ㅍㅍㅅㅅ https://ppss.kr 필자와 독자의 경계가 없는 이슈 큐레이팅 매거진 Thu, 03 Jul 2025 04:04:26 +0000 ko-KR hourly 1 https://wordpress.org/?v=5.8.10 https://ppss.kr/wp-content/uploads/2015/07/ppss-100x100.png ㅍㅍㅅㅅ https://ppss.kr 32 32 밤에 ‘이불킥’을 하게 되는 심리학적 이유 https://ppss.kr/archives/269742 Thu, 03 Jul 2025 04:04:26 +0000 https://ppss.kr/?p=269742 “피카츄 좋아하세요? 저 피카츄 닮았단 소리 많이 듣거든요. 방전된 버전으로요.”

밤에 불을 끄고 이불을 덮은 채 누워 있으면 대체 왜 그때 그 말을 했는지가 갑자기 떠오른다. 과거, 소개팅에서 분위기 띄워보겠다고 꺼낸 실없는 개그를 말한 그 순간, 상대방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0.3초간 정적이 흐른 뒤 물 한 모금 마셨던 모습이 기억난다. 그날 이후 연락은 끊겼고, 그 장면은 지금도 불쑥 떠오른다.

또는 친구와의 대화에서 너무 오버하다가 “넌 진짜 안 웃겨, 알지?”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이불을 힘차게 걷어찬다. 바로 ‘이불킥’을 하게 되는 순간이다. 아마 누구나 흑역사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문득 밤에 이불 속에 들어갔는데 그 흑역사가 재생되는 바람에 이불을 걷어찬 경험 또한 말이다. 그런데 여러분은 아는가? ‘이불킥’에도 우리가 미처 몰랐던, 심리학적인 의미가 숨어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불킥을 대체 왜 하는 걸까?

이불킥은 대부분 밤에 찾아온다. 왜 그런 걸까? 낮 동안 사실 우리의 뇌는 끊임없이 바쁘다. 스마트폰 알림·업무 일정·사람들과의 대화·길거리 소음·광고 배너·밀려오는 카카오톡 메시지들까지. 집에 와서는 유튜브·OTT·SNS·쇼츠·릴스 등 온갖 자극적인 매체들이 뇌를 헤집어놓는다.

자극들이 머릿속에서 범람하는 사이, 응당 있어야 했을 자극에 대한 반응들, 이를테면 생각이라든지 감정이라든지 하는 것들이 따라 나왔어야 하는데 그것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뇌는 다가오는 자극을 처리하느라 바빴다. 그래서 정작 자극에 대한 나의 감상, 반응들이라든지 딸려 나온 감정적인 찌꺼기들은 ‘일단 나중에 보자’라는 식으로 뒤로 밀리게 된다.

그런데 밤이 되면? 모든 게 조용해진다. 불을 끄고, 핸드폰을 내려놓고, 귀에 들리는 건 냉장고 모터나 창밖의 바람 소리뿐이다. 외부의 잡다한 자극이 사라지자, 뇌는 드디어 자기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기 시작한다. 그때 작동하는 게 바로 ‘야간 리플레이 모드’다. 낮 동안 감정적으로 찝찝했던 순간들, 진짜 쥐구멍을 찾고 싶었던 순간들, 예를 들어 소개팅에서 분위기 잡겠다고 갑자기 “혹시 이름이 Wi-Fi세요? 자꾸 연결되고 싶어지네요”라는 말을 꺼냈다가 정적이 흘렀던 순간 같은 흑역사들이 하나씩 튀어나오기 시작한다. 정리하면 아무 외부의 자극이 없는 이 순간 비로소 뇌가 지난 생각과 감정들을 꺼내 볼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사실 ‘이불’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이불은 심리적 피난처의 역할을 한다. 이불 속에 숨은 상태라면 그 누구의 시선도 없고 평가도 없고 조롱도 없다. 바로 그런 심리적으로 안전한 환경이기에 나에게 가장 민감하고 예민했던, 차마 들춰볼 수 없었던 그런 흑역사들을 조심스레 꺼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그렇다. ‘수치심’이라는 사회적 감정은 오직 혼자일 때 가장 진하게 활성화되는 법이다.

 

이불 속에서 뭐 하세요? 후회와 사후가정사고

아오, 그냥 그때 입 닥치고 있었으면 됐는데.

이불킥에는 거의 항상 사후가정사고(counterfactual thinking)가 따라붙는다. 사후가정사고란, 심리학 용어로 우리가 과거의 특정 순간을 되짚으며, 그 상황에서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를 상상하는 인지적 과정을 말한다. 예컨대 우리가 후회를 어떤 식으로 하는지 한번 상상해보자. ‘그때 그냥 웃고 넘겼더라면’,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같은 식으로 만약 어떤 행동을 했다면·하지 않았다면 더 좋은·더 안 좋은 결과가 있었을 거라는 식으로 ‘대안 현실’을 상상해 보곤 하는데 이게 바로 사후가정사고다.

사후가정사고는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뉜다. 상향적(upward) 사고는 ‘더 나았을 결과’를 상상하면서 아쉬움과 후회를 만든다. 반면 하향적(downward) 사고는 ‘더 나빴을 수도 있는 상황’을 상상하면서 현재를 위로한다. 이불킥 상황에서는 상향적 사고가 압도적으로 많다. 뇌는 집요하게 나의 실수를 확대 재생산하며, ‘그때 그렇게만 안 했더라면 지금쯤 얼마나 달라졌을까’라는 가상의 시나리오로 현재의 나를 괴롭힌다.

으아아아아

그러나 사후가정사고를 단순한 자기 괴롭힘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사실 후회라는 감정은 미래를 준비하는 시뮬레이션 훈련장의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보자. 한 직장인이 제출한 보고서를 검토하는 상사 앞에서 “그 보고서, 제가 진짜 열심히 했단 말이에요…” 하며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순간 정적에 휩싸였고 상사는 조용히 서류를 덮었다. 그날 밤 그는 이불을 걷어차며 외친다. ‘아오 진짜, 울긴 왜 울어…’ 동시에 그는 계속 생각했다.

그때 그냥 조용히 메모만 했더라면 어땠을까? 고개만 끄덕이고 나중에 따로 피드백을 요청했더라면?

며칠 뒤 또 다른 보고서 제출일이 다가왔다. 이번엔 다르게 행동해 보기로 했다. 보고서를 더 철저히 검토하고, 예상 질문을 정리해 답변을 준비했다. 회의 날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피드백을 듣고, 필요한 부분만 간단히 질문했다. 회의가 끝나고 상사는 말했다.

이번 건 훨씬 정리 잘됐네. 좋았어.

이것이 사후가정사고의 핵심 기능이다. 심리학자들은 사후가정사고가 감정적 고통을 수반하더라도, 반복적으로 비슷한 상황에서 실수를 줄이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행동 의도를 강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본다. 즉, 후회는 일종의 인지적 GPS 재계산 신호다. ‘다음에는 이리 가지 말 것’이라는 방향 수정이다.

한편, 사후가정사고는 통제감을 높인다. ‘내가 그때 더 준비했더라면’, ‘말을 한 번 더 생각하고 꺼냈더라면’ 등의 생각은 개인이 자신의 노력을 통해 결과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 즉 지각된 통제감(perceived control)을 만들어낸다. 실제로 시험, 발표, 인터뷰 등에서의 실수 후에 사후가정사고를 한 학생들은 다음 과제에서 실제로 더 나은 성과를 보였다는 연구도 있다.

 

이불킥의 존재 이유: ‘나아졌다는 증거’

이불킥은 단순한 창피함이 아니다. 그보다 우리가 무언가를 놓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뇌가 스스로에게 보내는 신호이자 경고, 때론 피드백이다. 우리가 놓치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는 것, 나를 되돌아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때와 지금이 다르다는 것이 핵심이다.

당시엔 미처 몰랐지만 이불킥을 할 만큼 ‘눈치가 생기고’, ‘성장한’ 지금은 안다. 그 말이 왜 그렇게 촌스러웠는지, 그 행동은 왜 그렇게 어색했는지를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불킥이 찾아온다는 건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보다 더 나은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나의 판단 기준·표현 방식·사회적 감각이 예전보다 예민해졌다는 뜻이 아닐까?

과거 신입사원 시절에 했던 어이없는 실수들이 생각나서 이불킥을 한다면? 나는 그 이불킥을 가리켜 성장의 증거라 칭하고 싶다. 어제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보면 부끄러운 것처럼,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를 보며 또 다른 이불킥을 날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게 아니다. 오히려 ‘나는 지금 멈춰 있지 않다’는 강력한 증거 아니겠는가. 그러니 뜬금없는 흑역사 소환에 이불킥을 시전하더라도, 끝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보자.

그게 쪽팔린 줄은 이제 아는구나. 그래도 좀 컸네.

생각해 보자. 만약 여러분이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세상에 바라는 것도 없고, 누가 날 어떻게 보든 신경조차 쓰지 않는 상태라면 흑역사도 이불킥도 없었을 것이다. 창피함이란 감정 자체가 생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불킥을 한다는 건, 한때 그만큼 절실히 잘해보고 싶었다는 뜻이 아닐까. 그때의 나는 진심이었고, 순수했고, 어떻게든 인정받고 싶어서 무리수를 던졌다. 뒤늦게 보면 어이없고 민망할 수는 있어도, 결코 비웃을 일은 아닐 것이다. 치열하게 살고자 했던 나의 흔적이고, 오히려 자랑스러운 성장의 한 조각이니 말이다.

누워서 맞이하는 성장의 소회 / 출처: freepik

 

마무리: 흑역사? 아니 언젠가 ‘백역사’가 되리라

결국, 이불킥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민망함은 생존한 자의 특권이고 후회는 여전히 나아지고자 하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감정이다. 그러니 이불킥이 찾아올 때는 당황하지 말고 이렇게 대응하자.

