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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니커즈

밑바닥에 고무창을 붙여 걸을 때 발소리가 나지 않는 운동화

  • 국립국어원 우리말샘

 

1. 최초의 운동화는?

초기 플림솔 ⓒ Alansplodge
배에 표시되어 있는 플림솔 라인

19세기 철도가 발달하면서 영국의 노동자들은 바닷가에서 휴가를 보낼 수 있었죠. 이들은 바닷가에서 샌드 슈즈(Sand Shoes)를 신었습니다. 샌드 슈즈는 가죽 혹은 밧줄로 밑창을 만들고 캔버스 천을 덧댄 신발로 내구성이 뛰어나지는 않았습니다.

1830년에 리버풀 러버 컴퍼니(Liverpool Rubber Company)에서 밑창을 고무로 제작하기 시작하면서 이야기가 달라지죠. 이때까지 샌드 슈즈는 밑창과 캔버스 천이 쉽게 떨어지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결합 부분에 두꺼운 고무 밴드를 추가한 거예요. 샌드 슈즈에 부착한 고무 밴드의 모습이 마치 화물선의 적재량을 알려 주는 표시인 플림솔 라인(Plimsol Line)과 닮았다고 해서 이 신발을 플림솔이라고 부르기 시작합니다.

1868년에는 끈이 달려 더욱 편안해진 ‘크리켓 샌들’이 등장합니다. 이름처럼 크리켓 경기를 위한 신발로 당시 가격으로 6달러로 아주 비쌌죠. 하지만 산업혁명으로 기계가 발달하면서 1897년에는 60센트가 됩니다.

ⓒ Keds

1916년에는 US 러버 컴퍼니(US Rubber Co.)와 굿이어(Goodyear)가 합작하여 케즈(Keds)를 설립하게 됩니다. 이 케즈에서 최초로 대량 생산된 스니커즈 챔피온(Champion)을 판매하죠. 챔피온은 현재에도 판매되고 있습니다.

 

2. 최초의 운동화는 리복

리복 최초 러닝화 ⓒDAILY MIRROR

최초의 러닝화는 1865년에 시작됩니다. 바닥에 스파이크가 달려있는 구두처럼 생긴 모습이었죠. 1900년 대에는 J. W. 포스터 앤 손(J. W. Foster and Son)이라는 영국 회사에서 스파이크가 달린 가죽 러닝화인 ‘Foster’s Running Pumps’를 제작하는데요. 영화 <불의 전차>로 더 유명한 1924년 프랑스 하계올림픽 100m 달리기 챔피언 해롤드 아브라함스(Harold Abrahams)가 이 신발을 신어 유명세를 얻게 됩니다. 이후 1958년 J. W. Foster and Son은 회사의 이름을 바꾸게 되는데요. 그게 바로 리복(Reebok)이죠.

 

3. 테니스에 진심인 아디다스

스탠스미스 – 1963년 ⓒadidas

최초의 테니스화는 1931년 아디다스에서 처음 선보입니다. 물론 그 전에 컨버스 올스타나 케즈의 스니커즈를 테니스화로 사용했긴 하지만 테니스화라고 명명해 출시한 것은 아디다스가 처음이었죠.

테니스화의 역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신발은 1963년에 등장합니다. 아디다스가 컨버스 천이 아닌 가죽으로 된 테니스 신발을 출시한 것이었는데요. 이 신발의 모델은 당대 프랑스의 테니스 스타였던 로버트 헤일렛(Robert Haillet) 이었죠. 하지만 로버트 헤일렛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은퇴하게 되고 새로운 당대 최고의 테니스 선수와 계약하게 됩니다. 그가 바로 그 유명한 스탠 스미스(Stan Smith)이죠.

 

4. 많은 이야기가 담긴 농구화

  • 컨버스 올스타 – 1917년
최초의 농구화 컨버스 올스타 ⓒconverse

세계 최초의 농구화는 컨버스(Converse)에서 제작한 올스타입니다. 당시 농구 선수였던 척 테일러(Chuck Taylor)는 컨버스를 찾아가 이 농구화에 대한 개선점을 제안합니다. 이 제안을 계기로 척 테일러는 컨버스의 홍보와 유통을 담당하게 되고, 더 나아가 신발에 그의 이름을 붙이게 되죠. 그의 노력 덕분에 컨버스 올스타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미군의 공식 운동화가 되기도 했고, 1970년대 초에는 미군 공수 부대에도 납품되었다고 합니다.

  • 아디다스 슈퍼스타 – 1970년
최초의 로우탑 가죽 농구화, 아디다스 슈퍼스타 – 1970년 ⓒadidas

아디다스 슈퍼스타는 최초의 로우 탑 가죽 농구화입니다. 처음엔 농구선수 카림 압둘 자바가 신고 나오면서 인기를 끌었죠. 하지만 슈퍼스타를 더 유행시킨 것은 힙합그룹 Run-DMC인데요. 그들은 슈퍼스타를 신발끈 없이 신발 혀를 밖으로 빼고 신는 스타일을 유행시켰죠.

아디다스에 진심이었던 Run-DMC는 1986년 <My Adidas>라는 곡을 출시하기도 했습니다. 아디다스는 그들과 백만 달러의 광고 계약을 체결했는데, 운동선수가 아닌 인물이 모델 계약을 따낸 사례는 스포츠웨어 브랜드 사상 최초였다고 하네요.

  • 나이키 에어 조던 1 – 1985년
에어 조던 1 – 1985년 ⓒNike

농구화하면 빼먹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에어조던이죠. 나이키 에어 조던 1의 시그니처 컬러인 검은색과 빨간색은 혁명적인 것이었습니다. 당시 NBA는 일정 부분 이상의 흰색이 포함된 농구화를 신도록 규정하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에어조던은 이러한 제재를 오히려 마케팅 기회로 활용합니다. 나이키는 마이클 조던이 에어조던을 신고 경기를 할 때마다 5000달러의 벌금을 지불했고, 이런 광고 카피를 내보내죠.

NBA가 이 신발의 착용을 금지했습니다. 다행히도 NBA는 여러분이 이 신발을 신는 것은 금지하지 못합니다.

당연히, 엄청난 매출을 거두었습니다.

 

마치며

마이클 조던, 스탠 스미스, 척 테일러, 해럴드 아브라함스 등 운동화의 탄생과 유행에는 항상 스타 운동선수들이 함께 했습니다. 오늘날 운동화 회사들이 스포츠에 투자하며 홍보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당연한 일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케즈 챔피온이 최초의 스니커즈였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스니커즈에 비해 인기가 없었던 것은 스포츠 스타와 관련된 일화가 없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원문: 사소한 것들의 역사


참고문헌

  • Amber J. Keyser. (2015). Sneaker Century, A History of Athletic Shoes, Twenty-First Century Books
  • Conran. (2009). Fifty Shoes that Changed the World. Design Museum
  • Marc Richardson. (2018). A Quick History of Reebok. grailed.com
  • 로리 롤러. (2002). 신발의 역사. 이지북
  • 마티외 르 모. (2019). 1000 SNEAKERS. 루비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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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실험한 것을 어떻게 믿음?: 실험실의 역사 https://ppss.kr/archives/269518 Fri, 13 Jun 2025 03:08:57 +0000 https://ppss.kr/?p=269518

실험실

실험을 하기 위하여 필요한 장치와 설비를 갖춘 방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들어가기 전에

최근에는 계속해서 전자기기에 관련된 역사만 조사했는데요. 『실험실의 진화』라는 책을 보다가 재밌어서 오랜만에 다른 주제를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책을 꽤 오래전부터 도서관에서 눈여겨 보고 있었는데, 전자기기의 역사만 조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뒷전으로 미루어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냥 읽기만 해야지 했다가 결국 정리까지 해버렸네요.

실험실의 역사는 화학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화학사는 한 번 정리한 적이 있습니다) 가장 인상 깊은 순간도 보일이 자신의 실험을 사람들에게 믿게 하기 위해 실험실을 개방하였다가, 왜 과학자만을 위한 닫힌 실험실이 되었는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1. 최초의 실험실은?

최초의 실험실은 누가 만들었는지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따르면 실험실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16세기 신비주의 철학자 존 디(john Dee 인데요.)하지만 실험실(laboratory)의 라틴어 어원인 라보라토리움(laborarorium)은 16세기 이전부터 쓰였기 때문에 존 디가 실험실이라는 단어를 처음 쓴 사람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2. 어둠의 연금술사 실험실

연금술사의 실험실은 주로 지하와 같은 어두컴컴한 곳에 있었습니다. 안드레아스 리바비우스(Andreas Libavius)는 이 점을 비판하며, 연금술이 지하 세상의 어두운 비밀을 몰래 탐구하는 활동이라며 비난했습니다.

반면, 리바비우스는 연금술과 대비되는 가상의 ‘화학의 집’을 제안했는데요. 화학의 집은 도심에 있었고, 커다란 창을 통해 들어온 빛이 내부를 환하게 밝혀주는 구조였습니다. 말하자면 연금술은 어둠의 학문이고, 화학은 빛의 학문이라는 것이죠.

이처럼 연금술은 화학자들과 종교인들에게 비난의 대상이었는데요. 금을 만들기 위한 목적이 탐욕스럽고 헛되다고 보였기 때문이죠.

하지만 사실 18세기 초엽까지 화학자의 실험실은 연금술사의 실험실과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두 실험실 모두 가장 중요한 기구는 화로와 증류기였습니다. 화로는 고온을 만들어서 금속을 녹이거나 증류를 하는 데 사용했고, 증류기는 불순물을 걸러내는 데 사용했죠.

18세기 중엽부터 화학 연구의 주류가 야금학이나 약제학에서 기체 화학으로 바뀌면서 화로의 중요도가 점점 줄어듭니다. 대표적으로 라부아지에(Antoine-Laurent de Lavoisier)의 실험실을 보면, 화로는 없고 테이블 위에 각종 실험 도구들이 놓여있었습니다. 게다가 라부아지에의 실험실은 파리의 병기창에 있었고,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반면 동시대 프리스틀리의 실험실은 17세기의 연장선이었습니다. 집에 실험실을 두고 공기 수집기를 개량해서 실험했죠. 그래서 혹자는 프리스틀리를 최후의 연금술사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3. 프랜시스 베이컨과 실험의 등장

화학자의 실험실이 생겨났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중심이 되는 중세에서는 실험 자체를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지식은 실험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본질을 사변적으로 생각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라고 받아들여졌죠.

그리고 당시 실험실의 필수품이었던 화로와 증류기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는 자연의 모든 존재는 자연적인 운행을 하므로 인간이 개입하는 실험은 자연을 망친다고 보았는데요. 특히 자연에서 볼 수 없는 화로와 증류기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랬죠.

16세기에 이르러서야 아리스토텔레스적 사고에 반기를 든 지식인이 등장하는데요. 바로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이었습니다. 베이컨에게 지식은 대상이 무엇에 의해 일어나고 있는지 동적 원리를 탐구하는 것이며, 이를 알기 위해서는 실험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화로와 증류기에 대한 비난에 대해서는 베이컨은 실험이 인공적인 상태를 만드는 게 아니라 막고 있던 다른 요소를 치워줌으로써 자연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는 작업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더 나아가 베이컨은 국가와 사회가 지원하는 공동 연구의 필요성을 이야기합니다. 베이컨의 저서 『새로운 아틀란티스』(1626)에는 솔로몬의 집이라는 공간이 등장하는데요. 이곳에는 36명의 연구원이 분업하여 연구합니다. 외국을 여행하며 정보를 수집하는 사람, 실험을 수집하는 사람, 실험을 수행하는 사람, 수집된 내용을 정리하는 사람, 실용적으로 응용할 방법을 찾아내는 사람, 새로운 실험을 연역하는 사람, 새로운 실험을 수행하는 사람, 이를 모두 취합하여 자연법칙을 이끌어내는 사람으로 나뉘어 합동 연구를 진행합니다.

