ㅍㅍㅅㅅ https://ppss.kr 필자와 독자의 경계가 없는 이슈 큐레이팅 매거진 Thu, 24 Dec 2020 07:33:47 +0000 ko-KR hourly 1 https://wordpress.org/?v=5.8.10 https://ppss.kr/wp-content/uploads/2015/07/ppss-100x100.png ㅍㅍㅅㅅ https://ppss.kr 32 32 캠퍼스를 잃고 사는 교수 생활 https://ppss.kr/archives/217856 Thu, 21 May 2020 09:55:31 +0000 http://3.36.87.144/?p=217856
텅 빈 부경대학교 캠퍼스. / 출처: KBS

언제까지일지 모르지만, 나는 일본 메이지가쿠인대학의 대학교수다. 현재는 캠퍼스를 보지도 못하고, 학생들의 숨결을 느끼지도 못하고, 그들의 환한 얼굴과 시끄러운 재잘거림을 듣지도 못하는 온라인 교수다. 이 글은 일본의 코비드 긴급조치 발령으로 일시적이나마 캠퍼스의 영토를 잃어버린 허전함에 되돌아보고 쓴 소회다.

나의 인문학적 깨우침에는 공간이 지닌 잠재적 교육 작용, 간접적 소통 구조를 누구보다 높이 치는 방향성이 있다. 그래서 조금 다른 의견이 있을 친구들도 있을지 모르지만 내게는 대학 자체는 물론 그 교정, 그 주변의 대학가는 한 세트로 잠재적 교육을 담당한다고 믿는다. 한국의 모교에서 재직할 때도, 캠퍼스와 신촌 거리가 나를 가르쳤고, 내 제자들을 나와 같이 교육한다고 믿으며 말해왔다. 고교 시절부터 대학 캠퍼스가 주 무대로 그곳에서 살며 노는 생활을 했다.

이화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가 내 고등 모교다. 고교의 교실과 교정이 이대의 캠퍼스에 연이어 있는 데다, 매주 채플은 이대 대강당에서 있었고, 학교의 백일장, 사생대회, 음악회, 가장 큰 행사로 매년 유엔데이에 치르는 모의올림픽 등등 크고 작은 행사는 거의 이대 캠퍼스에서 열렸다.

여름에 열흘 가까이 실시하던 해양 캠핑은 당시 충남 서천 비인에 있던 이화대학의 하계캠핑 시설을 이용했다. 그밖에도 당시는 어느 정도 금남의 구역으로 여겨지던 이대 캠퍼스에 고교의 남학생들이 자유롭게 활보할 수 있다는 으쓱함에 아무 용무 없이도. 친구들과 이대 캠퍼스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대 캠퍼스는 그 내용은 불문하고, 나에게 여러 잠재적 가르침을 주었다.

고교 시절 나를 기른 이화대학 캠퍼스. 수 년 전 국제학회에 발표차 갔을 때인데, 산천도 의구하지 않을 정도로 상전벽해였다.

모교 연세대에 진학한 이후에는 누구보다 오랜 시간을 캠퍼스에서 보냈다. 강의를 듣는 시간은 그 일부였다. 물론 도서관에도 열심히 갔으나, 솔직히 그곳에만 파묻힌 열렬 학구파는 아니었다. 써클 활동, 데모, 아르바이트, 친구들과 사사로운 놀이, 심지어 연애마저 전부 캠퍼스와 신촌 거리가 무대였다. 캠퍼스와 그 주변은 나를 기르고 가르치는 공간, 그 자세였다.

그 시절의 캠퍼스와 신촌 거리의 빛깔, 바람, 냄새, 계절마다 다른 공기의 온도와 습도를 나는 지금도 몸으로 기억한다. 그 시절 거기의 음악 소리, 눈에 잔영으로 남아 있는 풍광, 먹고 마신 모든 것의 맛과 내음, 그리고 마주 앉았던 친구들의 목소리와 분위기, 그것에 더불어 우리가 목청을 높였던 토론의 아젠다도 거의 기억한다.

이런 습성은 유학 시절도 마찬가지였다. 일본 교토의 도시샤대학, 그 캠퍼스와 교토의 거리거리, 그 낡았으나 고상한 분위기와 냄새, 독특한 정경은 그대로 나의 생각과 사유의 바탕으로 흘러들었다.

도시샤대학은 윤동주 시인과 정지용 시인의 시비가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 출처: 여성경제신문

한국으로 돌아가 시간강사와 연구 기간을 거쳐 모교의 전임교수가 되었다. 전임교수로서의 신분, 안정적 수입, 제자들을 기르는 기쁜 보람으로 가득했을 때, 철이 없는 나는 더욱더 기쁜 일이 하나 더 있었다. 연구실이다.

