ㅍㅍㅅㅅ https://ppss.kr 필자와 독자의 경계가 없는 이슈 큐레이팅 매거진 Mon, 19 May 2025 02:45:44 +0000 ko-KR hourly 1 https://wordpress.org/?v=5.8.11 https://ppss.kr/wp-content/uploads/2015/07/ppss-100x100.png ㅍㅍㅅㅅ https://ppss.kr 32 32 몰이해의 세상 속에서 ‘찬찬히 들어보고 이해하는’ 시도가 중요한 이유 https://ppss.kr/archives/267114 Mon, 19 May 2025 02:40:28 +0000 http://3.36.87.144/?p=267114 타인을 대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해하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매도하려는 것이다. 사실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극악무도한 범죄자도 이해할 수 있다. 정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그를 불쌍히 여길 만큼 깊이 이해할 수도 있다. 그의 환경·인생 여정·당시의 상황·내면의 결핍 등 온갖 것들을 통해서 말이다.

반대로 우리가 누군가를 매도하려고 마음먹는다면, 그가 아무리 인간보다는 천사에 가까운 존재일지라도 밑도 끝도 없이 매도할 수 있다. 그의 이타적 행동은 깊은 자기만족에서 오는 이기적 행위이다. 그가 이렇게 착하게 살 수 있는 건, 부유하게 자랐기 때문이다. 그는 착한 척 하지만 알고 보면 다 자기 평판을 위한 것이고, 아프리카 아이의 인권이나 닭의 동물권에 대해 말하지 않는 걸 보면 차별주의자다. 무엇이든 다 갖다 붙여서 매도할 수 있다.

Image by rawpixel.com on Freepik

그래서 언젠가부터 나는 사람을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나누는 일에 큰 관심이 없어졌다. 그 대신 나랑 잘 맞는 사람인가, 내가 충분히 이해하고 싶은 사람인가, 나랑 조화롭게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인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어차피 내 기준에서 아무리 좋은 사람일지라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때려 죽여도 부족할 사람일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참 좋은 변호사가 상대편 당사자에게는 원수일 수도 있고, 내가 믿는 참 훌륭한 회사 대표가 그 직원한테는 원망스러운 상사일 수도 있다.

세상사의 복잡한 욕망들 속에서, 누군가를 객관적으로 착한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라 규정하는 건 정말이지 쉽지 않다고 느낀다. 선인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 안에 이기적인 탐욕이 있기도 하고, 악인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각자의 사정이 있을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무 자르듯이 선인과 악인을 나누기 쉽지 않다고 많이 느낀다. 그냥 나는 내 선에서 개인적인 호불호를 판단하고 가까이하거나 멀리할 뿐, 그 이상에 대해서는 판단을 중지하고 나 자신이나 잘 반성하자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비슷한 맥락에서 한 사람에 대한 판단도 너무 쉽게 내려서는 안된다고 느끼기도 한다. 섣불리 누군가에 대해 내린 판단이 달라지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거듭 만나보고, 이야기를 더 깊이 들어보고, 그의 생각이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최초의 편견을 넘어서 더 깊이 이해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오히려 편견을 갖고 빠르게 판단했던 나 자신을 반성하게 되는 경우들도 적지 않다. 사람은 깊게 사귀고 볼 일이다.

Image by rawpixel.com on Freepik

요즘 사회를 한 마디로 하자면, 그야말로 손쉬운 판결과 매도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잘 모르는 셀럽에 대해서도 그가 한 말 한마디, 어록 하나 어디서 듣고 악플부터 쓰기 바쁘다. 흥미로운 소문들은 늘 손쉽게 누군가를 악인으로 만들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이런 몰이해의 세상 속에서 누군가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이해하려는 시도가 하나의 해독제가 될 수도 있다고 느낀다. 찬찬히 들어보고 이해하기, 라는 것만큼 이 시대의 독을 치료해 가는 첫 단계가 있을까, 싶기도 한 것이다.

원문: 변호사 겸 문화평론가 정지우의 페이스북


이 필자의 다른 글 읽기

]]>
악플이 걱정되더라도, 자기 이야기를 글로 써야 하는 이유 https://ppss.kr/archives/267116 Fri, 11 Apr 2025 03:59:09 +0000 http://3.36.87.144/?p=267116 글쓰기에 대한 하나의 정의가 있다면,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뚫고 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나를 싫어하거나 멸시하고, 왜곡하거나 험담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나아가 그로 인해 큰 상처를 받고 움츠러들거나 삶을 포기하기까지 하는 등 삶에 커다란 영향을 받기도 한다.

자기의 글을 쓰겠다는 결심은, 그렇게 나를 부정하는 타자들을 배제하면서, 나의 길을 뚫고 나가겠다는 것과 상응한다. 내가 믿고 싶은 삶, 내가 나 자신이고 싶은 방식, 내가 나를 받아들이고 싶은 정의로 나를 규정하면서 나아가는 것이 곧 글쓰기로 실현되기도 한다. 그럴 때 누군가는 내가 나를 정의하는 방식, 내가 내 삶을 좋아하고자 하는 방식을 싫어하고 비난하겠지만 글 쓰는 사람은 그것을 뚫고 나가야 한다.

출처: freepik

그렇기에 때로 글쓰기는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많은 사람들이 글쓰기 강의에서 내게 ‘글 쓰는 용기’에 대해 고민하며 묻곤 한다.

나에 대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할 자신이 없어요.

누군가 비난할까 봐 두려워요.

내 생각이 틀리면 어쩌죠?

이런 질문은 거의 매번 듣는다. 그러면 그냥 용기를 갖고 나아가는 것밖에 다른 방법은 없는 것 같다고 대답한다. 다만 다행스러운 일이 하나 있다면, 글 쓰는 사람은 선의의 동료 역시 얻을 여지가 있다는 점이다.