베이컨의 이상이었던 솔로몬의 집은 1660년 왕립학회가 설립됨으로써 실현되었습니다. 이곳에서 과학자들이 모여 실험 결과를 발표하고 토론했죠. 하지만 조직적인 협동 연구가 진행된 것은 아니었고, 정부의 연구비 지원도 없었습니다.

 

4. 실험을 믿게 하는 방법: 열린 실험실

연금술사의 실험실은 비밀에 싸인 공간이었으며, 연금술사의 실험 노트는 본인이 아니면 해석할 수 없는 암호 문자를 사용했습니다. 반면, 근대 과학자들은 실험이 공개적으로 검증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로버트 보일(Robert Boyle)이었습니다. 그의 실험실은 모두에게 열려 있었고, 실험 결과를 책이나 논문으로 발표했죠. 다만 그의 실험을 직접 보지 않은 과학자들에게 어떻게 실험 결과를 믿게 할 것인지가 문제였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보일은 세 가지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첫 번째는 많은 사람이 자신의 실험을 지켜보았다고 기록하는 것이었습니다. 보일은 수은주 실험에서 “유명한 수학 교수들, 월러스 박사, 와드 박사, 그리고 미스터 렌이 보고 있는 가운데 실험했다”며 이름까지 공개하기도 했죠. 보일은 독자들에게 자신의 실험을 목격한 사람들이 거짓말을 할 사람들이 아니라는 믿음을 심어주려고 한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실험의 시시콜콜한 내용까지 전부 기록해서 보고하는 것이었습니다. 보일은 진공 속의 새에 대한 실험을 보고하면서, 공기를 빼니까 새가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고, 구경하던 한 사람이 실험을 멈추게 하고 새를 구해줬다는 이야기를 적었습니다. 이렇게 세세한 내용을 전부 기록함으로써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죠.

세 번째는 실패한 실험까지 자세하게 기록하는 것이었습니다. 실패한 실험에 대한 상세한 보고는 성공한 실험에 대한 설득력을 높여주었죠.

하지만 보일도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들의 비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들은 보일이 만든 진공이 인공적인 산물이라며 비판했습니다. 리바이어던으로 유명한 홉스(Thomas Hobbes)도 실험이 과학적 사실을 만들어낸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실험이 완벽한지 확신할 수 있냐는 것이었죠. 따라서 홉스는 보일의 진공 펌프는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공기가 새고 있고, 진공 속에서 새가 죽은 것은 숨을 쉬지 못해서가 아니라 진공펌프의 틈으로 공기가 급격하게 빨려 들어가 소용돌이를 일으켜 새를 죽인 것이 아니냐며 비판합니다.

이에 대해 보일은 새를 넣은 유리구 속에 작은 깃털 하나를 매달은 채로 진공을 만들었습니다. 홉스의 말대로 공기의 강한 소용돌이가 새를 죽인 것이었다면 깃털은 소용돌이 때문에 요동을 쳤을 테지만 미동도 하지 않았죠.

 

5. 증인은 중요하지 않다: 닫힌 실험실

보일의 진공 실험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쪽이 막힌 긴 유리관에 수은을 가득 채운 뒤 수은이 담긴 넓은 그릇 안에 거꾸로 세웁니다. 그러면 유리관 속 수은은 넓은 그릇 안으로 내려가다가 일정 높이에서 더 이상 내려가지 않죠. 이때 긴 유리관과 넓은 그릇 전체를 진공펌프 안에 넣고 공기를 빼내면, 넓은 그릇에 작용했던 공기의 압력이 약해지면서 긴 유리관 속 수은 기둥의 높이가 내려가게 됩니다.

보일의 실험이 화제가 되면서 당시 유명한 물리학자인 크리스티안 하위헌스(Christiaan Huygens)도 보일의 실험을 재현해 봅니다. 그런데 진공을 만들어도 수은 기둥이 전혀 낮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하위헌스는 이 사례를 들면서 보일이 진공펌프를 통해 얻은 공간은 진공이 아니라고 비판했죠.

보일은 이 결과를 듣고 하위헌스가 만든 진공펌프가 불량이라 나타난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위헌스가 1663년 보일의 진공펌프를 가지고 자신의 실험을 재현하면서, 보일은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죠. 보일이 하위헌스의 실험 결과를 받아들였지만, 아직 믿지 않는 왕립학회 회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을 대상으로 로버트 훅은 하위헌스의 실험을 재현합니다. 로버트 훅은 회합 장소로 실험 도구를 옮겨 실험을 재현했습니다. 실험 결과는 하위헌스의 결과대로였죠. 하지만 그럼에도 왕립학회 회원들은 실험 도구를 옮기는 과정에서 진공펌프의 밀봉에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회합 장소가 아닌 로버트 훅의 실험실에서 실험 결과를 재현한 뒤에야 과학자들은 하위헌스의 실험 결과를 받아들입니다.

이 일을 계기로 실험의 신뢰도는 목격자의 존재와는 무관하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실험실은 열린 공간일 필요가 없어졌죠. 실험실은 실험을 주도하는 과학자만의 공간이 되어 갔습니다.

 

6. 대학교의 실험실

19세기 초반 유럽 대학에서는 실험실을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당시까지도 대학의 주요 과목은 신학, 의학, 법학, 철학이었기 때문이죠. 19세기 말에서야 과학이 주요 과목이 되면서 대학 내에 실험실과 연구실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유기화학을 개척한 유스투스 폰 리비히(Justus von Liebig)는 기센 대학교에서 실험 실습을 할 수 있는 실험실을 운영했는데요. 이 리비히의 실험실은 여러 대학 실험실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대학에 실험실이 자리 잡게 되면서 어떻게 학생 여럿에게 동시에 같은 실험을 가르칠지에 대한 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네덜란드 레이던 대학교의 화학 교수 헤르만 부르하버(Herman Boerhaave)은 많은 학생들이 동시에 실험을 진행하고, 안전하게 불을 사용할 수 있도록 작은 화로를 만들었습니다. 점차 큰 화로는 실험실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19세기 무렵 학생들은 화로 대신에 알코올 램프로 실험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7. 물리학 실험실의 탄생

리비히의 실험실이 성공적으로 운영되면서 19세기 초엽 대학에는 화학 실험실이 정착했습니다. 게다가 인공 염료의 상업화로 대학뿐만 아니라 기업에서도 화학 실험실이 세워졌죠. 하지만 화학 외의 분야에서는 실험실이 좀 처럼 활성화되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18세기 후반 유행했던 전기 실험은 실험실이 아닌 살롱이나 귀족의 저택에서 진행되었죠. 대중강연으로 유명했던 험프리 데이비(Humphry Davy)와 마이클 패러데이(Michael Faraday)도 강연을 하는 극장의 무대 바로 옆에서 실험했죠.

물리학 실험실이 생겨난 계기는 전신의 발명이었습니다. 1830년대 새뮤얼 모스(Samuel Morse)가 발명한 전신은 급속도록 발전해 1850년대 이미 해저 케이블이 깔리죠. 전신선은 수십에서 수천 킬로미터에 달했는데, 중간에 손상된 부분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표준저항이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표준 저항을 측정해서 만드는 것이 국가적 차원에서 중요한 일이 되었죠. 표준저항을 만들기 위해서는 외부의 교란 없이 정밀 작업이 가능한 실험실이 필요했고요.

그렇게 생겨난 물리학 실험실은 화학 실험실을 모방해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물리학 실험실에서는 보통 강의실 바로 옆이나 밑에 있었고, 강의와 연계된 실험을 진행했죠.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실험실은 표준저항을 정교하게 측정하고 유지하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1874년 세워진 케임브릿지 대학교의 캐번디시 연구소는 1층과 3층에 연구 실험을 위한 실험실을 배치하고, 2층에는 학부생을 위한 강의실과 실험실을 지어 이런 문제를 해결합니다. 특히 정밀 실험실이 위치한 1층은 복도를 없애고 방과 방을 직접 연결함으로써, 학생들의 접근을 자연스럽게 차단했습니다.

 

8. 생물학 실험실의 탄생

18세기 무렵 생물학 강의는 주로 대학교 박물관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교수는 박물관에 있는 표본을 가져와서 강의했죠. 실험은 일부 교수가 알아서 장소를 마련해 하는 것이었습니다.

근대 실험생리학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 마장디(Françosi Magendie)는 생리학에서 실험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요. 이를 위해서는 동물실험을 위한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마장디의 제자이자, 췌장액의 기능을 밝힌 것으로 유명한 클로드 베르나르(Claude Bernard)역시 마찬가지였죠.

하지만 마장디가 속했던 콜레주 드 프랑스(Collge de France)는 생리학 연구에 실험실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베르나르에게 충분한 실험실을 제공해주지 않았습니다. 사실 마장디의 동물실험은 비윤리적이라며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거든요. 결국 베르나르가 여러 정부 기관을 설득하는 오랜 노력 끝에 자연사박물관에 딸린 작은 부속 건물을 실험실로 제공받았는데요.이때는 생리학자로서 베르나르의 연구가 거의 끝나가던 때였죠.

케임브리지 대학의 마이클 포스터(Michael Foster)는 교육과 생리학 실습을 병행할 실험실을 대학에 요구해 1873년 ‘기초 생물학에 대한 실제적인 수업’을 개설합니다. 이 수업에서는 다양한 동식물들을 해부 및 관찰했죠. 포스터는 학부생을 대상으로 실험을 통해 생물학을 가르친 최초의 과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실험을 통해 생물학을 가르치는 방식은 서서히 여러 대학으로 확산해 갔습니다.

포스터의 스승이었던 토머스 헉슬리(Thomas Huxley)도 “과학 연구자에게는 실험실 작업이 중심이어야 하며, 책은 이를 도와야 한다”라며 실험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1872년 영국 왕립 과학 칼리지의 교수가 된 후 학생들의 실험을 위한 공간과 예산을 확보해 생물학을 가르쳤죠.

원문: 사소한 것들의 역사


참고

  • Lowe, D. (2015). Laboratory history: The chemistry chronicles. Nature 521, 422
  • Peter J. T. Morris. (2021). The history of chemical laboratories: a thematic approach. Chemtexts
  • 황상익, 김옥주. (1992). 19세기 서유럽 생리학의 전문과학화 과정. 의사학, 1(1), 3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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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바지

능직으로 짠 질긴 무명으로 만든, 푸른색 바지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1. ‘님’에서 만든 데님

제노바 선원

16세기 제노바의 코르듀로이 목화는 품질이 좋기로 유명했는데요. 이를 본 프랑스의 님스 지방에서도 좋은 품질의 직물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죠. 그 노력의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님스 지역의 능직이라는 뜻의 세르제 드 님(Serge de Nimes)입니다. 세르제 드 님이 드 님(de Nimes)으로 불리며 오늘날까지 데님이라는 명칭으로 이어진 것이죠.

이 데님은 내구성이 매우 강해 제노바 해군들이 입었는데요. 이것이 Jeans의 어원이라는 설이 있어요. 제노바를 뜻하는 프랑스어 단어가 Génes이기 때문입니다. 이후 데님은 서부개척 시절 마차의 천으로 이용되었고, 미국과 영국의 전쟁에서도 전략물자를 실어 나르는 데 요긴하게 사용되었습니다.

