ㅍㅍㅅㅅ https://ppss.kr 필자와 독자의 경계가 없는 이슈 큐레이팅 매거진 Mon, 02 Jan 2023 08:42:39 +0000 ko-KR hourly 1 https://wordpress.org/?v=5.8.10 https://ppss.kr/wp-content/uploads/2015/07/ppss-100x100.png ㅍㅍㅅㅅ https://ppss.kr 32 32 황교익과 백종원, 음식의 정치 https://ppss.kr/archives/51053 https://ppss.kr/archives/51053#respond Mon, 06 Jul 2015 04:02:11 +0000 http://3.36.87.144/?p=51053 1. 취향과 평론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 선생이 한국일보에서 지나가는 얘기로 우리의 슈가보이, 백종원 대표를 비판하면서 논란이 있었던 모양이다. 사실 황교익과 백종원을 둘러싼 구도는 그다지 특별할 게 없다. 영화 <변호인>에 대한 허지웅의 비평과 그것을 둘러싼 논란도 그랬다. 그런 개별적인 사례를 떠나서 정말 어디서 많이 본 구도다.

황교익과 백종원을 둘러싼 구도는 아주 전형적인, 대중의 취향과 비평가의 충돌이다. 그리고 ‘포퓰리즘’, 내지는 포퓰리스트라고 평가받는 정치인에 대한 논쟁과 닮은 구석이 많다.

음식에서 시작하여 사람들이 무엇을 어떻게 먹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정치적이다. 아니, 어떤 면에선 정치적인 부분을 빼면 남는 게 없다고 해도 될 것이다. 황교익 선생이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그랬던 것처럼.

대표적인 것이 탕국 문화다. ‘육수’를 내어 국물을 만들고 탄수화물을 넣어 탕을 해먹는 것은 실제로 먹을 게 없어 양을 불리기 위한 일이었다. 먹을 게 없다는 사실, 즉 빈곤만큼 정치적인 것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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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생으로도 문제가 많은 탕국문화

조금 시계추를 과거로 돌려보자. 미디어에서 음식을 다루는 방법은 주로 두 가지였다. 하나는 도무지 일상에서 즐길 일이 없어 보이는, 말 그대로 ‘산해진미’에 대한 소개였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전업주부가 아침에 보고 오후에 돌아올 아들, 저녁에 돌아올 남편을 위해 몇 시간 투자해 만들어 볼 만한 레시피를 설명하는 프로그램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자는 반복되던 일상에서 일탈했을 때 무엇을 즐기느냐 하는 것이다. 후자는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넉넉히 시간을 들여 만들어, 생존을 위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홈 스위트 홈의 기억으로 남길 요리다.

 

2. 맛집과 먹방

그리고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매스미디어의 음식을 다루는 방식은 변했다.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낮았던 음식의 분량과 가격이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VJ특공대에서 연달아 방영하는 맛집이란 거의 모두가 ‘무한리필’이나 그에 준하는 싸고 푸짐한 성격을 가진 식당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 별세한 ‘나물이네’ 고 김용환 씨의 <2,000원으로 밥상 차리기>와 같은 시리즈를 기억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서, 2000년대 후반부터 떠오른 건 맛집과 먹방이다. 1997년 환란 이후 고용안정성이 파괴되면서 많은 직장인들이 요식업에 손쉽게 뛰어들었다. 요식업은 더욱 양극화되었고, 훨씬 더 고강도의 경쟁을 치러내기 시작했다. 맛과 가격만 갖고 정당하게 경쟁하기는 너무 어렵다.

치킨집 숫자만 봐도 이 정도다.
치킨집 숫자만 봐도 이 정도다.

온갖 합리적인 마케팅 기법부터 사기(Fraud)에 가까운 것들까지 범람했고, 인터넷으로 정보를 찾는 일이 보편화되면서 사람들은 맛집과 진미의 정의를 바꾼다. 맛집이란 단순히 맛집이 아니라, 맛집이라고 쓰여 있는 곳들 중 다른 누군가의 검증과 추천을 거쳐 등장한 ‘진짜’ 맛집이다. 그리고 그 기준은 주로 싸고 푸짐하며 적당히 길게 음미할 필요까지는 없는 것이다.

서바이벌 역시 마찬가지였다. ‘슈퍼스타K’가 그 방아쇠였다고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홈 스위트 홈이란 이제 없다. 요식업과 식문화는 한국 사람들의 상호 저신뢰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부분일 지경이다. 요리사는 더 이상 낭만과 로망의 상징이 아니며, 식당 역시 일상으로부터의 탈출과 거리가 멀어졌다.

70년대의 짜장면은 가난한 사람들이 경사를 축하하기 위한 소박한 낭만이지만, 현재의 짜장면은 그런 것과 거리가 멀다. 식문화와 요리 역시 무한경쟁과 승자가 써나가는 스토리, 그 진실성에 대한 검증이 필요하다. 먹방은 먹는 음식이 싸고 접하기 쉽다면 그 음식의 맛을 대신 검증하는 과정이겠지만, 비싸고 접하기 어렵다면 대리만족 포르노에 가까워진다.

 

3. 궁극의 대중주의 쉐프, 백종원

백종원 대표는 그 흐름의 최신에 나타난, 맛에 대한 궁극의 포퓰리즘적 ‘쉐프’다. 그는 단순히 엄격한 제한 조건하에서 합리적인 맛과 분량의 요리를 만드는 연금술사라서 인기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거기서 맛과 분량은 부차적이다. 백종원 대표의 진짜 미덕은 1) 그가 냉혹한 현실에서 버티기에 가장 적합한 스타일의 음식을 선보이고 2) 그런 상황에 놓인 많은 사람들을 위한 합리적인 제안을 하며 3) 그가 그런 사람들의 모습 중 어떤 것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그의 “저지방 마요네즈 먹을라믄 뭣허러 먹어” 라는 말을 기억하시는가. 그의 말은 단순히 ‘맞는 일침이라서’ 호응받는 것이 아니다. 저지방 마요네즈를 먹고 싶지 않거나 먹는 게 부담스러운 사람들에게 ‘굳이 불행해지지 말라’고 하기 때문에, 그가 갈수록 식문화의 즐거움을 빼앗기고 있는 사람들의 편에 섰기 때문에, 비로소 사람들의 마음에 스며드는 것이다.

이제 황교익 선생의 이야기로 돌아오겠다. 백종원의 대극점에 위치한 그가 정말로 대중을 경멸하는가? 그는 자신의 미각이 ‘절대’라고 선언한 적이 없다. 그가 선언하는 것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이 ‘먹는다는’ 것에 더 돈을 쓸 수 있는 여건이 되기를 원한다.

대안 요리가 나쁜 게 아니다. 대안 요리를 해 먹어야만 하는 상황이 문제다.
대체 요리가 나쁜 게 아니다. 대체 요리를 해 먹어야만 하는 상황이 문제다.

그에게 음식이란 정치 그 자체이며, 그가 사단법인 ‘끼니’를 세운 것 역시 음식의 정치, 정치로서의 음식을 개선하기 위한 맥락이다. 그는 더 많은 복지를 주장한다. 대통령과 권력자를 비판한다. 더 좋은 정치로 더 좋은 식문화를 세우고 싶어한다. 그리고 더 좋은 식문화를 세워 더 좋은 사회를 만들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는 그 과정에서 ‘너의 입과 내 입은 같을 수 없다’고 선언한다. 동시에 지금의 식문화, 그것을 상징하는 백종원(과 같은 훌륭한 사람과 이영돈 등의 사이비까지), 그에 열광하는 대중을 비판한다. 꾸준히 그 음식이 어떤 맥락을 갖는지, 무엇이 옳은지를 논한다.

‘맛 칼럼니스트’인 그는 막상 자신의 입맛이 차지하는 평가 기준은 20~30%에 불과하다고 말하지 않나. 나머지 60~70%는 그가 믿는 신념이고, 입맛이 아닌 역사와 맥락이다. 바로 그것들이 꾸준히 사람들이 배신당해온 것들이다. 황교익에 의해 사람들은 자기가 ‘사기당했다’는 사실과 마주해야 한다. 그리고 이미 알고는 있었던, 지금 우리가 뭔가를 어떻게 먹는 모습이 ‘그리 좋지 않다’는 사실을 계속 재확인해야 한다. 불편한 과정이 될 수밖에 없다.

 

4. 공감과 지향

황교익과 백종원이 무언가를 내놓았다는 사실에 반응하게 되는 ‘평범한 사람들’의 지갑은 대체로 얇아졌다. 시간 역시 더욱 사라져 간다. 백종원의 ‘연금술’은 우리가 값비싼 대가와 시간을 퍼부어 먹던 것들을 더욱 싸게, 효율적으로 카피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대가로 ‘건강함’에 대한 고민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역시 보여준다. 그리고 그냥 식당에서 더 맛있는, 더 여유 있는 추억을 쌓는다는 선택을 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진다는 사실은 숨겨져 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없기에 나온 결과다.

우리가 백종원에 열광하는 것은 가장 맛있고 가장 건강한 음식을 만들어서가 당연히 아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그의 충청도 말투가 수더분해서, 그가 마리텔을 잘 끌고 가서도 아니다. 우리의 일상을 언행과 음식으로 보듬어 준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우리가 처한 어떤 상황, 낮을 수도 있는 눈높이를 그가 부정하거나 비판하지 않기 때문이다.

황교익의 말에 불쾌한 기분이 드는 것 역시 단순히 황교익이 엘리티즘 내지는 ‘절대적 미식의 기준’을 들고 대중을 비판하는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어찌 됐건, 백종원의 레시피가 ‘최선’일 수는 없기에 비로소 생기는 문제들이다. ‘타협’의 불안정성에 관한 문제 말이다.

백종원 대표의 레시피는 저성장과 불안함, 각박함이 일상화된 사람들의 삶을 긍정한다. 그의 ‘진정성’이 그것을 보증한다. 그래서 1인 가정과 ‘DIY’를 강요받는 더 많은 사람들이 백종원을 통해 더 합리적인 대안을 찾고, 더 행복해지는 것이 맞다고 여긴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 또 다른 황교익 선생, 황교익 선생의 또 다른 주장이 나와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이 현실이 불합리하며 이롭지 않다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고작 역사가 100년에 불과하며 쓴맛이 나서 오히려 왜염이라 천대받았던 천일염을 최고의 소금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처럼 말이다. 황교익의 주장이 맞고 그르고는 그다음 문제다.

 

결론 : 착한 기업가와 평론가의 지조

백종원의 만능 간장으로 밑반찬을 간단하게 해결하고 더 여유를 찾았다면, 그다음 과제는 ‘악식가’ 황교익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의미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 둘은 우리 삶에서 충분히 공존할 수 있다. 먹고 사는 것에 대한 정치에서 백종원은 새로운 베이스캠프고, 황교익은 대안을 모색하고 새로운 생각을 제시하는 사람이다.

먹는 데 쓸 돈이 없어 미각이 퇴화했다.

복지를 늘려서 제대로 된 식문화를 자리 잡게 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져야 한다.

고 주장하는 게 황교익이다. 백종원은 대신 돈이 없는 사람을 위한 요리를 만들고, 복지가 늘어나지 않아도 버티기 위한 요리를 알려준다. 착한 기업가와 강건한 평론가는 서로 다른 부분에서 사람들의 행복에 기여할 것이다.

황교익의 ‘음식 정치’는 역설적으로, 사람들이 백종원의 레시피로 요리와 음식에 대해 좀 더 단순하게, 좀 더 생활 밀착적으로 여기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진전될지도 모를 일이다. 음식의 정치를 하기 위한 동력 중 하나가 백종원의 레시피고, 황교익의 ‘맛칼진’ 말은 그런 음식의 정치에 걸려있는 여러 지향 중 하나다.

그래서 오늘 저녁으로는 어머니가 만들어 놓으신 백종원 대표의 ‘만능간장’ 두부조림을 먹을 생각이다. 그리고 페이스북에 뜨는 황교익 씨의 포스팅을 읽을 것이다. 먹는 즐거움과 아는 즐거움 중 하나를 포기하는 건 너무 아깝지 않나.

미각에 절대는 없고 숨겨져 있는 부분이 많기에 오히려 수준에 대한 논의는 풍요로울 수 있다. 홍콩반점이 있어서 궁지에 몰린 약속 장소에서도 번민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다. 음식의 정치란 그렇게 다양한 화두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퍽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까. 어쨌든, 착한 기업가와 지조있는 평론가가 모두 먹는 문제를 신경쓰고 있으니까.

원문 : 잉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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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H. Park – 노무현이 누구니 https://ppss.kr/archives/49029 https://ppss.kr/archives/49029#respond Tue, 16 Jun 2015 09:44:44 +0000 http://3.36.87.144/?p=49029

* 전지적 GH Park 시점, BGM 재생 필

GH Park)

지금이 몇 세기니? 21세기요. 지지율은? 33요. (아오!)

