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미국에 처음 온 것이 2007년 가을이니 이제 9년이 다 돼간다. 박사과정 대학원생으로서 미국 동부의 조용한 칼리지 타운인 앰허스트(Amherst)의 낯선 환경에 적응하려고 애쓰던 20대 중반의 청년은, 시애틀에서 빙(Microsoft Bing) 검색엔진의 성능 평가 및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30대 중반의 직장인이 되었다. 그동안 많은 시행착오와 어려움이 따랐지만, 돌이켜보면 미국에서 보낸 9년이라는 시간은 필자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믿고 싶다).
필자의 예전 글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동안 기회가 있을 때마다 미국 유학에 대한 막연한 환상에 대한 경고의 글을 쓰곤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최근 들어 미국의 한인 유학생의 수는 정점을 찍고 하향세에 있다는 소식이다. 그런데 요즘은 IT 분야를 중심으로 해외 직접 취업 등의 방법으로 미국에 오는 방법에 대한 문의나 관련 정보를 자주 접하게 된다. 해외 유학과 해외 취업은 매우 다른 선택이지만, 모든 분들에게 적합한 선택이 아니며, 그 보람만큼이나 다양한 난관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필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국에서 IT 분야에 종사하는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보람과 어려움,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필자 나름의 방법을 적어볼까 한다. 오늘은 미국 직장 생활에 대한 널리 퍼진 믿음과 그 이면의 진실, 그리고 ‘미국 생활에 적합한 사람’의 조건을 고민해보고자 한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적지않은 양의 관련 자료를 참고했지만, 결국 필자의 제한된 경험에 근거한 주관적인 내용이라는 점을 밝힌다.
IT 종사자의 천국
흔히 미국은 IT 종사자의 천국으로 묘사된다. 미국은 IT의 발상지이기도 하고 현재도 첨단 기술의 트렌드가 시작되는 곳이며, IT 종사자에 대한 대우도 좋은 편이니 틀린 말은 아니다. (관련 기사) 하지만 이런 좋은 근무환경 탓에 미국 IT 기업에는 전 세계의 인재가 몰리고 있으며, 이들은 미국 특유의 성과 중심의 문화 속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미국 IT 기업의 고용 계약은 보통 회사가 직원을 자유롭게 해고할 수 있게 되어있기 때문에, 무능한 직원은 오래 살아남기 어려운 구조다.
실리콘밸리 기업 문화의 상징처럼 된 넷플릭스를 생각해보자. 널리 공유된 기업 문화 슬라이드에 나오는 넷플릭스는 자사의 직원들이 소풍 나온 아이들이 아닌 프로 스포츠 팀의 일원처럼 행동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그리고 넷플릭스는 성과에 따른 보상이 확실한 프로 스포츠 팀처럼 최고의 직원에게 최고의 보상을, 그 밖의 직원들은 가차 없이 해고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슬라이드를 만든 HR담당 임원도 결국 해고당한 것을 보면 이 말은 농담이 아니다.)
그렇다면 넷플릭스는 왜 이렇게 냉혹한 기업 문화를 만들었는가? 여느 대기업처럼 자세한 프로세스를 만들어 누가 와도 잘 굴러가는 조직을 만들면 되지 않을까? 넷플릭스의 설명에 따르면 이런 문화는 혁신을 멈추지 않는 조직을 만들기 위함이라고 한다. 규칙에 기반하여 돌아가는 조직은 같은 일을 반복할 뿐이지만 창의적인 직원이 최대한 자율성을 발휘하는 조직은 새로운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넷플릭스가 DVD 배달에서 스트리밍 서비스로, 그리고 콘텐츠 제작 서비스로 끊임없이 진화해온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물론 넷플릭스의 사례를 미국 전체 IT 기업으로 일반화할 수는 없다. MS, 구글, 애플, 아마존 등 대표적인 IT 기업들은 모두 고유한 문화를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미국의 직장생활이 그 보상만큼이나 확실한 성과를 요구하는 것은 분명하다. 이처럼 꾸준한 성과를 내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일에 열정을 가지고 꾸준히 노력하여 전문성을 키우는 것이다. 특히 기술 진보에 따른 변화가 심한 IT 업계에서는 이런 노력이 결코 선택이 아니다. (양파님의 관련 글 참고 / 하나 더)
개인이 존중받는 사회
한국의 직장 생활에서는 아직도 개인의 자유 의지보다는 집단의 단결이 우선시 되고 조직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이에 비해 개인주의가 바탕에 깔려 개인의 의지가 존중받고 공과 사가 철저히 분리되는 미국의 직장문화는 신선하기까지 하다. 업무 계획은 일방적인 지시보다는 직원의 제안과 협의를 거쳐 이루어지니 무리한 일정을 강요당할 일은 거의 없다. 회식은 보통 점심이나 오후 시간에 이루어지며, 정말 급한 경우가 아닌 이상 휴가 중이나 주말에 회사 이메일을 체크하지 않는다고 뭐라고 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런 자유는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버거울 수 있다. 필자가 처음에 대학원에 들어갔을 때 교수님께서 앞으로 내가 원하는 연구 주제와 방향을 생각해와서 토론하자고 하셔서 당황했던 기억이 나는데, 회사에서도 본인이 스스로 아이디어를 내서 일하는 것을 기대하고 인정해주는 분위기다. 이는 일에 대한 열정이 있고 자기주도적인 사람에게는 축복이지만, 주어진 일을 하는데만 익숙한 사람에게는 부담스러운 환경이다. 게다가 일일이 잘잘못을 지적해주는 상사도 많지 않기 때문에 부족한 점은 스스로 고쳐야 한다. (미국에서는 이런 관리자를 micro-manager라고 경원시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공과 사의 구분이 뚜렷해 회사 내의 인간관계가 직장 밖으로 잘 연결되지 않는 부분도, 가족이 없고 현지 생활이 처음인 사람에게는 외로울 수 있는 환경이다. 필자가 사는 시애틀만 해도 취업 첫해에 제대로 된 커뮤니티를 찾지 못해 외로움에 시달리다가 우울증에 걸릴 뻔 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한국은 재미있는 지옥, 미국은 재미없는 천국이라는 이야기는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가만히 있어도 밀려드는 모임/약속에 시달리는 한국에 익숙해진 사람이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고 가족 중심으로 움직이는 미국 생활에 적응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다양성의 사회
미국 사회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는 ‘다양성’이다. 미국은 이민자들이 세운 나라이며 현재까지도 전 세계에서 이민자들이 몰리는 나라이기 때문에, 다양한 배경과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각자의 장점을 인정받고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을 중요시한다. IT 업계에는 특히 기술을 인정받아 정착한 동유럽이나 인도, 중국계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미국 회사에서는 이처럼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팀을 이루어 일하는 것이 보통이다. MS의 경우 사내 교육 프로그램 가운데 ‘다양성’이라는 주제가 큰 비중을 차지할 정도다.
