ㅍㅍㅅㅅ https://ppss.kr 필자와 독자의 경계가 없는 이슈 큐레이팅 매거진 Tue, 01 Jul 2025 03:22:59 +0000 ko-KR hourly 1 https://wordpress.org/?v=5.8.10 https://ppss.kr/wp-content/uploads/2015/07/ppss-100x100.png ㅍㅍㅅㅅ https://ppss.kr 32 32 책 읽어주지 않는 부모가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 https://ppss.kr/archives/269748 Tue, 01 Jul 2025 03:15:24 +0000 https://ppss.kr/?p=269748 ※ The Guardian지에 기고된 「‘It’s so boring’: gen Z parents don’t like reading to their kids – and educators are worried」을 번역한 글입니다.


최근 연구와 전문가 의견에 따르면, 아이들의 스크린 타임이 증가하면서 책 읽기와 같은 질 높은 대화 시간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 부모 세대인 Z세대는 책 읽기를 재미있거나 배워야 하는 과목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며, 이는 아이들의 독서 습관 형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실제로 5~10세 아이들 중 재미로 책을 읽는 비율이 크게 감소했고, 부모들도 책 읽기보다 스크린 사용을 더 선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들이 책 읽기 대신 디지털 기기와 영상에 의존하는 모습이 늘어나면서, 아이들의 언어, 인지, 사회성 발달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아이들이 책 읽기와 대화에 참여하는 시간을 점차 늘리고, 관심사에 맞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합니다. 또한, 아이들이 책 읽기에 흥미를 느끼지 않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천천히 습관을 들이기 위해 작은 단계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권장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노력이 아이들의 어휘력 향상과 학교 적응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으며, 부모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도 강조되고 있습니다.

스크린 타임(Screen time, 컴퓨터, 텔레비전 또는 게임기와 같은 장치를 사용하는 시간)이 점점 더 대화 시간 대신 자리 잡고 있으며, 전문가들은 그러면 아이들이 뒤처질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최근, 전 초등학교 교사인 스펜서 러셀은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 @Toddlers Can Read를 팔로우하는 부모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왜 아이들에게 소리 내어 책을 읽어주지 않나요?

러셀이 가디언지와 공유한 답변들은 부끄러움에서 짜증, 분노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습니다. 한 부모는 “너무 지루해서요”라고 했고, 또 다른 부모는 “시간이 없어서요”라고 답했습니다. 한 어머니는 “저도 책 읽는 걸 즐기지 않아요”라고 적었습니다.

다른 부모들은 아이들이 “Goodnight Moon”이나 “Mother Goose”와 같은 책을 충분히 오래 앉아 읽게 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했습니다. “항상 방해를 해요.” 또는 “아들이 페이지를 넘기기 싫어해요.”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읽는 시간이 지루하다고 느끼는 부모들도 있었는데, 한 부모는 “아이들과 책 읽는 걸 좋아하지만, 아이들이 같은 책을 반복해서 요청해요.”라고 했습니다.

스크린 타임이 부모와 아이 간의 일대일이고 질 높은 상호작용을 대체하고 있습니다.

  • 스펜서 러셀

최근 하퍼콜린스(HarperCollins) UK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데 어려움을 겪는 부모들은 대체로 더 젊은 세대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Z세대 부모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 사람들이 “책 읽기가 재미있다”라고 답했으며, 거의 3분의 1은 “즐기기보다는 배워야 하는 과목’”으로 여겼습니다. 이는 X세대 부모보다 훨씬 높은 수치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자연스럽게 아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5세에서 10세 아이들 중 자주 재미로 책을 읽는 아이는 3분의 1에 불과하며, 2012년의 절반 이상과 비교하면 크게 줄었습니다.

이는 부모들이 아이들이 다섯 살 이전에 책을 읽어주는 일이 적기 때문일 수 있는데, 모든 연령대 부모의 41%만이 그렇게 하고 있다고 답했으며, 이는 2012년의 64%보다 크게 감소한 수치입니다.

 

“책 읽기의 롤 모델”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소리 내어 책을 읽어주는 일이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교육자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러셀은 18개월부터 읽기 능력을 가르치는 강좌를 제공하며, 종종 14세의 아이를 둔 부모들로부터도 문의를 받습니다. 일부 부모들은 여전히 책을 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는 유튜브나 미스 레이첼 같은 영상에 집중하는 아이들은 보지만, 책을 읽히면 움직이거나 흔들리거나 소리 지르거나 도망가 버리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Z 세대 부모들은 불평등과 불안정으로 가득 찬 경제 환경을 물려받았으며, 이는 육아를 더욱 스트레스받게 만듭니다. 미국에서 육아 비용은 연간 약 11,000달러로 1990년대 이후 급증했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밤에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피곤하거나 스트레스로 인해 실천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사진: Unsplash Vitolda Klein

또한, 스크린은 피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특히 Z 세대 부모들은 어릴 때부터 디지털 기기와 함께 자란 최초의 세대입니다. 기술이 Z 세대 부모와 아이들의 독서 시간 감소에 영향을 미치는 역할을 완전히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고 봅니다. 스크린 타임은 부모와 아이 간의 질 높은 상호작용을 대체하고 있다고 러셀은 말합니다.

아이들과 대화하며 책을 읽는 가장 도움이 되는 방법 중 하나는, 아이들이 관심 있어 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 도나 더프

많은 연구들이 과도한 스크린 타임이 아이의 인지, 언어, 사회적 정서적 성장에 해로울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의사들은 2세에서 5세 아이들의 ‘비교육적 스크린 타임’을 평일에는 약 1시간, 주말에는 3시간으로 제한할 것을 권장합니다. 하지만, 유아가 ‘블루이’ 같은 프로그램을 보지 않도록 하면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아이패드를 ‘필요악’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미국의 이른바 ‘문해력 위기’는 잘 문서화되어 있습니다. 작년 가을의 애틀랜틱의 보도에 따르면, 많은 엘리트 대학생들이 영어 과제를 완수하지 못하는데, 이는 그들이 고등학교 시절에 한 권의 책도 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팬데믹은 수학과 읽기 모두에서 학생들의 성적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두 과목 모두 30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틱톡에서는 교사들이 부모들에게 자녀에게 읽어주는 것을 권장하는 공익 광고를 게시하며 “나는 유아에게 모유 수유를 했는지 분유 수유를 했는지 구별 못할 수도 있지만, 매일 밤 읽어주는 성인들이 있는 아이는 알 수 있다”라는 캡션을 달기도 했습니다.

집에서 책 읽기 습관이 없는 아이들은 종종 그 습관이 있는 아이들보다 따라잡기 어렵다고, 서니 빙햄턴 대학교 언어병리학 교수인 도나 더프는 말합니다.

책은 새로운 단어를 배우는 매우 풍부한 자료이며, 집에서 읽기 경험이 없는 아이들은 어휘력이 낮게 자라기 쉽고, 이는 학교 전반에 걸쳐 성공하는 데 큰 차이를 만듭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학교에서만 읽기를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 학교 사서 협회 회장인 베키 칼자다는 부모의 역할이 ‘책 읽기 롤 모델’로서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아이들에게 큰 소리로 책을 읽어주는 것은 어휘력 향상뿐만 아니라 공감 능력과 연결 능력 같은 감성 지능을 키우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칼자다는 말합니다.

하퍼콜린스의 보고서에 따르면, 0세에서 2세 사이의 남자아이 중 5명 중 1명 이상은 거의 또는 전혀 읽어주는 일이 없으며, 이 연령대의 여자아이 중 44%는 매일 읽어주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남자아이들이 계속해서 여자아이들보다 학교에서 뒤처지고 있기 때문인데, 이들은 유치원에 여자아이들보다 뒤처져 입학하는 경우가 많고, 낮은 GPA를 기록하며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스크린 타임 줄이기

러셀은 ‘책이 유튜브와 경쟁하지 못한다’라고 인정하면서, 2025년 부모의 압박이 매우 크다고 말합니다. 한 부모는 그에게 “아이에게 책을 읽어줄 기력이 전혀 없어요. 저와 아내는 쉬기가 너무 힘들어요”라고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을 휴대폰에서 멀어지게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칼자다는 아이에게 읽어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부모들에게 천천히 시작할 것을 권장합니다.

처음에는 최대한 조금씩 줄이기 시작하세요. 20분이나 1시간 동안 앉아 있을 필요는 없어요. 두 살 아이는 읽기 체력이 많지 않지만, 다섯 페이지 정도의 책을 읽어 줄 수 있습니다. 주로 ‘소는 음머, 돼지는 꿀꿀’ 같은 내용으로 충분하며, 점차 늘려갈 수 있습니다.

또한, 아이들이 이야기 시간에 집중하지 않더라도 포기하지 말라고 더프는 조언합니다. “페이지의 모든 단어를 읽어야 한다거나, 심지어 어떤 단어도 읽지 않아도 된다고 느끼지 마세요,”라고 말하며,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아이에게 자신의 말로 이야기를 만들어보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덧붙였습니다.

아이들과 관심사에 대해 대화하는 것이 책 읽기의 가장 도움이 되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아이들의 리드에 따라가세요.

원문: 피우스의 책도둑&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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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입한 지식의 시대는 지났다, 학습에 대한 철학이 중요하다 https://ppss.kr/archives/264774 Sun, 06 Apr 2025 04:18:07 +0000 http://3.36.87.144/?p=264774 1.

나의 교육관이라면, 사실 ‘교육’이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의 헤지펀드 매니저 브루스 코브너는 트레이딩을 가르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가르칠 수는 없다. 하지만 배울 수는 있는 것 같다.

브루스 코브너(Bruce Stanley Kovner, 1945~). 현대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억만장자 헤지펀드 매니저이자 자선가로 꼽힌다.

배운다는 것, 학습한다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자발적인 활동이다. 게임에 빠져드는 것, 음악에 심취하는 것, 책에 젖어 드는 것, 모두 개인의 흥미가 콘텐츠와 만나서 뇌가 적극적으로 몰입하게 된 활동이다. 그때 비로소 생각이 콘텐츠와 ‘반죽’이 되어 간다고 생각한다.

그 반죽 안에서 급격한 화학 작용이 발생한다. 그렇게 놀아본 게임, 심취해 본 음악, 젖어든 책은 오랫동안 잊히지 않고 머릿속 깊은 곳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나간다. 단 한 줄의 시를 읽어도 그러하다.

​반면 교육은 이러한 작용을 외부에서 강제로, 혹은 반자동적으로 만드는 하나의 영역이다. 중요한 것은 그 반죽의 숙성에 있고, 흥미와 콘텐츠의 융합에 있지 교육을 하는 ‘행위’에 있지 않다. 말을 물에 데려가더라도 어떨 땐 마시고 어떨 땐 마시지 않으리라. 소귀에 경을 읽는 행위를 열 번 하고 체크리스트에 열 번의 체크를 한다고 해서 교육이라 부를 순 없을 것이다.

결과를 도출해 내는 것이 좋은 ‘교육’이다. 즉, 즐거운 학습이라는 것이 발생하도록 하는 것이 어쩌면 좋은 교육의 유일한 목표이다.

2.

