ㅍㅍㅅㅅ https://ppss.kr 필자와 독자의 경계가 없는 이슈 큐레이팅 매거진 Mon, 16 Jan 2023 03:15:18 +0000 ko-KR hourly 1 https://wordpress.org/?v=5.8.11 https://ppss.kr/wp-content/uploads/2015/07/ppss-100x100.png ㅍㅍㅅㅅ https://ppss.kr 32 32 노티피케이션: 디지털 공유지의 비극 https://ppss.kr/archives/117217 https://ppss.kr/archives/117217#respond Tue, 12 Jun 2018 02:17:55 +0000 http://3.36.87.144/?p=117217 ※ 이 글은 Scott Belsky가 자신의 미디엄에 작성한 「Notifications: A Tragedy Of the Digital Commons」를 번역한 글입니다.


스마트폰의 탄생은 앱의 시대를 열었고, 기능과 인터페이스는 개별 앱에 따라 세분화 되었다. 초기 모바일폰에는 GPS가 없었다. 실시간 비디오도 물론 없었고 (통신망이 지원하지 않았다), 커뮤니케이션은 비동기적이었으며 여전히 문자메시지, 이메일 또는 전화통화 등이 주된 연락 수단이었다.

물론 오늘날의 모바일 기기들은 완전히 다르다. 그들은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고, 실시간으로 우리에게 접근하며, 탑재된 애플리케이션 역시 훨씬 더 진보되었다. 앱은 모바일 운영체제를 능가하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이에 대응하고자 iOS와 안드로이드는 상시 작동하는 고도의 지능적 기능들을 구현했는데, 그 방법이 매우 어리석다. 아이콘 모퉁이에 띄워진 뱃지, 자동 업데이트, 그리고 궁극적으로 노티피케이션들이다.

 

아아, 노티피케이션들

그것이 처음 등장했을 때 개발자들은 앱의 경계를 넘어 언제나 사용자에게 접근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들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사용자에게 주어진 건 성가시고, 뜬금없고, 거의 괴롭힘에 가까운 경험이었다.

노티피케이션은 우리의 삶을 더 낫게 만들기는커녕 그저 주의를 끌기 위한 술책으로 전락했다. 현재의 노티피케이션 방식은 결코 지속될 수 없는 편법에 불과하다는 것이 점점 더 자명해지고 있다. 가장 높은 전환율을 보이는 노티피케이션이 대부분 돈과 관련이 있거나, 공포 심리 또는 FOMO(fear of missing out • 잊혀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등의 감정과 연관된 것들이라는 점은, 기업들이 사용자의 주의를 끌어보고자 심리 게임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는 전형적으로 ‘공유지의 비극’에 해당하는 사례다. 공유지의 비극이란 ‘소유권의 구분 없이 공유된 자원을 개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용함으로써 결국 고갈시키고 마는 비효율적인 사회적 현상’을 의미한다. 여기서 ‘개개인’은, 이기적인 태도로 ‘공유지’에 해당하는 사용자의 모바일 사용환경을 무분별한 노티피케이션을 통해 침해하는 앱 개발자들이 해당될 것이다.

노티피케이션의 범람과 몇몇 무책임한 사람으로 인해 모두를 위한 공간이 훼손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앱은 노티피케이션의 홍수 속에서 더 돋보이고자 온갖 새로운 방식을 시도한다. 얼마 전 이야기를 나눴던 한 기업가는, “테스트 결과 이모티콘이 포함된 노티피케이션이 20%나 더 높은 전환율을 보이더라.”는 이야기를 했다. 이제 대부분의 노티피케이션에 이모티콘이 포함되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속될 수 없는 구조다. 앱이 중심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사용자와 앱의 접점인 인터페이스가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을 보고도 어떻게 모른 채 지나칠 수 있겠는가.

 

장기적인 해결책: 지능적 ‘노티피케이션 레이어’ API

스타트업 단계의 팀부터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Periscope/Twitter, Pinterest, Behance, Adobe, Prefer 등의 팀들과 협업하며 깨닫게 된 것 중 하나는, 노티피케이션 시스템이 지금보다 더 똑똑했다면 사람들의 삶과 직업을 더 낫게 만들 수 있었으리라는 점이다.

그래서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이 아이디어는 애플이나 구글, 또는 어느 아파트나 창고에서 프로덕트를 만들고 있는 팀이라도 얼마든 가져다 써도 좋다. 다른 모든 앱들이 노티피케이션을 보내기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또는 반드시 사용해야 하는) 하나의 노티피케이션 관리 서비스를 만들라. 이것을 ‘노티피케이션 레이어 API’라 부르자.

노티피케이션 레이어 API는 당신의 위치 정보, 스케줄, 특정 시간대에 특정 앱을 사용하는 경향성, 과거 비슷한 노티피케이션에 대한 전환율 등 모든 정보를 통합적으로 수집할 것이다. 그리고 이 시스템은 다른 사용자들의 사용패턴을 분석해 노티피케이션의 기본 설정도 스스로 변경하며 최적화할 것이다.

당신과 비슷한 사람들이 특정 시간 또는 장소에 어떤 앱의 노티피케이션을 유용하게 사용한다면, 당신 역시 그 노티피케이션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사용자에게 지속적으로 무시당하는 불필요한 노티피케이션은 점차 차단되어 갈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용자가 그런 노티피케이션을 접하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초래될 변화에 대해 생각해보자:

  • 노티피케이션은 정중하고 영리해진다. 당신의 캘린더에 미팅이 잡혀 있다면, 그 시간동안 긴급한 내용이 아닌 이상 어떤 노티피케이션도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트럼프에 관한 뉴스나 Houseparty 앱이 보내는 알림 따위를 받을 일은 없다. 하지만 당신이 우버를 타고 이동하고 있는 것이 감지된다면, 다양한 뉴스 알림과, 낱말 맞추기 게임, 그리고 라이브 스트림 등의 볼거리가 노티피케이션으로 전달될 것이다.
  • 노티피케이션은 인공지능에 의해 최적화된다. 어떤 사용자가 특정 앱의 노티피케이션에 잘 반응하지 않는다면, 사용자 본인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노티피케이션이 덜 전달될 것이다. 시스템은 노티피케이션 선호도를 측정하고 결과를 적용하며 마치 Spotify가 사용자의 음악 취향을 알아가듯, 그리고 Stichfix가 사용자의 패션 취향을 파악해가듯 사용자의 행동 데이터를 기반으로 진화해 갈 것이다. 그리하여 시스템은 점진적으로 더 영리해지며, 사용자에게 필요한 노티피케이션이 전달되는 확률은 계속 증가할 것이다.

노티피케이션 레이어 API는 사용자 인터랙션 모델을 전환시킴으로써, 앱 개발자들로 하여금 가장 실행가능성이 크고, 사용자에게 가치 있는 노티피케이션을 가장 좋은 시간대에 배치하기 위해 추가적인 노력을 들여 제품을 개선하게끔 장려할 것이다. 그리하여 ‘공유지’는 더 비옥해질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iOS와 안드로이드는 노티피케이션에게 더 넓은 공간을 할애하는 방향으로 진보될 것이다(그저 몇 문장의 글이 아닌 애니메이션 또는 풀 스크린으로 된 노티피케이션을 생각해보라). 다만 퀄리티가 보장되고 공유지가 훼손되지 않는다는 보장 하에 말이다.

 

단기적인 해결책: 더 나은 노티피케이션 로직

앱을 제작하는 기업의 경우,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노티피케이션의 로직을 바로잡는 것은 강한 무기가 될 수 있다. 특히나 라이브 비디오 관련 서비스들 (Preiscope, Houseparty 또는 ‘제2의 케이블 네트워크’를 지향하는 Cheddar 등)은 반드시 이벤트 관련 노티피케이션을 발송하는 프로세스를 개선해야 한다.

간단한 로직 모델로는 충분하지 않다. 아주 좋은 예로, Slack이 고객에게 노티피케이션을 보내는 것을 결정하기까지의 로직 맵을 한번 살펴보라 (아래 그림 참조). 감탄스럽다.

출처: Slack Team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앱의 노티피케이션을 조정하거나 차단한다. 따라서 당신의 팀이 사용자에게 노티피케이션을 계속 전달하고 싶다면, 시스템 자체를 혁신해야만 할 것이다. 물론 각각의 앱이 스스로의 시스템을 개선하는 방식의 단기적 해결책은 한계가 있다. 결국 그것은 여전히 난잡한 노티피케이션의 범람 속에 묻혀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익 구조의 변화나 규제가 생기기 전까지 공유지의 비극은 계속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노티피케이션 시스템의 로직은 관련성, 긴급성, 위치 정보, 관계 정보와 이를 기반으로 한 인공 지능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 가장 좋은 해결책은 모바일 운영 체제 자체가 모든 앱이 준수해야 하는 노티피케이션 레이어 API를 제공하는 것이다.

사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우리가 어떤 앱을 설치했는지보다 우리가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새로운 모바일 운영 체제일지도 모른다.

원문: Hyungtak J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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툴을 쫓는 사람들 https://ppss.kr/archives/116610 https://ppss.kr/archives/116610#respond Tue, 05 Jun 2018 00:56:21 +0000 http://3.36.87.144/?p=116610 ※ Tim Kadlec의 ‘Chasing Tools’를 번역한 글입니다.


Tim Kadlec

직업 프로그래머로서 참여했던 나의 첫 번째 프로젝트는 레거시 코드로 가득한, 꽤 큰 규모의 웹사이트였다. 레거시 코드는 많은 문제를 유발한다. 이 프로젝트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웹사이트에 무려 세 가지의 다른 자바스크립트 프레임워크가 공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개발자들은 과로에 시달렸고, 사이트에게 필요한 리빌드를 진행하기엔 예산이 부족했다. 물론 처음에 사용되었던 프레임웍을 계속해서 유지해올 수도 있었겠지만, 문제는 새로운 프레임웍이 등장할 때마다 기존에 사용해오던 프레임웍은 개발 전선의 뒤편으로 밀려났고, 활발했던 커뮤니티마저도 시들해져 버리곤 했던 것이다.

사실 그 프로젝트는 다행히도 잘 마무리되었다. 다른 프레임웍은 모두 제거하고 jQuery만을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이 얼마나 대단한 퍼포먼스 향상인가). jQuery는 우리가 사용했던 다른 프레임웍과 달리 새로운 프레임웍의 등장으로 인해 잊히지 않았고 오히려 그 생태계는 시간이 갈수록 성장하고 번성했다.

물론 그저 순수한 자바스크립트를 사용했더라면 이런 문제들이 애당초 없지 않았겠냐는 비판을 해보고 싶은 마음도 없는 건 아니다. 그런데 그런 비판이 공정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이런 툴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제작된 건 아니니 말이다. 툴이 존재하는 건 누군가 어떤 상황에서 분명 도움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툴을 만들고 공유했다. 솔직히 그것 자체는 정말 멋진 일이다.

