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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

우리나라 고유의 형식으로 지은 집을 양식 건물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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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옥은 원래 없었다?!

한옥이라는 말은 원래는 없는 말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한옥이라는 용어 자체가 서양식 주택인 양옥과 구분하기 위한 용어이기 때문이죠.

한옥이라는 말은 1907년 정동길 주변을 기록한 약도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당시 서양의 근대 건축양식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이들과 구분하기 위해 표시한 것이었죠. 이때는 한옥이라고 하면 살림집을 의미했는데요. 우리나라의 전통 건축물을 통칭하여 한옥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1975년에 나온 『삼성 새우리말 큰사전』에서부터 입니다. 이 사전에서 한옥은 양옥과 대비되는 개념이자 한옥의 동의어로 ‘조선집’, ‘한식집‘이 있다고 표기되어 있죠.

현재 한옥에 대한 정의는 건축법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요. 2010년 2월에 제정된 「건축법 시행령」 제2조에 따르면 한옥은 ‘기둥 및 보가 목구조 방식이고 한식 지붕틀로 된 구조로서 기와, 볏짚, 목재, 흙 등 자연 재료로 마감된 우리나라 전통 양식이 반영된 건축물 및 그 부속 건축물’을 말한다고 합니다.

 

2. 한중일 전통 가옥의 차이는?

한중일 전통 건축물은 비슷하게 생겼는데요. 한옥만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중국의 집은 온돌과 마루가 없고 일본은 마루만 있는 반면, 한옥은 방에는 온돌을 대청과 툇간에는 마루를 깔아두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어요. 난방시설인 온돌과 냉방시설인 마루를 가지고 있는 한옥은 겨울에 춥고 여름에 더운 한반도의 특징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온돌은 순수 우리말로 구운 돌의 약자인 ‘구들’이라고도 합니다.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불기운이 바닥 아래를 지나 굴뚝으로 빠지게 되는 구조이죠. 온돌은 열의 효율이 높고 연료나 시설이 경제적이며 고장이 별로 없다는 장점이 있어요.

마루는 나무 널판으로 구성된 바닥을 말하는 것으로 바닥을 지면으로부터 떨어트려 통풍이 되도록 해 습기를 방지하는 구조입니다. 대개 마루는 앞쪽이 트여 있고 뒤쪽에는 문이 달려 있는데, 한여름에 문을 열면 통풍이 잘됐죠.

 

3. 조선시대부터 한옥마을이었던 북촌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한옥은 대문, 마당, 부엌, 사랑방, 안방, 마루, 외양간, 화장실, 장독대 등이 갖추어져 있는 조선시대 상류층의 한옥입니다. 유교 사상이 사회 전반에 퍼져있던 조선시대라 신분과 남녀유별, 장유유서를 공간에도 적용했죠. 크게 안주인이 쓰는 공간인 안채와 바깥주인이 쓰는 바깥채 등으로 나누기도 하고, 집채를 달리하거나 작은 담장을 세워 주거 공간을 상, 중, 하로 나누기도 했어요.

한옥은 풍수지리에 따라 배산임수의 원칙으로 지어졌어요. 뒤로는 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물을 마주하며 남쪽으로 짓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한옥의 위치였죠. 풍수지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서울에서 가장 좋은 장소는 경복궁이고 그다음이 창덕궁인데요. 그 사이에 있는 북촌 역시 북고남저로 겨울에 따뜻하고 배수가 잘될 뿐 아니라 남쪽은 넓게 트인 데다 남산의 전망도 좋아 조선 시대부터 권문세가와 왕족들이 모여 살던 동네라고 하네요.

경복궁
창덕궁

반면 하급 관리들은 남산 기슭인 이른바 남촌에 살았죠. 이곳은 음지이기는 하지만 배수가 잘되고 지하수가 풍부하여 물을 얻기 편했어요. 오늘날의 중구 남산동에서 필동을 거쳐 묵정동에 이르는 지역이에요.

하지만 조선 후기에는 조금 달라졌습니다. 원래 고급 관리가 살던 곳이 북촌, 하급 관리가 살던 곳이 남촌이었죠. 하지만 후기로 갈수록 북촌에는 노론이 거주하기 시작했고, 남론에는 소론과 남인·북인이 살게 됐어요.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른 기록입니다.

 

4. 서양인들이 만든 개량한옥

구한말 미국공사관 ⓒUniversity of Arkansas Libraries

구한말이 되자 우리나라에 서양인 관리와 서양인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한옥을 구입해 자신들의 습관과 용도에 맞게 개조했어요. 여러 개의 방을 터서 침실·식장·거실 등으로 개조하는 한편, 벽지를 바르고 종이로 된 창문을 유리창으로 바꾸고 서양식 가구와 카펫 그리고 난로를 설치했어요. 당시 미국공사관이 대표적인 개량한옥이었죠.

서양인이 개조한 한옥은 이후 조선인의 주거 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조선인 재력가들은 이들을 따라 창호지 방문과 창문을 유리로 바꾸는 한편, 대청마루를 응접실로 바꾸고 목욕탕도 설치했어요. 당시 재력가들 사이에서는 서양식 가구를 사용하는 것은 부와 개화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유행하기도 했다고 하네요.

 

5. 도시형 한옥의 탄생

도시형 한옥

1908년 일본이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하면서 일본인들을 조선의 농경지로 대규모로 이민시키는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이때 조선의 땅값이나 세금이 일본에 비해 싸고 수익률이 높아 주로 일본에서의 빈농층이 주로 이민을 왔죠. 1911년 첫 이민 가족 160호를 시작으로 매년 5,000명 이상이 넘어왔어요.

일본인들이 조선의 농촌으로 이민 온 후 일제는 본격적으로 조선의 농촌을 수탈했습니다. 특히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많은 조선인의 토지를 빼앗았죠. 토지를 빼앗긴 조선인들은 소작농이 되었습니다. 소작농 거리도 찾지 못한 이들은 공장이 있는 대도시로 이주해 막노동을 하게 됐죠. 이로 인해 경성에는 1926년 30만이던 인구가 1931년에는 36만으로 1936년에는 67만으로 늘어났죠. 도시로 몰린 인구로 인해 주택난이 심해져 새로운 주거 형태가 필요해졌어요.

주택난 속에서 조선인 전문 주택 개발업자들이 등장했습니다. 관급 건설 사업을 일본인들이 독점하게 되면서 조선인 건설업자들은 민간 주택 시장으로 눈을 돌렸죠. 이들은 대형 필지를 사서 작은 필지로 나눈 후 획일화된 한옥을 개조했습니다. 어려운 조선인들의 경제 사정상 소규모 주택의 수요가 더 많았고, 주택 개발을 하는 입장에서도 작게 여러 주택을 만드는 것이 평당 이익이 높았기 때문이었죠. 게다가 한옥은 일본인들이 손대기 어려운 분야였고, 유학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서구식 건축 개발보다 훨씬 수월한 시장이었어요.

이때 대규모로 만들어진 한옥을 도시형 한옥이라고 부릅니다. 기존 한옥과 달리 ㄷ자나 ㅁ자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비교적 크기가 작고, 변소가 건축물 내부에 들어간 형태를 띠고 있었으며, 벽돌과 유리 함석을 사용하는 등의 특징이 있었죠.

 

6. 건축왕, 북촌 한옥마을을 만들다

건축왕 정세권

당시 등장한 전문 건설업자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정세권이예요. 1919년 3.1 운동 이후 상경한 정세권은 1920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부동산개발회사 건양사를 설립했습니다. 북촌을 시작으로 경성 곳곳에 근대식 한옥 집단지구를 건설하면서, 10년도 안 되어 큰 부를 축적해 조선을 대표하는 부동산업계의 거물로 성장하게 되죠. 사람들은 그를 건축왕이라고 불렀어요.

그가 개발한 대표적인 필지는 조선 왕족의 종친 이해승의 누동궁을 개발하여 만든 68채의 한옥단지, 북촌 가회동 31번 한옥 집단지구, 익선동 166번지 등이 있어요. 후자의 두 곳은 지금도 한옥을 찾아볼 수 있죠.

이 부를 바탕으로 정세권은 신간회, 조선물산장려회, 조선어학회 등을 물심양면으로 후원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을 계기로 일제에게 고문을 받기도 하고 막대한 재산을 빼앗기기도 하면서 안타깝게도 건양사는 쇠락하게 돼요.

 

7. 고급 주택가였던 전주 한옥마을

전주 한옥마을

지금의 전주에는 풍남문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일제강점기 이전만 해도 사대문이 있었어요. 성안에는 관인, 양반, 향리 등이 거주했고, 성 밖에는 상인들이 거주하면서 남문시장이 형성됐죠. 하지만 1907년 조선 통감부의 폐성령에 따라 풍남문을 제외한 3개 성문이 철거되었고, 도심부는 1920~30년에 일본인들이 독점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1920, 30년대의 도시 집중화 경향에 따라 전주로 많은 사람이 이주해 왔습니다. 그중에는 호남평야의 대지주나 신흥 자본가들도 있었죠. 이들은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고급 주택가인 한옥 집단지역을 형성했어요. 이 지역의 한옥 주택은 1970년대까지 꾸준히 생겨났지만, 1970년대 중반부터는 한옥 보존 정책이 시행되면서 신축이 중단되었죠.

 

8. 아파트에 밀린 한옥

6·25전쟁 이후로 경제가 개발되면서 도시로 인구가 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전보다도 토지를 효율적으로 이용해야 하는 필요성이 생기자, 한옥보다는 서양식 단독주택과 아파트가 건설되기 시작했어요. 특히 1960년대와 1970년대 산업화와 새마을 운동 시기를 거치면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심해졌고, 초가집도 슬레이트집으로 바뀌게 됐어요. 70년대 중반에는 재개발, 신축 등으로 인해 기존 한옥의 90%가 헐리게 됩니다.

북촌한옥마을에도 1970년대 들어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한옥을 보존해야 한다는 필요성도 대두되기 시작했죠. 1976년 북촌 지역을 민속 경관 지역으로 지정하면서 북촌의 한옥은 보존되기 시작했답니다.

원문: 사소한 것들의 역사


참고문헌

  • 김경민. (2017).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이마
  • 임창복. (2011). 한국의 주택, 그 유형과 변천사. 돌베게
  • 전남일. (2010). 한국 주거의 공간사. 돌베게
  • 전남일 외 3명. (2008). 한국 주거의 사회사. 돌베게
  • 이용우. (2003). 북촌 한옥마을. 대한인쇄문화협회
  • 장성화. (2011). 전주 한옥마을 조성사업의 도심재생 성과 분석 및 개선방안. 전북발전연구원
  • 신광호. (2003). 도시형 한옥 마당의 공간적 특성 연구 – 전주시 도시형 한옥 사례 연구. 우송대학교 석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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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러그

전기 회로를 쉽게 접속하거나 절단하는 데 사용하기 위하여 코드 끝에 부착하는 접속 기구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1. 한 집 당 벽면 콘센트 한 개

로터리 컨버터
크기는 대략 이렇습니다

전기 기술은 1800년에 개발된 볼타의 파일을 시작으로 19세기에 급속도로 발전합니다. 불과 100년도 안 되어서 전기가 가정용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죠.

전기가 가정용으로 보급될 수 있었던 이유는 1888년 로터리 컨버터(Rotary Converter)가 발명되었기 때문입니다. 로터리 컨버터는 전압, 주파수, 위상 등을 원하는 형태로 바꿀 수 있는 장치입니다. 그러니까 전기가 모든 가정에 동일한 전압의 전기를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단 말이죠.

전기가 가정에 처음 공급되었을 때는 조명용으로만 사용되었기 때문에, 가정에는 천장에 달린 소켓만 있었습니다. 영국을 기준으로 1930년대 초까지도 기술적 한계로 인해 한 가구당 6개의 천장 소켓과 1개의 벽면 소켓만 있었다고 합니다.

1909년의 토스터기 ⓒwww.worldstandards.eu
전구와 비슷해 보이는 초기 전기 플러그

참고로 벽면 콘센트 아니고 소켓 맞습니다. 당시 전기 기기들은 오늘날과 같은 꽂아 쓰는 플러그 형태가 아니라 전구를 끼우듯이 돌리는 형태였기 때문이죠. 이 나사 소켓형 플러그는 1880년대 중반 에디슨에 의해 개발되었고 20세기 초까지 산업 표준으로 활약했습니다.

 

2. 파나소닉을 만들어 낸 멀티탭

대략 이런 느낌의 쌍소켓
마쓰시타 고노스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30년대까지 대부분의 가정에는 벽면에 하나의 소켓만 있었어요. 이러한 이유로 천장 조명을 제외한 2개 이상의 전기 기기를 사용하려면 추가적인 어댑터가 필요했습니다.

이 어댑터는 1918년 일본에서 발명됩니다. 작은 전기용품 가게를 운영하던 일본의 한 전기공이 쌍소켓을 발명한 것이죠. 쌍소켓은 히트 상품이 되어 그의 가게를 어엿한 기업으로 성장시킵니다.