처음 모교에 부임했을 때, 내 연구실은 연대의 고색창연한 역사적 건물 ㄷ자형 중앙정원 언더우드 동상의 왼팔 쪽 석조건물 아펜젤러관 맨 가운데 창가에 있었다. 햇살 따사롭고, 대학의 숨결이 가득 밀려드는 작은 영토였다. 거기서 쉴 새 없이 논문과 책을 썼고, 강의 준비를 했다. 당시 하루 24시간 중 분명히 나는 그 반 이상을 그 영토에서 머물렀을 것이다.

한국과 일본에서 대학교수로 재직하면서 국내외 학회, 해외 콘퍼런스를 다녔다. 특히 내 전공이 역사 관련으로 다른 전문분야에 비해 답사, 필드 워크가 많다. 대부분의 학회나 콘퍼런스 장소는 대학 캠퍼스다. 혹 그렇지 않더라도 나는 어느 나라 어느 낯선 도시를 방문하던 다른 목적지에 앞서 대학 캠퍼스 투어를 꼭 했다.

그동안 어림잡아 보면, 고국에서만 해도 서울과 지방을 불문하고 100개 이상의 캠퍼스는 방문했던 거 같다. 일본에서도 소속 학회의 순회 개최, 필드워크, 강연 초청를 비롯한 특별한 용무로 50곳 이상의 국공립, 사립 대학 캠퍼스를 방문했다. 십수 년 전에는 연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두 차례에 걸쳐 미국의 소위 아이비리그 대학 거의 다와 그 밖의 전통적 대학, 캐나다의 유명 대학 등등을 순례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중국의 남북 지역 여러 도시, 홍콩, 타이완, 동남아시아 등등에 나갈 때도 그 도시의 대표적인 대학 캠퍼스는 필수적으로 방문했다. 이를 나는 직업병이요, 캠퍼스 중독이라고도 말했다. 이렇듯 캠퍼스는 그 자체로 놀라운 교육과 연구 작용을 한다는 것이 내 신념이다.

출처: 연합뉴스TV

온라인 대학교수가 된 요즈음. 매일 노트북과 태블릿 PC 앞에서 리포트를 읽고, 코멘트도 하고, 질문에 응답도 한다. 가끔은 영상이나마 학생들을 불러 모은다. 그러나 거기는 싱그러운 봄학기의 5월 신록도, 바람 소리도, 햇살에 빛나는 캠퍼스의 향기로운 라일락 냄새도 없다.

배경이 없는 그림, 바탕이 없는 존재란 허무하기 이를 데 없다. 나 스스로도 잡동사니로 둘러싸인 캠퍼스의 독립국. 그 작은 영토에 머물러 있을 때, 진정 자유로운 사고의 주권을 지닌 교수가 될 수 있을 것도 같다.

원문: 서정민 교수의 동경 에세이-종교사학자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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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 총선 결과와 4·16 세월호 사건 https://ppss.kr/archives/216755 Tue, 21 Apr 2020 05:25:59 +0000 http://3.36.87.144/?p=216755 언젠가 하도 깊은 충격 때문에, 한국 현대사는 4·16 세월호 사건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야 할 것이라고 한 적이 있다. 일본 현대를 3·11 동일본 대지진 이전 이후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는 맥락과도 궤를 같이한다.

세월호는 우리가 겪었던 한국 현대사의 질곡과는 상당히 다른 특징이 있다. 긴 역사는 차치하더라도 식민지 압제와 분단, 전쟁, 민중 학살, 군사 독재, 민주 항쟁 등 우리가 겪어 온 비탄의 역사, 그 트라우마는 어느 하나 쉽게 치부할 수 없는 한으로 쌓였다. 그러나 대부분 우리에게 불가항력의 운명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세월호는 달랐다. 국가가 제대로만 작동했다면, 높고 낮고 간에 곳곳의 책임자들이 마땅한 본연에만 성실했다면, 화면에서 비치는 우리 눈앞에서, 그 푸르고 창창한 이들이 차가운 바닷속에서 그렇게 처절히 죽어가지 않았을 것이라는, 절절해 숨조차 쉬어지지 않는 고통을 전 국민이 경험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트라우마다.

도대체 우리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권력과 최고 책임자는 어떤 역할과 기능, 사명이 있는가. 되물을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6년이나 지났지만 그때의 그 무능하고, 악하며, 최소한의 책임도 방기한 세력을 이어받은 잔당들에 의해, 우리는 아직 우리의 청청한 이들이 왜 우리 눈앞에서 그토록 허망하게 죽어가야 했는지 진상을 아직 다 알지 못한다. 그 과정에서 누가 어떻게 했으며, 무슨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도 다 알지 못한다.

