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쓰네오의 회상과 독백을 통해 전개되는 쓰네오 자신의 성장 서사다. 아니, 그것을 의도한 영화라 하자. 내가 본 것은 성장이 없는 성장 서사의 기만이다.
성장 없는 성장 서사의 기만
장애를 가진 상대와의 연애가 반드시 일방을 강자나 약자로 만들 이유는 없다. 연애뿐 아니라 모든 관계에서 서로가 서로를 소비하고 대상화하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다. 각자가 가진 상이한 결여와 욕망들이 충돌하고 마찰하는 지점에서 서로가 소비되고, 우리는 그것을 경험이라 부른다. 마찰과 충돌은 불편하고, 그를 감내하고 넘어서는 과정에서 사람은 성장한다. 조제의 장애 역시 여러 결여 중 하나이고, 조제는 여느 장애인들 혹은 비장애인들만큼 타인에게 ‘불편’함으로써 존재할 수 있다. 사람이 사람을 경험한다는 것은 주체간의 충돌, 불편의 교환이니 말이다.
그러나 조제는, 또 조제의 장애는 쓰네오에게 너무나 ‘편리한’ 경험이다. 누구에게서도 의무(의미)를 부여받지 못한 쓰네오가 방황할 때, 조제는 쓰네오를 필요로 하는 장애인이다. 그러나 그녀의 무게가 힘겨워진 쓰네오가 도망칠 때, 조제는 강인하고 독립적인 개인이다. 조제가 보이는 의존성과 강인함은 실상 장애(결여)의 두 얼굴이다. 이 상반된 필요 혹은 욕망들이 마치 잘 설계된 것처럼 쓰네오의 욕망을 거스르지 않고 따라간 것은, 쓰네오의 잘못은 아니리라. 더 냉정히 말하자면, 쓰네오는 무언가 ‘잘못’을 저지를 만큼 경험하지도 않았다.
조제의 장애가 가진 요철(凹凸)이 쓰네오에게 소비되는 방식은 조제라는 인물이 가진 입체성을 재단하여 그녀를 쓰네오의 인큐베이터로 만들어 버린다(그런 인큐베이터라면 그 안에 들어가는 이가 굳이 쓰네오일 이유 역시 없다). 잠시 엿보이던, 조제를 원하는 쓰네오를 거부하는 강한 조제와, 조제에게서 도망치려는 쓰네오에 매달리는 의존적 조제는 이내 다른 이도 아닌 바로 조제 스스로에 의해 수정되어 버린다. 심지어 영화는 그 지점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관객에게 부각시킨다.
조제의 장애가 소비되는 방식
줄곧 쓰네오에 의해 서사되던 영화의 시선이, 예외적으로 조제의 시점으로 옮겨간 장면이 둘 있다. 첫 번째는 조제가 쓰네오에게 “곁에 있어 달라”고 매달리는 장면이다. 두 번째는 이별여행을 떠난 조제가 잠든 쓰네오에게 “네가 사라지고 나면, 나는 길 잃은 조개껍데기처럼 바다 밑을 굴러다닐 거야. 그렇지만 그것도 그런대로 나쁘지 않아.”라며 속삭이는 장면이다.
연애의 시작부터 끝까지, 조제는 ‘떠나달라’는 거절도, ‘내가 떠나면’이라는 가정도 하지 않는(못하는) 존재다. 그것은 그렇게 당연한 걸까? 위 두 장면은 앞서 언급한 조제의 ‘편리함’을 극대화시킨다. 공교롭게도 전자는 쓰네오가 그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어 삶의 의미를 부여받고 싶어하던 순간이며, 후자는 쓰네오가 그녀와의 사랑에 지쳐가던 순간이다.
이때마다 조제는 자발적으로, 그리고 주체적으로 편리하다. 조제의 입을 빌려 조성된 조제의 편리함은, 다른 그 누구에 의해서도 비판받을 수 없다. 조제의 주체성은 그 자체로도 쓰네오의 편의를 위해 소비되며, 잘 ‘편집된’ 조제를 쓰네오의 시선 속에 전시하고, 쓰네오와 그 전시 모두를 비판으로부터 보호한다.
이후 조제를 홀로 두고 도망치면서도 정작 자신의 외로움이 두려웠던 쓰네오는, 조제의 집에서 빠져나오며 곧바로 과거의 애인 가나에를 찾는다. 그러나 가나에를 만나자마자 쓰네오는 조제를 떠올리며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으로 꼽는 장면이며, 이 장면에서 (영화가 의도한 것으로 보이는) 쓰네오의 성장 드라마는 절정에 오른다. 나는 그 울음을 보며, 그만 날카로운 역겨움을 느꼈다. 그 울음은 성장이 아닌, 편리함의 완성이었다.
