수많은 날들, 바다를 보러 떠나고, 서로의 마음을 챙기고, 때론 미워했다가도 화해하며 서로의 소중함을 확인했던 그 모든 날들보다 더 소중한 걸 상상하기 어렵다. 오히려 어떤 오해 같은 것이 내가 이토록 소중히 여기는 걸 망가뜨린다면, 그 후회를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작가: storyset / 출처: freepik

세상에는 성적인 욕망이나 호기심 같은 걸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나는 서로가 신뢰와 애정으로 오랫동안 쌓아 나가는 관계, 지속으로부터 얻는 안정감, 서로를 위로하고 지켜줄 수 있는 이해심 같은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느낀다. 그리고 그런 건,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한 일이라고도 생각한다.

‘나’라는 존재는 결국 내가 쌓아온 시간과 다름없기도 하다. 나는 이 관계를 지키기 위해 살아왔고, 그것이 나이며, 그것이 나의 삶이기도 하다. 또 그건 우리이기도 해서, 내가 나에게, 너에게, 우리에게 그런 심대한 상처를 주는 일은 도무지 할 수가 없다고 느낀다.

내가 무엇 때문에 그토록 내게 소중한 아내와 아이에게 원망받는 행위를 해야 할까? 무엇이 그리 대단해서? 무슨 엄청난 걸 얻기 위해?

말하자면, 나는 ‘그런 걸 하고 싶은’ 사람들 자체를 멀리하고, 아예 그들과 무관하게 살아가고 싶은 쪽에 가깝다. ‘그런 걸 중시하는’ 사람들과 다른 세계와 가치관에 살길 바란다.

나는 함께 쌓아온 시간이 더 소중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애정으로 쌓아온 관계의 신뢰를 중시하는 사람들, 함께한 세월 속에 담긴 추억이나 기억을 너무도 귀중히 여겨 그것을 잃는 걸 너무도 두려워하는 사람들, 그래서 지금 내게 주어진 관계를 무엇보다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들과 가치를 교류하고 싶다.

출처 Freepik

나도 가족과의 관계를 결코 완벽하게 해내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잘 해내고 싶은 건 이 관계다. 내가 원하는 건 우리가 쌓은 추억을 잃지 않는 것이다. 내가 바라는 건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나에 대해 가진 신뢰를 끝까지 지켜내는 것이다. 내가 지키고 싶은 건 우리가 살기로 한 이 삶에 대한 약속이다.

원문: 정지우 문화평론가 겸 변호사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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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상형은 (거의) 부모님에 의해 결정된다 https://ppss.kr/archives/264574 Wed, 27 Dec 2023 04:11:54 +0000 http://3.36.87.144/?p=264574 당신이 누군가에게 관심이 가고, 사랑을 느끼고, 편안함을 느끼는 데에는 당신의 부모님이 크게 영향을 미칩니다. 이에 대해서 당신은 알아챌 수도 있고, 제대로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은 외적인 부분을 제외하고, 어떻게 부모님이 당신의 연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알아봅니다.

 

행복 재현의 욕구

나는 아빠 같은 사람을 만날 거야!

나는 엄마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고 싶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경우입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양육자가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사랑이 충분했다면, 우리는 반대되는 성의 부모님의 모습을 토대로 이상형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빠가 최고야

자신이 살면서 받았던 사랑의 방식과 비슷하게 또다시 건강하게 사랑받고 싶다는 욕구가 발현되는 것이지요. 만약 아버지가 자신을 많이 귀여워하고 챙겨주었던 여성분이라면, 비슷하게 자신을 귀엽게 여기고 챙겨주는 남자에게 끌릴 수 있습니다.

 

익숙하지만 다른 결말의 욕구

이 케이스는 여전히 부모님과 비슷한 유형의 상대를 찾지만, 그 이유가 조금 독특합니다. 부모님이 부정적인 양육 태도를 보였어도 닮은 사람을 연애 상대로 고르거든요.

예를 들어 볼까요?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그다지 애정 표현도 해주지 않았던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아버지와 행동 양식이 비슷한 남자를 선택하는 겁니다.

이런 선택에서 작용되는 심리는 ‘익숙함’ + ‘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다른 결말을 맺고 싶은 마음’이 반영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싫고 함께 살기 힘들었던 아버지지만, 그런 모습이 머리에 각인되어 버린 겁니다. 그래서 비슷한 면을 가진 남자에게 동일한 감정을 느끼는 거죠. 그런 남자가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일종의 편안함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완전히 새로운 유형은 이해하기도 힘들고, 낯설다 여길 수 있죠)

거기에 더해, 자신이 자라는 과정에서 느꼈던 수많은 좌절과는 다른 경험을 하고 싶은 희망이 반영되기도 합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이 아버지와 비슷한 남자지만, 과거와는 다르게 새로운 결과를 만들고 싶은 것입니다. 현재의 이 상대는 무뚝뚝했던 아버지와 비슷하지만, 이번에는 아버지와는 다르게 나에게 많은 표현을 해주는 사람으로 변모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겁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만난 사람 역시 아버지가 그랬듯이 변화는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변화는 자신이 문제의식을 느껴야 시작되는 거지, 상대가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애정과 존경의 복잡한 욕구

반대로 부모님으로부터 받지 못했던 사랑과 관심, 애정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을 찾기도 합니다. 살면서 애정 결핍을 느꼈던 사람들이 이 경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죠.

그런데 반대의 케이스도 있습니다. 애정을 갈구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애정을 잘 주지 않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죠. 이들에게서 보이는 독립적이고, 강인하고, 자신의 일에 열중하는 모습이 매력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왜 이들에게 끌리는 걸까요? 상대가 나를 이끌어주고, 챙겨주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에게서 자신에게 없는 모습들을 발견하고 매력을 느낍니다. 독립성, 강인함, 높은 성과 등이죠.

그 이유는 자신이 과거에 사랑받지 못했던 이유를 자신의 부족함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독립적이지 못했고, 강인하지 못했고,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해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조건부 사랑’ 공식을 머릿속에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을 고르게 되는 것입니다.

똑똑하고 강인한 사람에 끌리는 이유

문제는 앞서 말했듯이 이들이 독립성, 강인함, 성과주의에 집중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작 자신이 원하는 애정과 관심을 덜 줄 수 있다는 것이죠. 이들은 그런 관계나 그런 표현 같은 것에 익숙하지 않고, 필요성도 잘 못 느끼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어쨌든 이들은 눈앞의 애정보다 강인함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단순히 애정만 꾸준히 주는 사람은 눈에 차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신이 믿고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을 찾는 이유죠.