이 기업이 바로 훗날 파나소닉이 되는 마쓰시타 전기 산업입니다. 쌍소켓을 발명한 전기공은 파나소닉의 창업자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죠.

테이블 탭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멀티탭
멀티탭 절망편 ⓒReiner Hahn

우리가 쓰고 있는 멀티탭 형태는 1929년에 테이블 탭(Table Tap)이라는 이름으로 처음에 등장했습니다. 1970년에는 페드트로(Fedtro)라는 회사에서 콘센트 구멍마다 스위치가 달린 멀티탭을 선보였죠.

 

3. 유럽과 미국의 평행이론?!

에디슨이 발명한 소켓형 플러그는 불편했기 때문에 오늘날처럼 꽂는 형태의 플러그가 등장합니다. 흥미로운 건 유럽과 미국에서 각각 독자적으로 발명했는데 발상이 비슷했다는 점이에요.

  • 유럽 승 : 일자형 플러그

꽂는 형태의 플러그는 유럽에서 먼저 등장했습니다. 1882년 영국의 토머스 테일러 스미스(Thomas Taylor Smith)가 ‘전기 회로 연결’에 대한 특허를 낸 것이 최초였죠. 1889년 제너럴 일렉트릭 컴퍼니 카탈로그에도 꽂는 플러그가 등장한 것을 보면 상용화도 빠르게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893년 GEC 카달로그에 실린 전기 플러그
1904년 허벌(Hubbell)의 플러그 제품들

반면, 미국에서는 유럽보다 22년이 늦은 1904년 하비 허벨(Harvey Hubbell )에 의해 발명됩니다. 산업 표준이 소켓형이었기 때문에 그의 발명품은 소켓에 연결해서 사용하는 형태였죠. 하비 허벨은 이후 허벨 회사를 설립하고 다양한 제품을 내놓는데요, 오늘날의 멀티탭과 비슷한 형태의 제품도 있었습니다.

  • 미국 승 : 접지 플러그
Knapp의 접지 플러그
1925년 등장한 슈코 플러그

누전을 방지하기 위한 접지 장치가 들어간 플러그의 발명은 미국이 유럽보다 빨랐습니다. 1915년 허벨 회사에 재직 중이던 조지 냅(George Knapp)이 3핀짜리 콘센트, 즉 접지 장치가 들어간 플러그를 개발한 것이죠.

유럽에서는 그로부터 10년 뒤인 1925년 바이에른 전기 악세사리(Bayerische Elektrozubehör AG)에 재직 중이던 알베르트 뷔트너(Albert Büttner)가 개발합니다. 이 플러그는 안전 콘센트를 의미하는 독일어 ‘Schutzkontakt’의 줄임말인 슈코(Schuko)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죠. 현재는 type F 규격으로 불리며 대부분의 유럽 국가와 우리나라에서 사용 중입니다.

접지 기능이 있는 이 두 플러그는 안전성과 편리성을 인정받아 미국과 유럽의 표준이 되었죠.

 

4. 하나로 통일시켜라 좀…

옛날 스페인의 콘센트. 어떻게 쓰는지 상상도 못 하겠다…
옛날 그리스식 콘센트

플러그와 콘센트는 나라별로 독자적으로 발전되어 왔기 때문에 유럽 내에서도 각자 모양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나라끼리 표준화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100년 전 사람들이라고 안 한 것이 아니었죠. 그래서 1906년 영국에서 비영리 국제기구인 국제 전기기술 위원회(IEC)도 창설되면서 총대를 메는가 싶었는데, 하필이면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애매한 상태에서 멈춰버렸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다시 유럽 국가 12개국이 모여서 회의를 했죠. 하지만 1938년 영국과 1939년 프랑스에서 열린 회의는 모두 눈치만 봤고, 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흐지부지되었습니다.

1957년에야 국제 전기 장비 승인 규칙 위원회(IECEE)에서 플러그 및 콘센트의 표준을 발표하긴 했지만, 이는 기술 보고서에 불과했습니다. 1963년이 되어서야 ‘유로 플러그’라고 불리는 것이 등장하긴 합니다만 이미 각국의 전기 인프라가 깔린 상황이었던지라… 통합은 물 건너간 거죠.

세계표준이라 쓰고 남아공 전용이라 읽는 N타입

그래서 세계 표준은 없냐고요? 놀랍게도 있습니다. 1986년 제정된 유니버셜 플러스(Type N)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세계 표준 규격인 만큼 접지도 있고 플러그도 두껍지 않아 합리적인 플러그죠. 하지만 전 세계에 깔린 전기 인프라를 뒤집어엎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사용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전기 인프라가 완전히 구축되지 않았던 애꿎은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브라질에서만 이 플러그를 채택했습니다. Type N의 변형 플러그가 등장했기 때문에, 사실상 남아공 전용 플러그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통일된 건 하나 없이 A~O Type이 존재하는 현재에 이르렀는데요. 러프하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Figure.16 A-O 까지의 플러그&콘센트 타입 (혼파망…)
  • 미국의 영향을 받은 나라: Type A, B
  • 영국의 영향을 받은 나라 : Type C, D, G, M
  • 독일을 필두로 사실상 유럽 표준 : Type F
  • 소수 국가들에서만 쓰는 : Type H(이스라엘), J(스위스), K(덴마크), L(이탈리아), O(태국)
  • 세계 표준이라 쓰고 남아공, 브라질용이라 읽는 : Type N

 

5.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에너지 경제신문

우리나라에 전기 인프라가 깔리기 시작한 것은 미군정 시기부터입니다. 시대 특성상 자연스럽게 미국 표준인 Type A, B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1970년대 초까지 미국 표준을 잘 쓰고 있었죠.

하지만 문제는 1970년대까지 발전소가 부족해 전력 사정이 열악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기 사용량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하자, 정부는 효율적이고 안정적인 전력 공급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하죠. 그렇게 시작된 것이 1973년부터 2005년에 걸친 ‘220V 승압 사업’입니다.

전압이 높아지며 발생하는 감전 등의 안전 문제를 고려해 type F를 채택한 것입니다. Type A, B는 코드를 완전히 빼기 전까지 전기가 통하기 때문에, 살짝만 걸쳐있는 상태에서 돌출된 핀을 잡으면 감전되는 안전성 문제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지금의 콘센트 형태로 자리 잡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원문: 사소한 것들의 역사


표지 이미지 출처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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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깎이 777 말고 아는 사람? https://ppss.kr/archives/266642 Thu, 16 Jan 2025 14:34:33 +0000 http://3.36.87.144/?p=266642 손톱깎이 하면 쓰리세븐이 가장 유명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손톱깎이에는 생각보다 여러 브랜드가 있습니다. 국내만 해도 벨, 로얄금속공업 등이 있고 해외의 벨로티, 카이 등이 있죠.

손톱깎이 최초의 브랜드는 Gem이지만 현재는 판매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로 오래된 회사인 Trim을 중점적으로 살펴볼 예정입니다. 아니, 그럴 예정이었습니다… 만 마찬가지로 Trim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더라고요. 그래서 손톱깎이 전반에 대한 역사를 다뤄보았습니다. 그래도 분량이 적은데, 이런 날도 있어야죠ㅎㅎ

 

1. 시작이 불분명한 손톱깎이

 1875년 발렌타인 포거티의 손톱깎이 개선 특허
1881년 유진 하임과 셀레스틴 마츠의 손톱깎이 특허

손톱깎이의 발명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가장 오래된 손톱깎이 개선 특허는 1875년 미국의 발렌타인 포거티(Valentine Fogerty)에 의해 출원되었습니다. 다만 포거티의 특허 제품은 손톱깎이라기 보다는 원형 네일 파일에 가까웠죠.

19세기에 수많은 손톱깎이 특허가 나오는데, 오늘날과 비슷한 클램프형 손톱깎이는 1881년 유진 하임(Eugene Heim)과 셀레스틴 마츠(Celestin Matz)의 특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902년 Gem 손톱깎이 광고

1896년에 Gem이라고 하는 손톱깎이 브랜드 제품이 처음으로 생겨났습니다. 1947년에는 미국 바세트(BASSETT)사의 TRIM 손톱깎이가 출시됩니다. 트림 제품은 레버를 엄지손가락으로 돌릴 수 있는 기능을 추가하는 등 안정적인 사용감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죠. 우리나라에서도 트림 제품은 고급품으로 인식되어 장롱 서랍에 모셔두고 사용했답니다.

 

2. TRIM이 선택한 국내 손톱깎이 회사

벨금속공업 이희평 사장 ⓒ동아일보

고급 손톱깎이로 명성이 높았던 TRIM의 손톱깎이는 1980년대 이후 한국의 손톱깎이 회사들의 품질이 상승하고 경쟁력이 높아지면서 세계 시장 점유율에서 점점 밀리기 시작합니다. 결국 2003년 트림은 공장 문을 닫고 OEM방식을 채택했죠. 이곳의 생산을 도맡은 곳이 바로 한국의 벨금속공업입니다.

벨금속공업은 1954년 한국전쟁 직후에 설립되어 우리니라 최초로 손톱깎이를 만든 회사입니다. 당시에는 손톱깎이를 만들 강철 자재조차 구하기 어려웠죠. 그래서 주변에 나뒹굴던 드럼통을 작두로 잘라낸 뒤 연마기로 일일이 날을 갈아 손톱깎이를 만들었다고 하네요.

한동안은 해외에 OEM방식으로 판매하다가, 1974년부터는 BELL이라는 자체 브랜드로 수출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88올림픽 이후로 한국의 위상이 올라가면서 세계에서 벨 손톱깎이를 알아봐 주기 시작합니다.

참고로 1970년에 벨금속공업에서 손톱깎이에 손톱 칼을 붙인 디자인 특허를 냈습니다. 오늘날에야 흔한 디자인이지만 당시에는 벨금속공업에서만 만들 수 있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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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777 vs 보잉

쓰리세븐 손톱깎이 세트, 군대를 다녀온 분은 익숙한 세트 ⓒi777mall.com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쓰리세븐(777) 손톱깎이 회사는 1975년 설립되었습니다. 현재는 세계시장 점유율 40%를 차지하며 세계 1위를 하고 있는 기업이죠.

창업자 김형규 회장이 1960년대 중반 잡화상을 하던 중, 미국 트림사의 손톱깎이가 유행하는 것을 보고 손톱깎이 사업에 뛰어들었다고 하네요. 벨금속공업과 마찬가지로 드럼통을 이용해 손톱깎이를 만들기 시작해 OCM 브랜드로 제품을 수출했습니다.

93년, 미국 점유율 70%를 넘어가자 이들은 자체 브랜드로 수출을 결심하고 미국 특허청에 ‘777’ 상표출원을 했습니다. 하지만 미국 항공사 보잉에서 90년에 777을 등록해 놓았기 때문에 상표등록을 할 수 없다고 통보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미국 상표법은 ‘선사용주의’이기 때문에 보잉사 보다 먼저 777을 사용했다는 것을 증명하면 승소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온 공장을 뒤져 84년 미국에 777 브랜드를 부착해 수출한 제품을 찾아냅니다. 결국 보잉과 공동으로 상표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이 소송전의 승리로 쓰리세븐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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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기한 손톱깎이들

분량이 적어서 이대로 끝내기가 아쉽네요. 신기한 손톱깎이들도 몇 개 소개해 드립니다.

ⓒamazon.com

허리를 굽히지 않아도 되는 발톱깎이 

안티오크 클리퍼(Antioch Clipper)에서 처음으로 출시한 발톱깎이로, 2011년에 특허가 출원되었습니다. 허리를 굽히기 힘든 어르신들을 생각해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klhip의 13만 원짜리 손톱깎이 ⓒklhip.com

가장 비싼 손톱깎이

세계 최초의 인체공학적으로 올바른 손톱깎이라고 주장하는 Klhip 손톱깎이입니다. 가격은 $79.95으로, 국내에서는 13만 원에 판매되고 있습니다. 의료용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들어졌다, 일본의 수술용 초정밀 기술이 사용되었다 등등의 수식어가 있긴 한데… 개인적으로 가격이 납득가진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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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동 손톱깎이 ⓒlotteon.com

전자동 손톱깎이

샤오미 등에서 출시한 전자동 손톱깎이입니다. 언제 처음 등장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국내에는 2019년부터 소개된 것으로 보입니다. 깎는다기보단 갉아내는 거라 호불호가 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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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사소한 것들의 역사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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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철의 노벨상 후보들, 겨울 난방기구의 역사 https://ppss.kr/archives/265602 Fri, 03 Jan 2025 01:39:01 +0000 http://3.36.87.144/?p=265602

난방기

실내의 온도를 높여 따뜻하게 하는 장치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시작하기 전에

윌리스 하빌랜드 캐리어는 에어컨의 기초를 만든 사람입니다. 인터넷에는 이 사람이 노벨평화상을 받아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더라고요. 오늘 저는 겨울철 노벨 평화상 후보들을 소개해 보려 합니다. 라디에이터, 온수기, 전기장판, 온수 바닥 난방 등의 온열 기구로 인류를 추위에서 구원하신 위인들이죠.

