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관련 책을 최소 100권은 넘게 봤을 텐데, ‘일제 시대 한국(조선) 경제’에 관한 책은 본 적이 없었다. 일제 시대에 관한 경제 공부를 위해 이영훈 교수의 『한국경제사 2』(일조각)를 봤다. 예전에 구입해서 뒷부분을 중심으로 봤었는데, 이번에는 앞부분을 본 셈이다.
1–7장은 『한국경제사 1』에서, 8–12장은 『한국경제사 2』에서 다룬다. 『한국경제사 2』의 전체 분량은 약 600쪽이다. 이 중에서 8–9장은 250쪽 분량이다. 일반적인 책 한 권 분량은 족히 된다. 부분적으로 기존의 ‘수탈설’을 반박하는 서술을 하지만, 책 전체의 서술방식은 매우 건조하게 팩트를 정리하는 방식이다. 평생 연구한 내용을 집대성 및 요점 정리하는 책이다.
『한국경제사』는 한국경제 3,000년의 방대한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책이다. 참으로 대단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학자’로서 큰 업적을 이뤘다고 생각한다. (이영훈 교수 의견에 동의하든, 비판적이든) 『한국경제사』가 경제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필독서’가 되었으면 한다.
『한국경제사 2』는 ‘접근의 총체성’과 ‘학자적 성실함’이 돋보이는 책이다. 학자적 성실함은 방대한 참고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접근의 총체성은 ‘세부 목차’에 잘 드러난다.