 

단지 외로움을 없애고 싶은 욕구

이 케이스는 사실 상대가 그렇게까지 마음이 가지 않지만, 현재의 외로움을 해소하고 싶은 마음에 만나는 경우입니다.

딱히 끌리지도 않는데도 상대를 만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어서 나중에 더 자세히 다룰 것입니다. 다만 미리 말해둘 케이스는, 자신의 부모님이 외도를 한 경우입니다.

그럴 경우 ‘내가 가장 믿고 사랑하는 사람도 신뢰를 저버리고, 갑자기 애정을 주지 않고,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각인이 머리에 박힐 수 있습니다. 이때 이 사람의 애착 프로그램에 새로운 생각이 자리 잡습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욕구는 있지만, 마음을 주고 깊은 관계를 기대했다가는 크게 상처 입을 수 있다는 생각이죠.

그래서 이들은 대단히 열정적인 사랑도 기대하지 않고, 상대방이 가깝게 다가와도 거리를 유지하게 됩니다. 언제든 떠나도 좋다거나, 나도 떠날 수 있다는 뉘앙스로 이야기할 수도 있죠. 왜냐하면 자신은 사랑을 믿지 않고, 상대도 자신의 부모님처럼 신뢰를 어길 수 있다 생각하니까요.

이들은 이 방식이 자신의 마음을 보호하는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마음속에 외로움은 계속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상대를 찾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는 것이죠.

당신은 어떤 유형인가요? 부모님과 비슷한 사람인가요? 아니면 정반대의 사람인가요? 스스로를 생각해 보는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원문: 멘디쌤 조명국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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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무한한 우주, 티끌 같은 다정함일지라도 https://ppss.kr/archives/263272 Tue, 11 Jul 2023 01:07:15 +0000 http://3.36.87.144/?p=263272 ※ 영화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멀티버스와 이세계라는 장르가 최근 인기 있는 모티프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 영화(콘텐츠) 정말 최고인걸?’라는 느낌을 주는 작품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그나마 ‘스파이던 뉴 유니버스’ 애니메이션 정도일까요? (그마저도 시각적 연출 측면에 한정되지만)

그런데 행운스럽게도, 이토록 멀티버스라는 모티프가 줄 수 있는 가슴 따뜻한 울림을 지닌 영화를 만났습니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입니다.

 

1.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때론 도움이 된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는 보는 이를 빼놓고서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이야기가 누군가를 가슴 저리게, 미소 짓게 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그 원동력은 읽는 이가 겪어온 삶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술가들이란 이야기를 누구보다 날카롭게 벼려 가슴 깊숙이 찔러주는 사람들이겠죠.

가능성의 우주(멀티버스), 이세계 이야기가 오늘날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최선의 선택과 결정으로 만들어진 오늘날의 자신이지만, 세상의 등쌀에 이리저리 떠밀릴 때면 그런 내가 한없이 작고 하찮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밀려오는 후회와 함께 다른 선택을 해서 찾아왔을 세계를 꿈꾸게 되죠.

그때 다르게 선택했다면, 달라졌을까?

그래서 팍팍한 현실을 잊게 해줄 이야기가 꾸준히 웹툰이나 극장에서 보이는 것 같습니다.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던 헝가리 속담처럼, 그렇게라도 힘든 현실에서 잠시 눈을 돌리는 것이죠.

가운데가 텅 빈 베이글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이하 에에올)〉의 등장인물인 ‘조부 투파키’가 만든 베이글은 이런 현대인의 상징과도 같습니다. 자신의 실패와 어린 시절의 후회를 빚어 창조했다고 하는 베이글. 마치 가슴 한쪽이 뻥 뚫린 사람 같기도 하고, 무(無)를 뜻하는 O(zero) 같기도 하고, 빛마저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보이기도 하죠. 조부 투파키는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베이글 속으로 들어가 죽음의 망각에 기대고 싶어 합니다. 벗어날 수 없는 삶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하죠.

이는 조부 투파키만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영화 밖의 우리도 자신만의 실패와 후회를 빚어 만든 베이글을 가슴 속에 하나씩 지니고 살아갑니다. 베이글과 계속해서 눈을 마주치다 보면 무력감이 온 정신을 지배하고, 곧 그 속으로 자신을 던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죠. 때문에 베이글은 한 겹의 커튼으로 가려 무시하거나, 속을 채울 무언가를 계속해서 찾아 나서야 합니다. 하루라도 더 이 우주를 살아가기 위해서.

빈 구멍을 메워주기 위해서 보통의 다중 우주, 이세계를 소재로 한 콘텐츠는 환상적인 비일상의 세계를 준비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죠.

네가 꿈꾸는 모든 것이 여기 있어. 멋진 신세계를 탐닉하면서 베이글로부터 시선을 돌려!

실제로도 어린왕자의 상자 같은 멀티버스를 마음껏 주무르다 보면 현실의 고통과 상실은 잊혀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상자만을 가지고 놀 수는 없습니다. 언젠가는 장미가 기다리고 있는 고향 별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에에올’이 준비한 멀티버스는 조금 다릅니다. 멀티버스가 모티프이지만, 이들이 주목하는 것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우주’가 아닙니다. 바로 그 옆에 있는, ‘우주에 비하면 티끌과도 같은 우리 옆의 존재들’이죠.

 

2. 모든(Everything, Everywhere)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거의 없다’는 것과 같다

검은 베이글을 닮은 영수증의 오류 표시

영화 초입부터 보여주는 에블린의 삶은 마치 검은 베이글과도 같습니다. 자신의 20년 인생이 녹아 있는 영수증은 국세청으로부터 고발을 당했습니다. 이곳저곳이 오류투성이라며 친절하게 큰 동그라미마저 그려져 있습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죠.

너의 인생은 의미가 없어.

가운데가 파인 베이글처럼, 에블린의 삶은 후회와 무기력만이 가득합니다. 딸과 남편과의 관계도 삐그덕거립니다. 그 순간 ‘알파 차원’의 웨이먼드가 그녀에게 찾아옵니다. 그는 지금과 다른 우주에서 최선의 형태로 살아가고 있는 에블린을 보여주죠.

