ㅍㅍㅅㅅ https://ppss.kr 필자와 독자의 경계가 없는 이슈 큐레이팅 매거진 Tue, 21 Jan 2025 03:29:13 +0000 ko-KR hourly 1 https://wordpress.org/?v=5.8.10 https://ppss.kr/wp-content/uploads/2015/07/ppss-100x100.png ㅍㅍㅅㅅ https://ppss.kr 32 32 “그냥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온 건데요?” https://ppss.kr/archives/268404 Tue, 21 Jan 2025 03:29:13 +0000 http://3.36.87.144/?p=268404 집중해서 일할 때는 클래식이나 OST, 연주곡 같은 가사 없는 곡을 BGM으로 틀어 놓는다. 반면 반복, 단순 작업을 할 때는 소위 ‘노동요‘라는 제목이 붙은 속도감 있는 노래를 듣는다.

‘노동요’라는 제목만 보고 별생각 없이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생각보다 오래된 노래가 흘러나왔다. 듣다가 궁금해 노래 제목을 훑어보니 Y2K 감성이 물씬 풍기는 노래들이었다. 감성의 날이 바짝 서 있던 10~20대를 관통했던 그 시절 노래를 부른 주인공들의 얼굴이 하나둘 떠올랐다.

그런데 그 많은 뮤지션 중 지금까지 폼을 유지하며 가수 활동을 이어가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인기 하락, 엔터 업계에 대한 환멸, 사건, 사고, 결혼이나 육아, 사업 등등 활동을 하지 않는 이유는 많았다. 논란 없이 20여 년 넘게 꾸준히 활동하는 가수는 몇 없었다.

사진: UnsplashRoberto Sorin

나이를 먹어 갈수록 한 분야에서 오래 일을 한 사람을 볼 때,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시장에서 40년 넘게 소머리 국밥을 말아 온 할머니부터 박물관에 전시될 전통 예술품을 만드는 무형유산 장인까지. 그런 분들을 만날 때마다 진심을 다해 ‘대단하시다’고 쌍 엄지를 번쩍 추켜올리면 똑같은 장면이 재생된다. 다들 부끄러운 듯 손사레를 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대단은 무슨, 그냥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온 건데요.

아침이면 기대보다 두려움을 안고 눈을 뜨는 요즘,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자기 일을 묵묵히 해내는 사람들이 존경스럽다. 자의든 타의든 한자리를 지키는 일의 어려움을 절실히 실감하는 중이다.

나의 의지나 능력도 불가피한 천재지변급 상황 앞에서는 무력해지는 순간이 온다. 그 모진 풍파를 다 견디고 경력 30년, 50년이란 타이틀을 달고 장인 대열에 서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다. 어디 일뿐일까? 취향도, 목표도, 관계도, 변함없이 한결같다는 건 상상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다.

생각 많고, 변덕스럽고, 엉덩이가 가벼운 내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조금이라도 싫증이 나거나 희망이 보이지 않으면 쉽게 방향을 튼다. 확신은 없고 불안에 떨다 썩은 동아줄을 내팽개치고 빨리 새 동아줄로 갈아탈 기회만 노린다. 앞은 보이지 않고,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감도 안 잡히는 날들 속에서 내가 택한 생존법이다.

한 분야의 터줏대감 같은 분들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그냥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는 것의 실체는, 그저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온 날들이 쌓인 결과다. 그들은 반짝하는 순간에만 빛나는 사람들이 아니다. 평범한 날들을 하루하루 쌓아가며 대체할 수 없는 역사를 만들어 온 존재들이다. 지루하고 다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드는 날에도 묵묵히 하던 일을 계속해야 얻을 수 있는 결과다.

Image by jcomp on Freepik

고인물. 고루한 존재에 대한 부정적인 의미로 쓰던 말이 이제는 한 분야에서 높은 경지에 이른 사람에게 존경의 의미를 담아 부르는 표현이 됐다. 혁신, 창조, 트렌드 같은 단어가 득세하는 세상에서 고인물의 존재는 더 빛난다.

시류에 휩쓸려 가지 않고, 청천벽력 같은 사건에도 꺾이지 않고 소신대로 내 갈 길 가는 사람들.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실감하는 계절이다. 그런 사람들이 제일 부러운 요즘이다.

원문: 호사의 브런치


이 필자의 다른 글 읽기

]]>
남의 다이어트 일기를 보고도 거울 치료가 되나요? https://ppss.kr/archives/267382 Wed, 01 Jan 2025 14:03:47 +0000 http://3.36.87.144/?p=267382 SNS 알고리즘이 다이어트로 도배된 이유

나폴레옹 사전에 불가능이란 단어가 없다면, 내 사전에는 ‘군살’이라는 단어가 없는 줄 알았다. 인생의 대부분을 저체중으로 살았으니 나는 살이 찌지 않는 ’축복받은 체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체질이 아니라는 걸 중년이 되고서야 알았다. 노화의 여러 증상이 있지만 그중 내가 가장 절실하게 체감하는 건 방심하면 불어나는 군살이다. 방심하면 하루가 다르게 구석구석 살이 붙는다. 한창 먹성 좋던 시절처럼 먹었다가는 내 몸이 걷잡을 수 없이 사이즈 업 된다는 걸 마흔 가까이 되고서야 알았다.

식사량을 줄이고, 밀가루나 기름진 음식을 멀리하는데도 살이 사채이자처럼 무섭게 불어난다. 하염없이 붙은 살이 키로 가면 좋겠지만 난 아쉽게도 성장기가 아니라 갱년기에 가깝다. 몸 곳곳에 쌓인 군살은 좀처럼 빠지지도 않고, 빼기도 어렵다. 하루하루 낡아가며 몸의 효율이 떨어졌다.

Image by freepik

관심사가 이러니 SNS 알고리즘은 자연스럽게 다이어트 관련 영상으로 도배됐다. 다이어트 도전 영상을 수없이 봤다. 식이 조절, 근력 운동, 다이어트 댄스, 체중 감량 보조제, 특정 부위를 조져(!)주는 기적의 운동기구 사용기 등 모두가 각자의 방법으로 열심히 살을 빼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좋아하는 장르는 다이어트 일기다. 매일매일 꾸준히 살을 빼기 위해 뭔가를 하는 사람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지금은 군살 따위는 없는 매끈한 사람도 시간을 거슬러 가보면 전혀 다른 푸짐한 모습이었다. 꾸준히 뭔가를 하는 게 그 어떤 일보다 어렵다는 걸 알기에, 다이어트 동지의 마음으로 조회수와 좋아요 숫자를 올려주며 응원한다.

 

성공하는 사람은 ‘그냥’ 하더라

시도가 모두 성공으로 이어지면 좋겠지만 슬프게도 가혹한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번만큼은 꼭 성공하겠다며 독하게 마음먹었지만 의지를 꺾는 뜻밖의 일이 불시에 생긴다. 요요라는 최악의 결과를 받아 들고 시작할 때보다 더 불어난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서면 다행, 몇몇은 ‘먹텐션’을 올려 다이어트에서 먹방으로 전공 분야를 바꾸기도 한다. 그도 아니면 이렇다 저렇다 인사도 없이 업로드를 중단하고 사라지는 게 대부분이다.