제 17대 대통령은 눈이 좀 달라
특별법이 어때도 경제를 망치면 난 눈이 안 가
메르스 한 방에 방역이 망해서 무정부 상태라도
서울 시장이 먼저 날뛰면 난 맘이 안 가

선거는 이겼는데 친노에 종북있어 정치 하기가 너무 힘들어 oh Yeah
Shake that country that economy (X2)

명령만 하고 싶은데 대국민 담화 시키면 미치겠어 oh Yeah
Shake that country that economy (X2)

나라 어쩌면 좋니 나라 어쩌면
나라 어쩌면 나라 어쩌면 좋니
왜 이렇게 답이 없니
미국이나 가려는데 그분이 오지 말라잖니

노무현이 누구니
도대체 어떻게 빨갱이 천국을 만들었니
Shake that country that economy (X2)

세월호 유가족 이겼다고 정치 끝 아냐
연금개혁 이겼다고 끝난 것 아냐 난
하나가 더 있어

가만 있을 땐 알 수가 없어
재보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어 난
난 그때서야 선거의 신!

언론은 잡았는데 야당이 있어 지지율 관리 너무 힘들어 oh Yeah
Shake that country that economy (X2)

대통령만 즐기고 싶은데 사고 수습 시키면 미치겠어 oh Yeah
Shake that country that economy (X2)

나라 어쩌면 좋니 나라 어쩌면
나라 어쩌면 나라 어쩌면 좋니
왜 이렇게 답이 없니
총리나 다시 뽑을려니 모두가 하기 싫다잖니

노무현이 누구니
도대체 어떻게 나라를 이 꼴로 넘겼니
Shake that country that economy (X2)

Huh! Break Down! (빰-빰-빰-빰 빠라 빠밤 빠바바밤 빰)

재보선은 끝났는데 유가족 있어 이미지 관리는 너무 힘들어 oh Yeah
Shake that country that economy (X2)

당 대표는 때려잡고 싶은데 지지율 때문에 미치겠어 oh Yeah
Shake that country that economy (X2)

황교안)

Ya, 청문회 자료제출 Got it from nowhere
공안검사 전관예우 법조계 좁잖아
부산여자 드세지 맞을 짓을 하지
이젠 모두 알아봐 Hey, JUST 총리

사면 개입 장남 병역 물어봐 물어봐
증거는 없으니 물어봐 물어봐

Thin Brain, Big Church
텅텅 빈 청문회
파란 색깔 야당까지 whoa
충청도 총리? nah 저리 비켜봐

너희들 혈압이 전부 올라 uh
허스키한 목소리
키보드 손 떼라 Hey 기자

GHP)

나라 어쩌면 좋니 나라 어쩌면
나라 어쩌면 나라 어쩌면 좋니
왜 이렇게 답이 없니
uh 남미 가서 놀다 오니 독감 갖고 이 난리니

노무현이 누구니
도대체 어떻게 나라를 이렇게 만들었니
Shake that country that economy (X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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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초 삽질 병기 열전 (2) 잠수항모 https://ppss.kr/archives/18799 https://ppss.kr/archives/18799#respond Fri, 12 Jun 2015 06:00:24 +0000 http://3.36.87.144/?p=18799 잠수함에서 항공기를 띄우는 것 자체는 1920~1940년대에도 그다지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

이 시기는 이제 막 레이더에 관한 기초 개념이 완성되어가던 시점이었다. 아직까지 레이더를 사용한 화력통제는 미성숙한 단계였다. 때문에 감시수단을 어떤 식으로든 확보하는 것은 중요했고, 규모가 좀 되는 함선에서 간단한 관측용 정찰기를 한두대 운용하는 것은 일종의 유행이었다. 영국과 프랑스에도 그런 결과물이 있었다.

영국 해군의 HMS M2 잠수항모
영국 해군의 HMS M2 잠수항모

영국 해군이 원래 만들려던 것은 전함급의 주포를 가진(당시 분위기는 거함거포주의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잠수전함(…)이었다. 그 결과물이 M급 잠수함인데, 만들고 보니 쓰레기였다. 그래서 2번함에서는 아예 포를 치우고 수상기를 얹어보려고 시도한다. 그래서 나온 것이 이 HMS M2다.

그러나 이 함선은 무슨 이유인지 명확하게 밝혀지진 않았지만 침수되어 침몰했고, 이 사고 이후 영국 해군은 잠수항모라는 개념을 때려치운다.

프랑스 역시 비슷한 시도를 해봤다:

프랑스 해군의 쉬르쿠프급 잠수순양함(Underwater Cruiser)
프랑스 해군의 쉬르쿠프급 잠수순양함(Underwater Cruiser)

쉬르쿠프급 잠수순양함은 말 그대로 잠수하는 순양함이다. 덩치 큰, 주포가 달린 잠수함. 지금이야 잠수함이 어뢰나 미사일만 쓰지만, 과거엔 희한한 걸 많이 달고 다녔다. 즉 여차하면 잠수해서 숨고, 부상해서 뻥 쏴서 상대방 구축함을 때려잡을 수도 있고.. 뭐 그런 생각으로 만든 것이다.

문제는 이 함선 자체가 아니라, 여기에 탑재된 베송 MB.411 표적획득용 수상관측기였다:

Besson MB.411 쌍발 수상기. 속도래봤자 200km도 안되는 간단한 구조의 초계용 관측기였다. 
Besson MB.411 쌍발 수상기. 속도래봤자 200km도 안되는 간단한 구조의 초계용 관측기였다.

쉬르쿠프급은 센토쿠급이 나오기 전까지 유일하게 잠수가 되면서 뭔가 항공기를 날릴 수 있는, 실전 운용 잠수함이었다. 그러나 동방의 어느 나라에서는 이것을 뛰어넘는 뭔가를 만들게 된다. 그것이 I-400 센토쿠급 잠수항모다.

태평양 전쟁 개전 이전,구 일본군은 ‘절대로’ 미국과의 전면전을 꿈꾸지 않았으며, 진주만 공습의 기본 목표는 미 해군 전력의 코어에 커다란 타격을 주어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를 맺고 일본의 물주인 미국이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건설에 협력까진 아니더라도 최소한 방해하지 않도록(이미 미국은 일본으로 들어가는 전략물자 중 상당수의 수출국이면서 동시에 그 시점에 그것들에 대한 금수조치를 내렸다)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다. 일본을 부숴버릴 생각으로 충만한 정부와 의회, 군대 불합격 떴다고 실의에 빠져 자살하기까지 하는 미국 국민, 1개의 공업단지만으로 제3제국 철강 생산량을 넘어서는 미국의 거대기업이 삼위일체를 이뤄 미친듯이 전쟁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자신이 원했던 상황이 이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1차대전으로 이미 초강대국의 지위에 오른 미국이었고, 일본 전체가 미국의 힘을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알 사람은 알고 있었다. 미국이 이 전쟁에 끼어들면 소련만큼이나 압도적인 존재가 될 것임을.

그러나 이걸 원했으면 일본은 전쟁을 안 했어야 했고 최소한 진주만 공습과 같은 방식으로는 전쟁을 해선 안 되었으나 현실은 일본군의 비열한 기습(이라고밖엔 표현할 길이 없는 행위였다)에 온 미국이 들끓어올랐다. 일본군이 원하는 건 미국이 끼어들지 않는 것밖에 없었으나 미국은 오히려 일본을 때려잡으려 온 국민이 벼르게 된다.

일본 군부는 어떤 식으로든 미국의 본토에 타격을 주어, 그 충격과 피해 누적으로 미국 정부와 여론에 전쟁 혐오심리를 일으킴으로서 미국과의 전면전을 피하고 싶었다. (사실 이것은 일본의 생각일 뿐이다 – 일본이 정말로 I-400 등을 이용해 본토를 타격했으면 일본은 반쯤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멸망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런데 본토를 타격할 수단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일본 군부는 머리를 굴리기 시작한다. 실질적으로 미국 근해에 접근할 방법은 잠수함 뿐인데, 당시에 잠대지 순항미사일 같은 건 없었기 때문이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잠수함에 베송 MB.411 같은 찌질한 물건이 아니라 진짜 공격기를 탑재시킨다. 그리고 그 공격기를 발진시켜 본토를 타격한다는 것이다.

그간의 미국의 반응과 분위기를 생각하면 근본적으로는 파멸적인 계획에 가까웠던 아이디어를 입안한 것이 바로 그나마 일본 해군에서 상식파에 해당했으며, 후에 미군의 공격으로 사망하는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
이 양반도 현실파악이 안되기로는 다른 해군 장성들과 별 차이 없었던 것이다

여튼 이 양반은 잠수항모 계획을 입안했다. 그 계획의 결과물이 I-400 센토쿠급 잠수항모로서, 만재배수량 5,600 톤의 2차대전 최대의 잠수함이면서 동시에 유일무이한 공격기를 탑재한 잠수항모로 총 2척이 운용되고 3척이 건조되기에 이른다.

그래서 여차저차해서 이 센토쿠급을 만들어보기 시작하는데, 너무나 당연하게 기술적 문제들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1.

잠수함에서 함재기를 발진시킨다고 생각해 보자. 격납고를 잠수함 바닥에서 발진시킬 수는 없고, 잠수함에 공간이 어딨다고 잠수함 안에다 격납고를 만들고 거기서 엘리베이터로 그걸 끌어올리나? 즉 격납고는 잠수함 동체 위에 있고 거기서 발진을 시켜야 한다. 그런데 격납고를 상부에 달면 무게중심이 위쪽에 집중되면서 잠수함이 떠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설계자들은 내압선체를 = 모양으로 2개를 배치하고, 이 = 사이에 격납고를 다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그래서 센토쿠급은 2개의 내압선체를 가진다. 이해하기 어렵다면 이런 것을 상상해 보시라. 통나무 2개를 끈으로 엮고, 여기에 비닐봉지를 씌워서 꽉 묶고 위에다가 장난감을 올리는 것이다. 어쨌든 이런 발악에 가까운 노력으로 잠수함이 가라앉지는 않게 되었다.

센토쿠급의 조감도
센토쿠급의 조감도

 

2.

어떻게 떠서 뭔가를 날릴 수는 있다는 결론을 얻긴 했는데, 그래서 뭘 날릴 것인가? 대체로 거의 모든 국가의 잠수함은 생긴 것이 별 차이가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돌고래나 원통형으로 만드는 게 아니면 물에 의해 엄청난 항력을 받을 게 뻔하잖아.. 즉 함재기를 싣기가 너무 힘들다. 센토쿠급은 그것도 2차대전 잠수함 중 가장 크기가 컸는데도. 간신히 잠수함 위에 격납고와 활주로를 어떻게 마련하긴 했는데, 거기에 들어갈 비행기가 없었다. 이쯤되면 포기할 법도 한데, 일본 해군은 누가 미치지 않았다고 할까봐 여기에 맞는 비행기를 또 만든다! 그것이 M6A 세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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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잠수항모’에 들어갈 ‘전용 공격기’를 또 이렇게 만든 것이다.. M6A 세이란은 최대 800kg의 폭탄을 장착하고, 자이로컴퍼스같은 물건도 달린 고급기종이다. 물론 양산은 거의 되지 않았다.

세이란은 꼬리날개도 접을 수 있었고, 주날개는 횡으로 돌린 뒤 사진처럼 접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격납고에 보관하다가 발진시킬 때는 날개를 펴서 날리면 되는 구조다. 이륙 자체는 충분히 가능했다. 캐터펄트로 쏘면 대충 이륙은 가능하다. 그러나 문제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세이란은 저런 식으로 캐터펄트로 날리고, 착륙은 수상 플로트로 일단 수면에 착륙시킨 다음 센토쿠급의 크레인으로 싣게 되어 있었는데, 이게 꽤 어려운 건 둘째치더라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라는 건 뻔했다.

그리고 이거 분명 ‘잠수항모’라고 하지 않았나? 이착륙이 이렇게 골치아프면 이 와중에 전투기에 걸리면 어쩌냐는 의문에 대한 해군 수뇌부의 해답은 ‘더 열심히 훈련한다’ 였다. 센토쿠급의 승조원과 조종사들은 정말 미친듯이 훈련을 받아야 했다. 1초라도 이착륙 시간을 줄여보려는 발악적인 시도. 그래서 조종사와 승조원에 대한 대우는 상대적으로 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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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적인 문제도 좀 있었는데, 항공기가 엔진 넣으면 바로 붕 뜨는 것이 아니었다. 예열 시간이 필요한데, 항공모함이야 갑판 위에서 예열하다 날면 되지만 이건 아닌데? 더군다나 잠수함은 밀폐구조다. 일산화탄소 가스같은 것이 함내로 그대로 들어온다. 그래서 또 머리를 짜낸다. 아예 기름을 달궈놓고, 세이란에 이 달군 기름을 바로 집어넣어서 별도의 예열 없이 엔진을 따뜻하게 만들어주기로 한 것. 이렇게 하면 분명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이 되었다.

한 가지 기괴한 점이 있다면 분명히 잠수항모인데, 14cm 함포에 어뢰 발사관 8문을 달고 있었다는 점이다. 14cm 함포는 비슷한 규모의 경순양함에나 달리는 함포인데, 이거 분명히 ‘항모’라고 하지 않았나? 즉 공간부족에 그렇게 시달리면서도 이런 걸 또 달았다. 물론 변명의 여지는 어느 정도 있었다. 숫자도 적었을 뿐더러, 수상함과 함께 미 본토를 타격할 수는 없었으니까.