그러나 성인들도 그러하듯,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뛰어드는 영역이라는 것은 지극히 우발적이어서 통제하기 어렵다. 뛰어난 인재들도 사내 교육 영상을 틀어놓는 획일화된 교육에는 진절머리를 느낀다. 그러나 집에 가는 길에 우연히 들어간 취미 동호회 게시판에서 몇 시간 동안 자발적 학습을 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그래서 교육이라는 이름이 붙은 교육은 대체로 지겹고 비효율적이며 심지어 비합리적인 과정이기 쉽다. 교육자의 편의에 맞춰져 있거나, 이미 학생들이 교육에 엄청난 열의를 가지고 있음을 가정하고 있는 경우가 대다수다. ‘학생이라면 공부를 해야지!’라며 강제적 교육을 할 때는, 그 학생이 이미 공부에 목숨을 건 어떤 계기가 있었을 때에만 합리적인 방법이다.

​교육의 올바른 접근은 ‘배우도록 돕다’이다. 배우도록 돕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재밌게 가르치는 것이다. 이 점은 유튜버들이 이미 증명한 것 같다. 호기심을 갖도록 썸네일을 던져주고, 직접 파헤칠 수 있도록 장려해야 한다. 그리고 성인 교육이 그러하듯, 중간에 졸리거나 관심도가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배려해 주고 존중해 줘야 한다. 원래 배운다는 것은 머리가 아프고 당이 떨어지는 일이다.

3.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제일 좋은 교육은 첫째로 학습에 대한 습관이 들게 하는 것이다. 장기간 무엇을 탐구하고 배우고 익히고 가지고 노는 그 몰입의 시간이 몸에 배게 해야 한다. 그 몰입력은 근육과 같아서, 갖추지 못한 사람은 평생 계발시키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출처: freepik

​단기적인 교육 성과의 기준을 ‘몰입 시간의 극대화’라고 해보자. 교육자가 몰입 시간을 극대화할 수 있다면 성과와 보상을 받는다고 상상해 보자. 그러면 아이들에게 재미없는 학습 과정을 시간을 딱딱 잘라 이렇게 주입했다가 저렇게 주입했다가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회의감이 느껴질 것이다.

자연스럽게 아이들의 몰입 시간을 극대화하는 방법은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일을 찾는 것으로 이어진다. 다른 방법은 통하지 않는다. 정신적 균형 같은 것은 나중 일이고, 우선 푹 빠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한 시간, 가급적 두 시간 이상씩 몰입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을 장려하면 된다.

게임이나 영화, 영상은 이런 분야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심지어 이 분야들이 정신에 해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프로 게이머, 영화감독, 영상 분석가들은 모두 정신병 치료를 받아야 맞다. 그러나 딱히 그런 트렌드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이건희 회장은 영상으로 많이 공부했다고 한다. 주치의가 말렸어야 할까? 일론 머스크나 제프 베조스,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등은 모두 어릴 때 컴퓨터에 빠져 있었을 텐데 이들만이 그 중독에서 생존한 기적적 케이스라고 봐야 할까? 아니다.

​요는 게임이 문제가 아니라, 게임의 즐거움을 대화하고 나누고 곱씹을 인간적 대상이 없는 경우라고 생각한다. 어릴 때 하루 종일 공을 차거나 피겨 스케이팅을 한다고 해서 교육적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강압적으로, 혹은 고립적으로 했을 때 문제가 된다.

출처: freepik

 

4.

어린 나이에 몰입력이 계발되면 학습할 수 있는 영역이 상상 이상으로 참 많다. 한번 몰입이라는 근육이 생겨난다면, 대체로 새로운 학습에 대해서 역량이 커지는 셈이다. 몰입을 방해하는 온갖 ‘교육적’ 요소들을 디자인하는 것보다, 몰입을 할 수 있는 요소를 만들어주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그 와중에 중요한 것은 죄책감을 주지 않는 것이다. 비만이나 흡연, 음주, 도박, 낭비 등의 문제 중 하나가 타인들이 쉽사리 비난하여 죄책감을 준다는 논문 속 주장을 읽었는데, 그 죄책감을 없애기 위해 다시 중독되어 있는 영역으로 도피하기 쉽다는 것이다. 위의 행위들을 그럼 장려하라는 참이냐?! 고 물을 수 있는데, 내 얘기인즉슨 진지한 대화와 공감이 대체로 비난보다 훨씬 효율적인 무기라는 것이다.

“아직도 게임이나 하고 있어!”라고 외친다면, 그건 마치 여러분에게 “오늘도 술이나 먹고 있어?” “오늘도 커피 먹고 수다나 쳐 하고 앉아 있었어?” “오늘도 인터넷이나 하고 앉아 있었어?”라고 끝없이 다그치는 것과 비슷한 효과일 것이다. 정녕 이 방법이 교육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재벌 회장들과 대통령 옆에도 이런 비난꾼을 고용해서 앉혀놓을 일이고, 잔소리꾼 상사들의 연봉을 수직 인상 시켜주면 회사가 잘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허망한 생각이 아닌가.

출처: freepik

그럼에도, 아이들이 만화책이나 영상, 게임 등을 하는 시간을 ‘교육적이지 않다’라며 비난하면 어떤 효과가 발생할까? 죄책감이 생기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계기가 되어 더 좋은 사람이 될까? 그럴 수도 있지만 극히 드물 것이라는 점이 현실이다. 나쁜 콘텐츠는 피하도록 도와주되, 오히려 함께 대화할 수 있는 주제로 끌고 나와야 한다. 그렇다면 그마저도 모두 건전한 ‘학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영화에 미쳐서 어쩌면 인류 중에서 영화에 관해 가장 해박한 지식을 ‘학습’한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어머니께서 성인 등급의 영화까지 다 보여줬다는 얘기에 충격을 받았다. 이 충격을 아이들을 키우는 지난 11년간 곱씹어 봤다. 나라면 그럴 수 있을까? 도대체 어떤 상황이었을까? 과연 좋은 영향을 줄까? 타란티노는 애초에 미친놈 아닐까? 혹은 천재여서 그러진 않았을까?

어쨌건 그의 영화에 대한 집념은 주위에서 장려를 받았고, 그는 그 집념을 키워나가 세계적인 감독이 되었다. 요즘 같은 시기에 타란티노의 이야기가 울림이 있는 것은, 누구라도 자신이 집념하는 영역을 어려서부터 5년 10년간 애정 해 올 기회만 된다면, 자신의 오타쿠적 관심사로 먹고 살 수 있는 시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타란티노 영화가 지나치게 자극적이라 주장한다면 그 또한 동의한다. 성인 등급 영화는 유치원생의 정신 발달에 지나친 수준의 자극은 아니었을까 싶긴 하다.

​어쨌든, 달리 말하면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그런 오타쿠적 관심사를 접고 인류 보편적 교육으로 교환해야 한다면, 대체로 경제적 이득은 매우 적은 행위일 것이다. 더욱이 집중력을 키울 기회마저 잃을 테니 더욱 그렇다.

 

5.​

아이들의 머리는 24시간 돌아간다. 책을 한 권 읽으면, 그 내용을 한번 복기할지 1500번 복기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강제로 읽힌 책은 필시 한 번도 복기 안 할 것이고, 스스로 읽은 책 중에는 한 번쯤 백번 천번 복기하는 책이 나올 것이다.

​주입한 지식의 시대는 간 지 오래다. 스스로 소화해 내고 학습해 낸 내용들의 총량이 사람의 지성을 결정한다. 공교육이 무너졌다고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으리라. 교과 내용이 후지다고 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으리라. 그러나 획일화된 프로세스를 우선시해서 단기적인 입시 따위에 아이를 껴 맞추기 시작하면, 그 대가로 지성과 깊이를 잃고, 또한 경제적 기회까지 잃는 시대가 되었다.

​교육이 그만큼 중요하다. 아니, 학습에 대한 주변 어른들의 철학이 그만큼 중요하다.

원문: 두물머리 천영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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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에 가까워진 대한민국 초등학생과 초등학교 https://ppss.kr/archives/266940 Thu, 12 Sep 2024 12:46:14 +0000 http://3.36.87.144/?p=266940
작가 Drazen Zigic / 출처 Freepik

전국의 초등학생이 절반으로 줄었다는데…!

벌써 올해가 시작된 지도 2개월이 지나, 3월이 다가왔습니다. 여러분은 ‘3월’ 하면 어떤 것이 먼저 떠오르시나요? 저는 싱그러운 봄 날씨, 예쁜 꽃들과 함께 3월에 입학하는 풋풋한 학생들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일부 초등학교는 입학생을 맞이하기는커녕 학생이 없어 폐교를 걱정한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약 두 달 전 보도된 뉴스에 따르면, 최근 3년 사이 학생이 감소하여 문을 닫은 초∙중∙고 학교는 103개나 되고, 지난해 신입생을 받지 못한 초등학교는 무려 145개나 된다고 합니다. 뉴스에서는 이 소식을 심각하게 전달하고 있는데, 막상 주변을 둘러보면 정말 초등학생이 줄어들고 있는 것인지 좀처럼 체감이 되지 않는데요! ‘학생 수가 정말 줄어들었을까?’라는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제가 졸업한 경기 내혜홀초등학교를 검색해 보았습니다.

경기 내혜홀초등학교 학교 현황 (출처: 네이버)

제가 졸업하던 2011년 당시 전교생 수는 1,000명이 넘었지만, 지금은 432명으로 13년 동안 약 40% 감소한 수준이었어요. 40%나 줄어들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는데요! 아마도 이런 경향은 제가 졸업한 학교 이외에도 수많은 다른 학교에서도 나타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따라서 전국 초등학생 수의 변화를 알아보기 위해 한국교육개발원과 교육통계서비스에서 제공하는 데이터를 활용해서 정말 초등학생과 초등학교 수가 감소하고 있는지, 감소 현상이 두드러지는 학교나 지역이 있다면 어디인지 등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주인을 잃은 교실 안 절반의 책상들

초등학생 및 초등학교 수 (데이터 출처: 한국교육개발원)

한국교육개발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초등학생은 약 260만 명으로, 이는 서울 올림픽 경기장 약 39개를 가득 메울 수 있을 정도입니다.

2023년 기준 초등학교는 6,364개 존재하며, 평균적으로 학교 하나당 약 409명의 학생을 수용하고 있는데요. 이 숫자는 지난 시간 동안 어떻게 변화해 왔을까요? 1965년도부터 2023년까지의 데이터 변화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965년부터 2023년까지 초등학생 수 및 초등학교 수를 나타낸 콤보 차트 (데이터 출처: 한국교육개발원)

위 시각화는 1965년부터 2023년까지 초등학생과 초등학교 수를 나타낸 콤보 차트입니다. 차트에서 막대는 초등학생 수, 갈색 선은 초등학교 수의 변화를 표현하고 있는데요! 왼쪽의 y축은 학생 수를, 오른쪽의 y축으로는 학교 수를 알 수 있습니다.

막대 길이의 변화를 보면 초등학생의 수가 평균 12년 간격으로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지만, 최근으로 올수록 점점 줄어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초등학생이 가장 많았던 1971년과 비교해 보았을 때, 2023년 초등학생 수는 약 55.1%나 감소한 수치에 해당했어요. 반면, 선의 높낮이 변화를 통해 초등학교는 1987년부터 감소하다가 2001년부터 다시 증가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학교 수가 증가하는 이유는 최근 신도시가 개발되면서 학교도 새로 생겨나기 때문이라고 해요.

학교 수는 늘어난 데 비해 학생 수가 줄어들었다면, 한 학급의 학생이 전보다 훨씬 줄어들었을 것 같은데요. 지금은 한 학급에 몇 명의 학생이 있을까요? 1999년부터 2023년까지의 학급당 학생 수 데이터로 알아보겠습니다!