 

2. 데님 바지와 청바지는 다르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데님 바지는 오래 전부터 있어왔는데요. 하지만 우리는 리바이스(Levi’s)의 청바지를 최초의 청바지로 알고 있죠. 이전의 데님 바지와 청바지의 차이는 리벳이라는 구리 단추와 대량생산에 있습니다. 데님 바지에서 주머니 모서리와 단추 플라이의 밑부분 등에 금속 리벳을 설치한 것이 리바이스의 청바지로, 이로 인해 내구성이 더 향상되었죠.

이 아이디어는 제이콥 데이비스(Jacob Davis)라는 재단사에 의해 발명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발명품을 사업화하기 위해 당시 샌프란시스코에서 도매상점을 운영하고 있던 Levi와 손을 잡기로 하고 1873년 특허도 함께 등록합니다.

 

3. 도대체 왜 있나 궁금했던 청바지의 작은 주머니

지금 생산되는 청바지의 공통적인 특징으로는 오른쪽 앞주머니 안의 작은 주머니와 두 개의 뒷주머니를 들 수 있습니다. 원래는 앞주머니 두 개와 오른쪽 뒷주머니만 있었어요.

1870년대 후반 오른쪽 앞주머니에 회중시계를 넣을 수 있는 작은 주머니가 생겼고, 1901년부터 왼쪽 뒷주머니가 추가되었습니다. 또한 리바이스 청바지의 상징인 리벳이 현재는 뒷주머니에서 빠져 있는데요. 이는 1960년대에 리바이스가 안장, 가구 등에 흠집이 난다는 소비자의 불만을 받아들인 결과죠.

 

4. 최초의 XX바지

리바이스 상표

1873년 특허를 내고 탄생한 청바지는 XX라는 이름으로 출시되었는데요. 이 XX라는 명칭은 1890년 501이라는 명칭으로 바뀝니다. 이 리바이스의 501라인은 아직도 출시되고 있죠.

1886년에는 이 바지에 상표가 붙습니다. 말 두 마리가 청바지를 반대 방향으로 당기고 있는 모습인데요. 지금까지 쓰이는 상표로 리바이스 청바지의 내구성을 상징하죠. 1936년에는 다른 청바지와 구분할 수 있도록 레드 탭(Red Tab)을 부착하기 시작했고, 이는 리바이스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5. 반항의 상징, 청바지

<위험한 질주>의 한 장면

청바지는 여러 편의 영화에 등장하며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1952년 <밤의 충돌>의 마릴린 먼로, 1953년 <위험한 질주>의 말론 브란도, 1955년 <이유 없는 반항>의 제임스 딘이 입으면서 반항의 상징으로 떠오른 것이죠. 이 때문에 미국 동부를 중심으로 한 일부 주에서는 교실에서 데님 착용을 금지하기도 했습니다.

청바지는 록 음악의 역사와도 함께 하는데요. 엘비스 프레슬리가 청바지를 입고 나와 자유의 상징이 되기도 했어요. 심지어는 Elvis의 이름이 글자 순서만 바꾸면 Levis가 된다는 점이 화제가 되기도 했죠.

저항의 이미지는 1970년대에도 이어져 히피, 사이키델릭 록, 반전 시위 등을 상징하는 의복이 되었습니다. 펑크 록의 유행으로 디스트로이드 진, 흔히 말하는 ‘찢청’이 등장하기도 했죠.

 

6. 청바지가 파란색인 이유?

인디고 블루 염료

대부분의 청바지가 파란색인 이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골드러쉬 시절 광산에 뱀이 많았는데 당시 파란색 염료에는 뱀이 기피하는 성분이 있기 때문에 사용했다는 설이 있죠, 두 번째로 원래 리바이스에서는 덕 팬츠(duck pants)와 파란 색의 데님 바지를 출시했었는데요. 파란 색의 데님 바지의 경우, 인디고 블루 염료의 성분 때문에 세탁할수록 부드러워진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더 선호되었고, 이윽고 파란색만 출시하게 되었다는 설이 있죠.

원문: 사소한 것들의 역사


참고문헌

※ 리바이스의 시초에 대해서는 여러 참고문헌이 있었지만, 각자 내용이 달라 리바이스 공식 홈페이지의 내용만을 중점적으로 다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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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 기업으로, 기업에서 가정으로 이동해 온 컴퓨터의 역사 https://ppss.kr/archives/266638 Fri, 09 May 2025 08:18:07 +0000 http://3.36.87.144/?p=266638 ※ 한국기계산업진흥회에서 발행하는 KOAMI Insight 매거진에 기고한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1. 파스칼의 계산기

파스칼의 계산기

컴퓨터가 나오기 전에 계산은 계산자나 미리 계산을 해둔 계산표를 가지고 하는 것이 보편적이었습니다. 이러한 기구를 이용해서 ‘계산하는 사람’을 컴퓨터라고 불렀죠. 하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다 보니 오류가 있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계산하는 기계, 계산기 발명 시도가 있었습니다.

라이프니츠의 계산기

기계식 계산기가 처음 등장한 것은 1623년 빌헬름 시카르트(Wilhelm Schickard)에 의해서였습니다. 6자리 숫자의 덧셈과 뺄셈을 수행할 수 있는 기계였죠.

이후 1642년에는 파스칼에 의해 기계식 계산기가 개발되었고, 1671년 라이프니츠에 의해 곱셈, 나눗셈까지 가능한 사칙연산 계산기가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단순 계산기가 아닌 본격적인 현대 컴퓨터의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한 것은 찰스 배비지(Charles Babbage)였죠.

차분기관의 일부

1821년 찰스 배비지는 천문학자 존 허셜(John Herschel)과 함께 수치 계산표를 검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계산표에서 오류를 발견했고, 계속해서 오류가 나타나자 화가 난 배비지는 본인이 직접 증기기관을 이용한 계산 기계를 만들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배비지는 영국 정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아 증기기관으로 작동하는 계산기를 만들기 시작해 1832년 샘플에 해당하는 모델을 만들었습니다. 배비지는 자동으로 계산하기 위해 곱셈을 덧셈으로 바꿔서 복잡한 계산을 단순하게 만들어주는 계산 방식인 차분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이 기계를 차분기관이라고 불렀죠. 하지만 끝내 만들어지지는 못했습니다. 1834년까지 차분기관 제작에 진척이 없어 정부 지원금이 끊겼거든요.

하지만 배비지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해 명령어를 입력해 다양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기계의 아이디어를 떠올렸죠. 이 기계는 해석기관이라고 불렸으나, 역시 설계도만 있을 뿐 실제로 제작되지는 않았습니다. 이 해석기관을 이해한 에이다 러브레이스(Ada Lovelace)는 만들어지지도 않은 해석기관을 이용해 베르누이 수를 구하는 알고리즘을 작성했는데, 이것이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램이 되었습니다.

참고로 완성되지 않은 찰스 배비지의 차분기관은 1991년 런던 과학박물관에서 배비지 탄생 200주년을 맞이해 완성합니다.

 

2. 직조기에서 시작된 IBM?

자카르의 천공카드를 이용한 베틀 ⓒthoughtco.com

18세기 중반, 태엽 달린 기계 장치들은 오르골처럼 실린더 위의 돌기나 구멍을 이용해 움직임을 반복했습니다. 이것을 산업 분야에서 처음 사용한 곳은 섬유산업이었죠.

1725년 바실레 부숑(Basile Bouchon)이 천공카드를 이용해 베틀을 제어하는 방법을 발명하고 1805년 조셉 마리 자카르(Joseph Marie Jacquard)가 산업적으로 완성하죠. 자카드의 베틀을 본 나폴레옹과 조세핀은 자카드 베틀에 대한 특허를 부여했고, 그 대가로 자카드는 3,000프랑의 연금과 6년가 베틀마다 로열티를 받았습니다.

허먼 홀러리스의 천공카드

19세기 후반 미국에서는 노예제가 폐지되면서 인구가 급속하게 늘었고, 세금을 거두기 위한 인구조사를 빠르게 해야 했죠. 허먼 홀러리스(Herman Hollerith)는 섬유 산업에 쓰이던 천공카드를 도입해 인구조사에서 얻은 결과를 한 사람당 한 장의 카드에 저장하는 방식을 개발했습니다.

홀러리스 천공카드 기계의 가장 큰 혁신은 전기의 사용이었습니다. 홀러리스의 기계는 천공카드에 구멍이 있으면 금속 바늘이 구멍을 통과해 수은에 닿아 전기신호를 전달하는 원리였습니다. 홀러리스는 TMC라는 회사를 설립해 천공카드 기계를 납품하면서 천공카드는 인구통계, 보험, 군수 관리 등에 쓰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TMC는 훗날 IBM이 되죠.

 

3. 전쟁이 만들어낸 컴퓨터

봄베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은 독일군의 암호화 장치 에니그마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영국의 비밀정보국은 에니그마 해독을 위해 과학자들을 모아 암호해독 전담팀을 만들었죠. 이때 차출되었던 앨런 튜링(Alan Mathison Turing)이 1939년 봄베 컴퓨터를 개발합니다. 봄베 컴퓨터 제작에 관한 영화가 바로 <이미테이션 게임>이죠.

1943년 콜로서스 mk2 의 모습

하지만 곧이어 에니그마의 상위 버전인 로렌츠 암호 전신기가 등장하며 봄베보다 더 성능이 좋은 암호해독기가 필요해졌습니다. 그렇게 개발하게 된 것이 콜로서스입니다.

콜로서스는 당시 최신 기술인 진공관을 사용했는데요. 진공관은 쉽게 망가지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장치를 끄지 않는 것이었죠. 장치를 끄지 않으면 진공관의 온도가 급격히 올라가거나 내려가 생기는 충격을 피할 수 있었거든요.

그리하여 1943년 1,500여 개의 진공관과 릴레이만으로 완성된 디지털 컴퓨터 콜로서스가 개발됩니다. 콜로서스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등에 중요한 역할을 해냈죠.

에니악의 일부 모습

1943년 영국이 콜로서스를 만들었을 때, 미국은 대공 미사일 시스템을 만들기 위한 컴퓨팅 장치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벨 연구소에서 담당했던 이 프로젝트에는 레이더와 같은 다른 장치로부터 직접 데이터를 받기 위해 전기회로를 사용한 컴퓨팅 기계를 개발하죠. 2년에 걸쳐 제작된 이 기계가 바로 에니악으로, 농구장만 한 크기를 자랑했습니다. 진공관은 총 17,468개가 사용되었는데 역시 전원을 끄지 않는 것으로 진공관 고장을 예방했습니다.

에니악이 하나의 문제를 풀고 난 다음 다른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복잡한 전선을 사람들이 일일이 다시 연결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문제를 푸는 데는 금방이었으나 전선을 연결하는 작업에는 며칠씩 걸렸죠.

이러한 에니악을 본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은 데이터뿐만 아니라 컴퓨터 프로그램도 코드로 만들어 컴퓨터에 입력해야 한다는 ‘내장형 프로그램 개념’을 떠올립니다. 이 프로그램 내장 방식은 오늘날 컴퓨터의 기원이 됩니다.

폰 노이만은 1945년 에니악 개발팀과 논의한 끝에 새로운 <에드박 보고서 1차 초안> 보고서를 제작하고, 이 방식을 바탕으로 1951년 에드삭이 개발됩니다.

 

4. 튜링의 만능기계

사실 컴퓨터에 대한 아이디어는 봄브와 콜로서스, 에니악이 등장하기 전부터 있었습니다. 1936년 앨런 튜링의 <계산 가능한 수에 관하여, 수리 명제 자동생성 문제에 응용>이라는 논문에 처음 등장했죠.