세상의 절반 이상은 나의 생각이나 삶에 동의할 수 없다. 모두 경험한 게 다르고, 삶에 대한 믿음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세상에 10분의 1이나 100분의 1 정도는 나와 공감할 수 있는 사람도 있을 거라 믿고 있다. 글 쓰는 사람이 자기 진실에 대해 써나갈 때, 그전에는 만날 가능성이 없었던 10분의 1이나 100분의 1을 만날 ‘가능성’이 생긴다. 글 쓰는 사람은 그들과 한 명 한 명 만나가면서, 선의의 울타리를 만들고, 그 울타리를 넓혀가면서 글을 쓴다.

출처: freepik

아마도 거의 필연적으로, 글 쓰는 사람은 선의보다 악의를 더 많이 만나고, 악의보다는 무관심을 더 자주 만날 것이다. 아무리 천사처럼 헌신적으로 봉사하며 산 성인에게도 그를 증오하며 암살하려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하물며 각자도생 사회 속에서 간신히 자기 삶 하나 건사하며 살기 바쁜 현대의 개인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좋게 봐줄 사람보다는 ‘누칼협’이나 ‘알빠노’ 같은 걸 내세우면서 적극적으로 욕할 사람이 더 많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자기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은 계속 자기 글을 쓰며 자기 길을 뚫고 간다.

이런 시대에 가지면 좋은 태도가 하나 있다면, 참견하기 좋아하는 온갖 사람들의 험담에 상처받기보다는 그저 나의 삶을 살면서 함께 살아갈 사람들을 찾고, 그들과 공감하고 사랑하는 데 몰두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있는 온갖 악의적인 시선과 말들이 우리를 엄청나게 해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우리를 해칠 수 없는 선의의 울타리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것도 좋을 듯하다. 글 쓰는 사람은 그런 믿음으로, 오늘도, 내일도 글을 쓸 수 있다.

원문: 문화평론가 겸 변호사 정지우의 페이스북


이 필자의 다른 글 읽기

]]>
“나는 내 삶을 정말로 좋아하고 있는가?” https://ppss.kr/archives/258778 Fri, 28 Feb 2025 02:24:24 +0000 http://3.36.87.144/?p=258778 1.

살아가다 보면 ‘내가 내 삶을 정말 좋아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할 때가 있다. 좋아한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다. 삶을 좋아한다, 라는 말은 자주 쓰는 말이 아니고 어딘지 어색하게도 느껴지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 핵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중요한 진실은 언제나 드물게 마주하게 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말이다.

내가 내 삶을 좋아하는가, 라는 질문 앞에서 다른 질문들은 오히려 부차적인 것이 된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얼마나 가졌는가, 내가 남들보다 얼마나 잘살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얼마나 이루었는가,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라는 건 모두 핵심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어떤 질문이 핵심에 가까울까?

내가 원하는 게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인가?

내가 남들보다 잘산다고 표현할 때의 기준은, 내가 진짜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준인가?

내가 무엇을 이루었는지 헤아릴 때 그것들은 내가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일까?

내가 행복을 가늠할 때 그 행복은 진짜 내가 원하는 행복인가?

이 질문들이 핵심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이 질문들을 하나로 모으면, ‘나는 내 삶을 정말 좋아하고 있는가.’가 되지 않을까 싶다.

사진: UnsplashKelly Sikkema

 

2.

살다 보면,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아닌데도 어느덧 원하고 있는 경우가 참 많다. 남들이 중요하다고 하니 나도 좇고 있고, 남들로부터 느끼는 박탈감이나 소외감이 무서워서 남들을 따라 살고 있다. 내가 원한 삶은 이게 아니었는데도, 그저 남들이 원하는 직장, 동네, 상품 같은 것들을 나도 좇아 살고 있다. 그럴 때 나는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다.

그런 것들을 좇느라 정신없이 견뎌내고 있는 이 나의 삶을 정말 좋아하는가?

내가 이 삶을 좋아한다면, 내가 사랑하는 것들 때문이다. 여유로운 주말 아침에 나서는 가족과의 산책, 회사 점심시간에 동료들과 나누는 수다, 늦은 밤 홀로 책 읽는 시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 삶에 바로 그런 요소들이 있기 때문에, 나는 이 삶을 좋아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 삶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내가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좇는 것들, 강박을 느끼는 것들, 집착하는 것들 때문이다. 특히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무의식적으로 강요받는 것들 때문이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 저렇게 살아야 한다,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라는 것들이 어느덧 내 안에 들어와 나를 조종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 부분들이 너무 커져서 삶을 뒤덮어버릴 정도가 된다면 “나는 내 삶을 좋아하지 않아”라고 말할 용기가 필요하다.

 

3.

하나의 삶을 부여받은 한 명의 인간에게 의무가 있다면, 자기 삶을 좋아할 의무일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내 삶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내 삶을 좋아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느낀다.

삶이 너무 메말라 있다고 느낀다면, 당장 오늘부터 서점에 달려가 좋아할 수 있는 책 한 권을 고른다. 음악이 부족하지 않나 싶으면, 음악을 챙겨 듣는다. 데이트가 부족한 것 같으면, 양손에 아내와 아이의 손을 하나씩 잡고 달려 나간다.

그리고 내 삶을 싫어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소가 있다면, 그 요소에 대한 ‘제거’를 다짐한다. 때로 그 요소는 어떤 사람일 수도 있고, 다른 문제일 수도 있다. 내게는 내 삶을 좋아할 의무가 있으므로, 내 삶을 싫어하게 만드는 요소들을 제거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삶을 개척할 용기를 지닌다는 건 그런 의무로부터 비롯되기도 할 것이다.