 

1. 첫 번째 후보, 라디에이터

최초의 산업용 난방은 라디에이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산업혁명의 시작은 증기기관이고, 라디에이터는 바로 그 증기로 공기를 따뜻하게 만드는 장치이기 때문이죠. 증기기관을 만들어낸 제임스 와트(James Watt)도 1790년대 일종의 라디에이터를 만들어 집에 설치했다고 합니다.

스티븐 골드의 매트릭스 라디에이터 ⓒpmmag.com
넬슨 번디의 라디에이터 특허

이처럼 증기기관이 등장하고부터 다양한 형태의 라디에이터가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증기를 사용하는 라디에이터는 압력 때문에 폭발하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1854년 스티븐 골드(Steven J. Gold)이죠. 그가 만든 라디에이터는 기존의 것보다 훨씬 저압으로 작동하는 장치로, 생김새 때문에 매트릭스 라디에이터로 불렸죠. 당시 사용되고 있던 벽난로와 비교해 효율도 안정성도 높아 상업적으로 성공한 최초의 라디에이터가 됩니다.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라디에이터의 형태는 1863년 발명가 조셉 나슨(Joseph Nason)과 로버트 브릭스(Robert Briggs)가 그 전신을 만들고, 1872년 넬슨 번디(Nelson H Bundy)가 완성한 제품입니다.

아메리칸 라디에이터 회사(American Radiator Co.)는 1891년 많은 보일러와 라디에이터 제조업체들을 통합해 세계에서 가장 큰 라디에이터 제조사가 됩니다. 이 회사는 오늘날에도 존재하는데요. 바로 아메리칸 스탠다드(American Standard)죠.

 

2. 두 번째 후보, 온수기

옛날에는 따뜻한 물을 쓰려면 냄비에 물을 끓여서 사용했습니다. 씻는 물이라면 펄펄 끓는 냄비 물을 찬물과 섞어 미지근하게 만든 뒤에 바가지로 퍼서 사용했죠.

가이저의 광고 ⓒbatemanwaterheating.com

오늘날처럼 바로 온수가 나오는 기계는 1868년 처음 등장했습니다. 영국의 벤자민 와디 모건(Benjamin Waddy Maughan)이 발명했죠. 모건은 이 발명품을 아이슬란드 온천의 이름을 따서 가이저(Geyser)라고 불렀는데요. 가이저는 차가운 물이 뜨거운 가스에 의해 가열된 파이프를 통과하면서 온수가 되는 원리였습니다. 하지만 가스를 배기하는 장치가 없어 자칫하다가는 터질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장치이기도 했죠.

에드윈 루드가 만든 온수기
에드윈 루드와 그의 발명품 온수기 ⓒwaterheatersplusplumbing.com

모건의 발명품을 안전하게 개량한 것은 연료 가스 제조 회사에서 일하고 있던 노르웨이의 엔지니어 에드윈 루드(Edmund Rudd)였습니다. 루드는 1880년 최초의 자동 저장 탱크식 가스 온수기 특허를 받았죠.

켐프의 태양령 온수기 특허
켐프의 태양령 온수기 광고 ⓒarticsolar.com
켐프의 태양력 온수기 광고 ⓒarticsolar.com

루드가 온수기를 개량한 때와 비슷한 시기에 켐프(Clarence Kemp)도 온수기를 생산하고 있었는데요, 1891년 그는 조금 특별한 온수기를 발명합니다. 가스로 물을 데우는 장치가 아닌 태양열로 물을 데우는 온수기인 클라이맥스 시스템을 개발한 것이었죠. 물이 흐르는 파이프를 지붕 위에 노출해 태양열로 파이프를 데우는 형식이었어요. 뜨거운 물을 사용하기 위해 한여름에도 난로를 데워야 하는 것이 불편하다고 생각해 만든 것이었죠.

 

3. 세 번째 후보, 전기장판

러셀의 전기담요를 보고 있는 사람들

최초의 전기장판은 1912년 의사였던 사무엘 러셀(Samuel Irwin Russell)에 의해 발명됩니다. 결핵환자의 몸을 따뜻하게 만들기 위해 발명한 것이었죠. 하지만 부피도 크고 화재의 위험성도 있어서 널리 쓰이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장판이 아닌 담요 형태로 만든 건 조지 크롤리(George Crowley)입니다. 조지 크롤리는 해군 기술자였는데요, 조종사들이 높은 고도에서 추위를 견딜 수 있도록 하는 전기 온열 비행복을 개발합니다. 그리고 이 기술을 담요에도 적용하죠. 1936년에는 실내 온도에 따라 자동으로 켜졌다 꺼졌다 하는 전기담요를 개발하기도 합니다.

 

4. 마지막 후보, 온수 바닥 난방

바닥 난방 시스템은 기원전 1300년 중동에서 처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르자와 국왕이 터키 비체슬탄의 궁전에 설치된 것이 바로 최초의 바닥 난방이죠. 참고로 우리나라의 온돌은 기원전 4세기경(!)으로 추정됩니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시기에 로마에서도 하이포코스트(hypocaust)라고 불리는 바닥 난방장치가 있었어요. 하이포코스트는 돌 바닥 아래의 빈 공간에 연기가 지나 벽면의 연도(연기 길)로 빠져나가게 되는데요. 온돌은 연기가 지나가는 길이 만들어져 있는 반면, 하이포코스트는 바닥 아래가 거의 다 뚫려있는 형태였죠. 또한 가정집보다는 목욕탕 등의 상업시설에 설치되었죠.

온풍 바닥 난방을 설명하는 그림

로마 제국이 몰락한 후 유럽에서의 난방 시스템은 후퇴하여 벽난로가 난방을 대체하게 됩니다. 다시 바닥 난방이 유럽에 등장한 것은 19세기 초반이죠. 1800년 초, 미국의 발명가 다니엘 페티본(Daniel Pettibone)은 바닥에서 따뜻한 바람이 나오는 장치를 개발하는데요. 엄연히 말하면 바닥을 따뜻하게 하는 것은 아니었고 특정 위치에서 따뜻한 바람이 나오는 장치라 바닥 난방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했죠.

앤지어 퍼킨스의 난방 시스템

온풍을 이용한 난방 방식은 부피가 너무 크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1831년이 되면 온수 파이프가 방바닥을 흐르게 해 바닥을 데우는 난방방식이 등장합니다. 앤지어 퍼킨스(Angier March Perkins)의 고압 온수 난방 시스템이었죠. 이 난방 시스템은 영국에서 인기를 끌고, 이윽고 미국에서도 유행하게 되죠.

 

5. 석탄 → 갈탄 → 연탄 →기름 → 가스

새마을 보일러 ⓒ6080추억상회

우리나라는 온돌을 오랫동안 쓰다가 주거 형태가 점차 변하기 시작하면서 더 이상 온돌을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서 집마다 퍼킨슨 방식의 바닥 난방이 도입되기 시작했죠. 물을 데우는 연료는 석탄으로 시작되었다가, 조개탄으로 불린 갈탄, 연탄 순으로 이어졌습니다.

당시에는 새마을보일러라는 것도 있었습니다. 퍼킨슨 화로 윗부분에 뚜껑을 만들어 그 안으로 물이 들어가 데워진 후, 옆에 달린 큰 고무통에 온수를 받을 수 있는 형태였죠. 새마을보일러는 1960년대 후반부터 널리 보급되었지만, 연탄가스 중독 사고가 발생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때마침 1970년대 다가구주택, 아파트 등이 보급됨에 따라 집마다 있던 퍼킨슨 난방이 중앙 난방식 연탄보일러로 대체되기 시작합니다. 이 중앙식 연탄보일러는 온수 사용이 가능하도록 제작된 최초의 온수용 보일러이기도 하죠.

1975년 이후부터는 아예 연탄이 사라지고 기름보일러가 보급되기 시작했습니다. 작동 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방안에서도 보일러를 컨트롤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은 혁신이었죠. 1997년 중반에는 사용자가 기다릴 필요 없이 순간적으로 온수를 쓸 수 있는 순간식 기름보일러도 등장합니다.

하지만 90년대 후반 정부의 에너지 정책과 맞물려 기름보일러보다는 가스보일러로 점차 시장의 흐름이 옮겨가게 되죠.

원문: 사소한 것들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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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 복음 12장 34절 https://ppss.kr/archives/266646 Thu, 31 Oct 2024 00:55:30 +0000 http://3.36.87.144/?p=266646

치킨

닭에 밀가루 따위를 입히고 튀겨 만든 요리. 굽기도 한다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1. B. C. (Before Chicken)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닭 요리는 백숙입니다. 고기가 귀하던 시절 더 이상 달걀을 낳지 못하는 닭을 푹 끓여서 양을 불릴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죠.

백숙 이후에는 일제강점기에 계삼탕이 나타났습니다. 계삼탕은 삼계탕의 원래 이름인데요. 인삼과 닭은 모두 귀한 요리 재료였기 떄문에 당시에는 특권층들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어요. 우리가 복날 흔하게 삼계탕을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1963년 이후 사료 산업이 발전되고 양계산업의 규모가 커진 이후입니다.

요새는 닭이 일상 음식이 되었지만, 옛날에는 특별한 날에 먹는 음식이었어요. 크리스마스나 Thanks Giving Day에 주한 미군들은 고국에서 공수한 칠면조 요리를 먹었는데, 이것을 보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따라 했다는 거죠. 하지만 칠면조는 구할 수 없으니까 대신 닭을 먹었다고 합니다.

 

2. 태초에 전기구이 통닭이 있으라

우리나라에서 처음 등장한 치킨은 1960년 명동영양센터의 전기구이 통닭입니다. 현재도 가게가 남아있어요.

전기구이 통닭은 굽네치킨과 오빠닭 등으로 대표되는 오븐 치킨의 전신이죠. 여기에 강한 양념을 더한 것이 숯불구이치킨이고, 2005~6년쯤에 유행했던 불닭을 거쳐 현재는 훌랄라와 지코바로 남아있죠.

 

3. 압력튀김기가 이 땅에 이르러 닭을 튀겼나니

1970년대 말 압력튀김기가 국내에 수입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튀김옷이 있는 후라이드 치킨이 등장하게 됩니다. 치킨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는 먼저 튀김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튀김에는 간단하게 습식과 건식이 있어요. 습식은 물반죽, 건식은 파우더를 묻혀 튀깁니다. 물반죽으로 만든 치킨을 ‘민무늬 치킨’이라 부르고, 건식으로 만든 치킨은 ‘엠보치킨’이라 부릅니다. 습식과 건식을 합쳐 볼륨감을 주는 방식은 KFC와 같은 크리스피 치킨이 되고요.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파우더를 묻혀 건식으로 튀겨낸 엠보치킨이예요. 보드람, 치킨뱅이, 둘둘치킨, 림스치킨처럼 호프집에서 파는 치킨(?)의 형태를 띠고 있죠. 림스 스타일이라고도 불리는데요. 1977년 등장한 한국 최초의 치킨 프랜차이즈인 림스치킨에서 시작했기 때문이예요.

엠보치킨은 작은 닭을 한방염지액에 담근 뒤, 파우더를 얇게 묻혀 촉촉하게 흡수시킨 다음에 압력 튀김기에서 튀겨냅니다. 그래서 닭이 작고, 독특한 한약 맛이 나는 것이 특징이죠.

 

4. 치킨에 양념이 배거늘 많은 이들이 감읍하여 그를 믿고 따르리라

엠보 치킨 이후에는 습식으로 튀겨낸 민무늬 치킨이 등장했어요. 1980년대 시장에서 파는 ‘닭전’에서 시작되었죠. 이후 치킨 1세대 브랜드로 불리는 페리카나(1981년), 맥시칸치킨(1985년), 처갓집 양념통닭(1988년), 멕시카나(1989년), 장모님치킨(1989년)가 민무늬 치킨으로 영업을 시작했어요.

민무늬치킨이 이렇게 유행할 수 있었던 데에는 먼저 1982년 프로야구 출범, 1988년 서울올림픽 등 80년대 스포츠 열풍의 덕이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양념치킨의 등장이 큰 역할을 했어요. 민무늬 치킨은 표면이 매끄러워 양념소스에 버무리기 좋았고, 염지 자체가 독특한 향미를 지닌 엠보치킨보다 양념에 적합했죠.

양념치킨은 프랜차이즈 등록 시기(1982)가 가장 빨랐던 페리카나가 자신이 원조임을 강조했었죠. 하지만 현재는 멕시칸 창립자인 윤종계씨가 양념치킨의 개발자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윤종계씨는 1985년 양념통닭 요리법을 개발해 ‘계성육계’라는 개인업체를 운영하고 있었고, 1986년부터 ‘맥시칸 양념통닭’으로 사업을 확대했어요.

