ㅍㅍㅅㅅ https://ppss.kr 필자와 독자의 경계가 없는 이슈 큐레이팅 매거진 Thu, 01 Dec 2016 01:48:52 +0000 ko-KR hourly 1 https://wordpress.org/?v=5.8.10 https://ppss.kr/wp-content/uploads/2015/07/ppss-100x100.png ㅍㅍㅅㅅ https://ppss.kr 32 32 이정현, 시정잡배의 의리 https://ppss.kr/archives/94363 https://ppss.kr/archives/94363#respond Thu, 01 Dec 2016 01:48:52 +0000 http://3.36.87.144/?p=94363 pgpg
출처 : 조선일보

이정현 대표가 박근혜 대통령을 끝까지 지키는 것을 보고, ‘그래도 의리는 있다’며 고 평가하는 경우를 가끔 본다.

먼저 현재의 박근혜 대통령이 어떤 사람인가. 권력 사유화의 몸통으로 기업의 돈을 뜯어냈고, 헌법 유린과 유체이탈성 발언으로 지지율 5%를 기록하며 매 주말 수십만의 국민들을 거리로 나오게 만든 대통령이다. 검찰 수사를 받겠다는 국민과의 약속도 어겼고, 여당에서도 다수의 의원들이 탄핵에 앞장서겠다는 의견을 밝힐 정도다. 단순한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국가적 실패, 정치의 실패를 초래한 대통령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리를 지키는 게 옳은 자세인가? 정치인은 사인이기 전에 공인이다. 공인이라면 개인적인 감정이나 인연을 떠나 공공을 위한 선택을 내려야 한다. 인간적으로 배신하라는 말이 아니다. 제대로 된 측근이라면 대통령이 진정한 사과와 퇴진을 하도록 설득하고, 인간적으로는 곁에 남아 위로하면 된다.

그러나 국민들의 공분을 외면하고, 그 어떤 사과나 책임 조치도 하지 않은 채 여당 대표라는 실제 권력을 놓지 않는 것은 의리가 아니라 몰염치다. 설령 의리라 하더라도 정치인의 본분을 저버린, 시정잡배나 필부들의 의리다.

민주가 어떻고, 자유가 어떻고, 근대화가 어떻고 주구장창 떠들던 사람들이 이러한 전근대적 의리, 마치 조직폭력배가 보스에게 충성하는 듯한 의리를 칭송하는 모습을 보면 한 편의 부조리극을 감상하는 기분이다. 더구나 이정현 대표가 어거지로 자리를 보전하는 것은 개인과 정파의 이득이 걸려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가오는 예산안 심사에서 당 대표의 권력으로 지역 예산을 많이 따내겠다는 욕심이 전혀 없을까? 예산 폭탄이라는 슬로건으로 순천에서 당선된 사람이?

정파적으로도 친박계는 폐족 직전에 몰렸다. 지금 당장 비박에게 당권을 내주고, 대통령 탄핵과 동시에 새누리당이 재창당 수순에 들어가면 친박계는 정치적 시한부를 선고받게 된다. 그렇기에 이들은 어떻게든 새누리당 간판을 유지하며 시간을 끌어야 한다. 지루한 대치가 계속되면 바닥을 찍은 대통령 지지율이 회복되고, 그러면 친박계가 다시 숨을 쉴 수 있다는 계산을 마쳤기 때문이다.

출처 : 연합뉴스

이정현 대표와 친박계는 대한민국 보수 세력이 살고 죽는 것보다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억지로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공인과 사인의 처신을 망각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노림수 때문에 대표실 앞에서 10일 넘게 단식하는 위원장들을 외면하는 모습이 의리라면, 그냥 어디 촌동네에서 조폭 한 명 데려다가 대통령이든 장관이든 대표든 시키는 게 낫다.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는 공과 사의 구분이 무너졌기 때문에 터진 사건이다. 대통령에게 주어진 공적인 권력을 대통령 본인과 비선들이 사적으로 이용한 것이 최순실 게이트의 본질이다. 그로 인해 보수당에게 뼈 아픈 겨울이 찾아왔음에도 이정현 대표와 지도부, 그리고 의리를 부르짖는 지지자들은 전혀 반성을 모르고 있다. 지금 이정현 대표는 공적인 직위를 이용해 철저하게 사적인 인연과 이익을 수호하고 있을 뿐이다. 공보다 사가 중요한 사람들은 공인이 아닌 사인으로 남아야 한다.