최근 어떤 글이 과도하게 복잡해져 버린 근래의 자바스크립트 환경을 농담조로 비난한 것에 일부의 개발자들이 불편함을 표현한 것 역시 그 순수한 의도가 공격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글은 분명 재미를 위해 쓰였겠지만(난 웃었다), 누군가는 이것을 오픈소스 생태계와 그것에 공헌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분명 그 글의 의도가 그런 부정적인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사안이 오픈소스 생태계가 가진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넘쳐나도록 다양한 선택지가 있다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다. 선택사항이 부족한 것보다는 많은 것이 좋다. 문제는 새로운 툴이 나올 때마다 그것을 쫓아온 우리의 대응 방식이며, 더 심각한 문제는 우리가 이런 기술을 가르치는 방식에 있다.

소프트웨어 산업은 툴을 사랑하고 거기엔 이유가 있다. 툴은 우리의 생산성 증대를 도와준다. 툴은 프로젝트에 있어서 필수적인 단순한 작업들의 자동화를 돕는다. 툴은 난해한 브라우저 호환성 문제의 해결을 돕는다. 툴은 우리가 더 중요하고 흥미로운 문제들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다. 툴은 대체적으로 ‘좋은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툴을 향한 우리의 애정은 계속해서 새로운 툴이 출시되기를 기다리는 건강하지 못한 집착으로 이어졌다.

빌드 스크립트들의 사례는 꽤나 재미있다. Grunt는 등장과 함께 프론트엔드 개발 커뮤니티에서 체계적인 개발 프로세스를 정립하는 것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개발자들이 Grunt 사용을 익숙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할 즈음 얼리어답터들은 이미 새로운 빌드 스크립트인 Gulp를 찬양하기 시작했다. 많은 개발자들이 Gulp로 갈아타는 동, 일부 개발자들은 새롭게 등장한 또 다른 빌드 스크립트 Broccoli로 갈아타기 시작했다.

마치 새로운 대안을 사용하는 것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또 다른 대안이 계속해서 등장하는 것만 같았다. 물론 진화는 대체로 이로운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토대로 발전하길 지속해야 한다. 그리고 각각의 빌드 툴은 나름의 차별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사람들은 자신의 워크플로우에 더 적합한 툴을 선택해 사용할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정작 해결되어야 할 문제를 고민하기보다 새로운 것을 쫓는 것에만 몰두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이유로 이런 기류가 형성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자바스크립트와 웹 기술 전반을 교육하는 방식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만약 당신이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순수 자바스크립트에 대한 자료를 구하고자 시도해본다면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 해결을 논할 때 특정 툴을 끼워 넣지 않은 글이나 강좌를 찾기란 쉽지 않다.

툴은 끊임없이 쏟아진다.

jQuery가 주목받기 시작하던 시절 자주 지적되었던 문제점은 너무 많은 글이 jQuery의 사용을 당연시한다는 것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CSS만 가지고도 충분히 시연할 수 있는 것을 굳이 Sass를 사용하는 사례 역시 흔하다. 이 글 초반부에 언급한 최근의 자바스크립트 환경 비판 글에는 단순한 질문에도 ‘당신은 React를 배워야 할 것 같네요.’라고 대답하는 가상의 캐릭터가 등장한다. 다소 인위적일 수는 있지만 내용 자체는 낯설지 않은 이야기다.

새로운 툴이 등장할 때마다 증가하는 개발 환경의 복잡도 만큼이나, 교육 과정에서 언급되는 툴의 개수가 증가함에 따라 학습 환경 역시도 점점 복잡해지고 있다. 이 글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논점도 바로 이 부분이다. 개발 환경에 결함이 있다는 것이 아니고, 다양한 선택권이 나쁜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누군가 어떤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할 때, 그들이 얻는 답변 중 다수가 ‘이 툴을 설치하시고요, 이렇게 셋업부터 하세요.’로 시작되는 현실에 관한 이야기다.

도움 될 새로운 툴을 가르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것은 그 툴이 도움 될 이유뿐 아니라 도움 되지 않을 수도 있는 이유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근본적인 문제와 특정 툴이 성급히 연관되지 않도록 분리하는 데 좀 더 신경 써야 한다. 사람들이 기본적인 것부터 배우도록 도와야 한다. 그러고 나면 그들이 스스로 필요한 툴을 결정할 것이다.

전에도 언급한 적 있지만 개발자로써 배울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기술은 Node.js나 React, Angular, Gulp 또는 Babel 따위가 아니다. 당신이 시간을 들여 배워야 할 가장 가치 있는 것들은 오히려 네트워크, HTML, CSS, 그리고 자바스크립트와 같은 웹의 핵심 기술들이다. 웹의 핵심에 대한 이해는 당신이 툴에 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기반이 되어줄 것이다.

툴은 적합한 상황에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지만, 그것을 판단하기 위해선 상황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며 해결해야 할 사안을 발견했을 때 기저에 깔린 문제의 본질을 생각해봐야 한다. 문제를 확실히 파악하고 난 후에야 툴의 사용 유무와 어떤 툴을 사용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다.

툴을 선택함에 있어서 고려해야 할 몇 가지 사항이 있다. 다음은 내가 주로 생각해 보는 것들이다:

  1. 사용하려는 툴을 통해 어떤 사람들이 어떤 도움을 얻는가? 분명 누군가 도움을 얻기 때문에 이 툴이 존재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만약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어렵다면, 아마도 그 툴은 사용에 적합한 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2. 사용하려는 툴이 발생시키는 손해는 어떤 것인가? 얻는 것이 있으면 항상 잃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누군가는 해당 툴을 사용해 손해를 보게 된다. 개발 환경이 더 복잡해질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 사용자가 그 대가를 치러야 할 수도 있다. 사용으로 인한 손해를 파악해야 그것으로부터 얻는 이득과의 비교를 통해 합리적 결정을 내릴 수 있다.
  3. 문제 발생 시에는 어떻게 되는가? 나는 이 질문을 Clearleft의 글로부터 인용해 왔는데, 이런 방식의 사고가 아주 맘에 든다. 뭔가 잘못되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좋든 싫든 우리의 웹 환경은 불안하다. 어느 시점에서인가, 반드시 문제는 발생하기 마련이다.
  4. 해당 툴이 그것의 토대가 되는 기술을 지원하는가? 만약 그것이 프레임웍이나 라이브러리라면 기반 기술을 의미 있는 방식으로 강화하는가? jQuery가 이에 관한 좋은 사례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jQuery는 DOM을 컨트롤하기 위한 훨씬 편리한 방식이었고, 나아가 그것이 자바스크립트를 사용하는 방식과 지향점에 대해서도 영향을 미쳤다.

이 외에도 다른 질문(커뮤니티가 얼마나 활발한가, 공헌자는 많이 있는가 등)이 있겠지만 이 정도면 현재 본인의 개발 환경에 새로운 툴을 추가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의 시작점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질문의 답은 대부분의 경우 ‘아니오’일 것이다. 다시 말해 당신의 개발자 친구들이 지난주에 출시된 새로운 코드 에디터로 새롭게 공개된 프레임웍을 사용해본 것을 신나게 이야기할 때,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둘 다 접해보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따분한 기술은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따분한 건 좋은 것이다.

아직 Vim을 사용하는 개발자를 옆에서 구경해본 적 있는가? 정말 끝내준다! 어떤 사람은 아직도 그들이 Vim을 사용하는 이유가 종료하는 법을 배우지 못해서라고 농담하지만, 내 생각엔 그들이 Vim에 완전히 꽂혔기 때문인 것 같다. 다른 이들은 이 툴 저 툴 옮겨 다니는 동안, 그들은 이 ‘따분한’ 툴을 계속해서 사용하며 마스터 해왔고,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대부분의 문제 해결은 이런 식으로 되는 것이다.

웹을 만드는 우리는 행운아다. 누구든 스스로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는 일에 공헌할 수 있고 실제로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이들이 공유하는 작업과 지식을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얻는다. 분명 격려받아 마땅하지만 항상 최신 기술에 매달려야 할 필요는 없다. 이에 관한 Addy의 조언이 아주 적절하다.

기본을 정확히 세우라. 천천히 유익한 툴에 익숙해지고, 그것을 사용하며 지속적으로 효과적인 상태를 유지하라.

핵심에서 시작하고 관심을 더해가자. 무너지지 않는 단단한 웹 개발 방식과 배움을 위해서도 말이다.

원문: Hyungtak J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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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기록하기 위해 놓치는 것들 https://ppss.kr/archives/39918 https://ppss.kr/archives/39918#respond Tue, 03 Apr 2018 02:53:36 +0000 http://3.36.87.144/?p=39918 2013년 교황 선출 풍경, 바티칸
2013년 교황 선출 풍경, 바티칸

전시회나 공연을 보러 다니다 보면 종종 사진촬영이 금지된 경우가 있다. 입구에서 예상치 못한 촬영금지 안내문을 발견할 때면 아쉬운 마음이 우선 들게된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오히려 촬영이 금지된 전시들을 더 집중해서 오랫동안 감상했던 것 같다. 기록할 수 없다는 불안함 탓이었을지, 아니면 관람에만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일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도널드 노먼의 저서 『방향 지시등은 자동차의 표정이다(Turn Signals are the Facial Expressions of Automobiles)』에는 한 초등학교 연극 행사에서 자녀의 모습을 촬영하기 바빠 정작 연극은 감상하지 못하는 부모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 녹화된 테이프를 재생하며 그제야 스크린을 통해 자녀의 연극을 감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1990년대 초반에 출간된 책이다 보니 디지털 개념이 거의 생략되었고 비디오 테입과 인화 사진의 수명 역시 영원하지 않다는 점이 기억매체의 한계성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기록 도구 역시 인간의 기억과 마찬가지로 영원할 수는 없었던 시절을 지나 우리는 이제 모든 것이 디지털화되어 클라우드에 보관되는 시대를 산다. 우리의 기록은 이제 적어도 개념상으로는 영구히 불변할 수 있고, 얼마든 복제되어 공유될 수 있는 형태로 보관되는 것이다.

 

기록의 시대

오늘날 사람들은 저마다 주머니에 고성능 기록장치를 가지고 다니며 삶의 다양한 순간을 디지털 형태로 기록한다. 콘서트를 감상하기보다는 녹화하고, 유명인이 나타나도 직접 보기보다는 촬영하기에 바쁘고, 맛있는 음식 앞에서도 포크보다 카메라를 먼저 집어 든다.

기억할만한 순간을 카메라 렌즈에 먼저 양보하는 것은 이제 흔한 일이다. 훗날 기억의 한 챕터를 끄집어내기 위한 책갈피로서의 기록이라고 하기에는, 기록과 공유 행위 자체가 오히려 경험의 가장 큰 동기가 되는 경우가 너무 많아졌다.

selca
…화재도 셀카 본능을 막지 못한다

하지만 가끔 너무나도 아름다운 풍경이나 행복한 순간을 맞을 때, 오히려 이 순간을 기록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경험의 보관과 공유를 걱정하기보다는 차라리 그 순간을 온전히 체험하고 싶고, 한편으로는 그 경험이 디지털화되어 기록되고 공유되면 오히려 그 가치가 퇴색될 것만 같은 불안함도 있다.

누군가에게 내가 직접 이야기해 주고 싶은 이 경험을 디지털 파일이 문맥도 없이 전부 전달해버릴까 두렵기도 한것 같다. 사실 디지털이 되어버린 기록이 돌려줄 수 있는 보상이라고는 ‘좋아요’ 같은 단발성 자극뿐이지 않은가.