먼저 웃자. ‘아 진짜 그때 왜 그랬지ㅋㅋ’라고 한바탕 실소라도 터뜨려라. 그건 감정의 압력밥솥을 살짝 열어주는 행위다. 그리고 다음엔 이렇게 되물어보자. ‘그때 내가 바랐던 건 뭐였지?’ 칭찬받고 싶었는지, 분위기 띄우고 싶었는지, 혹은 그냥 외롭지 않았으면 했는지. 욕망을 인식하면, 그 장면이 조금은 이해될 것이다.

흑역사는 언젠가 결국 지나가고, 우리는 그 바탕 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이다. 그러니 기꺼이 흑역사를 만들며(?) 살아가자. 인생에 그런 무리수는 꼭 필요하다.

원문: 허용회의 사이콜로피아


작가의 말

심리학적 글쓰기, 직장심리, 자존감, 목표관리, 마음건강, 메타인지, 외로움 극복, 공간활용의 심리학 등 다양한 주제로 강연 가능합니다. 출강 제안도 환영합니다. 허작가의 사이콜로피아 홈페이지에서 제 소개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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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학생의 자기효능감은 어떻게 변해왔을까? https://ppss.kr/archives/266958 Sun, 11 May 2025 23:44:23 +0000 http://3.36.87.144/?p=266958 심리학에서 다루는 개념 중에는 자기효능감(Self-efficacy)이라는 것이 있다. 워낙 유명한 개념이라 많이들 들어보셨을 것으로 생각된다. 자기효능감은 전설의 레전드 심리학자인 반두라(Bandura)에 의해 제안된 것으로, 자신이 목표로 한 어떤 일을 잘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을 의미한다.

자기효능감은 주관적인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보유하고 있더라도 자기효능감은 낮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능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아쉬운 성과를 낼 가능성이 있다.

반대도 성립한다. 아무리 부족한 능력을 갖고 있어도 자기효능감은 높을 수 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사회에서는 의외로 이런 사람들이 성과를 내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기도 하다.

Image by storyset on Freepik

 

자기효능감의 효능(?)

자기효능감이 유명해진 이유는, 그만큼 우리 삶에 매우 중요하며 또 성취 전반에 있어 매우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처음 개념이 제안된 이래로 지금까지 심리학자들은 자기효능감을 말 그대로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데 열심이었다. 생각할 수 있는 웬만한 개념들을 다 자기효능감과 연관시켜 연구하는 작업들이 반복되었다.

그 결과, 자기효능감이 높은 사람들은 회복탄력성도 높고, 스트레스 대처도 잘하고, 창의성도 높고, 성취동기도 높고, 우울하지도 않고, 사회불안도 덜 겪고, 정서도 풍부하고, 발달도 수월하고, 대학 생활 적응도 돕고, 정신적인 건강에도 도움을 주고, 문제해결 능력도 높여주고, 진로의사결정도 도와주고, 경제적 독립이나 배우자 탐색과 같은 인생 과업에도 긍정적인 작용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 외에도 자기효능감의 효능이 밝혀진 사례는 매우 많으나 다 적기는 어려울 것 같다. 논문이 아니므로 일일이 관련 레퍼런스를 인용하지는 않겠다)

 

자기효능감의 추이

때로 심리적 변화는 사회의 변화와 밀접히 맞물리기도 한다. 심리학은 사실 꽤나 미시적인 학문이지만, 사회의 변화가 개인들의 심리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 분명하기에 어떤 심리학자들은 거시적인 관점을 갖추고 심리학을 연구하기도 한다.

경제 발전을 통해 생활이 풍족해지고, 정신건강 서비스에 대한 접근도가 높아지면 국민들의 우울, 불안 수준은 평균적으로 낮아질 수 있다. 코로나19와 같은 펜데믹이 사회를 강타하면 그 영향으로 우울 수준이 올라갔다 내려가기도 한다. 혹은 개인주의 문화의 확산으로 인해 자기애적 성향이나, 상호독립적 자기 등의 변화가 집단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진행되었던 매우 흥미로운 심리학 연구를 한 편 소개하고 싶다. 한국 대학생들의 자기효능감 추이를 1999년부터 2022년까지, 추적하여 변화 양상을 분석한 연구가 있다.

위 논문에서는 시교차적 메타분석(cross-temporal meta-analysis)이라는 기법이 쓰였다. 학술적인 이야기는 차치하고 간단하게 말하면, 정해진 기간(본 논문에서는 1999-2022) 동안 ‘자기효능감’이 측정된 논문들을 싸그리 모아서, 자기효능감 점수가 연도에 따라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알아봤다고 이해하면 된다. 당연하겠지만 똑같은 심리척도를 사용한 논문만 수집되며, 각 논문에서 측정된 사례 수가 커질수록 높은 가중치를 설정하여 분석을 진행하게 된다. 그럼 분석 결과는 어땠을까?

조수진, 박혜경, 2023

생각보다 연도에 따른 자기효능감 평균 점수의 기울기가 가파르지 않다. 아주 미세하게 연도에 따라 상승한 것처럼 보이지만 거의 수평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실제로도 저자들에 따르면 안타깝게도 가중회귀분석 결과가 통계적으로 유의미하지 않았다고 한다. 즉, 적어도 본 연구에 따르면 1999년부터 2022년까지 한국 대학생들의 자기효능감은 변하지 않았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필자 나름대로 해석해 보자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리나라의 GDP도 증가하고 평균 생활 수준 자체는 이전보다 올라갔을지 모르지만, 새로운 사회 문제가 끊임없이 대두됨에 따라(청년 실업, 저출산-고령화, 청년 고독사, 문과 전멸, 전문직 시험 강세, 공무원 직업 인기, 빈부 격차 등등) 대학생들이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인생의 난이도는 결코 이전보다 낮지 않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즉, 이전 세대의 입장에서야 ‘이전보다 살기 참 좋아졌어~’, ‘젊은 사람들이 결혼하고 애를 낳아야지 쯧쯧’, ‘예전엔 더 힘들게 살았는데 요즘 애들은 뭐가 그리 불만인지~’ 이런 생각을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글쎄, 정작 청년들이 피부로 느끼기에 비록 배고파 굶을 일은 없어질 지언정, 제대로 사람구실 하고 살아가기가 여전히 힘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야 자기효능감은 높아지려야 높아질 수 없을 것이다. 취업도 어렵다 어렵다 하고, 연애하고 결혼하고 출산은 꿈도 못 꾼다 하고, 내 집 마련은 로또같다고 하는데 내가 저 인생의 퀘스트들을 잘 해낼 수 있으리라는 그 ‘주관적 믿음’이 어디에서 생기냐는 말이다. 오히려 돈을 못 벌겠다, 차라리 그냥 즐기기라도 하자며 YOLO나 부르짖고 있는 현실 아니겠는가.

이렇게 본다면, 자기효능감이 그간 떨어지지 않고 유지라도 되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싶기도 하다.

 

참고

자기효능감이 십수 년간 늘어나지 않았다는 결과는 잠정적인 것일 수 있다. 저자들은 조사 기간이 충분히 길지 않아서, 실제로는 자기효능감이 시간의 변화에 따라 증가해 왔음에도 그것이 포착되지 않았을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다는 점을 일러둔다.

원문: 허용회의 사이콜로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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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진상’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https://ppss.kr/archives/268384 Thu, 10 Apr 2025 04:09:09 +0000 http://3.36.87.144/?p=268384

A씨는 원래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큰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월급을 받고 계획적으로 소비하며 살아갔다. 그런데 어느 날, 회사가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몇 개월 치 퇴직금이 나왔지만,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저축은 바닥을 드러냈고, 생활비는 점점 빡빡해졌다.

재취업을 위해 이력서를 돌리고, 가급적 절약하며 살려고 했다. 하지만 면접에서 번번이 떨어지고, 은행 잔고가 줄어드는 걸 보며 불안이 커졌다. 결국 실업급여와 기초생활수급 같은 복지제도를 알아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나라에서 이렇게라도 지원해 주니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몇 개월이 지나자 점점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로는 부족한데?” ”

“이건 내가 받을 권리가 있는 거잖아.”

“나라가 나한테 해준 게 대체 뭐지?”

조금씩, 사고방식이 변하기 시작했다.

 

‘가난한 진상’의 사고구조

일부의 ‘가난한 진상’은 왜 진상처럼 행동하게 될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이들은 자신이 받는 복지나 지원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당연히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면 ‘사소한’ 행정 절차나 규정 같은 건 부차적인 것이다. 아무리 규정을 근거로 들며 이 이상 해줄 수 없다고 설득해 봐야 가난한 진상들에게 그런 말은 먹히지 않는다. 오히려 규정 자체도 문제라고 여길 가능성이 높다. 왜? 규정은 나를 일부러 안 도와주려고 누군가와 누군가가 짜고 치는 음모니까.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가로막는 적처럼 느껴지니까.

가난한 진상은 무례한 사람들일까? 겉으로는 그래 보일 수 있다. 어쨌든 요구가 먹히지 않으면 과격한 행동도 서슴지 않는 그런 사람들도 분명 있으니까 말이다. 사회복지 계통에서 일하고 계신 많은 분들이 피로와 고통을 호소하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다. 하지만 ‘무례하다 – 개입/처벌해야 한다’로 이어지는 경로로 빠져서는 우리는 ‘가난한 진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가난한 진상은 단순한 무례함, ‘못 배워먹어서’라기보다는 심리적 방어 기제와 사고방식의 변화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가난을 자신의 무능력이나 잘못의 결과로 받아들이기보다, 사회적·구조적 실패로 돌리고 싶은 마음이 강해지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러진 않았을 것이다. 아직 희망이 꺼지지 않았던 시절, 실패와 가난은 ‘내 탓’이었고, 그래야만 했다. 나만 더 잘하면, 나만 더 정신 차리면 가난에서 극복할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가난이 장기화되면 어떨까? 더 이상의 내 탓은 고통스럽다. 내 탓만 반복한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가난 탈출에 대한 희망이 점차 꺼져가는 바로 그 시점, ‘가난한 진상’에 대한 유혹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세상이 나한테 해준 게 뭔데? 꼭 나만 잘못한 거야?