그러나 코로나19 위기 상황에서는 국가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았다. 물론 세월호 사건과 차원은 다르다. 하지만 국가에 지워진 책임과 그 책임자의 자세와 역할이 무엇인지도 보았다. 세월호로 인해 세계의 손가락질을 받았던 이 나라가, 지금 코로나19 상황에서 온 세계로부터 어떤 존중과 부러움을 사는지도 보았다.

4·15 총선의 결과는 4·16 세월호 6주년을 맞은 국민의 엄중한 질문이며 응답이다. 4·16의 숨 막히는 고통, 촛불 혁명이라는 요원의 불길,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민주 시민의 열망, 그리고 주저 말고 적폐, 구습, 악덕 기득권을 확실히 청산해 나가라는 국민의 명령이다. 모두 6년 전 4·16에서 비롯되었다. 그 사실을 진 자도, 이긴 자도 잊지 말기 바란다.원문: 서정민 교수의 동경 에세이-종교사학자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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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적 자위권에 대해 알아야 할 몇 가지 사실 https://ppss.kr/archives/26476 https://ppss.kr/archives/26476#respond Sat, 18 Oct 2014 02:50:50 +0000 http://3.36.87.144/?p=26476 집단적 자위권과 평화헌법의 의미

요즘 일본 자민당(自民党) 정권이 입만 열면, ‘집단적 자위권’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한국의 몇몇 친구들이 이것이 도대체 무어냐고 자꾸 나에게 묻는다. 그리고 이것이 지닌 근본적 문제가 도무지 무어냐고 추궁한다.

그러나 이 또한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오늘은 장황하게 그것을 조목조목 잘 설명하기 보다는 되도록 간단하고 명료하게, 내가 아는 대로만 전해둘까 한다.

일본은 현재 자위대(自衛隊)라는 비교적 강한 ‘수비형’ 군대가 있다. 그러나 최소한 자국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직접적으로 자국 영토 내에서 발생하지 않는 한 군사적 수단의 자위권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어있는, 이른바 ‘평화헌법’(곧 헌법 제9조)이 있고, 그런 헌법 정신과 전통 안에 놓여있다.

이것은 공공연히, 특히 불특정한 명분으로, 더구나 자국 영토 바깥에서 어떤 전쟁에도 참여한다거나, 결코 군사행동을 전개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이것이 얼마나 좋은 헌법이고, 훌륭한 헌법 정신인지 모른다. 심지어 웬만해서는 수비적 전쟁도 안한다는 내용이니, 반전주의자인 내 입장에서는 이런 대단한 헌법이 정말 있을까 할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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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클래스에서 일본학생들에게 바로 이 헌법 덕택에, 적어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은 가까운 주변에서의 것만으로도, 한국전쟁 6.25, 베트남 전쟁 등, 세계전쟁사의 가장 참혹한 전쟁사의 와중에서도, 젊은 병사 한 사람도 보내지 않았고, 그들의 목숨도 잘 지켰다.

오히려 그 전쟁으로 인한 천문학적 경제이익은 왕창 챙겨서, 급속도로 경제대국의 대열에 화려하게 등극한 이득을 본 바 있다고 설명한다. 바로 그 모두가 평화헌법의 덕택이라고 설명하며, 그런 은혜를 생각해서라도 평화헌법은 일본인들이 목숨 걸고 지켜야 한다고 부언한다.

그런데 보수정권들은 전쟁을 할 수 없는 일본의 헌법, 일본의 군대가 자꾸 불안한 모양이다. 특히 요즘 동아시아 정세가 중국의 입김, 북한의 태도 등으로 더욱 불확실해지면서, 기본적으로 전쟁을 걸 수도 없는 일본, 전체적으로 일본의 방위책임은 이른바 ‘미일동맹’에 의해 미국이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이 그 불안의 근본인 것이다.

이들은 말한다. 도대체 지금 이 세상에서 작은 나라든, 큰 나라든 자기나라를 주체적으로 방위해 나갈 수 있는 군대가 없는 나라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아무리 그것이 과거의 전쟁책임과 패전국으로서의 큰 그림자였다고 해도, 이제는 자신들도 주체적 군대를 운용하는 정상국가가 되고 싶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헌법의 탄생 배경에는 말도 안 되는 일본의 전쟁역사가 있고, 패전국으로서의 수동적 측면에서 만들어진 헌법이지만, 정말 바람직한 헌법이다. 이 헌법이 어떻든 유지되어왔다. 일본의 보수적 정권이나 우익들은 이를 고쳐서 더 강력한 군대를 만들고 전쟁도 불사하는 국운의 재흥을 꽤해 보려는 시도를 줄곧 해왔다.