 

디지털은 기억보다 우월할까?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개인적인 경험을 모두 디지털화하는 걸까? 디지털 포맷은 인간의 기억력이 가진 왜곡·망각 등의 약점을 완벽히 보완하고 개인적 경험의 공유 또한 수월하게 만드는 강점이 있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모든 것을 디지털화하는 것은 결국 현재의 경험을 인간의 기억보다 더 나은 형태로 보관하기 위한 행위라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디지털 포맷이 정말로 인간의 기억보다 우월할까? 왜곡과 망각은 단점이고, 불변하고 편리한 것은 장점일까? 우리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이유는 과거의 기억들을 계속해서 왜곡하고 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기억방식이 디지털 방식과 같다면 우리는 단 한 번의 실수 또는 부끄러운 행동으로 인해 평생을 괴로워해야 할 수도 있다.

인간의 뇌 속에 저장된 기억은 그 상태로 불변하지 않고 끊임없이 재생산, 재해석된다. 과거의 기억을 재해석하는 관점은 언제나 현재다. 그러므로 과거에는 원수였더라도 지금 서로 사랑한다면 괴로웠던 과거의 경험조차도 재미있는 추억거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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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 기록행위가 증거물을 남기거나 어떤 사실을 증명하기 위함이 아니라면, 개인적 경험이 픽셀과 프레임 단위로 정확하고 불변한 형태로 기록되어야 할 이유는 마땅히 없다. 모든 것이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디지털은 불변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부자연스럽다.

어쩌면 삶의 순간들은 아련하고 어렴풋한 형태로 기억될 때 더 아름다울 수 있다. 훌륭한 예술작품이 현실의 정확한 묘사에만 전념하지 않듯, 재현은 그것이 정확할수록 주관과 감성이 들어설 자리를 배려하지 않는다.

 

경험으로서의 기록 행위

해변이나 항구 근처를 걸어 다니다 보면 캔버스 위에 풍경을 그리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들에게 물감과 캔버스는 기록 도구나 저장 매체가 아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그 행위 자체로서 훌륭하고 수준 높은 경험이다. 물을 연필로 그려보면 그 어느 때보다 물을 자세하게 관찰하고 이해하려 노력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사진 촬영 역시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자체로써 훌륭한 경험이다. 그들은 인간의 눈으로 인식하기 어려운 순간들을 사진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글로는 전할 수 없는 이야기를 담아내기도 한다. 이렇듯 기록은 그 자체로 훌륭한 경험이 될 수도 있다.

어떤 기록은 흔하고 반복되는 경험을 하나뿐인 값진 것으로 바꿔놓기도 한다. 습관적으로 기록되고 공유되는 수많은 디지털 노이즈와 달리, 개인의 주관이 깊이 반영된 기록은 매체의 특성을 초월한 고유의 것으로 구분될 수 있다.

 

기억의 디지털화

지난 수십 년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개념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무분별한 디지털화는 그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가능했기 때문에 이루어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사물, 직업, 삶의 방식, 그리고 우리의 경험과 기억까지도 모두 디지털화되고 테크놀로지와 디자인은 그것이 인류의 삶에 어떤 궁극적 변화를 초래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 없이 단지 실현 가능성, 사용성, 편의성 등의 측면에서 고효율만을 추구해온 것이 사실이다.

과학이 발견하고, 산업이 적용하고, 인간은 순응한다(Science Finds, Industry Applies, Man Conforms).

  • 1993년 시카고 세계박람회의 모토

사람들의 행동방식이나 습관은 개인의 선택이 아닌 시대적 강요에 의해 결정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우리가 디지털 네트워크를 통해 나와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과 연결되고자 SNS의 개발을 요청하지 않았듯, 우리가 스스로 삶의 수많은 순간을 불변하는 매체로서 저장하고자 고성능 기록장치와 클라우드 시스템의 개발을 요구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그 반대의 순서로 일어났다. 어쩌면 세상의 변화 속에 자연스러워 보일 수 있는 행동방식의 변화다. 하지만 커다란 변화의 방향이 개인에게 끼치는 영향력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은 채 진행된다면 그 속에서 우리는 어떤 것들을 놓쳤을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원문: Designing by Wri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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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터 람스가 말하는 디자인의 5가지 핵심: ACCD 졸업식 축사 https://ppss.kr/archives/65178 https://ppss.kr/archives/65178#respond Sun, 18 Feb 2018 01:20:40 +0000 http://3.36.87.144/?p=65178 ※ Dotted Line의 “Dieter Rams Urges Graduates Toward a Responsible Design Ethos“를 번역한 글입니다.


더 인간적인 환경을 위한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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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0여 년간 저의 디자인 철학은 변하지 않았으며, 여전히 이것이 옳다고 믿고 있습니다. 제품의 중심엔 언제나 인간이 있지만, 디자인은 사회의 변화와 함께하고, 그것은 디자이너의 책임 변화로 이어집니다.

오늘날 디자인은 ‘조금 다른 것’ 또는 ‘눈에 띄도록 가공된 것’의 의미로 자주 오용됩니다. 디자인과 성장 지향적 소비사회와의 관계는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디자인의 의미가 더 이상 퇴색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하고 공존하며 개선해가는 과정을 대변했으면 합니다.

삶의 터전을 보존하려는 것은 우리의 열망입니다. 세상을 가득 채운 물리적, 시각적 공해는 시급한 대책을 필요로 합니다. 좋은 디자인이란 가능한 최소한의 디자인입니다. 우리는 순수함과 간결함으로 되돌아가기를 갈망하며, 이것은 우리를 탁월함으로 이끌어줄 열쇠입니다.

저의 신조인 ‘더 적게, 하지만 더 좋게(Less, But Better)’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내포합니다. 우리에게 항상 새로운 제품이 필요할까요? 산적해 있는 경제 및 환경 문제 앞에서 디자인은 근본적 의미 변화를 앞두고 있습니다.

less but better

디자인은 표면적, 치장적 형태를 버리고 소비 지향적 사회를 넘어서는 대안을 고려해야 합니다. 혁신적인, 유용한, 심미적인, 직관적인, 정직한, 절제된, 견고한, 세심한, 환경친화적인, 그리고 최소한의 디자인은 제가 30여 년 전 정립했고 여전히 변치 않은 디자인의 10가지 원칙입니다.

하지만 이것들을 모두 충족하는 것만으로 좋은 디자인이라 볼 수는 없습니다. 좋은 디자인은 언제나 명확하며, 그것이 속한 환경 전반을 개선하고, 또한 미래를 가늠하는 척도가 됩니다.

저는 실무에 몸담았던 기간 동안 운 좋게도 혁신적이고, 책임감 있고, 도전의 위험도 기꺼이 감수하는 훌륭한 기업들과 함께 일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과 저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같은 비전을 갖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과도하게 시선을 사로잡지 않으면서도 훌륭한 사용 경험과 지속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통해 스스로 설득력을 갖는 제품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내일의 세상은 오늘의 디자인 학도인 여러분이 만들 것입니다. 이는 커다란 기회이자 과제이며, 책임감을 의미합니다. 지난 50여 년간 저는 제품 디자이너와 대학교수로서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과거에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갈망했습니다. 디자이너는 언제나 세상을 개선하고자 하는 야망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결코 스스로를 개선하지 않으니까요.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는 환경보호와 잘못된 소비형태의 개선입니다. 미래의 디자이너에게는 더 큰 과제가 주어질 것입니다. 디자이너가 개별 제품만 고려해서는 이제 부족하며 새로운 행동방식과 문화적 가치, 그리고 문화 간의 관계도 고려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독단성과 자위성을 초월하는 디자인 정신이 필요합니다. 저는 디자인의 핵심이 되는 다섯 가지 측면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1. 기능의 차원: 유용성이 대체될 수 있을까

일을 시작한 이후 줄곧 저는 제품의 기능과 유용성에 집중을 해왔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제품 자체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디자인의 과정은 점점 더 정교해져 왔고, 새로운 기술들이 이를 뒷받침했습니다.

디자이너들은 새로운 제작 기술과 재질의 잠재력을 활용하는 데 점점 능숙해집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완벽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우리가 정답에 가까이 왔다고 생각할수록 더 많은 문제가 모습을 드러내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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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기능’의 영역은 점점 넓어집니다. 이제 우리는 단일제품의 기능이 얼마나 다양하고 복잡할 수 있는지 압니다. 오늘날 우리가 만드는 제품이 반드시 심리적, 생태학적, 사회적 이득을 창출해야 한다는 것도 알지요. ‘기능’은 분명 더 넓은 의미를 지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대체될 수 없는 영역입니다.

 

2. 커뮤니케이션의 차원: 디자인은 무엇을 전달해야 하는가

디자인 프로세스는 제품의 목적, 기본적 구조, 사용법, 기능, 가치 등 온갖 정보를 전달하는 커뮤니케이션 과정이기도 합니다. 전달하려는 정보를 가장 명확하고 이해하기 쉽게 만드는 과정 역시 기능적 측면의 일부입니다. 결국 이해하기 쉬운 것이 사용하기도 쉽기 때문이죠.

그런데 제품의 이해도를 높이는 과정은 전보다 더 중요하고 어려운 과제가 되었습니다. 수많은 제품이 혁신적인 기술과 기능으로 무장하고 개별 제품은 고유의 영역을 확장해서라도 더 많은 기능을 갖추길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디자인을 이용해 실제보다 더 큰 성공의 착시를 만들어내는 일은 훨씬 쉬워졌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이러한 디자인의 부정한 잠재력을 악용하지 않아야 합니다. 기업이 고객을 의도적으로 기만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득이 될 수 없으며 우리 사회에서 허용돼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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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심미적 차원: 혼란스러운 세상을 어디까지 버텨낼 수 있을까

언제나 그래 왔듯 저에게 아름다운 디자인의 환경이란 충분히 절제되고 단순해서 눈치채기 어려운 것을 의미합니다. 그에 더불어 누구나 소속되고 싶어 하고, 사용의 기회마저 반가울 만큼 매력적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짧은 유행이나 과거 회귀와 거리를 둔다는 점에서 현대적이어야 합니다.

제품에 이런 아름다움이 스며들게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차분하고, 절제되고, 사실적인 성격은 결핍되어서는 안 되지만 그것 자체가 디자인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 역시 아닙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생산되는 제품의 홍수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렇기에 결국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디자인 과제란, 피할 수 없는 세상의 어지러움을 최소화하는 일일 것입니다. 이는 다음 주제로 연결됩니다.

 

4. 시간적 차원: 우리는 얼마나 많은 낭비를 감당할 수 있을까

‘의도적 노후화’는 아주 불쾌한 개념입니다. 이는 존재하는 제품의 가치를 떨어뜨릴 목적으로 새 제품을 출시해 소비자가 제품의 수명이 다하기도 전에 새것으로 교체하게끔 유도하는 전략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분명 자원과 에너지의 낭비입니다.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 제품을 만드는 것은 진정으로 요구되는 제품을 만들기보다 훨씬 쉽기 마련입니다. 이렇듯 디자인은 종종 혁신의 허상을 만들어내는 도구로 오용되곤 합니다. 디자인을 통해 충분한 내구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은 디자인의 가장 중요한 측면 중 하나입니다.

