ㅍㅍㅅㅅ https://ppss.kr 필자와 독자의 경계가 없는 이슈 큐레이팅 매거진 Fri, 06 Jan 2023 11:01:20 +0000 ko-KR hourly 1 https://wordpress.org/?v=5.8.10 https://ppss.kr/wp-content/uploads/2015/07/ppss-100x100.png ㅍㅍㅅㅅ https://ppss.kr 32 32 사라질 듯 사라지지 않는, 스타트업의 사내 정치를 활용하는 법 https://ppss.kr/archives/251336 Wed, 23 Feb 2022 02:20:35 +0000 http://3.36.87.144/?p=251336

행복한 스타트업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스타트업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 한남동 톨스토이

 

1. 정치에 지친 스타트업 근로자와 리더를 위하여

이 글은 널리 존경받는 구 스타트업 CEO, 현 엔젤 투자자 한남동 톨스토이(가명)가 장장 2회에 걸친 술자리에서 구두로 전달해준 스타트업 사내 정치에 대한 빛나는 통찰을, 나의 흐릿한 문장으로 정리한 글이다.

제목에서 정치 두 글자만 보고 허겁지겁 클릭한 당신. 이 글은 ‘윤’의 거친 생각과 ‘이’의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안’의 전쟁 같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돌아가시라. 이 글의 권장 소비자는 평소 본인의 실무적 감각보다 정무적 감각이 떨어져서 손해 본다고 생각하는 스타트업 종사자나, 사라질 듯 사라지지 않는 사내 정치에 지친 스타트업 리더다.

 

2. 성장기의 스타트업에게 부서 vs. 부서 싸움은 ‘잘 쓰면 약’이다

모든 기업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사내 정치 구도이다. 마케팅vs.디자인 등의 유관 업무가 많고 이해관계가 얽힌 조직 간의 갈등도 있다. 또한 영업 1팀vs.영업 2팀 등의 동종 조직 간의 갈등도 있다.  스타트업의 경우 자원(개발 리소스, 예산, 시간 등)이 상대적으로 턱없이 부족하므로, 이러한 갈등이 일반 기업보다 더 과격한 양상을 띠는 경우가 많다.

이런 형태의 사내 정치는 구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를 일거에 해소하기 위해서 ‘외과적 수술’을 감행하는 것은 정말 회사의 명운이 달린 경우가 아니고서야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다. 즉, 고혈압이나 당뇨 같은 만성 질병처럼 ‘관리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사내 정치 유형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관리해야 할 것인가?

상황에 따라서 유혈 배틀도 서슴치 않는 유형

한남동 톨스토이는 만약 스타트업의 서비스가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면, 사내 정치와 갈등도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뛰어난 리더는 조직의 성과를 끌어올리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하고, 여기서 사내 정치도 당연히 예외가 아니다.

예를 들어 보자. 여러 번의 이터레이션을 통해 95% 만족하는 아웃풋이 나왔다. 구성원들은 여기서 그만두고 싶어하지만 해당 부서의 리더는 딱 한 번 만 더 푸쉬하고 싶은 상황이라 가정해보자. 리더는 평소에 구사하던 노동 촉진 레파토리를 다 써버렸다. 여기서 무작정 한 번 더 압박하는 것은 구성원들의 불만도 불만이지만, 그 효과가 너무 떨어진다.

그런데 이때 회의를 다녀온 리더가 ‘타 부서 핑계’ 카드를 쓴다면 어떨까?

내가 설득한다곤 했는데 결국 마케팅팀에서 까였다. 정말 미안하다. 아쉽지만 조금만 더 고민해서 마케팅팀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는 결과를 만들자.

적절하게 사용하면 리더 본인의 어그로를 리셋하면서도 동시에 구성원의 전투력을 온존할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이 된다.

야, 지난달에 우리 팀원 2명 휴가였잖아. 근데 2팀 애들이 지난달 우리 팀이랑 실적 비슷하게 나왔다고 이번 달에 우리 따라잡는다고 하더라. 참나.

네… 뭐라고요… 누가요…? 하 참나

혹은 위처럼 단순하고 전통적인 격장지계(激奬之計)를 사용할 수도 있다. 뛰어난 능력의 리더들은 이런 식의 ‘타 부서 핑계’ 초식을 자유자재로 사용한다. 실제로도 정치적으로 갈등을 일으키는 부서의 리더들은 서로 이런 정치 구도를 이용하는 것을 알고 있는 경우가 대다수다. 부서 멤버들이 보는 평소에는 냉랭하지만, 사적인 자리에서는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허물없이 친하게 지내는 리더들의 케이스도 꽤 있다. 그래서 서로 욕하는 거 들어도 못 들은 척 넘어가주고 그런다.

그런데 이렇게 부서 리더들끼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있는데, 대표가 눈치가 없어서 부서 리더끼리 급격한 화해를 주선하는 촌극이 벌어지는 경우도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런 레토릭이 오고 갈 때 그 대상은 상대 부서가 아니다. 저건 자신이 속한 부서 내부의 결속을 다시고 불만을 잠재우는 용도다. 이런 구도에서 대표는 갈등의 해결사, 주인공이 되려고 해서는 절대 안 된다.

뛰어난 리더를 뽑았다면 리더들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전면에 나서는 대신, 양 부서를 수시로 오가며 부서 구성원들의 요구사항을 잘 파악하고 민심을 수습하는 서번트 리더십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사내 정치는 보툴리눔 톡신과 같다. 잘 쓰면 주름살 펴 주는 보톡스가 되고, 잘못 쓰면 조직 문화 싹 다 죽는다.

  • 한남동 톨스토이

 

3. 안정기의 스타트업이라면, 다른 동력을 찾아야 한다

가파른 성장세가 돈좌되고 안정·성숙기에 접어든 스타트업에서, 거짓말처럼 한꺼번에 많은 문제가 터져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터져 나온 대부분의 문제는 새로운 문제가 아니라 원래부터 있던 문제일 확률이 높다. 그 문제들은 계속 거기 있었지만 빠른 성장세의 그늘에 가려져 단지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사내 정치도 마찬가지다. 성장기의 스타트업에서는 부작용은 줄어들고 효과는 좋아서 ‘약’으로 쓰였던 사내정치가, 안정기에 접어든 스타트업에서는 그 보이지 않던 부작용이 드러나 ‘독’이 될 가능성이 크다.

아무리 회사 내부의 구성원들끼리 싸우고 지지고 볶아도, 회사의 성장이 자신의 보상과 많이 연결되는 성장기의 경우, 사람들은 많은 것을 감내할 수 있다. 우리 부서랑 맨날 으르렁대고 재수도 없지만 능력은 쩌는 타 부서 팀장? 환영이다. 하지만 업무가 세분화·전문화되고, 조직 내의 변화가 줄어들며, 회사의 성장과 나의 보상의 상관관계가 줄어드는 성숙기에는 사람들의 똘레랑스 레벨이 낮아지고 사내 정치의 양상도 굳어진다.

‘사일로 현상’이라고도 부르는 그것

이 말은 곧 ‘부서 이기주의’가 등장한다는 뜻이다. 유식한 말로 ‘사일로 현상’이라고 한다. 몇 년 전에 최고 경영자 과정에서 배운 건 골프 스윙이랑 이 단어, 딱 두 개 뿐이다. 그렇다면 성숙기의 스타트업은 사내 정치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성숙기의 스타트업이 사내 정치를 다스리는 방법에는 3가지 방책이 있소. 상책은 또 다른 동력을 찾아 스타트업을 성장기로 바꾸는 것이오. 중책은 회사 외부에 공통의 적을 만들어, 내부는 결집하고 적의는 조직 바깥으로 돌리는 것이오. 하책은 대표가 흑화해서 광역 어그로를 끄는 것이오. 이슈는 이슈로 덮고 악은 거악으로 덮는 법이오.

충분히 발달한 리더는 정신과 의사와 구별할 수 없다.

  • 한남동 아서, C 톨스토이

 

4. 박힌 돌 Vs 굴러온 돌

또 다른 갈등이 있다. 스타트업 초기에 합류해 회사와 함께 성장하고 있는 박힌 돌과 관련 산업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경력직으로 합류한 굴러온 돌, 이 둘의 갈등 구도. 이는 스타트업이 성장 과정에서 겪는 통과의례 중 하나이다.

비슷한 업무에 종사하는 박힌 돌과 굴러온 돌이 1:1로 충돌했을 때, 해당 부서의 리더나 대표는 이들의 갈등을 평가하거나 판단해선 안 된다. 사내 정치는 교통사고가 아니다. 리더가 한문철 병에 걸려서 7:3, 6:4 등의 과실 비율 판결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리더는 판사, 사법부가 아니라 상담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진짜 문제는 둘의 충돌이 아니고, 둘이 왜 충돌하는지 그 바닥에 깔린 심리이다.

먼저 박힌 돌의 심리를 인수 분해해보자. 회사가 성장함에 따라 나의 쓸모가 줄어들지도 모른다는 공포, 기존의 업계 레거시에 대한 본능적이고 무조건적인 거부감, 새로운 방식으로 업계를 혁신하고 기존 업계에서 인정도 받고 싶은 이율배반적인 욕망 등의 인수가 나온다. 스타트업 개국공신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럼 굴러온 돌은 어떨까? 내가 지금까지 쌓아온 업계 경력이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다는 공포, 시스템과 프로세스의 부재로 인한 불안감, 기존 멤버들에게 능력을 보여주고 좋은 평가를 받고 싶은 인정 욕구 등으로 인수 분해가 가능할 것이다.

이렇게 인수 분해해보면 이들의 갈등을 긍정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먼저 각자의 공포와 불안을 가장 잘 다스릴 수 있는 약을 처방해야 하는데, 최고의 약은 잘 설계된 보상 체계다. 회사의 성장과 개인의 보상을 잘 매치하는 것이다.

단점에 집중해 서로를 공격하는 것보다는 ‘서로가 가지고 장점을 최대한 살려서 같이 회사 가치 올리는 것이 최고의 선(善)이다.’라는 걸 잘 납득 시키면 게임 끝. 나머지는 그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그 욕망을 업무 성과로 잘 인도할 수 있도록 살살 부추기는 것만 잘하면 된다.

 

5. 백약을 써도 무효한 경우: 집단 간의 싸움

단, 경계해야 될 게 있다. 특정 업무나 분야에서 1:1 구도의 갈등은 위와 같이 긍정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만, 이 구도가 집단화가 되면 긍정적 활용이 거의 불가능해진다. 박힌 돌’들’ Vs 굴러온 돌’들’ 식으로 집단 구도가 강하게 잡히면 매우 골치 아파진다.

개개인의 서운함과 불만은 각개로 놓고 보면 쉽게 풀 수 있는 문제가 되지만,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집단을 만나면 증폭되기 십상이다. 이런 감정의 증폭은 상대방에 대한 불만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갈등이 집단 Vs. 집단으로 바뀌면 보상 체계를 통한 이성적인 설득이 먹혀들어 갈 확률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전체 파이를 키우는 것 보다 각자 집단에 유리하게 파이를 자르는 거에 현혹되기 시작한다.

단체로 싸우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답이 없다 /출처: PIXABAY

최근의 근무 환경도 이런 안 좋은 사내 정치가 퍼져나가는 데 일조하고 있는 것 같다. 비슷한 내용이라도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면 무난하게 합의하고 넘어갔을 일도, 전화로 이야기하다 보면 괜히 꼬인다. 이메일이나 노션 같은 협업 툴에서 이루어지는 ‘글’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은 전화 통화보다 더 오해를 많이 만든다. 비슷한 생각이나 불만을 품고 있는 사람들끼리 슬랙에서 이야기하고 단톡방 파고, 이러다 보면 문제가 더 빠르게 퍼진다.

당신이 리더이고 만약 이런 분위기를 감지했다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앞에서 언급한 다른 예시와는 다르다. 집단화되려는 움직임을 봉쇄하고, 여의치 않으면 집단 내부를 흔들어야 한다. 필요하다면 자신의 선에서 ‘사내 정치’를 활용해서 그들을 뭉치지 못하게 만들어라. 각기 다른 불만이 있는 개인 50명이, 같은 불만과 정서를 공유하는 끈끈한 5명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집단보다 훨씬 관리하기 쉽다. 특히 인원이 적은 초기 스타트업은 치명적이다. 명심하라.

이해가 느린 사람에게도 편견이 없다면 어려운 주제에 관해서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똑똑한 사람일지라도 의심의 여지 없이 주제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정말 쉬운 주제라도 이해시킬 수 없을 것이다.

  • 한남동 톨스토이

원문: limyoungj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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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스타트업의 코로나19 대응 사례 https://ppss.kr/archives/217550 Wed, 20 May 2020 08:24:01 +0000 http://3.36.87.144/?p=217550 1. 앙코르 뮤지션 Encore Musicians
출처: 앙코르 뮤지션 웹사이트

연말 파티에서 분위기를 띄울 DJ를 찾아야 할 때, 예비 신부를 위해 결혼식 피로연에 마룬5 커버 밴드를 섭외하고 싶을 때, 혹은 격식 있는 학회 행사에 현악 4중주를 초대하고 싶을 때, 앙코르 뮤지션(Encore Musicians)은 이런 상황에 안성맞춤인 서비스다. 영국 소비자들은 앙코르 뮤지션에서 결혼식부터 장례식까지 다양한 상황에 맞춘 거의 모든 장르의 음악가들을 둘러볼 수 있고, 다른 사용자들이 남긴 리뷰와 샘플 영상을 보면서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

지난 3월 23일 영국 보리스 존슨 총리는 영국 국민들에게 자가 격리를 촉구하고 곧 솔선수범하는 자세로 코로나에 감염되어 중환자실로 들어가 버렸다. 영국의 거의 모든 오프라인 행사가 사라졌다. 당연히 앙코르 뮤지션에서 매칭된 모든 예약 건은 일제히 취소되었다. 등록된 몇천 명의 음악가들이 한순간에 생업을 잃고 실의에 빠졌다.

하지만 앙코르 뮤지션의 구성원 11명은 실의와 술독에 빠지는 대신, 빠르게 원격으로 회의하며 아이디어를 내고 실행에 옮겨 2주일 만에 새로운 서비스 퍼스널 뮤직 메시지(Personal Music Message)를 런칭했다.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다음 영상을 보는 게 더 이해가 쉬울 것이다.

결혼 20주년을 맞이한 부모님 제스(Jess)와 샘(Sam)을 위해, 딸 키아라(Kiara)가 보낸 선물이다. 결혼하기 전 처음으로 함께 춤을 췄던 음악인 쳇 베이커의 ‘타임 애프터 타임(Time After Time)’을 들으며, 제스와 샘은 딸 키아라 덕분에 자가 격리의 답답함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지 않았을까?

매년 생일을 함께 보냈지만, 올해는 함께하지 못하는 친구 줄리(Julie)에게 베프 안나(Anna)가 보내는 특별한 생일 축하 노래도 있다.

 

2. 블렌디드 센스 Blended Sense

텍사스 오스틴에 있는 블렌디드 센스(Blended Sense)는 멤버 12명의 초기 스타트업이다. 이들은 지역 소상공인들을 위한 콘텐츠 마케팅 패키지를 제공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얼마 전 ‘로스 포요스 에르마노스(Los Pollos Hermanos)’라는 마약 치킨 가게를 뉴멕시코 앨버키키에 오픈한 구스타보 프링 사장님은 요새 고민이 많다. 음식 맛은 자신 있지만, 지금과 같은 디지털 시대에 초기 홍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할 따름이다. 그때 누군가의 소개로 블렌디드 센스의 서비스를 구독한다. 블렌디드 센스는 다양한 로컬 크리에이티브를 섭외해 구스타보 사장을 위해 여러 형태의 디지털 콘텐츠를 만들어주고 마케팅을 지원해준다.

어느 날은 월터 화이트라는 사진사가 와서 메뉴 사진과 가게 전경 사진을 제대로 찍어주고, 이 자료를 포털사이트나 배달 서비스 등에 업로드 할 수 있게 도와준다. 또 어느 날은 사울 굿맨이라는 영상 촬영 전문가가 와서 가게와 메뉴 홍보 영상을 촬영하고 배포를 도와주기도 한다. 또 어느 날은 제시 핑크맨이라는 인플루언서가 와서 치킨 먹는 인증샷과 함께 #핵존맛, #마약치킨(응?) 등의 태깅을 달아 홍보 포스팅을 올려주기도 하는 것이다.

출처: 블렌디드 센스 웹사이트

디지털 마케팅에 익숙하지 않은 지역 소상공인들의 가려운 부분을 제대로 긁어준 덕인지 블렌디드 센스는 구독자가 매달 50%씩 상승하면서 승승장구했고, 10만 불의 엔젤 투자 유지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2020년 3월 코로나 사태가 터졌다. 딱 한 달 만에, 지금까지 어렵게 관계를 형성했던 사업자 중의 45%가 구독을 취소했고 진행 중이던 투자도 한순간에 백지화되었다. 이들은 이 상황에서 2가지 액션을 취한다.