경제학과 경제 성장론에서 중요시하는 것을 대부분 포괄한다. 예컨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핵심은 사유재산과 시장경제다. 이영훈 교수는 사유재산을 다루기 위해 민법의 시행, 개인의 탄생, 가족의 변화를 심층적으로 다룬다.
경제 성장론를 제대로 다루려면, 경제 성장의 요인들을 다뤄야만 한다. 인간, 토지, 자본, 교육, 사회 간접 시설이다. 국가의 역할을 다루기 위해 ‘국가재정’을 구성하는 세입과 세출의 양상을 다룬다. ‘사유재산’의 역사적 변천을 다루기 위해 법학에서 다루는 민법까지 공부하는 경제사학자는 몇 명이나 될까? 학자적 성실함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책은 민법, 개인, 가족, 인간, 토지, 자본, 교육, 사회 간접 시설, 세입, 세출의 양상을 다루되 역사적 변화까지를 다룬다. 평생에 걸친 한국경제사 연구를 1,300쪽짜리 책 2권으로 정리한 셈이다. 『한국경제사 2』를 통해 새롭게 알거나 제대로 안 것들이 참으로 많다.
1.
첫째,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 승리 이후 체결된 을사늑약을 통해 조선을 ‘실질적’으로 지배했다. 그러나 조선의 병합에는 신중한 입장이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대표적인 신중론자였다. 그러나, 만주 지역의 영토분쟁이 발생하고, 청나라-독일-미국의 동맹 조짐이 있자 1909년에 ‘병합’을 결정하게 된다. 1909년 10월, 안중근에 의한 이토 히로부미 사망은 주된 변수가 아니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살았어도 ‘병합’은 시간문제였다.
둘째, 일본은 점진적 동화주의 전략을 펼쳤다. 1868년 메이지유신 성공 이후, 일관되게 일본은 ‘영리한’ 행동을 했다. 초기 정한론에 대한 신중한 접근의 연장 선상이다. 일본은 노련하게, 점진적으로, 반발을 최소화하며, 그리고 길게 보며 조선을 지배하려 했다. 일본은 점진적 동화주의 전략의 연장에서 ‘민법’을 만들 때, 조선의 관습을 중시했다.
셋째, ‘토지조사사업’은 소유권의 획정과 그에 기반한 조세 징수체계 정비가 주된 목적이었고, 실제 결과도 그랬다. 일본은 조선을 점진적으로, 그러나 통째로 지배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가급적 조선인들의 반발을 초래할 일들을 자제하는 편이었다. 왕이 소유하던 왕유지의 처분 과정에서 민간과의 분쟁이 일부 있었는데, 대체로 연고(緣故)가 있는 소작농에게 유리하게 마무리했다. 토지조사사업을 통한 ‘토지 수탈론’은 사실이 아니다. 일본 입장에서는 ‘정치적 지배’가 훨씬 더 중요했다.
넷째, 1912년 3월 처음 공포된 조선민사령에 의한, 민법과 민적(호적)의 시행은 개인의 기본권이라는 차원에서 ‘거대한 진일보’였다. 조선은 신분제적 차별사회였다. 신분에 따라 등록이 달랐고 특히 여성의 ‘이름’은 등록도 되지 못했다. 여성의 경우 성(姓) 또는 씨(氏)만 표기되었다. 민법과 민적 이후 모든 여성은 이름을 갖고, 신분 차별의 상징이었던 ‘직업의 표기’가 사라졌다.
다섯째, 일본은 1894–1895년 청일전쟁, 1904–1905년 러일전쟁,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1917년 러시아혁명이 있을 때마다 ‘영토’를 확장했다. 이 과정에서 대만(타이완), 관동주, 조선병합, 만주 지역을 점령했다. 이후 일본은 식민지와 교역에서 관세를 철폐한다. 엔 블록 단일 시장으로 작동한다. 이는 ‘금융시장’에서 이자율의 수렴 현상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일본계)제일은행 부산지점의 예금 이자율은 1890년대까지 도쿄 지점과 오사카지점보다 2% 이상 높았지만, 1910년 이후 거의 일치하였다. 제일은행 부산지점의 어음 할인율은 1890년대까지 도쿄지점과 6% 이상 격차를 유지하다가 1910년대에 3–5%로, 1920년대 이후 2% 미만으로 ‘좁혀지는’ 추세를 보였다. 조선과 일본의 금융시장은 1920년대 즈음부터 사실상 ‘하나의 단일시장’으로 통합된다(99쪽).
여섯째, 한국에서 상설 점포를 차려놓고 장사를 하는 ‘정주상업’의 역사는 1920년대부터다(111–114쪽) 이른바, 점포의 탄생이다. 그전까지는 행상이 중심이었다. 1940년 국세조사에 의하면, 점포는 24만 6,730개에 달했다.
일곱째, 총독부는 초기에 조선 지역의 ‘회사 설립’에 소극적이었다. 일본 본토에서는 회사 설립이 ‘신고제’였는데, 조선에서는 ‘허가제’였다. 회사 설립의 허가제는 조선에 투자하려던 ‘일본 자본’의 항의와 1919년 3.1 운동 이후 ‘문화통치’로의 전환 과정에서 신고주의로 바뀐다.
여덟째, 조선의 인구는 1925년 1,827만 명, 1940년에 2,430만 명이었다. ‘인구 증가’의 주요 원인은 1880년대 종두법의 보급과 일본의 지배 이후 공중위생 상태의 개선이 영향을 미쳤다. 1918–1940년 동안 ‘농지 확대’는 3.9%에 불과했는데 인구 증가는 33% 수준이었다. 특히 농촌 사회에서 꽤 무거운 인구 압력이 가해졌다.
2.
이영훈 교수의 『한국경제사 2』가 갖는 매력 중 하나는 ‘구체적인 데이터’다. 일부 사람들이 우려하듯 데이터를 편파적으로 취급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책 전체에서 활용되는 데이터는 ‘기존의 학술 연구’에서 발표된 것들에 기반한다.
김낙년 팀은 1910–1940년 조선의 국민총소득 증가분을 추계했다. (1935년 기준 가격으로) 1910년 9억 4,308만 원에서 1940년 27억 4,575만 원으로 증가했다. 연평균 성장률은 3.7%이다. 인구 증가를 감안하면, 1910–1940년 동안 1인당 실질 소득은 연평균 2.37% 증가했다.
경제사에서 전(前)근대와 근대를 구분 짓는 가장 유명한 테제 중 하나는 ‘맬서스의 덫(Malthusian Trap)’이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경제 성장률이 0.1% 미만이었는데 식량 생산 능력이 역부족이었기에 인구가 일정 수준 이상 증가하면 전염병, 기근 등의 발생으로 인구가 ‘다시 줄어드는’ 일이 반복된다. 이를 맬서스의 덫이라고 한다. 1910–1940년 기간 1인당 연평균 2.37% 성장률은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동시에 근대적 성장이 시작됐음을 의미한다.

