ㅍㅍㅅㅅ https://ppss.kr 필자와 독자의 경계가 없는 이슈 큐레이팅 매거진 Wed, 20 Jul 2022 03:40:16 +0000 ko-KR hourly 1 https://wordpress.org/?v=5.8.10 https://ppss.kr/wp-content/uploads/2015/07/ppss-100x100.png ㅍㅍㅅㅅ https://ppss.kr 32 32 오늘부터 내 목표는 “최수연”이다 https://ppss.kr/archives/255728 Wed, 20 Jul 2022 03:40:16 +0000 http://3.36.87.144/?p=255728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최수연(하윤경 분)은 마냥 착하고 다정한 인물로 그려지진 않는다. 1화에서 그가 우영우(박은빈 분)를 대하는 장면은 캐릭터의 성격을 보여준다. 최수연은 ‘우영우가 어떤 사람이냐’ 묻는 권민우(주종혁 분)에게 로스쿨 시절의 일화를 들려준다.

나는 걔 보면 괴로워요. 어설픈 모습이 안쓰러워 도와주다 보면 정작 걔는 일등하고, 나는 뒤처지고…

그러면서도 회전 출입문을 못 지나가는 우영우를 본다. “저러고 있는데 어떻게 안 도와줘요”라고 말하니, 권민우는 “그럼 도와주시던가요”라는 말을 남기고 여유 있게 우영우 옆을 지나쳐간다. 오기가 생긴 최수연도 그냥 지나가지만, 결국 몇 걸음 못 가 뒤를 돌아보고 한숨을 푹 쉬고 우영우를 위해 회전 출입문을 잡는다. 그리고 우영우에게 쏘아붙인다.

회전문이 어려우면 다른 문으로 나오면 되잖아. 너 바보야 너 바보냐고! 아 진짜…

회전문을 못 지나가는 우영우를 도와주는 최수연

최수연이 우영우를 대하는 태도는 ‘동정’인지 아닌지도 판단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가 진심으로 우영우를 친구로서 아끼는지도 알 수 없다. 만나서 속 깊은 이야기를 털어놓는 동그라미(주현영 분)의 우정과는 상당히 다른 지점이다. 실제로 우영우가 동그라미에 대해 “‘하나’밖에 없는 친구”(동동삼씨의 사기 사건에 대해서 언급하며)라고 말한 것을 보면, 최수연과 우영우의 관계는 친한 친구 관계로 보기에도 애매하다.

우영우가 이준호(강태오 분)에게 고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전화를 하자 “영우아 너 지금 뭐 해, 근무 시간에 이러면 안 돼”라고 지적한다. 이준호에게도 “영우가 자주 이러냐, 평생 들어주실 거 아니면 준호씨가 먼저 선을 그어야 한다”라고 조언하기도 한다. 우영우와 이준호가 점심시간에 고래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는 우영우를 말리려고까지 한다.

하지만 대체로 최수연은 우영우에게 다정하다. 새 명패가 생긴 우영우에게 “사진 찍어줄까”라고 말한다. 권민우가 의도적으로 알려주지 않은 ‘ATM 사건’에 대해서도 일러준다. “구내식당에서 김밥 나오는 날은 말해줘야겠네”라고 하며, 아무렇지 않게 생수병 뚜껑을 따주기도 한다. 우영우의 ‘엄마’ 이야기를 들었을 땐 말 없이 경청을 하고, 뒤늦게 그를 위로하기 위해 백화점에 가서 가방을 사주겠다고 말한다. 7화 예고편에선 우영우에게 “준호씨가 너 좋아하는 거 같은데?”라며 (자신도 약간의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이준호의 마음이, 사실은 우영우에게 가 있다는 것을 솔직히 밝힌다.

우영우의 물병 뚜껑을 따주는 최수연

최수연은 특별히 선하거나, 진중하거나, 정의로운 사람이 아니다. 우영우와 평등한 관계를 지향하며, 편하게 대하려고 노력은 한다. 하지만 우영우를 도와주고 배려를 베풀어야 할, 혹은 관리가 필요한 ‘약자’로 여기는 경향을 버리지 못했다. 우영우의 ‘1등’에 왠지 모를 괴로움을 느끼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데도 최수연은 우영우에게 ‘봄날의 햇살’이다.

너 그런 거 아니야. 너는 봄날의 햇살 같아. 너는 나한테 강의실의 위치와 휴강 정보와 바뀐 시험 범위를 알려주고 동기들이 날 놀리거나 속이거나 따돌리지 못하게 하려고 노력해. 지금도 너는 내 물병을 열어주고 다음에 구내식당에 또 김밥이 나오면 나한테 알려주겠다고 해. 너는 밝고 따뜻하고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야. 봄날의 햇살 최수연이야.

최수연은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사람이다. 우영우를 찾아가서 밥을 사 먹이진 않지만, 우영우를 보면 “밥 먹었냐”라고 물어본다. 우영우가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차별받거나 손해 보거나 미움받지 않도록 노력한다.

우영우에게 “고래 이야기를 그만하라”라고 한 것도, 그를 단순히 다그치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준호가 우영우에게 고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을 ‘점심시간’으로만 제한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더 좋아졌다. 아마 로스쿨 시절에도 그는 우영우와 우영우를 이해하지 못하고 배척하는 이들의 관계를 조정하는 역할을, 남들 모르게 해왔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누군가는 현실에서 최수연 같은 사람에 대해 ‘속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착한 척하는’ 위선이라고 꼬집었을 수도, 또 누군가는 약자성을 갖고 있는 타인을 시혜와 동정의 대상으로만 보는 사람이라고 비판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최수연이라는 캐릭터에게 “봄날의 햇살”이라는 최상의 찬사를 남기면서, 그가 우영우를 대하는 방식이 우영우의 삶에 큰 힘이 됐음을 보여준다.

요즘 나는 타인에게 친절하기가, 또 언제나 기꺼이 도움을 주기는 영 쉽지 않다는 것을 실감한다. 예의를 차리고 깍듯하게 대하는, 존중을 표하는 것은 오히려 쉬울 수 있다. 그러나 ‘곁’을 내주고 끊임없이 신경 쓰는 일은 ‘존중’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야 가능하다. 핑계겠지만, 줄곧 나는 ‘남에게 마음을 줄 만큼 에너지가 없구나’라고 스스로에 대해 생각해왔다. 실제로 누군가를 챙기는 일은 내게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할지 모르는 어색하고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몸에 맞지도 않은 행동을 억지로 할 바에는 그저 무례하지 않게, 적절한 거리를 두면서 타인을 대해야겠다는 것이 나의 오랜 생각이었다.

아마 나의 성향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최수연이라는 캐릭터는 그동안 내가 너무 ‘겁쟁이’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만든다. 나는 누군가에게 마냥 헌신과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이준호도 아니고, 어떠한 편견 없이 진정한 우정을 맺을 수 있는 동그라미도 아니다. 나는 속되고, 거만하고, 냉소적이며, 인정머리가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은가.

아주 조금 용기를 내서, 너무 멀리 있지도 또 너무 가까이 있지도 않은 채로, 타인에게 찰나의 마음을 쓰면 어떨까. 아마 그건 정말 별 게 아닐 것이다. 너무나 사소해서 누군가에게 말하기도 민망할 행동일 게 분명하다. 하지만 처음부터 곁을 쉬이 내주는 일은 불가능할뿐더러, 그것이 타인과 연대하며 마음을 나누는 유일한 법은 아닐 것이다. 그 점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일깨워준다.

최수연은 우영우의 고통과 불편을 제 일처럼 여기고 나서진 않았다. 가까이 다가와서 위로해주는 스타일도 아니다. 중요한 건, 그럼에도 결코 외면하진 않았다는 사실이다. 거기에서부터 시작하자고 마음먹었다. 내 목표는 최수연이다.

원문: 박정훈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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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여류문학’과 박서원, 그리고 페미니즘 https://ppss.kr/archives/232888 Fri, 08 Jan 2021 07:47:46 +0000 http://3.36.87.144/?p=232888 자기 고유의 언어를 가진 자들이 그 언어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세상은 변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지식을 말하지 않더라도 지식인의 형태를 띠게 된다. 순수/참여 같은 분류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세상에 관해 이야기하는 모든 시는 그 시대의 정신과 분위기를 담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인이 순응과 퇴행을 택하느냐, 전진 혹은 전복을 택하느냐는 사회적으로도 중요한 화두다.

노혜경 시인의 『그러나 최소한 나는 저항한다』를 여름에 한 번, 겨울에 한 번, 두 번 읽었다. 2020년의 마지막 독서였다. 시에 대해 알지도, 모르지도 않는 나는 두 번을 읽고 나서야 과거의 글들을 모은 이 책이 지금 나온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여성시’란 무엇인가라는 고민, 그리고 왜 시인은 ‘페미니스트여야 하는가’라는 문제의식을 던지기 위함이었으리라 믿는다.

이 책에서 다루는 ‘여성시 운동’은 내겐 비교적 생소한 것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여류 시인’에서 ‘여류’를 떼고, 여성들이 쓴 시에 대해 온당한 평가를 하자는 90년대의 운동이다. 언뜻 보기에는 명확하고 단순해 보이는 ‘여성시 운동’이 어려웠던 이유는 ‘여성시’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반면 남성 시인의 ‘도발적’인 시나, 남성의 시각을 대리하는 여성 시인의 시는 평단의 찬사를 얻었다.

저자가 이 책에서 가장 중심적으로 호명하는 인물은 박서원과 김정란이다. 이들의 시를 저자는 “얼굴이 없는, 혹은 지워진 여자들”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그리고 박서원의 「부서진 십자가」의 일부를 인용한다.

이들의 시는 다른 얼굴로, 즉 맨얼굴로 말해야 할 필요성을 깊이 인식한 세계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드러내야 하는 것은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여자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남성 단론의 규정된 틀 안에서 그들이 얻었던 얼굴을 ‘지워버린’, 그리하여 다시 새로운 얼굴을 가질 때까지는 얼굴이 없는 여자들.

  • 『그러나 최소한 나는 저항한다』, 127쪽

주여,
나에게 성녀가 되길 요구하지 마세요.

갈비뼈 앙상한 십자가 허리
망치로 내려친다 차례대로……
손목……무릎……발목

내 팔뚝도 면도날로 난도질한다

아무도 내 얼굴을 잘 모른다

버려진 내 시
소망으로 가득 찼었지만 나뒹구는 내 시

와 고통은 얼굴을 원치 않는다.

  • 박서원, 「부서진 십자가」(1995)에서

저자는 박서원이 인터뷰에서 자기 시에 영향을 미친 전통이 있느냐 묻는 말에 “없다”고 했다며 “슬프게도 이 대답은 대개의 여성시인에게도 해당이 된다”고 밝힌다. 그는 “여성이 인간이면서 시인이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길목에 가장 큰 장애로 버티고 선 것이 ‘전통이라 불리는 남성들의 언어”였다고 강조한다.