이 맥시칸 치킨에서 생겨난 업체만 70여 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대표적으로 ‘처갓집양념통닭’은 맥시칸 기계제작 공장장과 영업부장이 시작한 사업이죠.

 

5. BBQ 가로되 안방에서도 KFC 치킨을 허락하라 하더라

KFC, BBQ처럼 바삭한 튀김옷이 특징인 치킨을 크리스피 치킨, 업계 용어로는 ‘물결무늬 치킨’이라고 합니다. 크리스피 치킨을 만들기 위해서는 염지 닭에 튀김가루를 묻히고, 물반죽코팅(배터믹스)에 담갔다가 다시 튀김가루에 묻혀야돼요. 이때 좁은 통에서 튀김가루를 묻히면 닭이 서로 눌려 튀김옷의 컬이 잘 잡히지 않기 때문에, 큰 통에서 많은 양의 튀김가루를 담아 묻혀야 하죠.

이처럼 크리스피치킨은 원가가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KFC에서만 먹을 수 있는 고급 치킨이었어요. 1990년대 말이 되어서야 등장한 또래오래, BHC에서 크리스피치킨을 선보였는데요. 1995년 당시 BBQ의 컨셉은 ‘안방에서도 KFC 치킨을 즐길 수 있다’일 정도였죠.

원문: 사소한 것들의 역사


참고

  • 정은정. (2014). 대한민국 치킨전. 따비.
  • 대법원 1997. 2. 5. 선고 96마364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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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아딸”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https://ppss.kr/archives/266644 Fri, 27 Sep 2024 03:21:41 +0000 http://3.36.87.144/?p=266644

떡볶이

가래떡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 여러 가지 채소를 넣고 양념을 하여 볶은 음식. 양념은 간장으로 하기도 하고, 고추장으로 하기도 한다.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시작하기 전에

어렸을 적 먹던 컵볶이는 500원이면 먹을 수 있었는데, 이제 거의 2만 원을 내야지 떡볶이를 먹을 수 있게 되었죠. 만드는 방법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이런 의문에서 떡볶이를 조사하게 되었습니다.

미리 말씀드릴 것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없습니다. 다만 어떤 흐름에서 궁중 떡볶이가 즉석 떡볶이가 되고 매운 떡볶이가 등장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있게 될 거예요.

 

1. 가래떡의 등장

우리나라는 떡의 역사는 깁니다. 청동기 시대의 유물에서도 곡식을 가는 도구와 찜을 위한 시루를 찾아볼 수 있죠. 특히 가래떡은 기본적인 재료와 방식으로 만들기 때문에 초기에 등장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정확하게 등장하는 것은 1770년의 『경도잡지』에서 “멥쌀로 떡을 만드는데, 치고 비벼 한 가닥으로 만든다”라는 기록이 최초이죠.

 

2. 궁중 떡볶이

간장 베이스의 궁중 떡볶이 ⓒ우리의 식탁

떡볶이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595년 『겸암집』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병자(餠炙)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요. 제사 의례상에 올리는 음식이었죠.

구체적인 요리법은 『부인필지』, 『주식시의』, 『규곤요람』 등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각 책 별로 들어가는 재료가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떡볶이는 떡과 야채와 해산물 혹은 소고기를 간장 양념으로 볶은 요리였죠. 물론 밀가루와 해산물, 소고기 등은 쉽게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귀한 음식이었어요.

1930년대 노래인 「오빠는 풍각쟁이」에서 ‘불고기 떡볶이는 혼자만 먹구 / 오이지 콩나물만 나한테 주고 / 오빠는 욕심쟁이 오빠는 심술쟁이 오빠는 깍쟁이야’라는 가사를 통해 떡볶이가 귀한 음식임을 확인할 수 있죠.

 

3. 통인시장의 기름 떡볶이

통인동 기름떡볶이 원조, 김정연 할머니 ⓒMBC

6·25전쟁 이후 서촌 지역에 피난민이 모이면서 통인시장이 형성되는데요. 이곳에 김정연 할머니도 있었습니다. 김정연 할머니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 개성에서 잠시 서울로 내려왔다가 전쟁으로 인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죠. 그리고 생계를 위해 1958년부터 기름떡볶이를 판매합니다.

기름떡볶이는 뜨겁게 달군 무쇠 팬에 기름을 두르고 볶아 만드는데요. 간장 양념의 간장떡볶이와 고춧가루 양념의 기름떡볶이 두 종류가 있죠. 할머니는 2015년에 별세하시기 전까지 기름떡볶이를 판매하셨습니다.

통인시장에는 꽤 많은 기름떡볶이집이 있었지만, 우리가 흔히 아는 자작한 국물 떡볶이가 흥행하면서 많은 집이 문을 닫았다고 하네요.

 

4. 신당동 마복림 할머니 즉석떡볶이

마복림 할머니의 순창 고추장 CF

통인시장에 김정연 할머니가 계셨다면 신당동에는 마복림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마복림 할머니는 6·25전쟁 이후 1953년부터 떡볶이를 판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무엇보다 빨간 국물 떡볶이를 처음 개발한 것으로 유명하죠.

빨간 국물 떡볶이를 개발하게 된 일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마복림 할머니는 귀한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중국 음식점을 찾게 되었는데요. 귀한 음식인 탓에 본인은 중국 요리에 쉽게 손을 대지 못하고 개업식 공짜 떡으로 배를 채우려고 했답니다. 그러다가 실수로 자장면 그릇에 떡을 빠뜨렸는데, 자장면 양념이 묻은 떡이 생각보다 맛이 좋아 이를 계기로 춘장을 이용한 자신만의 떡볶이를 만들기 시작하죠.

마복림 할머니의 떡볶이는 연탄불에 냄비를 얹고 고추장과 춘장을 섞은 소스와 떡 등을 넣어 끓인 것이었는데요. 이 새로운 떡볶이는 인근 학교의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인기를 얻게 되죠. 시간이 지나면서 들어가는 부재료들이 다양해집니다. 라면 사리, 쫄면 사리, 달걀, 만두, 튀김 등이 들어가기 시작하고 70년대에는 어묵과 양배추가 추가되었죠.

마복림 할머니의 떡볶이 가게가 잘되면서 인근에 비슷한 가게들이 생기고 떡볶이 골목이 만들어지는데요. 신당동 떡볶이 골목이 성행하는 데에는 야구가 한몫했습니다. 1960년대는 고교야구, 1982년에는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동대문 운동장에 많은 인파가 몰렸거든요. 덩달아 경기가 끝나면 동대문 근처에 있던 신당동으로 떡볶이를 먹으러 오는 사람들도 늘었고요.

1996년에는 마복림 할머니가 순창 고추장 TV 광고에 출연해 ‘고추장 비밀은 며느리도 몰라, 아무도 몰라’라는 대사를 하면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집니다. 마복림 할머니는 2011년에 별세하셨지만 며느리가 이어받아 현재도 운영 중이죠.

 

5. 학생들의 소울 푸드

신당동 떡볶이집의 DJ ⓒ연합뉴스

신당동 즉석떡볶이가 유행하면서 차별화를 위한 새로운 형태의 떡볶이 가게가 등장하는데요. 바로 DJ가 있는 떡볶이 가게였습니다. 다방에 고등학생 출입이 금지되어 갈 곳이 없어진 고등학생들의 수요에 맞춘 것이었죠.

이처럼 떡볶이는 학생들의 사랑을 받았고 학생의 수도 많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떡볶이 가게들은 학교 앞에 점차 퍼져나가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90년대 초반생들까지 기억하는 포장마차 떡볶이집이 생겨난 것이었죠. 하지만 학생 인구가 줄면서 문방구와 함께 급속도로 사라지게 됩니다.

 

6. 프랜차이즈의 시작 – 신전떡볶이, 아딸, 엽떡

떡볶이는 학교 앞 길거리 노점이나 김가네나 김밥천국 등 분식 프랜차이즈 등에서 판매되는 것이 대부분이었는데요. 2000년대를 기점으로 프랜차이즈 떡볶이집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합니다. 대표적으로 1999년에 등장한 신전떡볶이와 2002년의 아딸과 동대문 엽기떡볶이가 있죠.

신점떡볶이 ⓒ네이버 블로그 Flex-
  • 신전떡볶이

신전떡볶이를 창업한 하성호 대표는 갓 군대를 전역한 1999년 대구 칠성동에서 신전떡볶이를 창업해 직접 배달하며 신전떡볶이를 운영하는데요. 입소문이 나 2003년 대구 동성로에 2호점을 내게 됩니다. 그리고 이 2호점이 대박 나면서 급성장하죠.

신전떡볶이의 전략은 매운 떡볶이를 좋아하는 마니아층을 공략하는 것이었는데요. 문제는 너무 매워서 2014년 서울에 진출할 때는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원래는 매운맛만 2가지였는데 순한 맛을 추가했다고 하죠.

아딸 매장 ⓒ한겨레
  • 아딸

아딸(아버지 튀김, 딸 떡볶이)의 시작은 꽤 장대합니다. 파주 미군기지에서 물품을 배달하던 이영석 대표가 우연한 기회에 미군 부대에서 튀김 기술을 전수받게 되는데요. 이 기술을 가지고 1972년 문산튀김집이란 가게를 차리고 꽤 잘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이영석 대표의 딸인 이현경 대표와 사위인 이경수 대표가 2000년 서울 금호동에 자유시간이란 8평짜리 분식집을 개업하게 되죠. 처음에는 평범했던 분식집이었는데요.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서 가업을 잇는 장인과 딸 부부라고 소개되면서 하룻밤 사이에 유명세를 얻게 됩니다. 아침부터 사람들이 줄을 서고, 문의 전화가 쇄도해서 전화기 코드를 뽑고 영업할 정도였다고 하죠.

인기에 힘입어 2002년 이화여대 입구에 가게를 확장해서 내는데, 이대생들의 핫플레이스가 되며 성공하게 됩니다. 계속된 성공을 발판으로 2002년 5월부턴 프랜차이즈를 본격화하기 시작하죠.

아딸은 이경수 대표가 전면적으로 언론에 나서 착한 기업으로 이미지 메이킹을 해왔는데요. 자서전에서도 사회기부 등을 이야기하며 착한 경영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2015년 박근혜 정부가 경제민주화 정책의 일환으로 프랜차이즈 업체를 대대적으로 수사할 당시, 아딸이 2008년부터 4년 동안 식자재 업자들에게서 61억 원을 받고 회삿돈 8억 8천만 원을 빼돌린 혐의가 밝혀지며 징역 2년 6개월에 추징금 27억 3천만 원을 선고받았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창업주 부부가 이혼소송을 진행하면서 상표권 소송에 들어갑니다. 결국 상표권 소송에서 부인이 이겨서 대부분의 아딸 매장은 아딸이란 명칭은 못쓰게 되고 ‘감탄 떡볶이’로 바뀌게 됩니다. 현재는 감탄 떡볶이와 아딸 모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죠.

엽기떡볶이 본점 ⓒ네이버 블로그 일상 공유 블로그!
  • 동대문 엽기떡볶이

동대문 엽기떡볶이의 금주영 대표는 원래 동대문 의류회사에서 상품기획자로 일했었는데요. 90년대 중반 의류 도매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외환위기로 회사가 부도나버렸죠.

재기할 아이템을 찾던 그는 술안주로 먹던 불닭발을 생각하게 됩니다. 동대문 시장을 찾는 여성들이 매운맛을 좋아했었던 것이 떠올랐거든요. 2002년 동대문 중앙시장에 배달 전문으로 가게를 내고, 입소문을 타면서 순조롭게 재기에 성공하나 싶었죠. 하지만 또다시 2003년 조류인플루엔자가 유행하며 또다시 위기를 맞게 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매출이 크게 줄지 않았어요. 알고 보니 닭발이 아닌 사이드 메뉴인 ‘엽기떡볶이’의 매출이 60%였기 때문이었죠. 이후 떡볶이를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합니다. 동대문 엽기떡볶이의 정식 명칭이 ‘불닭발땡초동대문엽기떡볶이’인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죠.

 

7. 2세대 프랜차이즈 – 죠스, 국대, 두끼

2008년에는 이명박 정부의 한식 세계화 사업의 일환으로 떡볶이 산업 육성 T/F가 구성되었고, 농림수산식품부에서도 감소하는 쌀 소비량을 늘리기 위해서 떡볶이 산업 육성 예산을 책정했습니다. 이러한 국가적 지원에 힘입어 국대떡볶이 등 프랜차이즈 업체 24곳이 생기고, 가맹 점포 수도 2배 이상 증가해 2,203개가 생깁니다.

죠스떡볶이 고려대점 ⓒmoneys.co.kr
  • 죠스떡볶이

죠스떡볶이를 창업한 나상균 대표는 이전에도 핫도그 푸드트럭을 운영한 경험이 있었고, 애완동물용품 사업으로 성공도 거두었죠. 제약회사의 영업사원으로 근무하기도 했어요. 이후에는 미국 유학을 꿈꾸었는데요. 유학 생활 자금 마련을 위해 시작한 것이 바로 죠스떡볶이였죠.

