ㅍㅍㅅㅅ https://ppss.kr 필자와 독자의 경계가 없는 이슈 큐레이팅 매거진 Fri, 13 Jan 2023 08:57:55 +0000 ko-KR hourly 1 https://wordpress.org/?v=5.8.10 https://ppss.kr/wp-content/uploads/2015/07/ppss-100x100.png ㅍㅍㅅㅅ https://ppss.kr 32 32 베트남에서의 한국군의 만행 https://ppss.kr/archives/65738 https://ppss.kr/archives/65738#respond Mon, 18 Jan 2016 06:31:49 +0000 http://3.36.87.144/?p=65738 일그러진 ‘무적 따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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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은 베트남 전쟁에서 공식적으로 전사자의 8배에 가까운 4만여 명의 베트남인을 사살했다. 당시 언론들은 10:1의 눈부신 전과라며 ‘자랑스러운 대한의 남아’ ‘무적 따이한’으로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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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언론
“한국군을 만나면 어떻게 해서든지 피하라고 그들 군대에게 명령할 정도로, 베트콩은 한국군을 겁내고 있다고 합니다. 다시 한 번 무적 해병대의 위용을 과시했습니다.”

 

이는 미군의 두 배이자 게릴라전 역사상 유례없는 전과였다. 그렇다면 당시 동맹국 미국은 한국군을 어떻게 보았을까?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4년 3월 28일 자)

 

이미지_10릭 와이드먼
“한국군은 교전 중에 사상자가 발생하면 끝까지 추격해서 마지막 한 명까지 사살하곤 했다.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는 이들이라고나 할까.”

 

당시 미 대통령 법률 보좌관 맥퍼슨의 현지 보고서의 내용이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4년 3월 28일 자)

 

이미지_20맥퍼슨
“한국군은 정말로 무서웠다. 현지 주민들에게 한국군은 공포 그 자체였다. 나는 한밤중에 신분증 없이 한국군을 만나는 일이 과연 없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랬다. 베트콩들이 한국군을 만나면 피하라고 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한국군을 1명이라도 사살하게 되면 화가 난 한국 군인들이 인근 마을로 쳐들어가서 애꿎은 양민들에게 보복이라도 할까 봐 두려워 베트콩들 스스로, 한국군을 쏘지 말라고 명령했던 불편한 진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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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미국의 종군기자가 본 한국군의 모습은 이러했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4년 3월 28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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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키틀리 (종군기자)
“한국군은 상대가 누구인지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어느 지역에 베트콩이 있다고 알려지면 그 지역의 아무에게나 총을 쏘는 그런 식이었다.”

 

당시 파월 장병의 증언은 이렇다. (『한겨레 21』 273호, 1999년 9월 21일 자)

 

다운로드파월 장병
“우리 군이 한 명 죽거나 다치면 그 다음 날엔 줄초상이 났어. 설령 그 마을이 베트콩과는 무관한 마을이라고 해도 상관없었어. 그냥 보이는 대로 쏴 죽이고 여자들은 강간한 뒤에 죽이고 그랬으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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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의 잔혹 행위는 당시 해외 언론에서는 자주 언급됐던 부분이다. 오죽했으면 남베트남군의 한 사단장은 민간인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남베트남군에게 한국군 발포 명령을 내릴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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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사실들에 대해 국내 언론은 철저히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당시 조선일보 외신부 기자의 회고다. (리영희, 『스핑크스의 코』,  252~253쪽.)

 

다운로드 (2)리영희
“매일 수 없이 죽어가는 무고한 베트남인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나는 매일 우울한 마음으로 신문사를 나서야만 했다. 그리고는 아픔을 달래기 위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어딘가에서 소주를 마시곤 했다.”

 

한국군이 4만 명의 베트콩을 사살했다고 국내 언론들은 자랑스럽게 보도했지만, 사실 이 중에는 9천여 명의 무고한 민간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구수정, 「베트남전 한국군 양민학살」, 『한겨레 21』 279호.)

 

증오비의 문구: 남조선 군대는 ‘미국의 용병’

한국군이 베트남 전쟁에서 사살한 민간인은 크게 다음의 4개 성(省)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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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는 한국군에 학살된 수 (이규봉, 『미안해요! 베트남』, 144~145쪽.)

이 중에서 꽝남성에서만 희생자의 절반가량인 4,500명 정도가 발생했고 나머지 성들에서는 각각 1,700명씩의 희생자가 나왔다. 그리고 이들 학살이 일어난 지역마다 오늘날에는 ‘증오비’와 ‘위령비’ 등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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꽝응아이성 빈호하의 증오비: 남조선의 만행을 뼛속 깊이 새길 것 ☞ 참고

하지만 한국군에 의해 희생된 희생자들의 비문에는 늘 한국군과 함께 미군이 함께 거론되고 있으니, 이들의 논리는 이렇다. (이규봉, 『미안해요! 베트남』, 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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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_32베트남인
“한국은 돈을 벌기 위해 미군을 대신해 싸운 용병이었다! 그러니 일차적인 책임은 미국에 있는 것이다.”

 

그런 베트남인들의 생각은 1967년 12월에 있었던, 투이보촌(村) 학살을 기억하는 비문에서도 잘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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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이보촌 위령비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진 위령비의 내용은 이렇다. (이규봉, 『미안해요! 베트남』, 1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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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이보촌 위령비
“1967년 12월, 야만적인 미국 군대는 우리가 사랑하는 어르신, 소녀, 어린이 145명을 학살했다. 이를 후손들은 대대로 마음 깊이 기억하라.”

 

하지만 학살은 미군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67년 12월, 당시 투이보촌에는 2대의 헬기가 한국군(청룡부대) 1개 소대를 내려놓았다. 이때 한국군은 마을로 밀고 들어오면서 닥치는 대로 총을 쏘아댔기 때문에 주민들은 총알을 피하기 위해 재빨리 땅굴을 찾아 몸을 숨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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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당시 한국군들은 땅굴에 사람이 숨어있으면 죄다 베트콩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마을 곳곳의 땅굴을 수색해 주민들을 모두 땅굴 밖으로 나오게 하고는 나오는 사람마다 차례대로 총을 쏘아 죽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모두 145명의 민간인들이 학살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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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생존자의 증언은 이렇다. (이규봉, 『미안해요! 베트남』, 1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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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1시였어요. 한국군들이 들이닥쳐서 주민들을 모두 한곳에 모아놓더니, 갑자기 폭탄을 터뜨리고 총을 쐈습니다. 그렇게 모두 100명도 넘게 죽었어요.죽은 사람들 속에는 내 자식들도 3명이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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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위와 외손자까지도 모두 잃었어요. 그때 세 살짜리 외손자는 내 품에서 두개골이 산산조각이 나서 죽었고, 나는 턱과 혀 반쪽에 날아갔다는 걸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렇게 입이 돌아가 있습니다.”

 

하지만 위령비에는 한사코 미국 군대라고 적혀 있다. 베트남 사람들은 누가 죽였든 그것은 미국의 죄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군을 끌고 온 것은 미군이고, 한국군은 미군의 ‘용병’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규봉, 『미안해요! 베트남』,  150쪽.)

 

애꿎은 양민에게 복수하던 한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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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청룡부대는 1968년 2월 여단 규모(4천 명)로 작전을 벌였다. 이 작전은 1968년 1월 베트콩의 구정공세에 대한 반격 작전이었다. 그런데 퐁넛 마을을 지나던 1개 중대가 민간인 70여 명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당시 작전에 참여했던 한국군의 증언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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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병
“행군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마을로부터 총알이 날아오잖아요. 그래서 마을에 베트콩이 있는 것으로 알고 들이닥쳤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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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마을에 도착하고 보니 이미 베트콩은 떠나고 없더라구요. 겁먹은 마을 사람들밖에 없어서 우리는 주민들을 한 곳에 불러 모아 놓았는데 , 어디선가 갑자기 또 적의 총알이 날아오는 거에요.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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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대장
원래 사람들을 죽일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겁을 먹고 도망가니까 죽인 거지요. 참나…”

 

하지만 사실은 달랐다. (『한겨레 21』 334호, 2000년 11월 23일) 문제의 퐁니·퐁넛 마을은 애초에 베트콩과는 거리가 먼 ‘안전 마을’이었다. (안전마을: 미군이 베트콩으로부터 안전한 마을이라 지정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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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미군의 조사 결과는 이러했다.

 

그림1“한국군이 정찰 중에 대인 지뢰에 걸려서 발목을 날린 사건이 발생했다. 그래서 한국 해병 1명이 부상을 당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화가 난 한국군은 보복하겠다며 인근 마을을 희생양으로 삼았던 것이다.”

 

당시 증언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규봉, 『미안해요! 베트남』, 158~1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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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_48베트남인
“시체들은 정말 끔찍했다. 어린아이들이 발가벗긴 채 죽어 있었고… 양쪽 다리를 잡아당겨 찢어 죽인 것도 있었다.”

 

한 비구니는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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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를 칼로 창자를 끌어내 죽인 시신도 있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어 우리는 절 안에 향을 피울 공간도 없을 정도였다.”

 

전 세계적으로 보도된 학살사건

그러나 퐁넛 마을의 사건은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자행했던 100여 건이 넘었던 학살 사건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그렇더라도 이 사건은 한국군의 학살 사건 중 가장 널리 알려지게 된다. ☞ 참고 한국전쟁 당시 수많은 양민학살 사건이 있었지만 그중에 거창학살사건이 가장 유명한 것처럼… 퐁니·퐁넛 마을 사건도 흔히 ‘한국판 미라이’라고도 불리는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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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이 유명해진 이유는 희생자 중에 남베트남 군인의 가족들이 있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학살 현장에서 살아남은 생존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가족들은 진실을 밝히고 배상하여줄 것을 요구하는 편지를 남베트남 국회에 보내 탄원했던 것이고, 남베트남 정부의 항의로 미군이 독자적인 조사를 벌인 탓에 사건의 전말이 베트남 현지는 물론이고 뉴욕 타임즈 등을 통해서 기사가 퍼져나갔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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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 학살이라뇨? 우리 군인들은 절대로 그런 짓을 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베트콩들의 기만전술인것 같습니다.”

 

게다가 미국도 더 이상 한국을 추궁하지는 못했다. 사건 한 달 후에, 미군 스스로 미라이 학살 사건을 터뜨렸기 때문에… ☞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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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억울해진 것은 희생된 민간인 유족들이었으니, 당시 이들 유가족에 대한 보상은 희생자 한 사람당 20kg의 쌀 한 포대와 2m짜리 상복을 만들 천이 전부였다. (이규봉, 『미안해요! 베트남』, 159쪽.)

사건이 이렇게 책임을 묻지 못하고 흐지부지 끝나버렸으니, 이후로 유사한 사고들이 지속적으로 발생했던 것은 물론이다. 가령 한국군이 행군이나 작업 도중 지뢰를 밟거나 부비트랩이 터지기라도 하면, 한국군은 이내 인근 마을을 찾아가 가혹한 보복을 가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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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디엔반 현에서 도로 청소 중 지뢰가 터졌다는 이유로 청룡부대는 130명의 양민을 학살했는데, 이때 희생자들 중엔 미군 부대 소속 군인들의 가족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규봉, 『미안해요! 베트남』, 157쪽.)

 

이미지_44한국군
“그러니까 감히 우리들 주위에 지뢰나 부비트랩 같은 거 설치하지 말라니깐!”

 

학살현장을 은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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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현지 주민들과 우호적으로 지내다가도 갑자기 악마로 변해 잔인하게 살육한 사건도 있었다. 디엔바 현 하미촌에 주둔했던 청룡부대가 그러했다. 이들은 평소 대민 지원도 나가는 등 베트남 주민들과 잘 지내고 있었지만, 해당 마을에 작전 명령이 떨어지자 한국군은 180도 돌변했다.

오늘날 마을 입구에는 있는, 증오비의 내용을 인용해보면 이렇다. (이규봉, 『미안해요! 베트남』, 152~153쪽.)

 

이미지_65한국군 증오비
“1968년 2월, 청룡 부대 군인들이 갑자기 나타나, 마을을 포위하고 양민들을 미친 듯이 학살하여 마을의 30채 가옥이 불에 타고 주민 135명의 시체가 산산이 태워졌다.”

이미지_65“탄 고기와 비린 피를 탐하는 개미들이 주위로 새까맣게 몰려들었고, 그 와중에 한 아이는 여전히 살아있어서… 엄마 배 위에서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젖을 찾고 있었다.”

 

당시 생존자의 증언이다. (이규봉, 『미안해요! 베트남』, 1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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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 티 호아
“평소 한국군은 마을 사람들을 모아서 빵을 나눠주곤 했었지. 학살이 일어난 그 날 아침에도 빵을 주려나 보다 하고 마을 사람들은 모였던 거야.”

이미지_64“그런데 한국 군인들은 갑자기 난데없이 마을 사람들을 향해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지기 시작했어. 그때 나는 다리가 잘렸어. 그리고 죽은 척 엎어져서 있었지. 그렇게 밤이 될 때까지 꼼짝없이 죽은 척을 했어.”

이미지_64“그리고 컴컴한 밤이 되자 나는 기어 나와 살 수 있었던 거야. 하지만 그때 일로 나는 4명의 가족을 잃었어. 자식 둘과 임신 4개월 된 조카며느리를 잃었지. 죽기 전에 며느리는 한국군에게 강간을 당했어. 우리 며느리는 참 예뻤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학살을 끝내고 나면 한국군은 흔적을 지우기 위해 탱크나 불도저를 끌고 와서 현장을 깔아뭉개서 시체의 형체를 알 수 없도록 했다는 점이다. (이규봉, 『미안해요! 베트남』, 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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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내용은 하미촌의 증오비에도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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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미촌 증오비
“…더 처참한 것은 학살 후에 탱크가 시체들을 짓뭉갠 것이다.”

 

아이들까지 모두 죽여야 했던 군인들

이렇듯 사건을 은폐시키기 위해서라도 민간인 학살이 발생하면 한 명도 살려둘 수가 없었으니 안정효의 자전적 소설 ‘하얀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에서는 그런 부분이 자세히 묘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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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병
“소대장님, 저기 앞에서 부스럭 소리가 들리는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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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대장
“그래? 베트콩이다! 쏴 갈겨!”

 

하지만 현장에 가보니 베트콩 대신에 무고한 양민들이 쓰러져 죽어있었다. 그리고 주위에는 남편의 시체를 붙잡고 오열하고 있는 젊은 부인과 쓰러진 노파, 신음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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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병
“이게 뭐야! 우리가 민간인을 죽인 거야?”

 

이미지_69소대장
“아냐, 총이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거야. 뒤져봐.”

 

하지만 아무리 뒤져도 이들은 선량한 민간인이었다. 순간 군인들은 모두 이성을 상실하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러자 소대장은 총검을 빼내어 살아남은 사람들을 향해 난도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병사들한테도 똑같이 민간인을 찌를 것을 강요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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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_69소대장
“빨리 해. 이 XX야. 어차피 죽여야 하잖아. 방법이 없잖아!”

 

결국 이런 식으로 한 사람의 무고한 양민이 희생되면 입막음을 위해, 집단 전체를 몰살해야만 하는 참극이 자행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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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신병일 때는 목에 칼을 대고 강요를 해도 쉽사리 선량한 사람들을 쉽게 죽이지는 못한다. 하지만 이후 서서히 전쟁에 익숙해지면 곧 야수로 변신하고 말았으니, 당시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이규봉, 『미안해요! 베트남』, 201쪽.)

한 병사가 5~6살 된 현지 꼬마에게 손을 내밀었다. 꼬마의 어머니는 이미 군인들 손에 주검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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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
“자, 아저씨가 사탕 줄 테니 받아.”

 

순진한 꼬마는 손을 내밀었는데, 그때 병사는 일어서서 가슴에 대고 총을 탕! 하고 쏴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아이의 시체를 발로 툭 걷어차 버렸다. 그리고 병사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이렇게 입을 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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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
“어차피 베트콩 자식인데… 나중에 애비 애미 원수 갚겠다고 덤벼들지도 모르잖아요.”

 

그런 이유로 멋모르는 어린 아이까지 죽여야만 했을까?

1965년 1월 트이프억현 떤장 촌에서 맹호부대원들은 수색 도중에 베트콩에게 아군 1명이 사망했다는 이유로 인근 마을로 내려가 대대적인 복수를 자행했다. 이때의 학살 기록은 마을의 증오비에 잘 나타나 있다. (이규봉, 『미안해요! 베트남』, 1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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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_65한국군 증오비
“태어난 지 이틀밖에 안 된 갓난아이가 군홧발에 짓이겨진 채 엄마 가슴 품에서 죽었고, 임신 8개월 된 부인은 총격으로 자궁이 밖으로 나온 채 죽었다.”

이미지_65“한 병사는 한 살배기 어린아이를 죽인 뒤, 아이의 머리를 잘라 땅에 내동이치고 남은 몸통은 여러 조각으로 잘라 버렸고, 두 살배기 아이는 목을 꺾어 죽였다.”

 

식사 한 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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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은 보복을 위해서만 민간인을 살해했던 것이 아니었다. 1968년 이후 청룡부대의 초소가 세워진 주이쑤엔 현 쑤엔타이 촌에는 평소에도 한국군에 의한 강도·강간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었으니, 오죽했으면 농민들은 들로 일하러 나갈 때면 집안의 돈을 모두 싸 들고 일터로 나가곤 했다. 돈을 집안에 두었다가 한국군에게 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규봉, 『미안해요! 베트남』, 163쪽.)

강간 범죄도 극심해서 한국군이 주둔하는 동안에만 18명의 여자들이 집이나 들판에서 강간을 당한 뒤 살해되었다. (이규봉, 『미안해요! 베트남』, 163쪽.) 특히 작전 지역에서 여자들이 접근하는 경우에는 여지없었다. 당시 참전 병사의 증언이다.

 

이미지_72참전 병사
“이른 아침이면 소대가 매복을 나갔어요. 한번 나가면 하루 종일입니다. 분대별로 흩어져 죽 때리다가 해가 져서야 귀대했죠. 그런데 우리나라처럼 베트남 사람들도 산으로 나물을 캐거나 나무 열매를 따러 옵니다. 그러면 분대끼리 무전기를 때립니다.”

이미지_72“여자 한 명이면 ‘식사 추진, 식사 추진, 1인분’이라고 하죠. 만약 남자라면? 보고 후 바로 쏩니다. 작전구역에 무단으로 침입했으니까요. 무조건 베트콩으로 간주하는 거죠. 하지만 여자는 안 쏘고 기다립니다. 매복지점 바로 앞까지. 그리곤 덮치죠. 강간합니다. 집단으로 윤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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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_72“그러면 다른 매복조에서 무전을 막 때립니다. ‘너네만 먹냐. 이쪽으로 배달하지 않으면 우리가 먹으러 간다’고요. 소대장이 있지만, 제지를 안 합니다. 못 합니다. 사병들이 더 고참이고 M16을 가졌잖아요.”