다이어트 일기를 꾸준히 보니 성공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의 차이가 보였다. 성공하는 사람은 ‘그냥‘ 꾸준히 했다. 폭염이 오건, 태풍이 불건, 교통사고가 났건, 함께 사는 강아지가 아프건 그냥 하던 대로 식단을 하고, 운동을 했다. 팔이 부러졌으면 멀쩡한 다리로 천국의 계단이라도 올랐다. 연인과 헤어졌다면 슬픔을 이겨내기 위해 빗속을 달리며 눈물의 러닝을 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실패하는 사람은 어땠을까? 운동이든 식단이든 이어가지 못할 이유를 끊임없이 찾았다. 부상, 생리, 스트레스, 우울, 실연, 퇴사, 술 약속, 여행, 가정 문제, 폭우, 사고, 손가락이 미끄러지는 바람(우스개 소리라는 걸 안다)에 배달 음식을 시키는 등등 피치 못 할 사정이 많았다. 상황 탓, 날씨 탓, 기분 탓, 남 탓하기 바빴다.

다시 봐도 명언인 이유

성공하는 사람은 살 빼기라는 다이어트의 목적에 충실했다. 이유가 단순하면 성공하고 이유가 많고 복잡하면 실패하기 쉽다. 뭔가 하기 싫을 때마다 하지 않아도 될 이유부터 찾았던 자기 합리화의 달인은 뜨끔했다. 이게 바로 거울 치료의 효과인 건가?

목표가 선명할수록 사람은 단순해진다. 다른 곳에 에너지를 분산시킬 여유가 없다. 간절하면 덜 간절한 것들을 차례로 포기하게 된다. 그 말은 즉 포기한다는 건 덜 간절하다는 뜻이다. 원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당장의 즐거움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무슨 일이든 목표한 바를 이루고 싶다면 특별한 비결이나 쉽게 가는 꼼수란 없다. 단순하게 노력하는 게 답이다.

원문: 호사의 브런치


이 필자의 다른 글 읽기

]]>
평점을 얼마나 믿으세요? (Feat. 별점의 함정) https://ppss.kr/archives/267379 Wed, 20 Nov 2024 01:49:41 +0000 http://3.36.87.144/?p=267379 카카오 지도 앱 별점 2.5. 평소였다면 과감히 선택지에서 지웠을 낮은 평점에 오히려 호기심이 생겼다. 파워 계획형 인간은 얼마 전 삼척 여행을 하기 전, 숙소 도착 후 근처에서 첫 식사를 할 만한 곳을 찾았다. 그때 <부일 막국수>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삼척을 대표하는 막국수집이라고 했는데 왜 이리 평점이 낮을까?

후기들을 꼼꼼히 읽어 내려가니 이해가 갔다. 만족은 맛과 양에 대한 부분이 많았고, 불만은 지옥 같은 대기와 불친절한 서비스에 대한 부분이었다. 유명하다고 해서 가보긴 했는데 대기와 서비스에서 불쾌한 경험을 한 사람들의 뾰족한 후기가 많았다.

평소라면 불만 부분에 수렴하고 다른 대안을 찾을 나였지만 왜인지 정면 돌파를 택하고 싶었다. 웨이팅 문제는 대기가 적은 시간에 가면 해결될 일이고, 서비스에 대한 불만족 부분은 직원들이 컨디션이 비교적 온전한 시간을 공략하면 되는 거 아닐까? 모든 문제는 한적한 시간에 가면 해결된다는 뜻이다. 저녁 장사도 없이 오전 11시에 영업을 시작해 재료가 떨어지면 바로 문을 닫는 극악의 난이도. 다행이라면 우리가 간 시기는 성수기도 지났고, 주말도 아닌 ‘비성수기 평일’이라는 점이었다. 숙소에 짐을 맡기고 서둘러 막국수집으로 향했다.

부일막국수 차림표 / 출처: 식신 현우아빠

오전 11시. 밭과 주택이 드문드문 늘어선 한적한 동네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다소 웅장한 식당 건물의 위용에 살짝 놀랐다. 오픈 시간에 맞춰 도착했는데 이미 주차된 차가 몇몇 보인다. 넓은 주차장을 보면 그 가게에 얼마나 많은 손님이 오가는지 알 수 있다. 단정한 조경과 대기용 큼직한 2개의 정자에서 주인의 애정과 자부심을 느꼈다.

신발을 벗고 실내로 들어가니 우리보다 앞서 도착해 막국수를 기다리는 부지런한 사람들이 보였다.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물 막국수 두 개에 비빔 막국수 하나 그리고 맥주 한 병. 처음이었지만 자주 와본 것처럼 자연스럽게 주문했다. 이게 다 사전에 철저한 공부를 한 덕이다. 오픈 시간이라 주문이 밀리지도 않았고, 이거 달라 저거 달라 아우성치는 손님도 없으니, 직원들도 아직 컨디션이 좋다.

내가 이 식당을 선택한 이유를 일행들에게 브리핑하는 사이 차가운 맥주와 함께 무김치와 백김치가 먼저 도착했다. 요즘 배춧값이 금값이라 김치냉장고 속 시어 빠진 묵은지 말고 싱그러운 배추김치를 마주한 게 얼마 만인지 감격스러울 정도였다. 채 친 풋고추를 듬뿍 올린 백김치를 한 젓가락 집어 들고 대기. 맥주를 한잔 시원하게 들이켜고 백김치를 입에 넣었다.

출처: 식신 현우아빠

아삭하게 씹히는 배추와 매운맛은 전혀 없고 풋고추 특유의 향만 입안에 은은하게 남았다. 도시의 흔한 인공적인 단맛은 없다. 배추 특유의 단맛, 천일염의 짠맛, 그리고 자연 발효되면서 생겼을 살짝 새큼한 맛이 밸런스 좋게 어우러져 훌륭한 애피타이저가 됐다. 경기도에서 출발해 강원도 삼척에 오느라 새벽부터 서두르고 KTX를 타느라 울렁거렸던 속이 말끔하게 씻겨 내려갔다.

잠시 후, 큼직한 하얀 대접에 담긴 막국수가 도착했다. 오이채와 무김치, 깨가 넉넉하게 들어간 막국수다. 일단 숟가락으로 국물부터 한 입 떠먹었다. 오잉? 뭐지? 슴슴했다. 연한 바닷물에 감칠맛 내는 조미료 2방울 똑 떨어뜨린 것 같은 순수한 맛이었다. 외지 것들의 어설프게 먹는 모습을 보고 직원은 강원도 사투리 듬뿍 담긴 어투로 말했다.

바닥에↘ 양념장 있으니까↗ 섞어 드세요→.

이것 또한 알고 있었다. 수많은 후기들을 훑으며 입력된 정보다. 하지만 순정을 맛보고 싶은 욕심에 조심조심 양념장이 흐트러지지 않게 입으로 첫인사를 했을 뿐이다.