1999년부터 2023년까지 학급당 학생 수를 나타낸 라인 차트 (데이터 출처: 교육통계서비스)

위 시각화를 보면 학급당 학생 수는 24년간 꾸준히 감소하는 추세임을 알 수 있는데요. 1999년에는 35.4명이었던 학급당 학생 수가 2023년이 되자 20.7명이 되며 약 41% 줄어들었습니다. 한 학급의 책상과 의자 약 14쌍이 사라진 셈인데요, 이제는 교실이 텅 비어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와 같이 학생 수가 줄어드는 경향은 전국 대부분의 시도에서 유사하게 나타났습니다.

2012년에서 2023년의 지역별 학생 수 변화량을 나타낸 양방향 막대 차트(데이터 출처: 교육통계서비스)

위 시각화는 2012년 대비 2023년의 시도별 학생 수 증감률을 나타낸 양방향 막대 차트입니다. 중앙의 0을 기준으로 학생 수가 증가했으면 오른쪽으로, 감소했으면 왼쪽으로 막대가 뻗어 있는데요! 막대의 길이로 2012년에 비해 2023년에 학생 수가 얼마나 크게 변화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전국적으로 2개의 시도(세종특별자치시, 제주특별자치도)를 제외하면 2012년에 비해 2023년의 학생 수가 감소했습니다. 이 중에서 가장 크게 학생 수가 감소한 서울특별시는 초등학생 증감률 -24.2%로 약 12만 명이나 감소했습니다.

한편, 앞서 언급한 세종특별자치시, 제주특별자치도는 각각 +0.9%(359명), +360%(25,524명) 증가율을 보였는데, 절대적인 수치의 변화는 타 시도의 감소량에 비해 미미한 수준이었습니다.

 

2. 오히려 도시의 학교에서 줄어드는 학생들

전국의 초등학생 감소 추세를 확인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모든 초등학교에서 학생 수가 줄어들고 있을까?”, “혹시 어느 초등학교에서는 학생 수가 증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학생 수가 꾸준히 증가/감소한 학교의 비율을 나타낸 파이 차트 (데이터 출처: 교육통계서비스)

교육통계서비스에서는 전국의 초등학교마다 연도별 전교생 수를 제공하는데요. 2008년부터 2023년까지 각 초등학교별 연도별 전교생 수의 변화를 살펴본 결과, 대다수의 학교는 연도별 학생 수가 등락을 반복하는 패턴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런 패턴을 보인 학교는 전체(폐교 포함) 7,241개 중 6,023개, 83.18%를 차지했어요.

그러나 1,008개(13.92%)의 학교에서는 학생 수가 매년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요! 학생 수가 꾸준히 증가한 학교 210개(2.9%)에 비해 5배 많은 정도였습니다.

학생 수가 꾸준히 감소하는 추세를 보인 학교는 다음 해에도 학생 수가 감소할 여지가 있다고 예상해 볼 수 있는데요. 이러한 학교들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분석해 보았습니다.

매년 학생 수가 감소한 1,008개의 초등학교는 어디에 있을까요? 일반적으로 이미 학생 수가 적은 지방에서 지속적으로 학생 수가 감소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는데요. 정말 이 학교들이 지방에 있는지 알아보려고 합니다.

먼저, 지역 규모를 기준으로 특별/광역시, 시, 읍, 면, 특수지역으로 분류하여 분포를 확인해 보았습니다.

학생 수가 꾸준히 감소한 학교가 속한 지역의 지역 규모 분포를 표현한 막대 차트 (데이터 출처: 교육통계서비스)

매년 학생 수가 감소한 학교가 많이 분포한 지역은 읍, 면 지역이나 특수지역이 아닌 시, 특별/광역시 지역으로 나타났습니다. 의외의 결과였는데요! 시 지역과 특별/광역시 지역이 전체의 64.8%를 차지하고 있어, 지방보다 도시 지역의 많은 학교들이 지속적인 학생 수 감소 현상을 겪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학생 수가 꾸준히 감소한 학교가 속한 지역을 나타내는 단계 구분도 (데이터 출처: 교육통계서비스)

오히려 도시 지역에서 꾸준히 학생 수가 감소하는 초등학교가 많다니, 이와 같은 현상이 두드러지는 지역이 어디일지 궁금했는데요. 위 시각화는 학생 수가 매년 감소한 초등학교의 시도별 분포를 나타낸 단계 구분도입니다. 지역이 짙은 붉은색에 가까울수록 꾸준히 학생 수가 감소한 학교가 많다는 것을 의미하는데요!

차트를 보면 가장 짙은 색을 띈 지역은 경기도로 전체 1,008개 중 205개의 학교가 분포해 있습니다. 특히 경기도 중에서도 수원에는 32개의 학교가 분포했는데요. 수원은 2024년 1월 기준 경기도 내 인구수 1위임에도 불구하고, 학생 수가 꾸준히 감소한 학교가 가장 많은 지역이라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3. 지방 초등학교의 소멸

당연한 수순이겠지만, 학생 수의 감소는 끝내 폐교로 이어지게 됩니다. 지난 시간 동안 학생 수가 감소해 오다 끝내 문을 닫은 학교들에 대해서도 데이터로 살펴보았습니다. 2008년부터 2023년까지 교육통계서비스에 폐교 사실을 보고한 학교들의 데이터를 활용했어요.

지난 15년 동안 전국에서 문을 닫은 초등학교는 540개입니다. 그중 학생 수가 10명 미만 존재한 상태에서 문을 닫은 폐교는 전체 중 217개(40.18%)나 되었으며, 또 학생 수가 끝내 0명이 되어 문을 닫은 학교는 전체 폐교 540개 중 240개(44.4%)였습니다. 폐교 역시 수도권보다 상대적으로 학생 수가 적은 지방에서 더 많이 발생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요. 정말 그럴지 지역 규모별로 폐교의 분포를 확인해 보았습니다.

폐교가 속한 지역의 지역 규모 분포를 표현한 막대 차트 (데이터 출처: 교육통계서비스)

위 시각화는 2008년부터 2023년까지 지역 규모별로 폐교 수 분포를 나타낸 막대 차트입니다. 폐교가 많이 분포한 지역은 예상대로 면 지역이나 특수지역처럼 대체로 인구수가 4,000명 미만인 곳으로 각각 전체 폐교의 47.22%, 35.75%를 차지해, 이를 합하면 무려 82.97%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2008~2023 전국 폐교 초등학교의 수를 나타낸 막대 차트(데이터 출처: 교육통계서비스)

마찬가지로 폐교들이 실제로 위치한 시도는 어디일지 알아보았는데요! 2008년부터 2023년까지 시도별로 전국에서 폐교한 학교 수를 막대 차트로 만든 뒤, 폐교 수가 많은 지역 순으로 정렬해 보았습니다.

전라도와 경상도, 강원도 순으로 폐교가 많이 분포한 것으로 나타났는데요! 이 지역들은 인구수가 평균 3,000명이 채 되지 않는 면 지역과 섬이나 산에 위치해 발길이 닿기 어려운 특수지역에 위치했다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전라도의 경우, 문을 닫은 162개의 초등학교 중 141개(87%)는 면이나 특수지역에 있었고, 경상도는 160개 폐교 중 136개(85%)의 학교가 면이나 특수지역에 있었습니다.

반면 경기도를 포함한 특별/광역시 지역은 모두 낮은 폐교 수를 보여주고 있는데요. 특히 광주광역시와 세종특별자치시는 단 하나의 학교도 문을 닫지 않았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인구가 밀집되고 비교적 인프라가 좋은 지역의 학교는 폐교 확률이 낮지만, 지방의 면 지역이나 특수지역의 학교는 문을 닫을 확률이 크다고 해석할 수 있어요.

 

에디터의 한마디

지금까지 데이터를 활용해 초등학생과 초등학교와 관련된 특징을 살펴보았습니다. 특히 1971년에 비해 학생 수가 절반에 가까운 수치로 줄어들었다는 사실과 가장 낮은 시점이 2023년, 가장 최근이라는 점이 놀라웠습니다. 또 학생 수가 매년 빠짐없이 꾸준히 줄어드는 학교는 오히려 도심에 많다는 점, 이미 문을 닫게 된 지방의 폐교의 분포를 통해 미래에는 지금보다 더 많은 학교가 줄어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요.

본문에서 언급하지 않았지만, 초등학생 수가 감소하는 이유는 낮아지는 합계출산율 때문이라고 합니다. 통계청의 ‘인구동향조사 중 출생, 사망 통계’에 따르면 2023년 합계 출산율은 0.72명으로, 전년 대비 0.06명이 감소하며 역대 최저치를 달성했다고 합니다. 즉, 앞으로 초등학생이 늘어날 가능성조차도 줄어들었다고 해석할 수 있어요.

저는 종종 제가 졸업한 학교가 있는 동네를 찾아가 추억을 떠올려보곤 합니다. 어릴 적 뛰어놀던 운동장과 맛있는 간식을 사 먹었던 학교 앞의 분식점과 문방구를 보며 여전하면서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소소한 행복인데요! 오늘의 글을 쓰며 ‘우리 학교도 학생 수가 줄어 문을 닫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여러분들도 네이버에 졸업했던 초등학교 이름을 검색해 학생 수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아보세요!

원문: NEWS JELLY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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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내용은 더 잘 기억될까? https://ppss.kr/archives/266504 Wed, 21 Aug 2024 03:57:10 +0000 http://3.36.87.144/?p=266504 사람들은 어려웠던 과제보다, 쉽게 느껴졌던 과제에 대해 더 긍정적인 학습 판단을 내리는 경향이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걸 가리켜 ‘ELER’ 편향이라고 한다. 참고로 ELER은 ‘easily learned = easily remembered’의 약어이다.

왜 이게 편향일까? 언뜻 생각하면 당연해 보인다. 자격증 시험을 준비한다고 해보자. 첫 서론 부분은 쉽다. 그래서 진도가 팍팍 나간다. 내용이 다 이해되니까, 다 ‘배운 것’같이 느껴진다. 하지만 본론으로 넘어가니 내용들이 어렵게 느껴진다. 암기는 고사하고 이해하는 것조차 어렵다는 기분이 든다.

그런데 문제는 ‘이해≠학습’이라는 점이다. 사실 학령기를 거친 여러분이라면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책에 있는 내용을 그냥 보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말이다. 자칫 눈에 익숙한 나머지 ‘내가 이걸 다 외웠다, 마스터했다’ 착각하고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흔히 강조되는 것이 외운 내용을 회상하거나 시연하는 절차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배웠으면 빈 종이에 토해내면서 내가 정말 완벽하게 숙지한 게 맞는지 점검해야 한다. 혹은 직접 써먹어 보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하면서 내가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지를 체크하고 보완하는 과정이 따라야 한다.

작가 goonerua 출처 Freepik

 

ELER 편향을 범하기 더 쉬운 사람들

지능이라는 건 타고나는 걸까, 후천적으로 만들어지는 걸까? 정답은 누구도 모른다. 아마 그 사이 어딘가쯤 진리가 숨어 있겠지만 그걸 누가 알 수 있을까. 흥미로운 점은 지능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다.

누군가는 지능의 불변성에 좀 더 무게를 둔다. 지능이란 타고나는 부분이 강하며, 개인이 어찌하기 어렵다는 암묵적 생각이다. 다른 누군가는 지능의 가변성을 택한다. 후천적인 노력과 학습을 통해 얼마든지 더 똑똑해질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심리학에서는 전자를 불변론자(entity theorist), 후자를 가변론자(incremental theorist)라고 부른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좀 더 가까운가?

