ㅍㅍㅅㅅ https://ppss.kr 필자와 독자의 경계가 없는 이슈 큐레이팅 매거진 Tue, 08 Jul 2025 02:07:52 +0000 ko-KR hourly 1 https://wordpress.org/?v=5.8.11 https://ppss.kr/wp-content/uploads/2015/07/ppss-100x100.png ㅍㅍㅅㅅ https://ppss.kr 32 32 〈케이팝 데몬 헌터스〉 재미와 의미, 퀄리티 모두 갖춘 지금의 KPOP! https://ppss.kr/archives/266148 Tue, 08 Jul 2025 02:07:52 +0000 http://3.36.87.144/?p=266148 케이팝 데몬 헌터스 (KPop Demon Hunters, 2025)

© netflix더 이상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이른바 ‘K’가 앞서는 드라마와 영화들이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됐다. 여기에 미국 이민 2~3세대가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며 만든 여러 작품들도 전 세계적으로 작품성을 인정받는 일이 잦아졌다. 더 이상 KPOP 아이돌이 빌보드 차트를 석권해도 놀라지 않는 시대지만 뭔가 아쉬운 (어쩌면 배부른) 부분도 있었다. 이를테면 디즈니 애니메이션 〈메이의 새빨간 비밀 (TURNING RED〉 같은 작품을 보며 느꼈던 점이다.

이 작품을 보며 부러웠던 점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글로벌한 디즈니 작품을 통해 중국의 전통적인 정서를 부담스럽지 않게 녹여냈다는 점이다. 그리고 어쩌면 두 번째가 좀 더 부러운 점일지도 모르겠는데, 그건 여러 아시아인들을 애니메이션으로 묘사하는 방식이 매우 현실적이고 자연스러웠다는 점이다.

〈메이의 새빨간 비밀〉은 주인공인 메이를 비롯한 아시아인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에 더해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들의 체형을 현실적으로 반영한 점이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평범한 체형을 애니메이션에서 접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경험인지 비로소 알 수 있었던 작품이기도 했다).

© netflix

이 작품을 보며 우리도 보통의 한국인 얼굴과 체형이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을 전 세계를 상대로 보게 될 날을 고대했던 것 같다. 더불어 미국 내에서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애니메이션들 중 노래(싱어롱)의 임팩트가 큰 작품들이 적지 않다.

내가 아이를 통해 접했던 작품들 가운데 〈마이 리틀 포니〉 같은 애니메이션 작품도 꽤 수준 높은 음악들이 수록되었는데, 음악으로 인해 이 작품에 역으로 유입되는 아이들도 적지 않을 정도로 완성도 높은 음악과 시퀀스가 돋보였다 (앞서 소개했던 〈메이의 새빨간 비밀〉 역시 빌리 아일리시와 그의 오빠 피니어스 오코넬이 참여한 음악이 아주 인상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아이들에게 언어보다 장벽이 낮은 음악을 내세워 빠르게 캐릭터와 동화되게 만드는데, 그 음악의 수준이 어린이용 애니메이션으로 남기엔 뛰어난 곡들이 많았다.

© netflix

아이러니하지만 솔직히 ‘우리도 이런 작품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는 것은 그런 바람을 모두 충족시킨 작품을 보고 나서야 알게 됐다. 바로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 (KPop Demon Hunters, 2025)〉가 그 작품이다.

제목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케이팝 그룹으로 분한 데몬 헌터스가 역시 케이팝 그룹으로 분한 데몬들과 대립한다는 이야기로 초등학생부터 어른까지 쉽게 즐길 수 있는 대중적 작품이다. 우리에게는 익숙한 서울 곳곳의 장소를 배경으로(남산 같은 실제 장소는 물론 실제가 아니더라도 서울 시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현실적인 장소들이 등장한다) 우리에게도 이제는 크게 어색하지 않은 악귀와 퇴마라는 주제를 간결하게 담아냈다.

© netflix

이 작품의 성공요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핵심은 역시 KPOP이다. 그저 인기에 순응해 그럴듯한 KPOP 아이돌과 음악을 묘사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KPOP에 가장 대표적인 프로듀서 중 한 명인 테디를 비롯한 더 블랙 레이블의 프로듀서들이 참여했고, 〈스우파〉로 유명한 잼리퍼블릭과 리정 등 댄서들이 직간접적으로 안무에 참여하기도 했다.

흉내내기가 아닌, 진짜 KPOP 아이돌 대하듯 만들어진 극 중 아이돌 ‘헌트릭스’와 저승사자 아이돌 ‘사자보이즈’의 춤과 노래는 공개 단 하루 만에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 정도로 KPOP의 정수를 (의외로) 제대로 담았다.

최근에는 플레이브 등 버츄얼그룹이 큰 인기를 얻고 있는 것처럼 실존하는 것의 경계가 점점 무의미해지고 있기 때문에, 헌트릭스와 사자보이즈에 대한 인기는 단순히 영화 속 캐릭터로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돌을 팬덤으로 진화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인다. 벌써부터 속편에 대한 팬들의 바람이 커지는 건 작품 자체의 매력도 있지만, 극 중 아이돌의 다음 공연을 보고 싶은 팬심이 더 클지도 모르겠다.

© netflix

PS 1. 몹시 경쟁이 심한 내 플레이리스트는 요 며칠 헌트릭스로 가득하다.

PS2. 몹시 경쟁이 심한 내 위시리스트에서 요새 가장 탑은 단연 극 중 호랑이 인형이다.

원문: 아쉬타카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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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리언 로물루스〉 새로운 세대를 위한 에이리언이 나타나다 https://ppss.kr/archives/266924 Fri, 30 Aug 2024 02:03:20 +0000 http://3.36.87.144/?p=266924 에이리언: 로물루스 (Alien: Romulus, 2024)

〈이블 데드〉의 리메이크작과 〈맨 인 더 다크〉 등 주로 공포 영화를 연출해 왔던 페데 알바레즈가 새로운 에이리언 영화인 〈에이리언 : 로물루스 (Alien: Romulus, 2024)〉를 만들었다.

〈에이리언〉 시리즈는 리들리 스콧의 프랜차이즈로, 정말 할 말도 많고 우여곡절도 많은 프랜차이즈다(※ 리들리 스콧은 이번 작품의 제작을 맡았다) 나 역시 전통의 1, 2편을 비롯해 일부 팬들에게 괴작이라고도 불리는 3, 4편도 그럭저럭 재미있게 보았다. 다시 원류로 돌아갔던 〈프로메테우스〉와 〈커버넌트〉도 좋아한다. 그러니 새로운 〈에이리언〉영화를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물루스〉는 1편과 2편 중간 정도의 시간선을 배경으로 한다. 그렇다는 건 올드 팬들에게는 반가울 디자인의 세계관이 펼쳐진다는 얘기다. 〈에이리언〉의 세트, 메카닉, 우주선, 에이리언 등 등장하는 모든 요소의 디자인은 그것만 따로 소개해도 이야깃거리가 넘쳐나는데, 이런 디자인의 세계관을 2024년의 스크린으로 만나본다는 것은 무척 반가운 일이다. 더군다나 새로운 이야기로 말이다.

© 20th Century Studios

하지만 〈로물루스〉의 구조 자체는 〈에이리언〉1편과 큰 덩어리가 같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기존 관객들에게 익숙한, 반복에 가까운 이야기다. 첫 장면만 봐도 어떻게 전개되어 마무리될지 쉽게 예상이 가능하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로물루스〉는 단 한 순간도 지루하거나 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유명한 프랜차이즈 영화가 리메이크되거나 새로운 옷을 입고 나설 때, 일반적으로 1세대 관객들은 반가움 이상의 감정을 느끼기 어려울 때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에이리언 : 로물루스〉는 인상적인 작품이다. 〈에이리언〉에 대해 잘 몰랐던 새로운 세대가 흥미를 갖기 충분한 동시에, 올드팬들 역시 반가움을 넘어서 또 한 번 새로운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에이리언〉시리즈의 여러 덕목 중에는 철학과 액션, 공포 등이 있다. 이중 ‘공포’에 집중한 것은 확실히 좋은 선택이었다. 〈로물루스〉는 오히려 심플해서 매력적이다.