이 논문은 수학자 힐베르트(David Hilbert)의 생각이 틀렸음을 증명하기 위해 썼던 것이었는데요. 힐베르트의 생각은 지금까지 수학자들이 어떠한 문제를 증명하기 위해 해왔던 과정은 몇 개의 추론 규칙을 반복해서 적용하는 것이 전부이며, 이런 규칙들을 찾아서 자동으로 추론해 주는 기계를 만들면 수학자들이 더 이상 고생하지 않으리라는 것이었죠.

이에 앨런 튜링이 ‘만능기계’를 제시해 이 만능기계가 못 푸는 문제가 있음을 보임으로서 힐베르트가 틀렸음을 증명합니다. 이 만능기계의 원리가 폰 노이만의 프로그램 내장 방식의 유래가 됩니다.

앨런 튜링의 ACE ⓒAntoine Taveneaux

튜링은 세계대전 동안 암호해독기를 만드느라 범용 컴퓨터의 설계는 전쟁 이후에 시작했습니다. 이 컴퓨터는 자동 컴퓨팅 엔진(ACE, Automatic Computer Engine)이라고 불렸으며 1950년에 첫 시험 모델이 완성되었죠.

참고로 튜링의 에이스는 폰 노이만의 에드박과 아주 다른 방식의 기계였습니다. 에드박은 에드박의 논리 구조는 계산을 빠르게 만드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고, 에이스는 다양한 문제에 사용할 수 있게 논리 구조를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었죠.

 

5. 정부에서 기업으로

LEO의 모습 ⓒi-progrmmer.info

전쟁 이후에는 컴퓨터가 민간에 쓰이기 시작합니다. 1947년 당시 영국에서 큰 회사들 중 하나였던 라이언스(J. Lyons & Co. Ltd)는 관리부서 업무를 자동화하기 위해 컴퓨터 전문가들을 수소문했습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이 만든 컴퓨터를 사업용으로 쓰기에는 부적합하다고 판단한 라이언스는 직접 컴퓨터를 제작하기로 합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컴퓨터가 레오(LEO, Lyons Electronic Office)이죠. 레오는 기존 컴퓨터보다 기업에서 사용하기에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포드 같은 기업이나 기상청에서 채택했습니다. 미국에서는 1946년 존 모클리(John William Mauchly)와 존 에커트(John Presper Eckert Jr)가 컴퓨터 회사를 세워 유니박을 만듭니다. 유니박을 처음 구매한 곳은 미국 통계국이었죠.

이후 기업용 컴퓨터가 점차 많은 곳에서 쓰이게 되는데, 여기에는 트랜지스터가 등장한 영향이 컸습니다. 트랜지스터를 이용하면 진공관을 이용한 컴퓨터 기계보다 훨씬 작고, 전기도 조금 들고 저렴했기 때문에 기업들도 컴퓨터를 사는데 부담이 적어진 거죠.

트렌지스터는 1947년 벨 연구소의 윌리엄 쇼틀리(William Bradford Shockley)와 그의 연구소 동료였던 존 바딘(John Bardeen), 월터 브래튼(Walter Brattain)과 함께 개발한 것이었죠. 이후 쇼클리는 벨 연구소를 떠나 1955년 쇼클리 반도체 연구소를 설립합니다. 하지만 쇼클리의 연구소는 새로운 연구 결과물을 내지 못했고 자기 고집대로만 연구소를 운영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연구소를 떠났습니다.

1957년 쇼클리의 연구소를 떠난 8명의 연구원은 페어차일드 반도체라는 새로운 회사를 설립해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곳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또다시 여러 회사를 만들었습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회사가 바로 인텔이죠.

IBM 360 ⓒNBC NEWS

IBM는 컴퓨터의 표준을 만들어 컴퓨터가 널리 쓰이는 데 기여했습니다. 기존 컴퓨터는 각 컴퓨터를 위해 특별히 개발된 소프트웨어만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한 회사에서 만든 컴퓨터끼리도 소프트웨어를 공유할 수 없었죠.

1964년, IBM에서는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50억 달러라는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입해 모든 소프트웨어가 잘 동작하는 System/360을 개발합니다. System/360으로 IBM의 컴퓨팅 분야 매출은 2배가 증가했고, 이를 통해 여러 업체가 만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컴퓨터 종류에 상관없이 작동하는 개방형 표준이 만들어집니다.

 

6. 기업에서 가정으로

알테어 8800의 잡지 광고

세계 최초의 가정용 컴퓨터는 1974년에 등장한 알테어 8800Altair 8800로 1년 만에 5,000여 대가 넘게 팔렸죠. 알테어 8800은 오늘날로 치면 본체만 있는 셈으로 확장 장치를 이용하던가, 전면 패널의 토글스위치와 LED만을 이용해 컴퓨터를 사용해야 했는데, 스위치를 이용해 기계어 명령어를 메모리에 주입하고 프로그램을 실행 후 결과를 LED로 표시하는 식이었죠. 즉 컴퓨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만 사용할 수 있는 기계였습니다.

이처럼 한계가 많은 제품이었지만 컴퓨터의 역사에는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빌 게이츠(Bill Gates)와 폴 앨런(Paul Gardner Allen)은 알테어 8800을 보고 이를 위한 프로그램인 알테어 BASIC을 납품하며 마이크로 소프트를 설립했고, 스티브 잡스(Steven Paul Jobs)와 스티브 워즈니악(Steve Gary Woz Wozniak)은 더 나은 PC를 만들겠다며 애플을 창립하죠.

Figure.13 SAGE 콘솔을 사용하는 모습 ⓒcomputerhistory.org

일반 사람들이 컴퓨터를 많이 쓰이게 된 계기는 사용하기 편리한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GUI)가 등장한 이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최초의 GUI는 1958년 북미항공우주방위사령부에서 사용했던 SAGE(Semi-Automatic Ground Environment)라는 방공망 관제용의 전산 시스템의 제어 콘솔이었습니다. SAGE 제어 콘솔에는 레이더 스크린이 있었는데, 라이트펜으로 화면을 찍으면 아군기인지 적기인지 알려주는 기능이 있었죠. 다만 군사 기밀이라 민간용으로 쓰이지는 않았습니다.

스티브 잡스와 매킨토시S 128k의 모습

1973년에는 GUI 운영체제를 탑재한 최초의 컴퓨터 제록스 알토가 등장합니다. 다만 제록스에서 상용화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어 연구소 내에서만 사용하고 있었는데요. 이를 본 애플은 제록스에 100만 달러어치의 애플 주식을 주고 기술 자료와 제품을 개발할 권리를 얻습니다.

그렇게 해서 애플이 내놓은 제품이 1983년 애플 리사 LISA, 1984년 매킨토시 128K이고, 매킨토시 128K의 성공으로 GUI가 대중화됩니다.

IBM PC ⓒIBM

매킨토시 128K의 성공으로 80년대 개인용 컴퓨터 시장은 애플이 점령했습니다. 그때까지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지 않은 IBM은 당시 연구원이었던 돈 에스트리지(Philip Donald Estridge)에게 1년 만에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라는 미션을 주었습니다.

돈 에스트리지는 가격을 낮추기 위해 IBM에서 모든 부품을 제작하는 것이 아닌, 다른 회사에서 만든 기성품을 가져다 썼습니다. 그리고 다른 회사에서 주변 기기나 호환 기종을 만들 수 있도록 아키텍처를 개방하는 정책을 결정하죠. 그러니까 오늘날 조립PC의 시초인 셈이었죠.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IBM PC 5150은 사무용 컴퓨터로 큰 인기를 얻으며 성공합니다. IBM PC 5150의 성공으로 PC는 IBM의 모델명에서 개인용 컴퓨터를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죠.

IBM PC 5150의 아키텍처 개방 정책은 컴퓨터 업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부품과 소프트웨어를 제조하는 회사가 많이 늘어나 컴퓨터 산업 전체가 커지는 계기가 됩니다. 특히 인텔과 마이크로소프가 가장 큰 혜택을 얻었죠. 그리고 현재까지 MS OS의 IBM PC 호환 기종과 Mac OS의 매킨토시로 시장이 양분되어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원문: 사소한 것들의 역사


참고

  • 더밋 튜링. (2019). 계산기는 어떻게 인공지능이 되었는가. 한빛미디어
  • 마틴 데이비스. (2023). 오늘날 우리는 컴퓨터라 부른다. 인사이트
  • 박민규. (2020).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은 IT의 역사. 빈빈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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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권이 없었다면 아이비리그도 없었다, 복권의 역사 https://ppss.kr/archives/266652 Wed, 09 Apr 2025 04:15:10 +0000 http://3.36.87.144/?p=266652

복권

번호나 그림 따위의 특정 표시를 기입한 표(票). 추첨 따위를 통하여 일치하는 표에 대해서 상금이나 상품을 준다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1. 진시황이 싼 똥, 복권으로 치운다

오늘날 키노, 글자 대신 숫자로 바뀌어 로또처럼 되었다

복권과 비슷한 유물이 고대 이집트 유적에서 발견되기도 했지만, 기록상 가장 오래된 복권은 기원전 1세기경 중국의 한나라에서 등장합니다. 이 복권은 키노(Keno)라고 불렀는데요. 키노는 120개 글자 중에서 10개를 맞추면 되는 형식으로 오늘날의 로또와 비슷했어요. 오히려 45개 숫자 중에서 6개를 맞추는 로또보다 훨씬 낮은 당첨 확률을 가지고 있었죠.

키노가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한나라의 탄생과 관련이 있습니다. 한나라는 진나라가 멸망하고 세워졌는데요. 새로운 나라를 세움으로서 체제와 영토를 정비해야 했고, 진나라 때 벌여놓은 만리장성 공사 등을 마무리 지어야 했기 때문에 많은 돈이 필요했죠. 하지만 전쟁 직후의 국가 재정으로는 무리였어요. 그래서 재정을 확보할 방법을 찾다가 고안해 낸 것이 복권이었죠. 이 키노는 한나라가 멸망하면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러다가 키노는 19세기 미국 대륙 횡단 철도 건설을 하던 중국 이민자들에 의해 부활했어요. 키노의 120개 한자는 80개의 숫자로 대체되었죠. 지금도 미국 카지노에서 차이니즈 로터리(Chinese Lottery)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어요.

 

2. 클래스가 다른 로마의 복권 경품

유럽에서는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5대 황제 네로가 복권을 발행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첫 황제로서 수도를 건설하기 위해서, 네로는 대화재로 불탄 로마를 재건하기 위해서 발행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요. 당시 아우구스투스의 복권은 음식 계산서 영수증을 추첨해 선물을 나눠주는 형태였고, 네로는 귀족과 부유층을 상대로 노예, 배 등의 경품을 걸었죠.

 

3. 복권으로 세운 아이비리그

베니스의 복권 추첨 ⓒHistory.com

16세기 초 제노바 공화국에서는 90명의 후보자 중에서 5명의 의원을 뽑았는데요. 이 방식을 차용해 90개의 숫자 중에서 5개 숫자를 추첨하는 복권이 만들어졌어요. 이것이 로또(Lotto)의 시초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렌체에서도 도시 정비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복권이 등장했는데요. 이 복권은 당첨자에게 현금을 주어서 현대식 복권의 시작으로 보기도 합니다.