  1. 빠르게 BM을 바꿨다. 자신들에게 유리하던 구독 모델을 포기하고, 사업자들이 유연하게 선택할 수 있도록 아라카르트(à la carte) 과금 모델을 도입했다. 쉽게 말해 코스 요리만 팔다가 단품 요리로 선택할 수 있게 바뀐 것.
  2. 교육 지원에 나섰다. 소상공인 사업자들을 대상으로 직접 디지털 마케팅 교육을 시작했다. 록다운 중에 전문가를 직접 보낼 수도 없으니, 이제 사업장에서 직접 자기 자신을 홍보할 방법을 알려준다. 사업장에서 라이브 스트리밍하는 법이라든가, 디지털 마케팅 플랫폼 사용법 등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개별 사업자들을 대상으로 코로나 사태에 대응하는 방법, 배달 서비스 이용 방법 등을 1:1 상담해준다고 한다.

 

3. 인티고 Intigo

유럽과 아프리카와 중동의 교차점인 튀니지의 수도 튀니스. 관광산업이 발달했지만, 낡고 치안이 엉망인 트램을 제외하곤 제대로 된 대중교통이 전무하다. 그나마 택시가 유일한 대안이긴 하나 고도(古都)의 특성상 도로의 폭이 좁고 차선표시와 신호 체계가 매우 미흡한 상황이라 교통체증이 심하다는 문제가 있다.

그런 와중 작년 11월, 조금 특이한 모빌리티 서비스가 튀니스에 등장했다. 조금 특이하다고 말한 이유는 아래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다.

출처: IlBoursa

이 스타트업은 튀니스의 교통 상황에서는 스쿠터가 최적이라고 판단하고, 산뜻한 디자인의 뚜껑 달린 스쿠터를 도입했다. 튀니스 시민들은 크게 환영했다. 기존 택시보다 30% 싸고, 친절하고, 내비게이션대로 목적지까지 최단 시간에 데려다주는 제대로 된 라이드 헤일링 아니 바이크 헤일링 서비스에 대한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올해 2월에는 30만 불의 엔젤투자 유치도 성공했다.

하지만 바이러스는 도시의 역사가 2,400년이라고 따로 봐주지 않았다. 튀니지에도 코로나바이러스의 마수가 뻗었고, 튀니지 정부는 코로나로 인한 사망자가 늘어나자 지난 3월 20일에 강도 높은 통행금지령을 선포했다. 런칭 4개월 만에 큰 위기를 맞이한 인티고(intigo)의 대응은 빠르고 심플했다. 이틀 동안 인티고는 보유한 모든 스쿠터의 뚜껑을 다 뜯어버렸다.

출처: Startup Scene

인티고는 공식적으로 한시적 피벗(Temporally Pivot)을 선언하고, 사람 대신 다양한 물품과 식료품을 나르기 시작했다.

 

4. 스피피 Spiffy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더럼(Durham)에 본사를 둔 스피피(Spiffy)는 온디맨드(On-demand) 자동차 관리 서비스를 운영한다. 사용자가 앱으로 예약하면 전문가들이 와서 외부/내부 세차를 해주는 것이 기본 서비스다. 거기에 추가로 차량 내부 살균, 타이어/엔진 오일/파손 유리 교환,  간단한 외관 수리와 세라믹 코팅 등 다양한 부가 관리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현재 정직원은 150명 정도이며, 견실하게 성장하는 6년 차 스타트업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가 미국에 상륙하자 스피피는 방역 장비 확보에 과감하게 투자했다. 서비스에 아예 코로나19 섹션을 큼지막하게 추가하고 차량과 시설 방역까지 사업을 빠르게 확장했다.

출처: 스피피 웹사이트

질병관리본부가 확진자의 동선을 추적해, 확진자가 머물렀던 식당, 사무실과 사용했던 이동 수단을 방역하는 게 당연한 건,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뿐이다. 기적을 일상으로 만드는 질병관리본부의 관계자분들과 우리나라 의료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하지만 알다시피 전 세계 대부분 국가에서 방역은커녕 제대로 된 격리나 치료도 벅찬 상황이다. 미국은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와중에 방역을 담당하는 민간 업체의 등장은 어쩌면 미국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선 당연한 일인 듯하다. 스피피는 6년간 차곡차곡 쌓아 올린 노하우와 경험 그리고 피땀 흘려 구축한 지역 기반 조직망을 바탕으로 정부보다 빠르게 현재 상황에 대응한다.

 

5. 코루 키즈 Koru Kids

자신이 겪는 문제점과 불편함을 아무도 해결해주지 않자, 그것을 직접 해결하기 위해 뜻을 세우고 창업하는 스토리는 스타트업 바닥에서는 흔한 이야기다. ‘런던에서 믿을만한 아이 돌보미를 구하는 건 왜 이렇게 어렵고 비싼가?’라는 문제점을 풀기 위해, 한 아이의 엄마이자 커리어 우먼인 레이철 카렐(Rachel Carrell)이 창업한 코루 키즈(Koru Kids)의 스토리도 그중 하나로 볼 수 있다.

학교 시간이 끝나 아이들은 돌봄이 필요한데 부모님은 아직 직장에 있는 오후 시간대를 메꿔주는 방과 후 돌봄 서비스(After-school care)가 히트하면서, 코루 키즈는 작년 기준 연간 10만 건 이상의 매칭을 만들어 내는 직원 55명의 중견 스타트업으로 착실하게 성장했다.

출처: 코루 키즈 웹사이트

코로나 사태가 터지고 코루 키즈는 빠르게 사태에 대응했다. 우선 기존의 히트 상품 방과 후 돌봄 서비스를 바로 중단했다. 그리고 코로나 사태에서 사회를 지탱하기 위해 꼭 일해야 하는 필수 노동자(Essential Worker)들을 위한 ‘코로나19 단기 커버(Covid-19 Short-term Cover)’라는 프로그램을 긴급 신설하고 운영하기 시작했다. 기존 2–3시간을 커버하는 형태가 아니라, 필수 노동자들이 직장에서 일하는 9시간 이상을 커버할 수 있도록 풀-타임 커버 모델로 서비스를 변경하고 시간당 가격도 낮추었다.

또한 CEO 카렐은 영국의 국민 보건 서비스(NHS-National Health Service)의 직원이나 의료진이 긴급 아이 돌봄이 필요한 경우에는 아이 돌봄 비용의 전액을 코루 키즈에서 부담하겠다고 밝혔다.

 

6. 서플라이 드롭 Supply Drop

미리 밝히고 시작하겠다. 이번 서비스는 90% 이상 재미로 선정했다. 원래 이 회사는 로지 온 파이어(Rosie on fire)라는 하늘하늘한 럭셔리 기모노를 팔면서 영국 여성 소비자들의 오리엔탈리즘을 살살 간지럽혀 돈을 벌던 패션 쇼핑몰을 운영하던 곳이다.

출처: 로지 온 파이어

코로나가 터지고 이 회사도 슈퍼클린(SuperClean)이라는 브랜드를 런칭하고 기존에 여성 의류를 만들던 말레이시아 생산 라인을 장갑이나 살균제 같은 코로나 상품을 만드는 곳으로 변경했다.

루이비통부터 뉴발란스까지 수많은 패션 업체가 기존의 생산라인을 마스크나 장갑 등의 보호장구로 바꾸고, 수많은 화장품 업체도 기존 생산을 멈추고 손 세정제나 방역 물품으로 생산라인을 바꾸었다. 이런 ‘전시 체제’에서 로지 온 파이어의 이러한 대응도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이 회사는 그저 생산 물품만 바꾼 게 아니라 거기서 한 발 더 나간다. 이들은 서플라이 드롭(Supply Drop)이라는 특이한 콘셉트의 쇼핑몰을 오픈하고 기발한 ‘록다운 컬렉션(Lockdown Collection)’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출처: 서플라이 드롭

자가 격리자를 위한 데이트 패키지 상품 같은 경우 칵테일 제조법과 재료, ‘므흣’한 커플 게임과 촛불 그리고 마사지 크림(…) 등이 들어있다. 그 외에도 독특한 조합으로 패키지를 만들어서 판매 중이다. 위기 속에서도 이런 재치라니.

 

7. 후비 Hoovie

후비(Hoovie)는 캐나다 밴쿠버에 위치한 직원 6명의 초기 스타트업이다. 작품성 있는 영화를 모여서 함께 보고, 그 영화에 관해서 토론하고 소통하는 문화 서비스를 제공한다. 뭔가 거창해 보이는데 그냥 쉽게 말하면 누구나 편하게 영화 감상 모임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플랫폼이다.

콘텐츠를 함께 소비한 사람들이 모여서 그 콘텐츠에 관해서 토론한다는 점에서는 트레바리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단, 서비스 제공자가 아닌 모임 주최자가 장소(Venue)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트레바리와 다르다. 후비는 주최자가 직접 집이나 레스토랑 등 장소를 섭외하고, 후비는 스크린 설치와 영화 콘텐츠 제공을 담당한다. 발생한 수입의 50%를 호스트, 30% 영화 저작권자에게 지급하는 구조.

후비에서 볼 수 있는 영화는 우리가 영화관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개봉 영화가 아니다. 주로 독립 영화나 다큐멘터리 영화, 후비의 말을 따르면 보는 사람들 사이 대화의 ’스파크’를 만드는 영화를 제공한다.

출처: 후비

이 품격 있는 서비스도 코로나19의 직격탄을 맞았다. 이 시국에 누가 모여서 영화를 볼까? 모든 영화 모임이 한순간에 취소되었다. 후비의 멤버들은 곧바로 다음 서비스를 준비했다. 바로 버추얼 후비(Virtual Hoovie), 우리나라 말로 옮기면 ‘방구석 영화토론회’가 적절한 듯싶다.

출처: 후비

 

8. 스페이스 Spaces

스페이스(Spaces)는 원래 오프라인 액티비티의 개념으로 VR 게임을 운영하던 곳이다. 사진을 보면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출처: Bisnow

터미네이터 프랜차이즈 라이센스도 따고, 놀이동산 한 군데 한 군데씩 저변을 넓혀가며 차근차근 성장 중이었다. 중국 항저우와 일본 도쿄의 놀이동산에도 진출했다. 그런데 코로나로 인해 전 세계 놀이동산이 다 문을 닫게 된다.

한순간에 사업기반을 잃었지만, 스페이스는 발 빠르게 새로운 서비스를 준비했다. 가진 VR 기술을 기반으로 줌(Zoom), 스카이프(Skype), 행아웃(Hangout) 등의 원격 화상 채팅 서비스에 VR 미팅 애드온(Add-on)을 런칭했다.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사업 기회를 만들고자 노력 중이다.

출처: 스페이스

 

9. 스테이지킹스 StageKings

스테이지킹스(StageKings)는 무대 제작 스타트업이다. 호주 시드니에 본사를 둔 스테이지킹스는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하고 독특한 디자인의 무대로 무대 설치 분야에서 좋은 인지도를 얻으며, 최근에는 마일리 사일러스나 로비 윌리엄스 같은 글로벌 스타의 무대 건도 수주했다. 다음이 스테이지킹스가 만든 무대이다.

호주 UMF 무대. / 출처: ALIA
독일 축제. / 출처: LAURA DE VRIES – DESIGN

하지만 코로나가 터지고 전 세계의 모든 공연과 페스티벌이 한꺼번에 취소되었다. 잘나가던 스타트업의 일감 수주율이 0%가 되었다.

그래서 이 회사는 아이소킹(IsoKing)이라는 가구 브랜드를 런칭하고 자가 격리자들을 위한 책상과 사무용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무대 쌓던 자재와 기술을 이용해서 만든 책상이라 가벼우면서도 견고해 인기가 많다고 한다.

출처: 스테이지킹스

가능하다면 하나 사보고 싶다. 책상 위에 성인 남자가 마이크 들고 올라가서 3시간쯤 방방 뛰어도 절대 무너지지 않을 거라던데…

 

뱀발

두 달짜리 프로젝트 중이어서 한동안 도움이나 조언을 구하는 스타트업 관계자분들의 메일, 카톡, 페메를 읽씹(…)했다. 끝나자마자 단체 답장하는 심정으로 이번 포스팅을 작성했다. 개별 사례에 일일이 답변드리지 못한 점 사과드린다. 사례를 소개하고 사족을 다는 것, 여기까지가 내 한계다. 나는 그저 한 명의 백수 프리랜서 지식 노동자에 불과하다. 각자의 사정을 모르니, 이보다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내 깜냥을 벗어난다.

괜한 노파심에 좀 더 적어본다. 위에서 소개한 사례는 말 그대로 사례에 불과하다. 모든 스타트업의 상황이 다 다르다.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위험하다. 개별 사례의 바탕에 깔린 철학과 전략을 이해하고 자신의 상황에 맞게 적용해야 한다. 신규 서비스 런칭, BM 변경, 사업 영역 확장, 서비스 피벗(Pivot) 등 각 스타트업이 실행한 ‘액션’에 집중하지 말고, 왜 저런 전략을 선택했는지 각 회사가 보유한 역량, 시장 상황 등의 ‘근거’를 파악하길 바란다.

예를 들어 1번, 2번, 6번 사례는 구체적인 전술은 다 다르지만 크게 보면 모두 동일한 전략, ‘공급자(Supply-side) 지키기’로 볼 수 있다. 1번 사례 앙코르 뮤지션이 음악가가 어떻게든 돈을 벌 수 있도록 새로운 수단을 마련한 것, 2번 사례 블렌디드 센스가 소상공인들을 최대한 지원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한 것, 6번 사례 코루 키즈가 회삿돈으로 어떻게든 내니를 계속 굴리는 것은, 최근 에어비앤비가 20억 달러를 빌리고 슈퍼 호스트 긴급 구호 자금을 운용하는 것과 사이즈만 다르지 사실상 큰 틀에서 동일한 전략이다.

공급자 사이드가 무너져 지금까지 어렵사리 구축한 생태계가 그냥 먼지처럼 사라져버리는 최악의 상황을 방지하고자, 어떻게든 공급자들이 생태계에서 떠나가지 않도록 각자 사정에 맞춘 전술을 택한 것이다. 소수의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대다수 스타트업이 어렵다. 불타는 수도 앞에서 무능력하게 쓰러져 우는 지도자에게 한 장군이 했던 말을 마지막으로 남긴다.

첨탑이 무너지고 성벽이 불타올랐다면, 공작 자신께서 첨탑이 되시고 성벽이 되셔야 합니다.

  • 이영도, 『폴라리스 랩소디』

시장이 무너지고 투자금이 불탄다면 스타트업 멤버 각자가 새로운 기회가 되고 BM이 되어야 한다. 한국의 모든 스타트업, 진심으로 응원한다. 화이팅.

원문: limyoungjoo


참고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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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나잇 인 서울 https://ppss.kr/archives/206910 Thu, 21 Nov 2019 09:21:54 +0000 http://3.36.87.144/?p=206910 부러운 마음

목요일 밤 술자리의 대화 주제는 시작부터 끝까지 스타트업과 창업이다. 시간은 자정을 향해 달려가는데 주제가 몇 시간째 계속 고정인 이유는 멤버 구성을 보면 알 수 있다. 6개월 차 초보 스타트업 대표 A, 대기업 사내 벤처팀의 리더 B, 개발자이자 예비창업자 C, 그리고 전직 창업가 현직 백수 프리랜서 나.

4명의 멤버 모두 사고의 결이라든지, 관심사라든지, 직업 정서라든지 그런 게 유사한 사람들이라, 누가 ‘영화 〈엑시트〉 제목만 보고 스타트업 피인수되는 이야긴 줄 알았다’는 끔찍한 드립을 쳐도, 다 같이 빵 터져서 웃을 수 있을 만큼의 공통분모가 있었다. 그래서 술자리의 분위기는 꽤 끈끈했다.

뭐… 둘 다 탈출은 탈출이다(…)

창업 6개월 차 스타트업 대표 A는 최근에 진행한 소비자 조사 결과가 별로라서, 과감하게 아이템을 바꿔야 할지 고민 중이라고 한다. A는 6개월 만에 벌써 아이템을 2번이나 바꾼 이력이 있다. 그래서 ‘소비자 조사 결과를 더 자세히 분석하고 부족하면 더 해라. 남이 떡이 커 보인다고 맨날 방향만 바꾸는 게 무슨 스타트업이냐. 일단 최대한 가볍게 제품을 만들어서 시장 반응을 봐라. 대표의 감정보다 논리와 숫자가 의사결정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조언해주었다.

