ㅍㅍㅅㅅ https://ppss.kr 필자와 독자의 경계가 없는 이슈 큐레이팅 매거진 Tue, 30 May 2017 07:44:24 +0000 ko-KR hourly 1 https://wordpress.org/?v=5.8.10 https://ppss.kr/wp-content/uploads/2015/07/ppss-100x100.png ㅍㅍㅅㅅ https://ppss.kr 32 32 ‘언니의 폐경’은 희망 그 자체다: 모든 사람은 김훈보다는 글을 잘 쓴다 https://ppss.kr/archives/116221 https://ppss.kr/archives/116221#respond Mon, 29 May 2017 09:39:08 +0000 http://3.36.87.144/?p=116221

푸하하하… 김훈의 「언니의 폐경」을 읽다가 처음엔 멍했는데 나중엔 너무 웃어서 호흡 곤란이 왔다. 이런 거지발싸개보다도 못한 글이 황순원 문학상까지 받았다니… 희대의 코미디다.

김훈의 가장 큰 문제점은 게으르다는 데 있다. 무식한 건 두 번째다. 네이버 검색창에 생리대만 쳐 봤어도 저런 개소리를 못 할 텐데. 아니, 팬티를 자르면 도대체 생리대를 어디다 붙이냐고요. 생리대 착용 방법은 여기저기 아주 쉽게 나와 있잖아! 수많은 블로거들이 친절하게 사진까지 찍어서 포스팅을 올려놓았는데 아이고…

김훈 선생님, 동네 슈퍼든 편의점이든 생리대를 사서 그중 하나를 뜯으면요, 생리대 뒷면에 접착제가 있어서 팬티에다 붙이고 4시간이고 5시간이고 있어야 한다고요. 생리는 오줌처럼 누는 게 아니라 일주일 동안 계속 흐르는 거니까요.

 

그리고 여자 나이 50에 전신 마비도 아닌데 동생이 생리혈을 대신 처리해 준다고? 우웩… 그럼 김훈 작가는 남자 나이 50에 동생이 운전하는 차 안에서 사정을 했는데 동생이 갓길에 차를 세우고 형의 바지를 벗기고 팬티를 잘라 주나? 그것도 손톱깎이에 붙어 있는 작은 칼로?

형은 동생이 팬티를 벗기기 쉽게 바지 지퍼를 내린 다음 엉덩이도 들어 주고? 그런 다음 동생은 물티슈가 아닌 콘돔으로 정액이 묻은 형의 허벅지를 닦아 주고? 동생이 닦는 동안 형은 또 다리를 벌려 주고 말이지? 그러고 나서 정액을 닦은 콘돔과 이음새를 잘라낸 팬티를 차 뒷좌석으로 던지면 끝?

백번 양보해서 앞뒤 맥락 가운데 글을 봐야 한다는 주장을 존중한다고 치자. 언니는 지금 막 남편의 사망을 확인하고 오는 길이다. 충격으로 아무 생각이 없는 상태다. 그러면 본인이 생리하고 있는지에 대한 감각마저 없을 정도로 그냥 멍하게 앉아 있지, 동생이 팬티를 잘라내기 쉽게 엉덩이도 들어 주고 다리도 벌려 주지 않는다. 젠장… 엉덩이를 들어 주고 다리도 벌려 주는 건 생리와 관련된 묘사가 아니라 섹스와 어울리는 문구 아닌가?

변태 자매의 엽기 행각은 소설 내내 계속되는데 언니란 사람은 오십견이 왔는지 팔이 아파 등 뒤로 손을 못 뻗는 상황에서 동생한테 맨 젖가슴은 보여줘도 브래지어 컵은 안 보여준다.

또, 동생이란 사람은 집에서 자다가 새벽에 갑자기 생리가 터진 언니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자세히 관찰한다. 팬티를 벗은 언니의 엉덩이와 허벅지에 푸른 달빛이 내려앉았다나 어쨌다나. 아니 어떤 미친년이 새벽에 남의 엉덩이를 소재로 푸른 달빛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시를 쓰냐고. 언니 때문에 잠 깼다고 신경질을 내는 게 정상 아닌가?

이쯤 되면 제목을 「언니의 폐경」이 아니라 「자매의 패륜」으로 고치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생리 묘사 장면뿐만 아니라 전체 내용이 아주 그냥 총체적 난국이다.

누군가 이런 질문을 했다. 언니의 폐경은 10년도 더 된 소설인데 왜 인제 와서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다고. 그게 바로 SNS의 힘이다. 아마 대한민국 사람 대부분은 김훈의 「언니의 폐경」을 읽어보기는커녕 들어본 적도 없을 것이다. 명색이 작가인 나도 김훈 작품 중에 이런 게 있는지 처음 알았다.

그런데 페이스북 담벼락에 누군가 비판의 글을 올렸다. 최초로 올린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으나 내 경우에는 페이스북 친구분이 다른 페친분의 글을 처음 공유했고, 그 뒤로 또 다른 페친 분들이 잇따라 언니의 폐경에 대해 언급하면서 일파만파로 퍼졌다.

단언컨대 김훈 「언니의 폐경」이 제5회 황순원 문학상을 받았다는 중앙일보 기사보다 “뭐 이런 X 같은 글이 다 있어!” 하며 어이없어한 그 누군가의 포스팅이 수백, 아니 수천 배 더 클릭 수가 많았을 것이다. 시대가 이렇다. 그런데도 아직도 잘난 척하고 싶어하는 자칭 지식인들과 공존해야 하는 것 또한 사실이고.

내가 박근혜 전 대통령한테도 욕을 한 적이 없고 최순실 씨한테도 함부로 말한 적이 없다. 삼일교회를 나오면서도 전병욱 목사의 책을 그대로 뒀고 이문열 작가의 책도 버리지 않았는데 김훈은 정말… 순간 살의에 가까운 분노를 느꼈다.

왜냐하면, 김훈은 철없는 10대도 아니고 무려 결혼을 한 사람이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딸이 있는 사람이다! 도대체 딸이 있는 기혼남의 글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냔 말이다.

나는 강아지를 좋아하긴 하지만 개는 사람보다 열등하며 기본적으로 밖에서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지금 푸들 한 마리를 안에서 키우고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상황인 거고 개를 위해 너무 비싼 용품을 구입하는 것도 정상처럼 보이진 않는다.

이런 나를 두고 누군가는 못마땅하게 생각할지 모른다. 어머 작가님, 실망이에요. 개는 동물이 아니라 가족이에요, 가족! 하고 정색을 하며 말할지도 모른다.

그렇다손 치고 내가 강아지에 대해 묘사하는 글을 쓴다고 가정해 보자. 김훈 역시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하며 기본적으로 남성의 보호 아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중년여성의 폐경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논하고 또 그걸로 문학상까지 받았으니 말이다.

– 얘, 어떡하지. 갑자기 왜 이러지……

– 왜 그래, 언니?

– 뜨거워. 몸 속에서 밀려나와.

토리는 다리가 20개밖에 없다고 주인한테 버림받은 개다. 얼굴 쪽은 상황이 더 심각하다. 눈은 5개밖에 없고 코는 3개밖에 없다. 발견 당시 1미터짜리 목줄에 묶여서 썩은 음식물로 연명하고 있었다. 사육장 안의 다른 개들이 끌려가서 날개 달린 지렁이한테 먹히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단다. 이런 토리가 극적으로 구조된 후 주인을 찾던 중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입양을 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유력 대선 후보의 입양 계획이 발표된 후 동물보호단체마다 평소보다 몇 배 많은 문의 전화가 쏟아진다고 한다. 반가운 일이긴 하나 한편 걱정도 된다. 충분한 고려 없이 입양을 결정했다가 나중에 돌려보내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자유한국당의 홍준표 후보를 제외하고 대선후보들 모두 앞다투어 유기동물을 입양하겠다고 했는데 안철수 후보가 입양하겠다고 한 무지개 햄스터는 정말 조심해야 한다. 비 오고 나서 무지개가 뜨면 하늘로 올라갔다가 보통 일주일이 지나야 땅으로 내려오는데 혹시라도 안철수 후보가 우리 햄스터 보신 분 누굽니까? 하고 찾으러 다닐까 싶어서다.

선거 기간 내내 우위를 지키던 문재인 후보는 결국 대통령이 됐고 약속대로 토리는 청와대에 입성하게 됐다. 나는 사석에서 언니라고 부를 정도로 평소 가깝게 지내던 동물단체 케어의 박소연 대표랑 청와대로 향하다가 갓길에 차를 세웠다. 자정, 즉 72시가 지난 시간이었다. 나는 룸 라이트를 켜고 토리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 어머, 언니. 다리가 1개 더 나오려고 하네.