그래서 사실은 헌법을 개정하여서라도 전쟁을 할 수 있는 정식군대를 가지고 싶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그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다. 나름대로 평화헌법의 오랜 전통이 있고, 평화헌법의 정신과 이것을 지지하는 국민적 정서도 있으며, 앞서 설명한 실제적 이득도 있었던 역사가 있다. 더더구나 지금에 와서 일본이 헌법을 완전히 바꾸어 군대를 창설한다면 주변국의 견제와 집중적 대치국면이 벌어질 것도 불 보듯 한 일이다.

 

아베와 자민당 정권의 ‘해석변경’

이에 현 자민당 정권은 하나의 방법으로 그 중간 단계의 방향을 획책하고 나섰다. 지금의 헌법, 즉 평화헌법 제9조를 그대로 둔 채, 단지 그 헌법의 해석을 달리함으로써 일단은 자신들이 원하는 단계를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집단적자위권’을 허용하는 헌법해석이다.

즉 요점은 이렇다. 일본의 자위권행사는 일본이 직접적으로 심각한 공격을 당할 때, 그 또한 선별적으로 자위적 방위권을 행사한다. 그 밖의 대부분은 일본 방위를 책임지기로 동맹을 맺은 미국의 몫이다. 그러나 이번의 집단자위권 인정 해석은 일본국민과 국토가 직접적인 공격을 받지 않아도, 일본의 방위에 있어 현저하게 중요한 동맹국이 공격을 받을 시에도 일본의 자위력으로 이를 방어,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런 미국의 영토나 미국의 관할권 안에 있는 영토에 대한 공격은 일본의 방위에 심대한 영향을 주는 일이기 때문에, 동맹국에 대한 공격은 곧 일본에 대한 공격으로 판단, 자위대가 군사작전을 펼 수 있도록 그 역할의 확대해석이 가능하다는 논리이다.

여기에 한 수 더 붙인다. 동맹국이 아니더라도, 다른 지역, 다른 국가가 다른 나라로부터의 군사적 위협에 처하여 혹시 일본에게 지원을 요청했을 시, 그 상황이 일본의 국가안위나 자국민의 보호에 심각하고 엄중한 관련이 있다고 판단될 때에는, 자위권 차원에서 일본 영토 바깥지역에서의 군사작전도 허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모두가 현재의 평화헌법에 대한 해석의 변경만으로 가능하다는 논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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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곧 평화헌법은 그대로 둔다지만, 지금까지 존중되어 온 평화헌법의 정신은 다 무너지는 일이 된다. 그렇게 되면 일본은 여러 이유와 빌미를 들어 얼마든지 국내외에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국가라는 방향으로 논리가 귀착되어 나간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욱이 이러한 자위권의 확대 결정, 이른바 ‘집단적자위권’ 행사를 결정하는 그 때 그 때의 정권의 성향에 따라 고무줄처럼 그 해석이 늘어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어서, 또 다시 일본이 전쟁 광풍의 군사대국으로 새로운 험로를 걸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삐가 한번 풀리면 그것을 다시 잡아채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일은 일본의 주변국뿐만 아니라, 실은 일본 내부 구성원들에게 과거의 악몽, 참담한 미래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데 더 문제가 있다. 지금 일본 안에서도 일부에게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다수는 아직 깊이 그 위험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집단적 자위권과 추축동맹의 기억

그리고 마침내 전후 일본정치에서 거의 유일하게 칭찬할 수 있었던 부분이  금이 갔다. 이른바 ‘집단적 자위권’을 인정하는 것을 각의(閣議)가 결정했다.

아베수상은 이런 경우야 말로 만약, 만일의 극히 예외적 경우이며, 일본은 지금까지와 같이 평화헌법과 그 정신을 수호하며, 전쟁에 결코 참여하거나 관련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누누이 국민 앞에 강조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것이 더욱 수상해 보인다. 그렇게 아닐 것을 그렇게 집요하게 해석변경을 해내려고 노력한 이유가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아베나 지금의 정권은 설사 그 전통을 공언대로 지킨다 하더라도, 다음 어느 때고 새로운 정권이 조금 더 강성으로 전쟁지향의 매파들이 들어선다면, 오늘의 헌법 해석변경은 곧바로 적극적으로 활용될 소지가 불 보듯 한 일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미국의 동아시아정책이 깊이 우려된다. 이제 미국은 일본에 대한 전적인 방위책임에 어느 정도 피로를 느낀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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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나아가 미국의 동아시아 군사억지력의 일부 책임을 집단자위권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떠넘기고, 그 대가로 일본의 군사력 증강을 용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오늘 나의 상념을 더해주는 것은 오래 전의 한 가지 역사적 사실이다.