사진: UnsplashJessica Rockowitz

나는 아내와 아이랑 함께 바다 앞에 고요히 앉아 있을 때, 삶을 좋아한다고 느낀다. 그러려면 내게 무엇이 없어야 하고 있어야 하는지를 확신한다. 확신이 삶의 추동력이다. 이 삶을 사랑하기 위한, 절실한 이유들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나에게는 꿈이 있다. 죽는 날까지 이 삶을 더 온전히 좋아하는 것이다.

원문: 문화평론가 겸 변호사 정지우의 페이스북


이 필자의 다른 글 읽기

]]>
“당신은 어떤 이상을 향해 달리고 있나요?” https://ppss.kr/archives/267112 Tue, 11 Feb 2025 05:14:54 +0000 http://3.36.87.144/?p=267112 1.

우리 시대에 ‘꿈을 좇는 일’을 나쁘게 말할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런데 정신분석학적으로 볼 때, 꿈을 좇는 일은 현실과 이상의 격차가 있다는 걸 의미한다. 이 격차는 사실 해소될 수 없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모두 ‘이상’을 좇아야 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해소될 수 없는 현실과 이상의 격차가 항상 존재한다는 걸 의미하게 된다.

여기에서 아주 흥미로운 문제가 발생한다. 정신분석학에서 볼 때, 이 현실과 이상을 좁히려는 시도는 인간에게 ‘무한동력’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가령, 어릴 적 아버지를 무의식적으로 롤모델로 삼은 아이가 있다고 했을 때, 이 아이는 죽을 때까지 자기 안의 아버지를 무한하게 좇을 수 있다. 아버지라는 이미지에 도달하고자 끝없이 공부하고, 일하고, 노력하면서 한 평생을 갈아 바칠 수 있다. 그 동력은 그야말로 죽을 때까지 ‘무한’하다.

Image by pch.vector on Freepik

 

2.

이졸데 카림의 『나르시시즘의 고통』에는 자본주의가 이런 개인 내면의 ‘무한 동력’에 기생하고 있다는 취지의 이야기가 나온다. 예를 들어 SNS도 그렇다. SNS에 우리는 삶을 적당히 화려하게 편집하여 올리는데, 사실 그 삶의 이미지는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이다.

SNS 속의 나는 필터나 구도를 통해 나 자신보다 더 아름답게 만들어진 얼굴로만 장식되어 있다. 옷가지나 먹다 마신 물컵이 널부러진 집안이 아니라, 잠깐만 유지되는 완벽하게 정돈된 이미지만이 전시된다. 우리는 우리가 전시한 그 이미지에 도달할 수 없다.

이것은 우리를 ‘무한’하게 전시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바로 그 현실과 이상의 간극에서 ‘무한동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우리는 끝없이 내가 최고로 잘 나온 사진, 내가 최고로 행복한 순간, 내가 최고로 돈을 많이 쓴 시간에 대해서 올린다. 그 이유는 그것이 내가 현실을 지우고 뛰어들고 싶은 유토피아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이미지를 잠시 만들어낼 수는 있을지언정, 그 이미지 속에서 살 수는 없다.

Image by pch.vector on Freepik

참 흥미롭게도, 이런 개인의 내면적인 문제가 한 사회 전체의 동력이 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내 안에 있는 부자가 되는 이미지, 내 인생의 경영자이자 주인이 되는 이미지, 세상의 인기와 명예를 얻는 이미지에 사로잡혀 그 이미지와 지금 현실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인생의 모든 에너지를 투여한다.

자본주의란 그런 개개인들의 투쟁이 만들어낸 부산물처럼 존재하고 지탱된다. 그 과정에서 당신을 ‘이상’에 도달하게 해주겠다고 하는 수많은 상품과 브랜드, 강의 등이 만들어진다.

 

3.

여기서 하나 생각해 볼만한 점은, 인간이 이 ‘무한동력’을 생산해 내는 현실과 이상의 격차라는 구조를 없앨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가능한 건 어떤 방식으로 그 격차를 해소하는 달리기를 이어갈까 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평생 달려야 하는데, 무엇을 좇아 어떻게 달릴지만을 조정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누군가에게 그 이상은 붓다나 예수다. 누군가에게는 에르메스나 포르쉐다. 누군가에게는 노벨문학상 작가나 자연 속 도서관 주인이고, 근래 우리 사회에서 가장 보편적이게는 강남 대단지 아파트 주민 같은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상을 포기하는 건 정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건 이상을 다루는 방식이고, 이상과 공생하는 방식이다. 이것이 가능할지는 몰라도, 할 수 있다면 이상에 영혼을 팔지 않는 선에서 내 삶에 이로운 이상과의 관계를 만들어 나갈 수도 있다고 믿는다.

이상은 우리를 목숨 바치는 열광적인 상태로 만든다. 나의 이상이 ‘도박의 신이 강림한 존재’ 같은 게 되면 삶은 파멸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이상이 이웃들과 더불어 살며, 강박적으로 삶에 쫓겨 다니지 않으면서, 하루하루를 충분히 사랑할 수 있는 ‘삶의 장면’이 된다면, 구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원문: 변호사 겸 문화평론가 정지우의 페이스북


이 필자의 다른 글 읽기

]]>
‘짱구’도 아빠가 되겠지, 그래도 이 여름날을 기억해줘 https://ppss.kr/archives/267122 Tue, 21 Jan 2025 04:40:06 +0000 http://3.36.87.144/?p=267122 나는 짱구 또래의 아이를 키우고 있는 아빠다. 그래서인지 이 장면을 만난 순간 갑자기 마음이 울컥하는 게 느껴졌다. 〈짱구는 못말려 극장판: 어른제국의 역습〉에서의 한 장면이다.