죠스떡볶이는 2007년 고려대 앞에서 장사를 시작하는데요. 떡볶이, 순대, 튀김, 어묵으로 단순화된 메뉴와 양질의 식자재 사용, 위생적인 매장환경 등으로 차별화를 주어 성공하죠. 스마트폰이 등장한 이후에는 각종 협찬과 이벤트를 통한 모바일 기프티콘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데, 이 역시 다른 떡볶이 브랜드와는 차별화되는 모습이었죠.

국대떡볶이 매장 ⓒ국대FNB
  • 국대떡볶이

창업주 김상현 대표의 이력이 특이한데요. 대구대 체대를 다니다 중퇴하고 캐나다 유학길에 올라 국제경영학을 전공하고 군고구마 장사, 신발 장사, 호프집 서빙, 주류 배달업, 한인 음식점 배달업 등을 하고 한국에서 의류업을 하다 실패했죠.

이후 대구의 한 떡볶이집 비법을 전수받아 2008년 이대 앞에 태극기를 내걸고 무허가 노점을 열어 영업을 시작합니다. 이게 대박이 나 이듬해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에 국대떡볶이 1호점을 오픈하죠. 국대떡볶이는 오픈 직후 월 매출 1,000만 원을 돌파하고 사업을 넓혀갑니다.

국대떡볶이는 10~30대 여성들을 겨냥했는데요. 그래서 깔끔한 인테리어를 갖추고 젊은 남성 직원들을 고용하는 전략을 취합니다.

두끼 고려대점 ⓒ네이버 블로그 평데평마
  • 두끼

국대떡볶이 이후로 시들했던 떡볶이 열풍은 두끼를 필두로 한 즉석떡볶이 프랜차이즈가 등장하면서 다시 불게 됩니다. 2014년 고려대 앞에 1호점을 런칭한 두끼는 무한리필 뷔페형 콘셉트와 즉석떡볶이로 차별화에 성공해 10~20대에게 인기를 얻었죠.

두끼의 창업자인 김관훈 대표는 현대오일뱅크에서 7년간 근무했지만 일에 의욕이 없이 마지못해 다니고 있었어요. 그러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고민하다 떠올린 것이 떡볶이였죠. 회사에 다니면서 네이버 카페 ‘떡볶이의 모든 것’을 운영하기도 했는데요. 2011년 7월 개설 이후 카페 회원들과 전국 떡볶이 맛집 3,000여 곳을 찾아다녔죠.

김관훈 대표는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준비하기 위해 요리학원을 다니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한 꼬마가 핫바를 먹는 것을 보고 당시 사업을 시작하고 있었던 부산의 삼진어묵으로 가서 어묵 핫바에 대한 투자 설명회를 하죠. 삼진어묵 측에서 그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이면서 떡볶이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밑천을 마련하게 되었어요.

두끼는 처음부터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두고 사업을 시작해서 2015년부터 적극적인 해외 진출을 진행해 왔는데요. 현재 베트남, 태국, 대만, 싱가포르 등 아시아를 중심으로 다양한 국가에 가맹점을 두고 있죠.

 

마무리하며

떡볶이는 장사하는 사람의 이미지가 투영되는 것 같습니다. 기름 떡볶이에는 김정연 할머니의 인정 넘치는 모습, 신당동 즉석 떡볶이에는 마복림 할머니의 장난스러운 모습이 생각나요. 어쩌면 떡볶이는 가게마다 맛 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원문: 사소한 것들의 역사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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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온병의 시작은 스탠리가 아닌 써모스 https://ppss.kr/archives/266640 Tue, 03 Sep 2024 04:37:59 +0000 http://3.36.87.144/?p=266640 시작하기 전에

오늘 소개할 최초의 브랜드는 써모스입니다. 보온병을 최초로 만든 곳이죠. 국내에서는 스탠리에 비해 인지도가 떨어지지만 외국에서는 포크레인, 호치키스처럼 보온병을 써모스라고 부른다고 하네요.

1980년대 일본 회사에 매각된 이후 디자인이 조지루시 보온병처럼 바뀐 것 같아 아쉽습니다. 반면 스탠리는 써모스보다 7년 늦게 등장했지만, 클래식 라인을 아직도 출시하고 있는데 말이죠. 이럴 때는 어떤 브랜드의 제품을 구매해야 할지 고민이 많이 되는데요. 결국 써모스를 구매해서 작년부터 사용하고 있답니다.

제가 사용하고 있는 모델은 ‘써모스 퀵오픈 스트레이트 텀블러’인데요. 실제로 사용한 소감은 엄청 가볍고, 뚜껑을 한 바퀴만 돌리면 열려서 편리합니다. 개인적으로 텀블러는 세척이 불편해서 잘 안 쓰게 되지만, 텀블러를 자주 쓰시는 분이라면 추천할 만한 제품인 것 같습니다.

 

1. 발명가와 사업가는 다르다

최초로 보온병을 만든 제임스 듀어
최초의 보온병 특허를 내고 써모스를 창립한 라인홀트 부르거

19세기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대학에는 극저온에 관해 연구하는 화학자 제임스 듀어(James Dewar)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가스가 액화될 정도로 극저온으로 냉각시키는 것은 값비싼 작업인데요, 듀어는 그 비싼 공정을 들여 만든 액체들이 증발하는 것을 막아야 했습니다. 1892년 여러 시행착오 끝에 유리로 된 플라스크 2개를 겹치고 그사이의 공기를 빼면 온도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죠.

듀어는 유리 기술자였던 라인홀트 부르거(Reinhold Burger)를 고용해 자신이 발견한 방식으로 단열 플라스크를 제작해 실험에서 유용하게 썼습니다. 이 단열 플라스크 덕분인지 듀어는 1898년 최초로 액체 수소 생산에 성공하고 노벨상 후보에도 오릅니다.

하지만 특허 문제로 알프레드 노벨과 사이가 나빠져서인지 노벨상은 받지 못했고, 단열 플라스크에 대한 특허도 내지 않습니다. 그래도 듀어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극저온 액체 단열용기를 ‘듀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라인홀트 부르거의 보온병 특허
구스타프 팔렌의 1909년 개선된 보온병 특허

듀어에게 단열 플라스크를 제작해 주던 라인홀트 부르거는 이 단열 플라스크가 일상생활에서도 유용하게 쓰이리라는 것을 직감합니다. 부르거는 단열 플라스크에 보호 금속 케이스를 씌어 1903년 일상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단열 용기에 대한 특허를 받죠. 이듬해에 Thermos라는 상표를 등록하고, 1906년에는 알버트 아슌브레너(Albert Aschenbrenner)와 구스타프 팔렌(Gustav Robert Paalen)과 함께 GmbH* 회사를 설립합니다. 뒤늦게 드워는 자신의 발명품에 대한 지적재산권을 주장하기 위해 소송을 제기했지만 패소합니다. 이후 1907년 써모스 GmbH는 써모스 상표권을 3곳에 매각해 미국, 영국, 캐나다에서 독립적으로 운영됩니다.

참고로 Thermos 라는 브랜드명은 이름 공모전을 열어 당선된 이름으로 “뜨겁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Therme”에서 유래한 것이죠.

  • GmbH : 독일의 유한책임회사, 오너가 기업의 채무에 대한 책임이 없다.

 

2. 전 세계에서 인정받는 써모스

1909년 시애틀에서 개최된 세계 박람회인 알레스카-유콘-태평양 박람회(AYPE)의 모습. 박람회장은 현재 워싱턴 대학교의 캠퍼스가 되었다고 한다.

1907년에 세워진 미국의 써모스는 써모스 보온병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1909년 알래스카-유콘-태평양 박람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고, 그 외 7개의 세계 박람회에서 수상하면서 큰 관심을 이끌었거든요.

1920년대 홍보를 위해 운행했던 써모스 보온병 모양의 차량 ⓒthermosmalaysia.com

영국의 써모스에서는 1911년 유리 충전재를 최초로 기계 생산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로써 유리 진공 기술 분야를 선도하고, 공정을 자동화함으로써 생산 속도를 높일 수 있었죠. 이 영향으로 써모스 제품의 인기는 높아졌고, 공장을 계속해서 옮기며 생산량을 늘립니다. 1923년에 출시한 대용량 보온병인 블루 보틀과 점보 저그도 인기를 끌며 사업은 순항하죠.

※ 참고로 스탠리는 1913년에 금속 진공격벽 구조 보온병을 출시하며 등장합니다.

 

3. 아웃도어에서 요긴했던 보온

써모스 보온병은 20세기 초반의 탐험가들에게도 필수품이 되었는데요. 극지탐험가 프레데릭 쿡(Frederick A. Cook), 남극을 탐험한 어니스트 새클턴(Ernest Henry Shackleton), 북극점에 최초로 도달한 로버트 피어리(Robert Edwin Peary), 비행기를 발명한 라이트 형제 등이 써모스 보온병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죠. 뿐만 아니라 1950년대 프랑스 등반가들의 안나푸르나 1봉 초등, 1953년 영국의 에베레스트 초등, 1954년 이탈리아의 K2 초등 때도 써모스 보온병이 함께 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써모스 광고 ⓒthermosmalaysia.com
다양한 사용처를 소개하고 있는 써모스 광고 ⓒthermosmalaysia.com

탐험은 물론 전쟁에서도 요긴하게 사용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영국의 써모스는 영국군에게 보온병을 제공했는데요, 천 대의 폭격기가 출격할 때마다 1만 개의 써모스 보온병이 함께 갔다고 하죠. 미국의 써모스에서도 전쟁 동안 보온병 생산량의 98% 이상이 군사용과 원자력 연구소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써모스 보온병은 전시동안 널리 사용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써모스의 제품은 인기를 끌게 되는데요. 일상생활에서뿐만 아니라, 과학, 의학, 산업 분야에서도 유용하게 사용됩니다. 기름 퇴적물 감지, 열대어 운반, 혈청 및 조직 보존 및 운반 등에 사용되었죠.

 

4. 보온병? 커피포트가 있는데 왜 씀?

도자기처럼 생긴 텀블러 커피버틀러 ⓒ1stopretroshop.com

써모스는 1966년 스테인리스를 이용한 보온병을 출시합니다. 1985년에는 커피 버틀러를 선보이며 큰 인기를 얻고요. 1988년에는 스테인리스보다 내구성이 좋은데 가벼운 티타늄 소재의 보온병을 출시합니다. 티타늄 보온병은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전문 산악인들에게 인기였다고 하죠.

이처럼 여러 제품을 출시하며 전성기를 누리던 써모스는 다양한 가전제품이 나오면서 위기에 처합니다. 특히 커피포트의 등장으로 따뜻한 커피를 오래 유지할 수 있게 되자, 가정 내에서 보온병에 대한 필요성이 줄어들죠. 결국 써모스는 1989년 일본의 고압가스 회사인 일본산소(Nippon Sanso, 현 다이요닛산)에 매각됩니다.

고압가스 회사라고 해서 뜬금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요. 사실 일본산소는 써모스를 인수하기 전인 1978년에 세계 최초로 스테인리스 보온병을 개발하며 보온병 시장에서도 이름있는 기업이었습니다.

 

5. 그릴 사업으로 잠깐의 외도

 

셔틀쉐프 ⓒ써모스 코리아 블로그
써모스 전기 그릴 ⓒkleinanzeigen.d

일본산소에 매각된 써모스는 성장이 정체되어 있던 보온병 대신 다양한 시장에 도전합니다. 1989년에는 보온병 기술을 응용한 진공 보온 조리기 셔틀쉐프를 발매하죠. 셔틀쉐프는 한 번 조리한 제품을 다시 가열하지 않고 보온을 유지한 상태에서 그대로 먹을 수 있는 장치였어요.

1990년에는 몬테 피터슨(Monte Peterson)을 써모스 CEO로 영입하며 당시 시장 규모가 연간 10억 달러였던 가정용 바비큐 그릴의 신제품 개발을 추진합니다. 1993년 출시한 써모스 전기 그릴은 돔 형태의 뚜껑으로 열기를 보존하고, 기존 그릴에서 열선의 위치를 개선한 장치였는데요. 299달러라는 비교적 높은 가격대에도 첫해부터 히트하며 전년 대비 매출액 13% 증가, 시장점유율 2%에서 20%로 증가하는 성과를 이뤄내죠.

써모스의 진공단열 커피메이커 ⓒ써모스

그렇게 그릴 회사가 되나 싶었는데, 다행히 1996년 그릴 사업을 매각하고 원래의 단열 용기 사업으로 돌아옵니다. 2005년에는 진공단열 커피메이커라는 요상한 제품을 출시하기도 하지만, 별 탈 없이 보온병 사업을 현재까지 이어 오고 있죠.