– 그래? 그래서 이렇게 몸이 뜨거운 거야?

– 토리도 자기가 청와대 가는 줄 아나 보네.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은 백이면 백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거 판타지 소설이네. 맞다. 판타지 소설이다. 세상에 다리가 20개 달린 개가 어딨으며 무지개 햄스터는 또 뭐란 말인가? 내가 김훈의 언니의 폐경을 읽었을 때 느낌이 딱 이랬다. 이게 뭐지? 코믹 판타지 소설인가? 그런데 아니었다. 진지한 궁서체로 써 내려 간 사실주의 소설이었다. 출판사 책 소개를 보면 기가 막힌다.

“50대 두 자매가 겪는 늙어감, 남편의 떠남, 자식들의 이기심과 배신, 잔잔하지만 분명한 허무감 등을 여동생의 목소리와 시각으로 촘촘하게 교직한 작품이다.”

촘촉하게 교직한 작품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코믹 판타지가 아닌 이상 개는 다리가 4개고 눈은 2개다. 지렁이는 새가 아니어서 날개가 없고 햄스터는 해가 뜨든 비가 오든 상관없이 박스 같이 생긴 집 안에서 잘 먹고 잘 논다. 이건 한 번이라도 개를 본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고 한 번이라도 지렁이를 본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고 한 번이라도 햄스터를 본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결혼을 안 한 미혼남도 아니고 엄연히 부인도 있고 딸도 있는 남자가 이런 글을 쓴다는 것은 여성 혐오 문제를 떠나서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관심과 예의가 없다는 뜻이다.

다시 내가 소장하고 있는 책 이야기로 돌아가서, 성범죄 혐의로 불명예스럽게 물러난 전병욱 목사의 책도 버리지 않고 최근 배임 유죄 판결을 받은 조용기 목사의 책도 버리지 않고 “죽기 좋은 계절이다”라고 시작하는 역대급 망언을 조선일보에 쏟아놓은 이문열 작가의 책도 버리지 않고 있는데 김훈 책만큼은 싹 다 재활용 쓰레기장에 던져 버리려다가 생각을 바꿨다. 오히려 눈에 가장 잘 띄고 손에 가장 닿기 쉬운 곳에 ‘모셔’ 두었다.

나는 이번 여름에 장편 소설 하나를 출간할 예정인데 그동안 등장인물 하나를 어떻게 죽일까 고민이 많았다. 타살로 처리할까 자살로 처리할까 하다가 글이 잘 안 풀려 머리카락도 쥐어뜯어 보고 책상도 쾅쾅 내리쳐 보고 원고 초고도 북북 소리 내며 찢어서 쓰레기통에 버려 보고… 여하튼 이런 와중에 김훈의 「언니의 폐경」을 만나 모든 우울감이 일시에 다 사라지고 밝은 희망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막 솟아오르고 있다.

내가 무슨 글을 쓰더라도 김훈의 「언니의 폐경」보다는 잘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김훈 선생님께 큰절이라도 올려 감사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긴, 대한민국 그 누구라도 김훈보다는 잘 쓴다. 페이스북 친구가 올린 간단한 포스팅을 예로 들어 보자. “오늘 매운 진짬뽕을 먹었습니다”는 단문이지만 명확한 사실만 들어 있다. 그럼 진짬뽕이 맵지 새콤달콤하겠는가?

그런데 기본적인 사실관계 확인조차 없으면서 본인의 필력만 믿고 어떤 특정 상황을 쓸데없이 자세히 묘사하며 세련된 문장을 쓰는 작가인 척하는 그 위선과 허영심은 최악이다. 전 세계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으로서 난 이보다 못한 글을 본 적이 없다.

나의 이런 분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아니, 이해하는 척하면서 훈수를 두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긴, 상대방을 때리면서 쾌감을 느끼는 사디즘도 있고 상대방한테 맞으면서 쾌감을 느끼는 마조히즘도 있으니 각자의 생각을 뭐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한 가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내 평생에 황순원 문학상을 받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장담한다. 100퍼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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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식 사랑법, 닉슨과는 너무 다른: 청와대 진돗개 vs. 백악관 스파니엘 운명 비교 https://ppss.kr/archives/106585 https://ppss.kr/archives/106585#respond Thu, 23 Mar 2017 04:04:55 +0000 http://3.36.87.144/?p=106585

2017년 3월 13일 자 동아사이언스 기사를 읽다가 혈압이 올라 뒷목 잡고 쓰러질 뻔했다. 박 전 대통령의 개 사랑이 예전부터 유명했단다. 영애 시절에도 개를 키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단다. 이런 XX… 신생 인터넷 매체도 아니고 보수 정론지에서 이런 구라를 치다니…
기본적인 사실관계조차 확인하지 않은 아주 게으르고 불성실한 기사라고 욕을 하려다가 이게 어떤 한 매체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언론 전체의 문제 같아서 개를 사랑하는 애견인으로서 몇 자 적는다.

 

먼저, 박근혜 전 대통령을 관통하는 키워드인 일관성은 개와 관련된 부분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비열하고 일관되게 추잡하고 일관되게 무식하고 일관되게 무책임한 박 전 대통령은 개를 안을 때도 아주 일관되게 한 가지 방법만 고집하는데 아래 사진들을 한 번 자세히 살펴보자.

모든 사진에서 보이다시피 절대로 엉덩이를 받쳐 주지 않고 강아지 몸체의 가운데 부분인 흉부를 압박하면서 앞다리 안쪽을 들어 올리고 있다.

 

자, 박 전 대통령처럼 강아지를 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무게중심이 심히 불안정한 가운데 공중에 매달려 있는 셈이기 때문에 강아지들은 본능적으로 발버둥을 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 소름 끼치는 것은 불안한 강아지의 상태와는 전혀 상관없이 혼자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이다.

박 전 대통령에게 있어서 강아지라는 것은 보호하고 사랑해야 할 생명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사진을 잘 나오게 하는 소품이자 도구이자 배경일 뿐이다.

 

취임식 날 텔레비전 중계를 보다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니, 강아지를 저렇게 척추를 거꾸로 해서 들면 어떡해? 삼성동 주민들이 안정적으로 안고 있던 모습과는 너무 비교되는 모습이다.

 

그나마 강아지가 고생하고 있지 않은 사진인데 무릎에 올려놓아 공중에 대롱대롱 떠 있진 않더라도 이 사진 역시 맹점이 있다. 박 전 대통령은 단 한 번도 강아지와 눈을 마주친 적이 없다. 박근혜에게 있어서 강아지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좀 더 예쁘게 꾸며 주는 액세서리에 불과하다.

 

적어도 박정희 전 대통령은 실제로 개를 키워본 경험이 있다는 것이 여러 사진에서 은연중 드러난다. 국가기록원에서 공개한 희귀 사진 중에는 개와 눈을 마주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모습이 여럿 보인다. 무엇보다 카메라 정면을 의식하지 않는 자연스러움이 보인다.

맨땅에서 기업을 일궈 본 경험이 있는 창업자와 모든 것을 그냥 물려받아 귀한 줄 모르는 재벌 2세와의 차이랄까? 워낙 박근혜가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자주 보여준 터라 박정희의 이런 사진들조차 위대해 보이기까지 한다.

 

자신의 개를 위해 직접 애견용품 가게에 가서 물건을 고른다거나 백악관에서 개와 함께 달리고 장난을 치는 오바마까지는 바라지도 않겠다.

제발 개를 안을 때는 양손이 아니라 양팔을 쓰라고! 9.11 테러 당시 7시간도 아니고 고작 7분을 밝히지 못해서 맹비난을 받은 조지 부시도 개는 이렇게 양팔을 써서 안정감 있게 안았단 말이다.

 

빌 클린턴은 재임 중 스캔들이 터진 이후 이렇게 반려견과 얼굴을 맞대고 아주 친한 척하는 사진을 계속 공개했다. 개를 이미지 메이킹에 이용한다는 비난도 많이 받았으나 어쨌든 이 초콜릿 색의 래브라도는 자신의 주인 빌 클린턴을 무척 따랐다.

 

박근혜-최순실 이전에 레이건-키글리가 있었으니.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부인 낸시 레이건은 조안 키글리라는 점쟁이를 통해 점을 쳐서 대통령의 일정, 연설문 작성, 토론회 날짜 등도 다 결정했다. 복채는 제삼자를 통해 은밀히 전달했는데 나중에 이 말도 안 되는 비선 실세가 밝혀지자 레이건 대통령 부부는 전 국민의 조롱거리가 됐다.