 

이미지_72“그렇게 식사가 끝나면, 여자는 그냥 쏴 죽입니다. 증거를 없애야 하니까. 중대엔 베트콩을 사살했다 보고하죠.”

 

1969년 10월 카인호아 성에서는 백마부대 소속의 군인 한 명이 현지 여성을 희롱하다가 절의 주지승에게 쫓겨나자, 이에 격분하여 다시 찾아와서 총기를 난사해 절의 스님 4명을 사망케 한 사건이 AFP 통신을 타고 해외토픽으로 보도되기도 했었다. (이규봉, 『미안해요! 베트남』, 2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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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잔인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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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에 참전한 군인들은 중대장급은 대개 1935년 전후에, 일반 사병들은 1945년 전후에 출생한 이들이었다. 이들은 한국전쟁을 체험하고 철저한 반공교육 속에서 살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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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가난하고 불행한 이유는 김일성이랑 빨갱이 때문이다!”

“맞아! 빨갱이는 찢어 죽여야 마땅한 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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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이런 사상교육을 귀가 닳도록 받고 자랐었다. 때문에 ‘이념의 전쟁’이라 믿고 참전했던 베트남 전쟁에서 그들은 ‘반공’이라는 명분으로 더욱 대담하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군인들이 악마로 변해가던 모습을 한 참전 군인은 이런 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규봉, 『미안해요! 베트남』, 202~203쪽.)

 

이미지_72참전 군인
“배치된 지 며칠 되지 않은 신병들은 포로로 잡아 온 여자 베트콩을 칼로 찔러 죽이고 귀와 유두와 음부를 도려내라는 명령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대개는 하지 못하죠. 죽일 수 없다고 울며 거부합니다. 이때 분대장이 총구를 신병 머리에 갖다 대는 겁니다.”

이미지_72” 그러면 어쩔 수 있나요. 살기 위해 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칼로 찌르고 도려내고 나면 수류탄을 던져서 증거를 없애 버리는 겁니다. 그걸 하고 나면 신병은 거의 미친 상태가 되어 버리죠. 하지만 이때부터 정상적인 사람도
어느새 야수로 변하게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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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사람을 직접 죽여봐야 사람 죽이는 걸 예사로 아는 법이다. (이규봉, 『미안해요! 베트남』, 201쪽.) 게다가 한국군은 대체로 통역관을 수행하지 않아 현지 민간인들과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했고, 그런 만큼 병사들은 낯선 환경에 대한 공포가 더욱 만연해서 쉽사리 이성을 상실하고 극단적으로 행동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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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콩은 표시 없다

하지만 실수로 살육을 하더라도 그것은 곧 베트콩을 해치웠다는 전공으로 둔갑했고 상부에서도 이를 묵인했기 때문에, 학살에 대한 죄의식은 금방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니 병사들은 희생된 민간인들을 민간인으로 변복한 베트콩이라고 한사코 자기최면을 걸면서 스스로를 정당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구수정, 「아 몸서리쳐지는 한국군」, 『한겨레 21』 1999년 5월호.)

공산당은 우리 민족의 원흉이자 마땅히 타도할 대상이기 때문에 목을 베거나 창자를 끄집어내거나, 산채로 불에 태우거나, 독가스를 분사해 질식사시키거나, 임산부의 태아가 나올 때까지 군홧발로 짓밟고 한 줄로 세워서 M16의 화력 실험을 하는 식의 광기로 가득 찬 만행들 속에서도 죄책감을 덜 수 있었던 것이다. “타도하자 베트콩”, 그것은 그들에게 내려진 지상명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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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월장병들의 증언

하지만 당시 파월 장병들 역시 피해자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유수호’라는 미명하에 남의 나라 전쟁터에서 싸워야 했던 군인들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저 국가의 명령으로 전쟁터로 보내졌을 뿐이었다.

그리고 50년이 지난 지금 그들에게는 가해자라는 멍에와 참혹한 기억들이 남아있다. 당시 파월 장병들의 증언이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4년 3월 28일 자)

 

이미지_17이재길 (66년, 맹호)
“피를 보게 되면 한국 사람들은 그래요.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살의가 올라버려요. 그럴 때 중대장이 시계를 기념으로 건다거나 하면서 (학살) 명령을 내리는 겁니다.”

 

이미지_18모행원 (66년, 백마)
“살아도 찢어 죽여야 해요. 총으로 쏴 죽이지 말고… 베트콩을 잡으면 칼로 찢어 죽이자! 중대장이 그렇게 명령했어요.”

 

이미지_12김영삼 (70년, 맹호)

“중대에 보고하니깐 발모가지 하나 잘라오라고 했어요.”

 

image송중식 (71년, 백마)
“아, 전쟁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이럴 수가 있는 것일까? 하면서 많이 괴로워했죠. 지금도 어떤 때 월남 꿈을 꾸고 나면 공포증이 생기고 막 그럽니다. 나이 먹을수록 그럽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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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병사의 일기 :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되고 또 무시당하는 전쟁이란 무엇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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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학 (69년, 맹호)
“군대 생활하는 꿈만 꾸면 악몽입니다.”

 

반세기가 지난 베트남전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저 잊혀진 전쟁일 뿐이지만, 이렇듯 당시 파병 장병들에게는 더욱 또렷해지는 아픈 상처인 것이다. 게다가 베트남인들도 그런 사실을 절대 잊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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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비에는 이런 문구가 유독 많다. ☞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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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찌를 죄악, 만대에 기억하리라.”

원문: 만쭈리님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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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pss.kr/archives/65738/feed 0
‘국민소득 1천불·수출액 100억불’의 비밀: 재벌 특혜, 가족계획, 똥값이 된 달러 https://ppss.kr/archives/61203 https://ppss.kr/archives/61203#respond Tue, 29 Dec 2015 02:41:40 +0000 http://3.36.87.144/?p=61203 지상목표 국민소득 1천 불, 수출 100억 불

72년 유신체제가 선포될 때 정부는, “10월 유신, 100억 달러 수출, 1,000달러 소득” 을 되풀이하며 강조했다. 그리고 73년 1월 12일 유신 첫해, 박정희는 연두교서를 통해 국민들에게 이런 공약을 했다.(오원철, 『한국형 경제건설』 7권, 559쪽.)

 

박정희_얼굴

박정희
“앞으로 중공업을 육성하여 경제발전에 박차를 기하도록 할 테니, 지금은 좀 더 허리띠를 졸라맵시다. 그렇게만 한다면, 80년대 초에 국민소득 1,000달러,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시키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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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 ‘국민소득 1천 불, 수출 100억 불’은 대한민국 선진화의 상징과도 같았고, 지상목표이자 희망의 메시지인 동시에

농민

국민
“국민소득 1천 불, 수출 100억 불 시대가 되면 우리나라도 선진 대열에 낄 수 있다나 뭐라나…”
“그때가 되면 모두가 자동차를 몰고 다니게 된다지, 아마?”

‘억압’을 정당화하는 구호로도 사용되게 되었다.

정부정부

“지금이 어느 때라고 임금인상 타령이야!”

 

당시 국민소득 1천 불과 수출 100억 불의 목표 시점은 81년. 언론을 통해 하도 들어서 귀에 더께가 앉을 정도라서, 국민들은 이때가 되면, 정말로 이상향이라도 건설되는 것처럼 착각이 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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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에 총력, 국민소득 천 불·수출 백억 불

그런데 실현 시기는 예상보다 빨랐다. 8년 후로 생각되었던 달성 시기가 그 절반인 4년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77년 말, 대망의 목표였던 수출 100억 달러와 1인당 소득 1천 달러의 고지를 동시에 점령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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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77년 12월 22일에 있었던 수출의 날 행사는, 전에 없던 성대한 팡파르가 울려 퍼지며 국가적인 축제로 행해졌다. 이날 박정희는 이렇게 말했다.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70년대 편』 3권, 102~103쪽.)

 

박정희_얼굴

박정희
“1964년 1억 불, 1970년 10억 불, 그리고 올해에 드디어, 100억 불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그동안 정부와 우리 국민들의 피땀 어린 노력과 의지의 결정이요, 승리인 것입니다. 10억 불에서 100억 불이 되는 데 서독은 11년, 일본은 16년이 걸렸지만, 우리 한국은 불과 7년이 걸렸습니다.”

 

외신들도 한국의 고도성장에 일제히 찬사를 보내고 있었으니…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춘 지는 77년 9월호에서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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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1인당 GNP는 지난 15년 동안에 무려 8배 이상 증가했다. 이러한 성장은 무엇보다 내핍적이고 수출 지향적인 정책에서 이룩된 것이었다. 한국인은 주당 50.7시간을 일해, 지구 상의 다른 어떤 국민들보다 더 많이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100억 불 수출 공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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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하필 100억 불 수출 공약이 나왔던 것일까? 유신의 구호로 외쳤던, ’10월 유신 1,000불 국민소득’과 함께 이왕에 ‘100억 불 수출’ 이면 입에 쫙쫙 달라붙기는 했다. 그런 상징적인 효과와 더불어, 박정희는 ‘중화학공업’이라는 혁신 산업에 내심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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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5월 서울에서 무역확대진흥회가 열리던 때의 일이다.
(오원철,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 강국을 만들었나』, 135~144쪽.)

박정희_카툰

박정희
“이봐, 오 수석. 80년대 초까지 수출 56억 불을 목표로 한다고 했지?”

 

오원철

오원철
“실적으로 그렇게 될 듯합니다.”

 

박정희_카툰

박정희
“그거 가지고 선진국 될 수 있겠어? 한 100억 불 정도 수출할 수는 없어?”

 

당시 100억 불이면 우리나라 전체 GDP와 맞먹는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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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박정희_카툰박정희
“그게 뭔데?”

 

오원철오원철
“중화학공업 생산품을 수출하면 됩니다. 일본도 57년 중화학공업으로 전환하면서 10년 뒤에 수출액 100억 달러를 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빠른 수출 성장을 위해서라면 중화학공업으로 전환해야만 합니다.”

박정희_카툰박정희
“음…”

 

그리하여 정부는 ‘중화학공업 정책’을 선포하고 각종 세금 우대, 특혜 금융 등의 막대한 지원을 하게 되었다, 수출, 그것도 이왕이면 중화학공업 관련된 사업이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막대한 특혜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특혜는 재벌의 ‘문어발식 경영’만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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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한정된 자원을 ‘선도 기업’에게 밀어줘서 먼저 성장부터 시키고 분배는 나중에 생각해보자는 식의, 경제학에서 흔히 말하는 ‘불균형성장론’의 신봉자였다. 때문에 노동자들에게는 희생을 강요하고 쥐어짜면서도 재벌에게는 막대한 혜택을 베풀며 정부가 쳐준 우산 속에서 무럭무럭 성장하기만을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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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만 더 기다려봐. 곧 낙수효과가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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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박 정권의 경제정책은 곧 ‘재벌 육성정책’이기도 했다. 실제로 유신 전후로 매년 한 건씩 메가톤급 정책을 터뜨리며 열심히 재벌들에게 퍼줬던 정부였다.

83조치

① 72년 8.3 긴급경제조치참고
“기업들은 사채 빚 당분간 갚지 마!”

73중화학공업화정책

② 73년 중화학공업화정책참고
“중화학공업 사업하면 각종 특혜를 주겠다능!”

528특별조치

③ 74년 5.28 특별조치
“모든 기업들은 제도 금융시장을 이용하라능!”

종합무역상사제도

④ 75년 종합무역상사 제도
“수출 열심히 하면 대출금리 팍팍 줄여주겠다능!”

어떻게 말인가? 먼저 ‘5.28 특별조치’를 설명하자면 이렇다. 정부는 8.3 긴급조치로 지하금융인 사(私)채 시장을 때려 부순 만큼 그걸 대신할 기구로 ‘투자신탁’, ‘신용협동조합’ 따위의 전문적인 투융자 기관을 만들어서 이용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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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자, 앞으로 돈놀이하고 싶은 큰손들은 명동의 불법 사채시장 같은 곳에 기웃거리지 말고… 앞으로 투신사를 통해 돈을 맡기도록 하라능. 또 돈을 꾸고 싶은 사람은 투자신탁을 찾아가면 되겠다능.”

하지만 투신사들은 함부로 돈을 꿔주는 법이 없었다. 대기업들이야 간판을 믿고 쉽게 돈을 꿔줬다지만, 중소기업에게는 까다로운 요구가 있었던 것이다.

데헷

중소기업
“저 돈 좀 꾸러 왔는데염.”

 

심각투신사
“회사 상태가 어떤지 알아야 하니 먼저 재무제표를 보여주세요.”

 

좌절중소기업
“뭐? 재무제표요? 아놔…”

 

사실 당시 중소기업들은 대부분 막대한 빚을 지고 사업을 하던 상황이라서 회계학적인 관점으로 보자면, 대부분 ‘부실기업’의 꼬리표를 떼기 어려웠다.

심각

투신사
“헐! 무슨 부채비율이 이리 높은 거죠? 우린 돈을 꿔줄 수 없겠네요.”

 

좌절중소기업
“ㅠㅠ”

 

때문에 돈을 꾸지 못한 중소기업들은 줄줄이 휘청거렸고, 재벌들은 이런 중소기업들을 하나둘씩 합병하여 계열사를 늘리거나 자신들의 하청기업으로 만들어 버리곤 했다. 그리하여 중소기업체 중 하청관계의 업체는, 66년 12.6%에서 80년 30.1%로 크게 늘어나게 된다. (역사학연구소, 『강좌근현대사』, 3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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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또 다른 선물은 75년에 선보인 ‘종합무역상사 제도’였다. ‘종합상사제도’는 일본의 것을 베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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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수출을 전문으로 하는 종합상사로 지정받으면, 시중 금리(15~19%)의 절반도 안 되는 싼 금리(7~9%)로 돈을 꿔주겠다능.”

 

하지만 아무나 ‘종합상사’가 될 수 있겠는가? 천만의 말씀! 이것도 ‘돈’을 가진 재벌들만 가능한 일이었으니, 재벌들이야 특혜를 얻기 위해 너도나도 수출에 매달려 ‘종합상사’라는 타이틀을 쉽게 얻을 수 있었다지만, 중소기업들에게 그것은 그림의 떡과도 같았다. 재벌이 승승장구하는 만큼 중소기업들은 빠른 속도로 몰락할 수밖에 없었고,

“이미 대출 금리부터 달랐으니 시장에서 공정한 게임이 될 수 없었지.”

그렇게 휘청거리다 보면 재벌들이 날름 합병해버렸다. 그 결과 78년 기준으로 10대 종합상사 그룹들이 거느린 기업군은, 럭키 47, 대우 41, 삼성 38, 현대 33, 쌍용 20, 국제 24, 선경 27, 금호 10, 삼화 30 등 모두 304개 업체에 달했다. (역사학연구소, 『강좌근현대사』, 339~340쪽.)

다운로드 (2)그러니 빈부 격차가 얼마나 심각해졌겠는가! 73~78년간 GDP 성장률은 연평균 9.9%였지만 같은 기간에, 46대 재벌사의 성장률은 무려 ‘연평균 22.8%’에 달했다. 6년 동안 재벌들은 평균 3.5배씩 덩치가 커진 셈이다. 그 결과 GDP에 대한 46대 재벌 비중은, 불과 6년 사이에 73년 9.8%에서 78년 17.1%로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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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재벌이라도 상위에 속한 재벌일수록 더 빨리 성장했으니, 하위 25개 재벌의 연평균 성장률은 12.8%인 데 비해, 상위 5대 재벌의 성장률은 연평균 30.1%에 달했다. (사공일, 『세계 속의 한국경제』, 88~89쪽)

현대, 삼성, 럭키, 대우 등의 재벌들은 6년 만에 덩치가 5배씩 더 커졌다.

 

중동특수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정권의 ‘중화학공업 육성책’은 한동안 빛을 발하기 어려웠다. 73년 말에 터진 ‘석유파동’과 그에 따른 ‘글로벌 경기 침체’로 75년까지 오히려 이전보다도 더 중화학공업의 성장세는 주춤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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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놔

“아놔, 상황이 이런데 무슨 중화학공업에 투자하라는 거야. 회사 거덜 날 일 있어?”

하지만 그런 위기의 정권을 구원했던 것은, 전혀 예기치도 않게 ‘오일달러’로 벼락부자가 된 중동의 왕족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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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오일 달러 때문에 배 터지겠다.”

왕족2

“그런데 국민들에게도 나눠줘야 하지 않겠음?”

왕족2

“어떻게 하면 될까?”

왕족1

“보여주기 용도라면, 제일 티 나게 할 수 있는 건 다리, 도로 놓고 아파트 지어주는 거임.”

왕족2

“좋은 생각인데, 그거 다 만들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잖아.”

왕족1

“소식 못 들었어? 한국이 뭐든 빨리 만든다잖아.”

왕족2

“한국? 거기서 만든 고속도로가 날림공사라는 소문이 있던데?”

왕족1

“뭐 어때. 일단 빨리 만들고 나서 보수공사를 하면 되는 거지.”

덕분에 한국은 예상치도 못한 엄청난 달러벌이를 하게 된다. 한일협정이 8억 불, 월남특수가 10억 불이었는데, 중동특수는 무려 400억 불이었다. 75년 건설 수주액이 7억 5천만 달러였는데, 78년에는 81억 달러로 늘어나게 되었으니, 당시 우리나라 수출 총액의 40~60%에 달하는 엄청난 수치였던 것이다. (김영사, 『세계 속의 한국경제』, 21쪽.) ☞ 참고 (해외건설수주는 경상수지 중 서비스수지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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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수출액 100억 불 신화는 중동특수가 없으면, 절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울러 수출액 100억 불이 달성되던 당시, 누적 적자액이 총 160억 달러에 달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정권은 수출 100억 불 달성을 화려하게 치장했지만 2년 뒤 수입액은 200억 불을 돌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빚을 져서 매출을 늘렸던 셈.

 

수출금융의 맹점, 율산 그룹 사건

당시 워낙 ‘수출 기업에 대한 특혜’와 ‘중동 특수’가 엄청났기 때문에, 자본금 100만 원을 가지고 시작한 벤처기업이 3년 만에 자본금 100억 원과 14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재벌’로 성장하더니 갑자기 모래성처럼 무너져버린 희대의 사건도 있었다.

한국 경제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흥망사를 썼던 기업은 바로 20대 젊은이들이 모여 만든 ‘율산 그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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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은 중화학공업 특혜와 수출 기업 특혜, 그리고 종합상사 특혜라는 정권의 각종 특혜만을 쫓아 단물을 빨아들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말인가?

먼저 율산그룹은, 쿠웨이트에 시멘트를 팔아 짭짤한 돈을 만지더니, 종잣돈이 생기자 그 돈으로 아예 화물선을 사서 자신들이 직접 시멘트를 운송하면서 막대한 폭리를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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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 관련 사업에 중화학공업 관련된 것이라 ‘금융혜택’에 ‘세제혜택’까지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현금이 모이기 시작하자 당시 여느 재벌들이 그러했듯이 율산은 건설, 의류, 전자 시장으로 문어발식 확장을 시작하게 되었고 78년에 ‘종합상사’로 지정되면서 재계를 깜짝 놀라게 하게 됐다.