‘세상이 나한테 해준 게 뭔데?’라는 생각이 자리 잡으면, 복지의 손길에도 감사보다는 당연하다는 태도가 먼저 형성된다. 지원을 받으며 ‘최소한 이 정도는 해줘야지’라고 생각하고, 나아가 ‘내가 받은 피해에 비하면 이 정도 지원은 너무 적다’는 불만이 생긴다. 사고방식이 이런 식으로 자리 잡으면, 복지를 받을수록 더 많은 요구를 하게 되고, 지원이 끊기거나 기대만큼 주어지지 않을 경우 강한 반감을 느끼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책임은 점점 흐려지고, 모든 원인이 사회나 국가에 있다고 믿는 태도가 굳어진다. “내가 이렇게 된 건 내 잘못이 아니야. 시스템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 이런 생각이 자리 잡으면서, 복지 정책이 충분하지 않다고 느낄 때마다 더 큰 분노가 형성된다. 결국 복지를 받는 것이 일종의 ‘당연한 권리’가 되고, 이 권리가 충족되지 않으면 사회가 자신을 홀대한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출처: freepik

 

경제적 불안이 사람을 어떻게 바꿔놓는가?

이제 원점으로 돌아갈 차례이다. 결국 가난한 진상을 만드는 건 ‘가난’이다. 가난은 단순히 돈이 부족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가난, 그중에서도 장기화한 가난은 곧 ‘트라우마’다. 극적인 계기를 맞아 가난이 해결된다 해도, 가난이 남긴 상처는 쉽게 회복되는 것이 아니며, 가난은 인간의 사고방식과 행동을 근본적으로 바꿔놓는다.

즉, 경제적 불안은 대인관계·도덕적 판단·의사결정 방식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경제적 불안은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변화시키는가?

 

1) 생존 모드의 발동

첫째, 가난한 사람들은 장기적인 목표보다 단기적인 생존에 집중하게 된다. 이를 터널 비전(Tunnel Vision)이라고 한다. ‘당장 오늘, 내일 어떻게 살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면서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는 것이 어렵고, 결과적으로 즉각적인 욕구 충족이 더 중요해진다.

예를 들어, 당장 월세가 밀려 퇴거 위기에 처한 사람이 ’10년 뒤를 위한 재테크’를 고민할 여유가 있을까? 그보다는 오늘 하루를 버티기 위해 대부업체에서 고금리 대출을 받거나, 일회성 수입이라도 당장 생기는 일을 찾아 나설 가능성이 크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점점 더 장기적인 사고를 하기 어려워진다. 미래를 준비할 만한 여유가 없으니 ‘지금’을 해결하는 것에만 몰두하게 되는 것이다. 즉 한 달 후의 일을 걱정하기보다는, 오늘 식사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순위가 되는 것인데, 이렇게 생존 모드가 활성화되면 절약보다는 즉각적인 소비를 선택하는 경향이 높아지고, 돈이 들어오면 곧바로 사용해 버리는 패턴이 굳어진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이는 단순한 나태함이 아니라, 장기적인 보상을 고려할 여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뇌가 단기적인 보상에 더욱 민감해지는 결과라고 볼 수 있다.

 

2) 자기 개념의 붕괴, 그리고 대물림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가난을 죄악으로 규정하는 자본주의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겠고, 가난한 사람들이 행동적으로 보여주는 ‘꾀죄죄하고, 구차하고, 유치하고, 한심한 모습’에 반발감을 느끼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고정관념과 편견을 만든다. ‘가난한 사람들은 노력을 안 한다’, ‘가난은 게으름의 결과이다’ 등의 편리한 공식을 만들어 싸잡아 비난하고 외면하는 것이다. 게다가 가끔 뉴스를 보면 ‘가난한 진상’이 등장한다. 그들이 사회복지사에게, 봉사자에게, 공무원들에게 어떤 ‘진상 짓’을 하는지를 본다. 가난한 진상의 소식들은 고정관념·편견을 재생산, 강화하는 역할을 맡는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항변한다. ‘진정한 가난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나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는 ‘빈곤 포르노’는 실상을 반영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이는 심리학적으로 나름 일리 있는 설명이다. 사실 가난이 길어지면 단순히 경제적 어려움을 넘어,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 근본적으로 변화한다. 처음에는 ‘내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나아질 거야’라는 희망이 있었지만, 반복적인 실패와 좌절을 겪으며 ‘내가 뭘 해도 소용없다’는 생각이 깊어지게 된다. 이는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으로 이어진다.

사람들은 흔히 가난을 ‘노력의 부족’으로 해석하지만, 가난이 장기화되면 개인의 효능감(self-efficacy) 자체가 무너진다. ‘나는 무능하다’, ‘나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인식이 굳어지면서, 새로운 도전을 시도할 동기를 잃어버린다. 가난이 사회적 낙인과 결합하면, 개인은 자신을 더욱 낮게 평가하게 된다. ‘나는 가치 없는 사람이다’, ‘사회는 나 같은 사람을 원하지 않는다’는 자기개념(self-concept)의 왜곡이 일어나고, 결국 이는 사회적 관계 회피와 경제적 재기 의지의 약화로 이어진다.

출처: freepik

더 큰 문제는 가난의 대물림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세대를 거쳐 대물림되면, 가난은 단순한 재정적 문제를 넘어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심화된다. 유년기부터 경제적 불안이 일상화된 사람들은 장기적인 목표를 설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합리적인 재정 관리를 배우지 못한 채 동일한 패턴을 반복하게 된다. 결국 가난이 지속되는 한 이를 극복할 동력조차 상실하는 악순환이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마치며

가난은 단순한 경제적 상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사고방식과 삶의 태도,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까지 바꾸어 놓는다. 우리는 종종 가난을 개인의 잘못으로 여기고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 냉소적인 시선을 보낸다. 하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무기력과 사회적 낙인은 단순한 의지로 극복하기 어렵다.

사회는 가난을 방치할 수도 있고, 그것이 개인의 몫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가난의 대물림을 방치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가난이 세대를 넘어서며 굳어질 때, 우리는 단지 한 사람의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 세대의 가능성까지 함께 소멸시키는 선택을 하는 셈이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가난을 완전히 없애겠다는 비현실적인 목표가 아닐지도 모른다. 다만 누군가가 한 번 가난해졌다고 해서, 그가 그리고 그의 아이들이 영원히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도록 만드는 사회라면 우리는 과연 공정한 사회를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가난의 ‘얼굴’

원문: 허용회의 사이콜로피아


작가의 말

심리학적 글쓰기, 직장심리, 자존감, 목표관리, 마음건강, 메타인지, 외로움 극복, 공간활용의 심리학 등 다양한 주제로 강연 가능합니다. 출강 제안도 환영합니다. 허작가의 사이콜로피아 홈페이지에서 제 소개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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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연락 좀 자주 해라!” 오랜만에 연락 받았을 때 하면 안 되는 말 https://ppss.kr/archives/268420 Sun, 16 Feb 2025 15:04:45 +0000 http://3.36.87.144/?p=268420

야, 연락 좀 자주 해라.
연락 좀 하고 살자.
왜 이렇게 오랜만에 연락해!

어느 주말이었습니다. 간밤에 꿈속에 나타난 옛 친구가 있어서 궁금한 마음에 먼저 전화를 걸었습니다. 실로 오랜만의 연락입니다. 그런데 벨이 울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가 받자마자 “야, 연락 좀 자주 해라. 나 까먹은 거 아냐?”라고 투덜거렸습니다. 순간 기분이 묘했지요. 반가우면서도 지적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조금 씁쓸했달까요.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에휴, 본인도 나한테 연락 한번 안 했으면서… 내가 연락 안 한 거나, 네가 연락 안 한 거나 피장파장 아닌가?

그런데 문득 생각해 보니, 저 역시 누군가에게 “왜 이렇게 오래 연락이 없어? 연락 좀 하고 살자”라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단순히 반가운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고 여겼지만, 상대방 입장에서는 어떻게 들렸을지 생각해 본 적은 많지 않았지요. 그러자 “상대방도 분명 이런 감정을 느꼈을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친구가 던진 “야, 연락 좀 자주 해”라는 말은 어쩌면 아주 사소한 토라짐이나 친근한 투정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오랜만에 들은 이 한마디가 왜 거슬리는지 곰곰이 떠올려 보았습니다.

“야, 연락 좀 자주 해라!” / Image by freepik

연락은 쌍방향이고 서로 노력해야 한다는 점은 다들 알지만, 왜 마치 한 사람만 노력하지 않은 듯이 받아들여지는 걸까요. 심리학을 공부하며 접했던 의사소통과 감정에 대한 여러 관점을 떠올리면서, 자연스럽게 ‘연락’이라는 주제를 깊이 생각해 보고 싶어졌습니다.

 

‘연락’이라는 마음의 다리

연락은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연결고리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가족, 친구, 연인, 지인 등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과의 유대감을 이어가는 데 꼭 필요한 도구이기도 합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상호의존성(Interdependence)이란, 서로가 마음을 주고받으며 이뤄지는 자연스러운 유대감입니다. 궁금해서 먼저 연락을 하면 상대방도 내 안부를 묻고, 이렇게 주고받는 흐름 자체가 관계를 유지하는 원동력이 되죠. 한편, 상대방에게 건네는 작은 관심과 호의는 교류분석에서 말하는 ‘긍정적 자극(Strokes)’으로 작동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지내?”라는 짧은 메시지가 주는 온기는 생각보다 크거든요.

다만, 이 따뜻함이 책망 섞인 표현으로 바뀔 때는 오히려 불쾌감과 부담감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연락 좀 자주 해”라고 들었을 때 느끼는 압박감

반가움에서 비롯된 표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듣는 순간 왠지 모를 죄책감이나 방어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첫째, 의무감 vs. 자발성 문제입니다. 연락은 자발적으로 해야 서로가 편안합니다. 그런데 “연락 좀 자주 해”라는 말은 상대에게 ‘너는 연락할 의무가 있다’라고 전달하는 듯한 느낌을 줄 수 있습니다. 내가 보고 싶다는 마음을 솔직히 드러내기보다, 연락을 하지 않은 사람에게 약간의 책임을 묻는 듯 비칠 때도 있는 거죠.