우주선 타고 달나라에도 가고 암도 정복하는 현대 미국에서 웬 무당이냐며 비난 여론이 들끓었지만 낸시 레이건의 반려견 사랑은 한결같았다. 쭈그려 앉는 것도 마다하고 반려견과 포옹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극적인 스토리의 주인공은 리처드 닉슨의 개인 체커스(Checkers)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탄핵을 앞두고 사임한 그 주인처럼 체커스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는데 툭하면 어머니 아버지를 모두 흉탄에 잃어서 이제 남은 건 국가에 대한 봉사뿐이라고 이야기하는 박근혜만큼이나 기구하다.

1952년(공교롭게도 박근혜가 태어난 해다), 부통령 후보로 나선 닉슨은 불법 선거 자금 의혹에 휘말리게 된다. 언론과 여론의 십자포화 속에서 당시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아이젠하워가 러닝메이트를 철회할 수도 있는 상황. 그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닉슨은 정면돌파를 선언하고 1952년 9월 23일 오후 6시 30분, 그 유명한 체커스 연설(The Checkers Speech)을 시작한다.

사실 체커스 연설은 후에 붙여진 이름이고 불법 선거 자금 의혹에 대한 해명 연설인데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지인으로부터 1만 8천 달러의 후원금을 받은 건 사실이야. 하지만 개인 용도로는 단 한 푼도 쓰지 않았어. 내가 개인적으로 받은 것은 텍사스의 어느 지지자가 내 딸에게 선물해 준 체커스라는 이름의 강아지 한 마리밖에 없어.”

그리고는 연설의 절정에서 그는 모든 사람의 뇌리에 남을 결정적 한마디를 던졌다.

Regardless of what they say about it, we’re gonna keep it!
그 누가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강아지는 반드시 키울 겁니다!

이날 연설에서 자신의 재산 내역과 정치 인생에서부터 민주당에 대한 역공까지 꽤 많은 이야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남는 것은 인상적인 문구 하나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강아지를 키울 거라는 닉슨의 말은 순식간에 전세를 뒤집었고 중요한 것은 강아지가 아니라 불법 선거자금이라는 민주당의 호소도 덮어 버렸다.

 

체커스는 하루아침에 유명 스타가 됐고 닉슨은 결국 부통령이 됐다. 그리고 아이젠하워가 재선에 성공하면서 닉슨은 8년 동안 부통령을 하게 된다. 권력의 중심에서 이인자로서 착실히 준비해 온 닉슨. 드디어 1960년 선거에서 대통령에 도전하는데 하필 젊고 잘생긴 케네디가 혜성처럼 나타나면서 고배를 마신다. 그 후 2년 뒤 닉슨은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마저도 낙선, 누가 봐도 정치 생명이 끝난 야인이 되었다.

이건 이동원 전 외무부 장관의 회고록에 소개된 비화인데 닉슨이 1962년 선거에서 떨어진 후 한국을 방문했다고 한다. 이에 당시 주한 미 대사였던 브라운 대사가 어쨌든 미합중국의 부통령을 지낸 닉슨의 이력을 존중해서 청와대에서 만찬을 열어줄 것을 요청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일언지하에 거절했단다. 대선에서 떨어지고 나서 주지사 선거까지 떨어진 사람인 만큼 정치적 재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서였다.

결국, 브라운 대사가 개인 자격으로 김포공항에 나가서 그를 영접하고 청와대 대신 대사관 관저에서 만찬을 열었는데 하필 그 날 박정희 대통령이 갑자기 장관들을 몽땅 다 청와대로 불러들여서 닉슨을 위한 만찬 참석자는 이동원 외무부 장관 한 명뿐이었다고 한다. 썰렁한 분위기에서 만찬은 금방 끝났고 닉슨은 피눈물을 삼키며 미국으로 돌아갔다.

서구 선진국도 아니고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박대를 당한 닉슨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런 닉슨을 곁에서 지켜준 건 체커스였다. 닉슨은 체커스를 안고 울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박정희가 그토록 철저하게 외면했던 그 닉슨이 1968년 대선에서 기적처럼 승리하며 다시 화려하게 복귀했다. 이에 다급해진 사람은 박정희였다. 공식, 비공식 외교 채널을 전부 가동해 닉슨을 만나기를 원했지만 계속 묵살당했다. 박정희의 끈질긴 요청에 닉슨이 결국 답을 하기는 했다.

그런데 백악관이 아니라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로 오라는 것이었다. 공식 업무 시간에는 만나기 싫으니 휴가 기간 중 자기 별장이 있는 곳으로 오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즉시 새크라멘토로 날아갔는데 약속장소인 세인트 프란시스 호텔에서 닉슨은 박정희를 일어서지도 않고 자기 자리에 앉은 채로 맞이했다고 한다.

시종일관 무성의한 태도로 이야기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박정희를 위한 만찬 장소로 바로 이동했는데 참석자가 국무장관 딱 한 사람뿐이었다.
그리고는 1971년 3월 27일 미7사단의 철수를 단행한다.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한 지 23년 10개월 만에 최초로 철수를 지시한 대통령이 바로 닉슨이다.

닉슨의 입장에서는 통쾌한 보복을 한 셈이다. 본인을 무시하던 박정희에게 시쳇말로 빅엿을 먹인 것인데 이때 닉슨의 강아지 체커스는 없었다. 닉슨이 대통령에 당선되기 4년 전 하늘나라로 갔기 때문이다. 닉슨이 이렇게 화려하게 복귀한 모습을 끝내 보지 못하고 야인시절에 눈을 감은 체커스를 너무나 안타깝게 생각한 사람들이 많은 나머지 9월 23일은 아예 체커스의 날로 지정되어 있다.

 

주인이 정치적 위기에 빠졌을 때 방패막이가 되어 준 체커스. 이후 8년 동안 부통령인 주인을 따라 백악관을 드나들 수는 있었지만, first dog의 위치는 아니었던 체커스.

2인자였던 주인이 1인자 자리에 도전했으나 예상치 못하게 패배하고 나서 주지사 선거마저 떨어지자 혼자 남게 된 주인을 계속 지켰던 체커스. 주인의 기적적인 재기를 결국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은 안타까운 사연의 주인공 체커스. 닉슨은 끝내 같이 백악관에 입성하지 못한 체커스를 생각하며 늘 백악관 집무실 책상 서랍 속에 강아지용 비스킷을 한가득 넣어 두었다고 한다.

박근혜 탄핵이 진행되면서 가장 많이 언급된 인물이 닉슨인데 박근혜와 닉슨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박근혜는 영애 시절부터 개를 좋아했다고 알려져는 있는데 아무런 사건도 없고 에피소드도 없고 이야깃거리도 없고 구체적인 증거가 하나도 없다. 만약 박근혜가 닉슨처럼 그 누가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강아지는 내가 반드시 키울 겁니다 (Regardless of what they say about it, I’m gonna keep it!) 라고 했다면 난 촛불 대신 친박 집회에 참석해서 태극기를 흔들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니다. 개를 좋아한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나도 2년 전 초겨울, 급하게 이사를 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내가 가장 먼저 챙긴 것은 우리 집 강아지의 가방과 집, 그리고 강아지가 춥지 않게 덮을 담요였다. 언젠가 캘리포니아 부촌에서 불이 났을 때 사람들이 일제히 챙긴 것은 반려동물이었다. 가족이기 때문에. 소중한 생명이기 때문에. 말 못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우선으로 배려해줘야 하는 것을 반려견을 키우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혹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친박 집회에서 만난 어떤 노인이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금 무슨 정신이 있어서 개를 챙길 수 있느냐며 별걸 다 트집을 잡는다고 했는데 헐… 모르시는 말씀. 사람은 힘들수록, 억울할수록 개를 찾게 되어 있다. 세상 모든 사람으로부터 손가락질당하고 욕을 먹는다고 해도 개만큼은 변함없이 내 편이기 때문이다.

2013년 2월 25일 대통령 취임 첫날, 선물로 받은 진돗개의 척추를 거꾸로 뒤집은 채 혼자만 환하게 웃던 박근혜는 결국 2017년 3월 12일 청와대에서의 마지막 날, 진돗개 9마리를 모두 버려둔 채 혼자만 환하게 웃으며 삼성동 자택으로 들어갔다. 가수 이승환 씨의 표현처럼 참으로 기괴한 캐릭터가 4년 동안 청와대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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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낙차’가 연예인에게 끼치는 영향 : 박유천과 하현우를 보며 https://ppss.kr/archives/85041 https://ppss.kr/archives/85041#respond Mon, 04 Jul 2016 08:42:55 +0000 http://3.36.87.144/?p=85041 지금껏 살면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연예 뉴스는 ‘서태지-이지아 이혼 소식’이었다. 그때 받았던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내 마음속의 완전무결한 문화자산이 이렇게 맥없이 무너지며 구설수의 중심에 놓이다니.  

