ㅍㅍㅅㅅ https://ppss.kr 필자와 독자의 경계가 없는 이슈 큐레이팅 매거진 Thu, 12 Sep 2024 05:12:21 +0000 ko-KR hourly 1 https://wordpress.org/?v=5.8.10 https://ppss.kr/wp-content/uploads/2015/07/ppss-100x100.png ㅍㅍㅅㅅ https://ppss.kr 32 32 우리 지역의 병원이 없어진다면 https://ppss.kr/archives/266944 Thu, 12 Sep 2024 05:12:21 +0000 http://3.36.87.144/?p=266944 1.

지역 병원의 폐업이 반복되고 있다. 최근 경상남도 동부권에서만 종합병원 2개 기관이 문을 닫았다.

김해 중앙병원은 지역응급의료센터 운영 등 지역의 필수의료를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했으나 부실운영과 무리한 신축병원 건립 실패로 2023년 10월 운영을 중단하였다. 웅상중앙병원은 동부 양산 유일의 응급의료기관이었지만 병원장 별세 후 인수자를 찾지 못해 2024년 3월부터 폐업 상태다. 경남 서부권 농촌 지역에서도 군 내 유일한 응급실이 있었던 새하동병원이 경영난으로 휴업을 반복하다가 2022년 3월 결국 폐업하기도 했다

병원이 폐업한 후 지역 경제나 의료 접근성, 건강 결과 등이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연구는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관련 연구 「농촌 종합병원 폐업이 지역사회에 미치는 영향」). 폐업 후 대체로 응급 이송 시간이 길어지고 병원서비스 접근성은 감소했지만, 의료의 질이나 건강 결과 측면에서는 뚜렷한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2.

그렇다면 질문해 보자. 지역 병원이 폐업하고 사망률이 증가하지 않았거나, 심지어 건강 결과는 오히려 좋아졌다고 한다면 병원 폐업은 문제가 아닌 걸까?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병원이란, 의료란 무엇을 위한 것인지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만약 병원의 존재 의의가 숫자로 요약되는 건강 결과에만 있다고 하면 지역의 병원 하나쯤 없어져도 괜찮다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병원과 주민이 맺는 사회적 관계 자체를 의미 있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면, 병원 폐업 후 주민의 인식과 경험을 세심히 살펴야 비로소 질문에 답할 수 있게 된다.

오늘 소개하는 논문은 미국에서 농촌 병원이 폐업하고 1년 뒤에 주민의 인식을 조사한 연구다.

작가 mrsiraphol 출처 Freepik

연구의 배경이 된 미국 테네시주는 2010년 이후 14개의 농촌 병원이 폐업했다. 그중에서도 애팔래치아는 산간 지역으로서 경제적으로 낙후되었을 뿐 아니라 의료 접근성도 다른 지역보다 떨어진다. 의사를 비롯한 의료 제공자가 부족하고, 의료기관까지 거리도 멀며, 교통 상황도 열악하다. 건강보험이 없는 사람의 비중이 높고, 건강 정보를 습득하고 해석하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도 많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역 병원의 폐업은 기존 건강 불평등을 악화시킨다는 점에서 더 문제적이다.

연구진은 조사를 위해 54병상 규모의 작은 병원이 폐업한 지역을 찾았다. 빈곤율과 실업률이 높고 의료서비스 공급도 부족한 농촌 마을이었다. SNS와 지역 언론의 온라인 광고를 통해 병원에 관해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모집했고, 연구참여자가 소개해준 다른 주민을 만나는 방식으로 총 24명을 인터뷰했다. 인터뷰 내용을 분석하기 위해 의료 접근성을 가용성(availability), 접근성(accessibility), 편의성(accommodation), 지불능력(affordability), 수용가능성(acceptability) 등 5가지 차원으로 구성한 이론적 틀을 활용하였다.

연구 결과, 접근성 면에서는 모든 연구참여자가 병원 폐업 후 진료를 위한 이동시간이 길어졌다는 데 동의했다. 설상가상으로 외지 병원으로 이동하려면 더 열악한 도로를 거쳐야 했다. 대중교통 인프라는 턱없이 부족했고 특히 노년층과 거동불편자가 교통수단을 마련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주민들은 의료서비스를 이용하기 어려워졌다는 인식도 공유하고 있었다. 응급의료와 전문의 서비스는 더 이상 지역 내에서 이용할 수 없게 되었다. 주민들은 근처에서 응급 상황에 대처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몹시 애석해했다. 과거와 달리 기본적인 CT 검사를 위해서도 외지로 나가야만 했다.

사진: UnsplashZhen H

지역 병원이 폐업하면서 의료 이용의 경제적 부담도 가중되었다. 외지 응급실에 가기 위해 구급차를 이용해야 하는 상황은 가장 일반적인 걱정거리였다. 건강보험이 없는 사람들은 의료비 문제로 병원 방문을 미뤄야 하거나 이용 자체가 불가능할 것 같다고 염려하고 있었다.

일부 주민은 이전보다 대기 시간이 길어지고 진료받기가 불편해졌다는 사실도 지적했다. 연방공인보건센터에서 의료진을 만나려면 몇 달이 소요되는 일도 있었다. 병원 폐업 전에는 지역에서 365일 24시간 응급 진료가 가능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일과시간에 맞춰 진료를 받으려면 휴가를 내야만 했다.

마지막으로 주민들은 병원과 맺고 있던 관계를 잃게 되었다. 기존 병원의 의료진과 직원은 몇 다리만 건너면 아는 사이였고, 이는 ‘저 사람은 나를 진심으로 돌봐줄 것’이라는 신뢰로 이어졌다. 드나들던 병원 시설의 익숙함도 주민들이 안정감을 느낄 수 있게 했다. 하지만 병원 폐업과 함께 친숙한 관계도 사라지고 말았다.

논문은 결과를 갈무리하며 농촌 응급의료기관 지정 및 재정 지원, 일차의료 강화, 메디케이드 확대, 대체 의료시설을 확충하기 위한 법 개정 등 다양한 층위에서 의료 격차를 줄이기 위한 전략을 제시한다. 실질적인 정책 대안을 마련하는 일이 중요함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우리 지역의 의료를 지킬 수 있는 힘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지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사회적 동력이 없이는 아무리 좋은 정책도 제대로 구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3.

인구 감소와 저성장, 수도권 집중화가 심화하는 시대에 숫자 싸움만으로 비수도권 비도시 지역에 힘을 싣기는 쉽지 않다. 숫자를 통해 불평등을 드러내려는 노력의 가치를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다른 차원에서는 의료란 문서상의 건강지표가 아니라 사람들의 실제 삶과 생활을 낫게 만들려는 도구라는 점을 주장하고, 주민의 고유한 인식과 경험을 판단의 근거로 삼을 수 있게 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 연구의 가장 중요한 의의는 인터뷰를 통해 정책의 내용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실마리를 포착한 데 있지 않다. 그보다는 고작 54병상짜리 병원이 없어진 지역을 주목하고, 소중한 병원을 잃은 사람들의 경험세계를 탐구해 공적 의미를 부여한 것 자체에 있지 않은가 한다.

원문: 시민건강연구소


서지 정보

  • Letheren, A., Brown, K. C., Barroso, C. S., Myers, C. R., & Nobles, R. (2024). Perceptions of access to care after a rural hospital closure in an economically distressed county of Appalachian Tennessee. The Journal of Rural Health, 40(2), 219-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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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생 총력대응’의 진정성을 보여라 https://ppss.kr/archives/266500 Thu, 11 Jul 2024 02:38:54 +0000 http://3.36.87.144/?p=266500 지난 19일에 열린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에서 대통령은 국가 인구비상사태를 선언하고, (가칭) ‘인구전략기획부’ 신설과 ‘인구위기 특별회계’를 비롯한 각종 범국가적 총력대응 정책들을 발표했다. 이전 정부에서 내놓은 저출생 대책과 다른 점은 위상을 높인 전담부처와 별도예산을 명시하고, 저출생의 직접 원인이 되는 일·가정 양립, 양육, 주거 3대 분야를 집중 지원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비상사태라는 진단에 걸맞는 대응책이며, 정부가 집행에 진정성을 보일지 회의적이다. 우선 국회에서 정부조직법상 ‘여성가족부’의 존폐가 정리되어야 부총리급 ‘인구전략기획부’가 들어설 수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윤석열정부 출범이후 지속된 여야의 대치 정국을 풀고 다른 모든 일에 앞서 그 합의를 이끌어 낸다면, 정부가 말한 ‘총력대응’의 의지를 신뢰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어렵다면, 나머지 정책들의 파급력은 다시 말할 것도 없다.

출처: MBC

시민들은 당장 정부의 여러 감세정책 때문에 재원은 마련할 수 있을지, 주거지원정책이 아니라 부동산정책이 아닌지, 아동돌봄시간 연장보다 노동시간 단축이 우선이 아닌지, 성차별 해소 없이 일·가정 양립은 가능한지, 게다가 외국인 유학생과 그 배우자에게 ‘최저임금을 적용하지 않는 가사 돌봄 취업 기회’를 주는 것이 글로벌 시대정신에 맞는지 묻고 있다.

‘휴대폰이 재미있어서 애를 안 낳는다’거나 ‘여아 조기입학으로 저출생을 해결한다’는 정부기관의 발표가 거센 비판과 조롱을 받았던 것이 불과 두 달도 되지 않았다(관련기사1, 관련기사2). 과연 한국의 인구정책 결정권자들은 저출생이 왜 문제라고 생각하고, 진정 이 문제를 해결할 의지와 능력은 있는 것일까? 이런 발표가 연이어 나온다는 것은 한마디로 무능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비상사태가 어제처럼 오늘도 이어지고, 오늘보다 내일 더 심해져서 결코 ‘저출생 추세 반전’이라는 대통령의 목표를 이루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한두 사람에 그치지 않는 것 같다.

