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비행을 끝내고 도착한 LA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첫 일정은 UCLA(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의 인터뷰였다. UCLA는 캠퍼스 자체가 하나의 도시처럼 매우 넓으며, 그 안에 소방서와 경찰서가 따로 있을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한다. 그만큼 캠퍼스 내에서도 많은 에너지를 사용한다. 친환경적인 에너지 사용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져 있어서 그것에 대한 인터뷰를 하기로 했던 것이다.
UCLA가 숙소는 꽤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는 길에 인텔리젠시아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가기로 했다. 시간이 넉넉하지는 않았고, 이 카페는 사전에 인터뷰가 계획되어 있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볍게 커피 한 잔만 마시고 나오기로 했다.
이른 아침, 다 같이 상쾌한 날씨를 만끽하며 숙소 앞에 주차해두었던 차에 올라탔다. 이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다 같이 아무것도 모른 채로 인텔리젠시아로 출발했다. 그런데 운전석에서 내릴 때 뭔가 이상한 흰 종이가 앞유리에 끼워져 있다. 웬걸, 숙소 앞의 주차구역에서 받은 티켓이었다.
주택가는 보통 한 라인씩 길거리 청소 시간이 정해져 있다. 그 시간이 되면 차를 반대편 라인으로 옮겨야 한다. 호스트에게 미리 설명을 들었지만, 단 10분 차이로 티켓을 받았던 것이다. 덕분에 첫날부터 70달러의 벌금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미국은 단순한 여행을 가는 마음가짐으로 간 게 아니라서, 카페에서도 편안하게 커피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다. 때문에 유럽보다는 재미있게 나눌만한 이야깃거리가 적다. 하지만, 스페셜티 커피 역사가 오래된 미국 시장을 오랜 기간 동안 지키고 있는 인텔리젠시아와 같은 브랜드의 스토리가 생각보다 재미있다. 그래서 앞으로는 미국의 몇몇 이야기에서는 미국 스페셜티 커피 시장이나 그 브랜드가 가지고 있는 스토리에 대해서 이야기해볼 예정이다.
LA, 인텔리젠시아의 역사
인텔리젠시아는 ‘진보적 지식인’을 뜻하는 러시아어인 ‘intelligéntsia(인텔리겐챠)’에서 따온, 꽤 오래된 역사의 브랜드이다. 1995년 시카고의 작은 카페로 시작했다. 하지만 17년 후 그들은 전 세계에 로스팅 공장을 두고, 미국 내에만 700개 이상의 업체에 커피를 공급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맛있는 커피를 소비자들에게 제공하겠다는 생각으로 브랜드를 성장시키면서, 동시에 커피가 원산지부터 최종 소비자들에게 가는 모든 과정에 관여했다. 이 과정에서 생긴 농부들과의 관계를 기반으로 커피 시장 자체를 바꾸어 놓으며 탄탄한 브랜드로 성장했다.
중개인의 개입 없이 농부들과의 직접적인 거래를 통해 그들이 합당한 가치를 받아갈 수 있도록 했으며, 좋은 관계를 바탕으로 좋은 커피를 지속적으로 공급받아왔다. ‘지식인’이라는 브랜드 이름에 걸맞게 커피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와 발전도 추구하고 있으며, 지금까지도 매우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인텔리젠시아는 사실상 커피 업계의 많은 영역에서 한 발 앞서가는 역량을 보여주고 있다. 매장에서도 그들의 성격을 관찰할 수 있다. 매장마다 각 지역의 특색을 살린 독특한 인테리어를 선보이며 디자인 방면에서도 매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특히 창립자의 스타성과 맨파워가 대단하다. 더그 젤(Doug Zell)이라는 창립자는 원래 무역회사에서 일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다 돌연 일을 그만두고 천연 재료로 만든 신선한 티(tea) 음료 유통 사업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시점에서 더그 젤은 스페셜티 커피 시장을 접한 뒤 가능성을 보았다 .그래서 당시 미국 전역에서 유명세를 떨치고 있던 카페에서 바리스타로 일하며 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이후 더그 젤은 시카고를 시작으로 인텔리젠시아 로스팅 공장과 커피 바를 오픈했다.