이런 에이리언 영화가 나올 수 있었던 건, 반대로 이전에 여러 장르의 ‘에이리언’ 영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프랜차이는 수많은 호불호를 맞보며 복잡함을 과감하게 걷어낼 수 있었다. 반복이 될 수 있는 이야기도 새로운 세대에 맞춰 용기 있게 선택할 수 있었다.

아마도 10, 20대의 어린 관객들은 〈로물루스〉를 본 뒤 내가 처음으로 시고니 위버가 나왔던 〈에이리언〉을 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여러모로 걸작인 리들리 스콧과 제임스 카메론의 〈에이리언〉과 절대 비교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새로운 세대의 에이리언이 되기에는 충분한 영화이지 않을까?

원문: 아쉬타카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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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번, 모두가 성장하는 드라마 〈인사이드 아웃 2〉 https://ppss.kr/archives/266524 Mon, 29 Jul 2024 03:38:33 +0000 http://3.36.87.144/?p=266524
© Pixar

또 한 번 모두가 성장하는 드라마

〈인사이드 아웃 (Inside Out, 2015)〉은 정말 신선한 설정이었다. 머릿속 감정들이 캐릭터화되어 전개되는 설정은 ‘왜 이전에 이런 이야기가 없었을까?’ 싶을 정도로(물론 눈에 불을 켜고 찾다 보면 나오겠지만) 한편으론 단순하지만, 그래서 더 신선한 설정이었다. 처음 〈토이 스토리〉를 보았을 때 그랬던 것처럼(이 시리즈는 여러 면에서 ‘토이 스토리’와 닮아있다) 1편을 보고 나서는 이 이상 더 (재미있는) 속편이 있을까? 싶었는데, 〈인사이드 아웃 2〉는 적어도 전편에 비해 또 한 번 성장하고 발전하는 데에 성공했다. 마치 극 중 라일리가 사춘기를 겪으며 또 성큼 성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부모가 되고 나서부터는 이야기를 보는 시점이 그 이전과는 전혀 달라지기도 한다. 〈인사이드 아웃〉을 보고 나서 처음 들었던 생각은 ‘아, 감독이 어린 자녀가 있는데 자신의 일 때문에 별생각 없이 먼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나중에야 이사를 온 것이 자녀에게 큰 영향을(혹은 상처를) 주었겠구나 싶어 미안함에 자녀의 마음을 깊이 헤아려 보려 한 노력의 결과였구나’ 하는 것이었다. 〈인사이드 아웃 2〉 역시 자연스럽게 같은 시각으로 보게 됐다.

© Pixar

속편은 라일리가 사춘기를 맞아 새로운 감정들이 등장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중 가장 비중이 큰 감정은 ‘불안이’인데, 이 ‘불안이’를 그리는 방식이 정말 탁월했다.

보통의 경우라면 기존 기쁨이, 슬픔이 등의 감정(캐릭터)들이 주인공이자 일종의 우리 편 같은 포지션을 갖게 되고, 새롭게 등장한 감정들이 일종의 악당 역할을 맡곤 한다. 이 작품도 얼핏 보면 그런 대립 형태로 가는 듯한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순한 대립의 구도가 아니다. 불안이의 행동들이 사실은 다 잘해보려고 노력한 결과였다는 걸 알 수 있다. 잘해보려는 말과 행동들이 의도와 다르게 타인에게 잘 전달되지 않거나, 심지어 스스로에게조차 확신이 들지 않는 사춘기 시절의 묘사가 불안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압축적으로 전달된다.

다시 부모의 시점으로 돌아와 보자. 〈인사이드 아웃 2〉는 결국 부모가 모든 걸 해줄 수는 없으며, 아이가 스스로 커나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깨달음의 결과가 아닐까 싶다. 사실 이걸 모르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가능하면 모든 위험을 미리 차단해 주고, 좋은 것들만 보고 경험하게 해주고 싶기 마련이다. 모든 불안과 걱정에서 자유롭도록 도와주고 싶다. 그래서 ‘모든 걸 해줄 순 없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 부분은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의 사춘기라는 건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부모가 자녀를 또 한 걸음 멀리 떠나보내며 (원치 않는) 성장을 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 Pixar

그래서일까. 머리로는 알지만 벌써부터 가슴 한 켠이 아려오는, 마냥 행복할 수만은 없는 성장 드라마였다.

원문: 아쉬타카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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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오브 인터레스트〉: 악의 평범성, 그리고 지옥과의 거리 https://ppss.kr/archives/266522 Tue, 02 Jul 2024 04:37:55 +0000 http://3.36.87.144/?p=266522 존 오브 인터레스트 (The Zone of Interest, 2023)
악의 평범성, 그리고 지옥과의 거리

지난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그동안 아카데미에서는 주목받지 못했던 크리스토퍼 놀란이 <오펜하이머>를 통해 드디어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하는 일종의 ‘대관식’으로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꾸준히 화제와 논란이 되는 건 바로 <존 오브 인터레스트>로 장편국제영화상을 수상한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의 수상소감이다. 유대인 영국감독인 조나단 글레이저가 홀로코스트에 관한 이 영화로 수상하며 현재 진행 중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세력 하마스의 전쟁을 비판했기 때문이다.

이 전쟁으로 인해 희생된 무고한 이들을 언급하며 하마스는 물론 이스라엘 역시 비판한 이 수상소감은 대부분의 유대인들의 심기를 몹시 불편하게 했다. 특히 유대인들이 더 분노했던 이유는 ‘다른 것도 아니고 홀로코스트에 대한 영화로 수상하면서 이럴 수 있느냐’는 불만이었다. 이 논쟁은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찬반 균열을 일으킬 정도로 논란이 되었고 현재도 진행 중이다.

© A24. 이 영화는 세트가 아니라 실제 장소에서 촬영되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역사와 여러 영화, 드라마 등을 통해 접할 수 있었던 홀로코스트에 관한 영화다. 하지만 기존 작품들과는 전혀 다른 시선을 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기존 홀로코스트 영화들이 나치의 잔혹함과 악마성을 강조하기 위해 유대인들의 고통을 체험하고 들여다보는 피해자 중심의 작품이었다면, 이 작품은 철저하게 가해자들의 입장에서 아니 그들의 삶 자체에 집중하고 있다.

피해자가 존재하는 실제 역사나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면 사건을 묘사하는 것(감상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고 불편한 것이 사실이다. 자극적인 측면을 강조해 관객의 호기심과 욕망을 더 이끌어낼 수는 있을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그 (고통받는) 장면이 필요했는가를 따진다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설령 필요하더라도 더 나은 다른 방법을 찾으려는 노력이 충분했는지 되묻고 싶은 경우도 많다. 이런 면에서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보여주지 않으므로써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교과서 같은 작품이다.

© A24. 몸이 거부하는 악행과 현재를 교차시킴으로써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었던 장면

또한 근래 우리가 자주 접하게 되는 ‘악의 평범성’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악마 같은 행위를 저지르는 악인들이 모두 악마 같은 성품을 갖고 있고, 일상생활은 불가할 것만 같은 아주 특별한(불편한) 이들이 아닐까 싶지만, 실제로는 매우 평범한 이웃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개념이다.

이 영화는 바로 홀로코스트를 자행했던 독일군 장교 가족의 아주 평범한 일상을 묘사한다. 너무나도 단란해 보이는 가족. 군인으로서 맡은 바 일을 더 잘 해내기 위해 고민하고 연구하는 아버지와 가정을 꾸리고 집과 정원을 가꾸는 것에 정성인 어머니. 그리고 이들과 함께 행복한 일상을 누리고 있는 아이들까지. 이들 가족의 삶은 평범하고 행복해 보인다. 하지만 이들이 일상을 지내는 집은 바로 유대인 포로수용소와 담 하나를 두고 있을 뿐이다.