태어나지 않는 아이들을 걱정하면서 딴 수가 없으니 안 하는 것보다는 하는 게 낫고, 없는 것보다는 이런 지원 정책이라도 나오는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다 같이 보다 더 나은 삶을 살게 하려고 머리를 맞대고 애쓴다기보다, 형편이 더 좋은 사람이 더 많은 지원정책의 수혜를 입고 사정이 어려운 누군가는 희생하고 곤란한 삶을 견디라고 하는, 더욱 강고한 불평등의 체제화를 비상사태의 해법으로 삼는 데 동의할 수는 없다.

당장 단기 육아휴직 도입과 육아휴직 월 급여 상한 인상의 혜택을 제대로 누릴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이런 대책은 공허하다 못해 좌절감까지 준다. 노동시장, 젠더 등 구조적인 사회불평등을 직격하지 않는 대책은 이미 우리가 수없이 경험한바, 그 결과는 불평등의 심화이다.

2월 20일 경북도는 도청에서 ‘저출생과 전쟁’ 선포 행사를 열었다. / 출처: 경북도

인구정책은 출생정책을 넘어선다. 인구정책은 한 사람이 태어나고 자라고 배우고 일하며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전 과정에 대한 사회정책들의 총합으로, 국가의 책무성이 전면적으로 구현되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국가는 스스로 감당해야 할 책임을 축소하고 그것을 시민들에게 돌림으로써, 생애과정에서 직면하는 다양한 사회적 위험을 개인이 극복할 과업으로 여기게 함으로써 통치의 효율성을 꾀하고 있다.

결혼과 출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국가권력은 그 과정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나는 돌봄과 노동에 대한 성차별적 사회구조와 불리함을 전면적으로 갱신하지 않고도 실현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정책들로 면피 중이다. 이런 통치 전략의 성공 여부는 ‘정부 역시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느냐’ 라는 담론의 보편화 정도가 좌우하는바, 문제 해결의 책임을 내면화한 주체가 얼마나 생산되었는가가 결정한다.

그렇다면 정부의 저출생 극복 정책이 단편적이고, 역부족이어서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비판하는 것으로는 충분한가? 고디언의 매듭(Gordian knot)을 잘라내는 영웅을 기다리며 문제를 외재화하는 것은 책임의 내면화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기 어렵게 만든다.

2000년대 이후 한국에서 저출생 현상은 개인들의 보편적 삶의 양식으로 자리 잡은 사회적 실천이자 문화가 되었다. 이는 교육, 노동, 주거, 지역, 젠더 등 모든 삶의 조건에서의 불평등과 위기의식에 기반한 사회구성원들의 개별적이면서 집합적인 수행이다.

그럼에도 국가는 여전히 저출생을 경제·성장·국력·노인 부양의 위기로만 호출하며 그 기저에 놓여 있는 구조적 모순을 비껴가고 있다(서리풀논평 바로가기). 점점 더 많은 개인들이 생존과 친밀성의 공동체로서 유지해 왔던 가족이라는 오래된 시스템에서 떠나기를 선언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변화와 시민들의 새로운 필요에 반응하기보다, 국가권력과 총자본은 ‘국가존망의 위기’라는 역사적 국면으로 전환하여 통치의 존속을 도모하고 있다.

저출생이 불평등과 위기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저항이자 결단이라는 맥락에서 우리는 정책당국에게 다음과 같이 주장하는 바이다. 출산과 인구전략이라는 연상의 고리를 끊어야만, 여성의 삶을 출산과 양육에 맞춰 쉽게 바꿀 수 있다는 도구적 인식을 중단해야만, 각자의 삶을 보호하고 더 나은 선택을 넓히는 방법으로서 저출생을 넘어선 인구정책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시민들에게 다음과 같은 결의를 제안한다. 현재의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가부장적 재생산관계로부터 파생되는 사회적 불평등을 돌파하지 않는 한, 그것을 피해 가는 복잡하고 우스운 방법들로는 저들이 말하는 비상사태도, 우리 삶의 위태로움도 해결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불평등과 차별을 극복하고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민주적이면서도 공공적이며, 지속가능한 사회적 관계’를 만들기 위한 정치적 실천, 그래서 현실과 미래의 사회구성원들이 자기 삶에 대한 결정의 실질적 주체가 되기 위한 역사적 실천. 이런 투쟁과 실천을 함께 할 것을 요청한다.

원문: 시민건강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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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가 지역을 떠나는 이유 https://ppss.kr/archives/265541 Tue, 19 Mar 2024 01:19:01 +0000 http://3.36.87.144/?p=265541

의료서비스가 더 필요한 곳에 의사와 의료기관이 더 적게 분포한다.

  • 역의료 법칙(inverse care law)

역의료 법칙은 1971년 영국의 의사 줄리안 튜더 하트가 지역 간 의료불평등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이론이다(※ 관련 자료 바로가기). 당시 영국의 북서 해안과 북동부 지역은 많은 의료 필요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지역보다 의사 수가 적었다. 이러한 차이는 지역 간 의료서비스 접근성의 불평등을 만들어 지역 간 건강격차로 이어졌다.

왜 의료서비스가 더 필요한 곳에 의사와 의료기관이 더 많이 분포하지 않고 더 적게 분포하게 되었을까? 어떻게 해야 전국 어디에서나 필요할 때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을까? 최근 한국 정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2025년부터 의대 입학 정원을 2,000명 증원하여 2035년까지 최대 10,000명의 의사 인력을 확충하겠다고 발표했다. 의사가 부족하니 의사 수를 늘리면 될 것 같은데, 정말 의사 수를 늘리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의사의 이동’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의료 취약지에 의사를 구하기 어려운 문제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보건서비스(National Health Service, NHS)를 가진 영국에서도 응급실에서의 장시간 대기 문제, 낙후된 지역의 의사 부족 문제가 심각하다. 이러한 현상을 보다 잘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오늘 소개할 논문은 그 중 의료 취약지 의사 인력 부족문제를 ‘의사의 수’가 아니라 ‘의사의 이동(경로)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한 결과이다(※ 논문 바로가기: 「의사의 이동성에 대한 예상과 그것이 건강 결과에 미치는 영향」). 이 연구를 통해 현재 논란 중인 의사 인력정책에서 빠져있는 것은 무엇이고, 추가로 고려해야 할 문제는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사진: UnsplashSasun Bughdaryan

의사는 보건의료영역에서 의료서비스 제공 여부와 질을 결정짓는 중요한 행위자이다. 의사는 어디에서나 일할 수 있는 이동성이 높은 직군으로 여겨지지만, 어디에서 일할지에 관한 결정은 개인적 선호를 넘어 구조의 영향을 받는다. 즉, 현재 한국이 직면한 의료 취약지 의사 부족 문제는 기존에 만들어진 의학교육과 수련 과정이 누적되어 의도치 않게 만들어 낸 결과인 셈이다.

의사 인력에서 큰 지역 이동이 일어나는 시점은 주로 의과대학 진학 시, 인턴 수련병원 선택 시, 전공과목 선택 시, 전문의 취득 후로 구분할 수 있다. 이동 시점별로 공간의 변화를 살펴보면, 의과대학 진학 시 많은 학생은 거주지가 아닌 지역으로 이동한다. 의과대학 선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고려 사항으로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고려된다.

  1. 해당 의과대학이 가진  사회적 명성
  2. 교육의 질
  3. 수련병원의 지리적 위치와 규모

한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기준으로 의과대학 진학이 이루어지는데, 위 조건들을 두루 갖춘 의과대학은 대부분 수도권에 있다. 의사 인력의 두 번째 중요한 지역 이동은 인턴·전공의 수련병원 선택 시 발생한다.

지역 의과대학의 정원이 해당 지역의 의사 수로 연결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수련병원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① 선택하고자 하는 전공과목의 수련 가능성과 ② 수련의 질이 있다. 출신 학교만큼이나 어느 병원·기관에서 수련받았는지가 향후 의사로서의 직업적 성취의 많은 부분을 결정한다.

현재 한국에서 중요한 치료는 대부분 ‘빅5’라고 불리는 큰 병원에서 이루어진다. 지역의료기관에서 치료할 수 있더라도 진단만 받고 서울의 큰 병원에서 치료받는다. 이러한 이유로 ‘내외산소(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청소년과)’와 같은 주요 전공과목을 희망하는 학생들은 다양한 임상경험을 쌓기 위해 지역을 떠나 수도권의 큰 병원에서 수련받는 경향이 생겼다.

사진: UnsplashPiron Guillaume

 

어디에서 일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

마지막으로 전문의 취득 후에도 지역 이동이 발생한다. 이 단계에서 일어나는 지역 이동은 의사 개개인이 놓인 상황에 따라 다양한 우선순위가 고려된다. 이 논문에서는 지역의 교통과 개인이 이동에 쓸 수 있는 자원과 능력으로 이를 설명했다.

병원은 24시간 매일 운영되어야 하므로 집과 병원을 오가는 교통상황은 상당히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실질적인 거리는 멀더라도 주거지역과 병원을 오가는 교통수단이 저렴한 비용으로 잘 정비되어 있다면, 매일 같이 장시간 운전해야 갈 수 있는 지역병원보다 선호될 것이다.

