ㅍㅍㅅㅅ https://ppss.kr 필자와 독자의 경계가 없는 이슈 큐레이팅 매거진 Wed, 23 Apr 2025 03:06:54 +0000 ko-KR hourly 1 https://wordpress.org/?v=5.8.10 https://ppss.kr/wp-content/uploads/2015/07/ppss-100x100.png ㅍㅍㅅㅅ https://ppss.kr 32 32 60년 전 ‘피의 화요일’, 학생과 시민이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 https://ppss.kr/archives/268820 Wed, 23 Apr 2025 03:06:54 +0000 http://3.36.87.144/?p=268820 1960년 4월 19일, 4·19 혁명의 불길이 타오르다
혁명은 4월 18일, 고대생 피습사건을 계기로 ‘부정선거 규탄’에서 ‘독재 타도’로 바뀌고 있었다.

1960년 4월 19일은 화요일이었다. 전날, 평화적 시위를 마치고 귀가하던 고려대학생들이 경찰과 공모한 정치깡패들의 무차별 테러로 다친 뒤라 분위기는 잔뜩 격앙되어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하나둘 국회의사당에 모인 학생들은 선언문을 낭독하고 거리로 나섰고 이내 경무대 방향으로 행진하기 시작했다.

 

‘피의 화요일’ 사망 186명, 부상 6026명

애당초 ‘부정선거규탄’과 ‘학원의 자유’를 외쳤던 학생들의 평화적 시위는 경찰의 폭력 진압 앞에서 질적 변화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날의 구호는 ‘3·15부정선거 다시 하라’, ‘1인 독재 물러가라’, ‘이승만은 하야하라’ 등 독재정권 퇴진과 민주주의 수호를 요구하는 혁명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전우와 애국가를 부르며 달려가는 젊은 학생들의 대열에 하나둘 시민들도 합류했고, 서울 시내는 온통 민주 수호와 독재 타도를 외치는 10만 명이 넘는 시위대열로 뒤덮였다. 경무대로 나아가려는 학생들과 이를 저지하려는 경찰의 공방은 점차 치열해지기 시작했다.

최루탄과 공포탄으로 시위대를 막던 경찰의 1차 저지선은 잔뜩 고양된 학생과 시민들 앞에서 이내 무너졌고, 시위대는 경찰의 최후 저지선인 경무대를 향해 달려갔다. 소방차를 앞세운 시위대와 경찰의 간격이 10여 m로 좁혀졌을 때, 실탄을 장전한 경찰의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경무대에서의 발포를 비롯하여 서울 시내 곳곳에서 경찰의 무차별 사격으로 숱한 학생과 시민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분노한 시민들은 반공청년단 본부와 왜곡 보도를 일삼은 신문사를 불태웠으며, 시위를 진압하려 출동한 소방차를 빼앗고 경찰서를 습격하는 등 시위를 한층 격렬하게 전개하기 시작했다.

혁명의 불길을 댕긴 실마리는 전날인 4월 18일, 청계천 4가에서 벌어진 테러였다. 국회의사당 앞에서 구속된 학생들의 석방과 학원 자유를 요구하며, 평화적 시위를 벌인 후 고려대생들이 귀갓길에서였다. 경찰의 비호 속에 반공청년단이라는 정치깡패들의 무차별 테러로 학생 수십 명이 다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계엄군이 출동했지만, 군은엄정 중립을 지키면서 치안 유지와 유혈사태 방지에 힘썼다. 시위대가 군의 탱크 위에 올라가 있다.
교수단 시위 이후에는 4.19 때 발포로 친구를 잃은 초등학교 학생도 시위에 참여했다.

학생들의 평화 시위마저 폭력으로 진압한 정권에 대한 국민의 분노는 마침내 임계점에 이르렀다. 이 고대생 피습 사건은 학생시위의 주역을 지방의 고교생으로부터 서울의 대학생으로, 시위목적도 ‘부정선거규탄’에서 ‘독재 타도’로 전환하게 한 변곡점이었다.

서울 시내가 완전히 무정부 상태에 빠지자 당황한 이승만 정부는 이날 오후 3시, 서울 일원에 이어 유혈사태가 벌어진 부산·대구·광주·대전에도 계엄령을 선포했다. 밤늦게까지 산발적으로 이어진 시위는 계엄군이 서울에 진주하면서 일단 가라앉았다. 계엄군은 중립을 선언하고 소극적으로 시위진압에 임하였고, 유혈사태 방지와 치안 유지, 혼란 수습 등에 치중하였다.

이날 하루 동안의 시위로 서울에서만 1백여 명, 부산에서 19명, 광주에서 8명 등 전국적으로 186명이 사망했고, 6026명이 부상했다. 이날을 ‘피의 화요일’이라 부르는 이유다.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학원의 자유를 요구하면서 시작된 학생시위는 마침내 그 비등점에서 폭발하고 만 것이었다.

 

혁명의 시발점, 2.28 대구 학생 시위

사월혁명은 2월 28일, 대구에서 시작된 고교생들의 부정선거규탄 시위가 시발점이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는데, 당국은 대구에서 개최될 민주당 선거 유세에 학생들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학생들을 등교시켰다. 공휴일에 학교에 불려 나온 학생들은 영화 관람과 토끼사냥 등에 동원되었다.

전날, 학교의 의도를 간파한 경북고·대구고·사대부고 학생 8명은 부당한 등교 지시에 항의하고자 시위를 조직하고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해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는 결의문도 작성했다. 28일 오후 1시 학생 800여 명이 반월당을 거쳐 경상북도청으로 행진하며 벌인 시위에 다른 학교 학생들이 합류하며 시위대는 1200여 명으로 늘어났고, 120여 명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시위가 번질 것을 우려한 경찰은 주동자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학생을 석방하였지만,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시위는 보름 뒤 정·부통령 선거일에 자행된 부정선거로 다시 불이 붙었다. 선거는 이승만(1875~1965)의 장기 집권과 유고 시 뒤를 이을 부통령 후보 이기붕(1896~1960)의 승리를 위해 추악하고 불법적인 부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상 유례없던 부정선거의 양상은 다음과 같다.

  • 3~5명씩 짝지어 기표하고 자유당원에게 검사받는 3인조, 5인조 공개 투표
  • 투표소 주변에 자유당 완장 부대를 동원해 민주당 지지자를 위협
  • 있지도 않은 사람을 유권자로 둔갑시켜 자유당에 투표하게 하는 유령 유권자 조작
  • 총 유권자의 40%에 달하는 자유당 표를 미리 투표함에 넣어두는 4할 사전투표

이처럼 투표는 부정과 폭력이 난무한 가운데 진행되었고,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대구에서 타오른 불길은 이은 곳은 마산이었다. 민주당 마산지부의 선거무효 선언과 함께 시작된 부정선거 규탄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하자, 이승만정권은 무차별 진압에 나섰다. 마산에서는 만여 명이 넘는 시위대에 경찰이 총격을 가하자 시민들은 돌을 던지며 맞섰다. 이날 경찰의 발포로 7명이 사망하고, 870명이 부상했다.

3·15 시위에 대한 국회 조사단은 경찰의 총격이 시위대 해산이 아닌 살상 목적으로 자행된 것을 밝혀냈지만, 대통령 이승만은 시위가 ‘공산당의 사주’로 벌어진 일인 양 주장하였다. 부통령 당선자 이기붕은 “쏘라고 준 것이지 가지고 놀라고 준 게 아니”라는 망언도 서슴지 않았다.

 

김주열의 희생과 교수단 시위 이후 이승만 하야

국회 조사 등으로 진정된 시위는 3·15 시위에 참여한 학생 김주열(1944~1960) 군의 주검이 마산 중앙부두 앞 바다에서 눈에 미제 최루탄이 박힌 채 떠오르면서 다시 불이 붙었다. 마산 시민은 물론, 전국에서 자유당의 만행을 규탄하는 시위가 이어졌다.

4월 19일의 시위와 항거는 2·28이래 이어져 온 일련의 저항을 매듭짓는 항거의 정점이었다. 혁명의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자, 자유당 정권은 사건 무마에 온 힘을 기울였지만, 민심은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독재정권의 종말을 결정짓는 시위는 4월 25일에 일어났다. 전국의 대학교수 대표들이 모여 시국 수습을 위한 선언문을 발표하고 시위에 나선 것이다. 이날 오후 3시,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인 27개 대학교수 258명은 ‘대통령을 위시한 여야 국회의원들과 대법관 등은 3·15부정선거와 4·19사태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동시에 재선거를 실시하라’고 하는 요지의 14개 항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이승만의 하와이 망명을 전하는 5월 29일 자 <경향신문>기사. 그는 5년 후 망명지에서 죽었다.

이어서 교수 4백여 명은 ‘4·19의거로 쓰러진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구호를 내걸고 평화적인 시위를 시작, 서울시가를 행진했다. 이 4·25 교수단 시위는 시민과 학생들의 절대적 지지를 불러일으켜 그날 밤부터 다시 시민·학생들의 궐기로 이어졌다.

4월 26일, 서울 시내엔 경계 태세가 삼엄했지만, 시위대의 규모도 엄청나게 불어났다. 교수단 시위 이후 국민의 요구는 이승만의 하야로 정리되었다. 4·19 때 경찰의 발포로 친구를 잃은 초등학교 학생도 어깨동무하고 시위에 참여했다.

경무대를 지키던 계엄군은 실탄을 장전하고 있었지만, 엄정중립의 입장을 지켜 더는 국민의 희생을 초래하지 않았다. 달리 사태를 수습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승만 대통령은 결국,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당일 오후 4시에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돌아간 이승만은 4월 28일, 이기붕 일가가 스스로 목숨을 끊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4.19가 ‘미완의 혁명’인 이유

이승만의 하야 후 허정 내각 수반이 과도정부를 이끌었고, 학생들은 파괴된 질서를 회복하는 데 힘썼다. 그리하여 1960년 8월, 의원내각제의 제2공화국 장면 내각이 새롭게 출범하였다. 그러나 제2공화국은 이듬해인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이 이끈 군부 쿠데타로 무너졌다. 4·19가 ‘미완의 혁명’이 된 이유다. 4·19는 쿠데타 이후 군사정권에서는 ‘의거(義擧)’로 불리다가 문민정부 때가 되어서야 ‘혁명’이라는 이름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당시 한국 상황이 “이승만정권의 권력 구조와 정치의식 계층, 특히 학생들의 가치관과의 사이에 크고 명백한 균열이 있었다”는 점에서 ‘혁명적인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시위 학생과 시위군중들은 “조직화 된 지도력”을 갖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또, 이러한 “명백한 지도력의 부재가 이승만의 조속한 사임을 가져오게 하”였지만, 이는 “이승만정권의 붕괴 후에 ‘혁명’을 완성시키지 못하는 중요한 원인”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4·19가 ‘미완의 혁명’이 될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원문: 이 풍진 세상에


두 번째 책 『독립운동가, 청춘의 초상』을 내면서

유관순 18살, 이재명 22살, 윤봉길 24살, 안중근 30살, 이봉창 34살. 독립운동의 빛나는 순간들 속에서 독립운동가들은 2030 청춘이었다.

100년 전에 찍은 한 장의 사진으로 남은 ‘청춘의 초상’이 들려주는 뜨겁고 강렬한 대한의 독립운동 이야기. 반백의 노구와 주름진 얼굴의 흑백사진 속에서 기억되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에게도 조국의 독립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찬 청춘의 시절이 있었다.