내구성이란 디자인만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뛰어난 아이디어, 성공적 공학기술, 높은 수준의 제작 과정이 디자인과 함께 상호작용할 때 충분한 내구력을 갖춘 제품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디자인은 기업 전체의 노력과 함께할 때만 성공적일 수 있습니다.

 

5. 생태학적 차원

오늘의 세상을 만들어오는 과정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생존 문제가 달린 생태계를 파괴할 위험한 시도를 해왔습니다. 인류, 대량 생산, 넘쳐나는 제품들이 자연환경에 큰 위협이라는 사실에는 모두 동의할 겁니다. 마찬가지로 공산품의 생산 체계가 환경적으로 지속 가능해져야 한다는 사실에도 모두 동의하리라 봅니다. 하지만 환경적 의미에서 지속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는 것은 어쩌면 인류 역사상 가장 어려운 과제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제가 생각하는 지속 가능성의 공식은 ‘더 적게, 하지만 더 좋게’입니다. 훨씬 더 적게, 하지만 훨씬 더 낫게 말이죠. 사람들이 사고 싶어 하도록 제품을 치장하는 과정에 디자인은 일조해왔고, 이는 결국 새로운 제품의 범람으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디자인은 반대로 이 범람을 막아내는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제품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드는 환경적 비용은 결코 적지 않지만 정작 제품의 사용도는 그에 비해 낮습니다. 제품은 멋스럽게 나이 들지도, 오래도록 사용되지도 않고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도 못합니다. 결국 이런 제품들은 새롭게 쏟아져 나오는 신상품들에 떠밀려 쓰레기장에 쌓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전자제품 쓰레기처리장, 중국 광동성 구이유촌. 출처: TotallyCoolPix

우리가 1년, 5년, 혹은 10년 동안 같은 제품을 사용한다면 그것만으로 큰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자원을 낭비하고 자연을 파괴하는 제조사의 제품 사용을 줄여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유행에 따라 짧게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제품의 생산 역시 줄여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삶을 더 쉽고 편리하게 만들어주는, 소비자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제품입니다. 디자인은 기본적으로 지적 과정이며, 창의적 혁신과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려는 시도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제품을 갈아치우고 건물을 허물기 전에 다시금 진보적이고 단순하게 디자인할 수 있을지 고려해야 할 이유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과정에서 기업과 기업가의 역할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하고자 합니다. 저의 경우 성공적인 프로젝트는 언제나 훌륭한 기업과의 관계를 기반 두었습니다. 20세기 초반에는 아에게(AEG)의 피터 베렌스(Peter Behrens)와 에밀 라테나우(Emil Rathenau)가 있었고, 1950년대 디자인을 처음 시작하던 시절엔 니촐리(Nizzoli)의 아드리아노 올리베띠(Adriano Olivetti), 마리오 벨리니(Mario Bellini), 에토레 소트사스(Ettore Sottsass)가 있었습니다. 1955년에는 운 좋게도 브라운(Braun) 형제와 함께 일할 수 있었고 1957년에는 닐스 비제 비초에(Niels Wiese Vitsoe)와 협업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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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함이란 궁극의 정교함이다.”

이 말은 스티브 잡스가 자주 사용하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격언입니다. 그리고 애플은 이러한 디자인 철학을 훌륭히 실현해낸 기업이기도 합니다. 디자이너와 기업가가 감당해야 할 사회적 책임감은 그 어느 때보다 커졌습니다. 우리는 이제 제품 간 경쟁에서 벗어나 소통과 사용성, 지속 가능성의 경쟁으로 접어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래의 소비자는 브랜드 뒤에 감춰진 기업의 진정한 철학과 미학에 대해 더 민감해질 것입니다. 이것은 기업의 신용도가 미디어를 통해 의도적으로 생산된 메시지가 아닌, 실제적 기업의 콘텐츠로 평가되리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기업의 전략과 방향이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에 반한다면, 기업은 스스로 속한 사회와의 위험한 가치 충돌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는 분명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제 훌륭한 사용자 경험은 제품의 실용적, 환경적 수준이 결정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에서 보고 싶은 변화가 있다면 직접 그 변화가 되어라”.

우리 스스로의 태도를 변화함으로써 시작합시다.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원문: Hyungtak Jun – Designing by Wri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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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웨어의 필연적 가벼움 https://ppss.kr/archives/111472 https://ppss.kr/archives/111472#respond Sat, 22 Apr 2017 02:35:38 +0000 http://3.36.87.144/?p=111472 한번 생각해보자. 매일 아침 들르는 카페에서 매일 같은 커피를 한 잔 주문해 마시는데, 오늘따라 커피의 향이 영 이상하다. 주문이 잘못된 건 아닌 것 같고, 바리스타도 바뀌지 않았는데 왜 커피 향이 달라졌을까? 바리스타의 대답은 이렇다.

“아, 다름 아니라 저희가 AB 테스트 중이거든요.”

이런 상황을 맞닥뜨린다면 기분이 어떨까? 나라면 꽤 당황스러울 것 같다. 나의 동의도 없이 나를 상대로 테스트를 진행한 카페 측의 결정이 괘씸하게 느껴질 것 같다. 만일 이런 식의 테스트가 반복적으로 나의 동의 없이 진행된다면 더는 그 카페를 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또 한 번 생각해보자. 매일 들르는 웹사이트가 나의 동의 없이 AB 테스트를 진행한다면 방문자로서 기분이 어떨까? 아마도 테스트 자체를 눈치채지 못할 확률이 아주 높지만, 발견한다고 해도 별다른 감정적 변화는 없을 것 같다. 실제로 수많은 웹사이트가 매일 다양한 테스트를 진행 중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왜 동네 카페에서 몇 명 안 되는 고객을 상대로 진행한 테스트는 문제의 소지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수천만 명이 접속하는 웹사이트가 매일같이 진행하는 테스트는 굳이 문제 삼고 싶지 않은 걸까? 나는 그것이 소프트웨어 비즈니스의 필연적 가벼움에 근거한다고 생각한다.

소프트웨어가 거의 모든 분야를 집어삼킬 수 있었던 핵심 원동력은 그것의 근본적 속성인 비물질성, 간접성, 그리고 가변성에 근거한다. 건물은 완공된 후 구조를 변경하기 어렵지만, 소프트웨어는 출시 이후에도 얼마든 구조를 변경할 수 있고, 심지어 다른 소프트웨어와 연동하거나 결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소프트웨어의 필연적 가벼움 역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것의 무게감을 떨어뜨린다.

결국 사용자가 인지하는 소프트웨어는 스크린에 흩어진 픽셀의 나열이 만드는 비물질적 허상에 불과하다. 아이패드 안의 물고기가 진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고양이들은 아직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웹사이트가 다운된 것을 건물이 붕괴된 사건과 동일한 무게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그런데 이런 근본적 속성에 의한 가벼움을 굳이 문제 삼아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소프트웨어는 더 이상 개별 범주의 산업으로 구분할 수 없다. 거의 모든 산업에 전기가 필요하듯 이제는 거의 모든 산업이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하고 있고, 소프트웨어는 그야말로 어디에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에도 여전히 소프트웨어의 영향력을 비교적 가볍게 여기는 제작자들의 의식은 분명 다양한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 사실 제작자라고 해서 소프트웨어 개발 헌장을 매일 낭독하는 것도 아니고, 일상에서는 사용자의 입장에서 소프트웨어를 접하는 경우가 더 잦을 수밖에 없다. 심지어 소프트웨어 산업에서는 제작자가 사용자를 직접 만날 기회도 흔치 않다. 그렇다 보니 급격히 변화하는 소프트웨어의 실제적 영향력에 준하는 수준의 책임의식을 유지하기란 별도의 노력 없이는 어려운 현실이다.

O’Reilly 출판사에서 올해 출간 예정인 『비극적 디자인(Tragic Design)』은 잘못된 디자인이 발생시킨 비극적 사고들에 관한 책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첫 사례인 방사능 치료기 ‘Therac-25’의 사례는 소프트웨어적 결함이 직접적으로 사망자를 발생시킨 첫 사례로 알려져 있다. Therac-25는 1985년에서 1987년 사이 6건의 의료사고와 3명의 사망자를 발생시켰다. 소프트웨어적 결함이라고 언급되긴 하지만, 사실 의도되지 않은 기술적 또는 구조적 결함이라기보다는 개발과정에서 중요도가 낮기에 외면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인터페이스 레벨의 문제가 참사로 이어진 사례로 볼 수 있다. 책에서 지적한 Therac-25의 인터페이스적 문제점은 다음 세 가지로 정리된다.

  1. 첫째, 당시는 GUI(Graphic User Interface)가 보급되기 전이라 해당 기기의 인터페이스는 커맨드라인 기반이었는데, 인풋 필드에 커서가 있는 것을 관리자가 깜빡하고 화면 상단의 정보를 수정하기 위해 ↑방향키를 누르면, 인풋필드에 해당 키 값이 입력되는 문제가 있었고, 이것이 잘못된 치료명령으로 이어지는 사례가 있었다.
  2. 둘째, 입력되지 않은 필드는 아무런 경고 메시지 없이 모두 기본값으로 대체되었다.
  3. 셋째, 에러 메시지가 단순히 숫자로 된 에러코드로만 구성되어 있었고, 에러 발생이 너무 잦다 보니 관리자는 습관적으로 ‘p’키를 눌러서 무시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관리자들은 환자에게 방사선이 과잉 투사되는 끔찍한 사고 과정에서도 에러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무시하게 되었다.

사실 인터페이스 자체만 두고 보면 이런 사례들은 소프트웨어 결함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당시에는 흔했던 커맨드라인 인터페이스의 불편함 정도의 것들이었다. 아마 해당 소프트웨어 제작자들도 이런 불편함을 알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기에 굳이 개선하지 않고 출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가볍게 여겼던 문제들은 끔찍한 참사의 원인을 제공했고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거나 큰 장애를 갖게 되었다.

출처: Hackaday

우리의 인식 속에 소프트웨어는 여전히 가볍다. 하지만 이제 소프트웨어는 절대 가볍지 않은 분야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디지털 기술노동자들의 업무는 그 사회적 영향력을 나날이 키워가고 있는 셈이다. 권한이나 환경은 제자리인데 책임은 더 커지는 현실이 폭력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의 의지로 꺾을 수 없는 변화의 큰 물결에서 소프트웨어는 점점 더 인간과 밀접해지고, 소프트웨어에 대한 인간의 의존도는 점점 더 커지고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우리가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를 기대하며 만들어내는 다양한 기술은 이제 실제로 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더 많은 기회를 맞이할 것이다. 하지만 사회의 복잡도가 증가함에 따라 그 영향력이 긍정적인 것이 될지 부정적인 것이 될지를 결정하는 권한은 우리에게서 멀어지는 듯하다. 매일 뉴스로 등장하는 무거운 문제들을 지켜보노라면 우리가 매일같이 반복하는 작업과 그로 인해 탄생하는 디지털 결과물들이 때로 한없이 가볍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 둘을 명확히 구분할 수 없는 시점은 분명히 다가오고 있다.