80년대 거대한 적이 사라지고, 민중문학이 길을 잃었을 때도 여성 시인들은은 ‘화전민 선언'(이어령)이나 ‘아버지 죽이기’ 식의 남성적 전통을 바탕으로 변화를 꿰할 수가 없었다. 그때 여성은 ‘여성’에 집중하며 새로운 길을 만든다. 그러나 저자는 “이때 여자는 시인 자신이 아니라 그야말로 ‘얼굴이 지워진’ 여자들이다. 어머니이기도 하고, 딸이기도 하며, 여신이기도 한 여자들”(149쪽)이라고 말한다.

나의 얄팍함은 이 지점에서 문단 내 성폭력 고발을 비롯한 미투 운동과 최영미의 시 「괴물」을 떠올리게 했다. ‘매끈한 얼굴을 가진 남성주체’가 단독자로서 언어를 집행할 때, 여성은 어떻게 맞설 수 있는가를 ‘여성시’가 보여준 게 아닐까 싶었다. 그들의 시가 지금 페미니스트 시인들의 유일한 ‘참고 문헌 있음’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최영미의 시 「괴물」.

그런데 처음 이 책을 다 읽고 나서야, 박서원 시인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2012년 죽었지만, 그의 죽음은 2017년에 알려졌다. 박서원은 가부장제 속 여성의 고통을 몸소 체득하며 살아온 사람이었고, 자신의 트라우마를 고백하듯 시를 써 내려간 사람이다. 그는 모두가 좋아하는 시를 쓰지도 않았고, 번듯한 교수도, 문단의 스타도 아니었다. 김정란은 박서원 자서전 『천년의 겨울을 건너온 여자』의 추천 글에 이렇게 적었다.

그의 삶은, 한국이라는 아주 특수한 가부장 문화를 가진 땅에서 가진 것 없이 태어난 한 아름답고 재능있는 여성이 겪어야 하는 온갖 종류의 고난을 뭉뚱그려 가지고 있는 상징이며, 그의 고통 뒤에는 남성들에게 받은 학대를 여성에게 갚으며 살아온 이 땅의 전근대적 어머니들의 비극이 겹겹이 쌓여있다. 그는 시라는 칼로 그 순환고리를 끊어낸다.

그의 죽음이 단순히 재능있던 한 시인의 ‘안타까운 죽음’으로 끝낼 수 있는 이야기일까. 때문에 「그러나 최소한 나는 저항한다」는 박서원의 존재를 재조명한다는 점만으로도 의미가 작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오래전부터 수많은 영역에서 ‘아버지’로 상징되는 권력이 남성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한다. 남자들이 눈치 없고 무례하고 쉽게 분개할 수 있는 이유는, 폭력과 기행을 ‘성격’으로 포장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 자연스럽게 부여받은 ‘승계권’ 때문일 것이라고. 그들에게는 언제나 ‘안전망’이 있다. 가부장이 될 수 있다는, 또는 절대로 가부장이 남성인 자신을 버리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그것이다.

하지만 박서원에겐 안전망이 없었다. ‘마녀’도 ‘성녀’도 아닌 그냥 ‘시인’. ‘여류’가 아니라 그냥 ‘시인’. ‘女시인’이 아닌 그냥 ‘시인’이 되기 위해서 남자들의 ‘믿음’에 양날의 검을 내밀었다. 어쩌면 지금도 많은 여성은 거대한 ‘남성권력’을 앞에 두고, 자신을 지킬 수 없는 상황에서 싸우고 있을 것이다. 싸움을 걸어도 숨기에만 급급한 ‘아버지’와 ‘아버지 지망생’들, 대체 어디에 있는가.

생전 박서원 시인. / 출처: 박서원 시인 유족, 최측의농간

여성을 착취하는 시인, 페미니즘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시인은 ‘시’를 권력의 도구로 이용한다. 시와 작품은 다르게 평가해야 한다는 지적이 있지만, 적어도 그 시를 통해 얻은 ‘지위’를 이용해 성폭력을 저지르거나 반여성주의적 언사를 반복한다면 그 작품을 개인의 행적과 따로 평가하긴 어렵다.

A 시인은 박원순 전 시장의 장례식에 가지 않겠다고 말한 류호정 정의당 의원을 두고 “구상유취: 입에서 젖내가 남. 당신들 100만 명의 정의감과 도덕성보다 나는 박원순의 단 하루가 더 아쉽고 안타깝다”라고 말했다. ‘구상유취’라는 시인의 사자성어 인용은 박 전 시장 지지자에게는 “공격하라”는 하나의 신호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는 이외수의 시 여성혐오적 시 「단풍」(“저 년이 아무리 예쁘게 단장을 하고 치맛자락을 살랑거리며 화냥기를 드러내 보여도”)을 보고도 “문학이 버려야 할 말이 너무 많아졌어요 형님”이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A 시인이 말하는 문학은 대체 누구를 위한, 누구에 의해 쓰인 문학인가. ‘여성’의 존재를 지운 문학인 것은 확실하다.

‘신망받는 남성 권력자를 잃은 것, ‘남성이 억울할지도 모르는 상황’은 누군가에게는 ‘피해 여성’의 고통보다 주요한 관심사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사회적으로 돌아올 비난과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그럼에도 ‘고발하고’ 또 ‘연대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시’와 ‘시인’의 권위를 통해 틀어막히기도 한다.

문단 내 성폭력 운동을 통해 성폭력 혐의로 처벌받거나 혐의를 인정한 시인, 소설가만 14명이다(페미위키 인용). 남성 문인 상당수가 교수나 출판사의 높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성폭력이 드러나지 않은 경우도 꽤나 많을 것이다. 상황이 이럴진대 페미니스트가 아닌, 남성 권력의 온존에 힘쓰는 시인들의 시를 우리가 왜 읽어야 하는가? 과연 ‘버려야 할 시’는 없는 것일까?

원문: 박정훈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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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왜 ‘노력’이 아니란 말인가 https://ppss.kr/archives/221289 Mon, 06 Jul 2020 08:51:37 +0000 http://3.36.87.144/?p=221289 금천구는 수능성적이 서울에서 가장 낮은 곳이고, 그중에서도 내가 다니던 학교는 공부를 못하는 축에 속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문과 남자(공학인데 분반) 1–3반 중 내가 있던 3반에서만 인서울 대학에 갔다.

엄마는 비정기적으로, 그러나 꽤 자주 ‘같은 반 어머니 모임’에 나갔다. 누가 오는가 물어보면 거의 6–7명의 멤버가 고정되어있었다. ‘강□□, 조○○, 송◇◇ 어머니 등등’. 어머니 모임은 딱히 어떤 목적을 갖고 만난 것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모임’ 외에는 딱히 무언가를 하질 않았다. 그 흔한 학원이나 과외선생님을 공유하는 일조차 없었다. 그런데 나중에 재수까지 포함해서 반에서 여섯 명이 인서울 대학을 간 것을 보니, 그중 한 명 빼고는 ‘어머니 모임’ 멤버의 자식들이었다.

어머니들이 자식의 ‘성적이 좋은 편이라서’ 모임에도 의무감으로 참석한 것인지, 어머니가 신경을 많이 써서 ‘성적이 좋았던 것인지’는 구분하기 어렵다. 하지만 부모의 지원이나 관심이 입시에서 무시할 수 없는 요소라는 것을 대강 짐작하게 됐다. 특히 내가 다니던 학교처럼 학교 선생님이나 주변에서 일체의 진학 상담도 안 하는 환경이라면 말이다.

출처: KBS

흔히 말하는 ‘노력의 결과’라는 것은 온전히 개인의 노력으로 이뤘다고 보기 어렵다. 노력은 노력할 수 있는 동기가 있어야 하고, 노력할 수 있는 환경이 뒷받침해야 가능하다. 입시에 있어서 중산층 부모라면 중위권 아이에게 끊임없이 동기를 부여해서(투자) 성적을 어느 선까지는 끌어올릴 수 있다. 하지만 하층 부모라면 그런 부분에 대해서 충분히 신경 쓰지 못하고, 이는 입시 결과와 직결된다.

대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자기계발’의 시간은 모두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방학을 대학생 인턴이나 대외활동으로 보내는 이와 육체노동으로 보내는 이의 스펙이 같을까? 구직활동과 알바를 병행하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의 결과는 동일할까? 한 학교의 지역 캠퍼스를 다녔던 친구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학교 친구들은 방학 시작하면 대부분 알바를 한다. 그런데 서울에 와보면 대외 활동, 토익 준비, 계절학기를 듣고 있더라.

우리는 ‘성공담’만을 소비한다. 각종 취업 관련 커뮤니티 카페를 보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시험에 합격한 이야기가 높은 조회 수를 얻고 찬사도 이어진다. 그런데 거기에는 수많은 맥락이 빠져있다. 생계를 돌보지 않아도 괜찮았는지, 생활 환경은 어땠는지, 기존 공부량이나 학습 스킬은 어느 수준이었는지 등등. 이런 것들은 고려되지 않은 채 ‘노력은 성공의 어머니다’라는 오래된 교훈만 강조된다.

시간을 투자해서 이론을 외우고 문제를 풀이하는 시험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누군가에게는, 아니 적어도 국민의 절반 이상에게는 주어지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의도적으로 이 지점을 망각하게 만든다. ‘계층 상승’의 꿈을 잃지 말라는 메시지를 던지며 ‘장승수 변호사’ 같은 신화적 인물에만 초점을 맞춘다. 이러니 ‘일제고사’식의 시험이 누구에게나 공정하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시험을 ‘잘 볼 수 있는’ 기회가 누구에게나 주어진다고 여기면, ‘정규직과 고연봉’은 꼭 일률적인 시험을 통과해서만 얻을 수 있는 거라고 믿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베이비붐 세대부터 지금의 20대들은, 한국 사람들은 ‘명문대와 시험(공채)을 통한 정규직·고연봉 일자리’를 삶의 지향점으로 믿고 살아왔고, 또 그것을 개인의 노력으로 쟁취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이런 토대 위에서 성장한 청년들이 공채를 안 거친 ‘공사 정규직’은 상상하기 쉬울 리 없다.

논란이 된 채팅방 대화는 작성자 신분이 불분명하며, 임금 또한 일반 정규직이 아닌 자회사 수준이다. / 출처: MBC

제아무리 연봉체계도 다르고, 직군도 다르고, 신입 채용에 영향을 안 미친다고 해도 마음속으로 납득이 안 가는 거다. 그들 주변의 세계에선 시험이 곧 질서이고, 시험을 열심히 준비해서 잘 보는 것만이 진정한 노력으로 간주된다. 그것만이 안정되고 높은 지위를 쟁취할 수 있는 법이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서 ‘일률적인 시험’을 치를 수 없거나, 치르지 않아도 되는 직업을 가진 이들의 노력은 사소화될 수밖에 없다.