하지만 승승장구는 딱 거기까지였다. 막대한 빚을 져서 이룩한 기업인지라 수입선이 막히면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었으니, 만기가 된 어음을 결제하지 못해 자금난에 허덕이다가 결국 그룹을 채권단이 공동관리하게 되면서 그동안의 은행 부채가 1,523억 원에 달한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 (현재가치로 2조 원이 넘는 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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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아! 이거 순 빚으로 쌓은 모래성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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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종합상사가 되고 나니 너무나 쉽게 돈들을 꿔줘서리.”

7년형을 선고받았고, 율산은 계열사 전체가 부도처리 되었다. 당시 재벌들이 얼마나 쉽게 부를 축적할 수 있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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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산그룹 신승호 회장. 출처: 헤럴드PHOTO

 

국민소득 1천 불의 의미: 1인당 소득을 늘리기 위해

한국에서 가족계획은 군사정권이 들어선 1962년부터 시작되었다. 60년대의 슬로건은 “덮어 놓고 낳다 보면 거지 꼴을 못 면한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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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유신정권 들어서 가족계획은 단순한 슬로건에서 벗어나 ‘국가의 정책’으로 적극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이때 슬로건은 좀 더 구체적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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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80년대에 들어서면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로 절정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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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구호 뒤에 국가는 남자들에게 정관 수술을 강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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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군 훈련받기 귀찮지? 이번에 안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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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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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 수술을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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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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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새마을운동 사업과 연계되어, 시골의 마을회관에서는 지도 요원들이 나와서 연일 ‘가족계획’의 필요성을 설파하고 각종 피임 방법을 가르쳐 주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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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잘살아보세> 중

하지만 당시만 해도 농촌의 인식은 자식은 다다익선이라는 고정관념이 많았던지라 마을의 노인들이 지팡이를 휘두르며 가족 요원들을 쫓아내는가 하면, 피임 학습을 받으러 나온 며느리를 시어머니들이 손 붙잡고 데려가기 일쑤였다. (여성신문사, 『20세기 여성 사건사』, 1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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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잘살아보세> 중

할머니

“시방 남의 집 귀한 대를 끊으려는 겨 뭐여?”

때문에 정부의 뜻대로 원활히 이루어지기는 힘들었다. 그런데 왜 정부는 이토록 인구정책에 집착했던 것일까? 당시 경제기획원 담당 사무관 조남홍의 말이다. (주태산, 『경제 못 살리면 감방간데이』, 83쪽.)

조남홍

조남홍
당시 인구증가율이 연 2% 이상이어서 1976년까지 1.8%로 낮추겠다고 계획했더니, 부총리가 1.3%로 낮추라고 호통을 쳤어요. 그래야 1인당 소득이 높일 수 있다는 것이었죠. 하지만 연구 용역을 맡았던 서울대 측은 1.5%도 힘들다고 했어요.

그래서 결국 1.5%로 낙착이 되었고 그 목표를 지키기 달성하기 위해서… 정관 수술 시 보상금 지급, 콘돔 무료 배포, 산아제한 홍보 등의 각종 프로그램이 시행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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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잘살아보세> 중

 

가족계획운동의 여파

그 결과 70년대 우리나라의 인구증가율은 급격히 낮아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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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별 인구증가율 (단위 : %)

당시 가족계획의 홍보를 위해 TV 드라마에서도 부부는 두 자녀 이하만을 갖도록 설정이 되어야 했고, 우표·담뱃갑·극장표·통장·주택복권은 물론 버스·택시·지하철·기차 구내 등 일상 공간마다

“적게 낳아 잘 키우자”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내일이면 늦으리! 막아보자, 인구폭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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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의 가족계획에 관한 표어가 부착되었다. 또 도시마다 ‘인구 탑’을 세워 매일 증가하는 인구수를 보도록 했었다.

76년부터는 두 자녀가 있는 가구에는 소득세를 감면해 주었고, 둘 이하를 낳고 영구 불임수술을 한 경우에는 공공 주택 할당 및 금융 대출에 우선순위를 주었으며 그 자녀들에게는 취학 전까지 의료혜택을 주었다. 심지어 영세민들이 불임수술을 받을 때는 금전적인 혜택까지 주었다. (여성신문사, 20세기 여성 사건사 p.177)

다만 당시 가족계획 요원들은 군 보건소로부터 정해진 목표량을 달성해야 했기 때문에, 실적으로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곳곳에서 잡음이 많았다. 하지만 결국 군사정권 특유의 밀어붙이기식 정책 덕분에 우리나라의 출산력은 빠른 속도로 감소할 수 있었고 전두환 정권에서도 이를 고스란히 답습했기 때문에, 80년대 후반 우리나라의 인구증가율은 재생산 수준에도 못 미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 재생산 수준이란?

재생산율은 한 여인이 평생 여아를 몇 명 낳는가 하는 것으로, 한 나라의 인구가 장기적으로 유지되려면 최소한 재생산율이 1은 넘어야 한다.

90년대 초반 우리나라의 인구 증가율은 1% 미만으로 감소하였으며 출산율로는 1.6으로 떨어졌다.

  • 출산율이란?

한 여성이 15~49세 가임기간에 낳은 평균 출생아 수.

그리고 2001년의 출산율은 1.30으로까지 낮아졌으니, 이는 미국(2.13), 영국(1.64), 일본(1.33)보다 더 낮은 수치였다. (한국일보, 2002년 8월 28일 자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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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출산율은 전 세계 186개국 중 184위다.

 

장래를 생각하지 않은 근시안적인 정책

이러한 가족계획은 정권의 바람대로 ‘1인당 소득’을 빠르게 끌어올릴 수 있어 공약 실천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 1인당 소득증가율 = 경제성장률 – 인구증가율

또 자식이 적어지다 보니 딸에게까지 교육의 혜택이 돌아가 여성의 취학률이 급격히 높아져 1970년 남자 37%, 여자 24%였던 고등학교 진학률이, 1990년에는 남녀 모두 97%로 증가하게 된다. (여성신문사, 『20세기 여성 사건사』, 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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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보다 잃는 것이 훨씬 컸다. ‘인구증가율 감소’는 산업화가 진행되면 자연스레 나타나는 현상이거늘, 그걸 인위적으로 건드려서 20년 뒤에나 찾아올, 저출산·고령화 현상을 미리 앞당겨 우리나라의 잠재성장률을 크게 깎아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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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잠재성장률 추이

자고로 ‘인구 1억’은 있어야 오타쿠 같은 마니아층을 위한 전문 산업도 나타날 수 있고, 수출 의존도에서 탈피하여 ‘내수’로 살아갈 수 있다고들 하는데, 5천만의 한국 소비시장으로는 기업이 제대로 성장하기가 어려운 게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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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DP 대비 수출의 비중 : 동아시아와 동남아 국가의 비교

쉿

“에잇! 우리나라 인구밀도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잘난척

“모르는 소리. 우리나라의 90%의 인구가 국토 2%의 땅에 몰려 살고 있다능.” ☞ 참고

헐

“아!”

잘난척

“우리나라 평균 인구밀도의 33배가 넘는 서울에 살면 많이 불편함?”

쉿

“…”

사실 인류 역사가 도래한 이래로 인구는 곧 국력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초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인구는 세계 10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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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미국의 인구가 900만 명이었다 세계 인구 Top 10 국가. 출처: 매디슨 논문

1820년 한반도 남쪽의 인구만 계산해도 전 세계 인구의 약 1%를 차지했었다. 하지만 현재는 0.67%로 줄어들었고, 2050년도에는 0.45%로 비중이 줄어들게 된다. ☞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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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0년의 경우 북한 인구를 포함 : 제외하면 약 970만 명으로 추산 (단위: 만 명)

그만큼 한국의 미래 국력도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이미지_56“한국? 우리 인구의 1/3밖에 되지 않은 나라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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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우리보다 경제규모가 낮은 나라?”

 

 

미국 달러의 약세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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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가족계획’의 효과와 ‘중동특수’에 힘입어 우리나라는 예상보다 4년 빨리, 대망의 국민소득 1천 불을 달성했다. 하지만 정부가 호언 한 대로 선진국이 되었는가?

농민

“어림 반푼도 없는 소리!”

여전히 한국은 경제적으로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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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당 소득 1천 달러가 넘었던, 1977년 서울의 한 골목

1인당 국민소득의 순위는 73년에 84위에서, 78년에 78위로 겨우 1년에 한 계단씩 상승했을 뿐이다. (경향신문, 1978년 5월 3일)

한국이 4년 만에 420달러에서 1천 달러를 넘겼을 때, 일본은 3,900달러에서 8,700달러로 상승했다. 당시 전 세계 대부분 국가는 모두가 폭발적으로 1인당 소득이 상승했다.

그 이유는 오일쇼크 이후 미국의 경제가 심각하게 나빠져서 미 달러에 대한 기피 현상으로 달러화가 약세를 면치 못했기 때문이다. 72~78년 기간 중, 미 달러의 가치는 영국 파운드화에 비해 27%, 일본 엔화에 비해 20% 이상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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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당시 원화 가치는 지나치게 고평가되고 있었다. 어떻게?

73~77년 동안 연평균 인플레이션율은 미국은 7.8%, 한국은 15.2%였다. 때문에 한국의 원화는 미국의 달러에 비해 매년 7.4%씩 가치가 떨어져야만 했다.

한해 15%씩 물가가 상승했다는 말은 돈의 가치가 15%씩 떨어졌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1973년도의 100원은 1977년에는 50원의 가치밖에 안 된다. 그런데 1973년의 1달러 400원의 환율은 1977년에는 484원으로 20%밖에 오르지 않았다. ☞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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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별 환율 : 1980년 이후에야 환율을 조정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는 경제 성장이 전혀 없었다 하더라도, 1973년에 총 1,000억 원어치 물건을 생산해냈다면

쉿_정부

“흠, 1달러 400원이니 GDP는 총 2.5억 불이겠군.”

1977년에는 총 2,000억 원어치로 평가되어

웃는_정부

“흠, 1달러 484원이니 GDP는 총 4.1억 불이겠군.”

1.6억 불 소득이 늘어나버리는 괴상한 일이 발생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74년에 환율을 484원으로 정한 뒤, 79년까지 전혀 변동시키지 않았다.

쉿_정부

“지금 석유값이 금값인데 환율을 높여봐. 기업들 죽어난다능. 수출이야 뭐 대부분 중동 특수가 해주고 있는데 뭘…”

그런데 만약 이러한 ‘거품’을 뺀다면, 즉 환율을 현실에 맞게 조정했더라면 실제로 1977년 한국의 1인당 소득은 774달러가 되어야만 했다. 73년부터 77년까지 한국의 물가상승률이 미국보다 1.43배 더 높았으니 말이다.

역시 마찬가지로 수출액 100억 불은 실제로는 70억 불이었던 셈이다.

 

국민소득 1천 달러 시대인데 왜 달라진 게 없는가?

77년 그렇게 국민소득 1천 달러를 넘겼는데, 사람들은 도저히 실감할 수 없었다.

민중1

“뭐지? 1천 불 시대가 오면 선진국이 될 거라고 하지 않았어?”

민중2

“그러게…”

민중2

“누구나 자동차를 몰고 다닐 거라며?”

민중1

“젠장, 국민소득 1천 불 아무것도 아니었네…”

당시 언론들도 미 달러 약세의 영향으로 예상보다 빨리 찾아온 국민소득 1천 달러 시대가 뻘줌했는지, 이러한 기사들을 싣곤 했다. (동아일보, 1978년 2월 21일 자)

“작년 말 우리나라는 국민 소득 1천 달러를 넘긴 것으로 밝혀졌다. 프랑스는 53년, 서독은 54년, 일본은 66년, 대만은 2년 전에 1천 달러를 넘긴 바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각기 그해의 달러 가치로 1천 달러를 넘어선 것이고, 가치가 크게 떨어진 지금의 미화로 따지면, 각국의 소득액은 이보다 훨씬 높은 것이다. 거꾸로 그때의 달러 가치로는 따지면 우리의 소득은 1천 달러가 훨씬 안 되는 셈이다.”

다른 신문은 우리나라의 환율을 현실에 맞게 올리자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매일경제, 1979년 9월 4일 자, 1면)

“우리나라는 74년부터 1달러 484년으로 환율을 고정하고 있는데, 이는 현실적인 수치보다 43%가량 낮게 평가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구체적으로 우리나라는 75년부터 올해 5월까지 물가가 총 66.2% 올랐지만, 주요 선진국들은 같은 기간 중 평균 22.5%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니 1달러 695원이 타당하다.”

하지만 정권은 환율을 조정하지 않았다.

원문: 만쭈리님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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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운동과 함평 고구마사건 https://ppss.kr/archives/61209 https://ppss.kr/archives/61209#respond Wed, 18 Nov 2015 06:02:33 +0000 http://3.36.87.144/?p=61209 농협의 배신

1976년 11월 어느 늦가을, 전남 함평군의 한 시골 마을. 포대에 담긴 고구마가 길거리에서 썩고 있었다. 그런데도 농민들은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아이고, 으짜쓸까…”

그해 함평에서 생산된 고구마는 전년보다 25% 더 수확량이 많았다. 농협에서 이렇게 꼬드겼기 때문이다.이미지_14

농협: 작년에 고구마가 크게 흉년이 들어서 올해는 고구마 수요가 많아질 거라고 허니. 올해는 안심들 하고 고구마 농사 많이들 지으쇼잉. 수확한 건 빼깽이로 맹글지 말고 걍 고대로 넘기시고들.

농민: 아 그럼 좋지라. 근디 얼마나 쳐줄랑가요?

농협: 고로코롬만 혀면, 가마니당 1300원 씩 쳐줄랑게요.

농민: 으따, 1300원이면 솔찬히 좋구마요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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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깽이 만드는 모습. 출처: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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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고구마 ‘빼깽이’

‘빼깽이’는 얇게 썰어 말린 건고구마를 말했다.당시 수확된 고구마는 주로 에탄올(술)을 만들기 위해 소비되었기 때문에 장기간 보관하기 위해 빼깽이로 만드는 게 일반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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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카스’맥주를 만드는 진로그룹이 생산하던 진로소주

그런데 76년, 농협에서는 이례적으로 높은 값을 쳐주겠다며 생고구마를 원했던 것이다.때문에 이를 곧이곧대로 믿은 농민들은 빼깽이로 만들지 않고 포대에 생고구마 그대로 담아, 운송하기 편리하게 도로변에 쌓아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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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을 듣고 상인들이 고구마를 사겠다고 찾아왔지만,

상인: 저기요. 고구마 좀 팔면 안 되나요?

농민: 얼마나 쳐줄랑가요?

상인: 가마당 1200원 어때요?

농민: 1200원? 아따 농협에서는 1300원 쳐준다고 했어라. 그냥 가보쇼들.

그렇게 농민들은 상인들의 부탁을 들은 체 만 체했다.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정작 수매일이 되고 보니, 농협은 수확량의 40%만을 겨우 사들인 것이다.

농민: 시방 이것이 머당가요?

상인: 올해 고구마가 지나치게 풍년이라서…

농민: 아니, 이제 와서 그딴 소리혀면 어떡한데요? 농협만 믿고 안 팔고 그동안 버텨왔는데, 시방 장난하는 거요, 뭐요?

그렇게 시장에 내다 팔 마지막 기회마저 놓친 농민들이었다. 때문에 노천에 방치한 고구마는곧 썩어들어가기 시작했고, 농민들은 푼돈이라도 건져보겠다고 가마당 400원씩의 헐값으로 넘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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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를 한 농민들은 적었다

가톨릭농민회

농민들의 피해 소식을 듣고 당시 우리나라의 유일한 농민운동단체인 가톨릭농민회(가농)가 찾아와 ‘피해보상대책위원회’를 꾸렸다.
(박세길, 다시쓰는 한국현대사 2권 p.281)

농민: 시방, 우리 군(郡)의 피해가 총 얼마나 되능가요?

가농: 글쎄요. 계산을 좀 해봅시다. 고구마 농사를 짓는 집이 총 7천여 가구… 한 가구당 50 가마니씩 수확했다고 치고, 농협에서 제대로 수매해주지 않은 고구마가 가구당 30가마니 정도라고 할 때… 30가마니 중 20가마니가 헐값에 팔리고 나머지 10가마니는 썩혀서 버렸으니, 그렇게 따지면 한 집 당 2만원씩은 손해본 것 같네요.

그러면 7천가구가 피해를 입은 건 총 1억4천만 원이 될듯해요. ☞ 참고

농민: 아따 겁나게 많구마요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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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작 피해를 신고한 농민들은총 160가구,총 액수 309만 원에 그쳤다.

사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농협에서 ‘마을 이장’ 등을 앞세워 피해 농가를 찾아다니며 확인증을 반강제로 받아 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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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 김 씨 할아버지. 이번에 고구마로 피해봤다고 혔죠?

김 씨: 시방 말도 말랑게.

이장: 할아버지, 그란다고 너무 뭐라 하지 말더라고요.

김 씨: 뭐셔?

이장: 농협한테 밉보이면, 우리 마을이 우수 마을로 뽑히지 못한다는 거 몰라요? 고로케 되면 지원금도 떨어져뿔고 비료도 안 나온당게요. 교회놈들이 찾아와서, 피해 액수가 뭐니 물어보면 절대로 없다고 하더라고요.

김 씨: 아따… 뭔 놈에…

이장: 그럼, 여그다 확인증 좀 찍어주더라고요.

그런가 하면, 이미 피해보상을 밝힌 이들에게는 농협 직원들이 직접 찾아와 회유와 협박을 했었으니,

농협 직원: 이봐요. 박 씨 아저씨. 이번에 피해보상 대책위에 가입했다면서요.

박 씨: 피해봤응게, 가입한 건데 그게 뭐가 잘못이라요?

농협 직원: 아놔, 정말 모르시네. 그런데 함부로 가입하면… 나중에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잡혀갈 수 있다는 거 몰라요?

박 씨: 그게 뭔 말이라요?

농협 직원: 가농인지 뭔지 하는 애들 걔네들 알고 보면 순 빨갱들이에요. 선량한 농민들 이용해서 반정부 시위하려는 거라니깐요.

박 씨: 흐미! 진짜라?

 

 농민들의 시위와 정부의 비협조

사태 해결이 지지부진하자 가톨릭농민회는 77년 1월, 보고서를 작성해서 정부에 제출하는가 하면, 77년 4월에는 피해 농민들을 불러모아 광주의 한 성당에서 대대적인 규탄 시위를 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무책임한 농협은 당장 농민들의 피해를 보상하라!”

“보상하라! 보상하라!”

그러자 그제야, 당황한 농협이 반응했다.