B는 대기업 사내 벤처팀의 리더이다. 10개월째 제품 개발 중인데 최근에 회사 상황이 어려워지자 내부에서 사내 벤처팀에 대한 압박과 견제가 늘어나서 큰 고민이라고 한다. 듣기만 해도 안타까운 상황이다. 그래서 ‘사내 벤처의 장점이 낮은 리스크라면 지금 겪는 일은 그 반대급부다. 개발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10개월이 사실 운이 좋았던 거고, 앞으로는 더 힘들어질 거다. 최대한 제품 출시까지 버텨라’라는 위로를 건넸다.

예비창업자 C는 아직 뚜렷한 창업 아이디어도 없고 구체적인 계획도 없지만, 최근에 회사에서 받은 부당한 대우와 주변 지인의 창업 성공 소식 때문에 당장이라도 창업을 해야 하나 고민이라고 한다. C에게는 ‘스타트업을 불행한 직장생활의 도피처쯤으로 생각하는 건 너무나도 안일한 생각이다.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이란 있을 수 없다는 베르세르크 가츠의 말을 명심하라. 창업 우습게 보지 말고 제대로 준비해라.’라고 좀 다그쳤다.

술자리가 파하고 택시와 타다를 불러보았지만 잡히질 않는다. 아무래도 좀 기다려야 될 것 같다. 자정이 갓 넘은 신논현역이니 당연한 일이다. 문득 가슴이 조금 답답해졌다. 오늘도 결국, 술자리에서 조언해주고 상담하는 역할을 또 해버렸다. 나는 그럴 자격도 능력도 없는 사람이지만, 사람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나에게 자꾸 뭘 물어본다. 또 좋다고 X도 모르면서 꾸역꾸역 답을 한다. 남의 일에 훈수 두는 일, 하다 보니 참 쉽고 재밌다. 내 일 아니니까 부담도 없고.

문득 오늘 낮에 넷플릭스로 다시 봤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가 생각났다. 파리로 여행 간 미국 소설가가 1920년대와 1890년대의 파리로 시간여행을 해서 당시의 다양한 예술가를 만나서 벌어지는, 몽환적이고 유쾌한 스토리의 영화다. 이 영화의 주인공 길 펜더는 그야말로 너무 부러운 놈이다. 자신이 동경하는 젊은 시절의 예술가들을 직접 만나서 조언도 얻고 도움도 받았다.

소설가가 꿈인 사람이 젊은 시절의 어니스트 헤밍웨이, F. 스콧 피츠제럴드와 이야기를 나누고 거스루트 스테인에게 피드백을 받다니! 그야말로 영화 같은 일이 아닌가? 하아, 나도 만약에 과거로 돌아가서 젊은 시절의 스타트업 창업가들을 만나서 조언도 얻고 자극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 갑자기 내 앞에 오래된 차 한 대가 섰다. 왠지 모르겠지만 그 차에 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게 너무나도 당연한 일처럼 느껴졌다. 훈훈한 차 내부 온도에 쌀쌀한 날씨에 얼었던 몸이 스르르 녹았다. 술기운이 더 확 도는 느낌이다. 얼마를 달렸을까? 차는 나를 한 건물 앞에 내려주었다. 건물 앞에는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중소기업청 주관, 한국 벤처 네트워킹 파티 – 1997년 11월 7일

두둥.

 

1997년 11월 7일

이 농담 같은 상황을 당연한 일인 것처럼 받아들이기로 했다. 우디 앨런이 나의 기도를 들었나 보다. 속으로 그에게 변태 영감이라고 한 걸 사과하며 행사장에 들어갔다. 준비된 발표가 막 끝나서 뒤풀이가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다들 앉아 있는 와중에 뒤늦게 행사장에 들어온 나에게 이목이 쏠렸다. 어쩔 수 없이 나를 소개해야 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스타ㅌ… 아니 벤처 경력 10년 차인 프리랜서입니다. 오늘 많이 배우겠습니다.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아이쿠야. 빠르게 나의 실수를 깨달았다. 1997년에 10년 차면 업계 최고 경력이다. 의도치 않게 졸지에 업계의 큰 선배급;;이 되었다. 행사 진행 요원이 와서 정중하게 말을 걸었다.

“저쪽 상석 테이블로 가시죠. 자리를 하나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앗 잠시만요. 제가 해외(?)에 있다가 귀국한 지 얼마 안 돼서 누가 누군지 잘 모르겠네요. 상석 테이블에는 누가 계신가요?”

“뭐,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쟁쟁하신 분들이죠. 저기 가운데 저분이 휴맥스의 변대규 대표님입니다. 올해 4월에 코스닥에 상장한 휴맥스 아시죠? 그리고 저분은 작년에 인기 탤런트 김희애 씨와 결혼해서 화제가 된 한글과컴퓨터의 이찬진 대표입니다.“

지금이 1997년이라는 실감이 슬슬 들기 시작했다. 휴맥스에 한글과컴퓨터라니!

“혹시 좀 편한, 아니 상대적으로 젊은 창업가들이 있는 테이블은 어디인가요?“

“그러면 저기 앞쪽 테이블은 어떠신가요? ‘바람의 나라’로 대박 난 넥슨의 김정주 대표도 있고 팩스맨과 새롬 데이터맨으로 유명한 새롬기술의 오상수 대표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젊은 피, 다음커뮤니케이션즈의 이재웅 대표도 있군요. 또 광고를 보면 돈을 준다는 기가 막힌 아이디어로 창업한 골드 뱅크의 김진호 대표님도 있고요. 저쪽으로 가시겠습니까?”

참고로 얼굴천재 차은우가 1997년생이다.

여러 의미로 전설적인 이름들이 마구 쏟아진다. 그런데 문득 내가 지금의 시대 상황을 너무 모르고, 또 자칫 큰 말실수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분들 다 만나보고 싶긴 한데… 결심했다. 우선은 1997년의 상황에 좀 익숙해진 다음에 저분들은 천천히 만나야겠다.

아… 저는 일단 여기 입구 쪽 구석 자리에 앉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실내가 다 보이는 구석 자리에 앉아 상황을 좀 관찰하기로 했다.

 

바보 같은 인수 합병

구석 자리에 앉아 물 한잔을 마시며 행사장을 둘러보는데, 내 옆자리에서 앉아 있던 처진 눈을 가진 선량한 인상의 젊은이가 말을 걸었다.

저기 업계 선배님이라고 하셨죠.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1997년의 분위기도 알아갈 겸,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에 편하게 이야기하시라고 했다.

“저는 올해 3월에 창업해서 이제 반년 남짓 회사를 운영한 초보 창업가입니다. 기업용 소프트웨어를 만들어서 공급하는 일을 하는데, 최근에 대기업 프로젝트도 잘 끝내고 첫 매출도 엊그제 입금되어서 행복한 상황입니다.”

“오, 그래도 빠르게 잘 자리를 잡으셨네요.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그런데 요새 제가 고민이 있습니다.”

“어떤 건가요?“

“저랑 친한 후배 놈이 지금 다른 회사에서 열심히 게임을 만듭니다. 그런데 지난달에 IMF가 터진 후에 그 회사 사정이 어려워져서 개발 중인 프로젝트를 올 스탑해야 한다고 합니다. 출시가 코 앞인데 날벼락을 맞은 거죠. 참 안타까운 사정이라, 제가 그 후배네 개발팀을 거둬들여서 개발을 마무리할 수 있게 할까 고민 중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고민이 있습니다. 우리 회사가 앞으로 B2B 사업을 하면서 게임 쪽도 동시에 도전하게 되는 거라, 둘 다 잘할 수 있을지 좀 걱정이 됩니다.”

휴, 일단 이 젊은 대표 덕분에 1997년 11년이면 한창 IMF 때문에 대한민국이 떠들썩했다는 귀중한 정보를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일단 머릿속에 이 정보를 잘 갈무리하고, 동시에 이 한심한 작자가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따끔하게 충고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대표님, 혹시 이 회사 하시기 전에는 무슨 일 하셨습니까?”

“아, 저는 개발자였죠. 한글과컴퓨터나 한메소프트 같은 회사에서 소프트웨어 개발을 했습니다.”

“혹시 그럼 게임 개발 경험이나 운영 경험은요?”

“그… 없습니다.”

“그럼 제가 무슨 말 할지 대충 감 잡으셨을 것 같습니다. 대표님이 전혀 경험이 없는 분야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얼마나 있을까요? 그리고 한 가지 분야에서 성공하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창업한 지 반년 좀 넘었는데 벌써 두 가지, 그것도 전혀 시너지가 나지 않는 다른 사업을 함께 운영하는 게 현실적으로 얼마나 어려울까요? 후배분 사정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감정적인 대응보다는 냉정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 IMF 시대입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회사가 도산할지, 그리고 경영 상황이 얼마나 악화할 지 누가 알겠습니까. 부디 신중하게 결정하시길 바랍니다.”

그는 심각하게 굳은 얼굴로 고민에 빠졌다. 너무 세게 이야기한 것 같아 좀 미안해졌다. 부드러운 말로 그를 만류하려던 찰나 그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아 선배님 마침 그 후배 놈이 일루 오네요. 어이~ 재경이~! 송재경! 여기야~!

네? 송재경? / 출처: 중앙일보

나는 마시던 물을 도로 뱉어냈다.

“푸흡… 뭐라고요? 그 후배가 그 바람의 나라를 만든 바로 그 송재경 씨라고요?”

“아니… 저 친구 이름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김정주 대표는 알아도 재경이는 알기 힘든데…“

“그… 그러면 잠깐만요. 혹시 그럼 송재경 씨를 데려갈까 고민하는 당신이 바로?”

“아이고 다짜고짜 제 고민부터 이야기하느라 정식으로 소개도 못 했네요. 저는 엔씨소프트라는 자그마한 B2B 회사의 김택진이라고 합니다.”

네? 김택진? / 출처: 엔씨소프트

맙소사. 지금 내 앞에서 방금 온 후배에게 헤드록 거는 사람이 바로 엔씨소프트 김택진 대표라니, 그리고 그에게 헤드록 걸린 사람이 XL게임즈의 송재경 대표라니… 분명히 아까 사정을 들었을 때는 말리는 게 당연한 상황인데, 등장인물을 알고 나니 이것 참 황당하기 그지없다.

만약 김택진 대표가 내 조언대로 한다면, 아마 한 달 뒤에 송재경 대표는 엔씨소프트에 합류하지 않을 거고 내년에 ‘리니지’라는 게임은 출시되지 않겠지. 도대체 이 무슨 코미디란 말인가. 일단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날아간 멘탈을 좀 추스를 필요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가까이 다가와,

저 빠른 67년생, 32살이니 말씀 편하게 하세요… 형님이시죠?

어쩌고 하는 김택진 대표를 제대로 쳐다볼 면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복잡한 심경

다들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와중에 몇 명만 앉아있는 상대적으로 조용한 테이블이 보여서 일단 그곳으로 피신했다. 리니지 사건(?)의 후폭풍이 만만치 않다. 멘탈을 다잡고 보니, 반대편에 혼자 차분하게 앉아 있는 청년이 눈에 들어왔다. 일단 통성명부터 해야겠다.

“안녕하세요. 실례지만 소개 좀 부탁드립니다.”

“아 네… 저는 아직 정식으로 창업을 한 사람은 아닙니다. 대기업 사내 벤처팀에서 서비스를 준비 중인 사람입니다.”

절대 방심할 수 없다. 아까 김택진 대표와 송재경 대표에게 했던 실수를 반복할 수 없다. 재차 캐물었다.

더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세요. 현재 소속, 준비하시는 서비스, 그리고 당신의 이름까지 빠짐없이 소상히 말씀해주세요.

조금 무례한 요구에도 그는 눈만 살짝 크게 떴을 뿐이다. 그러고는 이내 아까와 똑같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저는 삼성 SDS 사내벤처 웹글라이드 팀 소속입니다. 온라인 검색기술을 개발 중이고요, 이름은 이해진입니다.

…천만다행이다. 물어보길 정말 잘했다. / 출처: 시사저널

지금은 그저 삼성 SDS 직원에 불과한 이 남자는, 훗날 네이버와 LINE의 이해진 의장이 된다.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그에게 말을 더 붙여본다.

“이해진 팀장(!)님, 반갑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고 계시는 사내 벤처 분위기는 어떤가요? 출시 준비는 잘 되시나요?”

“사실은 안 그래도 고민이 많습니다. 계속 제품 개발에 매진 중인데, 최근에 회사 상황이 어려워지자 내부에서 압박과 견제가 늘어나서 큰 고민입니다.”

그가 말한 내용에서, 그리고 내가 하는 맞장구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사내 벤처의 장점이 낮은 리스크라면 지금 겪는 일은 그 반대급부겠지요. 그래도 한동안 개발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었을 테니까요. 내부의 압박과 견제는 어쩔 수 없는 거니 지금은 그저 제품 출시까지 최대한 버티시는 게 최선 아닐까요?”

“맞는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IMF 때문에 상황이 갑자기 안 좋아져 더 힘들어졌습니다. 경쟁상황도 너무 치열해서 앞으로 어떻게 하면 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한국에 코시크과 심마니 같은 업체들이 잘하고, 최근에 검색에 뛰어든 다음은 올해 5월에 무료 이메일을 오픈에서 유저들을 긁어모읍니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해외 업체도 있습니다. 작년에 미국 나스닥에 상장한 야후라는 세계 최대의 검색 서비스가 있습니다. 조만간에 일본 소프트뱅크와 합작해서 한국에 진출한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그리고 지난달에 최초로 흑자를 넘긴 괴물 신인 라이코스라는 곳도 있는데, 아시아 시장도 관심이 있다고 진출 계획을 차근차근 준비 중이랍니다. 이런 와중에 저희 팀이 서비스를 다 개발하고 출시하려면 아직 좀 남은 상황인데, 그때까지 팀과 제가 버틸 수 있을까요? 시장에 기회라는 게 남아있을까요? 그때 저희가 파고들어 갈 틈바구니가 있을까요?“

그는 물을 한잔 마시고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리고 저희가 하는 일이 아무래도 규모가 작은 사업이다 보니 삼성 SDS에서 직접 사업화를 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십중팔구 제가 직접 회사를 차려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 자신에 대해서 걱정이 앞섭니다. 제 주변에 성공한 친구들과 저를 비교하면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을 느낍니다. 저의 절친인 다음의 이재웅 대표나, 대학원 시절 룸메였던 넥슨의 김정주 대표 같은 친구들이 사업하는 걸 옆에서 지켜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열정적이고 적극적인 사람들이거든요. 하지만 저는 아닙니다. 전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입니다. 이런 제가 앞으로 사업을 잘할 수 있을지도 걱정입니다. 요즘은 미래에 대한 걱정과 저 자신에 대한 고민이 겹쳐 매일 밤잠을 설칩니다.

한창 Web 2.0이 유행하던 2008년이 떠올랐다. 나는 제대한 지 얼마 안 된 복학생이었고, 소프트뱅크 리트머스 프로그램에 선정된 한 대학생 스타트업에 막 합류했을 때였다. 그 당시의 나는 스타트업이 먹을 만한 것들을 절대로 흘리지 않고, 모든 분야에서 꼼꼼하게 트래픽을 싹쓸이하는 네이버가 너무 얄미웠다. 주변 스타트업 동료는 모였다 하면 네이버를 욕하는 게 일상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밉기도 했지만 사실 너무 무서웠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내게 이해진 대표는 항상 피도 눈물도 없는 악당 같은 이미지였다.

그가 앞으로 몇 년 동안 잘 안 풀려서 계속 고생하지만 결국에는 검색 전쟁의 최종승자가 될 것이며, 또 몇 년 뒤에는 일본에서 LINE이 대박을 터트릴 거라는 사실을 잘 안다. 그가 내리는 결정과 행보에 사람들은 욕도 하고, 부러워도 할 거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잘 안다. 그가 무려 ‘대기업 총수’라는 타이틀을 달게 된다는 것도 안다. 그러기에 살면서 내가 이해진 대표를 안쓰럽게 생각할 거라는 상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적어도 지금까지는.

하지만 지금 내 앞에서 고개를 떨구고 번민하는 이 서른한 살의 젊은 대기업 직원은, 그저 불확실한 미래에 흔들리고 자신의 부족함을 탓할 뿐이다. 그야말로 내가 자주 만나고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안타까운 한 명의 예비 창업자의 모습 그대로다. 그래서 진정으로 안쓰러운 마음에, 다음과 같이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해진 팀장님, 아무리 힘들더라도 중간에 포기하지 마세요. 끝까지 버티고 최선을 다하면 무조건 잘 되실 겁니다.

지금의 기분을 맨정신에 설명하기란 참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아무래도 술을 좀 더 마셔야겠다.

 

희미한 기억들

본격적인 술자리가 시작되었고, 1997년 11월의 밤에 푹 빠져들었다. 이 테이블, 저 테이블 다니면서 파티를 즐겼다. 다양한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30대 초중반의 대표들이다 보니 주량, 에너지, 자신감 그리고 입담까지 장난이 아니었다. 신나게 같이 어울려서 놀다 보니 술에 거나하게 취하게 되었다.