아버지가 태워주는 자전거 뒤에 타고 있던 소년이 / 출처: 〈짱구는 못말려 극장판: 어른제국의 역습〉
장면이 전환되면서 짱구의 아버지 신형만이 된다. 등 뒤에는 아들인 짱구를 태우고 있다. / 출처: 〈짱구는 못말려 극장판: 어른제국의 역습〉

짱구 또래의 아이를 키우고 있는 아빠로서, 이 장면을 오랜만에 만난 순간 갑자기 마음이 울컥하는 게 느껴졌다. 이 장면에는 슬프다고밖에 할 수 없는 면들이 구석구석 담겨 있다. 하나는, 짱구가 아빠의 등을 바라보며 아빠의 자전거 뒤에 타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이날이 여름이라는 점이다. 세 번째는 별 생각 없어 보이는 짱구의 평온한 표정이다.

어 아이가 아빠의 뒤에 앉아 등을 바라보며 자전거를 타는 시간은 길어도 이삼 년 남짓이다. 그보다 어릴 때는 아이가 위험할 수 있어 등 뒤에 태우기 어렵다. 그보다 크면 스스로 자전거를 타려고 하지 굳이 등 뒤에 타려고 하지 않는다. 인생에서 패달에 발이 닿지 않는 아이를 등 뒤에 태우고 달리는 일은 아주 잠시, 지나고 나면 잘 기억나지도 않을 짧은 시절의 일이다.

낚시대를 어깨에 올린 채 자전거를 몰며 여름에 떠나는 나들이라는 것도, 그리 자주 있을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어쩌면 짱구 아빠는 매일같이 회사에 출퇴근하며 일하다가, 일 년에 딱 한 번 낸 여름휴가를 가족과 보내기 위해 힘을 냈을 것이다. 뭉게구름이 솟아 있는 좋은 날, 아직 아이는 부모와 함께 여름을 보내는 그런 날, 인생에 몇 번 없을 여름휴가가 그 속에 담겨 있다. 몇 년 뒤 아이가 아빠의 자전거 뒤에 타서 낚시를 따라나서는 일은 끝날 것이다.

인생과 시간의 진실이랄 것을 딱히 알 리 없는 짱구의 표정은 마치 자신이 영원히 그대로 그 자리에 있을 거라 믿는 것처럼 평온하다. 인간의 삶이란, 세월이 흐르면서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지나가며 잊혀지는 일이라는 걸 아이는 아직 제대로 모른다. 아이는 언젠가 자신이 어른이 되고, 아빠가 될 거라는 걸 머리로는 알겠지만 그래도 지금이 그대로 영원할 줄 믿고 있다. 언젠가는 엄마와 아빠로부터 떨어져, 다른 누군가와 여름을 보내며, 삶을 사랑할 것을 아직은 모르고 있다.

사진: UnsplashPriscilla Du Preez ????????

요즘 가끔씩 아이의 두 눈을 뚫어지게 바라볼 때가 있다. 언제 이렇게 컸나, 아직 어린데, 아직 앳된 얼굴인데, 아직 이렇게 귀여운데 참 많이 컸다. 그리고 아이가 아내와 이야기 나누는 걸 가만히 듣는다. 아직 발음이 아이 발음인데, 완벽한 어른 발음은 아닌데, 아직 아기 같은데, 그래도 정말 많이 컸다. 그래도 아직 부모가 자기의 세계이고, 엄마와 아빠랑 함께 있는 걸 좋아하고, 같이 놀아달라고 하고, 어디든 따라다니는 나의 강아지인데, 이제는 친구랑 노는 걸 더 좋아하기도 하고, 자기 세계도 만들어간다. 그런 것들이 눈앞에 손에 잡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가끔 아이를 곁에 누이고 아이가 해달라고 하는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줄 때면 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구나’하는 안도의 마음이 든다. 문어 나라 이야기, 굼벵이 세상 이야기 같은 걸 제멋대로 지어내 들려주면, 아이는 세상에서 제일 재밌다는 듯 깔깔 웃는다. 내가 집에서 운동을 할 때마다 옆에 와서 따라 하는 걸 보고 있으면, 아직 나와 너는 연결되어 있구나, 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이 여름도, 우리 셋이 마치 하나인 것처럼 보내는 나날들도 점점 끝나가고 있다는 건 안다.

나는 삶을 우울하게 보는 사람이 아니고, 내가 어떤 삶의 국면에서도 나름의 기쁨을 잘 찾아낼 것을 스스로 믿는다. 그렇지만 삶이 본질적으로 슬프다는 사실은 잊지 않으려 한다. 언젠가 나에게 자전거를 가르쳐준 아버지, 나에게 그림을 가르쳐주고 이야기를 들려준 어머니의 자리에 내가 와 있듯이 아이도 커서 다시 이 자리에 서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때쯤 되어 나의 흩어질 마음을 아이가 기억해 주고 이해해 준다면 삶의 가장 깊은 위로가 될 것 같다. 우리는 어쨌든 한 번뿐인 삶의 슬픔을 껴안고 서로를 위로하며 살아아야 한다.

아마 20년쯤 뒤에도, 짱구는 여전히 짱구일 것이고, 짱구 아빠는 하루 종일 회사에서 일한 뒤 돌아와 땀 채인 발의 냄새를 풍기는 짱구 아빠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아빠의 자리에는 아이가 있을 것이고, 아이는 또 다른 짱구를 품에 안으며 이 시절을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

원문: 정지우 문화평론가 겸 변호사의 페이스북


이 필자의 다른 글 읽기

]]>
타인에 대한 우월감에 몰두하지 말아야 할 이유 https://ppss.kr/archives/267118 Wed, 27 Nov 2024 03:10:34 +0000 http://3.36.87.144/?p=267118 살아갈수록 누군가에게 느끼는 우월감에 몰입하는 건 참 멍청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개 인생을 열심히 삼사십 년 정도 살아온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애쓴 부분이랄 게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내가 누구보다 ‘잘났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일부 있을지라도, 그 누군가도 나보다 ‘잘났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이 반드시 있다.