  • 불변론자(entity theorist) = 지능은 불변
  • 가변론자(incremental theorist) = 지능은 가변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불변론자들이 가변론자보다 ELER 편향, 즉 쉬운 과제가 더 잘 기억되는 것 같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반면 가변론자들은 어려운 과제가 더 기억에 남는다고 말한다. 아래 그래프를 보면 불변론자들은 쉬운 과제(high fluency)에 대해 학습판단(judgments of learning)이 더 높다. 가변론자들은 정반대다. 쉬운 과제보다 어려운 과제(low fluency)에 대해 학습판단이 더 높다.

Miele, Finn, & Molden(2011)

왜 이런 차이가 생긴 것일까? 비밀은 지능에 대한 믿음이 만들어 낸 ‘노력의 가치’ 차이에 있다.

불변론자들은 노력의 가치를 낮게 평가한다. 어차피 지능이야 정해진 거고 타고난 건데, 노력해 봐야 뭘 어쩌냐는 생각이다. 물론 노력을 통해 어느 정도 처음보다 더 나은 수행을 보일 수는 있다. 그러나 지능의 총량은 타고난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얼마 가지 않아 한계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불변론자들은 노력을 덜 하는 경향이 있다. 쉬운 과제는 덥썩 물지만, 어려운 과제는 쉽게 포기한다. 그래서 이들은, 한 번이라도 해본 ‘쉬운 과제’는 더 잘 기억하는 반면, 어려운 과제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가변론자들은 노력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 지능에는 한계가 없다. 내가 얼마나 노력하고 갈고닦느냐에 따라 더욱 나아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들은 설사 어려운 과제라 하더라도 노력한다. 쉬운 과제도 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나를 좀 더 성장시켜 줄 수 있는 어려운 과제에 더 치열하게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 더 고생한 만큼 더 기억에 남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래서 이들은, 쉬운 과제보다는 어려운 과제를 더 잘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세상은 어려운 과제에 더 많은 보상을 약속한다

불변론자보다 가변론자들이 더 나은 성취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 어려운 영단어도 더 잘 기억하고, 시험 점수도 더 좋다. 회사에서는 더 나은 성과와 보상을 받는다.

이쯤 되면 이제 여러분도 그 이유를 짐작할 것 같다. 불변론자들보다 가변론자들이 더 어려운 일에 매달린다. 물론 어려울수록 실패 확률도 생기지만, 적어도 개고생하면서 얻은 경험치는 남는다. 그렇게 가변론자들은 성장하면서 점점 더 어렵지만 더 보상이 높은 일에 익숙해져 간다.

반면 불변론자들은 쉬운 과제에만 머문다. 그래서 쉬운 과제에 걸맞은 작은 보상을 주로 받는다. 물론 불변론자들 중에서도 야심가가 없는 건 아니다. 이들은 부자가 되겠다, 성공하겠다, 남들이 우러러보는 명예를 얻고 싶다, 야심을 불태운다. 하지만 노력으로 이뤄내기에는 자신의 작은 그릇이 발목을 잡는 것 같아서 아쉽다.

그래서 가변론자보다, 불변론자들이 더 치팅의 유혹에 취약하다. 가변론자들은 될 때까지 한다. 그러나 불변론자들은 해도 안 될 것 같으니까, 그럼에도 보상과 명예는 얻고 싶기에 ‘된 척’을 한다. 자신의 성과를 부풀리고 포장한다. 안 되겠으면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거나 방해해서라도 상대적 우위를 만들고자 노력하게 된다.

 

 마치며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ELER 편향(easily learned = easily remembered)을 소개했다. 그러나 이 믿음이 언제나 유효한 것은 아니다. 쉬운 것만 하는 사람들에게는 맞는 말이겠지만 어려운 것에도 도전하는 사람들에게는 틀린 믿음이다. 원래 더 고생한 만큼 더 기억에도 오래 남는 법이다. 공부할 때도 예외는 아니다. 암기를 더 잘하고 싶다면 좀 더 고생할 생각을 하자.

사진: UnsplashKelly Sikkema

그전에, 기왕이면 불변론자보다는 가변론자가 되자. 지능의 한계는 우리가 결정할 수 없지만, 다행스럽게도 믿음의 차이는 우리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원문: 허용회의 사이콜로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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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 메타인지, 자존감, 동기부여, 게으름 극복, 마음건강 등에 관한 직접 강의나 외부 출강을 다닙니다.
  • 그외에도 재미있겠다 싶은 강의면 심리학을 응용하여 뭐든 다루고 있습니다.
  • 심리학 대학원 입시 전략 설명회도 정기 진행합니다.

위의 내용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허작가의 사이콜로피아 홈페이지(바로가기)를 확인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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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 수업 자료만 올리면 억대 수입? 저작권 걱정 없는 수업 자료 판매, 쏠북에서 시작 https://ppss.kr/archives/263550 Mon, 12 Jun 2023 04:12:20 +0000 http://3.36.87.144/?p=263550 교육 콘텐츠가 돈을 버는 시대

‘성인교육 콘텐츠’로 돈 번다는 사람이 넘쳐난다. 스마트스토어 강의, 포토샵 강의 등으로 억대를 벌었다는 간증이 넘친다.

월 천 찍는다는 콘텐츠 부자를 바라보는 우리의 모습

하지만 최근 뜨는 성인교육 콘텐츠 시장은 ‘입시교육 콘텐츠’ 시장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유명 에듀테크 스타트업의 연 700억 매출(적자 200억)이 대단하다 하지만, 하지만 그조차도 오프라인 사교육 시장에 비하면 정말 작다. 온라인은 메가스터디 등을 다 합쳐봐야 3조를 웃도는데, 오프라인 사교육 시장은 20조가 넘는다.

에듀테크 시장도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지만, 학원(사교육) 시장 규모에는 미치지 못한다. (2020 기준, 사교육시장 규모는 대교 교육연구소, 에듀테크 시장 규모는 정보통신산업진흥원 자료를 인용)

그러다보니 학원 선생님들은 좋은 강의를 만들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 그들의 강의자료는 비법처럼 네이버 카페 등을 통해 공유되기도 한다.

하지만 큰 돈을 버는 건 대형 입시학원에서 강의하는 일부 유명 강사에 불과하다. 다른 중소형 학원 선생님들은 아무리 좋은 강의자료를 만들어도 팔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학원 강사도 자신의 교육 자료로 돈을 벌 수 있는 플랫폼이 생겼다. ‘쏠북’에서는 강사 누구나 자신의 학원 수업 자료 콘텐츠를 온라인으로 유통할 수 있다.

 

“내 수업 자료가 이렇게 가치 있는 줄 몰랐어요”

실제 ‘쏠북’에서 콘텐츠를 유통한 선생님들의 실적은 상당하다. 인기 강사들의 경우 월 정산액이 800만원, 연 1억을 찍는다. 상위 10%만 해도 정산액이 연 평균 5800만원 이상. 더 중요한 건 일부 최상위 크리에이터만 떼돈을 버는 게 아니라, 롱테일처럼 매출이 고르게 분산되어 있다는 점이다.

어디어디의 일타 강사들처럼 거대한 팀을 꾸리고 사업을 하는 게 아니다. ‘쏠북’을 위해 별도의 콘텐츠를 만든 것도 아니고, ‘쏠북’을 위해 강의를 제작한 것도 아니다. 그저 컴퓨터 속에 잠자는 강의 자료를 ‘쏠북’을 통해 업로드한 것만으로 얻은 ‘추가적인’ 매출이다.

추가로 일하지 않아도 돈이 생긴다!

돈 뿐만이 아니다. ‘쏠북’을 이용한 많은 선생님들은, 반대로 매출을 통해 내 콘텐츠의 가치를 증명 받는다는 점에 더 큰 만족감을 느꼈다. 선생님이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전문성과 노하우가 있다. 쏠북은 이를 통해 자존감과 수익을 올리는 건 기본이고, 피드백 등을 통해 자신의 전문성을 높여가게 된다.

단순히 ‘돈이 들어온다’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점이, 이 숫자를 통해 내 콘텐츠가 가진 가치를 증명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쏠북 자료 저자의 실제 정산 페이지)
에듀테크 그거 별 거 아니다, 현장 선생님들이 진짜 전문가다

다만, 그래도 걸리는 점은 있다. 실제로 콘텐츠 판매를 위해서는 디자인이나 브랜딩, 홍보 등 신경쓸 부분이 여전히 많다는 것. 내 콘텐츠의 품질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멋진 표지와 매력적인 캐치프레이즈 없이는 범람하는 콘텐츠 속에 묻혀버리기 십상이다.

당신의 콘텐츠도 이런 튀는 제목들 사이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아님)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게 바로 ‘쏠북’이 잘하는 것이니까. 디자인과 템플릿 등 부수적인 과정은 그냥 ‘쏠북’에 맡기면 된다.

그냥 내 수업 자료만 있으면, 상담부터 받아보면 된다. 컨설팅도 무료다. 로고 디자인과 맞춤형 마케팅 메시지도 만들고, 거기 맞춰 디자인 템플릿까지 만든다. 표지 디자인까지 다 해 준다.

‘쏠북’은 수업 자료를 브랜딩하고, 홍보하고, 또 손쉽게 유지 개선할 수 있도록 템플릿까지 만들어준다.
‘쏠북’을 통해 진행한 실제 템플릿 디자인 사례. 왼쪽 디자인이 오른쪽과 같이 바뀌었다.

 

가장 핵심적인 문제, “저작권”을 해결하는 가장 쉽고 빠른 길

완성도 높은 콘텐츠도 있다. 브랜딩부터 디자인까지는 ‘쏠북’이 해 준다. 하지만 여전히 가장 큰 문제가 남아 있다.

바로 ‘저작권’이다. 실제로 온라인 시장에 진출하려는 학원 선생님들이 가장 먼저 부딪치는 벽이 이것이다. 수업 자료에 교과서와 참고서의 내용이 아예 안 들어갈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학원 교사 개인이 저작권자와 직접 소통하기는 어렵다. 방법도 알 수 없고, 협의를 한다 해도 저작권료가 상당히 비싸다.

유명 강사들이야 출판사와 협의를 통해 콘텐츠의 저작권 문제를 해결하지만, 어디까지나 대형 교육회사를 낄 때나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쏠북’을 쓰면 이 어려운 게 진짜로 쉬워진다. 쏠북은 NE능률, 지학사, YBM, 다락원 등 4개 출판사와 이용 협약을 맺고 있다. 쏠북을 이용해 콘텐츠를 제작하고 유통하면, 이 4개 출판사 교재를 저작권 문제 없이 이용할 수 있게 된다.

혜성같이 등장한 저작권 해결사 쏠북. 복잡한 저작권 계약을 직접 할 필요 없이, 그냥 ‘쏠북을 쓰기만 하면’ 저작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저작권 이용료가 비쌀 거라는 걱정도 노노. 연간 매출액 약 1억원을 달성한 한 선생님의 경우, 저작권 사용료는 연간 3백여만원에 지나지 않았다. 매출액이나 콘텐츠 형태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기는 하지만, 보통 매출 대비 저작권료의 비중은 2~3% 수준에 그친다. 개별적으로 계약을 맺었다면 절대 불가능한 금액이다.

사실 에듀테크 플랫폼을 표방하면서도 단순히 장터만 열 뿐, 콘텐츠의 질이나 법적 문제 등에 대해선 손을 놓아버리는 곳이 많다. 어쩌면 직무유기로까지 느껴지는 부분. 하지만 쏠북은 에듀테크 플랫폼이 해야 할 일, 에듀테크 플랫폼의 가치를 고민했다. 그리고 선생님은 쏠북을 통해 유통하기만 하면, 부수적인 문제가 다 해결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쏠북’은 학원 선생님들과 교재 출판사들, 그리고 학생들 모두가 상생하는 선순환 구조를 지향한다.