© A24. 저 담장 너머에 바로 수용소가 있다.

영화는 단 한 번도 담장 너머 아우슈비츠의 끔찍한 학살현장을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이 가족의 집이 등장하는 모든 장면에서 담장 너머 수용소의 소리들이 마치 생활 소음처럼 존재한다.

생활 소음이라는 표현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조나단 글레이저는 유대인들이 수용소에서 총을 맞고,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는 순간 비명을 지르고, 불타 재가 되는 순간 새어 나오는 삶의 마지막 소리를 강물이 흐르고 나무 위에서 새가 지저귀고 마당에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생활 소음들과 같은 레벨로 들려준다.

그리고 이 가족들에게는, 그저 다른 생활 소음과 유대인들의 고통의 비명소리가 다를 바 없다. 이 사실을 강조해서 묘사했다는 표현도 사실 적절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들의 집과 아우슈비츠가 담 하나로 갈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는 게 영화적 설정이 아니라 실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 영화의 사운드는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리고 영화는 철저하게 사운드를 재현한다. 늦은 밤 침대에서 잠을 청하는 아이들의 평범한 일상에 사람들의 비명 소리와 소각로가 가동 중인 잡음이 섞여 있다. 이 사운드는 24시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끔찍한 학살이 자행되었다는 사실을 아무런 시각 정도 없이도 극대화해 전달한다. 이는 시각적으로 자극적이었던 그 어떤 홀로코스트 영화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 A24. 열화상 카메라로 촬영된 이 시퀀스도 실제 이야기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아무 말도 못 하고 극장을 나오며 앞선 조나단 글레이저의 수상 소감을 다시금 떠올려 보게 됐다. 그리고 영화 속 루돌프 회스 가족의 집과 아우슈비츠의 거리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라는 게 가장 잔인한 사실이라면,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다면 괜찮은 것일까? 과거가 아닌 지금도 우리 주변과 먼 곳에서는 여전히 끔찍한 전쟁과 학살이 존재하는데, 물리적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다면 이런 고통들은 그저 무시해도 괜찮은 걸까.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인간 존재에 대한 여전한 의문을 담은 동시에 과거를 통해 현재를 바라보게 만드는 힘이 있는 작품이었다.

원문: 아쉬타카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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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스터로이드 시티〉 웨스 앤더슨, 당신은 정말로 영화를 사랑하는구나 https://ppss.kr/archives/266146 Fri, 24 May 2024 03:49:31 +0000 http://3.36.87.144/?p=266146
애스터로이드 시티 (Asteroid City, 2023) © Focus Features

경계를 넘어 너에게 닿기를

오래전 마틴 스콜세지 영화를 볼 때 그랬고,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를 볼 때도 그랬다. 더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미셸 공드리의 영화를 볼 때 그런 생각을 많이 했고, 근래에는 데미언 셔젤의 영화들을 보며 비슷한 생각을 했더랬다.

이 감독은 정말 영화를 사랑하는구나, 진심으로.

최근 몇 년 사이 가장 영화를 사랑하는 것 같은 감독을 꼽자면 의외로(?) 웨스 앤더슨을 첫 번째로 꼽아야겠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The Grand Budapest Hotel, 2014)〉을 볼 때까지는 잘 몰랐는데, 〈프랜치 디스패치 (The French Dispatch, 2021)〉를 보고 나서는 웨스 앤더슨을 좀 다른 각도로 바라보게 됐고, 이번 작품 〈애스터로이드 시티 (Asteroid City, 2023)〉를 보고 나서는 이런 생각이 완전히 굳어졌다.

한때는 웨스 앤더슨을 그저 비주얼리스트, 구도와 색감을 강박에 가깝게 고집하는 강렬한 스타일리스트 정도로만 여겼었는데, 최근 그의 작품들을 보면 점점 더 그 강박적 구도 안의 이야기(정서)가 더 크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웨스 앤더슨의 깊이가 더 깊어진 것인지 아니면 그의 영화 속에 항상 존재했었는데 내가 뒤늦게 발견하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프랜치 디스패치〉와 〈애스터로이드 시티〉를 통해 〈문라이즈 킹덤〉과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 시절보다 그를 더 좋아하게 됐다.

© Focus Features

아, 다시 생각해 보니 이 영화가 그의 전작들보다 더 감정적으로 받아들여진 건 한 개의 레이어가 더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외계에서 온 운석이 떨어진 사막 위의 도시 ‘애스터로이드 시티’를 배경으로 한정된 공간, 한정된 인물들이 겪게 되는 연극과 같은(실제로 연극인) 에피소드는 그 자체로도 삶에 대한 여러 가지 감정과 시대에 대한 풍자 등이 충분히 담겨 있다. 마치 웨스 앤더슨의 전작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연극으로 공연하는 배우들과 작가의 이야기가 하나의 레이어로 더 존재한다. 감독은 컬러와 흑백, 독백 형식 등으로 이를 완벽하게 구분한다. 이 경계를 관객에게 더 어필하려는 듯 각 레이어의 경계선을 분명히 하면서도, 가끔 경계를 넘나드는 유머를 섞기도 한다.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공연 그 자체도 의미를 갖지만, 그 무대 위 공연을 실현하기 위해 무대 뒤와 밖에서 작가와 배우들이 고민하고 연구하는 과정들을 알게 되는 순간 무대 위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들의 깊이는 더 깊어진다. 그리고 수직적 움직임과 사각 구도의 한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웨스 앤더슨의 영화들에서 가장 궁금한 미지의 세계인 앵글 밖의 이야기, 더 나아가 그 구도 밖 경계에 걸쳐져 있는 누군가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다.

사실 이건 위험할 수 있는 방식이다. 왜냐하면 자칫하면 영화를 만드는 감독과 스텝 본인들에 대한 자기방어에 그쳐 관객에게까지 닿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 Focus Features

하지만 내게 있어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자칫 미학적으로만 아름다운 에피소드에 그칠 뻔했던 이야기에 감정적 울림을 가져다준 놀라운 영화였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웨스 앤더슨의 영화들, 특히 전작들의 미학적 성취를 좋아했던 나로서는 〈프랜치 디스패치〉에 이어 이번 작품까지, 한편으론 기대하지 않았던 예상 밖의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분석적으로 바라보기보다는 더 감정적으로 그의 영화를 바라보게 됐다.

사실 계속 웨스 앤더슨의 영화들을 좋아한다고 말해왔지만 한편으론 동어반복이 계속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었다. 특히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이후 대중적으로도 큰 주목을 받게 되면서 그의 스타일은 하나의 아이콘이 되었는데, 이전과 이후의 작품들을 이런 시각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더 잦아졌다는 게 문제였다. 바로 그 프레임에 한정되어 고갈되어 가는 느낌이 짙어져 가는 분위기였으니까.

누군가에게는 〈애스터로이드 시티〉 역시 여전히 색감과 구도만 아름답고 동어반복되는 영화가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겐 전혀 다른 기대감으로 웨스 앤더슨의 다음 작품을 궁금하게 만드는 영화가 됐다. 그의 어떤 작품들보다 다음 영화가 가장 기대되는 영화다.

원문: 아쉬타카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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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로를 이탈할지라도 끝까지 간다 〈파묘〉 https://ppss.kr/archives/265499 Mon, 04 Mar 2024 02:59:34 +0000 http://3.36.87.144/?p=265499 ※ 영화 〈파묘〉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가급적 영화 감상 후 보시길 추천합니다.


파묘 (Exhuma, 2024)

〈검은 사제들 (2015)〉 〈사바하 (2019)〉 등 한국 영화계에서는 흔치 않게 오컬트에 진심인 장재현 감독의 신작 〈파묘〉. 평소 그의 전작들을 (아주) 재미있게 보았던 터라 이번 신작도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선공개된 예고편과 스틸컷 등은 오컬트를 좋아하는 나 같은 팬들은 물론이고, 일반 대중들도 큰 흥미를 갖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예고편 속 장면이 기억에 쉽게 각인될 만큼 참 잘 만든 티저였다).