 

참고

원문: 사소한 것들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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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프라이어와 전자레인지가 뒤늦게 성공한 이유 https://ppss.kr/archives/266636 Mon, 12 Aug 2024 03:52:06 +0000 http://3.36.87.144/?p=266636

전자레인지

마이크로파의 성질을 이용하여 식품을 가열하는 조리 기구. 고주파 전기장 안에서 분자가 심하게 진동하여 발열하는 현상을 이용한다.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에어프라이어

가열한 공기를 골고루 쐬어 음식을 익히는 조리 기구. 주방 가전제품의 하나로, 기름을 덜 사용하여 튀김 요리를 할 수 있다.

  • 국립국어원 우리말샘

 

1. 레이더에서 시작된 전자레인지의 역사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방위산업체 레이선(Raytheon)은 레이더 부품을 공급하던 기업이었습니다. 그중에는 마이크로파를 생성하는 ‘마그네트론’이라는 부품을 연구하던 엔지니어 퍼시 스펜서(Percy .L. Spencer)가 있었죠.

그는 1945년 마그네트론을 실험하던 중 우연히 자신의 주머니 속 초콜릿이 녹은 것을 발견합니다. 이 현상이 마그네트론과 관련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마그네트론으로 달걀과 팝콘, 그리고 가재를 조리하기 위한 적정 주파수가 무엇인지 연구해서 특허를 내죠.

레이선 사는 스펜서가 발견한 이 현상을 적극적으로 이용했습니다. 그러던 중 스펜서와 함께 마그네트론을 연구했던 마빈 복(Marvin Bock)이 전자레인지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1954년 레이선은 레이더레인지(Radarange)라는 이름으로 1~3kW(오늘날 가정용이 700w)의 출력을 내는 대형 전자레인지를 상용화했습니다. 이 제품은 호텔, 레스토랑 등 영업용으로 판매되었죠.

1955년 타판 사에 출시한 최초의 가정용 전자레인지 ⓒNational Museum of American History

1955년에는 타판(Tappan)에서 레이선의 라이선스를 구매해 최초의 가정용 전자레인지를 출시합니다. 하지만 약 1,300달러라는 높은 가격과 더불어 벽걸이 형태로 출시되는 바람에 일반 가정에서 쓰기는 힘들었습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1967년이 되어서야 레이선의 자회사 아마나(Amana)에서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가정용 전자레인지를 출시했습니다.

1967년 아마나에서 출시한 진짜 가정용 전자레인지 ⓒnpr.org

1970년대 미국의 전자레인지는 아마나, 타판, GE 등이 시장을 주도했습니다. 하지만 1970년대 말부터 일본과 한국의 저렴한 제품에 밀리게 됩니다. 심지어 GE는 1980년 모든 전자레인지를 삼성에서 제조하기로 합니다.

 

2. 수출 효자 상품 전자레인지

1976년 삼성전자 임원이 미국에서 우연히 전자레인지를 봤습니다. 이를 계기로 삼성전자는 전자레인지 개발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GE 전자레인지를 리버스 엔지니어링하여 1978년 첫 번째 시제품 ‘RE-7700’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하고, 1979년에는 전자레인지의 핵심 부품인 마그네트론을 자체 제작하는 데 성공했죠.

하지만 당시 국내에서의 전자레인지 보급량은 400여 대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평균 월급의 2배에 달하는 RE-7700의 가격 때문이기도 했지만, 냉동식품 시장이 형성되지 않은 시대적 배경 때문이기도 합니다. 전자레인지의 용도가 애매했던 시절이었거든요. 그래서 전자레인지는 내수가 아닌 수출에 중점을 뒀어요.

삼성전자는 1979년 파나마에 340대를 수출한 것을 시작으로, 1987년에는 영국에 공장을 설립해 빠른 속도로 전 세계 시장을 석권합니다. 금성사도 1982년부터 사우디아라비아에 전자레인지를 수출했고, 1983년에는 미국 시장을 공략하기 시작해 1988년 미국에서만 210만 대를 팔며 세계 시장 점유율 19%로 1위를 기록하죠.

하지만 그해 전자레인지로 조리하면 식중독을 유발하는 리스테리아균이 살균되지 않는다는 소문이 유럽에 퍼지면서 큰 타격을 입습니다. 이러한 악재 속에서 금성의 세계 시장 점유율 순위는 4~5위로 하락했죠. 하지만 1990년대 중반에는 저렴한 가격과 뛰어난 성능으로 일본과 점유율 1위를 다툴 만큼 다시 성장했습니다. 우리나라 전자레인지가 너무 잘 팔리자 1996년 유럽 연합에서는 한국산 전자레인지에 9~24.4%의 추가 관세를 부과하기도 했어요.

 

3. 전자레인지는 위험하다?

전자레인지의 위험성에 관한 이야기는 1973년에 처음 등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의 소비자 연합회에서 ‘전자레인지에서 방사능이 나올 수 있으니 구입하지 말라’고 권고한 것이죠. 물론 소비자 보고서를 통해 매년 전자레인지를 테스트하면서 몇 년 후에는 이런 두려움이 대부분 사라졌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소비자 단체를 통해 1989년 방사능 위험성에 대한 이야기가 처음 나왔습니다. 국립전파연구원은 조목조목 반박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전파가 건강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는지도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고, 실제로 건강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해도 전자레인지의 문을 닫으면 밖으로 나오는 전파량이 아주 적어 건강에 영향을 미치기 힘들다는 것이었죠.

그런데 실제로 전자레인지가 인체에 해로웠던 순간도 있었습니다. GE에서 출시한 전자레인지 문틈에서 915MHz의 주파수가 새어 나와 리콜한 적이 있었거든요.

 

4. 에어프라이어? 회오리 오븐!

맥슨스가 만든 회오리 오븐

에어프라이어는 오븐에 팬을 장착해 뜨거운 열을 대류시키는 장치를 의미합니다. 크기가 크면 컨벡션 오븐(Convection Oven)이라고 구분하기도 하죠. 팬이 장착된 오븐은 1914년 전기 공기 압축 오븐(Electric Air Pessure Oven)이라는 이름으로 테크니컬 월드 매거진에 등장합니다. 하지만 개인 발명품에 그쳤죠.

최초의 상용품은 1945년 윌리엄 맥슨(William L. Maxson)에 의해 개발됩니다. 윌리엄 맥슨은 군수품을 발명해 납품하는 일을 했습니다. 다연장포, 자신의 위치를 계산해 주는 비행기용 내비게이터 등을 개발했죠. 그가 발명한 군수품 중에는 냉동식품도 있었어요. 당시는 전자레인지가 발명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맥슨은 냉동식품을 데우는 기계도 직접 만들게 됩니다. 그게 바로 에어프라이어의 시작이 되는 회오리 오븐(Whirlwind Oven)이었죠.

회오리 오븐은 오븐 뒤에 선풍기를 설치한 형태로 뜨거운 공기를 순환시키는 장치였습니다. 이 기계는 일반 오븐보다 2배 빠르게 음식을 데울 수 있었고, 모든 곳을 균일한 온도로 데울 수 있었어요. 회오리 오븐도 군수품으로 납품되면서, 미 해군 항공 수송기에서는 전쟁 중에도 차가운 샌드위치와 전투식량이 아닌 스테이크와 비프스튜를 먹을 수 있게 되었죠.

전쟁이 끝나자 맥슨는 일반 시장에 진출할 계획을 세웁니다. 냉동식품을 슈퍼마켓에 판매하고, 회오리 오븐을 가정용으로 판매할 계획을 세우죠. 1947년에는 일반 항공기에도 도입합니다. 하지만 그해 윌리엄 맥슨이 사망하고, 아무도 그의 회사를 인수하지 않아 계획은 사라지고 맙니다.

 

5. 에어프라이어가 뒤늦게 성공한 이유

맥슨이 사망하고 20년이 지난 후에야 일반 시장에 회오리 오븐(에어프라이기)이 등장합니다. 맥슨의 오븐은 최고 온도가 약 93도에 불과했는데, 노르드스코그 컴퍼니(Nordskog Company)에서 더 높은 온도를 낼 수 있는 회오리 오븐을 만들어 냈죠.

비슷한 시기 멜리어블 아이언 레인지(Malleable Iron Range)에서는 가정용 오븐 크기의 회오리 오븐을 제작했습니다. 하지만 개량된 제품들도 2000년대까지는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했습니다. 냉동식품을 데우기 위한 역할은 전자레인지가 꽉 잡고 있었기 때문이죠.

필립스의 에어프라이어 ⓒ필립스

200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회오리 오븐이 주목받기 시작합니다. 우선 2011년 필립스(Philips)에서 에어프라이어(Air Fryer)라는 이름의 제품을 출시합니다. 네, 바로 여기서 에어프라이어라는 이름이 굳어졌죠.

에어프라이어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긴 했지만, 지금처럼 필수품 취급을 받지는 않았어요. 비싼 가격도 문제였지만, 쓰임새가 애매했기 때문이었죠. 당시만 해도 에어프라이어는 ‘기름 없이 튀기는 건강한 튀김기’라는 포지션을 내세웠는데, 막상 에어프라이어는 오븐이었기 때문에 튀김기를 기대하고 산 소비자들에게 실망을 안긴 것입니다.

그러다가 에어프라이어가 튀김기가 아닌 소형 오븐이라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 사이에서 레시피가 활발히 공유되기 시작하면서, 에어프라이어가 인기를 끌게 된 거죠.

 

6. 전자레인지와 에어프라이어, 하나만 산다면 어떤 게 좋나요?

비스포크 큐커 이쁘다 ⓒ삼성전자

전자레인지와 에어프라이어 중에 하나만 산다면 어떤 걸 사야 하나요?

인터넷에 종종 올라오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민은 더 이상 안 해도 됩니다. 전자레인지와 에어프라이어를 합친 제품이 이미 출시되었거든요. 2018년 SK매직에서 ‘오븐 레인지’라는 이름으로, 2021년 삼성전자에서는’비스포크 큐커’라는 이름으로 출시한 제품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물론 가격은 에어프라이어와 전자레인지를 각각 사는 것보다 좀 비싼 30만 원대네요.

 

마무리하며

전자레인지와 에어프라이어는 공통점이 많습니다. 둘 다 불 없이 음식을 조리하는 기기라는 점, 그리고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만들어졌다는 점이 있죠.

전자레인지와 에어프라이어 모두 기계 자체가 발명되었을 때보다 기기를 활용할 수 있는 냉동식품과 레시피가 등장했을 때 유의미해졌습니다. 이 모습은 오늘날의 플랫폼 산업과도 비슷해 보입니다. 플랫폼의 기능 그 자체보다, 플랫폼을 구성하는 콘텐츠의 양과 질이 더욱 중요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죠.

결국 옛날이나 지금이나, 제조업이나 IT 산업이나 그 안에 무엇을 담느냐가 핵심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듯합니다.

원문: 사소한 것들의 역사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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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킥보드 문제 https://ppss.kr/archives/266634 Thu, 18 Jul 2024 13:55:57 +0000 http://3.36.87.144/?p=266634

킥보드

긴 손잡이가 있고, 바닥에 2~4개의 작은 바퀴가 달린 탈것. 두 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한 발로 바닥을 밀면서 탄다.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자료 조사를 하면서 가장 애를 먹었던 부분은 킥보드와 스쿠터의 차이가 무엇인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안장 여부로 킥보드와 스쿠터를 구분합니다. 하지만 영어로는 안장 여부와 상관없이 모두 스쿠터입니다. 킥보드는 ‘수영 발차기를 연습할 때 사용하는 물에 뜨는 직사각형 판’을 의미하죠.

그러면 왜 우리나라에서는 스쿠터를 킥보드라고 부르는 걸까요? 1999년 K2 Sports에서 출시한 스쿠터 브랜드 킥보드(Kickboard)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제품은 2000년 4월 한국에 처음 들어와 대학가를 시작으로 인기를 끌었고, 킥보드라는 브랜드 이름이 일반 명사가 된 것이죠.

이 글에서는 보드형 바닥이 있고, 두 발이 보드 위에 얹는 형태의 탈 것을 스쿠터라고 정의하고 조사했습니다.

 

1. 킥보드는 ‘로스트 테크놀로지’다

1916년 오토페드를 타고 있는 영국의 참정권 운동가인 플로렌스 노먼 부인

최초의 전동 스쿠터는 뉴욕의 롱아일랜드 시티 오토페디드 컴퍼니(Autoped Company of Long Island City)에서 1915년에 출시했습니다. 앞바퀴를 동력으로 하는 155cc 4기통 가솔린 엔진을 탑재해 시속 57km까지 달릴 수 있었죠. 게다가 보관이 용이하도록 핸들 바가 접혔는데요, 무게가 110kg에 육박해 휴대용으로 쓰였는지는 미지수입니다.

오토페드의 가격는 100달러로 당시 미국인들 평균 연봉이 687달러인 것을 감안하면 2~3달 치 월급에 해당했지만, 그래도 자동차보다는 저렴했기 때문에 “가격이 매우 저렴해서 거의 모든 사람이 구입할 수 있다고”고 광고했죠.