인천공항 정규직 전환 관련해 많은 사람이 20대를 욕했다. 그렇다면 다른 세대는 ‘시험 보지 않은 대다수 노동자’의 노력을 얼마나 인정하는가 묻고 싶다. 대학 이름으로 채용 여부를 가르고, 회사 안에서도 공채와 비공채출신을 가르던 사회에서 갑자기 ‘혁명 세대’라도 탄생하길 바라는 것일까. 수시보다 정시를, 로스쿨(요즘에는 변시도 붙기 어렵지만)보다 사법시험을 선호하는 정서는 세대 불문이다.

소위 ‘인국공 사태’를 두고 말이 많다. 그런데 시험을 잘 봤거나, 적어도 시험을 볼 기회가 있었던 이들의 목소리만 크다. 내 글 역시 그런 목소리 중 하나라는 점이 슬프다.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흔히 상상하는 시험이 아닌, ‘노동 현장에서의 수많은 시험과 난관을 거쳐왔노라’고, ‘그래서 내가 정규직 되는 게 뭐 어떠냐’고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 그건 지금의 사회에서 자부심이 아니라 ‘꼼수’나 피해 의식의 발로처럼 읽히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들 스스로 ‘공채·정규직’이 누리는 특권을 줄여야, 비정규직-정규직 문제가 해결된다고 말하기는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

인천공항 보안검색요원이 다른 직군에 비해 고임금 노동자가 아니었다는 점(2019년 자회사 설립 기준 초봉 세전 3,200, 2013년에 180–200 사이라는 이야기를 보면 최저임금 인상에 따라서 평균 30–40 정도 올랐다고 보면 될 것 같다), 호봉제를 적용받지 않아 신입과 10년 차가 월급 20만 원 정도밖에 차이 나지 않던 상황, 올 데이 근무(오전 6시 30분–오후 8시 30분) 등을 쭉 해오면서 휴게시간 1시간조차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환경, 군기가 세고 힘든 일이라 1년 이내 퇴사율이 50%가 넘는다는 점 등의 노동 조건은 크게 조명되지 않는다.

이들이 어떤 상황에서 버텨왔고, 노력했는지는 사람들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어쨌든 ‘시험’을 보지 않았으니까. 10–15년 일해도 시험을 보지 않고 정규직이 될 것이니 ‘역차별’이라는 주장이 나오는 것은, 지금껏 우리가 어떤 노력만을 ‘진정한 노력’으로 여겼는지 드러내는 지점이다.

‘기회’가 모두에게 주어진다는 기만을 일삼으며, ‘선발고사’만이 ‘정당한 평가 방식’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게 우리 사회다. 그렇기에 자신이 어떠한 위치에 놓여 있는지, 타인은 어떤 노력을 하고 사는지도 전혀 파악할 수 없는 구조이기도 하다. 기회를 얻은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시험 통과에 의한 정규직·고연봉’ 방식이 유지되는 한,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낸 시스템이 공고한 이상 젊은이들의 ‘역차별’ 논리도 계속될 것이다.

큰 책임을 진 정부와 기업, 그리고 기성세대가 ‘특권 구조’를 깨기 위해 ‘자신의 것’을 포기하는 용기를 내지 않으면, 갈등은 무한 반복될 뿐이다. 시험에 의한 공정한 경쟁은 ‘허상’이며, 시험을 볼 수 있는 것 자체가 ‘특권’일 때도 있다는 것을 일러주는 사회가 될 순 없을까.

원문: 박정훈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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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남성의 반 페미니즘 https://ppss.kr/archives/216590 Wed, 22 Apr 2020 02:26:13 +0000 http://3.36.87.144/?p=216590 20대 남성의 반 페미니즘에 깔린 두 가지 전제

’20대 남성의 반 페미니즘’을 이야기할 때, 나는 두 가지 전제를 깔고 시작한다.

먼저 20대 남성이 ‘여성혐오 세대’가 아니라, 생애 주기상 그들은 한국 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 정서를 가장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취약한’ 상황에 있다는 것. 군대와 취업을 앞두었으며, 사회 전반의 성차별이 어떠한 지경인지 경험하기 어려운 20대 남성들은 반 페미니즘의 논리에 유혹당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불안과 고통도 ‘페미니즘’을 원인으로 지적한다. 사회경제적 불만을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언어화할 사회적 자본이 없으니, ‘이게 다 페미니즘 때문입니다’로 자신들이 겪는 문제를 설명해버린다.

출처: CNN

두 번째, 천관율 시사IN 기자와 정한울 한국리서치 전문위원의 『20대 남자』에서는 이 점을 분명히 하지 않았지만, 현 상황은 분명 ‘백래시‘다. 2015년 이후 10–20대 여성의 페미니즘 수행은 온라인 상으로 남성을, 정확히 말하면 남성문화를 비판하거나 조롱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잠재적 가해자’라는 말에 반발하듯 남성들은 자신들을 향한 직접적인 비판을 바로 수용하지 못했고, 놀라거나 분노했다.

하지만 이들의 반발과는 별개로 페미니즘 의제는 사회의 주요 화두가 되었고, 그들이 ‘극단적’이라고 주장하던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는 법이나 정책에 반영됐다. ‘남성(문화)을 비판하는’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을 보며 이들은 ‘위협’을 느꼈을지 모르는 일이다.

이렇듯 20대 남성의 강한 반 페미니즘 정서와 공격성은 일차적으로 그들이 10–20대 영영페미들의 미러링이나 비판을 직접적으로 마주하는 연령이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나아가 그들의 반발이 무색해진 페미니즘 확산이 ‘페미니즘이 여성에게 유리한 권력 작용'(『20대 남자』)을 일으킬 수 있다고 판단한 게 이들의 위기감을 심화시키고 공격성을 키운 것으로 볼 수 있다.

 

20대 남성도 성차별과 성폭력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안다

20대 남성의 공격적인 반 페미니즘에 우려를 표하는 분들이 많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변화하는 남성성과 성차별」, 정책기획위원회 「2030세대 젠더 및 사회의식조사 결과」, 시사IN 「20대 남자」 등 다수의 자료에서 20대 남성의 반 페미니즘 성향은 매우 뚜렷하다. ‘반 페미니즘’을 경유해 정치적 주체로서의 자격을 획득하려 하며, ‘페미니스트’처럼 ‘반 페미니스트’가 하나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은 경향도 찾아볼 수 있다.

당장 남초 커뮤니티에서 한 시간 내에 올라온 페미니즘 관련 글 몇 개만 가져와도 황당하고 착잡하기 이를 데 없을 것이다. ‘남성 차별’이 존재한다고 믿으며 ‘피해자 남성’으로 자신을 위치시키고, 적극적으로 페미니스트들에게 테러에 가까운 공격을 가하는 것을 계속 보게 된다. ‘요즘 남자애들 어떡하냐’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출처: YTN

하지만 나는 여성혐오가 ‘요즘 남자애들’만의 문제가 아닐뿐더러, 20대 남성은 ‘반 페미니즘 정서가 가장 강하지만 역설적으로 젠더 감수성도 가장 높은 세대’라고 주장하며, ‘변화의 가능성’을 여전히 말하고 다닌다.

20대 남성의 주된 정서는 ‘나는 아니야’다. 반 페미니스트들은 성차별로 인한 특혜는 윗세대만이 누려왔고, 성폭력은 내가 속한 남성문화가 아니라 ‘개인’의 문제라고 여긴다. 이것은 구조와 통계와는 동떨어진 명백한 ‘착시 현상’이라서 계속 비판해온 지점이다. 한편으로 이러한 태도는 이들이 성차별과 성폭력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다른 세대보다 잘 인지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페미니즘을 반대하는 ‘억울한 지위’를 갖기 위해선 남성의 가해 행위를 적극적으로 부정하면서, 기존의 남성문화와도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금 더 긍정적으로 해석하자면, 이들이 5년간 페미니스트들과 불화했지만, 그들이 바꿔놓은 사회 분위기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그들이 만나는, 만나야 할 여성들은 대체로 페미니즘을 강력하게 지지한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들도 눈치를 봐야 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n번방 성 착취’ 사건에서 남초 커뮤니티에 있던 대부분의 남성들은 철저하게 자신과 선을 그으려고 했다.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범죄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반면 중년 남성들은 “호기심에 들어온 사람”(황교안 대표) 운운한다든가, “나는 2번방”(허용석 통합당 후보)이라는 말을 유머로 던지든가, 미래한국당 공천과 n번방 성 착취를 비교한 만평(민중의소리)을 그리는 등 사건 자체에 경각심이 전혀 없어 보였다.

물론 소위 안티페미니스트라는 이들도 피해자다움이나 ‘꽃뱀’ 서사라는 그릇된 남성문화를 공유한다. ‘남성들이 반성해야 한다’는 말에도 격분해 성찰하지 않으려는 한계도 보인다. 하지만 적어도 성폭력을 ‘그럴 수 있는 일’처럼 여기거나 두둔하는 기성세대 남성들의 관습과는 온도 차가 있다. 과거 남성들의 ‘여성혐오’와는 분명 구분해야 할 지점이고, 이를 토대로 생각해볼 문제가 많다.

 

‘성평등적 가치’를 수용하면서 자란 이들이 가진 ‘다른 점’

출처: 한겨레21

한겨레21이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20대 여성과 남성 800여 명에게 성평등 연애 규범에 관해 설문한 결과를 보면 20대 남성의 75%가 ‘나는 페미니즘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응답했다.

그런데 모순적이게도 “스킨십이나 섹스를 하는 중에 언제든 파트너의 의사에 따라 행위를 중단하는 게 당연하다” 항목에는 20대 남성의 85.4%가 동의(매우 그렇다, 그렇다)했다. ‘섹스보다 피임이 더 중요하다’ ‘성적 대상화나 여성혐오적 표현을 조심해야 한다’ ‘맨스플레인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항목에도 70% 이상의 남성이 동의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페미니즘이 싫다고 말하지만, 정작 페미니즘적 가치를 수용하는 게 현재의 20대 남성인 것이다.

20대 남성은 기성세대 남성들이 공유하던 여성혐오 문화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성매매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한국리서치가 19–59세 남성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것을 바탕으로 제작한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변화하는 남성성과 성차별」 발표에 따르면 20대의 성 구매 비율은 6.9%에 불과했다. (30대 23.7%, 40대 41.7%, 50대 44.4%)로 드러났다.