가장 성공한 차원의 에블린의 모습 중 하나

에블린이 접신하는 다중 우주 속 또 다른 에블린들은, 우리가 현실을 망각하기 위해 읽어내리는 여러 콘텐츠와 닮아 있습니다. 현란하고 황홀하며, 눈길을 끄는 광경으로 비참한 현실을 잊게 만들어 줍니다. 심지어 가장 중요한 현실의 문제를 망각하게 만들 정도죠. 영화에서는 이를 ‘버스 점프(Verse Jump)’라고 이름 붙입니다.

멀티버스의 이름을 ‘버스 점프’라고 부르는 건 참으로 기묘합니다. 수많은 자아와, 그것을 현실시켜 줄 정보를 찾아 넘나드는 현대인을 염두에 둔 작명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 가능성에 쫓기며, 현실의 고난함을 잊기 위해 차원(콘텐츠)을 넘나들지만, 그럴수록 우리의 자아는 어디까지가 자신의 욕망이고 어디까지가 타인의 기대인지 구분하기 힘들어집니다. 빌런인 조부 투바키가 바로 그런 인물의 전형입니다.

조부 투바키가 되어 버린 조이와, 그런 우주적 빌런을 만들어 낸 알파 세계의 에블린. 이들은 어느 우주의 자신들보다도 많은 가능성을 품은 이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목적지(가능성)가 있다고 한들, 정착하고자 하는 항구가 없다면 배는 결코 육지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어머니의 기대와 사회의 강압 때문에 시작된 출항이기에, 조이에게는 스스로 정한 정착지가 없었습니다.

‘어디든 갈 수 있다’는 말은 곧 ‘어디에도 갈 곳이 없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결국 조이는 망망대해의 한가운데에서 방향을 잃고 표류하게 됩니다. 조이의 자아는 자신의 욕망과 타인의 기대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합니다.

그러나 모든 이들에게 공평한 단 하나의 정착지가 있습니다. 바로 죽음입니다. 조부 투바키는 그렇게 자신을 지치게 하는 표류에서 벗어날 방법으로 죽음이라는 마지막 수단을 꿈꾸게 됩니다.

우리가 찾아 나선 가능성도 조부 투바키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조이에게 에블린이 늘상 하는 잔소리인 ‘살을 빼라’ ‘레즈비언의 정체성을 아버지에게 알리지 마라’는 사회의 표준에 맞춰진 요구입니다. 조이에 대한 사랑에서 기반한 잔소리이지만, 이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마치 남의 옷에 내 몸을 끼워 맞추듯 답답함과 숨 막힘을 견뎌야 합니다. 사회는 그 기대를 ‘가능성’이라고 부르지만, 여기에 딱 맞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이죠. 강압에 떠밀릴수록 새로운 조부 투바키가 탄생할 뿐입니다. 가능성의 우주는 순식간에 종말의 블랙홀로 뛰어드려는 이들로 가득 차게 됩니다.

알파 우주의 웨이먼드는 에블린이 지닌 가능성의 힘으로 조부 투바키의 허무에 맞서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극한까지 밀어붙인 가능성은 또 다른 허무가 되어 데칼코마니처럼 반복될 뿐이었습니다. 무한 우주가 지닌 가능성으로도 조부 투바키의 가슴 속 뻥 뚫린 구멍은 메울 수 없었습니다. 다른 멀티버스 영화와 달리, 가능성이 지닌 힘은 우주를 멸망으로 몰아가는 허무를 메울 수 없는 겁니다.

 

3. 무한한 가능성의 우주를 거쳐 만난, 지금 이 순간에 다정함을

역설적이게도 조부 투파키를 막아낸 사람은 최악의 가능성을 지닌 주인공 에블린입니다. 알파 우주의 웨이먼드가 보았을 때 특출난 장점도 없고, 특별한 재능도 없는 사람. 허술한 영어로 세금 신고를 하다, 가족끼리 즐기기 위해 산 노래방 기계가 잘못 접수되어 국세청의 조사까지 받게 된 이민자. 그런데 그녀가 지닌 진정한 무기는 영화 시작부터 관객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베이글 속을 채우는 듯한 가족의 모습

바로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보여주는, 노래방 기계로 단란한 시간을 보내는 에블린 가족의 모습입니다. 골치 아픈 사건을 만든 노래방 기계이지만 남편과 에블린의 진실된 재능은 바로 다른 우주의 자신을 소화해 내는 능력이 아니라 사랑이었던 겁니다.

현실의 문제가 너무나 벅차서 그렇지, 에블린은 본래 남편과 닮아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었음을 영화 내에서 몇 번이나 보여줍니다. 실패한 인생의 원인인 웨이먼드를 따라 미국으로 온 것도, 코인 세탁소를 힘들게 운영하며 딸을 낳은 것도, 의절한 아버지가 미국에 건너와도 보살펴 주는 것도, 설령 딸이 다중 우주를 멸망시킬 악이라 해도 죽일 수 없다 맞섰던 것도 에블린이 모든 순간, 모든 장소에서 사랑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최악의 가장 성공했던 알파 우주의 자신들도 가지지 못했던 재능입니다.

내가 아는 유일한 것은 우리가 친절해야 한다는 것이야. 제발, 친절하게 대해줘. 특히 우리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를 때.

내가 유일하게 아는 것은 우리 모두 다정해야 한다는 거야. 다정함을 보여줘. 특히 우리가 모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를 때 말이야.

남편인 웨이먼드는 순진한 사람이지만 바보는 아니었습니다. 지루한 세탁 과정을 기다리는 와중에도 사람들이 웃을 수 있게 인형 눈을 붙여 놓는다던가, 자신들을 조사하는 국세청 세무사에게도 미소가 가득한 모양의 쿠키를 건네주는 것. 그가 보인 다정함은 에블린이 다시 영수증을 정리해 제출할 기회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실제로 다정함은 다른 사람에게도 선의를 끌어내는 그의 전략적인 무기였습니다.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 에블린은 다른 차원에서 빌려온 기술들이 아니라, 다정함이라는 무기를 빌려옵니다. 남편이 장난삼아 붙이곤 했던 눈알을 이마 정중앙에 붙이고, 악당들에게 다정함을 베풉니다. 폭력에 친절로 응수하며, 싸움이 아닌 화해의 액션을 화려하게 펼쳐 보입니다. 모두가 다정해져서 우주를 가득 채울 수 있도록. 그 혼란마저 이해하고 껴안을 수 있도록.