그 중에서도 가장 괴로운 것은 내 안의 연예인 ‘서태지’의 이미지와 몰래 결혼생활을 했던 일반인 ‘서태지’의 이미지가 상충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때 결심을 했다. 다시는 연예인들의 사생활에 관심을 갖지 않으리라고, 이런 식으로 내 감정을 소진하지 않으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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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전설이 된 스캔들…
출처: 중앙일보

그리고 2016년 6월, 박유천 사건이 터졌다.

난 별로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이 연예인을 바라보고 규정하는 시각은 그대로인 것 같다. 실시간 검색어에 박유천을 비롯, ‘박유천 성폭행’, ‘박유천 화장실’ 등 관련 단어가 도배하다시피 하고 페이스북 타임라인, 트위터 타임라인 등에서 완전 난리가 났으니까. 그때  번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제 각 언론사들마다 자료화면으로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 엄청 써 대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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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BS2 <성균관 스캔들>

아니나 다를까, 미디어에서는 <성균관 스캔들>의 캡처 화면이 계속 나왔다. 박유천은 일전에 그 드라마에서 목에 칼이 들어와도 원칙을 지키고 임금을 향해서도 거침없이 쓴소리를 쏟아낸 ‘이선준 유생’ 역을 맡았기 때문이다.

연기는 그저 연기다. 하지만 언론사들은 언제나 ‘이미지 낙차 효과’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일례로 예전에 황수정 마약 사건 때도 그랬다. 사건 자체보다는 ‘청순한 예진 아씨가 어떻게?’ 식의 기사가 주를 이뤘다.

 

‘이미지 낙차’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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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언론만 이런 것은 아니다. 1995년 ‘휴 그랜트 매춘 사건’이 터졌을 때 모든 영어권 언론이 일제히 반복해서 강조했던 게 바로 ‘우아하고 귀족적인 영국 영어를 쓰는 배우가 어떻게?’ 였다.

“나 참, 귀족적인 말을 쓰는 것과 사생활이 무슨 상관이 있다고?” 라고 반문하고 싶기도 하나, 사실 충분히 상관있다. 실제로는 아무 상관 없는 별개의 문제지만, 이미지상으로는 아주 많은 상관이 있다. 사람들이 원하는 건 본인들이 소비하고 싶은 스타의 ‘이미지’이지 팩트가 아니니까.

이미지 낙차가 클수록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거나 큰 감동을 받는다. 여기서 복면가왕 최고 화제의 인물인 ‘우리동네 음악대장’ 하현우를 한 번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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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MBC 복면가왕

그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다. 나도 이전에는 하현우가 누군지 몰랐다. 만약 조용필이나 이선희 등 대형 가수가 나왔더라면 9연승까지 가지 않았을 것이다. 혹시 9연승을 했더라도 이렇게까지 큰 화제성이 있진 않았을 것으로 확신한다.

감히 조용필이나 이선희의 내공을 논하자는 게 아니라, 너무나 유명한 가수들이기 때문에 예상외의 반전 요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다. 그런데 하현우는 ‘무의 충격’과 ‘엄청난 실력’이 제대로 충돌해 무시무시한 파급 효과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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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갈등 관리 모델로도 잘 알려진 토마스 킬만 표다. 서로 다른, 혹은 상충하는 이미지를 어떻게 관리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고전적인 모델이다. 설명을 더 해보자.

 

갈등 관리 모델의 예시

1. Collaborating

서로 상관관계가 없는 이미지들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최고의 시너지 효과를 내는 상황이다. 예를 들어 누나들의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귀여운 미소년의 이미지와 거칠면서도 묵직한 상남자의 이미지는 서로 다른 영역에 있지만 <태양의 후예>에서 송중기는 collaborating을 이뤄냈다. 얼굴은 여전히 여리여리하고 아가 같은데 직업은 특전사 대위란다. 완벽한 collaborating의 전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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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이미지 Collaborating의 예시인 유시진 대위.
출처 : <태양의 후예> 홈페이지

신라호텔 이부진 사장이 직원들과 같이 족발집에서 회식을 했다는 기사가 나온 적이 있다. 별게 다 기사로 나온다고 눈살 찌푸린 사람들도 있었을 테지만 충분히 기사 가치가 있다. 이슬 한 방울도 프랑스제 커틀러리로 썰어 먹을 것 같은 재벌의 이미지와 신발을 벗고 맨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소주와 함께 먹어야 제맛인 족발로 대변되는 서민의 이미지는 족보 자체가 다르니까 말이다.

 

2. Competing

서로 대척점에 있는 이미지가 충돌하지만, 긍정적인 효과를 내는 경우다. 예를 들어, 돈을 너무 안 쓰는 구두쇠 이미지와 돈을 펑펑 쓰고 다니는 풍족하고 헤픈 이미지는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지만 만약 자기한텐 하나도 안 쓰면서 남을 돕는 일에는 앞장선다고 하면 부정적인 이미지는커녕 존경스러운 이미지가 생성된다.

까다롭고 신경질적인 성격과 친절하고 다정다감한 성격 역시 상반되는 이미지이지만, 배우 김명민의 경우 본인의 연기에는 한없이 엄격한 반면 촬영장 스태프들한테는 무척 자상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김명민은 ‘명민좌’로 불리며 안티 세력도 별로 없다.

 

3. Avoiding

이건 최악의 경우다. 서로 대척점에 있는 이미지가 충돌해서 부정적인 효과를 내는 경우인데 지금 박유천의 이미지가 딱 이 상황이다.

연기는 연기일 뿐이고 방송에서 보이는 이미지는 잘 재단된 포장지 같은 것이지만 이렇게 냉정하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어느 사회나 소수다.

“아니, <성균관 스캔들>에서는 그렇게 올곧고 원칙주의자였던 이선준 도령이 성폭행을, 그것도 화장실에서?”

무죄 추정의 원칙에 의해 박유천을 함부로 비난하는 것을 자제하는 것이 맞지만, 법적 결과에 상관없이 박유천의 이미지는 이미 최악이다.

사실 착한 역할, 멋진 역할을 많이 맡을수록 이미지 리스크 또한 크다. 그리고 연예인 못지않게 종교인이나 교육인들도 같은 문제에 직면할 때가 많다. 아니 목사가 어떻게? 내지는 아니 학교 선생님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말이 나오는 것 자체가 ‘이미지 선입견’을 드러내는 것이다.

성직자든 교육자든, 직업적 윤리를 제외하면 그들이 특별히 더 거룩할 것이라는 아무런 근거가 없음에도 사람들은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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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네이버 뉴스

 

4. Accommodating

나쁜 이미지이긴 하지만 설명이 가능하면 오히려 긍정적인 에너지로 승화시킬 수 있다. 이병헌, 김구라 같은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차갑고 막말을 내뱉는 독설가의 이미지는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으나 ‘난 원래 이렇다. 내가 언제 도덕적으로 훌륭하다고 했나? 그런 건 유재석이나 하라고 해.’ 아예 처음부터 이렇게 나오면 이미지의 틈새 시장 또는 이미지의 블루 오션 창조가 가능하다.

영국의 대표적 록 밴드 오아시스의 노엘 갤러거, 리암 갤러거 형제가 그랬다. 이 둘은 맨날 싸우고 맨날 서로 헐뜯고 비난하기 바쁘다. 팬들도 그냥 그러려니 한다. 그런데 이들은 아예 처음부터 ‘우리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폭력적인 성향이 있다, 형은 동생이 재수없고 동생은 형이 재수없다, 하지만 서로의 음악적 재능만큼은 인정한다.’ 라는 태도로 나왔다. 본인들이 그렇다고 인정하는데 뭐 어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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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하기 쉽게 토마스 킬만 표 위에 각각의 이미지로 대변되는 연예인들을 분류해 보았다. 사실 연예인, 유명인, 사회적 공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은 다 나름대로 이미지 낙차 관리를 하고 있다. 연애의 밀당이라는 것도 결국은 이미지 낙차다.

고수들은 이미지 낙차 관리에 능하다. 반전 매력, 츤데레 캐릭터 등도 같은 말이다. 시종일관 계속 잘해주는 사람보다는 나쁜 남자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자상한 면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 자상함은 실제보다 훨씬 더 많이 배가된다.