그 후 면을 살짝 들어 무김치+오이채와 함께 후루룩 들이켰다. 까만 메밀 껍데기가 살아 있는 거친 면이 입안에 착 감겼다. 어느 정도 순정을 맛본 후 젓가락을 깊숙이 넣어 바닥의 양념장과 훌훌 섞으니 자작한 비빔 막국수가 됐다. 도시에서 흔히 먹던 시고 달던 막국수와는 다른 맛이다. 테이블 위에는 식초와 설탕, 연겨자 튜브까지 갖춰져 있었지만, 굳이 넣어 맛을 해치고 싶지 않았다. 촌스럽고 투박하기까지 한 맛과 향이 입안에 오래 남았다. 왜 그런 웨이팅 지옥이 생겼는지, 왜 서비스에 불만을 늘어놓는지 이해가 갔다.

도시의 패스트푸드처럼 앉자마자 튀어나오는 음식이 아니었다. 많은 시간과 정성이 쌓여야 나올 수 있는 맛이었다. 그러니 바쁘다 바빠 현대 사회 속에서 속도전을 치르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느리고, 불친절한 맛이다. 바다가 지척이라 신선한 해산물 음식이 흔하다 해도 삼척에 왔다면 이 막국수 한 그릇을 맛볼 가치가 있다. 순수하고 투박한 막국수 한 그릇이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번지르르한 식당에서 공장제 소스를 넣고 끓인 반짝반짝한 생선조림보다 나았다.

Image by freepik

별점 2.5. 지금껏 난 이 숫자를 달았다는 이유로 유명 음식점의 훌륭한 음식을 맛볼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곤 했다. (3.5점 이상은 되어야 검토한다.) 사람마다 음식점을 선택하는 각자의 이유가 있겠지만 별점 2.5점은 음식점 선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처음 가는 곳이라면 더더욱. 나처럼 별점 숫자로 이 막국수집을 탈락시켰을 많은 사람들이 있을 거다.

<부일 막국수>는 숫자 말고 후기를 꼼꼼히 읽어 봐야 할 이유를 알려줬다. 혹독한 자영업의 세계에서 사이비 종교처럼 찬양 일색으로 후기가 차 있다면 오히려 작업(!)을 의심해야 한다. 동전의 양면처럼 불만과 만족은 등을 꼭 맞대고 있다. 더군다나 소비자는 칭찬에 인색하고 ‘까’는데 희열을 느낀다. 후기의 세계는 어둠의 맛 평가단이 활개를 치는 곳이다. 그래서 별점을 참고할 거라면 내가 수용 가능한 것과 절대 수용 불가한 걸 구분해야 한다.

별점을 무기처럼 쥐고 흔드는 사람의 입김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선 확실한 자기만의 기준이 필요하다. 때로는 평점을 모르고 우연히 들어간 카페의 커피 한 잔에 감동할 때도 있고, 평점을 철썩 믿고 들어간 맛집에서 실망스러운 한 끼를 먹을 때도 있다. 평점이라는 다수의 의견을 참고할 수도 있지만 그게 세상의 전부인 양 맹신할 필요가 없다. 결혼, 출산, 주식, 부동산, 자동차 등 사람들이 안 하면 큰일 날 거라고 겁을 주던 평균의 삶을 살고 있지 않아도 나름의 행복을 찾으며 큰 불만 없이 사는 나 같은 사람도 있으니까.

여행의 첫 단추를 기분 좋게 끼운 식사를 마친 후 화장실에 가기 위해 건물을 빙 돌아가야 했다. 길을 잘못 들어 식당 뒤편의 풍경을 본의 아니게 엿봤다. 살짝 열린 틈으로 수다를 떨며 배추를 다듬는 직원분들의 미소가 보였고, 고추가 주렁주렁 달린 텃밭이 보였다. 아마 머지않아 막국수와 함께 상에 오를 백김치가 될 재료들일 거다.

한자리에서 오래 그 자리를 지키며 영업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시대인가? 손님이 보지 못하는 순간순간 쌓은 정성이 모여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맛을 만들어 낸다. 평점에 휘둘렸다면 맛보지 못했을 그 맛이 그렇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원문: 호사의 브런치


이 필자의 다른 글 읽기

]]>
검색 대신 책 10권을 읽는다고?: 미련한 독서를 위한 변명 https://ppss.kr/archives/267385 Tue, 29 Oct 2024 00:56:21 +0000 http://3.36.87.144/?p=267385 모르는 분야에 대해 파고들기 시작할 때는 책부터 뒤진다. 열 사람에게 물어볼 수 없어서 책 10권을 읽는다. 동영상 n배속 시청, 챗GPT의 요약이 흔한 요즘 속도와 비교하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느리고 무식한 방법이란 걸 안다. 인터넷 검색 한 번이면 지구 반대편에 사는 축구선수의 점심 식사 메뉴까지 알 수 있는 시대에 어쩌자고 난 이리 미련스러운 방식으로 책을 읽게 됐을까?

출처: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23년 국민 독서실태 조사에 따르면 1년간 1권 이상 책을 읽은 19세 이상 성인 독서율은 43%고, 평균 독서량은 3.9권이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난 그 수치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으로 책을 읽는 인간이었다. 베스트셀러나 업무차 읽어야 하는 책을 제외하면 자의로 읽는 책은 1년에 두세 권? 누가 봐도 독서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학창 시절에도 ‘책벌레’라 불릴 만큼 책에 대해 애정을 품은 적은 없었다. 대신 그 시간에 TV를 보거나 라디오를 듣는 편이었다. 덕분에 성인이 돼서는 영상 만드는 일로 밥벌이를 했다. 책보다는 영상과 뉴스를 보며 요즘 뭐가 ‘핫’한 지를 파악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쏟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책도 자주 안 읽으면서 막연히 마흔 살이 되기 전에 책 한 권 내고 싶다는 꿈을 품었다. 그리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도무지 감이 안 잡혔다. 대체 어떤 글이 좋은 글일까? 글 잘 쓴다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쓸까?

그게 궁금해 책을 뒤졌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려면 호랑이의 취향부터 파악해야 했다. 내가 내고 싶은 분야의 일반적인 책부터 글쓰기에 대한 책까지 닥치는 대로 읽었다. 글을 먼저 쓰다가 부족함을 느껴 글쓰기 책을 읽다니, 뭔가 앞뒤가 바뀐 거 같지만 내 인생은 늘 그런 식이다. 모르고 살다가, 부족함을 느끼고 뒤늦게 파고드는 스타일.

Image by freepik

간절함보다 좋은 동력은 없다. 글을 잘 쓰고 싶어서 글쓰기에 대한 책을 읽으니 차곡차곡 데이터가 쌓였다. 글 잘 쓴다는 작가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글을 잘 쓰는 공통 방법이 있었다.

꾸준히 쓸 것! 독자를 염두하고 쓸 것! 구체적으로 쓸 것! 말하듯 쓸 것! 뜸 들이듯 시간을 두고 퇴고할 것!