아무튼 이런 삽질의 끝에 어찌 됐든 센토쿠급이 나오긴 했다. 근데 이렇게 나온 센토쿠급이 뭔가 활약을 했냐고? 전혀 아니다.

분명 크기가 매우 컸기에(이거 만재 5600톤의 대형 잠수함이다) 항속거리는 이론적으로는 6만 km에 달했다. 그러니까 ‘이론상’ 태평양을 건너, 남아메리카를 돌아서 워싱턴 DC 앞바다에서 세이란을 내보내 백악관에 폭탄을 꽂을 수는 있었다. 실제로 그 정도의 항속거리가 가능은 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무리에 가까웠지만, 어디 가치있는 곳이 워싱턴뿐인가? 중요한 건 미 본토를 타격하는 것이고(명심해야 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본군의 관점이다 – 실제로 일본군이 I-400으로 백악관에 폭탄을 날렸으면 지금 일본이란 나라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확률이 높다), 꼭 남아메리카를 돌아갈 필요도 없었다. 오히려 진짜 문제는 펀치력이었다.

세이란이라고 해봤자 센토쿠급에 고작 3기가 적재될 수 있었다. 원래는 20기 정도의 센토쿠급을 양산해 잠수함대(현실판 침묵의 함대다)를 만들어서 어떻게 해보려는 생각이 있었는데, 기술적 문제가 너무나 많으니 개발은 늦어지고, 결국 양산은 고작 3척이었다. 개발이 늦어지는 와중에 일본 해군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성대하게 항모 4척(아카기/카가/소류/히류)을 잃어버리는 등 막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미드웨이 해전의 참패로 잃어버린 해군력과 항공력은 일본에겐 다시는 복구 불가능했다.

물론 장갑항모 다이호와 같은 물건이 나오기야 했지만, 그건 이미 때가 너무 늦었을 뿐더러 전황이 악화됨에 따라 근본이 없는 기괴한 항모였고, 그에 비해 미국은 요크타운급의 뒤를 이을 에식스급 항공모함, 마지막 전함이면서 동시에 공수주 모두 이전의 전함을 뛰어넘은 최고의 전함 아이오와급의 양산에 들어갔으며 이미 미국의 생산능력은 일본군에겐 절망적인 수준이었다.

결국 센토쿠급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3척 중 1척은 미완성이었고, 이 완성된 2척에 6기의 세이란을 끌고 미 본토로 간다고 치자. 그래서? 이걸로 뭘 할 건가? 두리틀 특공대 흉내내는 것도 아니고. 즉 펀치력 자체가 역부족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 일부 일본군 장성들은 누가 일본군 아니랄까봐 무릎을 탁 칠만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세이란의 폭탄에 세균병기를 얹어 날리는 것이다! 세균 병기를 사용하면 분명 재래식 병기보다야 많은 미국인을 죽일 수는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 장성들이 전부 미친 건 아니었고, 이 방법이 부도덕적인 걸 떠나서 그 뒷수습이 불가능했다. 어디까지나 센토쿠급의 기본 목표는 미국에게 어느 정도 회피불가능한 타격을 주어 미국의 전쟁 의지를 감소시켜서 강화를 유도하는 것이지, 미국에게 세균 병기를 선사하고 미국의 세균 병기를 자국이 얻어맞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독일군 역시 화생병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인도적인 이유가 아니라 상대방도 그걸 끌고 나오면 대책이 없었으니까. 더군다나 보급사정이 열악하고 본토방공이 철저하지 않았던 일본이다. 화생병기로 양국이 작정하고 싸움을 시작하면 피해는 일방적으로 일본에 집중될 것이 뻔했다. 미국의 화생병기 생산능력과 투하능력은 일본과 도저히 비교할 수가 없었고, 미국은 시시각각 일본 본토에 대한 포위망을 좁혀들어왔다. 이미 1942년 두리틀 특공대는 도쿄 본토에 공격을 가했고, 그것의 재연이 다가오고 있는 판에 미국 본토에 세균병기를 투하하는 것은 아무리 미쳐 있던 일본 군부라고 하더라도 불가능한 행위였다.

그래서 워싱턴을 공격한다느니 하는 정신나간 생각은 집어치우고, 대신 파나마 운하를 공격할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이것도 현시창이었다. 파나마 운하는 중요한 시설이고, 중요한 시설의 방어가 허술할 리가 없다. 세이란 6기로는 일본이 핵폭탄이라도 만든게 아닌 이상 파나마 운하엔 흠집도 낼 수 없다. 결국 아예 수상용 플로트(세이란의 밑바닥) 떼버리고 카미카제로 들이박을까? 하고 되지도 않는 망상을 하던 일본 군부였고, 원폭 2발에 전쟁이 끝나게 된다.

센토쿠급 잠수항모 자체는 꽤나 현시창인 물건이지만, 그런 전술적 개념 자체는 현대의 핵잠수함과 통하는 부분이 많다. 단지 당시엔 미사일이 없었고, 기술이 열악했기에 그나마 먼 거리를 날아갈 수 있었던 함재기와 잠수함이 결합되었을 뿐이다. 지금의 핵잠수함은 함재기 대신 SLBM(잠수함 발사 핵미사일), 또는 VLS(수직 미사일 발사 격납고)를 통해 크루즈 미사일을 쏘아 센토쿠급으로 생각하던 목표를 훨씬 쉽게 달성할 수 있다. 조금 다르지만 미 해군의 최신예 스텔스함인 줌왈트급 구축함의 경우 잠수는 안하지만 스텔스성으로 상대의 접근거부(A2/AD) 지역에 최대한 깊숙히 들어가 함재기 대신 사거리가 150km도 넘고 오차가 50m 안쪽에 달하는 AGS 함포와 강력한 미사일 운용능력으로 적국의 연안에 침투해 화력을 투사할 수 있다.

조금 더 유사하게로는 코모란트와 같은 VLS로 발사되는 UAV를 잠수함에서 운용하려는 계획도 있었다.

록히드 마틴의 코모란트 UAV. 잠수함의 VLS로부터 발사된다
록히드 마틴의 코모란트 UAV. 잠수함의 VLS로부터 발사된다

일본군의 유인 미사일 오카, 유인어뢰 가이텐, 폭탄보트 신요와 같은 특공병기는 전술적인 무용성을 떠나 인명경시로 인한 역겨움을 보여주는 사례라면, 센토쿠급은 일본군의 주된 특징이었던 ‘현실은 시궁창’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즉 센토쿠급은 꽤 혁신적인 ‘개념’이기는 했다. 단지 개념을 실현시킬 능력이 없었다는 점, 동시에 이런 개념이 혁신적인지와 별개로 이 개념을 구현한다고 그것이 전략적으로 유리해져서 원하는 결과를 끌어내는 데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진짜 문제였다.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면, 일본이 핵이라도 먼저 만들지 않는 이상은 미국에게 무슨 짓을 어떻게 하더라도 승산이 전무했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런 식의 민간인이 죽기 딱 좋은 공격방식은 미국의 분노를 더욱 증폭시켰을 것이다. 일본을 위해서도 센토쿠급이 미국 본토르 공격하지 않은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원문 : 잉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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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어는 왜 더 똑똑해보이는가 https://ppss.kr/archives/37717 https://ppss.kr/archives/37717#respond Mon, 20 Apr 2015 04:54:57 +0000 http://3.36.87.144/?p=37717 SNS를 하다 보면 나보다 연배가 높은 30대를 필두로 한 분들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자주 접한다. 한두 번 접한 것도 아니고 일종의 컨센서스가 있는 듯한 말이다.

현재의 10대와 20대의 지적 역량과 경험은 역대 최고 수준이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뒤따라

1) 야성과 열정 2) 모티베이션 3) 통찰의 부재 라는 평이 나온다.

개인적으로 이 주장에 대해서 회의적이다.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입장이다. 다만 이런 종류의 평가가 왜 이렇게 잦은가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다.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엿보인다.

중요한 순서대로 언급하면 1) 사회의 변화 2) SNS의 교류방식의 특성 3) 교육의 변화가 있다.

 

1. 사회의 변화 – 취향존중, 최적화, 양극화

취향의 존중

앞서 언급한 화두에 대해서 주변의 또래들은 “개인들의 ‘성능’은 분명히 경미하게나마 높아졌다. 그러나 공론이라는 차원에서는 후퇴하지 않았는가?” 라는 답변을 했다. 이 평가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동의하는 입장이다. 그 평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서 언급한 취향존중, 최적화, 양극화라는 세 개의 화두에서 시작해야 한다.

경제가 성장하고 사회적으로 다양성과 개성이 존중받게 되면서, 과거 세대에 비해서 청년들은 훨씬 더 개별적이고 다양한 호불호를 갖게 되었다. 뭔가에 홀리거나 미치는 것은 과거에 비해서 훨씬 사람들에게 권장된다. 그런 시대의 청년들은 과거 세대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호불호가 더 확고하며, 더 취미에 깊게 파고든다. 그 과정에서 관심이 있는 분야에 대한 지식은 늘어나고 표현 수준은 높아진다. 당연히 제한적인 범주에서 ‘똑똑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현재의 청년들에게는 상대적으로 ‘평균압’이 낮다. 각자의 취향과 개성은 존중의 대상이다. 인디 밴드를 아는 것은 이제 ‘힙’하지도 않다. 마블 코믹스 매니아는 10년 전만 하더라도 미친 사람에 가까웠을 것이다. 요즘 누가 그렇게 여기는가? 그러나 이 흐름에서 청년은 ‘원하지 않으나 알아야 하는’, 혹은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 것들이 더 적어진다.

 

최적화

다른 각도에서 청년의 성장을 보자. 청년이 독립된 인간으로 서기 위한 ‘취업’이라는 관문 말이다. 기업은 무엇을 요구하는가? 대학은 어떤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는가? 특성화와 전문화다. A를 하고 싶으면 이전부터 깊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많은 지식을 쌓고 활동을 한다. 최근의 입학사정관제 역시 비슷한 것을 요구하고 있다.

요즘의 초등학교
요즘의 초등학교

구태여 지식 차원의 이야기만도 아니다. 대학에 가봤자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빨리 깨닫는 빈곤 청년들은 어떤가.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세상을 빨리 깨닫는다. 단지 학식이 아니라 현실을 지배하는 법칙을 빨리 깨달을 뿐이다. “배운 게 없으면 무시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과 같은 법칙 말이다.

비록 스티브 잡스로 인해 인문학과 통섭이 주목받고 있다지만 기본은 변한 것이 없다. 과거 세대에 비해 청년으로 갈수록 생존을 위해 전문성을 갖춰야 하는 시기는 더 빨라지고 수준은 더 높아져야 한다. 20년 전과 지금 금융권에 들어가는 신입사원들을 비교해 보면 극명히 드러난다. 후자 쪽이 실제로 똑똑한지와 별개로 ‘금융에 대한 관심도와 지식’은 압도적으로 높다.

누구에게나 시간과 돈은 제한적이다. 즉 필요한 것에 집중해야 한다. 교양과 잡학에 대한 투자는 줄고 필요한 부분에 대한 최적화(Optimize)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청년은 과거 세대에 비해서 ‘어떤 분야에서’ 더 높은 성취를 보인다. 청년은 적응한다. 그런 것이 권장되고 있으며 필요하기 때문에. 최적화가 이루어지면 이루어질수록 반대로 어떤 부분에 대한 경험과 지식은 줄어든다. 대표적으로 줄어드는 것이 타인에 대한 관점이다.

어떤 청년이 관련 분야를 좋아하고 열심히 공부를 해서 현 시대의 다양한 IT 기반 플랫폼이 일으키는 세상의 변화를 세련되게 풀어낸다고 치자. 그 사람은 SNS에 밝고 모바일 및 IoT(사물인터넷:Internet of Things)와 같은 트렌드에 민감하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의심을 해 볼 수 있다. 이 청년은 과연 ‘스마트폰이 없는 사람들’에 민감할까? 그들의 경제적 상황에 민감할까?

아마도 아니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이 청년의 관심사는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이 IT와 SNS와 모바일의 수혜를 받을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걸 떠나서 그 청년이 그 분야에 대해서 많이 알려면 당연히 많은 시간을 투자해 관련 정보를 살폈을 것이 아닌가. 취향존중과 맞물려 생각해 보면 어떤 문제인지 감이 잡힐 것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관심이 없거나 필요하지 않은 분야에 대한 이해도는 낮아진다.

 

양극화

양극화 역시 주목할 만한 변화다. 청년 세대는 명백히 양극화되어 있다. 단순히 경제적인 차원이 아니다. 생활양식 자체가 그러한 것이다. 막대한 자본을 통해 어떤 청년은 손쉽게 어떤 분야의 지식과 표현력을 쌓아올린다. 하다못해 테크에 대한 시각은 테크에 관련된 아이템을 써봐야 알 수 있다. 그에 비해 어떤 청년은 트렌드의 변화를 따라가는 것도 벅차다.