반대로 ‘착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너 왜 그래?’ 하고 실제보다 훨씬 더 많이 욕을 먹는 경우도 있긴 하다. 이 경우는 억울하기 그지없다. 난 그냥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 상대방의 이미지 틀 안에서 상대방이 멋대로 판단한 것이니까 말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혼자 무인도에서 사는 게 아니니까 다른 사람들로부터 유난히 오해를 많이 받는다면 본인의 이미지 낙차 값이 Avoiding 안에 떨어지는 게 아닌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이미지 낙차가 생긴다는 것은 욕망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람에겐 늘 서로 다른 욕망이 끊임없이 부딪친다. 예를 들어, 때론 청순하고 싶기도 하지만 때론 요부처럼 섹시하고 싶기도 한 게 인간의 마음이다. 무식할 정도로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던 옛날 어머니들의 삶을 존경하면서도 그와 동일하게 세련되고 지적이고 현대적인 어머 상을 멋지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존재한다. 프리랜서의 자유로운 삶을 동경하면서도 불안한 건 싫고 조직의 비합리성을 비난하면서도 안정된 생활은 포기할 수 없는 게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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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페친의 담벼락에서 “엄마도 섹시하면 안 되나? 엄마도 여자임을 주장하면 안 될까?” 라는 내용의 글을 보았다. 물론, 당연히 된다.

처음부터 엄마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엄마 이전에 아가씨였고 그 이전에는 어린이였다. 엄마라는 역할을 맡기 전 누군가의 자식이라는 역할을 맡고 있었고 지금은 거룩한 모성의 엄마이면서도 동시에 누군가의 사랑스러운 아내 역할을 맡고 있다. 그리고 페이스북을 비롯한 온라인 공간에선 자신의 이름을 걸고 활동하는 하나의 인격체다.

그런데 우리는 한 사람 안에 여러 가지 역할이 요구되고 또한 여러 가지 욕망이 끊임없이 부딪치며 그에 따라 여러 가지 고민도 생성되고 분출된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할 때가 많다.

막장 드라마에서 자주 쓰이고 코미디 프로에서 자주 패러디하는 대사 하나를 살펴보자. 누군가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충고한다.

“너답지 않게 왜 그래?”

그러면 상대방은 이렇게 응수한다.

“나다운 게 뭔데?”

그러게나 말이다. 세상에는 100% 이성적인 사람이란 없다. 마찬가지로 100% 감정적인 사람도 없다. 100% 내성적인 사람도 없으며 100% 외향적인 사람도 없다. 아무리 밝아 보이는 사람도 우울할 때가 있고 아무리 염세적인 사람도 삶의 기쁜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너답지 않게 왜 그래?’ 라는 말은 굉장히 무식한 말이다. 복잡다단할 수밖에 없는 만물의 영장 인간을 단세포 원생동물처럼 생각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발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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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원은 리처드 체임벌린이 될 수 있을까? https://ppss.kr/archives/74516 https://ppss.kr/archives/74516#respond Wed, 24 Feb 2016 08:46:47 +0000 http://3.36.87.144/?p=74516 나는 자타공인 영화광이다. 밥 먹는 시간, 자는 시간까지 아껴 가며 정주행한 영화가 최소 만 편 이상이라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듯이 영화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제법 지론을 펼치기도 한다.

지론을 펼치다 보면 입만 살아서 마치 내가 영화의 신이라도 되는 양 떠들기도 하는데, 전지전능한 신의 입장에서도 답변이 불가능한 질문이 하나 있으니, 누군가 “지금껏 본 영화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영화는?” 하고 물어볼 때다. 수많은 영화 중에서 어느 한 편, 혹은 어느 몇 편을 콕 집어서 이야기하기란 불가능하다.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편』이란 책에 소개된 영화도 겨우 1001편이니 말이다.

그런데 지금껏 본 영화 평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이라고 묻는다면 바로 대답할 수 있다. 누군가 <검은 사제들>을 보고 올린 평이다.

 

<검은 사제들>: 강동원의, 강동원에 의한, 강동원을 위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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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승전 강동원도 아닌 그냥 다 강동원!

인류 역사상 이런 영화평은 없었다! 영화란 모름지기 각본·감독·음악·미술·의상·특수효과 등이 전부 다 어우러져 결과물이 나오는 종합예술일진대, 이토록 온전히 배우 한 사람에게만 집중이 된다면 이건 실패한 영화가 아닌가?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검은 사제들>을 본 나의 영화평 역시 이렇다. “신선한 소재 외에 특별히 추천할 만한 점은 없으나 강동원이 잘생겼다.”

200% 공감하는 한국일보 기사. 따로 스크랩해 두었다.
200% 공감하는 한국일보 기사. 따로 스크랩해 두었다.

​강동원은 안 그래도 키가 크고 팔다리가 길쭉길쭉한데 수단을 입혀 놓으니 신체의 장점이 극대화되는 자체 특수효과까지 생겼다. 사실 성직자의 옷이 얼마나 섹시한 매력이 있는지 연구한 사람들이 여럿 있는데, 그 중 『색의 유혹』을 쓴 저자 에바 헬러에 따르면 일단 검은색의 특성 자체가 옷이 아닌 몸에 집중을 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키가 작은 사람이 검은색 옷을 입으면 더 키가 작아 보이고 키가 큰 사람이 검은색 옷을 입으면 키가 더 커 보이는 현상이 발생한다. 젊은 사람이 검은색 옷을 입으면 더 젊어 보이고, 나이든 사람이 검은색 옷을 입으면 더 나이 들어 보이니, 검은색이 세련된 색인 동시에 아주 위험한 색일 수 있다고 조언하기도 한다.

엄마 자궁 속에서부터 워킹 연습을 했을 것 같은 강동원을 보니 생각나는 미국 배우가 있다. 한국에선 드라마 <가시나무새>의 랄프 신부로 유명한 리처드 체임벌린이다.

 

리처드 체임벌린: 보수적인 영국에서 인정받은 미국인

강동원 이전에 (태초에) 리처드 체임벌린이 있었으니
강동원 이전에 (태초에) 리처드 체임벌린이 있었으니

​사제복이 잘 어울리는 배우의 원조인 리처드 아저씨는 우리나라에선 <가시나무새> 주연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영국에선 ‘최초의 미국인’으로 유명하다. 리처드 체임벌린이 얼마나 대단한 배우인가 하면 영국 본토 셰익스피어 극장에 선 최초의 미국인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엄밀히 말하자면 두 번째 미국인이지만, 1920년대 존 베리모어가 주연을 맡았던 때에 비해 리처드 체임벌린이 주연을 맡았던 1960년대는 미디어 환경 자체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기 때문에 리처드 체임벌린을 최초의 미국인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게다가 리처드 체임벌린은 60년대 최고의 할리우드 청춘 스타였다. 그냥 얼굴 좀 잘 생겨서 10대 여학생들에게나 인기 많은 톱스타인 줄 알았는데, 셰익스피어 무대에 선다고 하니 그 충격과 파장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영국은 아주 보수적인 사회다. 때로는 그 보수성이 지나쳐 폐쇄적인 면모도 보이는데, 해리 포터의 팬인 드류 배리모어가 출연료 필요 없으니 그저 <해리 포터>에 나올 수 있게만 해 달라고 애걸했으나 원작자인 롤링이 단칼에 거절했다는 일화는 아주 유명하다.

롤링이 거절한 이유는 단 한 가지다. 드류 배리모어가 영국 사람이 아닌 미국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해리 포터의 감독 크리스 콜럼버스의 딸인 엘레노어 콜럼버스는 예외적으로 출연을 허락 받긴 했으나 대사가 전혀 없는 조건하에서였다. 미국 미시건 출신의 번 트로이어는 출연도 하고 대사도 있는 은총을 입었으나 그의 말은 나중에 전부 영국 성우가 재녹음하는 것으로 편집됐다. 배경이 영국인데 조금이라도 미국식 영어가 들어가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21세기에 만들어진 영화 해리 포터가 이럴진대 1960년대 상황이 어떠했겠는가? “감히 미국 배우 나부랭이가 셰익스피어 무대에 서다니!” 하면서 온갖 평론가들이 총출동했는데, 그의 연기력과 완벽한 발성에 도저히 흠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미국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영국식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지?”하는 찬사와 함께 1969년 이후 감히 그 누구도 리처드 체임벌린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배우를 완성하는 요소는 세 가지다. 역할을 빛내는 출중한 외모와 뛰어난 연기력, 그리고 정확한 발성. 보통은 한 가지를 잘 하고 간혹 두 가지를 갖춘 배우들이 있기는 하다. 평범하다 못해 투박하고 거칠기까지 한 외모지만 미친 연기력으로 처음부터 승부수를 띄우는 연기파 배우들이 있는가 하면 20대 꽃미남 배우들이 보통 재벌 2세 실장님, 본부장님 등 얼굴이 중요한 역할을 맡다가 점점 연기가 좋아져서 30대에 이르러 외모와 연기력 두 마리 토끼를 다 갖추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훌륭한 외모에 훌륭한 연기력에, 플러스 훌륭한 발성까지, 리처드 체임벌린처럼 세 가지를 다 갖추기는 정말 드문 일이다.