이정현 대표와 친박 지도부는 사인으로 돌아가 순천이나 어딘가에서 박사모라는 이름의 조직을 만드는 게 낫겠다. 두툼한 팔뚝에 ‘배신은 죽음’이나 ‘차카게 살자’와 같은 문신을 새겨도 잘 어울릴 것 같다.

공공성이 생명인 정치권에서 시정잡배의 의리를 추앙하는 이들도 이참에 직업을 조폭으로 바꾸면 어떨까?

원문 : 장예찬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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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20대의 정치화에 관심이 없다 https://ppss.kr/archives/36754 https://ppss.kr/archives/36754#respond Thu, 29 Jan 2015 01:06:43 +0000 http://3.36.87.144/?p=36754 20대가 바라본 ‘시대정신이 사라진 20대’에 대하여.

지금의 20대를 향해 ‘시대정신이 없는 게 시대정신’인 세대라고들 한다.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소명을 공유했던 선배 세대와는 달리 뚜렷한 공통의 목표가 없고, 탈 정치화가 가속화 된 세대라는 이유이다.

실제로 주위를 돌아보면 20대의 탈정치화에 대해서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SNS에서 정치적인 의견을 표출하고, 목소리를 내는 20대는 극소수다. 대부분의 20대는 정치와 운동, 투쟁과 같은 단어에 아예 관심이 없다.

나는 또래 중에서는 정치와 사회 운동에 관심이 적지 않은 편이고, 기회가 주어지는 곳에서 목소리를 내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이를 위해 다양한 분야의 독서는 물론이고, SNS에서도 화제가 되는 필자들과 친구를 맺고 잡식성 읽기를 끊임없이 해왔다. 내 페이스북 친구들의 스펙트럼이 극우에서 극좌까지 다양한 것도 우연이 아니라 노력의 결과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공허함을 느끼게 됐다. 20대 중에서 정치와 사회라는 문제로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은 극소수이고, 그 목소리는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20대를 대변하는 젊은 층은 정치권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준석, 손수조 같은 얼굴 마담, 젊은 세대의 대변과는 무관한, 아는 사람만 아는 몇몇 진보 매체의 젊은 필자들 정도가 있을 뿐이다.

김무성수첩음종환이준석진실게임
그 얼굴마담도 이러고 있다.

 

20대를 대표하는 얼굴마담 하나 세우지 못하면서 선배들의 꼰대질은 날이 갈수록 심해진다.

투표를 하라거나, 선거권을 행사하라는 운동은 꼰대질이 아니다.

그러나 ‘젊은이라면 당연히 야당을 찍어야 한다’거나 ‘선거날 부모님의 주민등록증을 갖고 튀어서 여당 투표를 막아라’ 따위의 말은 결국 ’20대의 투표율’보다는 ‘우리를 찍어주는 20대의 투표율’에 관심이 있음을 증명할 뿐이다.

게다가 보수화된 20대가 많아지니 선배들의 꼰대질은 단순히 투표를 독려하는 수준을 벗어난다.

순수하게 선거와 정치에 대한 관심을 가지라는 말이었다면, 자기 목소리를 내고 투표하는 보수화 된 20대는 모범적인 친구들이다. 그러나 보수 성향의 20대에게는 조중동에 세뇌 됐다거나 먹고 사는 문제밖에 관심이 없는 속물이라는 말을 쓴다.

‘토익 책 대신 짱돌을 들고 던져’라는 말부터 ‘지금의 20대는 예전 386같은 패기가 없어서 정부가 이 따위다’라는 말까지. 과거의 386에 향수를 느끼는 윗 세대의 꼰대질은 명백하게 ‘특정 진영’을 가르키고 있다.

그들은 20대의 정치화에 대해 관심이 없다.

다만 20대가 정치적으로 ‘자기 진영’을 지지해주는 것에만 관심이 있을 따름이고, 당연히 20대라면 범 야권과 범 진보를 지지해야 한다는 단순한 논리로 무장했을 뿐이다.

따지고 보면 무진장 야측 지지율 높다(...)
따지고 보면 무진장 야측 지지율 높다(…)

 

그들만의 시대정신

그런데 주위의 평범한 20대들은 왜 정치에서 벗어나며 시대정신 따위를 개의치 않게 됐을까.