또한 의사 개인마다 가지고 있는 사회경제적 배경과 사회적 관계망이 다르므로 일할 병원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해당 지역에 가족이 살고 있는가’, ‘주거지와 병원 사이 이동은 편리한가’, ‘병원이 있는 지역에서 거주하는 비용은 적절한가’, ‘거주지의 인프라 및 편의시설은 잘 갖춰져 있는가’ 등에 따라 영향을 받게 된다.

 

마치며

한 명의 의사가 제 역할을 하기까지는 의과대학 6년, 인턴 1년, 전공의 3~4년이라는 오랜 수련 과정이 필요하다. 현재 한국의 보건의료체계는 양질의 교육을 받고자하는 젊은 의사들을 지역에서 대도시의 큰 병원으로 불러 모으고 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지역 간 의료불평등은 의과대학 및 수련병원의 지리적 위치와 교육·수련 과정이 장기간에 걸쳐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이러한 구조 하에서 지역의대의 정원 증가가 의료취약지 의사 인력 충원으로 이어지길 바라는 것은 지나친 낙관주의일 수 있다. 지역의사제가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겠으나, 전공과목별로 수련병원에 따른 수련 과정의 질적 차이를 어떻게 보완할지에 대한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다면 지역 간 의료불평등이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의료서비스가 더 필요한 지역에 의사들이 일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의사 수’라는 양적인 증가에 앞서 의사를 육성하고 수련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의사의 이동’이 지역의 의료 필요와 연결될 수 있도록 지역을 고려한 전공과목별 수련 과정 개편 그리고 국가 차원의 실질적인 지원이 필요한 시점이다.

원문: 시민건강연구소


서지정보

  • Brewster, L., et al. (2022). Who cares where the doctors are? The expectation of mobility and its effect on health outcomes. Sociology of Health & Illness, 44(7), 1077-1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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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vs 바이든의 재대결: 누가 이기든 패자는 중국 https://ppss.kr/archives/265535 Tue, 12 Mar 2024 03:33:45 +0000 http://3.36.87.144/?p=265535 ※ Bloomberg에 기고된 「In Trump-Biden Rematch, the Only Sure Loser Is China」를 번역한 글입니다.


도널드 트럼프가 벌였던 중국과의 무역 전쟁은 두 초강대국 간 경제적 유대를 약화시켰다. 그의 두 번째 임기 도전은 그나마 남아있던 관계를 완전히 단절시킬 위험이 있다.

트럼프는 모든 중국산 수입품에 60%의 관세를 부과하려고 한다. 블룸버그 이코노믹스의 분석에 따르면 그럴 경우 5,750억 달러에 달하는 무역 파이프라인이 사실상 무(無)로 줄어든다.

현재 여론조사 결과에서는 트럼프가 조 바이든 후보를 근소한 차이로 앞서고 있다. 이 결과가 11월의 승리까지 이어진다면, 염두에 둬야 할 긴장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이것은 중국 경제와 침체된 주식 시장(2021년 최고치보다 40% 이상 하락)에 여간 나쁜 소식이 아니다. 더 나쁜 것도 남아 있다. 트럼프의 수사학이 바이든에게 선거일을 앞두고 더 가혹한 조치를 취하도록 압력을 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바이든도 중국에 강경한 전략을 취하는 것이 검증된 승리 전략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바이든은 트럼프의 관세만큼 급격한 공약을 내놓지 않을 수도 있고, 그의 행정부는 중국과의 디커플링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데이터 흐름에서부터 전기차에 이르기까지 취할 수 있는 일련의 제재 조치를 갖추고 있다. 미국인들이 투표소에 가기 전까지 기다렸다가 투표 후 조치를 취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바이든 대통령과 시진핑 국가 주석의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이 온도를 낮춘 지 3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대통령 선거에 다시 열기가 감돌고 있다. 투자자들에게 트럼프의 최근 제안은 첫 번째 임기를 떠올리게 할 수도 있다. 그가 트위터에 올린 무역 정책 발표가 전 세계 시장을 뒤흔들 것이다.

중국 정부의 관리들은 누가 권력을 잡아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호불호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한 익명의 중국 관리에 의하면, 트럼프는 예측할 수 없고 종종 공격적이며, 거래 성사를 좋아하고, 동맹국과 협력하려는 바이든의 노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한다.

반면 중국 상무부 고문인 상바이촨 베이징 대외 경제 무역대학교 교수는 ‘둘 다 큰 위협’이라고 말한다.

바이든에게는 중국을 기술 공급망으로부터 차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는 반중 경제 서클을 돌파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중국 정부는 중국의 발전을 배제하고 억제하려는 미국 대통령을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트럼프 관세 쇼크

트럼프는 60% 관세 부과 계획 질문에 대해 답하면서 앞으로의 목표는 “사업을 다시 미국으로 가져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첫 번째 임기의 25% 관세는 이미 중국의 수출 업체들이 미국 시장에서 벌어들이는 수입에 구멍을 냈다. 60% 관세는 그 구멍을 분화구로 바꿀 것이다.

블룸버그 이코노믹스에 따르면, 무역 전쟁이 시작되기 전 약 22%로 정점에 달했던 중국으로부터의 미국 수입 비중이 거의 0으로 줄어들 것이라 추정한다. 특히 현재 중국이 지배하고 있으며 이익률이 낮아 관세의 영향을 흡수할 여력이 없는 섬유와 전자에 떨어질 것이다.

블룸버그 이코노믹스에 따르면, 무역 흐름이 지정학적 단층선을 중심으로 이동함에 따라 동남아시아와 멕시코가 이러한 균열에서 가장 큰 수혜를 볼 것임을 보여준다(※ 아래 차트 참조).

미국의 전자제품 회사들은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대부분 중국에서 제품을 제조하기 때문이다. 결국 소비자들은 수입품에 더 높은 가격을 지불하게 될 것이다.

관세는 트럼프의 선거 운동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경제 공약이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바이든이 이미 규정을 강화하고 있는 분야인 미-중 투자에 대한 새로운 금지도 암시하고 있다. 중국이 미국의 ‘필수 산업’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미국의 현금의 중국의 상승을 견인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중국은 이전에 아무도 보지 못했던 수준으로 우리의 사업을 가져가고 있습니다. 제가 당선되면 관세 부과를 통해 사업을 다시 미국으로, 제조업을 다시 미국으로 돌려놓겠습니다.

  • 도널드 트럼프

이어서 그는 자신의 중국 규제를 유지하면서 더 많은 것을 추가한 바이든 행정부가 미국의 이익을 사라지게 했다고 비난했다.

그들은 미국의 이익을 날리고 있습니다.

선거 공약이, 특히 실제로 미칠 영향이 이렇게 파괴적일 경우 항상 행정부의 정책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래도 트럼프의 첫 임기에서 교훈이 있다면, 그의 반중 수사학은 실제로 적용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시진핑 주석에게 미국과의 경제 갈등이 심화될 것이라는 전망은 좋지 않은 시기에 찾아왔다. 중국은 이미 가장 큰 성장 동력이었던 부동산이 붕괴하고, 주식시장이 폭락하며 7조 달러의 자산이 사라져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시진핑의 경제 기획자들은 최근 최대 수출 시장이던 미국과의 관계 안정을 위해 재닛 옐런 재무 장관을 베이징으로 초청하는 계획을 세우는 등 미국과의 교류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트럼프가 공화당 후보 지명을 거의 마무리하고, 주요 경합 주에서 바이든보다 앞서고 있는 가운데, 투자자들은 이미 그 영향에 대비하고 있다.

트럼프의 60% 관세 위협은 저가 소매 업체부터 태양광 패널 제조업체에 이르기까지 중국 주식의 매도세를 이끌었다. 골드만삭스의 이코노미스트들은 베이징과 상하이의 투자자들이 가장 자주 묻는 질문 중 하나가 ‘트럼프 승리의 의미’라고 말한다.

 

고조되고 있는 선거 열기

하지만 그보다 먼저 통과해야 할 2024년이 있다. “베이징의 도살자들”에게 책임을 묻겠다는 약속으로 선거운동을 했던 빌 클린턴부터 트럼프에 이르기까지, 역사는 미국 선거의 해가 문제를 앞에 두고 있음을 시사한다.

트럼프와 바이든의 재대결은 무역전쟁을 일으킨 대통령과 그 영역을 더 확대한 대통령과의 싸움이 될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중국에 강경했던 사례가 있다. 일찍이 관세는 트럼프가 선택한 무기였지만, 중국의 정책이 굳어지자 그는 무기고를 확장했다. 행정 명령을 통해 슈퍼앱 위챗과 바이럴 비디오 플랫폼 틱톡의 미국 내 영업을 금지했다. 통신 장비 대기업 화웨이 테크놀로지스가 표적이 되면서, 수많은 수출 통제와 제재가 중국 기업들을 겨냥했다. 신장의 인권 침해는 대량 학살로 분류되었다.

바이든 당선인이 취임할 무렵에는 중국이 근본적 위협이라는 점이 초당적 합의였다. 바이든 당선인이 외교적 가드레일을 복구하고, 보다 시민적인 어조를 갖추었지만, 관계의 본질은 여전히 전략적 경쟁 관계로 남아 있다.