위 그림은 주요국의 실질 소득 성장(1910–1940)이다. 김낙년 팀이 추계한 자료다. 한반도, 미국, 독일, 멕시코, 일본, 영국, 인도의 실질 소득 성장을 비교한다. 두 가지 특징이 눈에 띈다. 첫째, 일본과 한반도(조선)가 가장 높은 성장률이며, 동시에 ‘유사한 흐름’을 보여준다. 통합된 단일 시장권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다른 나라들은 1929–1930년 대공황의 여파로 인해 소득의 하락을 겪는다. 반면 일본은 1920년대 이미 금융공황을 겪은 적이 있어 1929년 대공황의 충격을 덜 받는다. 조선의 성장률을 이끈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조선의 경제 성장률을 주도한 것은 ① 수출, ② 투자였다.

위 그림은 주요 국가의 수출 동향(1913–1938)을 보여준다. 1913년 시점의 수출을 100으로 설정하고 1938년 수출증가량을 보면, 조선은 1,888이다. 무려 18.8배가 증가했다. 연평균 (수출)성장률로 보면 조선은 13.02%, 타이완(대만)은 8.46%, 일본은 5.95%, 만주는 5.23% 증가했다. 엔 블록 시장의 교역이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도 압도적으로 많음을 알 수 있다.

위 그림은 김낙년 교수팀이 추계한 국내 총생산의 지출 구성(1910–1940)이다. 조선의 경제 성장을 이끈, 첫 번째 요인은 수출이다. 1940년 기준으로, 국내총생산에서 수출+수입의 무역 비중(대의 의존도 비중)은 56.2%[23.1+33.1]에 달한다. 수출 비중을 보면 1912년 5.5%에서 1940년 23.1%로 확대됐다. 조선의 경제 성장을 이끈, 두 번째 요인은 투자이다. 위 그림에서는 ‘고정 자본 형성’이 해당한다. 1912년 4.8%에서 1940년 15.3%로 증가한다.
흥미로운 점은 투자 증대를 누가 주도했는지다. 결론부터 말하면 일본 자본이다. 다만 유의할 점은 일본 자본이 ‘주도’한 것은 맞지만, 조선 자본 역시 꾸준히 증대했다. 소위 ‘수탈론’이 팩트가 아니라고 반박되는 이유다.

위 그림은 민족별-기업 규모별 공장 수의 추이(1910–1938) 자료다. A는 5–50인, B는 50–100인, C는 100–200인, D는 200인 이상이다. 1938년을 기준으로, ‘공장의 합계’는 조선인은 3,963개이고, 일본인은 2,627개이다. 공장의 단순 합계만 보면 조선인이 더 많다.
다만 ‘기업 규모’로 들어가면 상황이 달라진다. 기업 규모별로 조선인+일본인의 합계를 구하고, 기업 규모별 조선인의 비율을 구해보면, A(5–50인) 규모는 63% → B(50–100인) 규모 36% → C(100–200인) 규모 22% → D(200인 이상) 규모 12.5%이다. 기업 규모가 큰 공장일수록 조선인 소유의 비율은 줄어든다(184–186쪽). 다시 말해 규모가 큰 공장일수록 일본인 소유가 많았다.