16세기 후반부터는 유럽 각국에서 복권 제도가 국가사업에 이용되었는데요. 독일에서는 쾰른 대성당을 재건하기 위해 사용되었고, 현재도 유지비의 상당 부분을 복권 수익에서 충당하고 있죠. 영국에서는 미국 식민지 개발에 사용되었는데요. 하버드, 예일, 콜롬비아, 프린스턴 등의 아이비리그 대학들이 복권 수익금으로 세워졌죠. 미국의 경우 프렌치 인디언 전쟁과 독립 전쟁에서 복권을 이용해 군수 자금을 마련했어요.

 

4. 막아봐야 다시 활성화되는 복권

1800년대 중반부터 미국 내에서 복권에 관한 열기가 너무 뜨거워지자 1900년대 초부터 미국 내에서는 복권 발행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어요. 하지만 복권을 금지하자 불법 내기와 도박 등이 성행해 결국 뉴햄프셔 주는 1964년 합법적인 복권 발행을 승인하죠.

영국에서도 복권 제도가 도박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1826년 일시적으로 복권 발행이 중단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복권의 이익을 공공사업에 사용하면서 복권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생기자, 1990년대에 국가 복권 제도를 다시 도입하죠.

 

5. 복권으로 산 올림픽행 티켓

조선견문도해 ‘복권 추첨’ / 부산근대역사관

우리나라 복권의 시초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계’로 추정합니다. 계원들의 이름이나 숫자를 적은 알을 통 속에 넣고 돌리다 밖으로 빠져나온 알로 당첨자를 정하는 산통계가 대표적이죠. 그 외에도 일정 번호를 붙인 표를 100명, 1000명, 1만 명 단위로 판매한 뒤, 추첨해 매출액의 80%를 복채로 주는 작백계도 인기가 있었습니다.

근대적 복권은 1945년에 등장합니다. 일본 정부는 군수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승찰이라는 복권을 발행했죠. 승찰은 10원짜리 복권으로 당첨금은 10만 원이었습니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되면서 사라지게 됩니다.

(좌)런던 올림픽 복권 ⓒ문화재청 / (중)제 1회 후생 복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 (우)제 1회 애국복권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우리나라에서 발행된 최초의 복권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인 1947년에 등장합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1948년에 열린 런던 올림픽 대회의 참가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복권을 발행한 것입니다. 액면 금액 100원, 1등 상금 100만 원이었던 이 복권은 140만 장이 발행되었고, 당첨자는 모두 21명이었죠. 이 복권으로 마련된 경비로 축구, 농구, 육상, 역도, 복싱, 레슬링, 사이클 7개 종목 선수 50명과 임원 17명으로 구성된 선수단이 런던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1948년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해이기도 하지만 그해 7월에는 이례적인 수해 피해가 있던 해이기도 합니다. 수천 명의 사상자와 수십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죠. 이재민 구호 기금 마련을 위해 1949년 10월부터 1950년 6월까지 세 차례 후생 복표가 발행되었고,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발행이 중단되었습니다.

6‧25 전쟁 뒤인 1956년에는 전쟁 복구에 들어가는 산업 자금과 사회 복지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매달 애국 복권을 발행했어요. 매달 1회씩 총 10회까지 운영된 이 복권은 100환짜리와 200환짜리로 발행되었습니다. 그 후 국가적인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복권이 등장합니다. 1962년 산업박람회복표, 1968년 무역박람회복표 등이 발행되었죠.

 

6. 준비하시고… 쏘세요!

1969년에 주택 복권이 발행되기 시작하면서 정기적으로 발행되는 복권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주택 복권은 무주택 군·경 유가족, 국가유공자, 파월 장병의 주택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발행되었죠.

처음에는 서울에서만 발행되었지만 2회부터는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인기가 늘어남에 따라 월 1회 추첨이 주 1회 추첨으로 바뀌었어요. 1등 당첨금도 1978년 천만 원, 1981년 3천만 원, 1983년 1억 원, 2004년 5억 원으로 점차 증가했습니다. 특히 1981년부터 TV를 통해 방송되면서 ‘준비하시고… 쏘세요!’라는 멘트와 다트 형식의 추첨 방식이 유명해졌죠.

하지만 찬란했던 영광은 2002년 12월에 등장한 로또로 인해 몰락합니다. 2002년에는 1,851억 원에 달하던 연간 판매액이 2005년에는 318억 원으로 급감하고, 마침내 2006년 복권위원회에서 인쇄 복권의 상품 수를 줄이기 위한 목적으로 폐지되었어요.

 

7. 앞으로 절대 없을 전설의 레전드 407억

로또 ⓒ서울신문

2002년 국내에 등장한 로또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보다 당첨금 이월 규정 때문이었는데요. 운이 좋게도(?) 초기에 연달아서 당첨금액이 이월되면서 19회차 로또의 1등 당첨금이 407억 2200만 원이 되었죠. 이 전설의 19회차 로또의 당첨자는 지방 경찰서 경사로 혼자 당첨금을 거머쥐었죠.

이후 높은 당첨금으로 사행성 논란이 일면서 이월 당첨금을 2번으로 제한하고, 구매액도 2천 원에서 천 원으로 낮춰 다시는 수백억에 달하는 당첨금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단적인 예로 최소 1등 당첨금인 2013년의 546회차는 4억 593만 원이었죠.

 

마치며

시작에서부터 복권은 국가사업을 위해서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도박처럼 취급되면서 금지되기도 했죠. 결국은 다시 풀리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세금을 거둬들이기 좋은 수단이기 때문이겠죠.

그러고 보면 술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유해성으로 인해 금지한 적이 있지만 결국 다시 활성화되었고, 세금을 거두는 데 이만한 게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우리 모두 국가를 위해서 술과 복권을 열심히 합시다??

원문: 사소한 것들의 역사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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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 한옥마을은 100년도 안 됐다고?: 한옥의 역사 https://ppss.kr/archives/264455 Mon, 24 Mar 2025 13:24:28 +0000 http://3.36.87.144/?p=264455

한옥

우리나라 고유의 형식으로 지은 집을 양식 건물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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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옥은 원래 없었다?!

한옥이라는 말은 원래는 없는 말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한옥이라는 용어 자체가 서양식 주택인 양옥과 구분하기 위한 용어이기 때문이죠.

한옥이라는 말은 1907년 정동길 주변을 기록한 약도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당시 서양의 근대 건축양식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이들과 구분하기 위해 표시한 것이었죠. 이때는 한옥이라고 하면 살림집을 의미했는데요. 우리나라의 전통 건축물을 통칭하여 한옥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1975년에 나온 『삼성 새우리말 큰사전』에서부터 입니다. 이 사전에서 한옥은 양옥과 대비되는 개념이자 한옥의 동의어로 ‘조선집’, ‘한식집‘이 있다고 표기되어 있죠.

현재 한옥에 대한 정의는 건축법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요. 2010년 2월에 제정된 「건축법 시행령」 제2조에 따르면 한옥은 ‘기둥 및 보가 목구조 방식이고 한식 지붕틀로 된 구조로서 기와, 볏짚, 목재, 흙 등 자연 재료로 마감된 우리나라 전통 양식이 반영된 건축물 및 그 부속 건축물’을 말한다고 합니다.

 

2. 한중일 전통 가옥의 차이는?

한중일 전통 건축물은 비슷하게 생겼는데요. 한옥만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중국의 집은 온돌과 마루가 없고 일본은 마루만 있는 반면, 한옥은 방에는 온돌을 대청과 툇간에는 마루를 깔아두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어요. 난방시설인 온돌과 냉방시설인 마루를 가지고 있는 한옥은 겨울에 춥고 여름에 더운 한반도의 특징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온돌은 순수 우리말로 구운 돌의 약자인 ‘구들’이라고도 합니다.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불기운이 바닥 아래를 지나 굴뚝으로 빠지게 되는 구조이죠. 온돌은 열의 효율이 높고 연료나 시설이 경제적이며 고장이 별로 없다는 장점이 있어요.

마루는 나무 널판으로 구성된 바닥을 말하는 것으로 바닥을 지면으로부터 떨어트려 통풍이 되도록 해 습기를 방지하는 구조입니다. 대개 마루는 앞쪽이 트여 있고 뒤쪽에는 문이 달려 있는데, 한여름에 문을 열면 통풍이 잘됐죠.

 

3. 조선시대부터 한옥마을이었던 북촌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한옥은 대문, 마당, 부엌, 사랑방, 안방, 마루, 외양간, 화장실, 장독대 등이 갖추어져 있는 조선시대 상류층의 한옥입니다. 유교 사상이 사회 전반에 퍼져있던 조선시대라 신분과 남녀유별, 장유유서를 공간에도 적용했죠. 크게 안주인이 쓰는 공간인 안채와 바깥주인이 쓰는 바깥채 등으로 나누기도 하고, 집채를 달리하거나 작은 담장을 세워 주거 공간을 상, 중, 하로 나누기도 했어요.

한옥은 풍수지리에 따라 배산임수의 원칙으로 지어졌어요. 뒤로는 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물을 마주하며 남쪽으로 짓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한옥의 위치였죠. 풍수지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서울에서 가장 좋은 장소는 경복궁이고 그다음이 창덕궁인데요. 그 사이에 있는 북촌 역시 북고남저로 겨울에 따뜻하고 배수가 잘될 뿐 아니라 남쪽은 넓게 트인 데다 남산의 전망도 좋아 조선 시대부터 권문세가와 왕족들이 모여 살던 동네라고 하네요.

경복궁
창덕궁

반면 하급 관리들은 남산 기슭인 이른바 남촌에 살았죠. 이곳은 음지이기는 하지만 배수가 잘되고 지하수가 풍부하여 물을 얻기 편했어요. 오늘날의 중구 남산동에서 필동을 거쳐 묵정동에 이르는 지역이에요.

하지만 조선 후기에는 조금 달라졌습니다. 원래 고급 관리가 살던 곳이 북촌, 하급 관리가 살던 곳이 남촌이었죠. 하지만 후기로 갈수록 북촌에는 노론이 거주하기 시작했고, 남론에는 소론과 남인·북인이 살게 됐어요.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른 기록입니다.

 

4. 서양인들이 만든 개량한옥

구한말 미국공사관 ⓒUniversity of Arkansas Libraries

구한말이 되자 우리나라에 서양인 관리와 서양인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한옥을 구입해 자신들의 습관과 용도에 맞게 개조했어요. 여러 개의 방을 터서 침실·식장·거실 등으로 개조하는 한편, 벽지를 바르고 종이로 된 창문을 유리창으로 바꾸고 서양식 가구와 카펫 그리고 난로를 설치했어요. 당시 미국공사관이 대표적인 개량한옥이었죠.

서양인이 개조한 한옥은 이후 조선인의 주거 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조선인 재력가들은 이들을 따라 창호지 방문과 창문을 유리로 바꾸는 한편, 대청마루를 응접실로 바꾸고 목욕탕도 설치했어요. 당시 재력가들 사이에서는 서양식 가구를 사용하는 것은 부와 개화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유행하기도 했다고 하네요.

 

5. 도시형 한옥의 탄생

도시형 한옥

1908년 일본이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하면서 일본인들을 조선의 농경지로 대규모로 이민시키는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이때 조선의 땅값이나 세금이 일본에 비해 싸고 수익률이 높아 주로 일본에서의 빈농층이 주로 이민을 왔죠. 1911년 첫 이민 가족 160호를 시작으로 매년 5,000명 이상이 넘어왔어요.

일본인들이 조선의 농촌으로 이민 온 후 일제는 본격적으로 조선의 농촌을 수탈했습니다. 특히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많은 조선인의 토지를 빼앗았죠. 토지를 빼앗긴 조선인들은 소작농이 되었습니다. 소작농 거리도 찾지 못한 이들은 공장이 있는 대도시로 이주해 막노동을 하게 됐죠. 이로 인해 경성에는 1926년 30만이던 인구가 1931년에는 36만으로 1936년에는 67만으로 늘어났죠. 도시로 몰린 인구로 인해 주택난이 심해져 새로운 주거 형태가 필요해졌어요.