관세 외에도 바이든은 최첨단 기술로 경쟁할 수 있는 중국의 능력을 겨냥한다. 그는 국내 산업을 활성화하기 위한 조치와 함께 칩 제조 장비에 수출 규제를 가했고, 인공지능과 양자 컴퓨팅 같은 분야에 미국 투자를 위한 선별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

사진: UnsplashRené DeAnda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면 트럼프의 접근 방식은 재선에 도움이 되는 시기에 중국과의 무역 협상을 모색하는 등 거래적인 측면이 강했고, 종종 혼자만의 노력처럼 보였다는 점이다. 트럼프는 미국의 동맹국뿐만 아니라 적대국과의 무역을 놓고 다퉜으며, 재임 기간에는 유럽을 겨냥한 징벌적 조치를 계획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바이든은 자신의 정책을 위해 더 광범위한 연합을 구축했다. 이로써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질서를 중국이 훼손하는 걸 막아내고 공동의 이익을 창출했다. 그는 헤이그와 도쿄의 관리들에게 반도체 기술에 대해 중국에게 압박하는 걸 돕도록 설득했다. 네덜란드의 거대 칩 장비 회사 ASML 홀딩스 NV 같은 주요 회사들의 중국 판매를 제한했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과 이후, 중국이 러시아와 손을 잡은 것이 미국의 주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때까지 중국을 지정학적 위협이라기보다는 시장 기회로 여겼던 유럽의 동맹국들은 대만 침공 위험을 포함한 미국의 경고에 더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 충격의 일부 측면은 측정이 가능하다. 블룸버그 이코노믹스에 따르면, 트럼프 관세가 부과되지 않았을 경우 중국의 대미 수출액은 1,600억 달러 근처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신뢰의 효과 등 다른 것들은 포착하기 더 어렵다.

그러나 전반적인 효과는 뚜렷하게 부정적이다. 그래서 중국의 성장세가 둔화되고, 월스트리트 트레이딩 플로어의 전망이 어두워지는 원인이 되고 있다.

미국이 투표에 들어가기 전, 중국 경제는 더 많은 압박을 받을 수도 있다. 중국을 명시적으로 겨냥한 8건의 행정 명령과 대부분의 수출 규제 및 제재는 휴스턴의 중국 영사관도 폐쇄한 트럼프의 임기 마지막 해에 이루어졌다. 트럼프의 적대감은 팬데믹이 시작된 후 중국을 비난하면서 시작되었다.

11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바이든과 시진핑의 회담은 따뜻한 악수로 시작했고 부분적인 화해에 대한 희망으로 끝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이든 팀은 선거 전 몇 가지 움직임을 준비하고 있다.

행정부는 중국 내 미국 투자자들을 위한 최종 버전의 규정을 만들고 있다. 강경파들은 더욱 강력한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게다가 이들은 ‘데이터 보안’이라는 새로운 전선을 개척할 준비를 하고 있다.

광범위한 산업에 걸쳐 민감한 개인 데이터를 포함한 거래를 억제하는 조치가 발표될 수 있다. 또한 중국산 전기차와 소위 ‘스마트 자동차’라고 불리는 그 밖의 차량이 제기하는 데이터 위험 때문에 중국 전기차에 대한 규제도 진행 중이다.

전기차와 청정에너지 제품, 그리고 구형 반도체에 대한 관세 인상이 거론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11월 투표 전에 나올 가능성이 있다. 또한 시진핑이 중국 경제를 침체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기대하고 있는 첨단 산업에 직접적으로 위협이 된다.

백악관은 선거를 앞두고 중국에 대한 바이든의 접근 방식에 대한 질문에 지난달 말 제이크 설리번 국가 안보 보좌관의 발언을 언급했다. 이 연설에서 설리번은 중국에 대한 투자 및 무역 제한을 포함하여 행정부가 국가 안보를 옆두에 두고 취한 경제적 조치에 대해 설명했다. 미중 관계에 “경쟁적인 구조적 역학 관계”가 존재한다고 말하면서도, 이러한 경쟁이 “갈등, 대립 또는 신냉전으로 이어질 필요는 없다”라고 덧붙인 것이다.

사진: Unsplashaay

 

베이징의 시각

중국은 사태를 관망하고만 있지 않다. 시진핑은 중국을 자급자족하게 만들 수 있는 기술적인 돌파구를 보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 제조업에 돈을 쏟고 있는 것이 고민의 결과다.

그 예로 화웨이는 정교한 칩이 들어간 스마트폰을 출시했다. 이를 통해 지난해 매출이 1,000억 달러 가까이 급증했다. 이는 미국의 규제에 대한 승리가 될 것이다.

베이징의 싱크탱크인 그랜드뷰 인스티튜트의 미국 연구 책임자이자 전 인민 해방군 연구원이었던 주준웨이는 중국 대중이 미국 대선을 보는 시선을 알아내기 위해 비공식 온라인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결과적으로 중국 대중의 약 60%는 트럼프를 선호했다. 주된 이유로 그가 미국에 혼란을 가져옴으로써, 다른 방식으로 중국에 대한 압력을 완화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원문: 피우스의 책도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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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이 비싼 사과를 먹게 될 것인가? https://ppss.kr/archives/265527 Mon, 04 Mar 2024 04:13:09 +0000 http://3.36.87.144/?p=265527 설날이 지나고도 ‘세계에서 제일 비싼’ 한국의 사과 가격은 화제다. 이미 작년 봄부터 사과 등 과일 가격은 작황 부진으로 평년보다 50% 이상 올랐다. 흔한 겨울철 과일이었던 귤과 사과, 역시 부담 없는 간식이던 바나나의 위상을 바꾼 가격표를 보면서 계속 이렇게 비싼 값으로 사 먹어야 하는지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신선 과일과 채소의 가격 변동이 커진 것은 한국만의 상황도 아니다. 영국, 스웨덴, 미국, 중국 등에서도 최근의 과일과 채소의 가격은 길게는 20년 기간 중 최고 수준으로 상승해서 식품 인플레이션을 걱정하고 있다. 최근 가격 동향에는 코로나19 이후 상품 수요의 증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인한 비료 가격 및 에너지 가격상승이 반영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은 코로나 이전부터도 다른 나라들에 비하여 식료품 가격이 높았다. 2024년 현재에도 한국은 다른 나라보다 월등한 격차로 과일, 야채, 유제품, 육류 등의 가격이 높은데, OECD 국가 중 스위스와 아이슬란드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수준이다(관련 자료). 먹고 사는 이 기본조건에 대해 정부는 적절하게 평가하고 대응하고 있는 것일까.

체감될 만큼 높게 뛰어오른 과일 값 / 출처: 서울신문
높은 과일 물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국민 대다수가 공유하게 되었다 / 출처: MBC경북

 

‘수입 과일’로 대체하겠다는 계획이 어려운 이유

정부는 1월에 발표한 <2024년 경제정책방향> 에서 ‘물가 안정’을 위해 역대 최고 수준의 관세 면제와 인하, 저율관세할당 도입 방침을 밝혔다.

하지만 비싸진 국산 과일을 수입 과일로 대체하겠다는 이 계획은 효과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작년 봄 사과 가격이 급등했을 때도 똑같이 오렌지 수입계획을 내놓았지만 결과는 어땠나? 주 원산지 미국에서는 전년도의 허리케인과 대규모 홍수 등 기상악화로 수확량이 급감했고, 브라질과 유럽·호주 역시 폭염과 태풍, 냉해와 병충해 등으로 인한 작황 부진을 겪으면서 수입산 오렌지 가격이 상승하여 기대한 대체효과를 내지 못했다.

한국산 사과의 작황이 부진한 바로 그 이유, 즉 이상기후를 해외 원산지도 마찬가지로 겪으면서 공급이 부족해진 것이다. 날씨는 수요·공급과 함께 과일 가격에 영향을 주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기후변화의 변동성이 커지면서 수입산 과일에 의존하는 가격정책은 진정한 대책이 되기 어려워졌다.

유럽중앙은행 발표에 따르면, 지난 30년간의 전지구적 기후온난화는 고소득 국가와 저소득 국가 모두에 명백한 인플레이션 상승 압력으로 작용했고, 극단적 기후 현상은 식품 가격의 안정성에 큰 위험을 초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관련 연구). 이상기후로 인한 농작물 수확량 감소와 유통기한 단축, 손실률 상승 등에 따른 공급 부족, 생산국의 무역 제한, 그로 인한 신선식품의 가격 급등락은 더욱 예측가능한 상수가 되었다. 이런 변화된 상황들은 당연히 정부의 새로운 농산물정책에 반영되어야 한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 지금까지 한국 정부가 고수했던 농산물 저가격정책은 한국 자본주의 축적을 위한 주요 전략으로 활용되면서 농촌의 황폐화를 이끌었고, 수입자유화 이후에는 농산물 가격 폭등시 수입농산물을 들여와 가격을 떨어트리는 ‘물가 안정’ 정책 패키지로 전환되게 되었다.

농촌을 식민화해온 이 오래된 농산물 최저가격보장제도는 농산물 가격 안정과 농가생산자 보호를 위해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관련 기사). 또한 수입농산물 관세보조는 국산 농산물의 가격을 생산비가 보장되는 수준 이하로 하락시키기 때문에 농촌의 어려움을 가중시킬 뿐이다. 이근혁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위원장은 “농산물 가격은 물가지수 가중치가 낮기 때문에 제대로 된 (물가 안정)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관련 기사)

따라서 정부의 농축산물과 과일에 대한 무관세·저관세 수입계획은 대내외 상황의 변화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정책효과마저 기대할 수 없는 내용을 재탕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책임하고 안이하기 이를 데 없다.