물론 각기 생각이 다른 부분도 있었다. 누군가는 단문이 좋다고 했고, 또 누군가는 단문 강박에 빠질 필요는 없다고 했다. (장문을 써도 이해하기 쉽게 쓴다면 진정한 능력자가 아닐까?)

단문 제일주의에 반기를 드는 작가의 책 한 권만 읽었다면 아마 나는 일찌감치 글쓰기를 포기했을지 모른다. 생각이 많아 문장이 길어지면 장황해지는 편이라 단문이 익숙하다. 그 기준에 맞추면 내 글은 흐름과 호흡이 뚝뚝 끊기는 ‘나쁜 글’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여러 책을 읽으며 단문과 장문, 각각의 장단점을 파악하게 됐다. 그 후 장문과 단문을 섞어 내 머릿속 생각을 끄집어내 글을 쓰는 사람이 됐다.

한 권을 읽으면 글쓴이 개인의 의견을 알게 된다. 10권의 책을 읽으면 작가 10명의 생각을 훔쳐볼 수 있다. 열 권을 읽으면 공통으로 말하는 단단한 척추가 보인다. 그게 흔들리지 않는 진리라고 믿는다.

책 10권을 천천히 꼭꼭 씹어 소화하듯 읽다 보면 느껴진다. 돌아서자마자 머릿속에서 휘발되는 정보들과 달리 오래도록 단단하게 남아 있다.

원문: 호사의 브런치


함께 읽으면 좋은 글

]]>
꿈은 거창해야 한다는 편견을 버려! https://ppss.kr/archives/266518 Fri, 26 Jul 2024 02:31:13 +0000 http://3.36.87.144/?p=266518 죽을 때까지 평생 한 가지 직업으로만 사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이전 세대는 대다수가 가능했을지 모를 그 ‘흔한 일’이 지금 세대에게는 축복에 가까운 어려운 일이 됐다. 어느 정도 연차가 쌓이면 자의든 타의든 지키고 있던 자리를 내줘야 하는 순간이 온다. 특히 ‘멀티‘가 아니면 살아남기 힘든 시대에 제2, 제3의 직업을 가지는 건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사람들을 만날 때면 요즘 어떤 고민을 하고 있고, 앞으로 어떤 미래를 그리는지 꿈을 묻는 게 내 요즘 최대의 관심사다. 흙탕물 속에서 헤매는 작은 피라미 같은 상태인 내가 뿌연 시야를 조금이나마 선명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지인의 지인이 유튜브나 인스타, 틱톡을 시작했다는 얘기는 수없이 들었다. 일상의 무료함을 타파할 취미이기도 했고, 때로는 제2의 인생을 시작하기 위한 발판이기도 했다. 개인 계정으로 시작해 알고리즘신의 간택으로 조회수가 떡상하고 구독자가 급증하며 대박이 났다는 소식이 희미하게 들렸다. 하지만 실체를 본 적 없고 소문만 무성한 도시 전설처럼 느껴졌다. 남들과 나는 다를 거라는 기대에 차 시작하지만, 대부분 미약한 반응에 지쳐 중도 하차하거나 본업으로 돌아갔다. 꾸준히 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출처: freepik

얼마 전, 로또 같은 대박을 노리며 또 한 명의 어린양이 이 세계에 입성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건너 건너 지인인 A의 꿈은 ‘공구하는 사람 되기’라고 했다. A의 목표는 차은우 이목구비보다 또렷했다. 공. 구. 하. 는. 사. 람. 이라니. 처음 이 얘기를 전해 들었을 때 인중에 딱밤을 맞은 듯 머리 전체가 띵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셀럽이 되길 바라는 게 아니고, 구독자 몇백만의 인플루언서가 되길 원하는 게 아니다. 간결하고 현실적이게 ‘꿈은 공구하는 사람’이라는 게 놀라웠다. 이 꿈을 이루기 위해, 없는 시간을 쪼개 직접 출연한 영상을 편집하고 자막을 달아 올렸다. 지금은 미약할지라도 꿈인 ‘공구하는 사람’이 되기 위한 계단을 하나씩 오르는 중이었다.

그전까지 나는 어느 정도의 구독자 즉 팬덤을 가지면 자연스럽게 공구하는 사람이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봐왔던 사람들이 그랬으니까. 만화 캐릭터처럼 표정이 많은 고양이 영상을 올리던 계정주는 언제부턴가 고양이가 잘 먹던 북어 트릿과 고양이의 혼을 쏙 빼놓던 최신 장난감 공구를 시작했다. 야무진 살림 솜씨를 뽐내던 라이프 분야 인플루언서는 수저 불림 통의 편리함을 찬양하는 피드를 몇 번 올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의 DM이 쏟아져 담당자를 귀찮게 한 끝에 여러분을 위해 어렵게 얻은 기회라며 공구 링크를 내 걸었다.

(하루에 한 번 설거지를 하는 내 눈에는 수저 불림통이 없어도 텀블러나 머그 컵에 담가도 충분히 수저를 불릴 수 있을 거 같았다. 하지만 하루에 3번 이상 설거지하는 프로 살림꾼들 눈에는 수저 불림 통의 가치와 효용이 더 와닿았던 걸까? 어디서 이런 꿀템을 찾았냐며 칭찬하는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공구하는 ‘팔이 피플’의 세계는 달라도 확실히 달랐다.)

결론적으로 공구를 통해 수익을 얻는다는 최종 결괏값은 같다. 하지만 실존하는지 의심스러운 조회수나 구독자 수를 가진 유명인이 되는 게 꿈이 아니라 그저 ‘공구하는 사람’이라는 선명한 목표를 잡은 A의 선택은 눈앞이 캄캄해 방황하는 피라미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내 머릿속 ‘꿈’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물으면 과학자, 경찰, 선생님이라고 장래 희망을 답하는 초등학교 시절에 머물러 있었다. 꿈은 크고 거창해야 한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희망 직업과 의미를 혼동하고 있었다.

사진: UnsplashDakota Corbin

꿈 없이 살았던 내가 딱 두 번 꿈을 품은 적이 있다. 방송을 만들고 싶어서 방송계 언저리를 기웃거리며 일했고, 마흔 전에 내 이름 박힌 책 한 권 갖고 싶어서 호사라는 부캐로 글을 썼다. 미련스러운 시간과 운이 더해지니 어느새 두 가지 꿈을 이뤘다. 그러고 나니 다음은 뭘 해야 할지 막막했다.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기다렸다는 듯 원 직업의 유효 기한은 끝이 보였다. 좋아하는 걸 하면 돈이 절로 굴러들어 오는 상위 0.01%에게만 허락된 허황된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가? 불안에 떨며 귀한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꿈은 공구하는 사람’이라는 A의 도전은 ‘불혹의 방황러’의 뺨을 단호하게 내리쳤다. 지금 그럴싸한 꿈을 찾느라 헤매고 있을 때가 아니니 정신 차리라고, 일단 뭐라도 하라는 불호령처럼 느껴졌다.