모바일과 인터넷은 시공간을 뛰어넘는 도구이지만 동시에 그로 인한 정보격차를 일으킨다. 스마트폰이 없거나 지나치게 구형인 청년이 어떻게 모바일과 관련된 트렌드에 빠르게 편승하고 거기에 대한 지식과 사고를 쌓을 수 있는가? 모바일을 통해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이런 사람들은 심지어 SNS에서 배제된다.

양극화
SNS의 세계에도 빈익빈 부익부의 문제가 있다.

취향에 대한 이해와 감상 수준이 높아지고 지식의 포인트를 좁혀 전문성을 기르기 위해서는 모두 시간과 자본이 들어간다. 그런데 그것을 가진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들이 있다. 그 격차는 계속 확대된다. 개별 분야에서 ‘똑똑한 장면을 연출하는’ 20대는 그럴 여건이 된 20대뿐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아예 눈에 띄지 않는다. 보이는 20대는 더욱 진보한다. 보이지 않는 20대는 그렇지 않다.

 

2. SNS의 교류방식

“10대와 20대가 똑똑한 것 같다”는 화두는 현실보다는 SNS, 특히 업계이나 사회에 관심이 많은 사람의 SNS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여러 원인이 있으나 핵심은 정해져 있다. 어떤 사람이건 그 주변에는 비슷한 사람들이 모이지 다른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SNS에서는 특히 그렇다.

시니어가 SNS에서 주니어를 접하는 상황을 보자. 이 사람이 직장 후배나 친인척, 제자가 아니라면 십중팔구 관계를 맺는 주니어는 정해져 있다. 어떤 식으로든 시니어가 관심이 있는 주제나 분야에 대해서 시니어를 ‘놀래킬 수 있는’ 사람이다.

특히 인텔리적인 분야에서 그렇다. 사회, 정치, 경제, 첨단 기술 등의 분야에서 ‘똑똑한 20대’가 자주 등장한다. 심지어 그 양식 역시 어느 정도 정형화되어 있다. ‘똑똑한 20대’의 글을 보고 시니어 쪽에서 관계를 맺으려 드는 것이다. 긴 글은 아무나 쉽게 쓸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결과적으로 SNS에서 눈에 띄는 주니어는 거의 항상 ‘평범하지 않다’. 엣지가 있는 사람이다. 적어도 같은 시점의 과거 세대보다는.

이런 분과에서 시니어를 놀래키는 청년들은 경제 성장의 수혜를 잘 받았다. 정보화 수준 역시 높다. 실제로 개별 분야에 대해서 깊게 파고들 여건과 분위기가 있었다. 이런 청년들이 만든 컨텐츠는 전파와 공유가 빠른 SNS에 의해 쉽게 퍼져나간다. 시니어는 놀란다. “아니, 얘는 이 나이에 이런 생각을?”

청년의 ‘똑똑한 장면’은 강한 인상을 남긴다. 똑똑한 장면을 본 것이 아니라 청년이 똑똑하다고 이해되기에 충분한 상황이다. ‘똑똑한 시니어’가 ‘주니어들의 똑똑한 장면’을 계속 접한다. 그 결과로 주니어가 속한 세대에 대해서 ‘똑똑한 세대’라는 인식을 갖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만큼, 그만큼 다양한 시각들도 존재한다. 똑똑함 역시 다각적인 의미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만큼, 그만큼 다양한 시각들도 존재한다. 똑똑함 역시 다각적인 의미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이것이 왜 허상인지는 같은 글에 대한 사람들의 다양한 피드백을 보면 알 수 있다. 분명히 같은 글인데 어떤 사람에겐 쉬운 문체로 룸펜(실업자라는 뜻이지만, 냉소, 허무주의자로 해석할 수도 있다.) 기미 없이 잘 쓴 글이라는 평가를 받지만 어떤 사람에겐 너무 어렵고 현학적으로 쓰였다는 평가를 받는 상황이 대표적이다. 전자의 사람에게 그 글을 쓴 사람은 그냥 똑똑한 사람이다. 그에 비해 후자의 사람에게 그 글을 쓴 사람은 똑똑한 것이 아니라 현학적인 헛똑똑이에 더 가깝다. 끼리끼리 모여서 살피다 보니 평균(Average)이 사라지고 편향적인 인식이 강화된다.

 

3. 교육의 변화

사실 청년이 ‘똑똑하다’는 말이 나오는 상황은 두 가지다. 하나는 지금까지 언급한 상황과 같이 시니어가 주니어의 어떤 ‘생각’을 보고 그렇게 믿는 경우다. 다른 하나가 있는데, 학력으로 입증되는 상황이다.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지표는 바로 문해력이다. 청년들의 문해력은 과거 세대에 비해 훨씬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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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교육의 확대에 따라 주니어들의 교육수준은 전반적으로 향상된 것이 사실이다.

또는 교육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느낌이 있다. 학생들이 과거에 비해서 훨씬 외국어 능력이 좋은 경우가 많다는 식. “요즘 애들 무서워. 어떤 애 보니까 중딩인데 토익이 990이던데?”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물론 이런 느낌은 주의해야 한다. 청소년들의 빈부-교육-정보의 격차는 크다. 토익 만점을 받는 중학생은 그리 특이하지 않게 되었지만 반대로 ‘초등학교 2학년’인데 한글을 완전히 익히지 못한 초등학생 역시 등장하고 있는 세상이니까.

교육의 변화가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보는 이유가 있다. 사회의 변화와 SNS의 소통양식을 언급했던 지금까지의 맥락을 돌이켜 보자. 시니어가 주니어를 보고 똑똑하다는 느낌을 받는 많은 상황은 순수하게 문해력이나 학력에 관련된 것이 아니다. 어떤 분야나 이슈에 대한 ‘생각’과 그걸 표현하는 방식에 받는 느낌이다. 문해력 수준이 올라간 정도로 ‘세대가 똑똑하다’는 인상을 받기는 어렵다. 초등학교 1학년이 영어를 조금 유창하게 한다고 세대가 똑똑하다는 인상을 받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 아이가 금수저라는 의심은 할 수 있겠지만.

그래서 교육의 변화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 애초에 학력이나 문해력의 문제와는 좀 거리가 있기 때문에. 똑똑한 아이들은 눈에 띄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사실 학교에도 잘 나오지 않아 가려져 있다. 평균적인 문해력 수치가 올라가는 것과 개인이 ‘세대가 똑똑하다’는 인식을 받는 건 꽤 차이가 크다.

 

‘헛똑똑이’

‘똑똑해 보이는’ 청년은 다른 가능성 역시 안고 있다. 특정 분야나 취미에 대해서 많은 시간과 돈을 쏟아 높은 수준을 성취하는 데에 성공했다면 분명히 반대급부가 있다. 그 반대급부는 무엇일까? 다양한 가능성이 있다. ‘지방에는 아파트가 없다’고 생각하는 서울의 청년(실화다)같은 것도 있겠고.

청년들이 똑똑해졌다기보다는 ‘예리하게 다듬어졌다’는 생각을 받아들이면 다른 각도에서 왜 ‘똑똑하긴 한데’ 라는 사족이 붙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똑똑한 청년들에 이끌려 가깝게 지내기 시작한 시니어들은 다른 것을 계속 마주하게 된다.

사회적 에티켓, 인성(글은 잘 쓰는데 태도는 좀 아니다), 자신이 관심이 없는 분야에 대한 저열한 수준의 인식. 축구선수로 치면 킥력은 좋은데 정확도가 없거나 스피드는 빠른데 피지컬이 이상한 상황을 계속 목격한다. 시니어들은 과거의 지성들에 비했을 때 지금의 청년들이 가진 훨씬 불안정한 편차들을 맛본다.

그 과정에서 어떤 시니어들은 ‘요즘 세대는 똑똑하긴 한데 뭔가 이상해’ 같은 결론을 얻는다. 앞서 말한 야성과 모티베이션의 부재, 빈약한 상상력, 통찰력 없음과 같은 다양한 수식어가 붙고 드디어 ‘헛똑똑이’가 등장한다. 최적화가 이루어지면서 ‘쌓을 필요가 없었던’ 어떤 지식의 필요성이 나타나고 거기에 대응이 안 되는 순간 똑똑한 청년이라는 생각은 무너지거나 바뀐다.

 

결론

어떤 세대나 집단을 얘기하는 데에 있어서는 크게 세 가지의 개념이 매우 중요하다. 첫번째로 평균. 두번째로 분산(Variance). 세번째로 추세.

분산이 크면 ‘평균적 인간’이 의미가 없어진다. 추세가 다르면 지금 시점의 평균은 의미가 없다. 청년들의 사는 모습은 매우 다양하다(분산이 크다). 청년들의 사는 모습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추세가 급격하다). 결국 ‘평균적 청년’의 모습은 거의 어림잡기가 불가능하며, 어떤 세대를 갖고 통째로 논의하는 것은 거의 무기력하다. 대표성이 떨어지는 상황인데다 남아있는 대표성도 빠르게 떨어지고 있다.

과연 사람들이 똑똑하다고, 혹은 멍청하다고 믿는 청년은 어떤 청년인가? 청년은 거대한 집단이다. 내가 본 청년들은 도덕적으로 특별히 우위에 있지도, 별로 탁월히 똑똑하지도, 별로 놀랍게 유능하지도 않고 그저 그 자리에 필요한 방식으로 자신들을 맞추고 있었을 뿐이었다.

우리 세대를 포함한 청년이 과거 세대에 비해서 지적 기반이 약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실제로 많은 지표들은 과거 세대에 비해서 청년이 평균적 지적 능력에서 우위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청년에 대한 인식과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청년들은 꾸준히 ‘다양해지고’ ‘전문화되었으며’ ‘격차가 커졌다’. SNS는 그런 청년들 중 원하는 사람을 취사선택하기에 편리한 매체다. 애초에 사람은 자신과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에 별로 관심이 없거나 적대적이다.

인간이라는 종의 역사는 길다. 고작 100년 정도에 뭔가가 크게 변했을 리 없다. 결국 인간을 둘러싼 것이 변하면서 인간에 대한 착시를 일으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 주변에서 청년이 똑똑하다 말하셨던 분들의 지적인 능력은 사회 평균보다 훨씬 높았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들은 자신과 유사한 사람들을 주변에 둔다. 정말로 그런 문제일 수 있다.

 

원문 : 잉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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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는 왜 ‘달관 세대’ 프레임을 내세웠는가 https://ppss.kr/archives/37964 https://ppss.kr/archives/37964#respond Wed, 25 Feb 2015 05:31:47 +0000 http://3.36.87.144/?p=37964 455335754_f0be15b5

조선일보는 의제설정 능력은 탁월하다. 물론 그 의제 설정은 철저하게 일반적인 인간에게는 도움이 안 되는 쪽이다. ‘달관 세대’라는 프레이밍을 시작한 조선일보의 기사를 봤다. 조선일보에게는 다음과 같은 질문 세 개를 하고 싶다.

  1. 이 사람들이 이와 같은 삶을 ‘지속할 수 있으며’ ‘권장할 만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고 보는가?
  2. 이 사람들이 ‘세대’라고 부를 만한 특수성을 갖고 있다고 보는가?
  3. 다른 걸 떠나서 이 사람들은 취재를 한 사람들인가, 아니면 기획 과정에 만들어낸 사람들인가?

이 기사에는 ‘달관 세대’의 대표격으로 세 사람이 등장한다. 이씨, 박씨. A씨. 내 기준에서 이씨와 A씨는 있긴 있는 인물이다. 조선일보에 의해 멋대로 평가당했을 뿐이다.

그런데 박씨에 대해서는 조선일보에 진심으로 물어보고 싶다. 이 사람은 진짜 있는 사람인가? 정말로 이 사람이 존재하는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운 대목들이 보인다. 우선 우선 서울 명문대 신방과 졸업 후 금융기관에서 6개월짜리 인턴을 하고 있다는 이씨, 그가 어떻게 조선일보에 의해 멋대로 평가당했는지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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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를 둘러싼 컨텍스트

이씨는 100만원을 벌고 있다. 월세가 25만원이라고 한다. 그는 ‘칼퇴’를 하고 신촌으로 달려갔다.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라고 보는 것이 옳아 보인다.

그런데 이씨는 오로지 월세 25만원만 내고 있다. 서울에 월세 25만원이 가능한 곳은 몇 군데 없다. 대표적으로 몰락 일로인 신림동 고시촌이 있다. 그리고 ‘공과금’이라는 압박을 받지 않을 만한 거주지는 딱 하나다. 고시원. 고시원도 월 25만원이라면 고급은 아니다. 중급 이하일 가능성이 높다.

구태여 이씨가 영화를 완전히 합법적인 방식으로 다운받아 보는지는 언급하지 않겠다. 노트북과 노트북에 연결할 TV 모니터는 어디서 났는지 역시 묻지 않겠다. 햄버거를 즐기는 것이 사회적으로 올바른 식생활이라고 할 만한가 역시 언급하지 않겠다. 그것은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다만 이씨는 조선일보를 상대로 “영원히 이렇게 살 수 있다”, 또는 살 것이라고 말한 적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당연한 이치다. 이씨는 서울 명문대를 졸업했다. 애초에 인턴이라는 것은 왜 하는가? 정규직을 얻기 위한 스펙으로서 하는 것이다. 인턴을 평생직장으로 삼는 사람은 없다.