성장의 본질은 불편함
경험, 그리고 그를 통한 성장의 본질은 불편함이다. 그러나 쓰네오는 편리한 사랑과 편리한 이별 끝에, 갑자기 스스로의 비겁을 싫어하는 성장통마저 ‘가지려’ 든다. 편리함과 성장의 부조화를 외면하는 이 과욕은, 기실 편리함의 민낯이다. 관계와 경험의 편리함 자체보다, 그 편리함을 불편과 성장으로까지 꾸며내는 것이 더욱 역하다.
박완서의 『도둑맞은 가난』에서, 가난한 주인공은 가난이라는 결여를 편리하게 ‘체험’하여 ‘인생 경험(성장)’을 취하려는 재벌집 아들을 경멸한다. 다만 그의 편리한 성장은 그의 아버지가 가난한 이들에게 사온 것이라면 쓰네오의 편리한 성장은 조제(그리고 그녀의 불편한 다리)가 제 손으로 내어 준 것이다. 그래서 더 정당하다. 그런가?
이별 후에도 담담한 모습으로 생선을 굽고, 전동휠체어를 타고 거리를 거니는 조제의 모습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어느 날 의자 위에서 생선을 굽고 방바닥으로 굴러 떨어진 조제가 홀로 일어서기를 포기하고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엎드려 우는 모습을 영화는 절대 그리지 않는다.
그것은 청초하게 눈물 흘리는 모습이 아니다. 성대가 갈라져 피가 맺히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조제는 짐승 같이 울부짖을 거다. 그리고 기진맥진해 죽은 듯 누워 있으면 좁은 방을 잠식해 오는 잔인한 적막, 우울한 어둠, 차가운 자괴감. 그것은 영화가 전시한 적 없는, 조제의 불편한 사랑, 불편한 이별이다.
영화가 반드시 인물과 사건의 모든 면을 전시할 필요는 없다. 영화가 결말부에서 보여준 조제의 담담한 일상 역시 사실(의 일부)이었을 것이고, 조제가 다시 행복해지리라는 예상도 어렵지 않다. 영화가 주인공의 시점에서 서사되는 것 역시 이례적인 일이 아니다.
그러나 영화는 쓰네오의 회상-독백이라는 전체 서사의 틀을 굳이 무너뜨리면서까지 (원래 쓰네오의 시선이 닿을 수 없는) 조제의 삶을 관음하고, 그 중 쓰네오에게 편리한 일부만을 취하여 다시 전시한다. 영화의 시선이 쓰네오의 시점에서 이탈했음에도 오히려 그 시점의 초월적 확장에 가까워 보인다. 이는 조제를 한 인간으로서 이해하는 데 있어 오히려 쓰네오의 시점을 일관적으로 유지하는 것만 못하다.
쓰네오라는 인물이 나약하거나 비겁한 것은 문제가 아니다. 나약함과 비겁함은 실존으로서 인간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다. 문제는 쓰네오로 대표되는 영화의 시선이 쓰네오의 나약함과 비겁함을 지극히 인간적인 사랑과 성장으로 그려내면서, 그와 동질적인, 혹은 그보다 더 인간적인 조제의 나약함을 은폐한다는 것이다. 쓰네오의 시선의 한계를 이용하다가, 또 그 한계의 초월과 예외까지도 교묘히 이용하면서 말이다.
쓰네오의 경험을 편리하고 또 완전하게 만드려던 영화의 모든 요소들(‘편집된’ 조제, 서사의 시선 변화 등)은, 내내 불편한 위화감을 뿜어냈고 역설적으로 쓰네오의 성장을 불완전하게 만들었다.
영화를 보며 수도 없이 쓰네오의 시선에 편승해 버리고 싶었고, 그러려 노력했다. 나는 처참히 실패했다. 쓰네오에게 온전히 이입한 관객에게 이 영화는 감동적인, 그리고 자랑스러운 성장 영화였을 것이다. 하지만 (파편적인 조제의 단면들이 아닌) 연속적인 주체로서의 조제에게 이입할 때, 집요하게 따라붙는 영화(쓰네오+제3)의 시선은 놀랍도록 잔인하고 미성숙했다.
좋은 서사는 관객이 이입의 대상을, 나아가 서사의 주체를 바꾸었을 때에도 자연스러운 서사의 상상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쓰네오에게 시선 주체, 혹은 서사 주체가 가져야 할 힘 이상을 실어준다.
쓰기 힘든 글이었고, 이 글을 쓰면서 영화를 볼 때보다 많이 울었다. 영화의 인물, 서사, 묘사에 감동하여 운 것이 아니다. 영화의 시선(도망친 쓰네오의 완성된 자기 만족과 성장 서사를 위한, 관음과 강요를 한데 섞은 시선)이 너무나 두렵고 아파서 울었다. 혹여 나의 사랑이, 그것도 사랑하던 상대의 시선에 의해 조제의 사랑처럼 전시될까 하는 우울감에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영화다.
원문: 한지은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