위 그림은 ‘민족별-업종별 회사 수 및 자본금 추이’(1925–1939) 자료다. 이 자료는 납입 자본금이 일정 규모 이상인 회사만을 대상으로 한다. 그러다 보니 전체회사의 1/3–1/4만을 포괄한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1939년을 기준으로, 회사 숫자를 보면, 전체 대비 조선인 회사의 비중은 30.2%이다(485/485+1,119).
자본금 규모의 경우, 전체 대비 조선인 회사의 자본금 비중은 9.4%이다(9,862/9,862+94,952). 역시 자본금 비중이 큰 경우, 일본인 회사인 경우가 많았다. 조선의 공업화와 경제 성장은 일본 자본이 주도하되, 조선 자본 역시 성장함을 알 수 있다. 식민지적 억압 때문에 조선 자본은 성장하지 못했다는 소위 ‘수탈론’은 팩트가 아니다.
1934년 자료 기준으로 공장이 많은 업종을 순서대로 살펴보면 ① 식료품업(5,126개), ② 화학공업(902개), ③ 방직업(336개)이다. 식료품업의 경우 정미소와 양조장이 대표적이고, 화학공업의 경우 고무신 제조업이 대표적이었고, 방직업의 경우 메리야스 공업이 대표적이었다.

위 그림은 광공업 부문 노동자 수의 추이(1918–1940) 자료다. 1940년 기준, 합계(29만 5,000명)+광부(24만 9,000명)+토건 노동자(29만 1,000명)의 총합계는 83만 5,000명이다.

산업 구조의 변화(1910–1940)을 보여준다. 1차 산업 비중은 70.6%에서 43.1%로 줄고, 광공업 등 2차 산업 비중은 7.5%에서 29.0%로 늘어나고, 3차 산업 비중은 21.7%에서 27.8%로 늘어났다. 흔히 말하는 산업구조 고도화가 진행됐음을 알 수 있다.

소비 지출의 비목별 구성 추이(1911–1939)이다. 관전 포인트는 엥겔 지수다. 엥겔 지수는 소득이 올라갈수록 식료품비가 줄어드는 것을 말하는데, 어느 나라, 어떤 시대에도 적용되는 것으로 평가되는 지표이다. 전체 소비 중 식료품비의 비중은 1911년 75% 내외에서 1939년 62% 내외까지 떨어진다. 이는 일제 시대 조선인들의 생활 수준이 개선되었음을 입증한다.
이외에도 일제 시대 조선인들의 생활 수준이 개선된 것을 입증할 수 있는 데이터로 행려(行旅) 사망자의 신장 사이즈를 제시한다. 당시 총독부는 행려사망자가 발생할 경우, 이들의 연고자를 찾기 위해 관보(官報)에 사망자의 나이와 신장(키) 등을 공개했다.
‘키’는 생활 수준의 향상을 보여주는 대표적 지표 중 하나이다. 이영훈 교수는 ‘김두얼-박희진’의 조사 자료를 인용하는데, 1881–1890년 출생자 1027명을 조사했는데 평균 키는 158.4cm였다. 반면, 1911–1920년 출생자 1,125명을 조사했는데 평균 키는 160.2cm였다. 신장 향상은 이 시기 생활 수준이 개선됐음을 보여준다.
이밖에도 조선인들의 생활 수준 향상을 입증하는 자료로 칼로리 섭취량, 도시 비숙련 노동자의 실질임금 추이 등을 제시한다. ‘수탈론’이 매우 과장됐음을 알 수 있다.
3.
소위 식민지 근대화론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이에 ‘생산적 토론’이 진행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실제의 역사(=팩트)를 확인하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한국경제사 2』에서 ‘일제 시대’를 시작하는 8장의 제목이 흥미롭다. 근대(近代)의 이식이다.
세계사 전체를 조망해볼 때, 전근대에서 근대로 이행되는 과정은 두 가지 경로가 있었다. 첫째, 자주적 근대화의 경로. 영국 혁명과 미국 혁명, 프랑스 혁명이 대표적이다. 대부분 ‘왕의 타도’와 연결되는 경우다. 시민혁명의 의미 자체가 ‘왕의 타도’를 의미한다. 둘째, 제국주의적 근대화의 경로. 이 경우 왕권의 타도 주체가 제국주의 외세이다. 중국, 한국을 포함한 거의 모든 나라가 여기에 해당한다.
‘식민지 근대화’라는 용어는 원래 이영훈 교수와 낙성대경제연구소 사람들이 사용한 용어가 아니다. 이들의 견해에 비판적인 사람들이 ‘낙인 찍기용’으로 만들었다. 부적절한 용어 사용이라고 생각한다. 식민지 근대화라는 용어는 마치 ‘식민지 덕분에’ 근대화가 됐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제국주의/식민지가 좋은 것인 양 생각하게 만든다.
이런 오해에 김낙년 교수는 제국주의/식민지 여부가 핵심이 아니라, 그들이 주도했던 제도가 핵심이라고 지적한다. 일본 ‘제국주의’와 그들의 주도했던 ‘제도’는 얼핏 구분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광복 이후 실제로 남한과 북한은 선택이 달라진다.
북한은 ‘일본 제국주의의 유산’이라는 명분으로 사유재산, 민법, 회사법을 폐기한다. 국유화와 집단농장화를 단행한다. 반면, 남한에서는 민법안을 기초했던 김병로 선생이 일본의 민법전과 민법학 자체는 일본만의 것이 아니라, 프랑스법과 독일법 등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민법의 ‘근대적 보편성’을 인정한 것이다. 일제 민법을 ‘해방’ 이후에도 사용한 이유이다.
‘제국주의/식민지’ 여부가 핵심이 아니라, 제도가 핵심이다. 이는 모택동 시기의 중국과 등소평의 개혁개방 이후의 중국을 비교해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중국은 1978년 개혁개방 이후, 농민들의 사유재산을 보호하는 ‘인센티브’의 개혁만으로 농업생산량이 급증하는 경험을 한다.
4.
조선은 왜 망했는가? 일본 제국주의 시대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근대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4개의 사회경제체제를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 조선 시대
- 일본 제국주의 시대
- 8·15 광복 이후, 박정희-전두환 시대
- 1987년 민주화 이후 대한민국
①–④번 체제는 모두 다른 정치·경제 체제이다. ①번보다 ②번이 진일보한 사회였고, ②번보다 ③번이 진일보한 사회였고, ③번보다 ④번이 진일보한 사회였다. 왜 그런가?