출처: 대학내일
출처: 대학내일

이씨에게 지금 사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턴이 박봉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씨가 정규직이 되는 순간 이씨는 그 소득수준에 맞춰서 자신의 생활수준을 더 높일 것이다. 심지어 이씨가 ‘채용전제형 인턴’이라서 시간만 지나면 정규직으로 전환된다고 생각해 보자(드문 일도 아니다).

아마 이씨가 제일 먼저 할 일은 월세 25만원의 고시원에서 벗어나는 일이라 생각된다. 예전 월 28만원 고시원 거주자의 경험으로서 말하건대, 월세 25만원의 고시원은 1년 이상 버틸 수 없는 공간이다.

이씨는 박봉에 맞춰서 적당히 살고 있을 뿐이다. 영화관 대신 IPTV와 (아마도 불법적인 소지가 있을) 영화 다운로드, 고성능을 요구하는 게임 대신 노트북으로도 돌아가는 무료 게임을 하는 식으로. 금 대신 황동, 금박, 18K를 다양하게 섞어 끼운 생활이다.

그리고 이씨는 단 한 번도 자기가 ‘계속 이렇게 살겠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냥 “생각보다 싸게 살 수 있더라고요” 정도의 이야기를 했을 뿐이다.

아무리 금과 비슷해 보여도 황동이나 14K, 도금은 금과 다르다. 얼핏 괜찮아 보이는 이씨의 주거 환경과 식생활은 매우 열악한 수준일 가능성이 높다. 이씨의 취미는 비정상적인 저작권 상태에 의지하고 있을 가능성 역시 높다.

이씨가 뭔가 달관한 것이 있다면 있다. 인턴 월급을 내가 올릴 수는 없으니 거기에 달관한 것이다. 아니면 영화 저작권 문제에 달관했든지. 아니면 점차 망가져갈 몸 상태에 달관했을 수도 있겠다.

 

초현실적인 박씨

박씨는 매우 초현실적이다. 서울 K대를 졸업했다. 건국대건 고려대건 절대로 평가가 낮은 대학이 아니다. 그런 박씨는 놀랍게도 취업은 커녕 매일 호프집 야간 알바를 한다. 그래서 월 40~60만원을 번다. 심지어 이걸로 옷값도 쓰고 수영장도 다닌다. 매일 밤 인터넷 라디오 방송을 한다고 한다.

이 사이에 박씨의 주거 문제는 없다. 뻔히 집에 얹혀 살고 있는 것이다. 호프집에서 받은 돈은 생활비가 아니라 용돈임이 분명하다. 지금 이 상황을 표현하는 적절한 단어가 있다.

“백수”. 또는 “갓수”, 더 고전적으로는 “식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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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박씨의 인생관은 놀랍다. 박씨는 대학을 졸업한 자녀에게 부모가 당연히 바랄 법한 어떤 것도 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집에 눌러앉아 전혀 경력과 상관없는 비숙련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그런 박씨는 놀랍게도 “대기업에 입사한 친구들이 부럽지 않다”고 말한다. 심지어 “부모님은 걱정하시지만 정말 알차게 살고 있다”고 말했다. 글쎄, 뭘 했기에 이렇게 주변의 기대앞에 당당한지는 잘 모르겠다. 혹시 팟캐스트로 세상을 바꾸고 있나?

일반적인 대학 졸업생이라면 1) 졸업을 하고서도 집에 눌러앉아 있으며 2) 주변 친구들과 달리 비정상적인 저임금 알바만 하고 있고 3) 그것을 벗어날 노력을 따로 하고 있지 않으며 4) 부모님이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자존감이 없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런데 박씨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 하다. 그 와중에 ‘알차게 살고 있다’고 말할 정도의 강철같은 멘탈리티를 가진 사람은 정말 극히 드물다. 초현실적이다.

 

A씨와 명품

A씨의 대목부터 조선일보는 아예 노골적인 의도를 드러내기 쓰기 시작한다. A씨가 서울대 졸업생, 즉 학력 계층의 엘리트 중 엘리트라는 사실은 일단 접어두자. A씨가 어떤 종류의 계약직으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역시 묘사되어 있지 않으니 별개로 한다. 그런데 A씨가 십자수를 즐기고 중저가 브랜드 쇼핑을 한다는 것부터는 이야기가 이상하게 돌아간다.

생각해 보자. 십자수가 취미라는 것이 어떤 부분에서 특이한가. 특히 ‘청년’이 십자수가 취미면 안될 이유가 하나라도 있는가? ‘중저가 브랜드 쇼핑’이 무엇이 어쨌다는 것인가? 아니면 A씨가 돈이 있는데도 명품을 사지 않는 이유가 있는가? 아무런 이유도 없다. 그냥 돈이 없으니까 명품을 사지 않는다. 주변도 돈이 없어서 명품으로 부러움을 느낄 일이 별로 없을 뿐이다.

A씨는 대체 무슨 종류의 ‘세대’를 상징하는가? 돈이 없고 학창 시절에 한번쯤 해보게 되는 것이 십자수이니 십자수를 하는 것뿐이다. 돈이 없으니 돈에 맞춰 중저가 브랜드를 쇼핑하고 명품의 이미테이션을 두른다. 무엇이 문제고 무엇이 특수한가? 이미테이션 백을 들고 다니는 40대 아주머니와 A씨의 생각 간에 무슨 차이가 있긴 있는가?

평범한 인간에겐 원래 명품이 없고 명품의 ‘짭’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 중저가 브랜드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A씨의 어떤 부분이 특별하기에 ‘달관 세대’라는 이름이 붙은 것인가?

흔한 조선일보 웹툰의 관점
흔한 조선일보 웹툰의 관점

 

조선일보의 의도는 이쯤 되면 뻔할 뻔자다. ‘명품’이나 좋아하고 과소비하기 좋아하며 복지가 어쩌고 정규직이 어쩌고 하는 너희 기득권 3040 정규직과 다른 청년이 있다는 얘기다. 새 시대의 청년들은 이미 그런 것과 거리를 두고 알아서 잘 살고 있다고 말하기 위함이다.

A씨는 전혀 특별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 조선일보에 의해서 특별해진 것에 불과하다.

 

이들을 둘러싼 ‘달관’

같은 20대로서 저 셋이 정말로 존재해서 취재를 한 것인지조차 알 수가 없다. 그 이전에 저들은 아무것도 달관한 것이 없다. 그냥 되는 대로 맞춰서 살고 있을 뿐이다. 그런 건 달관이 아니라 체념과 뻔뻔함이라고 한다. 자신의 욕구에 대해서는 체념하면 된다. 부모와 타인의 기대에 대해서는 뻔뻔해지면 된다. 그러면 백수도 알차게 산다는 말이 입에서 나온다.

오히려 진짜로 달관한 것은 부모일 것이다. 이씨의 주거 환경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해주고 싶지 않거나 해줄 수가 없어서 달관한 부모가 있을 수 있다. 부모의 기대같은 건 전혀 상관이 없는 삶을 사는 박씨에 달관한 부모가 있을 수 있다. 서울대 나와서 계약직 신세를 전전하는 A에 대한 부모의 달관이 있을 수 있다.

그 3인은 모두 어떤 종류의 ‘기대’를 본의든 아니든 무시하고 있다. 그게 달관 세대라고 조선일보가 이름지은 사람들의 유일한 공통점이다.

왜 이들이 전부 청년 내 고학력자에 해당하는지도 명확하다. 이들과 이들 주변의 눈높이에 맞는 직종과 임금을 획득하기는 원래 어렵다. 이들은 어쨌든 배운 사람이고 인텔리에 가깝다. 그런 그들이라서 ‘생산직’ 같은 건 아예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비생산 정규직은 원래 적으니 그냥 그렇게 살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프리터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어째서 전부 서울 소재 대학을 나왔는지는 설명이 불가능할 것이다.

‘달관 세대’라고 조선일보가 이름 붙여준 사람들이 가장 많은 곳이 어딘지 아는가? 신림과 노량진이다. 거기 장수생이 있다. 공부 자체는 달관했다. 먹고는 살아야 하니 대충 일은 한다. 동네의 물가는 낮으니 살만 하다. 거기 고시 낭인들이 조선일보의 ‘달관 세대’에 가장 가깝다. 뭔가 달관한 게 있기도 하고. 부모 역시 달관했다.

신림동 고시촌의 풍경. (출처)
신림동 고시촌의 풍경. (출처)

 

도금은 금이 될 수 없다

내가 아는 어떤 청년도 자기 스스로를 풍요로운 시대에 태어나서 돈 없어도 할만한 것 많다고 말한 적이 없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런 말을 하는 경우는 대부분 정해져 있다. 우선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소비를 한 다른 사람을 비난할 때다. ‘분수에 맞지 않는’ 소비를 한다고 일갈하는 것이다. 자기 기준에서 ‘과소비’를 하다 돈이 없다고 우는 소리를 하는 사람을 비난하기 위해서 그렇게 말하는 건 많이 봤다. 아니면 실제로 ‘돈 없다’의 기준이 정말 다른 금수저 청년이거나.

청년들은 디지털과 모바일, SNS에 익숙하다. SNS에 같이 놀 사람이 많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타인의 즐거움을 쉽게 마주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남의 욕망과 그것이 충족된 광경에 쉽게 노출된다. 그런 청년들이 어째서 안분지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가. SNS를 한다고 부유한 게 어떤 건지 모르고 사랑이 뭔지 모르겠는가?

모바일 중독이라 까이지만, 실은 이것도 데이터 요금이 부담스럽다.
모바일 중독이라 까이지만, 실은 이것도 데이터 요금이 부담스럽다.

돈이 없어도 할만한 건 없다. 모든 것은 돈이 든다. 단지 그래서 그 ‘모든 것’을 조금씩 바꾼 것이다. 금 대신 18K. 그것도 안 되면 황동. 그것도 안되면 금박지. 그런 식의 자기기만은 오래갈 수 없다. 아무리 그래봤자 암울한 주거환경에서 심신은 망가진다. 승진할 수 없는 환경에선 일하는 동기가 없다. 또한 아프거나 사고를 당해도 ‘작은 소비’로 만족할 수 있는지는 다른 문제다.

‘달관 세대’는 아무것도 달관한 것이 없다. 애초에 세대도 아니었다. 오히려 새로운 계층의 등장을 암시한다. 한국형 프리터. 그들의 모습이 일본의 프리터보다 나을지는 의문이다. 일본의 프리터만큼 행복할 수 있는지도. 정상적인 대학 졸업생이 박씨와 유사한 모습으로 살고 있다면 박씨보다 대충 천 배는 더 자신이 불행하다 느낄 것이다.

 

편가르기와 분할지배

솔직히 조선일보가 왜 이렇게 뜬금없는 기획을 미는지, 그것도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진행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여러 번 생각해본 결과 의외로 단순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조선일보가 일상적으로 하는 분할 지배(Divide & Conquer)에 지나지 않는 문제였다. 청년들의 아주 일시적이거나, 아주 비정상적이거나, 세대를 떠나 너무나 평범한 상황을 가져다 놓고 조선일보가 달관 세대라고 포장을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조선일보가 이런 달관 세대라는 프레임을 짜 놓으면 모든 것이 편하다. 실제로 ‘달관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청년을 비정상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의 기사를 본 많은 갑들은 달관하지 못한 청년에게 물을 것이다. 왜 이렇게 세상이 좋아졌는데, 경제는 어려워졌는데 많은 걸 요구하냐고.

너희 힘들다더니 이렇게 100만원 갖고도 잘만 살아가잖아? 심지어 저축도 하잖아. 어째서 임금 올려달라, 등록금 내려달라 난리야? 너희들 아낄 수 있는 데 까지 아껴 봤어? 이 청년처럼 IPTV 보면 영화값도 안 들잖아? 왜 요구하는 것이 많아?

이들은 명품도 안 바란다. 몸이 망가지건 어쩌건 좁고 더러운 방에서 잘 산다. 영화관에 가는 법을 잊는다. 왜 너희는 그렇지 못한가?

저임금과 저소득에 맞춰서 사는 사람들이 나타났으니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서 적응해야 한다는 논리다. 임금 제대로 달라, 일 그만 시켜라, 정규직 시켜달라 하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이 꼴에 반대하는 악질적인 청년들은 곧바로 종북 빨갱이가 된다.

그러면서 이런 문제에는 침묵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런 문제에는 침묵하고 있다.

심지어 이 논리는 청년 대부분의 문제에 공감하고 해결을 모색하려 드는 ‘어른들’에게도 미친다. 조선일보가 뽑아낸 이런 청년, 그리고 이런 청년이 마치 동년배 모두를 상징하는 듯한 ‘달관 세대’의 등장은 중장년 여론에 대해서도 효과적인 해결책이다. 이미 청년들은 잘 적응해서 나름대로 행복을 잘 찾아냈다. 왜 청년들이 힘들다고 뭔가 요구하려고 하는가? 아니, 조금 더 조선일보 식으로 표현해 보겠다.