물론 이 조사에서는 전체 성 구매 비율이 29.9%로 나와, 성 구매 비율이 과반수에 육박하는 2016년 성매매 실태조사와 직접적으로 놓고 비교하긴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20대가 성 구매 문화에 동조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일 수밖에 없다. ‘성매매 반대 캠페인’에 참여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긍정 답변 비율도 역시 20대가 가장 높았다.

이러한 설문 조사 결과는 20대 남성을 ‘유례없는 여혐집단’으로 몰아가는 분석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20대 남성의 반 페미니즘엔 기존 남성문화와 연결되는 지점과 단절되는 지점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 단절되는 지점이 ‘변화된 남성성이 만들어질 가능성’과 ‘안티 페미니즘 양상의 고착화’라는 우려를 동시에 안았다는 점이다.

출처: KBS

현재는 후자만이 너무 뚜렷하게 보이고 이야기되는 상황이다. 가부장 문화에서 자유롭고 (앞서 인용한 여성정책연구원 조사에서 20대는 유일하게 비전통적 남성성으로 분류된 남성의 비율이 과도기적 남성성이나 전통적 남성성을 분류된 남성의 비율을 앞질렀다) 페미니즘 리부트를 경험하고 일정 정도 ‘성평등적 가치’를 수용하면서 자란 이들이 가진 ‘다른 점’은 무시된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 문제를 한국 사회가 깊이 고민하지 않아서다.

그동안 20대 남성의 반 페미니즘에 정치권과 언론 등은 무작정 ‘현 정권이 20대 남성의 마음’을 달래줘야 한다는 식으로 다뤄왔다. 더불어 ‘전문가’들이라는 사람들조차 반 페미니즘적 행태를 취업난에 시달려서 발생하는 불만 수준으로 단순화시키기도 했다. 이 현상을 페미니즘에 대한 반발이나 남성성의 문제로 여겼던 게 아니라, ‘청년 세대 문제’ 정도로 치부했던 것이다. 오로지 ’20대’에게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면서, 이 문제가 ‘여성혐오’ 현상을 해결하거나 남성성의 변화를 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 현상을 해결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하루아침에 바뀔 일도 아닐뿐더러, ’20대 남성’만 특정해 비난하거나 옹호한다면 상황은 더 악화할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 전반이 페미니즘을 수용하고, 여성혐오적 문화를 도태시키거나 퇴출하는 과정의 하나로 이 문제를 다뤄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존 남성문화와 ‘단절된 지점’에서 새로운 남성성이 모색되길 간절히 바라고, 나 역시 이를 위해 말하고 쓰며 연대하고자 한다.

원문: 박정훈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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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내라고, 이겨내라고 말하지만 정작 감염된 이들에 대한 위로는 없다 https://ppss.kr/archives/214322 Tue, 17 Mar 2020 06:17:28 +0000 http://3.36.87.144/?p=214322 1.

우리 동네를 지나다니는 마을버스 01번 기사님이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구로구 콜센터 직원의 가족이라고 한다.

01번 버스는 전부 방역소독을 실시했고, 해당 노선을 운전하는 57명의 기사님들도 자가격리 조치됐다. 마을버스 대신 파란색, 초록색 시내버스가 01번 표지판을 붙이고 대체 운행을 했다. 물론 노선이 단축됐고, 배차 간격도 길어졌다. 채널A는 위의 사실을 보도하면서 주민들의 코멘트를 덧붙였다.

“내가 그 버스를 탔는데 그분이 만약 확진자라고 생각하면 저 같아도 무서울 것 같아요.”

“떨리죠. 무섭고 겁나죠. 페렴이라는 게 치료를 받아도 바로 낫는 게 아니고.”

별다른 의도는 없어 보였다. 주민 반응을 전하는, 일종의 구색 맞추기였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주민 반응을 덧대는 보도 방식에 속이 쓰렸다. 한 사람을 ‘민폐’를 끼치는 존재로, 타인을 무섭고 겁나게 하는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는 느낌이었다. 확진자들은 코로나19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이들임에도, 그저 ‘한 명의 바이러스’처럼 이야기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도처에서 힘내라고,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정작 감염이 된 이들에 대한 위로나 배려는 없다. 처음에는 주의 차원에서 이뤄졌던 동선 공개가 현재는 일종의 ‘데스노트’인양 여겨진다. 확진자가 지나간 가게는 일시적으로 폐쇄되고, 매출까지 떨어지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확진자는 이동 경로가 복잡할 경우 많이 돌아다녔다고 비난받는다. 증상을 자각한 상태에서 이동을 한 경우에는 거의 ‘역적’이 된다.

실제로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에서도 “확진 환자 개인을 특정하지 않고 시간별로 방문 장소만을 공개하는 방안을 고려하라”고 촉구한 상황이다. /출처: MBC 뉴스

우리집 근처에 사는 콜센터 직원 한 분도 확진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얼마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을까. 콜센터 직원들을 떠올리면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이, 그리고 확진자를 ‘바이러스’ 취급하는 지금의 분위기가 너무나 잔인하다는 생각이 든다. 몸이 아픈 것도 문제지만, 누군가를 전염시켰을까봐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그랬다면 ‘내가 부주의해서’라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는 상황 아닌가.

현재 정부는 방역과 치료에 온 힘을 다 쏟고 있다. 그래서 이번 코로나19 사태의 최대 피해자인 확진자들이 ‘사회적 낙인’까지 경험하는 것에 대해선 신경쓰지 못하는 실정이다. 치료해주고 응원해줘야하는 존재가 아니라, 폐를 끼치고 원망하게 만드는 존재로 규정되고 있다.

이를테면 마을버스를 통해 아침에 일찍 출근하는 한 노동자가 버스의 배차간격이 길어져서 초조해하다가, 확진자 판정을 받은 기사를 원망하게 만드는 상황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비슷한 일은 부지기수일 것이다.

그런 세밀한 부분, ‘인권적인 측면’에 대해 한국 사회는 얼마나 고민하고 있을까. 지금 한국에서 코로나가 ‘공포’인 이유는, 감염이 한 사람이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를 무너트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상황을 누군들 견딜 수 있겠는가.

 

2.

이번 콜센터 감염이 더욱 뼈아프게 다가오는 것은 생업에 종사하다가 집단감염된 사례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이처럼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거리가 느껴지는’ 말이었을 것이다.

콜센터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밀집된 공간에서, 마스크 없이 일해야만 하는 사업장은 지금도 수없이 많다. 공장, 콜센터, 학원, 음식점 등 좁고 환기가 잘 안되는 곳이라면 전부 코로나에 취약하다. 하지만 요즘처럼 있던 일자리도 잃는 상황에서, 코로나가 무섭다고 일을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매일매일 사람들과 부대끼며 일을 해야 생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주의하라’거나 ‘개인위생’을 강조하는 말은 별다른 힘이 없다. 방역 당국이 주의를 기울이더라도 결국 바이러스에 취약한 사각지대는 존재한다, 현재는 대규모 모임이나 예배 등은 자제하고 있는 분위기이므로 앞으로 방역의 ‘약한 고리’는 콜센터처럼 상대적으로 열악한 노동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일지도 모르겠다.(혹은 요양시설, 장애인 시설 등)

출처: 연합뉴스

현실적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기 어려운 이들이 코로나19 사태에서 가장 중요하게 언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좁은 공간에서 일하는 노동자뿐만 아니라, 단체생활을 하거나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생활할 수 있는 약자들을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보호하고 지원할 수 있을지 더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 나아가 코로나19로 삶이 위협받는 이들의 입장에 서서 말하고 생각하는 목소리가 외면당해서는 안 될 것이다.

원문: 박정훈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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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여성이 페미니즘을 공부하며 일어난 변화들 ‘여자 공부하는 여자’ https://ppss.kr/archives/205077 Tue, 05 Nov 2019 02:08:56 +0000 http://3.36.87.144/?p=205077
출처: 영화 〈82년생 김지영〉

영화 〈82년생 김지영〉에서 김지영 씨의 미래는 표면적으로는 그리 어두워 보이지 않는다. 경제 사정도 나쁘지 않고, 육아에도 비교적 충실한 남편이 있고, 경력 단절이 일어났지만 재취업할 일자리도 있다. 그렇다면 김지영 씨의 인생은 다시 날개를 달 수 있을까?

단언컨대 여성들은 ‘아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여전히 주 양육자를 여성으로 가정하는 현실에서 가사와 육아에 대한 부담은 남성보다 여성이 더 크게 느낄 수밖에 없다. 경력단절이 된 기간을 만회하기 위해 남자 동료들보다 훨씬 더 많이 노력하지만, ‘유리천장’의 벽에 막혀 번번이 좌절할지도 모른다. ‘좋은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과 ‘애 키우는 엄마가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라는 무언의 멸시를 모두 견뎌야 할 수도 있다. 수많은 워킹맘이 지금도 겪는 고통을 김지영 씨라고 피해갈 리 만무하다. 10년 후 김지영 씨는, 정말 괜찮을까?

 

자신의 삶을 설명하고 또 고민을 해결해줄 ‘언어’

콘텐츠 제작 사업체를 남편과 함께 운영하는 민혜영 씨는 ‘김지영’ 씨의 미래를 사는 여성이다. 10년 전 육아휴직을 끝내고 복귀했을 때 일과 육아를 병행하기가 어려웠고, ‘아이에 대한 심적 부채감’이 커지자 10년 넘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전업주부로 3년을 살던 그는 창업하면서 일을 다시 시작했지만, 답답하기만 했다. 두 아이를 키우며 회사 업무와 집안일을 모조리 도맡아 하면서, 본인의 표현에 따르면 ‘뒤죽박죽’ ‘우왕좌왕’인 삶을 버텨내던 상황이었다.

“이렇게는 살 수 없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던 중, 그가 찾은 것은 ‘책’이었다. 닥치는 대로 책을 읽다가 그는 페미니즘을 ‘돌파구’로 삼게 된다. ‘페미니즘 교과서’라고 평가받는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에서 아래와 같은 문장을 보고 나서다.

상처의 치유는 문제를 덮어둠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라 문제를 들춰내어 자신의 경험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하고 재발견함으로써 가능하다.

그렇게 민혜영 씨는 자신의 삶을 설명하고 또 고민을 해결해줄 ‘언어’로 페미니즘을 선택한다. 이후 만 3년 동안 꾸준히 페미니즘 책을 읽던 그는 이화여대 여성학과 석사 과정에 진학하며 공부를 이어간다. 그리고 그 공부의 중간 결과물로 낸 책이 바로 『여자 공부하는 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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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처럼 이 책은 고전부터 신간까지, 다양하고도 넓은 범주의 ‘페미니즘 책’을 저자가 소개하는 형식이다. 그런데 이 책의 독특한 점은 책 소개가 특정한 이론이나 혹은 학자의 권위에 기반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더 친근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부분이 많다.