검은 베이글과 정반대로 가운데는 검고, 겉은 하얀 인형 눈. 마치 다정함이 허무를 채우듯이,

사랑이 조부 투파키의 베이글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모든 가능성을 경험할 수 있는 조부 투파키에게 우주는 ‘이제 더 기대할 것이 없는’ 공간입니다. 결국 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라 차갑게 식어 멸망할 것을 알기에 합리적인 결론으로 죽음에 이르고자 합니다. 그럼에도 조부 투파키가 주인공 에블린을 찾아온 것은 필연적으로 찾아올 ‘죽음’의 우주에서 벗어나 ‘나를 혼자 두지 말아 달라’ ‘나를 사랑해 달라’는 가장 절박한 의지를 표현하고, 자신이 모르는 일말의 기대감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베이글의 빈 속을 채워줄지도 모르는 단 한 명의 사람을 찾아.

누군가 조부 투파키의 우주를 열고, 누군가가 이 구멍을 채워주어야 합니다. 바로 눈알로 상징되는 다정함만이 이 구멍을 채울 수 있습니다. 에블린이 경험한 알파 세계가 지닌 것 같은 무한한 가능성이 아니라, 바로 다정함이요.

 

4. 우주마저 건널 수 있는 티끌 같은 다정함을 가지기를

다양한 욕망과 빚어내는 자아가 꿈틀대는 현대 사회입니다. ‘멀티 페르소나’, ‘부캐’, ‘N잡러’라는 말들처럼 누구나 저마다의 우주를 열심히 건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우주에는 자신만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타인의 우주 역시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혼란스럽습니다. 조부 투파키가 어머니의, 할아버지의 요구에 맞춰지듯이 자신의 욕망과 사회가 주입한 욕망, 타인의 기대 사이에서 끊임없이 충돌하고 공존합니다. 타인의 욕망과 자신의 욕망 사이를 헤매는 우리의 머릿속이 곧 멀티버스입니다. 그렇게 수많은 욕망 사이를 점프(jump)하고 분열하다 보면, 결국 우리의 자아를 상실하고 검은 베이글을 빚어낼지도 모릅니다.

나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선 타인의 마음에 존재하는 나와, 내 마음에 존재하는 타인을 꺼내 함께 비교해 볼 수밖에 없습니다. 방법은 매우 간단합니다. 조이가 에블린이 자신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기를 원하는 것처럼, 상대방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즉 먼저 상대방에게 다가가 다정함을 건네고, 상대방의 다정함을 이끌어 내는 것. 그렇게 서로의 빈틈을 채워주는 관계를 구축하는 것.

손가락으로 핫도그를 먹고 발로 피아노를 치는 우주가 있듯, 우주에서는 모든 것이 일어날 수 있어!’

이렇게 열린 마음으로 세상에 친절을 베푸는 것. 다정함이 빈틈을 채우자, 우주는 모든 것이 중요한 공간으로 탈바꿈합니다. 나의 욕망만큼이나 너의 욕망 역시 중요하고, 그 수많은 가능성을 건너 우연히 우리가 함께 있다는 사실이요.

때문에 사랑합시다. 사소하고 미미한 것들을. 언제든지 다정함을 베풀 수 있도록. 우주의 거대한 무의미함에 맞서 절망하지 않고, 사랑을 서로 놓지 않을 수 있도록. 당신과 내가 그 수많은 가능성을 건너 여기 함께 있다는 사실을 축복하며, 서로의 베이글을 채울 수 있게.

원문: 소라소라빵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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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제사상에는 무슨 파스타를 올릴까? https://ppss.kr/archives/257471 Thu, 13 Oct 2022 04:46:01 +0000 http://3.36.87.144/?p=257471

파스타의 계절이다. 요즘 파스타에 꽂혀 1일 1 파스타 중이다. 별별 모양과 길이의 파스타면, 각종 소스와 향신료를 사들이느라 바쁘다. 거기에 애호박이나 가지 같은 제철 채소와 새우, 베이컨처럼 부재료 다르게 조합해 매일 다른 파스타를 먹는다.

늦은 아침과 이른 점심 사이, 오늘의 아점 역시 파스타였다. 일단 파스타면을 삶을 물을 담은 냄비를 올리고 물 끓기를 기다리는 동안 욕실로 가서 손을 씻었다. 비누 거품으로 손 구석구석을 비비며 냉장고 속에서 대기 중인 채소의 목록을 떠올려 봤다. 오늘의 선택은 보라색 가지, 새송이버섯, 빨간 파프리카 그리고 양파!

정확한 메뉴명은 ‘여름 채소 왕창 오일 파스타’로 정했다.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냉장고 문을 여는 나를 향해 엄마가 말했다.

나도 먹을래. 넉넉하게 만들어.

엄마는 일찌감치 아침을 드셨고, 아직 다 소화되긴 이른 시간이었다. 당연히 내 몫의 1인분을 생각했던 내게 날아든 엄마의 주문에 살짝 놀랐다.

완벽한 1인분의 파스타를 목표로 요리를 시작했지만 결국 늘 그렇듯 여유(?) 있게 만든 파스타를 엄마가 도와주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별도의 주문을 하시는 걸 보면 지난번 ‘새우 머리 왕창 오일 파스타’의 여운이 길었나 보다.

차례를 지내지 않은 추석을 그냥 보내기 아쉬워 미리 햇 흰다리 새우를 주문했었다. 오동통한 새우를 찜 쪄 먹고, 머리만 곱게 따서 놔뒀다가 오일 파스타를 만들었다. 파스타 면만큼이나 새우 머리가 가득했던 오일 파스타의 감칠맛은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맛이었다. 그래서 일흔 넘은 엄마가 파스타의 세계로 입성한 걸까? 아니면 대기업의 석학들이 머리를 맞대고 연구한 끝에 만든 토마토소스, 투움바 소스, 바질 크림소스, 로제 소스, 콰트로 치즈 크림소스 덕분일까?

주먹만큼 남았던 꽈배기 모양의 푸실리를 봉지째 털어 넣고, 새로 산 튜브 모양의 리가토니도 한주먹 넣었다. 8분 동안 삶은 푸실리를 건져내고, 좀 더 두꺼운 리가토니는 6분 후에 건졌다.

올리브 오일을 두른 팬에 편으로 썬 마늘을 볶다가 한입 크기로 자른 채소들, 삶은 면 순으로 넣고 볶는다. 뻑뻑한 감이 있어 미리 받아 뒀던 면수를 한 국자 넣으니 촉촉해졌다. 까만 후추와 빨간 페퍼론치노 가루와 초록 파슬리 가루를 뿌린 후 뒤적여 맛을 봤다.