세 가지를 다 갖추기는 드문 일이다.
세 가지를 다 갖추기는 드문 일이다.

강동원은 첫 번째 출중한 외모와 두 번째 뛰어난 연기력을 갖췄다. 세 번째는 조금 아쉽긴 하나 열심히 노력하면 될 거라는 희망이 있다. 그가 악역을 맡아 화제가 된 영화 <군도:민란의 시대>를 보면 영화의 배경이 조선 후기 전라도 나주임에도 불구하고 문장 중간중간마다 경상도 억양이 묻어 나오는데, 특별히 독백체보다 대화체에서 강하게 드러나는 현상이 발생한다. 완벽한 영국식 영어로 영국인들을 충격에 빠뜨렸던 리처드 체임벌린처럼 완벽한 한양 말을 썼다면 참 좋았을 텐데 옥의 티다.

​그런데 말이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여기서부터다. 강동원이 설사 피나는 노력을 해서 세 번째 조건까지 갖췄다 한들 그가 리처드 체임벌린을 능가하는 배우라는 것을 확인할 방법이 있는가?

 

뿌리는 아픈데 꽃만 화려한 한국의 문화계

​영국은 보수성이 지나쳐 폐쇄적일 정도로 미국 배우를 배척하지만, 셰익스피어라는 원작을 고집스럽게 지켰고 그 원작이 구현되는 연극무대 또한 고집스럽게 지켰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 배우가 영국 셰익스피어 무대에 선다는 것 자체가 뉴스가 되는 것이다.

영국의 로열 셰익스피어 극장
영국 로열 셰익스피어 극장의 모습

​우리는 원작도 없고 연극무대도 없다. 영국의 역사학자 토마스 칼라일은 “셰익스피어를 인도와 바꾸지 않겠다. 인도는 언젠가 사라지겠지만 셰익스피어는 영원하기 때문이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잠깐만 즐거운 상상을 해 보자.

한국이 일본을 식민지로 삼았다. 그리고 나서 칼라일 같이 오만한 한국의 역사학자가 나와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땡땡땡’을 일본과 바꾸지 않겠다. 일본은 언젠가 사라지겠지만 ‘땡땡땡’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어도 그 ‘땡땡땡’ 안에 들어갈 인물이 누구지 생각하면 잘 모르겠다. 허균? 김시습? 김만중?

한국 사람들은 영화는 많이 보면서도 연극은 외면한다. 뿌리는 아픈데도 화려한 꽃만 보고 열광하는 관객이 많다. 대학로에 가면 다들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천만 영화가 계속 나오는 상황에서 티켓 한 장당 천 원짜리 연극도 계속 나오고 있다. 3만원 정가를 다 받아서는 장사가 안 되기 때문에 눈물의 땡처리를 해서라도 소진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후의 보루일 수도 있는 연기상을 생각하면 혈압이 오르기 시작한다. 원작도 빈약하고 무대의 원형인 연극도 빈약하면 대중적인 상이라도 공신력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상의 권위라는 것이 없다.

지난해 대종상 후보자 전원이 시상식에 불참하겠다는 선언을 해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얼마나 상의 권위가 없으면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있으면서도 청담동에서 여의도까지 가는 것도 귀찮아 하는가? 영국의 국보(national treasure)라고 불리는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런던에서 캘리포니아까지 비행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넜다. 그는 참석 자체가 영광이라고 말했고 말 그대로 참석만 했다.

그가 무슨 대단한 상을 받거나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건 아니었다. 그저 <노예12년> 팀과 즐거워한 게 다였고, 다른 사람들이 상을 받을 때 얌전히 앉아 축하해주기 위해 여권을 챙기고 탑승 수속을 밟은 것이다.

즐거워하는 베네딕트 컴버배치
즐거워하는 베네딕트 컴버배치

지상파 방송사의 시상식은 동네 계모임보다 더 형편없다. 하다 못해 동네 계모임은 설사 중간에 계주가 곗돈을 떼먹고 도망가는 경우가 있긴 해도 순서라는 게 있고 규칙이라는 게 있다. 방송사 시상식? 이건 뭐, 무슨 뉴스타상이니 베스트 커플상이니 공동수상이니 해서 어처구니없이 상을 남발하기나 하니…

연기상을 받았다고 해서 그 배우가 정말 연기를 잘 하는 걸까? 나는 이제 막 연기를 시작한 윤은혜와 <하얀 거탑>에서 간성 혼수 상태에 놓인 외과 의사를 소름 끼치게 연기한 김명민을 동급으로 우수상 후보에 같이 올리는 것을 본 이후로는 연기대상에 대한 관심을 아예 꺼버렸다.

언젠가 강동원이 리처드 체임벌린에 버금가는, 혹은 그 이상가는 배우로 성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잘못된 환경이 이어진다면 우리는 그것을 알아볼 수조차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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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Hi Seoul’을 바꾼 건 매우 잘한 거다 https://ppss.kr/archives/65278 https://ppss.kr/archives/65278#respond Thu, 31 Dec 2015 02:40:01 +0000 http://3.36.87.144/?p=65278 하이 서울 Hi Seoul이 ‘안녕, 서울’이 아니라 ‘서울에 인사하시오’가 될 수 있다고 처음 이야기한 사람은 코리아 헤럴드의 최용식 기자로 그의 저서 <한국영어를 고발한다>를 보면 하이 서울의 문제가 뭔지 마치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조목조목 정리하고 있다. 다만 나는 여기서 이미 과거의 브랜드가 된 하이 서울의 총체적 문제점보다는 하이 서울이 ‘서울에 인사하시오’가 되는 문맥적, 상황적 오류에 대해 최대한 자세하게 풀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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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와 남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다르다

‘나는 겸손합니다’라는 문장이 있다. 문법적으로는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하다. 그런데 실제로 누군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는다면 뭐야? 자기가 자기 보고 겸손하대. 웃기는 사람 아니야? 하는 마음이 들 것이다. ‘나는 효자입니다’역시 문법적으로는 괜찮은데 자식의 입장으로서 난 효자예요 하고 말하면 좀 웃기는 상황이 된다. 효자인지 아닌지는 부모가 판단하는 게 아닌가?

내가 기업체 강연을 갈 때마다 처음에 분위기를 풀기 위해서 너스레 떨 때 자주 쓰는 문구가 있었다. “여러분, 제가 못생겼잖아요. 저는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면 보통은 청중 쪽에서 아니에요, 예뻐요! 미인이세요! 가 나오기 마련인데 한번은 “그렇군요. 진짜 영어를 잘하실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군요.” 라고 말한 남자 사람이 있었다.

너같이 미친 새끼는 어느 부서 소속이십니까? 하고 따져 묻고 싶었으나 꾹 참고 어색하게 웃으며 서 있는데 그다음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래도 요즘은 단순히 예쁜 것보다는 동안이 대세니까 이명현 선생님은 희망이 있네요.” 굳이 이렇게 확인사살까지 하다니… 뒷목 잡고 쓰러질 뻔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와 남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분명 다르다. 같은 주제라도 화자와 청자의 표현 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다. 부모는 자기 자식 보고 우리 집 못난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남이 내 자식 보고 “그 집 못생긴 막내딸 잘 있어요?” 하면 즉시 그 사람은 원수가 된다.

​반대로 어떤 정치인이 “여러분, 저는 정말 겸손하고 진실한 사람입니다.”하면 대박 미친 사람 취급을 받겠지만 제3자가 나서서 “여러분, 땡땡 후보는 정말 겸손하고 진실된 사람입니다” 해 주면 사람들은 그런가? 하고 모여들게 된다. 그래서 홍보 기법 중에 ‘endorser 활용 방안’이라는 게 있다. 뭔가 대단히 전문적인 말 같지만 쉽게 말해서 좋은 이야기를 나 스스로 자랑하기는 민망하니 제3자의 입을 빌려서 하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와 남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구분 못 해서 실수를 많이 했던 사람이 전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인데(아마도 이 아저씨보다는 한국 대학생들이 영어를 훨씬 더 바르고 고급스럽게 구사할 것이다) 지금도 회자하는 역대 최고급 실수가 1991년 영국 여왕의 백악관 방문 시 자신을 ‘부시 가문의 문제아’라고 소개한 일이다. 본인 스스로 본인을 가문의 문제아라고 소개한 것은 겸손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으나 부시 아저씨는 여기서 한 발 더 나갔다. “우리 가문의 문제아는 난데 당신 가문의 문제아는 누구인가요?”