과일 가격이 폭등하면 수입 과일로 대응한다는 방식은 윤석열정부가 2023년 4월 양곡법 개정안을 “시장의 쌀 소비량과 관계없이 남는 쌀을 막대한 혈세를 들여 사들인다”는 이유로 거부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다시 말하면 “비싸면 덜 사 먹으면 되고, 싸면 농사짓는 사람이 손해보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사람들이 양질의 식료품을 적절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도록 하고, 생산자는 안정적 생산 환경에서 먹거리를 공급할 수 있도록 제도화하는 것이 시민들의 기본권을 보호하는 국가의 책무가 아닌가.

 

앞으로 신선 식품의 적절한 보급은 더욱 중요해질 것

작년 1월 난방비 폭등 때 우리는 석유나 가스 같은 에너지 자원은 상품의 특성상 개인의 합리적 소비 행위가 불가능한 영역이기 때문에 공급과 위험에 대처하는 국가의 책임이 더욱 중요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농산물도 마찬가지이다. 농산물은 약간의 공급 변동만으로도 가격이 급변하는 특성이 있어 시장 기능에만 맡겨놓을 수 없다. 농산물유통종합정보시스템에서는 공산품과 확연하게 다른 과일과 농산물 가격 동향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영양가 있고 저렴한 신선식품에 대한 가용성이 저하되면, 사람들은 고열량의 영양이 부족한 식품 소비를 늘리게 된다는 것은 잘 알려진 보건학적 사실이다. 식단의 질과 영양이 저하되면 비만이나 심혈관질환, 2형 당뇨병 등 많은 만성질환 위험이 증가하고, 이는 식량 불안도가 높은 저소득가구의 건강을 더욱 나쁘게 만든다. 그러므로 다양한 제철 과일과 채소 등 신선식품에 대한 접근권은 중요한 공중보건의 문제이다.

사진: UnsplashMaria Lin Kim

게다가 한국에서도 도시와 농촌을 불문하고 식료품 공급처의 부족을 의미하는 식품사막(food desert)이 사회적 문제로 진입했다(관련기사). 여기에 더해 비싼 가격이 식품사막을 가속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점에서 신선식품 접근권 보장 및 불평등 완화를 위한 정책개입이 시급하다.

2023년 지구 평균기온은 파리기후변화협약에서 정한 1.5도에 거의 근접했다. 과학자들은 이런 기후변화는 토양과 식생에 영향을 주어 세계식량시스템을 파괴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농산물은 본래도 아니었지만, 더 이상 국제분업과 수요 공급에 의해 조정할 수 있는 시장적 상품이 아니게 되었다. 게다가 자재값과 원료비·인건비 상승, 농업인구의 고령화 및 지역 위축과 같은 생산자들이 처한 현실까지 감안하면, 가격 급등락에 대한 개입, 식량자급목표 등 정부의 농산물정책은 대대적인 재검토가 필요해졌다.

적정가격을 너머, 어떤 생산과 소비의 생태계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생존의 물적 조건에 대한 대안이 함께 고려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원문: 시민건강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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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사고 시 내 과실비율만큼 치료비 부담? ’과실책임주의‘에 얽매일 필요 없는 이유 https://ppss.kr/archives/262217 Mon, 13 Feb 2023 03:09:34 +0000 http://3.36.87.144/?p=262217 자동차보험에 ‘과실책임주의’ 도입? 겁낼 필요 없습니다

사례. 일방적인 후방 추돌 사고를 당해, 한 달 넘게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고통받고 있는 C씨. C씨는 통증이 충분히 좋아질 때까지 치료를 받고 싶습니다.

그러자 처음에는 과실 비율이 10:0이라며 사과하던 보험사가, 사실 C씨 쪽 과실도 있다며 과실비율을 9:1로 산정해야 한다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계속 치료를 받는다면 C씨의 과실 비율 10%만큼은 직접 진료비를 내야 한다며, 빨리 치료를 종결하라고 반 협박까지 하는데요.

말도 바뀌고 압박도 더해지고 / 출처: irastoya.com

2023년 1월부터 자동차보험 사고에 ‘과실책임주의’가 도입됐다는 얘기, 들어보셨나요? 쉽게 말해, 내 사고 책임만큼 ‘자기부담금’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건데요.

‘과실책임주의’라고 하면 겁이 나는 것도 사실 당연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이게 너무 어려운 개념이란 점인데요. 환자 입장에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렵고, 어쨌든 ‘자기부담금’이라는 게 나간다고 하니, 일단 보험사 직원의 말을 따르게 되는 것이죠.

이를 빌미로 일각에서는 치료를 받으면 받을수록 환자 본인이 내야 할 돈도 늘어난다거나, 보험료 할증이 늘어난다거나 하는 이유로 조기 합의를 종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모두 사실이 아닙니다.

복잡한 개념 대신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과실책임주의 적용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자동차보험 가입자들에게는 바뀐 게 없습니다. 환자가 받아야 할 치료를 도중에 중단해야 할 까닭도 없습니다. 어째서인지는 이제부터 설명드리죠.

 

자동차보험 얘기부터 해 볼까요?

자동차보험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계신가요? 자동차를 몰지 않는 분들도 ‘책임보험은 무조건 들어야 하는 보험이다’, ‘책임보험 차량한테 사고를 당하면 정말 운이 없는 것이다’, ‘요즘 대물은 10억은 해야 한다’ 같은 얘기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텐데요.

자동차보험은 크게 이렇게 구성됩니다.

위의 표는 책임보험과 종합보험, 대인과 대물보상의 개념을 간략히 정리한 것입니다.

자동차를 몰려면 누구나 ‘책임보험’이라 불리는 의무보험에 가입해야 하죠. 이 보험은 거의 최소한의 피해만을 보상합니다. 신체상 피해에 대해서도 한도가 빡빡하게 걸려 있고, 재산상의 피해는 2천만원까지밖에 보상하지 않죠. (웬만한 소형차도 2천만원을 넘어가는 시대에 말입니다.)

그래서 ‘책임보험’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추가적인 부분을 보상하기 위해 ‘종합보험’이 있습니다. 부상에 대한 치료비는 보통 무한대까지 보장되며, 재물상의 피해는 1억, 5억, 10억 하는 식으로 한도를 높여 적용하게 됩니다.

우리는 환자 얘기를 하는 중이니까, ‘대인보상’에 대한 이야기에 집중해 보겠습니다. ‘대인보상’은 다시 또 두 가지로 나뉩니다. 심플하게 ‘대인배상1’과 ‘대인배상2’라고 부르는데요.

대인배상1은 법률적으로 가입이 강제된 보험입니다. 책임보험의 영역이죠.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대인배상1은 보상한도가 법적으로 딱 정해져 있는데요, 예를 들어 척추가 삐었다면 120만원이 한계입니다. 치료비와 합의금을 모두 포함해서요.

대인배상1(책임보험)에 따른 보상금 상한액입니다. 이 안에서 치료비와 합의금을 모두 충당해야 합니다(…)

하지만 실제 자동차 사고 피해자들은 이보다 더 많은 치료비를 쓰게 됩니다. 사고로 척추가 나갔는데 120만 원으로 치료가 끝난다는 건 말이 안 되죠. 여기에 위자료와 사고로 일을 못 해서 생기는 손해까지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대인배상2가 있습니다. 대인배상1의 한도를 초과하는 치료비와 위자료, 손해액은 대인배상2를 통해 보상하는 것이죠. 그래서 지금까지는 사고를 당하더라도 치료비만큼은 걱정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다친 것도 억울한데, 이런 부분이라도 잘 챙겨 받아야죠.

 

‘과실책임주의’의 도입, 이게 대체 무슨 뜻이죠?

기존에는 내 과실이 일부 잡혔다고 해도, 상대방의 과실이 있는 경우 상대측 보험사에서 치료비 전액을 지급하는 방식이었죠. 환자 입장에서는 편하게 진료를 받을 수 있었지만, 일각에서는 이로 인해 경상 환자가 불필요한 치료를 계속 받는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때문에 2023년부터 ‘과실책임주의’가 도입된 거죠.

변경된 보상체계 지침. 솔직히 보기 겁날 정도로 복잡합니다… / 출처: 보험저널

과실책임주의가 도입되면서 어떤 점이 변했을까요? 우선 대인배상 1, 즉 책임보험에서 보상하는 부분은 그대로입니다. 예를 들어 척추가 나갔다면 120만원까지, 이 한도에서는 예전처럼 과실비율과 관계없이 치료비를 전액 보상받을 수 있습니다. 바뀐 부분은 그 다음부터인데요. 대인배상1을 초과하는 부분, 즉 대인배상2로 보상되던 부분을 사고 책임 비율에 따라 나누어 산정하기 시작한 겁니다.

자동차 사고로 척추를 다친 환자를 생각해 봅시다. 과실 비율은 7:3으로 산정되었습니다. 환자의 실제 치료비가 200만원이었다면, 기존에는 대인배상1에서 120만원, 대인배상2에서 80만원을 부담했습니다. 실제로 환자가 부담해야 할 비용은 없었던 거죠. 하지만 이제부터는 대인배상2 부분, 즉 80만원을 과실 비율에 따라 피해자가 나누어 부담하기 시작했습니다. 과실 비율이 3으로 책정되었으니 80만원의 30%인 24만원을 환자가 내야 한다는 것이죠.

꼭 알아야 할 부분만 도표화하면, 대강 이렇습니다.

 

그럼 앞으로는 사고도 당하고 치료비도 내가 내야 한다고요?

사실 과실책임주의의 명분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어쩐지 찝찝한 기분도 들죠.

우선 ‘과실 비율’의 문제입니다. 사회 상규상의 기준으로는 선량한 피해자이더라도, 과실 비율이 2~3까지 책정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사고에 치료비까지 내 돈을 써야 한다는 건 아무래도 억울합니다.