1940년 9월 27일 일본이 독일, 이탈리아와 체결했던 이른바 ‘삼국동맹’의 악몽이다. 이 동맹으로 일본은 이른바 주축국의 일원이 되었다.

그리고 뒤이은 아시아태평양전쟁의 전제가 되었다. 이 또한 시대가 다른 흐름이라고는 해도, 일종의 ‘집단자위권’ 동맹에 다름 아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길지 모르지만,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는 패전 후 일본 역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날이 오늘이다. 일본은 제한적이기는 해도 마침내 다시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

이런 동아시아 판국에 조국은 가지런히 내치도 바로 세우지 못하는 권력의 우왕좌왕을 보인다. 형편없는 난국상황이다.

 

모든 일본인이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집단자위권 인정이 지닌 위험성을 깊이 우려하는 일본의 시민들이 근래 들어 좀처럼 보기 드문 의사표현에 나섰다. 우리대학의 가까운 교수들, 학생들도 다수 데모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보기 드문 사건이 일본 동경 중심가에서 일어났다. 6월 29일 일요일 오후 2시 10분 경 동경 신주쿠(新宿) 대로의 한 육교 위에서 중년 남성이 휘발유를 뒤집어쓰고 분신자살을 기도했다.

그는 한 시간 이전부터 휴대용확성기를 통해 아베 신조(安倍晋三)수상의 집단자위권 행사 용인정책에 강력히 반대하는 내용으로 가두연설을 했고, 뒤이어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급히 소방대원들이 진화하고,병원으로 이송 하였다. 온몸에 중증의 화상을 입었으나, 현재 의식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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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적으로 의식 있는 시민들의 의견표현과 데모는 있었으나, 목숨을 내 던지는 이와 같은 항의사건은 드문 일이었다.

이 사건을 내/외신은 충격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원문 : 서정민 교수의 동경 에세이 – 종교사학자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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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는 꼭 불편함만은 아니다 https://ppss.kr/archives/23512 Fri, 05 Sep 2014 00:37:32 +0000 http://3.36.87.144/?p=23512 갑자기 찾아온 인터뷰

지난 금요일은 무척 바빴다. 우선 동료 교수 클래스의 학생들이 과제로 ‘장애인 삶의 나라별 차이’를 주제로 한 그룹이 공동으로 탐구하여, 조사보고서와 ‘프레젠테이션’(presentation)을 준비하는데, 나를 인터뷰하러 온 것이다.

학생들 네 사람이 내 연구실로 찾아 와 1시간 반 이상을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어 오후에는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의 바티칸까지 커버하는 로마 지국장인 기자가 교황의 한국방문을 앞두고 기획한 특집기사 취재를 위해 내 연구실을 방문했다.

이미 약속된 일정이었기 때문에 그의 취재에 응하고, 비교적 오랜 시간 이런 저런 한일 종교관련, 한일 역사관련 이야기를 함께 나누었다. 더구나 친구 교수들과 저녁 약속이 잡혀있는 날인 데다가, 비교적 간단하지 않은 인터뷰를 연거푸 당해야 하는 날이었다.

오랜만에 참 분주하구나 하는 느낌이 든 날이었다. 그러나 그 날 저녁을 최고로 가까운 친구교수들과 함께 나누며, 편안한 분위기로 즐거웠던 탓에 피로감은 이내 가셨다.

장애인 주제의 과제를 수행하는 학생들은 실제로 장애인 교수를 만나 인터뷰를 하자고 하니, 처음엔 무척 긴장한 양이었다. 무엇을 물을지, 어떻게 공손하게 자신들의 의견을 전할지 어려워했다. 물론 그것을 알아차린 내가 나서서 젊은 학생들의 긴장을 편안하게 풀어주었다. 이미 무엇을 묻고 싶을지 감이 왔기 때문에, 그들이 질문하고 싶은 것을 자문자답하듯이 답해 나가자 이내 학생들의 볼이 발갛게 상기되며, 오히려 나와 이야기 하는 것이 즐거워지는 것 같았다.