주택난 속에서 조선인 전문 주택 개발업자들이 등장했습니다. 관급 건설 사업을 일본인들이 독점하게 되면서 조선인 건설업자들은 민간 주택 시장으로 눈을 돌렸죠. 이들은 대형 필지를 사서 작은 필지로 나눈 후 획일화된 한옥을 개조했습니다. 어려운 조선인들의 경제 사정상 소규모 주택의 수요가 더 많았고, 주택 개발을 하는 입장에서도 작게 여러 주택을 만드는 것이 평당 이익이 높았기 때문이었죠. 게다가 한옥은 일본인들이 손대기 어려운 분야였고, 유학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서구식 건축 개발보다 훨씬 수월한 시장이었어요.

이때 대규모로 만들어진 한옥을 도시형 한옥이라고 부릅니다. 기존 한옥과 달리 ㄷ자나 ㅁ자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비교적 크기가 작고, 변소가 건축물 내부에 들어간 형태를 띠고 있었으며, 벽돌과 유리 함석을 사용하는 등의 특징이 있었죠.

 

6. 건축왕, 북촌 한옥마을을 만들다

건축왕 정세권

당시 등장한 전문 건설업자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정세권이예요. 1919년 3.1 운동 이후 상경한 정세권은 1920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부동산개발회사 건양사를 설립했습니다. 북촌을 시작으로 경성 곳곳에 근대식 한옥 집단지구를 건설하면서, 10년도 안 되어 큰 부를 축적해 조선을 대표하는 부동산업계의 거물로 성장하게 되죠. 사람들은 그를 건축왕이라고 불렀어요.

그가 개발한 대표적인 필지는 조선 왕족의 종친 이해승의 누동궁을 개발하여 만든 68채의 한옥단지, 북촌 가회동 31번 한옥 집단지구, 익선동 166번지 등이 있어요. 후자의 두 곳은 지금도 한옥을 찾아볼 수 있죠.

이 부를 바탕으로 정세권은 신간회, 조선물산장려회, 조선어학회 등을 물심양면으로 후원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을 계기로 일제에게 고문을 받기도 하고 막대한 재산을 빼앗기기도 하면서 안타깝게도 건양사는 쇠락하게 돼요.

 

7. 고급 주택가였던 전주 한옥마을

전주 한옥마을

지금의 전주에는 풍남문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일제강점기 이전만 해도 사대문이 있었어요. 성안에는 관인, 양반, 향리 등이 거주했고, 성 밖에는 상인들이 거주하면서 남문시장이 형성됐죠. 하지만 1907년 조선 통감부의 폐성령에 따라 풍남문을 제외한 3개 성문이 철거되었고, 도심부는 1920~30년에 일본인들이 독점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1920, 30년대의 도시 집중화 경향에 따라 전주로 많은 사람이 이주해 왔습니다. 그중에는 호남평야의 대지주나 신흥 자본가들도 있었죠. 이들은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고급 주택가인 한옥 집단지역을 형성했어요. 이 지역의 한옥 주택은 1970년대까지 꾸준히 생겨났지만, 1970년대 중반부터는 한옥 보존 정책이 시행되면서 신축이 중단되었죠.

 

8. 아파트에 밀린 한옥

6·25전쟁 이후로 경제가 개발되면서 도시로 인구가 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전보다도 토지를 효율적으로 이용해야 하는 필요성이 생기자, 한옥보다는 서양식 단독주택과 아파트가 건설되기 시작했어요. 특히 1960년대와 1970년대 산업화와 새마을 운동 시기를 거치면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심해졌고, 초가집도 슬레이트집으로 바뀌게 됐어요. 70년대 중반에는 재개발, 신축 등으로 인해 기존 한옥의 90%가 헐리게 됩니다.

북촌한옥마을에도 1970년대 들어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한옥을 보존해야 한다는 필요성도 대두되기 시작했죠. 1976년 북촌 지역을 민속 경관 지역으로 지정하면서 북촌의 한옥은 보존되기 시작했답니다.

원문: 사소한 것들의 역사


참고문헌

  • 김경민. (2017).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이마
  • 임창복. (2011). 한국의 주택, 그 유형과 변천사. 돌베게
  • 전남일. (2010). 한국 주거의 공간사. 돌베게
  • 전남일 외 3명. (2008). 한국 주거의 사회사. 돌베게
  • 이용우. (2003). 북촌 한옥마을. 대한인쇄문화협회
  • 장성화. (2011). 전주 한옥마을 조성사업의 도심재생 성과 분석 및 개선방안. 전북발전연구원
  • 신광호. (2003). 도시형 한옥 마당의 공간적 특성 연구 – 전주시 도시형 한옥 사례 연구. 우송대학교 석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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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콘센트 하나로 통일 좀 해줘라: 콘센트의 역사 https://ppss.kr/archives/268679 Fri, 14 Feb 2025 04:52:35 +0000 http://3.36.87.144/?p=268679

플러그

전기 회로를 쉽게 접속하거나 절단하는 데 사용하기 위하여 코드 끝에 부착하는 접속 기구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1. 한 집 당 벽면 콘센트 한 개

로터리 컨버터
크기는 대략 이렇습니다

전기 기술은 1800년에 개발된 볼타의 파일을 시작으로 19세기에 급속도로 발전합니다. 불과 100년도 안 되어서 전기가 가정용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죠.

전기가 가정용으로 보급될 수 있었던 이유는 1888년 로터리 컨버터(Rotary Converter)가 발명되었기 때문입니다. 로터리 컨버터는 전압, 주파수, 위상 등을 원하는 형태로 바꿀 수 있는 장치입니다. 그러니까 전기가 모든 가정에 동일한 전압의 전기를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단 말이죠.

전기가 가정에 처음 공급되었을 때는 조명용으로만 사용되었기 때문에, 가정에는 천장에 달린 소켓만 있었습니다. 영국을 기준으로 1930년대 초까지도 기술적 한계로 인해 한 가구당 6개의 천장 소켓과 1개의 벽면 소켓만 있었다고 합니다.

1909년의 토스터기 ⓒwww.worldstandards.eu
전구와 비슷해 보이는 초기 전기 플러그

참고로 벽면 콘센트 아니고 소켓 맞습니다. 당시 전기 기기들은 오늘날과 같은 꽂아 쓰는 플러그 형태가 아니라 전구를 끼우듯이 돌리는 형태였기 때문이죠. 이 나사 소켓형 플러그는 1880년대 중반 에디슨에 의해 개발되었고 20세기 초까지 산업 표준으로 활약했습니다.

 

2. 파나소닉을 만들어 낸 멀티탭

대략 이런 느낌의 쌍소켓
마쓰시타 고노스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30년대까지 대부분의 가정에는 벽면에 하나의 소켓만 있었어요. 이러한 이유로 천장 조명을 제외한 2개 이상의 전기 기기를 사용하려면 추가적인 어댑터가 필요했습니다.

이 어댑터는 1918년 일본에서 발명됩니다. 작은 전기용품 가게를 운영하던 일본의 한 전기공이 쌍소켓을 발명한 것이죠. 쌍소켓은 히트 상품이 되어 그의 가게를 어엿한 기업으로 성장시킵니다.

이 기업이 바로 훗날 파나소닉이 되는 마쓰시타 전기 산업입니다. 쌍소켓을 발명한 전기공은 파나소닉의 창업자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죠.

테이블 탭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멀티탭
멀티탭 절망편 ⓒReiner Hahn

우리가 쓰고 있는 멀티탭 형태는 1929년에 테이블 탭(Table Tap)이라는 이름으로 처음에 등장했습니다. 1970년에는 페드트로(Fedtro)라는 회사에서 콘센트 구멍마다 스위치가 달린 멀티탭을 선보였죠.

 

3. 유럽과 미국의 평행이론?!

에디슨이 발명한 소켓형 플러그는 불편했기 때문에 오늘날처럼 꽂는 형태의 플러그가 등장합니다. 흥미로운 건 유럽과 미국에서 각각 독자적으로 발명했는데 발상이 비슷했다는 점이에요.

  • 유럽 승 : 일자형 플러그

꽂는 형태의 플러그는 유럽에서 먼저 등장했습니다. 1882년 영국의 토머스 테일러 스미스(Thomas Taylor Smith)가 ‘전기 회로 연결’에 대한 특허를 낸 것이 최초였죠. 1889년 제너럴 일렉트릭 컴퍼니 카탈로그에도 꽂는 플러그가 등장한 것을 보면 상용화도 빠르게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893년 GEC 카달로그에 실린 전기 플러그
1904년 허벌(Hubbell)의 플러그 제품들

반면, 미국에서는 유럽보다 22년이 늦은 1904년 하비 허벨(Harvey Hubbell )에 의해 발명됩니다. 산업 표준이 소켓형이었기 때문에 그의 발명품은 소켓에 연결해서 사용하는 형태였죠. 하비 허벨은 이후 허벨 회사를 설립하고 다양한 제품을 내놓는데요, 오늘날의 멀티탭과 비슷한 형태의 제품도 있었습니다.

  • 미국 승 : 접지 플러그
Knapp의 접지 플러그
1925년 등장한 슈코 플러그

누전을 방지하기 위한 접지 장치가 들어간 플러그의 발명은 미국이 유럽보다 빨랐습니다. 1915년 허벨 회사에 재직 중이던 조지 냅(George Knapp)이 3핀짜리 콘센트, 즉 접지 장치가 들어간 플러그를 개발한 것이죠.

유럽에서는 그로부터 10년 뒤인 1925년 바이에른 전기 악세사리(Bayerische Elektrozubehör AG)에 재직 중이던 알베르트 뷔트너(Albert Büttner)가 개발합니다. 이 플러그는 안전 콘센트를 의미하는 독일어 ‘Schutzkontakt’의 줄임말인 슈코(Schuko)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죠. 현재는 type F 규격으로 불리며 대부분의 유럽 국가와 우리나라에서 사용 중입니다.

접지 기능이 있는 이 두 플러그는 안전성과 편리성을 인정받아 미국과 유럽의 표준이 되었죠.

 

4. 하나로 통일시켜라 좀…

옛날 스페인의 콘센트. 어떻게 쓰는지 상상도 못 하겠다…
옛날 그리스식 콘센트

플러그와 콘센트는 나라별로 독자적으로 발전되어 왔기 때문에 유럽 내에서도 각자 모양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나라끼리 표준화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100년 전 사람들이라고 안 한 것이 아니었죠. 그래서 1906년 영국에서 비영리 국제기구인 국제 전기기술 위원회(IEC)도 창설되면서 총대를 메는가 싶었는데, 하필이면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애매한 상태에서 멈춰버렸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다시 유럽 국가 12개국이 모여서 회의를 했죠. 하지만 1938년 영국과 1939년 프랑스에서 열린 회의는 모두 눈치만 봤고, 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흐지부지되었습니다.

1957년에야 국제 전기 장비 승인 규칙 위원회(IECEE)에서 플러그 및 콘센트의 표준을 발표하긴 했지만, 이는 기술 보고서에 불과했습니다. 1963년이 되어서야 ‘유로 플러그’라고 불리는 것이 등장하긴 합니다만 이미 각국의 전기 인프라가 깔린 상황이었던지라… 통합은 물 건너간 거죠.