독립운동가들의 2030 시절의 한때를 포착한 단 한 장의 사진과 함께 읽는 색다른 근현대사 책. 100년 전 사진으로 되묻는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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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욕’과 ‘곤혹’은 어떻게 다를까? https://ppss.kr/archives/266954 Thu, 27 Mar 2025 03:05:54 +0000 http://3.36.87.144/?p=266954 비슷해 보이지만, 그 뜻의 차이가 분명하니 쓰임새가 다르다

이제 사람들은 개별 언론사는 물론이고, 포털의 뉴스조차 잘 보지 않는다고 한다. 이들은 건조하고 중립적인 텍스트 뉴스 대신 정파적 시각에 따라 ‘편을 확실히 가르고’ 시청각으로 전해주는 유튜브로 옮겨간 것이다. 언론사 뉴스와 포털의 뉴스를 골라 읽고 나서 나 역시 유튜브로 이동하는 순서를 따르곤 한다.

 

유튜브, 맞춤법·표준 발음 문제다

그런데 유튜브 채널을 시청할 때마다 자막에 드러나는 ‘심각한 맞춤법 오류’와 자막을 읽어주는 해설자의 발음에 적지 않은 문제가 드러나서 입맛이 쓰다. 자막이 자동 생성되는 한국어야 기본적으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멀쩡한 문장에 어절 하나가 빠진 경우도 적지 않고 그걸 그대로 읽어 내려가는 해설도 딱하긴 마찬가지다.

한번은 ‘곤욕’과 ‘곤혹’을 어색하게 표현한 부분이 보여서 유념해 두었는데, 구체적으로 기억이 나지 않아서 찾지는 못했다. 둘 다 한자어인데, ‘곤(困)’은 ‘곤할, 지칠 곤’ 자, ‘욕(辱)’은 ‘욕될, 욕보일 욕’ 자고, ‘혹(惑)’은 ‘미혹할, 의심할 혹’ 자다.

뜻도 명확하게 나뉜다. ‘곤욕’은 ‘심한 모욕, 참기 힘든 일’의 뜻이고, ‘곤혹’은 ‘곤란할 일을 당하여 어찌할 바를 모름’이다. 강도로 치면 ‘곤혹’은 좀 곤란한 정도지만, 참기 힘든 모욕인 ‘곤욕’이 훨씬 세다. 곤욕은 주체가 직접 받는 실질적 구체적 피해지만, 곤혹은 사례에 따라 다르긴 해도 ‘조금 난처한 상황’이라고 해도 될 정도의 잘 드러나지 않는 피해이기 때문이다.

 

곤욕은 ‘심한 모욕’, 곤혹은 ‘어찌할 바를 모름’의 뜻

둘은 각각 실제 사용 예에서도 차별적인 방법으로 쓰인다. 이를테면 곤욕은 ‘치르다’, ‘겪다’와 같이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지시하는 동사와 같이 쓰이지만, 곤혹은 주체의 내면적 상황을 뜻하는 ‘느끼다’와 함께 쓰이는 것이다.

명사 곤욕과 곤혹은 접미사 ‘-스럽다’를 붙여 형용사로도 쓰인다. ‘곤욕스럽다’는 “곤욕을 느끼게 하는 데가 있다”의 뜻, ‘곤혹스럽다’는 “곤혹을 느끼게 하는 점이 있다”의 뜻이다. 이 둘의 구분은 꽤 까다롭기 때문인지 여러 매체, 블로그 등에서도 다루고 있다. 동영상으로 MBC ‘우리말 나들이’를 추천한다.

비슷해 보이지만, 두 말의 뜻은 구별해 쓰는 게 필요하다. 아무도 ‘모욕’과 ‘어찌할 바를 모름’이 서로 비슷한 뜻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니까. 한자어 낱말은 우리가 무심히 쓰지만, 한자어의 훈을 살펴보면 그 세밀한 뜻도 새겨볼 수 있다.

흔히 ‘와중에’ 꼴로 쓰여 “일이나 사건 따위가 시끄럽고 복잡하게 벌어지는 가운데”의 뜻으로 쓰이는 낱말이 ‘와중(渦中)’이다. 이 낱말의 원뜻은 “흐르는 물이 소용돌이치는 가운데”의 뜻이다. 한자 ‘와(渦)’가 ‘소용돌이’라는 뜻의 글자이기 때문이다.

곤욕은 ‘욕’을 기억하고, 곤혹은 ‘미혹’을 기억해 두면 두 낱말의 뜻을 분간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원문: 이 풍진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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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광복, ‘한글’로 해방의 감격을 노래하다 https://ppss.kr/archives/266956 Mon, 07 Oct 2024 12:26:10 +0000 http://3.36.87.144/?p=266956 1945년, 해방의 감격을 전하는 시와 시조, 노랫말, 그리고 산문
▲ 1945년 8월 25일, 남산 국기게양대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있다. 날짜는 미확인.

어머니! 이, 일본이 항복을 했다 합니다!”
“뭐라 했느냐?”
“일본이, 일본이 말예요, 항복을, 천황이 방송을 했다 합니다.”

서희는 해당화 가지를 휘어잡았다. 그리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정말이냐…….”

속삭이듯 물었다. 그 순간 서희는 자신을 휘감은 쇠사슬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다음 순간 모녀는 부둥켜안았다. 이때 나루터에서는 읍내 갔다가 나룻배에서 내린 장연학이 뚝길에서 만세를 부르고 춤을 추며 걷고 있었다. 모자와 두루마기는 어디다 벗어던졌는지 동 저고리 바람으로

“만세! 우리나라 만세! 아아 독립 만세! 사람들아! 만세다!”

외치고 외치며, 춤을 추고, 두 팔을 번쩍번쩍 쳐들며, 눈물을 흘리다가는 소리 내어 웃고, 푸른 하늘에는 실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5부 완결편 마지막 장면

봉순이 낳은 아이로 서희가 딸로 거둔 양현이 일본의 항복 소식을 서희에게 알리는 장면이다. 서희는 땅바닥에 주저앉고, 모녀는 부둥켜안는다. 읍내 갔다가 소식을 듣고 돌아오며 서희의 집사 장연학이 미친 듯이 만세를 부르고 춤을 추다 눈물을 흘리다가 소리 내어 웃는 가운데 대단원의 막이 내린다.

 

한글로 노래한 해방의 감격

실제로 1945년 8월 15일, 당시 삼천만 동포는 해방의 감격을 어떻게 드러냈을까. 남편인 길상이 감옥에 있는 최서희에게는 해방의 의미가 훨씬 명확했을 것이다. 징집을 피해 산에 온 사람들을 도우며 나름의 항일 운동에 참여한 장연학에게도 남다른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 전남 광주에서 펼쳐진 5.15해방 경축 퍼레이드

그러나 실제 해방 당일 그 소식을 제대로 아는 이들도 많지 않았고, 너무 갑작스러운 통일 소식이 별로 실감할 수 없었을 거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마침내 일제가 물러간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민족 지도자들의 귀환과 활동을 통해 광복의 의미를 실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1945년 해방 무렵에 사람들이 느꼈을 벅찬 감격은 어땠는지를 검색해 보다가 2020년에 국립 한글박물관의 소식지 <한박웃음>(2020.8. 제84호)의 기획 기사 ‘광복의 기쁨, 한글로 노래하다’를 읽었다. 해방은 일제 말기부터 금지되었던 조선어 사용과 교육을 온전히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심훈은 ‘그날’을 맞이하지 못했다

1930년에 심훈(1901~1936)이 발표한 시 <그날이 오면>은 심훈이 ‘해방의 그날’에 대한 열망을 직접적으로 표출한 작품으로, 이육사의 <절정>과 함께 1930년대를 대표하는 저항시다. 1920년대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잇는 이 작품은 해방의 그날이 오면, 시인의 머리로 종로의 인경을 두들기고 가죽으로 북을 만들어 치며 행렬의 앞장을 서겠다는 단순하고 격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날이 오면>은 1930년 3월 1일 기미 독립선언일을 기념하여 쓴, 식민지 시대의 대표적인 저항시이지만 심훈은 해방을 맞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그의 시는 작품집 《그날이 오면》(1949)에 실려서 해방 조국의 독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조선어학회의 간사장을 맡았던 한글학자 이극로(1893~1978)는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징역 6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해방 이틀 뒤에 함흥형무소에서 출옥했다. 국어학자인 그에게 해방은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을 터, 그는 1945년 12월 발간된 《해방기념시집》에 시조 ‘한양의 가을’을 싣고 한반도의 아름다움과 희망찬 내일을 노래했다.

 

시와 시조, 노랫말이 된 해방의 감격

이극로는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하면서 맞춤법 통일, 표준말 제정, 사전 편찬, 외래어 표기법 통일 등에 크게 이바지한 이다. 그는 1948년 4월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 참석차 평양에 갔다가 잔류하여 북한에서 활동하였는데, 1966년 이후 본격화한 북한의 언어규범화운동인 ‘문화어 운동 사업’을 주관하였다.

‘한양의 가을’은 한강, 기러기, 남산의 단풍, 무 배추 등 조선 김치 같은 시어를 써서 흥분하지 않고 담담하게 해방 조국에 당도한 가을을 노래했다. 씩씩한 청소년들의 모습에서 ‘신흥 조선’을 읽는 국어학자의 모습을 천천히 떠올리게 해 준다.

청록파 시인 조지훈(18920~1968)은 1945년 12월에 간행된 《해방기념시집》에 <산상(山上)의 노래를 발표하며 ‘어두운 과거를 극복한 현실에 대한 기쁨과 미래에 대한 소망’을 노래했다. 그는 해방의 감격을 비유적 표현과 절제된 어조를 통해 우회적으로 표현하면서, 일제 강점기를 견뎌내고 광복을 맞이하고도 민족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는 자기 모습을 구체적인 사물을 통해 드러냈다.

위당 정인보(1893~1950)는 처음으로 ‘국학’이라는 용어를 써서 이 땅에 ‘국학’의 뿌리를 내리고 품격 높은 국한문 혼용의 산문과 아름답고 전아한 의고체(擬古體)의 한글로 시조를 썼던 이다. 그는 해방 무렵에 ‘십이애(哀)’를 쓰기도 했지만, 그가 노랫말을 쓴 ‘광복절 노래’는 그의 아름다운 한글 맵시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광복절은 1949년 10월 1일 제정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따라 제정되었는데 광복절 노래도 같은 해 공모로 만들어졌다. 바장조, 4분의 4박자, 전체 16마디로 구성된 전형적인 두도막 형식 A(aa’) B(bc)의 곡이다. 2연 8행의 정형시에 1절과 2절로 나누어 곡을 붙였다.

‘보리밭’과 동요 ‘나뭇잎 배’를 만든 윤용하가 작곡한 이 광복절의 노랫말에도 위당 특유의 예스러운 한글의 아름다움의 품격으로 빛난다.

 

해방을 맞이한 여인의 감회, ‘대한 해방 감회문’

한편, 조선의 마지막 공주 덕온공주(조선의 제23대 왕 순조와 순원왕후의 막내딸)의 손녀 윤백영이 58세에 독립을 맞이하며 느낀 기쁨을 적은 글도 새삼 ‘나라 글자’ 한글에 대한 정체성을 환기해 준다. 붓글씨로 쓴 ‘대한 해방 감회문’은 “당시 여성으로서 해방에 대해 한글로 쓴 자료가 드문데다 윤백영의 뛰어난 한글 서체가 정갈하게 드러나 역사적으로도 가치를 지니는 작품”(한박웃음)이다.

여인은 해방을 “하늘은 복되고 길한 기운을 발하고 사람들은 행복의 기쁨이 넘치고 풀과 나무는 향기를 통하고 땅은 오곡이 잘 여물도록 도와주는 이때”로 받아들였다. 여성이라고 해서 해방의 감회가 남자와 다르겠는가. 궁서체의 글씨에 따뜻하게 배어 있는 한 여성의 감회는 새삼 시대를 뛰어넘어 다가온다.

