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쯤 문화창조벤처단지에서 ‘스타트업 기술자문 회의’가 있다며 급하게 자리를 좀 채워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기술자문 회의란 것이 갑작스럽게 만들어진 모양인데 신청하는 대표들이 적어서 모양새가 안 나오는 것이라고 짐작했다.

평소에 벤처단지 상주하시는 공무원분들과 각별하게 잘 지냈기에 바쁜 와중이었지만 일손을 놓고 회의실로 갔다. 어차피 같은 건물, 층수만 다른 회의실. 일하던 도중이라 티셔츠에 허름한 치마 차림이었는데 도착해보니 다른 대표님들과는 좀 격이 떨어져 보이긴 했다.
이런 자리가 다소 급하게 만들어진 건 벤처단지의 단장이 바뀌면서, 단장이 주도한 자리다 보니 그렇게 된 모양이었다. 그곳에는 새 단장과 카이스트 교수님 한 분이 앉아 있었다. 대표들에게 한 분씩 회사 소개와 비즈니스 모델을 소개해 달라고 했다.
미리 신청해서 발표 준비가 된 대표님들도 있었지만 나처럼 급하게 자리를 채우러 오느라 그냥 온 대표님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조금 편한 느낌으로 이야기하듯 회사 소개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한 분씩 돌아가며 회사 소개를 했고 담소 나누듯 꽤 길게 하시는 분, 짧게 하는 분 등 다양했다.

내 차례가 되어 회사 소개를 하는데, 분위기가 좀 딱딱한 것 같아
“제가 말주변이 없어서 좀 중언부언합니다.”
하고 농담을 했다. 그 말에 같이 참석한 대표님들과 공무원 담당자들이 다 웃는데, 단장이
“그렇네, 말을 되게 중언부언하네.”
라고 다짜고짜 반말을 했다. 나 혼자 말을 길게 한 것도 아니고, 그다지 중언부언한 것도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반말에 당황해서 웃으며 “하하, 그렇죠?” 하고 넘어가려는데,
“돈은 벌고 싶어?”
라고 공격적으로 물었다. 지금부터는 주고받은 대화를 기억나는 한 그대로 옮긴 것이다.
“네, 벌고 싶죠.”
“아니, 내가 보기엔 돈 안 벌고 싶은 것처럼 보여서 그래.”
“저희 BM이 나이브하단 뜻이신가요.”
“대표가 글도 직접 쓰지?”
“… 네, 씁니다.”
“거 봐, 그럴 줄 알았어. 방에 요-렇게 틀어박혀서 망상하고 글 쓰고 꿈꾸고 막 그런 타입이지?”
“… 네, 뭐 오타쿠죠. 그래서 서브컬처 사업하는 거고요.”
“거 봐. 근데 사업가는 안 맞는 것 같은데. 혹시 사회적 기업 할 생각 없어?”
“네?”
“본인처럼 틀어박혀서 망상하는 그런 오타쿠들 모아서 그런 글 쓰고 그런 거나 하지? 돈 벌 생각하지 말고?”
다른 모든 대표에겐 존댓말을 했고 시비도 걸지 않았지만 나 하나만 붙잡고 계속 이런 식이었다. 참고로 그 자리에 있는 대표 중 나 혼자 여자였다. 좀 어려 보이는 것도 한몫했을지도.
그러더니 이 단장은 나를 볼 때마다 조롱 조로 ‘어이, 꿈꾸는 소녀!’라고 불렀다. 내가 왜 이런 모욕을 당해야 했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가장 약해 보이는 대상 하나를 찍어서 조롱하고 놀리며 분위기를 띄우는 마초적인 방식에 말린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단장은 곧 청문회의 스타가 되었고, 여성신문 등에 나와서 여성을 대변하는 당당한 여성 전문가 이미지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렇다. 이 단장이 여명숙이다.

원문: 전혜정의 페이스북