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취미인데, 요즘은 통 시간이 없어서 인터넷 서점을 둘러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인터넷 서점 중에 가장 애용하는 건 교보문고다. 사실 다양한 책을 접하는 데에는 독립서점 둘러보기가 큰 도움이 되지만, 여전히 디지털상에서는 접하기가 쉽지 않다.
틈날 때마다 인스타그램에서 여러 독립서점 계정을 둘러보기도 하지만, 정작 책 정보는 없고 서점 내 행사나 서점 인테리어에 대한 사진 위주인지라 다양한 책을 찾아보는 재미를 누리기는 어렵다. 이렇게 반 정도 타의에 의해서 + 더 열심히 뒤지기 귀찮은 귀차니즘 때문에 여전히 대형서점 사이트를 이용한다.
어디선가 우리나라 서점은 잡화를 팔지 않으면 망한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대형서점 사이트는 늘 잡화 사이에 책이 마지못해 껴있는 모습이다. 집에 손님을 불렀더니 손님이 제집인 양 노는 꼴이다. 서점 사이트가 이런 형국인지라, 많은 보유 서적 덕분에 책을 찾아보는 재미는 누릴 수 있을지언정 책을 사랑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이게 전략인지 모르겠지만 오히려 책을 보다가도 본능적으로 잡화를 클릭하게 된다. 책을 보는 내내 주변에 디퓨저처럼 자잘한 물건을 사라는 광고가 아른거린다. 책을 구매하려고 결제창에 넘어갔다가 쓸데없이 잡화를 추가하는 경우도 있다. 배보다 배꼽이 큰 소비도 한두 번이 아니다. 게다가 별로 필요도 없는데 책에 굿즈가 붙어 나오면 왠지 사야 할 거 같은 기분이 드는 날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대형서점이 가진 위엄이 대단하므로 많은 출판사가 교보에 몰려든다. 교보에 들어가면 정말 많은 종류의 책을 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게다가 요즘 사람들이 많이 읽고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데도 도움이 된다. 책을 어떻게 찾아보는지, 내 취향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 훨씬 많기 때문에 교보문고처럼 베스트셀러나 새로운 책, 굿즈와 엮은 도서 판매 프로모션은 나름 구매 의사를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되는 면도 있다.
정말 사람들이 많이 봐서 베스트셀러인 건지, 베스트셀러라고 이름을 붙여서 베스트셀러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판매량이 많은 책을 통해 요즘 사람들 관심사도 어렴풋이 알 수 있다. 동시에, 쌓여가는 멤버십 포인트나 여러 가지 문화행사도 역시 강력한 고객 이탈 방지책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교보문고 사이트를 어슬렁거렸다. 포털도 재미없고, 브런치도 재미없을 때, 리모컨을 돌리다가 결국은 머무는 드라마나 영화채널 같은 사이트. 실은 교보문고가 별로인 양 얘기했지만 나에겐 그래도 주 5회 이상 방문하는, 영향력이 큰, 소중한 사이트다. 내가 원하는 책을 언제든 빠르게 배송해주고, 쉽게 주변 사람들에게 책을 선물해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오늘은 교보문고 사이트 메인에 영화 〈작은 아씨들〉 개봉을 기념하는 원작 도서가 팝업 배너로 떴고, 대형 출판사에서 광고하는 책들이 줄줄이 소개됐다. 그리고 천천히 메인 롤링 배너를 꼼꼼히 돌려보며 구경하는데, 눈을 의심하게 만든 이 광고.
교보문고! 누군가한테 협박을 받는 거라면, 왼쪽 눈을 깜빡여주세요.
갑자기 분위기 하이마트. 혹시 누가 교보문고에게 이 인덕션을 팔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한 걸까. 배너를 클릭하니 교보 핫트랙스로 연결된다. 도서를 파는 ‘교보문고’와 별개로 문구나 음반처럼 문화 관련 잡화류를 취급하는 교보의 형제기업이 ‘교보 핫트랙스’다. 이 둘이 힘을 합쳐 갑자기 인덕션을 판다. 교보문고가 만든 인덕션인가…?