원문: Hyungtak J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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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에게 아름다움을 가르치는 게 가능할까? : 데이터 시대의 디자이너 https://ppss.kr/archives/75873 https://ppss.kr/archives/75873#respond Wed, 16 Mar 2016 05:12:38 +0000 http://3.36.87.144/?p=75873 디자이너 두 명이 웹사이트 상품 구매버튼의 색상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하고 있다. 디자이너 A는 블루를 사용하길 원하고 디자이너 B는 레드를 사용하길 원한다. 과거였다면 이런 토론은 색채 이론, 색채 심리학, 브랜딩과 컬러 트렌드 등 다양한 이론과 가설이 오고 가며 정답이 아닌 합의점을 찾아내는 설득의 과정에 가까웠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런 토론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버튼 색상 논쟁을 종결짓는 건 이제 이론도, 유행도 아닌 숫자다. 테스트의 간소화와 일반화로 인해 구매 버튼 색상의 차이가 발생시키는 전환율과 매출의 차이는 정확히 측정 가능해졌고, 그 시점부터 실무 논의에서 측정이 어려운 이론이나 가설을 들먹이기란 굉장히 머쓱해졌다. 적어도 컬러는 철저히 브랜드의 영역이자 디자이너의 결정 권한이라 믿었던 통념은, 컬러 역시도 데이터에 기반해 최선의 답을 찾을 수 있는 ‘해결 가능한 문제’라는 인식으로 대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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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goldenwordsofself.com

머지않아 블루나 레드같은 후보색상을 고민할 필요도 없어질 것이다. 컴퓨터가 스스로 수많은 색의 조합을 끊임없이 테스트하며 문맥상 가장 적합하고 효과적인 색상을 직접 결정할 테니 말이다.

와이어드의 크리스 앤더슨이 2008년에 썼던 <이론의 종말>이 당시에는 과학계나 일부 최전선의 테크 기업에 국한된 이야기처럼 느껴졌다면, 지금은 일반 기업들의 업무 프로세스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보편적 변화로 와 닿는다. 가설을 세우고 변수를 줄여가며 정답에 가까이 다가가던 과정에서 필요했던 직관적 해석의 노력은 이제 더 많은 데이터를 얻어내기 위한 기술로 대체되었고, 빅데이터가 끊임없이 던져주는 수많은 상관관계 앞에 우리의 직관은 하염없이 작아 보이기만 할 뿐이다.

 

디자인 최종 결정권자: 데이터

데이터 과학이 굉장히 효과적이면서도 한편으로 위험한 이유는, 원인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어도 충분히 유용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상품 구매 페이지에서 원형 버튼이 사각형 버튼보다 25% 높은 전환율을 보여준다면 결과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어떤 조형 심리적 요소가 그 25%의 차이를 만들어냈을지 분석하고 해석하는 시간은 스케줄에 좀처럼 배정되지 않는다. 데이터 드리븐 디자인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건 디자이너의 직관이 아닌 숫자이며, 주관적 의견이나 해석은 테스트 결과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샌프란시스코의 스타트업 The Grid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인공지능 웹사이트 디자인(AI Website Design System)이라는 디자이너들이 섬뜩해 할만한 문구를 내세우며 등장했다. 텍스트, 이미지, 비디오 등의 컨텐츠를 던져놓으면 시스템이 이를 분석하고 적합한 레이아웃과 타이포그래피, 컬러 등을 결정해 스스로 웹사이트를 디자인한다는 것이 서비스의 기본 컨셉이다. 사이트의 전체적인 톤을 맞추기 위해 이미지들의 톤 보정까지 시스템이 알아서 처리한다고 하니 웹디자인 프로세스에서 디자이너의 필요성을 완전히 없애려는 것 같다.

이 서비스가 계획대로 진전된다면 시스템이 스스로 여러 안을 만들어서 지속적으로 스플릿 테스트를 진행하고 결과를 반영하는 등의 수준까지 발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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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id가 제안하는 인공지능 웹사이트 디자인의 모습. 인공지능은 스스로 데이터를 분석해 걸맞은 디자인을 제작한다.
출처: The grid Youtube

그러나 아직까지 The Grid는 거창한 등장만큼 만족할 수준의 결과물을 보여주고 있지는 못한듯하다. AI라는 포장지를 씌워놓은 스크립트 덩어리에 불과하다는 비난도 들린다. 다만 The Grid의 등장으로 인해 디자이너들이 느꼈을 불안감의 근원은 디지털 디자인 프로세스의 발전이 인간보다는 컴퓨터에게 더 많은 결정권을 쥐여주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 현실에서 디자이너의 역할 중 대부분을 컴퓨터가 대신하는 형태의 프로세스가 제시되었기 때문 아닐까 생각해본다.

“보다 더 정교해진 기계의 지속적인 진보가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며 새로운 기술 발전은 노동자의 작업을 더욱더 기계적인 작업으로 변혁하여 어느 시점에 이르면 기계가 인간의 자리를 대체할 것이다.”
– 칼 마르크스

 

컴퓨터에게 아름다움을 가르치는 것이 가능할까?

The Grid의 디자이너 Jon Gold는 수개월 전 한 팟캐스트에 출연해 최근 로봇에게 타이포그래피를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 컴퓨터가 시각적 아름다움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대해 예술적 의미의 아름다움과 달리 디자인에서의 아름다움은 일련의 규칙에 기반한 것이며, 규칙이 존재한다면 컴퓨터도 배울 수 있다고 답했다.

하지만 실무에서 디자이너들이 디자인의 기본 규칙을 몰라서 고생하는 것이 아니듯, 규칙을 안다고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컴퓨터는 규칙을 습득하는 방식보다는 방대한 데이터에 기반한 머신러닝을 통해 인간이 이해하고 있는 ‘시각적 아름다움’이 구조적으로 어떤 것이지 조금씩 알아나갈 가능성이 크다.

“머신 러닝은 향후 5년 안에 컴퓨터가 인간과 마찬가지로 미학적 결정을 내릴 수 있게 할 것입니다.”
– 마티아스 듀아트, 구글 디자인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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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번역의 역사는 이를 위한 좋은 참고사례다. 기계번역 초창기에 컴퓨터는 수많은 언어의 문법적 규칙과 존재하는 대부분 단어를 알고 있음에도 여전히 엉터리 문장들을 만들어냈다. 단어와 문법에 기반한 번역은 인간뿐 아니라 컴퓨터에게도 좋은 학습방법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기계번역의 품질이 급격히 개선되기 시작한 것은 머신러닝 방식이 도입된 시점이었다. 방대한 번역 데이터를 흡수하며 마치 어린아이가 새로운 언어를 습득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번역의 정확도를 조금씩 높여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 영어와 스페인어는 스카이프를 통해 동시통역이 가능한 수준까지 발전했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컴퓨터가 시각적 아름다움을 결정짓는 미묘한 차이를 수많은 데이터 분석과 비교를 통해 서서히 알아나간다면, 아름다움에 대한 견해가 인간과 다를 수는 있어도 어느 시점부터 최소한 인간이 보기에 좋은 수준의 시각적 결과물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단계에 이를 수 있지 않을까?

 

데이터 맹신과 숫자 만능론

새로운 툴이나 방법론의 등장이 설레는 건 기존의 비효율과 문제점이 개선되었으리라는 기대감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디터 람스의 말처럼 완벽한 해결책이란 없으며, 우리가 정답에 가까이 왔다고 생각할수록 새로운 문제점들이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

과학이 통치하는 세상에서 숫자는 신과 같은 존재다. 사회의 복잡성이 인간의 인지능력을 넘어선 순간부터 숫자는 논쟁을 종결짓고 결정을 내리는 역할을 맡아왔다. 언어는 모호하지만 숫자는 절대적이다. 숫자에 대한 깊은 신뢰는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는 자본주의와, 득표수에 따라 국가 지도자를 선출하는 민주주의를 가능케 했던 기반이 되었다.

하지만 숫자에 대한 무조건적 신뢰는 종종 숫자가 언제나 객관적이고 절대적이라는 착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데이터 드리븐 디자인에서 가장 흔한 실수는 양적/질적 데이터와 객관적/주관적 데이터에 대한 혼동이다. 간단히 말하면 숫자 정보로 치환된 주관적 의견을 객관적 데이터로 신뢰하는 오류다. Dr. Philip Hodgson는 그의 글 Usability Test Data에서 ‘Subjective and objective data’(주관적이고 객관적인 데이터)에 대해 명료하게 정리했다.

  • 컴퓨터를 가지고 있습니까? 라는 질문에 내가 ‘예’라고 대답한다면, 이는 숫자가 아니므로 질적 데이터이지만, 나의 주관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없으므로 객관적 데이터다. 그러므로 이 경우 나의 대답은 질적/객관적 데이터다.
  • 컴퓨터의 가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라는 질문에 ‘내 생각엔 너무 비싼 것 같습니다.’라는 대답은 질적/주관적 데이터다.
  • 컴퓨터 중앙처리장치의 속도가 어떻게 됩니까? 라는 질문에 ‘2GHz’라는 대답은 양적/객관적 데이터다.
  • 당신의 컴퓨터는 얼마나 사용하기 쉬운 편입니까? 1부터 10중 하나의 숫자로 답해주세요. 라는 질문에 ‘7’이라는 대답은 양적/주관적 데이터다.

사람들은 종종 양적(Quantitative) 데이터와 객관적 데이터, 그리고 질적(Qualitative) 데이터와 주관적 데이터를 각각 동의어로 간주하곤 하지만, 위의 예에서 볼 수 있듯 양적, 질적 데이터는 각각 주관적, 객관적일 수 있다.

실무에서 얻는 리서치나 테스트 데이터는 대부분 숫자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위의 예시로 보듯 숫자 데이터는 주관적일 수 있다. 적지 않은 경우 우리가 의미하는 객관적 데이터란 그저 수많은 주관적 데이터를 한곳에 모아두고 멀리서 바라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의 직관이나 주관이 마치 신성한 데이터에 스며들어선 안 될 오염 물질인 듯 여겨서는 곤란하다.

데이터 예찬론의 위험성은 그것이 데이터 맹신으로 변질하기 쉽다는 점에 있다. 테스트는 고민을 떠넘기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며, 데이터는 직관을 비웃기 위한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DataScientistJobDescriptions
출처: Gartner Blog Network

그것은 디자이너가 비록 단기적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없을지라도 ‘왜’라는 질문을 멈추지 말아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왜 그런 테스트 결과가 나왔는지, 왜 사람들이 B안을 A안보다 더 선호했는지, 왜 의도하지 않은 사용패턴이 발견되었는지 등 말이다.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한 사색과 토의가 비록 컴퓨터 입장에선 이해하기 어려운 인간 특유의 비생산적 행위일지 모르겠으나, 호기심은 인간이 지닌 가장 강력한 무기이고, 데이터의 상관관계가 밝혀내지 못하는 혁신적 발상은 언제나 그런 인지적 결핍을 메우기 위한 과정에서 탄생한다고 믿는다.