질문을 이렇게 하면 엘리자베스 여왕은 뭐라고 대답해야 옳은가? ‘우리집 문제아는 찰스 왕세자예요’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면 앤 공주? 여왕이 뭐라고 했는지는 언론에 알려진 바가 없지만 당시 영부인이었던 바바라 부시 여사가 이 철없는 아들을 호되게 야단쳤다는 비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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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부시 주니어를 한심하게 쳐다보는 여왕님…

 

하이 서울은 대체 누가 하는 말인가

하이 서울은 십 년 넘게 사용했던 슬로건이다. 사실 슬로건이라고 하기엔 너무 짧아서 슬로건이라고 부르기에도 참 민망하지만 말이다. 우리는 하이 서울이 너무 익숙해져서 ‘안녕 서울’로 바로 해석하는데 잠깐만 예전 중학교 때 교과서를 한번 떠올려 보자. 교과서 종류마다 다르긴 하지만 대개 1장은 반가운 인사말로 시작해 주신다. “Hi Jane! – 안녕 제인!”이라고 반갑게 인사한다. 그럼 또 “Hi John! – 안녕 존!”이라고 반갑게 인사한다.

그러면 여기서 ‘하이 제인’이라고 말한 사람은 누굴까? 자기가 자기 보고 하이라고 말하지는 않을 테니까 말한 사람은 존이다. 반대로 ‘하이 존’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제인이다. 인사라는 것은 누군가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걸 또 받는 사람이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면 하이 서울은 누가 누구에게 말을 해야 정상인가? 서울이 서울 보고 안녕 서울! 할 수는 없는 거니까 인사를 하는 사람이 외국인이 되고 인사를 받는 주체는 서울이 되는 기이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대접해야 하는 호스트 서울이 대접받아야 하는 게스트 외국인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거꾸로 게스트인 외국인이 호스트인 서울에게 하는 말이 돼 버린 것이다.

보통은 출발지를 떠나 어느 도착지에 당도하면 환영합니다, 라는 말을 기대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웰컴이 아니라 하이라고 하니 왜 내가 할 말을 저쪽에서 하는 거지? Say Hi to Seoul? 인가 하고 혼란스러워지게 된다. 하이 서울을 그냥 보면 안 이상할 수도 있는데 공항에 딱 도착하자마자 하이 서울을 보면 정말 이상하다. 어라, 여기는 웰컴이 아니라 하이 서울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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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어느 유력 정치인이 ‘한국에선 이런 식으로 사람을 환영하나요?’ 라고 질문했을 때 얼굴이 화끈거려 그 자리에서 증발해 버리고만 싶었다. 다행히 그는 의전상에 불만이 있어서 그렇게 질문했던 것 같진 않고 진짜로 궁금해서 물어봤던 것 같다. 영어로는 헤어질 때 다 같이 Goodbye이라고 해도 한국어로는 안녕히 가세요, 와 안녕히 계세요, 로 나뉜다는 것을 알고 있을 정도로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이 서울의 이런 부분을 지적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어딜 가나 대접 잘 받고 다니시는, 소위 말해서 ‘높은 분’들이 많았는데 어차피 서울이 국제적인 도시로서 세계적 명사들 앞에서도 손색이 없어 지려면 하이 서울은 서울에게 걸맞은 슬로건이 아니었다.

결론. 하이 서울을 바꾼 건 정말 잘한 거다. 그게 아이 서울 유여서 문제였던 거지.

원문 : 이명헌의 영어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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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서울 유’가 왜 ‘나는 너의 영혼을 빼앗겠다’냐고? https://ppss.kr/archives/62494 https://ppss.kr/archives/62494#respond Wed, 25 Nov 2015 09:18:13 +0000 http://3.36.87.144/?p=62494 지난주 글(「영어로 밥 벌어먹는 사람이 바라보는 I SEOUL U: 차라리 영어 안 쓰면 안 되나?」)이 약간 불친절하고 이해가 잘 안 가는 부분이 있다는 의견이 많아 보충 설명을 하고자 한다.

일단 서울의 새 슬로건인 아이 서울 유(I SEOUL U)는 명사인 서울을 ‘서울하다’로 동사화시킨 문법적 오류가 있긴 하지만, 난 이 부분은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원래 언어라는 것이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신조어를 만들어 내기도 하고 사어를 만들어 내기도 하니까 ‘서울하다’라는 말도 자꾸 쓰다 보면 언젠가 옥스포드 사전에 오를 수도 있다. 사실 구글하다, 페이스북하다, 포토샵하다 라는 동사도 원래는 존재하지 않는 단어였지만 지금은 아주 흔하게 쓰이고 있는 필수 동사들이다.

옥스포드 사전에서 구글을 찾아보았다.
옥스포드 사전에서 구글을 찾아보았다.

문제는 ‘서울하다’의 뜻이 과연 뭐냔 말이다. 구글하다는 ‘검색하다’, 페이스북하다는 말 그대로 SNS의 대표주자인 ‘페이스북에 사진이나 글을 올리다/보다’, 포토샵하다는 ‘이미지를 수정하다’라는 확실한 뜻이 있는데 동사 ‘서울하다’는 대체 무슨 뜻일까?

 

서울하다?

잠깐만 내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왕년에 파워 블로거였다(정확히는 이틀 정도). 어떤 뉴스나 이슈를 소개한 후에 그 상황과 묘하게 어울리는 영어 명언 하나씩을 연결하는 블로그를 운영했었는데 어느 금요일 저녁 ‘이명박 대통령님 사랑합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포스팅했다가 이게 주말 내내 다음 메인 화면에 걸리면서 난리가 났다. 그리고는 월요일 아침 상사한테 불려가서 엄청 깨졌다.

장황하게 사랑 고백을 쭉 하다가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마무리했었다. “대통령님께 강아지를 한 마리 선물하고 싶습니다. 강아지는 고양이와 달라서 쥐를 잡는 습성이 없으니 안심하고 청와대에서 키우셔도 됩니다.” 우연히 다음에 접속했다가 내 글을 본 상사는 기겁했고, 지금 회사에서 맡고 있는 정부 관련 프로젝트가 몇 개인데 네가 이런 글이나 쓰고 있느냐고 화를 냈다. 100퍼센트 맞는 말이었다. 블로그를 폐쇄했다.

강아지는 박근혜에게 선물됐다.
청와대에 선물된 강아지들… (출처: 데일리벳)

그러자 여기저기서 문의 및 항의가 빗발쳤다. 무슨 일 있느냐? 잘 지내느냐? 는 걱정 어린 안부 문자부터 아고라에 명현스런 글을 다시 보고 싶다는 청원을 하겠다는 전화까지 받았는데 제발 참으시라고, 그러시지 말라고 빌고 또 빌었다. 일단 사람들은 이명현이 누군지 모른다. 그리고 이명현이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 중에서도 개인 블로그에 쓴 글을 읽는 사람은 정말 소수일뿐더러 끝까지 제대로 읽는 사람은 더 소수다. 게다가 좋아해 주기까지 하고 나의 독특한 반어법 스타일을 이해하는 사람은 완전 극소수이므로 ‘명현스런 글을 다시 보고 싶다’고 청원하기 위해선 이명현, 이명현의 글, 이명현의 글쓰는 스타일–이렇게 허들을 세 개나 뛰어넘어야 하는 미션 임파서블이었던 것이다.

출처: 론리플래닛
출처: 론리플래닛

다행히 서울은 이미 국제적으로 유명한 도시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바는 이미 많이 알려져 있긴 하지만 서울을 지금보다 더 유명하게 더 좋은 이미지로 널리 알리고자 새롭게 영어 슬로건도 만들었던 것인데, 한번 잘 생각해 보자. ‘아이 서울 유–나는 너를 서울하다’가 서울이 어떤 곳인지 바로 설명해 주는 문구가 아니라 ‘서울하다’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따로 필요하다.

아이게 또 한국어로는 ‘나와 너의 서울’이니 영어 슬로건 설명과 별개로 한국어 슬로건 설명이 따로 가야 한다. 다시 말해서 서울, 아이 서울 유, 나와 너의 서울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하나하나 따로따로 각각 알려야 하니 숙제만 3배로 불어난 셈이다.

아이 서울 유를 새로운 슬로건으로 채택하기 위해선 먼저 서울하다가 무슨 뜻인지에 대한 정의부터 내렸어야 했는데 3세대 개방형 도시 브랜드 전략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고 하니 진짜로 ‘나는 너를 팔았다’, ‘나는 너의 영혼을 빼앗는다’ 등 온갖 해석이 다 나오는 것이다.