농협: 으따! 자꾸 왜들 이러시는 거요? 직접적인 보상은 해줄 수가 없당게요. 그라면 우리(농협) 입장은 뭐가 되는겨? 대신 피해 농민들마다 15만 원씩 융자금을 지원해줄 수는 있는디…

하지만 농민들은 단박에 거절했다.

농민: 돈은 그동안 허벌나게 많이 꿔 써서 빚이 산더미나 되는데, 또 뭔 돈을 꿔 쓰라는 건지… 시방 우리는 직접적인 보상이 아니고는 아무 것도 받아들일 수 없당게요.

농협: 아놔, 그럼 맘대로들 해보슈!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열받은 농민들은 농협 전남 도지부로 몰려가 도지부장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이제 더 이상 참을 없응게, 어여 도지부장 조 나와보슈. 우리랑 면담 좀 해야 쓰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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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기동경찰대가 투입되어 농민들을 향해 공봉을 휘둘렀으니, 농민들은 강제로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때의 시위가 정부로 알려지게 되어 정부는 서둘러 조사반을 파견하게 된다. 그런데 이때 이들이 조사한 피해액은 당초 가농에서 예상한 액수보다 컸다. 또 농협 전남지부장이 TV를 통해 전량수매를 약속하고도 이를 이행하지 않았던 사실까지 추가로 밝혀냈다.

때문에 조사 결과에 농민들은 크게 고무되었지만,

“거봐. 농협이 잘못을 혔당게.”

“그라제. 곧 보상금이 나오겠구먼.”

정작 농수산부와 농협중앙회는 대책 해결에는 미온적이었다.

농민: 조사 결과가 나왔으면 얼릉 피해를 보상해 주랑게요. 지금 뭐다는 거라요?

정부: 어허, 이 사람들이! 지금 계속 조사 중이니, 소란 피우지 마세요.

농민: 시방 1년이 넘어가요. 언제까지 기다리라고만 혀는 건지.

정부: 그럼 100만원을 줄 테니 그걸로 타협을 보는 건 어때요?”

농민: 뭐여? 100만원? 시방 우리는 309만 원어치 피해를 봤다고 분명히 말을 했어라!

정부: 아놔, 그럼 기다려요.

77년 한 해는 그렇게 흘러갔다.

 

단식투쟁과 농민들의 승리

아무리 해도방법이 없었기에 가톨릭농민회는좀 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게 된다. 78년 4월,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로 결심하고 광주의 한 성당으로 피해 농민들은 물론이고, 천주교·기독교 교인들과 사회운동가들까지 합세하여 700여 명의 인원으로 시위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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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화신문

“벌써 1년 반이 지났다.”

“농협은 피해 농민들을 외면하지 말고 정당한 보상을 해달라!”

이어서 시위대는 거리 시위를 계획했지만, 경찰의 진압에 막혀 실패하고 말았고, 결국 성당 뜰에 앉아서 무기한 단식투쟁에 들어가기로 했다.

농민: 좋아! 정 그렇다면… 시방 우리들의 요구를 들어줄 때까정 단식 투쟁을 하겠구마잉!”

경찰: 아놔, 뭔 단식투쟁이야…

이에 경찰은 성당 출입문을 폐쇄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혹시 미사를 보기 위해 성당을 찾은 신도들이 새롭게 합세하여 시위 규모를 늘릴까봐 염려했던 탓이었지만, 덕분에 시위대는 완전 고립 상태에 빠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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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성당 구내마당에서 단식농쟁 중인 농민들. 출처: 시민의소리

그리고 그렇게 단식 5일째가 되자, 단식자 중 5명이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갔다.

경찰: 아놔, 이제 그만하고 해산들 하세요. 몸만 상합니다.

농민: 피해보상이 이뤄질 때까정 시방 우리는 절대로 단식을 멈추지 않겠어라.

그리고 단식 8일 째, 결국 당국은 농민들에게 손을 들고 말았다. 농협 전남지부에서 피해보상금 309만원을 가져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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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톨릭뉴스

농협: 자요. 돈 줄 테니 얼른 받아 가지고 가세요.

그렇게 해서 78년 5월, 농민들은 8일간의 단식농성을 풀고 농성 20개월 만에 1인당 19,300원씩을 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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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보상금을 받아가는 농민들. 출처: 시민의소리

 

309만 원 vs 80억 원

유신정권 시대, 정부는 ‘새마을운동’을 강조하며 ‘추곡수매제도’를 통하여 농가 소득을 보장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추곡수매가 뭥미?”

“농민들이 추수한 농산물을 시장에 내다 파는 게 아니라, 농협에게 직접 파는 것.”

하지만 이를 통해서 정부는 교묘히 농촌의 생산을 통제하고 ‘저곡가정책’을 시행할 수 있었다.

“농산물 가격이 전년보다 10% 올랐어도 물가는 15%씩 오르고 있었으니깐…”

그리고 그런 와중에 터졌던 ‘함평 고구마 사건’은 당시 파행적으로 운영됐던, 정부의 추곡수매 정책의 폐단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농민의 이익에 앞장서야 할 농협이 오히려 농민들에게 손해를 입히고도 자신들에게 책임을 물을까 봐, 피해보상 요구를 묵살하고 회유하는 행태는 농민들의 분노를 폭발시키기에 충분했다.

사실 농민들이 20개월 동안 시위를 하면서 겨우겨우 받아냈던, 1인당 19,300원의 돈은 결코 큰 돈이 아니었다. 당시는 초코파이 1개에 50원, 라면 1개 50원, 공무원 월급 10만원, 버스 안내양 월급 6만 원이던 시절이었다. (78년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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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안내양
출처: 웰빙뉴스

그런데도 농민들은 그 돈을 받겠다고 그토록 처절하게 투쟁을 했던 것이다.

한편 사건이 외부로 크게 알려지자 감사원의 감사가 이뤄졌는데, 이게 웬일인가! 농협이 양조회사와 결탁하여 고구마 수매를 이용해서 엄청난 돈을 유용했던 사건이 밝혀졌으니, 그로 인해 농협 공무원 658명이 줄줄이 옷을 벗게 된 것이다.

“농협은 고구마를 농민들에게서 직접 헐값에 수매했음에도, 중간 상인들에게 높은 값에 수매한 것으로 장부를 허위 날조해서 총 80억 원의 엄청난 폭리를 취했던 것임.”

“80억!”

“그런데도 309만원을 보상해주는 게 아까워서 저랬었다니…”

참으로 부조리한 사회였다. 참고로 함평고구마사건은 대한민국 건국 이래, 농민이 공권력에 맞서 승리한 최초의 ‘농민운동’이었다.

 

 ‘정치적 도구’였던 새마을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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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살아보기 운동’으로 알려진 새마을 운동은 실제로 농촌의 발전을 우선적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사실 당시의 경제성장 방법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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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산업이 선도적인 역할을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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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산업이 따라와 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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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산업은 다른 산업을 위한 ‘퇴비 역할’에 충실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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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1차 산업은, 저곡가정책을 통해 다른 경제구성원들에게 낮은 생계비를 보장해주는 한편, 도시로 값싼 인력을 공급해주기 위해 몰락한 농민을 양산해야만 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새마을운동은 실제로는 ‘잘 살아보기’운동이 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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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이 잘 살아봐. 그러면 도시는 구인난으로, 임금이 오르지, 그러면 물건 값이 오르지… 값이 오르면 수출이 줄어들지, 결국엔 경제성장률이 떨어지게 된다능.”

때문에 새마을운동은 경제적인 측면이 아닌, ‘정치적인 측면’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정부가 농촌이 가난한 이유를 구조적인 문제가 아닌, 농민의 무지와 게으름, 안일과 타성이라고 시도때도 없이 주입시켰던 이유도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70년대편 3권 p.124)

“농촌이 가난해? 그건 바로 농민들이 그만큼 무식하고 나태해서임.”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농민들의 자책감은 곧 훌륭한 ‘동원 이데올로기’로 활용되었으니. 정부는 농촌의 인프라를 닦는 일까지도 공짜로 농민들에게 강제 부역을 시킬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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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국민들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것은, 치안·국방·공공투자와 같은 공공 서비스를 도맡아서 하라는 이유에서인데… 그런 일까지도 농민들에게 떠넘겼던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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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당시 농민들은 커다란 불평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으니 새마을운동이란 가히
탁월한 ‘정치도구’였던 것이 분명하다.

 

 ‘외화내빈’의 새마을운동

하지만 정치적 목적이 과잉된 나머지 ‘외화내빈’이 되어버린 부작용도 많았다. 대표적으로, 초가 지붕을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꾼 사업이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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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 보기에, 빨갛고 파랗게 페인트 칠이 된 지붕은 농촌 근대화의 상징과도 같았다. 하지만 당시의 주택 개량 사업은 꼴랑 지붕만 바꾼 것이었지 초가집의 낡은 흙벽은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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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벽이 슬레이트 지붕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집이 기울어지고, 그걸 받치기 위해 처마 밑에 장대를 세우는 식의 거추장스러운 모습들이 여기저기서 속출하고 있었다.
(역사비평 1995년 여름호 p.94)

하지만 그렇더라도, 농민들은 대부분 지붕을 바꿨다. 낙후함의 상징이던 초가 지붕을 없애지 않으면, 공무원이 강제로 벗기던 시절이었으니 지붕 개량을 하지 않고는 도저히 버틸 재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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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초가집에서 지붕만 바뀐 집이 허다했다

그러나 지붕을 바꾼 자체가 소득 증대에 어떤 기여을 했단 말인가? ‘슬레이트 지붕’을 구입하려다가 농민들은 오히려 빚만 늘어났다. 이렇듯 농민의 실질적인 삶과는 동떨어진 채, ‘정권의 치적’을 드높이기 위한 전시행정의 사례는 당시 새마을운동의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수확량이 좋다고 통일벼를 심으라고 강요하더니… 비닐 하우스며 농약에 비료까지 오히려 예전보다 벌이가 줄어들었다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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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계 기만’을 통한 새마을운동 홍보

박 정권은 새마을운동을 통해 농촌이 도시보다 더 잘 살게 되었다는 선전 공세를 집요하게 해왔다. 특히 농가소득과 도시근로자 가구 소득을 비교해 볼 때, 1970~73년에는 농가 소득이 낮았지만, 74년 이후로는 농가 소득이 더 높아졌다는 통계 자료를 정권의 홍보 수단으로 사골처럼 우려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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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과연 사실인가? 조금만 파헤쳐 봐도 허점 투성이다. 정부가 제시한 소득은 1인당 소득이 아닌, 가구당 소득이었고

“읭? 시골은 대가족인데 도시는 핵가족이잖아.”

통일벼 흉년으로 농가가 휘청거리는 78년 이후로의 자료는 쏙 빠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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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산업의 연평균 성장률 : 70년후반 1차산업은 마이너스 성장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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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당 실질소득으로 볼 때, 농민들은 도시의 근로자 소득의 2/3에 불과했지만, 그런 소득계산 방식마저 엉터리였다.

김주숙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유신시대 농가 소득은 그야말로 엉터리 발표였다. 농가 소득에는 농업소득 뿐만 아니라 자산 소득까지 다 포함시키면서, 도시 근로자 소득은 오직 노동소득(월급)만 포함되어, 부동산 소득이나 금융소득은 전혀 포함되지 않았던 것이다.

또 도시 근로자의 경우 월수 35만원 이상의 고소득자를 제외했으면서, 농민 소득은 300평(1단보) 이하의 저소득층은 제외했다.”

(김주숙, 한국 농촌의 여성과 가족 p.79~81)

그러면서도 1인당 소득에서 도시 근로자가 훨씬 앞섰으니, 실제로 당시 농촌은 얼마나 가난했었단 말인가! 괜히 70년대 후반이 되어 1년에 70만명씩이나 되는 엄청난 이농인구가 발생하는 게 아니었다. 1년에 우리나라 인구의 2%씩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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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인구의 감소 : 서중석, 한국현대사 p.372

원문: 만쭈리님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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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떠나며: 해방 이후 조선땅에 남은 일본인들의 삶 ② https://ppss.kr/archives/55082 https://ppss.kr/archives/55082#respond Fri, 28 Aug 2015 06:55:39 +0000 http://3.36.87.144/?p=55082 ※ 「조선을 떠나며: 해방 이후 조선땅에 남은 일본인들의 삶 ①」에서 이어집니다.


조선에 눌러앉고 싶은 일본인들

1945년 9월 12일 경성 : 때아닌 조선어 강습 열기

경성 YMCA 청년회관 로비에는 어린 학생에서 백발이 성한 노인들까지 삼삼오오 모여들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바로 이들은 조선어를 배우기 위해 모인 일본 사람들이었다.

당시 강단에 선 일본인 강사는 이런 말로 강의를 시작했다.

 

5_시바타 겐조

센세 (대역)

“조국의 패전과 조선의 독립으로 발생한 현 상황은 비록 마음이 아프지만, 그렇다고 명연자실하여 넋 놓고 있기보다는 차라리 조선어를 배워 새로운 조선에 우리도 협력합시다.”

 

이렇게 수강생들을 격려했다.

당시 조선어 강좌는 1945년 9월 12일부터 3개월 과정으로 일주에 3회, 90분씩 진행될 예정이었다.

▲ YMCA 내부
▲ YMCA 내부

그런데 수강생을 모집하자마자 희망자가 정원을 넘어서는 바람에 1주일도 채 되지 않아 학급을 증설해야 할 정도였다.

 

미군에 대한 불안: 일본인 위안부를 모집하자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처음 2~3일 동안 매일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조선인들이 독립만세를 외쳐대는 통에 일본인들은 두려워서 집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다.

게다가 북한에는 이미 소련군이 진주해 있었고 인천에도 곧 미군이 상륙한다는 소문이 돌자

3_경성

일본인들은 점령군이 자신들을 어떻게 대할지 몰라 몹시도 불안해했다. 심지어 일본인들은 자체 회의를 열어 일본인 여자들 중에서 미군을 상대하는 전문 위안부를 모집하여 따로 유곽을 열면 어떻겠냐는 주장도 하고 있었다.

▲ 미군 부대의 일본인 매춘부들
▲ 미군 부대의 일본인 매춘부들

차라리 성매매를 공개적으로 하는 것이 만일에 있을지도 모를 부녀자에 대한 성폭력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되지 않겠냐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미군은 기강이 잘 잡혀 있어 걱정하던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5_위안소

미군이 진주하고 치안이 안정되자 얼마 전까지만 해도 피난 갈 곳을 찾느라 정신이 없던 일본인들은 서서히 조선 땅에 눌러앉을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떠나는 일본인들

밀항선, 도둑배

패전 당시 해외에 있던 일본인들은 어림잡아 총 700만 명에 달했다. 동쪽의 태평양 열도에서 서쪽의 인도차이나 반도까지, 북쪽의 만주에서 남쪽의 인도네시아까지, 그들이 일본으로 돌아가려면 모두 송환선이라는 배를 타고 가야 했다.

6_지리

다만 한반도는 여타 식민지에 비해 지리적으로 가까운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공식 송환선 외에 밀항선을 이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들 밀항선은 도망치듯 떠난다 하여 속칭 ‘도둑배’라고도 불렀다.

▲ 당시 밀항선의 모습
▲ 당시 밀항선의 모습

한반도에서 돌아간 일본인들을 보면 민간인은 약 70여만 명, 군인은 20여만 명으로 추계하고 있는데, 이들 중 20만 명 정도는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러한 도둑배들은 위험을 무릅써가며 단기 특수를 노렸기 때문에 돌아갈 때는 빈 배로 떠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승객을 태우지 못하면 하다못해 밀수품이라도 싣고 갔다. 하지만 그런 덕분에 나중에는 그걸 노리는 해적들까지 등장하게 된다.

 

송환선 vs 밀항선, 무얼 타고 갈 것인가?

일본으로 돌아갈 때 밀항선과 공식 송환선 중에서 무엇을 탈 것인가는 단순히 교통편을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은 향후 그들의 인생이 걸린 도박과도 같은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밀항선의 경우 검역을 거치지 않았으므로 전염병에 감염될 우려도 있었고, 악덕 업자를 만나면 어렵게 가져온 재산마저 모두 빼앗기고 엉뚱한 곳에 내려놓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이 밀항선을 타고자 했던 이유는 분명했다. 공식 송환선을 타고 가면 심사과정에서 반출 상태를 면밀히 수색당해야만 했다.

▲ 당시의 송환선
▲ 당시의 송환선

당시 민간인은 1,000엔, 군인은 200~500엔 사이로 소지 금액이 제한됐고, 수하물도 휴대 가능한 보따리 정도로만 제한했었기 때문이다.

 

두고 가는 공동묘지의 처리

일본인 공동묘지 처리는 큰 고민거리였다. 인천에 사는 일본인들은 그대로 놔두면 안 되냐며 조르고 졸랐지만, 이에 인천시장은 이렇게 큰소리쳤다.

 

9_각시탈

인천시장 (대역)

“아놔, 만일 동경 한복판에 조선인 묘지가 있다면 니들은 그거 그대로 놔둘래?”

 

 

10_니혼진

일본인

“…”

 

 

9_각시탈

인천시장 (대역)

“애초에 니들 맘대로 우리 땅에 공동묘지를 만들지 않았음?”

 

결국 인천시는 공동묘지를 모두 없애고 일본인 유골들은 구덩이를 파서 모두 한곳에 매립시켜 버렸다. 떠나기 전에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는데, 막상 떠나려고 하니 일본인들은 조상의 무덤까지도 신경 써야 했던 것이다.

 

38선 이북의 일본인들

무지막지한 소련군의 실체

1945년 8월 말 평안북도 강계: 일본인촌

일본인 촌의 젊은 처자들은 소련군이 오고 있다는 소식에 황급히 수수밭으로 달려가 몸을 숨겼다. 미처 집을 빠져나가지 못한 사람들은 다락과 지하실로 들어가 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또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여자들은 모두 머리를 잘랐다. 머리를 빡빡 깎은 여성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소문에 모두 까까머리를 한 것이었다. 하지만 소련군은 백주 대낮부터 조선인을 앞잡이로 세워 마을의 일본인 집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 당시의 소련군
▲ 당시의 소련군

그들은 무언가 돈이 될 만한 물건이 없나 여기저기를 뒤졌고, 그중에서도 소련군은 유독 시계와 만년필을 좋아했다. 술을 달라는 병사도 있었다. 술을 내주면 순순히 돌아가기는 했지만, 문제는 이들이 술에 잔뜩 취해 다른 집으로 들어가 행패를 부렸다는 것이다.

▲ 미국 잡지를 보고 좋아하고 있는 소련군
▲ 미국 잡지를 보고 좋아하고 있는 소련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소련군에게 절대 술을 내주지 않기로 사전 약속까지 하게 된다. 하지만 소련군 한 무리가 지나가고 나면 곧 또 다른 패거리가 나타나 이번에는 이불과 담요를 가져갔고, 더 이상 찾아오지 않겠거니 생각할 무렵에는 여군들이 와서 취사도구를 챙겨갔다. 이것이 바로, 말로만 듣던 소련군의 현지 조달 방식이었다.