우리의 작업 프로세스는 계속해서 더 높은 효율성을 추구하고 그 안에서 데이터 과학의 중요도는 점점 더 높아질 것이다. 기술의 발전은 진화와 같아서 누군가의 의지로 멈추거나 되돌릴 수 없다. 그러므로 변화되는 작업 환경에서 우리의 논의는 데이터 과학과 대립각을 세운 채 감성과 아름다움의 중요성을 주창하는 방향이 아닌, 그것들의 중요성을 입증하기 위해 어떻게 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방향이 되어야 할 것이다.

원문: hjun.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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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적 이메일 확인 줄이기 https://ppss.kr/archives/39920 https://ppss.kr/archives/39920#respond Tue, 26 May 2015 06:55:27 +0000 http://3.36.87.144/?p=39920 Social media addiction

Nir Eyal은 작년에 흥미롭게 읽었던 책 ‘Hooked: How to Build Habit-Forming Products’의 저자다. 사용자의 습관이 될 수 있는 디지털 프로덕트 설계법에 관한 책을 쓴 저자가 얼마 전 inc.com에 기고한 글의 주제는 조금 의외였다.

‘How to Stop Checking Email Like an Addict’ – 어떻게 이메일 확인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디지털 프로덕트가 사람들의 습관이 되어가는 과정에 대해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을 그 역시도 정작 그 습관으로부터 자유롭기란 쉽지 않았나 보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화장실에 가는 길에, 심지어 운전 중 신호대기로 정차해있을 때도 이메일을 확인한다는 그의 이야기가 사실 특이하게 들리진 않는다.

그만큼이나 끊임없이 스마트폰으로 이메일과 메시지를 확인하는 것은 우리 세대에게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것이 과연 죄책감 느낄만한 일인가도 불분명하나, ‘아빠는 왜 그렇게 폰을 자주 확인하느냐’는 어린 딸의 질문에 그는 좋은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주제에 대해 고민을 시작하기엔 충분한 사건이 아니었을까.

머지않아 혀마트폰 거치대가 나올지도 모른다.
머지않아 혀마트폰 거치대가 나올지도 모른다.

Nir Eyal은 그의 무의식적인 이메일 확인 행위가 일종의 불안감과 동반된다고 생각했다. 인박스에 혹시 중요한 이메일이 기다리고 있진 않을까, 아니면 좋은 뉴스 혹은 나쁜 뉴스가 와 있는 건 아닐까. 이 불안감의 즉각적 해소법은 역시나 이메일을 확인해보는 것일 테다.

휴가도 소용없었다. 일로부터 떠나있는 기간은 그만큼 더 많이 쌓여있을 이메일을 의미하기도 하니까. 하지만 이렇게 자신의 무의식적 행위의 동기를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습관을 무장해제 시킬 수 있는 시작이될 수 있다.

끊임없이 이메일을 확인하는 습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가 시도한 방법들은 꽤 현실적이다. 이메일 계정을 없애버린다거나 스마트폰을 버리고 2G폰을 사용하는 등의 극단적인 방식은 분명 그 과감성만큼이나 휘발성 역시 강할 것 아닌가. 일을 하려면 이메일은 확인해야 한다. 그가 시도한 하나의 방법은 이메일 확인 시간을 마치 미팅 스케줄 잡듯이 캘린더에 등록해놓는 것이었다. 이메일의 끊임없는 간섭을 방관하지 않고 정해놓은 시간에만 이메일을 확인하기로 했다.

빨간 원 안에 숫자가 써져있다면 누구나 눌러보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빨간 원 안에 숫자가 써져있다면 누구나 눌러보고 싶게 만든다.

하지만 넘어야 할 산은 또 하나 있었다. 스마트폰을 볼 때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메일 앱 아이콘 모퉁이에 새빨간 동그라미는 “나에게 중요한 메시지가 있으니 어서 확인해달라!”고 외쳐대는것 같았다. 그는 결국 이메일 앱을 어딘가에 묻어버리기로 했다. 이메일 앱은 이제 첫 페이지를 떠나 두 번째 페이지의 그룹 폴더 안으로 들어갔다. BJ Fogg 박사에 의하면 어떤 행위의 난이도가 올라갈수록 그 빈도수는 줄어든다고 한다. 단지 이메일을 확인하는 과정에 몇 가지 단계를 더 추가했을 뿐인데 무의식적인 이메일 확인 빈도는 크게 줄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수신되는 메일의 수 자체를 줄여나갔다. 휴가 중이 아닌 경우에도 자동 답신 기능을 설정해서 수신하는 모든 메일에 즉각적으로 답신이 가도록 했고, 메일 안에는 자주 받는 질문이나 요청에 대한 답을 포함해 두었다. 그의 경우 미팅일정 관련 요청을 많이 받기 때문에 직접 자신과 스케줄을 잡을 수 있는 온라인 캘린더 링크도 달아두었다고 한다.

특별히 그가 이메일에 대해서만 논했지만, 본질적으로 그의 이야기는 스마트폰 대중화와 함께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digital distraction에 대한 많은 사람의 고민과 같은 맥락이다.

나 역시 지나치게 잦아지고 있는 노티피케이션과 무의식적인 스마트폰 확인 습관 등을 줄여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Nir Eyal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 유저의 습관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프로덕트를 고안 해내려 함과 동시에 나 자신이 그런 습관들에서 벗어나고자 애쓰는 것은 이 분야의 직업적 아이러니이자 딜레마가 아닐까 싶다.

원문 : Designing by Wri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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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언의 배신 https://ppss.kr/archives/39923 https://ppss.kr/archives/39923#respond Tue, 31 Mar 2015 09:01:33 +0000 http://3.36.87.144/?p=39923 개인의 확신은 시기적·우연적 요소를 간과한다

모든 것이 양면성을 지니고 있듯 조언 역시 독이 될 수 있다. 특히 개인적 경험의 지나친 확신으로부터 나오는 진심 어린 조언은 시기적·상황적 차이를 무시한 채 낡은 사고방식을 세습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피로감 때문인지 사람들은 너무 쉽고 성급하게 과거를 단정 짓는 경향이 있다. 현재의 B를 초래한 것은 과거의 A라는 식의 논리가 지배적인데, 문제는 과거의 A를 추론하는 범위가 본인의 경험과 지식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사건을 단정 짓는 중심에는 언제나 ‘나의 선택’ ‘나의 행위’ 등 본인의 시점이 있고, 그것을 둘러싼 수많은 시기적·우연적 요소들은 대부분 인지되지 못해 무시되거나,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심하게 저평가된다.

하나의 사건도 사람마다 다르게 기억한다. 그러므로 과거 역시 이미 일어난 ‘사실’이 아닌 개인적인 ‘해석’이고 하나의 ‘의견’으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거듭해서 미래를 설계하는 것에 실패하는 이유는 과거에 대한 확신을 주재료로 사용하려 하기 때문이다.

결과론적으로 볼 때 시기적·우연적 요소는 언제나 가장 큰 원인이고, 개인의 의지와 행위가 가진 영향력은 생각보다 미미하다. 한두 줄의 문장으로 기억하고 있었던 단순한 경험조차도 막상 꺼내놓고 그것을 둘러싼 모든 요소를 하나씩 되짚어 보면, 그것이 어떤 경험이든 특정 시기에 한정적이고 수많은 우연적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경험에서 시기적·우연적 요소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면 그 경험은 오로지 본인에게, 그리고 특정 시기와 상황에만 해당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인의 과거는 타인이 다시 밟을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오히려 흩뿌려진 입자들이 우연히 만들어냈던 찰나의 형상에 가깝다.

그러므로 본인이 조언을 듣는 사람의 존재가 되어 미래를 다녀온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내가 해봐서 아는데’ 또는 ‘그렇게 하면 실패한다’ 등 확신에 찬 이야기는 해선 안 되는 말들이다.

나에게 과거는 다른 사람에게도 과거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예측 불가능하게 변화한다. 어제와 동일한 행위가 어제와 동일한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이유다. 조언이 경험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근본적으로 그것이 미래가 아닌 과거를 가리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에는 시대를 초월한 원초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극히 원론적인 개념들을 제외하고 개인의 경험이 시대적 문맥으로부터 자유로운 경우는 없다.

지금의 20-30대와 이들의 부모가 살았던 세대의 환경은 비교할 수 없이 다르다. 정보의 양, 소통의 방법, 삶의 방식, 보편적 가치관 등 거의 모든 것이 변했고, 지금도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다. 그런데도 지극히 개인적이고 시대 의존적인 경험을 마치 불변의 가치인 것처럼 착각한 일부 기성세대는, 세상의 변화를 무시한 채 본인이 믿고 있는 구시대적 가치관을 자식 세대에게 강압적으로 주입한다. 결과는 물론 아름답지 않다.

수많은 젊은 세대가 아직도 수십 년 전에 각광받던 직업을 좇고, 노년기의 사람들과 동일한 수준의 안정을 추구하는 등 이미 낡아 버린 가치들이 변화된 세상에 들어맞지 않으며 사회 전체가 삐걱거리고 유연성을 잃는 모습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 경우 조언자의 ‘진심’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킨다. 스스로 옳다 믿는 사람은 자신의 행위를 되돌아보지 않기 때문이다.

 

문화와 사회 시스템을 초월할 수 있는 자의식을 가진 개인은 많지 않다

적어도 읽는 동안 만큼은 변화의 희망을 품어볼 수 있게 만드는 철학, 인문, 자기계발서들은 반박하기 어려운 혜안들을 꺼내놓아 독자들로부터 큰 공감을 얻은 후, 결과는 책임지지 않는다. 주제의 깊이는 그것의 일반적 실천 가능 여부와 무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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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현실에선 반비례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나는 사회적 통념과 문화적 굴레를 무시하고 일상생활에서 철학적 신념들을 실현할 수 있는 초월적 존재들이 흔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현실적으로(혹은 비관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지나치게 타인을 의식하는 문화 속에서 매일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고 자신의 노후와 가족의 미래를 걱정하며 살아가는 개인이, 본인의 의지만으로 남을 의식하지 않고 공동체의 선을 추구하며 진정한 행복을 찾는 경우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 마찬가지로 특정 분야에서 나름의 성과를 거둔 이들이 자주 던지는 ‘좋아하는 일을 하라’ 또는 ‘잘하는 일을 하라’ 등의 조언 역시 사실 책임감 있는 말은 아니다.

특정한 일을 하고 싶은 목표와 동기는 아무에게나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을 찾아내는 과정 역시도 그것을 잘하기 위한 과정만큼이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젊은 시절을 모조리 ‘교과과정 암기’에 쏟아부어야 하는 대한민국의 청춘들에게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도 찾으라는 것은 마치 배트도 쥐여주지 않고 홈런을 치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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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조언을 하는 사람에겐 적어도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있었던 환경과 운이 있었다는 뜻이다. 역시나 그런 환경적·우연적 요소를 무시한 채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했기 때문에 잘 됐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심각한 과거 미화고 무지한 교만이다. 무엇보다도 개인에게 문화와 사회 시스템을 초월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현실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조언이 빚은 사회

그렇다면 조언이 없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일까? 그건 알 수 없다. 그런 사회는 내가 알기엔 없으니까. 하지만 시대적 변화를 무시한, 위계적이고 무책임한 조언이 남발하고 그것이 사회적 통념이 되어버리는 지경에 이른 사회에서 걱정해야 할 것은 오히려 조언의 남용이 낳는 문제이지, 그것의 결핍에 대한 우려가 아니다.