저자는 고전들을 읽고 난 뒤의 의문과 혼란스러움을 솔직하게 밝히기도 한다. 자신을 둘러싼 ‘여성혐오’에 온몸으로 맞서온 여성만이 할 수 있는 직관적인 통찰이 인상적이다. 그는 학자들의 전복적인 사유가 실제 현실에 적용하기 어렵다고 느낄 때는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185쪽)고 고백하기도 한다.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책의 장점은 책의 내용을 자신의 경험에 엮어서 사유하는 방식이다. 여성주의 경제학자 낸시 폴브레가 쓴 『보이지 않는 가슴』은 돌봄의 비가시화를 이야기하며 ‘돌봄 불이익’과 ‘아이는 (사회적) 공공재’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언어의 레퍼런스를 따라가서 얻을 수 있는 것

이 책의 내용을 저자는 자신의 ‘녹색 어머니회’ 경험을 통해 풀어낸다. ‘저출산’이 사회적 문제가 되는 것만 보더라도 아이는 사회를 유지·발전시키는 인적 자원이자 공공재다, 그런데 정작 사회는 ‘아이는 네가 낳고 싶어서 낳았다’는 식으로 치부하며, ‘녹색 어머니회’처럼 어머니에게만 아이에게 책임을 다하라고 강요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1년에 한두 번인데 그것도 못 하냐고. […] 그렇다면 묻겠다. 왜 그 좋은 일을, 1년에 한두 번밖에 하지 않는 일은 당신은 하지 않느냐고. ‘선생님도’ 하지 않고, ‘아버지’도 하지 않고 동네 ‘어르신’도 하지 않는데 왜 ‘어머니’만 해야 하냐고. 그리고 ‘하는’ 이들이 왜 ‘하지 않는’ 이들에게 꾸지람을 들어야 하냐고.

  • 215쪽

또한 기혼여성이 겪고 있는 ‘시간 부족’ 현상에 저자는 앨리 러셀 혹실드의 『돈 잘 버는 여자 밥 잘하는 남자』, 브리짓 슐트의 『타임 푸어』, 애너벨 크랩의 『아내 가뭄』 세 권을 엮어 설명한다. “대한민국의 워킹맘이라면 앞의 세 권에 나오는 모든 사례를 자신의 사례로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자신과 같이 육아와 가사에 시달리면서 시간을 쪼개 책을 썼던 『타임 푸어』의 저자에 연대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 역시 자신의 ‘타임 푸어’ 생활을 증언한다.

그렇게 세포 하나하나에 모두 할 일이 있고 그것들을 처리하면서 갈가리 찢기는 감각에 시달릴 때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곤 했다. 가끔 말을 잘 들어주는 친구라도 만나면 정신줄 놓고 푸념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런 날이면 내가 어찌나 초라해 보이던지.

  • 42쪽

이어 페트리샤 힐 콜린스의 『흑인 페미니즘 사상』을 소개하면서 그는 “여성들은 언어가 없다고 말하는데, 네가 말하는 것이 언어가 아니고 무엇이냐”고 말한 교수의 말에 반박한다. 자신을 ‘맘충’이라고 부르거나 ‘일차 돌봄 노동자’로만 생각하는 사람에게 대항하고 설명할 ‘말’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는 과거에는 사회에서 인정받고 싶어서 ‘지배자의 언어’를 내면화하려 했다고 고백한다. 여성 동료가 아이 때문에 연차를 쓰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고, 육아 휴직으로 승진이 누락된 여성을 ‘당연하다’고 여겼다.

출처: 영화 〈82년생 김지영〉

하지만 “자신들이 언어로 말하지 않는 이상 재단되고 타자화되고 대상화되는 것”을 알게 되면서 페미니즘이 그에게도 필요했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그 언어의 레퍼런스를 따라가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상대성의 차원을 언어로 로직화하고, 교차성 속에서 나아갈 방향을 가지며, 교차성을 횡단하면서 실천과 연대를 모색할 수 있다는 점”이라고 강조한다.

이렇듯 저자는 페미니즘 책을 꼭꼭 씹는다. 잘 넘어간다고 빨리 먹지도 않고, 몸에 좋다고 꿀꺽 삼키지도 않는다. 자신만의 시각과 경험으로 책을 소화하기 위해서 치열하게 고민하며 책을 두 번 세 번 더 들여다본다. 그런 점에서 그의 ‘페미니즘 공부법’이 담긴 이 책은 10년 후의 김지영들에게 하나의 ‘이정표’다. 읽고 쓰는 연습을 통해 자신의 삶을 바꿔내고, 자신의 아픈 몸(정희진의 표현)에서 우러나온 인식으로 세계를 파악하는 그의 모습은 페미니즘이 ‘자유’를 줄 수 있다는 명확한 근거다.

아마 『82년생 김지영』의 후속편이 나온다면, 당시 전업주부였던 그들이 ‘워킹맘’이 되고, 틈을 내어 페미니즘 스터디를 하는 장면이 등장하지 않을까. 아마 집에도 수학책(방문한 집의 엄마가 스트레스받으면 푼다던)이 아닌 페미니즘 책이 가득 꽂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도 이미 ‘부너미’나 ‘정치하는 엄마들’ 등에서 활동하는 페미니스트 기혼여성들은 이미 적극적으로 페미니즘을 실천한다. 책 제목처럼 ‘여자 공부하는 여자’들이 곳곳에서 세력화할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이유다.

저자는 “내가 읽은 책의 레퍼런스로 내가 지을 집의 형태가 결정된다고 믿는다”며 “나는 페미니스트를 페미니즘 책을 읽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함께 읽는다면 함께 집을 지을 수 있다”라고 책 말미에 밝힌다. 멋진 선언이다. ‘82년생 김지영’의 10년 후 모습은 아마 ‘더욱 강해져서 돌아온, 함께 집을 지어가는 페미니스트’였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착하지만, 실제로 김지영 씨의 인생에 큰 도움은 되지 못하던 정대현 씨의 10년 후 모습은 어떨까. 적어도 페미니즘을 공부하며 스스로의 위치를 인식하면서, 동시에 김지영 씨가 받던 ‘돌봄 불이익’을 통해 되레 ‘반사이익’을 얻으며 살던 날들을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남자들도 ‘계속 이렇게 살면 안 되기 때문에’ 페미니즘을 배워야겠다는 절박함이 있어야 한다. ‘정대현들’이 여성들과 함께 집을 쌓을 것인지, 아니면 외롭게 고립될 것인지 부디 잘 결정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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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기사는 웨일북의 후원으로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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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를 ‘몸평’하는 비열한 남자들 https://ppss.kr/archives/190369 Tue, 26 Mar 2019 08:23:12 +0000 http://3.36.87.144/?p=190369 한국 남성들의 주류문화

중3 때였나, 안양역 근처에서 모인 친구들이 길 가던 여성들을 점수 매기기 시작했다. ‘쟤는 A, 얘는 C’ 그런 말을 내뱉으며 아마 “저 여자 죽인다” 같은 말들도 누군가 했던 것 같다. 설마 나도 말을 보탰을까? 잘 기억나진 않는다.

 

요즘 들어 그때 그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아주 어릴 때부터 또래 남성 집단이 여성을 어떻게 대상화하고 평가했는지 보여주는 장면 같아서이다. 여성을 오로지 ‘성애’의 대상으로 삼고, 그 ‘성애’를 공공화함으로써 남성들 간의 유대감을 다지는 행태는 한국 남성들의 주류문화다. 이런 문화는 나이가 적든 많든, 돈과 권력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전면적으로 퍼져있다. 여전히 남성들은 여성을 동등한 ‘사람’으로 존중하는 문화를 가지지 못했고, 그것이 정준영 불법 촬영과 서울교대 집단 성희롱 사건으로 증명되고 있다.

공공연하게 이뤄지는 ‘평가’

‘단톡방 성희롱 고발’에 대해서 “사생활 침해” “얼굴이나 몸매 평가는 솔직히 할 수 있는 거 아니냐”라고 묻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그런 이들을 보면 “왜 여성들은 ‘단톡방 성희롱’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까?”라고 되묻고 싶다. 남자 얼굴이나 몸매 평가? 여자들도 할 수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양상이 남성들과는 사뭇 다르다.

적어도 대학이나 회사 동기 십여 명이 있는 방에서 그런 ‘평가’가 이뤄지진 않을 것이며, 무엇보다 불법 촬영 영상이나 사진을 뿌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남성을 성적으로 평가하거나, 성애의 대상으로 언급하는 것은 여성들에게는 굉장히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행위에 가깝다. 공적으로는 사실상 금기시되어있기도 하다.

반면 남성들에게는 자신의 성욕을 드러내고, 여성을 성적으로 평가하고, 성 경험을 자랑하는 것이 매우 ‘공적’인 일이다. 즉, 사회생활의 일부다. 군대에서 만난 남자들의 절반 정도는 원나잇이나 성매매에 대해서는 아주 쉽게 말했고, 여자 친구와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도 별 거리낌이 없었다. 오히려 고참이 말해달라는데, 안 해주면 이상한 사람이 되므로, 사실상 강요받기 일쑤였다.

한 커뮤니티에 올라온 군대 내 성적 발언과 관련한 고민상담

단순히 “성관계를 했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온갖 성희롱적 언사가 양념처럼 들어갔다. 여성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한 명 한 명의 주체가 아닌, ‘성애화 된 몸’으로서 공유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던 순간들이었다. 심지어 군대에 있을 때 한 소대원은 자신이 성매매를 해서 성병에 걸렸다는 것을 말하고 다녔다. 그런 행동들이 가능했다는 것이 지금도 끔찍하게 느껴진다.

 

남성 집단의 유지 ‘도구’로 쓰이는 여성

남성 집단에서 여성이 오로지 ‘성적 대상’으로서 공유되며, 남성 집단 유지의 ‘도구’로 쓰이는 구조는 공적으로 승인되며 재생산된다.

서울교대 사건을 보자. 성희롱 고발 대자보에 따르면 해마다 일부 남자 졸업생들과 대부분 남자 재학생들의 ‘남자 대면식’ 행사가 열린다. 재학생들은 새내기 여학생들의 얼굴과 나이 등이 들어간 책자를 졸업생들에게 제출하기 위해 만든다고 한다. 그러면 졸업생들은 그걸 보고, 재학생들에게 신입생 ‘평가’를 스케치북에 쓰게 하고, 마음에 드는 여학생들의 이름을 말하게 했다고 한다.