 

1945년 8월 말 평안북도 곽산: 충격적인 소련군의 모습들

소련군의 첫인상은 강렬했다. 당시 한 일본인의 목격담은 다음과 같았다.

“윙~윙~” 소련군이 곽산에 온다는 사이렌 신호가 떴다. 조선 사람들은 겉으로는 환영하는 듯했지만, 사실 그들도 안심할 수 없었고 부녀자들은 재빨리 집으로 돌아가 시계나 금붙이 등을 숨기고 있었다.

▲ 북한 주둔 소련군
▲ 북한 주둔 소련군

실제로 소련군은 전투태세로 침공해왔기 때문에 일본인과 조선인을 가리지 않고 약탈과 폭행을 자행하고 있었다. 그런 소련군의 행렬을 보면 모두들 적잖이 놀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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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것이 정녕 현대군의 모습이던가?”

마차를 앞세운 긴 행렬이 이어지고, 긴 장총을 어깨에 걸쳐 걷는 소련군들은 마치 유목민의 모습과도 같았다. 군대의 행렬 후미에는 양과 닭까지 매달고 있었다. 심지어 마차 위에는 부뚜막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14_북한_소련

소련군들은 개고기는 역시 누렁이가 최고라며, 주인이 있든 없든 길에 나다니는 개가 보이기만 하면 어김없이 총을 쏘아 잡으며 행군을 계속하였다. 이들은 무기와 탄약을 제외하고는 모두 현지에서 조달하고 있었다.

▲ 당시 소련군의 모습
▲ 당시 소련군의 모습

또 원래는 철도와 교량 경비를 위해 곽산에 들어왔다지만, 실제로는 기계와 설비를 뜯어 소련으로 실어가려는 목적으로 온 것이었다.

 

소련군과 대조적인 미군의 모습

그에 비해 미군이 주둔하던 한반도 남쪽의 일본인 목격담은 이렇다. 대략 500~600명 규모의 미군이 마을에 진주했는데 일본인들은 이들이 가져온 장비와 물품을 보고서 크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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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 일본이 정녕 이런 나라를 상대로 4년 동안이나 전쟁을 벌였단 말인가?”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언뜻 보아도 미군은 모두들 최신식 무기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16_최신식 미군

오지에 주둔하면서도 침구와 식량, 심지어는 개인이 마실 물까지 휴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련군의 현지조달

소련군은 왜 북한에 주둔했나?

원폭 투하로 일본에 대한 각종 이권이 미국으로 대거 넘어갈 듯하자, 소련은 서둘러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동아시아 전선으로 뛰어들게 된다. 사실 소련군은 한반도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저 바람이 있다면, 폴란드와 마찬가지로 소련에 우호적인 정부를 하나 그쪽 동네에 만들면 그것으로 만족할 정도였다. 당시 소련의 주된 관심 지역은 동유럽이었지 동아시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에서도 한반도보다 전통적으로 소련의 목을 조여온 만주지역, 그리고 일본과 이권을 다투던 홋카이도, 사할린 지역을 소련은 더욱 중시했다.

▲ 당시의 소련군들 (채색 사진)
▲ 당시의 소련군들 (채색 사진)

따라서 소련은 애초에 한반도는 별 관심이 없었고 북한을 먹은 것도 만주, 사할린 지역과 연동되는 형태로 이뤄진 것이었다.

 

소련군의 현지조달의 배경

소련은 2차대전에서 비록 승전국 반열에는 올랐지만, 까놓고 말하자면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2차 대전 중으로 2,500만 명이 사망했는데, 이것은 대전으로 죽은 전 세계 사망자의 40%에 해당하는 엄청난 수치였다.

2차대전_소련

또 전쟁으로 GDP가 17%나 감소했기 때문에 종전 후 소련의 최우선 과제는 무엇보다 노동력 확보와 경제복구였다.

이런 상황과 맞물렸으니,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의 주둔 비용은 철저히 현지 조달 방식을 취하게 된 것이었다.

▲ 독일 여자의 자전거를 강탈하고 있는 소련군
▲ 독일 여자의 자전거를 강탈하고 있는 소련군

심지어 소련군 병사들의 월급도 북한 재정으로 충당하고 있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소련군은 배상 명목으로 수풍발전소를 비롯해 한반도의 주요 공장시설, 광물자원, 생산품 등을 마구 반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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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놔, 일본 걸 뜯어가야지. 왜 우리 걸 뜯어가는 건데!”

 

1946년 1월 초 평양 : 일본인은 소중한 노동력

미소 공동위원회를 앞두고 북한에 있는 일본인들의 남하 문제를 논의하게 위해 미군 장교들이 평양을 방문했다. 당시 소련군 관계자는 상부로부터 일본인 송환에 관한 지시를 따로 받은 것이 없었지만,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20_소련 장군

소련군

“일본인들을 그대로 돌려보내기에는 ‘매우 귀중한 노동력’임.”

 

 

현지조달과 노동력의 확충

북한을 상대하는 소련의 인식은 철저히 뜯어먹고 보자는 식이었다. 그들은 단순히 생산 설비만 반출해간 것이 아니라 북한에서 생산시설을 가동하여 완제품을 만들어 반출하고, 나중에 생산 설비를 뜯어가는 형식이었으니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방식이었다.

21_공장

그런가 하면 소련군이 보기에 일본군 포로는 더없이 훌륭한 인적자원이었다. 일본인들 중에서는 고등교육을 배우고 고급 기술을 연마한 엔지니어가 많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애초에 소련군은 일본인들을 본토로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다.

▲ 북한 주둔 소련군
▲ 북한 주둔 소련군

따라서 1946년 3월까지 남한의 일본인들은 모두 일본으로 돌아갔으나 북한의 일본인들은 여전히 발이 묶인 상황이었다.

 

북한 거주 일본인들의 호구지책

목욕탕에서 허드렛일을 하게 된 학교장

도코 요시마사는 원래 평안북도 정주에서 소학교 교장으로 일하면서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었지만, 그는 이제 먹고살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만 했다. 그래서 겨우 찾게 된 것이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공중목욕탕의 일이었다.

▲ 일제강점기의 목욕탕
▲ 일제강점기의 목욕탕

아침 일찍 욕조에 물을 받고 장작을 때워 물을 데우는 일이라 일 자체는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선인과 대면하면서 그가 받는 스트레스는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조선인들은 일부러 다른 사람도 들으라는 듯이 여기저기서 더운물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그럴 때마다 그는 “네!”라고 답하며 물을 대령해야 했다.

때로는 꼬마들까지 “이르본(일본)!”이라며 그를 놀렸다. 하지만 먹고살려면 어차피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오히려 더 기분 나쁜 것은 일본인들의 처지를 이해하는 척하면서 은근히 염장을 지르는 이들이었다.

 

26_꿀잼

염장질

“와! 패전 덕분에 목욕탕에서 시중드는 일본인 나리를 다 뵙게 되네.”

─ 정주 소학교 교장 도코 요시마사

 

 

로스케 마담이 된 일본 여자들

1945년 가을 함경북도 성진. 이곳의 주택가를 스치고 지날 때마다 나날이 일본인들은 야위어만 갔다. 먹을 것도, 돈도, 입을 것도 점점 궁해 보인다.

27_일본_여자

그런 한편, 암시장은 성황을 이뤘다. 모두 일본인에게 약탈한 물건들이었다. 시장 한편으로는 사과, 감, 털게, 조선 엿, 육류 등이 쌓여 있지만, 일본인들을 물물교환할 옷가지마저 없어 그저 침을 삼키며 바라만 볼 뿐이었다.

예쁘게 옷을 장식한 소련 장교 부인, 몸을 화려하게 꾸민 조선인 부인 사이로 그야말로 상거지나 다름없는 몸빼바지 차림의 일본 부인이 콩을 바꾸어 가는 모습이 애처롭기 짝이 없다.

▲ 일제강점기 평양의 거리
▲ 일제강점기 평양의 거리

조선인 냉면 가게나 주막에서 일하는 일본 여성도 늘어났다. 이들은 새하얀 분과 붉은 입술을 한 일명 ‘로스케 마담’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녀들의 주요 고객은 소련 군인들이었다.

─ 고니시 아키오 세화회 섭외부장

 

가르치던 학생 집에 식모로 들어온 교사

생활난에 허덕이던 일본인들은 조선인이 경영하는 이발소, 여관, 목욕탕 등에서 잡일을 하기 시작했다. 특히 부녀자들은 부유한 조선인 집이나 소련군 관사 등에 들어가 가정부로 일하기도 했고 농사 한번 지어보지 않은 사람이 중국인 밭에 약초를 캐러 다니기도 했다.

29_일제강점기

이러한 가운데 점령 당국이 1946년 1월부터 일본인의 상업활동을 부분적으로 허가하여 일본인들 중에서 담배, 두부, 비누 행상에 나서는 자도 나타나게 됐다. 다만 이런 행상의 경우는 조선인 상권 보호를 위해, 일본인 마을에서만 허용되었다.

수입이 없어 생활이 어려워지자 과거 자신이 가르치던 학생 집에 식모로 들어간 교사도 있었다. 그녀는 평안북도 정주에서 일하던 곽산소학교 교장의 딸, 도코 도시에였다.

그녀는 한때 학교의 교사로 있었지만

30_일제강점기_학교

패전이 되자 한 부유한 조선인 집에 들어가 가정부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원래 자신이 가르치던 아이의 집이었으니, 조선인 고용주는 그녀를 매우 딱하게 여겼다. 하지만 조선인 고용주가 신경을 써줄수록 그녀의 마음은 더 괴로웠다고 한다.

─ 정주 소학교 교장 딸 도코 도시에

 

캄차카의 고기잡이 선원 모집

1946년 초 남한에서 일본인의 송환이 마무리되고 있을 무렵, 소련 당국은 흥남 공업지역 일대에서 사할린과 캄참카 방면의 고기잡이배에 탈 노동자를 북한에서 모집하려고 했다.

31_캄차카

소식을 들은 일본인들은, 소련군이 일본인들을 만주와 시베리아로 끌고 간 것도 모자라 남아 있는 일본인마저 ‘모집’이라는 허울로 다른 곳으로 보내려는 것이 아니냐며 불안해했다. 하지만 호구지책이 궁했던 일본인들은 굶어 죽느니 먹고살 수 있는 길을 택하게 되고, 그렇게 2천여 명이 캄차카의 고기잡이 일에 지원하게 된다.

 

귀환 후에 일본인들

민폐 집단이라는 차가운 시선

1947년 1월 어느 겨울날. 오사카에 사는 22세의 한 젊은 여성이 집에서 극약을 마신 채 자살했다.

▲ 당시의 기사
▲ 당시의 기사

다키카와 나쓰요라는 이 여성은 1945년 11월 조선에서 돌아왔다. 그러나 마땅히 거처할 곳이 없어 잠시 지낼 곳을 수소문하던 끝에 알게 된 친척 집에서 온 가족이 신세를 지게 되었다.

원래 이 집에는 미쓰이 씨 가족 5명이 살고 있었는데, 다키카와 가족 8명이 들어오는 바람에 졸지에 13명이 생활하게 되었다. 그런데 비좁은 집에서 함께 살다 보니 알게 모르게 두 집 사이에 다툼이 잦았다.

 

33_일본인

가족 (대역)

“가뜩이나 패전으로 본토인들도 살기 빠듯한데, 사람들이 염치가 있어야지!”

 

 

그도 그럴 것이, 생전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들이 대뜸 친척이랍시고 들어와 함께 살고 있으니, 미쓰이 가족 입장에서도 분통이 터졌던 것이다.

▲ 영화 '반딧불의 묘'가 연상되는 장면이다.
▲ 영화 ‘반딧불의 묘’가 연상되는 장면이다.

게다가 새로운 군식구들은 변변한 일자리도 없이 마쓰이 가족에게 번번히 손을 벌리기 일쑤였다.

결국 이러한 상황이 너무도 힘들었던 귀환자 가족 중 22세의 한 젊은 여성은 자살하고 만 것이다. 이는 당시 귀환자들을 대하는 본토인들의 일상적인 단편이었다.

 

임시 수용소의 삶

패전 후 2년여가 지난 1947년 겨울, 도쿄의 역 부근에 설치된 귀환자 임시 수용소는 본의 아니게 거의 반영구 시설이 되어버렸다.

당시 수용된 귀환자들은 일자리를 구해 빨리 밖으로 나가야만 다음 사람을 받을 수 있는데, 수용소에 한번 들어오면 그대로 눌러앉기 일쑤였다.

그도 그럴것이 취직은 어려운데 물가는 살인적이었다. 나가더라도 높은 전세값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 당시 수용소의 모습
▲ 당시 수용소의 모습

당시 수용소는 시설이라고는 대충 지어진 가건물 속으로 바닥에 깔린 거적이 전부였다.

게다가 귀환 출신의 어린이가 수용소 울타리 밖으로 나서기라도 하면 본토의 아이들은 이렇게 놀려댔다.

 

35_꼬꼬마

꼬꼬마들 (대역)

“외지에서 굴러 들어온 거지!”

 

그때마다 아이는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자며 울면서 돌아오는 턱에, 부모들의 억장은 무너졌다.

 

범죄자라는 오명

해외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도둑질을 일삼게 되었다.

▲ 고구마를 사고 있는 전후의 일본인들
▲ 고구마를 사고 있는 전후의 일본인들

1946년 7월 1일의 범죄 통계를 보면, 생활고와 취직난으로 저지른 절도죄가 총 범죄 건수의 2/3를 차지했는데, 범죄자의 대부분은 갓 제대한 군인이거나 해외에서 돌아온 사람들이었다.

 

‘세균 덩어리’라는 인식

해외 귀환자는 더러운 전염병을 옮기는 세균 덩어리로 인식되고 있었다.

1946년 봄에서 여름까지 중국 대륙, 한반도의 일본인들은 대대적으로 일본으로 귀환하고 있었는데, 이때 돌아오는 사람들로 인해 일본은 각종 풍토병과 전염병에 시달리게 된다. 때문에 흔히 외지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본토인들로부터 ‘세균 덩어리’ 취급을 당해야만 했다.

37_풍토병

당시 일본의 언론을 이렇게 퍼뜨리고 있었다.

 

38_라디오

라디오

“조선, 만주에서 돌고 있는 전염병으로 발진티푸스, 천연두, 콜레라, 페스트, 유행성출혈열 등이 있다.”

 

 

이렇게 대대적으로 홍보하면서 본토인들은 귀환자들에 대해 ‘온정’을 베풂과 동시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계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호의호식했잖아!

민폐 집단이라는 사회적 낙인과 범죄자, 거지, 세균 덩어리라는 인식은 귀환자들에게 한동안 잊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귀환자들이 가장 듣기 싫어했던 말이 있었다. 당시 귀환자들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 귀환자들이 가장 힘들어했던 말은 바로 이것이라고 한다.

“본토 귀환 이래로 어떤 점이 가장 당신들을 힘들게 했는지?”

라는 질문에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외지에서 식민지 사람들을 착취하면서 온갖 호사를 누리고 살았으니, 지금은 천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말이 가장 듣기 괴로웠다고 한다.

원문: 레알뻘짓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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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떠나며: 해방 이후 조선땅에 남은 일본인들의 삶 ① https://ppss.kr/archives/54593 https://ppss.kr/archives/54593#respond Mon, 17 Aug 2015 05:45:07 +0000 http://3.36.87.144/?p=54593 1945년 우리나라가 해방된 이후로 일본인들이 어떤 식으로 우리나라에 남아서 생활했고, 또 어떤 식으로 빠져나가 귀환해서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있는 사람들은 드물다. 그런 면에서 『조선을 떠나며』라는 책은 그런 부분만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1_조선을_떠나며_a

책 내용은 대부분 일본인들의 시점에서 그려진 회고담이다.

여기서는 책을 보면서 인상 깊었던 부분을 약간씩 발췌, 각색해서 올려본다. 좋은 책이니 관심 있으면 내용 전부를 보았으면 한다.

 

38선 이남의 일본인들

패전 당시의 일본인

1945년 8월 9일 함경도 회령 : 소련의 8월 폭풍 작전

8월 6일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다음날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 지역에 대대적으로 공격을 시작한다.

2_만주

그러자 이곳을 지키고 있던 일본의 관동군 수뇌부는 곧바로 열차를 동원해서 고위 관료와 군 관계자 가족을 서둘러 남쪽으로 피신시켰다.

그러나 만주 현지에 있던 100만 명에 달하는 일본인들에게는 어떠한 대피 명령조차 내리지 않았다. 때문에 상당수의 일본인들이 소련 지역으로 끌려가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으며, 많은 자들이 희생되고 고아들이 대거 발생하게 되었다.

▲ 8월폭풍 작전 당시 소련군
▲ 8월 폭풍 작전 당시 소련군

그런데 사흘 뒤, 한반도에서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소련군이 함포사격에 이어 시가지 상륙을 개시하자 함경북도를 관할하던 일본 군부는 서둘러 열차를 수배하여 군인 가족들만 태우고 경성으로 출발해 버린 것.

4_일본_기차

그러는 동시에 조선인들과 일본 민간인들에게는 대대적으로 소집영장을 띄워서 회령에 있는 군부대로 모이게 했다. 군부는 이들을 희생양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당시 비료공장에 다니던 사바타 겐조는 이렇게 회고했다.

 

5_시바타 겐조

사바타 겐조 (대역)

“영문도 모른 채 수많은 사람들이 소집영장을 받고 회령의 군부대로 모여들었다. 그곳에 관리자들은 우리에게 무기 대신에 삽 한 자루씩을 쥐여주고선 소련군의 총알받이로 삼으려 했다.”

 

1945년 8월 15일 부산의 한 관공서 : 예상된 항복 발표

상부로부터 정오에 중대 발표가 있을 예정이라는 전갈이 내려졌다. 공무원들이 들어보니, 그것은 예상대로 항복에 관한 내용이었다.

6_항복

공교롭게도 이날은 일본이 4년 전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도발하고부터 시작된 부산 지역의 등화관제가 해제된 날이었다. 때문에 조선인들에게는 야경을 만끽하며 비로소 해방을 실감할 수 있는 뜻깊은 날이었지만

7_항복2

일본인들에게는 자신들의 초라한 모습을 비추는 환한 불빛이 결코 달갑지만은 않았다.

─부산지방교통국장 다나베 다몬

 

1945년 8월 15일 경성전기회사

덴노(천황)의 항복 방송을 듣자마자 경성전기회사의 사장 호즈미 신로쿠로는 황급히 지금의 을지로 입구에 있는 사옥으로 갔다.

 

8_신로쿠로

호즈미 신로쿠로 (대역)

“만약 단 1분이라도 정전 사태가 발생한다면 무서운 결과가 초래할 것이다. 그러니 직원 여러분은 막중한 책임을 갖고 임하도록 .”