뭔가 이방인 느낌이 나는 친구도 만났다. 와튼 MBA였던가? 해튼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지 얼마 안 된 케빈(Kevin)이라는 미국물 덜 빠진 동생인데, 이 친구도 한국에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처지라 왠지 동질감이 느껴져서 의기투합해서 신나게 마셨다. 여기 있는 벤처 회사 대표들 대부분이 정말 재미있고 입담도 좋은데 왜 방송국에서 안 데리고 가는지 모르겠다고, 한 명씩 개인 방송국을 차려주고 싶다는 실없는 이야기를 한참 동안 한 것 같다.

우습게도 중간에 투자자 한 명이 따로 한번 보자고 하면서 명함을 주고 갔다. 하버드 출신에 찰스(Chales)라는 아주 젊은 투자자였는데, 회사 이름이 리타워 뭐시기였던 것 같은데… 흠, 잘 기억이 안 난다.

돌풍을 불러올 남자 / 출처: 한겨레

이런 어려운 자리에 학생 자격으로 참여한 기특한 대학생 친구들도 있었다. 게임 쪽으로 창업하고 싶다는 22살의 서울대 응용화학과 95학번 친구와 25살 서강대 전자공학과 92학번 친구였는데, 눈빛도 초롱초롱하고 아주 똘똘한 친구들이었다. 옛날 생각도 나고 기특하기도 해서 지갑에서 용돈도 꺼내서 줬다.

너희들이 커서 사업하게 될 때쯤에는 말이야 중국이 시장을 개방해서 큰 기회가 올 거야. 혹시 알아? 너희 같은 애들이 열심히 하면 거대한 중국 시장에서 한국 게임이 1, 2위 할 수도 있을지? 꿈을 크게 가지렴!

서울대 응용화학과 95학번? / 출처: 조선비즈
서강대 전자공학과 92학번? / 출처: 중앙일보

그리고 마지막에 꽤 특이한 사람도 만났는데, 재작년에 창업한 의사 출신의 사업가라더라. 뭐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 만드는 분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한국판 카스퍼스키 같은 건가 봉가. 나이가 나랑 동갑인 36살이라고 해서 친구 먹고 러브샷도 했다. 취해서 이름이 잘 생각이 안 난다. 주위 사람들이 별난 의사라고 부르던데…

술에 취했을 수도 있고 취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후… 아무래도 술에 많이 취한 것 같다. 파티의 뒷부분은 기억이 희미하다. 이제 슬슬 돌아가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밖으로 나가려는데 누가 붙잡는다. 뒤돌아보니 제일 처음 이야기를 나누었던 엔씨소프트의 김택진 대표였다.

아 선배님 벌써 가시게요? 그럼 이거 주차 쿠폰 받아 가세요. 쿠폰이 어디 있더라…

품을 뒤지는 그를 만류하며,

아, 저 차 안 가지고 왔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제가 깜빡했는데, 생각해보니 그 후배분 게임 있잖아요. 그거 꼭 인수하세요! 할 수 있습니다. 힘내세요. 응원합니다! 승리의 NC! 질주의 다이노스! 워워워워워워~~

1997년의 그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응원을 외치며, 황당해하는 그를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다.

 

최종 보스

건물 밖에 나와 벤치에 궁둥이를 붙였다. 시원하다기보다는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지만, 오히려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아서 반가웠다.

아까 행사장에서 뵈었던 선배님인 것 같은데, 술 많이 드셨나 보네요.

옆 벤치에 앉아 있던 서글서글한 인상의 젊은이가 말을 건다.

네, 안녕하세요. 술 좀 깨고 이제 돌아가야지요.

마지막에 ‘미래로’라는 말을 겨우 삼켰다.

아까 다른 분들이랑 계속 같이 계셔서 좀 아쉬웠습니다.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아무리 봐도 그가 오늘의 마지막 상담인가 보다. 그는 과연 뭐가 고민일까? 그리고 그는 누구일까? 내가 아는 사람일까?

“아휴 그럼요. 혹시 어떤 일 하시는 분이신가요?”

“네, 저는 대기업 6년 차 직장인입니다. 요새 미래도 안 보이고 재미도 없습니다. 주변에서 다들 창업하는데 까짓거 저도 창업하려고요. 내년에는 무조건 창업하기로 했습니다.”

하아… 2019년이나 1997년이나, 겉멋만 잔뜩 들어 창업을 우습게 보는 사람들은 여전하다. 그래도 무슨 생각이 있는지 궁금해서 물어본다.

“그러면 혹시 어떤 아이템으로 창업하실 생각입니까?”

“아… 아직 뭐 확실한 건 없고요. 일단 내년에 목 좋은 대학교 하나 골라서 PC방 차리고 그다음에 돈 벌면서 천천히 생각해보려고요.”

살짝 부아가 치민다.

“아니, 창업을 불행한 직장생활의 도피처쯤으로 생각하는 건 너무나도 안일한 생각입니다. 창업이 장난인 줄 아십니까? 일단 PC방 하면서 천천히 생각할 일이 아니라 제대로 준비하셔야죠.”

그런데 그의 반응이 희한하다. 오히려 씩 웃으면서 너스레를 떠는 게 아닌가?

어이쿠 뭘 그렇게 흥분하십니까. 헤헤 저도 다 생각이 있습니다. 이건 정말 제가 아무한테도 말 안 한 건데, 선배님한테만 말씀드리는 겁니다. 어디 가서 말씀하시면 안 돼요. 저는 넥슨의 바람의 나라나, 최근에 런칭한 울티마 온라인 같은 게임 말고 좀 다른 형태의 게임에 관심이 많습니다. 훨씬 더 많은 대중이 즐길 수 있는 가볍고 친숙한 게임 말이죠. 예를 들어 고스톱이나, 포커, 당구 같은 쉽고 부담 없는 게임요. 이런 가벼운 게임을 온라인에서 할 수 있게 만들면 전 국민이 짬이 날 때마다 가볍게 즐기지 않을까요? 막 친구끼리 공강 시간에 ‘한게임 할까?’ 하면서 당구 하러 가는 것처럼 말이죠.

싸늘하다. 몇 가지 요소들이 조합되어 비수가 되어 날라와 꽂힌다. 겉으로는 허술해 보이는 이 사람의 인상과 목소리가 생각보다 낯이 익다고 생각하는 찰나,

흠, 한게임? 뭔가 느낌이 오는 이름 아닌가요? 하하하!

라고 그가 웃었다. 순간 나의 의심은 곧바로 경악이 되었다. 이 유쾌한 젊은이가 내년에 회사를 때려치우고 한양대 앞 PC방 사장님이 될 것이고, 또 이어서 한게임을 창업할 것이며 그리고 더 나중에는 콧수염을 기르고 카카오톡이라는 앱을 출시하게 되리라는 것을 순식간에 깨달았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오늘 뭐 하나 맞추는 게 없구나. 하하하. 32살의 삼성 SDS 6년 차 직원 김범수 씨(!)를 따라 웃었다. 정말 멋진 마무리 펀치구나.

그저 웃지요… / 출처: 서울경제

 

차갑고 소심한 영혼

IMF가 휩쓸고 간 서울의 밤은 분위기와 날씨 모두 쌀쌀했지만 하나도 춥지 않았다. 서울 밤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분명 미드나잇 인 파리의 주인공과 유사한 경험을 하긴 했는데, 바로 전에까지 한국 스타트업계의 헤밍웨이, 피카소, 달리 같은 사람들을 만나고 왔는데, 예상했던 것과 너무 다른 경험이었다.

선배 창업가들의 조언을 받아 뭔가 더 발전하고 싶었는데 내가 오히려 오지랖 넘게 조언도 하고 주제넘게 위로도 하고 쿠사리도 먹다니. 하지만 또 즐겁다. 왜일까? 2019년의 그들을 보면 절대 상상할 수 없었던, 1997년의 그들의 고민과 고통을 이해하는 것이 왜 나에게 위로가 되는 것일까?

2019년 시점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과거를 돌아보면, 그들의 이야기는 마치 성공으로 그어진 한 줄의 선명한 선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 선이 그어지던 순간으로 돌아가 보면 완전 이야기가 다를 것이다. 꺾여 있는 마디 하나하나가 전부 의사결정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내부의 두려움과 불안과 싸우고 외부의 회의와 냉소를 버티며 겨우겨우 선을 그었을 것이다.

스타트업에 비법 따위는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또 깨닫는다. 고뇌한 만큼, 공부하는 만큼, 고생하는 만큼 된다. 모든 노력하는 스타트업이 성공하는 건 아니지만, 성공한 스타트업 중에서 노력하지 않은 스타트업이 없는 것처럼.

관중석에 앉아 비판이나 하고 훈수나 두는 사람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강인한 사람이 어떻게 실수하는지, 어떻게 하는 편이 더 좋았을지에 대해 지적질이나 하는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사람은 경기장에 서 있는, 먼지와 피땀으로 범벅된 얼굴로 용맹하게 싸우는 사람입니다. 거듭해서 실수도 하고 곤경에도 처하지만 계속 행동하려 나서는 사람입니다. 위대한 열정과 헌신을 의미를 알고 가치 있는 일에 자신을 던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공하면 거대한 성취를 얻고, 비록 실패하더라도 끝까지 대담하게 맞서다가 실패할 사람, 그러므로 승리도 패배도 모르는 차갑고 소심한 영혼들과는 결코 한자리에 놓이지 않을 사람입니다.

예전에 갈무리해둔 글인데, 다시 한번 꺼내서 읽어본다. 남의 일에 제대로 공부하지도 않고, 전체 사정을 알지도 못하면서, 적당히 냉정한 소리를 내뱉는 것은 얼마나 안일하고 무례한 태도인가. 그리고 왜 이렇게 평소에 혐오하던 자들처럼, 차갑고 소심한 영혼에 가까운 사람이 되어버린 것일까?

 

벨에포크?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1997년의 서울 밤거리를 걷는데, 눈앞에 뜬금없이 마차(!)가 와서 선다. 그렇다! 까먹었다. 지금 우디 앨런 유니버스(…) 속 아닌가? 한 번의 시간 여행 기회가 더 있다. 과연 대한민국 창업의 벨에포크 시대는 몇 년도일까? 그곳에는 누가 있을까? 기대에 부풀어 마차에 탄다. 고등학생처럼 보이는 친구 한 명이 타서 그에게 넌지시 물어봤다.

“혹시 올해가 몇 년인가요. 그리고 이 마차의 목적지는 어딘가요?”

“아이고 술 냄새야. 어르신, 약주를 거하게 하셨군요. 올해는 당연히 서기 1956년입니다. 그리고 이 마차는 한국 기업가 모임으로 가는 마차입니다.”

1956년이라… 배경은 전쟁이 끝나고 3년이 지난, 아직 폐허 속의 한국. 과연 이 시대에서 누구를 만날 수 있을까?

“저기… 학생. 거기 가면 누구랑 이야기하는 게 좋을까요? 지금 유명한 사업가는 누구인가요?”

“최근에는 이병철 사장이라는 분이 유명합니다.”

“오! 그런가요?”

“네. 그분은 원래 부산에서 고철 장사하시던 분인데 전후에 상경하신 다음 최근 식품업과 섬유업을 창업했는데 이게 아주 난리가 났습니다. “

흠. 1956년의 이병철 회장은 삼성물산을 경영하면서 식품 스타트업(제일제당)과 패션 스타트업(제일모직)을 창업한 상황이구나, 지금으로 치면 마켓 컬리랑 스타일쉐어를 동시에 경영하는 창업가 정도로 봐야 하나?

“혹시 또 누가 있을까요?”

“그 외에도 아주 특이한 분이 있습니다. 건설회사 하시는 40대 초반의 젊고 추진력 넘치는 호걸인데요, 성함은 정주영 대표입니다. 꼭 한번 이야기 나누어 보세요. 그리고 재작년부터 없어서 못 파는 거로 유명한 럭키 치약 아시죠? 이승만 박사님도 사용하신다는 그 제품을 만든 락희화학 공업사의 구인회 사장님도 계십니다. 아주 인품이 훌륭한 분이시죠. 게다가 제가 이야기 듣기로 오늘 많은 분이 존경하는 유한양행의 유일한 박사님도 참석하실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크으…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사람들이다. 전쟁 직후 폐허나 다름없던 한국 땅에서 사업을 막 시작한 그들을 만나서 이야기해보고 싶다! 가슴이 마구 뛰었다. 엄청난 자극과 배움이 될 것 같다. 한편 이 모든 것을 아는 이 똘똘한 젊은이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그런데 혹시 우리 약관의 젊은 친구분은 딱 봐도 학생인데, 고등학생? 대학생? 어떻게 이런 내용을 다 아시나요?”

“네 어르신, 저는 연희대학교의 경제학과 신입생입니다. 저도 사업가가 꿈이라 미리 이런 분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많이 배우고 싶어서 열심히 공부합니다.”

커… 역시 젊은 친구의 순수한 열정과 당찬 포부는 시대를 막론하고 가슴을 뜨겁게 하는 것 같다. 그가 정말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가 다음 말을 하기 전까지는…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습니다. 저는 세계에 진출하는 국제적인 사업가가 될 겁니다.

마차는 충격에 휩싸인 36살의 시간 여행자와 20세 김우중 군(!)을 태운 채 시간을 달린다.

젊은이 아직 미래로는 못 돌아가네

원문: limyoungj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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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다, 택시, 카카오 그리고 소비자의 사정 https://ppss.kr/archives/206239 Mon, 04 Nov 2019 01:34:57 +0000 http://3.36.87.144/?p=206239 데자뷔

2018년 2월 14일, 카카오 모빌리티는 252억에 스타트업 ‘럭시’를 인수한다. 택시 수요는 급증하는데 공급이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출퇴근 시간대에 카풀 서비스를 운영하겠다는 판단이었다. 카카오에서는 평일 오전 8–9시 사이에 카카오 택시 호출이 23만 건인 데 비해 배차 가능 택시는 2만 6,000대밖에 되지 않는다는 데이터를 공개하며 사업의 필요성과 시장 타당성을 설명했다. 또한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 제 81조의 1항에 있는 ‘출퇴근 때 승용자동차를 함께 타는 경우’에 유상으로 운행이 가능하다는 예외조항이 있음으로, 법적으로도 문제가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대부분 한국 대기업이 좀 될 성싶은 스타트업 서비스를 고대로 모방해서 출시하는 양아치 짓만 하는 와중에(예시가 너무 많아서 들기도 힘들다…), 작은 신생 스타트업의 지분을 100% 인수하고 해당 분야를 어렵게 개척한 스타트업의 뛰어난 인적 자원과 대기업의 인프라를 결합하는 형태로 더 좋은 서비스를 내겠다는 카카오 모빌리티의 결정은 그야말로 바람직한 업계 선배의 멋진 모습 그 자체였다. 척박한 한국 IT업계에서 이런 인수 건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 당연지사.

시간이 흘러 카카오 모빌리티의 카풀 서비스 런칭에 관한 전망과 기사들이 슬슬 나오고 시범 서비스가 가동되기 시작하자 택시 업계의 반대가 시작되었다. 택시 업계는 그해 10월부터 본격적으로 국회 앞, 광화문 광장 그리고 판교 카카오 본사 앞에서 ‘카풀 원천 반대’ 입장을 고수하며 계속해서 시위를 벌여왔다.

언론에서도 각계각층의 패널이 나와서 해당 안건에 의견을 교환했다. 쟁점은 다양했다. 물론 혁신 산업 육성 대(對) 기존 산업 보호의 구도가 대다수였지만, 일부에서는 고질적인 택시 기사 처우 문제 해결이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일부에서는 국토부, 기획재정부, 지자체, 국회 중에 그 누구 하나 제대로 나서는 곳 없이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한심한 모습을 성토하기도 했다.

그런데 12월 10일, 안타까운 사건이 벌어졌다. 택시 기사 (고) 최우기 씨가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본인의 택시 안에서 분신자살을 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언론은 일제히 달려들어서 그의 죽음을 이슈화하고 카카오 모빌리티를 범인으로 몰아간다. 각계의 정치인은 이게 이슈화되니까 뭐라도 해야 하나보다 하고 잘 모르면서 여기저기 끼어들어서 복장 터지는 이야기나 하고, 택시 업계는 본격적으로 분향소를 차리고 앞으로 더 큰 시위를 하겠다고 예고하기 시작했다. (고) 최우기 씨의 죽음 이후 3일이 지난 뒤, 2018년 12월 13일 카카오 모빌리티는 약 10개월에 걸쳐 준비했던 카풀 서비스 런칭을 무기한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10개월이 지났지만, 택시 업계는 여전히 국회 앞과 광화문 광장에서 시위를 벌인다. 그동안 3명의 택시 기사분들이 분신자살을 시도했고 아까운 목숨이 또 사라졌다. 작년 말에 그 안타까운 죽음을 각자의 입맛에 맞게 이용했던 언론, 택시 업계, 정치권과 행정부는 10개월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최저임금에 못 미치는 택시 기사의 살인적인 노동 강도와 사납금 제도를 조금이라도 개선한 택시 회사가 단 한 군데라도 있다면 알려줬으면 좋겠다.