‘나는 이렇게 해서 이렇게 됐으니, 너도 그렇게 해라’, ‘나는 이렇게 해서 실패했으니, 너는 절대 그렇게 하지 마라.’ 등의 단순하고 무책임한 조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해롭다. 누군가 내린 성급한 결론이 독단적 확신으로 무장한 채 조언의 형태로 타인에게 주입되기 시작되면, 개개인의 가치관과 삶의 모습은 다양성을 잃게 되고 그것은 사회적으로 소수의 가치관을 말살하려는 다수의 폭력으로 이어지기까지 한다.

그러므로 본인이 이미 내린 결론을 타인에게 그대로 주입하려 하기보다는, 자신의 경험을 가감 없이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판단과 해석에는 관여하지 않는 것이 더 좋은 조언 방식일 것이다. 그리고 개인의 경험을 이야기할 때는 그것이 가능(혹은 불가능)했던 시대적 상황과 다양한 우연적 요소들도 빼놓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복잡한 것을 다 따져서 어떤 조언을 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타인의 인생 설계에 조금이라도 개입한다는 것은 원래 그렇게 어렵고 조심스러워야 하는 것 아닐까.

원문: Designing by Wri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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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과 IT: 5가지 키워드에 대한 이야기 https://ppss.kr/archives/29265 Wed, 17 Sep 2014 04:56:09 +0000 http://3.36.87.144/?p=29265 라디오가 5천만명에게 사용되기까지 약 40년이 걸렸고, TV는 약 10년, 아이폰은 약 3년이 걸렸다. 이처럼 변화의 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그 중에서도 디지털 프로덕트, 인터랙션 디자인 분야는 스마트폰의 대중화를 기점으로 그 어느때보다 빠르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하나의 제품일지라도 거의 모든 사람의 일상이 되어버리고 나면 오히려 그 제품이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더 나아가 사회 시스템을 변화시킨다. 전구와 자동차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결정했 듯, 스크린과 인터넷은 다시한번 우리 삶의 방식을 크게 바꾸고 있다.

또한 인간과 디지털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있는 현실에서 인터페이스는 더 이상 스크린속에만 존재할 수 없고, 그렇기에 향후 수년간 진행될 급격한 변화속에서 프로덕트 디자이너들은 계속해서 통념과 상식을 버리고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훈련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올해 테크놀로지와 프로덕트 디자인 분야에는 그 어느때보다도 다양한 변화와 진전이 있었고, 미래에 대한 논의 또한 끊이지 않았다. 올해가 지나가기 전에 한해 동안 읽었던 책이나 관심있게 지켜봤던 키워드들을 중심으로 개인적인 생각들을 하나의 글로 정리 해두고자 한다.

 

Wearable Device

컴퓨터는 발명 이후 계속해서 소형화, 경량화, 저가화 되어왔고,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사람과의 거리를 좁혀왔다. 연구실에서 각 학교로, 가정으로, 그리고 사람의 무릎 위로, 이제는 손 안으로 들어왔다. 어찌보면 이 시점에 웨어러블 디바이스가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자연스럽다. 모두가 스마트폰을 들고다니는 시대를 지나 컴퓨터는 이제 사람들의 일상적 행위의 일부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Google Glass
Google Glass

웨어러블 테크놀로지의 화두가 되고 있는 디바이스들을 살펴보면 시계, 안경, 팔찌 등 대부분 사람들이 이미 사용해오던 사물들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이것은 컴퓨터가 사람의 주머니 들어가기 위해 Pocket PC가 아닌 핸드폰으로 포지셔닝 한것과 동일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언제부터인가 기술의 발전은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행동을 요구하기 보다는 그들이 이미 취하고 있는 행위 속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들기 시작했다.

“Pebble was built to ‘mesh into your life,’ not change your behaviour”- Eric Migicovsky, CEO of Pebble

“페블은 당신의 행동을 바꾸려 하기 보다는, 그 안에 맞물려 들어가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To earn the privilege of being worn, wearable design should evoke a feeling of the device as a natural extension of the person. It should not require the person to adapt or force new behaviour.” – Marcus Weller, Ph.D.

“입혀진다는 것에 대한 특권을 누리기 위해 웨어러블 디자인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확장으로써의 디바이스의 감성을 일깨워야 합니다. 그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새로운 행동을 요구해서는 안됩니다.”

이를 디자인 관점에서 보면, 나오토 후카사와가 이야기했던 ‘Design dissolving in behavior’라는 개념과 들어맞는다. 그는 사람들이 제품을 통해 무엇인가를 가장 잘 할 수 있는 상태는 제품 자체를 인지하지 못한 상태라는 ‘Without Thought’ 철학을 강조 해왔다. 인터랙션 디자인은 이러한 사용환경 변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에, 변화의 큰 방향을 이해하는것은 중요하다.

결국 디자이너가 웨어러블 디바이스의 보편화 속에서 읽어야 할 중요한 코드는, 그와 함께 시작 될 Screenless technology(無스크린 기술) 시대의 도래다. 인간과 디지털의 경계이자 접점인 인터페이스의 역할을 오늘날 스크린이 대부분 맡고 있고, 초기 웨어러블 디바이스들 역시 스크린의 의존도가 큰 편이다.

하지만 그 접점이 불분명해지는 과정에서 인터페이스는 더 이상 스크린속에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다. 웨어러블 디바이스들뿐 아니라 Siri, Google Now, Kinect, Leap Motion, Touch ID등 주목받고 있는 기술들은 모두 공통된 미래를 그리고 있다. 새로운 사용환경 속에서 인터페이스는 결국 스크린을 벗어나 사람들의 행동 패턴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될 것이고, 웨어러블 디바이스에 대한 논의는 이러한 큰 변화의 시작점이라고 생각한다.

마커스 웰러는 그의 최근 글 ’10 top wearable technology design principles’ 에서 웨어러블 테크놀로지 디자인의 10가지 법칙을 이이기하며 human, person, behavior 등의 단어들을 반복해서 사용했다.

이는 웨어러블 테크놀로지가 데스크탑 또는 스마트폰 처럼 인간으로부터 독립된 객체에서 작동되는것이 아닌 인간의 행위와 동일한 레벨에서 작동한다는것을 의미하고, 이로인해 디자인의 시작점 역시 기계가 아닌 인간으로부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웨어러블이 보편화 될 미래에 디자이너들은 오늘날 OS와 하드웨어에 쏟는 관심 이상으로 인간의 기본적인 행동방식과 그 안에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점들을 유심히 살펴봐야 하게 될 것이다.

 

The next tools

완벽한 프로세스란 존재하지 않듯 완벽한 툴도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은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계속해서 변화해야 하는것이 프로세스와 툴이다.

하지만 끊임없이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제작자들이 새로운 프로세스와 툴을 시도해 보기란 쉽지 않고, 그렇다보니 자의적 보다는 타의적인 이유에 의한 변화가 더 일반적이다. 결국 대부분의 경우 더 효율적인 방법에 대한 고민 보다는, 사용환경의 급격한 변화로 더 이상 기존의 프로세스와 툴이 적합하지 않아졌을때 이를 개선하거나 바꾸게 되는데, 바로 지금이 그런 시기인것 같다.

이제는 포토샵에 가로 1440px 새창을 띄워놓고 웹디자인을 시작하거나 고정 해상도의 앱 페이지를 디자인하는 방식으로는 효율적인 프로덕트 개발이 어려워졌다. 어떻게보면 디자이너로써 느끼는 가장 큰 변화는 포토샵 자체의 활용도가 점점 줄고 있다는 것이다. 포토샵은 픽셀단위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거나 합성 하기에는 정말 훌륭한 툴이다.

하지만 웹은 더이상 정해진 사이즈로 만들어낼수도 없고, 이미지에 크게 의존하지도 않으며, 심지어 픽셀단위로 설계할수도 없어졌다. 디자이너들의 프로필에서 흔히 찾아볼수 있던 Pixel perfection이란 말은 이제 힘을 잃었고, 오히려 그런 마인드셋은 Lean 프로세스에 해가 된다는 의견들도 있다.

멋진 시안으로는 클라이언트는 얻을 수 있어도 유저는 얻을 수 없다. 극소수를 제외한 대다수의 유저는 우리가 만드는 프로덕트 자체에도 관심이 없다. 그들은 그저 본인의 목적을 달성하기에 가장 편리하고 적합한 무언가를 원할 뿐이다. 그렇기에 이제는 시안이 아닌 프로덕트를 만들어내기에 적합한 툴이 필요하다.

Sketch (From the article 'Sketch VS Photoshop'*)
Sketch (From the article ‘Sketch VS Photoshop’)

다행히도 최근의 변화 중 하나는 아주 작은 단위(스크립트 or 플러그인) 에서부터 독립적인 소프트웨어까지, 디자인 프로세스를 개선하기 위한 높은 완성도의 다양한 툴들이 수많은 개발자 혹은 스타트업들에 의해 끊임없이 개발되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툴을 확인하고 배울필요는 없지만, 더 효율적인 프로세스를 위해 관심있게 지켜보고 더 적합한 툴을 찾는 노력은 필요하다. 아래의 툴들은 최근에 출시된것도 있고 오래된것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작업 프로세스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 중 일부로 사용해보고 있는 것들이다.

Sketch – 인터페이스 디자인에 최적화 된 벡터 기반 그래픽 툴

Quartz Composer – 노드 기반 비주얼 프로토타이핑 툴 (Julie Zhou의 아티클을 통해 최근 재조명 됨)

Framer – 페이스북에서 제작된 자바스크립트 기반 웹 프로토타이핑 툴

조금 더 나아가 이제는 해묵은 논쟁인 ‘디자이너가 코딩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나는 사실 이 논쟁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산업디자이너는 재질과 금형에 대해 알아야 하고, 출판디자이너는 종이와 잉크에 대해 알아야 한다. 디지털 프로덕트가 시작부터 끝까지 code로 이루어져 있다면 디자이너가 이를 알아야 하는것이 억지스럽지 않다고 생각한다.

Steven Bradly의 글에 인용된 반 고흐의 편지에서, 반 고흐가 원하는 색을 더 잘 표현하기 위해 기존의 물감이 아닌 프린터 잉크를 연구하고 사용해보는 과정에 대한 내용이 짤막하게 나온다. Role을 정립하고 구분하려 애쓰기 보다는 더 나은 결과물을 위해 끊임없이 공부해야 하는것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Microinteractions

Good design과 Great design의 차이는 디테일에 있다고 한다. 댄 새퍼가 올해 새로 출간한 책 Microinteractions는 이러한 디테일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우리가 흔히 인터랙션 디자인의 결과물을 보고 디테일이라고 단정짓거나 혹은 피상적으로만 논하던 부분들을 구조적으로 정리했다.