 

그는 위급한 시국에 정전사태라도 발생하게 되면 일본인들에게 극심한 공포심을 조장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1945년 8월 중순 부산항: 밀항선

돈 있는 사람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재빨리 밀항선으로 귀국했다. “나만 살겠다”는 원초적 본능만 남은 조선의 일본인들에게 천황의 백성이라는 애국심은 눈곱만치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 당시 밀항선의 모습
▲ 당시 밀항선의 모습

이들은 그저 어떻게 하면 가족들이 일본으로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을지, 또 조선 땅에서 일군 재산을 어떤 방법으로 한 푼도 빠짐없이 가져갈 수 있을지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교사 후지와라 지즈코

 

조선인에 대한 갑작스런 공포심

1945년 8월 16일: 만세를 외치는 군중

사무실 밖으로 조선인들이 만세를 외치며 경성역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10_신로쿠로2

─경성전기회사 사장 호즈미 신로쿠로

 

8월 15일 이후 1주일간의 폭행 사건

1945년 8월 16일부터 23일까지 약 1주일 동안 조선 전역에서 보고된 폭행 사건은 총 913건이었다. 조선인들이 집단으로 습격한 곳은 주로 경찰관, 지방행정기관, 신사였다.

또 개인을 상대로 한 살인과 폭행은 총 267건으로 보고되었는데 주된 표적은 경찰관, 교사, 공무원 그리고 그들의 가족이었다.

11_사건

당시 보고 체계가 제대로 가동되지 않아 오지에서 일어난 소소한 사건은 집계에서 누락되기 일쑤여서 보고 수치를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일본인보다 조선인의 피해자가 훨씬 많았다는 것이다.

이유가 뭘까?

▲ 해방직후의 조선인들
▲ 해방 직후의 조선인들

일본인 상관들은 조선인 부하 직원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먼저 피신했기 때문이다.

그러기도 했지만, 일본인 상관보다 그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징발에 앞장서며 악역을 맡았던 조선인들에게 악감정이 많았던 탓이기도 했다.

 

1945년 8월 18일 조선총독부

이날 조선총독부는 각 기관에 급하게 전달한다.

 

13_아베 노부유키

아베 노부유키 (대역)

“각 기관에 걸어둔 천황의 사진을 모두 불태워라!”

“또 각 지역의 신사에 연락해 위패를 모두 불태우도록 명령하라!”

 

그들은 행여나 조선인들의 심기를 상하지 않도록 재빠르게 대응했던 것이다.

 

뜻밖의 공포: 조선인들이 이렇게도 많았나?

당시 일본인들이 느꼈던 공포심은 평소 조선과 조선인들에 대한 총체적인 무관심에서 비롯됐다. 사실 조선에 살던 일본인들은 조선인의 존재를 거의 의식하지 않고 살았다.

14_만세

이런 경향은 식민 지배 초기에 수많은 조선인의 저항을 경험한 1세대와 달리, 문화통치 시기(1920년대)에 이주해 왔거나 조선에서 태어난 2세의 경우에 더욱 강하게 나타났다.

이들은 조선을 타지로 인식하기보다는 일본 본토의 일부로 생각하고 있었다.

─호즈미 신로쿠로

 

일본인 촌: 그들만의 분리된 공간

대부분의 일본인이 패전 직후에 나타난 조선인의 집단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일본인들은 집단을 이루며 조선인과는 다른 그들만의 공간에서 따로 살고 조선인들을 도시의 변두리로 몰아내면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일본인촌이 당시 한반도 전역에 산재해 있었다.

▲ 원산의 일본인촌의 모습 : 철길 너머로 조선인들의 거주지가 보인다.
▲ 원산의 일본인촌의 모습. 철길 너머로 조선인들의 거주지가 보인다.

이러한 일본인촌에는 철도역과 정거장, 학교, 병원, 관공서, 백화점 등의 편의 시설이 조성되어 있었고, 경찰, 군대 등 치안기관을 유치해 더욱 안전하고 편안한 곳으로 만들어놓았다.

그렇게 일본인들은 자신들만의 공간에서 조선인들과 분리되어 살았기 때문에 평소 조선인들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았던 것이다.

 

일본인들의 증언: 여기 일본 아니었어?

당시 초등학생(소학교 학생)이었던 한 일본인은 이렇게 말한다.

▲ 일제시대의 소학교 교실
▲ 일제시대의 소학교 교실

 

17_아쿠오

마쓰나가 아쿠오 (대역)

“한 번도 조선인 친구와 놀아본 기억이 없다.”

“내가 기억하는 조선인은 가끔씩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다니며 물건을 팔던 아줌마가 전부였다.”

“원산에 그렇게 많은 조선인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은 패전 이후에야 알게 되었다.”

─원산부립소학교 2학년 마쓰나가 아쿠오

 

경찰서에 근무하던 청년은 이렇게 물었다.

 

18_경찰

나카무라 기미 (대역)

 

“패전했기로서니 꼭 내지(일본)로 돌아가야 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의 부모님들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저 돌아가야 한다고만 대답했다. 그는 왜 자기가 자신의 고향인 충청도 강경 땅을 떠나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19_귀환

그는 패전 직후 조선인들이 왜 거리를 쏟아져 나와 만세를 외치는지도 이해 못 했다.

─나카무라 기미(당시 23세). 충남 강경 경찰서 근무

 

갑자기 달라진 세상

돈을 인출하려는 일본인들

요즘은 밤이 깊어서야 겨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우편예금을 인출하려고 사람들이 몰려든 바람에 출금 업무가 갑자기 늘어났기 때문이다.

20_경성우편국

─이노우에 스미코. 충무로 경성우편국 근무

 

은행에는 돈을 인출하려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8월 15일에만 은행이 보유한 지급준비금의 20%가 빠져나갔는데, 이런 속도로 돈이 빠져나간다면 곧 은행은 파산이 나고 말 것이다.

▲ 일제시대 은행 내부
▲ 일제시대 은행 내부

만약 그렇게 되면, 예금한 돈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게 되어 수많은 예금자들은 화가 나서 은행을 때려 부수려 할 것이다.

때문에 8월 17일부터 총독부에서는 라디오방송을 통해 일본 사람들을 안심시키려 했다.

 

22_나오마사

미즈타 나오마사 (대역)

“예금은 언제든지 인출할 수 있으니 안심들 하삼. 지금 큰돈을 인출했다가 공연히 도난 사건에 휘말리지 마시고…”

 

하지만 하루빨리 재산을 찾아서 일본으로 귀환하고자 하는 일본인들에게는 쇠귀에 경 읽기였다.

─ 총독부 재무국장 미즈타 나오마사

 

강탈을 당해도 신고할 수 없었다

은행에서 인출을 하고 돌아오다가 돈을 강탈당했다는 소식이 자주 들려왔다. 하지만 그런 일본인들은 어차피 경찰에 신고해봐야 소용없다며 분을 삭일 따름이었다.

─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교수 다나카 마사시

 

거리마다 넘쳐나는 물자

패전 후 조선 전역에서 나타난 특이한 현상 중 하나는,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시중에 전례 없이 물자가 풍족해졌다는 점이다.

천황의 항복 방송을 듣고, 다음 날 남대문시장에는 거짓말처럼 쌀, 설탕, 밀가루, 옷감, 가죽제품, 구두 등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 충무로 모습
▲ 당시 충무로의 모습

전쟁 수행 중에는 좀처럼 구경할 수 없었던 각종 물자가 한꺼번에 시중에 풀린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북한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바로 일본인들은 하루빨리 살림을 처분하고 일본으로 귀환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24_귀환

일본인들은 모든 세간을 헐값에 팔아치우고 당장 배를 타고 항구로 달려갈 기세였다. 그런 일본인들의 심리를 꿰차고 아예 조선인 고물상들은 일본인 마을을 찾아다니며 물건들을 값싸게 구매하고 있었다.

그 바람에 대전과 같은 지역에서는 쓸만한 물건을 사려는 조선인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전에 없던 시장이 하루아침에 생겨나기도 했었다.

 

일본인들의 투매 행위 비난: 조선의 재산을 함부로 팔지 말라

한편 조선인 지도층들의 생각은 이랬다.

아무리 사소한 물건이라도 일본인이 소유한 것은 바로 ‘조선에서 조선인을 부려서 일군 것’

때문에 일본인 재산은 그 형태를 막론하고 조선인들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25_경성

따라서 일본인들 재산을 매입하는 행위는 해방 조선의 부를 유출하는 이적 행위요, 공공의 재산을 개인의 것으로 독점하는 반사회적 악덕 행위로 간주했다.

그렇게 일본인들의 투매 행위에 대해 조선 사회의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미군정 또한 일본인들의 재산 반출에 여러 제약을 가하기 시작했다.

▲ 떠나는 일본인들
▲ 떠나는 일본인들

가지고 갈 짐에는 중량을 제한했으며 현금은 1,000엔 이상의 반출을 금지했다.

이러한 제한 조치 때문에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어떤 짐을 가져가고, 또 가재를 팔아 마련한 돈을 어디에 숨겨 가야 할지 저마다 고민하고 있었다.

 

귀환 열차 속의 풍경

귀환 열차에 오르다가 넘어진 앞사람이 무거운 배낭 때문에 혼자서 일어나지도 못하니, 그 모습이 비참했다.

다행히 넘어지지 않고 열차에 오른 사람들의 걸음걸이도 무거운 짐 때문에 하나같이 중풍 환자나 술에 취한 사람 같았다.

▲ 당시 귀환열차
▲ 당시 귀환 열차

등에 짐을 짊어지고 젖먹이 아기까지 감싸 안고 있는 아낙의 모습을 보자니 씁쓸했다.

28_마스지로

“고작 이것이 수십 년 동안 일하여 얻은 전 재산의 말로구나!”

─ 고타니 마스지로 인천일본인세화회장

 

당시 남한과 북한이 달랐던 점

돈을 허리춤이나 옷섶에 넣어 보이지 않게 다시 꿰매거나 커다란 붓 속에 지폐를 말아 넣는 등의 방법은 이미 낡은 방식이 되면서 단속을 피하기 위한 다양하고 기발한 수법이 끊임없이 동원되고 있었다.

▲ 당시의 송환선
▲ 당시의 송환선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돌아간 남한의 일본인들은 북한에서 돌아간 사람들과 비교해보자면 훨씬 상황은 나았다.

북한에서 돌아간 일본인들의 경우는 자전거, 라디오, 축음기, 재봉틀, 서적류는 물론 심지어 이불과 개인 화장품까지도 공출 대상이었다.

 

일본인들이 느낀 패전 후 몇 달간의 변화

1945년 8월 16일: 독립만세

거리에는 가는 곳마다, 일장기를 재활용해 만든 어설픈 태극기가 나부끼고 있었다.

30_만세운동

그리고 질주하는 트럭은 물론이고 전차 지붕에서도 조선인들이 외쳐대는 만세 소리가 들려왔다.

─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교수 다나카 마사시

 

1945년 9월 5일: 조선에 남고 싶은 일본인들

시간이 지나면서 조선인들의 만세 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했고 일본인들도 점점 무뎌져 갔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귀환 열차가 출발한다는 헛소문이 돌아 멀쩡한 가구를 헐값에 내다 팔며 부산을 떨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불편해서 못 살겠다며 다시 세간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또 어느 정도 치안이 확보되는 낌새가 보이자 어떻게든 조선에 눌러앉아보려는 사람도 늘어갔다.

31_일본인

눈치 빠른 사람들은 지금 일본의 주요 도시들은 대공습으로 초토화되었고, 그나마 멀쩡한 도시도 피난민들이 몰려들면서 몸살을 앓고 있기 때문에 돌아간다고 한들 미래가 없을 곳이라고 말했다.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은 조선에 어떻게든 남아있으려고 했다.

─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교수 다나카 마사시

 

1945년 가을: 점차 안정을 찾는 사회

8월 말부터 푸줏간에는 오랫동안 구경하기 힘들었던 고기가 내걸렸고 술집에는 각종 술이 넘쳐났다. 다시 문을 연 카페에서는 전쟁의 선전가요가 아닌 대중가요가 흘러나왔다.

32_전화

사람들의 차림새도 칙칙한 국민복을 벗어 던지고 여성들도 볼썽사나운 몸빼바지 대신 치마를 걸치기 시작하여 거리의 풍경도 한층 밝아졌다.

33_경성

거리 뒤편의 상점들에서는 “배척하자 일본인”이라고 적힌 전단을 떡 하니 붙여놓고 조선인들이 일본어로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34_왜노

조선인들은 돈벌이를 위해 일본인에게 물건을 팔기는 했지만 가는 곳마다 왜노(倭奴) 추방이라고 써 붙인 자극적인 전단지가 계속해서 눈에 거슬렸다.

─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교수 다나카 마사시

 

1945년 겨울: 사라진 일본어

11월에 들어서는 어느새 일본식 동네 이름들이 모두 조선식으로 바뀌어 길 찾기도 어려워졌다. 관청에서는 각종 서류에 ‘쇼와’, ‘메이지’ 같은 연호를 기재하면 아예 접수조차 받아주지 않았다. 그저 이름만 바뀌었을 뿐인데 경성은 어느새 낯선 공간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라디오 방송도 10월 말부터 과도적으로 한일 양국어를 사용하다가 얼마 후 뉴스를 제외하고 모두 조선어로 단일화했다.

35_일본어

12월에 들어서는 그런 뉴스마저 하루에 단 1회로 줄어들었다. 경성에서는 이제 제국의 언어(일본어)가 발붙일 곳은 전혀 없었다.

─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교수 다나카 마사시

 

하지만 북한과 비교하면 그래도 양호했다. 북한에서는 8월 29일부터 라디오에서도 전면 일본어가 배제되었다. 때문에 갑작스런 정보의 차단으로 당시 일본들은 몹시도 불안해 했다.

원문: 레알뻘짓 블로그


※ 「조선을 떠나며: 해방 이후 조선땅에 남은 일본인들의 삶 ②」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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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의 길거리는 똥 천지였다.” (2) https://ppss.kr/archives/52424 https://ppss.kr/archives/52424#respond Fri, 24 Jul 2015 04:10:37 +0000 http://3.36.87.144/?p=52424 ※ 「“한양의 길거리는 똥 천지였다.” (1)」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서양의 화장실

동양과는 달리 서양에서는 화장실을 갖춘 집들이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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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에 비해 인분을 거름으로 쓰는 시비법이 덜 발달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어떻게 용변을 봤단 말일까?

그냥 밖에서 누거나 아니면 요강을 사용해서 버렸다.

루이 14세의 요강
루이 14세의 요강

어디다 버렸단 말인가?

그냥 아무 데나 버렸다.

서양의 요강, 카피잔 같지만 요강이다.
서양의 요강, 커피잔 같지만 요강이다.

강에다 버리기도 하고 그냥 길가에 버리기도 했다.

으아아아악!
으아아아악!

예컨대 17세기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는 깊은 밤이 되면 갑자기 분주해졌다.(캐서린 애셴버그, 『목욕, 역사의 속살을 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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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각에 사람들은 길거리에 요강을 비웠다. 그래야 밤새 차가운 공기 중으로 분뇨의 악한 기운이 날아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이면 거리에는 똥과 오줌이 바짝 말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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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이나 프랑스에서도 밤이 되면 제리(jerry)라고 부르는 요강을 투척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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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곱게 투척하면 괜찮을 것을 2층에서 대충 뿌려대는 통에 길가는 사람이 똥물 세례를 맞는 일이 매우 흔했다.

윌리엄 호가스, 『그때 그 시절』의 삽화, 요강 비우기
윌리엄 호가스, 『그때 그 시절』의 삽화, 요강 비우기
관공서의 경우도 화장실이 없었기에 루브르 재판소의 건물 외벽은 창문에서 내던진 변기의 내용물로 온통 얼룩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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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당시에는 우산과 하이힐이 필수품이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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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산업화 시대가 도래하면서 부유층을 중심으로 점차 화장실이 생겨나게 되는데,

귀족의 화장실
귀족의 화장실

그렇더라도 대부분의 서민들은 여전히 화장실이 없었으므로, 아무 곳에서나 용변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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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18세기 파리에서는 궁중에서 심은 주목나무를 화장실로 쓰는 것을 당국에서 막자, 사람들은 일제히 센느 강에다 용변을 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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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경 유럽에서는 공중화장실이 생겨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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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 영국의 공중화장실을 시찰한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이렇게 말했다.(클라이브 폰팅, 『녹색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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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겔스

“맨체스터에서 200명의 사람들이 한 화장실을 나누어 쓰는 것을 봤다. 그곳의 공중 화장실들은 하나같이 문짝도 없었고…”
“화장실은 너무 더러워서 이곳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썩은 오줌과 똥구덩이로 범벅된 사방의 도랑을 피해 다녀야만 했다.”

 

조선 시대의 화장실 

동양에서는 화장실이 있었다. 변을 모아 밭에 퇴비로 주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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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전통시대의 동양은, 서양보다 훨씬 깨끗한 분뇨처리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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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한양과 같은 도시였다.

조선 후기가 되면 한양의 인구가 급증하게 되는데, 때문에 한양의 거리에는 대로변까지 불법 민가가 들어서고 있었다.

가건물이 점령한 한양의 대로변
가건물이 점령한 한양의 대로변

당시 임금이었던 영조는 이렇게 한탄하기도 했다.(정연식, 『일상으로 본 조선시대 이야기』 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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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아! 도성 안의 백성이 많아도 너무 많다능.”

 

그도 그럴 것이 조선 초 10만 명이던 한양의 인구가 18세기로 들어서면 20만 명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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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이러했으니 분뇨 처리도 갈수록 문제였다.

시골에서는 분뇨를 비료로 쓰면 됐지만

94-dung

도성 안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없도록 법으로 금지하고 있었으니,

당시 한양의 분뇨는 잘 말려, 인근 채마밭으로 내다팔곤 했다.
당시 한양의 분뇨는 잘 말려, 인근 채마밭으로 내다 팔곤 했다.

분뇨를 버리는 것도 매우 번거로운 일이었다.

96-toogi

이때 사람들은 몰래 하천에다가 투기하는 일이 많았다. 때문에 실학자 박제가는 이렇게 한탄하기도 했다.(정연식, 『일상으로 본 조선시대 이야기』 2권)

 

97-parkjega

박제가

“한양에는 수레가 없어서 오물을 쉽게 퍼가지 못하고 사람들은 냇가나 거리에 분뇨를 함부로 버리고 있다.”

 

98-river

 

97-parkjega

박제가

“도성의 물맛이 짠 것은 바로 함부로 내다 버리는 똥오줌 때문이다!”
“다리 밑을 보면 인분이 덕지덕지 달라붙어서 큰 장마가 아니면 씻기지 않는다.”