고 성내운 교수의 목소리로 읊는 정희성의 시 <8·15를 위한 북소리>를 듣는다. 새벽 운동에서 돌아와 태극기를 달면서 고개를 빼어 아파트 위아래를 찾아보는데, 위층 어디쯤 태극기 하나가 펄럭이고 있어서 반가웠다. 아, 언제 서울에 갈 기회가 있으면 ‘한글박물관’에도 꼭 한번 들러야겠다고 생각한다.

원문: 이 풍진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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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8일, 대통령 이승만이 서울을 탈출한 뒤 한강대교가 폭파됐다 https://ppss.kr/archives/266510 Wed, 14 Aug 2024 04:18:15 +0000 http://3.36.87.144/?p=266510 1950년 6월 28일, 새벽 한강대교 폭파
새벽 2시 28분에 국군은 한강대교(인도교)를 폭파하였다. 폭파로 50여 대의 차량이 부서지고 500~800명이 희생되었다. 
1950년 7월 초 서울 철교에 미국의 폭탄이 투하됐다. 오른쪽에 6월 28일 새벽에 폭파되어 끊어진 한강대교가 보인다. (미 공군 사진.)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28분, 국군은 한강대교(인도교)를 폭파하였다. 사흘 전인 6월 25일 새벽 4시에 시작된 한국전쟁 70시간 30여 분 만이었다. 폭파 장면을 목격한 미 군사고문단은 50여 대의 차량이 파괴되고, 500~800명의 인명이 희생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수도 서울을 빠져나가는 유일한 통로인 이 다리가 끊어지면서 무고한 인명의 희생에 이어 서울시민 100만 명의 발이 묶였다. 병력과 물자 수송이 막히면서 북한군을 저지하고 있다가 한강 이남으로 후퇴하지 못한 국군 6개 사단이 치명적 타격을 입었고 중화기와 차량 등 다량의 군수품을 적에게 내줘야 했다.

전쟁 발발 뒤 정부의 공식 발표는 6차례에 걸쳐 있었다. 6월 25일 정오에 국방부 담화문이, 6월 26일 새벽 6시에 무초(John Muccio) 미국대사의 입장 발표가, 같은 날 아침 8시에 신성모 국방부 장관의 생방송이 나간 것이다. 이어서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가 6월 27일 밤 10시부터 11시까지 라디오로 3번 반복 방송되었다.

서울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시오. 적은 패주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은 방송 전인 27일 새벽 4시에 이미 서울을 떠나 공식적인 ‘피난민 제1호’였다. 25일 밤 9시에 신성모 국방부 장관과 함께 이승만을 만난 무초 대사는 수도 서울에 최대한 대통령이 머물러야 함을 주장했으나 그는 전선에서 멀어지는 ‘안전’을 선택했다. 그는 이날 새벽에 각료나 국회의장, 대법원장 등에도 알리지 않은 채 경무대를 빠져나와 서울역에서 특별열차를 타고 남쪽으로 달아났다. 대구에 도착했으나 ‘지나치게 멀리 왔다’는 지적에 따라 열차를 돌려 대전에서 내렸다.

 

공식 ‘피난민 1호’는 대통령, 녹음방송으로 시민 기만

6월 25일의 정부 포고문. 군경을 신뢰하고 외출을 삼가라고 적혀 있다.

특별담화는 충남지사 관사에 여장을 푼 이승만이 녹음해 이를 방송으로 송출한 것이었다. 이 방송을 듣고 피난길에 나서려던 서울시민들은 짐을 풀고 도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이들은 서울이 수복되던 9월 28일까지 석 달 동안 꼼짝없이 적 치하를 견뎌야 했고, 부역자라는 의혹을 받으며 검증을 통과해야 했다. (서울에 잔류한 서울시민 105만 명 가운데 56만여 명이 부역자 혐의를 받고 검거되었다) 서울을 버리고 달아난 대통령에게 기만당한 시민들이 짐을 풀고 주저앉고 있던 27일 오후 2시에 국방부 장관 신성모가 한강을 건넜다.

군 지휘라인에 있던 인물들이 끗발 순서대로 한강을 넘은 후 한강 다리가 끊겼다.

  • 임기상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과 주무 각료인 국방부 장관이 100만이 넘는 서울시민을 버려두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아난 것이다.

1950년 6월 28일, 국군 병사들이 서빙고 나루터에서 선박을 이용해 철수하고 있다.
1950년 6월 28일 한국군이 폭파하여 끊어진 한강대교(인도교)

6월 28일 새벽 1시께에 북한군의 공세에 국군의 미아리-홍릉 저지선이 무너지고 북한군 전차가 미아리 고개를 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육군참모총장 채병덕 소장은 “적 전차가 시내에 들어왔다”는 잘못된 보고를 받는다. 그는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한강대교를 폭파하라는 지시를 내린 후 서둘러 새벽 2시에 한강을 건넜다.

6월 26일에 이미 육군본부 회의에서 한강대교 폭파가 결정되었다. 공병들은 대략 2800~3600파운드의 폭발물을 교량에 설치하고 폭파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육참총장이 한강을 넘은 지 28분 후, 다리에 설치된 폭발물이 터졌다.

그러나 폭약은 2개 다리에서 폭발하지 않았다. 한강 인도교와 경인 철교 하행선, 경부 복선 철교 상행선은 완전히 끊겼지만, 경인 철교 상행선과 그 옆에 있던 경부 복선 철교 하행선은 온전하게 남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북한군은 사흘 후 이 다리로 한강을 넘었다.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한강대교를 폭파하겠다는 계획 자체가 잘못된 판단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고 없이 막대한 인명 피해를 감수하고 폭파할 만큼 상황이 긴박하지는 않았다. 몇 시간이라도 다리 폭파를 늦추었다면 한강 이북의 국군 전력(중화기, 중장비)을 한강 이남으로 체계적으로 후퇴시켜 방어선을 짤 수 있었을 것이었다.

김홍일 장군이 6월 29일에 간신히 한강 이남에 한강 방어선을 형성하여 7월 3일까지 북한군을 한강 일대에서 저지할 수 있었던 것은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이 사흘 동안 머문 덕분이었다. 나룻배로 강을 건넌 철수 병력을 모아 편성한 방어선으로 그 정도를 막을 수 있었던 것도 불행 중 다행이었다.

서울 시내로 들어오고 있는 인민군 탱크. 잘못된 정보로 한강 다리는 서둘러 폭파되었다. ⓒ NARA

세 번째로 서울이 공산군의 손에 넘어갈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수천 명의 서울 거주자들이 널빤지로 한강을 건너고 있다.(1951.4.29.)

그러나 북한군 탱크가 한강대교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7시간 30분 뒤였다. 즉 한강대교가 폭파되는 시점에 북한군은 여전히 서울 북쪽 외곽에 있었다. 이 한강교 폭파는 그나마 유지되던 한국군의 한강 이북 지휘 체계를 완전히 무너뜨렸다고 한다.

폭파 직후인 7월 초, 주한 미 군사고문단의 조사 결과, 전쟁 발발 당시 9만 8천 명이었던 국군이 5만 4천 명으로 줄었다고 하는데 이게 믿어지는가. 전쟁이 터지고 1주일 사이에 4만 4천 명에 달하는 병사를 잃었다는 얘기다.

시민들이 무너뜨린 탑골공원의 이승만 동상.(1960.4.26.)

또 미 극동사령부의 전방지휘소 처치 준장은 6월 29일 전선을 시찰하러 수원에 온 맥아더 장군에게 한국군 병력이 2만 5천 명에 불과하다고 보고했다. 전쟁이 시작된 지 나흘 만에 군 병력이 1/4로 줄었다는 것인데 이 역시 믿어지는가.

일부 부정확한 사실이 있다 하더라도 한강 다리 폭파와 지휘 체계 붕괴로 군 병력을 엄청나게 잃었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서둘러 피난을 떠나면서 ‘수도 서울을 사수하겠다’고 국민을 기만한 정부가 상황에 떠밀려 수행한 전쟁의 전개는 지리멸렬일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 이승만은 한강교 폭파로 여론이 들끓자 폭파 실무 책임자인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웠다. 당시의 지휘 체계로 보아 폭파 책임은 대통령 이승만-국방부 장관 신성모-국방부 차관 장경근-참모총장 채병덕-참모부장 김백일에게 귀속되어야 했지만, 말단 실무 책임자에게 넘겨진 것이었다.

폭파 명령을 내렸던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은 개전 한 달 뒤인 7월 27일 경남 하동에서 전사했고, 최창식은 1950년 9월 부산에서 열린 군법회의에서 총살형을 선고받고 처형당했다.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죄명은 ‘적전비행죄’.

군인으로서 명령에 따른 죄밖에 없는 영관급 장교에게 물은 이 무책임한 문책은 14년 후에 바로잡힌다. 1964년 11월, 최창식의 부인이 신청한 재심에서 법원이 고인의 무죄를 확정하면서 최창식은 사후 복권된 것이다.

 

전쟁 중에도 계속된 이승만의 패착

남산 자유총연맹광장에 다시 세워진 이승만 동상. 2011년 8월 25일 자유총연맹이 세웠다. 그는 복권한 것인가.

한강 다리를 끊고 도주한 대통령 이승만은 7월 14일 UN군 사령관 맥아더에게 편지를 써 ‘대신 군을 지휘해’ 달라고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외교적 수사로 점철되어 있지만, 이 편지의 내용은 매우 굴욕적이었다.

그것은 전 주한 미군 사령관(1973~1976) 리처드 스틸웰(Richard Stilwell)의 말처럼 “지구상에서 가장 놀라운 형태로 주권을 양보한 사례(the most remarkable concession of sovereignty in the entire world)”였다.

수도와 시민을 버리고 떠났던 무능하고 비겁한 지도자 이승만의 패착은 전쟁 중에도 계속되었다. 고위 장교들의 부정과 착복으로 9만~12만에 이르는 국민방위군이 희생된 ‘국민방위군 사건’(1951)에 이어 거창과 산청·함양 등 각지에서 민간인 학살(1951)이 자행된 것이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일은 소홀히 하면서도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에 집착하고 있었다. 재선을 확실히 하고 독재정권의 기반을 굳히기 위해 전쟁 중 임시 수도인 부산에서 폭력을 동원하여 국회의원을 연행·구속한 ‘부산 정치파동’(1952)도 그중 하나였다.

그런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오늘날 수구·보수 세력들의 구애는 눈물겹게 이어지고 있다. 4·19로 파괴된 동상이 새로 세워지는 등 이른바 ‘국부’로 ‘건국의 아버지’로 그는 다시 태어나고 있다. 장기 독재로 민주주의를 파괴한 역사적 과오를 지우고 미화하려는 이들의 역사 왜곡은 이른바 ‘건국절’ 파동 등으로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원문: 이 풍진 세상에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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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휴전 30년이 지나서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가 방영되다 https://ppss.kr/archives/266508 Fri, 05 Jul 2024 02:41:59 +0000 http://3.36.87.144/?p=266508 1983년 6월 30일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453시간 45분 동안 방송되어 이산가족 상봉을 도왔다.

1983년 오늘(6월 30일), 한국방송공사(KBS)는 1TV를 통해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를 방송하기 시작했다. 이 특별생방송은 한국전쟁 33주년과 휴전협정(1953.7.27.) 30주년을 즈음하여 일제 식민지 지배와 한국전쟁(1950)으로 인한 남북분단이 낳은, 약 1천만 명에 이르는 이산가족을 찾기 위해 기획한 특별 프로그램이었다.

KBS는 본래 라디오에서 10여 년 동안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해왔던 터였다. 그래서 하루 동안 10가족 정도가 만나게 될 것으로 예상했었다. 그러나 예상을 뒤엎고 시민들이 끊임없이 밀어닥쳤다. 뜻밖의 열기에 KBS는 닷새간 정규방송을 취소하고 이산가족 찾기 릴레이 생방송을 이어갔다.