17%에 달한다는 빈곤 청년층은 정치에 관심을 갖는 것조차 사치로 느낄 것이다. 이런 이들에게 윗세대는, 그러니까 더더욱 정치에 관심을 가져서 세상을 바꾸라고 말한다. 차라리 개인의 노력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꼰대들은 ‘힘든 개인 한 사람’을 모욕하고 말지만, 세상을 바꾸지 못하는 20대를 탓하는 진보적인 꼰대들은 ‘세대 전체’를 모욕한다.

생존 자체가 시급한 화두인 빈곤 청년층이 세대적인 모욕을 감수하고 하나의 시대정신으로 똘똘 뭉치리란 기대는 순진하다 못해 멍청하다.

자신들의 시대처럼 짱돌을 들고 데모를 하다가 적당히 졸업해도 대기업이나 공공기관에 취업해 나이가 들면 보수로 사상적 전향을 할 수 있는 만만한 시대가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선배들의 몰염치는 탈정치화의 불꽃을 더욱 맹렬히 타오르게 만드는 장작이다.

필요하다 생각하면 정치도 알아서 한다.
필요하다 생각하면 정치도 알아서 한다.

빈곤 청년층이 아닌, 큰 어려움 없이 4년제 대학을 나와 취업에 성공했거나 취준생으로 살고 있는 대다수의 청년층은 왜 정치에 관심이 없는 것일까?

그들에게 세상은 짱돌을 들고 투쟁해야 할 만큼 엉망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386 집착증에 걸린 윗세대는 한국을 지옥으로 묘사하지만, 그래서 삼포세대니 88만원 세대니 하는 신조어를 열심히 만들어 청년 세대의 절망을 대변한다고 주장하지만, 빈곤층이 아닌 20대에겐 대한민국이 살만한 나라이기 때문에 투쟁의 동력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정치 논리보다 가치 있(어 보이)는 자신만의 삶

버블 경제가 무너진 후 일본의 젊은이들은 주택을 구매하거나 자동차를 사는 일에 관심을 접었다. 대신 소박한 여행과 화초 키우기, 그리고 오타쿠 문화로 표현되는 수많은 서브 컬쳐에 집중하며 저비용으로 다양한 취미를 즐긴다.

주위에서 흔히 만나는 같은 20대 친구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집을 사는 게 힘들기 때문에, 결혼과 출산과 육아에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분노하고 절망하는 20대를 온라인이 아닌 오프라인에서 만나기란 정말 힘들다. 대부분은 선배라는 작자들이 만들어낸 88만원 세대나 삼포세대와 같은 절망적인 신조어에 관심이 없다.

그래도 다 산다.
힘들지만 그래도 다 적응하며 산다.

상위 20%의 커트라인을 뚫고 대기업이나 공공기관에 합격한 친구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은 싸워야 할 이유를 모른다. 살만하기 때문이다. 살만한데 계속 세상이 지옥이라고 싸워야만 한다고 부추겨봤자 피곤하게 느껴질 뿐이다.

아직 대학에 있거나 취준생으로 사는 20대, 그리고 취업 관문에서 상위 20%에 들지는 못했지만 적정 수준의 연봉을 받는 20대들도 마찬가지다. 연봉이 많지 않아도, 그 연봉으로 집을 사는 게 불가능하고 결혼이나 출산이 어려워도 그들은 크게 개의치 않는다. 지금 세대의 일본 청년들처럼 저비용으로 누릴 수 있는 다양한 취미를 즐기며 저성장 시대의 라이프 스타일에 적응하고 있다.

좋은 차는 살 수 없어도 좋은 옷을 입고, 적금을 드는 대신 일 년에 한 번 여행을 가거나 꽤 자주 좋은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는다. 괜찮은 연봉을 받는 취업 관문 상위 20%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주위에서 흔하게 마주치는 평범한 20대들 중에 분노와 절망을 표출하는 사람을 찾는 게 쉽지 않다.

당연히 사는 게 쉽지 않겠지만, 대부분 저성장 시대의 라이프 스타일에 적응하며 윗세대의 선배들에 비해 소소하고 개인적인 즐거움을 찾아 누리는데 탁월하다. 빈곤 청년층은 투쟁 할 여력이 없고, 상위 계층만이 아니라 폭넓게 중간 계층에 속하는 청년들은 투쟁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한다.

 

선배들의 꼰대 논리

그런데 선배들은 시대정신의 실종과 탈정치화를 비웃고, 모욕하기 바쁘다. 성장 과정에서 그렇게 잘나신 386의 정치적 실패를 두 눈으로 보고 자란 지금의 20대들을 자기 진영으로 꼬시고 싶다면 유혹의 기술이라도 뛰어나야 할 것 아닌가.