참고로 나는 해리 포터를 쓴 작가 J. K. 롤링과 같은 학교를 나왔고 아이 서울 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맨 먼저 물어봤던 외국인 그룹은 대학 동기들이므로 이들이 서울을 발음이 비슷한 소울로 착각하고 “I soul you… You mean, I suck out your soul?”이라고 한 것은 예상 가능한 반응이었다. 해리 포터 영화 속에서 디멘터가 사람의 영혼을 빨아먹는 장면이 너무나 강렬해서 soul-sucking 이라는 형용사가 아예 새로 생겼고 2014년도에 새로 발견된 말벌 종을 학자들이 soul-sucking dementor 라 명명했을 정도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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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포터는 문학뿐만 아니라 생물학까지 영향을 끼쳤다.

나야 영국에서 공부했으니까 아이 서울 유를 영혼을 빼앗는다라고 해석한 친구들이 많았다고 해도,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서 공부한 이준석 씨와 한국의 고려대학교에서 공부한 이철희 소장은 누구에게 물어봤길래 내 친구들과 같은 해석을 얻었는지 궁금하다.

 

인크레…딘버러?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딘버러는 2012년에 인크레더블(Incredible)과 에딘버러(Edinburgh) 를 합쳐서 인크레딘버러(Incredinburgh) 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가 시민들의 반응이 너무 안 좋자 포기했다. 이미 30만 파운드를 홍보비용에 쏟아부은 상태였지만 사람들이 하도 괴상한 단어를 만들었다고 항의하자 시민들의 뜻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달리 시민을 강조하는 박원순 시장이니까 에딘버러의 경우처럼 “새로 만든 슬로건이 이상해요? 그럼 이건 접기로 하고 한 번 더 논의할까요?” 할 수도 있을 줄 알았는데 미스터 손의 뉴스룸에 출연하셔서는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그냥 가겠다고.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으신다고 하니 결국 서울의 운명은 다시 한 번 네티즌들 손에 있게 되었다. 작년에 가디언에서 실시한 전세계 주요 도시 브랜드 파워 조사에서 서울은 LA, 뉴욕, 런던, 파리에 이어 당당히 5위를 차지했다. 우리의 영원한 숙적 일본의 도쿄는 28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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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뉴욕, 런던, 파리에 이어 5위

그런데 전체 점수는 5위 대 28위인데 세부사항을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관광 시설을 포함한 도시 매력 지수, 환경, 인프라, 경제적 활동성 등 도시가 갖고 있는 자산 부분은 도쿄에 뒤쳐지지만 서울이 SNS상에서의 언급도가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해서 전체 점수를 더하니 5위라는 결과가 나왔다.

이 말인즉슨, 서울의 브랜드 파워는 순전히 대한민국 네티즌들이 열심히 언급하고 클릭한 공로로 생겼다는 것인데 이 나라는 옛날부터 항상 이랬다. 전쟁 중에도 왕은 도망을 가는데 의병들이 일어나 나라를 지키고 정치인들이 아무리 뻘짓을 하고 공무원들이 아무리 삽질을 해도 국민들이 워낙 똑똑하고 부지런해서 다 커버해 주니까 누군가의 말처럼 역설적으로 그저 국민 믿고 까부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이다. 나는 ‘아이 서울 유’를 볼 때마다 참 속상하다.

 

‘하이 서울’이 어떻게 해서 ‘서울에게 인사하시오’가 되는지 모르겠다는 의견도 많아 이 부분은 따로 다음주에 설명하려고 한다. 이러다가 내가 애정하는 강동원은 언제 얘기하지? 하는 두려움이 점점 커지고 있지만 우리의 서울은 소중하니까. 서울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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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로 밥 벌어먹는 사람이 바라보는 I SEOUL U: 차라리 영어 안 쓰면 안 되나? https://ppss.kr/archives/61425 https://ppss.kr/archives/61425#respond Mon, 16 Nov 2015 11:49:12 +0000 http://3.36.87.144/?p=61425 서울시 새 슬로건이 공개된 지 2주가 지났다. 이제야 글을 쓰는 이유는 처음에 너무 충격을 받아서 키보드 자판을 누를 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제발, 외국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I soul you? 난 너의 영혼을 빼았겠다라고? 아시아의 영혼 서울이 순식간에 죽음을 먹는 자들이 날아다니는 해리 포터의 서울이 됐다. I sold you 라고도 들린다. 나는 너를 팔았다? 죽음을 먹는 자들의 도시든 인신매매의 도시든 후덜덜하긴 마찬가지다. 그런데 “아이 서울 유”가 나와 너의 서울이라는 뜻을 가졌단다. 이건 또 무슨 말이야?

만약 뉴욕에 사는 사람들에게 새 슬로건을 반드시 한글 단어 중에서 하나 정해야 한다고 말하고, 다음 보기 중에 하나를 넣어야 한다고 생각해 보자. 살인, 강간, 방화. 그리고 뉴욕 시민들이 살인을 선택했다고 치자. 우리는 기겁하겠지만 그들은 행복할 것이다. Sa-rin, Gang-gan, Bang-hooa 등은 발음하기가 비교적 편하기 때문이다.

혁신, 융합, 번영 등은 뜻이 좋아도 절대 안 된다. 이중모음에 받침까지 있어서 대다수 뉴욕 시민들이 발음할 수 없다. 게다가 번영(Burn young)의 경우 ‘젊은 사람을 불태워 죽이다’로 들릴 수도 있다. SK의 원래 사명은 선경이었는데 영어권 사람들에게는 Sunk Young(젊을 때 가라앉다)으로 들렸다. 1998년 초, 선경을 SK로 바꾸고 대대적으로 새로운 CI 선포식을 진행했던 것은 아주 탁월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 귀와 외국인의 귀는 다르다
우리 귀와 외국인의 귀는 다르다

박원순 시장 이하 서울시 측에서는 서울시민의 뜻을 모았다고 아주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아름다운 서울’이나 ‘살기 좋은 서울’, ‘행복한 서울’ 등 우리말을 사용하는 슬로건이라면 얼마든지 또 당연히 그래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영어 슬로건이다. 서울시민의 모국어는 한국어지 영어가 아니다.

생각해 보라. 급히 응급수술을 받아야 할 환자가 있는데 보통 사람 100명의 상식에 근거해서 집단지성을 활용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한 명의 전문가인 의사를 찾아가겠는가? 도시 브랜딩은 전문가의 영역이다. 수많은 브랜드 전문가들, 컨설팅 회사들, 브랜드만 연구하는 학자 및 기관들이 왜 존재하겠는가?

도심에 꿀벌을 날린다거나 청사를 도서관으로 활용한다거나 한강 텃밭을 개장한다거나 돌고래 제돌이를 위시해서 동물의 권리까지 배려한 일련의 시정은 모두 진심으로 박수 받아야 한다. 하지만 브랜딩은 다르다. 게다가 영어라는 다른 전문 영역을 또 끌어들였다.

이명박 인수위 시절의 가르침
이명박 인수위 시절의 가르침

 

왜 굳이 되도 않은 영어를 붙여야 하는가

그냥 ‘아이 서울 유’는 없애고 ‘나와 너의 서울’로만 가면 안 되는 걸까? 왜 굳이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 영어를 꼭 넣어야만 하는가? 질문을 해 놓고도 창피하다. 답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왜냐하면 한국 사회에서는 무조건 영어가 있어야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내가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 뼈저리게 느낀 사실이 하나 있다.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영어를 잘 하는 게 아니다. 영어를 잘 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다! 이 말인즉슨 실제 영어와 전혀 상관 없이 상사가 좋아하는 영어 단어를 파악하는 것이 어떤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관건이 된다는 소리다.

서울시 측에서는 외국인들도 엄청 좋아했다고 주장하는데, 그럼 서울처럼 큰 도시의 행사에 초대받은 자리에서 감히 나쁜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 언론인이야 John Burton처럼 Seoul’s terrible new slogan와 같은  칼럼을 쓰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결정권자의 심기를 간파하는 눈치100단 고수들이다. 한국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에게서 진짜 속마음을 알긴 어렵다.

사실 원래 쓰던 하이 서울도 엄청 조롱거리였다(오세훈 전 시장이 박원순 현 시장을 비판하는 것도 참 어이가 없는 일이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대한민국 국민들은 하이 서울을 “안녕, 서울”로 해석하나 실제 뜻은 “서울에게 인사하시오”다. 여기서도 하이가 동사로 쓰였다. 차라리 형용사 high 를 썼다면 좋을뻔 했다.

너도 마찬가지야(...)
너도 마찬가지야(…)

하이 서울도 참 이상하기 짝이 없었지만 난 지금처럼 분노하지는 않았었다. 국정 역사교과서야 한글로 인쇄되어 한국 안에서만 유통되겠지만, 아이 서울 유는 영어권 사람 누구나 보고 비웃을 수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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