둘째, “왜 이렇게 연락이 없었어?”라는 표현에는 은근히 “내가 서운하다” 혹은 “네가 잘못했다”라는 의미가 묻어납니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안부를 물어보는 게 아니라 책망을 듣는 기분이 들 수 있어, 마냥 반갑지는 않을 때가 있죠. 나도 나름대로 바빴던 사정이 있었을뿐더러, 어쨌든 상대방도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나에게 연락을 안 한 거잖아요. 모처럼 큰맘 먹고 연락을 딱 했는데, 연락이 왜 없었냐고 뭐라 한 소리 듣는다면, 아무리 의도가 좋았다 해도 오해를 사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Image by storyset on Freepik

물론 직장 상사나 웃어른으로부터 “자주 연락해”라는 말을 듣는 건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등한 관계인 친구나 동료 사이에서 이러한 말이 나올 경우, 괜히 불편한 지시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연락 좀 자주 해라, 내가 싫어진 거야?

하지만 정작 저 말을 한 사람 입장에서는 그걸 대개 모른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혹여 상대방이 언짢아하는 기색을 보이면 ‘난 반가워서 그런 건데 왜 저러지’ 생각하며 오해를 갖게 되는 거죠. “왜 속 좁게 그러냐?”라고 되려 역공을 가하기도 해서, 결과적으로 오랜만에 연락한 일이 도리어 관계를 해치는 원인이 되는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대신 건네면 좋은 말

심리학에서 말하는 ‘심리적 안전감(Psychological Safety)’은 누구든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해도 비난받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안전감은 사실 사소한 표현 하나로도 흔들릴 수 있습니다. 위에서 계속 말씀드린, 표면적인 비난(“왜 연락을 안 하니?”)도 그 예시겠고요.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게 더 이롭습니다.

1. “바쁠 텐데 이렇게 연락해 줘서 고마워.”

이러면 상대방이 늦게라도 전화를 줬다는 사실 자체에 감사함을 전할 수 있습니다. 다음 연락도 훨씬 부드러워지죠.

2. “다음에는 내가 먼저 연락할게.”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노력해야 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돕고 이해하는 동등한 관계라는 느낌이 전해질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훨씬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겠죠.

3.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어.”

진심으로 너의 근황을 궁금해하고 있었다는 표현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상대방이 연락이 늦었던 이유를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고, 친밀함도 쌓을 수 있습니다.

왜 이 말들이 더 효과적일까요? 저는 이런 말들이 ‘연락의 쌍방향성’, ‘호혜적 성질’을 암시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적 연락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상대방이 부모님이나 중요한 집안의 어른이 아닌 다음에야 연락이 의무는 아닙니다. 서로 안부를 주고받으며 유대를 다지는, 그러나 어느 한쪽이 부담스럽다면 강요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죠.

그래서 “연락 좀 해”라는 말은 상대방에게만 책임을 전가하는 느낌이지만, “다음에는 제가 먼저 연락할게요”는 서로가 같이 노력하자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습니다. 대등한 관계에서는 이런 방식이 훨씬 자연스럽고 건강하게 느껴집니다.

“바쁠 텐데 이렇게 연락 줘서 고마워.”라고 말하면 훨씬 더 기분이 좋아질 겁니다. / Image by freepik

 

마치며

우리가 매일같이 쓰는 말 중 상당수가 의도치 않게 상대방의 마음을 건드리기도 합니다. “연락 좀 자주 해라” 역시 그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나름대로는 친근감의 표현입니다. 하지만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때, 상대방에게 미묘한 압박감이나 서운함을 줄 수 있다는 점을 떠올리면 좋겠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정말로 전하고 싶은 마음은 무엇일까?”라고 스스로에게 묻는 일입니다. 상대방을 책망하고 싶은 마음인가요, 아니면 진심에서 우러나온 반가움인가요?

그 차이를 분명히 알고, 더 다정한 방식으로 꺼내 보시면 어떨까 합니다. 그러면 ‘연락’이라는 두 글자가 더 이상 부담이 아니라 반가움과 편안함의 매개체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원문: 허용회의 사이콜로피아


작가의 말

심리학적 글쓰기, 직장심리, 자존감, 목표관리, 마음건강, 메타인지, 외로움 극복, 공간활용의 심리학 등 다양한 주제로 강연 가능합니다. 출강 제안도 환영합니다. 허작가의 사이콜로피아 홈페이지에서 제 소개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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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긁?’의 심리학적 의미 https://ppss.kr/archives/268398 Mon, 03 Feb 2025 03:26:29 +0000 http://3.36.87.144/?p=268398

요즘 인터넷 여기저기에서 “긁?”이라며 상대방에게 날을 세우듯 말을 건네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님 지금 긁혔음?
아, 이건 제대로 긁혔는데?
긁?

…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대체 왜 이런 표현을 쓸까 궁금해지더군요. 묘하게 신체적 상처와 연결돼 있는 듯한 ‘긁다’와 ‘긁히다’가, 감정적인 영역에서 도발과 상처를 묘사하는 용어로 자리 잡았습니다. 왜 하필 “긁”일까요? “찌르다”, “때리다”, “쑤시다” 같은 표현도 많은데 말입니다.

 

왜 ‘긁?’을 쓰며 도발하는 걸까?

사람들이 인터넷상에서 “긁?”이라며 시비(?)를 거는 이유 중 하나는, 이 표현이 단순한 욕설이나 강도 높은 비난보다 훨씬 ‘재미있고 미묘하게’ 상대방의 신경을 건드릴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예를 들어 “야, 빡쳤냐?”라고 직설적으로 묻는 것보다, “너 혹시 긁힌 거 아님?ㅋㅋ” 하는 식이 훨씬 자극적인 동시에 미묘하게 굴욕감을 주죠. 정색하며 ‘기분 나쁘다’고 항의하기도 애매한 애드리브 같은 느낌이랄까요.

또, “긁?”이라는 표현은 그 자체로 짧고, 듣는 순간 귀에 꽂힙니다. ‘찌르다’나 ‘때리다’는 물리적 통증을 연상시키지만, ‘긁히다’는 생채기가 나긴 했는데 치명적 부상은 아닌 상태를 떠올리게 해요. 그래서 상대방 심기를 은근하게 건드리는 언어적 ‘쟁기질(?)’이 가능해지는 것 같습니다.

인터넷에서 특정 표현이 유행할 때는, 그 표현이 현시대의 사회적·문화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SNS로 대표되듯 모두가 바쁜 세상 속에서 빠른 의사소통을 원하는 한편, 감정을 예리하게 건드려 손쉽게 재미를 얻으려는 심리도 깔려 있죠. 그렇다고 날것의 ‘욕’으로 도배할 수도 없고, 조금은 ‘재치 있게’ 상대방을 웃으며 건드리는 전략이 필요한 겁니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긁?”은 우리 사회가 점점 더 ‘감정 소통’에 민감해지고 있다는 점도 시사합니다. 예전에는 “열 받았냐?”라든지 “화났어?”처럼 직접적으로 물어보거나 조롱하곤 했죠. 하지만 지금은 조금만 틈이 생겨도 서로의 감정을 툭툭 건드리며, 때론 그것이 곧 밈이 되고 문화가 되는 것 같습니다.

 

상대방을 “긁?”하는 사람들의 심리

심리학적으로 보면, 사람들은 종종 ‘미묘한 공격성’으로 타인을 건드려서 자극을 탐색하려고 합니다. 아주 대놓고 공격하기에는 부담되고, 그렇다고 완전히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기엔 뭔가 심심한 거죠. 그래서 한 번 떠봤으면 좋겠는 마음이 생기는데, 이때 쓰기 딱 좋은 표현이 “긁?”이 됩니다.

또,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확인하는 과정 자체가 재미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긁혔음?”이라고 했을 때 정말 “아니, 나 안 긁혔어”라고 부정하면서도 조금은 신경이 쓰인다면, 이미 게임에서 반쯤 진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이는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끼리 서로 “울어?”하고 놀리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울어? 할 때의 놀리는 맛이 이젠 긁?으로 돌아왔네요.

 

‘긁혔다’는 것은 심리학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긁혔다”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어딘가 얕은 상처를 입은 느낌을 받습니다. 손톱자국 정도의 사소해 보이지만 은근히 쓰라린 상처 말이죠. 심리학적으로 ‘긁힌다’는 건, 누군가가 내 마음의 약점이나 콤플렉스를 살짝 건드렸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그렇게까지 심각하지는 않아도, 무시받거나 우습게 보였다는 생각이 들면 우리의 자존감이 가벼운 찰과상을 입게 되죠.

“긁히다”는 순간적인 당혹감과 불쾌감을 동시에 안겨줍니다. 하지만 너무 직접적으로 “속상해 죽겠네!”라고 표현하기엔 약간 과해 보이고, 그냥 아무 일 없는 척 넘기기엔 은근히 기분 나쁜 상태인 거죠. ‘긁혔다’는 표현이 딱 그 미묘한 감정의 스펙트럼을 잡아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가시에 긁혔다”든지 “유리 조각에 살짝 스쳤다”든지, 우리 일상에서도 ‘긁히다’는 사건은 대개 작은 생채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상처는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은근히 오래 아립니다. 그처럼 “아주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계속 신경 쓰이는 상태”를 적확하게 표현하기엔 ‘긁혔다’가 딱 들어맞는다고 느껴집니다.

콤플렉스 이야기가 나온 김에 분석심리학자 칼 융(Carl Jung)을 언급해 보고 싶은데요, 융은 인간의 심리적 구조를 개인적 무의식과 집단적 무의식으로 나누며, 그 속에 억압된 감정, 트라우마, 또는 콤플렉스가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이 중 콤플렉스는 무의식에 뿌리를 두고 우리의 행동과 감정을 강하게 흔들 수 있는 심리적 요인입니다. 누군가의 말이나 행동이 우리가 가진 콤플렉스를 자극할 때, 마치 얕게 긁힌 상처처럼 우리의 자존감은 가벼운 찰과상을 입게 됩니다.