특히 한국에서는 원만한 사고 처리 등을 명분으로, 사고 양측에 모두 일정 정도의 사고 책임을 분배(?)하는 관례 아닌 관례가 있어왔는데요. 그나마 최근에는 상황이 많이 개선되었다 하나, 과실 산정을 둘러싼 갈등은 여전히 첨예합니다.

그러다 보니 보험사 직원이 과실비율을 갖고 환자와 합의금 줄다리기를 하진 않을까, 합의를 종용하기 위해 환자에게 불리한 과실비율을 산정하진 않을까 하는 우려가 나옵니다. 다행히 이럴 때를 대비해 ‘과실비율 인정기준’이라는 공식 기준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과실비율정보포털(링크)를 통해 직접 내 과실비율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런 서비스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과실비율 산정을 사람들이 잘 믿지 않는다는 방증이겠지요. 결국 과실책임주의 도입에는, 보험사의 투명한 행정이 무엇보다 필수적인 선결 과제인 겁니다.

그럼에도 일부 보험사 직원들은 이미 과실책임주의를 합의를 종용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고 있다 하는데요. 물론 일부겠지만, 보험료 할증이나 자부담금으로 환자를 위협하며 아직 치료가 필요한 환자에게 합의를 종용한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나머지 치료는 건강보험을 통해 받으면 된다면서요. 모두 부당행위입니다.

과실비율을 두고 과실책임주의에 대해 제대로 설명해주는 경우는 찾기 힘들고, 심지어 환자를 속인다는 얘기마저 들려오는 형편입니다. 사고에 대해 환자의 책임을 제대로 따져 묻겠다는 과실책임주의. 하지만 과실책임주의가 제대로 자리잡으려면, 보험사 역시 환자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 하지 않을까요.

보험사 직원들이 과실책임주의를 호도해 환자들의 치료받을 권리를 침해한다는 증언이 여기저기서 들리고 있습니다.

 

환자에겐 충분히 치료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어떤 불이익도 없이요.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과실책임주의 적용에도 불구하고, 환자의 주머니에서 추가적인 돈이 나갈 일은… 대부분 없다는 겁니다. 치료 당시는 물론, 그 후로도 쭉이요. 바로 자상, 자손보험이 있기 때문인데요.

대부분의 운전자는 종합보험을 이미 드셨을 텐데요. 아마 그럼 자손, 자상보험에도 자연히 가입하셨을 겁니다. 심지어 그게 뭔지 모르시더라도, 종합보험에 대부분 기본적으로 포함돼 있거든요. 실제 통계에 따르면 96%의 운전자가 자손, 자상보험에 가입했다고 하네요.

자손은 자기신체손해담보, 자상은 자동차손해담보의 약자입니다. 내 책임, 내 과실분은 여기에서 보상받을 수 있습니다.

과실책임주의에 따라 내 과실만큼의 치료비는 내가 내게 된다고 해도, 이는 자손보험 또는 자상보험으로 처리됩니다. 대부분의 종합보험 가입자가 과실책임주의니 뭐니 크게 신경쓸 필요가 없는 까닭이죠.

혹 보험료 할증을 걱정하실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일부 보험사 직원들은 계속 치료를 받으면 보험료 할증이 늘어난다며 치료를 조기 종결할 것을 종용하고 있다고도 하는데요. 이는 명백한 거짓입니다. 치료를 많이 받는다고 보험료 할증이 늘어나지는 않거든요. 자손 또는 자상은 금액과 무관하게, 사고건수에 따라서만 할증이 이뤄집니다.

그럼 또 이렇게 물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럼 어쨌든 할증이 이뤄지는 건 맞으니, 위에서 얘기했던 허리 염좌 환자를 다시 예로 들자면, 120만원 내로 치료비와 합의금을 모두 처리하는 게 유리하지 않느냐고요. 실제 이런 식으로 ‘할증되기 싫으면 이 안에서 끝내자’며 120만원 내에서 치료비와 합의금을 모두 처리하려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이것도 왜곡입니다. 왜냐하면, 기존에도 치료비 이외의 합의금 항목 – 위자료, 휴업손해 등에는 과실책임주의가 적용되어왔거든요. 보통 교통사고 합의금을 계산한다고 하면 향후의 치료비 뿐 아니라 이런 위자료, 휴업손해 등을 모두 포함하여 계산합니다. 쉽게 말해, 교통사고 후 합의금을 받으셨다면, 이미 그 사고에 대해서는 자손, 자상보험상 보상건수 1건이 책정된 상태라는 것이죠. 여기에 치료비가 더 붙는다고 해서 할증이 추가로 늘지는 않습니다.

이는 금융위원회에서 공식적으로 내놓은 답변입니다. 추가 할증은 없습니다!

만일 운전자가 아니라서 자동차보험에 가입하지 않았다면요? 더욱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동승자나 보행자 등은 과실책임주의 적용에서 자유롭습니다. 이쪽은 자기부담금이 나갈 일이 전혀 없습니다. 혹 과실이 있더라도, 기존과 마찬가지로 걱정 없이 충분히 치료받으시면 됩니다.

 

부당하게 합의를 종용한다면, 1332 또는 1372로 신고하세요

작년, 그리고 올해 이뤄진 자동차보험 지침 및 약관 개정에 대해 많은 오해가 있었습니다. 과실책임주의가 시행됨으로써, 치료기간이 길어질수록 합의금은 줄고 보험료가 할증된다… 는 건 대표적인 오해입니다.

명분은 마땅합니다. 일부 ‘나일롱 환자’의 불필요한 장기간 치료를 막고, 자동차보험 재정 누수를 막는다는 것이죠.

하지만 실제 현장에 이 지침이 적용되는 과정에서 혼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환자들은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부 보험사 직원들이 실적을 위해, 환자에게 치료비를 최대한 덜 지급하기 위해 오해를 부채질하기도 했습니다. 단순한 기우가 아니라, 실제로 곳곳에서 들리는 증언들입니다.

빨리 치료를 종결하고 건강보험으로 치료받으라는 얘기도 어폐가 있습니다. 이건 윗돌을 빼 아랫돌을 괴는 일에 불과합니다. 자동차보험 재정을 아끼는 대신, 건강보험 재정과 이를 메우기 위한 국민 세금이 새어 나갑니다. 오히려 자동차 사고는 자동차보험으로 치료받아야 한다는 원칙이 무너지는 셈이기도 하고요.

이번 지침 변경이, 자동차보험 회사의 이익만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럼 그건 그저 또 하나의 단통법이 되어버리고 말 겁니다.

새로 변경된 지침이나 약관은 자동차보험으로 치료받을 환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나일롱 환자를 잡는 것,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러자고 무고한 진짜 환자들의 권리가 빼앗긴다면, 이건 선후관계가 뒤집혀도 너무 심하게 뒤집힌 게 아닐까요.

만일 보험사 직원이 부당한 방식으로 합의를 종용할 경우, 즉시 금융감독원(콜센터 1332)이나 한국소비자원(콜센터 1372)을 통해 신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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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믹스, 무너진 광산 속에서 기적을 마시다 https://ppss.kr/archives/258131 Wed, 16 Nov 2022 05:25:48 +0000 http://3.36.87.144/?p=258131 이번 계절은 우리에게 트라우마로 남을 것 같다. 10.29 참사를 비롯한 많은 사건과 사고를 겪으며 우리는 일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가를 마음에 새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한 줄기의 빛은 비추기도 한다. 무너진 광산에서 221시간 만에 살아 돌아온 광부들의 소식처럼 말이다.

음료미디어 마시즘, 오늘 희망의 이야기를 전하려고 한다. 아니, 자세히 말하자면 희망을 지켜준 하나의 음료에 대한 이야기다.

 

천둥이 치는 소리가 났고 광산은 다시 무너졌다

10월 26일 오후 6시, 봉화광산에 또다시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지하 205미터에서 아연을 채굴하던 두 사람은 벼락이 치는 소리를 들었다.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광산에는 900톤의 토사가 수직갱도에 쏟아져 지상으로 올라가는 길을 막아버렸다.

당시 현장에서 작업 중인 광부는 7명이었다. 이 중 5명은 자력으로 탈출하거나, 동료에게 구조되었다. 하지만 가장 깊숙한 곳에서 작업을 하던 2명의 무전이 끊기게 되었다. 작업반장과 신참이었다.

떨어지는 토사물과 낙석을 피해 작업반장은 신참을 데리고 갱도 안의 대피소로 향했다. 벌어진 상황에 신참은 광산만큼이나 마음이 무너져있었다. 그는 이제 막 일을 시작한 지 4일이 된 신참이지만, 광산 매몰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는 확실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불과 2개월도 되지 않은 8월 29일에도 봉화광산이 무너졌었기 때문이다. 당시 땅 꺼짐으로 인해 일하던 광부 중 2명이 추락하였고, 1명은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작업반장은 대피소 안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다른 곳으로 향하는 갱도들은 모두 막혀버렸다. 다행히 산소는 충분했지만, 벽과 천장에는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자칫 몸이 젖으면 체온이 떨어질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가 살려면 이제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한다.” 그는 주변에 버려진 비닐과 나무 등을 모아 냉기를 차단하고 모닥불을 피워 공기를 데웠다. 베테랑 광부인 작업반장은 신참에게 말했다.

이게 오늘 우리 저녁밥이다.

그의 손에 든 것은 커피믹스, ‘맥심 모카 골드’였다.