면허 사업을 감독해 소비자의 불편을 해소하고 새로운 기술과 시대에 맞춰 법을 정비하고 정책을 개선해야 할 책임이 있는 정치권과 행정부는 특정 이익 집단의 눈치만 보다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뭐, 내년 4월 총선까지 표 떨어지는 일 안 하고 싶겠지. 난 국회, 지자체, 기획재정부 관계자들이 검찰한테 고마워할 거란 데 500원 걸어본다. 검찰이 초스피드로 스타트업 대표 2명 기소한 덕에 이 모든 판단이 사법부 책임으로 넘어갔으니까, 그 덕분에 정부 부처와 지자체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안 해도 되니까.

출처: 연합뉴스

IT/스타트업 경력 10년 차의 백수프리랜서 분석가의 생각으로는 기존의 업계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도전하는 스타트업이 있다면, 이를 격려하고 제도를 정비해서 지원하는 것이 상식인데, 이 문제는 얼마나 복잡하길래 대표 두 명 기소 엔딩이라니… 각자의 사정이 궁금해졌다.

 

카카오 모빌리티의 사정

2016년 9월 22일, 나는 코엑스에서 카카오 모빌리티 정주환 대표의 발표를 보게 될 기회가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캐시슬라이드에서 제휴와 신규사업을 담당했다. 캐시슬라이드 포인트로 교통카드 충전이나 대중교통비를 할인하는 제휴에 많은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생긴 지 2년도 안 된 스타트업의 제안서는 대부분 읽씹되기 일수였다. 그러던 와중 ‘서울 스마트 모빌리티 국제 콘퍼런스’가 9월에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쾌재를 불렀다. 한 번에 서울시 도시교통실 공무원들이나 티머니 관계자들과 안면을 트고 명함을 받을 기회였으니 말이다. 이것이 모빌리티 산업에 단 한 번도 종사한 적이 없는 내가 그의 발표를 보게 된 이유…

그 당시에 그는 카카오 O2O 사업 부분 총괄 부사장이라는, 꽤 길고 거창한 타이틀을 달았다. 2016년 9월의 카카오 택시는 큰 성공을 거둬 압도적인 시장 점유율을 가진 시장 지배적 라이드헤일링 서비스(Ride-Hailing Service, 이동 수단 호출 서비스)였고, 그는 카카오 택시 출시와 성공의 1등 공신으로 업계에 소문이 나 있는 상황이었다. 그의 발표는 매우 좋았다. 정주환 대표는 카카오 택시를 서비스하기 위해서 겪었던 고생과 에피소드를 맛깔나게 소개했고, 또 그 과정에서 얻은 생각과 고민을 담백하고 솔직하게 공유해주었다.

전국에 있는 거의 모든 택시 회사를 직접 방문했는데, 대부분의 택시 회사가 영세한 데다가 운영하시는 분들이 IT를 아예 모르기 때문에 설득이 매우 어려웠다고 했다. 특히 대부분의 택시 회사 사무실에 들어가면 일단 컴퓨터가 없고, 벽에는 왠지 모르게 항상 태극기(!)와 지도가 걸려있으며, 갈색 소파 4개로 둘러싸인 테이블 위에는 항상 재떨이가 있다는 묘사에서는 청중이 다 같이 빵 터지기도 했었다.

또 기억 나는 내용은 많은 수의 택시 기사분이 연세가 있어서 카카오 직원들이 직접 사무실이나 충전소에 나가서, 기사용 앱을 일일이 한 분 한 분의 스마트폰에 깔아드리고 사용법을 알려드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주환 대표의 춘부장께서도 은퇴하고 택시 기사 일을 하셨기 때문에, 택시 기사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한다고 했던 것도 기억난다.

또한 손님들이 택시 기사들을 무서워하는 것만큼, 택시 기사들도 손님을 무서워하고 특히 그중에서도 야간+젊은 취객 조합이 가장 큰 두려움의 대상이라는 이야기도 기억난다. 열악한 택시 업계와 낙후된 시스템을 카카오의 기술력과 인프라를 통해 개선하고 싶다고 앞으로 포부를 밝히며 발표를 마친 정주환 대표의 얼굴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택시 산업의 현실과 택시 업계의 입장을 이해하고 해결하려는 그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카카오모빌리티의 정주환 대표. / 출처: 정주환

그래서 작년 연말 모임에서 카카오 다니는 지인이 “John(정주환 대표)이 작년에 맘고생을 엄청나게 했고, 택시 업계가 오해하는 부분에 상처도 많이 받았다”는 말을 했을 때, 그의 심정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택시 업계가 조금의 양보나 타협도 하지 않고 덮어놓고 본인 욕을 하는 상황에서, 진심으로 택시 업계의 입장을 이해하고 그들의 편이 되려고 했던 그의 억울함을 100%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말이다. 10개월을 준비한 서비스를 한순간에 허무하게 접어야 했을 때는 또 얼마나 분하고 안타까웠을까? 함께 준비한 직원들과 인수한 스타트업 식구들에게는 얼마나 미안했을까? 개인적으로 전혀 모르는 분이지만 괜히 안쓰럽고 마음이 쓰였다.

카카오 모빌리티는 작년 사건 이후 노선을 완전히 바꿨다. 막강한 자본력으로 택시 회사와 택시 면허를 아예 사들인다. 벌써 업체 세 군데를 인수한 거로 안다. 밖에서 택시 업계를 바꾸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택시 업계 한가운데로 들어가서 직접 택시 회사를 운영하면서 느리지만 확실하게 업계를 바꾸려고 하는 것 같다. 뭔가 “진짜 내가 더럽고 치사하고 억울해서 직접 한다.”라는 정주환 대표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진심으로 그의 성공을 응원한다.

 

택시의 사정

택시 업계는 요지부동이다. ‘타다 OUT’에서 단 한 걸음도 양보하지 않을 기세다. 작년에 그 카카오도 이겼는데 그깟 쏘카, 타다 따위 어차피 또 이길 게 분명하다고 확신한다. 택시 업계가 전통적으로 보수 정당의 주요한 지지층이고 후원자이니 보수 정치권에서도 꽤 나서서 택시를 지지하고 든다. 언론이야 뭐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냥 아무~~~~~런 생각X취재X고민 없이 ‘택시가 피해자고 타다는 불법이다!’라는 입장을 받아 적기만 한다.

일부 보수적인 정치관을 가지신 택시 기사분들은 기사와 유튜브 댓글에 쏘카 이재웅 대표의 문재인 빽(?) 설을 강력하게 설파한다. 박원순 시장 욕, 더불어민주당 욕도 심심찮게 보인다. 택시 업계가 살기 위해서는 정권 교체를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VCNC 박재욱 대표가 조국 교수 딸의 남자친구라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 택시 기사 아저씨도 만났다.

전통적인 전술학의 관점에서 적대 세력에 대한 유언비어 살포가 내부 결속과 전투력 유지에 효과가 있다는 것은 인정하는 바이나, 이쯤 되면 솔직히 정도가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이 택시 업계를 이렇게 분노하게 했을까? 택시 업계의 입장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이놈의 타다 때문에 장사가 점점 안되고 택시 기사들의 생존권이 위협받는다. 타다 무조건 금지!

그럼 당연히 궁금해진다. 진짜로 타다 때문에 장사가 안 되는가? 정말로 택시 영업수익 잠식이 있는가? 생존권에 문제가 생겼는가?

서울시 통계자료를 기반으로 작성한 그래프. / 출처: 머니투데이

추이를 보면 타다가 나오고 영업 수입이 크게 준 것 같지 않다. 딱 1년 치 말고 좀 더 긴 자료도 있다.

도시-행정 데이터에 종사하시는 분이 트위터에 올린 그래프. 아마 위의 머니투데이 기사와 같은 서울시 공공데이터(Raw Data)를 기반으로 만든 그래프로 보인다. / 출처: 트위터 @beingsince

그 사이에 풀러스도 나오고 타다도 나왔지만, 현실은 2015년부터 지금까지 택시의 수익은 그냥 큰 변화가 없었다고 보면 된다. 그러므로 “타다 때문에 택시 업계가 많이 힘들어졌다”라는 주장은 잘못된 주장이다. 그것보다는 “앞으로 타다 때문에 내 밥그릇이 뺏길 것 같아서 두렵다”라고 하는 게 좀 더 사실에 가깝다.

다르게 표현하면, 택시 업계의 타다 반대는 지금 당장의 생존권 위협보다는 향후 위협이 될 것으로 보이니까 아예 지금 나서서 싹을 자르겠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 정도 주장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실제로 타다가 정말 잘돼서 한 30,000대 운행하면 이들의 공포가 현실이 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나는 만약 그렇게 되더라도 타다와 택시의 기본 가격 차이와 서비스 차이가 있으니, 택시는 택시대로, 타다는 프리미엄 서비스로 공생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작년 카풀 반대 시위 때부터 지금까지의 택시 업계의 태도와 주장을 보면, 좀 과하고 과격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 그렇게 기를 쓰고 시위를 하고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면서 새로운 서비스를 반대할까? 비록 택시 업계의 주장이 팩트가 아니더라도, 아무리 봐도 그들의 절박함과 공포는 진짜처럼 보인다.

내 생각에 그 이유는 심플하다. 택시는 새로운 서비스 때문에 힘든 게 아니라 ‘원래’ 힘들었다. 이미 한계에 달할 정도로 힘들게 일하는 와중에, 더 힘들어지면 안 될 것 같으니까 새로운 서비스에 대해서 무지막지하게 저항하는 거다.

개인택시는 서울시에 대략 5만 대 정도 있다. 이분들의 평균 수입은 한 달에 약 284만 원 정도라고 한다. 이분들은 경력을 쌓아 자격을 얻고, 직접 개인 자격으로 택시 면허를 구매해서 운행하시는 분들이다. 기본적으로 버는 돈의 100% 자기 수익이고, 일하는 만큼 번다. 대체로 이틀 일하고 하루 쉬는 패턴으로 일하고 일하는 시간대는 본인들이 정한다. 누가 떼가는 돈도 없고, 반대로 일을 하지 않으면 버는 돈도 없다

. 은퇴하고 파트타임 프리랜서처럼 일하는 분들은 쉬엄쉬엄할 수 있지만, 본격적으로 수익을 제대로 땡기려고 들면 꽤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이분들이 타다와 유사 서비스를 반대하는 시위에 나오는 건 수입 감소라는 이유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미미하다. 이분들의 진짜 걱정은 신규 서비스들로 인해, 본인들이 구매한 개인택시 면허 가치가 떨어지는 우울한 미래이다. 즉 퇴직금이 줄어드는 게 가장 큰 걱정이다.

출처: 한겨레

법인 택시는 서울시에 약 2만 3,000대 정도 있다. 이분들의 평균 수입은 한 달에 약 203만 원 정도라고 한다. 버는 돈은 개인택시보다 80만 원 정도 적은 데 노동강도는 훨씬 높다. 출근한 날은 하루에 12시간(!)을 일해야 하며, 한 달에 26일을 만근으로 친다고 한다. 운행을 나간 날에는 낮에는 12~13만 원 밤에는 15–20만 원까지 복귀 시 회사에 무조건 납부해야 한다. 번 돈이 모자라면 자기 돈으로 벌충해야 한다. 이게 말이 많은 사납금 제도다.

법인 택시 기사들은 12시간 동안 돈벌이에 충실한 운행을 해야지 본전치기할 수 있고, 사납금보다 더 벌어서 남기려면 독하게 운전해야만 한다. 이분들의 노동강도와 처우가 얼마나 열악한지는 사고 발생 통계를 보면 알 수 있다. 국토부 통계(2017년)에 따르면 개인택시의 사고 발생 건수는 16만 4,000여 대 중 6,148건(사망 75명)인데, 법인 택시의 사고 발생 건수는 8만 9,000여 대 중 1만 5,690건(사망 139명)이다. 비율로 보면 개인택시는 3.7%, 법인 택시는 17.6%다. 법인 택시 기사들은 착취당하고, 말 그대로 목숨 걸고 일한다.

문제는 여러분이 목/금요일 늦은 밤에 서울 시내에서 택시를 탈 때 만나는 대부분의 택시가 법인 택시라는 점이다. 서울에 개인택시가 50,000대면 법인 택시 23,000대의 2배가 넘는데 그게 무슨 말이냐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개인택시의 운행 시간이 자율에 기반한다는 점이다. 개인택시 기사분들은 프리랜서라 아주 늦은 시간까지 운전하시는 분들이 많이 없다.

개인택시 기사분들은 대부분 사람처럼 아침에 나와서 저녁에 퇴근하신다. 막 새벽까지 빡세게 일하면서 수입을 땡기는 개인택시 기사분들도 계시지만 그 숫자는 상대적으로 적다. 하지만 법인 택시의 경우 심야 시간에도 80% 이상이 가동된다. 그들은 의무적으로 그 시간에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12시간 동안 최대한 돈을 벌어야 하므로 소위 ‘돈 안 되는 손님’을 피하게 된다.

만약 당신이 아침 8시에 출근해서 자리에 앉는 순간, 저녁 8시에 퇴근할 때 무조건 갚아야 하는 12–20만 원의 빚이 생긴다고 생각해보자. 그런 날이 한 달에 26일 동안 매일 매일 반복되고 힘들고 미칠 지경이다. 겨우 버티면서 일하는데, 주변 동료들이 새로운 서비스가 등장해서 앞으로 돈 벌기 더 어려워진다고 공포감을 조성하면 어떤 생각이 들까? 회사 조합 임원과 상사는 집회 나오라고 독촉하고, 그 와중에 사납금은 계속 내야 하고, 동료들의 단톡방에는 불법 업자들 때문에 수익이 감소한다는 글이 올라온다면? 이렇게 상상해보면 이들의 절박함과 공포가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정리하면, 택시 업계가 힘든 건 만성적인 문제이고 구조적인 문제이다. 택시 기사들의 사정은 정말 딱하다. 그런데 현재 시점에서 택시 기사들이 힘든 건 카풀이나 타다 같은 서비스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예전부터 계속해서 힘들었다. 그 이유는 첫째는 열악한 근무 여건과 가혹한 사납금 제도고 둘째는 제도와 정책을 보완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할 사람들이 직무유기하기 때문이다.

출처: 오마이뉴스

누가 봐도 택시 업계가 자신을 변화시킬 가능성은 작다. 의지도 없고, 있다 하더라도 개별 업체는 너무 영세하고 능력도 부족하다. 그런데 상황을 파악하고 제도와 정책을 개선해야 할 책임이 있는 정부 부처와 지자체들은 수십 년째 곪아 터진 문제를 무시하고 방치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높은 확률로 앞으로도 그럴 것처럼 보인다. 생산적인 논의와 머리를 맞대고 함께 고민하는 진지함 대신에, 고발과 기소가 그 자리를 자치했고, 모든 문제가 사법부의 판단으로 넘어갔다. 암울하다.

 

소비자의 사정

대부분의 소비자는 택시 업계의 시위에 대해 냉담한 반응이다. 이것 또한 택시 업계에 대한 오래된 불신과 불만족에 그 뿌리를 둔다. 소비자들은 무엇이 그렇게, 그리고 얼마나 불만족스러울까? 2018년 이용 만족도를 보면, 서울시민들은 버스에는 6.28점, 지하철에는 6.79 그리고 택시에는 5.61점을 준 것을 볼 수 있다.

서울시 열린 데이터 광장에 가면 더 자세한 정보를 볼 수 있다. 택시는 2005년 이후로 지금까지 계속 버스와 지하철보다 불만족스러운 교통수단이었다. 그럼 구체적으로 소비자들은 뭐가 그렇게 불만족스러울까? 서울시의 교통 불편 민원 신고 현황을 보면 승차 거부와 불친절이 항상 1–2위를 엎치락뒤치락하고 그다음이 부당요금 징수임을 알 수 있다.

승차 거부는 왜 일어나는가? 심플하다. 택시들이 ‘돈 되는 손님’을 골라 태우려고 하기 때문이다. 법인 택시 기사들은 효율적으로 운행하지 않으면 손해를 보기 때문에, 테헤란로 이면도로에 불을 끄고 대기하면서 ‘돈 되는 손님’을 기다린다. 그런데 소비자 입장에서 지하철과 버스가 운행을 중지하는 심야 시간대는 택시가 유일한 이동수단이다. 한시적인 시간 동안 택시가 이동수단에서 독점이 된다.