파스타를 삶을 때 물에 소금을 넣었으니 간이 있긴 했지만 뭔가 부족했다. 냉장고에서 잠자고 있던 참치액을 팬 안쪽으로 한 바퀴 휙 두르며 생각했다. 음식에 대한 자부심 강한 이탈리아 사람들이 파스타에 참치액을 넣는 한국인을 보면 무슨 말을 할까?

피클 대신 엄마가 며칠 전에 만든 양파장아찌만 꺼내 상을 차렸다. 늦은 아침이자 이른 점심 식사. 엄마와 나란히 앉아 파스타를 먹다가 내 특기가 또 발동했다. 칭찬받고 싶을 때는 옆구리 찔러 생색내기.

엄마, 딸 참 잘 뒀네. 집안에 편히 앉아 이탈리아 음식을 다 먹고. 이탈리아에서 공수한 파스타 면에 이탈리아산 올리브 오일까지 들어갔으니 여기가 이탈리아지 뭐.

그러네. 여기가 이탈리아네.

근데 엄마 파스타 좋아했어?

옛날에는 맨 밀가루 덩어린 줄 알았어. 파스타를 뭐 먹어 봤어야지. 근데 먹어 보니 맛있네.

아빠가 파스타 사준 적 없어?

아빠는 파스타가 뭔지도 모를걸?

그럼 엄마는 무슨 파스타가 좋아? 오일? 크림? 토마토?

(엄마는 고민 중)

쉽게 답을 말하지 못하는 엄마를 기다리다 못해 엉뚱한 말로 재촉했다.

나중에 엄마 제사상에 파스타 올릴게. 어떤 파스타?

며칠 전 들었던 팟캐스트의 한 대목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진행자는 기일이나 명절 즈음, 수년 전 돌아가신 아빠를 뵈러 묘소에 갈 때면 꼭 챙겨가는 게 있다고 했다. 살아생전 술, 담배도 안 하신 아빠가 좋아하셨다는 노란 맥심 커피 믹스. 보온병에 뜨거운 물을 챙겨가 술 대신 달달한 커피를 올린다고 했다.

연세가 있으시니, 엄마가 저세상에 가실 때가 언제 와도 이상하지 않다. 돌아가신 후에 상다리 부러지게 제사상 차리는 것보다 살아생전 좋아하는 음식을 같이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함께 나누는 게 더 가치 있는 일이라 믿는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우리 집 한정 ‘제사 간소화 추진 위원회’ 회장을 자청했으니 엄마의 제사도 아마 옛날 방식으로는 안 할 거다. 어렴풋이 그때를 생각해 보면 파스타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 좋아. 딸이 한 건 뭐든.

본인의 입맛보다는 남편과 자식들의 취향이 먼저였던 엄마. 딸이 만든 파스타 한 접시를 다 비울 때까지도 엄마는 끝내 한 종류의 파스타를 정하진 못하셨다. 살아 계시는 동안 다양한 종류의 파스타를 자주 드시다 보면 엄마의 선명한 파스타 취향이 생기지 않을까? 일흔 넘어 파스타 맛에 눈을 뜨셨으니 발전할 날만 남았다.

먹은 그릇을 치우며 딸의 정성과 애정이 듬뿍 들어간 홈메이드 파스타도 좋지만, 종종 엄마의 파스타 세계를 넓혀줄 전문적인 셰프의 손길 듬뿍 담긴 파스타를 만나러 가야겠다 다짐했다. 엄마와 내가 함께 파스타를 먹을 날이 얼마나 남았을지 아무도 모르니까.

원문: 호사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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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라”로 한 뼘 넓어진 아빠의 커피 세계 https://ppss.kr/archives/256922 Thu, 29 Sep 2022 06:20:01 +0000 http://3.36.87.144/?p=256922 비가 오던 점심, 온종일 집에 있느라 답답해하던 부모님을 모시고 집 근처 작은 손칼국수 집으로 향했다. 식당에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무섭게 쏟아지던 비는 푸짐했던 칼국수가 바닥을 보일 때쯤엔 어느새 잠잠해졌다. 내가 계산을 하는 사이 습관처럼 카운터 앞 커피 자판기의 버튼을 누르려는 아빠를 급하게 말렸다.

요 앞에 카페 새로 생겼던데 거기 가서 커피 마시자.

어디? 코너 돌면 있는 노란 간판?

거기도 새로 카페 생겼어? 거기 있는 건 또 언제 보셨대?

개업과 폐업이 회전목마처럼 빙빙 도는 동네의 작은 가게 사정은, 나보다 아빠가 빠삭하다. 내가 가고자 했던 카페는 칼국숫집에서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되는 A라는 곳이었고, 아빠가 생각한 B카페는 칼국숫집에서 2분 거리의 전철 철로가 이어진 골목 쪽이었다.

유동 인구도 많지 않은 주택가에도 구석구석 카페가 포화상태다. 새 카페 탐색이 취미인 내게는 더없는 즐거움이지만, 정글 같은 자영업의 세계에 뛰어든 카페 사장님들에게는 혹독한 현실이었다. 각자 차별화된 시그니처 메뉴를 무기로 피 튀기는 생존 전쟁 중이었다.

내가 A 카페를 가고 싶었던 이유는 직접 굽는 소금빵 때문이었다. 고소한 버터를 잔뜩 품고 노릇 바싹하게 구워진 빵 위에 보석처럼 박힌 하얀 소금이 포인트인 소금 빵 사진을 보는 순간, 마음속 ‘언젠가 가고 싶은 카페 리스트’에 한 자리를 차지했다. 이제 번화가 대형 빵집이나 유명한 카페에 가지 않아도 집 근처에서 소금빵을 먹을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야심만만하게 엄마 아빠를 모시고 카페에 들어섰을 때, 자그마한 카페를 가득 채운 고소한 빵 냄새를 맡았다. 나도, 부모님도 마시는 커피는 정해져 있으니 일단 부모님을 적당한 자리에 안내하고 카운터로 향했다. 메뉴판에 눈길도 주지 않고 쇼케이스에서 조용히 잠자고 있는 소금빵을 가리키며 주문을 시작했다.

일단, 소금빵 두 개랑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샷 하나 뺀 연한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 차가운 캐러멜 마키아토 한 잔이요.

소금 빵을 제외하면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나, 연하고 따뜻한 아메리카노는 엄마, 아이스 캐러멜 마키아또는 아빠 몫이었다. 주문을 듣던 직원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진다.