 

생존을 위한 물과 산소, 그리고 커피믹스

그들은 생존을 위해 가진 것을 모두 활용했다. 버려진 비닐로 텐트를 만들었고, 젖어버린 나무는 산소절단기를 통해 물기를 말리고 불을 붙였다. 마지막으로 휴식 시간에 마시기 위해 챙겨 온 커피믹스 30봉과 물 10리터로 식사를 대신하기로 했다.

물을 끓이기 위한 전기포트가 있었으나 매몰된 광산에 전기가 통할 리는 만무했다. 전기포트에 있는 플라스틱 부분을 떼어내어 바닥에 스테인리스만 남게 하였다. 그리고 모닥불에 물을 끓여 커피믹스를 만들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따뜻하고 달콤함이 찾아왔다.

‘이 또한 금방 지나갈 것이라…’ 그들은 빨리 구조가 될 것이라 생각하고 커피믹스를 2봉을 한 번에 마셨다. 하지만 상황은 200시간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시추작업은 굉장한 어려움을 겪었다. 구조 예정 지점으로 생각한 곳으로 땅에 구멍을 뚫는 시추작업을 시작하였지만 대형 암석들이 많아 길을 방해했다. 1차 시추가 실패하고, 2차 시추 작업이 실패했을 때는 이미 광산이 매몰된 지 6일이 지나 있었다. 광산업체가 제공한 도면 자체가 20년 전에 만들어졌기에 구조작업에 큰 문제가 있었다.

생존 신호도 진입로 확보도 어렵다는 소식은 가족은 물론 온 국민의 애를 타게 만들었다. 내시경을 통해서 매몰된 갱도를 살피는 뉴스 기사가 한 커뮤니티에 공유되었다. 한 회원은 댓글에 이렇게 남겼다.

내일 아침에 커피믹스 드시면서 나타나실 거예요.

누구도 그때는 이 댓글이 현실이 될 줄은 몰랐다.

 

어두움과 추위 속에서 그들이 발견한 것은

갱도 내부의 길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작업반장도 결국 탈출구를 찾는 것에 실패했다. 그들이 대피한 곳은 여러 개의 통로가 모이는 인터체인지 같은 곳이었지만 찾아본 모든 길이 막혀있었다. 다만 막혀있는 벽의 뒤로 들리는 발파 소리만이 그들의 희망이 되었다. 아직 누군가 우리를 구하려고 하고 있다는 것이기에.

하지만 시간과 어둠, 그리고 추위는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산소절단기의 가스가 떨어지고, 라이터의 가스도 떨어졌다. 땔감으로 사용한 나무도 몇 토막이 남지 않았다. 한 모금씩 나눠마신 커피믹스와 물도 바닥이 났기에 갱도에 흐르는 지하수를 마셔야 했다. 아무리 베테랑이라고 하지만 그도 떨어진 랜텐의 배터리처럼 희망의 빛을 잃었다.

그때 벽이 무너졌다. 아니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형님”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신참이 그를 향해 달려왔고 두 사람은 서로 안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새로운 삶이 열렸다.

11월 4일 오후 11시 3분경. 작업반장과 신참 보조작업자는 구조대에게 발견되었다. 사건이 발생하고 무려 221시간의 사투를 버텨냈다. 그들은 사흘 정도를 갇혀있었다고 생각했지만 말이다.

다행히 두 사람은 부축을 받으며 걸어 나올 정도로 걱정보다 상태가 양호했다. 주치의는 커피믹스를 식사 대용으로 3일에 걸쳐 먹은 게 저체온증 극복에 도움이 된 것 같다는 소견을 밝혔다.

실제 커피믹스는 등산객들이 체력이 떨어졌을 때 먹기도 한다. 실제 2017년에 저혈당 증상으로 쓰러진 사람에게 급하게 커피믹스를 구해와 살린 일이 있었다. 물론 커피믹스가 가지고 있는 열량만큼이나 중요했던 것은 커피믹스를 저녁밥이라고 이야기하며 희망을 놓지 않았던 작업자들의 의지가 아닐까?

 

평범한 일상을 특별한 기적으로, 당신의 커피믹스는?

두 사람은 병원에서 몸이 회복되면 무엇을 하고 싶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작업반장은 ‘쌀밥에 소주 한 잔’, 그리고 신참은 ‘미역국과 콜라를 마시고 싶다’는 것이었다. 우리에겐 너무나도 평범해 기억할 의지가 없는 먹고, 마실 것들이 그들에게는 정말 그리운 것이 되었다.

우리에게 일상은 정말 순식간에 무너질 수도 있는 공포이지만, 반대로 우리의 가까이에는 언제나 희망이 되는 것들 또한 함께했음을 알게 된다. 가장 가까운 순간에 여러분과 함께하는 음료, 아니 희망을 찾아보며. 차갑기보다는 따뜻한 소식이 더 들려올 겨울을 기다려본다.

원문: 마시즘


참고문헌

  • “광물더미 무너지며 매몰”…봉화 광산에서 2명 사상, 이윤재, YTN, 2022.8.29
  • [안동][4보]봉화 광산 갱도 붕괴로 2명 고립, 김서현, 대구MBC, 2022.10.27
  • [뉴스큐] ‘고립 46시간째’ 봉화 아연광산 구조 난항…현재 상황은?, 이광연 이수곤, YTN, 2022.10.28
  • 봉화 광산 매몰사고 5일째… “구조작업 늦어 억장 무너져”, 명민준, 동아일보, 2022.10.31
  • “95m 남았다”…봉화 광산사고 엿새째 ‘열악한 갱도’ 극복 안간힘, 김현태 김선영, 연합뉴스, 2022.10.31
  • 매몰 사고 봉화 광산 새 진입로 발견…“20m 남았다”, 김규현, 한겨레, 2022.11.2
  • ‘봉화 광산사고’ 9일째‥구조 속도내나, 이준형, 아시아경제, 2022.11.3
  • 봉화광산 매몰 광부 박정하 씨 “다른 광부들은 안전했으면”, 김영진 윤영민, 매일신문, 2022.11.06
  • “커피믹스 물 끓이며 저녁밥 먹자 했죠”…광부가 직접 말한 생환, 배유미, 채널A, 2022.11.06
  • “준철이 왔냐” 생환 기적 만든 베테랑 광부, 비닐 마른나무 챙겨 모닥풀 피우고 지내, 마경대 윤영민, 매일신문, 2022.11.05
  • ‘고립 10일’ 랜턴 방전 절망의 순간에 “아직 죽을 때 아니다, 무조건 살아나가야”, 나광현, 한국일보, 2022.11.06
  • 돌아온 광부들, 먹고 싶은 건 “미역국과 콜라”·”소주 한 잔”, 김수영, 한국경제, 2022.11.5
  • “커피믹스 드시면서 나타날 것”…봉화 광부 ‘생존 댓글’ 예언 ‘소름’, 문영진, 파이낸셜뉴스, 2022.11.06
  • [아주돋보기] 광산서 221시간 버티게 한 ’12g’ 커피믹스의 위력, 홍승완, 아주경제, 2022.11.07
  • 봉화 광산의 기적은 물·산소·빛 그리고 ‘이것’ 덕분이었다, 김정혜, 한국일보, 202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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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베충, 선의 그 자체를 혐오하는 악인들 https://ppss.kr/archives/257995 Mon, 07 Nov 2022 07:34:17 +0000 http://3.36.87.144/?p=257995 1.

공동체가 책임져야 할 참사가 일어나니 또 여기저기서 베충이들이 튀어나온다. 이제 ‘베충이’란 말은 더 이상 일베 이용자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당당하게 반사회성과 악의를 표출하는 자들에 대한 대유법이라 할 수 있다. 선의(善意) 그 자체를 혐오하는 이들이므로 나는 저들을 ‘악자(惡者)’라고 일컫고 싶다.

이 악자들은 으레 간주되는 것처럼 극우라고 보기도 어렵다. 극우 또는 집단주의는 뚜렷한 내집단/외집단 구분을 바탕으로 응집성과 통일성이 강한 사회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자주 반사회적으로 행동하며 구성원 간 선의의 기능을 부정하는 악자는 강력한 집단주의 사회에 적응하기 어렵다. 사실 보수적 교회가 오히려 집단주의에 가깝다. 그래서인지 일베충은 교회를 비롯해 종교에 대해서도 반감이 강하다.

 

2.

그럼 이 악자들의 근본적 특징은 무엇인가? 사회가 존속되기 위해 꼭 필요로 하는 선의를 싫어한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과도한 정서 표현을 싫어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자신들은 거리낌 없이 분노와 증오 같은 정서를 표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정을 자제한 채 논리적으로 사회적 의무를 설파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들이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공감, 연민 같은 감정 이전에 타인에 대한 선의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선의의 표현 자체가 일종의 손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장기적, 사회적으로 봤을 때 선의는 손해가 아니며 공동체의 건전한 유지와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의를 베푼다.

그런데 이 악자들은 그게 견딜 수가 없다. 자신들이 틀렸다는 방증이기도 하거니와 자신의 행동 양식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한 이들의 말과 행동이 자신들에게 직접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자신들을 공격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거리낌 없이 증오의 말들을 내뱉는 것이다.

 

3.

이들이 북한에 적대적인 이유도 투철한 이념적 성향 때문이 아니다. 북한에 대한 유화적, 협력적 정책에 깃들어있는 선의 자체가 싫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념과 무관한 난민 수용도 싫어한다. 그리고 지금은 중국을 적대하고 대만을 응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만약 대만인들에게 선행을 펼쳐야 할 일이 벌어지면 또 싫어할 것이다.