미국 우정국에서 오토페드를 사용하는 모습

오토페드는 미국 우정국과 경찰청과 계약을 맺기도 했고, 캘리포니아 해변에서는 관광용 대여 사업을 하기도 했죠. 오토페드는 저렴(?)하고 쉽게 탈 수 있었기 때문에 불량 청소년들과 갱단들에게도 퍼졌습니다. 브루클린, 퀸스, 맨해튼에서 이들의 난폭 운전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었죠. 이런저런 이유에서 판매가 부진했고, 1921년 미국 생산이 중단되었습니다.

 

2. 할리우드 스타들의 이동 수단

오토글라이드 광고 ⓒAACA Library

오토페드의 몰락 이후 스쿠터가 사라지나 싶었는데, 1929년 미국에서 대공황 시기에 되살아납니다. 당시 가장 유명했던 스쿠터 모델은 오토글라이드(auto.glide)였습니다. 엔진을 제조하던 쿠시맨(Cushman)이라는 회사에서 대공황으로 엔진이 팔리지 않자 자사 엔진을 탑재한 값싼 스쿠터를 제작한 것이었죠. 의자와 전조등을 추가해 우리나라에서 의미하는 스쿠터의 모습을 보입니다.

오토글라이드는 저렴하고 연비가 좋아 인기를 끕니다. 쿠시맨 스쿠터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에서 널리 사용되었고, 전쟁 전후에도 자동차 대안으로 사용되었죠.

1938년 험프리 보가트와 앨런 젠킨스가 워너 브라더스의 경비원에게 스쿠터를 타고 과속을 하다 제지당하는 모습

또한 스쿠터는 할리우드의 넓은 스튜디오 부지를 돌아다니는 이동 수단으로 쓰였는데요. 험프리 보가트(Humphrey Bogart)와 같은 스타들이 스쿠터를 타고 있는 모습이 사진으로 찍히며 더욱 인기를 얻게 되었죠. 그러나 1930년대 들어 미국의 교통법규가 강화되고 청소년들의 운전에 대한 규제 수위도 높아지면서, 오토글라이드는 판매에 직격탄을 맞게 되었습니다.

 

3. 이탈리아의 낭만, 베스파

로마의 휴일에서 나오는 베스파

2차 세계대전 당시 항공기 부품을 만들던 이탈리아의 피아지오(Piaggio)는 전쟁이 끝난 후 연합군에 의한 제재 및 항공기 제작 수요가 없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고민 끝에 피아지오는 1946년 항공기 부품을 만들던 기술을 응용해 스쿠터 베스파(Vespa)를 제작합니다.

베스파는 당시 패전 이후 열악한 이탈리아의 경제 사정과 도로 상황에 맞아떨어지며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됩니다. 게다가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햅번과 그레고리 펙이 베스파를 타는 장면이 나오며, 세계적으로도 인지도를 얻게 되었죠.

 

4. 60년 만에 부활한 킥보드

1985년에 등장한 고페드

앉아 타는 스쿠터가 발전하는 사이 두 발로 서서 타는 스쿠터는 암흑기를 맞이했는데요. 1985년 스티브 패트몬트(Steve Patmont)가 고-페드(Go-Ped)의 특허를 취득하면서 다시 두 발로 서서 타는 스쿠터가 주목받기 시작하죠.

고-페드는 처음에는 가스 구동식 스쿠터였지만, 2001년 리튬이온 배터리로 작동하는 전기 스쿠터를 출시합니다. 이 2001년 모델인 후버보드 (Hoverboard)에는 바퀴에 서스펜션을 갖추면서 승차감이 훨씬 좋아졌죠.

 

5. 전동 킥보드 공유 서비스의 등장

2017년 시작한 전동 킥보드 공유 서비스, 버드

오늘날 전동 킥보드의 인기는 누가 뭐래도 전동 킥보드 공유 서비스가 등장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공유 서비스가 등장하기 이전의 전동 킥보드는 주로 레저용으로만 사용되었는데, 공유형 전동킥보드 서비스가 등장하면서 이동 수단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죠.

스쿠터 대여 서비스는 2012년 캘리포니아에서 시작한 스쿠터 네트웍스(Scooter Networks)가 최초입니다. 두 발로 서서 타는 스쿠터 공유서비스의 최초는 2017년 역시 캘리포니아에서 서비스를 시작한 버드(Bird)입니다. 참고로 스쿠터 네트웍스는 2018년에 킥보드와 전기 자전거로 확장했고, 2019년 버드에 합병되었죠. 버드는 2023년 12월 파산신청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2018년 ‘킥고잉’을 필두로 ‘씽씽’과 ‘고고씽’ 등의 전동 킥보드 공유 서비스 업체들이 생기면서 전동 킥보드가 대중화됩니다.

하지만 전동 킥보드에 대한 인식은 좋지 않은데요. 사용자들의 무단 주차와 난폭운전으로 인한 사고가 끊이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국내에서는 2018년 최초로 전동킥보드로 인한 보행자 사망 사고가 발생했고, 2021년 전동 킥보드 관련 법이 개정되었죠. 파리에서는 2023년 9월부터 사용을 금지했습니다.

 

6. 혁신에서 생산 중단까지, 세그웨이

Figure.7 2001년 등장한 세그웨이

가장 미래적인 형태의 스쿠터가 무엇일까 하면 단연 세그웨이입니다. 세그웨이는 여러 의료용 장치를 발명한 것으로 유명한 딘 카멘(Dean Kamen)이 2001년 12월에 공개한 1인용 스쿠터입니다. 참고로 그가 개발한 의료용 기기로는 휴대용 인슐린 펌프, 서류 가방 크기의 신장 투석기,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는 휠체어 등이 있죠.

세그웨이는 자이로 센서로 구동되어 자동으로 중심을 잡고 몸의 움직임만으로 방향 전환이 가능한 스쿠터였습니다. 최대 20km의 속도를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격이 거의 천만 원대를 호가하였고, 안정성 문제, 타 이동 수단에 비해 장점이 명확하지 않은 점 등으로 인해 인기가 사그라듭니다. 2015년에는 중국의 나인봇이 세그웨이를 인수하고, 2020년에는 생산이 중단되고 말았죠.

원문: 사소한 것들의 역사


참고

  • Mike Hanlon. (2016). (The original) 100 year-old motorscooter up for sale. NEW ATLAS. URL : https://newatlas.com/original-scooter-eveready-autoped/45714/
  • TAUR. (2020). The History of Electric Scooters. Lotus Fruit. URL:
  • Unkown. (2021). The amazing history of motorised scooters. ANADUE. URL : https://www.anadue.com/post/the-amazing-history-of-motorised-scooters
  • Vespa Hompage. URL : https://www.vespa.com/us_EN/timeline/
  • 민병권. (2019). [토요워치]전동킥보드 원조는 1915년 美 ‘오토패드’…고가에 의자 없어 흥행 실패. 서울경제. URL : https://www.sedaily.com/NewsView/1VPHCS6LED
  • 박혜민. (2020). [번역기도 모르는 진짜 영어] scooter. 중앙일보. URL :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875686#home

 

이 필자의 다른 글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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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빙, 샤베트, 그리고 하겐다즈의 역사 https://ppss.kr/archives/265594 Mon, 24 Jun 2024 03:02:47 +0000 http://3.36.87.144/?p=265594

아이스크림

우유, 달걀, 향료, 설탕 따위를 넣어 크림 상태로 얼린 것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시작하기 전에

날씨가 많이 더워졌습니다. 부쩍 땀 흘리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땀을 흘리고 나면 달달하고 시원한 것이 떠오르는데요. 바로 아이스크림이 제격이죠.

저의 최애 아이스크림은 구슬아이스크림의 바나나스플릿입니다. 놀이동산에서의 행복한 기억과 겹쳐져서일까요? 아니면 유원지에서만 판매해서 평소에 자주 먹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이젠 코엑스에서 대용량으로 살 수 있다고 하니 조만간 방문해 봐야겠습니다.

아이스크림의 역사를 알아보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우유가 들어가야 아이스크림으로 인정된다는 것인데요. 따라서 단순 얼음과자와 같은 내용은 최대한 배제했습니다. 다음에 얼음의 역사를 다루게 된다면 그때 해당 내용을 다뤄볼게요.

제가 아이스크림의 역사에서 얻은 교훈은 ‘혁신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다’ 입니다. 콘을 원뿔모양으로 만드는 것, 음료수에 막대를 끼워 얼린 워터아이스, 막대기를 꽂아 아이스크림 바를 완성시킨 버트의 사례들이 그렇죠.

 

1. 최초의 아이스크림

우유를 넣은 샤르바트, 즉 아이스크림을 만든 안토니오 라티니

최초의 아이스크림은 중국 당나라에서 등장합니다. 이 아이스크림은 소나 염소 또는 물소의 젖을 발효시킨 뒤 곡물가루와 장뇌*를 넣고 끓였고, 이 혼합물을 얼음 구덩이 안에 넣어서 얼려서 만들었죠.

중세 시기 아랍인들은 샤르바트(Sharbat)라는 차가운 음료를 마셨습니다. 이 샤르바트는 이탈리아로 건너가 얼음 또는 눈과 설탕, 과일즙을 섞어서 만든 디저트, 소르베토(Sorbetto)로 발전합니다.

소르베토에 아이스크림인 조건인 우유가 들어가게 되는 시점은 안토니오 라티니(Antonio Latini)가 『현대의 집사』라는 책에서 우유를 넣은 소르베토를 소개하면서부터입니다. 그는 레몬, 딸기, 초콜릿, 솔방울 등을 더해 맛을 더하기도 했죠.

  • 장뇌 : 물파스 등에 함유되는, 특유한 싸한 냄새를 내는 녹나무에서 추출할 수 있는 천연수지물질

 

2. 기술의 발달

낸시 존슨의 아이스크림 제조기 ⓒdessertadvice.com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설탕과 크림, 향미료를 용기에 담아 소금과 얼음을 채운 통에 넣습니다. 그런 다음 용기 안의 내용물을 몇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저어줍니다.

이렇게 노동집약적인 생산 방식은 기계의 발전으로 해결되었죠. 1843년 낸시 존슨(Nancy Johnson)이 핸드 크랭크가 달려있어 손잡이 몇 번 돌려주면 자동으로 크림을 저어주는 아이스크림 제조기를 만들어 냈거든요.

그로부터 10년 뒤에는 제이컵 푸셀(Jacb Fussell)이 최초의 아이스크림 공장을 세웠습니다. 이때부터 대량생산을 통해 가격을 낮춰 많은 사람들이 아이스크림을 즐길 수 있게 되었죠.

그리고 1870년 독일의 과학자 카를 파울 고트프리트 폰 린데(Carl Paul Gottfried von Linde)가 기계적 냉동기술을 개발했습니다. 1888년에는 최초의 냉동시설을 갖춘 철도 차량이 등장해 아이스크림을 미국 전역으로 운송했죠. 1920년에는 자동 아이스크림 포장기기가 등장합니다.

 

3. 소비 공간의 변화, 사랑방에서 개인주의로

아직 운영 중인 르 포로코프

A. 카페

1686년 파리에는 르 포로코프(Le Procope)라는 카페가 열렸습니다. 이 카페는 문을 연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폴레옹, 볼테르, 빅토르 위고, 발자크, 벤저민 프랭클린 등 유명한 문학가와 정치가가 자주 찾는 명소가 되었죠. 이곳에는 커피, 다과와 얼음과자를 판매했어요.

19세기 말 소다파운틴의 모습 ⓒCORBIS

B. 소다 파운틴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아이스크림은 주로 약국에서 판매했습니다. 소다 파운틴(Soda Fountain)이라는 장치가 약국에 설치되어 소다수와 아이스크림을 섞은 ‘아이스크림 소다’를 판매했기 때문이죠. 약국에서 판매가 된 이유는 소다수에 치유 효과가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에요.

1920년 금주법이 발효되자 소다파운틴의 인기가 더 높아졌습니다. 술집을 운영하던 사람들, 심지어는 앤하이저부시(Anheuser-Busch)와 같은 맥주 회사도 아이스크림 제조 및 판매로 업종을 바꾸었죠. 1933년 금주법이 폐지되기 전까지 소다파운틴은 미국 전역에서 볼 수 있었어요.

1920년대 에드먼드 포르테의 아들 안젤로 포르테가 아이스크림을 서비스하는 모습 ⓒexetermemories.co.uk
굿 유머의 아이스크림 트럭의 모습 ⓒEDUCATION IMAGES UIG VIA GETTY IMAGES

C. 찾아오는 서비스

19세기 중반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던 이탈리아에서는 많은 사람이 다른 나라로 이주했습니다. 이들 중 일부는 생계를 위해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팔았습니다. 이들이 파는 아이스크림을 호키포키(hokey pokey)라고 불렀죠. 호키포키 장수 에드먼드 포르테(Edmund Forte)는 노점 장사로 크게 성공하고 ‘포르테 앤드 선스’라는 아이스크림 공장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최초로 아이스크림 바를 만든 해리 버트(Harry B. Burt)는 미국에서 굿 유머(Good Humor)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냉동고가 장착된 트럭을 몰고다니면서 아이스크림을 판매하는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트럭에 종을 달아 아이스크림 장수가 왔다는 것을 알리고, 아이스크림 판매원 유니폼으로 흰색 유니폼에 빳빳한 모자를 채택해서 깨끗하고 순수한 이미지를 부각시켰죠.