“꿈은 명사가 아닌 동사”라는 닳고 닳은 말이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직 선명한 꿈을 찾진 못했지만 ‘키즈 모델 빼고는 다 할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를 밑바닥에 깔았다. 나를 향해 열린 가능성에 기대 이것저것 시도 중이다. 일단 시작했다면 실패하더라도 경험은 남으니까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지 않을까?

이런 대책 없는 긍정력으로 겹겹이 쌓인 불안을 지우며 한 발, 한 발 나가는 중이다. 이 걸음의 도착점이 어딜지 지금은 알 수 없다. 그저 목적지에 도착해 발걸음이 멈췄을 때, 머무르지 않고 나를 믿고 앞으로 나아간 오늘의 나를 칭찬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다릴 뿐이다.

원문: 호사의 브런치


이 필자의 다른 글 읽기

]]>
엄마가 감자수제비와 뇨끼를 구분하던 날 https://ppss.kr/archives/265493 Thu, 13 Jun 2024 04:47:46 +0000 http://3.36.87.144/?p=265493 언젠가 달팽이처럼 등을 동그랗게 만 채로 티브이를 보던 엄마가 물었다.

뇨끼가 뭐야?

한 예능 프로의 미션으로 주인공 어머니께 음식 대접을 위해 전통시장에서 장을 보는 중이었다. 출연자들은 뇨끼를 만들기 위해 시장을 돌며 감자와 밀가루를 샀다. 방에서 물먹으러 나왔다가 엄마의 느닷없는 질문 공격에 당황해 심드렁하게 답했다.

뇨끼? 음… 이탈리아 파스타인데 일종의 국물 없는 감자수제비 같은 거야. 감자를 넣은 반죽으로 만든 수제비.

엄마가 묻는 말에 답을 해놓고도 영 개운하지 않았다. 뇨끼를 눈으로 본 적도, 입으로 먹어 본 적도 없는 엄마의 머릿속에 뇨끼는 그저 감자수제비로 기억될 테니까.

엄마는 칠십 평생 처음 들어 본 괴상한 이름의 음식이 감자수제비 맛이라니 신기해하셨다. 사실 뇨끼와 감자수제비는 분명 다른 음식이다. 하지만 엄마가 가늠할 수 있는 수준으로 설명하기에 이보다 적당한 요리가 없었다.

Pixabay

곧 엄마에게 뇨끼의 신세계를 열어 드리리라 다짐했지만 현실이 된 건 한참 지나서다. 오른쪽 무릎을 수술한 지 1년 만에 고장 난 왼쪽 무릎을 고치기 위해 수술대에 오르기 직전이었다. 17년 전에 수술한 왼쪽 무릎의 인공 관절이 또 말썽을 부려 재수술이 필요했다. 한동안 입원을 하고, 또 퇴원하더라도 당분간 외출이 어려워질 엄마. 그러니 입원 전 마지막 콧바람을 넣는 외출 식사 메뉴로 뇨끼를 택했다.

집 근처에 이탈리아 식당이 없는 건 아니지만, 수제 뇨끼를 취급하는 곳을 찾아 굳이 택시를 타고 옆 옆 동네로 향했다. 주말에는 예약 없이는 맛볼 수 없다는 그곳에 프리랜서의 특권, 평일 점심 무예약 신공으로 도착했다.

오너 셰프의 작은 레스토랑에는 들어서자마자 허브 향이 코를 확 찔렀다. 이탈리아 가정식을 표방한 요리들이 나오는 레스토랑답게 매장 가운데 난로 위 주전자에서 허브차가 끓고 있었다. 정수기의 온수가 아닌 뭉근하게 끓인 허브차를 홀짝이며 엄마와 나는 각자의 학창 시절 겨울이면 교실 난로 위에서 끓던 보리차 주전자에 대한 추억에 대해 도란도란 수다를 떨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손질한 천연 재료로만 음식을 만들기 때문에 시간이 다소 걸리니 이해해 달라는 메뉴판 첫 장의 당부와 달리 음식은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 식전 빵에 이어 나온 이탈리아 염장 햄, 프로슈토가 올라간 샐러드를 맛본 엄마가 말했다.

지금까지 먹어 본 샐러드 중 최고로 맛있어!

불규칙하게 부순 견과류가 씹히는 수제 렌치 드레싱이 입에 맞으셨는지 설거지라도 하듯 접시에 남은 소스를 양상추로 싹싹 모아드셨다. 워밍업 차원으로 시킨 샐러드가 이 정도면 메인 메뉴는 대체 어떨까?

기대감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그때, 드디어 올 게 왔다. 테이블당 1개만 주문이 가능할 만큼 인기 메뉴인 ‘포르치니 뇨끼’. 버섯 향이 강한 ‘포르치니 버섯’과 진한 크림이 진한 수제 감자 뇨끼가 도착했다. 새우 들어간 파스타가 드시고 싶다 하여 바질 크림이 들어간 새우 파스타도 함께 당도했다. 이국적인 향신료라면 고개를 젓는 입맛이 흥선대원군인 아빠와 함께였다면 감히 시키지 못할 메뉴들이었다.

사진: UnsplashSebastian Coman Photography

살짝 구워 노릇한 뇨끼 반죽 덩이가 하얀 크림소스 위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눈처럼 뿌려진 치즈 가루 사이사이로 트러플 향이 슬쩍 올라왔다. 늘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메뉴 앞에 선 듯 포크를 가져다 대지 못하는 엄마를 위해 딸이 시범을 보인다. 뇨끼를 포크로 푹 찍어 소스를 이리저리 입힌 후 한 입 베어 먹는다.

눈치 보던 엄마도 나처럼 뇨끼를 드셨다. 만 71세에 맛보는 첫 뇨끼다. 난생처음 뇨끼를 입에 넣은 후 엄마의 눈이 반짝였다.

아, 이런 거구나! 이거 감자수제비랑 비슷하면서도 달라!

옅은 안도와 짙은 후회가 교차했다. ‘왜 이제야 왔을까?’ 예상치도 않게 수술이 빠르게 결정되고 엄마의 얼굴은 날이 갈수록 어두웠다. 1년 만에 또 수술해야 한다는 두려움, 재활 치료의 고통, 갑자기 수술비로 빠져나갈 목돈, 자리를 비우는 미안함, 가족들에게 걱정을 끼치는 거 같아 자꾸만 위축되는 모습이었다. 뇨끼 덕분에 수심이 가득했던 엄마의 얼굴에 잠시나마 생기가 돌았다.

그제야 왜 택시를 타고 옆 옆 동네까지 와서 뇨끼를 먹는지 엄마에게 이유를 설명했다. 싸돌아다니기 좋아하는 딸은 세상 산해진미 다 먹어 보고 다니는데, 정작 엄마는 감자수제비와 잔치국수, 김치찌개와 미역국이 전부인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 어쩌다 외식이라고는 돼지갈비와 짜장면. 지극히 아빠 취향의 메뉴들뿐이었다.

얄팍한 부채감을 안고 살다가 작정하고 굳이 손잡고 나오지 않으면 엄마는 평생 뇨끼 = 감자수제비로 알고 사셨을 분이다. 우아하고 교양 많은 사모님의 세계와는 먼 곳에 무릎이 닳도록 억척스럽게 살아온 엄마에게 대접한 뇨끼 한 접시에는 여러 가지가 담겨 있다. 미안함, 감사함, 그리고 응원이 가득하다.