저, 손님. 저희는 캐러멜 마키아토가 없어요.

어? 그럼 아포가토요.

아, 그것도 없…

그럼 비슷한 달달한 커피는 뭐가 있을까요?

저희는 바닐라 라테가 맛있어요. 파우더가 아니라 진짜 바닐라 빈이 들어가거든요.

주변에 유독 마니아가 많은 음료, 바닐라 라떼. 직원은 아빠 몫으로 그 커피를 추천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아바라'(아이스 바닐라 라테)를 시키던 지인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대체 뭔 맛인가 싶어서 한 번 시도해 보긴 했지만, 맛도 향도 다디달던 아바라는 내 취향은 아니었다.

일단 아빠의 최애 음료, 캐러멜 마키아토도 아포가토도 없다는 상황을 설명하고 (동의를 가장한) 통보를 한 후 아이스 바닐라 라테를 주문했다. 잠시 후 고소한 냄새를 폴폴 풍기는 소금빵과 명도가 다른 석 잔의 커피가 우리 앞에 놓였다.

커피 마신 양과 횟수를 따지면 우리 가족 중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지독한 맥X 커피 믹스 중독자, 아빠의 반응이 궁금했다. 내 커피는 일단 제쳐두고 난생처음 아바라를 영접하는 아빠의 표정에 집중했다. 조심조심 빨대로 아바라를 쭉 들이키자마자 아빠의 동공이 터질 듯 커졌다.

어? 이거 뭐냐?

아바라. 아이스 바닐라 라테. 어때?

음… 괜찮네.

(※ 아빠의 ‘괜찮네’는 ‘맛있네’와 같은 의미다. 만족도 90 이상일 때 쓰는 최상급의 표현)

아포가토보다?

응.

캐러멜 마키아토 보다?

그려.

이제 아포가토 말고, 캐러멜 마키아토 말고 이거 드시겠네.

그래서 이거 이름 뭐라고? 아…  아… 바…

아이스 바닐라 라테. 아바라. 나중에 카페 가면 이렇게 말하면 직원이 깜짝 놀랄걸? 머리 하얀 할아버지가 아바라 시킨다고 멋있다고 할 거야.

아바라로 아빠의 커피 세계가 또 한 뼘 넓어졌다. 아침저녁 물처럼 마시는 노란색 맥X 커피 믹스에서 아포가토로. 다시 아포가토에서 캐러멜 마키아토로. 예전에 관련 글을 쓸 때까지만 해도 아빠 인생에 가장 맛있는 커피는 캐러멜 마키아토로 마감할 줄 알았다.

하지만 딸의 섣부른 생각은 아바라로 와장창 깨졌다. 일찌감치 바닥을 보이고 얼음만 덩그러니 남은 잔의 빨대를 연신 홀짝이며 바닥의 아바라까지 흡입하던 아빠에게 물었다.

그 커피 이름이 뭐라고?

아…아… 바…

아바라. 아이스 바닐라 라테.

캐러멜 마키아토도 겨우 외웠어. 할머니 산소 벌초하러 시골 가서 끝내고 카페 갔더니 고모들이 ‘오빠는 그 나이에 캐러멜 마키아토도 아냐’고 놀라더라. 이제 ‘이거’ 주문하면 고모들 놀라 자빠지겠다.

아빠는 우쭐하며 동년배와 격이 다른 커피 취향을 자랑한다. 그 모습을 보며 적지 않은 비용과 시간을 투자한 보람이 느낀다. 카페를 나와 10분도 안 될 거리의 집으로 향하는 길에 한 번 더 물었다. ‘아바, 아바…’만 연신 내뱉는 아빠. 끝까지 아바라를 완벽하게 말하지 못했다.

머지않아 여든이 될 할아버지의 머리에 아바라, 세 음절이 박힐 때까지 수없는 투자와 훈련이 필요하다. 햇볕은 따뜻하고, 바람은 선선한 가을. 아바라의 묘미를 제대로 느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여든 살이 가까운 아빠만을 위한 ‘아바라 특훈’의 시즌이 시작됐다.

원문: 호사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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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스트 부모 밑에서 자랐다면, 들어왔던 말을 모두 부정하세요 https://ppss.kr/archives/255702 Mon, 29 Aug 2022 04:07:05 +0000 http://3.36.87.144/?p=255702 자존감 상담을 하다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라나는 과정에서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자존감이 떨어졌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거의 90% 이상입니다. 보통 부모님이 준 잘못된 가치관을 억지로 자신의 삶에 적용하며 살다가, 그 가치관이 맞지 않아 스스로가 가치 없는 존재라는 인식을 갖게 되면서 자존감이 떨어지는 것이죠.

그중에서도 가장 힘들고 어렵고 안타까운 케이스는 부모님이 나르시시스트인 경우입니다. 오늘은 나르시시스트 부모님의 특징과, 그에 맞서 가져야 할 마인드셋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르시시스트 부모님의 특징

나르시시스트 부모님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 자식이 아무리 좋은 성과를 내도 인정하거나 칭찬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 자식을 오랫동안 무시하고 멸시한다.
  • 작은 잘못에도 크게 비난한다.
  • 힘들어도 절대로 자식 편이 되어주지 않는다. 문제가 발생하면 오히려 자식 탓을 하는 경우가 많다.
  • 자신의 희생을 크게 인식한다.
  • 자신의 잘못은 축소하거나 잊어버리거나 부정한다.
  • 끊임없이 자식에게 금전이나 관심 등을 요구한다.
  • 자식에게 지원과 도움을 받아도 감사함을 표현하지 않는다.
  • 주위의 시선에 매우 신경 쓴다.
  • 부모님 주위에 믿고 신뢰할 관계가 별로 없다.
  • (종교가 있다면) 종교 활동에 깊게 매진하며, 종교의 교리를 제멋대로 가져와 자식을 비난한다.
  • 자식의 의견을 무시한다. 자식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자식의 인생 계획까지 세워 놓는 경우가 있다.

저는 이런 부모님을 둔 분들을 많이 봤습니다. 그들은 신기하리만큼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낮은 자존감으로 힘겨운 삶을 살고 있었지요.

우리가 가진 초기 자존감, 즉 ‘나는 가치가 있고, 사랑받을 수 있다’는 인식은 기본적으로 부모님의 양육 태도에 의해서 만들어집니다. 나르시시스트 부모님에 의해서 자랐을 경우에는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가치 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없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도움받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가 충분히 괜찮고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라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지요.