가령, 누군가는 자신의 지위나 명예, 돈에 우월감을 가지고 상대방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상대는 그보다 더 건강할 수도 있고, 운동을 잘할 수도 있고, 주변 사람들과 진정한 우정을 나누거나 더 깊은 영성을 지녔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그 앞에서 내가 찬 시계나 가방이 더 비싸거나, 내가 타고 다니는 차가 더 비싸다며 우월감을 느끼는 건 멍청한 일인 것이다. 정작 내가 그런 가치의 우월감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상대방은 나보다 훨씬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공원을 달리고 있을 수도 있다.

Image by freepik

우월감에 몰두하는 건 멍청한 일이기도 하지만, 취약한 일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내가 돈에 최대의 가치를 두고 우월감을 중시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나는 매우 취약한 삶을 살고 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나의 자산이 내년에 가치가 엄청나게 하락할 수도 있고, 갑자기 세무조사를 당하거나 투자 실패로 그 가치를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나는 나보다 더 ‘돈’ 많은 사람 앞에서는 늘 열등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학문적 성취나 사회적 권력, 명망에서 오는 우월감에 취한 삶이 여러 비위 문제나 표절 시비 등으로 모든 걸 하루아침에 잃는 경우도 무척 흔하다. 그러면 그에게는 삶의 근거가 없어져버리는 셈이 된다. 무언가 누리는 게 있다면 감사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에 지나치게 몰입하며 자기 삶의 의미를 의존한다면, 그 삶은 근본적으로 너무도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살아가면서 가장 좋은 태도는 누구를 무시할 필요도 없고, 누군가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으며,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느낄 필요도 없이 그저 내 삶의 좋은 것들을 스스로 사랑해 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내가 운동해서 몸이 좋아지면 어제의 나보다 나아져서 좋은 것이지 이웃집 사람보다 몸매가 우월해서는 아니다. 내가 책을 꾸준히 내서 좋은 것은, 책을 한 권 낸 사람보다 우월해서가 아니라 그저 글 쓰는 게 좋고, 그로 인해 펼쳐지는 삶이 좋기 때문이다.

Image by freepik

그렇게 내면을 채워간다면, 특히나 외적인 것에 집착하는 일도 많이 줄어드는 듯하다. 중요한 건 남들의 시선이나 남들과의 비교 의식이 아니라, 나의 좋은 삶 그 자체이므로, 나의 좋은 삶에 진실로 기여할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인지 하나하나 찾게 된다. 그러면 내가 진짜 좋아하는 책도, 음악도, 영화도 알아갈 수 있다. 내가 정말 원하는 운동도, 관계도, 살 곳이나 탈 것도 알아갈 수 있다.

몰입해야 할 건 우월감이나 열등감이 아니라, 나의 삶을 안쪽에서부터 온전하게 만드는 마음들이다.

원문: 정지우 문화평론가 겸 변호사의 페이스북


이 필자의 다른 글 읽기

]]>
타인의 시선에 맞춘 성장은 ‘개미지옥’이 될 수 있다 https://ppss.kr/archives/267120 Tue, 24 Sep 2024 04:58:35 +0000 http://3.36.87.144/?p=267120 얼마 전 한 성형외과 의사 지인과 이야기를 했는데, 요즘에는 미모가 뛰어날수록 얼굴에 손을 댄다고 한다. 나는 잘 모르는 영역이라 막연히 세상에는 예쁘거나 잘생긴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지만, 알고 보면 상당수가 ‘만들어진’ 미모의 사람들이라는 게 다소 신기하게 느껴진다. 말하자면 우리는 ‘조작 혹은 계량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든 보이는 것들은 원래 그대로가 아니고, 만들어지거나 조작되거나 계량된 것들이다.

또 요즘 아이 부모들은 아이 키 때문에 난리도 아니다. 내가 어릴 땐 키가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살았던 것 같은데, 요즘에는 아이 키가 잘 안 큰다 싶으면 호르몬 주사 등으로 아이 키를 키우려 한다. 교육 같은 것은 물론이고 외모적으로도 아이들이 손해보고 클까 걱정하며 무엇이든 ‘평균 이상’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식이 팽배해 있다. 남들보다 못한 존재로 클까 봐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작가 pikisuperstar 출처 Freepik

나도 스스로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고 싶고, 여러 면에서 성장하고 싶은 의욕도 있다. 내 아이 역시 잘자라서 자기 인생을 잘 누리면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싶고, 그를 위해 많이 도와주고 싶기도 하다. 그런데 이렇게 인생의 모든 것을 ‘조작’하고 ‘계량’할 때,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가에 대해서는 깊은 고민이 필요할 듯하다. ‘모든 것’에 있어서 ‘남들’보다 못한 존재로 살지 않기 위해 계량하다 보면 근본적으로 끝이 없다.

남들보다 근육도 많아야 하고, 키도 커야 하고, 얼굴도 잘생겨야 하고, 남부럽지 않은 차도 타야 하고, 가방도 메야 하고, 시계도 차야 하고, 남들이 무시하지 않는 동네의 아파트도 가져야 하고, 브랜드 옷도 입어야 하고, 아이 학벌도 좋아야 한다. 남들을 기준으로 놓고 조작과 계량의 세계에 뛰어들면 자기를 온전하게 사랑할 방법이 없어진다. 대신 남들의 기준에서만 자기가 사랑받을 존재가 되는데, 이 남들이란 존재는 만족을 모른다. 우리에게 충족의 기준을 알려주지도 않는다.