 

상봉률 19%의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

이산가족 찾기 신청은 모두 100,952건이었다. 그중 53,536건이 방송에 소개되어 10,189건의 이산가족이 상봉했다. 성공률이 19.03%였다. 이는 이전의 신문과 라디오를 통한 이산가족 찾기 운동의 미미한 실적에 비하면 대단한 성과였다.

이산가족들의 폭발적인 반응에 고무된 KBS는 전담 방송 인원 1,641명을 투입했고 9개 지역 방송국을 동시에 연결하는 다원 생방송을 중계하는 등 모든 방송 역량을 투입했다. 자원봉사에 참여한 전국의 시민·학생들과 정부의 종합적인 지원(만남의 광장, 간이우체국, 이동 파출소, 법률상담소, 미아보호소 설치 등)도 큰 도움이 되었다.

1983년 6월 30일 밤 10시 15분에 전파를 타기 시작한 이 생방송은 1983년 11월 14일 새벽 4시까지 138일에 걸쳐 방영되어, 총 453시간 45분으로 마감되었다. 단일 주제 생방송으로 기록을 달성한 이 프로그램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어느덧 40년으로 치닫고 있었던 분단 상황과 그에 따른 1천만 이산가족의 존재가 있었다.

방송이 시작되자, 이산가족들의 사연에 온 국민이 함께 눈물을 흘렸다. ⓒ KBS 아카이브, 이하 같음.

가족을 만나지 못했던가, 할머니의 지친 표정과 좌절은 30년 시간을 넘어 내게 아직도 아프게 다가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민족사로 다루어져야 할 이산의 비극을 개인사로 방치했던 정부의 직무유기가 있었다. 일제 식민 지배에서 해방은 38도선 남북에 각각 다른 외국군이 진주하면서 이루어졌고, 이는 곧 남북이 이념으로 대립 갈등하면서 한국전쟁으로 이어졌다.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은 수백, 수천만의 인명 피해와 함께 1천만이 넘는 이산가족을 낳았다. 분단으로 인한 이산가족은 남북에서 생사를 모른 채 살아가야 했다. 그러나 이산가족은 막힌 휴전선 남북에만 있지 않았다.

 

이산가족 찾기는 ‘개인 문제’로 방치되었다

전쟁의 소용돌이와 피난길에서, 전후의 혼란과 절대 빈곤 속에서 각자도생해야 했던 무지렁이 백성들에게도 말 못 할 이산의 아픔이 있었다. 부모와 자식이, 형제와 자매가 헤어져 서로의 생사도 모르고 살아야 했던 이들 남한 내 이산가족들에게 이산가족 찾기는 개인에게 맡겨져 있었다.

남북 당국이 이산가족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53년 12월 11일부터 1954년 3월 1일까지 ‘휴전협정’ 제3조 제59항에 근거하여 설치된 ‘실향 민간 귀향 협조 위원회’가 남북이 이산가족 문제를 인도적 차원에서 해결키로 한 이후 첫 만남이었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1971년 8월 20일 남북적십자 간 판문점 중립국 감독위 회의실에서 사상 첫 회담을 개최한 이래 20여 차례의 예비회담과 8차례의 본 회담을 통해 이산가족 고향 방문 등을 조율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남한의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어떤 정책도 펴고 있지 않았다.

고작 라디오를 통해서 지엽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던 이산가족 찾기를 통해서 소수의 가족이 가끔 상봉에 성공하는 정도였다. 정부도 남한 내 이산가족 문제를 전 국민적 문제로 바라보지 않았고, 이산가족들 역시 그것을 자신의 개인적 문제로 끌어안고 있었다.

무능한 정부는 직무 태만을 저지르고 있었고, 착한 국민은 분단으로 헤어진 혈육을 찾는 일이 국가의 책임이란 걸 생각지도 못했다. 북에 두고 온 가족들이야 휴전선으로 막혀 있으니 어쩔 수 없다 쳐도 이남에서 헤어졌던 가족을 찾는 일을 왜 국가가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가족을 만나지 못했던가, 할머니의 지친 표정과 좌절은 30년 시간을 넘어 내게 아직도 아프게 다가온다.

방송이 시작되자, 온 나라의 국민이 공황에 빠졌다. 영상으로 전달되는 이산가족들의 곡절 많은 사연에 사람들은 함께 눈물을 흘렸고, 상봉에 성공한 이산가족들이 ‘맞다, 맞아!’를 외칠 때 손뼉을 치면서 함께 기뻐했다.

혈육들이 눈물로 재회하고 얼싸안고 울부짖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사람들은 분단이 우리의 삶에 드리운 깊고 어두운 그림자를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수십 년 동안 헤어져 살던 이산가족들의 상봉을 통해 분단의 아픔이 치유되는 듯한 황홀한 감정의 고양을 체험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혈육의 정, 민족적 동질성이 분단을 극복할 수 있는 출발점이라는 것도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함께 눈물 흘리며 분단 아픔을 나누다

넉 달 보름여에 걸친 최장 시간의 생방송이 이루어졌지만, 상봉에 성공한 사람은 열에 둘뿐이었다. 여전히 다수 이산가족이 이산의 고통을 치유하지 못했고, 분단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 생방송은 이산가족 상봉의 절실한 필요성을 환기하면서 이태 후 남북 이산가족 최초 상봉(1985.9.)의 촉매 역할을 했다. 냉전 체제의 긴장 완화에도 이바지했다.

이 생방송 소식은 온 세계에 타전되었다. 더는 지구상에 이와 같은 비극이 생겨나서는 안 된다는 평화의 메시지가 되어 보편적 인류애를 고취했다. KBS의 이 프로그램이 제6차 세계 언론인 대회에서 ‘1983년의 가장 인도적인 프로그램’으로 선정되고 세계평화 기여자에게 주는 골드머큐리 국제상(1984)을 받은 것은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은 결과였다.

KBS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기록물. 비디오테이프와 사진 등 2만 522건이다.

‘KBS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기록물’은 2015년 10월 ‘한국의 유교책판’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에 등재됐다. 이 기록물은 KBS가 1983년 453시간 45분 동안 생방송 한 남북한 이산가족 찾기 등을 담은 비디오테이프 463개, 담당 프로듀서의 업무수첩, 이산가족이 작성한 신청서, 일일 방송 진행표, 큐시트, 기념 음반, 사진 등 자료 2만 522건 등이다.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그러나 1세대에겐 시간이 별로 없다

<KBS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의 타이틀곡은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이었고, 이산가족 상봉 시 배경 음악은 패티 김의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였다. 눈물을 훔치면서 그 애잔한 가락을 듣던 기억이 어제 같은데 어느덧 세월은 30년이 훌쩍 흘렀다.

1985년 9월, 서울과 평양에서 최초로 이산가족 고향방문단과 예술 공연 교환 행사 개최된 이래, 남북의 이산가족 상봉은 2015년 10월까지 20차례, 이산가족 화상 상봉은 2005년 8월 15일 처음 이루어진 뒤 2007년 11월까지 7차례에 걸쳐 이어졌다.

남북 정상의 합의를 기반으로 한 6·15선언(2000)과 10·4선언(2007)으로 남북 간 화해와 평화 통일의 실마리가 열리면서 이산가족 문제에 대한 기대를 높였다. 그러나 2008년부터 이어진 보수 정부 9년은 그런 성과를 깡그리 무너뜨려 버렸다.

‘KBS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아카이브에는 이산가족 상봉 관련 기록물이 소개되고 있다. 특별생방송이 진행되던 시기의 자료, 특히 그때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살려 주는 사진 자료들이 주는 감동은 30년 세월을 넘어서 절절하게 다가온다.

현재까지 생존해 있는 이산가족 1세대는 80%가 70세 이상 노인으로, 80세 이상 고령자가 절반에 이른다고 한다. 앞으로 20년 후면 이들은 대부분 사망할 것으로 보이니 이들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다. 이들이 죽기 전에 혈육을 다시 만날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될까를 생각하면서 이산가족 찾기 관련 사진을 곰곰 들여다본다.

원문: 이 풍진 세상에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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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 광주의 진실”은 어떻게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나 https://ppss.kr/archives/266132 Wed, 12 Jun 2024 05:11:37 +0000 http://3.36.87.144/?p=266132 시  「아아 광주여!…」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그리고 대중가요 <바위섬>

광주민중항쟁의 진실은 마치 지금 전하는 흑백사진처럼 빛바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여전히 주요 진상이 밝혀지지 않아서다.

1980년 5월에 나는 대학에 복학하여 1학년이었다. 늦깎이로 대학에 입학했더니 바로 소집 영장(입영통지서)이 나와 입대해 33개월간 복무한 나는 1980년 2월에 만기 전역했다. 이른바 ‘서울의 봄’이라 불리던 시절이었지만, 나는 당시 집에서 받던 조선일보를 읽으면서 복학생들과 함께 정국을 멀찌감치서 기웃거리고 있었다.

 

내가 겪은 1980년 5월

20대 초반을 군대에서 짬밥을 먹다가 돌아와 다섯 살 아래의 후배들과 같이 공부하게 된 나는 무엇인가 위태위태한 일촉즉발의 위기가 내연하고 있는 듯한 학교 분위기가 마뜩잖았다. 단과대학 게시판에 날마다 울긋불긋하게 매직으로 갈겨쓴 대자보가 전해주는 낯선 소식들과 노천극장에서 시작된 집회의 함성 앞에 얼마간 주눅이 들기도 했다.

대학 운동권은 이미 지난해 12·12 쿠데타로 군권을 장악한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던 듯했다. 정작 제대 말년에 나는 10·26을 겪었고, 폭동진압 훈련에 동원되었으며, 마지막 휴가 중이던 12·12 당시에 우리 부대가 진압군으로 출동했다가 회군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정보로 정국을 살펴볼 만한 안목을 갖추지도, 정치적으로 각성되지도 못한 맹탕 어리보기에 불과했다.

대학에 돌아온 두 달 후에 광주항쟁이 일어났다. 5월에 비상계엄이 시행되면서 탱크를 앞세우고 진주한 해병대 병력이 학교를 닫아 버렸다. 시골에서 서둘러 달려온 학교, 해병대 병사들이 막고 있는 교문 앞에서 황당하게 발길을 돌리던 그날을 어제처럼 기억한다.

1학기를 집에서 보낸 학생들은 9월이 되어서야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학교에는 사복 경찰이 잠행 중이었고, 학생들은 모여서 낮은 목소리로 은밀한 정보를 주고받곤 했다. 신군부의 공포정치가 이어지면서 더는 학교에 대자보도, 집회·시위도 없는 ‘태평세월’이 수년간 계속되었고, 나는 1984년 2월에 졸업하고 3월에 경주지방의 한 여학교에서 초임 생활을 시작했다.

광주의 오월은 분명히 그 안에 엄청난 진실이 폭약처럼 감추어져 있다는 걸 알면서 정작 그 내용에는 어떤 접근도 할 수 없는 비밀의 문 저편에 굳게 닫혀 있었다. 대학 졸업반 시절에 수없이 복사되는 과정에서 사실상 해득이 불가능한 비디오 영상을 보긴 했지만, 그건 오히려 진실을 더 꼭꼭 숨기는 것과도 같았다.

광주의 진실을 알린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왼쪽이 내 서가의 1985년판. 오른쪽은 2017년 개정판.

 

항쟁을 기록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도서출판풀빛’에서 황석영(실제 저자는 이재의·전용호, 황석영은 이름만 빌려주었다)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펴낸 것은 1985년 5월이었다. 인쇄 도중 1만 권을 통째로 압수했지만, 나병식 대표가 미리 인쇄소를 한 군데 더 구해놓은 덕분에 거기서 급하게 찍은 1만 권이 시중에 깔렸다. 군부 정권은 그것마저 수거하려 애썼지만, 광주의 진실은 복사본을 통해 빠른 속도로 세상에 퍼져나갔다.