 

여성 학우를 동기나 후배가 아닌 마음껏 평가할 수 있는 ‘몸’으로 규정하는 것, 이것은 그들끼리 ‘남성’임을 승인하는 절차다. 앞으로 남성들이 우정을 쌓기 위해 무엇을 주제로 이야기할지는 너무나 자명하다. 그런데 이런 관행이 서울교대에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 많은 남성 집단에서 공인된 ‘남성됨’의 조건은 주변 여성을 성애화하거나, 자신의 성적 행위에 대해 공유하는 것이다. 또 이를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이들이 남성 주류 사회에서 ‘사회생활’ 잘하는 남자로 인정받는다. 요즘 트위터나 여초 카페에서 “남자들 사이에서 ‘의리 있는 놈’, ‘진국’ 이런 말 듣는 사람들 걸러라, ‘노잼’ 소리 듣는 사람을 만나라”는 말이 돈다고 한다. 왜 그런 말이 나오는지 잘 알 것 같다.

남자가 말하는 ‘진국’은 거르라는 한 트위터리안의 글.

장자연 사건- 김학의 성접대(성폭력)- 정준영 불법 촬영은 모두 여성을 단지 ‘성애화 된 몸’으로 여기며 평가하고 공유하던 남성문화의 민낯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런데 평범한 남성들은 괜찮은 걸까? 중고등학교와 대학 군대를 거쳐, 여성을 대상화·도구화하는 것을 ‘남성됨’으로 여겨오던 이들은, 함께 룸살롱에 가고 성매매를 한다. 서로의 ‘성행위’를 공유하며 ‘밀어주고 당겨주는’ 끈끈한 관계가 되는 것이다. 기존의 남성문화를 무너트리지 않는 이상, 앞서 세 사건처럼 권력과 유착된 사실상의 ‘집단 성폭력’도 사라지지 않을 것은 자명하다.

 

이제는 움직여야 할 때

그동안 남자들만 있는 모임 또는 단톡방에서 행해지는 말과 행동이 불편하다고 느꼈던 남자들부터 움직였으면 좋겠다. 어쩌면 그들은 집단에서 배제당하지 않기 위해, 지금껏 ‘여성 혐오’ 문화에 적당히 타협하거나 순응해왔을 것이다. 그런데 정준영 불법 촬영 사건이 ‘반론’의 기반을 만들었다. 적어도 소극적이지만 한 마디, “요즘 그런 말 하면 큰일 나요” 정도의 말은 지나가듯 할 수 있게 됐다.

물론 그럼에도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경우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말고 소극적 저항의 방식이라도 고민해봤으면 좋겠다. 룰이 바뀌고 있다. 단톡방 성희롱을 방조한다거나, 소위 ‘2차’에 함께하는 것, 그런 행위에도 강력한 책임을 묻게 될 것이다.

남성들의 변화를 위해 미디어도 힘을 모았으면 한다. 이번에도 몇몇 언론은 피해자 신상을 특정하는 등 2차 피해를 입히는 성폭력 보도를 반복했다. 다만 이전과 달라진 것은 주요 방송사나 언론 등에서 ‘우리는 피해자가 궁금하지 않습니다’ 운동을 보도하며, 이를 주요 의제로 삼았다는 점이다. 분위기가 확실히 달라졌다. 주류남성성에 저항하는 목소리들이 굉장히 커졌다. 언론이 이를 수면 위로 올리는 것만으로, 기존의 ‘남성문화’에 균열을 내는데 일조할 수 있다. 친구와 동료마저도 ‘성적 대상’으로만 여기는 남성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구조가 보도를 통해 낱낱이 밝혀지길 바란다.

원문: 박정훈 님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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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페미니스트들이 이뤄낸 것들 https://ppss.kr/archives/183663 Tue, 19 Feb 2019 07:11:52 +0000 http://3.36.87.144/?p=183663 2018년은 한국의 페미니즘 역사에서 상당히 중요했던 때로 기록될 것 같습니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의 노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며, 페미니즘 이슈가 한국 사회의 전면에 등장했던 한 해였습니다. 사회 변화를 요구하는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가 커진 만큼 이에 반발하는 이들의 활동도 눈에 띄게 활발해져 사회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새해가 된 지금에서야 ‘2018년 페미니즘 이슈’에 대해 가볍고 짧게 키워드로 정리해 봅니다. 빠진 사건들이 굉장히 많을 테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순서는 무작위입니다.

 

1. 미투 운동

출처: 한겨레

서지현 검사를 비롯한 수많은 여성의 미투는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습니다. 그들의 고발은 남 성중심사회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여성들의 목소리 하나하나가 여성을 동등한 시민이 아닌 ‘성적 대상’으로 여기는 시선, 성폭력을 조장·묵인·방조하는 강간문화 등이 모조리 잘못됐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이렇듯 미투는 강력한 반성폭력 운동임은 물론 남성이 만든 시스템의 민낯을 까발리며 ‘변혁’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2. 디지털 성폭력 문제와 웹하드 카르텔 고발

출처: 연합뉴스

2018년 여성들의 공분을 가장 크게 산 문제는 단연 ‘불법 촬영’일 것입니다. 만연하던 디지털 성범죄 영상과 불법촬영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가 이전부터 쏟아져 나오던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에 (불법촬영 범죄에 대한) 편파 수사 논란, 한 연예인 남자친구의 불법영상 협박 등의 사건은 여론에 불을 지폈습니다.

또한 위디스크 양진호가 헤비업로더를 관리하며 성범죄 영상으로 돈을 벌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웹하드 카르텔’에 대한 문제 제기도 계속됐습니다. 다행히 지난 11월 디지털성범죄 처벌을 강화하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됐지만 아직 갈 길은 멀기만 합니다.

 

3. 혜화역 시위

출처: 뉴스1

‘워마드’에 올라온 홍대 불법촬영 게시물에 대한 경찰 수사는 여러모로 이례적이었습니다. 8일 만에 여성 가해자를 잡고 포토라인까지 세운 것입니다. 여성들이 ‘편파 수사’라며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왜 여성들이 피해자일때는 “어렵다” “서버가 외국에 있어서 불가능하다”라고만 말해왔으면서, 남성이 피해자일 때는 빠르게 수사를 했냐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이렇게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로 시작한 게 혜화역 시위였습니다.

여러 논란이 있었지만 의의가 매우 큰 시위였습니다. ‘불편한 용기’가 주최한 여섯 번의 시위를 통해 분노한 여성들의 목소리가 울려 펴졌고, 이는 정부를 포함한 사회 전반에 여성폭력과 여성혐오 등에 경각심을 가지라는 강한 압박이 됐습니다.

 

4. KTX 해고 승무원 복직

출처: 연합뉴스

결이 조금 다를 수도 있지만 ‘KTX 해고 승무원 복직’은 2018년 여성 노동자들이 이룬 가장 값지고 자랑스러운 성과입니다. 지난해 7월 코레일과 해고승무원들의 복직 합의가 이뤄졌고 4,521일 동안의 싸움은 승리로 막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험난했습니다. 특히 KTX 해고 승무원의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 판결은 ‘양승태 대법원’이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박근혜 청와대’와 거래한 판결이라는 정황이 드러나 논란이 됐습니다.

 

5. 낙태죄 폐지 운동

출처: 한겨레

한국사회엔 여전히 여성의 인권을 위협하는 법으로 ‘낙태죄’가 존재합니다. 이에 여성들은 꾸준히 낙태죄 폐지 운동을 벌여왔습니다. 특히 2017년 말 ‘낙태죄 폐지와 자연유산 유도약(미프진) 합법화’ 청원에 대한 청와대의 답변이 있었고, 지난해 5월 헌재의 ‘낙태죄 위헌 심판 공개변론’ 전후로 낙태죄 폐지 운동이 가속화됐습니다.

특히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과 ‘비웨이브’가 중심이 되어 폐지 여론을 만들고, 정부와 헌재 등을 압박했습니다. 그러나 첫 공개변론 이후 위헌 심사는 6기재판부로 미뤄졌고, 지난달 21일엔 경남 남해경찰서가 특정산부인과를 이용해 여성들의 낙태 사실을 취조한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6. 탈코르셋

출처: TWITTER @100HUI

가부장제 사회가 규정한 미의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 여성들은 지금껏 ‘꾸밈노동’의 압박에 시달려왔습니다. 이에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에게만 강요되는 긴 머리, 화장, 다이어트 등에 반기를 들기 시작합니다.

특히 10대 여성들이 과도한 메이크업을 요구받는 분위기와 갑갑한 교복과 속옷 등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탈코르셋 인증’을 시작했습니다. 짧은 머리나, 화장품을 버리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올리는 식입니다.

탈코르셋은 단순히 10대들의 문화로만 끝나진 않는 분위기입니다. 여성을 외모로 판단하는 풍조와 사업장의 불필요한 복장-외모 규정에 대한 비판은 곳곳에서 이어집니다. 또한 안경을 쓴 아나운서가 늘어나고, 스튜어디스의 용모 규정이 바뀌면서 사회적 인식이 변화한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7. 역사 속 여성들 재조명

YH 사건 당시 경찰의 진압에 의해 숨진 김경숙 열사(왼쪽)가 친구와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 / 출처: 김경숙열사기념사업회

2018년 초 〈1987〉이 개봉하면서 여성들의 민주화운동 역사가 영화 속에서 지워졌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이에 1970~1980년대 노동운동,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여성들을 조명하고 재발굴하자는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또한 역사 속 페미니스트들이 다시 조명되고,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관심이 증가했습니다. 이런 흐름에 발맞춰 문 대통령은 지난 광복절 축사에서 해녀 항일운동을 언급하는 등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발굴할 것을 공언했습니다.

 

8. ‘페미니스트 정치’의 시작

출처: 한국여성의전화

6.13 지방선거에서 눈에 띄었던 것은 녹색당 신지예 서울시장 후보였습니다. 그의 슬로건은 명확하고 단호했습니다. ‘페미니스트 서울시장’. 그의 서울시장 출마를 통해 ‘페미니스트 정치’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비록 벽보가 훼손되고 수 없는 비난의 목소리가 쏟아지기도 했지만 그만큼 지지하는 목소리도 많았습니다.

다만 선거 결과로 놓고 보면 여성은 ‘광역단체장 17명 중 0명, 기초단체장 226명 중 8명’밖에 당선되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여성에게 정치의 벽이 높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여성을 대표할 수 있는 여성 정치인을 늘리기 위한 제도나 법을 요구하는 움직임도 커집니다.

 

9. 여성 영화, 여성 예능인을 향한 지지

영화 〈미쓰백〉은 특별한 영화였습니다. 여성 감독에 여성 원톱 주연. 이것만으로도 흔하지 않은데 심지어 여성 관객의 연대를 통해 ‘손익분기점’인 관객 70만 명을 넘겼습니다. 소위 ‘쓰백러’라고 불리는 마니아층이 입소문 내기, 단체 관람, 예매만 하고 가지 않는 ‘영혼 보내기’ 등으로 미쓰백의 흥행을 도운 것입니다.