 

장애인과의 동행은 불편하기만 하지는 않다

평소 내가 가지고 있는 장애인에 관한 핵심적인 생각이나 경험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과, 미국 등에서 경험한 실제적 사례들, 현장에서 내가 직접 느꼈던 느낌까지를 소상히 말해주자, 그네들의 용기가 좀 생긴 것 같았다. 인터뷰 후반부 질문이 걸작이었다. 즉 이야기를 마무리 해갈 즈음 그들이 내게 한두 가지 한 질문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교수님, 이런 상태로 우리가 그냥 어떤 시스템 안에서 의무감 같은 것으로만 생각 없이 살아간다면, 일본이든, 한국이든, 그 어느 나라든, 근본적으로 장애인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상적 사회를 만들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교수님 생각은 어떠세요?”

“우리는 자꾸 장애인들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그들은 무엇을 원할까, 혹은 그들이 무얼 더 해주려고 하면 오히려 미안하거나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하는데, 교수님 생각은요?”

나름 생각들을 많이 한 것 같다. 나는 동문서답처럼 대답을 했다. 우선 교육과 경험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어려서부터 장애인친구들과 같이 놀고, 공부하고, 살아간 경험을 지닌 이들이 제일 수준 높은 장애인 전문가가 되고, 그들은 장애인과 어떻게 함께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의 방법을 체득한다고 대답했다. 나는 평소 생각처럼 이렇게 예를 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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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관련을 전문으로 전공하고, 그 분야에서 일하는 이들보다, 오랫동안 나와 친구가 되어서 함께 여행하고, 함께 인생을 살아간 가족, 친구들이 훨씬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라고 말해 주었다. 혹시 그런 특별한 기회가 없더라도, 거리에서, 역에서, 공원에서 장애인을 만나 단 한 차례라도 도움을 주거나 이야기를 나누어 본 사람이 지니게 되는 생각은 그 어떤 이론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했다.

그리고 역으로 질문을 했다. 장애인과 함께 파트너가 되어서 사는 사람, 혹은 특별한 친구가 되어 같이 일을 하는 사람, 자의든 타의든 장애인과 관계를 맺고 사는 장애가 없는 사람들이 더 힘들고 부담스러운 삶을 살 것 같으냐고 물은 것이다. 그네들은 조금 망설이더니, 자신들은 사실 경험이 없어 잘 모르겠으나, 생각해 보면 분명 그러리라고 여긴다고 했다. 나는 그들의 일반적인 생각, 예상 다 존중해 주었다. 그러나 내 스스로 이렇게 단언하기는 좀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고 답해주었다.

장애인과 함께 어떻든 우정과 사랑을 나누고 사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인생이 훨씬 더 보람 있고, 행복하다는 것은 이미 거의 증명된 사실이라고 말해주었다. 한 걸음 더 뻔뻔스럽게 말해 주기를 나와 관련을 맺고 사는 사람들이 모르긴 몰라도 적어도 내 장애 때문에 더 힘들거니, 부담스럽거나 후회스럽기 보다는 더 보람 있고, 의미 깊으며, 행복했을 순간이 더 많았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해주었다.

 

인간 엘리베이터와 발상의 전환

그런 생각에까지 와 닿아 있는 나는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절대로 내 장애로 인한 미안함은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런 생각을 가지는 것이 그들에게 오히려 미안한 일이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학생들은 놀라워하면서도 그 근본적인 생각에 깊은 공감을 표하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체험적 지난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혹 이 글을 읽은 나의 고교시절, 아니면 대학시절 친구들이 있다면 아마 입가에 웃음이 번질 것이다. 내 학창시절만 해도 학교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있는 경우는 아주 드문 시대였다. 5,6 층 건물까지도 그대로 계단밖에 없을 시절이다. 그 때 내 친구들이 만든 방식이 두 사람이 양어깨를 끼고 계단을 뛰어 오르는, 이른바 ‘인간 엘리베이터’방식이다.

그건 내 일생, 고교시절부터 시작해서, 대학, 직장, 여러 학회, 그리고 그것을 철저히 계승하여 나를 도운 이들이 내 제자들이다. 그리고 모든 시스템이 잘 되어는 있지만, 혹 세밀한 부분에서 허점이 있는 이곳 일본에서도 내가 주변에 그 방법을 전수하여 도움을 받고도 있다.

특히 여름날 그 높은 계단 몇몇 층까지를 나를 어깨로 들고 뛰어 올라간 친구들은 숨을 몰아쉬며, 온 몸에 땀이 흠뻑 베인다. 나라고 왜 아니 미안하며, 마음가득 고마운 마음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나는 간혹 이렇게 그들에게 말했었다.