공개 당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2차 캐릭터 포스터

마찬가지로 김고은의 굿 장면이 SNS에서 화제가 되었던 1차 예고편

전작들 가운데 〈사바하〉를 가장 좋아하는 입장에서 〈파묘〉는 기대와 동시에 살짝 걱정이 되는 지점도 있는 영화였다. 캐스팅과 예고편만 보아도 전작에 비해 규모나 기대치가 높아진 작품이라, 자칫 이야기와 연출에 있어 대중성을 위한 타협 아닌 타협으로 귀결되기 쉬운 프로젝트였기 때문이다.

 

매력적인 캐릭터, 그 어떤 요소보다도 강력한

〈파묘〉는 관객의 호불호 지점이 분명한 영화다. 흥미로운 건 장재현 감독이 이러한 우려를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인지하고 있었고, 여러 제작진들의 반대에도 오히려 끝까지 본래 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밀어붙였다는 점이다. 이런 이야기나 설정을 관객이 좋아하거나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정도가 아니라, 이 지점이 반드시 불호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이 영화의 구조는 여러 모로 한 편의 영화라기보다는 일종의 시리즈 에피소드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이미 익숙한 인물들이 평소처럼 팀(유사 가족)을 꾸려 사건을 마주하는 방식이나, 해결 이후의 모습에서도 종결의 느낌이 아니라 연속성의 느낌을 준다.

이런 구조와 맞물려 첩장이 드러나는 순간부터 영화는 다른 결의 전개로 나아간다. 장르적 특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들이라면 전혀 다른 장르로의 변주로 받아들일 정도로, 이 이후의 영화는 내용적으로도 장르적으로도 다른 경로를 택한다.

〈파묘〉는 여러모로 전작들에 비해 내레이션 등 친절한 설명 방식을 택하고 있다. ‘경로를 이탈하여 재검색합니다’라는 내비게이션 안내 음성을 삽입한 것 역시 의도적이라 할 수 있다. 마치 관객들에게 ‘이제부터 좀 다르게 진행될 거야,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어’라고 친절히 경고하는 것처럼.

그런 경고가 있기는 했지만 민족적인 배경이 되는 이야기로(아주 직접적인 인물의 대사로) 영화가 방향을 틀 땐 솔직히 ‘엇?’ 하는 이질감이 느껴졌다. 특히 이 영화가 장르 영화 중에서도 가장 성격이 강한 오컬트 장르라는 점에서 다른 메시지적인 요소들은 굳이 건들지 않아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다음부터는 관객을 얼마나 설득할 수 있냐의 영역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영화가 선택한 대한민국 국토와 일본의 침략, 그리고 쇠말뚝에 관한 이야기가 선택의 영역이었는지 아니면 대한민국에서 파묘를 이야기하려면 어쩔 수 없이 파내야만 했던 이야기인지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다.

그러나 솔직히, 이런 전개 방향의 호불호와는 상관없이 이 오컬트 세계관 속 네 명의 캐릭터가 너무 매력적이었다. 이들이 등장하는 2시간 조금 넘는 영화 한 편을 봤을 뿐인데, 시즌제 드라마 속에서 각 캐릭터가 중심이 되는 에피소드들이 너무 쉽게, 또 여러 가지 떠오를(보고 싶을) 정도다. 영화 속에서 인물들의 전사가 거의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 편의 영화로 얼마나 매력적이고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캐릭터들을 만들어 냈는지 감탄하게 된다.

너무 두근두근 기대되지 않나? 또 누군가 묏자리를 잘못 쓴 이들의 요청을 수락해, 파묘를 하고 염을 하고 굿을 하며 어둠의 존재와 싸우는 네 사람의 모습이.

원문: 아쉬타카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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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무한한 우주, 티끌 같은 다정함일지라도 https://ppss.kr/archives/263272 Tue, 11 Jul 2023 01:07:15 +0000 http://3.36.87.144/?p=263272 ※ 영화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멀티버스와 이세계라는 장르가 최근 인기 있는 모티프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 영화(콘텐츠) 정말 최고인걸?’라는 느낌을 주는 작품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그나마 ‘스파이던 뉴 유니버스’ 애니메이션 정도일까요? (그마저도 시각적 연출 측면에 한정되지만)

그런데 행운스럽게도, 이토록 멀티버스라는 모티프가 줄 수 있는 가슴 따뜻한 울림을 지닌 영화를 만났습니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입니다.

 

1.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때론 도움이 된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는 보는 이를 빼놓고서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이야기가 누군가를 가슴 저리게, 미소 짓게 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그 원동력은 읽는 이가 겪어온 삶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술가들이란 이야기를 누구보다 날카롭게 벼려 가슴 깊숙이 찔러주는 사람들이겠죠.

가능성의 우주(멀티버스), 이세계 이야기가 오늘날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최선의 선택과 결정으로 만들어진 오늘날의 자신이지만, 세상의 등쌀에 이리저리 떠밀릴 때면 그런 내가 한없이 작고 하찮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밀려오는 후회와 함께 다른 선택을 해서 찾아왔을 세계를 꿈꾸게 되죠.

그때 다르게 선택했다면, 달라졌을까?

그래서 팍팍한 현실을 잊게 해줄 이야기가 꾸준히 웹툰이나 극장에서 보이는 것 같습니다.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던 헝가리 속담처럼, 그렇게라도 힘든 현실에서 잠시 눈을 돌리는 것이죠.

가운데가 텅 빈 베이글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이하 에에올)〉의 등장인물인 ‘조부 투파키’가 만든 베이글은 이런 현대인의 상징과도 같습니다. 자신의 실패와 어린 시절의 후회를 빚어 창조했다고 하는 베이글. 마치 가슴 한쪽이 뻥 뚫린 사람 같기도 하고, 무(無)를 뜻하는 O(zero) 같기도 하고, 빛마저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보이기도 하죠. 조부 투파키는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베이글 속으로 들어가 죽음의 망각에 기대고 싶어 합니다. 벗어날 수 없는 삶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하죠.

이는 조부 투파키만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영화 밖의 우리도 자신만의 실패와 후회를 빚어 만든 베이글을 가슴 속에 하나씩 지니고 살아갑니다. 베이글과 계속해서 눈을 마주치다 보면 무력감이 온 정신을 지배하고, 곧 그 속으로 자신을 던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죠. 때문에 베이글은 한 겹의 커튼으로 가려 무시하거나, 속을 채울 무언가를 계속해서 찾아 나서야 합니다. 하루라도 더 이 우주를 살아가기 위해서.

빈 구멍을 메워주기 위해서 보통의 다중 우주, 이세계를 소재로 한 콘텐츠는 환상적인 비일상의 세계를 준비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죠.

네가 꿈꾸는 모든 것이 여기 있어. 멋진 신세계를 탐닉하면서 베이글로부터 시선을 돌려!

실제로도 어린왕자의 상자 같은 멀티버스를 마음껏 주무르다 보면 현실의 고통과 상실은 잊혀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상자만을 가지고 놀 수는 없습니다. 언젠가는 장미가 기다리고 있는 고향 별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에에올’이 준비한 멀티버스는 조금 다릅니다. 멀티버스가 모티프이지만, 이들이 주목하는 것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우주’가 아닙니다. 바로 그 옆에 있는, ‘우주에 비하면 티끌과도 같은 우리 옆의 존재들’이죠.

 

2. 모든(Everything, Everywhere)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거의 없다’는 것과 같다

검은 베이글을 닮은 영수증의 오류 표시

영화 초입부터 보여주는 에블린의 삶은 마치 검은 베이글과도 같습니다. 자신의 20년 인생이 녹아 있는 영수증은 국세청으로부터 고발을 당했습니다. 이곳저곳이 오류투성이라며 친절하게 큰 동그라미마저 그려져 있습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죠.