세계표준이라 쓰고 남아공 전용이라 읽는 N타입

그래서 세계 표준은 없냐고요? 놀랍게도 있습니다. 1986년 제정된 유니버셜 플러스(Type N)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세계 표준 규격인 만큼 접지도 있고 플러그도 두껍지 않아 합리적인 플러그죠. 하지만 전 세계에 깔린 전기 인프라를 뒤집어엎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사용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전기 인프라가 완전히 구축되지 않았던 애꿎은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브라질에서만 이 플러그를 채택했습니다. Type N의 변형 플러그가 등장했기 때문에, 사실상 남아공 전용 플러그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통일된 건 하나 없이 A~O Type이 존재하는 현재에 이르렀는데요. 러프하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Figure.16 A-O 까지의 플러그&콘센트 타입 (혼파망…)
  • 미국의 영향을 받은 나라: Type A, B
  • 영국의 영향을 받은 나라 : Type C, D, G, M
  • 독일을 필두로 사실상 유럽 표준 : Type F
  • 소수 국가들에서만 쓰는 : Type H(이스라엘), J(스위스), K(덴마크), L(이탈리아), O(태국)
  • 세계 표준이라 쓰고 남아공, 브라질용이라 읽는 : Type N

 

5.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에너지 경제신문

우리나라에 전기 인프라가 깔리기 시작한 것은 미군정 시기부터입니다. 시대 특성상 자연스럽게 미국 표준인 Type A, B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1970년대 초까지 미국 표준을 잘 쓰고 있었죠.

하지만 문제는 1970년대까지 발전소가 부족해 전력 사정이 열악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기 사용량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하자, 정부는 효율적이고 안정적인 전력 공급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하죠. 그렇게 시작된 것이 1973년부터 2005년에 걸친 ‘220V 승압 사업’입니다.

전압이 높아지며 발생하는 감전 등의 안전 문제를 고려해 type F를 채택한 것입니다. Type A, B는 코드를 완전히 빼기 전까지 전기가 통하기 때문에, 살짝만 걸쳐있는 상태에서 돌출된 핀을 잡으면 감전되는 안전성 문제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지금의 콘센트 형태로 자리 잡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원문: 사소한 것들의 역사


표지 이미지 출처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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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깎이 777 말고 아는 사람? https://ppss.kr/archives/266642 Thu, 16 Jan 2025 14:34:33 +0000 http://3.36.87.144/?p=266642 손톱깎이 하면 쓰리세븐이 가장 유명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손톱깎이에는 생각보다 여러 브랜드가 있습니다. 국내만 해도 벨, 로얄금속공업 등이 있고 해외의 벨로티, 카이 등이 있죠.

손톱깎이 최초의 브랜드는 Gem이지만 현재는 판매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로 오래된 회사인 Trim을 중점적으로 살펴볼 예정입니다. 아니, 그럴 예정이었습니다… 만 마찬가지로 Trim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더라고요. 그래서 손톱깎이 전반에 대한 역사를 다뤄보았습니다. 그래도 분량이 적은데, 이런 날도 있어야죠ㅎㅎ

 

1. 시작이 불분명한 손톱깎이

 1875년 발렌타인 포거티의 손톱깎이 개선 특허
1881년 유진 하임과 셀레스틴 마츠의 손톱깎이 특허

손톱깎이의 발명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가장 오래된 손톱깎이 개선 특허는 1875년 미국의 발렌타인 포거티(Valentine Fogerty)에 의해 출원되었습니다. 다만 포거티의 특허 제품은 손톱깎이라기 보다는 원형 네일 파일에 가까웠죠.

19세기에 수많은 손톱깎이 특허가 나오는데, 오늘날과 비슷한 클램프형 손톱깎이는 1881년 유진 하임(Eugene Heim)과 셀레스틴 마츠(Celestin Matz)의 특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902년 Gem 손톱깎이 광고

1896년에 Gem이라고 하는 손톱깎이 브랜드 제품이 처음으로 생겨났습니다. 1947년에는 미국 바세트(BASSETT)사의 TRIM 손톱깎이가 출시됩니다. 트림 제품은 레버를 엄지손가락으로 돌릴 수 있는 기능을 추가하는 등 안정적인 사용감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죠. 우리나라에서도 트림 제품은 고급품으로 인식되어 장롱 서랍에 모셔두고 사용했답니다.

 

2. TRIM이 선택한 국내 손톱깎이 회사

벨금속공업 이희평 사장 ⓒ동아일보

고급 손톱깎이로 명성이 높았던 TRIM의 손톱깎이는 1980년대 이후 한국의 손톱깎이 회사들의 품질이 상승하고 경쟁력이 높아지면서 세계 시장 점유율에서 점점 밀리기 시작합니다. 결국 2003년 트림은 공장 문을 닫고 OEM방식을 채택했죠. 이곳의 생산을 도맡은 곳이 바로 한국의 벨금속공업입니다.

벨금속공업은 1954년 한국전쟁 직후에 설립되어 우리니라 최초로 손톱깎이를 만든 회사입니다. 당시에는 손톱깎이를 만들 강철 자재조차 구하기 어려웠죠. 그래서 주변에 나뒹굴던 드럼통을 작두로 잘라낸 뒤 연마기로 일일이 날을 갈아 손톱깎이를 만들었다고 하네요.

한동안은 해외에 OEM방식으로 판매하다가, 1974년부터는 BELL이라는 자체 브랜드로 수출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88올림픽 이후로 한국의 위상이 올라가면서 세계에서 벨 손톱깎이를 알아봐 주기 시작합니다.

참고로 1970년에 벨금속공업에서 손톱깎이에 손톱 칼을 붙인 디자인 특허를 냈습니다. 오늘날에야 흔한 디자인이지만 당시에는 벨금속공업에서만 만들 수 있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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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777 vs 보잉

쓰리세븐 손톱깎이 세트, 군대를 다녀온 분은 익숙한 세트 ⓒi777mall.com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쓰리세븐(777) 손톱깎이 회사는 1975년 설립되었습니다. 현재는 세계시장 점유율 40%를 차지하며 세계 1위를 하고 있는 기업이죠.

창업자 김형규 회장이 1960년대 중반 잡화상을 하던 중, 미국 트림사의 손톱깎이가 유행하는 것을 보고 손톱깎이 사업에 뛰어들었다고 하네요. 벨금속공업과 마찬가지로 드럼통을 이용해 손톱깎이를 만들기 시작해 OCM 브랜드로 제품을 수출했습니다.

93년, 미국 점유율 70%를 넘어가자 이들은 자체 브랜드로 수출을 결심하고 미국 특허청에 ‘777’ 상표출원을 했습니다. 하지만 미국 항공사 보잉에서 90년에 777을 등록해 놓았기 때문에 상표등록을 할 수 없다고 통보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미국 상표법은 ‘선사용주의’이기 때문에 보잉사 보다 먼저 777을 사용했다는 것을 증명하면 승소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온 공장을 뒤져 84년 미국에 777 브랜드를 부착해 수출한 제품을 찾아냅니다. 결국 보잉과 공동으로 상표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이 소송전의 승리로 쓰리세븐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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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기한 손톱깎이들

분량이 적어서 이대로 끝내기가 아쉽네요. 신기한 손톱깎이들도 몇 개 소개해 드립니다.

ⓒamazon.com

허리를 굽히지 않아도 되는 발톱깎이 

안티오크 클리퍼(Antioch Clipper)에서 처음으로 출시한 발톱깎이로, 2011년에 특허가 출원되었습니다. 허리를 굽히기 힘든 어르신들을 생각해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klhip의 13만 원짜리 손톱깎이 ⓒklhip.com

가장 비싼 손톱깎이

세계 최초의 인체공학적으로 올바른 손톱깎이라고 주장하는 Klhip 손톱깎이입니다. 가격은 $79.95으로, 국내에서는 13만 원에 판매되고 있습니다. 의료용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들어졌다, 일본의 수술용 초정밀 기술이 사용되었다 등등의 수식어가 있긴 한데… 개인적으로 가격이 납득가진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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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동 손톱깎이 ⓒlotteon.com

전자동 손톱깎이

샤오미 등에서 출시한 전자동 손톱깎이입니다. 언제 처음 등장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국내에는 2019년부터 소개된 것으로 보입니다. 깎는다기보단 갉아내는 거라 호불호가 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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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사소한 것들의 역사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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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철의 노벨상 후보들, 겨울 난방기구의 역사 https://ppss.kr/archives/265602 Fri, 03 Jan 2025 01:39:01 +0000 http://3.36.87.144/?p=265602

난방기

실내의 온도를 높여 따뜻하게 하는 장치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시작하기 전에

윌리스 하빌랜드 캐리어는 에어컨의 기초를 만든 사람입니다. 인터넷에는 이 사람이 노벨평화상을 받아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더라고요. 오늘 저는 겨울철 노벨 평화상 후보들을 소개해 보려 합니다. 라디에이터, 온수기, 전기장판, 온수 바닥 난방 등의 온열 기구로 인류를 추위에서 구원하신 위인들이죠.

 

1. 첫 번째 후보, 라디에이터

최초의 산업용 난방은 라디에이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산업혁명의 시작은 증기기관이고, 라디에이터는 바로 그 증기로 공기를 따뜻하게 만드는 장치이기 때문이죠. 증기기관을 만들어낸 제임스 와트(James Watt)도 1790년대 일종의 라디에이터를 만들어 집에 설치했다고 합니다.

스티븐 골드의 매트릭스 라디에이터 ⓒpmmag.com
넬슨 번디의 라디에이터 특허

이처럼 증기기관이 등장하고부터 다양한 형태의 라디에이터가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증기를 사용하는 라디에이터는 압력 때문에 폭발하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1854년 스티븐 골드(Steven J. Gold)이죠. 그가 만든 라디에이터는 기존의 것보다 훨씬 저압으로 작동하는 장치로, 생김새 때문에 매트릭스 라디에이터로 불렸죠. 당시 사용되고 있던 벽난로와 비교해 효율도 안정성도 높아 상업적으로 성공한 최초의 라디에이터가 됩니다.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라디에이터의 형태는 1863년 발명가 조셉 나슨(Joseph Nason)과 로버트 브릭스(Robert Briggs)가 그 전신을 만들고, 1872년 넬슨 번디(Nelson H Bundy)가 완성한 제품입니다.

아메리칸 라디에이터 회사(American Radiator Co.)는 1891년 많은 보일러와 라디에이터 제조업체들을 통합해 세계에서 가장 큰 라디에이터 제조사가 됩니다. 이 회사는 오늘날에도 존재하는데요. 바로 아메리칸 스탠다드(American Standard)죠.

 

2. 두 번째 후보, 온수기

옛날에는 따뜻한 물을 쓰려면 냄비에 물을 끓여서 사용했습니다. 씻는 물이라면 펄펄 끓는 냄비 물을 찬물과 섞어 미지근하게 만든 뒤에 바가지로 퍼서 사용했죠.

가이저의 광고 ⓒbatemanwaterheating.com

오늘날처럼 바로 온수가 나오는 기계는 1868년 처음 등장했습니다. 영국의 벤자민 와디 모건(Benjamin Waddy Maughan)이 발명했죠. 모건은 이 발명품을 아이슬란드 온천의 이름을 따서 가이저(Geyser)라고 불렀는데요. 가이저는 차가운 물이 뜨거운 가스에 의해 가열된 파이프를 통과하면서 온수가 되는 원리였습니다. 하지만 가스를 배기하는 장치가 없어 자칫하다가는 터질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장치이기도 했죠.