 2017년 개정증보판 출판기념회에서 황석영(오른쪽), 이재의, 전용호 작가(왼쪽) ⓒ 광주일보

책을 어디서 샀는지는 기억하지 못하겠으나, 정권의 압수 전에 내가 그 책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구속을 각오하고 책을 썼던 저자들과 기꺼이 이름을 빌려주면서, 자신이 원저자라는 알리바이를 만들고자 원고를 한 장 한 장 필사한 황석영 작가가 없었다면 광주의 진실이 드러나는 건 훨씬 더디어졌을 것이다. 그것은 출판사 대표가 구속되고 황석영 작가가 사실상 국외로 추방되는 비용을 치르면서 확보한 진실이었다.

우리가 풍문처럼 들었던 5·18 이야기들은 뒷날 모두 진실로 밝혀졌지만, 진실을 직면하면서 인지 부조화를 겪은 이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었다. 나는 가끔 아이들에게 모호한 언술로 그 진실을 은근히 암시하곤 했는데, 아이들은 잔뜩 긴장하면서도 그것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듯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5공 청문회 등을 통하여 12·12 쿠데타와 광주항쟁의 모습이 조금씩 밝혀졌다. 역사가 소수의 권력에 의해 농단 되고 비화의 형식으로 후대에 공개되는 사회는 불행할 수밖에 없다. 적어도 1980년 전후사에서 국민은 역사에서 완전히 소외되어 있었다. 그런 비사를 통해 나는 오랫동안 맞추지 못한 퍼즐 조각을 제자리에 갖다 놓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전남매일신문에 실린 김준태의 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김준태 시인이 1980년 6월 2일 전남매일신문(현 광주일보의 전신)에 발표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가 광주항쟁을 다룬 첫 번째 문학작품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것도 뒷날의 일이다. 이 109행에 이르는 장시는 군부의 검열로 고작 1/4 남짓인 33행만이 실렸다. 그러나 시인은 보안대로 끌려가 고초를 겪었고 근무하던 학교에서 해직되었다.

 

김원중의 대중가요 ‘바위섬’

1985년, 교직 2년 차에 나는 가르치던 아이들과 함께 진급하여 2학년 담임을 맡았고 아이들과 설악산 수학여행을 떠났다. 아이들은 3박 4일 동안 이동할 때마다 대중가요를 합창했는데, 당시 최고의 인기 가요가 김원중이 부른 ‘바위섬’이었다.

아이들이 그 노래를 얼마나 불러댔는지 이내 내가 그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있게 될 정도였다. 나는 무심히 노래를 흥얼거리고 말았지만, 그 노래가 항쟁 때 고립된 광주를 바위섬에 빗댄 노래였다는 사실은 훨씬 뒷날에야 알게 되었다.

광주에서 처음으로 만든 지역 음반과 바위섬의 가수 김원중의 당시 모습

김원중은 1984년 광주지역 가수들이 지역에서 낸 옴니버스 음반 ‘예향의 젊은 선율’에 이 곡으로 참여했다. <바위섬>을 만든 배창희는 전남 고흥 소록도에 갔다가 고립된 섬의 모습이 마치 5·18 당시 광주 같다고 느꼈고, 이에 영감을 얻어 노랫말을 쓰고 곡을 붙인 것이었다. 음반은 운 좋게도 지역의 라디오 전파를 탔고, 특히 <바위섬>은 입소문이 나면서 서울까지 퍼지면서 김원중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1985년 1월, 김원중은 서울의 라디오방송에 출연하면서 공식적인 가수 활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서슬 푸른 전두환 정권에서 5·18 광주는 입에 담을 수 없는 금기어여서 그는 방송에서 ‘바위섬’의 의미를 말할 수 없었다. 뒷날 방송에서 그 뜻을 조심스럽게 밝혔지만, 다행히 그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 뒤 <바위섬>은 가요 프로그램에서 2위, 라디오 순위에서 1위를 기록하며, 1985년 KBS의 ‘좋은 가사’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광주의 아픔을 담은 지역 대표곡 ‘바위섬’은 대중가요로 거의 국민가요 수준의 히트곡이 된 것이다.

김원중은 1987년 견우와 직녀 설화를 빌려 통일을 간절히 염원하는 문병란(1935~2015)의 시에 박문옥이 곡을 붙여 만든 <직녀에게>를 발표했다. 그러나 이 노래가 방송금지처분을 받으면서 한동안 가요계를 떠났던 김원중은 1989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추모하는 길거리 공연을 시작한 이후 민중가수로 지금껏 치열하게 살고 있다.

국립 5‧18 민주묘지의 희생자 묘역

항쟁 43년을 지나면서 광주항쟁은 보편적인 민주화 투쟁으로 인식되면서, 광주는 지역성에 갇히지 않고 전국적 보편성을 얻었다. 5‧18 민주화운동 기록물은 유네스코의 인권 분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됨으로서 광주항쟁은 자랑스럽고 숭고한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유산이 되었다.

 

자랑스러운 민주주의의 유산, 그러나 넘어야 할 문제들

그러나 아직도 온존한 영남인들의 반호남 지역감정은 상식과 논리로 설명하기 힘들다. 물론 일부 세대에서 두드러진 현상이지만, 광주의 진실이 하나씩 밝혀지는데도 영남인들의 호남인 기피와 혐오는 가시지 않는다. 가해와 피해의 도착된 기억들 위에 그것은 일종의 자기방어의 논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일부 극우 인사들의 광주항쟁에 대한 폄훼와 왜곡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것은 그들이 그러한 사람들의 정서에 숨을 수 있어서다. 망국적 지역감정은 통합의 정치를 통해 해소 극복되어야 하지만, 현 정부의 지역 편향은 퇴행적이고, 최근 집권당 최고위원의 망언은 그런 상황을 웅변하고 있다.

주변엔 아직도 광주항쟁을 ‘광주 사태’라고 일컫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단순히 말버릇이 아니라, 그건 인식과 관점의 문제다. 언제쯤 영남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을 지역감정이나 기피와 혐오의 정서가 아니라, 보편적 인권과 민주주의의 문제로 바라보게 될 수 있을까.

 

국제사회에 광주항쟁을 알린 5·18의 기록자들

그간 4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면서, 국제사회에 광주항쟁을 알린 외국인 5·18의 기록자들도 세상을 떠났다. 독일 제1공영방송(ARD)의 위르겐 힌츠페터(1937~2016)와 미국 AP통신의 테리 앤드슨(1947~2024) 기자가 바로 그들이다.

위르겐 힌츠페터

5·18 민주화운동이 진행 중이던 1980년 5월 20일 오후, 독일 제1공영방송(ARD) 북부독일방송 특파원 힌츠페터는 전라남도 광주시에 잠입했다. 그는 취재 허가를 받지 않고 외국인 전용 호텔 택시 기사 김사복과 함께 당시 최고급 세단이었던 검정 새한 레코드 로얄 택시를 타고 광주로 내려갔다. (※ 이 상황은 영화 <택시 운전사>(2017)라는 영화로 제작되어 일반에 개봉되었다.)

검문소에서 군인들에게 제지당한 힌츠페터 일행은 5~10km를 우회하여 작은 마을과 젊은이들을 만나게 되어 청년들의 트럭에 올라타고 시내로 들어간다. 그가 목격하고 기록한 광주의 참상은 검문소에서 군인들에게 제지당했다. 힌츠페터 일행은 5~10km를 우회하여 마침내 작은 마을과 젊은이들을 만나게 되었고, 힌츠페터는 청년들이 탄 트럭에 올라타고 시내로 들어간다.

그 결과 광주의 참상이 그의 컬러 필름에 고스란히 담겨 현재까지 보존되었다. 그의 필름은 도청 앞 분수대에서의 규탄 대회 등을 제외하면 생각보다 평온했던 시민들의 일상과 함께 약탈이나 물자 부족 같은 것 없이 음식이 가득한 시장 상황, 계엄군 측과 협상하기 위해 애쓰는 수습위원회 위원들 등을 담고 있다.

힌츠페터의 취재와 영상자료는 5.18 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날조하려는 시도를 저지하고 오늘날의 평가를 정립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테리 앤더슨

AP통신 특파원 테리 앤더슨은 1980년 5월 22~27일 광주에서 현장 취재로 신군부의 발표와는 다른 항쟁의 실상을 세계에 알렸다. 광주에 도착한 그는 사망자가 몇 명에 불과하다는 계엄군의 주장을 외신 특파원들과 함께 직접 광주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망자 숫자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검증했다.

그는 AP통신 도쿄지국을 통해 타전한 기사를 통해 계엄군은 사망자가 셋뿐이라지만 시민군 쪽은 261명이 숨졌다고 했다며, 이렇게 많은 시체를 본 것은 처음이라고 전했다. 1996년 국내 언론 인터뷰를 통하여 앤더슨은 자신이 확인한 항쟁의 진실을 증언했다.

당시 나의 주된 업무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확인하는 것이라 종일 광주를 돌아다니며 주검 숫자를 셌다. 고등학교들, 체육관들, 교회들에서 하루에 179구의 주검을 확인하기도 했다.

2020년 앤더슨은 광주항쟁 당시 미국으로 보낸 원본 기사, AP 도쿄지국에서 보낸 원고로 추정되는 기사 등을 광주광역시에 기증했다. 기사에서 그는 “광주시민들은 기자들과 담화에서 시위는 처음에 평화롭게 시작됐지만, 공수부대들이 18~19일 시위자들을 무자비하게 소총과 총검으로 진압하면서 격렬한 저항으로 변했다고 말했다”고 썼다.

또 그는 신군부의 왜곡된 발표만을 전달하는 국내 언론과 달리 광주시민들의 목소리를 전했다.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와 관계자들은 공산주의자를 지칭하는 말인 불순분자들이 시위를 부추겼다고 밝혔다. 그러나 불순분자가 개입된 것은 확인되지 않았다.

앤더슨은 광주 상황을 기록한 자신의 원고 등을 국내 언론 관계자를 통해 광주시 쪽에 기증하기도 했다.

원문: 이 풍진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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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의(布衣)의 선비 황현, 망국의 책임을 대신하여 자정하다 https://ppss.kr/archives/264841 Thu, 29 Feb 2024 02:40:58 +0000 http://3.36.87.144/?p=264841 1910년 오늘, 전라남도 구례군 광의면 월곡마을 대월헌에서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이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것은 열이틀 전(8월 29일)에 한일합병조약이 발효됨으로써 명운을 다한 조선왕조에 대한 한 선비의 마지막 의리였다.

칠언절구의 우국시 몇 수와 유서로 매천이 스스로 목숨을 마감하기 전에 성찰한 것은 지식인의 삶이었다.

매천 황현이 쓴 역시 기록물 <오하기문(梧下記聞)>의 원문. ⓒ 역사비평사

 

매천, 죽음 앞에서 지식인의 삶을 성찰하다

난리 통에 어느새 머리만 희어졌구나.
몇 번 목숨을 버리려 하였건만 그러질 못하였네.
하지만 오늘만은 진정 어쩔 수가 없으니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만이 아득한 하늘을 비추는구나.

요사한 기운 뒤덮여 천제성(天帝星)도 자리를 옮기니
구중궁궐 침침해라, 낮 누수(漏水) 소리만 길구나.
상감 조서(詔書) 이제부턴 다시 없을 테지.
아름다운 한 장 글에 눈물만 하염없구나.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니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어라.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날 생각하니,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어렵기도 하구나.

일찍이 조정을 버틸만한 하찮은 공도 없었으니
그저 내 마음 차마 말 수 없어 죽을 뿐 충성하려는 건 아니라
기껏 겨우 윤곡(尹穀)을 뒤따름에 그칠 뿐
당시 진동(陳東)의 뒤를 밟지 못함이 부끄러워라.