너의 인생은 의미가 없어.

가운데가 파인 베이글처럼, 에블린의 삶은 후회와 무기력만이 가득합니다. 딸과 남편과의 관계도 삐그덕거립니다. 그 순간 ‘알파 차원’의 웨이먼드가 그녀에게 찾아옵니다. 그는 지금과 다른 우주에서 최선의 형태로 살아가고 있는 에블린을 보여주죠.

가장 성공한 차원의 에블린의 모습 중 하나

에블린이 접신하는 다중 우주 속 또 다른 에블린들은, 우리가 현실을 망각하기 위해 읽어내리는 여러 콘텐츠와 닮아 있습니다. 현란하고 황홀하며, 눈길을 끄는 광경으로 비참한 현실을 잊게 만들어 줍니다. 심지어 가장 중요한 현실의 문제를 망각하게 만들 정도죠. 영화에서는 이를 ‘버스 점프(Verse Jump)’라고 이름 붙입니다.

멀티버스의 이름을 ‘버스 점프’라고 부르는 건 참으로 기묘합니다. 수많은 자아와, 그것을 현실시켜 줄 정보를 찾아 넘나드는 현대인을 염두에 둔 작명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 가능성에 쫓기며, 현실의 고난함을 잊기 위해 차원(콘텐츠)을 넘나들지만, 그럴수록 우리의 자아는 어디까지가 자신의 욕망이고 어디까지가 타인의 기대인지 구분하기 힘들어집니다. 빌런인 조부 투바키가 바로 그런 인물의 전형입니다.

조부 투바키가 되어 버린 조이와, 그런 우주적 빌런을 만들어 낸 알파 세계의 에블린. 이들은 어느 우주의 자신들보다도 많은 가능성을 품은 이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목적지(가능성)가 있다고 한들, 정착하고자 하는 항구가 없다면 배는 결코 육지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어머니의 기대와 사회의 강압 때문에 시작된 출항이기에, 조이에게는 스스로 정한 정착지가 없었습니다.

‘어디든 갈 수 있다’는 말은 곧 ‘어디에도 갈 곳이 없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결국 조이는 망망대해의 한가운데에서 방향을 잃고 표류하게 됩니다. 조이의 자아는 자신의 욕망과 타인의 기대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합니다.

그러나 모든 이들에게 공평한 단 하나의 정착지가 있습니다. 바로 죽음입니다. 조부 투바키는 그렇게 자신을 지치게 하는 표류에서 벗어날 방법으로 죽음이라는 마지막 수단을 꿈꾸게 됩니다.

우리가 찾아 나선 가능성도 조부 투바키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조이에게 에블린이 늘상 하는 잔소리인 ‘살을 빼라’ ‘레즈비언의 정체성을 아버지에게 알리지 마라’는 사회의 표준에 맞춰진 요구입니다. 조이에 대한 사랑에서 기반한 잔소리이지만, 이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마치 남의 옷에 내 몸을 끼워 맞추듯 답답함과 숨 막힘을 견뎌야 합니다. 사회는 그 기대를 ‘가능성’이라고 부르지만, 여기에 딱 맞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이죠. 강압에 떠밀릴수록 새로운 조부 투바키가 탄생할 뿐입니다. 가능성의 우주는 순식간에 종말의 블랙홀로 뛰어드려는 이들로 가득 차게 됩니다.

알파 우주의 웨이먼드는 에블린이 지닌 가능성의 힘으로 조부 투바키의 허무에 맞서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극한까지 밀어붙인 가능성은 또 다른 허무가 되어 데칼코마니처럼 반복될 뿐이었습니다. 무한 우주가 지닌 가능성으로도 조부 투바키의 가슴 속 뻥 뚫린 구멍은 메울 수 없었습니다. 다른 멀티버스 영화와 달리, 가능성이 지닌 힘은 우주를 멸망으로 몰아가는 허무를 메울 수 없는 겁니다.

 

3. 무한한 가능성의 우주를 거쳐 만난, 지금 이 순간에 다정함을

역설적이게도 조부 투파키를 막아낸 사람은 최악의 가능성을 지닌 주인공 에블린입니다. 알파 우주의 웨이먼드가 보았을 때 특출난 장점도 없고, 특별한 재능도 없는 사람. 허술한 영어로 세금 신고를 하다, 가족끼리 즐기기 위해 산 노래방 기계가 잘못 접수되어 국세청의 조사까지 받게 된 이민자. 그런데 그녀가 지닌 진정한 무기는 영화 시작부터 관객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베이글 속을 채우는 듯한 가족의 모습

바로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보여주는, 노래방 기계로 단란한 시간을 보내는 에블린 가족의 모습입니다. 골치 아픈 사건을 만든 노래방 기계이지만 남편과 에블린의 진실된 재능은 바로 다른 우주의 자신을 소화해 내는 능력이 아니라 사랑이었던 겁니다.

현실의 문제가 너무나 벅차서 그렇지, 에블린은 본래 남편과 닮아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었음을 영화 내에서 몇 번이나 보여줍니다. 실패한 인생의 원인인 웨이먼드를 따라 미국으로 온 것도, 코인 세탁소를 힘들게 운영하며 딸을 낳은 것도, 의절한 아버지가 미국에 건너와도 보살펴 주는 것도, 설령 딸이 다중 우주를 멸망시킬 악이라 해도 죽일 수 없다 맞섰던 것도 에블린이 모든 순간, 모든 장소에서 사랑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최악의 가장 성공했던 알파 우주의 자신들도 가지지 못했던 재능입니다.

내가 아는 유일한 것은 우리가 친절해야 한다는 것이야. 제발, 친절하게 대해줘. 특히 우리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를 때.

내가 유일하게 아는 것은 우리 모두 다정해야 한다는 거야. 다정함을 보여줘. 특히 우리가 모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를 때 말이야.

남편인 웨이먼드는 순진한 사람이지만 바보는 아니었습니다. 지루한 세탁 과정을 기다리는 와중에도 사람들이 웃을 수 있게 인형 눈을 붙여 놓는다던가, 자신들을 조사하는 국세청 세무사에게도 미소가 가득한 모양의 쿠키를 건네주는 것. 그가 보인 다정함은 에블린이 다시 영수증을 정리해 제출할 기회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실제로 다정함은 다른 사람에게도 선의를 끌어내는 그의 전략적인 무기였습니다.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 에블린은 다른 차원에서 빌려온 기술들이 아니라, 다정함이라는 무기를 빌려옵니다. 남편이 장난삼아 붙이곤 했던 눈알을 이마 정중앙에 붙이고, 악당들에게 다정함을 베풉니다. 폭력에 친절로 응수하며, 싸움이 아닌 화해의 액션을 화려하게 펼쳐 보입니다. 모두가 다정해져서 우주를 가득 채울 수 있도록. 그 혼란마저 이해하고 껴안을 수 있도록.

검은 베이글과 정반대로 가운데는 검고, 겉은 하얀 인형 눈. 마치 다정함이 허무를 채우듯이,

사랑이 조부 투파키의 베이글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모든 가능성을 경험할 수 있는 조부 투파키에게 우주는 ‘이제 더 기대할 것이 없는’ 공간입니다. 결국 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라 차갑게 식어 멸망할 것을 알기에 합리적인 결론으로 죽음에 이르고자 합니다. 그럼에도 조부 투파키가 주인공 에블린을 찾아온 것은 필연적으로 찾아올 ‘죽음’의 우주에서 벗어나 ‘나를 혼자 두지 말아 달라’ ‘나를 사랑해 달라’는 가장 절박한 의지를 표현하고, 자신이 모르는 일말의 기대감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베이글의 빈 속을 채워줄지도 모르는 단 한 명의 사람을 찾아.