얼굴을 고치기 시작하면 몇억을 들여서도 고칠 것들이 있다고 한다. 눈, 코 입, 볼, 턱, 윤곽선 등 하나씩 하다 보면 아파트 한 채 값은 들일 수 있다고 한다. 명품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끝없이 올라가는 영역이 있다. 아파트로 남들의 신경을 쓰기 시작하면 서울 강남 안에서도 ‘테북’과 ‘테남’이 나뉜다. 그 안에서도 브랜드가 나뉜다. 이렇게 타인들의 기준을 신경 쓰느라 신경쇠약에 걸릴 수준이 된다.

작가 pch.vector 출처 Freepik

우월감과 열등감은 동전의 양면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느끼는 우월감에 중독되면, 반드시 다른 누군가에게는 열등감을 느끼게 된다. 만족의 기준을 남들과의 비교에 둔다는 점에서 그렇다.

나는 기본적으로 성장을 지지하는 사람이고, 정신이나 신체의 자기계발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기준을 만들지 않으면, 성장과 계발도 일종의 개미지옥이 된다. 그 개미지옥은 타인들의 시선이라는 모래로 이루어져 있다. 만족과 행복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은 아무리 계량되어도 불행하게 살 것이다.

성장의 다른 이름은 때로 결핍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진짜 결핍을 마주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 결핍을 무한한 타인들의 기준으로 채울 것이 아니라, 진짜 자신이 되어가는 방식으로 채워야 한다는 점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원문: 정지우 문화평론가 겸 변호사의 페이스북


이 필자의 다른 글 읽기

]]>
“럭키비키잖아”, 어떤 상황이든 그 자체로 좋아하는 삶의 태도 https://ppss.kr/archives/267050 Mon, 02 Sep 2024 04:31:11 +0000 http://3.36.87.144/?p=267050 1.

요즘 최고의 유행어는 아이돌 IVE의 멤버 장원영의 “럭키비키잖아.”가 아닐까 싶다. 그녀는 빵집에서 사고 싶었던 빵이 있었는데, 앞사람이 그 빵을 다 사 가버린 상황을 마주한다. 보통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 인상을 찌푸리며 재수 없다고, 운이 나쁘다고 생각할 법하다. 그러나 그때 마침 갓 구운 스콘이 나왔고, 장원영은 오히려 운이 좋다고 생각하며 말한다. 앞사람이 원래 사고 싶었던 빵을 다 사가준 덕분에, 갓 구운 엄청 맛있는 스콘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고 말이다.

원래 원했던 게 있었지만, 그 바람이 실현되지 않는 순간 우리는 절망하고 짜증 내고 화를 내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그 순간 빠르게 포기하고, 눈앞의 상황을 새롭게 백지처럼 바라볼 수 있는 게 바로 이 ‘원영적 사고’다. 내가 그 무언가를 원하고 욕망했다 할지언정, 그 욕망 자체는 그리 대단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며 빠르게 ‘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다음에는 어떤 상황이든 그 자체로 좋아하면 그만이다. 따뜻한 스콘이 나오면 그것대로 좋아하면 되고, 살 게 없으면 덕분에 다이어트했다고 좋아하면 된다.

‘럭키비키’ 언급이 실린 장원영의 프라이빗 메일 원본

 

2.

이런 태도가 우리 시대에 폭발적인 호응을 얻는 건, 일차적으로는 우리 시대에 ‘집약적인 욕망’들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가벼운 예로 인스타그램에서 어떤 곳이 핫플로 뜨면 너도나도 그곳을 욕망하며 몰려가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두세 시간씩 대기하면서 ‘실망’해야 하는 일이 무척 흔하게 일어난다.

그 밖에도 살고 싶은 아파트, 갖고 싶은 명품, 가고 싶은 여행지 등 엄청나게 많은 욕망들이 생산되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걸 욕망하면서 상당한 경쟁과 스트레스, 잦은 좌절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무엇보다 욕망을 대하는 태도를 배워야 하는 것이다. 나의 욕망이 실현되지 못한 상황 앞에서 우울과 짜증, 히스테리와 분노에 사로잡히기보다는, 재빠르게 욕망을 포기하고 ‘수정’할 줄 알아야 한다. 이걸 배우지 못하면, 우리는 말그대로 욕망의 노예가 된다.

나아가 우리 사회는 보다 거대한 욕망들과 그 욕망의 노예들의 전쟁터가 되어 있기도 하다. 특히나 청년 세대들은 닿을 수 없는 부동산 등 거대화된 자본 앞에서 일찍이 좌절을 학습해 왔다. 이런 세상에서 생존 방법은 ‘재빠른 포기와 수정’이라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3.

이미 N포세대라는 말은 20년 전부터 유행하고 있고, 과거에는 연애·결혼·출산·취업 등을 포기하는 게 일종의 ‘우울한 좌절’로 받아들여지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그런 좌절들을 ‘긍정’으로 승화시키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생존할 수 없게 되었다.

연애하지 않은 덕분에 나를 위한 선물을 사고 혼자 여행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니 럭키비키잖아,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지 않는 대신 나를 위한 시간을 쓰면서 더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으니 럭키비키잖아, 하고 믿는 것은 자기합리화나 욕망의 왜곡이라기보다는, 욕망의 승화이자 수정이고 삶의 긍정이 되었다.