조선 시대는 일제 시대만도’ 못한 체제였다. 신분제는 공식적으로 작동했고, 심지어 여성은 (공적 공간에서) 이름도 없는 존재였다. 잉여 생산물이 있을 경우, 관료들의 수탈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래서 당시 조선 민중들은 게으름으로 저항할 정도였다. 조선은 신분제적 차별에 입각한, 총체적인 민중 수탈 체제였다. 반면 일본 제국주의는 ‘법에 의한 지배’를 했다.
이영훈 교수의 『한국경제사 2』에서 논쟁 되어야 할 지점은 개인의 탄생에 관한 부분이다. 이영훈 교수의 『한국경제사 2』는 ‘민법’을 매우 비중 있게 다룬다. 개인의 탄생, 사적 권리, 사유재산권의 법리적 표현이 민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개인의 탄생은 국민주권과 무관한 것인지, 혹은 국민 주권 없는 개인의 탄생은 가능하냐는 질문이다.
즉 우리는 다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서유럽의 역사에서 근대(近代)가 만들어지는 논리적 과정은 다음과 같다. (실제 현실에서는 ‘절대왕권’에 맞서기 위해, 자연법적 가상 상태를 설정하며)
- 최초의 자연 상태
- 최초의 개인
- 최초의 시민 사회
- 최초의 의회
- 최초의 국가
- 개인의 동의에 의해 만들어진 국가
- 개인의 권리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국가
국가의 본질은 ‘폭력’이다. 이는 전근대적 국가든, 근대적 국가든 동일하다. 자본주의적 국가든, 사회주의적 국가든 동일하다. 이영훈 교수가 강조하듯 근대의 본질이 개인의 탄생이라면, 바로 그 개인은 인민주권과 무관한 것인지 물어야 한다. ‘민법’의 실효적 작동은 인민주권과 무관한 것인지 물어야 한다.
이영훈 교수가 성실하게 입증하듯 일제 조선인의 실질 소득은 올라갔고, 조선의 공업화도 이뤄졌다. 그러나 이 모든 건 일본 정부의 필요에 의해 결정됐다. 조선의 공업화가 본격화되는 시점은 일본이 1931년 만주를 침략하고, 1937년 중국을 침략한 이후이다. 조선이 병참기지로서의 전략적 가치가 생겼기 때문이다.
근대적 의미에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한다는 것은, 개인의 신체와 재산권을 존중하는 것이다. 이영훈 교수가 책 전체에서 강조하는 계약자유의 원칙과 사적자치의 원칙이 중요한 이유 역시 그래야만 개인의 신체와 재산권이 존중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있었던 전쟁, 징용(사람의 동원), 공출(통제 경제), 물자동원은 모두 개인의 신체와 재산권을 침해하는 것들이다. ‘국가의 의사결정’에 관여할 수 없었던 조선인들은 자신의 신체와 재산권이 침해당하는 것에 속수무책이었다. 근대의 핵심인 개인의 자유가 인민주권과 무관할 수 없는 이유, 경제적 자유가 정치적 자유와 무관할 수 없는 이유이다.