다시 시작될 고통스러운 수술과 회복의 시간을 무사히 마치고 건강한 모습으로 뇨끼를 먹으러 오기로 약속했다. 접시 바닥까지 싹싹 긁어 드신 엄마는 며칠 후 뇨끼의 추억을 안고 입원했다. 그리고 남은 딸에게는 엄마를 떠올릴 인생 음식이 하나 더 생겼다.

원문: 호사의 브런치


이 필자의 다른 글 읽기

]]>
“내가 말할 자격은 내가 주는 거야”: ‘선 뻔뻔’ 후 용기를 내는 자세에 대하여 https://ppss.kr/archives/266142 Fri, 24 May 2024 03:45:18 +0000 http://3.36.87.144/?p=266142 한 달에 한 번 독서 모임에 간다. 발제처럼 딱딱한 의식이나 거창한 식순이 없는 캐주얼한 모임이다. 돌아가며 책 한 권을 추천하고, 읽은 후 와인이나 맥주를 곁들여 수다를 떠는 만남에 가깝다.

이번 책은 내가 추천한 『강원국의 글쓰기』였다. 몇 번의 모임을 통해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책을 넘어 글쓰기까지도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글쓰기를 시작하고 싶지만 망설이는 분들께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추천했다. 실제로 책에는 글쓰기 초보들이 고민하는 많은 부분을 해결해 줄 내용이 담겨 있다. 나도 글을 쓰며 헤매거나 방향을 모르겠을 때 수없이 펼쳐 본 책이었다.

내가 추천한 책이어서였을까? 각자 돌아가며 소감을 말하고 난 후 코멘트를 덧붙여야 할 거 같은 의무감이 들었다. 한 분의 소감이 끝나고 나는 이런 말을 했다.

맞아요. 책이 정말 좋으면 그 내용을 행동으로 옮기잖아요. 그게 진짜 책을 제대로 소화한 게 아닐까요?

글쓰기 책을 읽으니, 글을 쓰고 싶어졌다는 사람들을 향한 응원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다음 사람에게로 대화가 옮겨 간 후에도 나는 머릿속으로 내가 뱉은 말꼬리를 물고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충고할 만큼 나는 책을 깊게, 풍부하게 이해하고 있을까?” / 사진: UnsplashStudio Media

글을 읽고 쓰는 게 일이다 보니 일반 직장인들보다 많은 책을 읽을 수밖에 없다. 한 달에 몇십 권을 읽었다고 떠든 내가 과연 책 속의 메시지들을 실생활에서 행동으로 실천하고 있나? 되짚어 보니 낙제점에 가까웠다. 책을 읽고 고개를 끄덕이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다음 책을 펼치기 바빴다. 내가 뱉은 말대로 충분히 소화하고 음미하며 행동으로 실천하는 책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런데 내가 뭐라고 이런 말을 했을까? 테이블 밑으로 몰래 부끄러움의 하이킥을 날렸다.

정작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내가 그런 말을 했는지 세세하게 기억을 할지 모르는데, 지나간 말 곱씹기가 취미인 나는 모임이 끝난 지 며칠 지난 지금까지도 책만 펼치면 이불킥을 불렀던 그 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 구역의 제일가는 ‘후회의 달인’인 나를 어여삐 여긴 하늘의 뜻일까? 어디선가 나처럼 생각 많은 사람들에게는 ‘선 뻔뻔 후 용기’가 필요하다는 글을 봤다. 일단 뻔뻔해지고, 그다음에 용기를 내도 된다는 의미다. 난 숨 쉬듯 자기 검열을 하고, 내게 손해가 될지 이익이 될지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는 사람이다. 그런 ‘프로생각러’에게 더없이 필요한 말이었다.

말을 할 자격은 누가 주는 걸까?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고개를 끄덕일 사람은 끄덕이고,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뭐래?”라고 반박하거나 무시하고 넘길 거다.

말할 자격은 누가 인정해 주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이 만든다. 뱉은 말에 책임을 지면 된다. 분위기에 취해 뻔뻔하게 내뱉었으니, 수습해야 한다. 허락보다 용서가 쉽다고 하지 않았던가? 무슨 말을 하거나, 무슨 행동을 시작할 때 습관적으로 나를 가로막는 말, “내가 뭐라고”를 지우기로 했다. 대신 그 자리에 ‘선 뻔뻔, 후 용기’라는 말을 채워 넣었다. 일단 뻔뻔하게 내뱉고, 그에 걸맞은 행동을 실천하면 된다.

작가 storyset 출처 Freepik

최근 싸우는 장애인 운동활동가로서, 탈시설-자립 운동과 동물권 등 투쟁의 현실을 담은 홍은전 작가의 책 『나는 동물』을 읽었다. 그 책을 읽었다고 내가 하루아침에 채식주의자가 되거나 장애인 해방운동에 앞장설 리 없다. 대신 소위 ‘정상 인간’ 중심으로 돌아가는 현실의 이상함을 자각하며,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는 그들의 발걸음에 공감과 응원의 박수를 보내는 존재가 되고 싶다.

같은 시기에 마스다 미리의 책 『매일 이곳이 좋아집니다』를 읽었다. (일종의 병렬독서방식으로 어려운 책을 읽을 때는 쉬운 책을, 아프고 슬픈 책을 읽을 때는 밝고 유쾌한 책을 번갈아 읽으며 호흡을 고른다) 이 책을 통해 먼 훗날, 그리워할 나의 오늘을 무심하게 흘려보내지 말고 알차게 채워야겠다고 다짐했다.

책에 담긴 모든 내용을 100% 흡수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읽기 전보다 뭐라도 하나는 건져 내 몸에 습관을 들이다 보면 어제보다 오늘, 한 걸음 더 ‘좋은 사람’에 가까워지지 않을까?

원문: 호사의 브런치


이 필자의 다른 글 읽기

]]>
성장판이 닫혀도, 키는 클 수 있으니까 https://ppss.kr/archives/265984 Thu, 02 May 2024 14:45:12 +0000 http://3.36.87.144/?p=265984 약을 철근처럼 씹어 먹고, 각종 병원을 순회해도 영 컨디션이 나아지지 않았다. 그래서 종합건강검진을 받았다. 2년 만이었다. 토요일 새벽부터 공장처럼 바쁘게 돌아가는 건강검진센터에 다녀온 지 2주 후, 결과지가 도착했다.

건강 검진 결과지를 확인할 때마다 시험 성적표를 받아 들던 학창 시절로 돌아간다. 얼마나 공부했는지 대신, 그간 얼마나 자신을 돌보며 살았는지 인생 성적표를 받는 것 같아서다.

다행히 종합 소견서에는 잔고장은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큰 문제가 되는 건 없다고 쓰여 있었다.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마음이 놓였다. 하늘에 있는 누군가가 속삭이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너 잘 살았다.