작가 vwalakte 출처 Freepik

어떻게 보면, 이는 젊은 세대가 세상과 맞서 싸우는 하나의 전략처럼 보인다. 기성질서 안에서 획일화된 욕망들을 이루는 게 더 이상 불가능해졌다면, 포기하고 좌절하며 우울하게 살 게 아니라 삶을 긍정할 새로운 방법을 찾는 것이다.

20억씩 하는 아파트 앞에서 좌절하며 히스테리에 사로잡히는 인간이 되는 대신, 노마드적인 삶을 긍정하는 방향으로 삶을 재설계할 수도 있다. 이것은 실질적으로 필요한 생존 방법이 되었다. 좌절된 욕망을 집요하게 이어가기 대신 삶을 긍정하기, 이것은 이 시대에 요구되는 어떤 필연적인 태도를 지시하는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도, 역시 삶을 사랑하는 것이 낫다.

원문: 정지우 문화평론가 겸 변호사의 페이스북


이 필자의 다른 글 읽기

]]>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한국 사람들 https://ppss.kr/archives/265404 Fri, 28 Jun 2024 01:56:33 +0000 http://3.36.87.144/?p=265404 근래 우리 사회에는 부정할 수 없는 하나의 정서가 확고부동하게 자리 잡은 듯하다. 그것은 “일단 나라도 살고 보자.”라는 정서이다. 사실상 이 정서가 너무 강렬해져서, 사회나 문화에 존재하는 다른 가치들은 전혀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생존이 너무나 중요해진 나머지, 그 밖의 모든 것은 부수적이 된 것이다.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매슬로우의 욕구 이론에서 생존은 대략 1, 2단계 정도에 위치한다. 이 단계를 넘어서고 나면, 사랑과 소속, 존중과 인정, 아름다움과 가치 등 자기실현의 5단계까지 나아간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정서는 1, 2단계에 머무르면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생존의 불안과 공포에 잠식당해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이는 흔히 말하는 상류 계층이라고 해도 별반 다르지 않다. 당장 1억을 버는 사람도, 지금 많이 벌어두지 않으면 나중에는 연금이 고갈되고 나라의 경제가 위축되고 원화 가치가 폭락해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을 안고 있다. 당장 10억짜리 아파트를 가진 사람도 언제 부동산 시장이 변동되어 자산이 빚이 될지도 모른다는 초조함을 느낀다.

경제적 어려움을 현실적으로 겪고 있거나, 구직 단계에 있는 청년은 말할 것도 없다. 사회 전체가 모종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작가 pch.vector 출처 Freepik

청년들은 이제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키우지 않는데, 핵심은 생존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게 불가능해졌다는 데 있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불안한데, 아이를 낳고 키우는 건 불안이라는 폭탄을 만들어 안고 뛰는 정신 나간 일처럼 느껴질 것이다. 안정적인 주거나 직장, 벌이도 문제이지만, 그 이전에 사회 ‘자체’에 대한 안정감이 궁극적으로 상실된 것처럼 보인다.

사회나 경제가 성장할 거라는 기대도 없고, 그렇다고 저성장 속에서 구성원이 보다 평등하거나 동등해지리라는 기대는 더욱 없다. 나는 우리 시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이 사회에 대한 생각이 무엇인지 거의 알 것 같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점점 더 불균형해지고, 격차는 심각해지며, 모두가 함께 잘사는 사회가 아닌 살얼음판 속에서 몇몇만 간신히 살아남는 사회로 이동하고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 속에서 나라도, 일단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그런 세계관을 확인할 수 있다. 전국의 사람들이 고향을 버리고 수도권으로, 서울로, 그중에서도 강남으로 모여드는 것. 장기간 미취업 상태를 유지해서라도 소수의 안정적이거나 고소득 직장으로만 몰려드는 것. 인문학 등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고 돈 버는 일에 대한 콘텐츠로 관심이 집중되는 것.

결혼하지 않는 것,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것, 사교육 경쟁이 극심해지는 것, 타인에게 적극적으로 손 내밀지 않는 것, 그 모든 것들이 이른바 “일단 나라도 살고 보자”는 사고관이 확고해진 사회를 지시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무의식적인 공포에 잠식된 이런 사회에서, 그런 공포와 맞서 싸울 정도로 강한 심지를 가진 사람들을 찾아야 한다고 느낀다. 사회를 어떻게든 재건하고, 제도를 혁명적으로 바꾸어나가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사실 내게도 그것은 거의 요원한 일처럼만 생각된다.

그보다 삶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이 초조와 공포에 ‘잠식’당하지 않는 길을 찾는 것이다. 희망을 보고, 씩씩하게 자기의 대지를 갈고, 오늘도 달리며 햇빛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을 찾아야 한다고 느낀다. 그들로부터 배워, 나도 나의 정원을 가꿀 줄 알아야 한다.

팽배해진 불안감, 언제 벼락 맞고 나락으로 갈지 모른다는 초조함, 내가 딛고 있는 땅에 언제 싱크홀이 생기고, 내가 타고 있는 배가 언제 침몰할지 모른다는 그 불확실성의 그 감각을 다스려야만 한다. 삶에 햇빛을 불러들이고, 내일 지구가 온난화로 멸망하더라도 오늘의 사랑을 다질 줄 아는 태도를 배워야 한다.

나로서는 그것이 이 시대를 건너 보다 온전한 삶을 살아가고, 나아가 조금씩 사회를 이 땅에 다시 돌려놓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라고만 생각된다.