기껏 하는 말이라는 게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더 노골적으로 말해 ‘자기 진영’을 찍어주지 않으면 빈곤 문제가 심해지고 청년들은 계속 피해자가 될 거라는 협박이다. 적어도 이명박근혜보다는 우리 쪽이 낫지 않냐는 진부한 말이 10년 가까이 반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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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의 양당 구조에서는 어느 쪽이 이기든 세대의 이익과는 상관이 없다는 게 청년층 기저에 깔린 판단이다. 청년들이 삶이 힘들지 않다는 게 아니다. 그 어려움을 구조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이 정치라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특정한 정치 세력에게 힘을 실어주면 청년 세대의 이익을 대변할 거라는 확실한 물증을 주고 유권자를 유혹해야 한다. 이 세대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조롱과 비난이 앞서는데 외면을 받는 게 당연하다. 20대들이 윗세대의 꼰대질을 ‘취객의 진상’ 정도로 여기는 게 당연하다.

여자를 만날 수 없고, 그래서 여자를 혐오하는 일베충들과 정치적으로 20대를 이용할 수 없어서 20대를 혐오하게 된 윗 세대 선배들이 그리 달라 보이진 않는다. 굳이 지금 20대의 시대정신을 말하자면, ‘시대정신 따위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세대 단절은 더욱 심해질 것

누가 그랬듯 지금의 20대는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이고, 10대는 모바일 네이티브 세대이다. 현 세대가 지나고 다음 세대가 20대가 되면 탈 정치화 성향이 달라질 거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모바일 네이티브 세대는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인 지금의 20대보다 개인적인 면모가 훨씬 강하다.

모바일 네이티브 세대인 지금의 10대를 하나의 세대로 묶어 정치적 시대정신을 만드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나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20대로서 한 때 정치와 사회에 관심이 없는 대다수의 친구들을 무시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저성장 시대의 라이프 스타일에 적응하며 적게 벌어도 다양한 방식으로 인생을 즐기는 법을 배워가는 20대 친구들을 존경하고 응원한다. 시대정신을 갖는 것조차 사치인 빈곤 청년층의 탈정치화를 누구도 비난하거나 조롱할 수 없다.

또한 굳이 하나의 세대로 묶이지 않고 원자화 되어 개인에 집중하는 대다수 20대들은 이미 시작된 저성장 시대에서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체득하는 중이다. 그럴듯한 유혹의 기술도 없이 한 세대를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어 자신들의 투쟁에 소비하려는 윗 세대들의 바람은 앞으로도 영영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시대정신을 부르짖는 선배들은 시대가 어떻게 변했고, 청년 세대가 어떤 방식으로 바뀐 시대에 적응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능력도 없는데 노력조차 안 하니 세대 간 소통이 가능할 리 없다.

시대는 변했고, 현재의 20대는 누구보다 빠르게 바뀐 시대에 적응해가고 있다. 지금의 20대는 윗세대의 이해나 도움을 바라지 않는다. 당장 자신들을 지지하지 않으면 세계가 더한 지옥이 될 거라는 으름장에도 꿈쩍하지 않는다. 위에서 뭐라고 떠들건 관심 자체가 없다. 그저 이 세대만의 방식으로 주어진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윗세대의 투정일 뿐, 욕먹을 이유는 없다

일본의 기성세대가 청년층을 후리타, 니트, 마일드 양키 등 각종 별명으로 부르며 비난하는 것처럼 한국의 윗 세대도 계속해서 20대를 안주거리로 삼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대부분의 20대는 윗 세대의 비난 따위를 신경도 쓰지 않는다. 실제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진보 매체와 언론의 칼럼을 누가 읽겠는가. 애당초 그들의 글이 발표되는 창구가 20대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곳이다.

결국 ‘자기 진영’안에서 20대라는 비난할 대상을 정해놓고 손가락질하며 지지 세력을 결집시키는, 그야말로 ‘그들만의 부흥회’에 20대를 소비 할 뿐이다.

시대정신 따위에 집착하지 않는 내 주위의 평범한 20대 친구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정치와 사회에 무관심하다는 이유로 다시는 무시하지 않겠다. 온라인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극소수의 20대 운동가들보다 하나의 목소리로 묶이기를 거부하는 그들이 옳다.