“깨끗합니다! 잘 사셨어요!” / 출처: irasutoya.com

정신이 번쩍 든 건 체성분 결과였다. 2년 전과 지금의 나를 비교했을 때 가장 달라진 건 운동을 주기적으로 한다는 점이다. 그전까지는 숨쉬기 운동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나였다.

지금은 몸짱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 운동을 한다. 인내심, 배려, 자상함, 친절 등 인간답게 살기 위한 모든 것은 체력에서 나오니까. 그러니 몸무게 변화는 크게 없더라도 근육량이 늘었기를 기대하며 수치를 확인했는데 체지방은 정직하게 늘었다. 쳇.

성과는 의외의 곳에 있었다. 중 3에서 고1로 넘어가기 전 1년 사이 10cm가 자란 이후 성장판은 완전히 닫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확히 2년 전보다 0.9cm가 컸다. 조금만 더 힘을 냈다면 1cm라는 경이로운 숫자에 가 닿을 수 있는 아슬아슬한 0.9cm. 기적 같은 숫자를 확인한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지? 봉인됐던 성장판이 뒤늦게 열린 건가?

그럴 리 없다. 내 몸은 하루하루 낡아 간다. 벤자민 버튼이 아닌 이상 시간이 거꾸로 갈 리가 없다. 답은 하나다. 내 몸에 숨어 있던 키가 자세 변화로 드러난 것.

사진: UnsplashGinny Rose Stewart

2년 사이 가장 큰 도전이자 변화는  ‘요가’였다. 다이어트나 자세 교정이 목적은 아니었다. 미친 날씨처럼 날뛰는 마음을 진정시켜 보고자 요가 센터의 문을 두드렸다. 명상과 마음수련. 그게 내가 요가에서 얻고 싶은 거였다.

일주일에 3번, 많으면 5일 요가원에 가는 성실한 회원이었다. 그 사이 3개의 요가 매트가 바뀌었고, 한 분을 제외하면 선생님도 모두 바뀌었다. 2년 사이 바뀐 무수한 것 중에 내 몸도 있다. 모든 것에 쫓기며 사는 현대인들이 그렇듯 나 역시 시간에 쫓겨 숨을 헐떡이며 살면서도 악착같이 요가하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게으름을 줄이고, 핑계를 없앴다. 기계처럼 정해진 시간이 되면 요가 센터로 향했다. 그래서 이제는 습관을 넘어 일과가 됐다.

한 시간 동안 은은한 어둠 속에서 몸을 구기고 폈을 뿐인데 내 안의 숨은 키가 쏙 뽑혀 나왔다. 솔직히 키가 성장한 게 아니란 걸 안다. 구부정한 자세로 줄어들었던 키가 자세를 바르게 잡으면서 펴진 것일 뿐이다. 굽은 쇠를 두드려 펴는 이치와 비슷하다. 꼬박꼬박, 차근차근 수련이란 이름으로 단련했기 때문이다.

0.9cm 작았던 2년 전보다 지금은 시야가 달라졌다. 여전히 하이힐이나 발받침의 도움이 없다면 160cm 이상의 공기는 맡을 수 없지만 2년 전보다 0.9cm 높은 곳에서 무언가를 보게 됐다. 한층 높은 곳에서 볼 수 있다는 건 동시에 시야도 조금 더 넓게 한다. 조급한 마음에 전전긍긍이 일상이었던 2년 전과 비교하면 확실히 다른 점이다.

어차피 될 일은 되고, 안될 일은 안된다는 진리를 가슴에 품고 느긋하게 결과를 기다린다. 단, 과정에서의 열심은 변함없다. 과정에 부끄러움이 없다면, 그 어떤 결과가 오든 두렵지 않다는 믿음도 있다. 그 모든 건 바른 자세에서 나온다.

바른 자세의 중요성을 체감한 2년이었다. 삐뚤어진 마음과 삐딱한 시선이 사람을 얼마나 망가뜨리는지 확인한 시간이었다. 대장장이가 망치를 두드려 굽은 쇠를 펴듯 틀어져 굳은 뼈와 마음을 펴기 위해 요가를 한다.

나옹도 요가를 한다옹

한 호흡을 길게 내 쉬며 ‘아사나(요가 자세)’를 이어간다. 내 몸에 맞지 않는 자세는 통증이 심하다. 하지만 그 통증을 이겨내면 잘못 굳은 자세가 서서히 펴진다. 그 시간이 쌓이면 바른 자세가 되고, 잃어버린 줄 알았던 숨은 키가 뿅! 하고 나타날 것이다.

원문: 호사의 브런치


이 필자의 다른 글 읽기

]]>
SNS 속 알고리즘의 덫 https://ppss.kr/archives/265489 Mon, 22 Apr 2024 03:18:25 +0000 http://3.36.87.144/?p=265489 2024년에는 안 해보던 새로운 걸 해보자‘라는 연간 목표의 일환으로 새해부터 인스타를 시작했다. 작정하고 인스타를 파기 시작한 후 내 탐색 탭에는 비슷비슷한 내용이 올라온다.

알고리즘은 크게 세 갈래다. 책 추천으로 시작해 북스타그래머로 수익화하는 방법, ‘인스타 키우기 이렇게 하면 망한다’로 시작해 결국 전자책 팔이, 자기 계발 도파민을 퍼트리는 자칭 성공 중독자들의 일침이 주를 이룬다. 성공도 팔고, 노하우도 팔고, 꿈도 팔고, 굿즈도 팔고 다들 뭔가 열심히 팔고 있다. 비즈니스 계정이 아닌 개인 계정에서는 게장이나 다이어트 효소를 파는 줄만 알았던 인스타알못인 나는 이런 요상한 마켓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사진: UnsplashGabrielle Henderson

시간이 녹아내리는 줄도 모르고 한참 인스타에 빠져 있으면 초조해진다. 나만 빈털터리로 그 자리에 있고 세상 사람들은 모두 내일 당장이라도 돈, 명예, 자유 등등 원하는 모든 걸 다 가질 기세다. 알고리즘은 다단계나 사이비 종교처럼 당장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나만 구원받지 못하고 인생의 패배자가 될 것 같은 불안감을 조성한다.

CCTV와 도청 장치가 사방에 깔린 방에 갇히면 이런 기분일까? 생각을 엿듣기라도 한 듯 흥미를 끄는 콘텐츠와 필요한 상품의 광고를 대령하는 알고리즘이 신기하면서도 무섭다. 과학의 ‘ㄱ’도 모르는 뼛속까지 문과형 인간이지만 알고리즘이란 단어의 뜻은 안다.

알고리즘 algorism

[명사] 어떤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입력된 자료를 토대로 하여 원하는 출력을 유도하여 내는 규칙의 집합. 여러 단계의 유한 집합으로 구성되는데, 각 단계는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연산을 필요로 한다.