 

그러므로, 모든 것을 부정하라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만약 위의 리스트에 해당되는 부모님에게서 자랐다면, 이 말을 꼭 해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모든 판단’을 부정하세요.

특히 자신의 능력·가치·성격 등에 대한 모든 평가는 100% 무시하는 것이 좋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을 잘 해냈어도 무시당했을 것입니다. 그나마 듣는 표현이라고는 운이 좋았다거나, 충분히 잘 해내지 못했다는 이야기일 겁니다. 그다지 현명하지 못하다거나, 지나치게 예민하다는 평가도 많이 들었을 수 있겠지요. 그 표현을 크고 작게 받아들이고 내면화했을 것입니다.

매번 혼나기만 했나요?

하지만 이러한 평가들은 제대로 된 객관적인 평가가 아닙니다. 부모님이 오랫동안 여러분을 키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들을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나르시시스트 부모님은 스스로의 그 특성으로 인해, 자식인 여러분들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판단하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평가를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 평가는 신뢰할 수 없지요.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자기 외에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공격하고 시기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자신은 뛰어나고 잘난 사람이기 때문에, 남들을 위해 희생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타인에 대해서 객관적인 판단을 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자식일지라도 말이지요. 오히려 통제해야 하며, 나를 위해 힘써야 하는 미숙한 존재로 볼 뿐이지요.

따라서 여러분들이 가져야 할 태도는 부모님의 말이 사실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거절하기 시작해야 한다

물론 쉽지 않을 것입니다. 주 양육자가 한 여러분에 대한 평가와 판단은 지나치게 오랫동안 깊은 수준으로 이어져 왔을 테니까요. 게다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를 키워준 사람이 하는 평가를 온전히 무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부모님의 평가를 잊고 내 주위에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의 평가를 살펴보세요. 혹시 부모님이 말한 것과 너무 다르지는 않나요? 부모님에게는 전혀 듣지 못한 칭찬과 인정의 표현을 들어보지는 않았나요? 여러분의 연인은 좋은 말들을 쏟아주지 않나요?

같은 사람인데 왜 나는 부모님에게만 나쁜 자식인가?

그렇다면 이는 여러분이 그동안 잘못된 평가를 받아왔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여러분은 부모님을 떠나 다시 자신을 재평가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정말 문제가 많고 부족한 존재라면, 왜 부모가 아닌 다른 사람들은 여러분들을 좋게 평가할까요? 나를 위해 그냥 해주는 말 같나요? 나란 사람에게 잘 보여서 뭘 얻을 수 있는데요?

 

재평가를 위해 독립할 것

하지만 누군가가 지속적으로 여러분이 못났다고 이야기한다면, 여러분은 결국 그 평가를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는 못났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괜찮다고 말한다면, 평가를 유보하게 되겠지요. 계속해서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듣는다면, 스스로를 좋은 사람이라 여기게 될 것입니다.

이를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여러분이 물리적으로 부모님과 떨어져야만 스스로에 대한 평가를 조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평가를 매 순간 내리는 사람을 떠나지 않고서는 여러분은 스스로를 방어해 내기가 힘들 겁니다.

특히 그 사람이 나르시시스트인 부모님이라면 더더욱 방어하기가 힘들 것입니다. 그들에겐 가스라이팅은 일상이기 때문이죠. 여러분이 마인드셋을 뚝딱 고친다고 그들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는 없는 거고요.

무조건 멀리 떨어져야 한다

여기서 이 물리적이라 함은, 부모님과의 교류를 온전히 끊는 것을 말합니다. 사는 곳은 당연히 멀어져야 하고, 연락을 줄이거나 차단하며, 금전 관계도 정리해야 합니다. (물론 영원히 그러라는 뜻은 아닙니다)

단적으로, 여러분이 부모님과 교류하는 시간만큼 여러분의 자존감이 떨어지는 시간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물리적으로 충분히 독립했다면 정서적으로 독립해야 합니다. 여기서 정서적 독립이라 함은 ‘부모님은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나를 사랑할 수 없는 존재’라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뜻합니다.

어쩌면 지금까지도 여러분은 노력하면 부모님으로부터 따뜻한 애정의 한마디를 들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무리 노력해도 부모님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심리적인 문제는 스스로가 문제가 있다고 여길 때에만 바뀔 수 있습니다. 슬프게도 부모님은 이미 나이가 들어 마음이 굳어서, 바뀌실 여지가 거의 없습니다.

부모는 잘 변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세요. 이제라도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고, 가치 있게 봐줄 사람들로 부모님의 빈자리를 채워 나가야 합니다. 친구와 애인은 그 자리를 100%까지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채울 수 있습니다.

그때가 되어서야 여러분은 스스로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 어떤 능력이 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스스로가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이는 곧 충분히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요.

 

요약정리

나르시시스트 부모님을 두었다면 그들의 모든 평가를 무시하세요. 당신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과 함께하며,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와 판단을 다시 시작하세요.

원문: 멘탈경험디자이너 조명국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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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상: 엄마는 당신의 그런 식사를 원치 않는다 https://ppss.kr/archives/250103 Mon, 28 Feb 2022 09:04:57 +0000 http://3.36.87.144/?p=250103 낮잠에서 깼을 때, 미역국 냄새가 났다. 어느 집에서 미역국을 끓이는 모양이었다. 짭조름한 냄새에 식욕이 동했다. 그러나 미역국을 사먹을 데는 없었다. 인스턴트 미역국도 먹을 만했지만 재료를 아끼지 않은 찐한 국물을 들이키며 큼직한 미역을 우걱우걱 씹어 먹던 기억을 충족시켜줄 정도는 아니었다. 입 안에 기록된 그리움이 위장을 긁어댔다. 그날이 생일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생일은 명절만큼 번거롭다. 태어나고 싶었던 적도 없고, 태어나려 선택한 적도 없고, 태어나기 위해 노력한 적도 없이 엄마의 산통에 무임승차한 주제에 존재의 영광을 독점하고자 하는 작태는 뻔뻔했다. 물론 명분이 무엇이든 타인의 축하와 호의를 받는 일은 즐겁다. 그러나 받은 만큼 돌려주는 일이 귀찮다. 어떤 가격대에서 무슨 선물을 해야 할지 고르는 것부터 골치다. 사실 그다지 축하의 마음도 들지 않는다. 관행을 의무적으로 따를 뿐이다. 나는 이 지긋지긋한 상부상조를 폐기한 지 20년도 넘었다.