이러한 상처는 겉으로 보기에는 사소해 보일지 모르지만, 심리적 차원에서는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상징적 그림자(shadow)를 드러내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융의 관점에서 ‘그림자’란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려워 억압해 온 부정적인 성향이나 감정의 집합체로, 우리의 자아(self)가 인정하지 못한 부분들입니다. 누군가의 말이 우리를 ‘긁는’ 순간, 그 반응은 단순한 감정적 반발을 넘어, 내면의 그림자와 마주하게 하는 통로가 될 수도 있다는 거죠.

 

가벼워 보이지만 은근히 쓰라리고, 쉽게 사라지지도 않는

언어가 주는 ‘느낌’이 한 시대를 풍미할 때가 있습니다. 한때 “즐~”이 인터넷 공간을 떠돌며 누군가를 삐딱하게 놀리는 말로 유행했던 것처럼, 지금은 “긁?”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셈이죠. 그리고 이 흐름은 계속 변주를 거듭하며 또 다른 표현으로 탈바꿈할 겁니다.

예전에 ‘즐~’이 참 재미있었다.

다만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면, 이러한 재미와 도발이 한 끗 차이로 상대방을 심각하게 상처 입힐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재미나 유머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작은 긁힘이 돌이킬 수 없는 응어리가 되지 않도록 조절하는 것도 중요하니까요.

결국, ‘긁힌다’는 건 우리 마음의 작은 자존심에 손톱으로 콕 찍고 지나가는 일과 같습니다. 가벼워 보이지만 은근히 쓰라리고, 무시하려 해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 상처를 남기죠. 그래서 사람들은 상대방을 ‘은근히 놀리고’, 상대방이 “긁혔는지” 확인하며 은밀한 우위를 점하려 합니다.

하지만 이 ‘긁?’ 문화는 단순히 싸움을 일으키는 도발이 아니라, 누군가의 감정을 알아보고 교감하고자 하는 사회적·문화적 현상일 수도 있습니다. “너는 과연 이 말에 얼마나 예민해질까?”라고 떠보는 심리 말이죠. 중요한 건 그 선을 지키는 겁니다. 말로 긁고 긁히는 걸 완전히 없앨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무심코 뱉는 한 마디가 누군가에게 영영 아물지 않을 상처가 되지 않도록, 서로 조금씩 조심하고 헤아리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결국은 ‘긁’이냐 ‘때리기’냐의 표현 차이가 아니라, 우리 마음속 배려와 재미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일 테니까요. 그러니, 누군가가 “긁?” 하고 묻거든, 가볍게 흘려보낼지 혹은 정색하고 대응할지는 스스로의 기분과 상황을 잘 살펴본 뒤 결정하는 게 좋겠습니다. 살짝 생기는 긁힘은 금방 아물지만, 때론 후벼 파듯 오래 남을 수도 있으니까요.

“긁?” 한 번에 우르르 몰려가는 것이 아니라, 유연하게 받아넘기고 서로 예의를 지켜 나가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또 하나의 작은 지혜가 아닐까 싶습니다.

원문: 허용회의 사이콜로피아


작가의 말

심리학적 글쓰기, 직장심리, 자존감, 목표관리, 마음건강, 메타인지, 외로움 극복, 공간활용의 심리학 등 다양한 주제로 강연 가능합니다. 출강 제안도 환영합니다. 허작가의 사이콜로피아 홈페이지에서 제 소개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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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할 때 피해야 할 최악의 조합, 완벽주의와 마감기한 https://ppss.kr/archives/268386 Thu, 16 Jan 2025 02:54:15 +0000 http://3.36.87.144/?p=268386 시험공부하느라 날밤 지샌 경험, 기한 맞추느라 밤 새본 경험. 개인적으로 필자는 위와 같은 경험이 잦았다. 아마 필자뿐만 아니라 정해진 기간 안에 생각하고 일해야 하는 많은 사람들이 경험해 봤을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기한의 압박 속에 몸을 갈아 넣으면서 문득 생각하게 된 최악의 조합이 있다.

완벽주의 + 마감기한 준수 = 최악

다름 아닌 완벽주의와 마감기한 간의 환장의 콜라보다. 사실 완벽주의와 마감기한 중 하나만 존재한다면 의외로 그리 나쁠 게 없다. 아니, 오히려 더 훌륭한 성과를 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Image by KamranAydinov on Freepik

 

1. 완벽주의 O, 마감기한 X

여러분은 그 일을 잘 해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하지만 시간은 무제한이다. 그럼 어떨 것 같은가? 기한이라는 게 전혀 없으므로 여러분은 그 일을 당장 하지 않아도 된다. 과장 좀 보태자면 한 1년 정도는 빈둥빈둥하다가, 그제야 슬슬 구상에 들어가도 된다. 천천히 조금씩 해보고, 고치고, 해보고, 고치고, 귀찮으면 그냥 놔두고, 그랬다가 마음이 내키는 날에 다시 조금 해보고, 이런 식으로 천천히 완성해 가는 것이다.

기한이 없으니 마음이 편안하다. 기한에 쫓길까 불안하지도 않다. 일 때문에 잠을 줄여야 할 일도 없고, 일 때문에 내 다른 일상이 방해받지 않아도 된다. 천천히 공을 들여 일하는 것이므로 급하게 날림으로 처리한 경우에 비해 작업의 퀄리티도 좋을 것이다. 여러분은 기한 내에 여유롭게 완성도 있는 결과물을 내고, 좋은 보답을 받으면 된다. 이런 상황에서 완벽주의라는 것은, 결과물의 퀄리티를 높여주는 소중한 자원이다.

 

2. 완벽주의 X, 마감기한 O

마감기한만 있다고 해보자. 공부를 열심히 할 필요, 일을 잘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가정해 보자. 그럼 어떨까?

솔직히 필자는 엄청 마음이 편할 것 같다. 물론 지금까지 해 온 습관(완벽주의적 성향)이 있으므로 아예 개판으로 일을 처리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잘하지 않아도 된다면, 그 일에 내가 충분한 시간과 노력과 고민을 쏟을 이유가 없다. 그냥 마음껏 놀고먹으며 지내다가 마감기한 코앞에 닥쳐 그냥 딱 10분만 쓱싹쓱싹, 대충 발로 작업하여 결과물을 내면 끝이다.

이렇게 되면 완벽주의가 없는 마감기한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마감기한의 존재’ 자체는 소중하다. 마감기한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생각은 머릿속에서만 맴돌 뿐, 어떤 가시적인 성과도 세상에 등장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점은, 완벽주의가 없는 마감기한이 때로 창의적인 결과물의 비결이 된다는 점이다. 일을 정말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면 우리는 굳이 형식과 격식을 따질 필요가 없다. 매뉴얼도 필요 없고, 기존의 관행조차 필요 없어진다.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다만 정해진 시간 안에 ‘무엇이든’ 눈에 보이는 것을 내놓으면 그만이다. 더 이상 관행을 좇지 않는 우리는 이제 마감기한을 앞두고 자신만의 창의적인 ‘날림’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어, 진짜 대충 했는데 생각보다 결과가 괜찮잖아?

뇌 비우고 그냥 한 건데 사람들이 좋아해 주잖아?

아마 여러분도 분명 이런 경험이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진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한 일인데, 마음 내키는 대로 한 일인데 생각보다 결과물이 괜찮았던 경험 말이다. 필자는 이것이 바로 ‘순수한 마감기한의 힘’이라 생각한다. 완벽주의가 빠지고 마감기한만 남았을 때 우리는 기존과 전혀 다른 의외의 성과물을 만들 수 있다.

 

3. 완벽주의 O, 마감기한 O

이제 본론이다. 완벽주의와 마감기한의 조합은 앞서 이야기했든 최악의 궁합이다. 퀄리티 면에서도, 창의성 면에서도.

가끔 필자는 마감기한의 존재 자체가 싫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난다. 하지만 필자는 그들의 솔직한 속내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마감기한 자체를 싫어하는 게 아니다. 마감기한 안에 ‘최소한 납득이 가능할 정도의 퀄리티’, 혹은 ‘본인이 만족할 만한 퀄리티’, ‘상사에게 혼나지 않을 정도의 퀄리티’를 갖춘 결과물이 나와야 한다는 점이 싫은 것이다.

어느 정도는 일을 ‘잘해야 한다’는 생각과 마감기한의 압박이 합쳐져 나타난 강박이자 불안이다. 우리가 단지 어느 정도의 완벽주의를 평소 내면화하여 그것을 잘 의식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 마감기한 탓만 하는 것일 뿐이다. 원래는 ‘완벽주의와 마감기한이 싫어’라고 해야 하는데, 완벽주의 존재를 그만 깜박 잊고 나서 ‘마감기한이 싫어’라고 말하는 것이다.

완벽주의와 마감기한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 사실 완벽주의 성향이 강할수록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믿게 된다. 1번만 고쳐도 되는 걸 100번은 고쳐야 된다고 믿게 되니 어찌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래서 완벽주의 성향이 강할수록 마감기한을 다른 사람보다 더 짧게 지각하며, 그만큼 마감기한의 압박을 더 많이 받을 수밖에 없다. 결국 어떻게든 부족한 시간 안에 만족할 만한 퀄리티를 내기 위해 완벽주의자들은 과감한 결단을 내린다.

  • 커피 퍼마시기
  • 밤잠 줄이기
  • 정신 에너지 엄청 소모하기
  • 주변 일상 팽개치기
  • 가족에게 소홀히 하기
  • 먹을 것을 줄이기 등등

밤을 새우고 무리하면서 낸 결과물이 그리 뛰어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어쩌다 몸을 갈아 넣었을 때는 그에 보답하듯 괜찮은 결과물이 나와줄 수 있지만 이와 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계속 몸을 갈아 넣다 보면 분명 한계는 온다. 여러분이 열심히 작업한 결과물에 ‘피곤한 티’, ‘쩔어있는 티’가 배어나게 된다.