사실 커피 바(Coffee Bar)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 인텔리젠시아라고 봐도 무방하다. 바리스타와 손님이 직접적인 교류를 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더그 젤은 바(Bar)라는 명칭으로 카페를 오픈했던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소위 ‘미국 3대 커피’라고 불리는 브랜드가 있다. 블루보틀, 인텔리젠시아, 스텀프타운 이 세 가지 브랜드를 말한다. 미국 커피 시장 내에서 다양하게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그만큼 성공한 것에서 나온 명성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소위 ‘제3의 물결’이라 부르는 스페셜티 커피 시장을 미국 전역에 소개한 장본인들인 것이다.
블루보틀은 이미 한국에 매장을 많이 냈고, 스텀프타운은 아직 찾아보기 힘들다. 반면, 인텔리젠시아는 직접 매장을 운영하고 있지 않아도 ‘이스팀(Esteem)’이라는 브랜드가 인텔리젠시아와 협업하여 한국에 몇 군데 매장을 냈다. 판교, 부천, 송도, 목동에 있는 현대백화점에 들어와 있는데, 관심이 생긴다면 한 번 찾아가 보는 것도 추천한다.

사실 이때는 벌금 때문에 정신이 혼미한(?) 탓에 카페를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내부 사진도 찍어놓은 게 없어서 아쉬울 따름이다.
나는 에스프레소 한 잔, 친구들은 라떼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LA의 더운 날씨 때문인지, 유럽과 다르게 메뉴판에도 아이스 메뉴가 적혀 있었다. 그런데 주문이 다소 특이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주문을 받고 결제하는 기계는 작은 태블릿이었는데, 직원이나 손님 모두가 볼 수 있었다. 다만, 주문 후에 손님이 직접 터치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팁’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미국은 주문과 동시에 팁을 함께 계산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몇 퍼센트 또는 몇 달러를 손님이 직접 선택하면, 음식이나 커피값과 함께 카드로 계산이 가능했다. 그땐 어리둥절하며 그냥 1달러 정도의 팁을 함께 계산했던 것 같다.
그 뒤에 찾아보니, 대부분 그렇게 팁을 받고 있으며, 금액은 본인 여유 되는 대로 해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에 안심했다. 그리고 이다음부터는 늘 음식값 예산을 짤 때는 10% 정도의 팁을 따로 책정해놓고 사용하게 되었다.

바리스타는 마술사가 아니다
커피는 ‘블랙캣(BlackCat)’이라는 인텔리젠시아 시그니쳐 블렌드 커피로 맛을 봤다. 생각보다는 다크한 느낌이었지만, 블렌드 커피라는 것을 감안하면 괜찮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라떼의 맛을 보자 다크함이 한 번에 이해가 되었다. 카페에서 일을 하면서 많은 커피를 마셔보게 되는데, 가끔씩 이런 생각이 드는 커피가 있다.
아, 이건 라떼로 먹으면 진짜 맛있겠다.
이건 에스프레소로 먹자.
이런 생각이다. 이 블랙캣 원두로 만든 라떼를 맛보면서, 딱 이렇게 라떼로 마실 때가 가장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를 로스팅할 때에는 그 커피의 목적에 맞게 로스팅을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커피를 로스팅하는 로스터는 커피가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추출될 때 가장 맛있는지 그림을 그려 놓고 로스팅을 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 바리스타의 역할은 로스터가 그려놓은 그림의 색깔을 최대한으로 재현해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커피를 마시면서 예전에 어떤 바리스타와 이야기를 나눌 때가 생각났다.
바리스타는 마술사가 아닙니다. 그저 로스팅을 해 놓은 커피의 맛을 잘 표현할 따름이에요. 없는 맛을 만들어 낼 수는 없어요.
맞는 말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 재료가 가진 한계를 인식하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다. 인텔리젠시아도 그렇지만, 이다음에 소개할 벌브(Verve)라는 카페도 그런 것들을 조화롭게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손님들이 카페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많은 요소들 중 하나인 것 같다.
벌브에서는 바리스타와 인터뷰도 하고, 서로 선물도 주고받았다. 보다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원문: 만얼의 브런치
[커피 따라 세계 일주] 시리즈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