누군가 조부 투파키의 우주를 열고, 누군가가 이 구멍을 채워주어야 합니다. 바로 눈알로 상징되는 다정함만이 이 구멍을 채울 수 있습니다. 에블린이 경험한 알파 세계가 지닌 것 같은 무한한 가능성이 아니라, 바로 다정함이요.

 

4. 우주마저 건널 수 있는 티끌 같은 다정함을 가지기를

다양한 욕망과 빚어내는 자아가 꿈틀대는 현대 사회입니다. ‘멀티 페르소나’, ‘부캐’, ‘N잡러’라는 말들처럼 누구나 저마다의 우주를 열심히 건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우주에는 자신만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타인의 우주 역시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혼란스럽습니다. 조부 투파키가 어머니의, 할아버지의 요구에 맞춰지듯이 자신의 욕망과 사회가 주입한 욕망, 타인의 기대 사이에서 끊임없이 충돌하고 공존합니다. 타인의 욕망과 자신의 욕망 사이를 헤매는 우리의 머릿속이 곧 멀티버스입니다. 그렇게 수많은 욕망 사이를 점프(jump)하고 분열하다 보면, 결국 우리의 자아를 상실하고 검은 베이글을 빚어낼지도 모릅니다.

나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선 타인의 마음에 존재하는 나와, 내 마음에 존재하는 타인을 꺼내 함께 비교해 볼 수밖에 없습니다. 방법은 매우 간단합니다. 조이가 에블린이 자신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기를 원하는 것처럼, 상대방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즉 먼저 상대방에게 다가가 다정함을 건네고, 상대방의 다정함을 이끌어 내는 것. 그렇게 서로의 빈틈을 채워주는 관계를 구축하는 것.

손가락으로 핫도그를 먹고 발로 피아노를 치는 우주가 있듯, 우주에서는 모든 것이 일어날 수 있어!’

이렇게 열린 마음으로 세상에 친절을 베푸는 것. 다정함이 빈틈을 채우자, 우주는 모든 것이 중요한 공간으로 탈바꿈합니다. 나의 욕망만큼이나 너의 욕망 역시 중요하고, 그 수많은 가능성을 건너 우연히 우리가 함께 있다는 사실이요.

때문에 사랑합시다. 사소하고 미미한 것들을. 언제든지 다정함을 베풀 수 있도록. 우주의 거대한 무의미함에 맞서 절망하지 않고, 사랑을 서로 놓지 않을 수 있도록. 당신과 내가 그 수많은 가능성을 건너 여기 함께 있다는 사실을 축복하며, 서로의 베이글을 채울 수 있게.

원문: 소라소라빵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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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램덩크가 사랑받는 이유 : 성공 서사가 아닌 ‘치유 서사’의 힘 https://ppss.kr/archives/261963 Tue, 14 Feb 2023 09:06:21 +0000 http://3.36.87.144/?p=261963 ※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보고 나니, 많은 사람들이 왜 그렇게 오랫동안 슬램덩크를 사랑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 이유는 슬램덩크가 단순히 성공 서사가 아니라 치유 서사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어서 아닌가 싶다. 언뜻 보면 우승, 승리, 성공을 목표로 하는 전형적인 성공 서사 같지만 인물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면 성공보다는 개개인의 치유에 관한 이야기에 가깝다는 걸 알게 된다.

개인적으로 슬램덩크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정대만이 울면서 “안 선생님, 농구가 하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폭력배가 되었지만, 사실은 농구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억눌려 왔다가 폭발하는 순간이다. 어릴 때는 그 장면이 마냥 좋았지 왜 좋은지는 잘 몰랐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자기가 진짜 원하는 것 앞에서 무너지는 인간의 마음, 다들 강한 척 하지만 알고 보면 순수한 소년이나 소녀에 불과한 인간이라는 존재라는 것을 어릴 적에도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애써 아닌 척하고 모르는 척하고 강한 척하지만, 살아가다 보면 한 번쯤은 그 갑옷이 벗겨지는 순간을 마주하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강백호가 채소연으로부터 첫 마디를 들었던 순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농구 좋아하세요?

마찬가지로 불량배에 불과했던 강백호는, 그 순간 마음이 녹아내리는 듯한 무언가를 경험했을 것이다. 그는 여느 소년 만화처럼 농구왕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순간을 경험했기 때문에 농구를 택했다.

 

2.

이번 극장판은 송태섭의 치유 서사를 다루어서 좋았다. 가족의 죽음, 어머니의 절망 가운데에서 자기가 의지할 것이라곤 오직 농구밖에 없는 그 마음이 너무도 이해되었다. 어린 소년은 농구가 없었다면 그 시간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마약이나 술·담배에 빠져 인생을 망쳐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송태섭은 농구에 절실하리만치 몰두하며 그 시간을 이겨낸다. 절실한 몰입이야말로 인생이고, 또 치유의 전부나 다름 없다.

대개 이런 치유 서사는 로맨스물에서 다루어진다. 상처 입은 주인공은 연인에게 의지하며 사랑을 받고, 결국 세상을 이겨낸다. 그러나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연인의 자리를 ‘농구’로 치환한다. 나쁜 길로 빠질 수도 있었던 소년은 농구로 삶을 치유받는, 농구로 한 시절을 견뎌내는, 농구로 삶의 의미를 찾아낸다. 누구나 그렇게 절실한 의존이 필요할 때가 있다.

〈슬램덩크〉에 등장하는 소년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을 치유하는 것은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 서로다. 이들은 한 팀을 이루어 서로를 지탱하며 손을 붙잡아 준다. 상처 입은 꿀벌들처럼 모여서 팀을 이루고, 서로를 인정하고 지지해주면서, 스스로와 서로를 치유해 나간다. 그들에게는 농구가 너무나도 필요했는데, 꼭 1등이 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들을 삶에 붙잡아 주는 유일한 끈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3.

개인적으로 슬램덩크에는 기억나는 장면이 정말 많지만, 패배 후 낚시를 하는 윤대협과 가업인 식당을 물려받은 변덕규에 대한 장면도 상당히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최고가 되기 위해 목숨을 건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 시절 청춘에 스쳐 지나간 농구, 혹은 연인에 대한 이야기 같은 것이다.

누군가는 그 시절, 음악을 너무나 사랑하여 매일 동아리방에 찾아갔을 것이다. 누군가는 밤마다 소설을 써서 인터넷에 올렸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슬램덩크〉의 소년들은 농구가 전부인 한 시절을 살아낸 것이다. 그것이 그들을 치유했고, 삶이 되어 주었고, 그들을 온전히 살게 했다.

사람에게는 몰입할 것, 삶의 의미를 주는 것, 무엇보다도 사람들 사이에서 맡을 역할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에게 농구부가 없었다면, 그들은 어떤 청소년기를 보내서 어떤 청년이 되었을까. 모르면 몰라도 더 외롭고 절망적인 시절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농구를 좋아했다. 그랬기에 ‘영광의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그다음 삶으로 갈 수 있었다.

원문: 정지우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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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팔도기생〉, 당대를 풍미한 톱 배우를 한자리에서 만나다 https://ppss.kr/archives/255123 Thu, 15 Dec 2022 04:37:17 +0000 http://3.36.87.144/?p=255123 영화 〈팔도기생〉은 1968년 제작된 영화로, 1960년대 후반에 유행했던 팔도 시리즈 중 하나다. 팔도 시리즈는 대체로 전국 각 도에서 모인 출중한 인물들이 서울 출신의 주인공을 맏형으로 연대하여 공동의 적과 싸우거나, 공동의 과제를 해결하는 포맷으로 되어 있다.

〈팔도기생〉은 주인공 박효천(김진규 분)이 각 지방의 명기(名妓)들을 한 명씩 만나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으며, 팔도 기생들 간의 횡적인 연대는 보이지 않는다.