퀄리티라도 뛰어나면 다행이다. 마감기한에 쫓기는 완벽주의자들은 오로지 그 일 하나만을 위해 헌신하느라 다른 많은 것들을 이후의 대가로 지불해야 한다. 일하느라 미처 돌보지 못했던 자신의 건강, 삶의 여유, 가족과의 시간, 삶의 만족감, 번아웃 등등 많은 부작용이 찾아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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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완벽주의와 마감기한, 둘 중 하나는 내려놓아야 한다. 당장은 어렵겠지만, 또한 현실적인 여러 사정 때문에 완전히 한쪽을 포기하는 게 불가능할 수 있지만 어쨌든 그 둘을 여러분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 놔야 한다는 것이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그리고 둘 다 욕심내지 말고 하나만 우선시하라.

1) 완벽주의를 선택한 당신

완벽주의를 택했다면 마감기한과 최대한 멀어져야 한다. 상사와의 협상을 통해 가급적 시간을 벌고 또 벌자. 일을 고를 수 있다면 장기 프로젝트를 골라 마음의 여유를 갖자. 기한 안에 못 하겠으면 미리미리 말해 기한을 연장하자.

시간 많이 남아 있다고 놀지 말고 가능한 일찍부터 일을 시작하여 빨리 마무리한다는 마음가짐을 갖자. 시간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완벽주의자는 누구보다 섬세하고 공들인 결과물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다.

2) 마감기한을 선택한 당신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마감기한에는 두 종류가 있다. 외부에 의해 주어지는 마감기한과, 내가 스스로 지정하는 마감기한이 바로 그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설사 마감기한이 없는 과제라 하더라도 나 스스로 마감기한을 정하고 그것을 지키려 노력하는 것이 과제 수행을 촉진하는 훌륭한 전략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결과물의 질이 어찌 되었든 유의미한 성과를 만들어내고 싶다면 마감기한의 힘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좋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감기한 안에 완벽주의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심리적으로 방어하는 일이다. 특히 보다 창의적인 성과를 내고 싶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완벽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본인이 정한 마감기한 안에, 본인만의 ‘날림’으로 어떻게든 그럴싸한 결과물을 만드는 연습을 꾸준히 해야 한다.

여러분이 의도치 않게 좋은 성과를 냈던 경험을 기억하라. 그런 우연한, 하지만 창의적인 성과가 재현될 수 있도록 마감기한을 슬기롭게 활용해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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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 완벽주의는 일의 퀄리티를 높여준다.
  2. 마감기한은 (창의적인) 성과를 유도한다.
  3. 하지만 완벽주의와 마감기한의 조합은 최악이다.

원문: 허용회의 사이콜로피아


작가의 말

심리학적 글쓰기, 직장심리, 자존감, 목표관리, 마음건강, 메타인지, 외로움 극복, 공간활용의 심리학 등 다양한 주제로 강연 가능합니다. 출강 제안도 환영합니다. 허작가의 사이콜로피아 홈페이지에서 제 소개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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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 한번에 ‘따갚되’ 하지 마세요 https://ppss.kr/archives/267834 Tue, 19 Nov 2024 01:50:38 +0000 http://3.36.87.144/?p=267834 학교생활, 직장생활에 찌든 사람들은 누구나 일탈을 꿈꿉니다. 노는 날에는 학교·회사 방향으로는 눕지도 않고, 잠자지도 않으며 근처도 안 가고 싶은 것이 솔직한 속내 아닐까 싶습니다.

일탈을 꿈꾸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만큼 회사 다니느라, 학교 다니느라 스트레스가 마치 오래된 숙변처럼, 쌓이고 쌓였다는 방증일 겁니다. 묵은 스트레스가 심하면 심할수록 우리는 더욱더 ‘일탈적인 휴가’를 꿈꾸게 되죠.

  • 연차 몰아 쓰고 해외여행 다녀오기
  • 겁나 비싼 호텔에서 호캉스 하기
  • 사고 싶던 것들 수십 수백 단위로 지르기
  • 기타 온갖 미친 짓들(…)

이렇게 스트레스를 ‘따갚되’ 하시려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사실 저도 회사 다닐 때는 그랬습니다. 한창 회사 일에 치여 사는 동안에는 여유시간을 가질 엄두를 못 냈습니다. 그저 회사-집-회사-집만 반복하는 겁니다. 기껏 퇴근해 봐야 뭐 할 게 있겠습니까. 씻고 밥 먹고 집 정리 좀 하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밤 9시~10시고, 그러니 유튜브나 뒤적거리다 잠들 수밖에요. 하지만 이대로는 미칠 것 같으니 틈틈이 ‘일탈’ 생각이라도 해보는 거죠.

나중에, 내가, 진짜로, 돈 펑펑 쓰면서, 실컷, 재미나게 놀아줄 테다.
퇴사하고 해외여행이나 몇 달 다녀올 거다.

여행은 계획할 때가 제일 신나는 법 / 출처: UnsplashAnnie Spratt

그러나 만약 저처럼 생각하고 계신 분들이 있다면 스트레스 관리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께서는 소위 ‘따갚되'(따서 갚으면 되잖아)식 스트레스 풀기를 생각하고 계신 건데요(뭐, 비유가 적절한지에 대해 너무 자세히 지적하지는 말아 주세요), 어쨌든 묵힌 스트레스를 강력한 일탈 한 방으로 화끈하게 날리겠다는 계획, 그런 것들이 사실 스트레스 관리에는 별로 효율적이지 않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명절증후군이라는 말, 아마 들어보셨을 것 같습니다. 명절 등 장기간의 휴식을 보낸 뒤에 찾아오는 신체적, 심리적 고통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물론 명절을 어떻게 보냈느냐에 따라 명절증후군의 의미는 다릅니다. 명절에도 전 부치랴, 친척 만나러 이동하랴 바쁘고 힘드셨을 분들은, ‘명절임에도 제대로 못 쉬어서’ 힘든 것일 테지요. 그런데 명절을 맞아 실컷 집에서 뒹굴었거나 어디 해외여행이라도 길게 다녀오신 분들은 명절증후군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장기간의 일탈, 휴가 그 자체가 스트레스원(stressor)이 되기도 합니다. 오랜 휴가를 즐기고 일상에 복귀하기 전날의 기분을 여러분은 느껴보신 적이 있나요? 달콤한 휴가의 여운에 잠겨 있어도 모자랄 판에 당장 내일부터 출근할 생각에 한숨이 푹푹 나고, 내일이면 마주칠, 평소 나를 괴롭게 하던 상사 얼굴을 볼 생각에 마음이 우울해지고, 이제 또 언제 이만큼 길게 놀러 갔다 와보나 싶은 생각에 ‘절망감’마저 들게 되는 그, 일상 복귀 전날의 심란함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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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를 푸는 두 가지 방식

  1. 조금씩 따서 갚는다.
  2. 한방에 ‘따갚되’ 한다.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날그날의 스트레스를 조금씩 풀어가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일할 때는 죽어라 일만 하다가 한 방에 엄청난 여가, 지출, 일탈 등으로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려는 사람들이 있죠.

심리학자들은 후자의 방법을 그리 권장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스트레스가 조금씩 쌓일 때마다 ‘마냥 참지 말고’ 여유로운 산책을 가든, 맛집을 찾아가든, 주변에 고민 상담을 요청하든, 돈 들여 짧게 취미생활을 하든 아무튼 뭐라도 하면서 풀어가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말하죠.

스트레스를 한방에 ‘따갚되’하면 안 되는 이유

  1. 쌓이는 동안 내 몸과 마음을 좀먹는다.
  2. 잔여물이 남는다.
  3. 진한 ‘현타’가 온다.

첫 번째 이유부터 볼까요. 스트레스라는 놈은 우리 마음속에 저장될 때 그냥 얌전히 있어주지 않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차츰차츰 우리의 몸과 마음을 좀먹기 시작합니다. 왠지 자도 자도 피곤하고, 개운치 않고, 힘이 잘 나지 않는다든지, 아무리 재미있는 걸 봐도 웃음이 나지 않는다든지.

하루에 받는 스트레스 양 자체가 적더라도 그걸 해소하지 않고 계속 쌓아갈 경우, 장기적으로 몸과 마음에 부담을 주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미 상한 몸과 마음은 짜릿한 일탈을 통해 스트레스를 날린다 해도 이전 상태로 회복되지 않습니다.

두 번째, 일탈은 완벽한 치료제가 아닙니다. 이미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스트레스를 쌓았다면 제 아무리 멋진 휴가를 다녀오더라도 미처 해소되지 못한 스트레스는 남게 됩니다. 그리고 스트레스 대처 방략(stress coping strategy)이라고 해서, 스트레스를 연구하는 심리학자들은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진정 바람직한 전략은 바로 ‘문제해결’, 즉 정공법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일탈적인 휴가는 스트레스 관리의 최우선 대안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재미있게 놀고 쉬다 오면 뭐 하나요, 언젠가는 일상에 복귀해야 하고 다시 일터에 나가면 나를 괴롭게 하던 업무, 대인관계는 모두 그대로인데요.

세 번째, 앞서 명절증후군에 대해 이야기했죠? 왜 괜히 ‘명절증후군’이라는 단어까지 생겼겠습니까. 진한 휴식 뒤에 오는 심리적/신체적 고통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방증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일탈의 쾌감이 클수록, 우리는 더욱 우울하고 한숨 나오는 일상과의 진한 괴리를 경험하기 쉽습니다. 마음은 롤러코스터 꼭대기에서 추락하듯 울렁울렁하죠. 이 어마무시한 ‘현타’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더욱더 길고 짜릿하고 일탈적인 ‘다음 휴가’를 계획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이후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더 강력한 한 방을 즐길수록 그 뒤에는 더욱 처절한 우울감이 기다리고 있겠죠.