에드윈 루드가 만든 온수기
에드윈 루드와 그의 발명품 온수기 ⓒwaterheatersplusplumbing.com

모건의 발명품을 안전하게 개량한 것은 연료 가스 제조 회사에서 일하고 있던 노르웨이의 엔지니어 에드윈 루드(Edmund Rudd)였습니다. 루드는 1880년 최초의 자동 저장 탱크식 가스 온수기 특허를 받았죠.

켐프의 태양령 온수기 특허
켐프의 태양령 온수기 광고 ⓒarticsolar.com
켐프의 태양력 온수기 광고 ⓒarticsolar.com

루드가 온수기를 개량한 때와 비슷한 시기에 켐프(Clarence Kemp)도 온수기를 생산하고 있었는데요, 1891년 그는 조금 특별한 온수기를 발명합니다. 가스로 물을 데우는 장치가 아닌 태양열로 물을 데우는 온수기인 클라이맥스 시스템을 개발한 것이었죠. 물이 흐르는 파이프를 지붕 위에 노출해 태양열로 파이프를 데우는 형식이었어요. 뜨거운 물을 사용하기 위해 한여름에도 난로를 데워야 하는 것이 불편하다고 생각해 만든 것이었죠.

 

3. 세 번째 후보, 전기장판

러셀의 전기담요를 보고 있는 사람들

최초의 전기장판은 1912년 의사였던 사무엘 러셀(Samuel Irwin Russell)에 의해 발명됩니다. 결핵환자의 몸을 따뜻하게 만들기 위해 발명한 것이었죠. 하지만 부피도 크고 화재의 위험성도 있어서 널리 쓰이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장판이 아닌 담요 형태로 만든 건 조지 크롤리(George Crowley)입니다. 조지 크롤리는 해군 기술자였는데요, 조종사들이 높은 고도에서 추위를 견딜 수 있도록 하는 전기 온열 비행복을 개발합니다. 그리고 이 기술을 담요에도 적용하죠. 1936년에는 실내 온도에 따라 자동으로 켜졌다 꺼졌다 하는 전기담요를 개발하기도 합니다.

 

4. 마지막 후보, 온수 바닥 난방

바닥 난방 시스템은 기원전 1300년 중동에서 처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르자와 국왕이 터키 비체슬탄의 궁전에 설치된 것이 바로 최초의 바닥 난방이죠. 참고로 우리나라의 온돌은 기원전 4세기경(!)으로 추정됩니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시기에 로마에서도 하이포코스트(hypocaust)라고 불리는 바닥 난방장치가 있었어요. 하이포코스트는 돌 바닥 아래의 빈 공간에 연기가 지나 벽면의 연도(연기 길)로 빠져나가게 되는데요. 온돌은 연기가 지나가는 길이 만들어져 있는 반면, 하이포코스트는 바닥 아래가 거의 다 뚫려있는 형태였죠. 또한 가정집보다는 목욕탕 등의 상업시설에 설치되었죠.

온풍 바닥 난방을 설명하는 그림

로마 제국이 몰락한 후 유럽에서의 난방 시스템은 후퇴하여 벽난로가 난방을 대체하게 됩니다. 다시 바닥 난방이 유럽에 등장한 것은 19세기 초반이죠. 1800년 초, 미국의 발명가 다니엘 페티본(Daniel Pettibone)은 바닥에서 따뜻한 바람이 나오는 장치를 개발하는데요. 엄연히 말하면 바닥을 따뜻하게 하는 것은 아니었고 특정 위치에서 따뜻한 바람이 나오는 장치라 바닥 난방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했죠.

앤지어 퍼킨스의 난방 시스템

온풍을 이용한 난방 방식은 부피가 너무 크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1831년이 되면 온수 파이프가 방바닥을 흐르게 해 바닥을 데우는 난방방식이 등장합니다. 앤지어 퍼킨스(Angier March Perkins)의 고압 온수 난방 시스템이었죠. 이 난방 시스템은 영국에서 인기를 끌고, 이윽고 미국에서도 유행하게 되죠.

 

5. 석탄 → 갈탄 → 연탄 →기름 → 가스

새마을 보일러 ⓒ6080추억상회

우리나라는 온돌을 오랫동안 쓰다가 주거 형태가 점차 변하기 시작하면서 더 이상 온돌을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서 집마다 퍼킨슨 방식의 바닥 난방이 도입되기 시작했죠. 물을 데우는 연료는 석탄으로 시작되었다가, 조개탄으로 불린 갈탄, 연탄 순으로 이어졌습니다.

당시에는 새마을보일러라는 것도 있었습니다. 퍼킨슨 화로 윗부분에 뚜껑을 만들어 그 안으로 물이 들어가 데워진 후, 옆에 달린 큰 고무통에 온수를 받을 수 있는 형태였죠. 새마을보일러는 1960년대 후반부터 널리 보급되었지만, 연탄가스 중독 사고가 발생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때마침 1970년대 다가구주택, 아파트 등이 보급됨에 따라 집마다 있던 퍼킨슨 난방이 중앙 난방식 연탄보일러로 대체되기 시작합니다. 이 중앙식 연탄보일러는 온수 사용이 가능하도록 제작된 최초의 온수용 보일러이기도 하죠.

1975년 이후부터는 아예 연탄이 사라지고 기름보일러가 보급되기 시작했습니다. 작동 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방안에서도 보일러를 컨트롤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은 혁신이었죠. 1997년 중반에는 사용자가 기다릴 필요 없이 순간적으로 온수를 쓸 수 있는 순간식 기름보일러도 등장합니다.

하지만 90년대 후반 정부의 에너지 정책과 맞물려 기름보일러보다는 가스보일러로 점차 시장의 흐름이 옮겨가게 되죠.

원문: 사소한 것들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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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 복음 12장 34절 https://ppss.kr/archives/266646 Thu, 31 Oct 2024 00:55:30 +0000 http://3.36.87.144/?p=266646

치킨

닭에 밀가루 따위를 입히고 튀겨 만든 요리. 굽기도 한다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1. B. C. (Before Chicken)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닭 요리는 백숙입니다. 고기가 귀하던 시절 더 이상 달걀을 낳지 못하는 닭을 푹 끓여서 양을 불릴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죠.

백숙 이후에는 일제강점기에 계삼탕이 나타났습니다. 계삼탕은 삼계탕의 원래 이름인데요. 인삼과 닭은 모두 귀한 요리 재료였기 떄문에 당시에는 특권층들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어요. 우리가 복날 흔하게 삼계탕을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1963년 이후 사료 산업이 발전되고 양계산업의 규모가 커진 이후입니다.

요새는 닭이 일상 음식이 되었지만, 옛날에는 특별한 날에 먹는 음식이었어요. 크리스마스나 Thanks Giving Day에 주한 미군들은 고국에서 공수한 칠면조 요리를 먹었는데, 이것을 보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따라 했다는 거죠. 하지만 칠면조는 구할 수 없으니까 대신 닭을 먹었다고 합니다.

 

2. 태초에 전기구이 통닭이 있으라

우리나라에서 처음 등장한 치킨은 1960년 명동영양센터의 전기구이 통닭입니다. 현재도 가게가 남아있어요.

전기구이 통닭은 굽네치킨과 오빠닭 등으로 대표되는 오븐 치킨의 전신이죠. 여기에 강한 양념을 더한 것이 숯불구이치킨이고, 2005~6년쯤에 유행했던 불닭을 거쳐 현재는 훌랄라와 지코바로 남아있죠.

 

3. 압력튀김기가 이 땅에 이르러 닭을 튀겼나니

1970년대 말 압력튀김기가 국내에 수입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튀김옷이 있는 후라이드 치킨이 등장하게 됩니다. 치킨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는 먼저 튀김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튀김에는 간단하게 습식과 건식이 있어요. 습식은 물반죽, 건식은 파우더를 묻혀 튀깁니다. 물반죽으로 만든 치킨을 ‘민무늬 치킨’이라 부르고, 건식으로 만든 치킨은 ‘엠보치킨’이라 부릅니다. 습식과 건식을 합쳐 볼륨감을 주는 방식은 KFC와 같은 크리스피 치킨이 되고요.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파우더를 묻혀 건식으로 튀겨낸 엠보치킨이예요. 보드람, 치킨뱅이, 둘둘치킨, 림스치킨처럼 호프집에서 파는 치킨(?)의 형태를 띠고 있죠. 림스 스타일이라고도 불리는데요. 1977년 등장한 한국 최초의 치킨 프랜차이즈인 림스치킨에서 시작했기 때문이예요.

엠보치킨은 작은 닭을 한방염지액에 담근 뒤, 파우더를 얇게 묻혀 촉촉하게 흡수시킨 다음에 압력 튀김기에서 튀겨냅니다. 그래서 닭이 작고, 독특한 한약 맛이 나는 것이 특징이죠.

 

4. 치킨에 양념이 배거늘 많은 이들이 감읍하여 그를 믿고 따르리라

엠보 치킨 이후에는 습식으로 튀겨낸 민무늬 치킨이 등장했어요. 1980년대 시장에서 파는 ‘닭전’에서 시작되었죠. 이후 치킨 1세대 브랜드로 불리는 페리카나(1981년), 맥시칸치킨(1985년), 처갓집 양념통닭(1988년), 멕시카나(1989년), 장모님치킨(1989년)가 민무늬 치킨으로 영업을 시작했어요.

민무늬치킨이 이렇게 유행할 수 있었던 데에는 먼저 1982년 프로야구 출범, 1988년 서울올림픽 등 80년대 스포츠 열풍의 덕이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양념치킨의 등장이 큰 역할을 했어요. 민무늬 치킨은 표면이 매끄러워 양념소스에 버무리기 좋았고, 염지 자체가 독특한 향미를 지닌 엠보치킨보다 양념에 적합했죠.

양념치킨은 프랜차이즈 등록 시기(1982)가 가장 빨랐던 페리카나가 자신이 원조임을 강조했었죠. 하지만 현재는 멕시칸 창립자인 윤종계씨가 양념치킨의 개발자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윤종계씨는 1985년 양념통닭 요리법을 개발해 ‘계성육계’라는 개인업체를 운영하고 있었고, 1986년부터 ‘맥시칸 양념통닭’으로 사업을 확대했어요.

이 맥시칸 치킨에서 생겨난 업체만 70여 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대표적으로 ‘처갓집양념통닭’은 맥시칸 기계제작 공장장과 영업부장이 시작한 사업이죠.

 

5. BBQ 가로되 안방에서도 KFC 치킨을 허락하라 하더라

KFC, BBQ처럼 바삭한 튀김옷이 특징인 치킨을 크리스피 치킨, 업계 용어로는 ‘물결무늬 치킨’이라고 합니다. 크리스피 치킨을 만들기 위해서는 염지 닭에 튀김가루를 묻히고, 물반죽코팅(배터믹스)에 담갔다가 다시 튀김가루에 묻혀야돼요. 이때 좁은 통에서 튀김가루를 묻히면 닭이 서로 눌려 튀김옷의 컬이 잘 잡히지 않기 때문에, 큰 통에서 많은 양의 튀김가루를 담아 묻혀야 하죠.

이처럼 크리스피치킨은 원가가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KFC에서만 먹을 수 있는 고급 치킨이었어요. 1990년대 말이 되어서야 등장한 또래오래, BHC에서 크리스피치킨을 선보였는데요. 1995년 당시 BBQ의 컨셉은 ‘안방에서도 KFC 치킨을 즐길 수 있다’일 정도였죠.

원문: 사소한 것들의 역사


참고

  • 정은정. (2014). 대한민국 치킨전. 따비.
  • 대법원 1997. 2. 5. 선고 96마364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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