쓸데없는 윗세대의 투정에 관심이라는 먹이를 주지 않는, 변화된 시대에 누구보다 잘 적응해가는 우리는 욕 먹을 이유가 없는 세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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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훈 문제, 음악을 정치로 접근하지 말라 https://ppss.kr/archives/35233 Fri, 12 Dec 2014 07:21:09 +0000 http://3.36.87.144/?p=35233 결국 정명훈 선생이 사의를 표했다.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마음을 가라앉히며 몇 가지 짚어야 할 사안들을 기록하려 한다.

 

1. 서울시향의 문제와 박현정 대표의 언행

서울시향이 방만하게 운영되고 있었고, 몇몇 직원들의 근태가 불성실하다는 ‘소문’이 사실이라고 치자. 그렇다면 대표의 폭언과 성희롱, 인격 모독은 용납될 수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서울시향의 운영에 문제가 있었음을 지적하며 박 대표를 감싸고 돈다. 그렇다면 직장에서 성과가 좋지 않은 직원이라면 언제든 상사에게 폭언과 모욕을 당해도 괜찮다는 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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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콩 부사장 조현아를 비난하면서 박현정 대표를 감싸는 모순적인 발언이 스스로에게들 부끄럽지 않은지 묻고 싶다. 조직에 문제점이 있다면 냉정하게 지적하며 개선하면 그만이다. 그 정도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면 대표 자격이 없다.

공식적으로 확인 되지 않은 조직의 문제점을 근거삼아 인격 모독과 폭언, 성희롱을 두둔해선 안 된다는 건 상식 중의 상식이다.

 

2. 기업인들은 과연 만능 해결사인가?

박현정 대표의 커리어는 화려하기 그지없다. 비단 그녀뿐 아니라 각종 단체의 요직에 기업인 출신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하지만 이윤을 창출해야 하는 기업에서 쌓은 커리어가 과연 특수성을 지닌 각기 다른 단체의 운영에 도움이 될까? 우리는 전설적인 기업인 이명박이 어떻게 이 나라를 운영했는지 직접 겪은 산증인들이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기업인 출신들이 만능 해결사처럼 여겨지는 풍토가 남아있다.

박 대표의 음악계에 대한 몰이해와 무지가 지금의 비극을 낳았다. 그녀가 보기에 지휘자 정명훈이 누리는 혜택이 과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세계에 몇 안 되는 거장들이 누리는 것과 같은 수준의 대우를 받았고, 음악계의 관행에서 어긋난 연주 일정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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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정명훈이 서울시향을 지휘하며 받는 대우는 그가 1992년 바스티유 오페라단에게 제의받은 것과 비슷한 수준이다. 그동안의 물가상승률과 세계적으로 거장 지휘자들의 몸값이 상승한 것을 고려하면 계산기 굴리지 않고 아주 쿨하게 서울시향의 지휘를 맡아준 셈이다.

음악계뿐 아니라 각계각층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기업인 출신들이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광경을 이제는 그만 봤으면 한다.

 

3. 정명훈 가치는 우리 생각 이상으로 높다

한겨레 칼럼에 따르면 정명훈이 그리 대단한 사람 같지 않은데, 마에스트로 정명훈의 몸값 논란에 대해서는 허핑턴 포스트 코리아의 이 글이 훨씬 정확하다. 한마디로 정명훈의 가치는 매우 높다.

세상에 이유 없이 지불되는 돈은 ‘거의’ 없다. 정명훈의 지휘는 시장에서 그만큼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것은 ‘차별’이 아니라 ‘차이’다. 참고로 정명훈이 온 이후 유료관객률은 30%대에서 80%에 육박하고 있다.

다시 말하기도 입이, 아니 손가락이 아프지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정명훈은 세계적으로 손 꼽히는 거장이다. 그의 음악성과 세계적 평가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 자체가 스스로의 무식함을 드러내는 일이다.

Booklet | SPO Tchaikovsky

 

4. 예술가의 개인적인 흠과 정치적 견해는 구분해야

예술가는 완전무결한 인간이 아니다. 누구도 완전무결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인 흠결이 있고, 과오를 저지를 수도 있다. 그러한 부분은 예술가의 예술적 성과나 업적과 구분해서 지적하거나 비판해야 한다.