위는 쏠북의 선순환 구조다. 선생님은 저작권 등에 대한 걱정 없이 편리하게 교재를 이용할 수 있고, 이는 양질의 교육 콘텐츠가 생산될 수 있는 토양이 된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수업 교재의 채택률이 높아지는 효과가 생긴다. 마지막으로 이용자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금액으로 높은 품질의 교육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된다.

 

치열한 사교육 경쟁, ‘쏠북’을 통해 나만의 비교우위는 물론 부수입까지 창출하다

쏠북은 선생님들의 생산성과 편의 강화를 위해 더 많은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대표적인 게 쏠북의 교재 에디터, ‘쏠북 스튜디오’다. 쏠북 스튜디오가 내세운 최대의 강점은 역시 간편하면서도 강력한 편집 능력. ‘쏠북 스튜디오’를 사용하면 ‘쏠북’과 라이센싱된 교재를 바탕으로 손쉽게 문제를 만들 수 있으며, 제공되는 템플릿에 창작한 내용만 집어넣는 방식으로 나만의 교재를 완성할 수도 있다.

‘쏠북’의 에디터. ‘쏠북’과 라이센싱된 교재를 바탕으로 문제를 만들 수 있다. 제공되는 템플릿에 창작한 내용만 집어넣는 방식으로 손쉽게 교재를 완성할 수도 있다. 무료 체험 사이트를 통해 직접 사용해보자. (링크: https://studio.solvook.com)

선생님들을 위해 수업 자료 유통 채널도 계속 확대하고 있다. 최근 쏠북은 알라딘, 노팅, 스콘과 제휴를 맺어, 이들 전자책 플랫폼을 통해 수업 자료를 유통하기로 했다. 쏠북을 통해서 온라인 서점에 수업자료를 정식으로 출간할 수 있는 것이다.

세계 교육 시장 규모는 2030년 10조 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1경 원을 초과하는 어마어마한 시장이다. 더 중요한 건 에듀테크의 발전이 앞으로 더욱 급격해질 거란 점이다. 당장의 규모는 전체 교육 시장에 비해 작지만, 성장 속도는 2배 가까이 가파르다.

김형준의 토이푸들처럼 거대해질 날이 머지 않았다

 

저희집 푸들도 보세요 (구름이, 6살, 중성화)

과거, 교육은 디지털 전환이 느린 분야였다. 그러나 이젠 교육계에서도 ‘디지털 전환’이 큰 이슈다. 공교육을 중심으로 교내 디지털 인프라 도입이 속속 이뤄지고 있으며, 서울시 같은 경우 이미 1인 1 태블릿 보급을 목표로 예산을 투입하고 있다.

교육의 디지털 전환에 있어 ‘쏠북’은 신뢰를 가장 우선된 가치로 둔다. 가장 큰 장벽이었던 저작권 문제를 해결했고, 선생님들의 플랫폼 접근성을 크게 향상시킴으로써 교육의 질과 다양성을 높였다. 에듀테크 업계의 성장성과 사교육 시장의 방대한 규모를 생각할 때,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 또한 무궁무진하다. 쏠북은 학습자 뿐 아니라 교육자에게도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 쏠북에 자료 올리고 돈벌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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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램덩크가 사랑받는 이유 : 성공 서사가 아닌 ‘치유 서사’의 힘 https://ppss.kr/archives/261963 Tue, 14 Feb 2023 09:06:21 +0000 http://3.36.87.144/?p=261963 ※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보고 나니, 많은 사람들이 왜 그렇게 오랫동안 슬램덩크를 사랑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 이유는 슬램덩크가 단순히 성공 서사가 아니라 치유 서사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어서 아닌가 싶다. 언뜻 보면 우승, 승리, 성공을 목표로 하는 전형적인 성공 서사 같지만 인물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면 성공보다는 개개인의 치유에 관한 이야기에 가깝다는 걸 알게 된다.

개인적으로 슬램덩크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정대만이 울면서 “안 선생님, 농구가 하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폭력배가 되었지만, 사실은 농구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억눌려 왔다가 폭발하는 순간이다. 어릴 때는 그 장면이 마냥 좋았지 왜 좋은지는 잘 몰랐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자기가 진짜 원하는 것 앞에서 무너지는 인간의 마음, 다들 강한 척 하지만 알고 보면 순수한 소년이나 소녀에 불과한 인간이라는 존재라는 것을 어릴 적에도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애써 아닌 척하고 모르는 척하고 강한 척하지만, 살아가다 보면 한 번쯤은 그 갑옷이 벗겨지는 순간을 마주하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강백호가 채소연으로부터 첫 마디를 들었던 순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농구 좋아하세요?

마찬가지로 불량배에 불과했던 강백호는, 그 순간 마음이 녹아내리는 듯한 무언가를 경험했을 것이다. 그는 여느 소년 만화처럼 농구왕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순간을 경험했기 때문에 농구를 택했다.

 

2.

이번 극장판은 송태섭의 치유 서사를 다루어서 좋았다. 가족의 죽음, 어머니의 절망 가운데에서 자기가 의지할 것이라곤 오직 농구밖에 없는 그 마음이 너무도 이해되었다. 어린 소년은 농구가 없었다면 그 시간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마약이나 술·담배에 빠져 인생을 망쳐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송태섭은 농구에 절실하리만치 몰두하며 그 시간을 이겨낸다. 절실한 몰입이야말로 인생이고, 또 치유의 전부나 다름 없다.

대개 이런 치유 서사는 로맨스물에서 다루어진다. 상처 입은 주인공은 연인에게 의지하며 사랑을 받고, 결국 세상을 이겨낸다. 그러나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연인의 자리를 ‘농구’로 치환한다. 나쁜 길로 빠질 수도 있었던 소년은 농구로 삶을 치유받는, 농구로 한 시절을 견뎌내는, 농구로 삶의 의미를 찾아낸다. 누구나 그렇게 절실한 의존이 필요할 때가 있다.

〈슬램덩크〉에 등장하는 소년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을 치유하는 것은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 서로다. 이들은 한 팀을 이루어 서로를 지탱하며 손을 붙잡아 준다. 상처 입은 꿀벌들처럼 모여서 팀을 이루고, 서로를 인정하고 지지해주면서, 스스로와 서로를 치유해 나간다. 그들에게는 농구가 너무나도 필요했는데, 꼭 1등이 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들을 삶에 붙잡아 주는 유일한 끈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3.

개인적으로 슬램덩크에는 기억나는 장면이 정말 많지만, 패배 후 낚시를 하는 윤대협과 가업인 식당을 물려받은 변덕규에 대한 장면도 상당히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최고가 되기 위해 목숨을 건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 시절 청춘에 스쳐 지나간 농구, 혹은 연인에 대한 이야기 같은 것이다.

누군가는 그 시절, 음악을 너무나 사랑하여 매일 동아리방에 찾아갔을 것이다. 누군가는 밤마다 소설을 써서 인터넷에 올렸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슬램덩크〉의 소년들은 농구가 전부인 한 시절을 살아낸 것이다. 그것이 그들을 치유했고, 삶이 되어 주었고, 그들을 온전히 살게 했다.

사람에게는 몰입할 것, 삶의 의미를 주는 것, 무엇보다도 사람들 사이에서 맡을 역할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에게 농구부가 없었다면, 그들은 어떤 청소년기를 보내서 어떤 청년이 되었을까. 모르면 몰라도 더 외롭고 절망적인 시절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농구를 좋아했다. 그랬기에 ‘영광의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그다음 삶으로 갈 수 있었다.

원문: 정지우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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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메리칸 드림의 산증인이 아닙니다” https://ppss.kr/archives/251755 Thu, 10 Mar 2022 05:25:21 +0000 http://3.36.87.144/?p=251755 ※ 팟캐스트 ‘아메리카노’를 듣는 청취자 여러분들 중에서는 ‘아메리카노 2020 에필로그‘ 편에서 저희가 소개했던 책들을 기억하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 가운데에는 『배움의 발견(Educated)』이라는 책이 있었죠. 이 책을 쓴 타라 웨스트오버가 뉴욕타임스에 「I am not proof of american dream」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습니다. 번역해 소개합니다.


출처: 뉴욕타임스

대학교 1학년 첫 학기 때를 떠올리면, 그 기억은 지금도 온몸에 생생히 되살아난다. 나는 늘 극도로 피곤했다. 매일 아침 3시 40분이면 알람 시계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린다. 그 소리는 지금도 내 귓가에 울리는 듯하다. 이어 칠흑같이 어두운 방 안에 어색하게 걸터앉은 듯한 시계 속 주황색 숫자 3:40, 잠이 덜 깬 채 본능적으로 알람 버튼을 끄는 내 손, 지친 몸을 이끌고 침대에서 빠져나와 곧장 문으로 향하는 내 모습이 보인다.

잘 때 입고 있던 옷을 그대로 입고 문을 나선다. 잠이 들 때 나갈 옷을 미리 입고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3시 반이 아니라 3시 40분까지 10분 더 잘 수 있었다.

로키산맥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나는 공과대학 건물로 향한다. 새벽 경비 및 청소 일을 했다. 아침 4시부터 건물 안의 작은 나일론 카펫에 붙은 껌을 떼어내거나 칠판에 써 있는 복잡한 수식들을 지우고, 화장실 변기를 청소하는 게 내 일이었다. 일을 다 마치고 나면 아침 8시쯤 됐다. 그때 나는 수업을 들으러 갔다.

대학교 신입생 첫 두 달간 나의 일과는 늘 이렇게 시작됐다. 그러나 새벽에 경비 일만 해서는 집세를 낼 수 없었다. 그래서 두 번째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학교 구내식당에서 코울슬로와 젤리를 서빙하는 일이었다. 같이 일했던 동료도 나처럼 1학년 학생이었는데, 학교 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 있는 식대를 내지 못해서 일을 했다. 우리 둘은 지금 우리가 주문받고 파는 음식을 정작 우리는 사 먹을 돈이 없다는 씁쓸한 사실을 서로 입에 올리지 않았다.

나는 일하다 주어지는 점심시간에 앞치마를 걸어두고 가방 속에서 미리 싸 온 점심을 꺼내먹었다. 단백질 바 하나랑 동네 슈퍼에서 개당 10센트(약 100원)에 살 수 있는 라면이었다. 매일 같은 메뉴였지만, 그렇다고 질리거나 화가 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나와 같은 학년 학생들, 내 친구들이 먹은 음식이 담은 접시를 씻고, 사용한 화장실을 청소한다고 해서 딱히 창피하거나 모멸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가난, 불평등에 관해서 무언가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긴 했지만 기억에 남은 것은 너무 피곤했다는 사실 뿐이다.

ⓒ Unsplash

난생처음 간 학교에 대한 기억과 다른 경험을 모아 나는 2018년에 비망록 『배움의 발견』을 펴냈다. 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됐을 때 나는 적이 놀랐다. 내가 살아온 길지 않은 인생은 분명 대단히 희귀한, 극단적인 사례에 속한다.

나는 아이다호주의 산골짜기 마을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독실한 몰몬 교도셨는데, 정부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나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출생 신고도 아홉 살이 됐을 때 뒤늦게 했다. 브리검영 대학 강의실이 내겐 태어나 처음 듣는 학교 수업이었다. 나는 2008년에 학부를 졸업하고, 장학생으로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공부했으며, 거기서 박사까지 받았다.