 

청계천 수표교
청계천 수표교

실학자 박지원도 비슷한 지적을 했다.(『연암집』)

 

100-parkjiwon

박지원

“도성의 사람들은 함부로 분뇨를 하천에 버리기도 했는데…”
“그런 이유로, 장마철에 물이 범람하면 분뇨 섞인 오수가 거리 곳곳으로 번지기도 했다.”

 

당시 거리에는 아무 데나 싸고 버린 인분들이 널려있었고

101-chunggyeo

청계천에는 그런 변들이 둥둥 떠다니다가 돌로 쌓은 둑에 덕지덕지 들러붙어 있었던 것이다.

청계천 광통교
청계천 광통교

그러다가 큰비가 내려야만 분뇨들이 씻겨 내려갔다.

거기까지는 좋은데, 당시는 배수 시설이 형편없어서 똥물이 곧 민가를 덮쳤다는 게 문제였다.

103-dongnado

심지어 선왕의 후궁들이 기거하는 자수궁과 같은 지대가 낮은 궁궐에까지 오물이 괴여 궁중에서도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107-jasoogoong
자수궁 터

사실 동양에서의 화장실은 배설물을 모아 비료로 사용하기 위해 지어졌으니,

2천년 전 중국의 한나라에서는 돼지변소를 만들어 인분을 사료로 활용했다.
2천 년 전 중국의 한나라에서는 돼지 변소를 만들어 인분을 사료로 활용했다.

‘시비법’이 없었던 고려 시대 이전에는 애써 배설물을 모을 필요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퇴비를 모르던 시절에는 화장실보다는 ‘요강’을 주로 사용했다.

b-yogang

또 요강의 사용은 한양과 같은 도성에서는 필수적이었다. 어쩌면 전통시대에서는 화장실보다 요강이 더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을지도 모른다.

요강 닦기
요강 닦기

이는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로마 시대에는 발달된 수리시설로 수세식 화장실까지 사용됐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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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이후 화장실은 사라지고 요강이 보편적으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일본의 요강
일본의 요강
볼일을 보는 유럽 귀부인
볼일을 보는 유럽 귀부인

일본에서도 요강은 애용되는 아이템 중 하나였으니, 에도시대에는 야외용 요강이 따로 있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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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거리는 대소변투성이

구한말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이 남긴 기행문에 자주 등장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거리 곳곳에 널린 오물 덩어리였다.

108-seouls

당시 서울 거리는 대소변투성이었고 늘 악취가 진동했다.(동아일보 2007년 6월 21일자)

영국인 비숍은 이렇게 말했다.(『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1897)

 

109-bishop

비숍

“나는 중국의 베이징을 보기 전까지 서울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도시가 아닌가 했고”
“샤오싱을 보기 전까지 서울을 가장 냄새나는 도시로 생각했다.”

 

110-seoul

영국인 여행가 새비지 랜도 역시 이렇게 표현했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 1895)

 

111-rando

랜도

“서울에 도착하니 여름에는 비 덕택에 오물이 씻겨내려가 지낼 만하고…”

“겨울이면 얼어붙어서 괜찮았지만…”

 

 

112-winter

 

111-rando

랜도

“봄철에는 얼었던 오물들이 풀리면서 풍기는 냄새가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차라리 내 코가 없어졌으면 했다.”

 

 

113-seoul

그런데 이 말은 마치 유행어라도 된 듯, 한 독일인도 비슷한 말을 했다.(고유경, 2005, 「한독관계 초기 독일인의 한국 인식에 나타난 근대의 시선」, 349쪽.)

 

114-german

독일인

“이런 더러운 도시가 역병에 시달리지 않는 것은…”

“겨울의 혹한, 여름의 홍수가 오염물질을 그나마 쓸어주기 때문이고…”

 

115-winter

 

114-german

독일인

“그래도 남은 더러운 것들은 개들이 싹 먹어치운다.”

“그래서 한국인은 감사의 표시로 개를 먹는다.”

 

116-dogs

1901년부터 4년간 고종의 주치의로 있었던 독일 의사 리하르트 분쉬도 비슷한 말을 했다.(김종대, 『대한 제국을 사랑한 독일인 의사 분쉬』)

 

117-bunsh

 분쉬 

“서울의 길거리 청소는 견공들에게 맡겨놓은 상태다.”
“곳곳에 널린 대변을 개들이 먹어치우니, 길의 청결 여부는 견공의 식욕에 달려 있다고 할 것이다.”

118-dogs

이런 사실은 오늘날 과학으로도 증명되고 있다. 서울대 의대 신동훈 교수의 말이다. ☞ 출처

 

119-shin

신동훈

“경복궁 담장, 광화문 광장, 종묘 광장 등 조선 시대 지층에서 회충·편충 등의 기생충 알을 발견했다.”
“추출한 흙에서 1g당 최고 165개의 알이 나왔고, 평균 35개의 알이 검출됐다.”

120-eggs

119-shin신동훈

“기생충 알은 주로 인분으로 배출된 뒤 채소 등의 먹거리에 섞여 다시 사람 입으로 들어가는 방식으로 감염된다는 점에서 당시 한양에는 인분이 널려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분뇨를 비료로 사용하는 시비법은 중국에서 유래되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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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비법으로 인해 토지의 단위 생산량은 급격히 증가하여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게 되었지만, 대신 ‘기생충’이라는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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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90%의 중국 주민들이 기생충에 감염되어 있었다.


상황이 그러했으니 개화파들은 처참한 조국의 현실에 악담을 퍼부었다.

122-chosun

윤치호의 일기 내용이다.(장만석 외, 『한국 근대성 연구의 길을 묻다』, 104~1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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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

“천하 만고에 조선만큼 더러운 곳도 없다.”
“중국 도로에 지린내, 구린내가 진동한다지만 조선에 사는 사람들은 똥 구더기에 사는 격이다.”
“일본인의 집은 밝고 깨끗한데 중국인의 집이 더럽고 음침하다면서 욕을 주지만…”
“조선 사람들의 집은 똥 뒷간 수준인데 어찌 중국인들의 이층집에 비교하겠는가. 한심스럽다.”

 

124-seoul

1882년 김옥균은 이렇게 말했다.(장석만 외, 『한국 근대성 연구의 길을 묻다』,  102쪽.)

 

125-kim

김옥균

“우리나라를 방문한 외국 사람들은 오죽했으면 이런 말을 한다.”
“조선에서 가장 무서웠던 것은 길에 가득한 사람과 짐승의 똥오줌이다.”
“관청에서부터 민가의 마당에 이르기까지 오물 천지로 역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데…”
“이 어찌 외국의 조소를 받지 않을 일인가?”

 

심각한 수질오염

토양의 오염은 필연적으로 수질오염을 야기하기 마련이다.

126-seoul

당시의 상황이 어땠는지 보자. 영국인 비숍의 글이다.(『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1897)

 

109-bishop

비숍

“서울 골목길에는 서방에 널린 도랑과 시궁창으로 가뜩이나 좁은 골목은 더욱 비좁았다.”
“도랑에는 초록색 점액질의 걸쭉한 오물이 고여 있어서, 지독한 냄새가 났는데.”
“이는 집집마다 버려진 분뇨와 쓰고 버려진 하수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더럽고 썩은 시궁창에 반라의 어린이들이 즐겨 놀고 있었고…”

 

127-river

 

109-bishop비숍

“노점상들은 판자 조각을 시궁창에 걸쳐 놓고 그들의 상품을 팔고 있다.”
“개인 우물을 가진 곳도 상황은 심각했다.”
“마당의 반쯤은 두엄더미인데 여자들이 태연하게 그 우물에서 식수를 긷고 있었다.”

 

128-wall

미국인 언더우드 부인도 비슷한 글을 썼다. (『조선견문록』, 1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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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 부인

“조선의 좁은 하수로는 오물로 가득 차서 도로로 흘러넘쳤고…”
“때문에 녹색의 이끼 낀 물웅덩이가 거리 곳곳에 가득했다.”
“그런데 그런 오물에서 여인네들은 야채를 씻어 먹고 있었다.”

 

130-river

선교사 헐버트 역시 비슷한 얘기를 했다.(『대한제국 멸망사』,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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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버트

“한국인들은 초보적인 위생 상식도 없었으니, 아무리 부잣집에 가도 상황은 다를 바가 없었다.”
“청소를 기다리는 것보다 먼저 오물을 피해 가는 것이 더 현명했다.”
“우물도 매우 오염돼있었는데, 오물이나 빨래를 했던 물, 더러운 하수가 그대로 버려졌다.”

 

132-hanyang

선교사 알렌의 글도 비슷하다.(정성화·로버트 네프, 『서양인의 조선살이』)

 

133-allen알렌

“서울은 어딜 가나 위상상태가 좋지 못했다.”

“대감들이 몰려 살고 있는 부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134-giwa

 

133-allen알렌

“고관 댁 담장 아래로 하수로가 나 있었는데…”

“씻고 버린 채소나 쓰레기들이 쌓여 있어 악취가 엄청났다.”

“하지만 그런 길을 태연하게 대감들은 가마나 말을 타고 지나간다.”

 

135-gama

이번엔 1899년 독립신문의 글이다.(고미숙, 2004, 『근대계몽기 지식 개념의 수용과 그 변용』, 3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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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

“도성 안의 개천의 물에는 악독한 냄새와 지미한(미세한) 버러지가 나와…”
“코와 입으로 들어가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병이 나게 한다.”
“도성 안에 있는 우물 또한 모두 대소변의 거름물이 스며든 것이니, 그 물을 깨끗한 유리병에 담아 놓고 좋은 현미경으로 볼 것 같으면…”
“물 가운데 반드시 무수한 버러지가 있을 터이니 그런 물을 먹고서야 어찌 무탈할 수 있겠는가.”

 

거리청소의 시작

그야말로 불결함은 조선의 명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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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은 말할 것도 없고, 조선 팔도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사람들이 워낙 몰리는 시장에서는 따로 공중변소를 설치하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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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상황이 매우 열악했다. 일본인 혼마 규스케의 글이다.(『조선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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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마

“시장의 중앙에 공동변소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그것은 다만 짚으로 지붕을 엮고, 거적을 두른 조잡한 것이었는데…”
“주변에는 인분을 받아 먹이려 개와 돼지를 길렀기 때문에…”

 

오키나와의 똥돼지
오키나와의 똥돼지

 

139-honma

혼마

“사람이 들어가면 옆에서 기다렸다가 인분이 나오면 짐승들은 재빨리 받아먹었다.”
“때문에 그 모습을 보면 거의 구토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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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 이하의 아이들은 용변을 보고 나면 똥개가 핥아서 뒤처리를 해주곤 했다.

결국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정부는 거리 청소에 관심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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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만 있을 때는 어디가 나쁜 줄 전혀 모르다가…”

“세상 밖을 나가보니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이었음.”

당시 내무 대신이 된 박영효가 경찰 업무에 위생 사무를 포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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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효

“거리 청결에 대한 감시와 처벌을 앞으로 순검이 맡도록 하라.”

 

구한 말 순검의 모습
구한 말 순검의 모습

이어서 1897년 독립신문은 길거리를 깨끗이 하기 위해 공립 뒷간(공중화장실)을 설치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으나,

 

144-gojong

고종

“공립 뒷간이라니, 쓸데없이 돈을…”
“그냥 앞으로 길가에 대변을 누지 않도록 하라.”
이렇게 칙령을 반포했을 뿐 공중변소가 설치되진 않았다.

 

145-hansung

공중변소가 처음 생긴 것은 1904년 6월 ‘위생청결법’이 만들어지면서부터였다. 당시 위생청결법의  내용은 이러했다. ☞ 참고 (동아일보, 2007년 6월 21일자)

 

146-officer

관리

“집집마다 매일 쓰레기를 청소하되 준수하지 않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
“공중변소를 만들 것이니 앞으로 노상방변과 노상방뇨는 금지한다.”
“우물의 불결로 질병이 발생하니 앞으로 우물을 청결케 한다.”

 

똥구멍이 원수로다

이때 가장 중요한 문제는 거리의 대소변을 없애는 것이었다.

147-hansung

때문에 집집마다  화장실을 설치해야 했으니, 새롭게 수거 문제가 대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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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위생회사 혹은 청결회사라고 불리는 일본인 소유의 회사가 설립되었으니, 이 회사에서는 인부들을 고용하여 손수레로 분뇨를 실어 날랐다.(권보드래, 『한국 근대소설의 기원』, 274쪽.)

149-trans

대신 거리에 대소변을 보다 발각되면 참담한 수모를 당해야 했다.

150- punisher

걸리면 뭇매와 벌금은 기본이었고 자기 오줌을 핥아먹어야 했던 이들도 있었다.(이승원, 『학교의 탄생 : 100년 전 학교의 풍경으로 본 그대의  일상』,  138쪽.)

151-gonjang

이때 일본처럼 1개월 징역에 처하자는 주장도 제기되었다.(권보드래, 『한국 근대소설의 기원』, 275~276쪽.)

하지만 가혹한 대응에 사람들은  내심 분노했다.

 

152-people

지나가던 백성

“이건 너무 심하잖아!”

 

153-people

지나가던 백성

“아, 그럼 공중변소를 많이 만들던지. 급해서 바지에 싸게 생겼는데…”

 

다달이 걷는 위생비도 서민들에겐 큰 문제였다. 당시 조선인들은 공과금에 대한 개념이 없었으니 반발은 더욱 심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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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위생비를 내지 않으면 분뇨를 수거해가지 않았으니, 애써 만든 화장실에 대소변이 대책 없이 쌓여가는데 어찌하겠는가?

으악! 축간이 터지려고 한다!
으악! 측간 터진다!

때문에 위생비를 낸 집 문간에 붙여놓도록 한 표찰을 몰래 떼다 자기 집에 붙여놓는 도둑질이 횡행하는가 하면,

156-thief

분뇨를 몰래 거리나 개천에 내다 버리는 일도 잦았다.

157-k

이런 무단투기가 어찌나 심했던지, 거리가 예전보다 더 더러워졌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

158-hansung

하지만 예전처럼 마당 한편에 변을 말려 거름으로 팔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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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거름 판매를 일체 금지했기 때문에 위생회사를 거치지 않고서는 도저히 분뇨를 처리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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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위생회사의 주인이었던 일본인들은 수거비를 받는 동시에 분뇨를 농촌에 내다 팔아 다시 이익을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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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10월 대한매일신보 논설이다.(권보드래, 『한국 근대소설의 기원』, 2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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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매일신보

“몇백만 명 한국인의 똥이 일본인의 손으로 모두 넘어가서…”
“몇천만 석 거름의 이익이 일본인의 입으로 몽땅 들어갔다.”
“아! 똥구멍이 원수로다.”

 

하지만 이후로도 쉽사리 길거리에 변을 싸는 행위는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1910년대 신문사설의 자주 등장하는 말은 이러했다.(민족문제연구소, 『한국인의 생활과 풍속』 상, 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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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길바닥에 똥을 누지 말라능!”

 

원문: 레알뻘짓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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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pss.kr/archives/52424/feed 0
“한양의 길거리는 똥 천지였다.” (1) https://ppss.kr/archives/51553 https://ppss.kr/archives/51553#respond Fri, 17 Jul 2015 07:55:51 +0000 http://3.36.87.144/?p=51553 위생의 중요성

전통시대의 오염 중에서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바로 오염된 물을 식수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1-skull

사실 분뇨에 오염되지 않은 물을 마셨던 문명은 19세기 중반까지 동서양 어디에도 없었다.

19세기 템즈 강의 오염
19세기 템즈 강의 오염

예컨대 강 상류에서 버려진 오물은 강 하류에서 그대로 식수원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강 상류 사람들은 하천을 깨끗이 사용해야 했지만, 그렇다고 강 상류 사람들에게 빨래를 못 하게 하거나

3.1-poongsok

가축을 키우지 못 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분뇨를 흘러 보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했을 것이다.

3-poongsok

그런 오염된 물을 마셔야만 했으니, 19세기 초까지 인류는 수인성 질병에 시달려 평균 수명은 30세를 넘기 힘들었고
2천 년간 인류의 평균수명(유아사망률 포함)
2천 년간 인류의 평균수명(유아사망률 포함)

1년 이내에 사망하는 유아사망률을 제외하더라도 35세를 넘기 힘들었다.

구석기인들이나 19세기 인류나 평균수명은 비슷했다.(유아사망률 제외)
구석기인들이나 19세기 인류나 평균수명은 비슷했다.(유아사망률 제외)

하지만 19세기 중반부터 인류의 평균수명은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하여 20세기 초 45세, 21세기 초 75세로 증가한다.(서양 기준)

갑자기 수명이 빠르게 증가한 이유는 무엇일까?

6-question

많은 사람들이 의학의 발전을 생각할 듯싶다.

7-baccine

물론 18세기 후반부터 발명되는 천연두 백신으로 인해 인류의 평균수명은 획기적으로 높아질 수 있었다.

제너의 종두법
제너의 종두법

“예전에는 천연두에 걸리면 20%는 사망했었기 때문에…” ☞ 참고

조선시대 천연두에 걸려 죽은 시신은 가마니에 넣어 나무에 매달았다.
조선 시대 천연두에 걸려 죽은 시신은 가마니에 넣어 나무에 매달았다.

하지만 천연두 백신의 접종으로 사망률이 감소된 효과는 겨우 전체의 1.5%에 불과했다.(클라이브 폰팅, 2003, 『녹색세계사』, 그물코, 371쪽.)

읭?
읭?

20세기 이후 인류의 평균수명이 30세가량 높아졌지만, 그중 의학이 기여한 것은 8%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녹색세계사』, 372쪽.)

10-history

예컨대 20세기 중반 결핵 치료제가 개발되지만, 결핵 치료제가 없었던 20세기 초 결핵의 발병률은 이미 1세기 전보다 1/8 수준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읭?
읭?

인류 평균 수명의 연장은 의학의 발전보다는 상하수도 등 공중위생 개선과

11-water

영양섭취 개선이 더 큰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 참고

12-meal

“사실 천연두나 결핵과 같은 질병도 잘 먹고 위생상태가 좋으면…”

“약 없이도 완치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

 

조선 시대의 평균수명

전통시대를 벗어나지 못 했던 20세기 초 우리나라의 평균수명은 19세기 초 유럽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국인의 평균수명 추이(유아사망률 포함)
한국인의 평균수명 추이(유아사망률 포함)

“유아사망률을 포함하면 평균수명은 24세였던 걸로…” ☞ 참고

평균수명을 통해서 보자면 우리나라의 근대화는 서양에 비해 1세기 가량 뒤처진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조선 시대 사람들은 오래 살지 못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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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조선 시대의 의학기술은 당대 서양은 물론, 고대 로마시대와 비교해도 결코 낫다고 할 수준이 아니었다. ☞ 참고

2천 년 전 로마의 외과수술용 도구
2천 년 전 로마의 외과수술용 도구

조선 시대에 침술과 탕약을 쓰고 있을 때 서양은 해부학 서적이 편찬되고 외과수술을 하고 있었고,

1736년 영국에서는 최초로 맹장염 수술이 실시됐다.
1736년 영국에서는 최초로 맹장염 수술이 실시됐다.