물론 내가 “서점은 꼭 책만 팔아야지”라고 생각하는 서점계의 흥선대원군이라서 놀란 건 아니다. 책에 관심 없는 주변인들에게 이 배너를 캡처해서 보냈더니 다들 기가 찬다는 반응이다. 교보문고가 커머스가 되려는 거냐며 묻는다. (차라리 커머스였으면 저렇게 안 할 거 같은데… 아마존이 이렇게 하던가…)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 만든 걸까. 가전제품에서 교보만의 가치를 발견한 걸까. 인덕션 모양 책인가. 충격과 공포의 인덕션 광고가 무려 메인 배너 ‘요즘 이 책’과 ‘새로 나온 책’ 사이에 자리 잡았다. 책과 책 사이에 갑자기 등장한 인덕션의 속삭임이라… 이 배너를 올리게 된 배경이 궁금해진다. 어쩌다가 그들은 갑자기 인덕션을 파는 사람들이 됐나. 아무리 책만 팔면 망한다지만, 교보문고가 하이마트가 되어야 했던 이유는 뭘까.
진짜 요즘 많이 힘든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만약 누가 열심히 해보시려고 시도하셨던 거면 몰라드려서 죄송해요. 근데 진짜 모르겠어요). 힘들면 그럴 수도 있다… 정말 많이 힘들면 정상적인 판단이 힘들어진다. 나도 회사가 힘들어서, 위에서 시켜서 저런 말도 안 되는 선택을 했던 적이 있었다.
내 경우엔 인문학 동영상 강의랑 리조트 숙박권을 묶어서 파는 상품을 런칭하는 ‘사고’가 있었다. 난 이걸 사고라고 말한다. 자의가 아니니까 하하 :D… “인문학 여행으로 힐링하세요”라는 어거지 메시지로 상품을 팔았다. 리조트에서 인문학 강의를 들으라는 게 우리의 주장이었다. 서로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재화를 갑자기 ‘힐링’이라고 팔아 대는 마케터. 인생 최고의 현타였다. 황당무계한 시도를 막을 수 없는 그 좌절감…
행여나 누가 우리 회사 사이트를 볼까 봐 늘 조마조마했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언제든 “아 그거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거 아니야!”라고 자동응답기처럼 답할 준비를 해두었다. 놀랍게도 아무도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왜냐면 아무도 우리가 브랜드가 그러거나 말거나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보다 더욱 놀라운 건 브랜드 내부의 누군가는 그 상품을 파는 게 우리를 먹여 살릴 전략이라고 생각하고 일을 추진했다는 거 (?… 도대체 왜였지)
아무도 불만을 표하지 않아서 다행인 걸까.
교보문고 내부 사정은 잘 모르지만, 아마 큰 생각은 없었을 거라고 본다. 교보 핫트랙스는 이미 종합 커머스가 된 지 오래고, 소싱하지 않는 상품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다루는 상품의 폭이 넓어졌기 때문이다. 인덕션(또는 비슷한 류의 다른 재화) 하나쯤이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오늘에서야 주목해서 그렇지, 만약 한참 전부터 이랬다면 그들은 더더욱 별생각 없었을 것 같다. 인덕션도 팔고, 얼굴 브이라인 만드는 기계도 파는 서점 사이트에 대해서.
여태 사람들이 딱히 교보문고의 저런 행태에 거부감을 표하지 않았다면, 또는 인덕션 덕분에 매출도 좀 올랐다면, 더더욱. 오히려 살 길을 찾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혹은 전에 내가 다니던 회사처럼, 이런 방향성이 교보를 먹여 살릴 전략이라고 생각하고 일을 추진할지도 혹시 모른다.
만약 교보에서 인덕션을 팔길 잘했다고 생각한다면, 앞으로 교보문고는 얼마든지 ‘그들답기’를 포기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브랜드가 실망했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건 별로 좋은 신호가 아니다. 아무도 그 브랜드에게 바라는 점이 없고, 기대하는 이미지가 없다는 거니까. 소비자에게 그들은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브랜드로 전락할 수 있다.