  • 절명시 4수 전문

※ 윤곡·진동 : 송나라 선비. 진동은 적을 탄핵하다가 참형당했고, 윤곡은 몽고병의 침입 때 자결하였다.

매천 황현의 절명시

나는 조정에 벼슬하지 않았으므로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허나 나라가 오백 년간 사대부를 길렀으니, 이제 망국의 날을 맞아 죽는 선비 한 명이 없다면 그 또한 애통한 노릇 아니겠는가?

나는 위로 황천에서 받은 올바른 마음씨를 저버린 적이 없고 아래로는 평생 읽던 좋은 글을 저버리지 아니하려 한다. 길이 잠들려 하니 통쾌하지 아니한가. 너희들은 내가 죽는 것을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라.

  • 자결에 앞서 남긴 ‘유서’ 중에서

나라를 잃고 통분하여 자결을 택했지만, 매천은 단순히 봉건적인 충(忠) 관념을 지키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글을 아는 사람’으로서, 즉 선비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한 것이었다. 선비의 글(붓)로 일제의 총칼에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매천이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죽음뿐이었다.

매천은 전라남도 광양 출신이다. 본관은 장수, 자는 운경이다. 청년 시절에 과거에 응시하고자 상경하여 당시 문명이 높던 추금 강위(1820~1884), 영재 이건창(1852~1898), 창강 김택영(1850~1927) 등과 깊이 교류하였다. 뒷날 매천은 이들과 함께 한말 ‘한문학 사대가’로 불리게 된다.

1883년 과거의 초시에서 첫째로 뽑혔으나 시험관은 그가 한미한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둘째로 내려놓았다. 나라의 부정부패를 절감한 매천은 회시·전시에 응시하지 않고 귀향하였다. 5년 뒤에 부친의 명을 어기지 못해 생원회시에 응시해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나라가 기우는데도 이권만 다투는 썩은 정·관계와 결별하고 하향하였다.

최근 간행된 오하기문 번역서

매천은 구례로 솔가하여 만수동에 구안실(苟安室)을 지어 독서와 시문, 역사와 경세학 연구에 전념했다. 마흔여덟에 만수동에서 월곡(구례군 광의면 수월리)으로 이사하여 대월헌에서 <매천야록(梅泉野錄)>과 <오하기문(梧下記聞)> 등을 집필하면서 말년을 보냈다.

 

‘망국의 책임’, 한 포의가 대신해 지다

<매천야록>은 1864년부터 1910년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쓴 기록물이고 <오하기문>은 19세기 당쟁과 세도정치의 폐해, 동학 농민전쟁, 일제 침략과 항일 의병 활동 등 한 시대를 정밀하게 기록하고 있는 귀중한 사료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자 통분을 금하지 못하고, 당시 중국에 있는 김택영과 함께 국권 회복 운동을 하기 위해 망명을 시도했지만 실패하였다. 그 5년 뒤에 일제가 강제로 조선을 병합하자 매천은 더덕술에 아편을 타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었다. 향년 56세.

매천은 나라가 망하면 백성은 마땅히 죽어야 옳다고 여겼다. 사대부들이 염치를 중히 여기지 않고 직분을 다하지 못하여 종사를 망쳐 놓고도 자책할 줄 모른다고 통탄하였다. 그는 명예를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린 강화학파(江華學派)의 한 사람으로 그는 기꺼이 죽었다.

길이 잠들려 하니 통쾌하지 아니한가.

황현의 부음을 들은 경재(耕齋) 이건승은 다음 시로써 매천의 죽음을 애도했다.

의를 이룸이 예로부터 전공보다 높거니와
이 시야말로 겨레의 충성심을 깨우쳤다네.
과연 벌족들은 너무도 잠잠한데
한 포의(布衣) 마침내 해동(海東) 이름 드높였네.

조선왕조가 아니 대한제국이 왕의 나라라면 마땅히 망국의 책임과 죄업은 임금과 그 일가가 져야 한다. 그러나 이씨 성의 왕족 가운데 스스로 책임을 다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할 의리’가 없는 매천이 죽음으로써 그 부끄러움을 대신했을 뿐이다.

경재의 시에서 ‘벌족(閥族)은 잠잠한데’ 오히려 ‘한 포의(벼슬하지 않은 선비)’가 ‘해동 이름 드높였’다는 것은 그것을 이른 것이었다. 그렇다. 을사년(1905) 이래 경술년을 지나면서 스스로 왕토에 사는 신민의 도리를 다한 이들은 선비 예순여섯 분이었다. (※ 관련 기사: 「장엄하여라, 우국의 황혼이여」)

매천 사후 1911년에 벗 창강 김택영이 상해에서 그의 시집 <매천집>을 출판 배포하였다. 1955년에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매천야록>을 간행하였고 같은 해 구례군 월곡마을에 사당 매천사(梅泉祠)가 세워졌다. 1962년, 사후 52년 만에 매천에게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관련 기사: 「매천사, 망국의 치욕에 선비는 스스로 목숨을 거두었다」)

1955년 전남 구례군 광의면 수월리 월곡마을에 매천의 사당 매천사가 세워졌다.

망국의 분노와 치욕을 행동으로 관철할 만한 투쟁적인 면모와 사상을 지니지 못했던 매천은 대신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의지와 지식인의 책임을 다했다.

그것은 선비 시인으로서 매천의 한계겠지만 파편화된 개인으로 살면서 시민의 책무도 다하지 못하는 오늘의 소시민에게는 그의 담담한 목소리도 천둥소리나 진배없다.

원문: 이 풍진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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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하 대통령, 8개월 10일만에 ‘허수아비 옷’을 벗다 https://ppss.kr/archives/264839 Thu, 21 Dec 2023 02:51:48 +0000 http://3.36.87.144/?p=264839 1980년 8월 16일, 최규하 대통령직 사임
1980년 8월 18일, 청와대에 떠나면서 직원들과 작별 인사를 하는 최규하 대통령 내외. 그의 재임 기간은 8개월 10일이었다.

1980년 8월 18일, 오전 10시 제10대 대통령 최규하(1919~2006)는 사임 성명을 발표하고 재임 8개월 10일 만에 권좌에서 물러났다. 그는 사임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지난 봄 학생들의 소요와 광주사태에 대해 국정의 최고책임자로서 정치 도의상의 책임을 통감해 왔고, 역사적 전환기에 임기 전이라도 사임함으로써 평화적 정권 이양의 선례를 남겨 정치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것이다.

 

최규하, 허수아비 옷을 벗다

정작 쿠데타를 감행하여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학생들의 ‘소요’를 일으키고 광주 학살을 자행하여 집권 기반을 다진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은 손을 털고 침묵하고 있었다. 그런데 애먼 허수아비 권력이 책임을 ‘통감’하고 ‘평화적 정권 이양의 선례’를 위해 사임한다는 것이었으니, 코미디도 그런 코미디가 없었다.

형식적으로는 자진 사임이었지만 그가 신군부 세력으로부터 밀려난 것이라는 걸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이미 박정희 피살 뒤,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주도하는 신군부 세력이 12·12 군사반란과 5·17 조치 등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신군부 세력이 국보위를 설치해 대통령의 권한 행사를 무력화시키자 최규하는 헌법 개정 작업을 끝내지 못하고 중도에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최규하 (1919~2006)

1979년 10월 26일, 전임 대통령 박정희가 피살된 뒤, 당시 국무총리였던 최규하는 헌법 제48조에 따라 대통령 권한대행에 취임했다. 11월 6일, 최규하는 유신헌법에 따라 새 대통령을 선출하고 새 대통령이 이른 시일 내에 헌법을 개정한다는 ‘시국에 관한 담화’를 발표하였다.

최규하의 담화에 대해 재야에서는 유신헌법에 따른 대통령선거를 용납할 수 없다면서 민주헌법을 3개월 이내에 제정하고 이른 시일 내에 선거를 시행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최규하는 이에 응답하지 않았고 이에 반발한 재야와 학생들의 시위가 이어지자 정부는 경찰력으로 대응했다.

당시 헌법 때문에 야권의 입후보는 사실상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최규하는 무소속으로 단독 출마하였다. 12월 6일 장충체육관에서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그는 96.7%(2,465표)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종신 집권을 꿈꾼 박정희에겐 마침맞은 선거제도였지만, 허수아비 권력엔 득표율조차 희극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대통령선거가 치러지고 꼭 엿새 후에 전두환 일당은 12·12 쿠데타를 감행하여 권력을 장악한다. 이듬해까지 비등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던 민주화 열망, ‘서울의 봄’은 신군부의 군홧발에 짓밟히면서 막을 내린다. 5·18 광주 학살은 바로 그러한 비극의 정점이었다.

 

짓밟힌 ‘서울의 봄’

필경 대통령에 당선되었어도 최규하는 자신의 권력을 믿을 수 없었을 것이었다. 임기(1984년 12월 26일까지)를 채우는 것 역시 언감생심이었다. 6년 임기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8개월 만에 사임함으로써 최규하는 마침내 대한민국 역사상 최단기 집권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감수해야 했다.

‘서울의 봄’은 광주항쟁으로 이어졌다. 5월 18일 이전, 계엄령 반대 시위에 나선 광주시민들의 모습.

최규하는 한국 헌정사상 정당에 가입하지 않은 직업공무원으로서 과장·국장·차관·장관·국무총리를 차례로 거쳐 대통령이 된 첫 번째 인물이었다. 최규하는 공직생활 중에 독자적으로 자기 세력, 자기 파벌을 형성하지 못해 정치적 기반이 매우 취약했다. 그게 그를 8개월짜리라도 대통령에 오를 수 있게 하면서 동시에 권력에서 밀려나게 한 조건인 양날의 칼인 셈이었다.

최규하는 강원도 원주 출신으로 1937년 경성제일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 1941년 2월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다. 1943년 2월 만주 국립 대동학원 정치행정반을 수료하였다. 그는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이승만 다음으로 영어에 능통했던 대통령으로 꼽힌다.

해방 후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다가 미 군정에 발탁되었고, 정부 수립 후 농림부를 거쳐 외무부로 옮겨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이후 외무부 장관을 거쳐 유엔총회 수석대표, 대통령 외교담당 특별보좌관을 역임했고 1976년에 국무총리에 올랐다. 1979년에 국무총리로 다시 선출됐다.

그는 국무총리 재직 중 근검절약하고 깨끗한 공직생활을 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말단부터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관료로서 오를 수 있는 데까지 오른 사람이었다. 그러나 대통령 자리에 오른 게 그의 생애에 영광이 되었던 것은 아닌 듯하다.

최규하는 1980년 4월, 신군부의 강요에 따라 전두환을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해야 했다.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이미 실권은 신군부에 넘어가 있었으니, 그에게 얼마만 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에겐 ‘서울의 봄’을 민주화의 동력으로 삼아 역사적 전환기를 주도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신군부의 강요로 전두환을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했고, 전두환에게 대장 계급장을 달아주었다. 그러나 그에겐 실권이 전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한 내각에서조차 뜻을 제시하지 못했고, 내각이 구성된 지 두 달가량이 지날 즈음부터 청와대에서 장관들 얼굴을 보기조차 힘들어졌을 정도였다.

실권은 국보위 상임위원장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의 정치군인들이 농단하고 있었다. 8월 5일, 자신을 총애해 준 박정희에게 배운 대로 그는 대장으로 승진한 후, 8월 22일 전역해 대통령선거에 출마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최규하의 하야 과정에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이 압력을 넣었다는 것은 거의 정설이 된 듯하다. 그 자신은 이 부분에 대해서 침묵했지만, 당시 정치권 인사의 증언에 따르면 신군부 세력이 중간에 사람을 넣어 최규하에게 사임 압력을 행사했던 것은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1981년 3월 3일 전두환은 잠실실내체육관에서 대통령 취임식을 하고 12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새 희비극의 시작이었다.