 

결론: 둘 다 하세요

일 년에 두세 번만 찾아오는 휴가에 목숨을 거는 인생은 고달픕니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고 했습니다. 자주 오지도 않을 명절, 긴 연휴만 기다리는 삶은 딱 그 기간만 제외하면 모조리 불행합니다. 그래서야 마음이 건강하게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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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여러분이 내 인생의 최대 휴가, 일탈, 이벤트를 계획하고 있다면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그렇게 강력한 한 방이 필요할 정도로, 일상에서는 내가 스트레스를 효과적으로 풀어낼 수단을 단 하나도 제대로 가지지 못한 게 아닌지 스스로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출근 전에, 그리고 회사 안에서, 그리고 퇴근 후에 단 몇 시간이라도 즐겁게 보낼 수 있도록 다양한 스트레스 해소 수단들을 많이 만들어 둬야 합니다. 산책이든, 운동이든, 먹는 것이든, 만나는 것이든, 만드는 것이든, 아무튼 뭐든지요.

그렇게 하루하루 조금씩 스트레스를 풀며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관리하며 기다리다가 휴가철이 오면 또 신나게 놀러 갔다 오자고요. 그렇게 한다고 해서 휴가가 재미없는 건 분명 아닐 겁니다. 얼마든지 재미있게 휴가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대신 긴 휴가 뒤에 찾아오는 ‘현타’는 절반 이하가 될 겁니다. 이제 내일부터 회사에 가야 한다는 압박감 대신, 즐거웠던 휴가의 여운에 잠들 수 있는, 그런 여유를 갖게 될 겁니다.

  • 요약: 스트레스 한방에 풀지 마세요. 매일 조금씩 풀어야 합니다. 그러다 가끔 휴가 가서 완벽하게 스트레스를 씻어내세요.

원문: 허용회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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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내용은 더 잘 기억될까? https://ppss.kr/archives/266504 Wed, 21 Aug 2024 03:57:10 +0000 http://3.36.87.144/?p=266504 사람들은 어려웠던 과제보다, 쉽게 느껴졌던 과제에 대해 더 긍정적인 학습 판단을 내리는 경향이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걸 가리켜 ‘ELER’ 편향이라고 한다. 참고로 ELER은 ‘easily learned = easily remembered’의 약어이다.

왜 이게 편향일까? 언뜻 생각하면 당연해 보인다. 자격증 시험을 준비한다고 해보자. 첫 서론 부분은 쉽다. 그래서 진도가 팍팍 나간다. 내용이 다 이해되니까, 다 ‘배운 것’같이 느껴진다. 하지만 본론으로 넘어가니 내용들이 어렵게 느껴진다. 암기는 고사하고 이해하는 것조차 어렵다는 기분이 든다.

그런데 문제는 ‘이해≠학습’이라는 점이다. 사실 학령기를 거친 여러분이라면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책에 있는 내용을 그냥 보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말이다. 자칫 눈에 익숙한 나머지 ‘내가 이걸 다 외웠다, 마스터했다’ 착각하고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흔히 강조되는 것이 외운 내용을 회상하거나 시연하는 절차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배웠으면 빈 종이에 토해내면서 내가 정말 완벽하게 숙지한 게 맞는지 점검해야 한다. 혹은 직접 써먹어 보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하면서 내가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지를 체크하고 보완하는 과정이 따라야 한다.

작가 goonerua 출처 Freepik

 

ELER 편향을 범하기 더 쉬운 사람들

지능이라는 건 타고나는 걸까, 후천적으로 만들어지는 걸까? 정답은 누구도 모른다. 아마 그 사이 어딘가쯤 진리가 숨어 있겠지만 그걸 누가 알 수 있을까. 흥미로운 점은 지능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다.

누군가는 지능의 불변성에 좀 더 무게를 둔다. 지능이란 타고나는 부분이 강하며, 개인이 어찌하기 어렵다는 암묵적 생각이다. 다른 누군가는 지능의 가변성을 택한다. 후천적인 노력과 학습을 통해 얼마든지 더 똑똑해질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심리학에서는 전자를 불변론자(entity theorist), 후자를 가변론자(incremental theorist)라고 부른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좀 더 가까운가?

  • 불변론자(entity theorist) = 지능은 불변
  • 가변론자(incremental theorist) = 지능은 가변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불변론자들이 가변론자보다 ELER 편향, 즉 쉬운 과제가 더 잘 기억되는 것 같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반면 가변론자들은 어려운 과제가 더 기억에 남는다고 말한다. 아래 그래프를 보면 불변론자들은 쉬운 과제(high fluency)에 대해 학습판단(judgments of learning)이 더 높다. 가변론자들은 정반대다. 쉬운 과제보다 어려운 과제(low fluency)에 대해 학습판단이 더 높다.

Miele, Finn, & Molden(2011)

왜 이런 차이가 생긴 것일까? 비밀은 지능에 대한 믿음이 만들어 낸 ‘노력의 가치’ 차이에 있다.

불변론자들은 노력의 가치를 낮게 평가한다. 어차피 지능이야 정해진 거고 타고난 건데, 노력해 봐야 뭘 어쩌냐는 생각이다. 물론 노력을 통해 어느 정도 처음보다 더 나은 수행을 보일 수는 있다. 그러나 지능의 총량은 타고난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얼마 가지 않아 한계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불변론자들은 노력을 덜 하는 경향이 있다. 쉬운 과제는 덥썩 물지만, 어려운 과제는 쉽게 포기한다. 그래서 이들은, 한 번이라도 해본 ‘쉬운 과제’는 더 잘 기억하는 반면, 어려운 과제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가변론자들은 노력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 지능에는 한계가 없다. 내가 얼마나 노력하고 갈고닦느냐에 따라 더욱 나아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들은 설사 어려운 과제라 하더라도 노력한다. 쉬운 과제도 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나를 좀 더 성장시켜 줄 수 있는 어려운 과제에 더 치열하게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 더 고생한 만큼 더 기억에 남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래서 이들은, 쉬운 과제보다는 어려운 과제를 더 잘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세상은 어려운 과제에 더 많은 보상을 약속한다

불변론자보다 가변론자들이 더 나은 성취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 어려운 영단어도 더 잘 기억하고, 시험 점수도 더 좋다. 회사에서는 더 나은 성과와 보상을 받는다.

이쯤 되면 이제 여러분도 그 이유를 짐작할 것 같다. 불변론자들보다 가변론자들이 더 어려운 일에 매달린다. 물론 어려울수록 실패 확률도 생기지만, 적어도 개고생하면서 얻은 경험치는 남는다. 그렇게 가변론자들은 성장하면서 점점 더 어렵지만 더 보상이 높은 일에 익숙해져 간다.

반면 불변론자들은 쉬운 과제에만 머문다. 그래서 쉬운 과제에 걸맞은 작은 보상을 주로 받는다. 물론 불변론자들 중에서도 야심가가 없는 건 아니다. 이들은 부자가 되겠다, 성공하겠다, 남들이 우러러보는 명예를 얻고 싶다, 야심을 불태운다. 하지만 노력으로 이뤄내기에는 자신의 작은 그릇이 발목을 잡는 것 같아서 아쉽다.

그래서 가변론자보다, 불변론자들이 더 치팅의 유혹에 취약하다. 가변론자들은 될 때까지 한다. 그러나 불변론자들은 해도 안 될 것 같으니까, 그럼에도 보상과 명예는 얻고 싶기에 ‘된 척’을 한다. 자신의 성과를 부풀리고 포장한다. 안 되겠으면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거나 방해해서라도 상대적 우위를 만들고자 노력하게 된다.

 

 마치며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ELER 편향(easily learned = easily remembered)을 소개했다. 그러나 이 믿음이 언제나 유효한 것은 아니다. 쉬운 것만 하는 사람들에게는 맞는 말이겠지만 어려운 것에도 도전하는 사람들에게는 틀린 믿음이다. 원래 더 고생한 만큼 더 기억에도 오래 남는 법이다. 공부할 때도 예외는 아니다. 암기를 더 잘하고 싶다면 좀 더 고생할 생각을 하자.

사진: UnsplashKelly Sikkema

그전에, 기왕이면 불변론자보다는 가변론자가 되자. 지능의 한계는 우리가 결정할 수 없지만, 다행스럽게도 믿음의 차이는 우리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원문: 허용회의 사이콜로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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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간 감사일기를 써본 실제 후기 https://ppss.kr/archives/266470 Mon, 08 Jul 2024 01:37:33 +0000 http://3.36.87.144/?p=266470 감사일기, 그게 좋다며? 근데 잘 와닿진 않아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고 싶은가? 인생이 좀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는가? 그렇다면 심리학자들이 권하는 확실한 방법이 하나 있다. 다름 아닌, 감사일기 쓰기에 습관을 들이는 거다.

그런데 고백하자면 사실 나는 감사일기의 장점을 ‘이론’으로만 알고 있었다. 감사에 관한 심리학 논문들만 열심히 읽었고, 강연에서는 사람들에게 ‘감사일기를 써보시라’ 권했다. 마치 나는 이미 하고 있다는 듯, 예전에 감사하기를 주제로 칼럼도 몇 개 썼다.

심리학자들이 하도 좋다고 좋다고 해대는데, 나는 그저 ‘사람들이 왜 이걸 안 쓸까?’ 이런 생각만 했지, 정작 ‘내가 그걸 써 봐야겠다’는 생각은 예전에 미처 하지 못했다. (이런 걸 두고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하는 걸까…)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생각이 났다. 이론적인 거 말고, 진짜로 감사일기를 쓰면 내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궁금해진 것이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겠다, 그날로 당장 딱 한 달만 감사일기를 써보기로 했다.

형식? 분량? 이런 것에 제한을 두지 않기로 했다. 습관이라는 게 몸에 배기가 워낙 어려운 것인데, 쓸데없이 제약을 두었다가 30일 채우지 못하고 그만둘까 싶어서였다.

 

감사일기 30일 쓰고 난 리얼 후기

1) 가장 큰 장벽은 ‘낯간지러움’

30일 중에 처음 며칠이 가장 어려웠다. 귀찮아서? 뭐 아예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어차피 짧을 때는 1~2줄만 써도 된다고 마음먹고 있었으니 생각보다 귀찮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낯간지러움’, ‘오글거림’이 내겐 가장 큰 장벽이었다.