원문: 정지우 문화평론가 겸 변호사의 페이스북


이 필자의 다른 글 읽기

]]>
모두가 궁금한 저작권법 제28조 “인용” 조항을 간단히 정리해 보았다 https://ppss.kr/archives/265400 Fri, 07 Jun 2024 02:41:26 +0000 http://3.36.87.144/?p=265400 저작권법의 ‘인용’ 조항에 대해서는 많은 출판 관계인이나 언론인, 연구자 등이 궁금해한다. 내 주변에서도, 저작권에 관심 있는 편집자와 작가들이 저작권자 허락 없이도 인용할 수 있다고 알려주면, 깜짝 놀라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인용할 때는 일일이 모두 허락을 받아야 하고, 심지어 피인용 작품의 출판사한테 돈 주고 인용해야 하는 줄 알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건 전혀 잘못된 법적 상식이다. 요 며칠 사이에도 이 문제를 물어보는 분들이 많아서, 이번 기회에 이 저작권법 제28조에 대해 아주 간단히 이야기해 보려 한다.

작가 pikisuperstar 출처 Freepik

 

1.

먼저, 저작권법 제28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다.

공표된 저작물은 보도ㆍ비평ㆍ교육ㆍ연구 등을 위하여는 정당한 범위 안에서 공정한 관행에 합치되게 이를 인용할 수 있다.

많은 분들이 여기에서 “정당한 범위”를 궁금해하는데, 판례는 다음과 같이 판시하고 있다.

그 표현 형식상 피인용저작물이 부연, 예증, 참고자료 등으로 이용되어 인용저작물에 대하여 부종적 성질을 가지는 관계(즉, 인용저작물이 주이고, 피인용저작물이 종인 관계)에 있다고 인정되어야 한다)

복잡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인용한 원작품이 아니라 비평, 연구, 교육 내용 등이 ‘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원문을 500자 인용해 놓고, 비평은 50자를 달아 놓으면, 이는 원문이 ‘주’가 된 것이어서 정당한 범위를 인용한 것이라 볼 수 없다.

반대로 원문을 100자 정도 인용하고 비평을 1000자 정도 적었고, 그래서 그 글의 ‘주’가 되는 것이 원문이 아니라 비평 부분이라고 인정된다면 이는 정당한 범위에서 인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단순화한 면이 있지만, 이러한 분량적인 면도 실제로 중요한 기준이 된다.

 

2.

또 위 규정에서 ‘공정한 관행’이라는 부분도 다소 모호하다. 다만 대법원 판례는 이에 대한 기준을 어느 정도 확립해 주었다.

인용의 목적, 저작물의 성질, 인용된 내용과 분량, 피인용저작물을 수록한 방법과 형태, 독자의 일반적 관념, 원저작물에 대한 수요를 대체하는지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하여야 하고, 이 경우 반드시 비영리적인 이용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리적인 목적을 위한 이용은 비영리적인 목적을 위한 이용의 경우에 비하여 자유이용이 허용되는 범위가 상당히 좁아진다.

다소 복잡하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글을 쓰면서, 누군가의 견해를 비판하기 위해 그의 글을 일부 인용하거나 나의 견해를 보강하기 위해 그의 글을 일부 인용하는 식은 공정한 관행에 합치되는 것이라 본다.

여기에서 하나 생각해 봐야 할 점은, 상업적으로 판매되는 책에 다른 작품을 인용해도 되느냐는 것이다. 대법원 판례는 그것도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즉, 상업성(영리성)이 있다고 하여 곧바로 인용이 불가능하다고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이 보도·교육·연구·비평 등의 영역은 대부분 상업적인 영역과도 결부되어 있다. 비평을 문학잡지에 싣는다고 했을 때 비평가는 원고료를 받고, 문학잡지사는 구독자들로부터 구독료를 받는다. 신문에 보도 기사를 쓰더라도, 신문 구독자나 광고주로부터 역시 돈을 받는다는 점에서 상업성이 있다.

따라서 영리성과 비영리성을 엄격하게 나누는 건 거의 불가능하지만, 비영리적인 목적이 확실하다면 더욱 자유롭게 공표된 저작물을 인용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공교육 현장 등에서는, 다른 작품의 인용이 매우 관대해진다고 볼 수 있다.

 

3.

그럼에도 출처는 명시하여야 한다. 인용이 가능하다고 해서 출처 표기 의무에서 면제되는 건 아니다. 저작권법 제37조 제1항은 저작물 이용시 출처 명시 의무를 두고 있고, 이는 인용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다. 출처를 명시하지 않으면, 형사처벌도 받을 수 있다.

 

4.

결론적으로 말하면, 저작권법 제28조의 인용에 해당하는지에 대해서는 건별로 봐야하긴 하다. 가령 어떤 책에서 유명 작품들의 문장들을 잔뜩 수집하여 별다른 해설이랄 것 없이 ‘어록’ 같은 책을 만들었다면, 이는 인용이라고 보긴 어렵다.

그러나 반대로 어떤 책에서 저자가 분명한 논지를 펼치고 있고, 그 와중에 어떤 작품을 비평하기 위해 일부 인용하거나, 자신의 논지를 강화하기 위해 어떤 작품을 일부 인용하는 식으로 활용하고 있고, 그 저자의 견해가 ‘주’가 되는 것이 분명하고, 인용문은 ‘부종적’으로만 활용되고 있다면 굳이 허락받을 필요도 없이 인용할 수 있다.

이것은 저작권법의 제정 목적을 봐도 타당한 규정이다. 저작권법은 종국적으로 “문화 및 관련 사업의 향상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제1조에서 규정하고 있다. 문화의 발전은 자유로운 토론과 논쟁, 인용과 논평 등을 통해 이루어진다.

저작자의 권리 보호도 매우 중요하지만, 동시에 풍요로운 문화가 성장하는 데 자유로운 소통 또한 간과할 수 없다. 그렇기에 저작권법 제28조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 조항은 가히 저작권법의 감초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원문:정지우 문화평론가 겸 변호사의 페이스북


이 필자의 다른 글 읽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