“이눔들아, 어서 나에게 고맙다고 해라. 나를 들고 올라오고 나니 무척 기분 좋지? 그리고 오늘 벌써 착한 일 하나는 했으니, 약분하면 좀 나쁜 짓 한 가지는 해도 하느님이 봐 줄 거야 아마, 어서 고맙다고 하라니까.” 그러면 내 착한 친구들은, “그래그래 정말 고맙다 착한 일 하게 해주어서.”

장애인3

나중에 들으면, 첨엔 뭐 이런 친구가 다 있나 했다가도 그런 나의 뻔뻔함 때문에, 언제부턴가 나에게 장애가 있다는 것도 다 잊어버리고 살며, 그것이 하나의 일상이며, 기쁨이었다고 말해주는 친구들도 많았다. 요즘도 가끔 고교시절이나, 대학시절의 친구들은 만나면, 그렇게 내 어깨를 끼고 계단을 올려주고 싶어 한다. 그럴 때면 어떤 친구는 간혹 아직 널 이렇게 올려 줄 정도로 자신의 허리가 젊다고 자랑을 한다. 그러고는 그 시절 널 올려주느라 허리운동이 되어 그런가 보라고, 여전히 나에게 ‘고맙다’고 말해준다.

학생들은 내 경험이야기에 보충할 질문도 다 사라졌다고 하며, 시진 한 장 찍고 눈물 그렁그렁 내 방을 떠났다. 학생들 인터뷰 덕택에 나 또한 아스라한 지난 날 친구들과의 따뜻한 기억과 보고픔에 가슴이 먹먹했다. 그리고 요즘의 제자들이 해 준 말 중에도 생각나는 말이 있다. “선생님이 몸이 불편하시지 않다면, 저희가 어떻게 감히 선생님을 들쳐 업고 들고 뛰며, 선생님 땀 냄새를 맡으며 같이 살 수 있겠어요? 감사합니다.”

장애는 힘든 역경이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또 다른 행복도 가능하다. 그렇게 믿고 산다. 멋진 예술적 디자인으로 혹은 실용적 공간 활용으로 만들어지는 계단이 지체장애인들에게는 대부분 ‘골고다’의 고행으로 보인다.

원문: 서정민 교수의 동경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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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 당당하게 요구하기 https://ppss.kr/archives/23968 https://ppss.kr/archives/23968#comments Fri, 11 Jul 2014 05:07:22 +0000 http://3.36.87.144/?p=23968 요즘 좀 바쁘게 지냈는지 몸의 컨디션이 좋지 않다. 처는 한국에서 하던 수영을 일본에서 중단한 것이 컨디션 조절에 영향이 있는 것 같다고 한다. 며칠 전 내가 출근한 후 후쿠오카(福岡)에 사는 큰 딸과 상의하여 우리 동네 가까운 스포츠센터를 검색하여, 몇 곳 다녔으면 하는 수영장 후보를 자료로 정리해 놓았다. 나 역시 당장은 아니어도 머지않은 시일 내에 일본에서도 수영을 다시 시작해 볼까 하는 마음에서 전화로 몇 군데 문의를 해 보았다.

스포츠센터 상담담당자들의 대부분의 반응은 ‘풀’이 장애인 시설을 별도로 만들었기 보다는 일반인 수영애호자들과 함께 어울려 수영하는 것을 더욱 배려하다보니, 실질적으로 관련시설이 간혹 불편할 수 있다는 것에 먼저 양해를 구했다. 그래서 꼭 직접 방문하여, 모든 시설항목을 확인하고, 본인이 판단하여 최종 선택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물론 공히 공공 스포츠센터의 경우, 장애인 본인과 보호자 한 사람은 완전 무료로 매일이라도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었다.

 

장애에 대한 배려 없는 한국에서의 무한경쟁

나는 아주 어려서부터의 장애를 입고 살지만, 사실 한국에서 성장시설부터 의식적으로 장애인자각이나 열패감 없이 살아가려고 무진 애를 쓴 경우이다. 대개는 그것을 나름 숨이 턱에 닿도록 최선을 다해 초인적으로 극복하고 살고자 했지, 그것을 내걸고 무얼 좀 봐 달라는 입장은 결코 나에게서 도무지 용납이 안 되는 삶이었다. 그래서 그로 인해 나름 이겨내고, 때로는 쟁취해 낸 것도 꽤있다. 대학의 장애불합격을 싸워서 합격으로, 자동차운전, 취직, 스포츠, 여행, 인생 대부분 미리 포기한 것은 없다.