내 삶의 기록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나니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사람들이 책을 읽고서는 내 이야기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피드백을 주는 거다. 출판 기념회나 북토크를 가면 내 책을 읽고 희망을 얻었다는 사람도 있고, 어떤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굳세게 다시 일어서는 내 모습에 감명받았다는 사람도 있다. 사람들이 그렇게 봐준다니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가끔, 아니 종종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나로선 딱히 어떻게 답해야 좋을지 모를 말을 듣곤 하는데, 이런 식의 찬사다.

당신은 아메리칸 드림의 산증인이에요. 누구나 꿈꾸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셨잖아요.

정말 그런가? 내가 풀어낸 이야기는 아메리칸 드림의 전형이나 단면이라고 할 수 있나?

늘 피곤했던 기억을 제외하면, 내 대학 생활을 관통하는 경험은 가난이었다. 나는 무척 가난했던 학생이었기에 늘 한없이 부족했던 돈과 자원으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을 뽑아내려 했다. 학점은 당연히 꽉꽉 채워서 들었다. 다음 학기 등록금을 낼 수 있을지 늘 걱정하며 지냈으니, 비싼 돈 주고 다니는 학교에서 수업을 여유롭게 듣는 사치를 부릴 수는 없었다.

아르바이트도 한 개로는 부족했기에 두 번째 아르바이트도 해야 했고, 야간이든 새벽이든 시급이 높은 시간대가 있으면 무조건 그 시간을 골랐다. 잔디 깎기는 물론이고, 낙엽이든 눈이든 계절 따라 적은 돈이라도 받고 치워야 할 게 생기면 무조건 치웠다. 얼마를 주는지 묻지도 않았다. 아르바이트할 때마다 했던 질문은 딱 하나, 돈을 언제 받을 수 있는지 뿐이었다.

신입생 때 내 삶을 지배한 건 돈이었다. 부족한 돈을 메울 궁리 외에 다른 생각을 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매일 아침 3시 40분에 일어나야 했던 것도 밤 근무는 시급이 6.35달러로 낮 근무보다 1달러 더 비쌌기 때문이다. 자정까지 음악을 크게 틀어놓는 룸메이트 덕분에 하루에 3시간 정도밖에 잠을 못 자겠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잠이 부족하니 강의 시간엔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지만, 상관없었다. 겨우내 잔기침을 달고 살았고 코는 축농증으로 늘 막혔지만, 그래도 내 선택을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1달러나 더 주는데 그걸 왜 마다하겠는가!

피곤…

내 대학 생활은 2학년 때 순식간에 끝장날 뻔했다. 어느 날 턱이 너무 아파서 치과에 갔더니, 의사는 이가 썩어 신경까지 건드리게 됐다며 당장 신경 치료를 해야 한다고 했다. 문제는 치료비였다. 1,600달러가 든다고 했다. 그렇게 큰돈을 구할 길도 막막했지만, 학교는 당장 그만두는 수밖에 없었다. 오빠 한 명이 라스베가스에서 장거리 트럭 운전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오빠가 거처로 사용하는 트레일러에서 몇 달 정도 지내면서 길 건너 버거 가게에서 일하며 돈을 모아볼 생각이었다.

내가 다닌 학교는 브리검영 대학교였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 학생이 몰몬교 신자였다. 학교엔 종교적인 고민을 포함해 대학 생활에 관한 여러 가지 문제를 상담해주는 비숍(성직자)이 있었다. 비숍은 내게 펠 그랜트(Pell Grant)라는 연방정부 장학금을 알려줬다. 나처럼 가난한 학생들에게 학자금과 생활비를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처음엔 뭔지 몰라 두려움에 완강히 거부했지만, 끝내 비숍은 나를 설득했고, 며칠 뒤 4천 달러가 적힌 수표가 내 앞으로 도착했다. 생전 본 적도 없는 큰돈이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서 일주일 동안 수표를 그냥 뒀다. 그렇게 많은 돈을 소유하게 되면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두려웠다. 그러다 잠깐 괜찮아진 줄 알았던 치통이 다시 도졌다. 너무 아파서 어쩔 수 없이 은행에 가서 4천 달러를 현금으로 바꿨다. 바로 신경 치료를 받았고, 등록금도 낼 수 있었다. 입학한 뒤 처음으로 수업 시간에 필요한 교과서도 샀다.

그렇게 하고도 1천 달러 넘는 돈이 남았다. 그래서 학교 구내식당 아르바이트는 그만뒀고, 공과대학 청소 일도 밤 근무 대신 낮 근무로 바꿨다. 더는 수업 시간에 졸지 않았다. 기침은 멎었고, 축농증도 이내 나았다.

ⓒ Unsplash

정부에서 받은 장학금 4천 달러를 현금으로 바꾼 그 날은 내가 비로소 진짜 학생이 된 날이기도 하다. 장학금 덕분에 나는 수중에 있는 돈으로 앞으로 몇 일을 버틸 수 있을지 걱정하지 않게 됐고, 처음으로 강의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4천 달러는 부자가 되기엔 부족한 액수였지만, 당시 내게 무엇보다 필요했던 안정을 주기엔 충분한 돈이었다.

생활이 안정되고 나니, 그제야 대학생이자 성인으로서 나는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지 스스로 묻게 됐다. 내가 뭘 하거나 생각할 때 좋았는지, 내가 무얼 잘했는지 찬찬히, 진중하게 찾아볼 수 있었다. 교과서나 필독서 외에 다른 책을 볼 여유가 생겼고, 필수 과목이 아닌 수업 중에도 그저 재미있어 보여서, 궁금해서 들어보는 수업이 생겼다.

그 순간부터 내가 내린 모든 결정은 장학금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다. 1달러를 더 벌려고 하루 수면 시간을 몇 시간씩 줄였던 시절에 수천 달러는 내 인생을 통째로 바꿔놓았다. 새로운 우주가 열린 것과 같았다. 돈으로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귀중한 일이 무엇인지 그때 절실히 깨달았다. 돈이 있어야 돈과 상관없는 것들을 생각할 수 있는 여유와 능력이 생겼다. 돈에 얽매이지 않게 되자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내 이야기를 하고 싶은 유혹이 들 때도 있다. 나라고 영웅이 되고 싶지 않을까? 굳게 결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험난한 여정을 열심히 헤쳐 왔더니 지금에 이르렀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더 열광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이야기의 중심은 사실 내가 아니다. 그보다는 나를 둘러쌌던 조건과 환경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브리검영 대학교(Brigham Young University, BYU). 미국 유타주 프로보에 있는 사립대학이다.

나는 2004년에 브리검영 대학교에 들어갔다. 브리검영 대학은 몰몬교 교회가 상당한 금액을 지원하기 때문에 사립대학이지만, 한 학기 등록금이 1,640달러로 매우 쌌다. 2008년 부실 부동산 담보 채권에서 시작된 금융위기가 오기 전이었다. 그래서 나는 룸메이트가 있는 낡은 아파트를 월세 190달러에 얻을 수 있었다. 18년 전 나는 어쨌든, 일과 학업을 병행할 수 있었다. 무척 힘들고 피곤했지만, 애초에 엄두도 못 낼 정도는 아니었다.

여름방학 때 아이다호 집에 오면 읍내 슈퍼마켓에서 장 본 물건을 담아주는 일을 했다. 시급 5.35달러를 받고 일했다. 1년 학비와 생활비가 3천 달러 정도 들던 시절이다.

종이 가방, 비닐봉지 중 어디에 담아 드릴까요?

그 돈을 벌려고 여름 내내 이 말을 수천 번 해야 했지만, 어쨌든 그렇게 방학 때 아르바이트를 하면 학기 중엔 학교로 돌아가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정부를 믿지 않아 공교육도 믿지 못한 부모님은 나를 학교에 보낸 적이 없다. 대학교는 내 의지로 갔으니, 학비나 생활비를 보태줄 거라고는 기대조차 할 수 없었다. 돈도 돈이지만, 학교라는 공간에서 같이 수업을 듣고 방과 후에 같이 공부하고 과제를 하는 생활 자체도 한없이 낯선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간절히 원하는 일이라면 해볼 여지가 얼마든지 있던 시절이다.

오늘날이라면 18년 전의 나는 절대 나올 수 없었다. 가난한 집안 출신 학생은 내가 받은 교육을 받을 수 없다. 트럭 운전사, 농부, 청소 노동자, 택시 기사들은 미국에서 아마 가장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들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들이 자녀에게 대학 교육을 시키기는 너무 어려워졌다. 교육부 자료에 따르면 미국 4년제 대학교 등록금은 물가 인상을 반영한 뒤에도 30년 전보다 두 배 이상 비싸졌다. 2019년 고등교육정책 진흥기관이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미국의 평균적인 주립대학에 다니려면 저소득층 집안 출신 학생들은 8만 달러 정도를 빚을 내야 한다. 미국에서 가장 학비가 싼 축에 속하는 브리검영 대학교도 내가 졸업한 뒤 등록금이 두 배 이상 올랐다.

펠 그랜트 장학금은 내게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상태가 어떤 것인지 생생히 알려준 소중한 첫 경험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등록금도, 집값도 너무 올라서 펠 그랜트 장학금만 받아선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할 수 없다. 50년 전 처음 장학금 제도가 마련됐을 때만 해도 펠 그랜트 장학금은 4년제 대학에 다니는 데 드는 비용의 79%를 지원했다. 오늘날 그 비중은 29%로 낮아졌다. 여전히 훌륭한 제도지만, 경제적 안정을 가져다주기엔 너무 부족한 금액이 돼버린 거다. 그래서 내가 장학금 덕분에 누릴 수 있었던 경제적 안정, 마음의 평안, 그 전엔 사치로 여겨지던 삶의 진로에 관한 고민이 모두 이제는 불가능해졌다.

출처: Freepik

오늘날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우리는 아무런 희망도 주지 못하고 있다. 교육만이 희망이라고, 대학교 학위만 있으면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수 있다고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그 말에 책임질 자신이 없다. 오늘날 가족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아이들에게 대학 교육을 받으라는 건 결국 엄청난 빚더미에 앉으라는 소리일 뿐이다. 그렇게 교육을 받고 난 뒤에 과연 얼마나 안정적인 직업을 구해서 돈을 벌 수 있을지, 어마어마한 학자금은 언제 갚을 수 있을지는 갈수록 불확실해지고 있다. 그 사실을 조언하는 우리도, 듣는 학생들도 이미 다 안다. 그들에게 아메리칸 드림은 허울 좋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래서 내 책은 아메리칸 드림의 생생한 증거라기보다 아메리칸 드림이 얼마나 신기루에 가까워졌는지를 극명히 보여주는 씁쓸한 방증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까? 해결책은 여러 가지가 있다. 공교육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고, 교육을 이윤을 창출하는 도구가 아니라 철저히 공공재로 취급하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펠 그랜트 같은 정부 장학금을 늘리고, 학자금 제도도 개선해야 한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최근 들어 우리 사회와 정치를 모두 병들게 한 거대한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혜를 모으고 행동에 나서야 한다.