영화 〈팔도기생〉의 포스터

 

줄거리

흥선대원군은 풍류남아 박효천(김진규)을 한양 명기(名妓) 녹수(김지미)의 집으로 부른다. 이 자리에서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 낙성을 기념하는 행사에 조선 전국의 명창들을 불러 축하의 노래를 부르게 함과 아울러 민속 가락을 정리하라고 이른다. 대원군의 명을 받은 박효천은 전국 풍류여행을 떠난다.

그렇게 박효천은 전국 각도의 기생을 만난다. 함경도의 이름난 기생 태현실을 만나 〈신고산 타령〉을 듣고, 평양에서는 화선(문희 분)을 만나고, 송도에서는 초혼(전양자 분)을 만난다. 전라도에서는 절세가인 금향(남정임 분)이 사또의 수청을 거부하여 노여움을 사게 되는데, 박효천은 사또를 달랜 후 금향을 만나 남도가락을 듣는다. 진주에서는 남홍(윤정희)를 만나 시창을 듣는다.

낙성식 날, 경복궁에서는 성대한 잔치가 열린다. 박효천이 초대한 전국의 명기들이 모두 참석하여, 각자 자랑하는 가락들을 뽑는다. 기생들의 맏언니 뻘인 녹수(김지미 분)는 기생들에게 본분을 잊지 말고 노래를 잘 보전하라는 말을 남긴다. 임금은 박효천의 공로를 인정하여 장악원 원장, 요즘으로 치면 국악원 원장을 맡으라는 명을 남기지만 박효천은 풍류를 즐기며 평생을 떠돌아다니겠다며 거절하고 다시 길 위로 떠난다.

빵빵한 당대 배우 라인업

 

그 시절 배우들에 대한 향수가 있다면

이 영화에는 김지미, 윤정희, 남정임, 문희를 비롯해 전양자, 태현실 등 당시의 톱 여배우들은 모두 출연하였다. 이 영화에 출연하지 못한 배우들은 시기심을 갖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총망라된 라인업이다.

하지만 호화 출연진에 비해서 극적 완성도는 매우 낮다. 90분 정도의 상영시간 안에 6~7명의 여배우를 만나는 만큼, 한 사람당 배정된 시간은 10분 남짓에 불과하다. 그래서 영화의 대부분은 어느 지방에 찾아가 명기를 만나고, 저녁에 술 한잔하면서 노래  한 곡 듣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러다 보니 극적인 긴장감이나 아기자기한 스토리의 전개는 기대할 수 없다.

이렇게 영화의 작품성으로는 도저히 좋은 평가를 할 수 없으나, 당대의 일류 여배우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매력이라 할 것이다.

유튜브에 영화 전편이 올라와 있다. 궁금하면 보자.

원문: 이재형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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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역사를 바꾸고 싶었던 회한의 위령제 〈헌트〉 https://ppss.kr/archives/256742 Tue, 06 Sep 2022 08:40:10 +0000 http://3.36.87.144/?p=256742 ※ 영화 〈헌트〉와 〈날씨의 아이〉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정재 배우의 감독 출사표인 <헌트>는 개봉 직후 여름에 개봉한 <외계+인>, <비상선언> 등 여타 한국 영화들과 비교해 가장 호평을 받고 있다. 이정재 ‘감독’으로 처음 대중에게 모습을 보이는 만큼 기대 자체가 높지 않았던 것이 호평의 이유이기도 하겠지만, 영화의 완성도도 기대 이상으로 높았다.

하지만 단순히 완성도만 높았다면 첩보 액션 장르라는 점에서 <헌트>는 볼만한 영화 정도로만 평가받았을 것이다. <헌트>는 근현대사를 다룬 수많은 한국 영화들과 비교해 자기만의 독특한 위치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고 봐야 한다. 비슷한 시대와 사건을 소재로 한 <화려한 휴가><26년><택시운전사><1987>과 비교해보면 더욱더 흥미롭다.

 

1. 1980년대에 대한 공동체적 위령제 : <화려한 휴가>부터 <1987>까지

<화려한 휴가>, <26년>, <택시운전사>, <1987>은 모두 1980년대 그 중 12.12 사태 직후 신군부 독재 체제, 광주민주항쟁, 고인이 된 전두환을 다루고 있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1980년대는 특별하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암살 사건 이후, 드디어 한국에도 민주주의가 가능할 것이라는 국민의 염원이 1979년 12.12사태로 완전히 박살 나면서 다시 독재를 맞이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통해 최초로 민주주의를 맞이한 시기이기도 하다.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가장 격동적인 시기였던 것이다.

여러 영화가 이 시기를 다루었다. <화려한 휴가>는 광주민주항쟁과 군부 정권의 잔인성을, <26년>은 전두환 정권의 잔재와 남겨진 이들의 한을, <택시운전사>는 광주민주항쟁을 거치면서 한국 민중이라는 공동체로 나아가는 한 개인의 성장을, <1987>은 독재에 저항하는 집단으로서의 한국인에 대해 다루고 있다. 각 영화를 자세히 들여다보자.

<화려한 휴가>는 광주민주항쟁과 당시 정권의 잔인성, 그리고 권력에 의해 희생당한 민중의 피와 눈물을 스크린에 재현했다. 지나치게 신파적이기에 광주민주항쟁을 대중적이고 오락적으로만 향유한다는 비판도 받았다. 하지만 <화려한 휴가>는 2007년 당시에도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광주민주항쟁의 역사를 환기시킬 뿐 아니라 권력에 의해 스러져 간 한국 민중을 위로한다는 의의가 있었다.

<26년>은 광주민주항쟁이라는 피의 역사가 트라우마로 남은 이들의 분노를 영화적 상상으로나마 풀어주고자 하는 살풀이였다. 또는 죄인이라 칭하면서도 징죄하지는 못하는 현실에 대한 분노이기도 했다. 그렇게 두 영화는 잊혀지고 왜곡 당하는 광주민주항쟁을 한국 민중의 기억에 각인시키고자 하는 노력을 이어갔다.

위의 두 영화와 비교하면 <택시운전사>와 <1987>은 1980년대를 조금 더 객관적인 시선에서 접근하려 한다.

<택시운전사>는 한국 길거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택시 운전사가 우연히 외신 기사를 따라 광주민주항쟁의 현장을 경험하는 이야기다. 그 과정에서 택시 운전사는 군부 정권에 억압받는 민중 공동체를 인식하고, 자신 역시 그 일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택시 운전사>의 특징은 당시의 잔인성을 기자의 카메라와 연결해 보여주면서 객관성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의 분위기가 신파로 빠지지 않도록 붙잡는다. 그래서 후반부의 카체이싱 장면은 영화 전반부의 노력으로 인해 그나마 덜 신파가 될 수 있었다. 덕분에 이 영화는 피의 역사가 반복되더라도 우리 각자의 각성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만든다.

1987은 앞의 세 영화와 비교해서도 독특한 지점을 갖는다. 서울대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사건에서 시작해 이한열 열사 피격사망사건을 거쳐, 6월 민주항쟁이 발발하는 현장을 재현하며 실제 인물과 가상의 인물, 실제 사건과 가상의 사건을 촘촘하게 비추는 것이다. 한국 민중은 피와 눈물의 역사를 거쳐 결국 민주주의에 도달한다. 결국 4월 민주항쟁과 광주민주항쟁이라는 역사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게 되는 것이다.

개봉 당시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사건 직후라는 점을 떠올렸을 때, <1987>은 과거의 민중에 대한 현대의 위로가 된다. 한국의 민중은 언제든 저항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위로의 메시지인 것이다. 그래서 네 영화는 공통적으로 감성에 기반한 한국 민중 공동체의 과거에 대한 위령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헌트>의 회한,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다 ①

  • <헌트>의 조유정과 <1987>의 명희

그러나 <헌트>의 시점은 조금 다르다. 이는 <헌트>의 ‘조유정’이라는 인물에서부터 기인한다. 조유정은 박평호를 감시하러 온 북측 스파이이면서, 위장 신분으로 남한 사회의 운동권과 접촉한 대학생이다.