마이크로인터랙션은 프로덕트를 구성하는 수많은 인터랙션 중 하나일 수도 있고, 때로는 그 자체가 하나의 프로덕트가 될수도 있다. 하나의 마이크로인터랙션은 단 하나의 기능을 수행하는 한 개의 use case로, 댄 새퍼는 이것의 구조를 Trigger, Rules, Feedback, Loops & Modes의 네 단계로 구분하여 설명했다. 모든 마이크로인터랙션은 이 네 단계로 나뉘어 이해될 수 있고, 반대로 이 과정을 거쳐 디자인될 수도 있다.

인터랙션 디자인에서 디테일의 중요성은 자주 거론되지만 프로세스적으로 이에 관련된 부분은 상당히 파편화 되어있거나 심지어 개인의 성향에 의존되는 경우도 많았다. 댄 새퍼의 책은 이런 부분에 대한 이론적이면서도 실제적인 정리라고 볼 수 있을것 같다.

‘The overall experience of a product relies heavily on its microinteractions. They are the “feel” in look-and-feel.’

‘프로덕트의 전체적 경험은 마이크로인터랙션에 크게 의존한다. 마이크로인터랙션은 룩-앤-필 에서 ‘필’에 해당된다.’

‘The goal for microinteractions is to minimise choice and instead provide a smart default and a very limited number of choices.’

‘마이크로인터랙션의 목표는 선택사항을 최소화 하는대신, 스마트한 기본값과 아주 적은 수의 선택사항들을 제공하는 것이다.’

‘Don’t make users guess how a trigger works. Use standard controls as much as possible. As Charles Eames said, “Innovate as a last resort.”’

‘유저가 프로덕트를 어떻게 구동할지 추측하도록 해선 안된다. 가능한 가장 보편적인 컨트롤을 사용하라. 찰스 에임스가 이야기했듯, “최후의 수단으로 혁신하라.”’

스마트폰의 등장 이후 웹은 모바일로 옮겨가기 시작했고, 핵심 테크 기업들이 Mobile First를 선언하면서 디지털 프로덕트 디자인은 극도로 단순해져왔다. 모바일 환경에서 사용될 프로덕트는 가장 핵심적인 파트 외의 모든 부분을 제외시켜야 한다는 논의가 일반적이었고, 이 변화는 모바일의 사용성을 향상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 총체적 단순화의 과정속에서 기존의 소프트웨어들이 가지고 있었던 작지만 중요했던 부분들도 함께 많이 제외되었다. 단순함이란 단지 복잡함의 부재가 아닌, 제품이 가진 가장 핵심적인 것을 표현해낸 것이라는 조나단 아이브의 말을 생각해 볼때, 그간의 단순화는 진정한 의미의 Mobile First라기 보다는 오히려 데스크탑의 복잡함을 제거해 모바일 사이즈에 적용시키는 과정이지 않았나 싶다.

이제 우리가 해야할 단순화는 화면에 표현되는 개체의 숫자를 줄이는 작업이 아닌, 유저가 프로덕트를 사용해 목적을 달성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단순화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프로덕트의 개발은 오히려 더 세심하고 많은 고민을 거쳐야 하고 가장 작은 부분들에 대한 많은 논의가 필요해질 것이다. 댄 새퍼의 말처럼, ‘프로덕트의 디자인의 퀄리티는 가장 작은 부분이 결정한다.’

 

Remote work

‘The time is right for Remote Work.’

37signals의 창업자 제이슨 프라이드는 최근 출간된 그의 책 Remote: Office Not Required*에서 이제는 원격업무가 아주 오랜 시간동안 우리의 업무방식으로 자리 잡아왔던 오피스 기반의 시스템을 대체할 때가 되었으며, 원격 업무의 티핑 포인트는 머지 않아 올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Rework에서도 그랬듯 그가 던지는 화두는 언제나 파격적이지만 내용은 상당히 현실적이다. 그가 단지 이론가가 아닌 37signals라는 훌륭한 기업을 창업하고 경영중인 사람으로써 본인의 경험에 기반한 책을 써내기 때문일것 같다. (37signals는 소프트웨어 개발사로, 39명의 직원 중 28명이 미국 뿐 아니라 전세계에 퍼져 원격으로 일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오늘날 우리가 일하는 방식은 정말로 비효율적이다. 분야와 업무성격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정해진 시간에 맞춰 일을 시작하고 마치며, 하루 일과 중 정말로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다. 사람들 입장에선 오피스 근처에 살아야 하고, 회사입장에선 인재를 채용하기 위해 사람이 많은곳에 오피스를 둬야 하다보니 도시집중화는 점점 심각해지고 인재 채용의 폭은 좁아질수밖에 없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출퇴근을 통해 낭비하는 시간과 경제적 손실은 어마어마하다.

책을 통해 제이슨 프라이드는 37signals의 경험을 토대로 원격 업무방식을 적용하는데 어떤 어려움이 있었으며 어떻게 개선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현실적인 사례들을 토대로 이야기 하고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들, 예를 들면 ‘모두가 한 방에 모여있을때 가장 훌륭한 결과를 만들 수 있다.’, ‘직원들은 감시하지 않으면 일하지 않을것이다.’, ‘사내문화는 함께 있을때만 생겨날 수 있다.’, ‘사람들은 오피스가 아닌곳에선 일하지 않는다.’ 등에 대한 자신의 경험과 의견도 이야기한다.

사실 원격업무의 강점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고, 이를 위한 기술적, 환경적인 기반은 이미 준비가 되어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원격업무가 보편화 되기 힘든 이유는 이런 현실적인 요인 때문이 아니라, 이것이 사람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믿어왔고 따라온 방식에 대해 전면으로 도전하고 있기 때문인것 같다. 태어나서 지금껏 보고 따라온 방식과 체제에 대해 의심을 품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변화는 절대 오지 않을것만 같은 순간에도 이미 다가오고 있다. 제이슨 프라이드는 원격업무가 간디의 변화 모델 중 이미 2단계를 지났다고 이야기한다. (“그들이 처음엔 당신을 무시할것이고, 그 다음엔 비웃을 것이고, 그 다음엔 싸우려 들겠지만, 결국 당신이 승리할것이다.”)

개인적으로 올해 1년간 원격으로 일하며 겪었던 시행착오와 고민 중 많은 부분이 책에 담겨있어 공감도 되고 도움이 되기도 했다. 원격업무가 적용될 수 없는 분야의 일들도 있지만, 디지털 프로덕트를 만드는 일은 사실 원격업무를 적용하기 가장 좋은 형태인것 같기도 하다. 이것을 하나의 가능성으로 본다면, 다양한 나라를 여행하듯 살아가며 원하는 회사와 지속적으로 일을 하는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실제로 37signals 직원 중 그런식으로 일을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원격업무가 티핑포인트를 넘어서는 순간이 언제가 될지 지금으로썬 알 수 없지만 어쩌면 미래는 우리생각보다 훨씬 가까이에 와 있을지도 모른다.


37signals Works Remotely from Basecamp on Vimeo
 

Start something

무언가 새로운것을 시작하기가 지금처럼 쉬웠던 적은 없다. 새로운 어떤 것을 배우거나 시작하기 위한 시간적, 금전적 비용은 과거와 비교할수도 없이 낮아졌고 지금도 계속 낮아지고 있다.

툴을 하나 배우는것도, 웹 디자이너가 되는 것도, 심지어 창업을 하는것도 지금처럼 쉬웠던 적이 없었다. 도전의 비용이 낮아졌다는 것은 그만큼 실패의 리스크 역시 낮아졌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런 변화된 환경속에서 근 몇년간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수많은 기업들이 탄생했다.

어떤 사람들은 스타트업 붐을 마치 지나가는 하나의 광풍처럼 이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난 이것을 하나의 현상이 아닌 사회시스템의 근본적 변화라고 생각한다. 물론 모든 그래프는 꺾일 것이고 안정화 되겠지만 그것은 커다란 변화가 다가오는 과정일 뿐이다.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미래는 지금 이 시스템을 기반으로 돌아갈 것이고 더 진보된 변화 또한 이 시스템 위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강 건너 불 구경하듯 이 광풍이 잦아들기만을 기다리는 동안, 게임의 룰은 이미 오래전에 바뀌었다. (트위터가 탄생한지 벌써 8년이 되어간다. 아직도 이 ‘현상’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는가?)

지금도 세계 각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다양한 아이디어들을 현실화 해내고 있고, 이미 성공을 거둔 사람들은 새로 시작하는 이들에게 투자하고 그들을 도우며 상생하고 있다. 일례로 수많은 인큐베이터와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들은 새로 시작하는 팀들을 도와 그들이 더 빠르게 궤도에 진입할 수 있도록 이끌고 있다.

최근엔 인큐베이터와 액셀러레이터가 지나치게 많아졌다며 우려하는 목소리들 역시 많지만 이 역시 변화의 과정에 존재하는 작은 우려에 불과하다. 나는 올해 운 좋게 에버노트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대학원 수업을 수강하기도 하면서 두 개의 전혀 다른 시스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사람들은 별 의심없이 대학에 가기위해 엄청난 시간을 소비하고, 수많은 돈을 쏟아붓지만 그로부터 얻는것은 그닥 많지 않다. 현재의 대학교육 시스템은 아무리 개선한들 그 개념자체가 너무 낡았고, 대학에서 배울 수 있는 모든것들은 이미 대체할 수 있는 훨씬 좋은 프로그램들이 존재한다. 사실 효율을 논할 필요도 없다. 이 역시도 그저 인간의 오래된 습관으로써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반면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은 기본적으로 교육프로그램이 아님에도 그로부터 배우고 얻을 수 있는 것은 대학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많았다. 무엇보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산업 현장과 분리된 곳이 아닌 실제 비즈니스가 이루어지는 공간에서 앞서나간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며 성장할 수 있다는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인큐베이터와 액셀러레이터가 대학교보다 많지 않다면 우려의 목소리는 아직 대학을 향해야 하는게 맞다.

“This boom is so sustainable. It’s such a sustainable boom right now.” – Jason Calacanis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더 많은 디자이너들이 스타트업을 시작하거나 또는 합류했으면 한다. 아직도 훌륭한 디자이너들이 대부분 에이전시와 대기업에 속해 있는것이 아쉽다.

나도 스타트업에서 일한 시간만큼 에이전시와 대기업에서도 일을 했었지만, 스타트업 환경처럼 짧은 시간동안 다양한 경험을 하며 많은것을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특히 대기업에서는 비효율적인 프로세스나 문제를 발견하더라도 해결하려 들기보다는 참고 순응해야 했다면, 스타트업에서는 끊임없이 직접 개선하고 바로잡을 수 있고, 그 과정 자체가 값진 경험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지금이야말로 UI디자인의 황금기라는 이야기를 하고, 2014년은 디자이너들에게 지금껏 가장 좋은 한해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도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이런 기회들을 잡아보고자 발을 내딛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들이다. 실패를 두려워할 필요도, 아니 실패라 부를만한것도 여기엔 없다. 이 지속가능한 시스템 안에서는 그 어떤 실패의 낙인도 남지 않는다. 도전의 훈장만 남을 뿐이다.

큰 야망을 가져야 할 필요도, 세상을 바꾸려 할 필요도 없다. 그저 하나의 문제를 해결할만한 가치있는 아이디어가 있다면 함께 모여서 실행하고, 배우고, 성장해나가면 된다. 이제 시작은 그만큼 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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