어쩌면 인주부조화일지도 모른다. 아무도 내 생일을 축하하지 않기 때문에 축하를 주고받지 않겠다고 선수 치는 것이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고깝게 보는 것도 사랑받지 못하면 태어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돌려 말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노랫말에 따르면 생일은 태어난 목적을 확인하는 날이다. 그러나 사랑받기 위해 생일을 넌지시 알리는 것은 지질하고, 은근히 기대하는 것은 구차하다.

생일축하 초
사진출처: 픽사베이, diapicard

한때 생일마다 쇼핑몰에서 보내온 생일 축하 쿠폰이 조롱처럼 느껴진 적도 있었다. 돈 몇 천 원에 ‘당신은 소비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듣는다고 생각했다. 막상 요즘은 그들조차 입 닫고 있으니 허전하다. 공허함과 서운함이 복합된 마음 구멍이 미약하게라도 감지되는 것을 보면 사랑받는 것의 원초적 욕구가 아직은 유효한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나이 들수록 작년에 왔던 생일이 죽지도 않고 또 와 애정을 상호 구걸하는 행태는 거추장스럽다.

자취가 오래될수록 이 가련한 인지부조화는 강화된다. 굳이 궤변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별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축하를 주고받는 것이 감정 낭비라는 것을 경험으로 깨달았다. 학생 때야 친구들 사이에서 상호 채무 관계의 연쇄를 통해 우정을 강화했다. 그러나 취준생 때는 박살 난 자존감 때문에 사람 만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취업해서는 친구들 만나기가 어려워지고, 직장 동료와는 상대가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릴 관계임에도 존재를 기념하는 일은 과해서 피곤했다. 생일을 챙기던 사람들도 안 주고 안 받는 것이 속편해진다. 나를 위한 선물 정도에서 자신과 타협하거나 그나마도 생략한다.

대상 자체를 사랑하는 주체는 반려견과 부모님뿐이다. 반려견은 주인이 못생기든, 뚱뚱하든, 늙었든, 가난하든 꼬리를 쳐댄다. 부모들은 한술 더 뜬다. 반려견의 사랑은 자신에게 애정과 먹이를 주는 주인의 행위에 대한 반작용이지만,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무조건이어서 특급이다. 그래서 나도 엄마 생신만큼은 챙긴다. 예전에는 용돈만 드리다가 요즘은 작은 선물을 추가한다. 재난지원금이 남아 창고 정리하는 등산복을 사 드린 적 있었다. 아침 운동하실 때 막 입을 옷이었다. 엄마는 그 싸구려 옷을 ‘아들이 사 준 옷’이라며 아끼셨다. 그게 뭐라고, 내가 뭐라고, 주는 내가 존재 가치를 곱절로 돌려받는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내 생일축하는 산통과 키워준 채무에 대한 상환인지 엄마 자체에 대한 축하인지는 모르겠다.

늙은 자취생의 생일을 챙기는 것은 더 늙어버린 어미뿐이다. 내가 엄마에게 용돈을 드리는데, 엄마는 내 생일에 밥값을 입금해주셨다. 그날만큼은 맛있는 것을 사 먹으라신다. 내 끼니에 대한 엄마의 진심을 알고 있으므로 억지로라도 맛있는 걸 사 먹으려 한다. 물론, 고작 치킨이었다. 함께 먹을 사람도 없어 퇴근 후나 휴일에 혼자 뜯었다. 생일의 의미가 사라진 지 오래인데, 생일이어야 해서 이날의 치킨은 괜히 칙칙했지만 엄마는 당신이 보내 준 돈으로 내가 ‘고기’를 먹었다는 사실에 흡족해 하셨다.

올해는 생일에 맞춰 생일 음식을 택배로 보내주셨다. 누런 테이프로 이음새를 꽁꽁 싸맨 스티로폼 상자 안에 잡곡밥과 미역국이 있었다. 밥은 락앤락 통에 6-7인분 정도 되었고, 얼린 미역국 두 봉지는 각각 세 번 정도 밥 말아 먹을 정도는 되었다. 쿠킹 호일로 한 마리씩 싼 조기도 세 마리 있었다. 생선은 어렸을 때도 거의 안 먹어 커서도 즐겨 먹지 않는데도,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 생선을 못 먹인 것이 마음이 쓰이신 모양이었다. 사과 세 개, 귤 여남은 개, 샤인머스켓 한 송이도 있어 대여섯 끼의 입가심으로 충분했다. 음식 사이를 알밤이 메꿨다. 집 근처에 야생 밤나무 몇 그루가 있는데 거기서 주운 거라고 하셨다.

생일 전날 밤, 냉동실에 넣어둔 밥을 밥솥에 넣고, 얼린 미역국을 상온에 꺼내 두었다. 다음 날 아침, 밥은 따뜻해져 있었고, 내 방에는 짭조름한 냄새가 가득해졌다. 평소 한 끼는 미역국에 밥을 말아 김치 하나면 충분했지만, 이날은 조기도 굽고, 과일도 미리 씻어서 상에 올렸다. 겨우 밥 한 끼, 아무렇게나 먹어도 상관없는 겨우 밥 한 끼, 뭐 이리 번거로워야 하나 하면서도 내 한 끼를 위한 엄마의 수고를 생각했다. 상차림을 사진을 찍어 엄마에게 보냈다.

엄마는 잘했다고 했다. 밥을 먹는 것이 잘한 것일 수도 있는 멍청한 사랑도 있다. 엄마는 나보다 나를 더 아끼는 사람이다. 아니, 나는 애초에 나를 아끼지 않았다. 아끼는 사람에게 허술한 밥을 먹이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자취가 오래되며 나 스스로를 함부로 대하는 것에 지나치게 익숙해져버렸다. 겨우 밥 한 끼가 아니라 무려 밥 한 끼여야 했다. 최소한 생일만큼은 엄마가 걱정하지 않을 정도로 먹어야 했다. 그것이 태어난 사람이 지녀야 할 자신에 대한 예의다, 고 엄마가 말씀하신 듯했다.

미역국에 밥을 말아 먹었다. 조기 구이는 없어도 괜찮았지만 한 마리를 다 먹었다. 내게 미역국 냄새를 흘린 집에도 나의 미역국 냄새와 조기 구이 냄새가 건너갔으면 좋겠다. 당신만 먹는 게 아니라고. 나도 ‘무려 밥 한 끼’를 하는 사람이라고 자랑하고 싶었다.


원문: 하루오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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