<헌트>의 조유정(고윤정 분)

조유정이 보기에, 북한과 남한은 모두 뒤틀어진 독재 정권일 뿐이다. 전투기를 몰고 귀순한 북한 군인은 ‘북한 정권은 인민을 위한다고 해놓고 실제로는 정권을 세습하면서 왕국과 같은 모습을 보인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남한이 자유로운가? 남한은 군인에서 군인으로 세습되는 왕국일 뿐이다.

혈연이든 군연인든, 결국 남과 북은 ‘세상이 변하고 있음에도 정신을 못 차린’ 상태다. 영화에서 이를 언어로 발화하는 인물이 조유정이다. 그는 운동권 학생들의 모습을 보고는 박평호를 데리고 가 소주를 마시고 담배를 입에 문다. 그에게는 박평호도 군부 독재의 하수인일 뿐이다.

<1987>의 명희(김태리 분)

이러한 조유정의 모습은 <1987>의 명희와 비교했을 때 더 흥미롭게 느껴진다. 명희는 남한 사회에 살면서도 군부 독재의 현실을 외면하려는 젊은 세대의 상징이다. 군부 독재에서 벗어나기 위해 저항하는 이들을 보고서도 그런다고 현실이 바뀌냐고, 왜 바뀌지 않는 현실에 자신의 목숨을 바치냐고 묻는다. 하지만 결국 그도 이한열을 만나게 된다. 그의 행보와 죽음을 보고, 결국 자신도 염원을 가진 민중의 일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조유정은 결코 명희처럼 한국 민중으로 수렴할 수 없다. 그는 북한에서 암약하는 스파이이자 남한 국민으로 위장한 ‘경계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는 어느 집단에도 속하지 않은 개인이다. 경계성은 조유정이 북한과 남한의 뒤틀어진 독재 현실을 간파하고 이를 발화하는 이유가 된다. 이 조유정이라는 존재를 통해, <헌트>는 기존 한국 영화와 다른 독특한 지점을 차지하게 된다.

 

3. <헌트>의 회한,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다 ②

  • 한국 근현대사의 <날씨의 아이>
출처: 왓챠피디아

<헌트>는 표면적으로는 안기부 해외팀과 국내팀의 갈등, 그로 인해 스스로 무너지는 군부 독재의 한계를 그리고 있다. 해외팀 차장 ‘박평호’와 국내팀 차장 ‘김정도’는 안기부의 북한 프락치인 동림을 발본색원하기 위해 안기부의 살을 깎아 먹는다.

그러나 군부 독재 시스템에서 감시란 정권에 의한 민중 감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감시는 자유로운 존재인 인간과 자유가 말살된 존재인 노예 사이의 모순 사이에서 존재한다. 인간은 결국 예속과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는 헤겔의 관점에서 알 수 있듯, 군부 정권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모든 일원이 서로를 감시해야 한다. 이러한 감시는 결국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는 시발점 중 하나가 된다. 계단을 구르며 서로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박평호와 김정도의 모습은 결국 나락으로 떨어지는 군부 독재를 상징한다.

이 한계는 박평호와 김정도라는 인물 자체에서도 드러난다. 박평호는 사실 북한의 프락치 집단 동림의 일원으로, 한반도 평화 통일을 바라고 있다. 반면 김정도는 군인 출신으로, 국민을 지켜야 하는 군인이 권력을 위해 국민을 학살한다는 모순에 고통을 느끼고 스스로 자정하고자 한다. 이들은 서로 다른 꿈을 꾸지만, 동시에 같은 목표인 군부 독재 해체를 원하고 있다. 이들의 갈등은 당연히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하지만 1호를 암살하려는 김정도를 방해하고, 결국 살리기로 결정하는 박평호의 선택은 이들의 목표가 결국 다르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 둘의 결정적인 차이는 조유정으로부터 기인한다.

출처: 왓챠피디아

김정도는 군인으로서, 목표와 의무에 따라 군부 독재를 자정하고자 한다. 그는 신군부 혁명(?) 세력을 혁명해 새로운 정권을 만들려는 반군부 세력에게 자신들이 하려는 것은 혁명이 아니라고 명확하게 발화한다.

그가 목표하는 것은 남한 국민이라는 공동체에 대한 사죄다. 그는 광주민주화항쟁 당시 11세 어린이의 가슴을 관통한 탄환을 기억하며 눈물을 삼킨다. 군인으로서 목표와 의무를 다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는 인물이지만, 동시에 같은 군부대에서 근무했으며 동지인 최 사장을 전기 고문으로 죽인다는 점에서는 대의를 선택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한국 민중을 바라보는 관점에서는 기존의 한국 영화와 연결되지만, 동시에 1980년대에 대한 한국 영화의 한계를 보여주는 인물인 것이다.

극 중 ‘김정도’로 분한 배우 정우성의 모습

반면 박평호의 위치는 복잡하다. 그는 13년 동안 안기부에서 암약한 북측 프락치다. 군부 독재의 하수인이면서도, 동시에 평화 통일을 위해 남한 1호를 제거하려는 암살자이다.

그의 복잡한 위치는 자신을 감시하던 북측 스파이인 조원식의 죽음 이후 등장한 딸 조유정을 대하는 모습에서 더 명확히 드러난다. “내가 죽으면 누군가가 올 거야.”라던 조원식의 말에도 불구하고, 박평호는 조유정을 크게 의심하지 않는다. 오히려 개인적으로 마음을 쓰면서까지 조유정의 안위를 살핀다.

극 중 ‘박평호’로 분한 배우 이정재의 모습

이러한 박평호의 모습은 김정도와 비교했을 때 무척 흥미롭게 다가온다. 일면 박평호는 전쟁에 의한 통일을 반대하고 북측 중심의 평화 통일을 주장하는, 북한이라는 공동체를 대표하는 인물로 보인다. 하지만 감시자의 딸 조유정에게는 어떻게든 자신이 아끼는 조카 같은 이를 지키려는 아저씨의 모습을 보인다. 즉, 박평호는 자신의 조국인 북한보다도 조유정을 더 먼저 생각하며 조유정이 어떤 위협도 받지 않는 것을 원한다.

출처: 왓챠피디아

김정도의 목적이 자신처럼 남한 1호의 암살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를 방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남한 1호의 암살은 남한 민중에 대한 사죄이자 민주주의 정권의 시작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북측의 적화통일 즉, 전쟁의 포화가 시작될 수 있다. 전쟁은 약 1주일 정도 만에 결과가 나타날 것이지만, 동시에 수백만의 희생을 야기할 것이다. 그 수백만에는 남해로 피신한 조유정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결국 김정도는 조유정에게 한반도를 떠날 수 있는 여권을 건넨다. 그 여권은 갈등, 피, 눈물로 얼룩진 1980년대 한반도에서 벗어나라는 외침이면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죽어간 개인을 위한 위령제이고, 격동의 역사에 대한 후회인 것이다.

출처: 왓챠피디아

이러한 지점에서 <헌트>는 신카이 마코토의 <날씨의 아이>를 떠올리게 한다. 날씨를 조종하는 소년은 소녀를 구하기 위해 일본 전체에 엄청난 폭우를 불러오고, 결국 일본의 전 국토가 물에 잠기는 아포칼립스를 맞이한다. 그러나 소녀를 구한 소년에게 사설탐정은 말한다. 소녀를 구한 것에 절대 후회하지 말라고, 그 사랑의 감정에 누구도 원망할 권리는 없다고 말이다.

 

마무리하며

기존 한국 영화와 마찬가지로 <헌트>는 피로 얼룩진, 격동의 1980년대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위령제이다. 하지만 기존 한국 영화는 한국 민중이라는 공동체에 감성적으로 접근했다면, <헌트>는 대의와 공동체에 가려진 개인을 위한 위령제를 선보인다. 이처럼 남겨진 개개의 영혼들을 위해, 우리는 과거사에 부단히도 그리고 차근차근 다가가야 할 것이다.

원문: Gozetto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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