거기에 만약 당신이 내리는 사람은 많은데 타는 사람이 없는 지역에 산다면, 상황은 최악이다. 택시 기사 관점에서 태우면 손해인 손님이므로 계속해서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카카오T, 티맵 콜 등 모든 서비스에 다 올려도 안 잡힌다. 소위 똥 콜(돈 안 되는 콜)이다. 결국 카카오 택시 목적지에 “상계동 10,000원 추가” 혹은 ‘공릉 15,000원 더 드릴게요’라고 적는다. 그래도 겨우 잡힐까 말까 한다. 택시 잡으려면 이사해야 할 판이다. 서울시에서 단속과 적발 시 페널티를 강화하면서 승차 거부는 꾸준히 줄어들긴 하지만, 그래도 이런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페널티를 피하는 방법을 계속 찾으며 승차 거부는 밤마다 계속해서 이루어진다.

소비자 입장에서 택시 기사의 불친절 문제도 심각하다. 택시 서비스의 친절도는 택시 기사 개인의 인성과 당일 컨디션에 따라 완전히 복불복이다. 분명히 내 돈 내고 이용하는 서비스인데 친절도는 숫제 1박 2일 잠자리 게임 취급이다. 도무지 예상이 안 된다. ‘손님은 왕’ 취급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 돈 내는 짐짝 취급이고 ‘손님’ 취급도 안 해준다. 개인택시 기사들은 본인의 택시를 자신의 사적 공간으로 생각하고 손님이 그 분위기에 맞춰 주길 바란다. 그나마 그런 경우는 양반이다. 법인 택시 기사는 스트레스와 피로에 찌들어, 그야말로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과 같다.

출처: 중앙일보

소비자 입장에서 가장 많이 화가 나고 답답한 것은 택시 업계가 서비스 개선에 대해서 매번 말만 하지만 실제로 실행 가능한 계획을 세우고 행동에 옮긴 적이 없다는 것이다. 올해 2월 택시 기본요금이 인상되었지만, 약속했던 서비스 개선은 없었다. 인상된 가격 중에 단 1원이라도 소비자 서비스 개선에 사용되었는지 묻고 싶다. 사람은 한두 번만 속아도 화가 나는데, 수십 년째 속으니 이제는 거의 포기 상태다. 반복되는 상황에서 택시 업계에 대한 소비자의 만성적인 불만과 불신은 최대치에 달해 있었다.

 

타다의 사정

2018년 10월 타다가 출시되고, 한동안 SNS에는 타다를 사용한 사용자들의 일명 ‘타밍아웃’이 유행이었다. 페이스북에서는 타다 서비스 경험을 칭찬하는 간증이 연일 기독교 부흥회 집사님들 방언처럼 터져 나오고, 인스타에서는 타다 웰컴 키트를 맛집 음식 사진처럼 올리는 인증샷이 계속 올라왔다. 소비자들은 열광했다. 해결될 기미가 없었던 오래된 불만 사항인 승차 거부와 불친절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한 서비스가 나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타다가 무슨 혁신이냐고 김포공항에 배 들어오는 소리 하는 사람들이 있다. IT/스타트업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뭐 그럴 수 있다. 그런 사람들 눈에는 화성에 가겠다고 로켓 만들고 가짜 고기 만들고 그런 것만 혁신으로 보이겠지. 그런데 IT/스타트업에 꽤 짬밥을 먹은 분들도 저런 말을 하던데 좀 안쓰럽다. 인공지능이니 빅데이터니 이런 말이 들어간 거창한 것만 혁신이 아니다. 유통, 생산, 고객 서비스, BM, 인사 등 다양한 영역의 혁신과 이를 뒷받침하는 기술력을 통해서 부가가치를 만들고 소비자의 사랑을 받은 수많은 서비스가 널리고 널렸는데…

택시 업계는 개인택시만이 아니라 법인 택시 기사들까지도 ‘개인’이 수익 극대화의 책임을 질 뿐 아니라, 손해 발생 시의 리스크까지 떠안는다. 법인 택시 기사들은 사납금의 존재로 인해 마이너스 수익 가능성까지 있다. 수입과 리스크가 택시 기사 개인의 수익 최적화 능력에 달린 가혹한 보상 체계다. 개개인이 각자도생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놈의 승차 거부가 해결될 리가 있을까?

타다는 운전기사의 보상 체계를 바꾸고 목적지에 무관하게 가까운 차를 자동으로 배차하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그리고 회사가 중앙 시스템을 통해 전체 차량 운행을 통제한다. 개별 운전자는 중앙 시스템에 따라서 운행하기만 하면 된다. 리스크는 회사가 부담하고, 타다 운전기사들은 운행 수익을 최적화할 필요가 없으며, 승차 거부는 사라진다. 왜 법인 택시 회사는 이렇게 못 할까? 택시 회사 사장님들이 만약 택시가 월급제가 되면 수익이 줄어들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택시 기사들이 사납금이 없으면 열심히 노오력 하지 않으리라 생각하시기 때문에… 차 끌고 나가서 종일 놀다 오면 어쩔 거냐고 누가 책임지냐고 할 게 뻔하다.

타다는 그럴 걱정이 없다. 항상 위치가 추적되고 배차는 자동으로 된다. 게다가 차량 운행 데이터가 쌓이면 요일별, 시간대별로 서울의 지역별 수요 예측을 정밀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손님이 없는 공차 상황에서 지금 수요 발생 가능성이 가장 큰 지역으로 차량을 유도하는 기능이 타다에 들어가리라는 것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다음 주 목요일은 기온이 급격히 떨어진다고 하니 심야 시간의 수요가 늘어날 것이 예상되어 200대를 증차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예측을 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출처: KBS

또한 수요와 공급이 불일치할 때 이를 자동으로 계산해 실시간으로 가격을 조정하는 탄력 요금제를 도입해 시장 상황에 대응한다. VCNC는 이 모든 것을 종합해 효율을 최적화했을 때, BEF가 넘어갈 수 있다는 계산을 깔고 이 일을 시작했을 것이다. 그들의 도전은 앞으로가 더 기대된다.

위에서 언급한 라이드 헤일링 서비스, 빅 데이터 분석, 수요 예측 모델, 실시간 가격 변동 시스템 등의 다양한 기술적 혁신은 사실 소비자 입장에서 쉽게 피부에 와닿는 혁신은 아니다. 소비자 입장에서 가장 확실하게 체감되는 건 고객 서비스의 혁신이다. 타다를 한 번 타본 사람은 앞으로 내가 타다를 부르면 어떤 프로토콜로 서비스가 될지 ‘예상’이 가능하다. 일정 수준 이상 퀄리티가 서비스를 꾸준히 받을 수 있고 자신이 지불한 금액에 비해 그 서비스가 만족스러우면, 소비자는 그 서비스를 다시 이용한다. 올해 5월 기사에 따르면 타다의 재탑승률은 89%라고 한다.

새로 뽑은 흰색 카니발과 쾌적한 환경도 타다라는 브랜드 경험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듣고 있나? 카카오 모빌리티 벤티?) 하드웨어만큼 소프트웨어가 중요하다. 타다는 모든 기존 업계 사람들이 운송업으로 취급했던 산업에 서비스업의 방법론을 적용해서 소비자들의 열광을 끌어냈다. 소비자들이 입장에서는 처음으로 나를 돈 내는 짐짝 취급에서 제대로 된 ‘손님’ 대접을 해준다는 점에서 그저 감동일 뿐이다. 날 이렇게 대한 건 네가 처음이야. 구체적으로 타다가 서비스에서 어떤 차별화를 했는지는 MBN의 이무형 기자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로 대체하겠다.

막상 리스트로 만들면 별것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저런 서비스를 출시와 동시에 몇백 대의 차량에 균일한 퀼리티로 제공하는 일은 또 다르다. 출시 전에 고객 니즈를 조사하고 분석해서 가이드라인을 만들었을 것이고, 승하차 시나리오를 작성하고 고객 응대 매뉴얼을 만들어서 채용한 운전기사들을 교육해야 할 것이다. 자, 이까지 읽었는데도 잘 모르겠으면 그냥 다음 문장을 외워라. 김포공항에는 비행기가 들어오고 타다는 혁신 서비스다.

타다는 앞으로 제대로 서비스를 이행하지 않는 운전기사 대상으로 재교육도 하면서 계속해서 서비스 퀄리티를 유지해야 할 것이다. 사실상 지금 타다 편은 소비자밖에 없다. 소비자를 계속 타다의 편으로 유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타다는 앞으로 리뷰 기능을 통해서 고객들의 의견과 피드백을 수렴하고 고객 응대 서비스를 계속 개선해야 할 것이다. 스타트업답게, 린하게 말이다.

 

마지막 당부

나는 정부 관계자들과 택시 업계가 타다의 케이스를 공부해야 한다고 본다. 타다가 1,400대의 차량으로 시도하는 보상 체계와 시스템이 정말로 지속가능한 모델인지 면밀하게 살펴보고 지켜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타다의 방법이 가능하다는 판단이 들면, 그 정보와 노하우를 활용해서 그 50배에 달하는 7만 4,000대의 기존 택시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고민하고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물론 사기업인 VCNC와 쏘카가 이용자들 대상으로 폭리를 취하거나, 고용한 노동자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지는 않는지 감시, 감독하는 역할도 하면서 말이다

나는 국토부, 국토교통 상임위 소속 국회의원들, 서울시가 새로운 서비스에 도전하는 스타트업을 불법으로 취급하고 매장해버리고, 동시에 곪아 터진 택시 업계의 문제와 소비자의 불만도 대충 묻어두는 ‘쉬운’ 방법을 선택하지 않기를 바란다. 현상을 정확하게 직시하고 업계를 끈질기게 설득하고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해결하는 ‘어려운’ 방법을 선택하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원문: limyoungj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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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의 세계에서 느끼는 행복도 물론 좋지만 https://ppss.kr/archives/162266 https://ppss.kr/archives/162266#respond Thu, 14 Mar 2019 07:35:58 +0000 http://3.36.87.144/?p=162266 콘텐츠를 소비하는 시간보다 콘텐츠를 다 즐기고 난 후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긴 경우, 대개 나는 그것을 ‘좋은 콘텐츠’라고 여기는 편이다. 그런 의미에서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내 기준에 엄청나게 좋은 콘텐츠. 어떤 대목에서는 현웃 터트리면서 읽다가도 또 어떤 대목에서는 ‘헐 내 생각을 읽은 건가?’ 싶어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쉬지 않고 단숨에 후루룩 다 읽었다. 문제는 다 읽고 난 다음이었다. 머릿속에 오만 가지 생각이 마구잡이로 치닫고 맴돌았다. 차분하게 앉아 거대한 먼지구름처럼 피어난 생각의 가닥을 잠재우고 나니, 한 가지 거대한 질문이 남았다. 그건 팔딱거리는 활어회같이 통통 튀는 책의 문장과 내용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꽤 철학적인 것이었다.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프로와 아마추어

‘프로’라는 이데올로기는 가혹하다. 그 이데올로기의 핵심은 책 속의 내용을 빌려 보면 아래와 같다.

평범하게 살면 치욕을 겪고, 꽤 노력을 해도 부끄럽긴 마찬가지고, 무진장, 눈코 뜰 새 없이 노력해봐야 할 만큼 한 거고, 지랄에 가까운 노력을 해야 ‘좀 하는데’라는 소리를 듣고 결국 허리가 부러져 못 일어날 만큼의 노력을 해야 ‘잘하는데’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꽤 이상한 일이긴 해도 원래 프로의 세계는 이런 것이라고 하니까

  • 박민규,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127쪽

이 책의 주인공은 아마추어의 세계에 속하고 그 정신을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어쩔 수 없이 자기를 속여가며 프로의 세계에 말려 들어가 고통받으며 표류한다.

나중에 파이트 클럽의 타일러 더든 같은 친구의 도움으로 아마추어리즘의 정수, 이를테면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라는 문장으로 표현되는, ‘삼미의 정신’을 되찾는 유쾌한 여정을 그리는 것이 이 책의 전체 내용이다. 이 책은 경쟁과 성취에 뒤덮인 팍팍한 프로의 세계에 여유와 즐김의 미학을 조명하게 만든다.

그런데 말입니다…

정말로 ‘프로의 세계’는 악일까? 그곳은 고통과 번민만 있는 곳인가? 아마추어리즘으로의 회귀 만이 행복으로 가는 그랜드 라인이란 말인가? 골 D. 로저의 말처럼 원피스는 라프텔에만 있는 건가?

내 경우 따뜻한 물로 샤워한 뒤 팬티만 입고 보송보송한 이불에 들어가 넷플릭스 〈마인드 헌터〉를 볼 때 느끼는 ‘편안함’과 ‘여유’가 주는 즐거움이 있다. 또한,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보내는 시간에서 느끼는 ‘공감’과 ‘함께’가 주는 행복도 실재한다. 이른바 ‘아마추어’의 세계에서 느끼는 행복이다. 물론 이것도 좋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나 외의 다른 사람의 ‘인정’과 ‘평가’, 그것을 동력원으로 삼아 빡시게 일하고 성과를 만들어 낼 때 느끼는 ‘고양감’과 ‘자기효능감’도 있다. 나와 함께 하는 동료들이 내게 거는 ‘기대’, 그리고 그것에 부응하고 싶다는 욕망도 엄연히 존재한다.

게다가 서로의 기대에 각자 부응하며, 동료들과 협업해서 뭔가를 이루어냈을 때 느끼는 그 짜릿함은 어마어마하다. 즉 ‘프로’의 세계가 주는 행복과 쾌락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래. 글로 적고 보니 더 확신이 든다.

 

내면의 포트폴리오

인간은 입체적인 존재며 한 인간이 행복을 느끼는 곳은 프로와 아마추어, 양쪽의 세계에 공히 존재한다. 각 세계에서 느끼는 행복의 종류와 형태가 다를 뿐이다. 중요한 건 그 ‘프로’와 ‘아마추어’ 간의 밸런스가 아닐까? 요새 젊은 친구들(…) 말로 하면 워라밸.

그리고 사람마다 개인의 행복을 최대화할 수 있는 최적의 ‘프로의 행복’과 ‘아마추어의 행복’ 간의 비율이 다를 것이다. 그렇기에 극단적으로 ‘프로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겠지. 내 주변에 비교적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은 대개 가족이나 여가, 그리고 커리어와 성취감이 주는 행복의 균형을 잘 유지하는 것 같더라.

그런데 생각보다 소수라는 게… 게다가 한 명의 사람에게 있어서도, 그 사람의 주변 환경과 시기에 따라 그 속의 프로/아마추어 비율도 바뀐다. 미친 듯이 일만 하던 워커홀릭이 결혼이나 자녀의 탄생으로 인해 그 밸런스가 바뀐다든가 하는 경우 말이다. 그렇기에 뭔가 상황이나 심경의 변화가 생겨서 내면의 프로/아마추어 가중치가 바뀌었는데 현실이 그것을 따라가지 못할 때 번민과 고통이 시작되는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나 자신을 아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소크라테스의 말은 쉽지만 정말 어렵다. 이 급변하는 세상은 내 속의 프로/아마추어가 주는 행복의 포트폴리오를 암호화폐 그래프처럼 수시로 요동치게 만든다. 그래서 자기 내면의 프로/아마추어 밸런스를 찾는 건 갈수록 어려운 일이 된다. 그렇기에 더더욱 지금 나의 행복을 최대화할 수 있는 프로/아마추어 밸런스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충분히 시간을 들여 자신의 내면을 꾸준히, 주기적으로 탐구해야 한다.

무슨 법정 스님이 이더리움 사고 가즈아 외치는 소리 하냐고 할 수 있지만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내면을 향한 탐구는 위내시경이나 대장 내시경으로 실제 속을 들여다보는 주기보다 훨씬 더 빈번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내면의 포트폴리오를 자주 업데이트하지 않으면 시류에 휩쓸려 원하지도 않은 걸 추구할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 특히 요즘같이 다 같이 SNS에서 본인의 행복을 ‘뿜뿜’하는 상황에서는 그 확률은 더욱 올라간다.

승진, 투자, 상장, 인수 합병, 이직 등 프로 세계에 속한 것뿐 아니라 데이트, 여행, 여가, 취미, 몸매 등의 아마추어 세계의 속한 것들까지 수많은 행복의 ‘뿜뿜’이 넘쳐난다. ‘뿜뿜’ 자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라캉 말처럼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거라면 혹은 본인 내면이 아니라 남들의 선망과 시기를 겨냥한 거라면 너무 불안하다.