정치적 견해 역시 마찬가지다. 누구나 자유롭게 정치적 견해를 가질 권리가 있다.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예술가를 비난하는 사람은 세상 모든 일을 정치, 특히 자기 진영의 정치와 떼놓고 생각 할 수 없는 ‘진영 논리’에 물들어 사리분별을 잃은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한 때 빛났던 총기를 잃고 거듭된 헛소리로 자기 진영을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지탄을 받는 탁현민을 들 수 있겠다. 탁현민은 다음과 같은 트윗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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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정치논리에 파묻힌 정명훈 공격

이처럼 몇몇 좌파 지식인들은 지휘자 정명훈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다. ‘목수정’이 정명훈에게 대단한 결례를 범하고도 적반하장으로 자의적이고 악의적인 글을 올려 그를 비난한 이후 일부 좌파 지식인들이 정명훈을 힐난했다. (소수진보정당 소속 운동가들이 보기에 대표적 예시로 든 탁현민이 좌파가 아닐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 눈에는 그나물에 그밥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물론 상식적인 시민의 주류는 목수정의 무례함을 탓했지만, 자기 진영끼리 똘똘 뭉쳐 바깥 이야기에는 귀를 닫는 그들에게 있어, 정명훈은 세계적인 거장이 아니라 또 하나의 수구꼴통으로 여겨질 뿐이다.

목수정 사건으로 인해 지휘자 정명훈의 개인적인 정치 성향이 어느 정도 드러났고, 예술과 정치를 구분지어 생각할 줄 모르는 몇 몇 좌파 지식인들에게 정명훈은 용납할 수 없는 인물이 됐다.

이번 서울시향 사건이 터지자마자 언론 칼럼 등 여러 지면에서 좌파 지식인 딱지를 단 이들이 쏟아낸 수준미달(음악계의 현실과 글로벌 스탠더드를 전혀 모르고 쓴)의 원색적인 비난을 보며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신해철이 노무현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그의 음악성까지 폄하한 극우 꼴통들과 도대체 다를 점이 무엇이란 말인가? 신해철 사건에서도, 이번 사건에서도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진영 논리의 병폐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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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현상을, 심지어 예술까지도 자신들의 정치 진영의 논리와 결탁시켜 사고하고 판단하는 이들이 이 사회의 정치 혐오증을 부추기고 있는 주범이다.

 

6. 대체 무엇이 대중을 위한 예술인가?

탁현민을 위시한 몇몇 이들은 정명훈의 음악, 나아가 클래식이 서민적이고 대중적이지 않다는 말을 한다. 그들에게는 민중가요와 노동요 정도가 서민적인 음악일런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시각이야말로 서민과 대중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규정시키는 뼛속까지 엘리트 주의적인 사고의 산물이다. 과연 예술의 전당에, 클래식 공연장에, 또 발레나 뮤지컬이 열리는 곳에 단 한 번이라도 가보고 저런 말을 지껄이는지 묻고 싶다.

지금처럼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람들이 한 공간에서 클래식이나 발레를 감상하는 시대가 또 언제 있었던가. 예술의 전당에서 서울시향의 연주를 즐기면 더 이상 서민이나 대중이 아니게 되는 것인가.

또한 그들이 말하는 서민이나 대중은 클래식이나 발레 같은 취미를 즐길 수 없는 계층이라는 뜻인가. 서민과 대중을 들먹이는 지식인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서민과 대중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탁현민이 참여했던 윤도현 밴드 콘서트의 티켓 가격은 10만원 전후를 오간다. 서울시향의 공연 티켓 중에는 그보다 비싼 것도 있지만 그보다 저렴한 것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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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격 비교로 탁현민과 그의 동조자들을 조롱하고 싶지는 않다.

‘좋은 공연’, 나아가 ‘문화 예술’이 늘 저렴하고 무료여야만 서민과 대중을 위한 것이라는 발상은 얼마나 후진적이고 천박한가! 서민과 대중도 얼마든지 다양한 취미를 향유할 수 있고, 우리 사회가 문화 예술에 합당한 비용을 지불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야 한다.

 

7. 위대한 마에스트로를 보내며

이제 우리는 예전처럼 자주, 가까이서 마에스트로 정명훈이 지휘하는 서울시향의 연주를 보기 힘들어질 것 같다. 분명한 건 지난 시간 정명훈이 지휘하는 공연을 자주, 가까이에서 보고 들을 수 있어서 ‘서울’은 내게 제법 괜찮은 도시로 여겨졌다.

앞으로는 프랑스나 독일, 네덜란드의 라디오에서 서울시향의 연주를 소개하며 틀어주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이따금 유럽의 유명 악단과 함께 내한해 지휘하는 그의 공연을 더 비싼 값을 주고 봐야 할 것 같다.

할 말은 끝이 없지만 이쯤에서 줄인다. 내가 사는 도시에서 마에스트로의 공연을 자주 볼 수 있어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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