어째서 청년들을 정략적으로 동원하는가?

결국 이 달관 세대라는 기사로 청년들은 ‘올바른 달관 세대’와 다르기에 갑에게 두들겨 맞는다. 문제를 바꿔 보려는 사람들은 청년을 동원하는 정치꾼 취급이나 당한다. 그 외의 용도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전업주부와 워킹맘을 나누는 수법이 생각난다. 똑같은 사람 일각을 ‘신인류’인 것처럼 포장해 나머지 사람을 이기주의에 찌들은 바보로 만드는 수법.

누구도 달관한 적 없다. 달관한 것처럼 보여질 뿐. 그런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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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저가 싸우기 위한 자격 “스펙이나 가지고 비판해라” https://ppss.kr/archives/36522 https://ppss.kr/archives/36522#respond Fri, 23 Jan 2015 05:23:27 +0000 http://3.36.87.144/?p=36522 몇 달 전부터 존재는 알고 있던 <나는 시간강사다>라는 게시물이 있다. 지방대 시간강사였던 필자의 실상 얘기였다. 나는 한 가지가 의문이었다. 과연 독자들이 이것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나는 모종의 비관적인 결론을 가졌고, 반 정도는 확실히 현실이 되어 있었다.

부조리를 비판하려면 그럴만한 자격을 갖춰야 한다

이 명제가 맞냐 아니냐와 무관하게, 최소한 한국인 중 절반이 이에 동의한다 여긴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면 그 명제는 한국 사회의 아주 일상적 질서 중 하나라고까지 생각할 때가 많다. 특히 상아탑이 결부될 경우, 그 명제는 더이상 일상적인 것이 아닌 ‘절대’를 논할 만한 질서다.

댓글 중 일부.
댓글 중 일부.

 

범죄가 된 과거의 무능

그 필자는 모종의 죄인이 되어 있었다.그 필자가 어떤 사람들에게 죄인이 된 건 단순한 이유였다. 그는 돈이 없었다. 그냥 책을 좋아했고, 모든 책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사실 공부를 눈에 띄게 잘 하지는 않았다. 단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남의 시각에선 잘해야 ‘적절히’ 노력했고, ‘평범한’ 결과를 얻어 대학에 들어왔다.

그 시점에서 모든 것이 잘못된 것이다. 그는 그래서 ‘당연히’ 그런 처지에 빠진 것이다. 누구의 탓도 해서는 안 되었다. 그런데 누구의 탓을 했다! 구조의 탓을 했다. 자신이 ‘착취당함’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가 떼를 쓰고 있다고 받아들였다. 그가 어떤 처지에 있든, 그것은 오롯이 그가 선택한 것이기에 누구도 책임을 질 필요도 없다. 시간강사는 오히려 자신의 판단력을 탓하지 않고 남을 탓해 사회를 시끄럽게 한 죄인이 되어 있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항변했다. 하지만, 그것은 아마도 인터넷의 동료가 많다는 환상에 불과했을 것이다.

시간강사 문제는 이미 10년 가까이 진전이 없고, 오히려 매체의 성향과 구독자의 주된 성향을 따져 본다면, 너무나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그가 빠진 상황에 대해서 별다른 진지한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었다. 말은 길고 지점들은 조금씩 달랐지만, 수렴하는 결론은 단 한 가지였다.

감히 그 정도의 기량과 준비를 갖고 상아탑에 끼어들어 한 자리 해보려 했느냐?

 

항변을 위해 필요한 것

한국 사회에서 뭔가를 바꾸려는 사람들은 모종의 장벽에 부딪힌다. 진정성이다.

연봉이 너무 적다고 하면 어김없이 더 가난한 사람이 나타난다. 생활비가 너무 많이 든다 항변하는 지방에서 상경한 대학생은 ‘어디까지 아끼려고 했는지’를 항목별로 검사받는다. 비정규직이 처우를 개선해 달라고 하면, 비정규직에서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지나간 인생을 검토받는다.

김영오 씨의 경우, 세월호 특별법을 해보겠다고 자신이 좋은 아버지였는지 아닌지를 시험받았고 덕분에 통장 내역을 손에 들고 국궁이 귀족적 취미가 아니라 그냥 동네 동호회에서 할 수 있는 것임을 직접 가르쳤다. 모두 진정성이란 같은 맥락에 있다.

한국 사회에서 개인이 부조리를 비판하거나 고발하는 데 있어 갖춰야 한다고 평가받는 모종의 ‘진정성’이라는 건, 자신이 당한 부조리한 질서에 자신이 시비를 걸었을 때 잃어버리는 것이 얼마냐에 달렸다. 부조리 하에서 견디면 언젠가 얻을 대우, 부, 계급을 그만두면 비로소 진정성이란 신기한 칩이 생겨난다.

비정규직이 자신의 처우에 불만을 드러내면 그것은 떼를 쓰는 것에 불과하다. 그에 비해 정규직이 비정규직 차별을 중지하라 요구하면 그것은 연대다. SKY 출신이 학벌주의에 문제를 제기하면 ‘깨인 학생’이지만, 그 당사자인 지방대생과 고졸이 문제를 제기하면 깨인 학생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깨진다.

 

시간강사에게 비웃음이 넘실대는 이유

그 차이는 자신이 가만히 있으면 유리한 상황에서 그것을 포기하고 비틀린 질서에 항변하는 것인지, 아니면 불리한 상황이라서 싸우는 것인지에 있다. 차별과 부조리를 그냥 내버려 두었을 때 상대적으로 갖고 있던 ‘편함’을 던져 스스로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것으로, 비로소 진정성이란 칩이 손에 들어오고, 그 칩을 써서 부조리에 대한 항변을 할 권리가 비로소 주어지는 것이다.

사장님은 돈과 휴가를 풀어 착한 사장님이 되지만, 일하는 사람이 돈과 휴가를 달라고 하면 ‘근태’가 등장한다. 곧바로 진정성의 보유량을 의심받는다. 어김없이 “회사도 문제지만 노조도 문제죠”가 뒤따라 나온다.

사람 사는 게 아니라고 대학 시간강사 문제를 고발한 지방대 시간강사에 대한 비웃음이 넘실대는 이유도 이 흐름에 있다. 그 사람은 수학을 잘 못했고, 지방대 출신이며, 그런 고발이 철저하게 ‘개인적 이익추구’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뭔가를 함께 추구하거나 나눠주지 않는다. 그냥 자기가 힘들다고 하며, 그는 자기가 얼마나 그런 처우를 피하려고 밑바닥까지 노력했는지, 그 진정성을 입증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의 항변은 그저 남의 것을 빼앗으려는 시도로 다수에게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정규직이 비정규직 문제를 논하면 사회 이슈에 관심이 많고 이타적인 사람이 되지만, 비정규직이 비정규직 문제를 논하기 시작하면 단순히 일베뿐만이 아니라 대략 한국인의 3할 이상이 그것을 ‘루저의 떼법질’로 생각하는 것과 정확히 똑같은 방식이다.

그는 사회에 존재하는 ‘분수’를 어겼다. 그것은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강대하고 엄격한 관습법이다.

행복해질 권리는 모두에게 다르게 존재한다.

예전에 고대 학생이 사회를 거부한다며 대학을 자퇴한 것이 뉴스가 되었다. 그 학생이 분교 출신이었다면 그것은 얼마나 이슈가 되었을까? 최경환을 협박했던 대자보가 신촌이 아니라 소위 말하는 ‘지잡대’의 게시판에 붙었다면? 흔해 터진 주거 문제를 논하는 학생이 신촌에 집을 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 지방 구석 대학가에서 집을 구해야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얼마나 다른 한국인에게 ‘문제’로 비쳐졌을 것인가?

그것은 정말로,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에게, ‘같은 무게를 갖는가’? 그리고 주변 사람도 그 판단에 동의할까?

 

최저한이 없는 사회

부조리와 압박에 대한 항변에 진정성이라는 화폐가 필요하다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결론도 명확해진다. 사회의 루저들은 동시에 루저이기 때문에 그 사실에 문제를 제기할 수 없다. 어떻게든 자신이 ‘무능력해서’, 혹은 어찌할 수 없는 극한 상황에 몰려서 루저가 된 것이 아님을 밝히지 않는다면.

단순히 당신이 경쟁에서 밀렸다는 것이나 당신이 지금 갖고 있는 돈으로는 월세를 해결하면서 빚을 지지 않고 살 수 없다는 것은 당신이 겪는 고충을 해결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문제제기에도 모종의 스펙은 필요하다. 우리 모두는 그런 사회에서 살고 있다. 개개인이 인간이라는 사실, 인간답게 살아야 인간이라는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비판에도 ‘자격증’이 있어야 함에 공감하느냐 아니냐는 곧 개인이 얼마나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기본적인 질서와 먼 사람인지 아닌지를 분간하는 가장 확고한 바로미터 중 하나다. 그 명제가 가진 막강한 당위와 중량감이 곧 수많은 사람들과 담론을 분리했고, ‘밑으로부터의 혁명’을 막았으며, 비판이라는 것을 대중과 멀어지게 했다.

단순히 그뿐만이 아니라, 부조리에 대한 비판이나 저항을 지식인과 중산층의 특권 또는 현실에서는 절대적으로 무력한 룸펜들의 인터넷 놀음으로 여겨지게 만들었고, 다수에게는 박탈감을 선사했다.

그런 박탈감의 기운이 주변을 짙게 감돈다. 그런 공기 속에서 사람은 지난하고 끈기있는 싸움을 포기하고 속물이 되거나, 모든 것을 기득권으로 파악하고 파멸적인 욕망을 품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는 인간의 최저한이 없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이 정도의 존중을 받고, 뭐든 일을 하고 산다면 최소한의 존엄은 간직해야 한다는 것이 없기에, 사람들은 언제나 패배자를 보고 패배했음을 탓한다.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아서 애도를 받고, 죽었다는 사실이 무언가를 요구하게 되면 사람들은 순식간에 애도를 거두고 장사치를 보는 표정을 짓는다. 진정성이란 자산 앞에서 모든 비극과 고통은 손쉽게 저울에 달아진다.

 

이 나라는 왜 사람을 궁지로 모는가?

시간강사는 그래서 누군가에겐 머저리 주제에 감히 학문의 길을 가서 파랑새 증후군에 빠져 다른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죄인이 되었고, 세월호 유족은 그래서 누군가에겐 세월호 쇼크를 일으켜 ‘경제를 망친’ 경제사범으로 변했다.

우리는 그런 사회에서 산다. 누구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 하고 살 필요는 없고 불행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언제든지 동물 이상 인간 미만이 될 이유는 없다.

한국 사회는 매번 패배자를와 약자를 아예 사람이 아니게 만드는 것으로 모두의 노력을 독려했다. 우리는 일상을 반복하고 있지, 우주선 안에서 고립되어 물과 공기가 한정된 것이 아니다. 사람에겐 양보할 수 없는 존엄이 조금이라도 있음을 인정하는 것, 사소하지만 한국 사회에게 가장 크고 절실한 진보다.

그것에서부터 모든 인간성은 시작한다. 이제는 그만할 때도 되었다. 가진 것이 사람밖에 없다는 나라에서, 왜 이렇게도 사람을 궁지로 모는 해결책을 택하는가?

원문: 잉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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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국제시장” 에필로그 https://ppss.kr/archives/34694 Sat, 10 Jan 2015 01:28:03 +0000 http://3.36.87.144/?p=34694 네이버 영화 – <국제시장>

1국제시장

그러나 그것은 결단코 자기가 믿고 사랑하고 하는 아들의 신상을 여겨서가 아닙니다.

덕수 영감은 시방 아들이 뭘 내놓으라고 시위를 했다는 그 한 가지 사실이 진실로 옛날의 드세던 소대장이 베트콩 총알에 맞아죽는 그것보다도 더 분하고, 물론 무서웠던 것입니다.

진(秦)나라를 망할 자 호(胡:오랑캐)라는 예언을 듣고서 변방을 막으려 만리장성을 쌓던 진시황, 그는, 진나라를 망한 자 호가 아니요, 그의 자식 호해(胡亥)임을 눈으로 보지 못하고 죽었으니, 오히려 행복이라 하겠습니다.

“불법시위라니? 으응? 으응?”

덕수 영감은 사뭇 사람을 아무나 하나 잡아먹을 듯 집이 떠나게 큰 소리로 포효(咆哮)를 합니다.

“……으응? 그놈이 총파업을 허다니! 으응? 그게, 참말이냐? 참말이여?”

“허긴 그놈이 작년 여름방학에 나왔을 때버틈 그런 기미가 좀 뵈긴 했어요!”

“그러머넌 참말이구나! 그러머넌 참말이여, 으응!”

덕수 영감은 이마로, 얼굴로 땀이 방울방울 배어 오릅니다.