전두환은 1980년 9월 장충체육관에서 전임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간접선거로 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1981년 3월, 5공 헌법에 따라 체육관에서의 간접선거를 통해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권불십년이다. 6월항쟁과 전 국민의 민주화 요구 앞에 이들은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최규하의 반역사적 진술 거부

전두환은 대통령직에서 퇴임하고 백담사에서 은거해야 했고, 국회 5공 청문회에 서야 했다. 1995년, 김영삼 정부 때 구속기소 되어 1심에서 내란죄 및 반란죄 수괴 혐의로 1심에서는 사형을,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1997년 12월에 사면됐다.

대통령의 지위에 올랐지만, 최규하도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의 피해자다. 그러나 그는 피해자로서 동정표를 전혀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죽을 때까지 12·12나 5·18에 대한 증언 진술을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허수아비 권력으로 살았던 자신의 삶을 드러내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규하는 진술을 거부하는 이유로 ‘전직 대통령이 증언에 응하는 악례를 남기지 않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숱한 증언과 고백 요구에 일관되게 침묵했고, 면담 거절로 대응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일신의 수치를 넘지 못하고 뒤틀린 역사에 대한 증언자로서의 기회를 깡그리 거부한 것이었다.

최규하는 2006년 10월 22일 오전 6시께 서울 마포구 서교동 자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88세.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으며,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원수 묘역에 안장됐다. 그는 대통령 재임 중 자신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해 논란이 있었는데, 그게 그가 대통령으로서 누린 유일한 호사였는지도 모른다.

원문: 이 풍진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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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 결말을 알면서도 관객들의 ‘분노’를 추동하는 영화 https://ppss.kr/archives/264837 Thu, 14 Dec 2023 03:07:11 +0000 http://3.36.87.144/?p=264837 김성수 감독의 〈서울의 봄〉을 보다
▲ 영화 〈서울의 봄〉 포스터 ⓒ 하이브미디어코프(이하 같음)

지난 금요일, 아내와 함께 시내의 복합상영관에서 〈서울의 봄〉을 관람했다. 오전 10시 10분에 시작하는 조조 상영분이었지만, 객석의 한 1/4쯤은 찼다. 얼핏 보아도 대부분 젊은이였다. 아마, 그들은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대보다 한참 뒤에 태어난 세대일 것이었다. (※관련 글 : 「한 고교생의 기억에 박힌 총격전, 그리고 영화 <서울의 봄>」)

지난달 22일 개봉했으니 3주차를 넘겼는데도〈서울의 봄〉은 여전히 폭풍 진격 중이다. 소재나 배경에 대해서도 알려질 만큼 알려진 작품인데도 워낙 화제를 몰고 온 영화인지라 객석은 연일 찼다. 12월 14일을 기점으로 누적 관객 수는 750만을 가볍게 넘었다 한다.

 

‘기억’이나 ‘배경지식’ 확인·교정하게 하는 영화

▲ 전두광의 집에서 이루어진 반란군 측의 장교들 모임. 이들은 모두 군내 사조직 하나회 출신으로 국가가 아니라 조직에 충성했다.

12.12 쿠데타를 ‘역사’가 아니라, 현실 ‘사건’으로 겪은 시민들은 물론, 그걸 교과서나 다른 매체를 통해서 알게 된 젊은이들, 이른바 ‘MZ세대’도 영화를 보고 나서 자신의 기억이나 배경지식 따위를 확인하거나 교정한다. 열흘 가까이 내 블로그의 ‘최규하 관련 글’을 찾는 누리꾼들, 유튜브에 각종 관련 영상을 올리고 이를 찾아보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서울의 봄〉은 관객들에게 역사를 새롭게 환기하고, 우리 현대사의 비극적 사건을 조감하게 하는 영화다. 다큐멘터리가 아닌데도 12.12 군사 반란이 자행된 9시간에 현미경을 들이대고 그 프레임 속의 진압군과 반란군의 일거수일투족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영화는 그 자체로도 훌륭한 역사 교육이다.

관객들은 영화에 몰입하면서도 끊임없이 자기 기억과 배경지식의 오류를 검증한다. 그리고 마침내 모두가 12.12 쿠데타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 왔지만, 정작 자신이 아는 게 ‘쿠데타’라는 것뿐, 사건의 세부 내용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서울의 봄〉이 ‘보는 영화’가 아니라 ‘체험하는 영화’라고 말하는 이유도 관객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12.12 군사반란을 규정하면서 영화를  관람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재현되는 현대사를 따라가며 관객들은 수십 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그날의 기억을 새삼 ‘추체험’하는 것이다.

 

쿠데타, 일과성 사건 아닌 관련 인사의 ‘삶 규정’과 ‘민주주의 퇴행’의 근원

그런 한편, 관객들은 자신이 무심히 흘려보낸 12.12 쿠데타가 ‘일과성 사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프게 깨닫는다. 그리고 쿠데타가 반란군은 물론 진압군의 ‘삶을 규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 땅의 민주주의의 퇴행을 초래한 근원이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 수도경비사령관 이태신과 그의 참모들이 진압 계획을 짜고 있다. 이태신 왼쪽이 야전포병대장, 오른쪽이 작전참모다.
▲ 반란 수괴 전두광과 수하들. 그는 배짱으로 쿠데타를 자행했는데, 이를 두고 ‘역시 전두환은 인물이야!’라고 찬미할 이들도 있을 터이다.

역사적 사건과 거리를 두게 하는 44년이라는 시간도, 재현되는 비열한 술수와 더러운 폭력 앞에서 치미는 분노를 다스리는 데 아무 소용이 없다. 이는 감독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이 영화가 선악의 구도로 펼쳐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더 볼 것 없이 ‘좋은 우리 편’과 ‘나쁜 놈 편’으로 간단히 나눌 수밖에 없게 될 때 우리의 윤리적 감각은 즉물적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서울의 봄〉이 어떤 영화라는 것쯤은 모두가 알고 극장을 찾는다. 당연히 결말이 어떻다는 것도 안다.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영화적 상상력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라고 해도 기본적인 사실을 건너뛸 수는 없다. 따라서 이 영화는 굳이 ‘스포일러’가 따로 있을 수 없는 작품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런데도 관객들은 꾸준히 객석을 채운다.

 

쿠데타 성공 ‘도우미’가 된 국방부 장관과 합참차장

12.12 군사 반란은 정교하게 기획된 쿠데타라고는 할 수 없다. 결정적 반전의 계기를 여러 차례 드러낸다. 그런데도 군 핵심 지휘부는 ‘반전’의 기회를  무기력하게 잃고 반란군에게 주도권을 빼앗겨 버린다. 그 결정적인 이유가 군 지휘부의 우유부단과 무능, 그리고 오판이라는 데서부터 관객들의 분노가 치솟기 시작한다. 

대통령 다음 군 통수권을 지닌 국방부 장관은 참모총장 공관에서 들린 총성에 화들짝 놀라 가족들을 데리고 도주하여 한미연합사 등을 전전하다가 국방부에 숨어 있다가 발견된다. 그는 무책임과 무능을 넘어 결과적으로 쿠데타에 미필적 고의로 협력한 일등 공신이 된다.

▲ 진압군의 회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육군본부 벙커. 그러나 육군 참모차장은 신사협정을 부르짖을 만큼 무능하고 우유부단했다.

반란군에게 강제 연행된 계엄사령관인 참모총장을 대신해야 할 참모차장은 어떤가. 어이없게 쿠데타 군과 ‘신사협정’을 맺고 진압 부대를 회군시키다가 결국은 뒤통수를 맞는다. 자신의 판단을 미루며 면피하기 바쁜 그는 반란을 진압하려 하기보다는 상황 변수에 기대어 쿠데타를 추인하려고 애쓰는 것으로 보일 정도다.

예나 지금이나 지도자나 지휘관의 자질과 능력이 위기 극복의 열쇠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군사 반란에 대응하는 국방부 장관과 육군 참모차장의 무능과 무책임한 행태를 지켜보는데, 현 정부의 국방부 장관과 합참의장이 그들과 겹쳐진다.  막말과 이완용 두둔 등으로 질타받다가 임명된 국방부 장관과 자질 미달로 낙마할 뻔한 합참의장은 안보보다는 ‘주식 투자’에 진심이었던 이들이다. 영화 속의 빌런들과 그들을  겹쳐보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불길했다.

 

진압군과 반란군 – 엇갈린 선택과 삶, 그 데자뷔

쿠데타의 주역들이 승진 가도를 달리며 승승장구할 동안 반란을 막으려 했던 진압군 측 인사들은 불명예제대, 강제 예편 등으로 군에서 쫓겨났다. 대부분 상상 이상의 불행과 고통스러운 가족사를 겪었고, 정병주 특전사령관과 장태완 수경사령관의 아들, 김오랑 소령의 부인 등도 모두 불행하게 세상을 떠났다.

군사 반란을 두고 엇갈린 이 군인들의 뒷이야기는 아픈 기시감으로 다가온다. 일제 강점기 동안 일제에 부역하면서 영화를 누린 친일 부역자들과 조국 광복을 위해 풍찬노숙을 마다치 않았던 독립 투사들의 후예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스러운 삶은 상기하는 것조차 외람될 뿐이다. 역사가 무엇을 교훈으로 남길 것인가는 한국 근현대사가 두고두고 풀어야 할 숙제다.

영화에서 재연된 군사 반란이 당시 내가 주워들은 이야기와 뒷날 확인된 보도 등으로 얽은 내 상상 속의 12.12 쿠데타보다 훨씬 생생하고 실감 났던 건 더 말할 나위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9시간으로 집중 조명한 쿠데타의 전개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기존의 인식에 비어 있었던 부분을 채워 넣을 수 있었다.

1979년 12월 14일 마지막 정기휴가를 마치고 귀대했을 때, 나는 부대가 이틀 전 진압군으로 출동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무슨 연유인지 부천 근처에서 회군했는데, 이유는 긴급 전문을 받았다는 게 다였다. 회군이 아군 간 유혈 충돌을 우려한 참모차장이 이른바 신사협정을 믿고 내린 지시와 반란군 측의 회유로 이루어졌다는 걸 알게 된 것은 훨씬 뒷날의 일이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내 상상을 멈춰 버렸다. 이미 쿠데타는 성공하여 전두환 군부 독재의 공포 정치가 진행되고 있었고, 돌아간 학교에서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았다. 1980년 5월까지 고조되던 학내 시위는 휴교령과 함께 탱크를 앞세우고 해병대 병력이 진주하면서 중단되었다. 그리고 내가 졸업하던 1984년까지 대구 시내에 시위는 한 차례도 일어나지 못했다.

 

내가 근무한 9공수여단, 여단장의 선택

영화에서 수경사령관의 설득에 8공수여단장은 반란군에 맞서고자 서울로 향했다. 그러나 전두광은 반란군 측 2공수여단과 육군본부 측 8공수여단을 동시에 회군시키는 신사협정을 제안하고 이를 믿은 육군 참모차장의 명령에 따라 8공수여단은 복귀한다. 제압의 대상일 뿐 협상할 상대가 아닌 반란군과의 신사협정은 바보짓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승부의 추는 반란군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 제8공수여단장. 내가 근무한 제9공수여단장(윤흥기 준장)이 모델이다. 그가 회군하지 않고 진압에 나섰다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1993년에 방영된 KBS 다큐멘터리에서 윤흥기 당시 9공수여단장은 특전사령관의 요청에 따라 자신이 1개 대대만 끌고 먼저 출동했다고 증언한다. 부대를 되돌린 것은 영화와 다르지 않았다. 그때, 윤 여단장이 인솔한 병력이 내 소속 대대였는가 했더니 확인해 보니 이웃 대대였다. 윤흥기 준장은 9공수의 초대 여단장 노태우가 소장으로 진급하여 청와대 경호실로 이동한 다음 부임한 갑종 간부후보생 출신의 우리 여단장이었다.