D. 마트에서 사다먹는 아이스크림

1950년대가 되면 사람들은 아이스크림 장수에게서 아이스크림을 사는 것보다는 마트에서 포장된 것을 사먹는 걸 선호하게 됩니다. 2가지 기술적 변화가 이유였는데요. 첫째는 가정용 냉장고가 보편화되면서 냉동실에 아이스크림을 보관할 수 있게 된 것이었죠. 두 번째 이유는 자동차의 보편화로 사람들이 교외에 살면서 자동차를 타고 장을 보러 다니는 라이프스타일로 바뀌게 된 것이었는데요.

이 라이프스타일에 발맞추어 드라이브스루가 되는 패스트푸드점이 부상하게 되었고, 반대로 소다파운틴의 인기는 크게 떨어졌습니다. 1976년에는 굿유머 아이스크림 트럭까지 사라졌죠.

 

4. 신제품 탄생의 순간들

아이스크림 소다

A. 아이스크림 소다

소다 파운틴 인기의 주역이었던 ‘아이스크림 소다’는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아이템입니다. 발명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요. 유력한 후보 중 한명은 로버트 그린(Robert Green)입니다.

그린은 1874년 필라델피아의 프랭클린 연구소 설립 50주년 기념 축제 때 소다수를 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음료의 맛을 낼 때 쓰던 크림이 동나면서, 아이스크림을 소다수에 넣어 판매하면서 탄생했다는 것이죠. 또 다른 설에는 디트로이트의 프레드 샌더스(Fred Sanders)가 매장에 있는 크림이 모두 상하자 소다수에 아이스크림을 넣으면서 만들었다고도 합니다.

아이스크림 장수 ⓒThe New York Times

B. 아이스크림 콘

1903년 뉴욕 거리에서 아이스크림을 팔던 이탈로 마르키오니(Italo Marchiony)는 컵처럼 생긴 아이스크림 콘의 특허를 냅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원뿔모양의 아이스크림 콘은 아니였죠.

아이스크림 콘이 제대로 등장한 것은 1904년 세인트루이스 만국박람회에서 입니다. 박람회장에는 어니스트 함위(Ernest Hamwi)가 서아시아 지역의 와플인 잘라비아를 팔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장사가 잘 되지 않았죠. 고민하던 함위는 근처 아이스크림 노점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꼬깔 모양의 와플 위에 아이스크림을 얹인 음식을 판매하기 시작합니다. 아이스크림 콘이 인기를 얻자 함위는 코르뉴코피아(Cornucopia Waffle Company) 와플 컴퍼니를 세워 본격적으로 판매하게 되죠.

사실 옛날부터 콘은 있었습니다. 일찍이 13세기 프랑스에서 웨이퍼(wafer)가 등장했는데요, 이 웨이퍼를 납작하게 구운 뒤 원통이나 원뿔 형태로 말기도 했죠. 이렇게 만들어진 콘은 주로 고급스러운 디저트를 장식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1940년대의 에스키모 파이, 추후에 바가 추가되었다. ⓒThe Archives Center of the National Museum of American History, Smithsonian Institution.

C. 아이스크림 바

아이스크림 바는 1922년에 출시된 에스키모파이(skimo Pie)로부터 시작됩니다. 에스키모파이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에 밀크 초콜릿을 입힌 제품이었어요. 아이스크림 가게 주인이었던 크리스천 넬슨Christian Nelson 이 아이스크림과 초콜릿 캔디바 가운데 무엇을 살지 고민하는 손님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고 하죠.

에스키모파이는 초콜릿을 입힌 아이스크림으로 1922년 특허도 받았지만, 이후에는 새로운 발상이라고 보기 힘들다는 이유로 특허가 취소됩니다. 사실 특허 취소가 무색하게 에스키모파이는 엄청난 인기를 얻었습니다. 혼자 초콜릿 시장을 먹여 살렸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죠.

당시만 해도 에스키모파이는 완전한 아이스크림바는 아니었습니다. 바 형태이긴 했지만, 막대기가 꽂혀있지 않아서 손으로 들고 먹어야 했거든요. 아이스바에 막대를 꽂는 아이디어는 해리 버트(Harry B. Burt)가 1923년 최초로 특허를 받았습니다. 그는 이 특허를 가지고 굿유머를 설립해 아이스크림 트럭 사업을 시작하죠.

비슷한 시기 아이스크림바와 비슷한 물에 과즙과 향료를 섞어서 얼린 워터아이스도 만들어집니다. 레모네이드 노점을 운영하고 있던 프랭크 에퍼슨(Frank Epperson)은 문득 어릴 적에 만들어 먹던 막대 얼음과자를 판매할 생각을 했죠. 음료에 막대를 담가둔 채 베란다에 하룻밤을 두어 막대와 함께 얼어붙은 음료였어요. 그는 이 제품에 팝시클(Popsicle)이라는 이름을 붙여 1923년부터 판매하기 시작합니다.

 

5. 우리나라 아이스크림의 역사

아이스케키 장수

1900년대부터 경성 시내에는 일본식 빙수점이 등장합니다. 이곳에서는 곱게 갈아낸 얼음에 설탕, 시럽(심지어는 날계란!)등을 첨가해 만든 일본식 빙수인 ‘가키고리’를 팔았죠.

1910년대에는 한강에서 채취한 얼음으로 즉석에서 빙수를 만들어주는 상인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천연얼음을 사용하다보니 세균 감염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일부러 위생 문제가 있는 얼음을 사용해서 이윤을 남기려는 사람도 등장합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총독부에서는 아이스크림 장사를 하려면 ‘행상증’을 발급받도록 했죠.

1940년대에는 소규모 제빙이 가능해지면서 색소를 탄 물에 설탕을 넣어 나무 막대를 꽂아 얼린 아이스케키를 파는 상인이 등장합니다. 아이스크림이라고 하기에는 빈약한 간식이었지만, 이마저도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귀한 존재가 됩니다. 그렇게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는 아이스케키가 번성하게 되죠. 나중에는 점차 발전해서 단팥과 우유물을 혼합한 아이스케키도 판매했어요.

이때까지만해도 아이스크림의 주원료인 우유가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아이스크림이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1962년 삼강에서 ‘삼강 하드’를 출시하면서 드디어 제대로 된 아이스크림이 등장하게 됩니다. 삼강하드는 한 시대를 풍미한 간식이 되었고, 이때부터 ‘하드’가 아이스크림을 지칭하는 보통명사처럼 쓰이게 되었죠. 이후 1970년에는 해태제과의 브라보콘과 롯데삼강의 쮸쮸바가 출시되며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6. 아이스크림 기업의 역사

하겐다즈를 창업한 매터스 부부 ⓒicecream.com
  • 하겐다즈

오랫동안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일해 왔던 매터스(Mattus) 부부는 1959년 자신들만의 아이스크림 사업체를 차리기로 결심합니다. 매터스 부부는 품질 좋은 천연 재료를 쓰고, 일반 아이스크림에 비해 공기 주입량을 줄이고 유지방 함량을 높여 진하고 풍부한 맛을 내는 고급 아이스크림을 판매합니다.

그리고 고급 이미지를 주기 위해서 발음하기 힘든 외국어 같은 ‘하겐다즈’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아이스크림 포장지에는 스칸디나비아반도의 지도까지 그려 넣었죠. 스칸디나비아어에는 하겐다즈라는 말이 존재하지도 않았지만요.

그래도 이들의 고급 전략은 시장에 잘 먹혔고, 소비자들뿐만 아니라 미국 전역의 이름난 레스토랑에서도 앞다투어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을 디저트 메뉴에 올렸습니다.

2차 세계대전 중 아이스크림을 기다리고 있는 병사의 모습 ⓒRALPH MORSE/THE LIFE PICTURE COLLECTION/GETTY IMAGES
  • 베스킨라빈스

제 2차 세계대전 중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한 품목으로 아이스크림이 채택되었습니다. 미 국방부는 해상 전선에서 작전 중인 병사들에게도 아이스크림을 공급하기 위해서 아이스크림 생산 설비가 설치되어있는 수송선을 운영했죠. 이 아이스크림 생산 선박에 복무 중이었던 사람 중에 어니 라빈스(Irvine Robbins) 와 버튼 배스킨(Burton Baskin)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여기서 배운 노하우를 토대로 1945년 종전 후 각각 스노 버드 아이스크림 스토어(Snow Bird Ice Cream Store)와 버튼스 아이스크림 숍(Burton’s Ice Cream Shop)을 각각 오픈합니다. 1948년에는 아예 회사를 합쳐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Baskin Robbins Ice Cream)를 설립하죠.

베스킨라빈스는 ‘매일매일 다른 맛을 즐길 수 있다’는 슬로건으로 31가지 맛을 선보였고, 캘리포니아 전역에서 인기를 얻게 됩니다. 1960년대에는 미국 내 400개 이상의 매장을 열고 70년대에는 일본, 사우디아라비아, 호주 등에 진출하죠.

한국에는 1986년 명동 1호점을 시작으로 들어오게 되는데요. 당시 국내 시장에서는 마트에서 파는 아이스크림밖에 없었기 때문에 배스킨라빈스의 아이스크림이 큰 인기를 얻습니다. 국내 아이스크림 시장의 절반 이상을 점유하고, 전 세계 브랜드 매출의 약 10%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였죠.

설빙의 시초인 시루ⓒhere.busan.com
  • 설빙

설빙의 창업자인 정선희 대표는 일본에서 유학하며 제빵 기술과 푸드 코디네이터 과정을 공부했죠. 이후 한국으로 귀국한 뒤 2010년 부산 남포동에서 ‘시루’를 오픈합니다. 이곳에서 여러 가지 한국식 디저트를 만들었는데요. 2013년 4월 탄생한 제품이 우유를 갈아 만든 얼음 위에 콩가루를 뿌린 뒤 먹기 좋게 자른 인절미 떡과 아몬드 슬라이스를 올려 만든 인절미설빙이었죠.

인절미설빙이 인기를 얻어 서울에서 부산까지 빙수 원정을 오는 손님도 생기자, 정선희 대표는 인절미설빙 인기를 발판 삼아 코리안 디저트 카페 설빙을 론칭합니다. 2016년에는 일본에 진출하여 일본 내에서 큰 인기를 끌고 6개 지점을 오픈하기도 했지만, 일본에서 설빙을 맡았던 파트너사가 파산하면서 일본 매장은 문을 닫았어야 했죠.

인기는 예전만 하진 않지만, 인절미 설빙은2019년 누적 판매량 2,500만 개를 돌파해 단일 메뉴로 6년간 약 1,975억 원 매출을 기록했습니다.

유원지의 디핀다트 @seriuseats.com
  • 디핀다트 (구슬 아이스크림)

구슬 아이스크림을 저온물리학자인 커트 존스(Curt Jones)가 액체질소를 이용한 연구를 하다가 우연히 발명한 겁니 그는. 1988년 디핀다트(Dippin’ Dots)를 설립하고 ‘미래 아이스크림’이란 슬로건으로 유원지를 중심으로 판매하며 인기를 얻죠.

디핀다트의 구슬 아이스크림은 전 세계로 판매되기 시작하면서, 구슬 아이스크림을 판매하는 다른 회사가 등장하게 되는 데 바로 한국의 미니멜츠였죠. 디핀다트는 특허침해로 고소를 했는데, 문제는 특허권이 인정되지 않습니다. 미국 법상 특허는 개발된지 1년 안에 등록해야 특허권이 인정되는 데, 디핀다트는 회사 설립 이후 4년 뒤에나 1992년에 구슬 아이스크림 제조 방식에 대한 특허를 등록했기 때문이죠.

오히려 미니멜츠가 디핀다트에게 시장독점 혐의로 고소했는데, 미니멜츠가 승소하면서 디핀다트는 수백만 달러의 보상액을 지불하지 못하고 2011년에 파산합니다.

원문: 사소한 것들의 역사


참고 문헌

  • 로라 B. 와이스. (2013). 아이스크림의 지구사. 휴머니스트.
  • 심효윤. (2021). 냉장고 인류. 글항아리
  • 주영하. (2021). 음식을 공부합니다. 휴머니스트.
  • 작가미상. (2022). [장수브랜드 탄생비화]한국적인 맛으로 승부…코리안 디저트 설빙. 뉴시스. URL : https://mobile.newsis.com/view.html?ar_id=NISX20220107_0001716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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