“……그런 쳐죽일 놈이, 깎어 죽여두 아깝잖을 놈이! 그놈이 김사장님 친아들처럼 하라닝개루, 생판 정규직이 어쩌고 파업허다가 뎁다 경찰서에 잽혀? 으응……? 오―사 육시를 헐 놈이, 그놈이 그게 어디 당헌 것이라구 지가 시위를 히여? 밥 안굶고 남으 나라 광부까지 해서 먹여살린 자식이 무엇이 대껴서 부랑당패에 들어?”

아무도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리고 섰기 아니면 앉았을 뿐, 덕수 영감이 잠깐 말을 그치자 방 안은 물을 친 듯이 조용합니다.

“……오죽이나 좋은 세상이여? 오죽이나…….”

덕수 영감은 팔을 부르걷은 주먹으로 방바닥을 땅― 치면서 성난 황소가 영각을 하듯 고함을 지릅니다.

“베트콩이 있너냐아? 희멀건 괴물같은 코쟁이들이 있더냐……? 소가 있대야 지리산 빨치산 것이요, 한강 다리는 없어지고 목숨은 파리 목숨 같던 말세넌 다 지내가고오…… 자 부아라, 거리거리 경찰이요, 골골마다 공명헌 정사(政事), 오죽이나 좋은 세상이여…… 김일성이 그 빨갱이 놈 막으려고 바다 건너에서 몇만을 파병을 히여서, 우리 조선놈 보호히여 주니, 오죽이나 고마운 세상이여? 으응……? 제 것 지니고 앉아서 편안허게 살 태평세상, 이걸 태평천하라구 허는 것이여, 태평천하……! 그런디 밥도 안 굶어본 자식이, 더군다나 왜 지가 일이나 하구 편안허게 살 것이지, 어찌서 지가 세상 망쳐 놀 부랑당패에 참섭을 헌담 말이여, 으응?”

땅― 방바닥을 치면서 벌떡 일어섭니다. 그 몸짓이 어떻게도 요란스럽고 괄괄한지, 방금 발광이 되는가 싶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모여 선 가권들은 방바닥 치는 소리에도 놀랐지만, 이 어른이 혹시 상성이 되지나 않는가 하는 의구의 빛이 눈에 나타남을 가리지 못합니다.

“……착착 깎어 죽일 놈……! 민노총인지 뭐시깽인지 그놈을 내가 핀지히여서, 경찰더러 몽둥이로 패 쥑이라고 헐걸! 종북 빨갱이들 쏴죽이라 할거여…… 오냐, 그놈을 나중에 가게 권리금이나 물려줄까 히였더니, 오―냐, 적금을 톡톡 팔어서, 경찰서으다가 좌익활동 하는 놈 잡어 가두는 경찰서으다가 주어 버릴걸! 으응, 죽일 놈!”

마지막의 으응 죽일 놈 소리는 차라리 울음 소리에 가깝습니다.

“……이 태평천하에! 이 태평천하에…….”

쿵쿵 발을 구르면서 마루로 나가고, 앉아있던 영자와 달구도 따라 일어섭니다.

“……그놈이, 나랏님이 G7 회의까지 열어놓고 경제효과가 사백 오십조라는 마당에, 먹고 살 길이 읎어서 독일도 안 가고 베트콩 잡으러 가지도 않는 마당에, 세상 망쳐 놀 사회주의 부랑당패에, 참섭을 히여. 으응, 죽일 놈! 죽일 놈!”

연해 부르짖는 죽일 놈 소리가 차차로 사랑께로 멀리 사라집니다. 그러나 몹시 사나운 그 포효가 뒤에 처져 있는 가권들의 귀에는 어쩐지 암담한 여운이 스며들어, 가뜩이나 어둔 얼굴들을 면면상고, 말할 바를 잊고, 몸둘 곳을 둘러보게 합니다. 마치 장수의 죽음을 만난 군졸들처럼…….

– – –

원작 : 채만식 – <태평천하>

*원저자의 요청으로 부분 편집되었습니다.

출처: 잉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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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시위에 부쳐 https://ppss.kr/archives/28965 Mon, 08 Sep 2014 00:03:47 +0000 http://3.36.87.144/?p=28965 어제의 광화문 일베 시위는 매우 상징적이다. ‘청년 극우’의 본격적인 대두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어떻게 말하면 야권 지지층 일각이 일베에 대한 대항법으로 제시한 일베에 ‘관심을 주지 않는다’는 전략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러 가지 얘기를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일베가 왜 규탄받아야 하는지는 보편인권 의식만 있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일베3

 

다만 일간베스트라는 커뮤니티이자 플랫폼의 구조적 특성에 대한 평가 역시 상당히 흥미로운 지점들이 있다. 그 부분은 여러 면에서, 한국 정치에서 일베가 갖는 영향력과 포지션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검토의 필요가 있을 듯 하다. 크게 네 가지 지점에서 다뤄보겠다.

 

1. 일간베스트의 규모

일베는 동시접속자가 2.5~3만 명에 달하는 대형 커뮤니티이며, 다음 아고라와 같은 포털 기반이 아닌 대형 커뮤니티 중에서 일베에 비해 확실히 규모 면에서 앞서는 사이트는 거의 없다. 사실상 일베는 명실공히 한국 인터넷 스페이스의 주도적인 한 축이다.

일베와 지배적인 성향 면에서 비교되는 5개의 대형 커뮤니티, MLBPARK 불펜, 뽐뿌, 오늘의 유머, 클리앙, SLR클럽을 생각해 보자. 이 커뮤니티의 접속 인원을 전부 합친다면 일베를 압도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엔 두 가지 착시현상이 존재한다. 우선, 야당 지지자의 정치적 포지션 쪽이 일베로 대변되는 정치세력이 갖는 정치적 포지션보다 다원적이라는 사실이다. 안철수를 지지하는 사람과 문재인을 지지하는 사람간의 충돌은 야당 지지 대형 커뮤니티에서는 아주 당연한 현상이다!

다른 하나는, 저런 대형 커뮤니티는 중복 인원이 적지 않다는 점. 핸드폰 정보를 보기 위해 클리앙에 가고, ‘살 것’을 찾아 뽐뿌에 가고, 야구를 얘기하러 MLBPARK에 가는 사람은 전혀 드물지 않다. 그에 비해, 과연 일간베스트 구성원이 다른 커뮤니티와의 중복접속을 하는 비중이 최소한 저만큼 흔하다고 볼 수 있는가? 심지어 일간베스트는 수많은 다종다양한 토픽의 게시판이 있으며, 대부분의 관심사는 일베 ‘안에서’ 처리가 가능한, 포털과 대형 커뮤니티의 중간에 가까운 기능을 가진 커뮤니티다.

동접자 3만, 일일 페이지뷰가 500만에 육박하는 사이트의 지배적 여론이 갖는 크기는, 야당 지지자 일각에서 나왔던 “관심종자에겐 관심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전략을 무의미하게 한다. 뽐뿌와 맞먹는 규모의 사이트의 지배적 여론과 그 구성원의 반사회적 행동, 반인륜적 언행을 ‘관심을 안 주는’ 것으로 해결할 수는 없으며, 실제로 그간 야권 정치세력도, 지지자들도 일베를 ‘사실상 방치’ 했지만, 일베는 잘만 성장했다. 일베는 ‘무시할’ 수 있는 사이트가 아니다. 오히려 두려울 것이 없는 것이 일베의 규모이다.

 

2. 여론형성의 인센티브

일간베스트의 구조를 간단히 살펴본다. 게시판이 있고, 글이 있으며, 모든 글에는 추천(산업화)과 비추천(민주화)이 공존하고, 추천이 많은 글은 대문으로 간다. 추천이야 어지간한 대형 사이트에는 있지만, 비추천은 보기 드물다(오유 정도). 이 비추천은 누적될 경우 유저의 유저 레벨을 떨어뜨리고, 자동입력 방지 문자를 입력해야 하며, 글에 ‘짤방’을 삽입할 수 없다. 매우 적극적으로 소수 의견을 구축하고 소수 의견의 생산자의 발언을 억제하는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반대로 ‘산업화’가 이루어진 글은 당장 대문에 걸린다. 또한 ‘정치 게시판’의 일간 베스트는 일베 전체의 베스트 글 밑에 따로 걸리며, 접속하는 순간 제일 먼저 볼 수 있는 글은 일간베스트 전체 베스트 글과 정치게시판 베스트 글이다. 이렇게 게시판 개별 게시판을 넘어 모든 유저가 손쉽게 사이트의 다양한 게시판 전체의 베스트 글을 찾아볼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 역시 드물다.

매우 직관적으로 최다추천 글이 공유된다(좌상단)
매우 직관적으로 최다추천 글이 공유된다(좌상단)

 

이 시스템은 크게 두 가지의 역할을 한다. 하나는 일베 내에서 ‘자정작용’, 정확히 말하면 여론의 집적과 통일이 손쉽게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야권에서 대통령을 칭송하는 글이 거부당하는 것에 비해 일베에서 야권 정치인을 칭송하는 글이 거부당하는 효율이 훨씬 높다는 것이다.

동시에 추천을 통해 대문에 걸리는 시스템은 사람의 타인에 대한 계몽 욕구와 공명심을 자극한다. 이 시스템은 대문에 걸린 글에 뭔가를 보충하고 싶거나 더 논리적인(그렇다고 해 두자) 글을 쓰고 싶어하는 욕구를 강하게 자극하며, 일베 구성원들이 대체로 공유하는 가치에 대비해 ‘나쁜 글’이 빠르게 배제되는 과정과 맞물려, 일간베스트 구성원은 어떤 사안에 대한 나름대로의 일관되고 정돈된 여론을 빠르게 축적하고 공유한다. 이 구조는 뒤에 설명할 ‘이슈파이팅’에 크게 도움을 준다.

결국 어떤 이슈가 터졌을 때, 일베의 자료가 다른 사이트에 넘어올 때쯤 되면 그 정국에 대한 인식을 대변하는 일베의 자료는 빠르고 효과적인 강화와 개선을 거쳐 우수한 ‘선동성’을 보유하고, 다양한 이미지, 영상, 통계, 기사들로 무장한 그 자체로서 완결된 선동 컨텐츠로서 완성된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정몽준 선대위’가 그것을 활용했으며, 이슈가 되고 있는 중장년층 카카오톡 유언비어의 생성 역시 그런 일베에서 양산된 자료를 기반으로 구성된다.

(그런 구성원리를 가진 일베 유저들이 ‘선동’을 문제삼는다는 점은 블랙유머다)

 

3. ‘친목 밴’과 유대의식

일베는 대형 커뮤니티 중 압도적으로 소위 말하는 친목질을 강력하게 배제하는 사이트인데, 이것 역시 구조적인 측면에서 따져볼 가치가 있다. 친목질의 배제는 커뮤니티에 있어 상반된 효과를 가져온다. 첫번째는 ‘유명인사’의 탄생을 억제하는 것이며, 두번째는 사이트 내의 평등주의와 ‘유대의식’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친목을 배제하는 것은 일간베스트의 유저를 단일한 정체성으로 묶는 역할을 한다. ‘일게이’가 그것이며, ‘일베 가수’로 유명해진 브로(Bro)의 인증에서 드러나는 강한 유대의식에서도 엿볼 수 있다. 유명인사가 배제되고 반말을 사용하는 일간베스트의 구성원은 ‘불알친구’와 같은 멘털리티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 유대의식은 온오프에서의 다양한 반사회적인, 심한 비난을 받기에 충분한 행동을 할 수 있는 심리적 원천을 제공한다. “함께 있을 때 우리는 두려운 것이 없었다‘는 영화 <친구>의 슬로건을 떠올려 보자. 어떻게 추동하느냐에 따라서, 일베의 구성원은 커뮤니티 에서 눈에 띄고 싶은 마음, ‘용자’가 되고 싶은 생각 등이 겹치는 것으로 충분히 반사회적 행동을 감행할 수 있게 된다.

구태여 어제의 시위와 같은 극단적인 정치적, 공적 행동이 아니더라도, 여러 면에서 그 심리를 엿볼 수 있다. 여동생이나 누나의 사진을 도촬하는 매우 중고등학생 패거리를 연상케 하는 행위나, 학교의 대자보를 몰래 밤중에 찢는 것과 같은 좀 더 라이트한 종류의 행동들이 그렇다.

맥도날드 할머니를 조롱하는, 매우 초딩같은 행위 말이다.
맥도날드 할머니를 조롱하는, 매우 초딩같은 행위 말이다.

 

여론형성의 인센티브와 맞물린 유대의식의 특성으로, 제도 정치의 영역에서 일베는 재미있는 포지션을 갖추게 된다. 일베 출신 정치인은 나오기 극히 어렵지만, 대신 온라인에서는 1선, 오프라인에서는 2선의 영역으로서 ‘여의도연구소’와 공존하는, 결과적으로 보수를 위한 재능기부를 연상케 하는 포지션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광화문에서의 시위는 오프라인에서도 ‘1선’으로 동원될 수 있는(어버이연합과 쌍벽을 이루는) 것이 가능해졌음을 보여준다.