반란 직후 윤흥기 장군은 한직을 돌다 1983년 1월 한미연합사령부 작전참모차장을 끝으로 예편했다. 전역 뒤에 그는 자신의 회군으로 말미암아 반란군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떨치지 못했다고 한다. 그가 쿠데타 당시 육군본부의 정식지휘체계에 속했던 장군 22명을 규합해 1993년 7월 19일 전두환과 노태우 등 쿠데타를 주도한 34명을 ‘반란 및 항명 혐의’로 대검찰청에 고소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덧없는 역사의 심판, 아직 서울의 봄은 ‘미완’이다

그러나 역사의 심판은 덧없다. 마지막 대법원판결에서 전두환과 노태우는 군사 반란 수괴로 확정되었으나, 이들이 복역한 기간은 2년에 그쳤다. 영화를 누린 세월은 길었고, 심판의 굴욕은 짧았다.

2021년에 10월과 11월에 노태우, 전두환은 각각 사망했다. 끝내 사과하지 않고 죽은 전두환은 지난 2년간 묻히지 못하고 있었는데, 최근 파주에 안장하려던 계획이 해당 지자체와 시민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 12월 14일 군 인사를 한 다음에 찍은 신군부의 기념사진. 영화 마지막에서 배우들이 찍은 같은 구도의 사진은 이 사진으로 바뀐다.
▲ 5공 광주 청문회(1988~1989)에 증인으로 소환된 신군부 인사들. 왼쪽부터 정호용, 이희성, 박준병, 장세동, 권승만

영화는 사실에다 픽션을 버무렸다. 전두광과 이태신의 경복궁 앞 마지막 대결 장면이 대표적인 픽션 부분인데, 그 마지막 출정에 앞서 수경사 작전참모에게 건넨 이태신의 말은 망국의 책임을 대신하여 자정한 매천 황현이 남긴 말과 겹치면서 묘한 여운으로 남는다. (관련 글 : 「포의(布衣)의 선비 황현, 망국의 책임을 대신하여 자정하다」)

내 눈앞에서… 내 조국이 반란군한테 무너지고 있는데! 끝까지 항전하는 군인 하나 없다는 게… 그게 군대냐?

  • 수도경비사령관 이태신

나는 조정에 벼슬하지 않았으므로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허나 나라가 오백 년간 사대부를 길렀으니, 이제 망국의 날을 맞아 죽는 선비 한 명이 없다면 그 또한 애통한 노릇 아니겠는가?

  • 매천 황현
▲ 진압군의 장교들. 이들은 반란군과 달리 같이 모여 사진을 찍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이야말로 기억해야 할 진짜 군인들이다.

마지막 장면은 전두광과 하나회 일당이 단체 사진을 찍는 신이다. 처음엔 출연 배우들이 찍은 사진이 나오지만, 플래시가 한 번 더 터지고 빛바랜 흑백사진으로 바뀌면서 전두환을 비롯한 실제 하나회 단체 사진으로 겹치면서 바뀐다. 비록 픽션을 더했지만, 역사적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는 묵직한 은유다.

영화의 마무리 장면에서는 군가 한 곡이 장중하게 울려 퍼졌다. 군가가 왜 이리 슬픈가 싶었는데 확인해 보니 1981년에 만들어진 〈전선을 간다〉라는 제목의  군가라고 한다.  어처구니없게도 반란군에게 투항해야 하는 진압군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마치 만가(輓歌) 같은 노랫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허정허정 극장을 나섰다.

전선을 간다

높은 산 깊은 골 적막한 산하
눈 내린 전선을 우리는 간다

젊은 넋 숨져간 그때
그 자리 상처 입은 노송은 말을 잊었네

전우여 들리는가 그 성난 목소리
전우여 보이는가 한 맺힌 눈동자

 

사족

미친 것처럼 전두광에 빙의한 황정민 배우의 모습을 보면서 “역시 전두환은 인물이야!”라고 감탄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3성 장군 출신의 현직 국방부 장관도 12·12 군사반란을 두고 “나라 구하려고 나온 것”이라고 했으니 더 말할 게 없다. 44년이 흘렀지만, 우리가 즐기는 ‘서울의 봄’은 여전히 ‘미완의 봄’인 것이다.

원문: 이 풍진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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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과 사과, 혹은 사고와 참사 사이 https://ppss.kr/archives/258038 Mon, 07 Nov 2022 06:44:24 +0000 http://3.36.87.144/?p=258038 ‘어휘’는 화자의 내심과 의도를 드러낸다
출처: 연합뉴스

이태원 핼러윈 참사(10.29.) 이후,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발언이 여론을 데우고 있다. 재난관리 주무 부서의 책임자이지만, 참사를 바라보는 그의 시각은 정부의 면책을 의식하는 듯 상식과 책임을 위태하게 넘나들었다.

참사 다음 날인 10월 30일, 그의 제일성은 “경찰과 소방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던 것으로 파악한다”라는 것이었다.

 

이태원 참사, 정치적 책임론 경계하는 정부여당

그는 30일 오후 정부서울청사 브리핑에서 ‘많은 인파가 몰릴 것으로 예상됐다’라는 기자 질문에 “그 전과 비교했을 때 특별히 우려할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몰린 것은 아니다.” “서울 시내 곳곳에서 소요와 시위가 있어 경찰 경비 병력이 분산됐던 측면이 있었다”라고 말했다.

‘경찰과 소방을 배치하였어도 사고는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라는 속내가 엿보이는 발언인데, 이는 참사가 정부의 책임으로 이어지는 걸 막으려는 의도를 은연중에 드러낸 것이었다. 이 첫 발언에 여론이 술렁이고 비판이 이어졌지만, 그는 여전히 비슷한 태도를 이어갔다.

31일 오전에도 서울시청 광장에 마련된 이태원 사고 사망자 합동분향소에서 조문한 뒤 “경찰·소방력 대응으로 사고를 막기에 불가능하다고 말했는데 무슨 뜻인가”라는 질문에 “(경찰과 소방의 대응으로) 사고를 막기에 불가능했다는 게 아니라 과연 그것이 원인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라고 답했다.

또 “경찰의 정확한 사고 원인이 나오기 전까지는 섣부른 예측이나, 추측이나, 선동성 정치적 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말”이라고 전하며 “경찰의 병력 부족으로 인한 사고였는지, 그런 그것을 더욱 깊게 연구해야 하며, 섣부른 결론을 내고 원인이 나오기도 전에 이런저런 추측을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라고 입장을 전했다.

이에 시민사회와 야권은 물론 여당 내에서도 적절치 않다는 비판이 나오자, 그는 한발 물러나 ‘유감’을 표시했다.

재발 방지를 위해서는 정확한 사고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국민께서 염려하실 수도 있는 발언을 하여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비판이 강도를 더해가자, 그는 다음 날인 1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 출석해 사과와 더불어 고개를 숙였다. 참사 사흘 만이었다. 그는 사고 발생에 대해서는 ‘사과’하면서도 국민의 마음을 살피지 못한 데 대해서는 다시 ‘유감’이라고 했다.

국가는 국민의 안전에 대해 무한 책임이 있음에도 이번 사고가 발생한 것에 대해 국민 안전을 책임지는 주무 부처 장관으로서 이 자리를 빌려 국민 여러분께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유가족과 슬픔에 빠져 있는 국민의 마음을 미처 세심하게 살피지 못했습니다. 이점 다시 한번 깊은 유감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 장관이 즐겨 쓴 ‘유감(遺憾)’은 ‘마음에 차지 아니하여 섭섭하거나 불만스럽게 남아 있는 느낌’이라는 뜻이다. 현실 언어에서 이는 ‘사과’와 대체할 수 있는 낱말이 아니다. 게다가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빎”이라는 뜻의 ‘사과(謝過)’와는 꽤 거리가 있다.

 

‘유감(遺憾)’의 수사학

실제로 정치권에서 흔히 쓰이는 이 말은 원치 않는 사과를 해야 할 처지에 놓인 이가 쓰는 타협의 수사다. 잘못의 인정이나 용서와는 달리 이 말은 상대방이 아니라, 자기 심경의 일단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이 맞닥뜨린 상황에 마뜩잖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교묘한 수사이다.

국민의 마음을 살피지 못했으면 사과하면 될 일이지, “마음에 차지 아니하여 섭섭하거나 불만스럽게 남아 있는 느낌”은 무언가. 이는 내용으로는 사과의 의미를 담되, 완곡한 표현으로 상황을 서로 눙쳐서 터는 형식이다. 다분히 권위주의적 어법이어서 민주 사회에서는 걸맞지 않은 표현이다.

이런 교묘한 방식의 외교적 수사의 으뜸은 1990년 당시 아키히토 일왕이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을 환영하는 만찬에서 한일 간의 과거 문제를 언급한 형식적 사과다. 아키히토는 당시 이렇게 말했다.

일본에 의해 초래된 이 불행했던 시기에 귀국의 국민이 겪으셨던 고통을 생각하며 통석(痛惜)의 염(念)을 금할 수 없다.

‘통석(痛惜)’은 ‘애석하고 아깝다’라는 뜻의 한자어니, ‘통석의 염’은 ‘애석하고 아까운 마음, 생각’쯤으로 풀이할 수 있다. 마치 무슨 선문답과도 비슷한 이 모호한 형식으로 한국을 식민 지배한 일왕의 유감을 표현하여 한일 간 외교는 통과의례를 간신히 거쳤다.

 

모든 낱말은 화자의 속내를 드러낸다

모든 낱말은 화자의 의중을 일정하게 드러난다. 낱말은 그 생성 과정에서 특정한 의미를 포함하면서 그 말을 사용하는 언중들의 이해와 태도를 은연중에 표출하기 때문이다. ‘노동(勞動)’ 대신 ‘근로(勤勞)’를 즐겨 쓰는 것이나, 성차별적 세계관을 담고 있는 낱말들이 그 좋은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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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압사 사고와 그 피해자를 가리키는 말로 ‘사고’와 ‘참사’가, ‘사망자’와 ‘희생자’가 서로 맞선 형국도 마찬가지다. 정부나 여당 쪽에선 가능하면 이른바 ‘중립적’인 표현으로 사고에 내재한 문제를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은 속내를 정부 공문서로 공식화한다. ‘희생자’ 대신 ‘사망자’를 고집하던 속내도 다르지 않다.

정부 여당은 박근혜 정부의 이른바 ‘세월호 트라우마’를 경계하는 듯하지만, 사실 이태원 참사는 그보다 더 심각한 국가의 직무유기다.
결국 국가애도기간 마지막 날인 5일 서울 시청광장과 녹사평역 광장의 합동분향소 현판 명칭을 ‘참사 희생자’로 바뀌었다. 녹사평역 광장의 합동분향소는 12일까지 연장 운영된다. / 출처: 용산구

정부·여당의 태도에서 정치적 이해 관계나 책임의 부담 따위에 얽매이지 않는, 대상을 공감하는 태도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났듯이 그들은 공감 능력은 면책 등 정치적 이해에 짓눌려 있다. 이른바 ‘무한 책임’을 되뇌면서도 특정 낱말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이유다.

‘참사와 희생’의 정치적 트라우마를 겪은 탓일까, ‘사고’와 ‘사망자’를 고집하던 이들의 변명은 궁색하게 느껴진다. 여미면 여밀수록 속내는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면서 문제해결의 전제인 신뢰를 점점 잃어가고 있다. 모두가 아는 사실인데 그들만 모른 척하는 현재 상황은 한국 정치가 빠진 늪이고, 딜레마다.

역사의 교훈조차도 외면하게 하는 이 지독한 맹목의 정치는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

원문: 이 풍진 세상에


표지 이미지 출처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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