단지 교보문고가 책이나 재화를 파는 일반적인 상점의 기능만 한다면 교보문고는 언제든 알라딘으로 대체될 수 있고, 아크 앤 북으로 대체될 수도 있다. 어쩌면 정말 하이마트나 홈플러스가 그들의 자리를 위협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누군가 그들을 대체할 수 있다면, 그들을 찾던 수많은 출판사가 다른 서점을 향할 수도 있다. 교보문고가 이것저것 사달라는 말 외에 소비자에게 아무런 말을 건네지 못한다면 ‘좋은 브랜드’라는 얘기는 당연히 포기해야 할 거다.
브랜딩이란 게 해도 티가 안 나지만 안 하면 스스로를 좀먹는, 참 어려운 일이다. 브랜딩, 뭐 그거 마케팅으로 어떻게 해보면 되겠지, 이런저런 혜택 유지하면 되겠지 하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브랜딩 관점에서 우리가 어떤 상품을 파는지까지 꼼꼼히 관여할 필요가 있다. 올바른 브랜딩 관점을 세운 뒤라면, 인덕션을 팔든 똥을 싸든 박수를 보낼 수도 있다.
하지만 대책 없는 ‘커머스 되기’는 브랜딩에 전혀 도움이 안 될 뿐 아니라 심지어 조금 애처롭고, 정신없는 인상을 남길 뿐이다. 앞으로 책을 살 때는 책에 집중할 수 있는 다른 사이트를 찾거나, 없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오프라인 교보문고 매장에 방문해 책장만 둘러보거나, 수고롭더라도 동네 책방을 도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다운 게 뭔데’라고 묻고 싶을 그들을 위한 에필로그
교보문고는 그들다움을 유지하기 위해 조금 투자해도 될 정도로 여유가 있지 않나. 이미 수많은 소비자가 책을 살 때 습관적으로 찾는 브랜드라는 헤리티지도 있다. ‘책을 살 땐 교보문고’라는 소비자 관성을 만들어낼 정도로 브랜드 파워가 있는 게 교보문고의 입지다. 이런 부유한 브랜드가, 뭐가 조급해서 인덕션을 팔까.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책을 봐도 되고, 찾는 어떤 책이든 입고해주고, 약속 시간 전에 부담 없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 당장 필요한 자료를 찾기 위해 도서관보다 빠르게 찾아갈 수 있는 곳. 온라인에 구글이나 네이버가 있다면, 오프라인에는 교보가 있다는 것. 교보문고만의 압도적인 브랜드 헤리티지는 이런 거 아닐까. 이걸 위해서 좀 더 투자해도 되지 않나.
교보문고 사이트는 “책”에 대한 사용자 경험을 훨씬 강화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책을 구매한다는 기본적인 기능에 좀 더 초점을 맞출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자신의 책 취향을 찾아갈 수 있는 곳이라든지 책을 마음껏 찾아볼 수 있고 읽어볼 수 있는 등 책에 관한 경험을 강화해야 한다.
지금 사이트는 베스트셀러나 굿즈 혜택 알기에는 참 좋은 UI/UX지만, 오프라인 교보문고만큼의 좋은 경험을 연장하기에는 매우 부족하다. 책에 대한 경험이 곧 교보문고 브랜딩의 핵심이 아닐까 싶다. 혹시 내부에서 누군가 이런 노력을 하려고 한다면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밀어주길 바란다. 이미 잘 알려진 브랜드인데 뭔 브랜딩이야, 사이트 개편이야, 하지 말고 브랜딩과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을 적극적으로 시도해 오래오래 살아남는 브랜드가 되길 바란다.
너무 두들겨 팬 것 같아서 변명을 덧붙이자면
내가 국내에서 가장 좋아하는 브랜드는 교보문고다. 평소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도 교보문고이고, 내 용돈도 거진 교보문고에서 탕진한다. 제주도에서 홀로 서울에 올라와서 돈도 없고 갈 곳도 없을 때 교보문고는 가장 친한 친구이자 집 같은 존재였다. 애착이 커서 나온 쓴소리이니 혹시라도 교보문고 두들겨 패기라고 오해 없기를!
원문: 한나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