하지만 지구 반대편에 있는 전혀 다른 문화와 사회에 적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단일 민족으로 ‘서로 눈빛만 봐도 통하는’ 상황에 익숙해진 한국인들에게 이런 다양성은 여러 가지 도전을 안겨 준다. 우선 세계 각국의 다양한 엑센트가 섞인 영어를 알아듣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고, 예절이나 관습이 전혀 다른 상대와 효과적으로 소통하며 협업해 나가는 일도 만만치 않다. 미국인 직원에게 야근을 강요했다가 인사부서의 시정 명령을 들은 한국인 매니저의 이야기나, 이슬람교 동료에게 술을 권하다가 이상한 눈초리를 받았다는 사례를 들은 기억이 난다.
또한 비슷한 사람끼리 어울리는 인간관계의 특성상 미국에 사는 한국인들은 미국 사회에 제대로 융화되기보다는, 거주 지역 및 종교를 기반으로 하는 자신들만의 클릭(clique)을 이루고 사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민자들이 출신에 따른 다양한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것이 미국에서는 드문 풍경이 아니다. 하지만 한인 커뮤니티 내에서만 생활하다 보면 결과적으로 미국 사회에 오래 산 경우에도 자신이 주류 사회의 일원이라기보다는 여전히 이민자요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이 둘 사이의 적절한 균형이 필요한데, 이 또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부분이다.
미국 생활에 적합한 사람?
지금까지 미국 직장 생활의 다양한 측면을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필자는 미국 생활에 적합한 사람이었을까? 한국에서의 필자는 흔히 말하는 범생이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조용하거나 순종적인 편은 아니었다. 읽고 쓰고 배우는 것을 좋아했지만, 다른 사람의 말을 따르기보다는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기를 원했다. 외국 생활을 경험한 것은 아니었지만, 대학생 때 국제 캠프 등에서 자원봉사를 하면서 외국 친구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리곤 했다. 미국행을 고민할 무렵, 안정된 직장보다는 평생을 바칠만한 ‘내 일’을 찾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필자의 이런 특성은 미국 생활에 잘 들어맞았던 것 같다.
하지만 지난 9년간의 미국 생활은 이런 필자에게도 다양한 종류의 시련을 안겨주었다. 유학 초기에 동부의 시골 마을에서 자취생으로 혼자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했고, 가족과 친구들이 그리워 밤마다 전화통을 붙들고 있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친구들이 ‘자신감’이라는 별명을 붙여줄 정도로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던 필자였지만, 유학 초기에는 미국 학생들의 적극성에 주눅이 들기도 했다. 회사에 와서도 필자가 맡은 프로젝트에 필요한 자원을 얻기 위해 얼굴을 붉히며 논쟁하기도 했고, 필자가 맡은 프로젝트의 방향성을 두고 매니저와의 의견 충돌 끝에 결국 팀을 옮기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서두에서 밝혔듯 필자는 미국 생활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한국에 두고 온 가족 및 친구들과의 시간은 줄어들었지만 미국에서 소중한 인연을 많이 만들 수 있었으며, 한국에서의 익숙한 직장 생활을 포기하는 대신 미국 검색 트래픽의 30%를 책임지는 검색 서비스의 데이터를 원 없이 만지고 분석하는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뭘 하든 남을 의식하면서 살아아 했던 한국에서의 모습에 비해, 그동안 미국에서 쌓은 폭넓은 경험을 통해 필자는 나와 다른 사람의 차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스스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성숙함을 키울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이 글을 시작할 때 ‘미국 생활에 적합한 사람’의 조건으로 마무리를 하겠다고 했는데, 필자가 생각하는 조건은 다음과 같다. 요약하면 전문성, 자기주도성,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미국 생활에 적합한 것 같다.
1) 자기 분야에서의 전문성을 확보하고 이를 발전시킬 각오가 되어있는 열정적인 사람
2) 일과 삶에서 자기 주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관계를 만들어가는 적극적인 사람
3)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어울려 일하고 교류하는 것을 즐기는 열린 사람
물론 이 외에도 다양한 조건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글 서두에 밝힌 대로 유학이든 해외 취업이든 정답이 있는 결정은 아니지만, 관련 글을 몇 개 소개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이번 글에서는 미국 생활을 고민하는 분들에게 초점을 맞추었다면, 다음에는 미국에 직장을 잡아 오신 분들을 위한 내용에 초점을 맞출 예정이다. (의견 / 질문 / 좋아요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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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김진영 님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