결코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지만 만약 대만이 침공당하면 상당수의 대만 난민이 한국으로 유입될 것이다. 그럴 때 저들이 대만인들을 환영하고, 대만 난민들을 위해 우리의 자원이 투입되는 것을 기꺼이 인정할까? 전혀 그러지 않을 것이다.

페미니즘을 싫어하는 것도 자신의 전통적 가치관과 충돌하기 때문이 아니다. 종교적 신념 때문이거나 여자와 남자는 역할이 다르다는 전통적 관념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여성에게 선의를 베푸는 것이 싫은 것이다.

다른 사회적 약자, 예를 들어 아동이나 장애인, 성소수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이 악자들은 항상 저들이 약자나 피해자가 아닌 이유를 제시한다. 그런데 그걸 논리적으로 반박해봤자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저들은 사회적 약자가 피해자가 아니어서 싫어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선의 자체를 싫어하므로 설사 피해자가 맞는다 해도 베풂에 대한 반감은 여전하다.

 

4.

이들은 실제로는 패배자들이다. 그래서 다수의 선의가 사회를 움직이는 것을 목격할 때마다 굴욕감을 느낀다. 내부에 그런 뒤틀린 감정이 존재하므로 선의에 그렇게나 적대적인 것이다.

독재자 같은 역사적 악인들은 자신이 사회에 기여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선을 추구한다고 여겼다. 그런데 소위 ‘베충이’라 불리는 악자들은 저런 악인들과도 또 다르다. 이들은 선의 추구 자체를 싫어하고 사회를 부정한다. 실로 순수한 의미에서 악, 악자라 할 수 있다.

원문: Hyun Kyu Lim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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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과 사과, 혹은 사고와 참사 사이 https://ppss.kr/archives/258038 Mon, 07 Nov 2022 06:44:24 +0000 http://3.36.87.144/?p=258038 ‘어휘’는 화자의 내심과 의도를 드러낸다
출처: 연합뉴스

이태원 핼러윈 참사(10.29.) 이후,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발언이 여론을 데우고 있다. 재난관리 주무 부서의 책임자이지만, 참사를 바라보는 그의 시각은 정부의 면책을 의식하는 듯 상식과 책임을 위태하게 넘나들었다.

참사 다음 날인 10월 30일, 그의 제일성은 “경찰과 소방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던 것으로 파악한다”라는 것이었다.

 

이태원 참사, 정치적 책임론 경계하는 정부여당

그는 30일 오후 정부서울청사 브리핑에서 ‘많은 인파가 몰릴 것으로 예상됐다’라는 기자 질문에 “그 전과 비교했을 때 특별히 우려할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몰린 것은 아니다.” “서울 시내 곳곳에서 소요와 시위가 있어 경찰 경비 병력이 분산됐던 측면이 있었다”라고 말했다.

‘경찰과 소방을 배치하였어도 사고는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라는 속내가 엿보이는 발언인데, 이는 참사가 정부의 책임으로 이어지는 걸 막으려는 의도를 은연중에 드러낸 것이었다. 이 첫 발언에 여론이 술렁이고 비판이 이어졌지만, 그는 여전히 비슷한 태도를 이어갔다.

31일 오전에도 서울시청 광장에 마련된 이태원 사고 사망자 합동분향소에서 조문한 뒤 “경찰·소방력 대응으로 사고를 막기에 불가능하다고 말했는데 무슨 뜻인가”라는 질문에 “(경찰과 소방의 대응으로) 사고를 막기에 불가능했다는 게 아니라 과연 그것이 원인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라고 답했다.

또 “경찰의 정확한 사고 원인이 나오기 전까지는 섣부른 예측이나, 추측이나, 선동성 정치적 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말”이라고 전하며 “경찰의 병력 부족으로 인한 사고였는지, 그런 그것을 더욱 깊게 연구해야 하며, 섣부른 결론을 내고 원인이 나오기도 전에 이런저런 추측을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라고 입장을 전했다.

이에 시민사회와 야권은 물론 여당 내에서도 적절치 않다는 비판이 나오자, 그는 한발 물러나 ‘유감’을 표시했다.

재발 방지를 위해서는 정확한 사고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국민께서 염려하실 수도 있는 발언을 하여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비판이 강도를 더해가자, 그는 다음 날인 1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 출석해 사과와 더불어 고개를 숙였다. 참사 사흘 만이었다. 그는 사고 발생에 대해서는 ‘사과’하면서도 국민의 마음을 살피지 못한 데 대해서는 다시 ‘유감’이라고 했다.

국가는 국민의 안전에 대해 무한 책임이 있음에도 이번 사고가 발생한 것에 대해 국민 안전을 책임지는 주무 부처 장관으로서 이 자리를 빌려 국민 여러분께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유가족과 슬픔에 빠져 있는 국민의 마음을 미처 세심하게 살피지 못했습니다. 이점 다시 한번 깊은 유감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 장관이 즐겨 쓴 ‘유감(遺憾)’은 ‘마음에 차지 아니하여 섭섭하거나 불만스럽게 남아 있는 느낌’이라는 뜻이다. 현실 언어에서 이는 ‘사과’와 대체할 수 있는 낱말이 아니다. 게다가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빎”이라는 뜻의 ‘사과(謝過)’와는 꽤 거리가 있다.

 

‘유감(遺憾)’의 수사학

실제로 정치권에서 흔히 쓰이는 이 말은 원치 않는 사과를 해야 할 처지에 놓인 이가 쓰는 타협의 수사다. 잘못의 인정이나 용서와는 달리 이 말은 상대방이 아니라, 자기 심경의 일단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이 맞닥뜨린 상황에 마뜩잖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교묘한 수사이다.

국민의 마음을 살피지 못했으면 사과하면 될 일이지, “마음에 차지 아니하여 섭섭하거나 불만스럽게 남아 있는 느낌”은 무언가. 이는 내용으로는 사과의 의미를 담되, 완곡한 표현으로 상황을 서로 눙쳐서 터는 형식이다. 다분히 권위주의적 어법이어서 민주 사회에서는 걸맞지 않은 표현이다.

이런 교묘한 방식의 외교적 수사의 으뜸은 1990년 당시 아키히토 일왕이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을 환영하는 만찬에서 한일 간의 과거 문제를 언급한 형식적 사과다. 아키히토는 당시 이렇게 말했다.

일본에 의해 초래된 이 불행했던 시기에 귀국의 국민이 겪으셨던 고통을 생각하며 통석(痛惜)의 염(念)을 금할 수 없다.

‘통석(痛惜)’은 ‘애석하고 아깝다’라는 뜻의 한자어니, ‘통석의 염’은 ‘애석하고 아까운 마음, 생각’쯤으로 풀이할 수 있다. 마치 무슨 선문답과도 비슷한 이 모호한 형식으로 한국을 식민 지배한 일왕의 유감을 표현하여 한일 간 외교는 통과의례를 간신히 거쳤다.

 

모든 낱말은 화자의 속내를 드러낸다

모든 낱말은 화자의 의중을 일정하게 드러난다. 낱말은 그 생성 과정에서 특정한 의미를 포함하면서 그 말을 사용하는 언중들의 이해와 태도를 은연중에 표출하기 때문이다. ‘노동(勞動)’ 대신 ‘근로(勤勞)’를 즐겨 쓰는 것이나, 성차별적 세계관을 담고 있는 낱말들이 그 좋은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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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압사 사고와 그 피해자를 가리키는 말로 ‘사고’와 ‘참사’가, ‘사망자’와 ‘희생자’가 서로 맞선 형국도 마찬가지다. 정부나 여당 쪽에선 가능하면 이른바 ‘중립적’인 표현으로 사고에 내재한 문제를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은 속내를 정부 공문서로 공식화한다. ‘희생자’ 대신 ‘사망자’를 고집하던 속내도 다르지 않다.

정부 여당은 박근혜 정부의 이른바 ‘세월호 트라우마’를 경계하는 듯하지만, 사실 이태원 참사는 그보다 더 심각한 국가의 직무유기다.
결국 국가애도기간 마지막 날인 5일 서울 시청광장과 녹사평역 광장의 합동분향소 현판 명칭을 ‘참사 희생자’로 바뀌었다. 녹사평역 광장의 합동분향소는 12일까지 연장 운영된다. / 출처: 용산구

정부·여당의 태도에서 정치적 이해 관계나 책임의 부담 따위에 얽매이지 않는, 대상을 공감하는 태도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났듯이 그들은 공감 능력은 면책 등 정치적 이해에 짓눌려 있다. 이른바 ‘무한 책임’을 되뇌면서도 특정 낱말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이유다.

‘참사와 희생’의 정치적 트라우마를 겪은 탓일까, ‘사고’와 ‘사망자’를 고집하던 이들의 변명은 궁색하게 느껴진다. 여미면 여밀수록 속내는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면서 문제해결의 전제인 신뢰를 점점 잃어가고 있다. 모두가 아는 사실인데 그들만 모른 척하는 현재 상황은 한국 정치가 빠진 늪이고, 딜레마다.

역사의 교훈조차도 외면하게 하는 이 지독한 맹목의 정치는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

원문: 이 풍진 세상에


표지 이미지 출처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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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왜 그런 데를 갔대?”라는 무심한 말 https://ppss.kr/archives/258035 Mon, 07 Nov 2022 05:42:35 +0000 http://3.36.87.144/?p=258035

허망했다. 무서웠다. 내가 자주 가는 곳에서, 내가 가려고 했던 곳에서 내 또래의 친구들이 죽었다.

삶에 대한 허망을 이겨내기 위해 필요한 건 위로와 연대라는 까뮈의 말을 믿어보고 싶다.

원문: 서늘한여름밤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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