비슷한 현상은 역시 다수의 여성 배우들이 나오는 〈허스토리〉에서도 일어났습니다.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허스토리안들이 계속 단체관람을 이어나가며 영화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습니다. ‘남성 중심 영화’에 질린 여성들이 ‘여성 서사 영화’가 잘 안 된다는 편견을 깨기 위해 직접 나선 것입니다.

영화판과 더불어 역시 〈아는형님〉 〈해피투게더〉 등 남성들이 독식한 예능판에 대한 비판이 늘었고 여성 예능인 재조명이 이어졌습니다. 온라인 상에서는 송은이, 김숙을 비롯해 유리천장을 뚫은 이들의 재평가와 응원의 목소리가 꾸준히 나왔고, 이는 여성 예능인이 더욱 활발히 활동할 원동력이 됐습니다.

 

10. 백래시: 게임업계 페미니즘 마녀사냥과 총여 폐지

출처: 페미니스트 게임 이용자 모임 ‘페이머즈’ 웹사이트

2018년은 페미니즘 운동이 사회를 뒤흔들고 확장성을 갖게된 만큼, 백래시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가짜 미투’라는 악플, 『82년생 김지영』을 읽은 연예인들에 대한 공격, 산이의 〈페미니스트〉 가사까지… 이루 말하기 힘들 정도의 ‘반 페미니즘’ 움직임이 가속화됐습니다.

그중 게임업계의 페미니즘 사냥은 생계를 위협한다는 측면에서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남성 유저들은 게임에 참여한 개발자나 원화가들이, 페미니즘 관련 계정을 구독하거나 관련 글에 좋아요만 눌러도 ‘메갈’로 몰아가며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게임회사는 노동자들을 보호해주기는커녕, 마녀사냥당한 원화가들을 ‘계약 해지’ 조치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심지어 한 게임회사에서는 직원이 민우회 계정을 팔로우했다는 이유로 사장이 이 직원을 ‘공개 사상검증’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2018년 10월 11일 총학생회의 총여 폐지 투표에 거부해 투표 보이콧 운동을 진행한 ‘성균관대 성평등 어디로 가나’ / 출처: 성성어디가

‘총여 폐지’ 역시 백래시의 한 단면입니다. 연세대는 총여가 개편됐고, 동국대 성균관대는 투표를 통해 총여가 폐지됐습니다. 물론 총여 폐지를 단순히 ‘여성혐오’ 현상으로만 분석하기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총여가 왜 필요하냐”며 반발하는 대학생들의 반응들과, 익명 커뮤니티의 ‘페미니즘 조롱’ 움직임은 경계해야 할 부분입니다.

 

마치며

2018년을 앞두었을 땐 2017년의 페미니즘 이슈를 달별로 정리해서 ‘아는 페미‘ 계정에 올렸습니다. 아는 분도 계시겠지만 저는 1년 2개월간 오마이뉴스의 페미니즘 콘텐츠를 공유하는 ‘아는 페미’ 계정을 동료들과 함께 운영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사정상 하지 못하지만요.

계정의 이름을 빌리지 않고 이슈를 정리하니 부담스럽고, 민망하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저 스스로는 한 해를 정리하고 지나가야 할 것 같아, 이렇게 남겨 봅니다.

원문: 박정훈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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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폭력범은 괴물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https://ppss.kr/archives/179657 https://ppss.kr/archives/179657#respond Fri, 04 Jan 2019 02:59:27 +0000 http://3.36.87.144/?p=179657

견딜 수 없는 초조감과 불안감에 나는 급기야 아내에게 손찌검하는 남편이 되고 말았다.

아내가 조금이라도 불평을 하면 소리를 질러 대었고 그 말에 심하게 반발을 하면 다시 손을 올려붙였던 것이다. 정말 기억하기에도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위의 말들은 모두가 아는 사람의 자기 고백이다. 바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노 전 대통령은 94년도에 낸 첫 자전에세이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아내를 때리는 가부장이었던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드러낸다. 노 전 대통령의 아내 폭력은 일시적이거나 고시합격 이전만의 일도 아니었다. 그는 심지어 연수원에서 동료들이 “형수님을 어떻게 꽉 잡고 사냐”고 묻자 “조져야 해”라고 대답한 일도 털어놓았다.

노 전 대통령은 이 책에서 아내를 때리고, 여성을 소유물이나 장식품처럼 생각했던 자신의 과거를 크게 부끄러워한다. 그는 사회운동을 시작하며 젊은이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자신의 행동과 사고방식에 깊은 반성’을 했다며, 여성 문제에도 많은 관심을 갖게 됐다고 밝히고 있다. 나는 그가 집에서부터 가부장의 권위를 어느 정도는 내려놓았기에, 자연스레 시민들이 사랑해 마지 않았던 ‘권위 없고 소탈한’ 모습이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국의 아내 폭력 가해자 중 노 전 대통령처럼 반성하면서 스스로 아내 폭력을 멈춘 사례가 얼마나 될까. 거의 없을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의 사례를 볼 때 아내 폭력은 ‘문제 있는’ 남자들이 저지르는 게 아니다. 흔히 사람들은 남성 개인의 폭력성이나 열등감, 혹은 정신병력 등에서 폭력의 원인을 찾는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전혀 문제 없어 보이는 남성이 아내를 때리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남성과 여성의 성 역할을 고정해놓는 가부장제가 가정폭력을 용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에게 가장 큰 공포는 낯선 사람이 아니라, 가장 친밀한 관계를 맺은 사람으로부터 언제든 폭력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있을지도 모른다. 아내 폭력을 포함해 디지털 성폭력부터 살인까지, 여성 대상 범죄의 주요 가해자는 애인이나 남편이었던 남성들이다.

정희진은 ‘아내 폭력’을 다룬 책 『아주 친밀한 폭력』에서 “폭력 남편들은 ‘정상적’인 사람들”이라며 “‘아내 폭력’은 극단적이거나 일탈적인 현상이 아니라 구조 자체에 내재되어 있다”고 말한다. 가부장제 체제 내에서 남성과 여성의 권력 관계는 불평등하다. 또한, 여성들에게는 아내/어머니라는 고정된 성 역할이 부여되는데, 남성은 여성이 이와 같은 성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며 ‘맞을 짓’을 규정하는 것은 물론 ‘훈육’까지를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공/사 영역이 분리되었다는 인식 역시 ‘아내 폭력’이 지속하는 주요 원인이라고 정희진은 지적한다. 가족을 법과 민주주의 등의 공적 질서에서 벗어난 분리된 사적 영역으로 두면서, 사회적 감시에서 벗어나게 만든다. 공/사 분리 이데올로기는 근대 가족 형태가 남성 중심의 핵가족인 것을 고려하면, 가족 안에서의 가부장의 무한한 권력과 폭력 행사를 방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한국사 회에선 아이들을 ‘사랑의 매’라는 명목으로 때리는데, 가부장으로서는 아내 역시 그 ‘사랑의 매’에서 예외일 리 없다. 가부장에게 폭력은 아내와의 관계에서 금기시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선택지가 되는 것이다.

폭력 남편들의 기저에는 ‘어디 감히’가 깔려있다. 남성들이 보고 배우고 익힌, 또 신화화된 아내/어머니상이란 육아와 가사노동을 전담하며, 가부장과 시가의 지시에 순응하는 여성이다. 이것에서 벗어난 여성은 가족을 무너트리는, 가부장의 권위를 침범하고 ‘나를 무시하는’ 존재로 여겨진다. 그런데 불행히도 남성들은 누구도 가부장 질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는 아주 어릴 적에 벽을 주먹으로 치며 ‘어디 여자가 감히’라는 말을 했던 것을 똑똑히 기억한다. 아마 엄마에 대한 불만을 속으로 삭이고 있었을 때였을 텐데, 난 그 말을 대체 어디서 배웠던 걸까.

남성들은 뉴스에 나오는 ‘폭력 남편’에 대해 분노하고 비난하지만, 실상 폭력 남편을 만들어내는 가부장제는 지켜내기에 급급하다. ‘맘충’, ‘김여사’ , ‘된장녀’, ‘화냥년’. 이런 말들은 누가 만들었는가? 전부 ‘어디 감히’의 정서에서 만들어진 말들이다. 가부장제가 원하는 ‘조신한’ 여성상에 부합하지 못했다며 여성들을 비하하고 통제하려는 시도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여성에 대해서는 유독 ‘어디 감히’가 통용되고 확산하는 사회에서, 아내 폭력이 용인 안 될 리가 없다.

가부장제 질서를 자연스럽게 익힌 나에게도 부끄러운 기억이 있다. 20대 초반, 몸이 좀 아픈 날이었는데 당시 만나던 친구가 무엇인가를 먹자고 졸라서 식당으로 가다가 싸운 적이 있다. 그때 내가 갑자기 내 가방을 내동댕이쳐버리고 집으로 가버렸다. 굉장히 폭력적인 행동임은 말할 것도 없다. 아마 내가 데이트 중 가방을 바닥에 던질 수 있었던 이유는, 그런 남성들이 드라마 남주인공으로 등장할 만큼 사회적으로 용인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무엇인가를 던지는 이 행동, 데이트폭력이나 아내 폭력 가해자들의 초기 행동이다. 여성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던지거나 엎다가, 결국 직접적 폭력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당신이 남성이고, 아내 폭력범들에 진정으로 분노하는가? 그렇다면 아내 폭력범을 비난하는 것을 넘어서, 여성을 남성에게 종속화시키는 가부장제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여성에게 특정한 성 역할을 강요하지 않았는지, 남성집단의 여성을 향한 억압과 편견의 논리를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는지 돌이켜봐야 한다.

아내를 때리는 남편은 평범한 사람들과 동떨어진 ‘괴물’이 아니다. 지금과 같이 가부장제 정상 가족의 틀이 공고하고, 성 역할이 강요되며, 가족이 완벽하게 사적 영역화되어 있으면 어떤 남성이든 ‘폭력 남편’이 될 수 있다.

수많은 남성이 ‘여성 통제’와 ‘역차별’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며 폭력 구조를 지탱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남성 스스로가 성차별적 규범을 깨트리는 데 힘을 보태지 않으면 ‘일상의 홀로코스트'(정희진)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원문: 박정훈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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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남성 가해자의 ‘면죄부’가 아니다 https://ppss.kr/archives/180338 https://ppss.kr/archives/180338#respond Wed, 28 Nov 2018 02:59:18 +0000 http://3.36.87.144/?p=180338 심상대 씨의 새 소설 『힘내라 돼지』를 읽었다. 심 씨는 90년에 등단해 현대문학상, 김유정문학상 등을 탄 중견소설가다. 그의 신간이 나왔다는 사실은 몇몇 언론사들의 『힘내라 돼지』서평 기사에 대한 ‘독자들의 항의’를 통해 알게 됐다.