5.
이영훈 교수를 비롯한 낙성대 경제연구소 팀의 연구와 문제의식이 담은 진짜 핵심은 민족주의 담론에 은폐된 개인의 중요성을 재발견한 것이다. 민족주의 담론에 의하면 ‘조선 시대’가 ‘일제 시대’보다 좋은 체제이다. 고종을 찬양하는 드라마가 나오고, 그런 영화가 아직도 만들어지는 이유다.
이영훈 교수와 낙성대경제연구소는 이런 인식에 단호하다. 조선 시대는 일제 시대만도 못한 체제였다는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는 ‘서유럽의 근대를 수용한’ 세력이었다. 이영훈 교수는 애초에 자본주의 맹아론을 입증하기 위한 문제의식에서 한국경제사를 연구하게 됐다.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평생에 걸쳐 ①번 조선 시대와 ②번 일제 중에서 무엇이 더 나은지 연구한 셈이다.
그러나 2019년을 살아가는 대한민국 사람들은 ④번 1987년 민주화 이후의 대한민국을 살아간다. ②번 일본 제국주의 시대는 ‘인민주권’이 전혀 없던 세상이고, ③번 박정희-전두환은 대통령 직선제는 하지 못했지만 헌법상 민주공화국과 국민주권의 원리가 관철되고 불완전하지만 국회의원을 국민의 손으로 뽑을 수 있었으며, ④번 1987년 이후의 대한민국은 대통령중심제 국가에서 ‘대통령’을 국민들의 손으로 뽑는 시대다.
개인의 탄생이라는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하더라도 ① 왕 개인의 나라 → ② 일본 제국(천황+사무라이 출신 일본 관료)의 나라 → ③ 독재와 국민주권의 혼합(=박정희, 전두환 시대) → ④ 인민주권이 실현되는 나라(=1987년 민주화 이후의 대한민국) 순서다.
이영훈 교수가 평생에 걸쳐 학문적으로 훌륭한 연구를 많이 했음에도 커뮤니케이션 오류가 발생하는 근본 이유는 ④번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②번 체제가 ①번 체제보다 왜 더 나은 체제였는지 설명하는 것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④번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②번 시대와 ①번 시대는 모두 ‘아득히 먼 옛날이야기’일 뿐이다.
④번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③번을 이야기하든, ②번을 이야기하든, ①번을 이야기하든, ④번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심사와 연결해 이야기해야만 한다. 그것은 바로 ‘개인의 자유’와 ‘개인의 기본권’이라는 관점에서 ②번 일본 제국주의 체제가 얼마나 불철저하고, 얼마나 기만적이었는지 정확하게 짚어주는 것이다.
조선이 전근대 사회였다면, 일제 시대는 기껏해야 ‘반(半)근대’ 사회에 불과했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핵심으로 하는, 근대는 아직 ‘진행 중’인 것으로 봐야 한다.
원문: 최병천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