그러나 일본 유학시절 이후, 나는 좀 변했다. 거의 대부분 이른바 ‘장애인 핸디’를 무진장 요구하며 산다. 내가 이를 악물고 같은 조건으로 버티고, 뛰어보아야 결코 나에게도, 내 주변의 사람들도, 어차피 나와 같이 살아갈 때, 그렇게 하는 것이 서로에게 편안하거나 유쾌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어차피 장애가 없는 친구와 내가 100미터를 같은 스타트라인에 서서 뛰어 경주를 해보아야 내가 질 것은 명확한 일이다. 그렇게 해서, 그 친구가 날 이겨보아야 그 또한 기분이 좋겠는가. 이런 시합을 지켜본 구경꾼들도 에이 하고 야유나 퍼부을 것이다. 그렇다고 친구와 내가 100미터 달리기 시합 한 번 못한다면 그 또한 재미없는 인생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는 언제부터인가 당당히 주장한다. 내가 90미터를 먼저 가 있겠다고. 그리고 친구는 100미터 원래의 출발선에서 뛰고 나는 90미터 먼저 간 지점에서 동시에 출발하면, 누가 이기든 아슬아슬 골인해서, 그래야 이긴 사람은 환호하고, 진 사람은 아쉬워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야 구경꾼들도 진심으로 박수를 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내가 100미터 경주에서 90미터 먼저 가서 출발하는 것이 과연 ‘평등’에 어긋난 일인가.

 

장애를 가지고도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일본

일본에서(한국에서도 이제 일부는 적용되지만) 장애인 수당지급, 자동차세 면세, 고속도로통행료, 신칸센, 국내선항공료 반값, 지하철 무료, 전철과 택시비 할인, 공영주차장 무료, 가솔린값 보조, 줄서기 면제… 대학에서도 강의 시 내 연구실에서 최단거리의 특별교실 배정, 행정직원의 사무배달 서비스, 도서관 대출대행, 우천 시 우산 씌워주기, 모든 건물 앞의 내 자동차 주차허용 등등 이루 다 헤아리기 어려운 혜택을, 나는 다 그 내가 먼저 가는 90미터의 하나라고 생각하며, 대단히 뻔뻔하게 산다.

가끔 너무 이렇게 미안한 마음도 없이 당당하게 요구하며 살고, 큰 소리를 뻥뻥 쳐도 될까 생각할 때도 있다. 혹 역무원 등이 더 잘 못해드려서 미안하다며 허리를 굽혀 조아릴 때(물론 그것이 속마음 그대로인지, 훈련된 복무규정에 따른 것인지 모르지만, 물론 이러나저러나 그것까지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고), 거만하게(?)괜찮다고, 앞으로는 시스템이나 시설에 더 개선하는 모습을 보여 달라고 훈시(?)를 할 때, 가끔은 솔직히 좀 쫄리는 마음이 없지는 않다. 차비도 아예 안내거나 반값만 낸 주제에 말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그 90미터를 확실히 찾아 먹어야 이 세상이 더 좋은 세상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되도록 계속 뻔뻔하고자 노력한다.

 

안내견을 타고 버스에 오르지조차 모르는 한국

오늘 한국 뉴스 하나에 다시 내 피가 거꾸로 솟았다. 1급 시각장애인이 안내견(案內犬)을 데리고 버스를 타려는데, 내려라, 그것이 규정에 어긋나면 벌금을 내겠다. 앞으로 개새끼(?)랑 같이 타려면, 상자에 가두어 들고 타라… 운전사의 말이었단다. 돌아오는 길은 아예 태우지도 않고 출발…

이것 정말 언제까지 이래야하나. 다른 것 잘 고치고, 바꾸고, 민주주의가 어떻고 주장하면 무엇 하나, 장애인들을 다른 이들과 똑같은 선상에 같이 세워놓고, 같이 뜀박질하고는 그들이 뒤쳐졌다고 조롱할 판의 사회에서, ‘인권’이 무엇이고, ‘평등’이 무엇이며, 과연 ‘정의’란 무엇인가. 과연 잘 산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일본도 아직 시스템 상으로나 시설의 차원에서 완벽한 이상적 상태에 다다랐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부족분을 사람들이 채워간다. 이 사람들의 이른바 ‘다떼마에’(建前)인지는 몰라도 대개가 장애인 앞에서 그렇게 친절하고 부드러울 수가 없다. 물론 일본 싫어하고, 비난해야 할 일 많지만, 이런 건, 우선 좀 배워가야 할 것 같다. 이게 기본이다.

원문: 서정민 교수의 동경 에세이 – 종교사학자의 생각

Bollywood Aishwarya Rai baby B continues to be out of s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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