나부터 할 일을 하려 한다. 우선 내 이야기를 틀에 박힌 영웅담으로 윤색하지 않을 거다. 그런 이야기의 문제는 성공의 비결을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나 끈기처럼 개인의 문제로 국한하는 데 있다. 외부적인 요인도 똑같이, 어쩌면 더 중요한데, 늘 이를 간과한다. 그래서 나는 우선 솔직히 인정하려 한다. 내가 대학생일 때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기회가 주어진 걸 보면 분명 좋은 시절이었다고 말이다. 어쩌면 『배움의 발견』은 내가 배움에 눈을 뜰 수 있게 해준 환경에 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출처: 교보문고

펠 그랜트 장학금을 손에 쥐었을 때 절실히 깨달은 바가 하나 있다. 사람은 넘어지고 무너졌을 때 늘 굳세게 일어날 수 없지만, 국가라면 언제나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원문: 뉴스페퍼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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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 없이 누구나 바른 소리를 느낄 수 있도록, 훈맹정음 https://ppss.kr/archives/248086 Tue, 21 Dec 2021 05:15:48 +0000 http://3.36.87.144/?p=248086 지난 6월, 서울 종로에서 한글 금속활자가 출토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한글을 널리 쓰기 위한 활자까지 발견되고 보니 우리가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읽는 것의 과정과 함께 글자의 감사함을 느낄 수 있던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 글을 읽지 못하는 시각 장애인들은 어떻게 글자를 인식할까요?

다들 아시듯이 시각 장애인들은 ‘점자’를 사용합니다. 음료 캔이나 엘리베이터 등 일상생활의 곳곳에 점자를 배치하기도 하죠. 이러한 점자들은 언제, 어떻게, 누구를 통해서 만들어진 걸까요?

점자. / 출처: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첫 한글점자는 1898년 미 북감리교 선교사인 로제타 홀 여사가 평양에서 맹아학교를 설립하고, 한글점자를 창안해 교육했습니다. 또한 교과서와 성경책 등을 출판해 보급했습니다. 하지만 이 한글점자는 뉴욕점자인 4점 점자여서 자음의 초성과 종성이 구별되지 않는다는 단점이 존재했습니다.

이후 1913년, 조선총독부는 제생원 맹아부를 설치하고 일본의 6점 점자를 도입해 가르쳤습니다. 학생들은 이 6점 점자로 인해 기존의 4점 점자와 6점 점자의 차이를 느낄 수 있게 되었고, 6점 점자를 사용한 학생들은 좀 더 편리한 6점 점자로 한글 점자를 제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기 시작했습니다.

학생들의 의견에 따르면 기존 한글점자의 경우, 반수 이상의 자모가 두 칸으로 제자되었고 글자가 서로 중복되어 오독 가능성이 커진다고 했습니다. 이에 한글점자를 6점 점자로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에 점점 힘이 실리기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평양 맹아 학교 08반 여학생들. / 출처: 『KOREA MISSION』(METHODIST EPISCOPAL CHURCH, 1910)

학생들은 당시 제생원 맹아부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박두성 선생을 찾아가 6점 점자로 한글점자를 만들고 싶다는 의견을 제시했고, 박두성 선생은 제자들과 함께 새로운 한글점자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박두성 선생은 그 이전부터 조선어 과목을 폐지하려는 일본인 교사들에게 반문하며 조선어교육을 주장했습니다. 또한 어려운 일본어로 진행되어 이해에 어려움을 겪는 과목들은 직접 배워 가르치는 등 학생에 대한 애정이 높은 면모를 보였습니다.

박두성 선생은 한글점자를 창안하는 것이 일본의 민족 유화책과 한글 말살 정책에 반대되는 일임에도, 맹인들을 위해 결심을 굽히지 않고 한글 점자를 완성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제생원 맹아부 학생들과 박두성 선생. / 출처: 국립서울맹학교

박두성은 한글점자를 만들기 위해 두 가지 일을 진행했습니다. 먼저 이전에 존재했던 한글점자를 만든 홀 여사에게 6점 점자로 한글점자를 창안하자고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홀 여사는 기틀이 잡혀가는 점자를 버리고 새로운 점자를 만든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박두성은 홀 여사와의 공동연구를 포기했습니다.

두 번째로는 제생원 맹아부에 4점 점자가 아닌 일본과 같은 6점 점자로 한글점자로 만들어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건의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인이었던 맹아부의 부장은 조선어의 자모 수가 영어의 알파벳 글자 수와 비슷하니, 영어 알파벳 글자를 그대로 조선어 자모에 적용해 사용하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맹아부 부장의 뜻대로 인쇄된 점자를 본 조선총독부에서는 ‘조선어 점자를 만든 것 자체’가 일본의 방침과 반대된다며 맹아부 부장은 호된 질책을 받게 됩니다. 이후 맹아부 부장은 더 이상 조선어 점자 연구에 관심을 갖지 않았고, 덕분에 박두성과 제자들이 주변의 눈길을 피해 한글점자를 연구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한글점자 초고. / 출처: 국립한글박물관

이렇게 만들기 시작한 한글 점자는 ‘배우기 쉬워야 하고’ ‘점자의 수는 적어야 하며’ ‘서로 혼동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는 목표를 중점으로 두었습니다. 1920년부터 한글 점자에 관한 연구를 시작해 1921년에 초안을 만들었고, 이를 다듬어 1923년에 완성했습니다. 이 점자는 자음을 모두 세 점으로, 모음을 모두 두 점으로 제자해 3·2점자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초성과 종성이 구별되지 않는 결정적인 단점이 발견되었습니다. 이에 조선어 점자연구 위원들은 새로운 한글 점자를 다시 만들 것을 주장했고, 1923년 말부터 완벽한 한글점자를 위한 여정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최종적인 점자가 나오기까지 12개의 안이 제안되었고, 조선어 점자연구위원들은 이 안을 토론하면서 계속해 연구했습니다. 박두성은 국어에서 실제로 쓰인 자모의 빈도와 12개 안의 점의 수, 기억하기 쉬운 점자를 기준으로 다시 한번 비교 검토해, 제11안을 채택하고 ‘훈맹정음’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1926년 11월 4일에 박두성과 제자들은 훈맹정음 반포식을 거행했으며, 이날이 지금까지 이어져 한글점자 기념일이 되었습니다.

훈맹정음. / 출처: 국립한글박물관

훈맹정음이 발표된 후 점자는 빠른 속도로 보급되었습니다. 제생원 맹아부의 재학생과 졸업생들에게도 한글점자를 가르쳐 사용하도록 했으며 전국의 맹인들도 사용할 수 있게끔 점자 통신 교육을 활용했습니다.

제생원 졸업생인 정창규의 집에서 육화사라는 간판을 걸고 지속적으로 점자연구와 교육을 해나간 박두성은 우체국 사서함을 사용해 통신교육을 통해 점자를 가르쳤으며, 그의 제자들에게 매월 정기통신문을 보내게 하고,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점자를 모르는 사람에게 점자를 가르치라는 지침을 내렸습니다.

이러한 박두성의 계획 덕분에 전국의 많은 맹인이 한글점자를 깨우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점자 통신교육자료를 받아 읽은 후 박두성과 편지를 할 수 있었으며, 박두성은 거의 모든 질답에 응해주며 맹인들의 세상을 넓혀주는데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점자 카드가 담긴 편지 봉투. / 출처: 국립한글박물관

이렇게 박두성의 점자 통신교육은 전국의 많은 맹인과의 연락을 통해 제생원의 학생 모집에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당시 한글교육의 중심이 되었던 기독교에서도 점자를 활용할 수 있게끔 성경을 점역했고, 제생원 맹아부를 은퇴한 후에도 계속해서 성경과 일반도서 점역에 전념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박두성의 노력으로 인해 맹인들은 한글점자로 책을 읽으며, 새로운 세상을 보았고 꿈을 키워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훈맹정음의 점자가 몇 차례 수정과 보완을 거쳐 현재 우리나라에서 표준으로 삼는 ‘한글 점자 통일안’이 되었는데요. 박두성과 그의 제자들은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을지 헤아리기도 힘들 듯합니다.

우리의 글자가 있어도 뱉지 못했던 시절, 내일이 두려워 눈앞이 깜깜했을 시절에도 가슴의 등불을 밝혀주었던 사람들이 존재했기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글을 보고, 읽고, 느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훈맹정음’의 뜻처럼 누구나 차별 없이 바른 소리를 배우고, 모두가 어우러진 세상이 되길 바랍니다.

박두성 67세 즈음 사진. / 출처: 국립한글박물관

원문: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브런치 / 글·기획: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한걸음기자단 8기 정민경


참고자료

  • 임안수, 『한글점자를 창안한 송암 박두성 선생의 생애와 업적』, 황해문화, 2008년, 61쪽, 319–3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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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의 수명은 이제 다했어요” https://ppss.kr/archives/248692 Mon, 20 Dec 2021 02:39:56 +0000 http://3.36.87.144/?p=248692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 태어난 지 27살이 됐다. 언젠가부터 수능이 끝나면 ‘물수능’이니 ‘불수능’이니 하는 말들이 의례적으로 터져 나왔다.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능력을 가늠해 본다는 본래 목표는 사라지고 얼마나 완벽하게 학생들을 줄 세웠느냐를 두고 성패를 따지는 대상으로 전락한 수능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풍경이다.

올해 수능에 관한 품평들을 보면 분위기나 결이 여느 해와 크게 다른 것 같다. 출제 오류 논란에 휩싸인 생명과학 20번 문항이 법원 판결을 받는 처지가 되더니, 세계적 석학에게 진지한 목소리로 오류를 지적당하는 신세가 됐다.

집단유전학 분야의 세계 최고 석학 중 한 사람이라는 조너선 프리처드(Jonathan Pritchard) 스탠퍼드대 빙 석좌교수가 지난 11일 20번 문항에 대해 말한 트윗. “중대한 대학입학시험, 수학적 모순, 법원의 가처분명령 (흥미의) 요소를 다 갖추고 있다.” / 출처: 트위터 @jkpritch

2017년부터 2년간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으로 재직하면서 수능 업무를 총괄한 경험이 있는 성기선 카톨릭대 교수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수능의 수명은 이제 다했죠. 교과 중심으로 풀 수 있는 수능을 넘어섰어요.

수능은 수험생들의 대학입학 여부를 가르는 주요 ‘룰’이다. 출제 오류나 법원 처분 대상에 올랐다는 사실 자체가 ‘룰’로서의 위신에 치명타를 가하는 요소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오류 하나 없는 교과형 수능 문항으로 ‘룰’로서의 완벽성을 실현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럴 수 없다고 본다.

나도 성 교수처럼 수능 종말론에 동의한다. 그리고 수능 폐지론을 주장하고 싶다. 종말이나 폐지에 관한 한 우리는 그 시기를 아무리 빨리 앞당겨 실시해도 지나치지 않다.

룰은 아무리 잘 만들어도 완벽할 수 없다. 수능은 더욱 그렇다. 현재의 수능은 선별, 배제, 탈락 같은 변별 기능을 유지하는 것이 핵심이며, 이런 시험에서는 문제 풀이에 최적화한 소수의 상위권 학생들만이 주로 이익을 챙긴다. 나머지 대다수 학생은 이들의 들러리나 배경 구실에 머문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거대한 시험 이벤트를 전 국가적인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치밀하게 준비해 실행한다. 수능 시험 결과가 모든 학생의 인생을 좌우하는 것인 것처럼 선동하면서 말이다. 구조적으로 수능 패배자가 될 수밖에 없는 학생들은 이런 생각을 강요받는다.

내 노력이 부족했어.

성 교수의 말마따나 “거시적으로 보면 (수능처럼-글쓴이) 이렇게 불공정한 평가는 없다”. “할아버지 때부터의 경제력, 엄마의 정보력, 교육열, 유전인자, 학교에 가기 전까지 보인 초기 사회화 과정 등 학습 능력의 대부분은 이미 학령 전에 결정돼 나”오고 그 차이가 “학교를 다녀도 좁혀지지 않고 쭉 벌어지”는 상황에서 수능 시험 한 방으로 인생이 결정되(리라고 믿)는 것만큼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일이 있을까.