허준이 동의보감을 편찬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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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은 혈류 순환시스템을 이해하고 있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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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마가 사상의학을 창시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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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서는 혈액 수혈을 하고 있었다. ☞ 참고

20-blood

여기에 구한말까지도 민간에서는 해괴한 주술이 횡행하고 있었다.


다음은 구한말 민간에 횡행하던 민간요법들이다.

말라리아 치료법: 사람 그림을 그린 뒤 복부에 칼을 꽂아둔다.

a-nife

말라리아 치료법: 자기 발바닥에 아버지의 이름을 써넣는다.

b-foot

콜레라 치료법: 잡귀를 물리쳐주는 고양이 부적을 대문에 붙여둔다.

c-cat

종기 치료법: 종기가 난 자리에 犬을 그려 넣고 주위에 虎를 써넣는다.

d-dog

눈병 치료법: 눈병이 난 자리에 못을 박아 눈에 들어간 악귀를 쫓는다.

3-eye

황달 치료법: 맥주병을 걸어둔다.

f-yellow

설사병 치료법: 밥상 위에 젓가락으로 십자가를 만든 뒤 물을 붓는다.

g-dung

홍역 치료법: 갓이나 옷가지를 나뭇가지에 걸어둔다.

h-got


하지만 그래봤자 19세기 초까지 조선의 평균수명은 서양과 비슷했다.

읭?
읭?

어차피 평균수명을 늘린 것은 의학보다는 위생의 힘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동기 이후의 평균수명을 따져보면 50세 정도는 살았다.
아동기 이후의 평균수명을 따져보면 50세 정도는 살았다.

따라서 조선 시대 사람들이 오래 살지 못했던 이유는 의료수준보다는 위생상태를 먼저 따져봐야 할 일이다.

조선시대 한양의 노천 풍경
조선 시대 한양의 노천 풍경
가령 어떤 물을 마셨고 평소 얼마나 자주 목욕을 했고, 화장실 어떻게 사용했고, 분뇨는 어떻게 처리됐는지 등을 알아보는 것이 조선 시대를 이해하는 데 보다 효과적인 자세가 될 것이다.

 

전통시대 서양의 목욕

고대 로마인들은 발달된 수리시설을 통해

로마 시대 배관
로마 시대 배관

도시로 물을 끌어들여 공중목욕탕에서 목욕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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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시대의 공중목욕탕

하지만 중세 유럽이 도래하고 종교가 사회를 지배하기 시작하자 관념화되고 보수화되고 폐쇄적인 농경사회로 고착되어버렸으니, 희한하게 목욕 문화가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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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나병 환자, 시체도 거리낌 없이 만지셨다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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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먹을 때 손을 씻는 것도 위선이라고 말씀하셨음.”

‘씻는 것을 위선’이라고 생각했던 종교인들의 해석은 이후로 유럽인들의 위생 수준을 아찔할 정도로 변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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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의 성직자 성 제롬은 이렇게 말했다.(『목욕, 역사의 속살을 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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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날 때 세례를 받은 사람은 평생 더 이상 목욕할 필요가 없다능.”

 

‘아라비안 나이트’에서도 아랍인들은 유럽인들을 이렇게 꼬집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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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인

“기독교인들은 평생 씻을 줄을 모른다.”
“태어날 때 받은 세례가 일생 중 단 한 번의 목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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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인들의 일생의 유일한 목욕일 수도 있는 세례식

흑사병이 창궐할 때 유럽 의사들의 처방은 이러했다.(『목욕, 역사의 속살을 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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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팔이

“목욕을 하면 모공을 통해 오염된 물이 몸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건강하게 살고 싶으면 절대 몸에 해로운 목욕은 하지 마라.”

 

심지어 목욕물에 떠다니는 정자 때문에 임신할지도 모른다는 괴담까지 돌아다녀, 여인의 경우 목욕은 더더욱 삼가야 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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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에 와서도 이런 습관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으니, 17세기 독일 화가 네처가 그린 귀부인의 그림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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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류층 귀족이 아들의 머리에서 이, 벼룩 등을 찾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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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프랑스의 팔라틴 공주는 8월의 어느 더운 날 먼지가 나는 도로를 오랫동안 마차를 타고 달려 얼굴에 먼지가 너무 많이 묻어 어쩔 수 없이 세수를 했다고 투덜댈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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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라틴 공주

“오늘은 어쩔 수 없이 세수를 해야만 했어염.”

 

 

상황이 이러했으니 당시 유럽인들의 체취란 말할 것도 없었다.

1576년 이탈리아의 음악가 카르다누스는 이렇게 말했다.(『목욕, 역사의 속살을 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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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다누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몸에는 벼룩과 이가 득실거리고…”
“암내, 발 냄새, 구린내 등 온갖 냄새가 다 났지만,”
“다 참을 수 있어도 끔찍한 입 냄새만큼은 못 참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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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17세기 루이 13세는 이런 자랑을 했었다.(『목욕, 역사의 속살을 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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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3세

“짐은 선왕을 닮아 겨드랑이 냄새가 심하다능.”

 

그리고 그의 아들 루이 14세는 끔찍한 입 냄새로 악명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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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왕들은 아무리 악취가 심하다 한들 옷을 갈아입거나 향수를 뿌릴 뿐, 결코 목욕을 하는 법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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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목욕

고려 시대만 하더라도 목욕 문화가 어느 정도 발달되어 있어서 12세기 고려를 찾았던 송나라의 서긍은 고려의 목욕 문화를 보고 감탄하기도 했었다.(출처: 『고려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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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긍

“옛 역사서에 고구려 사람들은 모두가 깨끗하다고 하였는데 지금도 그러하다.”
“고려인들은 중국인들의 몸에는 때가 많다고 비웃는다.”
“고려인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목욕을 하고 문을 나서고…”
“여름에는 시냇가에서 매일 두 번씩 목욕을 하고 있었다.”

 

물론 서긍의 말 하나로 전체를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한 것은 조선 시대보다는 목욕 문화가 발전했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고려 시대는 전통시대 일본과 닮았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교사상이 지배했던 조선 시대는 여러모로 중세유럽과 닮았다.

관념적이고, 보수적이고, 폐쇄적이고, 신분질서를 중시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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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대부분 토지에 얽매어 이동을 제약받았던 점에서 조선 시대는 중세 유럽과 비슷한 부분이 꽤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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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우연의 일치인지, 조선 시대에도 목욕 문화는 급격히 쇠퇴하게 된다.

신체 노출을 극도로 꺼렸던 유교적 관습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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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네들은 목욕할 때도 옷을 다 벗지 않고, 필요한 부분만 선택적으로 씻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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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했으니 위생상태는 가히 절망적이었다.

100년 전 서양 사람들의 기록을 보면 상투를 풀어헤친 조선 사람들을 보면서 아연실색을 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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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유는 머리에서 이가 우두둑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선 시대 양반들은 ‘이’가 많은 걸 오히려 장수의 상징으로 생각하기도 했으니, 한 양반은 자식에게 이렇게 타이르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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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

“아들아, 너무 목욕 자주 하지 마라. 이가 없으면 빨리 죽는다.”

 

하지만 그렇게 말했던 양반은, 정작 자기 몸에 이가 없어져서 걱정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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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

“아! 그 많던 내 이들이 다 어디로 갔는고?”
“이가 많아야 오래 산다던데, 내가 이러다 빨리 죽겠구나”

 

그러나 얼마 후에 이가 다시 몸에 모이자 크게 기뻐 감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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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해서 조선 정부에서 목욕 문화를 막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세종 때는 일본의 발달된 목욕 문화를 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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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도 공중목욕탕을 만들고자 했었다.

15세기 초 일본을 방문했던 통신사가 세종에게 올린 보고서의 내용 중 일부다. ☞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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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생(통신사)

“일본인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목욕을 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큰 집에는 개인 욕실을 설치하고 있었고 집집마다 여러 군데 욕탕을 설치하고 있었는데,”
“욕실의 제도가 매우 잘 되어 있어 편리합니다.”
“가령 물이 적당히 끓여지면 뿔피리를 부는데, 그러면 사람들은 다투어 돈을 내고 목욕을 합니다.”
“조선도 이런 욕실을 많이 설치해서 화폐의 사용법을 돕도록 하소서.”

 

하지만 유교문화의 보수성과 백성들의 화폐에 대한 불신으로 공중목욕탕은 빛을 보지 못했다.

조선시대 서민들의 온천욕
조선 시대 서민들의 온천욕

구한말의 목욕

사람들은 불과 1~2세대 이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오늘날처럼 미디어가 발달된 세상에서도 1~2세대 이전의 모습을 보여주면 짐짓 놀라게 된다.

1966년 수원시
1966년 수원시
저렇게 살았었나?
저렇게 살았었나?

구한말 조선에 왔던 서양인들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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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들의 위생 수준은 상하수도 시설이 들어서는 19세기가 되면서부터 대폭적으로 개선되게 되는데,

19세기 후반의 상하수도 공사
19세기 후반의 상하수도 공사

구한말 조선의 모습을 보고 서양인들은 마치 전혀 다른 세계를 목격이나 한 듯 아연실색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은 17세기 조선에서 13년간을 살았던, 하멜의 표류기에는 결코 나오지 않는 반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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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19세기 말 ‘청결’은 서양인이 동양을 바라보는 하나의 기준이자 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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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서양인은 동양인들의 청결에 대한 차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박지향, 2003, 『일그러진 근대』, 푸른역사,  1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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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

“일본인은 몸과 옷이 다 같이 청결하고…”
“조선인은 옷의 청결함은 고집하면서 몸에는 관심이 없는 반면,”
“중국인들은 둘 다 관심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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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서울 풍물지』를 쓴 미국인 조지 길모어는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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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모어

“한 영국인은 조선에서 가장 깨끗하다는 사람이…”
“그가 여태껏 본 가장 더러운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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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년 제물포에 입국한 영국 군인들은 이렇게 말했다. ☞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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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인

“들리는 말로는 조선인은 평생 단 두 번만 씻는다고 하더라.”

 

미국인 선교사 알렌은 왜 침례교가 조선에서는 정착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건너가서는 성공했느냐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신복룡, 2002, 『이방인이 본 조선 다시 읽기』, 풀빛, 164~1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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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렌

 

“한국인은 목욕을 싫어하기 때문에 침례교가 뿌리를 내릴 수 없었고,”

“목욕문화가 발달한 일본에서는 성공할 수 있었던 것임.”

 

 

침례교
침례교

하지만 본시 청결함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딨겠는가? 개항장이 들어서 일본인 거류지가 생겨나자

제물포 개항장
제물포 개항장

우리나라에도 일본의 목욕문화가 전파되었으니 구한말 일본 요릿집을 본떠 만든 조선의 고급 요릿집에는 하나같이 ‘목욕’을 하나의 메뉴로 제공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인들은 목욕탕 안에서도 담배를 피웠다.
당시 조선인들은 목욕탕 안에서도 담배를 피웠다.

심지어 요릿집의 이름을 목욕탕 이름으로 짓기도 했다.(임종국, 1995, 『한국인의 생활과 풍속』 상, 아세아문화사, 191~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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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장

“자! 혜천탕이 신장개업했슴돠. 좋은 술과 요리는 물론이고 목욕간이 정결하답니다.”

 

하지만 식사를 하기 전에 목욕을 즐기는 건 극소수 상류층만의 일본 흉내 내기 놀이었을 뿐, 구한말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조선 시대의 위생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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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서울에서 국내 최초의 대중목욕탕이 생겼지만 사람들의 인식이 부족하여 곧 문을 닫고 말았고, 대중목욕탕은 1920년대에서야 본격적으로 생겨나게 된다.(이연복, 2000, 『한국인의 미용풍속』, 월간에세이, 164~165쪽.)

일제강점기의 목욕탕
일제강점기의 목욕탕

원문: 레알뻘짓 블로그


※ 「“한양의 길거리는 똥 천지였다.” (2)」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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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쿠데타 성공에는 몇 명이 필요했을까? https://ppss.kr/archives/17858 https://ppss.kr/archives/17858#comments Mon, 30 Jun 2014 04:59:23 +0000 http://3.36.87.144/?p=17858 ● 쿠데타의 역사

이미지_1우리 역사에서 ‘쿠데타’라는 단어는 매우 친숙하다. 건국 후 60여 년 동안 2번의 쿠데타가 일어났고, 이로 인해 3명의 군인출신 대통령을 두었으며, 이들에 의해 30년간의 통치를 경험해야 했던 것이 오늘날의 대한민국이다.

이미지_2과거에는 이런 쿠데타를 흔히 ‘정변’이나 ‘반정’이라고 했다. 물론 성공한 쿠데타에 한해서다.

이미지_3실패하면 흔히 ‘난’ 혹은 ‘반란’으로 치부되었다. 쿠데타나 반정을 미화하기 위해 흔히 ‘혁명’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데, 여기에는 논란의 소지가 많다.

이미지_34“도대체 쿠데타와 혁명은 어떻게 다름?”

이미지_5“쿠데타 이후에 사회전반적으로 얼마나 달라졌냐에 따라 혁명인지 아닌지 알 수 있지.”

이미지_6

“보통 혁명은 주도세력이 민중이지.”

이미지_36“그냥 내가하면 혁명이고, 남이 하면 쿠데타지.”

이렇듯 혼란스럽다. 이런 쿠데타는 우리 역사에 얼마나 자주 있어왔을까? 성공한 쿠데타만 따져봤을 때 대략 이렇다.

이미지_7고구려 4회, 백제 3회, 신라 10회, 고려 5회, 조선 4회. 보통 130년에 한번꼴로 일어났다. 백가의 난(501년), 공민왕 시해사건(1374년)과 같이 왕을 시해하는데는 성공했지만, 정변까지는 다달으지 못한 경우는 제외했다.

이미지_8

다른 나라의 사례까지는 따져보지는 못했지만, 중국에서 출현했던 60여개의 왕조의 평균수명이 64.8년 정도인 것과 비교해보면 BC 202년 건국된 중국의 한나라 이래, 중원에서 출현한 왕조 60여개의 평균 수명은 64.8년이었다.

images (1)위 그림은 동탁을 살해하는 여포의 모습이다. 대부분의 중국 왕조들은 ‘환갑’을 조금 넘긴 뒤에 세상을 떠났다. 우리나라의 정변 횟수는 결코 많았다고는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미지_10특히 조선시대만 놓고 보자면 더욱 그렇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시작부터 ‘위화도회군’이라는 역성혁명으로 이뤄졌고, 이후로 1차 왕자의 난, 계유정난, 중종반정, 인조반정 등의 4번의 성공한 쿠데타가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조선 전기에 일어난 일이고, 사회가 크게 보수적으로 변하는, 조선 후기에는 쿠데타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images (2)인조반정 이후로는 거의 300년 동안 우리 나라는 쿠데타를 잊고 살았을 정도였다. (병인양요, 신미양요라는 국지전이 있었다지만) 그 기간 동안 전쟁도 없었다. 아마 세계사적으로도 이런 장기간의 평화는 매우 드문 경우가 아닐까?

 

● 쿠데타와 병력의 상관관계

쿠데타를 하려면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

이미지_34“병력이겠지.”

아니다. 그보다 중요한게 있다. 516 쿠데타를 성공시킨 박정희의 경우만 봐도 총 3천명의 군인으로 정권을 잡게되는데, 3천명이면 당시 60만 총 병력의 0.5%에 지나지 않았던 수치였다.

이미지_34“그렇다면 철저한 보안?”

그것도 아니다. 사실 516 쿠데타만 하더라도 정가에서는 공공연하게 쿠데타썰이 오가던 상태였다. 그런데도 막지 못했다.

이미지_34“혹시 대의명분이 중요한 열쇠인가?”

이 역시 아니다. 어차피 정통성이나 명분은 일단 일을 저지르고나서 나중에라도 만들면 그만이었다.

이미지_34“그럼 대체 뭐임?”

바로 스피드다.

다운로드 (2)“읭?”

까놓고 말해서 군대만 있다고, 병력이 많다고 쿠데타가 성공하는 건 아니다. 역사적 사례만 봐도 그렇다.

무신정변1사극에서 보여지는 조선시대의 쿠데타는 수천명의 병사를 끌고와 궁궐을 장악하거나 칼쌈질을 하며 대대적인 전투를 벌이는 모습이 대부분이지만, 실제로 수천명의 병사를 몰고와 전투를 벌였던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미지_11대부분의 쿠데타는 궐기를 하는 순간 바로 성패가 결정이 되었기 때문이고 설령 천 단위의 병사들을 동원했다고 해도, 이들은 ‘보여주기 용도’였지, 모두 필요했던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미지_12그보다 얼마나 빨리 권좌를 장악하느냐 하는 것이 보다 중요했다. 권력이 나오는 핵심 자리를 장악하면 쿠데타는 늘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미지_14비단 조선시대 뿐만 아니라 516 쿠데타, 1212 사태 모두 그러했다. 특히 권력의 젖줄이라 할 수 있는 언론과 군권부터 빠르게 장악했다. 빠르게 권좌만 장악하면 됐기에 조선시대에는 길거리 양아치 몇 명을 포섭해서 나라를 전복했던 경우도 있었을 정도였다.

이미지_55“에이, 설마?”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다. 하긴, 병력이 너무 많아도 문제다. 쿠데타의 생명은 보안인데, 인원이 커질수록 보안은 지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 쿠데타군의 규모

조선시대 쿠데타 병력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이미지_10먼저 태조의 위화도 회군(1388년) 때 병력은 전투병력 38,820명, 보급병력 11,634명을 합쳐 도합 5만여명으로 나타나있다. 태종이 일으킨 1차 왕자의 난(1398년)은 최초 궐기 병력이 약 40여명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왜곡된 기록이라는 썰이 강하고, 실록을 조합해보면 최소 수백에서 최대 수천에 이를 것으로 보여진다.

이미지_11 (1)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1453년)은 최초 궐기 병력은 5명에 불과했다.

이미지_12 (1)이후 홍달손이 이끄는 포졸과 수양대군의 건달들이 합세해 총병력은 수백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미지_16박원종이 일으킨 중종반정(1506년)은 최소 수천 명으로 추정된다. 반정 세력이 창덕궁을 포위하자 이 소식을 듣고 문무백관과 백성들까지 가세했다.

이미지_17인조반정(1623년)은 주력 군사였던 이서의 병력 700명과 반정대장 김류 등이 이끈 병사 600~700명으로 총 1300명 정도로 예상된다.

이미지_18결국 조선시대에 있었던 다섯 번의 쿠데타를 보면, 역성혁명을 일으킨 이성계를 제외하고는 거의 천 단위 병력이나 그 이하의 병력으로 정권을 잡았던 것이다.

즉 병력의 수로 쿠데타의 성패 여부가 결정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빨리 권좌를 장악하느냐가 쿠데타의 성공 여부를 좌우했던 것이다.

원문: 레알뻘짓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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