독자들은 여성 폭행 전과가 있는 심 씨의 책을 소개하는 게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또한 자신의 감옥살이 경험을 토대로 쓴 것이 명백해 보이는 『힘내라 돼지』의 책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전달하는 것 역시 범죄를 미화해주는 측면이 있다고 주장했다.

참고로 심 씨는 2015년 내연관계에 있는 여성을 여러 차례 때리고 차에 감금하려는 혐의(특수상해 등)로 기소됐다. 1심에서는 집행유예가 나왔으나, 항소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아 감옥살이를 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그는 피해 여성이 다른 남자를 만난다고 의심해서 여성의 머리·배·어깨를 주먹·발·등산용 스틱으로 폭행했다. 이로 인해 피해 여성은 전치 10주의 상처를 입었다. 게다가 피해 여성의 직장에 찾아가 “너 여기서 죽고 싶으냐. 직장 그만 다니게 개망신당할래“라며 뺨을 때리고 승용차에 감금하려다가 미수에 그치기도 했다.

이런 배경이 있다 보니 A 언론사 서평에서 “그것은 2016~7년 사이 폭행 등 혐의로 형을 살고 나온 작가 자신을 향한 응원의 말로 들리기도 한다”는 부분이 강하게 비판받았다. 결국 A 언론사는 사과문을 올리고 기사를 지웠다. B 언론사 역시 서평 기사를 지웠고, C 언론사는 신간 소개에서 이 작품을 뺐다.

그렇게 서평은 지워졌으나, 소설은 남았다. 여성 폭행 전력이 있는 소설가가 작품을 낸 것, 또 범죄에 대한 죗값을 치르기 위해 간 감옥을 배경으로 소설을 낸 것, 둘 다 무턱대고 비난하긴 어렵다. 그러나 그 소설을 통해 자기변명을 하면서, 스스로 ‘면죄부’를 만들려고 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물론 작중 화자의 말이나 생각이 곧 작가 개인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작가가 창조한 세계 역시 작가가 살던 시기나 경험, 사고방식 등에 영향을 받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스스로 59년생 돼지띠에, 감옥생활을 한 사람이라면 『힘내라 돼지』가 “이 소설의 이야기는 나와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기만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 부분들을 감안해서 평가를 해보려고 한다.

 

‘아내 폭력’ 죄수의 변명에 초점 맞춰

『힘내라 돼지』는 중심이 되는 이야기가 있다기보다는, 59년생 돼지띠인 ‘빈대코’, ‘털보’, ‘빠삐용’의 수감생활 중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을 옴니버스식으로 다루고 있다.

이 소설은 감옥살이에 대해 “동무들과 어울려 소풍 온 듯 했다”(214p) ‘생애 가장 철저한 안전지대였고 가장 따뜻한 공동체'(296p)라고 묘사한다. 더불어 작중 인물들, 특히 59년생 돼지띠 세 명을 굉장히 인간적이고 소탈한 사람들로 그려낸다. 셋은 서로의 처지를 연민하며 동지애로 뭉쳐, 세 명이 한 마을에 모여사는 ‘새 삶’을 꿈꾼다. 책 뒷면에 “극한 상황에 놓인 중년 남성들에게 보내는 위로와 희망”이라고 쓴 홍보문구만 봐도 이 책의 주제의식을 잘 알 수 있다.

세 명은 ‘어쩌다 감옥'(38p)에 온 사람들처럼 묘사된다. 무려 죄목이 ‘(아내) 특수상해’, ‘탈세’, ‘뇌물 수수’인데도 말이다. 이들은 모든 것을 다 잃은 채로 ‘억울함’을 안고 감옥에 왔으며, 사회에서 추방 받았다는 사실에 슬픔을 느낀다. 심 씨는 한국 남성의 약자성을 강조하고 ‘집단적 자기 연민’을 통한 연대 의식을 보여주기 위해 감옥이라는 공간을 재해석한 것이다.

감옥 내 남성연대에서는 살인이나 강간 급의 범죄가 아닌 이상,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뀐다. 특히 아내를 때려서 감옥살이를 하게 된 빈대코의 경우에는 ‘여자가 맞을 만 하네’의 논리가 전면적으로 등장한다. ‘마귀할멈’, ‘여우’라는 표현까지 나온다.

과수원을 운영한 빈대코가 아내를 계속 때리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아내가 과수원 한가운데 있는 ‘어머니 묘지’를 이장하자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로 세 번이나 폭행으로 기소됐다가 감옥을 오게 됐음에도, 빈대코는 반성하지 않는다. “아내가 경찰에게 허위진술을 했다”, “이웃 남자랑 붙어서 과수원을 독차지하려고 계략을 세웠다” 등등의 말을 하며 억울함을 호소한다.

죄수들은 빈대코의 이야기를 듣고 피해자인 아내에게 ‘썅년’, “망치로 한 방 맞아야” 등의 욕을 퍼붓는다. 또 빈대코가 옥중 이혼당하자 죄수들은 “누가 잘못했나” 논쟁을 벌이는데, 이 부분은 감옥 내 남성연대가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참고로 쇼군은 방장이며, 기계조의 조장까지 맡는 감옥의 권력자로 등장한다.

우리가 남자라고 남자 말만 듣고 여자를 욕할 순 없죠.

쇼군이 화를 냈다.

공평하기도 하다, 이 새끼야! 그래서 니도 수갑 차고 손도장 찍으러 갈래?”(145p)

놀라운 것은 빈대코에게 특수상해가 적용된 것은 ‘감 따는 장대’로 아내를 때렸기 때문인데, 이는 심 씨가 사용한 ‘등산용 스틱’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장치는 의도적으로라도 뺐어야 한다고 보는데, 고의적으로 본인을 투영했다는 인상을 받는다.

또 다른 주인공 털보 역시 여성에게 배신당한 인물로 나온다. 그는 자신이 운영하던 주유소가 망한 이유를, 이혼한 아내의 고모부가 운영하는 막걸리 양조장에 무리하게 돈을 빌려준 탓이라고 본다. 며느리는 손주들과의 ‘화상 접견’을 막는 존재로 등장한다. 빈대코와 털보는 여자에게 ‘당하고만’ 사는 남자들의 전형처럼 그려진 것이다.

 

범죄에 대한 ‘남성적 해석’

이밖에도 여성을 도구화시키거나 죄수인 가해자 입장에서의 서술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죄수들은 자기 본위대로 여성에 대해 판단하며, 이 과정에서 여성은 끊임없이 도구화된다.(작품에서 긍정적으로 표현되는 여성은 ‘죽은’ 빠삐용의 아내와, 수동적으로 그려진 척추 장애 2급인 털보의 여동생뿐이다)

여자 제자를 성추행해서 감옥에 있는 ‘선생님’은 매일 제자들에게 편지를 쓰는 인물로 등장한다. 쇼군은 그에 대해 “존경할만하다, 변명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긍정적인 인물로 등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가 하는 말은 지극히 자기도취적이다.

순수한 아이들이라 용서를 빌면 받아들입니다. 용서하니 마니 그런 말을 주고받진 않습니다만 결론적으로 용서해요.”(77p)

문제 죄수였던 ‘동한’은 지체장애인 여성을 집단 강간해서 복역 중이다. 이로 인해 피해 여성은 임신을 해서 애를 낳았고, 동한은 “아이 사진을 들고 다니며 싱글벙글하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피해 여성이 시댁에 맡겨놓았던 아이를 찾아간 뒤 잠적하자 동한은 우울증에 걸린다. 그런데 이 상황에 대한 서술은 참담한 수준이다.

그러고 보면 동한이는 아들만이 아니라, 아이의 엄마도 지극히 사랑했던 셈이다.”(255p)

이렇듯 여성 대상 폭력에 대해 ‘때릴 만 해서’를 포함한 남성적 해석이 전면에 등장한다. 그밖에도 ‘역차별’론을 연상하게 만드는 남성 피해자 서사, 성범죄에 대한 남성 중심적 사고 등이 무비판적으로 드러난다. 이는 어쩌면 일상적 공간이라면 소설의 윤리성을 걸고넘어질 수도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심 씨는 감옥이라는 공간과 ‘죄인’이라는 신분을 배경 삼아 앞서 동한이의 이야기처럼 사실상 금기를 깨버리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금기를 깨는 것이 통속성을 부수거나, 새로운 윤리를 창조하는 형태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점이다. 『힘내라 돼지』에서 죄수를 두둔하는 서술은 기존의 가부장적 편견을 확대하고, 역차별론을 조장하는 수단으로 이용된다는 인상을 받는다.

 

소설은 용서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이것이 스스로에게, 또는 미투와 문단 내 성폭력 국면에서 또래 남성에게 부여하는 ‘면죄부’라는 확신을 굳혔던 부분이 있다. 17살에 살인을 해 무기수가 된 레옹은 빠삐용과 소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거짓말이 좋아요. 가장 깨끗하잖아요”(274p)라고 말한다. 이어 “소설은 이렇다 저렇다 가르치지 않고 재판하지도 않으니 말할 수 있어요. 그래서 소설한테는 용서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275p)라고 밝힌다. B언론사 서평에서는 이 부분을 소설의 ‘뼈’라고 말한 바 있다.

소설가가 작중에서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소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낸다고 추측할 수밖에 없다. 레옹은 소설은 거짓말이라고 규정한 뒤, 그 안에서 죄가 사해지는 것을 욕망한다. 심지어 한발 더 나아가기까지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고통을 토해내고 목숨을 건지면 그건 통속입니다. 그걸 꿀꺽 삼켜야 돼요. 그렇게 자신을 완전히 부패시켜야 대속(代贖)할 수 있어요.”(276p)

‘대속’, 대신 속죄한다는 것. “환갑 직전 돼지띠 동갑내기들을 위한 소설을 한 편 쓰겠다는 결심이 있었다”는 책 속 작가의 말에서 ‘대속’이 언급된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동시에 왜 이 소설이 희망적으로 쓰여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헤밍웨이의 역경 많은 인생사를 언급하며, “운명이 눈앞에서 어정거리거듯 구둣발로 걷어차라”는 헤밍웨이의 말로 작가의 말을 끝맺는다.

그런데 용서를 왜 피해자에게 받지 않고, 소설을 통해 받으려고 하는가. 역설적으로 그런 용서는 감옥 내 남성연대에서나 가능하다는 것을 이 소설은 증명하고 있다. 무엇보다 반성하지 않거나, 반성한다는 이들도 자신의 죄를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는 인물들 투성인 이 소설에서, 용서에 이은 ‘새로운 시작’은 가당치도 않다. 이 소설을 보고 위로받는 중년남성이 있다면, 자신의 윤리 의식이 소설에 등장하는 ‘죄수’들과 비슷한지 의심해봐야 하지 않을까?

원문: 박정훈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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