 

4. 보수를 위한 재능기부

지난 지선에서 정몽준 선대위가 일베 자료를 쓰고, 다양한 종류의 대중 프로파간다에 새누리는 일베의 자료를 동원하기 시작했다. 일베가 만들어내는 ‘선동성 강한’ 완결된 컨텐츠는 카카오톡과 맞물려 중장년의 여론에 영향을 주는 효과적인 도구로서 활용된다. 이미 범 새누리 진영은 일베의 자료를 가까이 두고, 필요하다 판단되면 얼마든지 활용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부분이 있다. 일베라는 커뮤니티의 자료를 ‘제1당’이 활용하고 있는데, 제1당에도 멀쩡하게 정당 싱크탱크가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여의도연구소다. 그러나 여의도연구소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정국’에 대한 적극적인 프로파간다를 생성하지는 않는다. 여의도연구소가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선거’이자 정책이다. 사실 여연은 선거 때에나 강력한 존재감을 발휘하지, 정국에서 존재감을 발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일간베스트에서 강한 유대의식과 신념, 효율적인 여론형성 인센티브를 통해 생성되는 다양한 자료(박원순 괴담, 유가족 비판 자료 등 다양한)는 여연의 미시적인 정국에서의 공백을 채운다. 일베 자료를 다른 산하 조직 구성원들에게 공유하고, 그 구성원이 카카오톡으로 다시 뿌려주는 것을 통해 일베의 자료는 매우 효과적으로 중장년층을 향한 ‘선동’의 기능을 담당하며, 여연이 하기는 힘든, 매우 저렴하고 천박하지만 효과적인 정치선동을 담당한다.

이런 식까진 아니더라도.
이런 식까진 아니더라도.

 

여의도연구소는 ‘판세’를 읽고, 일간베스트는 판세에 영향을 주는 느슨한 공조체계의 완성이며, 일간베스트의 구성원들은 결국 범새누리 진영을 위해 재능기부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그들은 나름대로의 구국의 신념으로 그와 같은 자료를 생성하고 공유한다).

또한 일베는 광화문 시위에서 드러난 것처럼, 제2의 어버이연합으로서 현실적인 동원력까지 보여줄 수 있음을 입증했다. 범새누리 진영이 그런 일베를 위해 하고 있는 일이라면, 아마 일베의 서버비를 보태주는 것(일베의 규모를 생각할 때 그 서버비를 대체 어떻게 조달하는 것인지는 많은 사람들의 의문으로 남아있다), 몇 명의 관리자에게 적절한 쌈짓돈을 꽂아주는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일베는 대단히 효과적으로 대중선동과 동원을 위한 도구의 기능을 하고 있으며, 어떤 정국의 우세를 잡기 위한 여론전 부터 인원 동원까지 다양하게 여권을 위해 활용되고 있다.

 

결론

지금까지 개인적인 4가지 키워드로 일간베스트의 구조적인 특성과 정치적 성질을 정리해 보았다. 일베가 재특회와 같이 자리를 잡을 지, 또는 혹자의 표현대로 나치의 한국 버전이 될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일베를 ‘무시하는’ 전략은 거의 실패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일베는 명백한 축이다. 그 사실로부터 전략의 재구성, 목표의 재설정이 필요한 시점으로 보여진다.

원문: 잉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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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에는 업무메일을 읽지도 말라: 다임러의 휴일 업무메일 자동삭제 정책 https://ppss.kr/archives/26375 https://ppss.kr/archives/26375#comments Wed, 20 Aug 2014 01:55:01 +0000 http://3.36.87.144/?p=26375 ※ BBC의 Should Holiday email be deleted?를 발췌 번역하였습니다.


William Kremer에 따르면, 독일 자동차 메이커 다임러는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회사도 따라하기를 바랄 휴일 이메일에 대한 혁신적인 접근을 행했다고 한다.

아마도 독일에서, 휴일 이메일은 안도감과 휴일 사무실 바깥에서의 메시지를 활성화하는 것에 대한 감정의 뒤섞임이라고 정의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끔찍하게 긴 근무 이후 가상 도구를 내려놓는 것은 만족스럽고 흐뭇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 중 많은 사람에게, 이 기분좋은 느낌은 2주 안에 상쾌하지만 우울한 감각으로 조절되어 버린다. 우리는 수백여 개의 대다수가 우리가 지나친 위기들에 대한 미팅 회의실 안내인 것들을 샅샅이 훑어봐야 한다.

그러나 다임러의 직원들의 메일은 조금 다르다. 휴일인 그들에게 메일을 보내면 당신은 이런 메시지를 받게 된다:

“저는 휴가중입니다. 저는 당신의 이메일을 읽을 수 없습니다. 당신의 이메일은 삭제되는 중입니다. 정말 중요한 일이라면 한스나 모니카에게 연락하시고, 그렇지 않다면 제가 사무실로 돌아온 다음 메일을 다시 보내주십시오. 고맙습니다(당케 쉔).”

명백히, 이런 통지를 받은 사람들은 거의 화내지 않는다. “그 응답은 기본적으로 99% 긍정적입니다, 왜냐면 모두가 말합니다. “그건 정말 괜찮은 물건이죠. 나도 그런 걸 갖고 싶어요.”

Daimler
Daimler

다임러 대변인 Oliver Wihofszki는 BBC 라디오 4’s Today 프로그램에서 말했다. 외부인들의 휴일에 대한 선망은 회사 이메일 정책의 변화에 대한 선망으로 대체되고 있다.

트위터의 반응은 압도적으로 긍정적이다. “난 다임러의 휴일 이메일에 대한 접근을 정말로 좋아합니다” 기업가 Nuno Almeida는 말했으며, FT의 Hanna kuchler 역시 언급했다 : “이제 이것은 이메일 관리입니다.”

자동 삭제 정책(선택사항이다)은 다임러가 2010~2011년 하이델베르크대 심리학자들과 함께 정부 자금으로 일과 삶의 균형에 대해 연구한 결과 중 한 조각이다.

회사는 이제 좋은 일과 삶의 예시를 갖추도록 관리자들을 훈련시키고 있으며, 그들에게 더 회의를 잡을 수 없다면 따로 시간을 설정하도록 고무한다. 이것은 직원들이 그들의 일에 집중하거나, 그들이 사무실에서 보내는 여분의 시간을 줄이도록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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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에 자네가 필요해.” “엿이나 드세요.”

다임러의 움직임은 근무 시간 이후 이메일을 끄도록 하는 폭스바겐의 정책과 프랑스에서의 일부 산업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에게 집에 간 이후 업무 이메일을 무시하도록 지시하는 새로운 규정에 따른 것이다.

회사는 이 정책이 시행되었을 때, 이것이 순수한 이타주의적 정책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이 프로젝트의 목표는 다임러 노동자들에게 일과 가정 사이의 균형을 유지시켜, 그들의 퍼포먼스를 장기적으로 유지하고 보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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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pss.kr/archives/26375/feed 1
당신도 모르게 약관에 동의한 10가지 https://ppss.kr/archives/25058 Mon, 28 Jul 2014 02:20:43 +0000 http://3.36.87.144/?p=25058 ※ Mashable의 10 things you didin’t know you agreed to via terms of service를 번역한 글입니다. (필자: Sylvan Lane)


어떤 사이트나 플랫폼에 가입하는 데 있어서 읽어야 할 문서로 알려져 있는 서비스 약관은 사람들이 거의 걱정하지 않는 법적 지침과 규율, 권한이다.

그러나 당신이 웹을 사용하는 방식을 바꿀지도 모르는, 못마땅한 전문용어 속에 숨겨진 당신이 동의한 몇 가지 것들이 있다. 개인정보 보호, 저작권 보호, 타인을 가장하는 행위의 금지 등 일부 권한은 잘 알려져 있으며 상대적으로 무해하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그것을 깨닫지도 못한 상태에서 서비스 약관을 어기게 될 여지가 있다.

참조 : 이 앱은 웹에서 당신의 개인 정보를 삭제합니다

여기에 여러분이 동의한 줄 몰랐으나, 실제로 동의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약관 10 가지가 있다.

 

페이스북

1. 페이스북 사용자는 무엇이든 원하면 당신의 사진과 비디오를 사용할 권한이 있다.

당신은 당신이 찍은 끝내주는 일몰 사진이나, 당신의 고양이가 담긴 재미있는 비디오를 페이스북 광고로 보기를 원하는가? 아니라고? 안됐다. 왜냐면 당신이 페이스북에 가입했을 때, 당신은 지적 재산권으로 간주될 수 있는 당신이 포스트한 모든 것에 대한 광대한 로열티 없는 저작권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여전히 모든 당신의 컨텐츠를 보유하고 있으나, 페이스북은 그것을 사용하고 다른 사람에게 사용할 권리를 부여할 수 있다. 이 권리를 취소하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이 페이스북에서 컨텐츠를 삭제하는 것이다.

그것이 예상 바깥으로 보일 수 있으나, 다른 소셜 미디어 사이트에서도 흔한 일이고, 비슷한 조항들은 트위터, 인스타그램, 구글의 서비스 약관에서도 존재한다.

2. 당신이 유죄 판결을 받은 성범죄자라면 페이스북을 사용할 수 없다.

이 한 조항은 매우 간단하다. 당신이 성범죄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적이 있다면, 당신은 페이스북에 등록할 수 없다.

3. 당신은 최신 연락처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페이스북은 당신의 계정이 보안이 유지되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연락처 정보에 대한 변경 내용으로 프로필을 업데이트하기를 모든 유저에게 요구한다. 이메일 주소에 대한 일정을 아예 그것이 지정하는 것은 아니나, 서비스 약관은 당신에게 48시간 이내에 당신의 휴대전화 번호를 업데이트해야 한다고 말한다.

 

트위터

4. 당신이 트위터를 어떻게 이용하고, 당신이 트위터에 어떻게 접속하는가?

트위터의 개인 정보 보호 정책은 회사에게 “당신의 IP 주소, 브라우저 종류, 운영체제, 참조 웹페이지, 페이지 방문, 위치, 이동 통신사, 이동 통신 장비, 어플리케이션 ID, 검색 용어 및 쿠키 정보”를 추적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구글 역시 거의 같은 일을 한다.

5. 당신은 사용자 이름에 알박기를 할 수 없다

혹시 당신은 당신의 자녀가 충분히 자랐을 때, 당신의 계정을 자녀에게 물려줄 계획이 있는가? 트위터의 서비스 약관에 따르면 그것은 규정위반이다. 트위터는 대부분의 6~9개월 비활성된 계정을 일반적으로 삭제하며, 그러므로 당신은 아마 그 규정으로부터 어쨌든 도망치지 못할 것이다.

 

인스타그램

6. 당신은 성적 암시를 띈 컨텐츠를 게시할 수 없다

생각할 가치도 없는 것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단순히 나체를 금지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규칙은 그 자체로서 매우 특별하진 않으나, 불쾌한 내용을 제한하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 비해서 아마 상대적으로 더 낮은 기준을 적용한다.

7. 당신은 인스타그램에 아이디어를 보내기로 되어있지 않으나, 인스타그램 측에서 마음에 든다면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인스타그램의 약관은 회사의 정책을 “우리가 특별히 요청한 것이 아닌 컨텐츠, 정보, 아이디어, 제안, 기타 요소를 받아들이거나 고려하지 않는다”고 서술한다. 그러나 주의할 점이 있다: 어떤 이유, 예를 들면 당신의 빛나는 아이디어가 높은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는 경우, 인스타그램은 그것을 사용하고 당신에게 1센트도 주지 않아도 된다.

참조 : 개인적인 브라우징 설정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개인적이지 않다

 

링크드인

8. 당신은 당신이 현실에서 모르는 사람을 추가할 수 없다

당신이 네트워킹 플랫폼에 능숙하다면, 당신은 당신이 링크드인에 그녀를 초대하기 전에 그 사람을 어떻게 알고 있는가에 관해 지정할 필요가 있음을 알 것이다. 당신이 학교나 직장 등을 제시할 수 없거나 그녀의 계정에 연결된 이메일 주소가 없는 경우, 링크드인은 당신을 연결시켜 줄 수가 없다.

그러나 잠재적인 연결에 관련되어 당신의 친분을 제공하는 것은 단순한 스팸을 막기 위한 대책이 아니다; 그것은 링크드인의 약관에도 쓰여 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별 걱정없이 그 규칙을 위반했다. 네트워킹은 때로는 치열한 법이다.

9. 당신의 프로필은 설령 당신의 거주지가 매춘이 합법이라고 해도 매춘 서비스를 홍보할 수 없다

당신이 친밀한 관계(주: 매춘 행위를 의미합니다)로 클라이언트와 에스코트를 짝지어 주는 합법적 사업의 주인이라고 생각해 보자. 그래도 링크드인의 네트워킹을 건드리진 말라. 그것은 규정 위반이니까.

10. 당신은 거짓말을 할 수 없다

정책은 최선의 정책이라고 알려져 있다. 링크드인에게 있어 정직은 정책이다. 네트워크의 유저 이용약관은 그들의 프로필에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추가하는 사용자를 퇴출시킨다. 또한 우선적으로 잠재적 고용주들에게 있어 (거짓말은) 잡아내기 쉬우며, 그러므로 가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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