얼마 전 독립연구자 박동섭이 쓴 『동사로 살다』(빨간소금, 2021)를 읽다가 농구의 ‘24초 룰’을 화제로 한 긴 대화문 꼭지를 재미있게 읽었다. 24초 룰은 공을 가진 팀이 24초 안에 무조건 골대나 그 근처로 공을 날리는 슛을 해야 한다는 규칙이다.

농구는 1891년에 발명됐고, 1898년 미국에서 처음으로 프로농구가 출범했다고 한다. 24초 룰은 1954년 어느 프로농구팀 구단주가 제안해 경기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그사이 미국 프로농구는, 전반전에서 이긴 팀이 후반전에도 이기는 경기를 유지하려고 공을 드리블만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이른바 ‘침대 농구’의 늪에 빠졌다.

선수나 감독이나 구단주들은 경기가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을 것이라는 점을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 각자 최선을 다해 달렸다. 특히 선수들은 “진짜 문제는 룰에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각자의 노력 부족을 자책했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교육의 이름으로 비교육을 행하는 것만큼 비교육적인 일은 없을 것이다. 수능 시험으로 우리가 만들어 내려는 인간상이나, 그들이 살아갈 사회상이 무엇일지 근원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할 때다.

원문: 정은균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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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의 ‘한자 교육’ 타령, 이제 그만 좀 합시다 https://ppss.kr/archives/248246 Mon, 06 Dec 2021 01:35:57 +0000 http://3.36.87.144/?p=248246 국어 능력의 저하, ‘한자 교육 중단’에서 찾을 일이 아니다

지난 11월 중순에 인터넷에서 《조선일보》 기사 「‘무운을 빈다’… 이게 뭔 소리? 검색창이 난리 났다」를 읽었다. 부제는 “국어사전 명사 80%가 한자어… 한자 의무교육 중단 20년이 부른 풍경”이다. ‘한자어’니, ‘의무교육’이니 뻔한 레퍼토리여서 어떤 기사인지를 단박에 눈치챘다.

기사는 ‘한자를 모르는 젊은이들이 점차 늘면서 벌어지는 일’ 몇을 소개하면서 그게 다 ‘한글 전용’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일부 젊은이들이 ‘무운(武運)’을 ‘운이 없음[무운(無運)]’으로 이해하고, 도쿄올림픽 여자 양궁 ‘9연패(連霸)’ 기사를 두고 댓글에 ‘우승했는데 연승이 아니고, 연패라고 하느냐’는 질문을 이어갔다는 얘기다.

국어 능력 문제를 ‘한자 교육 중단’에 묻는 《조선일보》 기사(11.11.). ⓒ 조선일보 인터넷 갈무리

 

원인은 정말 ‘한자’를 안 배워서일까

문제가 심상치 않은 것은 맞다. 그러나 원인을 ‘한자 교육 중단’에서 찾는 건 ‘역시나’고, 아직도 제호를 한자로 늠름하게 쓰고 있는 ‘1등 신문’다운 처방이다. 잊을 만하면 도돌이표처럼 돌아오는 논란, ‘한자 교육론’ 말이다.

‘한글전용에관한법률’이 제정된 건 1948년이었지만, 1963년에서 1971년까지는 교과서에 국한문을 섞어 썼다. “다만, 얼마 동안 필요한 때에는 한자를 병용할 수 있다”라는 단서 규정에 따라서다. 2005년 ‘국어기본법’이 제정되며 ‘한글전용에관한법률’은 폐지되고, 해당 규정은 국어기본법으로 이전되며 약간 보완되었다.

국어기본법은 완전한 한글전용이라기보다는 보조어 병기를 일정 부분 허용한다. 또 이 법은 사적 문서의 한글전용을 강제하지는 않는다. 한글전용이 정착하면서 일간지에서 한자를 쓰지 않게 된 것은 1988년 창간된 《한겨레》부터였다. 어느덧 30년이 훌쩍 지났지만, 한글전용 《한겨레》에서 기사 읽기가 불편하다는 독자는 없다.

그런데도 잊을 만하면 국어 능력의 저하가 한자 교육 중단에 따른 문제라고 강변하는 이들이 있다. 적지 않은 학자와 국회의원들이 이러한 민원을 받아들여 한자 교육론을 부르댄다. 2011년에는 ‘한자교육기본법’을 제정하려고 국어기본법의 일부 개정 법률안이 국회에 제출되는 일까지 있었다.

국어기본법의 “국어란 대한민국의 공용어로서 한국어를 말한다”는 조항을 “국어란 대한민국의 공용어로서 한글과 한자로 표기되는 한국어를 말한다”로 바꾸자는 개정안이었다. 국어를 정의하는데 난데없이 중국 문자를 들먹인 까닭은 그래야 한자를 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모국어’ 개념을 정의하는 데 다른 나라 글자를 불러온, 이 법안에 서명한 이는 22명이었다. 이들 가운데는 현재 현역 국회의원도 적지 않다. 물론 그 ‘다른 나라 글자’는 1천 년 넘게 국자를 대신한 문자이긴 했다. 그러나 한글만으로도 완벽한 문자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지금, 다시 ‘한자의 보조’를 국어의 정의에 명시하자는 제안은 얼마나 몰 주체적인가.

 

40년째 교과서 한자 병기 주장

한자를 알면 어휘가 늘고 문해력이 높아진다고? 그게 사실일까?

초등교과서에 한자를 함께 적자는 주장은 무려 40년째 해묵은 논쟁을 이어가고 있다. 이 제안은 한글학회를 비롯한 한글 관련 단체, 한글전용에 찬성하는 시민과 교사 등의 반대에 부딪혀 번번이 좌절되었다. 한자 병기 주장이 ‘한글전용의 정당성과 합리성’을 넘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글로만 써서 “올바른 이해와 표현에 어려움이 있었나. 문장력과 사고력이 저하되었나. 세대 간 의식 차이가 심화되었냐”라고 하는 한글학회의 반문에 이들은 아무도 자신 있게 답하지 못한다.

2012년 학부모와 대학교수, 한자·한문 강사 등이 “공문서의 한글전용 작성을 규정한 국어기본법은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냈으나, 2016년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이 법 규정을 합헌으로 결정하기도 했다.

《조선일보》 기사가 전하는 내용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위 기사가 전하는 현상의 원인이 《조선일보》가 단언하는 바와 같이 한자 교육의 중단이라는 데는 동의하기 어렵다.

 

한자를 알면 어휘가 늘고 문해력이 높아질까?

대체로 한자 교육의 효과를 굳게 믿는 이들은 한자를 알면 낱말의 뜻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어휘가 늘고 문해력도 높아진다고 믿는다. 이는 교육 종사자는 물론 일반 학부모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건 얼마나 사실에 가까울까?

《조선일보》 기사는 ‘팩트’부터 틀렸다. “국어사전 명사 80%가 한자어”라고 했는데, 묵은 정보다. 국립국어원이 2010년 발간한 「숫자로 살펴보는 우리말」에서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실린 표제어 약 51만 개 가운데 한자어의 비율은 58.5%다. 고유어는 25.5%로 한자어의 절반 이하다.

물론 고유어보다 한자어가 많다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게 한자를 배워야 하는 근거가 되는 건 아니다. 실제로 이미 귀화어가 되어 한자어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한자어도 적지 않다.

출처: 「숫자로 살펴보는 우리말」, 국립국어원, 2010.

훈(訓)으로 뜻을 새길 수 있는 한자어도 제한적이다. 비근한 예로 ‘선생(先生)’과 ‘제자(弟子)’는 각각 ‘먼저 태어난 사람’, ‘아우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치매(癡呆)’도 ‘어리석다’라는 뜻 두 개가 겹치는 구조다. 개별 글자의 훈을 묶어서 낱말의 의미를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한자 공부가 도움이 된다고 믿는 이들은 낱말 의미의 인식에서 한자 뜻을 새기는 과정이 ‘선행’하는 것으로 상정한다. 이를테면 ‘학교’라는 낱말은 ‘배울 학, 집 교’를 묶어서 뜻을 파악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낱말의 뜻을 그렇게 분절적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우리는 개별 글자의 훈보다는 낱말 덩어리 채로 기억 속에 이를 저장한다. 낯선 어휘는 글과 대화의 맥락을 살펴서 그 뜻을 새긴다. 정작 한자 뜻을 새기는 것은 부수적인 확인 과정일 뿐이다. 나는 교과서에 국한문을 섞어 쓴 1963년에서 1971년까지 초중학교를 다녀 한자가 낯설지 않다. 한자어의 훈으로 낱말의 뜻을 살필 수도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은 성인이 된 뒤였다.

빛깔을 가리키는 ‘연두’나 ‘고동’은 한자로 ‘연두(軟豆: 완두콩처럼 연한 콩)’, ‘고동(古銅: 헌 구리)’으로 쓴다. 우리는 대체로 이들 낱말의 뜻을 한자와 상관 없이 기억하고 인식한다. ‘연두’나 ‘고동’의 뜻을 일러주면 사람들은 그게 한자였냐고 반문한다. 한자를 몰라도 연두나 고동의 빛깔을 분명하게 알듯, 한자와 상관없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낱말을 알고 있는가!

 

국어 능력 저하의 원인은 따로 있다

우리는 새로운 낱말을 만나면 사전을 뒤져 그 뜻을 새기는 게 아니라, 그 낱말이 쓰인 맥락을 살펴서 그 내밀한 뜻을 새긴다.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에 대한 선험적 지식도 그 뜻의 이해를 돕는다. 형식적 표지에 불과한 한자의 훈에 의존한 낱말 뜻의 파악이 일면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한자에 익숙한 50대 이후의 기성세대에게는 한자가 친숙한 문자 체계고 그 함의를 통해 어휘력을 늘려온 경험이 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걸 전혀 다른 문자관(文字觀)을 익히며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강요할 일은 아니다.

우리가 한자를 모르면서 아는 낱말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이제 아이들에게 한자는 영어나 프랑스어처럼 외국어가 된 것처럼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는 한자 쓰기는 우리말로 풀이하는 번역과정을 하나 더 늘리는 일일 뿐이다. 이미 머릿속에 ‘학교’의 의미를 새겼는데, 새삼스레 ‘배울 학, 집 교’를 덧붙이는 것은 사족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무운(武運)’을 ‘무운(無運)’으로 잘못 읽거나, ‘갹출(醵出)’ 앞에 얼어붙는 이유는 한자를 배우지 않아서가 아니라, 언어생활이나 독서 경험 등으로 그 낱말을 겪고 써보지 못해서로 보는 게 훨씬 사실에 가깝다. ‘N빵’이나 ‘가부시키(株式, 일본어로 ’나눠 내기‘)’를 알아듣는 것은 그게 생활 속에서 습득한 낱말이기 때문이다. 낱말은 말과 글로 씀으로써 온전히 화자의 것이 된다.

국립국어원의 2013년 ‘국어 능력’ 평가에서 과반수(54.7%)가 ‘기초 이하’로 나온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언어생활에서 제대로 활용함으로써 국어 능력은 심화·확장한다. 문해력은 단순히 글자를 읽고 쓰는 능력이 아니라, 맥락 속에서 언어를 알맞게 활용하고 그 의미를 새길 수 있는 능력이다. 국어 능력의 저하가 한자를 몰라서라고 부르대는 일은 이제 그만할 때가 되었다.

원문: 이 풍진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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