  • 표준국어대사전 중에서

입력된 자료를 토대로 원하는 결괏값 출력을 유도하는 규칙의 집합인 알고리즘. 내가 입력한 값이 있기 때문에 결과가 도출되는 것이다. 내가 그쪽으로 클릭을 하고, 영상을 보는 움직임이 포착됐다. 나의 행동과 취향을 분석한 알고리즘은 내가 흥미를 느낄만한 콘텐츠를 끊임없이 추천해 준다. 홀린 듯 알고리즘의 안내를 쫓아가다 보면 이미 레드오션이지만 막차라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조바심과 압박감에 숨이 막힌다.

원인 없는 결과가 없듯, 알고리즘이 내가 원하는 콘텐츠를 마법처럼 진상하는 게 아니었다. 내가 흘린 과자 부스러기만 한 정보만으로도 로직이 열심히 움직이는 것뿐이다. 비슷비슷한 피드와 추천으로 도배된 그 알고리즘 세계 안에 있으면 그게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블루 라이트에 찌든 눈을 비비며 온라인 창을 닫고 현실을 둘러보면 그 사람들은 다 어디 갔나 싶다. 북스타그래머들이 핏대 올리는 것과 달리 서점은 한적하고, 책은 안 팔린다. (아… 귀엽고 자그마한 내 인세 정산 내역이여…) 머니 파이프라인을 늘린 노하우를 바탕으로 N개월 만에 구독자 NN만 명 달성하는 로또 맞은 사람보다 자기의 속도와 방향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사진: UnsplashCHUTTERSNAP

얼마 전부터 독서 모임에 나가기 시작했다. 우연히 한 번 초대된 독서 모임에서 얻은 신선한 충격과 긴 대화의 여운 때문이었다. 먹고살기 바쁜 와중에 시간을 쪼개 돌아가며 책을 추천하고, 그 책을 읽은 후 모여 소감을 나눈다. 이 독서 모임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내 의지로는 절대 선택하지 않을 책을 읽게 해 준다는 점이다. 또 같은 책을 읽고도 각기 다른 문장에 밑줄을 긋고,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내용을 들을 때면 사람의 생각이 이토록 다양하구나 느끼는 건 덤이다. 내 알고리즘에 절대 뜨지 않을 책들을 강제로(?) 읽게 된다는 점에서 좁았던 내 세계가 한 뼘쯤 넓어지는 기분이다.

내 취향은 아니지만 울림을 주는 책은 차고 넘쳤다. 관심 없는 분야는 쳐다보지도 않을 만큼 편협한 독서를 하던 내가 독서 모임 덕분에 관심 없던 분야의 책을 읽으며 건강한 독서 습관을 기르는 연습을 한다.

알고리즘의 덫에서 빠져나와야 비로소 보이는 게 있다. 안에 있으면 그 모양과 크기로 내 가치관과 상상력은 재단된다. 알고리즘 밖의 세상은 틀린 거니까 나가면 큰일날 거라고 가스라이팅하는 사람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야 한다. 알고리즘에 의지하고 지배당해 스스로 생각하는 근육이 퇴화한 사람에게 미래는 없을 테니까.

원문: 호사의 브런치


이 필자의 다른 글 읽기

]]>
다 그러고 산다고? ‘퉁 치는’ 위로와 응원의 위험성 https://ppss.kr/archives/265491 Fri, 08 Mar 2024 01:42:52 +0000 http://3.36.87.144/?p=265491 입사 일주일 차라는 한 신입이 글을 올렸다. 일이 힘들어서 퇴사를 고민한다는 것이었다. 여러 댓글이 달렸는데, 그중 한 댓글에 오래도록 시선이 멈췄다.

다 그러고 살아.

글쓴이만 유별나게 힘든 것이 아니다. 처음 사회생활 시작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힘들다는 뜻이었다. 다들 그렇게 겪고 적응하니까, 한 3개월만 죽어다 생각하고 해 보라는 응원의 말이었다. 자신 또한 여전히 힘들지만, 일한 후 들어온 월급으로 뭐 할지 생각하면서 버티며 산다고. 그 말이 유달리 맴돌았다.

다 그러고 살아.

다 그러고 살아.

다 그러고 살아.

하지만 난 이 말에 대해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한때는 나도 들어봤던 말이다.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입 밖으로 나와서 상대에게 가닿았을지도 모르는 말이기도 하다. (빈약한 기억력 탓에 절대 이런 말 따위 안 했다고 단언할 수 없다는 사실이 통탄스럽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다 그러고 살아’라는 말을 듣고 나면 속이 더부룩했다. 사이즈 작은 신발을 신고 종일 돌아다닌 것처럼 불편했다. 끈적한 마음의 찌꺼기가 쌓였다.

다 그러고 산다는 말 안에 담긴 보편적인 위로와 응원은 심신이 지쳐 꼬일 대로 꼬인 인간의 귀에는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았다. ‘다 그러고 산’다며 퉁 치는 위로와 응원이 내게는 와닿지 않았다.

사진: UnsplashRaphael Koh

연봉 160억이 넘는 (세상 단 한 사람 아버지만 인정하지 않는) 월드클래스 축구선수 손흥민도 떠먹는 요구르트를 먹을 때 뚜껑부터 핥고, 글로벌 대기업 회장도 대통령 뒤에서 시장 떡볶이 먹으며 사회생활을 한다. 어나더 레벨의 사는 사람도 아낄 때 아끼고, 하기 싫은 일도 하며 열심히 사는데 내가 뭐라고 힘들다고 징징거릴 짬이나 되냐는 말처럼 들렸다.

사람 사는 거 다 거기서 거긴데 왜 유별나고 예민하게 구냐는 말처럼 들렸다. 너는 뭐가 대단하다고 다들 그렇게 사는데 너만 다르게 살고 싶어 하냐고 혼나는 기분이었다. 상대의 고민과 고통을 누구나 겪는 보통의 아픔으로 치부해 버린다고 해서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게 아닌데,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나는 별다른 댓글을 달지 않았다. 댓글을 다는 대신, 온라인 말고 오프라인에서 내 곁의 누군가가 슬픈 눈으로 고민한다면 어떻게 해주는 게 좋을까 천천히 생각했다.

오래 생각해도 답은 하나였다. 이때 필요한 건 100개의 좋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었다. 입이 까끌까끌해 제대로 된 걸 먹지 못했다면 따뜻하고 든든한 음식부터 같이 먹는 게 좋겠다. 부드럽고 달큰한 옥수수 크림수프나 감자옹심이 같은, 부담 주지 않는 부드러운 음식으로 배를 채운다. 거기에 달달한 디저트를 곁들인 수다 타임이면 어떨까? 귀를 활짝 열어 두고 충·조·평·판(충고, 조언, 평가, 판단) 대신 온 마음을 다해 들어주는 것. 그거면 충분할 거다.

사진: UnsplashKelly Sikkema

무한 증식하는 괴물 같던 내 안의 고민을 세상 밖으로 꺼내 놓으면 마음이 후련하다. 쪼그라든 풍선처럼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니 타인이 고민을 이야기하면 해답을 주려고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 너의 고통이 남들도 겪었던 별거 아닌 경험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그냥 있는 그대로 고민을 들어주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고, 해야 하는 일이다.

원문: 호사의 브런치


이 필자의 다른 글 읽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