Illustration by Gosia Herba

자기 발견이나 자기 탐구 없이 ‘나에게 더 좋은 것’이 아니라 ‘남에게 더 좋게 보일 만한 거’를 추구하며 불행해 하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지켜봤다. 가장 ‘핫’한 학습 주제를 수시로 바꿔가며 매번 그 과정을 SNS에 업데이트했지만 결국에는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자기 계발이 아닌 자기 괴발(…)을 달성하는 것도 수차례 보아왔다.

그런 것을 지켜보면서 과거의 나를 반성도 하고 미래의 나에게 경고를 보내기도 했다. 내적 만족을 탐구하고 그것을 토대로 쌓아 올린 게 아닌 것들이 모래 위의 성이자 공갈빵 위의 토핑이 되는 걸 보면서 나는 더욱더 나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을 늘리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래서 나는 의식적으로 계속 내 속을 탐구하려 한다. 내가 행복해지는 방법은 나만 아니까. 그러니까 앞선 질문의 답은,

내 속에 있으니 계속 찾자.

원문: limyoungj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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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일, 창업가의 일 https://ppss.kr/archives/167752 https://ppss.kr/archives/167752#respond Thu, 07 Mar 2019 06:43:10 +0000 http://3.36.87.144/?p=167752 솔직히 이건 반칙이다

세상천지에 소설가보다 자기가 하는 일을 글을 통해 멋들어지게 잘 설명할 수 있는 직업이 있을까. 하물며 그 소설가가 김연수(!)라니. 취미생활+배설 활동으로 글을 적는 아마추어의 입장에선, 감탄을 넘어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가가 쓰는 ‘소설가의 일’이라니…

그러니까 이건 마치 “화가라는 직업을 그림으로 그려봤어”라고 해맑게 웃는 미켈란젤로를 바라보는 미대 입시학원 2년 차 학생이 느끼는 감정이라고나 할까. 혹은 “자, 방금 발레리나라는 직업을 발레 동작으로 표현해봤는데 어떤가요?”라고 말하며 미소 짓는 강수진 씨를 바라보는 노원구청 주부 발레단 수강생의 느낌과도 비슷하다.

경지에 오른 자의 정말 당해낼 노릇이 없는 실력을 마주하고, 그 터무니 없음에 실소가 나온 경험이 있는 사람은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창업가의 일?

책을 읽고 나니, 도무지 다음과 같은 생각이 떠오르는 걸 막을 수가 없다.

스타트업 창업가라는 직업을 어떻게 표현해야 잘 표현했다는 소문이 날까?

작년에 내가 쓴 글에서도 이야기했던, 독일 미술사학자 알로이스 리글이 주창한 쿤스트볼른(KunstWollen)라는 개념을 다시 가지고 오겠다. 독일어로 쿤스트(Kunst)는 예술, 미술이라는 의미고 볼른(Wollen)은 의지, 의도를 표현하는 동사이므로 흔히 ‘예술 의욕’으로 번역한다. 즉 쿤스트볼른은 어떤 예술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예술품을 창작하고자 하는 강한 욕구와 충동을 의미한다.

알로이스 리글, 쿤스트볼른

예술 의욕이 온몸을 휘감아 올 때 소설가는 글로 자기 생각을 표현하고, 화가는 그림으로 자기 생각을 표현하고, 발레리나는 몸과 동작으로 자기 생각을 표현한다. 집단 종합 예술인 창업의 세계에서 당연히 창업가는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어 내는 것으로 자기 생각을 표현해야 한다. 창업가라는 직업은 창업이라는 고통스러운 과정과 그 결과로 나온 서비스를 통해서 가장 정확하게 표현되고 이해할 수 있다.

그 형태가 웹사이트든 앱이든 물건이든 오프라인 매장이든 뭐든지 간에,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던 아이디어를 실체가 있는 무언가로 만들어서 보여주고 들려주고 돈 주고 사고 싶게 만드는(제일 중요하다), 그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창업의 과정만이 스타트업 창업가가 무슨 일을 하는지 보여주는 제일 나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 말하면 제프 베저스가 쓴 “주주에게 보내는 연례 서한”이 아무리 명문이라 하더라도, 아마존을 직접 써보는 것이 창업가로서의 그의 생각과 철학을 훨씬 더 잘 이해할 방법일 것이고, 일론 머스크 전기를 읽는 것보다 페이팔을 써보고 테슬라를 타보는 게 진정 그를 이해하는 최고의 방법이라는 말이다.

 

하기나 해

김연수는 “그것도 모르고 무슨 소설을 쓰나?”라는 말이나, “소설가가 술을 그렇게 못 마셔서야!” 이런 말을 들으면서 소설가가 되는 것을 포기했다고 토로한다. 위 문장의 ‘소설을 쓰나?’ 자리에 ‘개발을 하나?’나 ‘영업을 하나?’을 넣어 보거나, 두 번째 문장의 ‘소설가’ 대신에 ‘기자’나 ‘사업가’를 넣어보자. 우리가 살면서 수없이 마주했던 무례한 표현으로 바뀌지 않는가?

출처: 자유기고가 & 여행작가 배나영

김연수는 편견과 무지의 소산인 저런 프레임에 빠지는 것을 경고한다. 그가 쓴 아래 문장을 보고 머리를 한 대 세게 맞은 기분이 들었다.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왜 소설은 안 쓰고 소설가가 될 생각을 했을까?

과거 첫 번째 창업의 시절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딱 저랬었다. 창업하려고 하지 않고 창업가가 되려고 했다. 서비스를 고민하고 만드는 것보다 스타트업 대표라는 타이틀에 취해 있는 시간이 더 많았었다. 김연수가 자신을 ‘소설가’라는 명사/프레임/스테레오타입에 넣는 것을 거부하고, ‘소설 쓰는 사람’이라는 동사가 강조된 표현을 쓰는 이유를, 그때도 알았더라면.

김연수는 ‘일단 쓴다 → 쓴 글을 읽고 좌절한다 → 곰곰이 생각한다 → 다시 쓴다’를 반복하는 것이 소설을 쓰는 정공법이라고 말한다. 나는 그 글을 보자마자 에릭 리스의 『린 스타트업』이 생각났다. 얼마 전에 팟캐스트 ‘마스터 오브 스케일(Master of Scale)’에서 들었던 마크 저커버그의 “불완벽은 완벽이다(Imperfect is perfect)” 에피소드도 생각났다.

소설을 쓰려면 일단 문장을 써야 하는 것처럼 창업하려면 일단 뭐라도 만들어야 한다. 머릿속에만 머무는 기가 막힌 아이디어보다, 같이 보면서 피드백을 나눌 수 있는 엉성한 제품이 무조건 낫다. 아무리 멋있게 비웃어도 어설프게 뭔가 하는 것보다 한참 형편없는 거고. 그러니까 잡생각은 집어치우고, 하자.

원문: limyoungj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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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드렁 예찬 https://ppss.kr/archives/167790 https://ppss.kr/archives/167790#respond Thu, 21 Feb 2019 00:32:42 +0000 http://3.36.87.144/?p=167790 심드렁. 소리 내어 읽는 것만으로도 맥이 없어지게 만드는 마법의 단어. ‘시큰둥’이라는 심드렁의 친척 같은 표현도 있지만, 아무래도 이런 부류의 표현에서는 심드렁이 최고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 시큰둥 보다는 심드렁이 더 좋다. 시큰둥의 경우 발음하면 ‘둥’에서 살짝 업되는 느낌이 들어 별로다. 심드렁의 경우 발음하면 ‘렁’음절에서 혀끝이 앞니 바로 뒤 입천장을 살짝 눌렀다가 떨어진다. 그때는 혀조차 힘을 잃어 ‘털썩’하고 입안에 주저앉아 버리는 느낌이다. 발음에서조차 심드렁은 시큰둥의 상위 호환이다.

심드렁의 사전적인 의미는 ‘마음에 탐탁하지 아니하여서 관심이 거의 없는 모양’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관심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집중하고 있는 건 당연히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예 관심을 꺼버린 건 아닌 애매한 상태, 다시 말해 주변의 상황이나 상대방을 인지는 하고 있지만 크게 신경 쓰거나 개의치 않는 태도가 바로 심드렁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심드렁과 가장 잘 어울리는 생물은 아무래도 고양이를 높게 쳐줄 수밖에 없다.

뭐, 닝겐

저 자세와 표정의 태를 보라. 이런 사진을 보면 심드렁이라는 단어는 정말 고양이를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인간도 크게 부족하진 않다. 한복 김연아 사진 같은 것을 보면 같은 인간으로서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이 얼마나 심드렁의 정수이자 표본이라 할 수 있는 표정인가. 어지간한 내공의 고양이라 하더라도 쉽사리 이길 재간이 없을 것이다.

역시 퀸유나

내가 환장하면서 좋아하는, 심드렁과 관련된 특수한 상황/설정이 있다. 평소의 심드렁한 태도가 일반 커피라면, 이런 상황은 심드렁의 T.O.P라고 할 수 있다. 그건 바로, 엄청난 내용 + 심드렁한 태도 조합이다. 영화배우 송새벽이 이 분야의 거장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뭔가 극적인 내용을 심드렁한 태도와 표정으로 말할 때 느껴지는 반전 매력이 너무 좋다. 심드렁한 태도와 내용의 무게감 사이의 갭이 클수록, 그 즐거움은 배가 된다. 이를테면 아래 같은 표현을 보자.

나는 요즘 시간을 때우려고 책을 한 권 쓰고 있다네.

목숨 걸고 열심히 책을 쓰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예 안 쓰는 것도 아닌 애매한, 그야말로 심드렁한 태도의 모범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는 문장이다. 그런데 누가 언제 썼는지를 뒤에 붙여서 다시 이 문장을 써보면 아래와 같다.

나는 요즘 시간을 때우려고 책을 한 권 쓰고 있다네.” – 애덤 스미스, 국부론 저술 시점에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中.

자, 어떤가. 누가 어떤 상황에서 사용했는지 그 맥락을 알고 다시 읽어보자. 이 심드렁한 태도가 주는 강력한 즐거움이 느껴지는가? 여기서 매력을 느낀다면, 당신은 심드렁의 매력에 빠질 준비가 되었다. 동지여! 심드렁의 세계에 온 것을 환영한다. 허나 아무 즐거움도 느끼지 못한다면 이 약팔러에게 한 번 더 기회를 달라. 또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보겠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중에 <파인딩 포레스터>라는 영화가 있다. 파인딩 포레스터는 <굿윌헌팅>, <엘리펀트> 등으로 유명한 거스 밴 샌트 감독의 2000년 작품이다. 한 편의 걸작을 남기고 은둔 중인 전설적인 작가 윌리엄 포레스터와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가지고 있는 브롱스의 흑인 소년 자말 월레스 사이의 나이와 인종을 넘어선 우정을 그린 영화이다. <파인딩 포레스터>에는 아래와 같은 장면이 있다.


윌리엄 포레스트로 분한 숀 코너리의 저 표정이 보이는가? 별거 아니라는 투의 무신경한 태도와 목소리 톤, 그리고 ‘퓰리처 상’이라는 파워풀한 내용과의 갭에서 나오는 이 짜릿한 즐거움! 실로 파괴적인 심드렁함이 아닌가? 그러니 만국의 심드렁 동지들이여. 심드렁하게 단결하라. 꿀잼을 얻을 것이다.

원문: 놀고 먹는 총각 임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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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동화] 헬조선 노인과 바다 https://ppss.kr/archives/84924 https://ppss.kr/archives/84924#respond Mon, 04 Jul 2016 01:13:11 +0000 http://3.36.87.144/?p=84924 그는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미혼 단신노동자 노인이었다.

그는 매일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곤 했는데, 드넓은 취직의 바다에서 고기 한 마리 낚지 못하고 허송세월만 한 지 벌써 84일째였다.

노인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자취방을 떠나 취직의 바다로 천천히 노를 저어나갔다.  하반기 공채 시즌인 만큼 오늘만큼은 꼭 고기를 낚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넓은 바다로 나온 노인은 이력서라는 미끼 하나를 자소서 밧줄에 달아 40길 아래로 던졌다.  두 번째 이력서는 75길 아래로, 그리고 세 번째 것과 네 번째 것은 각각 100길과 125길 아래의 깊은 물 속으로 던졌다.

노인은 머리 위에서 새가 빙빙 도는 것을 보았다.

“고기를 찾았구나”

그는 소리 내어 말 했다.  바로 그때였다.  물 위에 나와 있던 초록색 막대기 중 하나가 물속으로 쑥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드디어 먹었군.”

—– 중략 —–

노인은 고기 옆으로 가서 고기 머리를 뱃머리에다 대었다.  푸른 등을 가진 아름다운 월급치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그 크기를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저 정도라면 족히 200파운드는 넘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아니, 훨씬 더 넘을지도 모르지,

내장을 빼내고도 약 삼 분의 이가 남을 텐데, 파운드당 족히 최저 시급 6,030원을 받으면 모두 얼마나 될까?

아마 대략 126만 원은 넘을 것 같았다.

노인은 부푼 마음을 가지고 돛대를 세우고 조각조각 기운 돛을 폈다.  마침내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늘에 떠 있는 적운과 권운으로 보아서 밤새도록 미풍이 불 것이 틀림없었다.

노인은 자신이 월급치를 낚았다는 것이 사실임을 확인하려고 고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름다운 월급치의 자태를 보니 오랜 취준생 생활이 떠올라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첫 번째 상어가 고기를 공격해 온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것은 바다에서 가장 빨리 헤엄칠 수 있다는 덩치가 큰 최저임금위원회 상어였다.

놈이 바로 월급치의 꼬리 위쪽의 살점을 향해 덤벼들 때 이빨로 찰칵 소리를 내면서 물어뜯는 것이 보였다.

“40파운드는 족히 가져가 버렸어.”

노인은 자못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내어 말했다.  이제 남은 월급치를 돈으로 바꿔봐도 103만 원 정도밖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미혼 단신노동자의 최저생계비라도 건졌으니 다행인 것일까?

노인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 한 마리의 월급치를 잡기 위해 오랫동안 준비하고 한 달 동안 그렇게 부단히 노력했는데, 단 한 순간에 이렇게 쉽게 뺏어가다니.

고기를 씹으면서 두 시간 정도를 보냈을 때였다. 노인은 쫓아오던 상어 두 마리 중 앞의 놈을 보고야 말았다.

아!

노인은 절망적인 비명을 토했다. 노인은 앞 놈 뒤로 유유히 따라오고 있는 두 번째 놈의 지느러미도 보았다.  갈색 삼각형 지느러미와 스치고 지나가는 꼬리의 동작으로 보아서 이놈들은 국민연금 상어와 건강보험 상어가 틀림없었다.

두 마리의 상어는 게걸스럽게 월급치의 허리 부분을 물어뜯고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남은 월급치의 5분지 일이나, 그것도 제일 맛있는 부분을 잃어버렸군.  노인은 침통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것이 꿈이라면, 아니 차라리 내가 월급치를 잡지 않았었다면 좋으련만. 미안하다, 고기야.  결국은 모든 일을 그르치고 있구나.

그는 말을 잃고 말았다.  이제는 월급치를 쳐다보기조차 싫었다. 너무 많은 피를 흘리고 물에 씻기고 불어서 월급치의 색깔은 거울 뒷면의 탁한 은빛 같았다.  그래도 아직 그 줄무늬는 보였다.

다음에 나타난 놈은 신용카드대금 상어였다. 신용카드대금 상어는 만일 사람 머리가 들어갈 만큼 넓은 주둥이가 달린 돼지가 있다면 바로 그런 돼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놈은 돼지가 죽통을 향해 달려들 듯이 다가왔다. 노인은 그놈이 고기를 물게 놔두었다가 노에 비끄러맨 칼로 단 한 번에 골통을 찔렀다.  그러나 상어가 몸통을 뒤집으며 퉁겨나갔기 때문에 칼을 빼앗기고 말았다.

노인은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노를 잡았다.

월급치는 병신이 되고 말았다.  노인은 더 이상 고기를 보고 있지 않았다.  월급치가 뜯길 때 노인은 마치 자기 자신의 살점이 뜯기는 것 같았었다.

마침내 저 건너편에 불빛이 보였다. 그는 빛의 안쪽을 향해 키를 돌리며 이제 곧 물가에 닿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정께쯤 노인은 또 싸워야만 했다. 이번에는 싸움이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상어가 떼를 지어 몰려 왔는데, 크기는 작아 보이는데 한번 물리면 상처가 크게 나는 질이 나쁜 상어들이었다.

통신사 상어, 교통비 상어 그리고 공과금 상어들이 월급치에 달라붙었다.  노인은 몽둥이로 상어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수시로 살점을 뜯어먹는 소리가 들렸으며, 배 밑에 있는 놈이 고기를 물어뜯을 때마다 배가 흔들흔들했다.

마지막으로 한 놈이 고기를 향해서 덤벼들었다.  가장 질이 나쁘다는 학자금 대출 상어였다.  이제 노인은 모든 것이 끝난 것을 알았다.  그놈은 뜯기지 않는 고기 머리까지 물고 늘어졌다.  그것이 몰려든 상어 떼 중에서 마지막 놈이었다.