평소 주변에 고맙다는 말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비록 글로 남기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이러저러해서 고맙다, 감사하다’라고 글을 쓴다는 게 부끄러웠다. 그래서 처음 감사일기를 쓸 때는 자세하게 쓰지 못했다. 가능한 무미건조하게 썼다.

그래도 계속 쓰다 보니 희한하게도 낯간지러움이 좀 가셨다. 게다가 글이라도 누군가에게 고맙다고 하는 게 익숙해지니까, 일기가 아닌 실제 그 사람 앞에서도 ‘감사하다’라고 말해보고 싶은 마음도 생기는 게 아닌가. 부모님한테, 아내한테, 주변 친구들한테 감사하다, 고맙다는 말도 꺼내보고 그랬다. 상대방은 적잖게 당황스러워했지만(…) 그래도 기뻐 보였다.

 

2) 낙관적인 사람이 되어가는 기분

감사일기도 소재 고갈을 피해 갈 수 없다. 며칠 쓰다 보면 이제 더 이상 ‘감사할 구실’이 없어진다… 오늘은 또 누구에게(무엇에게) 감사해야 하나, 이런 생각을 하며 머리를 굴리게 된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그런 고민하는 시간들이 내 성향 변화(?)의 밑거름이 되는 기분이 든다는 것이었다.

감사할 거 없나, 하고 찾다 보니 평소라면 안 감사했을 일도 새삼스럽게 감사한 일로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감사일기를 한 달이라도 꾸준히 쓴 지금은, 한 달 전에 비해 관찰력이 향상되었음을 느낀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고마운 일도, 감사한 일도 많다는 것을 체감하게 되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나의 낙관성이 더 커진 것 같다.

 

3) 이 세상의 의미에 관해 생각하다

여러분도 잠시 눈을 감고, 감사할 대상을 찾아보자. 예상하건대 십중팔구 ‘사람’을 떠올렸을 것이다. 감사일기를 쓰던 초반에는 나도 그랬다. 부모님, 아내, 딸 아이, 친구들, 전현직 직장동료, 기타 지인들 등등… 한 명 한 명씩 떠올리며 감사할 일을 찾았다.

근데 감사할 사람이 다 떨어지니(?) 이제 사람이 아닌 대상에게서 감사할 일을 찾아야 했다. 새삼 내가 건강하다는 게 감사하고, 오늘도 무사히 감사일기를 쓸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생명의 위협 없이 평화로운 내 주변 환경에 감사했고, 내가 보고 듣고 사용하는 물건들 하나하나에도 감사한 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사람 → 사물, 환경

감사 대상의 확대는 엄청난 변화다. 세상을 보는 시각, 관점이 달라졌다는 증거니까 말이다. 여담이지만 우리가 흔히 어떤 개인적·사회적 문제를 두고 ‘인식의 변화가 시급’하다고 부르짖지만 의외로 ‘인식의 변화’라는 건 그리 쉽게 일어나는 게 아니다. 그런데 감사일기라는, 비교적 사소한 노력만 했을 뿐인데도 인식이 변화되었음을 몸소 체험한 것이다. 인식의 변화를 이끌어 준 감사일기에 감사하다

이 글을 읽은 여러분들이 조금이라도 감사일기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아니, 나는 조건 없이 이 글을 읽은 여러분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지금까지 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원문: 허용회의 사이콜로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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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중독”이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https://ppss.kr/archives/264847 Wed, 26 Jun 2024 06:10:02 +0000 http://3.36.87.144/?p=264847 “관계중독이 뭔가요?”

중독, 하면 무엇부터 떠오르는가? 흔히 술, 담배, 마약 같은 물질중독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심리학자들은 또 다른 중독 유형인 ‘관계중독(relationship addiction)’을 지적한다. 이는 물질중독이 아닌 행위중독의 일종으로, 타인과의 관계에 과도하게 의존하며 자신의 감정과 행동을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관계중독이라는 개념을 처음 접했을 때, 개인적으로는 ‘굳이 그런 개념이 필요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째, 쇼핑 중독이나 마약 중독만큼 해로워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관계중독인 사람들은 늘 주변에 사람들이 많고, 인맥도 풍부하며, 외로움을 덜 타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했었다.

둘째, 이건 학술적인 문제인데 ‘관계중독’이 다른 유사한 개념들을 놔두고 굳이 독자적으로 따로 구분 지어 써야 할 이유가 있는 개념인지 분명치 않았기 때문이다(심리학자들은 개념·이론들이 남발되는 것을 싫어한다. 다른 학문도 마찬가지겠지만 심리학자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바는 가급적 적은 개념·이론만으로도 많은 현상을 설명하는 일이다).

애착, 의존성 성격장애, 친밀한 관계, 사회적 지지, 헌신적 관계, 스토킹 등 타인에 대한 열망을 설명하는 다른 개념들은 이미 많다. ‘관계중독’이라는 개념이 살아남으려면 기존의 다른 어떤 개념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독특한 현상이 있어야만 한다.

여기에 관해 관계중독을 연구하는 심리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답을 내놓았다. 우리가 술에 중독되는 것처럼, 쇼핑에 중독되는 것처럼, 단 음식에 중독되는 것처럼 ‘관계’에 대해서도 중독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이다. 다시 말해 때로 가까운 관계가 ‘중독’으로 정의될 수 있는 이유는, 중독자들이 경험하는 몇 가지 특징을 공유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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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중독’을 겪는 사람들의 몇 가지 특징

1. 관계 갈망

관계중독자들은 강렬한 ‘갈망’을 경험한다. 퍼마시고 또 마셔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는 기분이랄까?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 관계중독자들은 자신이 집착하는 그 관계 속에 시간과 돈,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들을 아낌없이 쏟아붓는다는 특징이 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특정 관계 하나에 모든 것을 ‘몰빵’하지 않지만, 이들은 무엇이든 다 내어줘야지만 온전히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잘못된 착각을 갖는다.

2. 금단 증상

잠깐만 연락이 닿지 않아도 안절부절못한다. 초 단위, 분 단위로 왜 연락이 안 되냐, 무슨 일 있냐, 나 무시하는 거냐, 제발 연락해라, 폭탄 문자를 보내며 상대를 들들 볶는 것이 관계중독자들의 특성이다. 왜 그럴까? 관계 경험을 충족하지 못할 때의 부정적 감정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관계가 멀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면 공허하고, 우울하고, 불안한 감정에 사로잡히기 일쑤이다.

3. 통제 결여

때로 관계중독자들은 자신이 관계에 대해 갖는 이러한 집착이 비정상적인 것임을 인식한다. 그래서 이제는 좀 집착을 줄여보고자 나름대로 노력을 해본다.

하지만 의식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대로 상대에 대한 관심을 끊기가 어렵다. 자꾸만 돈과 시간을 퍼붓고 싶어서 견디기가 어렵다. 통제를 위한 노력의 반복적 실패를 경험하는 것이 관계중독자들의 특징이다.

4. 일상생활의 어려움

오로지 인생의 목적이 ‘그 한 사람’으로 고정되고 만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소홀해지기 시작한다. 학교나 회사에서도 도통 집중하질 못한다. 심각한 경우 사람답게 사는 것을 포기하고 오로지 맹목적으로 상대와의 관계에 집착하기만 한다.

결과적으로 일상생활의 어려움이 가중될수록, 관계중독자들은 더 절박해진다. 이제는 진짜로, 저 사람 아니면 난 살아갈 수 없다는 극단적인 신념이 머리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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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관계중독’과 ‘의존성 성격장애(Dependent Personality Disorder)’를 혼동한다. 그러나 두 상태 모두 타인과의 관계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특징을 공유하지만, 이 둘은 중요한 차이점을 가진다. 관계중독자가 보다 더 적극적이고 주체적이라면, 의존성 성격장애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더 소극적이고, 수동적이다.

관계중독자들은 자신이 헌신하는 만큼, 상대방에게도 자기가 하는 것만큼의 헌신을 원하고 요구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관계에 집착하면서도 정작 상대의 생각과 의견에 자신의 행동을 굳이 맞추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 느낌일 것이다. 관계중독자들은 진심으로 상대방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누군가를 아끼고 사랑해 주는, 자기 자신의 헌신적인 모습을 사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반면 의존성 성격장애의 경우, 상대에게 모든 결정을 넘긴다는 특징이 있다. 다른 사람의 결정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혼자서는 그 어떠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며(심지어 상대방에게 어떤 종류의 애정과 노력을 쏟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상대방의 승인과 지지 없이는 자신감을 갖지 못한다(관계중독자들은 상대의 반응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다. 그냥 아낌없이 퍼부어댈 수 있는 자기 자신이 좋고, 거기에 어울려주는 상대방이 좋을 뿐).

 

그렇다면 어떻게 관계중독에서 좀 벗어날 수 있을까?

나름대로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감정을 조절한다거나 건강하게 타인과의 경계를 설정하기 위한 노력은 좋다. 필요하다면 자신과 단단히 약속을 걸고 하루 몇 분 이상은 상대에게 연락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식의 실천과제를 내걸 수 있다.

하지만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될까? 솔직히 나는 회의적이다. 관계중독이 술 중독·마약 중독·쇼핑 중독·도파민 중독 등 다른 여타 중독들과 증상을 공유한다면,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접근법마저 비슷하지 않을까?

술 중독이 말로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듯, 담배 중독이 단지 마음만 먹었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듯 전문가 등 제삼자의 전문적인 도움을 받아 적극적으로 개입, 처치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적절한 상담과 의학적 조언이 필요할 수도 있다. / 작가 pressfoto 출처 Freepik
  • 특정 관계에만 지나치게 몰두되어 있다면
  • 일상생활에 어려움이 생길 수준이라면
  • 금단 증상으로 인해 괴로움을 느낀다면

이별은 답이 아니다. 아마 하라고 해도 못할 거다(마치 알코올 중독자에게 ‘술 끊는 게 답이다’라고 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그보다는 누군가가 이별을 도와줄 수 있도록, 이별 이후 다친 마음을 추스를 수 있도록, 상담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가장 좋다고 본다.

원문: 허용회의 사이콜로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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