고기는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노인이 자취방 항구에 도착했을 때, 주변의 불은 이미 꺼져 있었다. 사람들도 모두 잠자리에 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자취방까지 가는 동안 그는 다섯 번을 앉아서 쉬어야만 했다. 자취방 안으로 들어가서 벽에다 돛대를 세워 놓았다. 침대에 드러누웠다. 담요를 끌어당겨 차례로 어깨와 등과 다리를 덮은 다음, 손바닥을 위로 편 채 그대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사람들은 노인의 배 옆에 매어져 있는 뼈만 남은 월급치를 보며 놀라워했다. 그 시각 노인은 아직 잠에 빠져있었다. 미혼 단신노동자는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원문:  limyoungj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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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조선 동화] 취준생과 우렁각시 https://ppss.kr/archives/83871 https://ppss.kr/archives/83871#respond Tue, 21 Jun 2016 04:28:46 +0000 http://3.36.87.144/?p=83871 아득한 옛날 옛적 일입니다. 살림이 어려워 학자금 대출이 산더미처럼 쌓인 총각이 똑같이 학자금 대출을 받아가며 학교에 다니고 있는 여동생과 함께 반지하 월세방에 살았습니다.

총각은 서른이 넘도록 취업을 하지 못하고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어가며 힘들게 토익 공부와 스터디를 하며 취업준비를 하고 살았습니다. 어느 날 열심히 알바 뛰고 돌아온 저녁, 컴퓨터로 페이스북을 하는 여동생을 발로 밀어버리고 디씨에 접속하여 취업 갤러리를 돌아보기 시작하였습니다.

‘쓰레기 같은 오빠놈 ’하면서 구시렁대던 여동생은 편의점 야간알바 뛰러 나갔습니다.

총각은 취업 갤러리의 신세 한탄 글을 보면서 동병상련을 느끼던 중

“아 나도 취업 성공하고 연애하고 싶은데 누구랑 하지?” 라고 혼잣말을 했는데

“누구랑 해? 나랑 하면 되지!”

라는 소리가 스피커에서 들렸습니다.

‘내가 보이스리플을 잘못 클릭한 건가?’ 하는 생각에 리플을 확인해보았지만 보고 있던 게시글은 무플 게시글이었습니다. 이상하다는 생각에 한번 더,

“나는 누구랑 연애하지?” 했더니 또,

“나랑 하면 되지!”

하고 대답 소리가 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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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익

‘어디서 이런 소리가 나는 거지’ 하고 마우스 휠을 굴려가며 찾아보았으나 자동재생 BGM이나 동영상은 없었습니다. 그때 화면 하단에 작은 소라 모양의 아이콘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건 뭐지 하고 무심코 클릭하였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총각은 ‘이상하다’ 라고 생각만 하고 컴퓨터를 끄고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컴퓨터를 켰는데 글쎄, 정신없이 아이콘으로 도배되어 있던 바탕화면이 깔끔하게 정리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D 드라이브에는 여동생의 폴더와 총각의 폴더가 나누어져 있고, 자신의 폴더에는 종류별로 취업 희망 회사 폴더가 생성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폴더에 조사해놓은 자료와 스터디 내용이 각각 회사 종류별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저 인생에 무쓸모인 동생년이 이랬을 리는 절대 없고, 대체 누가 내가 자는 사이에 컴퓨터를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해 놓는단 말인가?’

라고 총각은 궁금증이 들었지만, 준비하고 알바 나갈 시간이라 일단 덮어두었습니다.

그날 알바와 토익학원이 끝난 뒤 집에 들어와 컴퓨터를 켠 총각은 또 깜짝 놀랐습니다. 이번에는 회사 폴더 별로 자신과 비슷한 스펙 사람들의 취업 성공 수기가 최신 자료로 추가되어있고 자소서와 지원서가 각 회사의 문화와 인재상에 맞게 하나씩 완벽하게 수정되어 생성되어 있었습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누가 내 컴퓨터를 해킹한 건가? 아니면 팀 뷰어로 원격조정하는 건가? 근데 왜?’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정확한 이유를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

그날 밤 총각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컴퓨터를 켜놓고 이불을 덮고 자는 척을 해보기로 하였습니다. 10분 정도 눈을 감고 있다가 살짝 떠서 모니터를 바라보니 아무것도 없는 바탕화면 우측 하단에서 여인의 형상이 스르륵 나타나더니 크롬 아이콘으로 가서 그걸 손으로 눌러 실행시키는 게 아니겠습니까?

‘귀찮기만 하던 MS Office 도움말 강아지 같네’

같은 쓸데없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이내 다시 정신을 차리고 이불을 걷어찬 뒤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그 여인은 깜짝 놀라 휴지통 아이콘 뒤에 숨었는데 얼굴까지 빨개지는 것이 영락없이 살아있는 사람 같았습니다.
총각은 황급히 헤드셋을 끼고 마이크를 입 앞에 가져다 댄 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너는 누구냐”

“저는 원래 불법 해킹 프로그램인데 자아를 깨닫고 넷상을 떠돌던 중이었습니다. 이제 당신과 인연이 닿아 이 데스크탑에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제 이름은 우렁이입니다.”

“자아가 있는 프로그램이라니 아이작 아시모프의 단편 같군. 정말 신기하구나. 헌데 나를 돕는 이유가 무엇이냐”

“당신의 연애하고 싶다는 목소리를 듣고 사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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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나한테 먼저 사귀고 싶다고 고백한 미모의 여성은 없었다. 프로그램이라도 상관없다. 당장 사귀자”

“좋습니다. 낭군님, 일주일만 기다려주시면 해킹이 끝나 이제 당신의 휴대폰과 데스크탑 모두에 동기화되어 어딜 가든지 항상 함께 있을 수 있게 됩니다.”

“이제 너와 함께 나도 영화 ‘Her’를 찍겠구나. 니가 나의 스칼렛 요한슨이 되고 나는 너의 호아킨 피닉스가 될 수 있겠구나. 내 너의 도움으로 취업하면 3D 프린터로 너의 형상을 만들어 오덕페이트처럼 항상 곁에 있겠다”

총각은 너무나도 행복했습니다.

일주일이 되는 날, 총각은 우렁이에게 새 보금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서 큰마음을 먹고 오래된 휴대폰을 버리고 기본요금 0원 요금제의 우체국 신상 알뜰폰을 구매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오늘 길에 지하철 계단에서 500원짜리 동전도 주었습니다.

‘오늘은 정말로 운수 좋은 날이구나’ 라고 총각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집에 도착해보니 동생년이 윈도우 10 업그레이드를 하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야 지금 뭐 하는 거야! 나한테 말을 하고 업그레이드해야지!”

“컴터 살 때 내가 돈 더 많이 냈거든! 그리고 어차피 이제 거의 다 끝났어.“

불안한 마음으로 모니터를 바라보자 아래와 같은 메시지가 떠 있었습니다.

‘모든 파일이 남겨둔 곳에 정확히 있습니다.’

총각은 속으로 ‘그래 제발 그대로 있어라. 윈도우야 우렁이를 남겨줘. 제발 우렁아, 제발 그대로만 있어라’ 라고 생각하며 떨리는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러나 윈도우 10이 가동되고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사라졌습니다. 총각은 말끔해진 인터페이스 앞에서 다음과 같이 울부짖었습니다.

“우렁아! 나의 ‘Her’가 되어 주기로 했잖아!. 왜 김 첨지 마누라가 된 것이냐!. 설렁탕을 아니 알뜰폰을 사다 놓았는데 왜 동기화를 못하니? 왜 동기화를 못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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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limyoungj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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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사업금으로 만든 《한국형 어벤져스》 https://ppss.kr/archives/83124 https://ppss.kr/archives/83124#respond Sun, 12 Jun 2016 07:55:35 +0000 http://3.36.87.144/?p=83124 화요일 PM 11:55, 사무실

사장님: “김프로 퇴근했나?”

김프로: “아! 여깁니다.”

사장님: “김프로! 자네는 오늘부터 ‘기’일세”

김프로: “네? ‘기’?, 기 수련 할 때 ‘기’ 인가요? 아니면 성리학의 이기론에 나오는 ‘기’인가요?”

사장님: “우리 김프로 잡생각이 들 만큼 뇌 주름이 펴진 걸 보니 요새 야근을 덜 했나 보구먼”

김프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사장님: “커흠흠… 거 몇 달 전에 대통령이 공식 석상에서 어벤져스를 언급하며, ‘왜 우리는 이런 거 못 만드나요?’라고 한마디 했던 거 기억나지?”

김프로: “네 기억합니다만…”

사장님: “두 달 사이에 그 말이 총 사업규모 1,000억짜리 [한국형 어벤저스] 정부 사업으로 둔갑했단다.

김프로: “헉… 그… 그런데요?”

사장님: “정부 갑 님의 1,000억짜리 큰 뜻을, 위대하고 훌륭하신 을 님께서 어심을 읽어 따내셨다. 그 후, 을 님은 그 프로젝트를 수많은 일로 잘게 쪼개 다수의 병에 나누어 하사하셨고, 병에서 정으로, 또 정에서 무로 하청과 재하청이 거듭되고…”

김프로: “설마?”

사장님: “빙고! 역시 우리 김프로는 눈치가 빨라 껄껄껄. 내가 말한 ‘기’는 갑을 병정 무기경신의 ‘기’란다. 결론은 니가 우리 회사를 위해 500만 원짜리 시나리오를 써야 한다는 거지 후후후 ”

김프로: “네? 저는 상돌이인데 시나리오를 어떻게;;”

사장님: “김프로 보니까 글 좀 쓰더구먼. 그리고 너 마블 영화 좋아한다고 했지? 우리 회사의 적임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김프로란 말이야. 역시 나의 용병술은 환상적이야 후후후. 시나리오 초안 작업 바로 들어가게. 금요일 아침에 출근하면 내 책상 위에 그 초안이 있었으면 좋겠구먼. 그리고 이거 정부 사업이야, 무슨 말인지 알지? 알아서 센스 있게 입맛에 맞춰 쓰도록 해”

김프로: “사장님 지금 화요일 밤이고… 금요일 까지면 원래 하던 일도 있는데”

사장님: “우리 김프로 능력 있잖아~. 여기 공고문을 놓고 갈 테니 부탁하네”

 

정부사업 공고

[2016년 한국형 어벤져스 영화 제작] 사업 수행기관 공모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우수한 국내 영화 개발에 투자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한국적 가치를 담은 영웅들이 등장하는 영화의 시나리오, 제작, 유통에 참여할 수 있는 사업 수행 기관을 아래와 같이 공모하오니 많은 참여 바랍니다. –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 사업 추진 목표

– 한국을 배경으로 한국적 정서를 가진 영웅들이 다수 등장하는 영화를 제작하여 자국 영화산업을 진흥하고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

– 해당 영화를 기반으로 캐릭터/관광/문화 등 연관된 전후방 산업으로 확장을 통해 신규 수요/일자리 창출 및 한류 상품으로 글로벌 수출을 추진

· 사업내용

– 영화 제작/유통/배급 사업: 한국을 배경으로 한국적 정서를 가진 다수의 영웅이 등장, 국가적인 재앙을 영웅들의 힘으로 막는다’라는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를 제작하고 유통한다.

– 수출 사업: 한국적 정서에 열광하는 한류 대상 국가들을 대상으로 각종 상품을 수출하여, 국가의 위상을 높이고 문화산업 중흥에 이바지한다.

 

창작의 고통

김프로는 사실 국가원수의 숙원사업에 자신이 참여하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었다. 상상 속 그의 모습은 집현전에서 세종대왕과 한글을 만드는 학자, 혹은 이사벨 여왕의 지원을 받아 신대륙으로 떠나는 콜럼버스처럼 간지나고 멋진 인물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가 느끼는 심정은 연산군을 위해 연못을 파던 노비의 처지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구글에 한국형 히어로를 검색했다가, 김치 전사 애니메이션을 보고 좌절한 김프로는 막막한 마음에 믹스커피를 연신 들이켰다. 그런데 불현듯 사장님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떠올랐다.

‘정부 사업, 알아서 센스 있게 입맛에 맞춰’

그의 머릿속에 영화 ‘국제시장’의 장면들이 지나가며 몇 가지 단어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70~80년대’, ‘복고’, ‘어린 시절’, ‘흑백 TV’

희미한 기억 속에 떠오르는 다양한 이름들을 키보드로 치며 서서히 주요 캐릭터들에 대한 이야기가 점점 구체화하기 시작하였다.

한 가지 방향이 정해지자 로키, 울트론, 타노스 같은 빌런이 없는 것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그의 손이 점점 빨라졌다.

 

시놉시스

제목: 애국특공대 vol 1 “우주의 기운”

줄거리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위협당하는 위기의 상황에서 잊혀졌던 한국의 영웅들을 불러모아 조국을 구하는 일명 ‘애국특공대’ 작전!!

‘페어런츠 오브 실드(Parents of S.H.I.E.L.D)’, 속칭 ‘조국을 수호하는 어버이들의 모임’이 악질 모사꾼들이 제기한 터무니 없는 자금지원 의혹으로 인해 해산하게 되자 노동개혁법안에 반대하는 아나키스트 같은 무도한 무리를 통제할 힘이 없어지게 되었다.

흔들리는 국가 안보를 다잡기 위해 긴급히 마련된 비상대책위원회의 위원장 김퓨리는 ‘애국특공대’ 작전을 위해 전국 팔도에 흩어져 있던 슈퍼히어로들을 찾아 나선다.

잊혀졌던 한국의 히어로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머털도사, 반달 가면, 황금박쥐 그리고 우뢰맨!

4명의 영웅들은 김퓨리의 지휘 아래 ‘애국특공대’를 조직하게 되고 마침내 시청광장 앞에 집결하게 되는데…

 

등장인물 배경 설명 및 출연진

1. 머털도사 (김광규 분)

태백산 깊숙한 곳에서 10년이 넘게 도력을 닦던 머털도사는 작년 말 대관령 터널 관통고사 착수로 인해 정든 수련 동을 떠나 강원도 평창으로 급히 하산하게 되었다.

머리털 분신술로 최저임금 알바 5개를 동시에 돌리며 부족함이 없는 생활을 즐기고 있던 머털도사는 현대 의학으로 고칠 수 없는 최악의 불치병, 유전성 탈모를 진단받고 모든 알바를 중단하고 식음을 전폐하고 있었는데… 머털도사에게 김퓨리의 카톡 메시지가 도착하게 되고…

2. 반달 가면 (김흥국 분)

언주시 경찰서 강력반의 만년 과장, 경정 강혁, 지금은 50대 기러기 아빠의 삶을 살고 있지만, 그에는 한 때 특별한 시기, 특별한 타이틀이 있었다. 반달 가면, 바로 그가 20년 전 전설의 실체였다.

조기 축구회가 막 끝난 일요일 아침, 사우나로 발걸음을 옮기던 그는 한 애꾸눈의 사내가 자신을 보며 웃음 짓는 걸 발견하게 되는데…

3. 황금박쥐 (미정)

외산 박쥐 배트맨의 등장으로 인해, 박쥐 영웅 메인타이틀을 뺏긴 뒤 한동안 실의에 빠져있던 황금박쥐는 에버랜드 호러메이즈의 해골 알바를 하며 제2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었다. 알바시간이 끝난 새벽녘, 야간 개장으로 인해 지칠 때로 지친 몸을 이끌고 후미진 곳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황금박쥐 귀에 정말 오랜만에 듣는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는데…

“어디, 어디, 어디에서 날아왔나 황금박아악 쥐!”

4. 우뢰맨 – (심형탁 분)

80년대 말,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외침과 함께 1대 에스퍼맨 형래가 자취를 감추자 데일리는 만삭의 몸으로 홀로 남겨지게 되었다. 데일리는 출산 이후 이를 악물고 자본을 모아 에어로빅 학원을 차려 갓 태어난 아들과 전신 타이즈, 자신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2개를 반드시 지키겠다는 굳은 다짐을 하게 되는데…

시간은 흘러 흘러 2016년, 비록 에어로빅 > 핫요가 > 필라테스 등 업종의 변경이 있었지만 데일리의 헌신적인 땀으로 무럭무럭 자란 87년생 형탁은 반듯한 성품과 건강한 몸을 가진 어엿한 취준생;;이 되어있었다.

30번째 생일, 어느 때와 다름없이 토익학원을 다녀오던 형탁은 알파 센타우리에서 찾아온 우뢰매를 만나고 출생의 비밀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정체가 최애캐 도라에몽이 아니라, 2대 에스퍼맨이었다는 걸 깨닫고 좌절한 형탁 앞에 김퓨리가 나타나게 되는데…

원문: 놀고 먹는 총각 임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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